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21화 (21/21)

21장.

에스텔라는 숨죽여 인형에 녹음된 말들을 들었다. 루시와 루스는 인형이 말을 한다며 신기해했다. 녹음된 것이 끝나면 에스텔라는 다시 한번 인형의 등 태엽을 감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에스텔라가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루시. 루스. 이거 한동안 엄마가 빌려도 될까?”

“우웅. 그래!”

“알게떠.”

에스텔라는 두 아이가 자랑스러운 듯 사랑 가득 담아 투실투실한 뺨에 입을 맞췄다. 이런 깜찍한 것들, 어쩜 이렇게 적재적소에 엄마한테 이런 걸 알려줄까!

다음날 에스텔라는 곧장 전서를 보냈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이자, 자매이자, 한때는 사랑의 라이벌이었으며 또 한때는 원수의 딸이었지만, 지금은 조력자가 될지도 모르는 트라비아의 왕비에게 보내는 전서였다.

서북지대의 원군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버트랜드 국왕이 아닌, 메시앙의 적통 공주 에스텔라 데 메시앙의 권한으로서.

그런 뒤 이자크의 가짜 죽음 소동을 벌였다.

메시앙 왕궁에 가 눈물로 호소하며 서북지대 통행권을 허락받았다. 이자크는 물론 다른 병사들의 유해까지 수습하겠다는 명목으로 다리를 연결하고, 왕실 근위대의 일부를 받아왔다.

철저히 버트랜드 몰래 이 모든 전쟁을 멈추고 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러니까, 메시앙에서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버트랜드를 방심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이유밖에는 없었거든요. 미안해요. 멋대로 죽여버려서.”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눈만 깜빡였다.

아무리 계획이 있다 해도 그렇지, 어떤 여자가 아직 사방에 화살과 총탄이 날라다니는 전쟁터에서 곧장 적군의 왕을 만나러 오냔 말이야.

에스텔라의 거침없는 행동에 놀란 것은 아마 이자크뿐만이 아닐 거다.

난데없이 전서를 받고 트라비아에서 배까지 타고 온 릴리도, 난데없이 적국의 공주를 만난 에테리아의 국왕도, 모두 이자크와 같은 마음일 거다.

오늘 아침 에스텔라는 에테리아 국왕에게 새로운 협정을 제시했다.

‘불가침조약을 맺는 건 어떠시나요?’

자신이 메시앙의 영토를 살짝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기막히게 눈치챈 공주가 조약을 권유했다.

‘조약을 맺으면 이제 확실한 우방국이 되니, 저희 메시앙에서 매년 일정량 이상의 농작물을 에테리아에 한정하여 수출하고자 하는데.’

또한 에테리아에서 가장 원하는 것 역시 기막히게 알고 있었다.

‘서북지대는 원래 에테리아와 메시앙의 중립지대니, 이곳에서 카루체 족이 지내는 것은 맞지 않다 생각합니다. 하여, 카루체 족은 원래 메시앙의 원주민이기도 하니, 그들을 저희가 데리고 갈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국왕 전하?’

에스텔라는 에테리아 국왕에게 국왕이 아닌 자신과 손을 잡자 권했다.

에테리아 국왕은 자신이 왜 메시앙의 국왕도 아닌 공주와 손을 잡아야 하냐 묻자, 공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야, 이제 곧 제가 메시앙의 국왕이 될 테니까요. 차기 에테리아의 국왕과 타기 메시앙의 국왕이 손을 잡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정권이 시작하는데, 헌정권과 손을 잡지는 않으실 테잖아요.’

현 메시앙의 국왕은 이제 얼마 안 가 탄핵되고 말 겁니다.

에스텔라 옆에 앉아있던 트라비아 국왕의 사신이 말했다. 사신은 트라비아 국왕과 왕비의 의사를 대신하여 전달하는 이였다. 그런 사신의 입에서 현 메시앙의 국왕이 탄핵될 거라는 말을 한다.

트라비아 왕비는 버트랜드 국왕의 친딸이라 들었는데, 제 아비가 탄핵 되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에테리아 국왕의 눈치를 살핀 에스텔라가 가만히 대답했다.

‘부정하게 왕이 된 이는 부정하게 그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는 거죠.’

실로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현 메시앙의 국왕은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다 트라비아 왕국에 원군을 요청해 대군을 들여올 생각입니다. 트라비아 병사들은 이곳에 주둔하며 버트랜드가 원하는 대로 주권을 빼앗을 거고요. 그 와중에 에테리아가 무사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절대 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에스텔라의 말에 뒷받침이라도 보좌관이 메시앙과 주고받은 문서들을 건넸다.

에테리아의 국왕은 가만히 그 문서들을 살펴봤다.

이미 메시앙에서 버트랜드를 끌어내릴 모든 문서가 준비되어 있었다. 에테리아 국왕이 슬쩍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함부로 까불었다가는 큰코다치겠군.

에스텔라는 웃는 얼굴로 에테리아 국왕에게 예의를 갖춰 대화를 이어갔지만, 에테리아 국왕은 정작 에스텔라를 보며 저렇게 웃는 얼굴로도 쌍욕을 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특히, 그녀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에테리아의 차기 국왕께서는 진정으로 제 백성을 아끼시나 봅니다. 적국의 장수를 데려와 원주민들을 몰아낼 생각을 하시다니. 호호. 국왕 전하의 기사들은 다들 죽음 앞에서 기사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놨나 봅니다.’

어디 그뿐인가?

‘제 남편이 카루체 족장과 싸워 이길 줄은 알고 있었답니다. 델레가투스요? 어머, 참으로 그이다운 생각이네요. 호호. 제 남편이 이렇게나 제 부하들을 아낀답니다. 호호호. 고작 부상 때문에 제 부하들을 전쟁터로 몰아놓고 자신은 막사에서 편히 쉬는 이가 아니랍니다. 호호호.’

감히 내 남편을 카루체 족과의 전투에 보내? 에테리아의 기사들은 하는 일이 쥐똥도 없니? 기사도라는 것도 없는 것들이 기사를 하고 앉아있네? 어머, 웃겨라. 에테리아의 국왕을 보좌한다는 근위대장들은 자기들 다치는 게 무섭다고 그걸 또 가만히 보고 있어? 적군의 장수가 제 나라를 지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걸 아주 고상하게 돌려 말했다.

왕의 뒤쪽에 서서 공주와의 담화를 듣고 있던 헤롤드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었는지 은근슬쩍 자리를 피했다.

‘이자크를 탐내하시는 그 기분은 이해합니다. 호호호. 아무래도 다른 누구와는 다르게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신념이 있으니까요. 호호호. ’

눈은 생글생글 햇살처럼 웃고 있는데, 깃털 살랑대는 부채로 가려진 입꼬리는 절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사람이, 제 남편에게는 저렇게나 유한 미소를 지을 줄이야.

에테리아 국왕이 자신이 졌다는 듯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 참, 난 이시스 대륙의 차기 국왕 중 내가 제일 야심가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여기 차기 메시앙의 국왕께서는 나보다 더한 야심가더군.”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팔에 팔짱을 끼며 에테리아 국왕을 쳐다봤다.

“그러니, 이제 그만 제 남편을 돌려주시겠어요? 국왕 전하.”

“참으로 아까운 인재라 놓치기 싫지만, 앞으로 메시앙과는 우호국이 될 테니 이번에는 양보하겠소.”

이번에는 양보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에테리아 국왕은 속으로 메시앙의 공주가 이대로 왕위에 오르면 꽤나 성가실 이웃 나라의 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래 이웃 나라 왕이 성가셔야 자신 역시 좋은 왕이 될 수 있다 했다.

수가 훤히 보이는 현 메시앙의 국왕보다는, 차기 메시앙의 국왕이 앞으로 에테리아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

에테리아 국왕은 각 근위대장을 불러들여 서북지대에서 철수할 것을 명했다.

*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담화가 끝나자 바로 메시앙의 포로들을 모두 챙겨 에테리아 진영을 떠났다. 마차에 탄 에스텔라가 가만히 이자크의 손을 잡은 채로 창문 밖만 바라봤다.

이자크는 아직 제 손을 꼭 쥐고 있는 이가 에스텔라라는 것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정말 그녀가 서북지대에 있는 것인가?

내 앞에 있는 에스텔라가, 진정 에스텔라가 맞는 거지?

이자크가 엄지로 에스텔라의 손등을 쓸었다. 그러자 에스텔라가 슬며시 깍지를 껴왔다. 여전히 창문 밖에 고개를 고정한 채로. 마차에 타 오로지 단둘이 된 이후부터 에스텔라는 이자크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에스텔라.”

“…애들이 아빠를 엄청 그리워했어요.”

“왜 자꾸 창밖만 보고 있습니까.”

“…지금 조금 당신 얼굴 보고 있기 힘들어서요.”

“왜요.”

“그야….”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도, 일부러 더 꼿꼿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이유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수척해지고, 얼굴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나자마자 우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서 조금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창밖을 보고 있으려 했건만, 이자크는 제 속도 몰라주고 기어코 에스텔라의 얼굴을 제 쪽으로 잡아 돌렸다.

“내 예쁜 아내 얼굴 좀 봅시다.”

“….”

“어, 내 에스텔라가 아닌 듯하군. 내 에스텔라는 이렇게 찌그러진 호밀 빵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씨이…. 그럼 이자크는 완전 탄 바게트처럼 생겼거든요?!”

“이렇게 잘생긴 바게트도 있답니까?”

“자, 잘생기긴 뭐가 잘생겨! 내 잘생긴 이자크 돌려내! 뭐야! 흐어어엉, 이렇게 다치고 메말라서는…. 안 울려고 했는데 왜 울게 만들어요!”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치며 울었다. 가만히 맞아주던 이자크가 아직 부상이 다 낫지 못해 인상을 찌푸리자 에스텔라가 화들짝 놀라며 그의 옷을 들췄다.

“아파요? 다쳤어요? 어디 몸 좀 봐요, 어디 또 다쳤어요. 응?!”

“여기서 이러면 곤란해요. 여보.”

“이러면 곤란하긴 빨리요, 얼른! 당신 또 제대로 치료도 안 받을 게 분명한데-”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옷을 들추던 중, 그의 쇄골 부근이 파랗게 멍든 것을 발견했다. 그대로 홱 멱살을 잡아 벌리며 옷가지를 들추자, 왼쪽 어깨 쪽에 붕대를 칭칭 감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살들은 보랏빛으로 피멍이 들은 데다가 붕대로 감은 곳은 피가 은근히 새고 있었다.

“이, 이게….”

카루체의 족장과 델레가투스를 했다더니.

“카루체 족장 그놈이 한 짓이에요?”

“이기려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 끌기도 싫었고 왼쪽 어깨 하나로 서북지대 탈환은 나쁘지 않잖아요.”

그러자 다시 에스텔라의 얼굴이 찌그러진 호밀 빵처럼 쭈그러졌다. 이자크가 푸흐 웃음을 흘리며 에스텔라를 달랬다. 아픈 건 난데 왜 에스텔라가 그렇게 웁니까. 하자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이자크가 아프니까 내가 울죠. 얄미워 죽겠는데 이렇게 부상당한 사람을 차마 때리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치료는 제대로 했네요. 보통의 당신이라면 대충 붕대만 둘렀을 텐데 부목도 대주고… 누가 치료해줬어요?”

“볼레르 영주의 부인이요.”

“….”

에스텔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에스텔라.”

“…아.”

“거기서 내 여동생을 만났어요.”

적국의 땅에서 8년 만에 여동생을 만났다. 그것도 볼레르 영주의 부인으로.

에스텔라가 이국의 땅에 이민 보냈다는 말을 들었다. 거기서 새로운 이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바로 옆 나라 에테리아일 줄은 몰랐다.

부상당한 이자크가 승전 소식을 들고 돌아왔을 때 볼레르 영주가 자신의 성에 초대했다.

그곳에서 여동생을 만났다.

영주의 부인 역시 이자크를 알아본 듯했다. 이자크는 아는 척하지 않은 채 그곳에서 제 부하들과 저녁 만찬을 먹었다. 영주의 부인이 직접 와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간호해줬다. 이자크의 상처도 그녀가 치료해줬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엘레나 역시 이자크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날 밤, 볼레르 영주가 이자크를 자신의 서재로 불러냈다.

맞은편 소파에는 엘레나가 앉아있었다.

‘부인에게 대충 사정을 전해 들었습니다. 두 분이서 잠시 대화라도 나누시지요.’

하지만 영주가 자리를 비켜주고 나서도 둘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메시앙의 장수가 싸우러 온다는 말에 오빠가 생각나긴 했어. …잘 지냈어?’

‘네가 왜 볼레르 영주의 부인이 되어 있는 거니, 엘레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난 네가, 왜 여기에-’

‘다 말할게. 가장 중요한 건, 모두 내가 선택한 거였다는 것만 알아줘.’

엘레나는 그렇게 에스텔라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자크에게 모두 말했다.

“…볼레르 남작과 혼인을 했을 줄은 몰랐어요. 내가 억지로 시킨 건 절대 아니었는데-”

“알아요, 에스텔라. 당신을 원망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에요.”

그의 말에 에스텔라 고개를 들어 이자크를 쳐다봤다.

그날 변경백이 선왕 벤자민을 독살하려던 그날, 두 사람을 본 유일한 목격자는 그들의 시종들도, 밑의 가신들도 아닌, 변경백의 막내딸 엘레나 몬 디에스였다.

후에 아버지가 끌려가신 후 엘레나는 자신이 목격자라며 항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 그녀를 미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엘레나는 살해당한다.

그게 에스텔라가 메라의 금서를 얻어 처음 회귀했을 때의 일이었다.

두 번째로 회귀했을 때 에스텔라는 엘레나를 살리기 위해 이자크에게 엘레나가 미행당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자크 역시 미행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두 번째에도 마찬가지로 엘레나는 괴한에게 살해당한다.

세 번째가 되었을 때, 회귀 주술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에스텔라는 일단 엘레나를 살리는 것만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여 그녀를 이민 보냈다. 트라비아에 이민 보냈던 엘레나는 살해당해 발견된다.

그리고 네 번째가 되었을 때. 에스텔라는 그나마 차선책을 생각해냈다.

버트랜드를 따돌리면서도 엘레나의 근황을 늦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이름을 개명한 뒤 에테리아 귀족의 하녀로 보내는 것뿐이었다.

다섯 번째 회귀 때는 5년 전의 기억만 가진 채였기에 엘레나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네 번째 회귀 때 이민 보낸 엘레나가 다행히 살아 있었다.

‘공주님,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많이 불안정해 보였어. 정갈하시던 필체도 많이 휘갈겨지고… 오빠가 옆에 있으니 안심이지만, 요즘은 좀 어떠셔?’

마지막으로 엘레나가 에스텔라를 직접 만난 것은 6년 전. 이제 막 아이들을 낳았다는 에스텔라는 델라 랭과 아르텔과 함께 에테리아 귀족 저택에 초대받아 놀러 간다는 것을 명목으로 엘레나를 만나러 왔다.

그곳에서 만난 에스텔라는 많이 불안정해 보였다.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이긴 했어도 생기 자체가 보이지 않는 얼굴.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쳐도, 에스텔라는 멍하니 한 곳만 응시하거나, 가끔 자신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까먹은 듯한 얼굴이기도 했다.

또한 예전에 알던 햇살처럼 밝던 공주와는 달리, 사소한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으며, 특히 다른 에테리아의 귀족 중 하나가 이자크와 아이들에 대해 물어볼라치면 과하게 반응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볼레르 영주 성의 시녀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티 파티에 초대된 귀부인들의 시중을 들다, 에스텔라가 돌아가려 하자 얼른 그 뒤를 따라가 물었다.

‘공주님! …괜찮으신 거 맞으시죠?’

‘…잘 되는 중이야 엘레나. 괜찮아. 이번엔 내가 꼭 살릴게.’

‘예?’

‘그런데… 엘레나 영애.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그 차림은 뭔가요?’

‘공주님…?’

당황한 것은 그녀와 함께 온 살롱의 마담 델라 랭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녀는 이미 공주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양, 함께 온 젊은 남자와 눈치를 보더니 이내 멋쩍게 웃으며 에스텔라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에스텔라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마담을 쳐다보다 이내 아, 내가 지금…. 하며 당황한 듯 우왕좌왕하다 다시 엘레나를 쳐다봤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이었다.

‘… 가 볼게요, 엘레나. 지금 당장 힘들지 모르겠지만, 내가 꼭 당신과 이자크를, 내 아이들을 버트랜드로부터 살려낼게요.’

그러니까, 엘레나도 부디 살려고 노력해주세요. 그리고, 나 미워하지 말아줘요. 시누이한테까지 미움받으면 나 좀 서러울 거 같거든.

농담조로 말하는 듯 웃으며 말했지만, 목소리 끝부분이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다.

그게 마지막으로 본 공주의 모습이었기에 엘레나는 많이 걱정했다고 했다. 그 후 영주의 청혼을 받아 결혼한 뒤, 계속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8년 만에 이자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엘레나에게서 에스텔라와의 이야기를 들은 이자크는 다시 한번 에스텔라에 대해 자신이 이렇게나 무력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던 여자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원망하겠습니까, 에스텔라.”

“이자크….”

맨 처음엔 화도 났다. 에스텔라의 다이어리를 읽었을 때도, 엘레나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도. 자기 자신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내가 뭐라고. 그깟 첫사랑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냔 말인가.

이자크는 자신에게까지 이렇게 희생하는 에스텔라에게 고마움보다는 미안함이 더 컸다.

그런 와중에 몸도 성치 않은데도 이곳에 온 에스텔라를 보니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에스텔라. 제발. 제발 당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

“내 삶의 이유는 당신과 아이들이야. 그런데 이 위험한 곳에 당신이 온 게 고작 나 때문이라면-”

“이자크. 당신이 행방불명 되었을 때. 내가 무슨 생각했는 줄 알아요? … 만일 당신이 죽은 게 사실이라면, 다시 시간을 돌릴까 생각도 했어요.”

혼자서 이자크와의 사이에서 난 세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다. 이자크가 죽어서 미쳐 버리든, 다시 시간을 돌려 그를 살린 뒤에 미쳐 버리든.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 쪽이 더 나은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을 하다, 제 품에서 꼼지락대는 루멘과 그 옆의 쌍둥이를 보고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에스텔라는 그날 아이들을 부여잡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메시앙의 공주라면서, 서북지대가 에테리아에 넘어가는 것보다 당신이 죽는 게 더 싫었어요. 내 삶의 이유가 당신이라는 게 기쁘면서도, 한심했고.”

공주라면 더 큰 뜻을 품어야 하는데.

더 먼 곳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는데.

시간을 돌린 모든 이유가 당신과 아이들이었으니까.

한나라의 공주가 이렇게까지 이기적이고 사적이게 움직여도 되는 걸까? 많은 고민도 했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이자크. 내 삶의 이유 역시 당신과 아이들이에요. 이 나라? 백성들? 아버지의 복수? 그런 것들보다 당신과 아이들이 내게는 우선순위에요.”

매 순간 메시앙의 공주 에스텔라와 한 남자의 아내, 에스텔라 아이들의 엄마 에스텔라가 서로 부딪혔다.

“내가 버트랜드를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이유도, 당신과 아이들을 지켜 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나한테, 자꾸 날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말아줘요. 이자크는 나와 아이들 관련된 일에 당신이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에스텔라….”

“적어도 나한테 그런 말 하려면 몸에 부상이라도 당하지 말던가. 이게 뭐야 몸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멍들고. 이런 거 이제 그만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버트랜드를 몰아내고 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에스텔라. 아이들은 그럼 저택에 있는 겁니까.”

“네. 델라도 그곳에 지내고 아르텔도 있으니 많이 걱정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엄마 아빠 보고 싶어 하며 울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루멘은 아직 갓난쟁이라 아무것도 모른다 쳐도….”

보고 싶다며 엉엉 우는 쌍둥이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기분이다.

*

한편 변경 저택.

쌍둥이 루시와 루스는 매일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었지만 꾹 참기로 했다. 에스텔라는 사실 서북지대로 오기 마지막 전까지 고민했다.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가면 필시 불안해할 텐데, 그렇다고 이 어린아이들을 서북지대로 데려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에스텔라가 서북지대로 가기 전, 그녀는 쌍둥이를 불러서 물었다.

“엄마는 아빠를 데리러 서북지대로 갈 거야. 아빠가 엄마랑 우리 쌍둥이랑 루멘을 지키려고 갔듯이, 엄마도 아빠랑 우리 루시, 루스, 루멘을 지키려고 가는 거야. 루시랑 루스는 엄마 없는 동안 잘 지낼 수 있겠어? 너희가 싫다고 하면 안 갈게.”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쌍둥이가 물었다.

“가면 아빠 데려오는 거야?”

“엄마도 빨리 갔다 올 거야?”

“…루시랑 루스, 숫자 몇까지 셀 수 있지?”

“웅! 우리 백까지 셀 수 있더!”

“그럼, 오십 밤이 지나기 전에 엄마가 돌아올게. 100까지 셀 수 있으면, 50은 금방 세겠지?”

그러자 루스가 손가락 하나둘 접어보며 눈을 도륵도륵 굴리더니 자신 있게 대답했다.

“웅!”

“우리 이제 꾹 참는 거 잘해, 엄마.”

루시의 말에 에스텔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이들의 볼을 살살 만지며 에스텔라가 말했다.

“너무 꾹 참지 않아도 돼. 루시.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만 기다려줘. 엄마가 금방 아빠랑 같이 돌아올게. 그러는 동안 루시랑 루스는 할아버지랑, 루멘을 잘 봐줄래? 엄마랑 아빠가 이 저택에 없는 동안은 너희가 이 저택의 주인이니까.”

다섯 살짜리 아이들에게는 부담이 될 만한 말이라는 걸 에스텔라도 알고 있었다.

되도록 아이들은 조금 철이 없어도 좋으니 좋은 것만 알고 자랐으면 했던 에스텔라라, 이런 말 하는 것 자체가 미안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이 상황으로서는 단순히 세 아이의 엄마보다는, 내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차기 국왕으로서의 결단이 필요했다.

“저택 주인 우리야?”

“와. 우리가 대장이야?!”

쌍둥이들이 우리가 대빵이라는 거지! 하며 신나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쿠키 열 개 먹어도 돼?”

“우유 대신에 핫초코 먹어도 돼?”

“엄마가 저택에 없는 동안은 루시랑 루스 마음대로 해도 돼. 단, 먹고 나서 이는 잘 닦기. 이 썩으면 아야 해서 더 이상 쿠키도, 핫초코도 못 먹어.”

“네!”

그렇게 해서 에스텔라는 눈에 밟히는 아이들을 두고 서북지대로 떠났다.

에스텔라가 서북지대로 떠나는 날 쌍둥이들은 씩씩하게 에스텔라에게 말했다.

“다녀오쎄요!”

“압빠 꼭 데리구 와야해에-!”

“양치질 잘할게요!”

“루시랑 루스가 집 잘 지키구 있을게에!”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말하는 쌍둥이의 모습이 기특하여 에스텔라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아이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과연 루시와 루스는 에스텔라의 걱정대로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며 울었을까.

의외로 쌍둥이들은 씩씩했다.

대신 쿠키와 핫초코를 먹는 날이 많아졌다. 평소라면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이 썩는다며 정해진 양만 허락해줬는데 이제는 자신들이 저택의 대빵이라며 당당하게 쿠키와 핫초코를 요구했다.

“우리가 여기 대장이니까!”

“엄마가 루시랑 루스가 저택 주인이래써!”

쿠키와 핫초코를 요구할 때만 주인 행세를 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쌍둥이들은 착실했다.

“루멘! 좋은 아침이야!”

“루멘 안녀엉-”

“어라. 루멘이 기분이 좋은가 봐. 방긋방긋 웃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동생 루멘을 살펴보러 갔고, 루멘이 별 탈이 없는 듯하면 맨 꼭대기 층의 할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루스는 아니라곤 하지만 아직까지 엄마와 아빠와 함께 가는 게 아니면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가는 걸 무서워하는 듯했다.

루시 등 뒤에 딱 달라붙어 방에 들어가면, 벤자민을 치료하던 로먼이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원래 그랬어야 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루, 루시이 우리 로먼도 없는데 오늘은 그냥 가까…?”

“무슨 소리야 루스! 할아버지가 섭섭해 한다구!”

“히잉….”

“루쓰. 무서워? 무서우면 넌 여기 있어. 나 혼자 할부지한테 인사하고 올게.”

“루, 루시이! 혼자는 위험해에….”

그렇게 말한 루스가 꼭대기 층의 어두컴컴한 복도를 슬쩍 쳐다봤다.

하필 오늘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려와서 음산한 기운이 더해졌다. 결국 루스가 제 블라우스 자락을 꼭 잡고 발만 동동 구르다 루시를 따라 안에 들어갔다.

방안에는 온통 요상한 냄새가 폴폴 풍겼다.

이국의 약재라 생소한 냄새였고, 루시는 그 냄새가 흙냄새라며 좋아했지만 루스는 흙냄새는커녕 구릿한 입 냄새 같아서 싫어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유령이 나올 것 같은 복도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구릿한 입 냄새를 맡는 게 낫겠다 싶었다.

루시는 어쩜 저렇게 용감한 거야. 루스는 여전히 꼼지락꼼지락 블라우스 자락을 쥔 채로 얼른 루시 옆에 가 붙었다.

“할부지! 좋은 아침이에요!”

루시가 눈을 감고 있는 벤자민의 눈앞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인사했다. 루스는 그저 가만히 옷자락만 쥐다, 앞으로 몸을 기울여 벤자민에게 가까이 가는 루시의 옷을 잡아당겼다.

“이, 이제 인사했으니까 가쟈 루시.”

루스는 그냥 이 방의 모든 것이 께름칙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상한 기구들 투성이에다가, 누워 있는 벤자민의 몸에는 기다란 바늘들이 꽂혀있었다.

저게 할아버지라니. 루스의 눈에는 그저 동화 속에서 본 고슴도치 괴물로만 보였다.

“엄마가 그때 뭐라구 했어, 루스. 엄마랑 압빠 없는 동안은 우리가 여기 주인이랬찌. 글구, 주인이니까 우리가 마음대로 쿠키랑 핫초코 먹을 수 있는 건데, 주인이 해야 할 일 안 하면 주인 아니야.”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에.”

“엄마가 할부지랑 루멘 잘 봐 달라고 했짜나! 바보야!”

“나, 나 바보 아니야…가자. 나가자 루시….”

루스가 루시의 옷을 잡아당기자 루시가 귀찮은 듯 그를 살짝 밀었다.

“어휴, 저 겁쨍이! 절루 가! 진짜 뭐가 무섭다는 거야. 자꾸 내 옷 잡아당기지 좀 말라구.”

“가자아-”

“아, 진짜. 잡아당기지 말라니까. 리본 풀린다구.”

루시는 자꾸만 제 옷을 잡아당기는 루스가 귀찮았는지, 루스가 잡아당기던 제 옷자락을 확 잡아 뺐다. 그러자 반동으로 인해 루스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고, 짧은 몸으로 중심을 잡으려던 루스가 뒤로 다시 넘어갔다.

“어어-”

그때였다.

자그마한 루스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루스가 겁먹은 얼굴로 위를 올려다봤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몸집을 보자 창백하게 질렸다.

괴, 괴, 괴물이야!

루스의 눈에 눈물이 폭포처럼 팡! 하고 터졌다.

“으아아아아아앙!”

울음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개미 목소리라 놀림 받던 루스의 목소리가 1층의 중정까지 들릴 정도였다. 아이의 비명 소리를 들은 아르텔과 델라가 가장 먼저 위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도련님! 아가씨!”

뒤이어 다른 이들도 우다다다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자신들의 주인에게 혹여나 큰일이라도 일어났을까, 다들 그 어느 때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

“무슨 일이세요!”

“뭔 일 났습니까!”

다들 사태파악도 못 한 채 허겁지겁 올라왔다.

먼저 달려온 아르텔과 델라가 열린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자, 왜 들어가지 않냐며 다들 그들 등 뒤로 몰려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루스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고 있었고, 루시는 동그래진 눈으로 루스 위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후아아앙, 고슴도치 괴물!”

“와. 할부지 일어났다!”

루스는 자지러지게 울었고 루시는 신기한 듯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루스가 말한 고슴도치 괴물은, 벤자민이었다.

*

“응?”

“왜 그래요, 에스텔라.”

“뭔가 기분이….”

에스텔라는 순간적으로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안한 일이 생겼다는 직감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뭔가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것이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오히려 근거 없는 희망감이 생겼다. 마치 오랫동안 응어리진 뭔가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몸이 안 좋은 겁니까, 에스텔라.”

이자크가 얼른 에스텔라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열을 쟀다.

열은 없는데.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스텔라가 기시감의 정체를 찾아낸 듯 말했다.

“아뇨. 오히려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 드네요. 뭐지?”

메라의 금서를 읽은 이후부터 매일 옅은 안개가 낀 것 같았던 머릿속이 마치 숲속에 온 것처럼 환기되었다.

“에스텔라가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긴 한데. 몸이 안 좋은 건 아니고요.”

“네. 몸은 괜찮아요.”

에스텔라가 제 몸은 건강하다며 알통 보여주듯 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팔뚝에 알통은커녕 앙상한 뼈마디가 이자크의 눈에 들어왔다.

“더 마른 것 같습니다.”

“마르긴요.”

“봐요. 허리가 이렇게 한 줌에 잡히는데.”

어디 허리뿐 만인가. 손목도 앙상하고, 쇄골 부근의 뼈도 도드라지고. 보통 애를 낳은 직후에는 아직 부기가 빠지지 않는 데다가, 임신했을 때 찐 살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는데 오히려 에스텔라는 깡말라 이자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에스텔라의 허리를 감싼 이자크가 그대로 품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요. 불안하게 만들어서.”

“이자크….”

“당신 마른 거,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난 당신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감사한걸요.”

에스텔라가 이자크를 달래듯 손을 들어 그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자크가 에스텔라를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이자크가 말할 때마다 쇄골 부근에 닿은 그의 입술이 에스텔라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묘한 기류의 분위기가 잡히면서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눈을 마주쳤다.

“공주님. 단장님. 말씀하신 대로 시신들을 모두 수습했습니다. 다리도 모두 수복되어가고 있고요!… 어, 음. 죄송합니다. 제가 때를… 잘못 맞췄군요”

막사 안에 델버트가 들어오다가 다시 얼른 뒤돌아 나갔다.

그제야 여기가 마차 안도, 변경 저택도 아니라는 걸 잠시 망각했던 부부가 어흠, 흠, 헛기침을 하며 떨어졌다.

“들어와도 좋아요, 델버트 경.”

에스텔라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밖에서 기다리던 델버트 경이 살짝 눈을 내리깔고 들어왔다.

에테리아 진영에서 무너진 포트먼 요새를 지나, 드와이트 남작이 지키고 있는 서북지대의 마지막 요새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에스텔라와 이자크, 그리고 트라비아에서 파견된 사신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짧게 회의를 했다.

가장 먼저 전사한 어린 병사들과 서북지대 경비병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것. 그 이후 버트랜드가 무너뜨린 강의 다리를 다시 수복하는 것. 그 이후 트라비아 사신과 함께 왕궁으로 올라가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저, 근데 공주님. 왕실 근위 병사들이 여기에 와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델버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버트랜드의 감시라면 걱정 말아요. 저들 모두 근위 병사들이긴 하지만, 키에프 공작이 선별하여 보낸 이들이니까요.”

“키에프 공작?”

이자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나와 놀란 듯한 눈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답니다. 하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그 키에프 공작을 우리 쪽으로 붙게 했다고요?”

“으음, 뭐. 조금의 협박과 회유를 잘 섞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버트랜드의 본심을 알게 해주는 것이죠. 에스텔라가 별일 아니었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말했다.

키에프는 그동안 버트랜드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은 물론, 폭약을 대거 수입해 온 영수증, 그리고 오명을 씌워 몰락시킬 가문들을 구체적으로 적어놓은 명단까지 모두 에스텔라에게 전달했다.

그가 건넨 증거들을 두루 살핀 에스텔라는 키에프에게 정상참작되어 벌을 ‘덜’ 받을 순 있어도 ‘안’받을 순 없을 거라 싸늘하게 말했다. 공작은 상관없다 대답했다.

그가 죄를 뉘우치고 참회했다기보다는, 어차피 끌어 내려질 거, 자신 혼자 끌어 내려질 수만은 없다는 물귀신 작전에 좀 더 가까웠다.

상관없다. 키에프가 넘긴 증거들 덕에 이제 버트랜드를 고소할 수 있을 만한 모든 증인과 확증을 모았으니까.

“하여튼, 버트랜드 그는 믿음이 없어서 문제에요.”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에는 에스텔라의 수많은 희생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버트랜드가 제 편을 견고히 만들지 못해서임도 있었다.

만일 버트랜드가 얍삽한 두뇌 말고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완전히 제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면, 아마 그를 끌어 내리는 데 더 힘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제 편을 제 사람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

혼자만 정상에 올라가 그 아래 사람들은 올라오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땅을 파낸다. 마침내 제가 차지한 자리만 빼놓고 발 디딜 곳은 사라질 거다.

그렇게 되면 경쟁자 없이 혼자 모든 걸 독식할 순 있지만. 발아래 모두 파 버린 땅에 언제까지고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겠는가.

현재 버트랜드는 바닷가의 모래성 꼴이다. 서로 깃발만 빼놓고 야금야금 가져간다 한들, 언젠가는 깃발 꽂힌 모래성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본인은 성이 아닌 모래를 빼가는 손이라 생각하겠다만, 원래 국가와 국왕은 한 몸.

네가 야금야금 빼내온 것은 내 나라가 아닌, 네 명줄이다. 에스텔라가 생각했다.

델버트는 그런 에스텔라를 보면서 맞장구를 치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공주님은 제 단장을 마음고생 시키고 저 싫을 땐 가라, 저 좋을 땐 와라 하는 독불장군인 줄 알았건만, 오늘 이시스까지 행차한 에스텔라를 보고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제 단장은 자기네들 앞에선 그 누구보다 듬직하지만, 에스텔라 앞에서는 어떤 취급을 받아도 그저 좋아 꼬리 흔드는 충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오늘 단장의 모습을 보고는 역시나 자신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자크. 다리가 수복되면 곧장 왕궁으로 갈 생각인데 당신은 어찌 생각해요?”

“바로 왕궁을 점령할 생각입니까?”

“가능하다면, 네.“

“키에프의 왕실 군사로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델버트. 지금 전투 가능한 병사가 몇이나 되나.”

이자크의 질문에 델버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상 키에프 공작이 보낸 왕실 병사들 제외하고는 스물이 될까 말까 하죠.”

“왕실 병사는 천이 넘습니다. 에스텔라.”

적이 많은 인생이라는 건 아는 건지, 버트랜드는 왕실 병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내 나라를 지키는 것보다, 왕좌에 앉아 게걸스레 음식이나 처먹어 댈 자신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에스텔라가 품에서 자그마한 기계를 꺼냈다. 그건 아이들의 인형에서 뜯어낸 오르골 형식의 녹음 재생기였다.

“이자크. 릴리 언니가 아이들에게 준 인형 기억나나요?”

“네.”

“이건 그 안에 있던 거예요.”

태엽을 돌리자 버트랜드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워낙 잡음이 많았지만 대화는 명확하게 들렸다.

한참 동안 그 내용을 듣고 있던 이자크가 조금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릴리는 처음부터.”

“네. 그래서 트라비아의 사신이 와 있는 거랍니다. 이제 곧 트라비아의 원군이 들어올 거예요. 버트랜드도 지금쯤 원조 요청을 했을 테고요.”

“트라비아의 국왕은 이걸 알고 있습니까?”

“그럼요. 그나마 다행인 건, 버트랜드 같은 인간들이 세상에 별로 없다는 거죠.”

만일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버트랜드 같은 인간들이었다면, 아마 인간 문명은 진즉에 몰락했을 거예요. 에스텔라는 여유가 넘치는지 농담까지 해댔다.

그건 아마도 그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이끼 같은 미끌거리고 질척하며 퍼석거리는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일 거다. 에스텔라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렇게나 정신이 또렷하고, 마음이 가벼운 적은 없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그저 단순한 자신감 때문일까?

에스텔라는 순간적으로 왕궁 온실 아래 존재했던 동굴을 떠올렸다. 강가 아래 수몰된 수많은 자신들이 마치 그녀에게 힘을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의 다리는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강 반대편 사람들은 치료가 시급한 병사 일부를 먼저 나룻배에 태워 데려갔다. 마을 사람 대부분은 피신을 했지만, 남은 몇몇은 식량을 조달해 강 너머로 보내주기도 했다.

서북지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카루체 족의 전사들이 이자크와 에스텔라를 찾아왔다.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 되어 버린 자신의 족장을 지게에 지고서.

그들은 이자크에게 무릎을 꿇으며 족장이 강 건너 메시앙의 의사에게 치료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애원을 했다.

“카루체 족의 의원들은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다 합니다. 하지만 왕국의 의사들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저희 족장을 살려주십시오.”

야만족이라고도 불리는 카루체 원주민들은 전통을 계승하는 부족으로서 폐쇄적인 부족이었다. 도시의 의사들처럼 해외에서 수입해 오는 약재나 수술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치료보다는 기도와 의식을 통해 환자를 낫게 하는 방법을 썼었다.

이자크와의 전투로 부상을 입은 족장을 데려다가 제대로 된 응급처치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몸에 신을 받들게 하겠다며 의식을 치룬 결과였다.

“이렇게 족장이 죽어버리면 우리 카루체족의 존속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제발, 족장을 살려주십시오.”

이시스 국왕이 아닌 이자크를 찾아온 이유는 아마 자신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준 유일한 적군의 장수였기 때문일까.

치료만 받게 해준다면 서북지대에서 나가라 해도 군말 없이 나가겠다 말하던 그들의 모습에 에스텔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이자크가 에스텔라에게 물었다.

“사막지대 감옥의 경비병이 현재 공석이죠, 에스텔라.”

큰일이네요. 그곳은 너무 최악인지라 경비병들도 꺼리는 곳이고. 본래 사막 생활 하던 원주민과는 달리 메시앙 사람들은 사막에 취약하죠. 또 근래 들어 무역 상인들을 털어가는 도적 떼도 많아졌다고 하던데.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치료받게 해주마. 이 정도 상처라면 금방 나을 테니 걱정 말거라.“

에스텔라가 생긋 웃더니 이내 사람들을 불러 족장을 나룻배에 옮기도록 했다.

“카루체 족은 인구수가 몇이지?”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족장을 나룻배에 뉘이던 카루체 전사들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 삼 백 정도 될 겁니다.“

이자크가 맞장구쳤다.

“아주 적은 숫자는 아니군요.“

“네, 그러게요. 여보.”

부부가 당최 무슨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전서구 하나가 신문사 건물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사장실 의자에 앉아 불안한 듯 손톱만 물어뜯고 있던 똑같은 습관을 가진 남매는, 전서구가 들어오자마자 얼른 튕겨 오르듯 일어나 비둘기 발목에 묶인 쪽지를 확인했다.

쪽지를 읽어 내려간 남매가 얼른 아래층에 소리쳤다.

“다들 준비한 기사를 발행해!“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기계와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날을 위해 그 비싼 타자기들과 제판 기계들을 수입해오지 않았는가. 이날을 위해 에스텔라가 그동안 외도한다는 오해를 받고 이자크가 독수공방 서러움을 견디며 지내지 않았는가.

그동안 오르테즈 남매와 델라 랭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두 인물이 참아온 수모를 알고 있다. 에스텔라가 몇 번의 회귀를 하면서 온전치 못한 정신을 가질 때까지, 이자크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외면받아온 시간까지.

다 오늘만을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모두를 충격에 빠트리게 할 특종을 뽑아야 한다. 그 특종을 전국에 뿌려야 한다. 메시앙의 모든 백성과 귀족들이, 심지어는 뒷골목의 쥐와 떠돌이 개들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며칠 동안 신문 발행하는 부서의 불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기계는 쉴 새 없이 돌아갔고 신문을 나르는 직원들은 몇 번이고 왕복운동을 하느라 땀에 푹 젖었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나 신문은 그 어떤 때보다 조용하게 날라졌다. 지방으로 날라질 신문을 가득 담은 마차 수십 대가 새벽녘에 출발했다.

그제야 한숨 돌린 신문사 직원들은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수도로 올라오기까지만을 기다렸다.

그 시각 메시앙 왕궁.

버트랜드는 기분이 좋은 듯 왕좌에 앉아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럴만한 것이 오늘은 드디어 트라비아에서 병사들이 들어오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고지가 눈앞이다. 이자크는 죽었고 에스텔라는 싸울 의지를 잃었으며 릴리는 트라비아 왕비로 굳건히 자리매김했고, 이제 자신은 트라비아에 이 나라를 팔아넘기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벤자민에 대한 복수는 성공했으니, 나라를 팔고 받은 돈과 지위로 앞으로 뭘 해야 재미를 느끼며 살지 고민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된 버트랜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라비아에서 온 근위대장이 중앙 홀로 들어왔다.

그는 버트랜드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인사를 올렸다.

“아아, 일어나게나. 오느라 고생했네.“

“국왕 전하께서는 왕비님과 함께 일주일 뒤쯤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트라비아의 국왕과 왕비께서 직접 여기까지 온다니. 허허. 그런 정성까지 안 들이셔도 될 텐데 말이야.”

버트랜드가 기분 좋은 듯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국왕 전하와 왕비님께서는 직접 메시앙의 국왕을 만나고 싶다 하셨습니다.”

“알았네. 병사들을 주둔시키게나.“

근위대장이 꾸벅 인사를 한 뒤 중앙 홀을 빠져나갔다.

바깥에는 그의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위대장을 제외한 다른 부하들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각자 배정된 위치로 병사들 보내라.“

“네. 대장님. 헌데, 정말 국왕 전하께서…. 이래도 되는 걸까요?”

“안 될 게 뭐가 있나. 결정은 국왕 전하와 왕비님이 하신다. 사왕이 아닌 현왕이 우리의 주군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너무 갑작스레 여태까지 보고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변경이 되다 보니. 다들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서요.”

왕실 근위대장과 그의 부하들은 작년에 승하한 국왕과 메시앙의 국왕이 어떤 밀담을 오고 갔는지 알고 있었다. 트라비아 제국의 황제가 될 야망을 꿈꾸고 있었던 사왕은 예기치 못한 병마를 이겨내지 못해 죽고 말았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왕자가 왕위를 이어받았고 왕자비가 왕비가 되었다. 사왕은 죽기 직전까지 제 아들의 두루뭉술한 성격을 걱정했더랬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트라비아 제국으로 만드는 임무를 완수하라던 사왕의 유언을 들은 근위대장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지만 죽은 자는 어디까지나 죽은 자.

이제 자신이 따라야 할 이는 밍숭맹숭하고 두루뭉술하며 평화롭고 다정한 국왕과, 조용하고 존재감 없어 보이나 어느 순간 왕비의 권력을 모두 틀어쥔 왕비였다.

“대장, 지금이라도 저희는 저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귀족들도 모두 반발하고 있을 테고, 사왕의 유언을 무시하는 것은 도리에 벗어나는 것 아닙니까.”

“반발하는 귀족들은 모두 사왕을 쥐고 흔들던 좌파들이야. 국왕께서는 그들을 한풀 꺾으실 셈인 거지.”

아버지의 승하로 갑작스레 왕위에 오르게 된 왕자 부부. 혼란스러워하고 대신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닐 줄 알았건만, 근위대장은 자신이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 했다는 걸 깨달았다.

“허면.”

“우린 거기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우리가 따를 이는 오로지 국왕뿐. 사왕도 아닌 현왕인 거다. 알겠나.”

“예, 대장.”

에스텔라가 왕궁으로 도착하기까지 2주일 전. 메시앙의 우두머리가 바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트라비아 근위대장이 서북지대로 출정한 지 닷새가 되던 날 서북지대를 탈환했다는 호외가 돌았다. 용감한 트라비아 근위대장이 에테리아 군사를 무찌르고 서북지대 탈환에 성공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서북지대에서 몰래 은신하고 있던 야만족까지 포로로 붙잡았다.

포로가 된 카루체 족까지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다시 왕궁 수도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버트랜드에게 전해졌다. 버틑랜드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일에 크게 만족하며 축배를 들었다.

버트랜드와 에스텔라, 두 사람 모두에게 빠르게 흐른 2주일이었다. 누군가는 나라를 버릴 생각에, 누군가는 나라를 지킬 생각에 각자의 설렘을 가진 채였다.

2주일이 지나자 메시앙 왕궁에 트라비아 국왕 부부 내외가 도착했다.

버선발로 달려나가 뭘 여기까지 또 왔냐며 맞이한 버트랜드에게, 트라비아 국왕은 메시앙의 국왕을 만나 뵙기 위해서지요. 하며 유하게 미소 지었다. 옆에 서 있던 릴리 역시 드물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제 아버지에게 마음을 여는 듯했다. 적어도, 버트랜드는 그리 생각했더랬다.

트라비아 국왕 부부와 식사를 하던 버트랜드에게 보좌관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전하! 전하!”

“지금 트라비아 제국 황제 부부와 식사 중인 거 안 보이는가.”

“크, 큰일 났습니다. 전하.”

그렇게 말한 보좌관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하나 건넸다. 신문은 왜. 하며 귀찮은 듯 고개를 쭉 빼 신문을 넘기던 버트랜드가 다시 잽싸게 신문을 낚아챘다.

“이게 뭐야.”

“오, 오늘 아침 수도에 퍼진 신문입니다. 전하. 게다가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방부터 단체 봉기가 시작되어 백성들이 영주 성에 쳐들어가고 난리도 아니라고 합니다.”

[선왕의 독살 미수 사건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버트랜드 국왕의 배신]

신문지 사이에 슬며시 끼워져 있는 종이. 붉은 잉크로 써진 제목 아래에는 벤자민 선왕을 독살한 것은 변경백이 아니며, 그날 일에 대해 증언할 결정적 목격자가 나타났고, 그 목격자는 현 국왕을 가리켰다는 글이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버트랜드가 그동안 나라를 판 증거들과 증인들이 모두 공주의 손아귀에 있으며, 곧 돌아올 에스텔라 공주가 국왕을 직접 고소할 거라는 이야기까지.

버트랜드는 종이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당장 가서 신문사 놈들 연행하고 신문 회수해! 아침에 신문이 발행될 텐데 이제까지 뭘 한 거야!”

“바로 병사들을 보내긴 했는데, 오늘 신문사에 누구도 출근하지 않아 빈 건물이라 합니다. 아무래도 작정하고 일을 벌인 것 같습니다. 오르테즈 남매의 저택으로 병사들을 보냈지만 문을 틀어 잠그고 농성 중이라 합니다.”

신문을 발행하기 전 무조건 검문을 받아야 하는데, 그 눈을 피하기 위해 심의에 걸리지 않을 신문을 만들고, 그들이 알리려는 진짜 기사는 혹여라도 잉크가 마르지 않아 번질 것을 염려해 사이에 끼워 넣는 유선지에 인쇄한 것이었다.

“시간 차이를 두고 신문을 발행한 건지, 지방에서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킨 이유도 이 신문 때문입니다. 전하.“

잠시 격분했던 버트랜드는 제 앞에 놓인 와인을 단번에 들이키더니, 이내 안정을 되찾은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그깟 신문 하나로 내가 여기서 무너질 리 없지 않느냐. 종이 쪼가리에 불가해. 지방에 트라비아 원군을 보내면 잠잠해질 거다. 공주는 어떻게 되었지? 오늘 수도로 돌아왔을 텐데.”

“근위대장의 호위를 받으며 왕궁으로 올라오는 중이라 합니다.”

“시체는?”

“근위대장이 확인한 결과, 죽은 것이 맞다 합니다.”

“민심이 잠잠해질 때까지 공주를 가둬놔야겠구나.“

어차피 기사는 기사일 뿐. 버트랜드는 소란이 사그라들 때까지 에스텔라를 감옥에 가둬 둘 생각이었다. 변경백의 저택이 아닌 이 왕궁의 감옥에.

“에스텔라가 진정 내게 대들 생각이 없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지.”

그러자 맞은 편 옆자리에 앉아있던 릴리가 물었다.

“어떻게 되어가는 상황인가요, 전하. 일에 차질이라도 생겼다는 건가요?”

“아아,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왕비님. 아니, 이제는 황후가 되실 텐데. 허허. 곧 사그라들 잡음일 뿐입니다.”

이미 트라비아 군사들이 대거 이곳에 들어왔고, 각 검문소를 장악했을 것이며 광장과 도시에도 주둔하며 메시앙 백성들을 통제하기 시작했을 터.

이제 와서 기사가 터지고 진실이 알려진다 한들, 백성들의 분노 따위는 감히 버트랜드를 끌어내릴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점심 식사가 끝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가 왕궁에 도착했다.

아직 그녀는 신문에 난 기사를 모르는 듯해 보였다.

마차에서는 이자크와 그의 직속 기사단 시신이 들어있는 관들이 꺼내졌다. 공주의 남편이 죽게 되면 왕실에서 장례를 치러야 하는 것이 메시앙의 예법이었다.

오동나무로 급하게 만들어진 열 몇 개의 관들은 공주 뒤에 일렬로 놓아져 있었다.

“이 에스텔라, 나라를 지키다 순직한 메시앙의 수호자들을 데리고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왕좌에 앉아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스텔라를 내려다보던 버트랜드가 에스텔라에게 물었다.

“시신은 잘 수습했느냐.”

“예. 덕분에요.“

“…오늘 아침 불온한 기사가 수도를 어지럽히고 있다. 수도뿐만 아니라 메시앙 전체를. 네가 날 고소한다는 기사더구나.”

그러자 에스텔라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물론 나는 네가 한 약속을 잊지 않는다 에스텔라. 이자크 경의 시신을 수습하게 해준다면 너 역시 더 이상의 분란을 만들지 않기로 했었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에스텔라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민심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널 격리해야 할 것 같다. 이해해주겠지. 금세 들끓다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지는 것이 민중이다. 그때까지만 날 위해 참아다오.”

“이자크의 장례식은요. 예법대로라면 공주의 남편은 이곳에서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자 버트랜드가 태연하게 물었다.

“일주일 정도야 참을 수 있지 않겠니? 이미 죽은 남편과 앞으로 살아갈 세 아이 중에서 고르라면 주저 없이 후자를 골라야 현명한 공주 아니겠느냐.”

마지막까지 버트랜드는 최악의 인간이었다.

“….”

“여봐라. 공주를 안내하지 않고 뭐 하는 게냐.”

병사 중 하나가 에스텔라를 감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가까이 갔을 때였다.

에스텔라가 조만간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웃겨 죽겠다는 듯 웃다가도 허탈한 모습으로 버트랜드를 바라봤다. 버트랜드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공주가 드디어 미친 게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에스텔라는 미친 듯이 웃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했다.

“마지막까지 대부님은 최악의 인간이십니다.”

“….“

“어찌 제게 이러신단 말입니까. 제가 알던 어린 시절의 대부님은 모두 가짜였단 말입니까. 절 위해 다리까지 희생하신 그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것입니까. 그것 모두 연기였습니까.”

에스텔라에게 버트랜드는 최고의 대부였으며 최악의 대부였다.

버트랜드의 진심을 알기 전까지는 그를 세상 누구보다 의지하고 믿었다. 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버트랜드였었다.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그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에스텔라는 끝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마지막으로 버트랜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말했다.

“일주일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뭐?”

“들끓는 민심을 잠재우려면 방법이 하나뿐 아니겠습니까. 불온한 싹을 잘라내는 것.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

여기서 불온한 싹은 당신을 말하는 거랍니다. 버트랜드. 에스텔라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침묵하던 관들이 일제히 열렸다.

피투성이 된 시체들이 관에서 벌떡 일어났다.

*

트라비아 근위대장이 서북지대로 향했을 때였다. 그는 애초부터 자신들이 그저 들러리를 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메시앙의 새 국왕 될 사람은 워낙에 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평범한 방법으로 즉위할 생각이 없다는 왕비의 말을 듣고는 한참 동안 황당해하던 기억이 있다.

도대체 어떤 자가 이웃 나라 국왕까지 이용해 연극판을 벌인다는 말인가. 조금, 이상한 사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근위대장은 그날 처음 에스텔라를 만났다.

이 사람이 차기 메시앙의 국왕이 될 공주라고? 굉장히 작은 여인이었다. 마르기도 심하게 말라 과연 군주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혹은 제 남편에게 왕위를 넘기고 왕비가 될 생각인가. 하지만 저보다 배는 덩치 큰 남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주도권을 쥐는 공주를 보며 마냥 꽃밭에서 자란 공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왕실 병사는 천이 넘어요. 아마 버트랜드는 주권이 트라비아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경계를 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만큼 제 주변에 두는 병사들도 많아지겠죠. 왕궁 중앙 홀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는 50이 최소입니다. 그를 잡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절반이라도 되어야 해요.”

그렇게 말한 에스텔라는 제 남편에게 방긋 웃으며 다른 기사단과 함께 관에 들어가 있으세요, 이자크. 라고 말했다.

제 남편 보고 관에 들어가 있으라 말하는 아내는 또 처음일 거다. 이미 메시앙에서 이자크와 그의 기사단은 순직한 이들로 알려졌을 것이고, 그 누구도 관 속에 든 시체를 샅샅이 뒤적대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뭘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생각하던 트라비아 근위대장은 자신들을 마중 나왔다는 명목하에 감시하는 메시앙 병사들을 보며 버트랜드는 정말 그 누구도 절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맨 처음 관을 열어보던 메시앙 병사들도 악취 나는 피를 뒤집어쓴 시신을 보더니 더 이상의 검문은 하지도 않은 채 얼른 그들을 들여보냈다.

에스텔라는 관 속에서 돼지 피에 절여진 남편과 그의 부하들에게 조금 미안함을 느꼈다. 매우 역할 텐데 말이지. 여름이 아닌 겨울이라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걸까.

수도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소까지 통과한 에스텔라가 트라비아 근위대장에게 말했다.

“트라비아 근위대장께서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궁까지는 알아서 갈 테니 그대는 이제부터 버트랜드와 관련 있는 귀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데려와 주세요.”

에스텔라는 질질 끄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보통 왕궁 내 세력 교체라 함은 최소 몇 달, 최장 몇 년이 걸리는 것 아니던가. 에스텔라는 그렇게 오랫동안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은 좋지 않으니 일주일 안에 끝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렇게 근위대장은 남의 나라에 와서 남의 나라 귀족들을 꾀어내어 왕궁으로 데려갔다.

버트랜드의 편에 들어 야금야금 나라를 파는 것에 일조한 귀족들은, 트라비아 근위대장이 나타나자 드디어 때가 되었냐며 신나서 따라나섰다.

그사이 에스텔라는 왕궁에 도착했고, 자신을 맞이하는 버트랜드 앞에 관들을 옮겨놨다.

아주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길 바랐다.

이자크와 그의 기사들이 진짜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어린 병사들이 죽은 것은 사실 아닌가. 이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관은 서북지대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강 건너 목수들이 만들어 나룻배에 실어 보낸 수백 개의 급조된 관 중 남는 것이었다.

아직도 서북지대에서는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출정 명단과 그들의 신원을 파악하여 하나하나 관에 실어 그들의 가족들에게 보내기 위해서다.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죽음.

오로지 버트랜드의 욕심으로 인해 나라를 지키다 죽어 버린 영혼.

아주 조금이라도 애도하는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잠시 관을 바라보다 이내 하는 말이 불온한 기사가 항간에 떠돈다는 것.

그에 에스텔라는 자신이 또 한 번 멍청한 생각을 했다는 걸 자각했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런 인간에게 일말의 양심을 기대했다니.

저건 사람이 아니라고.

악마라니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그녀는 성질이 급하다. 질질 끄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이제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잠깐 여유를 가지며 쉬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불온한 싹은 당신을 말하는 거야, 버트랜드. 에스텔라의 말과 동시에 관속에 누워있던 이자크와 열 몇의 기사단이 무기를 든 채로 걸어 나왔다.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시체가 걸어 나온다며 대신들은 혼비백산해 주저앉았다.

트라비아 국왕도 이건 예상치 못한 것인지 깜짝 놀라 얼른 릴리를 쳐다봤다. 릴리가 남편에게 살짝 귀띔했다.

원래 에스텔라가 이런 걸 좋아해요. 깜짝 놀라게 하기요.

왕실 병사들이 얼른 버트랜드를 호위하며 그들에게 칼을 겨눴다. 버트랜드가 기가 막힌다는 듯 분노하여 소리쳤다.

“에스텔라.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그것참 다행이네요. 당신을 실망시켰다는 건 제 할 일을 잘하고 있다는 거니까.”

“이런 점은 참 네 아비를 닮았어. 형님 역시 항상 너처럼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얘야, 에스텔라. 이곳엔 이미 트라비아 국왕 부부가 와있단다. 트라비아 원군이 있다는 소리다. 전쟁터에서 굴러먹다 온 열 몇 명이 왕실 병사들과 원군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냐.”

때마침 귀족들과 함께 트라비아 근위대장이 도착했다.

버트랜드는 그를 보며 에스텔라를 가여워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이자크 경이 살아있다니. 참으로 축하할 일일세. 하지만 동시에 안타깝기도 하군. 공주가 제 분수도 모르고 미쳐 날뛰지만 않았으면 둘이 어디 숨어서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돼지 피를 뒤집어써 제 피를 흘려도 모르겠구먼. 차라리 전쟁터에서 죽었다면 명예만은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버트랜드가 그리 말하며 트라비아 근위대장에게 소리쳤다.

“근위대장! 저것들을 당장 포박하시오! 감히 트라비아 제국에 반기를 드는 반역자이니!”

버트랜드의 명령에 트라비아 근위대장이 제 병사들과 함께 에스텔라 쪽으로 향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에스텔라 뒤로 가 서서는 멀뚱멀뚱 공주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당황한 버트랜드가 얼른 트라비아 국왕과 왕비를 쳐다봤다. 그 눈빛은 꼭 지금 뭘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거냐, 하는 눈빛이었다.

릴리가 말했다.

“말했잖아요, 아버지. 저는 메시앙의 국왕을 만나러 왔다고요.”

그렇게 말하자 에스텔라 진영에서 구석에 가만히 있던 트라비아 사신이 걸어 나와 협정문을 읊기 시작했다.

트라비아 왕비와 에스텔라 공주가 협상한 협정문은 트라비아에게 팔았던 메시앙의 땅덩어리들을 모두 공주의 사비로 사들이며, 동맹국을 맺어 서로를 불가침 한다는 내용이었다.

“뭐?”

그제야 버트랜드는 그들이 말하는 메시앙의 국왕이 자신이 아닌 에스텔라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릴리가 자신을 배신할 줄 몰랐던 것이다. 당황한 버트랜드가 국왕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두루뭉술하기로 소문난 트라비아 국왕은 제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분개한 버트랜드가 소리쳤다.

왕실 병사들은 모두 나를 호위하라!

어찌 되었건 현재 국왕의 말을 무시할 순 없으니 왕실 병사들은 비상사태가 되었다.

버트랜드의 외침에 중앙 홀에 주둔하고 있던 일부 병사들은 그대로 에스텔라와 이자크에게 달려들었다. 뒤에 서 있던 이자크가 얼른 에스텔라를 제 등 뒤로 보내며 달려드는 이들의 급소를 노려 기절시켰다.

“당장 가서 병사들을 더 데려와!”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병사 하나에게 소리치자 병사가 얼른 뒷문을 통해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 홀에 수많은 왕실 병사들이 쳐들어 왔다.

차라리 죽일 생각이라면 손쉽게 베어버리면 될 일인데, 이자크는 더 이상의 살생은 안된다는 에스텔라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꽤나 고생했다.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이들을 하나하나 죽이지 않고 기절시키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었다.

결국 고통 없이 기절시키는 것에 이골이 난 이자크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덤비는 놈들은 봐주지 않고 죽탱이를 날리거나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잘만 달려들던 왕실 병사들은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채 제 동료들을 마구잡이로 주어 패는 그를 보며 주춤대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놈마다 억, 단말마와 함께 그대로 땅에 픽픽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병사들은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에스텔라는 물론 트라비아 병사들까지 모두 에워쌌다. 무기를 든 채로 눈치만 보며 언제 달려들까 재고 있는 듯했다.

에스텔라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절반만 서북지대로 보냈어도 아마 전쟁에서 이겼을 겁니다. 나라의 존속보다 본인의 존속을 택하다니. 이 얼마나 수치도 모르는 인간 아닙니까.”

그러든 말든 버트랜드는 얼른 메시앙 근위대장에게 저것들을 보는 앞에서 숙청하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있는 대로 악을 쓰는 모습은 충분히 궁지에 몰린 생쥐 같았다.

메시앙의 병사들과 대치하던 트라비아 병사들은 제 군주가 신호만 준다면 당장에 싸울 의향이 충분했다. 일국의 병사들이 감히 국왕 부부에게 칼을 겨누다니. 전쟁 선포와도 다름없었다.

트라비아 근위대장이 자국의 왕에게 말했다.

“국왕 전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으음, 릴리. 어찌 생각합니까?“

그러자 릴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에스텔라. 어찌 생각하니?”

이게 무슨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 놀이도 아니고. 전투를 눈 일촉즉발의 상태에서 저들은 너무 태평한 게 아닌가 생각했더랬다.

특히나 공주는 뒷짐까지 지고는 메시앙 병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는데, 여유가 넘치는 듯한 행동에 보는 이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한참 동안 자신을 둘러싼 병사들을 둘러보던 에스텔라가 물었다.

“정말 싸우고 싶은가? 병사들 뒤에 숨어 나라가 아닌 자기를 지키라 말하는 저놈을 정말로 지키고 싶은가? 근위대장. 말해보게. 저 인간이 국왕으로서 지킬 가치가 있던 자였나?”

“가치가 있든 없든, 저는 근위대장으로서 국왕을 지켜야 합니다. 본인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국왕은 지켜야 합니다.”

“아, 이런 꽉 막힌 사람 같으니라고.”

에스텔라가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께서도 자네의 이런 점은 고쳐야 한다고 하셨는데. 어쩜 나이를 먹어도 융통성 없는 고집은 여전하군.”

“유감입니다. 공주님.”

“헌데 자네는 국왕의 호위 아닌가. 버트랜드는 엄연히 따지자면 국왕은 아니지. 어디까지나 대리 국왕. 직계 후손인 내가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곧바로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법. 오히려 반란은 저쪽이 아닌가.”

일전에 귀족 회의에서 후계권을 다시 얻어가겠다고 말한 에스텔라였다.

그러자 에스텔라가 구석 어딘가에 대신들과 같이 찌그러져 있는 키에프 공작을 불렀다.

“키에프 공작! 내가 가져오라던 문서는 가져왔습니까?”

모두들 숨죽인 채로 멈춰있는 가운데 구석에서 낑낑대며 나온 키에프 공작이 품에서 문서 하나를 꺼냈다.

근위대장이 얼른 그를 막아섰지만 에스텔라가 무해하다며 양손을 들어 보이곤 말을 이어나갔다.

“키에프 공작. 그 문서를 근위대장에게 넘겨주세요.”

키에프 공작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그저 두려울 뿐인지. 항상 보여주던 근엄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손을 덜덜 떨며 문서를 넘겼다.

건네받은 것을 펼친 근위대장이 문서를 살펴 내려갔다.

그건 오래전 에스텔라가 버트랜드에게 국왕 자리를 임시로 넘기며 작성한 문서였다. 공주가 즉위를 원할 시 대리 국왕과 조율을 통해 언제든 가능하다고 써져 있었다.

하지만 에스텔라가 즉위를 원할 때마다 갖은 방법을 써 그 의지를 꺾었다.

“명확히 명시되어있는 것이 보입니까. 근위대장. 공주가 즉위를 원할시. 원로 귀족이 모두 허락을 할 경우 대리 국왕은 언제든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렇게 말한 에스텔라가 원로 귀족. 흐음. 원로 귀족의 허락이라. 중얼거리더니 다시 한번 키에프 공작을 불렀다.

“키에프 공작! 원로 귀족은 당신과 올란도 후작, 오르테즈 후작, 변경백 디에스 가문, 버트랜드 대공 가문이 맞지요?”

“예. 공주님.”

“올란도 후작은 죽었고, 오르테즈 후작 가문은 몰락했고. 디에스 가문 역시 몰락했으나 그 후계자가 내 남편이고. 버트랜드 대공 가문의 현 가주 역시 내 자매와도 같은 릴리 언니니. 이제 키에프 공작만 허락하면 되겠네요.”

“저야 공주님의 신하로서 당연히 찬성하는 바이지요.”

키에프 공작의 말에 버트랜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뿌듯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려 근위대장을 바라보던 에스텔라가 그에게 말했다.

“근위대장은 내가 열아홉이 되던 해까지 이곳에서 날 봤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알 거야. 또한 나와 아버지가 버트랜드를 얼마나 믿고 의지했는지도. 당신은 디에스 변경백의 동료이기도 했기에 그가 반란을 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겠지.”

근위대장은 실력이 뛰어난 이이기는 했으나 두려움이 많은 이였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고집이 세다. 평화를 좋아하는 척하나 사실 진실에 맞서기를 싫어하는 이다.

성군의 밑에 있다면 그에게 충성을 다할 좋은 신하가 되었겠지만 버트랜드 밑에서는 농땡이나 피우는 근위대장 말고는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자네 역시 사실은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었을 거야. 내가 자네의 능력을 아는데, 까막눈인 양 모르고 있을 리는 없거든. 자네가 지키려는 저자가 선왕을 독살하려 했고, 그 죄를 당신 전우에게 뒤집어씌었고. 나라를 팔 생각에 그저 행복해하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이유는 본인의 무능을 모른 척하고 싶음도 있었던 것 아닌가.”

근위대장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피 튀기고 싸운다 한들, 어차피 왕은 내가 될 거야. 장담하지. 안타깝게도 10년 가까이 왕실에서 등 따시고 배부르게 놀고먹은 자네 부하들과 다르게, 내가 데리고 있는 이들은 전혀 녹슬지 않은 이들이거든.”

우리 허여멀건 하고 말랑한 왕실 근위 병사들이 과연 내 사람 중 몇이나 무찌를 수 있을까. 공주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메시앙의 근위대장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공주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쪽수로만 밀어붙인다면 아주 잠깐 저들을 멈추게 할 수는 있겠지만.

선왕 재위 시절의 실력 있는 예전 기사들은 버트랜드의 즉위 이후 대거 빠져나갔고, 그나마 남아 있는 이들 역시 8년 가까이 정체되어 예전만큼의 기량을 뽐내지도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전투를 하게 되면 버트랜드가 도망갈 수 있는 시간 정도만 벌어다 줄 수 있겠지. 트라비아 국왕 부부도 있는 자리. 이미 충분히 전쟁이 나도 무방한 상황.

이미 자신의 선택은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애초부터 버트랜드의 명령에 병사들을 소집하지 말았어야 했거늘.

에스텔라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아직 그 정도 실수는 바로잡을 수 있어.”

근위대장이 후 한숨을 내쉬며 이자크와 그의 부하들 주변에 널브러진 제 병사들을 쳐다봤다. 잠시 뒤를 돌아 버트랜드를 쳐다보자 버트랜드가 버럭 소리 질렀다.

“뭘 보고 앉아있나. 얼른 저것들을 공격하라니까! 지금 설마 저딴 말에 현혹된 것이냐.”

“8년 동안 왕실에서 키우는 가축처럼 잘만 먹고 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진짜 인간인지, 가축인지 모르겠더군요. 그동안 가축들 보살피느라 고생하셨소.”

“뭐, 뭐?”

그렇게 말한 메시앙의 근위대장이 곧 제 병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버트랜드가 너희들 주인은 나라며 어딜 감히 내 명령을 무시하냐 소리쳤지만, 근위대장은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질 테니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라 말했다.

결국 눈치 보던 왕실 병사들은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 역시 전투태세를 풀었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근위대장이 에스텔라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신, 가축으로 지낸 탓에 인간으로서 신의를 저버릴 뻔했습니다. 부족한 저를 부디 용서하지 마시고, 처벌해주십시오.”

근위대장이 제 검을 에스텔라에게 바치며 말했다. 에스텔라는 그가 건넨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양쪽 어깨에 기사 작위를 내려주며 말했다.

“저 반역자를 잡아 내 앞에 데려오세요.”

에스텔라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버트랜드가 병사들을 헤집고 왕좌에서 내려왔다. 뒷문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워낙 많은 인원이 빽빽하게 중앙 홀에 들어찼기 때문에 움직이기 여간 어려웠다.

길을 비켜, 감히 누구 앞을 막는 거야!

소리쳤지만.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근위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반역자를 포박해 감옥으로 이송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목석같던 병사들이 버트랜드를 둘러쌌다.

버트랜드는 파리처럼 너무나도 하찮게 잡히고 말았다.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에스텔라는 더 이상의 희생을 보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 낫다 생각했다.

버트랜드는 잡혀가면서 제 딸에게 소리쳤다.

“릴리, 어찌 네 아비를 배신하냔 말이야! 그동안 나로 인해 온갖 혜택을 다 누렸으면서, 어찌 이제 와서 박쥐 새끼인 양 제 아비를 버리고, 천륜을 저버리겠다는 게냐!“

그의 말에도 릴리는 코웃음 쳤다. 저런 인간의 혈육이라는 것 자체가 끔찍이도 싫다. 한때는 좋은 아버지였으나 이제는 남보다도 못하다.

“천륜이요? 그걸 먼저 저버린 건 아버지 아닌가요. 날 자식이 아닌 도구로 생각했을 때부터 난 당신의 딸이 아니었어요. 날 트라비아에 팔아넘기듯 보냈을 때부터. 난 당신 딸이 아니었다고요. 내 마음을 이용해 이자크 경과 에스텔라에게 상처를 줬을 때부터! 난 당신 딸이 아니었어요!

후에 에스텔라에게 말하기를 그날 릴리는 처음으로 고함을 질러봤다고 한다.

버트랜드는 원망의 눈물을 흘리며 저를 바라보는 딸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악뿐이었다.

병사들에게 연행되어 가며 에스텔라를 지나가던 도중, 버트랜드가 에스텔라에게 말했다.

“날 처형할 것이냐? 내가 한 증거들이 뭐가 있다고. 넌 그저 신문을 이용해 무식한 백성들을 선동한 것뿐이야.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네가 정의라고 믿는 것 아니냐.”

“선동인지 아닌지는 법정에서 봅시다.”

병사들은 다시 버트랜드를 끌고 갔다. 버트랜드는 비틀대며 이자크를 한번 흘겨봤다. 이자크는 그런 버트랜드를 아무런 표정 없이 쳐다봤다. 분노라는 감정을 가지기도 아까운 인간이다.

왕좌가 공석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러웠던 왕궁은 버트랜드가 끌려나간 이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먼 길 와줘서 고마워, 언니.”

에스텔라가 피곤한 듯 머리를 넘기며 릴리에게 다가가 포옹했다.

“인형, 고마워.”

“다행이다. 끝까지 눈치채지 못할까 봐 걱정했거든.“

“눈치채지 못했으면 언니한테 도와달라 서신을 보내지도 않았을 거야.”

에스텔라가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놀란 이자크가 얼른 에스텔라를 부축했다. 에스텔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축 늘어졌다.

“그냥 긴장이 좀 풀렸나 봐요.”

긴장이 풀리기도 풀린 거지만 그동안 에스텔라는 무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릴리 역시 그런 에스텔라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타박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였어. 에스텔라.“

“하아, 무리하긴 했나 봐.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네. 미안해. 조금 더 대화하고 싶었는데….“

들것을 가져오자 에스텔라를 그곳에 뉘인 이자크가 말했다.

“에스텔라. 오늘은 이만 돌아갑시다.”

걱정스러운 그의 얼굴에 에스텔라도 오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버트랜드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것만으로도 오늘 할 일은 다 한 것이리라.

*

아르텔과 유모, 그리고 저택에 지내고 있던 델라 랭까지. 모두들 경악하는 얼굴로 에스텔라와 이자크를 맞이했다. 돼지 피를 뒤집어써 주변에 파리가 웽웽 날아다니는 이자크. 그리고 들것에 실려 들어오는 에스텔라.

유모가 기겁하며 얼른 이자크에게 수건을 건넸다.

“이,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세요?”

아르텔은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고 델라 역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에스텔라에게 물었다.

에스텔라는 세 사람의 끈질긴 추궁에도 다음에, 다음에 얘기하자. 하며 말을 삼갔다. 지금은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스레 늘어놓기보다는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달려와 엄마에게 매달릴 줄 알았던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쌍둥이는 어디에 있는 거야? 요 녀석들 엄마랑 아빠가 보고 싶지도 않은가.”

힘없이 축 늘어졌던 에스텔라가 장난스레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자크가 얼른 부축했다. 들것에서 내려온 에스텔라는 이자크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중정에서 아이들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한 에스텔라는 이자크와 함께 중정으로 향했다.

“요 녀석들! 엄마랑 아빠가 돌아왔는…!”

대략 한 달 만에 엄마 아빠를 보는 건데 소꿉놀이가 더 중요한 건가 싶었던 에스텔라는 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어흥! 소리와 함께 중정에 뛰쳐 들어간 에스텔라는 잠시 한동안 멍한 얼굴로 정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어? 엄마다! 아빠다!”

“에스텔라. 몸도 성치 않은데 그렇게 뛰어가면….“

뒤이어 따라 들어온 이자크 역시 놀란 눈치였다.

“…아빠?”

웃을 때 눈가에 주름이 자글해지던. 특이한 보조개를 가지고 있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웃으면 그 보조개를 하염없이 만지작대던. 녹색 눈동자를 가진. 마침내 그 눈동자를 마주 볼 수 있게 된. 그리웠던 얼굴.

에스텔라가 숨을 작게 헐떡이며 눈을 깜빡였다.

“아빠.”

“원. 녀석도. 스물일곱이나 되어서는 아직도 아빠라고 부르니.”

루멘을 안고 있던 중년의 남성은 잠시 아이를 요람에 뉘이며 말했다.

“흐, 흐으, 아빠아!”

에스텔라는 그대로 벤자민에게 달려가 안겼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그때와 다름없이 칭얼거리는 딸의 등을 툭툭 달래며 말했다.

그때는 이자크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건 곧 죽어도 못 보겠다 울던 녀석이, 이제는 저와 이자크를 쏙 빼닮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울고 있다.

“그래. 욘 석아. 아빠다.”

“아빠아, 흐어, 아빠. 내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으나 목이 자꾸만 매 말할 수가 없었다. 에스텔라는 그렇게 아빠, 내가, 진짜, 라는 세 단어만 계속해서 반복할 뿐이었다.

몇 년 만에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는 건가. 에스텔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아 엉엉 눈물을 흘리다가도 푸흐 웃음을 터트리며 벤자민과 눈을 마주했다.

“아빠. 보고 싶었어요. 흐윽.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요.”

벤자민은 제 딸이 울먹거리며 말하자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그래. 안다. 알다마다. 벤자민의 말 한마디에 에스텔라가 아버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그동안 혼자서 모든 걸 견뎌왔을 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고생했다. 내 딸. 고생했어.”

“아빠아아아….”

그때 에스텔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루시와 루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에스텔라는 제 몸 안의 모든 수분을 눈물로 빼냈을 것이다.

“엄마. 아빠 아니야. 할아부지야. 아빠는 이자크고 엄마는 에스텔라. 할아부지는 벤자민이야.”

“아빠는 쪼기에 있잖아.”

그 말에 에스텔라가 눈가 가득 찬 눈물을 훔치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게. 할아버지였네. 그동안 엄마 아빠 없이 잘 지냈어?”

아이들을 꽉 껴안으며 에스텔라가 묻자 아이들은 씩씩하게도 당근이지! 하며 소리쳤다.

“내가 루씨랑 루멘 지켰어!”

루스가 자랑스레 말하자 벤자민이 풉, 웃으며 동그란 머리통을 한번 쓰다듬었다.

“루스 얘는 날 보자마자 고슴도치 괴물이라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단다.”

“할아부지 말하지 말랬짢아요!“

“아이고 할애비가 실수했다. 미안하구나.”

“치.”

아이들과 투닥거리던 벤자민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자크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당황하던 이자크가 얼른 다가와 벤자민에게 인사했다.

“장인어른. 이런 몰골로 인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허허. 괜찮네. 내 이자크 경을 사위로 들이게 될 줄은 몰랐어.”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며 벤자민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자크 역시 따라서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이자크.“

에스텔라가 요람 쪽으로 가더니 손짓을 했다. 이자크가 얼른 그쪽으로 향했다.

“루멘이에요. 당신이 지어준 이름.”

이자크는 요람에서 꿈틀대는 작은 생명체를 바라봤다. 에스텔라는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길 바랐다. 너무 귀엽다, 혹은 낳느라 고생했다 기타 등등. 그런데 처음으로 셋째를 보는 건데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것 아닌가.

혹, 몸이 좋지 않아 아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걸까. 하며 그를 유심히 살피는데.

“…이자크 울어요?!”

“아닙니다. 울긴요. 기쁜 일에 제가 왜 웁니까. 그저 잠깐. 감정이 복받친 것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훔치는 이자크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에스텔라가 그를 꼭 껴안았다. 산통을 깬 건 벤자민이었다.

“얘들아. 다 좋은데, 일단 씻으려무나.“

악취가 진동을 한단다. 벤자민의 말에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얼른 욕탕으로 향했다.

*

부부는 같은 욕탕에 들어갔다. 이자크는 튼 살이 생긴 에스텔라의 몸에 오일마사지를 해주며 아직 붓기가 덜 빠진 다리를 천천히 주물러줬다.

“이자크. 당신 팔도 성치 않은데 괜찮아요.”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에스텔라가 앉아있던 타일에서 내려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이자크의 가슴팍에 등을 대고 기댄 에스텔라가 그의 품속에서 잠시 한동안 눈을 감았다.

“이제 거의 다 끝나가네요. 물론 아직 밝혀내야 할 것도 알아내야 할 것도 산더미지만.”

이자크는 가만히 에스텔라를 껴안았다. 따듯한 물과 거품 덕에 긴장했던 두 몸뚱이가 점점 느슨해졌다.

“내가 과연 좋은 국왕이 될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에스텔라.”

“난 잘 모르겠어요. 흐음. 이자크가 왕 할래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세요, 에스텔라.”

농담도 못 해. 에스텔라가 괜히 투덜거렸다. 이자크가 잠시 그런 에스텔라를 내려다봤다. 물에 젖은 동그란 정수리에 제 턱을 올려놓더니 이내 힘주어 그녀를 꽉 껴안았다.

“왕이 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건 당신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왕관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아는 사람만이 국왕이 될 자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버트랜드는 왕관의 무게를 몰랐다. 그 왕관이 그저 보석과 금으로만 이루어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국왕의 왕관에는 금과 보석만이 달려 있지 않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가 짊어져야 할 수많은 생명의 무게도 달려있다.

“당신의 모든 선택을 존중할게요.”

“이자크….“

에스텔라가 아련한 눈빛으로 뒤돌아 이자크를 쳐다봤다.

그녀의 모든 선택을 존중한다는 남자.

사랑하는 내 남편.

에스텔라가 이자크에게 입을 맞췄다.

“그럼 우리 넷째 어때요.”

“그건 안 됩니다.”

당신 몸이 다 낫기 전까지는. 적어도 6개월 동안은 수절 생활합시다. 아니죠. 적어도 당신이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는 한동안 금욕생활합시다. 이건 당신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에요 에스텔라.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좌절했다.

에스텔라는 생각했다.

하루빨리 버트랜드를 법의 심판을 받게 한 뒤에, 국왕 자리에 올라야겠다고.

그건 그녀의 욕구불만 때문만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물론, 아주 조금의 지분은 차지하겠지.

자신은 고작 욕구불만으로 인해 국왕 자리에 오르는 그런 왕관의 무게도 모르는 멍청이가 아니라며 에스텔라가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

며칠 지나지 않아 수많은 사람이 법정에 모였다. 참관하고 싶은 자는 모두 참석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바글바글 모였다.

다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법원 앞에 모여 안에서 결과를 전달해줄 이만 애타게 기다렸다. 재판은 꽤나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소년 하나가 법정 밖으로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공주님께서 승소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와아아! 함성 소리가 법원 앞을 가득 메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혔던 법원 문이 열리고 버트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왕을 배신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나라와 백성까지 배신한 희대의 쓰레기. 포승줄에 묶여 감옥으로 연행되는 버트랜드에게 사람들이 돌을 던져댔다.

고급 고기와 와인만 먹어 반질대던 그의 얼굴이 단 며칠 만에 수척해져 있었다.

에라이 쳐 죽일 놈. 비루먹을 놈아! 한때 국왕의 자리까지 올랐던 이가 듣는 소리였다.

돌팔매질을 당해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든 말든, 버트랜드는 그렇게 감옥으로 끌려갔다. 재산 몰수, 직위 해제, 한번 가면 죽을 때까지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막 한가운데의 감옥으로 보내지는 형벌을 받은 그는 이미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의기양양하게 에스텔라가 걸어 나왔다. 그녀 옆에는 남편 이자크가 서 있었고, 그들 뒤에는 증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사왕이었던 벤자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올란도 후작부인, 왕궁에서 선왕의 주치의였던 이, 이자크의 여동생, 그리고 트라비아의 왕비이자 버트랜드의 딸 릴리까지.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공주가 언제 저 많은 이들을 증인으로 데리고 온 건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공주님, 공주님께서 즉위를 하실 건가요?!”

누군가 에스텔라에게 물었다. 에스텔라는 저를 쳐다보는 수많은 백성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메시앙의 새 군주는 접니다.“

짧고도 강렬한 한마디였다.

다음날 신문 1면에는 모두가 궁금해했던 법정에서의 일이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뻔뻔한 버트랜드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벤자민을 마주했을 때 파랗게 질리더니 그대로 의자에서 떨어져 자빠졌다는 일화가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모두가 8년 전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디에스 변경백과 벤자민은 버트랜드가 비밀리에 자국의 땅을 이국 귀족들에게 팔아넘기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변경백은 벤자민에게 이를 알리기 전 몇 번이고 변절해버린 제 친구를 다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결국 선왕에게 이를 알리던 날, 선왕은 음독하게 되고 변경백은 그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벤자민의 증언이 끝나고 릴리가 나와 증언했다. 이미 버트랜드는 벤자민의 증언 이후부터 제 변호를 포기한 듯싶었다. 차례로 모든 이들의 증언이 끝나고 판사가 버트랜드에게 물었다.

피고는 달리 할 말 있습니까.

판사의 말에 버트랜드가 픽 웃으며 말했다.

저들 말이 모두 사실인데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 당신네들 마음대로 처벌하시오.

끌려나가던 버트랜드와 에스텔라는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버트랜드가 나가기 전 말했다.

“그건 연기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널 진정으로 살리고 싶었어.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구나.”

“그러게요. 그때 절 죽게 내버려 뒀다면, 당신이 원하던 결말이었을 텐데.”

더 이상의 유감은 없었다.

그날의 모든 진실이 알려지고 난 뒤 귀족 회의가 열렸다. 버트랜드와 함께 나라를 파는 것에 일조했던 귀족들은 모두 재산이 몰수되고 직위가 해제되었다. 다만, 올란도 후작부인과 키에프 공작은 후에 공주를 도왔다는 것을 정상 참작하여 직위 강등에서 그쳤다.

의외로 키에프 공작은 자신이 남작으로 강등된 것에 의연해 보였다. 자신들이 그동안 저지른 악행에 조금이라도 가책을 느낀 듯했다. 올란도 후작부인이었던 엠버는 남편과 아이를 잃고 아예 귀족 신분에서 내려와 이국으로 떠났다.

몰락했던 디에스 가문과 오르테즈 가문이 복기 되었다. 이자크는 디에스 가문의 가주가 되었고, 그동안 입에 담지 못했던 자신의 성을 입에 담았다. 이자크 몬 디에스. 그 이름을 다시 얻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오르테즈 남매는 후작으로 복귀되어도 계속해서 신문사를 이어나갈 거라는 계획을 밝혔다. 에스텔라는 그들에게 독립권을 주어 백성들이 보다 주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버트랜드로 인해 터전을 잃은 카루체 족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막지대에서 종종 도적들이 무역 상인들을 털어가 고민이었는데 카루체 족이 사막을 보호하는 대신 그곳에서 터전을 내도 좋다는 협상을 했다.

트라비아와 에테리아와는 동맹을 맺었다. 불가침조약을 서로 맺어 우방국이 되었다. 버트랜드가 국가적 고립과 백성들의 무지를 위해 그동안 닫아뒀던 문호를 개방해 새로운 문물들을 받아들였다.

하나둘 비정상적이었던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

아침부터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에스텔라는 제대로 눈도 못 뜬 상태에서 여기저기 하녀들과 시녀들에게 끌려다니기 바빴다. 밤늦게까지 정무를 본 탓인지 이제는 타올로 살갗을 벗겨내듯 때를 밀든 말든 에스텔라는 꾸벅꾸벅 졸았다.

다 씻고 나자 반쯤 자면서 걷고 있는 에스텔라를 뚜왈렛 룸으로 데려갔다.

흰색 속옷만 입고 있는 에스텔라 위로 겹겹이 옷들을 쌓아 올렸다. 옷이 쌓이면서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데도 에스텔라는 정신을 못 차렸다.

“어휴, 이렇게 조시면 이따가 어떡하시려고요.”

미엘라가 결국 한소리 했다.

“너무 피곤한데 어떡해.”

“얼른 잠 깨세요.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꾸벅꾸벅 조시다가는 오르테즈 남매가 신문 1면에 내고 말 거에요.”

“알았어…. 쌍둥이랑 막내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셔서 준비까지 마친 상태셔요.“

“내가 제일 늦나 보네. 하암. 이자크는? 옆에 없던데….”

새벽 내내 루멘 도련님께서 우시는데 직접 달래겠다고 하셔서 아마 도련님 방에서 주무셨을 거예요.

“그렇구나아….”

기다란 상아색 드레스까지 입고 나자 진짜 마지막이라며 붉은색 벨벳 망토를 에스텔라에게 둘렀다. 이제 곧 7월이 다가와 이건 너무 덥지 않을까, 하며 망토 가에 부분에 둘러진 밍크 털을 만지작댔다.

“더운 게 문제셔요? 위엄이 문제죠!”

그 정도는 앞으로를 위해 꾹 참아야 한다며 미엘라가 거침없는 말을 했다. 에스텔라는 그런가, 하며 망토 자락을 몇 번 툭툭 털었다. 시녀 하나가 달려왔다. 이제 곧 시작합니다! 그 말에 에스텔라의 옷매무새를 만져주던 미엘라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준비를 마친 에스텔라 역시 종종걸음으로 기다란 복도를 걸었다. 망토와 드레스 자락을 잡아주던 시녀들이 얼른 뒤따라왔다.

저 앞에서는 쌍둥이들이 엄마! 빨리! 빨리! 지각이야 지각! 하며 소리쳤다. 둘 다 푸른색 드레스와 양복을 갖춰 입은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에스텔라가 미안, 미안. 하며 아이들 뺨에 한 번씩 입을 맞췄다

“아이참, 엄마 지각이래두!”

“알았어. 알았어.“

“에스텔라. 무리하는 건 아니죠.”

“아뇨. 이자크, 무리는 오히려 당신이 하는 것 같은데. 오늘도 새벽 내내 직접 루멘 달랬다면서요.”

에스텔라가 걱정스러운 손길로 이자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런, 잠을 제대로 못 자 눈 밑이 시커메졌는데도 잘생긴 건 여전해. 에스텔라가 역시 내 남편이야. 하며 싱긋 웃고는 이자크에게 입을 맞췄다.

“에스텔라. 이러다 진짜 늦습니다.”

이자크의 말에 이러다 진짜 오르테즈 남매의 신문에 ‘지각쟁이 국왕 전하’라는 별명이 달린 제 모습이 나올 거 같아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그녀의 즉위식이다.

버트랜드가 탄핵되고 왕좌에 공석이 났지만, 벤자민이 임시로 왕위에 앉기에는 많이 쇠약했다. 결국 아직 즉위식도 못 한 채로 몇 달 정도 밀린 일을 해내느라 에스텔라가 꽤 욕봤다.

넓은 왕궁 발코니로 나가자 그 앞에 수많은 귀족과 백성들이 환호로 에스텔라를 맞이했다. 새 왕의 즉위식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는 뜻으로 이날 하루 왕궁 정원까지 신분 차별 없이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물론, 혹시라도 일을 대비하여 곳곳에 잔뜩 각이 선 근위대장이 눈을 부라리며 사방을 주시했다.

붉은색 망토를 두른 에스텔라 뒤로 루멘을 안아 든 이자크와 사랑스러운 쌍둥이가 따라 나왔다. 꼬맹이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까지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이들이 그저 신기한 것인지 웬일로 루스 마저 울지 않고 방긋방긋 손을 흔들었다.

에스텔라는 단상 위 휠체어에 앉아있는 아버지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왕홀과 왕관을 들고 있던 벤자민이 에스텔라에게 직접 왕관을 씌워 주었다. 에스텔라가 몸을 일으켜 그가 건네는 왕홀도 받아들었다.

그런 뒤 발코니의 맨 앞으로 가 왕홀을 들어 보였다.

메시앙의 새 군주가 태어나는 날, 모든 이들이 환호했다.

외전 1.

[외전 1-1 온실 밑의 지하동굴]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축제가 끝이 났다. 에스텔라는 오늘 하루만큼 이렇게나 많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나 싶어 혀를 내둘렀다. 왕실 귀족들은 물론 새로운 국왕을 보러온 수많은 백성까지. 이 작은 나라의 땅덩어리에 수많은 사람이 산다는 걸 다시금 체감했다.

에스텔라도 이렇게나 피곤한데 우리 작은 꼬맹이들은 얼마나 더 피곤할까. 이미 루멘은 미엘라가 데려간 지 오래고, 신나서 여기저기 참견해대던 쌍둥이는 어느새 이자크의 양 품에 안겨 안겨 들어갔다.

“에스텔라, 당신은요. 오늘 하루 제일 피곤한 사람은 당신일 텐데.”

“저는 혼자서 아주 조금의 자축만 할게요.”

혼자만의 자축이라는 것이 남은 와인병의 와인을 모조리 마신다는 걸 눈치챈 이자크가 못 말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에게 혼자 마시는 술의 묘미를 알려 준 것은 다름 아닌 그 아니었던가.

“저번처럼 잔뜩 술 취해서 오지만 마십시오.”

“금방 갈게요. 하지만 2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가 싶으면 온실로 와서 나 좀 데려가 줄래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이자크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술 취해서 오지는 않을 건데 그럴 확신은 없다는 소리 아닌가.

이자크가 잠투정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에스텔라는 시녀가 양손에 들고 가던 와인 두 병을 자신이 들고 있던 왕홀과 사이좋게 맞바꿨다. 시녀가 조심스레 왕홀을 받아 들고 얼른 보관소로 가는 동안 에스텔라는 온실로 향했다.

그렇게 에스텔라는 온실에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싱글벙글 웃고 있던 얼굴은 온 데 간 데 사라졌다.

온실은 언제나 그녀의 기억 속 그대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꽃이 시들거나 풀이 바래 죽는 일 따위는 없었다.

무거운 망토를 벗어 바닥에 잘 개어 둔 에스텔라는 머리 위의 왕관을 망토 위에 잠시 올려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와인 한 병을 병나발째로 불더니 심호흡하듯 후, 한숨을 내쉬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에스텔라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돌벽으로 가려진 문이었다.

지금은 굳게 닫혀있었으나, 여전히 그 돌벽은 에스텔라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그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았으니까. 잊을 수가 없다. 저 아래에는 자신을 비롯해 어머니와 수많은 이름 모를 이들이 수몰되어 있다.

에스텔라는 맨 처음 저 동굴 안에 들어갔을 때를 기억했다. 책을 얻고 그 안에서 아르텔과 델라를 만난 뒤, 그들에게 이곳의 정체를 물었지만 그들은 그저, 이곳은 고대 메라 신의 신전이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어째서 이곳에 어머니의 시신이 있는지 물었으나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권한 밖이라는 말만 했다.

그때는 그냥 넘겨버렸더랬다. 이자크를 살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이제는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왕궁 밑에 신전이 있는 이유는 뭐고, 어머니는 도대체 왜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한 것이었으며, 함께 수몰된 수많은 시신은 대체 무엇인가.

에스텔라는 가만히 돌문에 손을 얹었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에스텔라는 다시 한번 저 아래로 들어가 신전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적어도 뒤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는.

“그 안에 들어갈 거니, 에스텔라.”

깜짝 놀란 에스텔라가 얼른 뒤를 돌았다.

“아버지!”

“지금 당장은 들어가지 말려무나.”

“…왜요?”

“이리 오렴. 네게 해줄 말이 있단다.”

벤자민은 에스텔라가 메라의 금서를 읽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어디 그뿐일까. 동굴 아래 어떠한 것이 있는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의연해 보이면서도 착잡해 마지않는 얼굴. 에스텔라는 고민 없이 아버지에게 갔다.

휠체어를 굴려 최대한 동굴에서 멀어진 벤자민은 잠시 동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저 아래로 가면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걸 그 역시 알고 있다.

비록 물 안에 수몰되어 있으나 사랑하는 오로라가 저 안에 있다.

하지만 들어가서는 안 된다.

“몇 번 회귀했느냐.”

“…다섯 번이요.”

그러자 벤자민이 놀란 눈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몸은 괜찮은 게냐.”

“아버지. 어떻게 된 거예요? 아버지가 메라의 금서나 지하동굴에 대해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 혹시, 저 아래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계신 건가요.”

에스텔라의 질문에 벤자민이 가만히 딸의 손을 잡았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이내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로라는, 그걸 저주라고 불렀단다.”

신이 준 기회가 아닌 저주.

자신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믿는 사람에게, 감히 신이 정해준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 생각하는 이들이 받는 저주라고. 오로라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벤자민은 이제 아내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왕실 벽에 걸린 왕비의 초상화로만 아, 그녀가 이렇게 생겼었지 어림짐작할 뿐이다. 아내의 얼굴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아내가 죽기 전 그에게 했던 말은 생각난다.

‘벤자민. 나는, 에스텔라가 절대 모르고 살았으면 해요. 내가 한 행동은, 저주이자 축복이거든요. 내가 한 행동에 후회는 없어요. 하지만 때로는 생각하죠. 만약 그날, 내게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다음에는 진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헛된 희망만 품고 살지 않을까.

‘에스텔라는 내 딸이에요. 그 애에게도 언젠가 동굴의 문이 열릴 거에요. 아마 그 애가 처음으로 좌절하게 될 때겠지요.’

그 동굴은 단순한 슬픔으로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집착과 광기로 얽힌 슬픔이 아닌 이상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벤자민. 에스텔라를 철없게 키워줘요. 고통과 슬픔은 모르는 어린 철부지로 키워줘요.’

‘오로라. 나는 도대체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때의 오로라는 이미 지칠대로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의 나은 선택지를, 생각해낼 수가 없어요, 벤자민. 난 정말 나약한 인간이야.’

오로라는 자꾸만 에스텔라가 죽으니까 미칠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오로라. 에스텔라는 아직 버젓이 살아있잖아. 오로라. 병은 이겨낼 수 있어. 우리 셋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벤자민의 말에 오로라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에게 편지 하나를 건넸다. 에스텔라가 성인이 되고, 만약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게 될 시에만 이걸 전해 달라는 말.

“읽어보렴. 에스텔라.”

오로라의 편지를 건네는 벤자민의 손길이 떨렸다.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는 듯 눈시울은 붉어졌다. 에스텔라는 아버지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빼곡하게 쓰여 있는 필체는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 여기저기 휘갈겨 쓴 필체였다.

사랑하는 나의 딸, 에스텔라에게.

사랑하는 에스텔라. 네가 몇 살이 되었을까 궁금하구나.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아마 동굴 아래서 내 모습을 발견했다는 거겠지. 아마 모든 것에 대해 궁금해졌을 거야. 나 역시 그랬으니까.

엄마는 우리 에스텔라를 맨 처음 낳았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단다. 너무나도 작아서 이렇게 작을 수가 있을까 걱정도 했었지. 옆에서 같이 자다가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너를 누가 훔쳐 가진 않을까, 혹여나 이렇게나 작은 널 내가 뭉개진 않을까 난 단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어. 그만큼 널 사랑했단다.

사랑하는 에스텔라야.

엄마는 네가 지금 몇 살이 되었을까 궁금하구나. 학술원을 다니고 있으려나? 성인식은 치렀으려나? 결혼은 했을까? 아이를 낳았을까? 엄마에게 에스텔라는 항상 8살이야. 8살 이후의 너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단다. 그래서 다 컸을 때의 네가 너무나도 궁금해.

몇 번의 회귀 끝에 내가 선택한 것이 왜 죽음인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벤자민은 끝까지 이해를 못 하지만 넌 아마 가능할 거야.

이 편지를 읽는다는 건 에스텔라 역시 엄마처럼 사랑하는 누군가를 되찾기 위해 몇 번이고 회귀를 했다는 거니까.

엄마는 에스텔라의 8살 이후를 본 적이 없어. 몇 번이고 널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존재하는 건지, 매번 너를 잃고 말았단다.

사고는 항상 예기치 않게 찾아왔어.

맨 처음 오로라가 에스텔라를 잃었을 때는 마차 사고였다. 절벽 길을 지나던 도중 지반이 약해져 땅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산사태가 마차를 덮쳐왔다. 그 안에 타고 있던 것은 오로라와 에스텔라.

두 사람의 무게로 아슬하게 절벽 끄트머리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마차는, 누구 한 명이 구조되기만 해도 그대로 떨어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왕비를 구하느냐 공주를 구하느냐.

무조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때 근처에 있어 달려온 것은 버트랜드. 벤자민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던 그는, 흙투성이가 된 채로 딸애를 껴안고 있던 오로라를 강제적으로 구출해냈다.

“아니야, 버트랜드. 잡지 마, 에스텔라를 데려가, 제발!”

억지로 에스텔라를 떠밀어도 버트랜드는 오로라를 잡아당겼다.

“제발! 버트랜드! 에스텔라를 구해줘!”

“미안해 오로라. 하지만 난 당신이 더 중요해.”

“제발, 제발 그러면 차라리 같이 죽게 해줘.”

반항하자 억지로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어 오로라를 잡아당겼다. 오로라는 에스텔라의 손을 놓지 않았다. 괜찮아, 아가. 우리 둘 다 구조될 수 있단다. 땀으로 흥건해진 손에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 아이 손을 잡으며.

“대공 각하! 무게가 더 이상 지탱을 못 합니다. 이러다가는 밧줄도 끊어져서 왕비님은 물론 각하도 위험하십니다!”

“오로라, 손을 놔!”

“미친 소리 하지 마, 버트랜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 밧줄 풀어! 나보고 지금 에스텔라를 버리라는 거야?!”

한쪽 손으로 밧줄을 풀려 했지만, 이미 마차 충돌 전 에스텔라를 감싸느라 오른쪽 팔이 부러진 지 오래. 나머지 한 손으로는 에스텔라를 잡고 있어야 했다.

“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해 오로라. 미안해. 이건 단순히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야. 나라에는 왕비가 필요해.”

“버트랜드, 하지 마.”

“손 놔, 오로라. 아무도 당신을 비난하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제발. 아가. 저런 말 듣지 마렴. 엄마는 네 손 안 놓을 거야.”

8살은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왕비가 죽는 것보다 공주가 죽는 것이 나라에 혼란을 덜 준다는 것을 에스텔라는 알고 있었다.

“엄마. 나는 괜찮아요.”

“무슨 소리니, 에스텔라.”

“내 손에 땀이 너무 많이 나서 미끄러워요. 엄마. 나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게 너는 엄마의 손을 놨단다.

그때 혀라도 깨물고 널 따라갔어야 했나.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네 모습이 잊히지 않았단다. 일주일 뒤 수색대가 네 시신을 찾았어.

벤자민은 장례식 때까지 네 시신을 보지 못하게 했단다.

장례식을 치렀단다. 갑자기 관 안에서 네가 살려 달라 소리쳐 얼른 관을 열었어. 분명 네 목소리를 들었는데, 관 안에는 창백하게 눈을 감은 네가 물에 퉁퉁 불어 있었단다.

내가 알던 우리 에스텔라가 아니었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서 네가 아니라 소리쳤단다. 아직 우리 딸 살아있다고. 빨리 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 퉁퉁 불은 시체는 내 딸의 생일날 내가 우리 사랑하는 딸에게 준 팔찌를 차고 있었어.

그제야 네가 죽은 걸 깨달았어.

오, 신이시여. 나는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때 왜 나는 더 세게 네 손을 잡지 못했을까.

아니야. 이럴 순 없어. 사랑스러운 내 딸이 나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이건 지옥이야.

그 어떤 곳도 지옥보다는 나을 거야.

너를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엄마는 그 어떤 짓도 할 수 있는데.

그날 문이 열렸단다.

그 문이 날 불렀어.

[외전 1-2 저주의 시작]

오로라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계단을 내려갔고, 그곳에서 에스텔라가 경험한 똑같은 것을 느꼈다. 강 밑에 수몰된 시신들, 같은 얼굴들이 수십 개 보이는 이 기괴한 광경. 공포로 굳어졌을 게 분명한 다리는 제 의지와는 다르게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 아래에서 그녀는 제 외조모를 발견했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오로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냥 이곳의 존재 자체가 이해할 수 없었다.

몸은 멋대로 움직였다. 강 건너편에 도착한 오로라 앞에는 무너진 신전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책을 발견했어. 메라의 금서였지. 그 책을 보는 순간 나는 잊고 있었던 옛날 얘기를 떠올렸단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 외조모님께서 무릎에 날 앉히고 해줬던 머나먼 우리의 선조 이야기에 대해.

내 어머니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너무 귀담아듣지 말라 하셨어. 아들을 잃은 이후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했었거든.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외조모님은 평소에는 날 알아보지도 못하셨지만 이따금 정신이 들면 날 당신 무릎에 앉히곤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단다. 한 여인의 이야기였어.

신은 모든 인간을 아꼈으나, 그 중 특히나 어여삐 여기던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일레나. 메시앙 부족의 공주였다. 수많은 부족의 공주 중에서도 가장 현명하고 아름답기로 소문났던 일레나는 신 메라와 사랑에 빠졌다.

메라 신은 일레나에게 가장 처음, 승리의 권능을 주었다. 그렇게 일레나는 승리의 여신이 되어 메시앙 부족을 이끌었고, 메시앙 부족은 신의 가호를 받으며 주변 부족들을 집어삼키며 왕국의 형태를 갖추었다.

메시앙이 부족에서 왕국이 되던 해, 메라 신은 메시앙의 초대 왕으로 올라 일레나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메라는 남성의 몸으로 변하여 일레나와 결합했고, 일레나는 신의 아이를 잉태했다.

일레나는 사랑스러운 쌍둥이를 낳았다. 하나는 딸, 하나는 아들.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은 보통의 인간과는 달리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나자 성인의 모습이 되었다.

메라는 일레나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권능을 조금 나눠주었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 있는 동안에는 일레나와 두 자식이 함께 왕국을 통치했다.

메라 신이 다시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황금빛 물들던 메시앙의 찬란한 아름다움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핏빛으로 물들어 백성들이 절규하고 있었다. 나라에 역병이 들어 죽어 나가는 이가 수십이었고 흉작이 와 배곯다 아사하는 이들도 허다했다.

신은 깜짝 놀라 일레나와 제 자식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악신으로 변한 제 자식들을 마주했다. 세상이 온통 자신의 발 아래라 생각한 메라 신의 두 자식은 방탕하게 살며 백성들을 외면하고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다.

메라 신은 일레나에게 호통했다. 어찌하여 악신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일레나는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고 말했다.

메라 신은 제 딸과 아들을 설득해 다시 좋은 군주로서 살길 명했지만 이미 악신이 되어버린 그들을 막기란 불가능했다.

자신의 권능을 인간들을 죽이는데 써버리는 것에 통탄한 메라 신은 결국 그들을 제 손으로 죽여버리고 만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시신을 왕궁 가장 밑의 지하동굴에 버려 짐승이 먹도록 했다.

일레나는 큰 상실과 죄책감, 절망감에 빠졌다. 배 아파 낳은 제 사랑스러운 딸과 아들의 주검을 안고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그녀가 흘린 눈물은 동굴 한편을 가로지르는 강물이 될 정도였다.

비애에 젖은 일레나는 결국 메라에게서 받은 권능으로 그들을 다시 살리는 데 썼다. 시간을 되돌려 그들이 가장 사랑스러웠던 시절로 돌아간 일레나.

하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 아이들이 악신이 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악신이 된 사랑스러운 제 자식들은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전쟁을 일으켰다.

메라 신에게 들키기 전에 또 회귀 한 일레나는 아이들에게 분노와 시기, 질투에 대해 전혀 모르게 키웠다. 항상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들만 보게 하며 그들 옆에 달라붙어 악신으로 변하지 않도록 감시했다.

일레나는 아이들을 감시하느라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다. 백성들은 또다시 고통받았다.

악신으로 변하면 또 회귀하고 전쟁이 시작되면 또 회귀했다. 현명하고 지혜롭던 메시앙 부족의 일레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승리의 권능을 받은 내가 왜 자꾸 실패하는 거야! 왜! 어째서!

일레나는 그 권능이 본인만을 위해 사용하게 될 시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울부짖었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집착뿐이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집착, 그 어떤 이도 죽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 내 자식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

시간을 돌린다 한들, 그 시간마저 다스리는 메라에게 들키지 않을 리는 없었다.

신을 속이고 시간을 되돌려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진 일레나에게 신은 크게 분노했다. 그녀에게 주었던 모든 권능을 빼앗아 책에 봉인한 뒤, 악신이 되어 수많은 살육을 행하고 세상을 파멸로 이끌려는 그들도 함께 책 속에 가둬버렸다.

한낱 인간이 신의 권능을 써 세상의 이치를 몇 번이고 거슬렀으니, 부작용이 없을 리가 없었다. 일레나는 피폐해졌다. 하루가 다르게 망가졌다. 무슨 짓을 해도 아이들은 자꾸만 악신으로 변하고, 사랑하는 메라는 자신에게 화를 내고, 백성들은 등을 돌리니 절망의 연속이었다.

메라는 한때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해마지않는 일레나를 안쓰럽게 생각했다. 인간은 언제나 이상적이고 중립적인 신과 달리 이기적이고 우매한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불쌍한 일레나, 우매한 일레나, 사랑스러운 일레나.

메라 신은 결국 일레나와 자식들에게 주었던 모든 권능을 빼앗았다. 그런 뒤 그 권능과 악신이 될 운명인 제 두 자식을 금서에 가둬버렸으며, 일레나의 고통스러운 모든 기억을 지우고 메시앙 왕궁에서 쫓아냈다.

기억을 잃은 그녀를 주운 메시앙의 작은 귀족 가문의 청년은 그녀를 자신의 성으로 데려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일레나는 고통스러웠던 모든 기억을 잃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메라 신과 어떤 사이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을 돌봐준 청년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녀는 일평생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깊은 그리움과 애절함을 품고 살아야 했다. 뭔가를 잊은 듯한 그리움, 뭔가를 되돌려야 한다는 초조함.

그리고 마침내 일레나가 모든 기억을 되찾았을 때는, 그녀가 죽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남편의 손을 잡은 채로 병상에 누워있던 일레나는 유모의 품에 안겨있던 자그마한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잊고 지냈던 자신의 두 자식을 떠올렸다고 한다. 마침내 모든 걸 기억해낸 일레나의 표정은 슬픔과 분노, 그리움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기억해낸 기쁨도 있었다고 한다.

“여보, 사랑하는 여보.”

일레나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눈물 흘리는 남편에게 말했다.

“기억을 잃고 당신을 만난 것에 후회는 없어요. 당신과 우리 딸을 사랑하는 마음도 진심이에요. 하지만, 날 기다리고 있을 그 아이들이 자꾸만 떠올라요.”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의 모든 기억을 이야기해줬다. 그는 가만히 아내의 손을 잡은 채로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아내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말을 마친 일레나는 눈을 감았다. 남편의 손에서 일레나의 손이 힘없이 흘러내렸고 감은 눈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죽었다.

작은 귀족 가문 안주인의 장례식은 그리 성대하지 않았다. 한미한 집안에는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였어도 며칠 동안 애도할 만한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지만, 가주는 최대한 아내가 좋아하던 수선화로 관을 빼곡히 채운 뒤 그 위에 일레나의 시신을 올려주었다.

조촐한 하객을 맞이하고 마지막 장례식 밤이 되던 닷새째 날이었다. 더 이상 찾아오는 하객도 없이 남편과 그녀의 작은 딸, 그리고 저택의 시종들만이 지키고 있는 장례식 장에 한 사내가 풍성한 황수선화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부리고 있는 시종도, 집사도 없이 혼자 나타난 이는 매우 고귀해 보이는 행색의 사내였다. 태양을 본떠 놓은 듯한 풍성한 금발을 가진 그는 긴 머리칼을 허리 아래까지 흐트러뜨린 채 자신의 머리 색과 같은 황수선화를 들고 있었다.

“일레나는, 수선화도 좋아하지만 황수선화를 가장 좋아하지.”

메시앙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자그마한 수선화들에 비해 사내가 들고 있는 황수선화는 방금 막 피어난 것처럼 싱그럽고 꽃대의 크기가 컸다. 그는 황수선화 다발을 들어다가 일레나의 관 위에 올려두었다.

남편은 사내에게 물었다.

“귀하는 누구십니까?”

단번에 그가 높은 직급의 인물이라는 것을,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내는 매우 슬퍼 보이는 눈으로 관 속에 누운 일레나를 가만히 지켜보다 이내 남편과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딸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레나를 많이 닮았구나.”

사내가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통을 가만히 쓸었다. 갈대가 출렁이는 듯한 모래 색의 머리칼, 노을빛을 연상시키는 주황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까지.

사내의 행동에 그 누구도 무례하다며 손을 치우거나 경계하는 이가 없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위압적인 느낌과 몽환적인 외모에 다들 조용히 넋을 잃은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레나의 남편은 그 사내가 메라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기 전 아내가 고해성사라도 하듯 말하던 그 깊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메라 신. 인간에게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던 그 메라 신.

사내는 그 후로 별다른 말 없이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잠시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있던 남편은 얼른 그 뒤를 따라갔지만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장례식은 끝이 났고 일레나의 관은 저택 뒤쪽 동산에 묻혔다.

일레나의 무덤에서는 매년 한 송이의 황수선화만이 자란다고 한다.

그게 우리 헤르미안 가문의 전설이란다. 에스텔라. 그러니 우리는 메라 신의 아내이자 메시앙의 초대왕이기도 한 여인의 자식들이란다. 어쩌면 그분의 피가 섞여서 그런 걸까. 그 동굴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건. 외조모는 내게 그랬어. 이건 저주라고. 우리가 동굴의 선택을 받는 건 기회가 아닌 저주라고.

그 저주는 신의 저주가 아니란다.

일레나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집착과 미련, 스스로에게 내린 저주와도 같은 거야. 우리는 어머니의 저주를 받고 있는 거지.

일레나는 죽기 직전 그 모든 것을 기억해내고 남편에게 말해준 뒤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남긴 말이 있었다.

그립다. 너무 그립다. 내 아이들이 그립고 그분이 그립다. 다시 한번 모든 걸 바로잡고 싶다. 그와 동시에 당신과 내 딸도 잃고 싶지 않아. 너무 큰 욕심인 걸 알면서도 나는 왜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할까. 죽음에 가까워진 걸 알면서도. 이건 벌인 걸까. 나는 지금 벌을 받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 벌을 내리고 있는 걸까.

메라 신은 왕궁 지하에 생긴 커다란 동굴에 금서를 가뒀다. 사랑하는 아내의 기억을 지워 내보내고, 제 자식들을 손수 책에 가둬버렸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중립적인 신이라 해도 슬픔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가신 중 가장 지혜롭고 선한 이를 뽑아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에게 다른 이들이 동굴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당부했다.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 완벽하지 못하면서도 완벽함을 바라는 존재. 사랑스러우나 우매한 존재.

새로 왕위에 오른 이는 메라 신이 예상한 대로 성군이 되었다. 불안정했던 왕권은 단단해졌고 혼란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했다. 나라는 점차 안정되었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지만 딱 하나, 동굴의 부름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동굴은 일레나의 모든 염원이 모인 동굴이었다. 초대 왕의 염원이 모인 동굴, 봉인 당한 권능들이 해방되고 싶어 아우성치는 금서가 갇힌 동굴.

평범한 동굴이 아닌 사람을 끌어들이는 동굴.

에스텔라. 동굴은 사람을 고른단다. 왕궁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그 동굴은, 아주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염원하며 정말에 빠진 이들을 불러들인단다.

단 회귀를 할 용기를 가진 이들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절박한 이들만을 금서가, 동굴이 선별하여 문을 열어준단다.

그건 기회이자 저주인 거야.

메라 신에게는 시간을 거스르는 권능이 없었다. 아무리 신이라 한들 시간을 역행하는 권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 역시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태어난 존재였기에.

회귀의 권능은 일레나의 강력한 염원이 담겨 만들어져 변형된 권능이었다.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권능.

에스텔라. 네가 이 편지를 읽었다는 건, 너 역시 나와 같은 선택을 했다는 뜻이겠지. 그 동굴 안에 들어가 네가 소중히 생각하는 뭔가를 지키기 위해 금서에 손을 댔다는 뜻이겠지.

너의 선택을 나무라지는 않을게. 네가 최대한 이 저주에서 벗어났으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걸까. 우리에게는 일레나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동굴은 사람을 선택한다. 왕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금서를 품은 동굴. 일레나의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는 동굴. 강력한 염원으로 존재 자체가 권능이 되어버리기도 한 그 동굴. 아무리 신이 감추려 해도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동굴.

어찌 보면 그 동굴의 존재를 가장 처음 만들어낸 일레나의 핏줄이 그곳에 이끌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에스텔라.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단다. 내 선택으로 인해 네가 살아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의 회귀는 성공이야. 다만, 그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모든 저주가 끝이 나기 위해서는 회귀를 성공한 이가 금서를 파괴해야 하는데 나의 회귀는 나의 죽음으로서 성공이니 애초에 완벽한 성공이 아니구나.

에스텔라.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너는 회귀에 성공했니? 너의 행동이 가치 있고 후회 없는 일이라고 확신했을까? 나는 널 믿는단다. 너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니까. 네가 성공했으리라 믿어. 성공했다면, 그 금서를 파괴하렴. 그들을 자유롭게 풀어줘.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해주고 싶구나.

고생했어, 에스텔라.

사랑해.

어머니의 편지는 그렇게 끝이 났다. 편지를 읽어내려간 에스텔라는 조용히 편지들을 접어 다시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저주가 끝이 난 걸까요, 아버지?”

“나는 모르겠구나. 아마 네가 가장 잘 알겠지. 금서를 읽을 수 있는 이는 너밖에 없잖니. 에스텔라.”

벤자민의 말에 에스텔라가 가만히 뒤돌아 굳게 닫힌 동굴 문을 쳐다봤다. 다시 몸을 돌린 에스텔라는 휠체어에 앉아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회귀하신다는 걸 언제부터 아셨던 거예요? 혹시, 그래서, 그날 밤에 의사를.”

“그래.”

“…그럼,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가…”

에스텔라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날,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던 어머니의 방에 들어가던 아버지와 조그마한 약병을 들고 따라가던 의사의 모습.

작은 문틈 사이로 보이던 약병을 들이킨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잠이 든 어머니를 껴안고 한참을 우시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뛰쳐들어가는 어머니의 시녀와 호위기사.

“에스텔라. 오로라는 널 정말 사랑했다. 그녀는 많이 약해져 있었어.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의심이 없었지.”

“그래도 어떻게 저 때문에-”

“에스텔라. 이미 지나간 일이다. 오로라는 후회하지 않았으니 그걸로 된 거다.”

그걸 마시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오로라는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독약을 가져다 달라 요청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벤자민은 맨 처음 믿지 못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아직 제 딸은 건강하게 살아있고 오로라의 병 역시 꾸준히 치료만 하면 완치되는 것이 분명한 것이었다.

‘벤자민. 나는 이제 너무 지쳐있어요.’

그녀는 자신이 이런 상황을 몇 번이고 겪었다고 했다. 몇 번이고 에스텔라는 죽었고 자신은 그녀를 지켜내지 못했다고.

반복된 회귀로 오로라의 몸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오로라가 떠올린 에스텔라를 살리는 방법이란, 그 모든 회귀에서 자꾸만 오로라 대신 선택 받는 자신일 뿐이었다.

자신이 죽음을 선택함으로 인해 에스텔라가 생을 얻게 될 거라는 확증은 없었으나, 어떤 짐승 같은 직감이 그게 유일한 정답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리하여 오로라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다.

약을 마시고 사랑하는 벤자민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딸아이의 얼굴은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저 멀리서 그들이 뛰어 들어왔다.

‘오로라 님!’

‘오로라 왕비님!’

몸은 축 늘어졌으나 아득해지는 정신 사이로 문 뒤편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에스텔라가 보였다. 이 모든 광경을 보고 두려워할 에스텔라에게 미안했던 오로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자신의 딸이 살아있길 바라며, 동굴 안에 들어가질 않길 바라며.

반은 원하는 대로 되었고 반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에스텔라는 어머니로 인해 살아남았으나,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동굴로 들어갔고, 그 안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마주했다.

어째서 이곳에 어머니의 시신이 몇 개씩이나 있는 건지 몰랐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누군가 온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왔다. 델라 랭과 아르텔이었다. 에스텔라는 자신이 불러낸 기억이 없어 아버지를 쳐다봤다. 벤자민은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듯했다.

“모습이 달라 같은 이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들도 오로라를 기억하지 못했고. 하지만 네 옆에 계속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쩌면 오로라의 시녀와 호위기사였던 이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델라 랭과 아르텔이 잠시 벤자민을 쳐다보더니 이내 에스텔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온실 앞쪽에서 얼쯤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아르텔이 빨리 말하라는 듯 델라 랭의 팔을 툭툭 쳤다.

이런 건 꼭 날 시키지. 델라 랭이 아르텔을 가자미눈으로 노려보며 헛기침 두어 번 한 뒤 말했다.

“…에스텔라 님께서 여기 계실 줄 알고 왔어요.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가실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말끝을 흐리자 아르텔이 또 한 번 델라의 소맷단을 잡아당겼다.

“…저희도 그 동굴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요…”

아르텔이 또 쿡쿡 찌르려 하자 델라가 네가 말하라는 듯 그의 가슴팍을 퍽, 때렸다. 아르텔이 맞은 부분을 문지르며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어받았다.

“그 금서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에스텔라가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편지에 써진 일레나 신화에 따르면 아마 저 두 사람이 메라와 일레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이라는 거겠지.

에스텔라는 동굴 앞으로 다가갔다. 벤자민 역시 자신이 할 소임은 끝이 난 듯 한걸음 물러서듯 휠체어를 굴렸다. 델라 랭과 아르텔이 얼른 에스텔라 뒤를 따라갔다.

동굴 앞으로 가 항상 외우고 있던 고대어를 읊었다. 기다리기라도 한 양 동굴 문이 열렸다.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쳐다보던 에스텔라가 아르텔과 델라 랭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은 잠시 주저하다 에스텔라에게 향했다.

제 발로 이 계단을 내려가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여기 오는 걸 되게 무서워했잖아.”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던 에스텔라가 과거를 떠올린 듯 말했다.

델라 랭과 아르텔은 이 동굴에 돌아오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에스텔라가 몇 번이나 이 동굴 속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을 선택했을 때조차 온실 앞에서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지긴 했어도, 에스텔라가 막상 동굴 안에 들어가면 따라 들어오질 못했다.

“궁금한 게 있었는데, 계속 물어보질 못했어. 내가 이 동굴에 들어가 회귀를 하게 되면 두 사람은 어떻게 회귀한 내 곁으로 오게 되는 거야? 같이 물속에 뛰어든 것도 아닌데.”

에스텔라의 질문에 아르텔이 답했다.

“저희는 원래 책 속에 봉인되어있는 존재니까, 에스텔라 님이 회귀를 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같이 회귀를 하게 됩니다.”

호오, 그렇게 되는 거였구나. 에스텔라가 이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을 내려가던 에스텔라의 거침없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를 따라 조심스레 내려오던 델라 랭과 아르텔의 발걸음도 멈췄다.

에스텔라는 뒤쪽에서 숨을 가늘게 몰아쉬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뭘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항상 궁금했지. 그깟 동굴이 뭐라고. 그깟 강물의 시체가 떠다니는 게 뭐 좀 어때서. 난 더한 걸 겪어봤는데.

그렇게 생각해왔던 자신이 새삼 얼마나 무신경했는지 알 것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외가와는 연이 끊겨 오늘 어머니의 편지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이야기였다.

그래. 너희들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거였구나.

에스텔라가 뒤돌아 델라 랭과 아르텔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얕은 강에 수몰된 수많은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전 1-3. 이름 없는 신들]

아주 좁기도 하며 아주 광활하기도 한 심연에서 이름 없는 두 신이 눈을 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으며 자신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이 인간인지 신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암흑 속에서 눈을 뜬 남매는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긴 긴 세월을 보냈다. 그들에게는 감정이라는 것이 없었으니 지루함과 공허함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왜 자신들이 이곳에 있는 건지 궁금했다.

그런 질문이 들 때쯤 암흑 속에서 아주 자그마한 빛이 흘러들어왔다. 이내 어둠뿐이던 이곳을 눈이 부시도록 비췄다.

눈이 부셔 감았다 뜨니 암흑 속이던 그 좁으면서 광활하던 곳에 처음으로 다른 생물체가 나타났다.

“…당신들은 누구죠?”

기다란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헤집어 놓은 것인지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잔뜩 퉁퉁 부은 눈 사이로 하릴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자.

그리고 여자의 앞에 떨어져 있는 낡은 책을 보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저 책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동굴을 천천히 둘러보는 동안 기억이 차츰 돌아왔다. 이 동굴의 정체에 대해. 강물에 대해, 그 아래 수몰된 이들에 대해.

에스텔라를 처음 만난 그날 이후, 그들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델라 랭과 아르텔. 그들은 에스텔라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최적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에스텔라를 보필했다.

그녀가 죽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들이 할 일이었다.

“회귀자가 저주를 풀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저희는 모든 기억을 또 잃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요. 한없이 책 속에서 지내다가 불려 나오죠.”

델라 랭이 강 아래 수몰된 수많은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들의 얼굴을 보니 기억이 떠오른다. 델라 랭과 아르텔의 이름을 가지기 전 수많은 이들을 주인으로 섬겼다.

어찌 보면 어머니가 같으니 먼 형제이며 먼 후손이기도 한 존재들을 섬긴 적도 있으며 왕궁의 주인을 섬긴 적도 있었다.

델라 랭과 아르텔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에스텔라가 죽고 난 뒤 또다시 그 책 속에 갇힐 까 봐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한때 섬겼던 이들을 잊을까 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회귀를 반복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요. 에스텔라 님. 한때 저들을 섬겼었을진대, 그들과의 시간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들이 뭘 원하고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절망에 빠지고 희망을 가지며 회귀를 반복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음 한구석이 저며왔다.

감정이 없었던 이름 없는 신들은, 점점 감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존재한다는 그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벅차면서도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에스텔라 님과 마주한 그 날 이후로 이곳에 다시 오지 않겠다 다짐했어요. 무서웠거든요. 두려웠어요.”

“….”

“그치만, 이렇게 마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저희가 받을 벌인 거겠지요?”

그치요? 이것도 저희가 받는 벌인 거지요? 그렇게 말하는 델라의 눈이 마치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에스텔라는 그런 델라의 손을 꼭 잡았다. 아르텔이 얼쯤하게 서 있자 그의 등을 토닥여줬다. 먼 형제이기도 하며 먼 조상이기도 한 그들은 몸만 이렇게나 컸지 속알맹이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이 저주는 끝이 난 걸까? 일레나의 집착과 미련에 가까운 뭔가를 되돌려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이 열망은 끝이 난 걸까? 에스텔라는 확신할 수 없었다.

언제 아이들에게 위험이 닥칠지 모를 일이고 이보다 더한 고통이 에스텔라를 찾아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회귀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들과 이자크, 그리고 나와 이 왕국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 거잖아.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면서 탐욕만큼은 강하다. 에스텔라는 아이들을 지켜내고 왕위에 오르고 나서부터도 계속 그 생각을 했다.

이 다음번에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만약에 커다란 재해가 터지면?

그땐 회귀로도 막을 수 있을까?

내가 만약 계속 회귀 권능을 쓴다면, 델라와 아스텔은 계속 이곳에 있는 건가? 그러다가 내가 죽어버리면, 이들은 또…

머릿속이 복잡해져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궁

동굴 안에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진동이 시작되었다. 당황한 세 사람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우왕좌왕 대며 서로 딱 달라붙었다.

에스텔라가 얼른 주변을 둘러봤다.

“강물이…!”

동굴 한편을 가로지르던 강물이 뭔가에 빨려 나가듯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강물 아래 수몰되어있던 수많은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처하나 없이 깨끗하던 시신들은 빠른 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에스텔라의 모습도 있었다.

에스텔라는 죽은 제 모습이 빠르게 부식되고 산화되어 종국엔 가루로 휘날리는 모습을 봐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비단 제 모습 말고도 어머니의 시신을, 그리고 그 언저리에 비슷한 생김새의 초상화로만 얼핏 보던 외조모의 시신도, 주변에 깔려 있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까지 지켜봐야 했다.

역겨움과 두려움이 듦과 동시에, 어째서 갑자기 강물이 마르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부패하지 않던 시신들이 가루가 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여진까지 멈추자 동굴 안은 전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갖추었다. 이 안에 있으면 계속해서 동굴이 뭔가를 부추기고 말을 걸고 열망하게끔 만드는 기분이 있었는데, 그 기시감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건너편의 신전을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어쩐지 저곳으로 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위험해요, 에스텔라 님!”

“…아니야. 저기에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런 기분이 들어.”

그렇게 말한 에스텔라가 마른 강바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아르텔과 델라는 멀리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이내 얼른 에스텔라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높은 기둥이 세워진 신전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단상에 놓인 책은 여전히 에스텔라의 기억 속 같은 위치에 있었다. 그렇게나 동굴 안이 심히 흔들렸는데도 이 낡은 단상에 금이 가거나 책이 떨어지기는커녕. 마치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에스텔라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 앞에 서자 책장이 팔랑팔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가속도가 붙더니 이내 두꺼운 금서 맨 끝장이 펼쳐졌다.

이내 그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단순한 햇빛과는 달리 당장이라도 에스텔라를 집어삼킬 듯이 강렬했다. 아르텔과 델라가 뛰어와 얼른 뒤로 기우뚱 쓰러지는 에스텔라를 받았다.

*

에스텔라가 눈을 깜빡였다.

“에스텔라!”

걱정스러워하는 이자크의 얼굴과, 그의 겨드랑이와 옆구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미는 쌍둥이가 보였다.

“엄마!”

“엄마! 눈 떴어, 압빠!”

가만히 그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에스텔라가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 끄트머리에 걸려있던 눈물이 옆으로 뚝 떨어졌다.

“엄마 울어? 아포?”

에스텔라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이자크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에스텔라는 아직 멍한 정신에 어지러운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 음. 제가 쓰러졌었나 보네요. 이자크.”

당연한 말이라고. 이자크는 당장이라도 한소리 하고 싶었다.

그저 온실에 자축을 위해 술을 마시러 간다 하던 여자가 몇 시간이고 소식이 없어 데리러 가던 찰나, 델라 랭과 아르텔의 부축을 받으며 동굴 계단을 올라오던 에스텔라를 봤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델라와 아르텔은요?”

“당신을 부축해주고 돌아갔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기로 했으니 걱정 말고요. 두 사람도 꽤 놀란 눈치던데, 대체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자크가 제 옆구리로 자꾸 얼굴을 들이미는 루시를 빼내 유모에게 건네며 말했다. 루스와 루시는 우리도 엄마 옆에 있을 거야! 하며 땡깡을 부렸지만, 보기 드물게 엄한 표정의 이자크를 보자 조용히 유모와 미엘라 품에 안겨 나갔더랬다.

시끌벅적하던 아이들이 나가자 방 안에는 에스텔라와 이자크 둘 뿐이 되었다.

이자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후, 짙은 안개 같은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이자크?”

술은 결단코 마시지 않았어요. 말하려던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눈치를 살폈다.

“에스텔라.”

“으응?”

“에스텔라는, 내가 미덥지 못한 겁니까.”

“네?”

“당신이 강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텔라, 그게 내게 모든 걸 말하지 않고 혼자 감내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이자크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크고 두툼한 장수의 손끝이 파르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세수를 한 뒤 제 입을 틀어막듯 막고 있는 손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이자크….”

“이제는 그런 모습 안 보게 될 거라 생각해서 한시름 덜었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온몸이 축 늘어진 채 델라와 아르텔에게 업혀 나오던 그 광경을 본 순간, 이자크는 심장이 저 발치까지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도 자꾸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질릴 수도 있겠지만, 에스텔라.”

하얗게 질린 에스텔라를 보는 순간 그때 그 동굴에서 본 수많은 에스텔라가 떠올랐다. 그가 사랑해마지않는 같은 얼굴들. 심지어 몇 개는 눈을 뜨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당신을 잃을까 봐….”

결국 이자크가 말을 잇지 못했다.

여태까지 잘 참아왔다 여겼는데, 침대에 누워있는 에스텔라를 보는 순간 아등바등 막아뒀던 댐이 허물어지듯 몰아쳤다.

만약 내가 에스텔라와 아이들을 잃게 되면, 저 동굴이 기회를 줄까? 만약 열리지 않는다면? 그럼 나는 이대로 에스텔라와 아이들을 잃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이자크. 난 정말 괜찮아요. 나 좀 봐요. 응?”

불안한 듯 한쪽 다리마저 달달 떨기 시작하는 이자크의 모습에 에스텔라가 더 당황하여 그의 얼굴을 감싸 들어 올렸다.

그의 눈과 코가 시큰해진 듯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그런 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건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자크. 위험한 일은 하나도 없었어요. 이건 그냥, 모든 게 끝이 났다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제 금서는 없을 거예요. 동굴도 그저 평범한 동굴로 돌아갔고요.”

에스텔라는 이자크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의 얼굴을 품에 껴안았다.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고 있다. 이자크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그래. 나 역시 그 동굴에서 내 시신을 마주했을 때 충격적이었는데, 내가 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웠는데 당신은 어땠겠어.

그의 떨리는 손을 맞잡은 에스텔라가 이자크와 눈을 마주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거기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책의 주인을 만나고 왔어요.”

에스텔라는 그렇게 운을 띠었다. 메라 신과 일레나의 이야기, 악신이 되어버린 그들의 자식 이야기, 기억을 잃고 쫓겨난 일레나의 집착과 염원까지.

“메라의 금서는, 메라가 만들긴 했지만 모든 권능은 그가 일레나에게 줬던 거였어요. 동굴 속에 봉인하고 다시는 열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일레나의 염원이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아 일종의 ‘씌인 책’이 되어 버린 거예요.”

에스텔라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일레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이들을 품은 그 동굴의 주인, 일레나의 슬픈 얼굴이.

말라버린 강과 가루가 되어버린 시신들을 지나 에스텔라는 신전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곳에서 금서를 발견했고 금서는 에스텔라에게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을 내뿜었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멀리서 아르텔과 델라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이내 어느 순간 주변은 식물과 꽃이 가득한 정원으로 바뀌어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거지?

내가 책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정원 안쪽에서 콧노래가 들려왔다. 에스텔라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쪽에서는 꽃에 물을 주고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저기.’

에스텔라의 목소리에 뒤돌아본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에스텔라는 조금. 아니 많이 놀랐다. 어머니와도, 자신과도 비슷하게 생긴 여자였다.

‘일레나?’

직감적으로 저 여인이 일레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텔라가 제 이름을 부르자 여자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 에스텔라.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구나.’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라는 것은, 다른 식으로는 본 적이 있다는 건가. 에스텔라의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일레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금서란다.’

‘…네?’

‘메라 신께서 내게 회수해 간 그 모든 권능을 담은 금서. 그게 나라는 뜻이야. 나는 죽고 이 책 속으로 들어왔어. 아마, 메라 신께서 그리하신 거겠지. 내가 계속 구천에 미련을 가지고 어떠한 방법으로든 환생하려 들려는 걸 막으시려던 거겠지. 이제 드디어 풀려나겠구나. 네가 금서의 마지막 장을 펼쳤으니.’

일레나가 에스텔라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구나. 내 아이들과 나를 풀어주었어.’

‘제가요? 제가 한 거라고는 제 아이들과 남편을 지키려 한 것뿐인걸요.’

‘대개는 포기하거든.’

‘….’

에스텔라는 씁쓸한 미소를 짓는 일레나를 보며 물었다.

‘이제야 풀려난다는 것은, 여태까지 단 한 명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건가요, 이 회귀 권능으로?’

일레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많은 사람이 동굴에서 죽어갔어요. 모두 일레나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왕궁의 사람들이겠죠. 그들은 모두 절박했어요. 그저 책에서 풀려나기 위해 그 절박함을 이용한 건 아닌가요?’

에스텔라의 뾰족한 말에 일레나가 가만히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이곳에 갇힌 건 환생을 막기 위함도 있겠지만, 아마 그분은 내게 벌을 주고 싶었던 걸 거야. 같은 책 속에 내 자식들이 갇혀 있어도 만나지 못하고, 나의 집착으로 인해 시작된 권능에 현혹된 내 백성과 후손들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라는.’

미안하구나. 미안해. 일레나가 풀이 죽었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해진 듯도 하여 아까 전과는 달리 이번엔 달래주듯 말했다.

‘일레나의 탓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어찌 되었든 나 역시 당신의 권능으로 인해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걸 지켜낼 수 있었으니까요. 미안해요. 일레나도 고통스러웠을 텐데.’

에스텔라의 다정한 말에 일레나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러더니 그녀에게 정원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으라며 손수 의자까지 빼주었다.

‘내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니?’

‘아. 아르텔과 델라요?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동굴에 변화가 생겼어요. 강물도 마르고 그 안의 시신들도 모두 사라졌어요. 이건 이제 더 이상 이 금서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뜻인가요?’

에스텔라의 질문에 일레나가 그 전에 먼저 답할 것이 있다며 에스텔라의 두 눈을 똑똑히 쳐다보며 물었다.

‘에스텔라. 성공한 사람들은 너 말고도 몇몇 있었단다. 그 성공이라는 것은, 결국 원하는 것을 이 금서로 통해 얻어낸 이들을 말하는 거지. 나는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줘야만 해.’

‘선택지요?’

‘그래. 이 금서를 유지할지, 아니면… 파괴할지.’

금서를 유지하면, 후에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언제든, 네가 원하는 대로 또다시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단다. 기억에 혼란이 올 수 있긴 하겠지만 평생 모든 것을 네가 원하는 대로 바꾸며 살 수 있어. 하지만 한번 파괴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 되돌릴 수 없어. 그게 규칙이야.

파괴하면, 나와 내 아이들은 책에서 풀려나겠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권능은 쓰지 못해.

일레나의 말에 에스텔라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듯 일레나를 마주 보며 답했다.

‘파괴할래요.’

[외전 1-4 승리의 가호]

“…금서를 파괴하려면 내일 그들을 불러야 한다는 거군요.”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톱을 틱틱 튕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리될 텐데 왜 이렇게 불안해합니까.”

“혹시라도 내가… 내가 내린 결정에 후회할까 봐요.”

그녀는 이제 막 왕위에 올랐고, 나라는 평화로웠으나 불안정했으며, 아이들은 아직 어렸고 그들이 맞이해야 할 시간은 많았다.

한 나라의 최정상에 오른 가족에게 일평생 평화로울 거라는 생각은 오만 아니던가.

“만일, 내가 금서를 파괴해서 델라와 아르텔이 자유를 찾았다 해도… 만약에 또 아이들이랑 당신이, 그리고 내가 평생을 안정 속에서 살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아이들이 무탈하게 자라 행복하게 살다 가족들의 품에서 안락하게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그런 보장이-”

“에스텔라.”

초조함과 불안함에 말이 빨라지던 에스텔라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자크가 말했다.

“함께 하기로 했잖아요. 그건 당신이 더 이상 모두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인생 자체를 매일 제멋대로 바꿀 수 있으면 그게 얼마나 재미없는 인생이겠습니까.”

“이자크….”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 불안전한 인생에 같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이 연인이고 배우자며 가족 아닙니까. 그 길이 가시밭길이든, 꽃길이든. 나는 에스텔라의 손을 놓지 않을게요. 당신은? 당신은 내 손을 놓을 겁니까?”

에스텔라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왜 이자크의 손을 놓겠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긴다 한들, 그건 절대로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같이 지키면 되잖습니까. 응?”

“…응.”

“땅굴 파는 건 에스텔라와 어울리지 않아요.”

이자크가 유하게 미소 지으며 에스텔라의 머리칼과 뺨을 쓰다듬었다. 에스텔라는 잠시 그의 손길을 눈감고 느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정말 파괴해도 되겠니?’

‘네.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일레나는 조금 예상외의 전개에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왜 그런 얼굴로 보세요?’

‘조금, 예상외의 답이 나와서. 대개 전자를 골랐거든.’

에스텔라가 고개를 갸웃댔다. 여태까지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면서요. 에스텔라의 질문에 일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공한 이는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다들 죽을 때는 후회를 했거든.

회귀를 통해 원하는 것을 지켜내거나 얻어낸 사람은 꽤나 있었다. 설마 몇백 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성공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모두들 한결같이 전자를 택했다.

금서를 계속 가지고 있을 것.

실제로 처음 회귀를 성공한 뒤, 계속해서 금서를 지니고 있었던 왕들은 수없이 많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지. 그들을 그렇게 책에 잠식되어갔다. 회귀에 집착하여 세상 모든 것을 원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다 알아낸 이들은 다시 과거로 회귀하여 더 큰 영광을 욕심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메시앙은 몇 번 정도 커다랗게 몸집을 불리기도 했다가 다시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일레나에게 그들을 막아낼 힘은 없었다. 금서 그 자체이며 이 모든 원흉인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게 몇 명이나 같은 선택과 같은 실수로 후회하는 걸 보았던가.

사실 일레나는 이번에도 역시 전자를 선택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에스텔라는 자신의 아이들과 남편의 안전을 위해 몇 번이고 회귀를 한 여자였다. 아이들은 이제 겨우 5살. 갓 태어난 신생아까지. 이 작고 한없이 연약한 아이들은 스스로의 몸을 지키게 될 때까지 아직 한참 멀었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리. 아마 분명 에스텔라는 금서의 존속을 선택할 거야.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미래를 알 수 없는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몇 번이고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가 있는 삶은 확연히 다르다.

에스텔라는 세 아이의 엄마로서, 사랑하는 남편의 아내로서,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가장 최적의 선택을 해야 했다.

‘…저는 그게 최적의 선택이라 생각했어요. 더 이상의 회귀는 없어요.’

이제는 정말 그 어떠한 일도 되돌릴 수 없게 되겠지만, 에스텔라는 이게 맞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자크도, 아마 에스텔라를 아끼는 모든 이들이 그녀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을 거다.

에스텔라의 대답에 일레나가 살풋 미소 지었다.

‘내일 아이들을 불러 다시 동굴로 내려오렴. 뭘 해야 할지 저절로 알게 될 거란다. 너의 선택을 존중하마. 그리고 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길 바라마.’

그렇게 말한 일레나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모습이 오로라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에스텔라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맨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가 이내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엄마….’

여덟 살 이후로 만난 적 없었던 그리운 엄마.

에스텔라는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두 눈을 깜빡였다.

‘회귀자들의 영혼은 일부 이 책에 담겨 있단다. 일레나가 널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줬어. 내 딸. 어디 보자. 예쁘게 자랐구나.’

오로라는 상상만 해 왔던 자신의 딸을 실제로 본 것이 기쁜 듯 한참 동안 에스텔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대화를 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이들은 어떻게 컸는지 등등 보통의 엄마와 딸이 나눌법한 흔한 이야기들이었다.

에스텔라는 그 흔한 이야기를 어머니와 나눠 본 적이 없었기에 그 소소한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엄마. 나, 엄마가 준 편지를 읽었어요. 나, 나는 엄마를….’

에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오로라에게 응석을 부렸다. 맞은편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오로라를 껴안았다. 이내 오로라의 무릎에 얼굴을 묻자 다정한 손이 에스텔라의 등을 쓸어내렸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에 에스텔라는 또 코가 시큰해졌다.

오늘 대체 몇 번을 우는 건지.

‘에스텔라.’

‘네 엄마.’

‘잘 선택했단다.’

‘….’

‘잘 선택했어. 내 딸.’

그와 동시에 다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에스텔라가 급히 말했다.

‘엄마랑 좀 더 있고 싶어요.’

‘에스텔라. 항상 네 곁에 있는데 아쉬워하지 마렴.’

‘엄마….’

‘벤자민에게 전해주겠니? 그날, 책을 읽지 않아서 정말 고맙다고. 잘 참았다고.’

*

델라와 아르텔이 아침 일찍부터 입궁했다.

어젯밤 에스텔라는 금서의 맨 마지막 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받자마자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에스텔라 님,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아직 더 쉬셔야 하지 않을까요.”

에스텔라는 두 사람을 온실로 불러냈다. 그 자리에는 벤자민과 이자크도 있었다. 델라와 아르텔 둘 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는지 가만히 에스텔라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델라. 아르텔. 너희들에게 말해줄 것이 있어.”

의자까지 준비된 것을 보면 짧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인지, 델라와 아르텔이 얼른 의자에 착석했다.

에스텔라는 모든 이야기를 말해줬다. 마지막 장이 펼쳐졌을 때 자신이 누굴 만나고 어떤 이야기들을 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결정을 했는지.

“…나는 금서를 파괴할 거야. 너희는 더 이상 기억을 잃고 책 속에 갇히지 않아도 돼. 자유가 되는 거야. 내 옆에서 더는 나만을 위해 살지 않아도 돼. 너희 하고 싶은 거, 여행을 가도 좋고 공부를 해도 좋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델라와 아르텔은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회귀자를 섬겨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회귀자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 회귀자가 도중에 죽어버리면 다시 책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이 끝이었다.

권능은 모조리 빼앗겨 책에 봉인되었기에 제대로 된 능력도 쓰지 못했다. 회귀자가 기억에 혼란이 오면 규칙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맞는 길로 인도해야만 하는, 오로지 회귀자들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던가.

벌이었잖아. 우리가 받는 건 형벌이었잖아. 회귀자들의 말로를 지켜봐야 하는 형벌.

“…자유요?”

“저희가요?”

그런데 에스텔라는 자유를 준다고 한다. 금서를 파괴할 거라고 한다. 당황한 델라가 얼른 우왕좌왕 말을 이었다.

“금서를 없애는 건, 더 이상 회귀 권능을 쓰지 못한다는 소리예요, 에스텔라 님. 그래도 괜찮으시다는 건가요?”

“응. 괜찮아. 마음을 바꿀 일은 없을 거야. 너희만 괜찮다면 지금 당장 동굴로 내려가서 책을 파괴할 생각이야.”

델라와 아르텔이 가만히 서로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단호해 보였다.

“내려가 볼까?”

에스텔라의 말에 델라가 허둥대며 말했다.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 보세요, 아직 루시 님과 루스 님, 루멘 님도 크려면 멀었는데 어떤 비상사태가 일어날 줄 알고 이제는 회귀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거예요.”

델라는 마치 금서를 파괴하지 말라는 듯 만류했다. 아르텔이 옆에서 그런 델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가 되는 것은 기쁘지만,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가깝든 멀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책을 보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델라와 아르텔의 입장은 그랬다.

“이제 회귀하지 않을 거야. 혼자 짊어지지도 않을 거고. 그 책은, 자꾸만 욕심을 가지게 해. 수많은 사람이 강가에 수몰되어 있던 거 너도 봤잖니.”

이번이 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에스텔라는 금서를 파괴하는 것만이 앞으로의 미래를 가장 현명하게 맞이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인간에게 신의 능력은 독이야.

알면서도 자꾸만 원하게 되는 달콤한 독.

신과 인간이 나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 신은 감정이 없고 이성만 존재해. 하지만 인간은 감정이 있어. 어쩔 땐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기도 하지. 그 불완전한 생물체에게 완벽에 가까운 능력은 재앙일 뿐이다.

에스텔라의 생각을 눈치챈 델라가 가만히 제 드레스 자락을 꾹 잡았다.

“금서가 파괴되면 저희는 권능을 돌려받게 돼요. 만일 그러다가 또 악신이 되어버리면요?”

“악신이 되지 않게끔 너희가 스스로를 조절해봐. 어쩌다 악신이 된 것인지, 왜 너희의 능력을 스스로도 조절하지 못하는 건지.”

에스텔라는 냉정하게 말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단순히 아무 생각 없이 회귀자들을 보필해오지는 않았을 거 아니니. 강가에 수몰된 그 많은 사람을 떠올려. 그게 너희가 악신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야.”

먼 형제이자 조상이기도 한 그들이 이제 회귀자와 책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자신의 능력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결국 델라와 아르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파괴하러 가요, 에스텔라 님.

다섯 사람이 다 같이 동굴로 내려갔다. 벤자민은 이자크에게 업혀 동굴 아래로 내려가면서 긴장되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이자크 역시 일전의 기억을 떠올린 듯 긴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동굴은 평범했다. 강물도, 시신도 없었다. 대신에 부식되어 바스러진 것 같은 가루들이 마른 강바닥을 빼곡 채우고 있었다.

벤자민과 이자크는 그게 어떤 가루인 건지 알 것 같았다.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단상 위에 올려져 있는 책을 바라봤다.

“….”

“에스텔라?”

“에스텔라야?”

“에스텔라 님?”

가만히 책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에스텔라에게 다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스텔라가 가만히 책을 들여다봤다.

“…이, 일레나가 가면 뭘 하게 될지 알 거라고 했는데….”

당황스러운 얼굴로 에스텔라가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일전에는 저 혼자 잘만 넘어가더니, 이제는 보통의 책인 양 가만히 있는 거야?

비장하게 내려왔는데 막상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에스텔라가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일레나 뭐라도 좀 해 봐요! 당신이 금서라면서!”

아예 책을 붙잡고 말까지 거는 모습에 나머지 네 사람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에스텔라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였다.

[책의 파괴를 바라는 회귀자여]

기묘한 바람과도 같은 음성과 함께, 책이 에스텔라의 손에서 빠져나오더니 동굴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햇빛처럼 어두운 동굴을 훤히 비췄다. 다들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리며 눈을 찌푸렸다. 그 빛은 책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났다.

이내, 폭약이 터지는 듯 강력한 압력과 함께 바람이 일대를 휩쓸었다. 강물 바닥에 잔존하던 뼛가루들이 바람에 날려 동굴 이곳저곳을 부유하다 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에 빨려 들어간 뼛가루들이 자취를 감추자 그 안에서 강물이 터져 나왔다. 하늘에서 내리는 소나기처럼 비가 내려왔다. 동굴 전체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그 비를 맞았지만 신기하게도 몸이 젖지 않았다. 에스텔라가 가만히 손을 뻗어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비를 맞았다. 자세히 보니 비가 아닌,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비가 내린 자리마다 새싹과 풀이 빠른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풀이 우거졌다. 바위틈에서 자란 꽃들은 넝쿨처럼 벽면을 타고 올라갔고 흙바닥은 푸릇한 잔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에스텔라는 그 광경이 꼭 일레나를 만났던 정원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거대한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팡, 팡 터지는 소리가 가득 메웠다.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한 번 더 터짐과 동시에 점점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은은한 빛을 뽐내는 것은 일레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동굴 안을 꽉 메우는 커다란 빛의 일레나가 고개를 숙이더니 에스텔라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걸로 책을 찌르렴.]

오로라 빛이 영롱한 오팔 보석이 한가운데에 박혀있는 가느다란 장검이었다. 에스텔라가 검을 집어 드는 순간 미세한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 검은 일레나가 메라 신에게 승리의 권능 얻은 뒤 군사의 선두에 서서 적군을 무찌르고, 메시앙의 왕이 되었을 때 들고 있었던 검이었다.

에스텔라가 지체 없이 검을 들었다. 하늘 높이 떠 있던 책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든 일레나가 에스텔라 앞으로 책을 가져다줬다.

[네가 한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

에스텔라가 그대로 검을 책에 꽂아 넣었다. 금서에 칼이 꽂히자 그 사이로 빛이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후회하지 않아요. 난 나를 믿고, 이자크를 믿고, 날 사랑하는 사람들을 믿으니까.”

터져 나온 빛들이 델라와 아르텔의 몸 안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봉인 당했던 자신의 권능이 제 몸에 돌아온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초월적인 에너지가 자신의 몸을 휘감는 느낌에 델라와 아르텔은 기쁨과 두려움으로 온몸이 덜덜 떨려 주저앉고 말았다.

커다란 일레나의 빛은 에스텔라의 얼굴에 입맞춤을 했다.

[그 검을 잘 간직하렴. 그 검은 승리의 권능을 지닌 검이야. 이걸 네가 가지고 있는 한, 너와 메시앙 왕국은 항상 신의 가호를 받게 되는 거다. 나, 승리의 여신 일레나의 가호를.]

일레나가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이내 동굴 천장을 검지로 콕 찔렀다. 그러자 따스한 빛이 왕궁 전체로 퍼져 올라갔다.

그날 메시앙의 백성들은 왕궁에서부터 올라온 찬란한 황금빛이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 후에 그들은 그날을 ‘신성날’로 지정하였다.

일레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신전 안쪽의 델라와 아르텔을 쳐다봤다. 이내 온몸이 황금빛을 내뿜던 일레나가 사라졌다.

일레나가 사라지자 반딧불이 마냥 작은 빛들이 동굴 위로 내렸다. 에스텔라는 이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빛은 처음인지라 가만히 눈을 감고 빛을 느끼다 이내 자신이 찌른 금서를 내려다봤다.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던 전과는 달리 이제 그 안에는 어떠한 글자도 써져 있지 않았다. 에스텔라가 책을 들어 올리자 오랜 시간 정체되었던 시간이 급히 흐른 것처럼 책이 빠른 속도로 변색되더니 이내 바스러졌다.

에스텔라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회색 가루들이 모래알인 양 후두둑 떨어졌다. 이제 더 이상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다른 무엇도 아닌 승리의 가호를 받는 이였다.

에스텔라는 마지막 손바닥에 묻은 가루들을 탈탈 털어 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음 가득해진 동굴을 한 번 둘러본 뒤 얼띤 표정으로 연신 제 몸을 뒤적대며 확인하는 델라와 아르텔을, 무언가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아버지를, 그리고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는 이자크를 바라봤다.

메라의 금서는 사라졌다.

더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로 나아갈 거란 뜻이기도 했다.

*

금서가 파괴된 날 밤 에스텔라가 벤자민을 찾아왔다.

“에스텔라. 이 시간에 남쪽 궁에는 웬일이냐.”

“자기 전에 문안 인사 좀 드릴까 싶어서요.”

그렇게 말한 에스텔라가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그녀처럼 쪼르르 달려와 침대에 앉아있는 벤자민을 꼭 껴안았다. 벤자민은 그런 에스텔라의 등을 토닥였다. 애 셋이나 되는 엄마와 한 나라의 국왕이 되었음에도 벤자민의 눈에는 그저 어리고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아있던 벤자민의 허벅지에는 책이 엎어진 채로 놓여있었다. 책등에 제목은 쓰여 있지 않았다.

“책 읽고 계셨어요?”

에스텔라의 질문에 벤자민이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책을 들어 올렸다. 자세히 보니 책 모양을 한 보관함이었다.

보관함을 펼치자 색이 바랜 종이들이 돌돌 말려있기도, 봉투에 접혀 있는 것이 보였다.

에스텔라는 그 편지를 주고받은 상대가 어머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에스텔라가 가만히 벤자민을 쳐다보자,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냥 오랜만에 책상을 정리하다 발견했지 뭐냐.”

거짓말이었다. 누가 이 야밤에 중앙 궁의 서재까지 가서 책상 정리를 하겠는가. 벤자민은 대충 둘러대며 편지보관함 박스 끄트머리를 만지작댔다.

“어머니가 많이 그리우시죠.”

“…어찌 안 그리워하겠느냐. 평생을 사랑했던 여인인데.”

오로라가 죽고 난 뒤 공석이 된 왕비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가신들은 차고 넘쳤다. 벤자민은 공주에게는 믿고 의지할 어머니가 필요하다며 제 딸을 추천하는 가신들을 모조리 무시해버렸다.

공주가 아닌 왕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러니 나라를 위해서라도 새 왕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 간청들을 무시하기까지 6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몇 번 등쌀에 못 이겨 공작가의 장녀를, 후작가의 막내딸을, 이웃 나라 공주와도 만남을 가져봤지만 그녀들 모두 벤자민의 옆에 설 수 없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그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라가 아니면 벤자민의 아내, 메시앙의 왕비, 에스텔라의 어머니라는 자리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에스텔라도 그쯤은 잘 알고 있었다.

버트랜드는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여버렸다 말했다. 그건 그를 몰라서 하는 이야기였다. 아니, 벤자민과 오로라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감히 가늠조차 하지 못할 오만한 발언이었다.

에스텔라는 편지를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어제, 동굴에서 쓰려졌을 때요. 거기서 어머니를 만났어요.”

“……”

“아버지. 오늘 금서가 파괴될 때 어머니를 보신 거 맞죠.”

금서를 파괴하고 나온 뒤부터 벤자민은 말이 없어졌다. 에스텔라는 금서에서 반딧불이 같은 빛들이 천천히 떨어질 때 벤자민이 허공에 손을 뻗는 것을 봤다.

벤자민이 살풋 웃음을 흘렸다. 씁쓸한 미소였다.

“그건 그냥, 환영이었단다.”

“환영이 아니에요, 아버지.”

“…응?”

“그건 실제 어머니가 맞아요.”

회귀자의 영혼은, 금서가 파괴되지 않는 한 그 일부가 책에 갇히게 된다. 어디서 죽든, 뭘 하다 죽든 모두 그 영혼의 일부가 이곳에 갇히게 된다고 했다.

회귀자들은 몇 번이고 시간을 거스른 죄를 저질렀어. 금서가 파괴되기 전까진 윤회도 하지 못한 채 책에 영혼의 일부를 봉인 당하고 말아.

에스텔라. 네가 금서를 파괴한다고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네가 만일 금서를 파괴하지 않았다면, 너 역시 영혼의 일부가 이곳에 묶여 환생하지 못했을 거야.

오로라는 자신의 딸이 차후 죽게 되었을 때 이곳에 갇히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책 속의 세상은 무. 아무것도 없는 심연뿐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자신의 딸이, 이곳에 갇혀 금서가 언제 파괴될 줄 알고 끝없는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 걸 어느 어미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태초의 신은 규칙을 정해놓았다. 금서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규칙을 정했다. 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과거가 있으면 미래가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죽음을 맞이하면 그 상태로 소멸되는 것이 아닌 다시 한번 윤회를 하여 환생을 하게끔 만들었다.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전해달라 한 말이 있었어요.”

그날, 책을 읽지 않아서 정말 고맙다고. 잘 참았다고.

에스텔라의 말에 벤자민이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버지?!”

등을 둥글게 말고 한참을 덜덜 떨던 벤자민을 에스텔라가 꽉 껴안았다. 한참 동안 울음을 참던 벤자민이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허리를 폈다. 아버지의 두 눈이 보기 드물게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에스텔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날, 아버지한테도 동굴 문이 열렸던 건가요?”

“……그래.”

벤자민은 그를 떠올렸다.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로라. 그대가 남긴 유언이었으니까. 내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으니까.

오로라가 죽고 장례식을 치르던 날.

“그래. 동굴 문이 열렸었단다.”

책이 벤자민을 불렀다.

[외전 1-5 둘이 했던 약속]

벤자민, 사랑하는 나의 벤자민. 부탁이 하나 있어요.

무엇을, 오로라. 뭐든 말해주시오. 내 그대의 부탁은 모두 이루리라.

벤자민. 동굴 문이 열려도 그 안에 들어가지 마세요. 그 책을 절대, 읽지 마세요. 날 절대 살리지 말아요.

오로라, 지금 내게 당신을 포기하라는 말을 하는 거요.

포기가 아니에요. 약속해요, 벤자민. 절대 날 살려내지 않기로. 절대로 동굴에 현혹되지 말아요. 날 살려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을게요. 내 육신은 없어도 내 영혼은 당신의 것이니까.

벤자민은 자신에게 말하던 오로라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이는데, 녹음이 가득 찬 녹색 눈동자에서 생명력이 꺼지는 것이 훤히 보이는데도 그녀는 단호했다.

내가 죽어도 날 절대 살리지 말라.

그게 사랑하는 남편에게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오로라는 죽었다. 마지막까지 약속해줘요. 약속이에요. 꼭, 지켜줘야 해요. 하던 오로라가 이내 마지막 숨마저 빠져나간 듯 축 늘어졌다.

그녀의 손에서는 약병이 도륵 떨어져 내렸다. 그날 벤자민의 기억은 드문드문 났다. 온몸의 피가 빨려 나가는 것이 이런 것일까.

뒤이어 오로라의 시녀와 그의 호위기사가 달려 들어왔다. 이미 숨이 멎은 그녀를 붙잡고 흔들며 눈물을 흘려대던 이들은, 다시 허탈하게 서로를 지탱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벤자민은 그들이 와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눈물을 쏟고, 뒤에서 주치의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숨죽여 우는 동안 벤자민은 자신이 어째야 할지를 생각했다.

오로라의 장례식은 이틀 뒤에 열렸다. 그렇게 빨리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로라가 몰래 뒤에서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해왔기 때문이었다.

왕비의 장례식 때 수많은 귀족이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통곡의 자리에서 벤자민은 가만히 제 옷자락을 쥐고 있는 에스텔라를 껴안았다.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관 안에 희고 차가운 오로라가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빠. 엄마는 죽은 거예요? 그럼 언제 돌아오는 거예요?”

아직 ‘죽다’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에스텔라가 벤자민의 목을 껴안은 채로 물었다. 순진한 눈망울에는 깊은 절망도,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잠시 먼 여행을 떠났단다, 에스텔라. 이 세계가 아닌 저 하늘 너머 우주로 떠난 거란다. 알고 있지 에스텔라? 엄마는 모험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잖니.”

항상 널 데리고 잠행을 나가거나, 함께 뒷동산을 오르기도 했으며, 항상 에스텔라에게 메시앙 왕국과 거대한 바다 넘어 지구라는 거대한 행성에 대해 말해주곤 했었잖니.

그 말에 에스텔라가 이해를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의미 모를 얼굴로 고개를 갸웃대다 물었다.

“그럼 엄마는 지금 여행 중인데 왜 다들 우는 거예요?”

“그야 당분간은 보지 못하니까.”

“그럼 에스텔라도 엄마 못 봐요? 아빠도 엄마 못 봐요?”

“여행을 끝날 때까지는 우리 둘 다 엄마를 못 본다. 에스텔라, 엄마를 위해 꾹 참을 수 있겠니? 언젠간 우리 셋 다 다시 만나게 될 거란다.”

그러자 에스텔라가 다시 벤자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네. 꾹 참을 수 있어요. 벤자민은 그런 에스텔라의 등을 토닥였다. 아까 전부터 머리가 어지럽고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국왕께서 이리 굳건히 버텨주시니, 저희는 한시름 놓았습니다.

가신들이 벤자민에게 한 말이었다. 한나라의 국왕이 무너지시면 안 됩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나, 전하께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시지 마십시오. 적어도 장례가 끝나기 전까지는요.

충신의 말에도 벤자민은 미동이 없었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으며 그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오히려 오로라에게 미안해질 법도 했다.

오로라의 소꿉친구이자 나의 친우이기도 한 버트랜드도 저렇게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데, 난 왜 아무렇지 않은 건가.

내가 오로라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가.

벤자민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장례식이고 뭐고 너무 피곤하고 무기력하여 침실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저 혼자 있고 싶다. 제 다리에 매달리는, 오로라를 빼다 박은 제 딸도 지금만큼은 유모에게 맡긴 뒤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3일간의 장례가 끝나고 오로라의 관을 선대 왕비들의 관을 모아둔 당에 넣는 날이 되었다. 선대 왕비들의 관을 모아놓은 커다란 궁에서는 오로라의 관이 들어갈 자리가 마련되어있었다.

원래 메시앙에서는 왕비든 왕이든 죽으면 모두 흙 속에 파묻은 뒤 그 위에 묘비를 세워야 했다.

관 모양대로 깊은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오로라의 관을 넣었다. 티끌 하나 없이 새하얀 관 위로 흙들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오로라의 관은 보이지도 않았다. 흙으로 덮여 봉긋하게 솟아오른 땅 위에 화려하게 조각된 묘비와 가짜 관이 세워졌다.

[오로라 데 메시앙 여기 잠들다]

그 짧은 문구를 보는 순간 벤자민은 구토감이 밀려왔다.

그대로 도망치듯 궁전을 빠져나왔다. 정원에서 결국 제 속에 든 것들을 한차례 게워냈지만, 나오는 것이라고는 위액뿐이었다. 그는 오로라가 죽은 뒤부터 도통 입맛이 없어 먹질 않았다.

“허억, 허억….”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닦아낸 벤자민이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렸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잠시 산등선 너머 지고 있는 주황색 태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벤자민이 조만간 뭔가를 퍼뜩 떠올린 듯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지금쯤이면 오로라가 온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겠군. 티 타임은 항상 같이 갖자고 했었는데 한 소리 듣겠어. 벤자민은 비틀거리면서 오로라가 자주 가던 온실로 향했다.

남쪽 궁에 있는 온실 안으로 들어가자 오로라의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오, 오로라. 내 잠시 그대와의 약속을 잊고 있었어.”

‘당신도 참. 너무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에요. 대체 어딜 가 있었던 거예요?’

“미안해, 장례식을 다녀오느….”

평소처럼 오로라의 손을 잡으려던 벤자민이 말끝을 흐렸다.

‘장례식? 누가 죽었나요?“

“…….”

누가 죽은 거냐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오로라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만질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신이 죽었어….”

오로라, 당신이 죽었어. 당신이. 벤자민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그래. 오로라는 죽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시신을 마주했고 마침내 그 관이 땅에 묻히는 것까지, 그 위에 묘비가 세워지는 것까지 이 두 눈으로 확인했지.

벤자민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주저앉는 거로도 모자라 제 가슴팍을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운 듯 데굴데굴 굴렀다. 아악, 아아악! 오로라가 죽었어, 오로라가 죽었다고! 발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벤자민이 절망에 몸부림쳤다.

어쩜 이렇게나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차라리 쇠꼬챙이로 몸을 헤집어놔도 이것보단 덜 아플 것이 분명했다.

사랑하는 오로라가 죽었다.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무능할 수가 있을까. 어쩜 나는 이렇게 무능할까.

깊은 자책과 슬픔이 그를 잠식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온실 끝자락에 있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던 거대한 돌덩이. 장정 수십이 와서 힘껏 밀어 대도 절대 밀리지 않았던 그 문이 스스로 열렸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가? 안으로 들어오거라. 동굴 안에 들어와 나를 받아들이거라]

그 책이 벤자민을 불렀다. 사랑하는 아내를 돌려줄 수 있다고, 네가 시간을 되돌려 사랑하는 이를 지켜낼 수 있다고.

벤자민은 멍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로라를 살릴 수 있다고?

책이 부르는 곳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니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하게 빛나는 강물을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단상 위의 책 앞에 서 있었다.

[메시앙의 군주여, 책을 읽어라. 그 책은 그대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으리라. 시간을 거슬러 사랑하는 이를 지켜내라. 지켜야만 한다. 승리의 여신의 절망하심이 내가 되었다. 나는 권능이다. 인간의 집착이 만들어낸 기적이며 저주이며 그리움이다.]

벤자민이 책장 끄트머리에 손을 가져다 댈 때였다.

오로라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벤자민. 동굴 문이 열려도 그 안에 들어가지 마세요. 그 책을 절대, 읽지 마세요. 날 절대 살리지 말아요.’

책만 손에 넣으면, 오로라를 살릴 수 있다. 에스텔라가 언젠가 죽게 될 것도, 그로 인해 오로라가 죽음을 선택한 것도 모두 알고 있으니 나는 다르지 않을까. 나는 오로라도, 에스텔라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오로라가 보고 싶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너무나도 보고 싶다.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을게요. 내 육신은 없어도 내 영혼은 당신의 것이니까.’

[주문을 읽고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라, 그리하면 나는 너에게 권능을 넘기고 네게 기적을 보여주겠노라]

벤자민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오, 오로라. 하마터면 당신과의 마지막 약속을 깨트릴 뻔했소. 그는 몸을 돌려 신전을 빠져나왔다.

[사랑하는 이를 지켜내지 않을 셈인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냐]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살면서 그때만큼 다리 움직이는 것이 힘겨웠던 적은 없을 것이다. 그의 그림자는 진득이 벤자민의 다리를 물고 늘어졌다.

가지 말라고, 책을 읽어서 오로라를 살려내라고. 모두가 행복해져야 한다고.

강가로 되돌아간 벤자민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오로라…!”

강물 안에 수몰되어 있는 오로라의 시신을 건져낸 벤자민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미동 없는 그 얼굴은 자신이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관 속의 오로라와 똑같았다.

강 안으로 들어간 벤자민이 그 안에서 여러 명의 오로라를 발견했다. 주변에는 얼굴도 모를 이들이 몇 명씩 같은 얼굴로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곳에서 벤자민은 공포과 슬픔을 느꼈다.

‘에스텔라는 내 딸이에요. 그 애에게도 언젠가 동굴의 문이 열릴 거에요. 아마 그 애가 처음으로 좌절하게 될 때겠지요.’

‘벤자민. 에스텔라를 철없게 키워줘요. 고통과 슬픔은 모르는 어린 철부지로 키워줘요.’

그제야 벤자민은 오로라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자신이든 에스텔라든.

벤자민은 품속에 누워있는 오로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오로라, 내 에스텔라는 꼭 지키리다. 그대가 원한대로 절망도 아픔도 모르는 새하얀 아이로 키우리다. 부디 그 아이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리다. 사랑하오, 사랑해, 오로라.”

“그렇게 노력을 했건만, 내 버트랜드한테 당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어.”

벤자민이 고개를 슬슬 내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버트랜드가 그런 짓을 벌였다는 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특히나 벤자민과 에스텔라에게는 더더욱 특별하고 소중한 인연이었으니까.

“버트랜드가, 오로라를 아끼는 건 알고 있었어. 둘은 소꿉친구였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벤자민은 아직도 법정에서 마주한 버트랜드를 잊을 수 없었다.

“…또, 날 그렇게까지 원망할 줄도.”

죄를 저지른 건 그쪽인데. 어쩜 그리도 뻔뻔하게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휠체어에 앉은 벤자민이 증인석에 올라가는 순간 얼굴에 반지르르하게 펴진 철판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버트랜드는 누굴 원망할 자격이 없어요, 아버지.”

에스텔라가 얼른 벤자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외전 1-6 사막의 모래]

다음 날 서쪽 사막지대에 주둔하고 있는 카루체 족장에게서 서신이 왔다. 사막지대의 모든 도적을 토벌했다는 서신이었다.

마침 사막지대에 짓고 있는 새로운 상업지구 건설을 위해 에스텔라와 이자크, 그리고 루시와 루스가 사막지대로 발걸음을 향했다.

마차에 탄 아이들이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둘러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길 반복했다. 초록빛의 들판은 수없이 봐왔어도 태양 빛 가득 머금은 사막의 모래 언덕은 처음이었던 것이었다.

“엄마! 저기, 저기 봐! 온통 같은 색깔이야!”

“다 똑같이 햇님 색깔이네!”

신기해하던 것도 잠시 뜨거운 햇살에 아이들은 연신 물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메시앙의 사막은 에테리아의 사막보다 악명이 덜하여, 더위로 인해 사람이 쓰러진다거나 죽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기다란 행렬 끝에 카루체 족이 지내고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왕의 행차에 카루체 족 대부분이 마을을 화려하게 꾸미고 그들을 앞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본디 대륙의 원주민이었던 그들이 이민자들에게 땅을 빼앗겨 오갈 데 없어졌다는 것은 카루체 족의 입장에서는 꽤나 어이없는 일이 분명했다. 에테리아에서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기 일쑤였고, 사실 메시앙에서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에스텔라는 카루체 족과의 회담을 통해 사막지대를 그들의 터전으로 내어줬으며, 협정을 통해 그들의 독립적인 구역으로 인정해 줄 예정이었다.

“이곳까지 오느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저희 측에서 미리 숙소를 준비해 뒀으니 여독을 푸십시오.”

카루체 족장과 그의 아내가 얼른 메시앙의 왕족을 맞이했다.

아이들은 이국적인 풍경에 금방 기운을 차려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어엿한 공주와 왕자기에, 시종과 시녀들이 얼른 그들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녔다.

카루체 족이 꾸려놓은 마을은 생각보다 체계적이고 또 생각보다 더 어엿한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도시가 안정을 찾은 거 같군요, 아야칸.”

에스텔라가 족장이 지내고 있는 높은 건물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다 전하 덕분입니다. 사비로 저희 터전까지 도와주시고,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카루체 족장 아야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들은 에스텔라에게 은혜를 꼭 갚겠다며 충성을 맹세했다. 굳이 힘으로 압박하거나 협박하지 않아도 얻어낸 충성이 아니었기에 더 질기고 튼튼할 것이다.

“아닙니다. 저희는 이제부터 공생할 관계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에스텔라가 잠시 저 멀리 보이는 높고 낡은 탑을 쳐다봤다. 에스텔라의 시선을 눈치챈 카루체 족장이 슬며시 말했다.

“가보시겠습니까?”

버트랜드가 갇혀 있는 탑.

에스텔라는 몇 달 전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에스텔라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재판에서 진 버트랜드는 그대로 사막지대로 추방당했다. 흉악범만이 사막지대 탑에서 혼자 지내게 되고 그가 쉽게 죽어버리지 못하도록 보초병들이 교대하며 그를 감시한다.

처형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라고도 불리는 사막의 돌탑. 그곳에서 버트랜드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에스텔라는 창살 너머 꼬질꼬질해진 그에게 다가갔다.

“재판 이후 오랜만에 보는군요.”

“….”

관리하지 못해 떡 진 수염, 빨지 못해 더러워진 옷가지, 좁은 감옥과 그 옆에 위생적이지 않은 푸세식 변기까지. 한때 한나라의 왕이었던 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와 동시에, 제 나라와 백성을 팔아넘기려던 이와는 매우 잘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반성은 좀 하셨으려나요. 아마 안 하셨겠죠.”

“….”

버트랜드는 별다른 대답 없이 에스텔라를 노려볼 뿐이었다. 에스텔라는 그런 그의 모습마저도 용서할 수 없었다. 버트랜드를 향한 에스텔라의 감정은 사실 매우 복잡했다.

대부로서 믿고 따르던 그 시기가 너무나도 잊히지 않았으며 그와 동시에 아버지와 이자크의 가족들까지 몰살하려 했던 그가 혐오스럽기도 했다.

생각보다 고통받지 않는 듯한 버트랜드의 모습에 에스텔라는 심기가 거슬렸다.

어떻게 해야 버트랜드가 뼈저리게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고문? 그 정도로는 에스텔라의 성에 차지 않았다.

처형? 곱게 죽여 줄 생각 따윈 없다.

잠시 고민하던 에스텔라가 보초병에게 가서 의자를 가져오라 명했다. 의아한 얼굴로 의자를 건넨 보초병을 잠시 물린 에스텔라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촘촘한 창살을 사이에 두고 에스텔라와 버트랜드가 마주 봤다.

에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와 아버지를 원망할 자격이 없어요. 그리고, 내 어머니에게 감히 그런 감정을 품었다 말할 자격도 없고요. 당신은 애초부터 자격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그제야 버트랜드의 공허한 눈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에스텔라가 그런 버트랜드를 쳐다보며 비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지켜낼 각오조차 없으면서. 버트랜드. 내가 이자크와 아이들을 당신으로부터, 나로부터 지켜내기 무슨 짓을 했는지 당신이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모든 걸 말해주기로 했다.

당신이 이 모든 진실을 알고도 그런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일말의 죄책감도, 공포도, 허무도, 슬픔도 느끼지 않을지.

맨 처음 그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사람이 과거로 돌아간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하지만 버트랜드는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에스텔라는 처음이었던지라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로라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당황스러움에서 당혹스러움으로, 그리고 분노에서 허무함으로 이어졌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에스텔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버트랜드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러니까, 오로라는 죽음을 선택한 거라고. 너를 살리기 위해서?”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에는 그렇게 써져 있었어요. 믿든 말든 당신 마음이지만.”

에스텔라는 마지막 그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뭘 물어볼지 너무나도 훤히 보였다.

“형님에게는 그 동굴 문이 열렸다고?”

“네. 열렸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셨죠.”

당신에게는 그 문조차 열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버릴 각오조차 없었다는 거죠. 그런 사람이,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저, 당신은 정당화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 어머니를 그렇게 도구 취급하는 건 정말이지 매우 불쾌하군요.

에스텔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끝마쳤다.

맨 처음 그를 보았을 때의 분노와 혐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언저리에 아주 자그맣게 남겨져 있던 과거의 추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던 얼굴과는 달랐다.

에스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 정리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버트랜드를 보고도 화가 나지 않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지고 있던 일말의 추억들도 싸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에 버트랜드는 반성 따위 하지 않던 평온하다 못해 억울해하는 그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자격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말은 그에게 커다란 창이 되어 박혔다. 에스텔라가 원하는 대로, 예상했던 대로 그는 무너졌다.

“거, 거짓말.”

“거짓말이든 아니든 믿는 건 당신 마음이라니깐요.”

에스텔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버트랜드, 제발 피해자인 척하지 말아요. 보기 역겨우니까.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복수했다는 그런 말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저 남의 것이 탐이 났을 뿐.

차가운 시선을 남긴 채 에스텔라가 계단을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비키고 있던 보초병이 돌아왔다.

보초병은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마냥 그 자리에 우뚝 굳어있는 그를 보며 그저 조용히 혀를 찼다. 그리고 이내 뒤에서 들려오는 절규 소리에 깜짝 놀랐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으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무것도 아닌 존재.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존재. 그저 남의 것을 탐낸 좀도둑.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만 버트랜드가 그제야 무너졌다. 공든 탑이 아니었기에 그가 부서져 내려도 누구 하나 애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보초병은 그제야 성가신 듯 제 머리를 쥐어뜯고 돌바닥에 머리를 갖다 박는 그를 제지했다. 쇠사슬로 묶은 뒤 자해하지 못하도록 창살에 매달아뒀다. 뒤이어 교대를 하기 위해 온 다른 보초병이 버트랜드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뭐야. 왜 매달아뒀어?”

“자꾸 지 머리를 바닥에 내리치잖아. 전하께서 절대 자살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다고.”

“자해를 했다고? 허, 6개월 만에? 이제 와서? 죽고 싶었으면 여기 들어오기 전에 먼저 선수 쳤어야지. 쯧쯔….”

저 인간은 망나니한테도 아까운 놈이야. 쉽게 죽지 않도록 잘 감시해둬 자네도. 보초병들은 저들끼리 쑥덕이며 버트랜드를 노려봤다. 그는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로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미친 걸까?”

“미치기야 한참 전에 미쳤으니 나라를 갖다 팔 생각을 하지. 에라이 비열한 놈. 퉤.”

“반성 한번 안 하던 놈이 갑자기 왜 그랬지?”

“아까 전하께서 잠시 면회를 했는데, 그 이후부터 이상해졌어.”

전하께서도 참 다정하시지. 선왕까지 독살하려 한 놈을 한때 대부였다고 살려두시니 말이야. 어디 그뿐일까. 카루체 족까지 받아주셨잖아. 카루체 족이 사막지대에서 지내고 난 이후부터 도적 떼도 없고, 서쪽 나라랑 무역도 더 활발해졌어.

이게 다 전하께서 성군이시기 때문이지.

그들은 에스텔라를 찬탄했다.

철창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얼굴에 피가 쏠린 버트랜드가 가만히 생각했다.

전하께서도 참 다정하시지.

보초병의 말에 버트랜드가 허탈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에스텔라가 다정하다고? 날 살려둔 게 정이 많아서 그런 것 같으냐?”

버트랜드의 말에 저들끼리 떠들던 보초병 중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창 뒤쪽 뭉툭한 꼬챙이로 그의 옆구리를 세게 찌르며 말했다.

“어딜 감히 전하의 존함을 입에 담아? 네놈이 함부로 부를 이름이더냐? 목숨 부지 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 은혜도 모를 쓰레기 같으니라고.”

옆구리에 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세게 찔렸지만, 버트랜드는 그쪽의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실성한 사람처럼 계속 웃어댔다.

감히 웃음이 나오냐며 그들에게 두들겨 맞다 정신을 잃은 버트랜드가 슬며시 눈을 떴다. 온몸이 욱신댔다. 입안을 우물거리던 그가 퉤 이빨 몇 개와 피를 뱉어냈다.

창살 너머 보이는 창문으로 해가 지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창살에 거꾸로 매달려 해가 지는 것도, 사막의 똑같은 풍경도 거꾸로 보였다.

그는 앞으로 이곳에서 쭉 살아야 한다.

에스텔라는 쉽게 자신이 죽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

그 애가 다정한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만든 것도 자신이라는 걸 버트랜드는 잘 알았다.

당신에게는 그 문조차 열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자격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거라고요.

당신은 그 어떤 것도 바꿀 힘이 없었다고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 에스텔라는 끔찍한 진실을 알려줬다. 그가 반성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도 그를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거꾸로 매달린 버트랜드의 눈에서 절망에 가득 담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에스텔라의 승리였다.

외전 2.

[외전 2-1. 그 많던 꽃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니까, 모든 발단은 메시앙에 조금 요상한 이름이 붙은 날이 생기고 나서부터였다. 그건 바로 <로맨틱 하트 데이>라는 것이었는데, 그날 하루만큼은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꽃을 선물하는 그런 날이었다.

매년 5월 14일은 로맨틱 하트데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트 사의 초콜릿과 꽃 한 송이를 선물하세요!

최근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하트 사에서 내건 슬로건이었다. 하트 회사는 이국의 기업체 중 하나로 몇 달 전만 해도 저들끼리 경영권으로 싸우느라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기사회생했다.

하트 가문의 숨겨진 막내딸이 회사를 인수 받았다고 하던데, 그 막내딸이 어찌나 장사 머리가 잘 돌아가던지. 축제가 많은 오르고 달에 맞춰 <로맨틱 하트 데이>를 열었고, 덕분에 하트 사의 초콜릿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래봤자 상술이지. 상술.”

에스텔라는 오르고 달이라 축제가 한창인 도성을 내려다보며 코웃음 쳤다. 하트 사에서 만든 커다란 하트 모양 풍선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있다.

창가에서 몸을 돌린 에스텔라가 다시 책상으로 몸을 바로 하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장을 팔랑댔다. 그러다가 괜히 그 옆의 서류들도 만지작대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뒤쪽 문이 열리면서 미엘라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들어왔다. 손에는 장미 한 송이와 하트사의 리본 포장된 초콜릿이 들려있었다.

“어, 전하!”

“…뭐야, 그거?”

미엘라가 얼른 선물을 제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아, 그게. 그. 받았어요.”

“…누구한테?”

왕궁 내 연애 금지. 가 원래 법도에 맞지만. 남녀상열지사랬다. 어찌 자연스러운 감정을 막겠냔 말이다. 에스텔라도 굳이 연인들을 찾아내어 반쪽으로 찢어버릴 생각은 없었고, 미엘라 역시 에스텔라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머뭇댈 수밖에 없었다.

“헤일리 경한테요.”

“이자크의 기사단 중 한 명 아니야?”

“헤헤, 네.”

“와, 너희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 헤일리 경이 그걸 줬다고? 헤일리 경이랑 이자크랑 요 며칠 합숙 훈련으로 같이 있었을 텐데, 그럼 이자크도 헤일리 경이 하트 사 초콜릿 사는 걸 봤겠네?”

미엘라가 머뭇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방금 에스텔라의 말로 설명이 되었다.

그렇다. 미엘라는 하트 사의 초콜릿과 꽃 한 송이를 받았고 에스텔라는 받지 못한 것이었다. 심지어 헤일리 경과 이자크는 오합지졸 왕실 병사들을 집중 훈련시키려 며칠 동안 합숙까지 떠난 상태였는데 말이다!

빠직.

땅콩을 주먹으로 내리친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미엘라는 에스텔라의 이마 위에 솟아난 힘줄을 보고 가만히 침을 삼켰다.

“그, 그게 말이죠. 아! 제가 떼를 썼어요. 제가! 헤일리 경한테 저도 로맨틱 하트 데이 날 받아보고 싶다고 생떼를 부려서… 그래서 헤일리 경이 억지로 사다 준 거예요!”

물론 거짓말이다.

사실 오늘 헤일리 경에게 초콜릿과 꽃 한 송이 그리고 로맨틱한 고백까지 함께 듣고 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기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다 못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을 정도였다.

“거짓말.”

미엘라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 거짓말을 할라치면 식은땀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말을 더듬는 체질인지라. 오랜 시간 미엘라와 친구처럼 지냈던 에스텔라에게는 지금 미엘라의 뒷목을 흠뻑 적신 식은땀이 눈에 들어왔다.

에스텔라가 가자미 눈으로 하며 미엘라를 쳐다보자 결국 미엘라가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이자크 님! 어째서 초콜릿을 준비하지 않으신 거냐고요!

에스텔라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며 매초롬한 얼굴로 말했다.

“됐어. 어차피 하트 사의 상술이야. 상술이라고. 난 게다가 초콜릿 별로 안 좋아해. 난 마카롱이 더 맛있거든.”

“그쵸? 초콜릿 그냥 진흙 먹는 기분이랄까요.”

“미엘라. 입 옆에 묻은 초콜릿이나 닦고 말해.”

“헛….”

얼른 입가 주변을 쓱쓱 닦아내는 미엘라를 보며 에스텔라가 흥. 콧방귀를 꼈다.

이자크. 진짜 이럴 거다 이거지.

진짜,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정말 합숙 기간 끝날 때까지 안 돌아온다 이거지.

일전에 하트 회사의 대표를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로맨틱 하트데이를 만든 이유가 뭔지 짧고 간결하게 말하던 여자였다.

‘이를테면, 소소한 표현인 겁니다, 전하. 저희는 초콜릿만 팔지만, 초콜릿을 받은 사람은 그 안에 담긴 마음도 같이 받는 거니 가성비로는 최고지요.’

대단한 선물을 주는 게 아니더라도 그 속에 당신을 떠올렸다는 일종의 증거.

다 똑같은 초콜릿에 꽃 한 송이 일지 몰라도, 그걸 건네주는 이들의 마음은 다 다르니까. 별거 아니더라도 항상 확인받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게다가 남들 다 받는데 혼자만 못 받는 것도 뭔가 심기에 거슬린다.

내가 유치한 건가?

에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서른 넘은 미엘라의 기쁨으로 주체 못 하는 입꼬리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가 유치한 게 아니지.

그리고 결론이 하나 나왔다.

그저 이자크가 이런 쪽으로 너무 무심한 거야.

“난 사실 로맨틱 하트 데이 이런 거 별로 기대 안 해. 그래도 기분 좋아 보이는구나 미엘라. 축하해. 드디어 미엘라에게 애인이 생기다니. 드디어 32년 동안 묵혀놨던 휴가를 쓰겠구나.”

에스텔라의 말에 미엘라가 수줍은 듯 몸을 배배 꼬았다.

만년 솔로로 살 줄 알았던 미엘라. 드디어 애인이 생긴 것은 축하하는데. 왜 이렇게 내 목이 바짝바짝 타는 걸까. 에스텔라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외면하기란 불가능했기에 미엘라는 기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이자크 경께서는 많이 바쁘시니까요 전하.”

“그럼. 많이 바쁘지. 아, 나 절대 서운하거나 그런 거 아니란다 미엘라? 아까도 말했듯이 다 상술인 거고, 이자크는 상술에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니까. 원래 좀 무뚝뚝한 편이기도 하고. 내가 초콜릿 안 좋아하는 것도 알고….”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구차해지는 것 같아 에스텔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계속 똑같은 말만 하고 있지 않은가. 에스텔라는 부글부글 속이 끓는 것 같았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자크 당장 가서 잡아 와!”

“전하!”

“체면이고 뭐고 없어! 사실 합숙도 우리 싸웠다고 간 거잖아!”

미엘라가 익숙하게 에스텔라의 허리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사실 에스텔라가 이런 식으로 폭발하는 것은 어렸을 때도, 사춘기 때도,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있었던 일이었다.

“에라이 진짜 치사해서 못해 먹겠네!”

에스텔라는 결국 망토를 내팽개치고 말았다. 사실, 이자크와는 며칠 전부터 냉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화해를 하려면 오늘같이 초콜릿과 꽃 한 송이만 보내도 그 효과를 톡톡히 볼 것인데, 이자크는 초콜릿은커녕 그 초콜릿 빛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것 아닌가.

이제는 그놈의 합숙 때문에 밀크 초콜릿에서 다크 초콜릿처럼 새카맣게 타서 오겠지. 정작 에스텔라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사실 정식으로 싸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자크는 에스텔라에게 뭔가를 숨기는 듯했고 에스텔라는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뿐이다.

며칠 전부터 자꾸 어딘가에 나가는 것 같아 물어봤지만 이자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 쓰지 말라.

그 말에 서운함을 표현한 에스텔라에게 이자크는 국정 때문에 많이 예민해진 것 같으니 잠시 쉬어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을 시전하더니 이내 합숙하러 간 것이다.

“설마 이게 권태기라는 건 아니겠지, 미엘라? 난 아직 권태기 오려면 10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단 말이야.”

“전하, 권태기 일리가 없지요, 경께서 전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요! 그리고 권태기 때문에 멀어질 관계가 아니시잖습니까. 두 분이서 어떤 일들을 겪어 오셨는데요!”

“…그렇긴 해.”

그래도 요 며칠 이자크의 신경이 자신도 아니고 아이들도 아닌 다른 무언가에 꽂혀 있다는 건 확신했다.

에스텔라가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엘라가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망토와 흩뿌려진 문서들을 정리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평소라면 온실에서 우아하게 꽃에 물이나 주며 화를 삭혔을 텐데, 몇 주 전에 웬 고라니 새끼가 뒷산에서 내려온 건지, 온실 창문을 깨고 들어와 귀한 식물들을 죄다 뜯어 먹어버렸던 것이다.

“그리 애지중지 키운 것들은 죄다 고라니 배 속으로 들어가고, 이자크는 나한테 관심도 없고, 쌍둥이는 아빠 합숙한다고 홀라당 따라가 버리고. 허무하다, 허무해.”

뭣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듯해 에스텔라가 푹푹 한숨만 내쉬었다.

미엘라는 얼른 화제를 돌려야겠다 싶어 슬며시 눈치 봐가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황수선화를 사와야 할 시기네요, 전하.”

“…아, 응. 그런데 내가 이번엔 꽃을 준비하질 못했어.”

“이번엔 제가 나가서 주문해올까요?”

작년까지만 해도 공주였던 지라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반면, 지금은 한 나라의 국왕이 되어 마음대로 여기저기 나다니기 힘든 상황이었다. 에스텔라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엘라. 네가 가서 좀 사 오겠니?”

“네, 전하. 이번에도 그곳에는 혼자 가시려고요?”

이자크 경이랑 같이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 하자 에스텔라가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음, 이자크에게도 이제 말해야겠지. 하지만 내가 먼저 다녀온 다음에 말해줄래. 혼자 생각할 것도 있고.”

그렇게 말하자 미엘라가 알았다며 씩 미소 지었다.

반나절쯤 지났을 때였다. 항구에 나갔다 온 미엘라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돌아왔다.

“미엘라? 왜 빈손으로 왔어?”

“그, 그게요 전하. 이미 꽃들이 다 팔리고 없다 합니다. 황수선화 구근까지 모두 다 팔렸다고 합니다. 한동안 입고될 일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일대 꽃집은 다 돌아봤는데.”

“다 팔렸다고? 흐음, 웬일인지 모르겠다만. 그래. 알았어. 수고했구나.”

하트 사 덕분에 한동안 메시앙에서 가장 잘 인기 있는 꽃은 장미꽃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황수선화가 다 팔릴 줄은 몰랐다.

“아마, 전하께서 즉위식 때 황수선화 화환을 쓰셔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때 이후로 황수선화 수입량이 대폭 늘었잖아요.”

“그런가. 이런. 어쩔 수 없이 이번엔 빈손으로 가야겠구나.”

황수선화가 아니면 의미 없으니까 말이야.

에스텔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른 아침부터 에스텔라는 나갈 채비를 했다.

아이들은 이자크와 함께 합숙을 따라갔고, 막내 루멘의 자그마한 이마에 입을 맞춘 에스텔라가 방에서 빠져나왔다. 차분한 검정색 드레스를 갖춰 입은 에스텔라가 마차 안에 올라탔다.

매년 이맘때쯤 에스텔라가 꼭 잊지 않고 가는 장소가 있다.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의 시골이었는데, 그곳의 성당 뒤쪽으로 가자 조촐한 묘비 세 개가 세워져 있었다.

디에스 전 변경백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번째 아내의 묘비였다.

메시앙에서는 시신을 태우면 육신이 땅으로 돌아가지 못해 윤회하지 못한다 여긴다. 버트랜드가 디에스 변경백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운 이후 처형을 당했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윤회하지 못하도록 땅에 묻지 않고 그대로 태워버렸다.

참수당한 시체와 파헤쳐진 백골을 소각장에 끌고 가는 것을 에스텔라가 도중에 가로챘다.

원래는 그들을 도주시킬 생각이었다.

아직 금서를 읽기 전.

에스텔라는 뒷돈을 주고 감옥에 갇힌 디에스 변경백을 만나러 갔다. 뒤집어쓴 망토를 벗으며 에스텔라가 얼굴을 보이자 변경백은 도와 달라 말하기는커녕 왜 이런 곳에 온 거냐며 나무랐다.

“변경백. 접니다. 에스텔라.”

“공주님. 어찌…!”

에스텔라는 감옥 안에 갇힌 변경백을 바라보다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메시앙의 경계선을 지키는 수호자, 디에스 변경백의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고문을 받아 이곳저곳 피멍이 들어 있었고 둔탁한 것에 머리를 맞은 것인지 호박색 눈동자는 피떡이 된 머리칼과 부어오른 눈두덩이에 보이지 않았다.

“어찌 이렇게 심한 고문을… 괜찮으신 겁니까, 변경백.”

가족들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고 들었다. 이자크와 여동생은 남쪽 감옥에, 주동자인 변경백은 북쪽 감옥에.

일단 보석금을 내어 이자크와 여동생은 빼냈지만 변경백은 보석금으로도 빼낼 수 없는 상황. 그의 죄는 이미 확증이 되었고 모의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기에 정식 재판에서는 아마 바로 처형을 선고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변경백을 살릴 기회는 지금뿐이다. 에스텔라는 얼른 그에게 약봉지를 건네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자, 이걸 받으세요. 일시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게 하는 약입니다. 아직 정식 재판 전이니 당신을 분명 의사에게 데려갈 겁니다. 그때 제가 준비해 둔 사람을 시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울게요.”

신분을 바꾸고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으세요. 변경백 부인도 제가 빨리 빼 올 테니까요.

에스텔라의 말에 변경백은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공주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죽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다만, 약속을 하나 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변경백. 아직 포기하시기 이릅니다. 성공할 겁니다. 가능해요. 헌데 어찌 변경백께서는 죽음을 택하시겠다는 겁니까.”

에스텔라는 변경백이 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분명 오해가 있을 거다. 변경백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공주님. 이것 하나만 알아주십시오. 저는 절대 전하를 독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어요. 변경백.”

“…진범은.”

진범의 정체를 말하려던 변경백은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에스텔라는 왜 그가 그날 진범이 누군지 말하지 않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말로는 아마 그 역시 버트랜드가 진범이 아니길 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셨더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버트랜드가 했다는 확증도 없었을뿐더러 그는 정말로 버트랜드가 이렇게까지 최악의 인간은 아니길 바랐다.

아버지와 디에스 변경백 두 사람이 버트랜드가 팔아버린 땅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도 두 사람은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를 믿었다고 했었으니까.

“…진범은 언젠가 죗값을 치를 겁니다. 저는 변경백으로서 전하를 지키지 못한 죗값을 받는 것뿐입니다. 제가 도망가면 일이 더 커질 겁니다.”

일이 더 커진다 한들 에스텔라는 자신의 직위로 충분히 누를 수 있다 대답했다. 하지만 변경백은 확고했다. 그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변경백! 그럼 설마 이대로 억울하게 죽겠다는 겁니까?”

“그리 억울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포기해야 지킬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으니까요.”

대신에 공주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전하를 지키지 못한 제가 감히 공주님께 이런 부탁을 해도 될지는 모르지만,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변경백의 말에 에스텔라가 무엇이냐 물었다.

“이자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변경백… 그게 지금 무슨 뜻입니까.”

“마지막까지 좋은 아비가 아니었습니다. 이번만큼은 그 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아이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짧은 대화였다.

디에스 변경백과는 생전에도 대화를 많이 나눠 본 적 없었으며, 사실상 감옥에서의 대화가 그들이 여태 한 대화 중 가장 긴 대화였을 것이다.

변경백은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편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제 아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한다. 이번만큼은 그 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알 수 없는 말까지 한다. 에스텔라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물었지만 변경백은 더 이상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감옥 구석으로 들어갔다.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 그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에스텔라가 몇 번이고 변경백, 디에스 변경백! 하며 설득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변경백, 접니다. 에스텔라.”

에스텔라는 묘비들 위에 살짝 내려앉은 먼지들을 툭툭 털었다. 시골 성당 뒤편의 무덤이 화려해서 눈에 띄어서는 안 되니, 다른 귀족들처럼 화려한 관과 장식물들이 있기보다는 바로 땅바닥이었다.

에스텔라는 그대로 묘비 앞의 잔디에 준비해 온 담요를 깔고 그 위에 앉았다.

사실 디에스 변경백과 그 부인들과는 친한 편이 아니었기에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에스텔라가 하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년에 한 번 황수선화를 들고 찾아오는 것.

“오늘은 빈손으로 왔습니다. 황수선화가 다 팔렸다고 하더군요. 다른 꽃은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왔습니다.”

디에스 가문의 상징은 황수선화랬다.

몰랐다는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는 전투에 나가 핏물을 뚝뚝 떨기는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징이죠, 하고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황수선화의 꽃말에는 ‘사랑에 답한다’라는 뜻이 있대요, 이자크. 나는 황수선화가 디에스 가문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요?‘

귀족들은 백성들에게 사랑받길 원해요.

더더욱 자신들을 우러러보고 동경하고 갈망하길 바라면서, 막상 그들의 사랑에 답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지 않나요. 오히려 백성들을 깔보고 기만하는 이들이 대다수죠.

백성들의 사랑을 나라를 지키는 것으로 대답하는 변경백 가문에 조금 더 긍지를 가지세요.

“이자크 나쁜놈입니다. 변경백.”

에스텔라가 가만히 묘비를 쳐다보다 말했다.

“진짜, 진짜 나쁜 놈입니다. 나한테 뭘 숨기면서 말도 안 해주고. 제가 예민한 것 같다고 신경 끄래요. 좀 혼내주세요. 변경백 아드님이잖아요. …작년에는 경황이 없어서 못 찾아왔어요.”

에스텔라는 보통 이곳에 찾아오면 가족들 이야기를 해줬다.

왕궁에 아버지를 찾아가면 해줬던 이야기들과 같이, 아주 소소한 이야기들이었다.

때로는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죽은 이들은 말이 없었기에 에스텔라가 뭔 말을 해도 묵묵히 들어줄 뿐이었다.

“나중에 변경백이 혼 좀 내주세요.”

에스텔라가 콧방귀 뀌며 말할 때였다.

“그렇게나 밉습니까?”

“…!… 이자크?! 여길 어떻게….”

한 손에는 황수선화 다발을 들고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이는 이자크가 분명했다. 아직 이곳에 대해 말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자크가 가만히 제 부모님의 무덤에 꽃을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에스텔라 옆에 풀썩 주저앉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렇게나 나쁜 놈이었습니까, 제가?”

“…애들은 어쩌고 이자크 혼자 왔어요.”

에스텔라가 뚱한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이자크가 흠, 숨을 들이쉬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루시가 아마 합숙하는 이들 중 제일 잘 적응했을 겁니다.”

“루스는요.”

“루스는 루시 옆에 찰싹 붙어있고요.”

가끔은 엄마 아빠도 단둘이 있고 싶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아르텔이 말해줬습니다.”

“언제부터 여길 알고 있었는데요?”

“안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무덤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당신한테는 항상 빚지기만 하는 것 같아, 에스텔라.”

“부부 사이에 또 뭘 빚을 진다고….”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씩 미소를 지으며 에스텔라의 손을 잡았다.

아, 아직 우리 화해 안 했는데. 에스텔라가 뾰로통한 말투로 말하면서도 이자크의 손을 쳐내지는 않았다.

“에스텔라. 사실 저는 황수선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네?!”

이자크가 여전히 묘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제 가문이 싫었거든요.”

[외전 2-2. 별이 싫었던 소년]

이자크는 반짝반짝한 것이 싫었다.

죽게 되면 까마귀들이 이리저리 날아 들어와 시체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모조리 빼갔기 때문이다. 까마귀들이 잔뜩 내려앉았다 가는 시체는 그 모습이 그렇게 흉할 수가 없다.

메시앙에서는 특정 직급 이상의 기사들에게는 갑옷에 보석들을 달아준다.

어차피 죽으면 까마귀 새끼들이 다 털어 가는데 뭣 하러 이런 걸 달아주는 걸까 생각했더랬다.

맨 처음 전투에 참가한 나이는 12살.

방금 전까지 도련님, 도련님 하며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이 시체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다. 바로 옆에서 말 타고 있던 이의 심장에 창이 박혀 죽는 것도 목격했다.

아버지와 가장 친한 친우이자 이자크가 가장 따랐던 체로슈 경은 이자크가 14살이 되던 해 전사했다.

그때 체로슈 경의 시체를 수습하던 이자크가 본 것이 까마귀에게 잔뜩 뜯겨 알아볼 수 없었던 그의 얼굴이었다. 그의 갑옷에는 수많은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나 빛났던 분이, 이제는 이렇게나 흉하다.

아버지는 체로슈 경이 나라를 지키다 죽었으니 그만큼 영광된 것이 없다 했다. 이자크는 동의하지 않았다. 죽으면 끝이다. 영광 같은 건 없다.

변경백 가문이라는 건, 그냥 죽으면 끝인 가문이다.

몇십 년을 변방에서 피 터지게 싸워봤자, 전투에서 패하면 다들 욕할 것이 분명했다.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라를 위해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자크가 열다섯이 되던 해.

갑자기 내려온 적군을 소탕하느라 며칠 동안 전투가 이어졌다.

평소에도 죽음을 가까이 경험해본다 생각했지만, 그때만큼 가깝게 느껴진 적은 없었던 거 같다. 기다란 적군의 창이 이자크의 옆구리를 찔렀고, 그대로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정신을 잃은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피인지 노을인지 모를 붉은 것이 온통 하늘을 메웠고 제 명치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와 눈을 마주쳤다.

이자크의 갑옷에는 변경백의 후계자를 의미하는 황수선화 브로치가 박혀 있었는데, 그 브로치 역시 왕궁에서 하사한 것이라고, 언제나 변경백 가문의 긍지를 가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이 기억났다.

까마귀는 뾰족한 부리로 그의 브로치를 콕콕 찌르고 있었다.

이자크가 몸을 움찔대자, 까마귀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 검정색의 눈동자.

이자크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죽으면 끝이다. 영광 같은 건 없다.

*

전투를 마치고 아버지와 함께 왕을 알현하러 갔다.

그들의 왕은 선한 이로 언제나 평화를 원하는 이였다. 그 평화를 위해 대체 언제까지 죽음을 견뎌내야 하는 건지. 이자크는 더 이상 전투를 원하지 않았다. 더는 전우가 죽는 것도 보고 싶지 않고, 이 이상 까마귀를 보고 싶지 않다.

제 옷에 매달린 황수선화 브로치를 잡아떼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른다.

“아들이 자네를 빼다 박았군. 하하하! 이자크 경. 이번에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지, 내 자네와 변경백 덕에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오.”

“나라를 위해 지키다 죽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것인지, 아직 이 녀석은 어려 잘 모르는 듯합니다, 전하.”

이자크는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를 잠시 흘겨봤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였다.

이자크가 가만히 비소를 지었다. 그러다 벤자민과 눈이 마주치곤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평화롭고 유한 미소를 짓고 있던 벤자민이 이자크에게 말했다.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울 일이지. 디에스 자네 말고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오. 이자크 경. 오늘 연회에서 부디 조금이라도 즐기고 가시오.”

“예, 전하.”

“참, 자네, 온실을 좋아한다지? 내 딸도 온실을 좋아해서 항상 그곳을 가꾸는데 한번 구경이나 하지 않겠는가? 헨리, 가서 안내해주게. 나는 잠시 디에스와 할 얘기가 있거든.”

비서가 이자크에게 연회장 쪽으로 안내해주겠다며 다가왔다.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긴 복도를 걷고 있는데 비서가 물었다.

“역시 변경백의 후계자여서 그러신지, 정말이지 풍채가 대단하십니다.”

“…고맙소.”

“이번 전투는 정말로 치열했다 하시던데, 분명 연회장에서 수많은 이들의 영웅으로 불릴 것입니다, 이자크 경.”

“영웅으로 불리고 싶어서 이긴 전투가 아닙니다.”

“오오, 역시 변경백의 후계자께서는 긍지부터 다르시군요!”

아마 비서는 영웅이라는 명예가 아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긴 전투라 생각하는 듯싶었지만, 이자크는 그냥 죽고 싶지 않아서 싸운 것뿐이었다.

“모두들 변경백 후계자가 있어 듬직하다고 합니다.”

“…그렇겠죠.”

심드렁한 이자크의 반응에 잠시 당황한 비서가 이내 연회장 앞에 이자크를 안내했다. 이자크는 그에게 목례를 하고 연회장 안에 들어갔다.

‘귀족들에게 잘 보여야지 않겠냐. 우리는 변경에 위치해서 귀족들과 교류가 잦을 수 없어. 이제 너도 결혼할 나이고 하니, 슬슬 영애들과 인사도 하고 좀 그러거라. 변경의 후계자는 자식들을 많이 낳아야 해. 조금이라도 더 일찍 결혼하는 게 좋지.’

연회는 그와 맞지 않았다. 영애와의 만남도, 결혼도 그와 맞지 않다.

누구는 변방에서 죽어라 싸우는데 누구는 연회에서 하하호호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그들이 마시고 있는 와인이, 저들이 먹고 있는 양식이, 모두 누군가의 죽음 덕에 이뤄지고 있다는 걸 그들이 알기나 할까.

“어머, 변경백의 이자크 경 아니신가요?”

“이번에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신 거죠?”

아까 전 말 많던 비서의 예상대로 이자크의 주변에 귀족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제 딸과 결혼시키려는 속셈이 훤히 보이는 귀족들부터 부채질 살랑대며 은근히 제게 눈빛을 보내는 영애들, 그리고 저를 견제하는 듯한 영식들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기가 빨리는 기분.

“조금 있으면 공주님께서 오실 텐데, 인사라도 하고 가시죠?”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자크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저 웃음소리 끊이지 않는 곳에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으니까.

한참 복도를 거닐었다. 더 이상 시끄러운 악단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고 이자크는 달리 갈만한 곳이 없어 왕궁 정원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지나가던 시종에게 온실이 어디 있냐 물었고,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던 시종은 이자크의 의복 위에 달려 있는 황수선화 브로치를 보자 대번에 얼굴을 환히 밝히며 말했다.

“아! 변경백 후계자시군요!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온실은 저쪽 복도 끝으로 가셔서 오른쪽으로 돌면 나올 겁니다.”

“고맙소.”

이자크는 제 옷에 붙어 있던 브로치를 잡아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온실은 매우 거대했다. 희귀한 식물부터 메시앙에서는 자라지 않는 이국의 식물들까지, 정성이 듬뿍 들어간 온실이었다.

왕비가 죽고 난 뒤부터는 공주가 이곳을 가꿨다고 하던데.

귀족들이 온실을 가꾸는 건 예전부터 흔한 일이었다. 자신들의 화려한 온실을 구경시켜주는 것이 자랑거리 중 하나인 그들은, 온실에 키우는 식물들에 정성을 주기보다는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더 집중했다.

보여주기식의 온실은 볼 대로 본지라, 더 이상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공주의 온실은 다른 이들과는 많이 달랐다.

온갖 비료와 신선한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은 녹음이 푸릇했고 온실 안을 가득 메우는 향기는 향수가 아닌 흙과 식물의 고소하고 습한 냄새.

온실의 주인인 공주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게 만드는 장소였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도중 이자크가 발걸음을 멈췄다. 온실 한쪽을 가득 메운 황수선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자크는 사실 황수선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아직도 그날 제 황수선화 브로치를 부리로 찔러대던 까마귀의 눈을 잊지 못한다. 이따끔 악몽이 되어 나오기도 한다. 시체가 된 자신의 몸을 쿡쿡 찌르고 내장을 파먹기도 하는 그런 악몽이었다.

황수선화는 디에스 가문의 상징.

이자크에게 있어 황수선화는 그저 제 몸에 올라가 있는 끔찍한 까마귀와 다를 것 없다.

전투에서 죽는 그 허망한 것을 영광된 것으로 포장하는 아버지나, 그림자의 존재도 모른 채 빛 속에서 사는 다른 귀족들이나. 이자크를 옥죄는 것들과 다를 것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해야 하는 것이겠지.

디에스 변경백은 메시앙의 빛을 지켜야 하는 존재니까.

자신은 그 가문을 짊어져야 하니까.

그때 뒤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밑창 굽이 높고 보폭이 좁으며 바닥에 천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여유가 느껴지는 발걸음은 은근히 힘이 실려 있었다. 마침내 발걸음의 주인이 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와….”

아직 앳된 목소리. 이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짧은 감탄사에 이자크가 뒤를 돌아봤다.

아마 공주일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나 강조하던 메시앙의 빛. 우리가 그림자가 되면서까지 지켜야 할 존재.

메시앙의 차기 군주.

이 온실의 주인.

이자크가 뒤를 돌아 공주를 쳐다봤다.

그리고 공주를 처음 보는 순간.

‘미쳤군.’

이자크는 사람 심장 소리가 이렇게나 크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다름 아닌 제 심장 소리였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이런 건가.

금발의 굽이치는 머리는 허리춤에서 찰랑대고 있었고, 황금빛 자수가 수놓아진 흰색 드레스는 은은한 촛불들에 비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빛나는 것은 공주의 눈동자였다. 사방을 밝히는 은은한 촛불 덕에 노을 지는 갈대밭이 연상되는 눈동자였다.

이자크는 노을이 싫다. 전쟁이 끝 무렵이 될 때 핏물 같은 노을 사이로 보이는 까마귀도 싫고 그 아래 짙게 깔린 시신도 싫다.

별이 싫다. 자신은 평생 그 빛을 위해 그림자가 되어야 하니까.

하지만 공주를 보는 순간 핏빛 노을은 갈대밭의 노을이 되었다.

밝은 빛을 위해 기꺼이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대는 누구죠? 이곳은 나와 내 어머니가 아끼던 곳이라 웬만한 사람들은 들여보내선 안 되는데.”

아름다운 메시앙의 빛이 이자크에게 물었다. 이자크는 얼른 얼띤 표정을 갈무리하곤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내 가슴에 왼손을 얹으며 으레 영식들이 하는 매너를 흉내 내 봤다.

“공주님을 바로 뵙지 못한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전 디에스 가문의 장남, 이자크 몬 디에스입니다.”

“디에스 가문이라면, 변경백의 후계자겠군요. 디에스 변경백은 아버지의 오랜 친우라 영식에 대해 말은 많이 들었는데, 실물은 오늘 처음 보네요.”

“공주님을 더 빨리 뵙지 못해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자크의 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시 고개를 들어 공주를 바라봤다.

공주를 보자마자 느낀 것은 그야말로 황수선화같다는 것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촉촉해 보이고 애처로뤄 보이기까지 하는 공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무시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예서 뭘 하고 계셨나요? 이 온실은 찾기도 힘들 텐데.”

“아. 그것이… 꽃이 아름다워서, 국왕 전하께서 꽃을 좋아하면 이곳으로 가라 하셨기에. 몰랐습니다. 온실의 주인은 공주님이신데 제가 공주님께 허락을 받지 않은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곳의 꽃들은 다 아름답죠. 제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니까요. 영식께서는 어떠한 꽃이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이자크가 잠시 제 옆에 가득 심어져 있는 황수선화를 쳐다봤다. 분명 아까 전만 해도 그리 아름답지 않다 느껴졌던 꽃이었다.

죽음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갖는 변경백 가문의 상징 황수선화.

어머니는 전투를 피하시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

이자크는 항상 고민했다.

나는 이 나라를 기꺼이 지켜낼 수 있는가?

무엇을 지켜야만 하는가?

이자크는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저는 황수선화가 제일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이자크의 대답에 에스텔라가 가만히 황수선화를 쳐다봤다. 이내 노란빛이 도는 꽃대를 살짝 만지작대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황수선화. 보기 드문 품종이긴 하죠.”

공주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

에스텔라였다 했지.

메시앙의 별.

“…밤하늘의 별들이 내려온 것 같아 참 예쁩니다. 공주님의 성함처럼 빛나는 별 같지 않습니까.”

메시앙의 빛, 메시앙의 별을 지키리라.

“헬리건 영애의 구혼을 거절했다고? 네가 제정신이냐.”

디에스 변경백은 구혼이 들어오는 족족 뻥 차버리는 제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콧대 높은 영애들이 구혼서를 보내라 눈치를 줘도 보내기는커녕, 심지어 굽히고 들어와 구혼서와 선물을 보내도 반환하는 제 아들이 드디어 미친 건가 싶었다.

“다른 영애들에게 관심 없습니다. 헬리건 영애 또한 마찬가지고요.”

“대체 뭐가 문제인 게냐.”

“….”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곤란한 얼굴을 하는 제 아들을 보며 변경백은 설마, 하는 얼굴로 하얗게 질려 물었다.

“…설마 너! 너, 네놈, 남색이라도 하는 게냐? 이, 이런-”

별다른 대답이 없는 이자크의 모습에 변경백은 이자크를 키우는 16년 중 처음으로 뒷목을 잡게 되었다. 두 번째 부인이 얼른 그를 부축하며 중재하려 했다.

“얘야, 이자크, 얼른 아니라고 말씀드리렴. 이자크가 남색이라니요. 여보, 아직 열여섯이면 이성에 눈뜰 나이도 아닙니다.”

그치? 아직 그저 관심이 없을 뿐이지, 이자크?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새어머니의 모습에 이자크는 착잡해졌다.

차라리 남색이었다면 다행이지.

그는 지금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 에스텔라 공주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다.

그것도 변경에서 최전선으로 나라를 지켜야 하는 그 변경백의 후계자가 말이다.

귀족들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괜찮은 거 아닌가 할 테지만 적어도 디에스 변경백은 달랐다.

그걸 알면 길길이 날뛸 것이 분명했다.

무엄한지고, 감히 하늘같이 높은 분을 탐내는 것이냐, 변경백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네가 정녕 모르고서야 그분을 품는 거냐. 기타 등등 온갖 악담이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자크 본인도 알고 있다.

자신과 에스텔라는 한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은 평생을 전장터에서 구르다 온 놈인데 평생을 온실 속에서 지내온 공주님이 과연 그를 받아줄까.

이자크는 그저 묻을 생각이었다.

묻을 생각이었는데 묻히지가 않았다.

애타는 이자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스텔라는 자꾸만 그의 주변을 알짱댔다. 학술원에서 마주칠 일이 없는데도 몇 번이나 마주쳤으며, 심지어는 훈련소까지 찾아와 몰래 울타리 뒤에서 자신을 훔쳐보기까지 하더라.

이자크는 속이 탔다.

공주는 그저 내게 호기심일 뿐이다.

그래. 매번 희고 말랑한 남자들만 봐왔으니 내가 신기할 수 있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며 대놓고 에스텔라가 고백 비슷한 것을 했을 때도 눈치 없는 척 굴며 거절했다.

대신 스스로의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으리라.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이자크 경. 당신을 정말 좋아해요.”

릴리 버트랜드가 그에게 고백했다. 17살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오랜 친우인 버트랜드의 딸이 며느리가 되는 걸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자크가 모르는 사이 약혼식이 잡혔고, 그가 전투에 돌아오자마자 약혼식이 거행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줄 알았던 에스텔라를 향한 마음은 어째 점점 커지기만 했고, 마음이 커질수록 릴리와의 결혼식은 점점 더 빨리 다가오기 시작했다.

“네가 공주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걸 알고 있다.”

약혼식이 끝나던 날 이자크에게 찾아온 변경백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알아서 마음 정리할 것도 알고 있고. 나는 그걸 도와주는 것뿐이다.”

“…돕는다고요, 이게.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억지로 약혼시키고 결혼시키려는 게 아버지는 돕는 것입니까?”

“릴리를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다만 그 애는 네게 좋은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될 게다.”

“아버지는 그저 오로지 변경백의 자리에 오를 후계자만 원하시는군요.”

이자크의 말에 디에스 변경백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변경백에게 사랑하는 가족이란 언젠가 약점만이 될 거다. 적당히 정을 주고 적당히 아끼거라.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다.

말을 마친 변경백이 방을 나갔다. 이자크는 가만히 고개를 수그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그리고 어머니의 차가운 시신을 껴안고 한동안 가만히 앉아계셨던 아버지를 본 날. 그날이 떠올라 이자크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래. 나는 내 할 일을 해야 해.’

변경백의 후계자로서,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메시앙의 그림자가 빛을 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공주는 장차 메시앙의 왕이 될 사람. 그녀의 옆에는 살수나 다름없는 자신보다 더 알맞은 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메시앙을, 공주를, 왕을 지키면 되는 거야.’

사랑이 아닌 충성심인 거다.

붉은색 레드카펫에 흩뿌려진 꽃잎들을 밟으며 주례사가 있는 곳으로 향할 때 에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에스텔라는 퉁퉁 부은 눈으로 힘없이 그를 쳐다보다 이내 다시 눈이 그렁해져 고개를 얼른 돌렸다.

이자크 역시 못 본 체했다.

다시는 에스텔라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한쪽은 주군, 다른 한쪽은 주군의 개의 위치에서 만날 거라고.

서로의 옆에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이고 다음번에 봤을 땐 애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가 아닌, 주군으로서 위엄이 있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자크는 그런 마음으로 결혼식에 임했다.

릴리는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첫날밤에 신부를 혼자 내버려 두고 다른 곳에서 잠을 청하는, 어찌 보면 여인에게 큰 수치를 주는 행동에도 릴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해해줘서 고맙소, 릴리.”

“괜찮습니다. 아마 몇 해 정도 지나면 당신도 날 조금은 보겠지요.”

“…그렇겠죠.”

그렇게 되겠지.

그렇게 될 거라 믿었다.

에스텔라를 향한 마음은 이제 우물에 넣고 덮개를 덮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선왕이 독살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아버지가 집착하던 변경백이라는 작위는 그대로 무너졌고 가솔들은 모조리 집을 나갔으며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곧장 감옥에 끌려갔다.

이자크와 그의 여동생 역시 그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줄 알았으나 누군가가 낸 보석금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텅 비어버린 변경백 저택에 혼자 앉아 있던 이자크를 누군가가 찾아왔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에스텔라였다.

*

“그때, 에스텔라 덕분에 처형 전날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그러더군요. 미안하다고.”

이자크가 가만히 마지막 아버지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네가 열일곱 살 때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까마귀가 황수선화 브로치를 가져가려 했다고. 그 검은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려웠다고.

나는 그때 널 다그치기만 한 것이 미안하다.’

너에게는 미안한 것투성이다. 변경백이 처음으로 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멋대로 널 그림자에 쑤셔 놓고 하늘만 우러러보라 해서 미안하다.

네 감정을 무시하고 변경백만을 위해 살아가라 한 것도 미안하구나. 이렇게나 쉽게 사라지고 마는 것인 것을.

여태껏 지켜내기만 했으니 이제는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마음껏 사랑하거라.

“그때 아버지가 당신한테 무슨 부탁을 했습니까?”

이자크가 물었다.

여전히 두 사람은 변경백의 묘비를 앞에 두고 잔디밭 위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에스텔라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자크 버리지 말라고요.”

“….”

“아껴주라고요. 사랑에 서툰 놈이니 계속 사랑을 달라고요.”

“진짜입니까?”

“네. 진짜예요.”

이자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가만히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이런 걸로 거짓말은 안 한다며 억울한 듯 말했다. 보세요, 변경백. 아드님이 날 믿지도 않는군요!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가만히 아버지의 묘비를 쳐다봤다.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 무뚝뚝하시던 분이?

이자크가 가만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앉아 있자 에스텔라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황수선화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말해주려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직 자신이 삐쳤다는 걸 티 내며 뾰로통하게 말하는 에스텔라를 보더니 이자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에스텔라를 데리고 마차에 올라타더니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말만 했다.

아무리 급해도 부모님의 기일 아니냐 인사는 하고 와야 하는 것 아니냐 등의 에스텔라가 나무랐지만 이자크의 머릿속에는 한 생각뿐이었다.

이제는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마음껏 사랑하거라.

*

이자크는 에스텔라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아예 눈에 안대까지 씌워주고는 손을 잡고 걸어가는데, 에스텔라는 뭐길래 이러는 거냐며 툴툴대면서도 점점 기대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자크가 안대를 벗겼다.

얼른 주변을 둘러보던 에스텔라의 얼굴이 밝게 상기되었다.

“고라니 밥이 되었을 텐데!”

몇 주 전, 왕궁 뒷산에서 내려온 고라니 새끼 한 마리 때문에 에스텔라가 애지중지 아끼던 온실이 쑥대밭이 되었었다.

희귀한 식물의 줄기나 잎사귀들을 죄다 씹어 먹어 풍성하던 것들이 앙상해졌다.

배가 터지도록 먹은 것인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에스텔라가 특히나 아끼던 황수선화 꽃밭에 뒹굴며 자는 것을 에스텔라 본인이 발견했더랬다.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인간미 넘치는 고라니는 요상한 소리를 내며 자다가 에스텔라가 발끝으로 툭툭 치자 부스스 일어났더랬다.

그러더니 상황파악이라도 한 듯 무척 놀란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재빨리 저가 깬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고라니야 눈앞에 놓인 음식을 포식한 것뿐이니 죄가 없어 다시 산에 돌려보냈다마는, 그 긴 시간 동안 키우던 것들이 한순간에 고라니 밥이 되었고, 이제는 고라니 위장에서 소화되고 있을 게 분명해 슬펐다.

고라니가 신나서 여기저기 뒹굴어대니 꽃잎이며 줄기며 죄다 옆으로 쓰러졌다. 시들해져 버린 황수선화 꽃밭을 보곤 에스텔라가 푹 한숨을 내쉬었더랬다.

이런 걸로 눈물 보이기는 싫어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많이 속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늙은 귀족의 대머리인 양 황폐해졌던 자신의 온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예전과 같이 녹음 푸릇하게 돌아왔다.

특히 뿌리 까지 망가져 다 들어내야 했던 황수선화 꽃밭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성했다.

에스텔라가 어떻게 된 일이냐며 이자크를 쳐다봤다.

“설마, 수도 안의 황수선화를 모두 사들인 게 이자크에요?”

이자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끄러워하는 걸 보면 맞는 것 같다.

멀리서 통통하고 자그마한 것이 달려와 에스텔라의 치마폭에 부딪혔다. 루시와 루스였다.

“엄마!”

“이거 봐, 고라니 밥 우리가 복구했어! 루시랑 루스랑 압빠랑 셋이서 복구했어!”

“…합숙은?”

“합쑥도 하면서 했지! 부지런하게 했다구!”

루시와 루스가 신나서 다시 온실 주변을 방방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딱 맞춰서 해야 해서 시간이 바쁘댔어!”

“아빠가 엄청 열심히 했어-!”

딱 맞추다니. 뭘? 에스텔라가 고개를 갸웃대며 이자크를 쳐다봤다. 방금 전까지 얼굴을 붉히고 있던 이자크가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아까 전 에스텔라가 한 것처럼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나쁜 건 에스텔라입니다.”

“엥?”

“어떻게 이날을 잊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 둘이 처음 만난 날이요.”

에스텔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이 그 날이었단 말인가?

“내 사랑스러운 에스텔라는, 처음 서로에게 반했던 날보다는 로맨틱 하트데이에 더 관심이 있죠.”

그렇게 말하며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허리를 감쌌다. 내 아내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니, 우리의 첫 만남도 챙기고 로맨틱 하트데이도 챙겨야겠네요. 이자크가 그리 말하며 에스텔라의 입에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쏙 집어넣었다.

입에서 달짝지근한 맛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사탕이라도 굴리듯 초콜릿을 입안의 혀로 굴리며 천천히 녹여 먹던 에스텔라가 슬쩍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 아니, 저는 로맨틱 하트데이에 관심 없는데….”

“그런 사람이 오늘 아침부터 내내 뾰로통한 얼굴로 돌아다녔어? 아르텔부터 미엘라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야. 자, 이리 와요. 기념일도 기억 못 하는 미운 아내지만, 미운 놈 초콜릿 하나 더 준다잖아요.”

에스텔라의 입으로 초콜릿이 한 개 더 쏙 들어왔다. 에스텔라는 자신이 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나 곰곰이 생각했더랬다.

아닌데. 난 분명 그런 거 죄다 상술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척 혼신을 다해 연기했는데.

본인은 모르겠지만, 왕궁의 모든 가신부터 시종들까지 로맨틱 하트데이에 초콜릿도, 꽃도, 고백도 받지 못해 성이 난 에스텔라의 기분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침 회의 시간에도, 오찬 시간에도 한숨만 푹푹 내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은 너무나도 투명하게 기대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합숙을 핑계로 고라니 밥이 되었던 온실을 복구하던 이자크에게 아침부터 가신들이 슬그머니 찾아와 고해바쳤다. 아르텔도, 미엘라도 다들 슬쩍 와서 더 이상 늦어지면 전하께서 폭발하실 것 같습니다. 하며 진땀을 뺐더랬다.

“압빠. 루시 고생했으니까 나도, 아.”

“루스도. 루스도, 아.”

엄마 입에 두 개나 넣어줬는데 왜 자신들은 안주냐며 루시와 루스가 이자크의 바짓단을 잡아당기며 제 입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참새처럼 작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이건 엄마 건데. 너희 건 없어.”

단호하게 말하는 이자크의 모습에 쌍둥이가 충격받은 듯 헉! 숨을 들이마시었다. 그러더니, 우리도 고생했는데! 우리 이용했어! 하며 이자크의 다리를 솜방망이로 투덕대며 때리기 시작했다.

에스텔라가 웃음을 터트리며 아이들의 입에 사이좋게 하나씩 넣어줬다.

“우음- 달콤해!”

루스가 만족했다는 듯 제 양손으로 볼을 동글게 문지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에스텔라는 그런 아이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슬쩍 이자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자크. 고마워요.”

“아직 하나 더 남았습니다.”

“응?”

쪽, 하고 입술에 말랑한 것이 순식간에 붙었다 떨어졌다.

“엄마, 아빠 츄-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루시가 얼레리 꼴레리, 어디서 약 올리는 방법을 배워 놀리기 시작했다.

“와아, 츄- 했어?”

“엄마 아빠 또 츄-해. 그럼 우리 동생 또 생겨.”

아이들이 실실 웃으며 에스텔라의 손과 이자크의 손을 끌어다가 마주 잡게 했다. 동생이 또 생긴다는 소리에 에스텔라가 당황하여 말했다.

“동생이 또 생기기는…! 뽀뽀 좀 했다고 동생 안 생겨 요 녀석들아.”

“구래? 그럼 동생 어떻게 생기는데?”

루시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물어보자 에스텔라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루시랑 루스는 그러엄, 저-기 멀리서 놀구 있을게. 알았지? 저어어어기 멀리서 놀구 있는다?”

쌍둥이가 서로의 손을 꼭 잡더니 저 멀리 뛰어가기 시작한다. 요 사랑스러운 작은 천사들은 어쩜 이리 눈치 빠를까.

이자크가 다시 한번 에스텔라의 입에 입을 맞추곤 작게 속삭였다.

“그럼 동생 어떻게 생깁니까, 에스텔라?”

그저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유혹적으로 굴 줄도 안다. 에스텔라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음흉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이 사람이… 이자크가 원한다면 알려줄지도….”

“그럼 오늘 밤에 알려주시는 겁니까, 에스텔라?”

귓가에 나직하게 울리는 이자크의 목소리가 유독 간지럽다. 에스텔라의 얼굴은 금세 하트 사에서 판매하는 증정용 장미 한 송이인 양 붉게 타올랐다.

에스텔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전 3.

새로운 시작

에스텔라는 며칠 전 매우 기이한 꿈을 꿨다. 그건 바로 금서에 대한 꿈이었다.

국왕으로 즉위한 지 1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

금서가 파괴됨과 동시에 동굴이 사라지고 일레나의 집착이 만들어 낸 저주도 다 함께 사라졌다. 금서에 권능을 봉인당했던 아르텔과 델라 랭은 자신들의 권능을 돌려받았고 에스텔라는 승리의 여신으로서 일레나의 가호를 받게 되었다.

모든 게 그걸로 끝이 날 거라 생각했다.

헌데 1년하고도 6개월이라는 이 애매모호한 시점에, 에스텔라는 금서에 관한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심연이 아닌, 애메랄드 빛이 풍성한 수면 아래 에스텔라는 태초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평안을 느꼈다. 물속에 있으면서도 숨이 막히지 않았고, 차가운 곳에 있으나 따듯했다.

그때 에스텔라의 앞에 금서가 펼쳐지더니 이내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나오는 금색 실 같은 얇고 찬란한 빛은 에스텔라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금색 빛이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하여 에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소리 지르고 말았다.

“에스텔라!”

제 옆에서 헉,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마치 헤엄이라도 치듯 허우적대는 에스텔라를 이자크가 흔들어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에스텔라는 제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걸 깨달았다.

“에스텔라. 괜찮습니까.”

이자크는 얼른 푹 젖은 아내의 앞머리를 옆으로 정리해주더니, 이내 시종을 불러서 새 옷을 준비해오라 시켰다.

회귀 이후 악몽을 꿨을 때도 이렇게 땀을 흘려본 적은 없었다. 마치 실제 바다에 푹 빠졌던 사람처럼 에스텔라가 누워있던 자리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식은땀을 흘린 사람 치고 에스텔라는 멀쩡했다. 두려워하거나 찝찝해하는 기색보다는 오히려 신기한 경험을 한 듯 경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꿈을 꿨길래 이렇게 푹 젖은 겁니까.”

“꿈에 금서가 나왔어요.”

아직 꿈에서 다 헤어나오지 못한 듯 넋이 나간 채로 말하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이자크는 방에 빼곡히 들어왔던 주치의부터 시종들을 도로 내보냈다.

정작 꿈을 꾼 것은 에스텔라인데, 당사자보다 더 창백하게 질린 이자크가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회귀한 건 아니죠?”

그게 뭔 뜻인지 알아들은 에스텔라가 그런 건 절대 아니라며 이자크를 안심시켰다.

이자크는 아직도 금서의 이야기만 나오면 불안해한다. 에스텔라가 자신 때문에 무려 5번이나 회귀를 했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에스텔라는 자신이 꾼 꿈이 어땠는지 말했다.

“두렵다기보다는, 뭔가 더 경이로운 것이었어요. 그게 저주가 다시 시작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내 손으로 분명히 책을 찔렀는걸요. 일레나의 저주도 끝이 났고요.”

다만 의아한 것은 어째서 지금 와서 금서가 꿈에 나왔냐는 것이다.

“혹시 모르니, 내일 아르텔을 부릅시다. 만약 그 꿈이 예삿일이 아니라면 아르텔도 분명 뭔가를 눈치챘을 겁니다.”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

금서가 파괴된 직후, 권능을 돌려받은 아르텔과 델라에게 에스텔라는 자유를 줬다. 더 이상 내 옆에 있지 않아도 된다. 하고 싶은 걸 해라. 사람만 죽이지 마라.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에스텔라의 말에 아르텔과 델라는 진심으로 오랫동안 고민을 했더랬다.

그들에겐 이제 권능이 있었다.

물론 오랜 시간 책에 봉인 당한 힘이었고, 너무 오랜 시간 인간의 세계에 머물렀던지라 예전만큼의 막강한 권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날씨를 바꾸거나, 새싹에게 생명력을 준다거나 등의 꽤나 특별한 일은 가능했다.

아르텔은 이 힘을 가지고 계속 에스텔라 옆에 남아 있겠다고 다짐했다. 정확히는 메시앙의 어린 왕자들과 공주를 위해서였다.

델라는 생각이 좀 달랐다. 그녀는 잊고 있었던 모든 기억을 떠올린 그 날, 떠나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자신들이 악신으로 변했던 것에 의심을 품었다.

태초의 신 메라와 그가 사랑했던 현명한 여인의 자식들이 어째서 악신으로 변했던 건지, 자신들의 이야기에 의문을 가졌다.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다른 세상을 더 알고 싶어졌다 했다.

‘북쪽에, 메시앙의 초대 신관을 모신 신당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곳에 가서 신탁을 듣고 저희들에 대해 더 알아 오고 싶습니다. 전하.’

그렇게 델라는 떠났다.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막상 제 누이가 먼 여행을 홀로 떠난다 하니 아르텔은 걱정이 앞섰다. 평범한 인간도 아닐 것이 분명한데 아르텔은 그저 델라가 혼자 떠나는 것이 매우 불안해 보였다.

가지 말라 몇 번이고 붙잡았지만 이미 확고한 델라를 말릴 수는 없었다.

언제 돌아올 건지 기약도 없었다.

그렇게 델라가 떠난 지 1년하고도 5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밤중에 아르텔은 눈을 번쩍 떴다. 인간이 아니기에 숙면이 필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흉내는 내고자 항상 밤이 되면 눈을 붙이고 자는 편인데, 무엇인가가 아르텔을 부르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일으킨 아르텔은 주변을 둘러봤다. 기시감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기시감인지조차 구분해낼 수 없었고, 이윽고 메시앙의 막내 왕자 루멘이 울어대는 바람에 얼른 그를 안아 올렸다.

‘이런, 이런, 신이 인간 아이를 안고 재우는 꼴이라니. 이것 참 재밌지 않은가.’

‘재밌기는 그저 우습기만 하지.’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두 개였다. 둘 다 성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어떨 때는 여인의 목소리로 어떨 때는 사내의 목소리로 변했다.

“누구냐!”

‘이런, 헤르문, 그새 우릴 잊은 게냐? 쯧쯧쯔…. 내가 말했잖나. 쌍둥이 남자 쪽은 맹하다니까.’

‘헤르모니아는 단번에 우릴 알아 뵈던데.’

“모습을 드러내라!”

잘 들어보니 그것은 주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계시라도 받듯, 아르텔의 머리를 가득 메우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들이 신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왜? 기억도 못 할 놈이. 신이 인간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니. 메라가 기절할 노릇이로구먼. 가서 네 주인에게 전해라. 열쇠가 곧 너희에게 내려올 테니 너희는 그 열쇠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만 한다고.’

열쇠를 지키지 못하면 신들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끝으로 뒤 더 이상 아르텔의 머리를 가득 채우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르텔은 날이 밝자마자 에스텔라를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아르텔과 통했던 건지, 에스텔라가 시종을 보내 그를 불러들였다. 아르텔은 얼른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있을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욱-”

“에스텔라!”

입을 막고 헛구역질하는 에스텔라를 발견했다.

미엘라가 내온 차와 마카롱을 집어 드는 순간, 에스텔라는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을 느꼈다. 세상 달콤한 마카롱의 향기는 지독했으며, 고소한 향기를 내뿜는 차는 고약한 악취로 변했다.

결국 제 몸이 멋대로 반응하며 헛구역질이 나왔다.

욱!

입을 틀어막고 토기를 참는 순간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이게 뭔지 너무 잘 알았다.

어디 그뿐일까. 때마침 서재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던 아르텔 역시 그게 뭔지 잘 알았다.

“….”

에스텔라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고.

“…당장 주치의를 불러오거라!”

이자크는 얼른 시종에게 명령했고.

“…신이시여.”

아르텔은 가만히 신을 불렀다.

아무래도 메시앙에 넷째 왕족이 태어날 듯싶다.

이자크는 마음이 영 좋지 못했다. 정작 에스텔라는 넷째가 생기는 것이 반가웠는데 말이다. 물론 그 역시 에스텔라의 뱃속에 사랑스러운 아이가 또 자라고 있는 것이 기뻤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아직 루멘을 낳은 지 이제 겨우 1년이 겨우 넘은 상태에서 또 아이를 낳으면 에스텔라의 몸에 무리가 갈까 싶어서다.

마음 같아서는 대신 낳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

이자크는 진찰받는 내내 에스텔라의 손을 꼭 잡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에스텔라도 이제 그가 대충 뭘 염려하는지 알 것 같아 그의 반응에 서운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의사가 나간 뒤 이자크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자크 우리 맨 처음 결혼할 때 내가 꿈이 뭐라고 했죠?”

“….”

이자크가 곰곰이 떠올렸다. 행복하게 사는 거 아니었던가. 에스텔라가 잘생긴 그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만지작대며 말했다.

“이자크랑 나 반반 닮은 아이들을 엄청 낳는 거라고 했죠.”

“….”

“나는 적어도 한 열 명은 생각했거든요?”

“예? 에스텔라, 그러다간 평생 만삭으로 살 겁니까? 몸에도 좋지 않고-”

또 급격히 걱정스러워하는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이참! 말이 그렇다는 거죠!”

“….”

“어차피 낳는 건 난데 왜 이자크가 그렇게 불안해해요?”

“당신이 아파할까 봐.”

“노고를 알아주는 그 자세는 좋네요. 그래도 아빠니까 좀 더 기뻐해야죠.”

이자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에스텔라도 씩 따라 웃으며 그의 얼굴을 놔줬다. 공주일지 왕자일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아가야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지는 말아주렴.

에스텔라는 외동으로 자랐다. 아무리 릴리와 친자매처럼 자랐다 한들 그거야 어디까지나 말뿐이었고 사실상 외동으로서 많이 외로웠다. 메시앙의 단 하나뿐인 왕위 계승자 공주로 자라는 것은 그만큼 어린 시절부터 요구되는 것이 많았다.

그녀는 복작대는 가족이 부러웠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자신 둘뿐이었으니 아무리 벤자민이 애정을 퍼부었어도 그녀에겐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갈증이 있었던 것이다.

해서, 에스텔라는 벌써부터 복작대는 자신의 가족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행복했다.

금서에서 빛이 뿜어져 몸 안에 들어온 것은 태몽이었던 걸까.

그 외의 의미는 없던 걸까.

에스텔라가 그리 생각하고 있던 찰나 아르텔이 입을 열었다. 그는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들어보니 에스텔라가 기이한 꿈을 꾸었을 때와 비슷한 시각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자크가 안심시켜주려는 듯 에스텔라의 손을 꼭 잡았다.

“만일 에스텔라와 자네가 꾼 꿈이 연관이 있다면, 어쩌면 그 열쇠라는 건 태중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거로군.”

“저도 같은 생각했습니다, 이자크 님.”

“금서에 봉인되었던 자네 아니던가. 뭔가 떠올려지는 것이 없나?”

이자크의 말에 아르텔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말했다.

“…아르텔, 너에게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면 델라에게도 그런 비슷한 뭔가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걸요. …죄송합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 면목이 없습니다.”

아르텔은 본능적으로 ‘열쇠’라는 것이 자신들의 과거와도 연관되어있다 생각했다. 그들은 아르텔의 과거 이름을 아는 듯했다. 본인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신들.

헤르문. 헤르모니아. 신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금서는 분명 파괴되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에스텔라는 아직 불러오지도 않는 자신의 배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자신의 뱃속에 자리 잡을 이 아이는 어떤 운명을 지니고 태어날까.

열쇠를 지키지 못한다면 신들의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은, 태어날 이 아이는 결코 순탄치 않을 운명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불안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 그날 밤 심란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운 에스텔라는 밤늦게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

새벽쯤 되었을까 여전히 뒤척이는 에스텔라에게 이자크가 나직이 말했다. 그 역시 잠 못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에스텔라. 너무 불안해하지 마.”

“하지만, 신의 전쟁까지 일어날지도 모른다면서요.”

“그건 그 아이를 지키지 못했을 때지.”

“아이가 가지고 태어날 운명이 너무나도 가혹하면 어쩌죠.”

태어난 것만으로도 마치 벌을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혹하면 어쩌지. 에스텔라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아이가 자신이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것. 아이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

이자크가 가만히 에스텔라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가혹할 수도 있겠죠.”

“….”

“그걸 감내하는 것도 아이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태어날 아이는 당신과 나의 아이니까.”

태어날 아이는 어쩌면 가혹한 운명을 타고날 아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아이는 숱한 전투에서 강한 생명력을 지닌 이자크와 반복되는 절망적인 회귀에서도 끝내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낸 에스텔라의 자식이다.

스스로의 운명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아이는 나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태어날 아이를 믿는 수밖에 없다.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승리의 여신의 가호를 받은 이잖아요. 그 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미 신의 가호를 받은 상태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에스텔라, 불안해할 필요 없어.”

태어날 아이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어. 우린 그저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돼요. 아이가 가혹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으면 그 운명을 이겨낼 수 있도록 강한 사랑과 믿음을 주면 됩니다.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말을 믿기로 했다.

아이는 강할 것이다.

에스텔라의 정신력과 이자크의 생명력을 이어받을 것이다.

태중의 아이만 강하지 않다. 에스텔라의 사랑을 듬뿍 받은 루시와 루스, 루멘은 사랑이 주는 믿음과 힘을 알고 있다. 그 다정함은 부드럽고도 유한 힘이 되어 아이들의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은 강하다.

마음을 얻고 마음을 줄 줄 아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살면서 그 어떤 고난을 겪는 다 해도 그들 곁에는 여전히 사랑을 주는 이가 있을 것이며 그들 또한 알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강합니다. 에스텔라.”

그러니 마냥 지켜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만은 아니다.

그의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양 가만히 따라 중얼거리던 에스텔라는 그제야 안도하는 듯 숨을 내쉬며 쏟아지는 잠에 빠졌다.

에스텔라는 또 하나의 꿈을 꾸었다.

아주 미약한 새싹이 에스텔라의 손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그 새싹은 비실비실 자라면서도 끝없이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에스텔라의 손바닥에서 자라던 것은 어느새 저 하늘 끝까지 줄 대를 기르고 꽃 봉아리를 맺었다. 무성한 잎사귀들이 자라 나와 바람을 막고 비를 막아냈다.

어느새 작디작던 새싹은 에스텔라가 쉴 그늘을 만들기도 했으며 가늘었던 줄 대에 마음껏 몸을 기댈 수 있을 정도로 굵어졌다.

편안한 꿈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아이의 운명을 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루시와 루스는 여섯 살이 되었다. 루멘은 2살 생일을 맞이했고 그사이 에스텔라의 배는 만삭이 되었다.

“이제 곧 아가가 태어나면, 내가 아가를 지켜 줄 거야!”

루시는 제법 언니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자크를 따라 합숙 훈련을 갔던 것이 인상 깊었는지 검술 수련을 하고 싶다던 루시는 이제 목검을 들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루스는 아가한테 책 읽어 줄 거야. 루멘도 내가 잘 읽어주니까 좋아하거든. 루스 책 진짜 잘 읽지!”

루시가 검술에 관심을 보이는 동안 루스는 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도 동화책을 좋아해 매번 읽어줘야 했던 루스는 알파벳을 다 뗀 이후부터 메시앙의 지리학과 신화를 읽기 시작했다.

어린애가 읽기엔 너무 어려운 것 아닌가 싶지만,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땐 쪼르르 달려와 이게 뭐야? 이건 뭐야? 하며 묻는 걸 보면 그리 무리해서 읽는 건 아닌 것 같다.

항상 루시 옆에 착 달라붙어 울먹대며 루시 혼자 하지 마. 같이 하자. 나랑 같이 있자. 칭얼거리던 전과는 달랐다.

물론, 그래도 가끔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루시 방으로 달려가거나 루시와 손을 잡고 부부침실에 찾아오기는 한다.

루멘은 아직 갓난아기라 잘 먹고 잘 싸기만 해도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고마울 따름이다. 아직 에스텔라와 이자크에게 말하진 않았으나, 아르텔은 루멘 왕자가 이따금 자신을 지긋이 쳐다본다는 걸 눈치채고 있다.

별다른 이상은 없으니, 말을 꺼낼 생각은 없다.

그렇게 일레나의 가호를 받은 메시앙의 작은 왕족들이 무탈하게 자라는 동안 드디어 에스텔라가 진통을 느꼈다.

새벽, 익숙하면서도 매번 색다른 통증이 아래쪽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에 에스텔라가 잠에서 깼다. 에스텔라가 만삭이 된 이후부터 항상 선잠을 자던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굳이 깨우지 않아도 벌떡 일어나 주치의를 불렀다.

이제 익숙해질 법한데도 출산의 고통은 언제나 새로운 고통을 선사했다. 진통으로 낑낑대자 이자크는 저가 다 아픈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에스텔라의 손을 꼭 잡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에스텔라가 말했다.

“이, 이자크… 윽… 나가 봐요….”

“내가 어찌 당신을 놔두고 나간단 말이야.”

오만상 찌푸리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지라, 에스텔라는 계속해서 제 머리를 정리해주고 같이 심호흡 해주는 이자크가 야속할 정도였다.

이자크는 루시와 루스의 출생날에도, 심지어 루멘의 출생날에도 에스텔라의 곁을 지키지 못했던 것에 큰 미안함과 아쉬움이 있었는지 에스텔라가 나가라도 해도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자크으… 나 진짜… 표정 관리 못 하니까 빨리 나가요….”

매번 우느라 얼굴은 퉁퉁 붓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 얼굴은 새빨개지는데 그 모습을 이자크에게 보여주려니 괜히 창피하고 싫은 것이다.

“못난 모습 보여주기 싫다니까….”

“그게 뭐가 못 나다는 겁니까. 전혀 못나지 않아 에스텔라. 안 나갈 거야. 당신 고통을 나눠 갖지 못해 미안해.”

그렇게 말한 이자크가 고통으로 낑낑대는 에스테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때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말을 듣고 방을 나가든지 아니면 저 멀리 떨어져 발만 동동 구르든지 했어야 했다.

“아, 아악! 씨! 악! … 으윽!”

에스텔라의 말을 들었더라면, 적어도 지금처럼 머리를 쥐어뜯기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에스텔라의 입에서 단말마에 가까운 고통에 받친 소리와 함께 간간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자크는 기꺼이 제 머리를 아내에게 갖다 바쳤다.

“이, 이자크 님!”

당황한 시종들이 얼른 에스텔라의 손아귀에 잡힌 이자크의 머리채를 빼내려 했지만, 이자크는 이렇게라도 아내의 고통을 나눠 가질 수 있다면야 하며 다소 건방진 생각을 했더랬다.

“괜찮네, 괜찮, 윽! 에, 에스텔라!”

“아악! 씨! 내가, 나가라, 했, 아아악!”

인고의 시간 끝에, 에스텔라의 손바닥에 흑색 빛이 도는 머리카락이 꽤나 많은 양으로 뽑혀있을 때쯤, 방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퍼졌다.

*

아이는 작디작았다. 물에 씻겨져 푸른색의 실크에 감싸진 아이는 숨을 고르고 있는 에스텔라의 가슴 위에 올려졌다. 땀에 흠뻑 젖은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그 작은 생명을 경이롭게 쳐다봤다.

그때 문이 열리며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얼굴이 나타났다.

델라 랭이였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델라 랭의 모습이 아닌, 열쇠의 탄생을 보러 온 헤르모니아의 눈을 하고 있었다.

헤르모니아의 옆에는 아르텔이 서 있었다. 시종들이 그들을 막아서려 했으나 에스텔라가 그들의 입장을 허락했다.

헤르모니아가 천천히 에스텔라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가슴팍 위에 누워 꼬물대는 작은 생명체를 쳐다보더니 이내 자신의 주인을 섬기는 듯 무릎을 꿇었다.

에스텔라는 그런 헤르모니아를 쳐다보다 다시 제 가슴팍에 누워 숨을 고르는 작은 아이를 내려다봤다. 에스텔라가 눈도 채 뜨지 못한 갓난쟁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클라비아. 네 이름은, 클라비아란다. 아가.”

‘열쇠’의 운명을 타고 난 아이. 클라비아.

가혹한 운명을 타고났을지 몰라도 아이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강인한 정신력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아이니까.

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아이니까.

에스텔라는 아이를 믿기로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믿기로 했다. 그것만이 가장 강해지는 방법임을 이미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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