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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확신하네.”
“확신 안 하면? 도망가지 않고 같이 있어 봤자 어린애가 될 수 있는 건 누군가의 짐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적통이니 남아서 같이 죽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넌 그때 어렸고, 네가 아무리 대단하대도 그래 봤자 꼬맹이였다.
심술을 슬쩍 발랐음에도 별 타격도 입지 않은 것 같은 공주는 또다시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지만.”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건가. 사람 미안해지게!
“그런데 총독 화났어요?”
“안 났습니다.”
“씩씩거리길래.”
“안 씩씩거렸습니다.”
“왜, 감은 잡히는데 정확히는 모르는 거 있잖아요. 예를 들면 그거 조금 싱거워요, 많이 싱거워요? 아, 소금도 넣어요? 그렇게 맹탕이에요? 이런 느낌인 거지. 나도 알긴 다 알아요.”
“알긴 뭘…….”
안다고. 그리고 지금 어디에 뭘 비교하는 건데.
원인 불명의 답답함을 억누르고 있자, 이번엔 나름 고심했다는 어투의 핑계가 덧붙었다.
“그래도 명분이란 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명분 같은 소리 한다.
“명분을 따지자면 더 틀린 말이죠.”
“아, 그런가?”
“공주께서 죽으면 이자리스의 혈통은 그걸로 끝입니다. 나라를 다시 일으켜 볼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든 공주님만은 살려서 훗날을 도모해야죠. 후계자는 반드시 구심점이자 희망이 될 테니까요.”
요목조목 빠르게 쏘아붙이면서도 클로드는 본인이 대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어이없는 얼굴이었다.
자신은 눈앞의 여자를 좌절시켜서 땅도 빼앗고 계승권도 강탈해야 하는 입장인데.
‘내가 왜 그런 말실수를 해서는.’
그리고 공주는 또 왜 그런 표정을 지어서는.
‘사람 마음 불편하게.’
태리 역시 그의 이상한 심리를 알아차리곤 잠시 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조차 무감각해진 일에 일일이 반박을 해 가며 신경 쓰고 미안해서 눈치까지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재미있게도 위안이 되는 일이다.
그 점이 왠지 고맙기도 해서 눈이 마주친 순간 희미하게 웃어 보였는데 클로드는 보자마자 팩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을 살갑게 하는 재주가 부족한 점, 이해해 주십시오.”
“이해할게요.”
완전히 이해하고말고다. 낯선 세계에 뚝 떨어진 빙의자로서 주인공을 안 믿으면 누굴 믿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되돌아가려면 이쪽이랑 친하게 지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한다고 냉큼 대답하는 것에 클로드는 또다시 하고 싶은 잔소리가 많은 표정이었지만 관두고 하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리고 지나간 일에 그만 미련 두시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십시오.”
“살고 있는 사람들이요?”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곳 호텔에도, 약재상의 거리에도 생존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살아남아서 다들 잘 살고 있으니까 가서 직접 보고 오시죠.”
호텔이야 그렇다 쳐도 약재상의 거리는 또 어디인지.
클로드가 던진 힌트에 태리는 어떻게든 그걸 기억해 내려 애썼지만 아무리 뒤져 보아도 게임을 할 때 그런 지명은 본 적이 없었다.
“어디에 있는 건데요?”
“구시가지의 동쪽, 폐허에 있습니다. 살아남은 이자리스인들은 대부분 그곳에 몰려 삽니다. 피난민들의 정착촌 정도라고 보시면 되겠군요.”
예고도 없이 나타난 공주가 그에겐 전혀 반갑지 않았지만 마법사들에겐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까칠하고 도도하고 싸가지 없는 마법사들이 눈물 콧물 다 빼는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었다.
아, 그거 두고두고 놀려 먹을 기회인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그에게 태리가 불쑥 물었다.
“언제 시간 돼요?”
“……시간이요?”
시간? 시간? 내 시간? 내 시간을 왜?
“그건 왜―”
“가 보라면서요.”
“거길 가는데 어째서 제 시간이 궁금하신 겁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면서요?”
아니, 그렇다고 나랑 함께? 거길 같이?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주체하지 못했다.
“폐허까지 어떻게 가는지 잘 몰라요. 약재상의 거리는 들어 본 적도 없고. 그리고 나 여기 친한 사람도 없는 거 알잖아요.”
그럼 난 당신한테 친한 사람이냐. 클로드는 그렇게 따져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렇다.
태리가 여기서 제일 친하고 제일 잘 알고 제일 친근감을 느끼는 대상은 다름 아닌 그였다. 내 주인공.
후, 심호흡을 한 남자는 간결하고 깔끔한 한 문장으로 거절의 이유를 완벽하게 주지시켰다.
“거길 가면 전 죽습니다.”
“죽……? 아아.”
“제국의 기사들은 웬만하면 근처에도 어슬렁거리지 않는 곳입니다. 제가 가면 좋다고 단체로 지팡이를 들고 뛰어나오겠죠.”
“머리통 깨려고?”
“……말을 왜 그렇게 심하게 하십니까?”
폐허에는 이자리스의 토착 골수파들, 그러니까 진짜 찐마법사들이 똘똘 뭉쳐서 살아가고 있고 그들에게 클로드의 위치는 처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침략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연히 좋아할 리 없고, 가면 웬 떡이냐 하고 호랑이 소굴에 들어온 토끼 취급하며 마법으로 찜 쪄 먹으려고 하겠지.
그리고 그게 정상인 거다. 여기 공주가 비정상인 거고.
‘실수할 뻔했네.’
언제나 주인공 편향주의자였던 태리는 아직 적응되지 않은 자신의 위치에 그 사실을 하마터면 헷갈릴 뻔했다.
공주와 기사.
다른 데선 낭만적인 관계로 쉽게 발전하는지 몰라도 이 게임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방금 그가 마신 주스에 독을 타서 암살이라도 시도했어야 되는 거였다. 그도 아니면 싸대기라도 때리거나 눈이라도 흘기거나…….
‘아무것도 못 했는데.’
그런데 거기다 대고 그만 하품까지 쩍 해 버렸다.
“아, 미안. 미안해요. 진짜 실수. 새벽에 와서 잠을 거의 못 잤거든요.”
“예, 그러시겠죠. 많이도 때려잡았으니.”
알 만큼 안다는 듯이 클로드는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숲에서 혼자 많이도 처리하셨더군요.”
“그거야―”
이미 상대해 봤으니까. 여러 번 이겨도 봤고.
마우스의 왼쪽 버튼을 눌러 YES를 선택한 순간, 보고 있던 화면이 까맣게 변하면서 그녀는 숲의 한복판으로 떨어졌었다.
영문도 모른 채 다짜고짜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죽기 살기로 처치했고, 그런 와중에도 피투성이 엘프를 만나 그를 구해 주었으며, 기억을 더듬어 겨우 마을로 찾아 들어온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출몰하는 몬스터의 대부분을 거의 스무 번 이상씩은 다 잡아 본 경험이 있다는 것.
어디가 약점이고 어디를 찔러야 크리티컬 공격이 들어가는지 훤히 알았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물론 혼자서 벌인 사냥은 아니긴 했지.’
어느 광기 어린 엘프의 학살 본능도 티스푼을 얹었달까.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딱히 묻지 않아도 충분히 건강해 보이시긴 합니다만.”
“안 다쳤어요.”
“그럼 그 피는 뭐였죠?”
질문은 매우 기습적이었다. 부연 설명도 없고 대화의 맥락과도 전혀 맞지 않는.
“엘프였죠.”
그러나 태리는 당황하지 않고 깔끔히 받아쳤다.
“다친 엘프랑 같이 있었거든요.”
클로드가 너무 순순히 부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곧이어 더 많은 정보들이 추가로 쏟아졌다.
“하이엘프일 거예요. 상급 정령들이 동조하는 걸 봤으니까.”
“엘프가 왜 여기에…….”
“원하는 게 있겠죠. 그 시간에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아는 사이입니까?”
“아뇨, 모르는데요?”
그런데 왜 아는 것처럼 말하나. 그렇게 대꾸하고 싶어 하는 뚜한 표정이 읽혀서 태리는 작게 실소했다.
“수고비예요. 내가 이것저것 귀찮게 굴었잖아요.”
그러면서도 새벽에 만났던 엘프, 이즈리얼을 떠올렸다.
사실 그걸 만났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좀 있었다.
맨몸으로 싸우던 와중에 우연히 그의 단도를 주워서 사용했고, 욕을 한 바가지 먹고 돌려준 뒤에는 그냥 가는 방향이 겹쳐서 잠시 함께했을 뿐이니까.
물론 그때에도 그놈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욕과 짜증을 퍼부었다.
주인공의 아군과 적군을 오가며 조력자 노릇을 할 주요한 NPC. 한눈에 그의 정체를 알아봤던 태리는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고 숨을 죽이며 걸었다.
“다른 수고비는 다음에. 언젠가 또 지불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죠.”
그녀가 후일을 기약하며 클로드의 허리춤에 찬 칼 쪽으로 힐끗 시선을 주자 그가 습관적으로 상체를 돌려 감추며 방어했다.
“앞으로 잘 지내 봐요. 난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대신 나도 그쪽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게요.”
새벽에만 해도 절망으로 가득 찼었던 태리는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져 보기로 했다.
눈앞의 남자가 드래곤만 잡아 준다면, 그렇게 되도록 자신이 도울 수 있다면 충분히 엔딩을 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어 보기로 했다. 이제까지 해 왔던 것처럼 엔간한 건 힘줘서 참고 악착같이 살면 된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왜 서로 돕고 살아?’
그러나 클로드는 전에 없이 크게 당황했다. 내가 너를 나의 동료로 만들겠다는 공주의 강렬한 의지가 기습적으로 훅 끼쳐 와서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그가 도망치듯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만 가 봐야겠군요. 제가 사실은 할 일이 산더미인데…….”
구질구질한 변명까지 붙이면서 떨쳐 낸 자리였는데 공주는 속도 모르고 총총대며 그를 쫓아왔다.
“왜 따라오시는 겁니까.”
“배웅 나가려고요.”
배웅…….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그럴 필요 없다고, 나는 혼자가 편하다고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내는데도 그녀는 굳이 손을 흔들며 문 앞까지 나왔다.
여기만 탈출하면 이 미친 감정의 소용돌이도 끝나겠지. 클로드가 눈에 힘을 주며 계단이 줄지어 선 내리막을 펄쩍 뛰어내리려 한 순간 그 단단한 손이 나타나 그의 소매를 콱 비틀어 붙잡았다.
“잠깐만!”
아, 또, 왜!
“만나고 싶으면 어디로 연락하면 돼요?”
헤어지기 직전에 그녀가 물은 건 ‘연락해도 돼요?’도 아니고 ‘어디로 연락 넣으면 되니?’였다.
내가 자기 집사인 줄 아나. 하지만 거부권은 없다. 자기 신세 자기가 꼰다고 오늘 일을 이렇게 망쳐 놓은 건 그의 세 치 혀였으니까.
먼저 도와준다고 한 것도, 먼저 놀려 먹으려고 한 것도 전부 그 자신이었으니까.
클로드는 생애 처음으로 여자에게 사는 곳을 따이고야 말았다.
그녀가 적어 달라며 급하게 가져온 건 펜과 테이블보.
구겨서 바닥에 던져 놓은 그 테이블보에 그는 자신의 주소를 한 자, 한 자 꾸역꾸역 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