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86)


 

3

‘이상하군. 내가 왜 그걸 모르지?’ 

현재 그가 군대를 주둔시켜 점령하다시피 한 이곳은 눈앞에 있는 이 공주의 소유물.

그녀가 이 왕국의 적법한 후계자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들의 총사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녀에 대해 무언가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그는 공주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모르는 걸 당연하게 여기기까지 했고.

이럴 리가 없는데……. 그는 백지처럼 하얀 자신의 머릿속이 당황스러웠다.

“공주님.”

“누가, 공…… 아, 저요?”

“무례인 줄은 알지만. ……알려 주시겠습니까?”

“뭘요?”

“감히 존함을 청합니다.”

이제라도 알아야겠다는 주인공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거려서 태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런 거 알려 줘도 되려나. 어설프게 지어낸 걸로 돌려 막기 할 수도 없고.

고민하던 그녀는 급조된 허술한 연기를 하는 대신에 그냥 솔직한 답변을 내려놓았다.

“내 이름은 태리예요.”

“태리.”

태리 소네티? 좀 많이 이상한데.

클로드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발음을 입 안에서 소리 없이 연습해 보더니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깍듯한 자세를 보였다.

“여러 번 실례를 범한 점. 용서하십시오.”

“그 정돈 괜찮아요.”

“찾아뵌 건 인사를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지내시다가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께서도 공주님이 돌아오신 걸 알면 분명 신경 쓰시길 바랄 겁니다.”

만약 태리가 진짜 ‘공주’였다면 이 말에 화를 내고 얼굴에 물을 끼얹어도 시원찮았을 것이다.

빈집에 들어와서 멋대로 집 안 관리를 하고 있는 주제에 그의 태도는 마치 본인이 원래 이곳의 주인이고 그녀가 객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태리는 화내지 않았다.

주인공은 어찌 보면 예정된 승리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게 엔딩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래야 그녀도 집으로 돌아갈 궁리를 할 수 있을 거고.

세계를 구할 용사이자 영웅이 될 주인공.

차라리 필요한 게 있으면 편히 말하라고 밑밥을 깔아 준 게 더 고마웠다.

“알겠어요. 부탁할 일이 있으면 꼭 말할게요.”

“그렇게 두 주먹에 힘을 주고 꼭 말하실 필요까지는…….”

“그럼 바로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그러시죠.”

“여기 상황은 어떤가요? 혹시, 어, 뭔가 변화된 게 있나요?”

사실 태리가 진짜 묻고 싶었던 건 ‘님 혹시 드래곤 본 적 있음? 아니면 흔적이라도?’였지만 다짜고짜 그런 얘길 꺼냈다간 이상한 취급을 당할 게 뻔했다.

“내가 여길 어제 왔잖아요.”

그러니 에두르고 에둘러서 접근하는 수밖에. 다행히 클로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 변한 모습에 많이 놀라셨겠군요.”

몇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 옛 모습은 깡그리 사라지고 초토화된 데다가, 이웃 나라 군대까지 와서 설치고 있으니 낯설음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처음으로 공주에게서 공감의 포인트를 잡은 클로드는 아까부터 내내 그녀에게 묘하게 휘둘렸던 분위기를 도로 되찾아 오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라도 적군 사령관으로서의 본분을 챙기면 된다.

“도착했을 때 도시의 문명권은 대부분 소실되어 있었습니다. 마을과 숲 사이에 장벽을 쳐 최후의 방어선만을 겨우 사수하고 있는 상태였죠.”

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기 위해 마법사들은 자신의 생명력과 마력을 불태워 거대한 마나 장벽을 세워 놓았다.

마법을 천박하게 생각했던 발로란의 기사들마저도 보고 경이로움에 휩싸였을 정도였다.

“물론 그것을 위해 괴멸적인 피해를 감수했겠죠. 그래도 그렇게나마 시간을 벌은 덕분에 도망친 자들은 무사히 살아남은 줄로 압니다. 공주께서도 그렇게 살아남지 않으셨습니까?”

과거엔 자랑스러운 마법왕국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몬스터 창궐지로 전락해, 호승심 넘치는 모험가들의 담력 시험장 정도가 되었을 뿐이다, 이 나라는.

솔직히 클로드의 눈엔 아직도 안 망하고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게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치안은 앞으로 더욱 엄격히 단속할 테니 큰 걱정은…… 듣고 계십니까?”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거리낌 없이 미주알고주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던 공주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

눈꺼풀이 아래로 착잡하게 깔린 게 침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울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해서 그는 등받이에 여유롭게 젖히고 있던 등을 번쩍 앞으로 세웠다.

‘너무 심하게 말했나?’

아, 이건 아닌데.

살짝 적군다운 모습을 해 보려고 했던 거지 그렇다고 상처 줘서 울리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전혀, 전혀 없었다고.

고압적으로 굴려고 폼을 잡았던 자세에서 그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괜찮…….”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그런데 그 손끝이 닿으려던 찰나, 수그리고 있던 얼굴이 위로 올라오는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그는 희미한 안개 같은 것을 본다.

무표정인데도 배경처럼 깔린 듯한 우울함이 엿보여서 잠깐 사이에 가슴이 덜커덕거릴 뻔했다.

고개를 든 공주는 제게로 다가오려던 팔을 발견하더니 눈을 살짝 키웠다.

“걱정했어요?”

“아니요.”

걱정은 무슨, 절대로 아니다.

그냥 찝찝해서. 그래, 진짜 그냥 찝찝해서 살짝 신경이 쓰일 뻔했던 것뿐이지.

클로드는 빛보다 빠르게 부정했지만 태리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걱정했나 보네. 상처받았을까 봐. 얼굴에 그렇게 다 쓰여 있어요.”

“죄송하지만 상당히 잘못 보신 편입니다.”

“난 괜찮아요. 일일이 상처받기엔 이미 충분히 건조한 어른이 됐거든요.”

괜찮긴. 잘도 거짓말하네. 내가 아까 다 봤는데.

공주의 얼굴은 무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건조하진 않았다.

오히려 심해에 가라앉은 사람처럼 일렁거렸었지.

그렇게 솔직하지 못하면 자기만 힘들 뿐일 텐데. 그가 차가운 주스를 들이켜며 애써 표정을 감췄다.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네요. 설정상 나쁠 수야 없겠지만―”

그리고 머금은 순간 도로 푸웃! 하고 뱉어 냈다.

젠장!

입을 손으로 가릴 필요가 없었다면 욕이라도 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식당에 휴지 한 조각도 없어!’

허둥지둥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닦을 무언가를 찾는데, 벌떡 일어난 공주가 잔을 치우더니 테이블보를 통째로 걷어내 그에게 내밀었다.

“물들기 전에 옷부터 닦아요.”

지금 나더러 이런 걸로 닦으라고. 형형색색의 체크무늬…….

심지어 그녀가 걱정하는 건 그의 얼굴도 아니고 그의 옷이었다.

옷이 물든다고. 이 흰옷이.

“……예, 그러죠. 감사합니다.”

시킨 대로 옷의 얼룩부터 벅벅 문지르자 그녀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훈수마저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비비면 안 되는데. 꾹 눌러서 흡수시켜야 돼요.”

이를 좀 악물긴 했지만 클로드는 반항하지 않고 시킨 대로 꾹 눌렀다.

옷을 대강 닦고 나서야 얼굴에 튀긴 물기들을 훔친다.

태리는 맞은편에 턱을 괴고 앉아서 그가 푸드득거리는 새처럼 본인의 턱을 퍽퍽 때리듯이 닦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 잘 듣네, 하는 혼잣말이 절로 굴러 나왔다.

‘역시 주인공은 팔자부터가 천생 주인공인가 봐. 못되게 하려고 애써도 결국엔 착해. 어쩜 이렇게 요령도 없는 순진한 미남일까.’

좀 전에 그가 사소한 도발쯤으로 던진 돌은…… 그래, 솔직히 말하면 상처를 헤집는 내용이었다.

누군가가 널 살리려고 목숨을 걸었지.

그게 얼마나 그녀의 염통을 찌르는 말인지 몰랐을 거다. 거기서 좀 더 수위를 높였다면 충분히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반격 비슷한 걸 가볍게 생각해 두고 있었는데 막상 고개를 드니 웬 얼빵한 표정 하나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여서.

입술을 깨물고 눈동자를 굴리며 제 눈치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멍청한 표정이라 김이 다 새 버렸다.

‘화내서 뭐 해.’

어차피 장작까지 넣어 가며 활활 지피기엔 이미 많이 닳아 있는 감정이다.

다만 생각은 좀 많아져서 그가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동안 그녀는 반대로 등받이에 녹아내리듯이 어깨를 푹 파묻었다.

― 그들 덕분에 공주께서도 살아남지 않으셨습니까?

― 너만 없었으면 네 엄마가 그렇게 됐겠니? 널 위해 희생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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