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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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티로군.’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

작고 흰 얼굴에 탁한 잿빛의 금발을 듬성듬성 땋아 내린 아가씨.

이 여자가 소네티인 것이다. 이자리스의 마지막 공주.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소네티.

소네티라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라고 상상했던 것에 정확히 어울리는 모습이라 클로드는 내심 놀라 버렸다.

마성이 드러나는 외모 앞에 저도 모르게 감탄이 일어나려던 때였다. 왜인지 시종일관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공주가 먼저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쪽이 진짜 클로드?”

머릿속에서 얇은 유리막이 깨지는 것처럼 정신이 확 든다.

직함도, 성도 아닌 바로 이름으로 부를 줄이야.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했지만 클로드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일어나 그녀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세상의 모든 신비로움은 이자리스로부터.”

하얀 제복에 감싸인 손이 정중하게 내밀어졌다.

인사로서 손등에 입을 맞출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는 건 기사가 레이디에게 보여 주는 최고의 경애.

그러나 눈앞의 공주는 갸우뚱하더니 한참 후에야 ‘아, 손 달라는 건가?’ 하고 중얼대며 그의 손에 제 것을 털썩 겹쳐 주었다.

‘이것 참.’

무슨 적선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왜인지 조금 기쁘기도 하다. 절대로 손 같은 건 주지 않는 고양이가 무심하게 코로 손등을 톡 쳐 주기라도 한 것처럼.

“손이 무척 작으시군요.”

가벼운 키스를 하며 클로드는 공주의 손 크기를 가늠했다.

그러곤 비교해 볼 필요도 없이 숲에서 발견된 핏자국은 그녀의 손바닥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대마법사의 혈통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발로란의 성기사 클로드 데본셔입니다. 공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이자리스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발로란의 황제께서 이곳의 상황을 심려하고 계셨던 터라.”

보호라는 얌전한 어휘를 골랐지만 실상 무단 침입에 더 가까웠기에 클로드는 최대한 중립적인 어휘들을 사용하려 노력했다.

“저희 황제께서 말씀하시길 주인 없는 빈산에는 서둘러 군대를 보내야 하는 법이라고 하시더군요. 이곳에 머무는 것이 제 의지는 아님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니까 진실 그대로를 일러바쳐서 자신의 욕심 많은 황제의 민낯을 폭삭 까발리는 방식으로.

이해를 한 건지 만 건지 공주는 얼떨떨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간 눈알을 끔뻑거렸다.

태고부터 마법사들이 다스려 온 신비의 땅, 이자리스.

마도 문명의 발상지라고 불리는 이 작은 도시 국가는 지난 왕의 실수로 인해 스스로 자멸했다. 타국의 공격을 받았던 게 아니라.

광란의 마법사라 불렸던 왕이 신의 금기를 침범해 저주를 받은 거라고 소문은 나 있지만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도 누구도 모른다.

다만 저주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몬스터들이 왕국의 한가운데를 차치한 검은숲에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딸.’

정확히는 저주가 몰아쳤었던 과거에, 살기 위해 도망갔었던 공주.

“……공주님?”

아까부터 내내 자신만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시선에 클로드는 뭔가가 슬슬 불편해졌다.

관찰하는 듯한 그녀의 눈길에는 놀라움과 탄성이 묻어 있었다.

‘증오나 혐오 쪽으로 각오했는데?’

이런 식으로의 전개는 전혀 준비를 못 해 왔는데.

지도자를 잃은 빈 땅이었다곤 해도 멋대로 들어와 총독 노릇을 하고 있는 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침략자나 다름없을 테니 당연히 미움을 받겠다는 각오로 왔다.

“제가 실수를 한 것이 있다면……”

“정말 클로드예요?”

“예, 제가 정말 클로드입니다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대하듯이, 시종일관 이름으로 직행하는 호칭에 그는 또다시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혹시 저를 아십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거리낌이 없을 수가. 최대한 질 나쁘게 매도하자면 자신은 약탈자이고 도둑놈일 텐데.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조금 반가워서요.”

“반가…… 예?”

클로드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벙쪘다. 매끈하던 목소리도 삐끗했다.

어떻게 내가 밉지도, 싫지도, 혐오스럽지도 않고 그냥 반갑다고 말할 수가 있지?

최악을 가정해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이 주스로 얼굴 샤워를 맞겠다는 상상도 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태리는 진심으로 눈을 빛냈다.

그녀로서는 뭐랄까 ‘와, 예쁘다’ 하고 사들였던 조각상이 움직이고 말도 걸고 손등 뽀뽀도 해 준 기분이라서.

게다가 클로드 데본셔라니.

게임의 주인공이 아닌가. 그녀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모니터 앞에서 열심히 조작해서 움직였던 바로 그 기사.

주인공답게 빼어난 외모와 체격을 지닌 그는 본 직업인 성기사에 걸맞게 하얀 제복과 그에 대비되는 검은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차디찬 회색빛 눈동자가 그가 가진 빈틈없는 분위기에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역시 세상의 모든 주인공은 다 사기 캐릭이라니까. 수상한 얼굴로 뭐든 다 잘하는 전형적인 냉미남이었던가.’

하지만 침착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는 소년 같은 구석이 더 많은 인물이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것 같아도 남들에겐 절대로 밝힐 수 없는 크나큰 약점까지도 있고.

이미 게임을 통해 겪어 봤으므로 태리는 클로드의 인간적인 허점을 잘 알고 있었다.

‘우등생인 것 같지만 그냥 츤데레 쪽인데. 내가 살다 살다 별…… 츤데레 주인공이랑 마주 앉아서 차도 마셔 보고. 미쳤다, 미쳤어.’

그러다가 문득 제 처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현실이 아니라지만 어찌 되었든 눈앞의 남자는 이곳에서만큼은 실재하는 것이 분명한, 존재감이 뚜렷한 인물.

하지만 나는?

‘등장하지도 않는 캐릭터잖아. 이거 어떡해?’

게임 <이자리스의 검은숲>에서 이자리스의 공주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긴 해도 다 무너져 가는 나라이고, 처음부터 발로란의 기사인 클로드를 주인공으로 못 박아 놓고 시작하는 전개였으니까.

그가 이자리스의 총독으로 와선, 검은숲의 몬스터들을 처치해 가며 저주를 풀고 영웅이 되는 걸로 끝나는 게 스토리의 골자였다.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이도의 전투를 클리어 해서 쾌감을 즐기도록 하는 게 주목적인 게임이고.

흉측한 형상의 몬스터는 수없이 나올지언정 이자리스의 공주는 나올 이유도, 나올 구석도 없었다.

그렇다고 없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모를 일이지만 분명한 건 그녀는 단 한 번도 게임 속에서 등장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역할이 없는데 나오는 게 이상하지. 여긴 내 자리가 없어.’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보고 공주님이라느니, 소네티라느니 그렇게 불러 주지 않았다면 태리는 아직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체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숲에서 길을 찾아 마을로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겁하며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를 알아보았고―

― 맙소사! 공주가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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