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20화 (20/21)

20장.

“…메시앙과의 재협정을 바라시는 겁니까.”

“그것도 맞고. 사실 제일 큰 이유는, 카루체 원주민들이라네.”

에테리아의 원주민인 카루체 족은 이민자였던 에테리아에게 굉장히 적대적이라 했다.

그들은 서북지대에서 멀지 않은 에테리아의 국경선에 아슬하게 주둔하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국경선을 넘었다며 인근 마을을 공격하거나 아이들과 여성들을 납치, 혹은 인육으로 먹는다고도 했다.

“그 카루체의 족장이 바뀐 건지, 최근 들어 이것들이 기고만장해졌거든. 에테리아 백성들이 많이 불안해해. 트집을 잡으려 해도 카루체와 맺은 협약 때문에 마음대로 먼저 공격할 수도 없고.”

안 그래도 메시앙의 국왕이 자꾸만 협정을 어기고, 메시앙에 거주하는 에테리아인들을 차별하는 와중이라 거슬리는 참인데 카루체 원주민들이 이곳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유치한 도발을 해대는 메시앙의 국왕을 보자니, 서북지대는 군말 없이 넘길 것 같아 남하를 했다고 한다. 서북지대를 점령하고 나면 그곳에 거주하는 카루체까지 일거양득으로 몰아낼 생각이었다고.

“에테리아에서 몰아내지만, 카루체 원주민들의 터전까지 주어 평화 조약도 맺을 수 있는 나쁘지 않은 기회라 생각했거든.”

일단 카루체 원주민들도 그 수가 상당히 많아 원주민이라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젊은 에테리아의 국왕은 자신을 수완가이자 자비로운 국왕, 두 가지 면모를 보여주고 싶은 선택지를 찾아낸 것이었다.

“내가 마치 전쟁이라도 일으키길 바라는 듯이 계속 자극하더군. 메시앙의 국왕은 대체 무슨 생각인겐가?”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가길 바랄 겁니다. 저와 다른 병사들이 모두 패해 포로로 잡혀가고, 서북 요새가 모두 무너지고, 그렇게 해서 에테리아 병사들이 민가까지 쳐들어오길 기다릴 겁니다. 그렇게 해야 트라비아 원군이 합법적으로 메시앙에 들어오니까요.”

“역시. 그렇군. 제 나라를 팔아 버리려는 국왕이라니. 쯧쯧. 메시앙도 빛이 다했나 보군.”

이자크는 잠시 에테리아의 국왕을 가만히 쳐다봤다. 적군의 포로가 일국의 국왕을 감히 쳐다보는 것은 오만한 짓이며 당장 목이 잘려나간다 해도 이상할게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듯한 국왕에게는, 이자크의 그런 행동보다는 그의 능력이 조금 더 눈에 들어왔다.

“…카루체 원주민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 오히려 에테리아의 국경선을 넘어가 민가를 약탈하고 있지. 알고 보니 버트랜드 그 인간이 이미 오래전에 서북지대를 카루체 족장에게 거주권을 팔아넘겼다지 뭔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거주권을 사서 이곳에 지내고 있던 것은 카루체 원주민. 그들의 땅을 먼저 밟은 것은 에테리아인이라며 카루체 원주민들이 대거 에테리아의 민가를 급습했다고 한다.

버트랜드야 워낙에 야금야금 메시앙을 팔아넘겼기에, 이자크에게 있어서는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사실 예전에 에스텔라와 함께 후작의 장부들을 살펴보던 도중, 서북지대까지 팔아넘겼다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땅의 주인은 여전히 메시앙인데, 이곳에 거주권을 사 간 것은 카루체 원주민이었다.

팔아 버린 땅에 제 군사를 몰아넣는 이유가 뭔가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군.

카루체 원주민들은 꽤나 전투에 능하다. 그들은 워낙에 빠르고 사냥에 능숙한 이들이며, 에테리아의 지형과 기후에 맞게 예전부터 수렵 생활을 하여 에테리아의 병사들 못지않은 전투력을 가졌다.

“에테리아 병사들은 메시앙과의 전투로도 많이 지쳐있네. 그런 와중에 국왕이 카루체 원주민들이 있는 곳으로 자국민을 보내는 건 보기 좋지 않겠지. 게다가 자네 덕분에 우리 쪽 장수들도 하나같이 큰 부상을 당해서 말이야.”

요컨대 ‘네가 가서 카루체 원주민들을 에테리아에서 몰아내라’였다.

“그대의 실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네. 만일 카루체놈들을 에테리아에서 몰아내 준다면 우리도 더는 서북 요새를 건들지 않겠네. 곧바로 철수하지.”

에테리아의 국왕이 이자크의 눈치를 살폈다.

이자크 몬 디에스. 변경백 가문의 후계자.

메시앙에게서 가장 탐나는 것을 하나 고르라 하면, 비옥한 땅은 둘째다. 첫째는 바로 메시앙의 그림자 역할을 자처했던 디에스 변경백 가문이었다.

역모죄로 참수당해 죽은 전변경백은 물론,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이자크까지 그가 눈여겨봤던 인재였다.

실력 있는 기사를 영입하는 것이야말로 국경확장을 원하는 왕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굵직한 전투들에 이름을 올리던 이가 바로 이자크였다.

저 인재가 어쩌다 이곳으로 좌천되듯 지원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테리아 국왕은 신이 주신 기회라 생각했다.

“자네도 잘 생각해보게나. 메시앙의 군사는 그 수도 적을뿐더러, 제대로 된 식수도 공급받지 못한다 들었네. 포로로 끌려온 병사들도 아직 햇병아리들인데. 여기서 더 장기전이 되어봤자 병사들만 개죽음당하는 꼴 아닌가.”

이자크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질질 끌지 않는 이자크의 대답에, 에테리아의 국왕이 박수를 치며 그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정말인가? 현명한 선택일세.”

“대신에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 조건이 아니고?”

“조건은 따로 있습니다.”

뻔뻔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국왕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조건이야 아마 자기네 병사들 관련된 일일 거고, 그렇다면 달리 부탁이라 할 것은 무엇인가. 왕의 말에 이자크가 말했다.

“제 아내에게 전보를 보내주십시오.”

*

루멘이 태어난 지 2주일이 지났다.

갓난쟁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에스텔라만 보면 방긋방긋 미소 지었다. 루시와 루스는 꼬물대는 루멘이 그저 신기한 듯 하루 대부분을 흔들 침대 앞에서 보냈다. 책을 읽을 때도, 인형 놀이를 할 때도. 이따금 인형을 들어 보이며 루멘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루멘! 이거 봐바, 이게 뭐냐며언, 이건 책이라구 하는 거야.”

“루시, 우리가 책 읽어주쟈.”

아직 몸을 회복하지 못한 에스텔라는 그 옆의 침대에 누워 아이들을 쳐다봤다.

여전히 서북지대에서는 별다른 전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포트먼 요새는 함락되었고, 차례차례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돌연 휴전에 들어갔다고. 드와이트 남작은 에스텔라에게 함락된 포트먼 요새의 시체들을 수습했는데, 거기에 이자크의 시체는 없었노라고 전보를 보냈다.

시체가 없는 건지, 아니면 짓이겨져서 형체를 구분 못 하는 건지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요새가 무너지며 신원미상의 시체들이 몇십구가 나왔다지 않나.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결혼반지를 가만히 만지작댔다.

산후조리를 위해 옆에 붙어 있던 미엘라와 유모가 에스텔라의 눈치를 살폈다. 섣불리 위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주님….”

“….“

에스텔라는 계속해서 제 손바닥 안의 반지를 굴려댔다. 마치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 모습이, 조금은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멍하니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에스텔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살아있어.”

“네?”

“아직 살아있다고, 이자크.”

“공주님….”

“그러니까 나도,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해.”

기운 차리는 것은 좋으나 조금 더 제 몸을 사려줬으면 한다. 유모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에스텔라를 다시 도로 눕히며 말했다.

“공주님. 거진 50년 동안 오로라 님이랑 우리 공주님 키우면서 제가 뭘 느꼈는지 아세요?”

“응?”

“두 분 다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게 강하시다는 겁니다요. 정신력말이에요. 그건 아무나 그렇게 못해요. 사랑받아 본 사람만이 가능한 거거든요.”

“유모?”

“두 분 다 정말 강하시지만, 또 두 분 다 정말로 당신 몸은 전혀 살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한 유모가 에스텔라의 손을 꼭 잡았다. 주름 자글자글한 유모의 손은 에스텔라에게 제발 무리하지 말아 달라 말하는 것 같았다.

“헌데 말이죠, 공주님. 공주님이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는 것들은요, 사실 공주님을 가장 필요로 합니다. 우리 아가씨랑 도련님도, 선왕도, 이자크 님도, 그리고 이 미천한 유모도 말입니다.“

그러자 옆의 미엘라가 저도요, 저도에요 공주님. 하며 끼어들었다.

“공주님이 없으면 모든 건 의미가 없습니다요. 그러니, 조금만 더 자신을 소중히 여겨 주세요.“

“유모, 미엘라.“

“그러니까 아직 몸이 다 풀리기 전까진 무리하지 마셔요. 선왕 상태도 제가 계속 틈틈이 보고할 테니까요. 혼자 막 돌아다니거나 늦게까지 서류 보지 마시고요! 애 낳으면 뼈 마디마디 다 시릴 텐데 어쩜 그리 무모하신지. 어휴!”

따듯하게 시작되었던 유모의 말은 점점 진심이 담긴 잔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루시 아가씨랑 루스 도련님도 막 번쩍번쩍 안지 마시고요! 손목 나간다고요! 루멘 도련님도 저희가 잘 보살필 테니 일단 공주님은 휴식을 먼저 취하시라고요.”

“아, 알았어. 유모….”

“증말이지, 밥도 잘 챙겨 드셔야 한다고요! 입맛 없으시다고 물리지 마시고요! 어쩜 살이 이렇게나 빠지셨어요!“

지금 당장 일어나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고이 접었다. 유모가 저렇게나 열정적으로 혼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놀고 있던 루시와 루스가 에스텔라에게 다가와 물었다.

“엄마, 유모한테 혼나써?”

“엄마가 얌전히 안 누워이써서 그래. 우리 아플 때 엄마가 뭐라 했어. 푹 쉬어야 금방 낫고 금방 놀 수 있다 했지. 엄마도 그래야지.”

“알았어, 얘들아.”

유모한테는 물론 아이들한테도 혼난 느낌이라 에스텔라가 가만히 머리만 긁적였다.

한동안 이들을 위해서라도 가만히 누워 있어야겠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너무 불안한데 어떻게 해.

에스텔라의 끊임없는 일 중독은 이자크에 대한 불안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지워 버리기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몸은 편했지만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세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피떡이 된 채로 끌려가는 이자크의 모습이, 처형당하는 이자크의 모습이, 또다시 메라의 금서를 펼치는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흠칫 놀라기 일쑤였다.

하루에도 몇십 번 마음을 단단히 먹다가도 다시 허물어진다.

아이들을 내가 지켜야 해. 이자크는 살아 돌아올 거야. 하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나 혼자 이 애들을 어떻게 키우지, 이자크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가지?

메라의 금서를 읽게 되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걷게 되는 건가.

하지만 이자크가 없는 세상도 내게는 비슷하지 않을까?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미친 에스텔라. 아무리 이자크를 사랑한다 해도 어떻게 아이들과 이자크를 맞바꿀 생각을… !

자아가 분열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할 정도로, 에스텔라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학하길 반복했다.

폐쇄된 서북지대에서는 갖가지 소문이 들려오는데, 그곳에 간 제 님은 생사조차 확인이 안 되니 미쳐갈 노릇이었다.

서북지대에 역병이 퍼져 에테리아 군인들은 물론 우리 메시앙 군인들도 거의 다 죽어간대.

살이 썩어들어 간다는군.

드와이트 남작 역시 다리가 썩어서 절단했대.

그럼, 이자크 님은 어떻게 되신 걸까?

요새가 무너졌으니 죽었거나 포로로 끌려가셨겠지. 에테리아에서는 포로들을 모조리 숙청한대.

쉿. 다들 입 다물지 못해?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떠들어?

집안의 사용인들은 저들끼리 떠들다 아르텔이나 유모에게 걸려 호되게 혼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에스텔라를 위해 입단속 시킨다 해도, 귀가 먹지 않은 이상 그런 이야기들은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자크가 아직 죽지 않았다 말하면 다들 에스텔라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문병 온 다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젊은 나이에 애가 셋이나 되는데, 과부가 되어 안타깝군. 그런 눈빛.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1주, 2주, 3주,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에스텔라의 몸도 점점 회복했다.

이제 침대에서만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에스텔라는 기다렸다는 듯 밀린 일들을 시작했다.

델라 랭과 오르테즈 남매는 조금 더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제발 일하고 싶다는 에스텔라의 말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공주님, 아직 조금 더 쉬셔야 할 텐데요. 대부분 일은 거의 다 처리가 되어서 크게 신경 쓰실 필요도 없습니다.”

“델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래. 그 서류 줘.”

“다음부터는 더는 저택에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공주님은 조금 더 쉬셔야 해요. 저와 헬렌이 나머지 잔일들을 할 테니, 공주님은 제발….”

에스텔라는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델라 랭의 눈에는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 직전의 에스텔라 모습과 똑같이 보였다. 창백한 얼굴, 깊은 슬픔에 빠진 눈과는 달리 침착한 모습.

“금서를 읽을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공주님! 제가 단지 그것 때문만을 걱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델라. 왜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려도,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걸까.“

에스텔라의 지친 목소리에 델라는 더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 유모가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 들어온 유모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기이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에스텔라는 그런 얼굴을 보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주님, 저기….”

“왜 그러는 거야?”

“…전, 전보병이 왔습니다.”

전보병, 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아직 유모의 말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텔라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전보병은 평범한 우유 배달부처럼 행색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검문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건네는 전보를 받자마자 에스텔라는 그 자리에서 얼른 펼쳐 확인했다.

뒤이어 유모와 델라가 그 뒤를 따라 달려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려지려는 에스텔라를 얼른 부축했다.

“아아, 아아 신이시여….”

에스텔라가 전보를 껴안고 눈물 흘렸다.

제 몸을 지탱하지 못한 에스텔라가 주저앉았다. 편지를 껴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에스텔라는 계속해서 신만 찾아대며 울부짖었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헐떡거리다가 이내 스스로를 꽉 껴안으며 진정하려 했다.

유모와 델라는 물론 그 주변의 시종들 모두 에스텔라의 반응에 진정 이자크가 죽은 것인가, 하며 가만히 숨을 죽였다.

“감사합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살아있어, 이자크가 살아있어….”

에스텔라의 마지막 말에 다들 참았던 숨을 후, 내쉬며 환호를 질렀다. 이자크 님께서 살아 계신다!

전보를 건넨 전보병은 꽤나 놀라운 반응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유모는 살아계신대요, 우리 이자크 님이 살아계신대요! 하며 전보병을 얼싸안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앙 왕국에 비보가 전해졌다.

귀족들은 다들 안타까운 눈빛으로 살롱에서 이야기를 퍼다 날랐다.

“공주님께서 젊으신 나이에 과부가 되어 어쩌신대요.”

“결국, 이자크 경의 시신을 찾은 거랍니까?”

“예. 찾았대요. 국경선 근처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짐승이 물어뜯은 건지, 구분도 잘 안 간다 하더군요. 그래서 신상 확인이 오래 걸렸대요.”

“그 시체가 이자크 경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손가락에 같은 반지가 껴 있었나 봐요. 공주님이랑 같이 맞춘 반지가.”

“어머, 이걸 어째….”

그 전보는 에테리아의 국경선을 통해 온 전보병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적국이긴 하더라도, 공주의 남편이 죽었으니 그에 대한 예우는 갖춰야겠다는 전보였단다.

에테리아에서는 잠시 휴전을 제의하며, 공주가 남편의 시신을 가지러 올 때까지 일절 공격하지 않겠다는 말이 써 있었다고 한다.

이자크가 죽었다는 사실은 귀족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버트랜드에게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그때쯤 에스텔라가 버트랜드를 찾아왔다.

일전의 당당하던 그녀는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유모의 부축이 없으면 걷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버트랜드는 막상 에스텔라의 그런 모습을 보니 조금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이자크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도록 허해 주세요.”

에스텔라의 말에 버트랜드가 말했다.

“위험하다.”

“언제부터 제 안전을 그리 신경 쓰셨다고.”

“에스텔라. 난 널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네겐 항상 미안했지.”

“그런 분이, 이자크를 전쟁터로 내몰았나요? 그것도 겨우 100명의 군사를, 적군은 600 대군인데요? 이자크가 죽었으니 제가 한풀 꺾였네요. 축하드려요, 대부님. 당신이 이기셨어요.”

그렇게 말한 에스텔라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버트랜드 옆의 보좌관과 다른 가신들도 모두 당황한 눈치였다. 에스텔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상태로 버트랜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시신을 수습할 수 있도록 강에 다리를 열어 주십시오.”

고개를 숙인 에스텔라의 모습에 다들 웅성거렸다.

아이를 낳은 지 한 달이 겨우 지나 몸도 성치 않을 텐데, 그 와중에 남편의 비보까지 듣게 되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가신 중 몇몇이 다리만 열어 주면 알아서 간다는데, 열어 줘도 되지 않겠냐는 식으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버트랜드는 가만히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이자크가 죽었다고?

진정 죽었다는 말인가?

“강에 다리를 놓으면, 공주는 내게 뭘 할 건가. 후계권이라도 내려놓을 텐가.”

“내려놓겠습니다.”

에스텔라가 순순히 대답했다. 버트랜드는 이렇게나 쉽게 포기할 에스텔라가 아니라 생각했다. 이자크는 자신의 약점이 아니라 하지 않았던가.

시체 수습하겠다고 후계권을 버릴 예정이라니. 평소의 에스텔라답지 않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가.

하지만, 제 남편이 죽은 와중에 꼼수를 부렸을까.

“이자크가 죽은 것은 확실한가?“

“시체에서 그이가 끼던 반지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얼굴이 짐승들에게 뜯겼으나 체격과 짙은 흑발은 이 메시앙에 그이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시신을 수습하고 싶습니다, 전하. 아니, 대부님. 제발 보내주십시오. 이번만큼은, 제발 아비의 마음으로 딸을 보내주십시오.”

에스텔라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가련하게 떨리는 어깨만큼이나 목소리에도 동요함이 묻어났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워 보이는지, 결국 가신들 몇몇이 말을 거들었다.

“전하, 보내주십시오. 공주의 부군입니다. 나라를 지키다 순직한 이의 장례 정도는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북지대는 공주가 가기엔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아비의 마음으로 어찌 딸을 전쟁터로 보낸단 말이야. 에스텔라. 나를 원망하는 마음을 알겠지만-“

“이번만, 이번 한 번만! 다리를 열어주시면, 다시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간의 모든 일들! 모두 덮겠습니다.“

덮겠다는 말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버트랜드는 오로라를 쏙 빼닮은 에스텔라가 눈물로 호소하자 마음이 약해졌다.

사실 죽어 버리라는 심산으로 서북지대에 이자크를 보내긴 했지만, 막상 죽어 과부가 된 에스텔라를 보자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에스텔라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자크를 협박해서라도 에스텔라만은 자신이 한 짓을 몰라 주길 바랐었으니까.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이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면, 그 누가 앞으로 이 나라를 위해 싸운단 말입니까. 부디 다리를 연결해주십시오.”

그러자 몇몇 가신들이 만류했다.

“공주님, 부군의 시신을 수습하고 싶으신 마음은 십분 이해하겠으나, 이미 다리는 절반이 무너졌고, 어느 세월에 그걸 연결하여 다시 짓는단 말씀이십니까.”

“왕실의 군사들을 그렇게 사사로운 일에 사용해서는 아니되십니다.”

그들은 공익을 따지는 척 에스텔라에게 말했지만, 에스텔라는 그저 그들이 웃길 뿐이었다.

언제부터 저들이 공익을 따졌던가. 언제부터 저들이 사사로운 일과 사사롭지 않은 일들을 구분해가며 객관성을 유지했단 말인가.

“허가만 내어주십시오. 제가 사비로 하겠습니다. 다리가 문제라면 배라도 띄우게 해주십시오. 국왕 전하, 포트먼 요새가 무너진 뒤 백성들 사이에서도 불온한 기류가 보인다 합니다. 백성들은 언제 에테리아 군인이 강을 건너 이곳을 침략할지 두려움에 떨며 삽니다.”

에스텔라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혹여라도 제 얼굴에서 본심이 티끌만큼이라도 보일까 싶어 얼굴은 더, 더 아래로 수그렸다.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 때, 그들의 두려움을 어루만질 수 있어야지만 진정한 메시앙의 군주라 하였습니다. 역병 퍼지는 것이 두렵고, 인력이 아까워 강 너머 죽어가는 메시앙의 백성들을 진정 저버리실 것입니까.”

“공주님, 그 발언은 마치 저희가 일부러-”

가신 하나가 그녀의 말을 끊으려 했지만, 에스텔라는 휩쓸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강 건너 서북지대에 죽은 메시앙의 백성들이 백이 넘습니다, 유해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는 것이 백성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정성입니다. 단순히 제 남편의 시신만을 가져가기 위해 이리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십시오.”

“어찌 시체 수습만이 정성을 보여준다는 것입니까, 공주님, 말에 어폐가 있습니다.”

“어폐요? 타란틴 경, 말해보시지요. 전장에 댁의 아드님이 계십니까? 제 남편은 학술원 제 28기 기사 학도생들과 출정을 하였습니다. 타란틴 영식 역시 28기 학도가 아니었습니까?”

“….”

“아드님이 전선에 있을 텐데, 걱정되지는 않으십니까.”

“그, 것이.”

“찾아보니 28기 학도생 전원이 참가한 건 아니더군요. 분명 국왕 전하께서는 28기 기사학도생 전원의 출정을 명령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돈 많은 귀족 집 자제는 안전히 여기에 있고, 장학금 받고 다닌 중산층은 그 값을 지금이라도 내라는 듯 강 너머 서북지대에 있지요.”

에스텔라의 말에 몇몇 가신들은 헛기침을 하며 저들끼리 딴청을 부렸다. 아마 다들 같은 방식으로 제 아들이든, 제 사촌이든 교묘한 방법으로 출정 명단에서 이름을 뺀 이들일 거다.

“백성들이 이를 모를 거라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나라를 대표한다는 명목 하에 세금을 받아갔다면-”

에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비겁하게 눈을 피하는 가신들 하나하나를 둘러보며 말했다.

“- 제 핏줄만은 소중해서 남의 아들을 대신 명단에 집어넣었다면! 최소한 유해 정도는 수습해야 줘야 그게 정성 아닙니까? 최소한의 정성이요!”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에스텔라의 말에 변명이라도 해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남은 요새들이 모두 무너져 에테리아 군인들이 쳐들어오면, 그때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때는 수도를 뜯어내시기라도 하려고요? 역병? 역병은 고작 다리를 허문다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공기를 타고 퍼지는 것이 역병인 것을, 대신들은 말해보세요. 언제까지 백성들을 방패 삼아 그 뒤에 숨으실 겁니까.”

버트랜드는 일부러 저런 작자들만 골라 수뇌부의 대신들로 임명했다.

대부분은 머리 벗겨지고 배 나온, 자기관리도, 절제도 전혀 되지 않는 늙은 남자들.

하는 일이라고는 저들끼리 투닥대는 식의 하찮은 토론, 매일 되지도 않는 주제로 찬반 갈라 싸우다가도, 이렇게 똘똘 뭉치는 때가 있다. 그건 바로 제 이익과 관련될 때.

도무지 국왕을 보필하는 대신들로는 보이지 않는 이들.

애초에 대신이라는 직위가 뭔지, 충언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

버트랜드는 애초부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체스 말들을 죄다 썩어 버린 것들로 골라 채워 넣었다. 그래야 자신의 독재가 길어질 테니까.

그나마 견제할 만한 가신들은 모두 저 멍청이들의 하수인을 둬 제대로 된 발언권도 갖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에스텔라는 지금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가신들의 얼굴들을 똑똑히 기억해뒀다.

서슬 퍼런 공주의 눈빛에 반대하던 가신들이 흠칫 놀라며 다들 눈을 피하기 바빴다.

“공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때 누군가 에스텔라의 말에 맞장구쳤다.

“국왕 전하. 이럴 때일수록, 유해 수습을 하며 백성들에게 아직 나라가 그들을 버리지 않았음을 알려 줘야 합니다.”

키에프 공작이었다.

에스텔라가 뒤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인 거지, 키에프 공작? 그는 한번 에스텔라를 흘깃 쳐다보고는 짧게 목례를 했다. 자신들과 마찬가지일 줄 알았던 키에프 공작이 에스텔라를 옹호하자, 가신들 몇몇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장내가 시끄러워지자 버트랜드가 결국 짜증을 내며 말했다.

“다들 그만, 그만! 여기서 싸워서 해결될 게 뭐가 있소. 나 역시 이럴 때일수록 백성들에게 정성을 보여야 한다 생각하오. 서북지대의 탈환은 어려워도 시신은 수습해 줄 수 있겠지. 공주가 서북지대로 가는 것을 허락한다. 다들 물러가시오.”

그렇게 말한 버트랜드는 왕실 병사의 일부를 보내 다리 수복에 힘쓰라는 말을 했다.

에스텔라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합니다, 대부님, 감사합니다. 하며 인사를 올리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몸을 휘청거리며 아직 사별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음을 모두에게 보여줬다.

장이 파하였다. 왕은 키에프 공작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이만 물러나라 명령했다.

에스텔라는 키에프 공작을 지나쳐 홀을 빠져나갔다.

버트랜드는 왕좌에 앉아 부축받으며 나가는 에스텔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대리석 문이 닫히자 한숨을 내쉬며 제 수염을 쓸어내렸다.

키에프 공작이 그런 왕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자크 경이 정말로 죽었습니까?”

“그렇다는군. 시체의 반지가 똑같다나 뭐라나. 에스텔라의 반응을 보고 확실해졌네.”

키에프 공작이 가만히 에스텔라가 앉아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엄청 흐느끼시더군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하던데, 몸에 무리가 가시는 건 아닌지.”

“그래. 에스텔라는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울어댔거든. 저러다 더 큰 병이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 그나저나 정말로 죽어 버릴 줄이야. 생각보다 약하지 않나.”

버트랜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키에프 공작은 웃기다고 생각했다. 죽으라고 보냈으면서 무슨.

“전하께서 너무하신 처사를 하시긴 했습니다. 죽으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죽으라고 보낸 건 맞네. 살아 돌아오라고 보낸 건 아니니까. 그래도, 에스텔라가 저리 슬퍼하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구만.”

“아직 무르십니다, 전하.”

공작의 말에 버트랜드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에스텔라만 보면 물러지네. 이거 참. 고쳐야 하는 건데 말이야.”

“공주님이 오로라 왕비님을 많이 닮으셨으니까요. 헌데, 절 부르신 이유가.”

공작의 말에 버트랜드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아. 자네한테 그 문서가 있지?”

“예?”

“왜, 카루체 족 말이야.”

서북지대의 거주권을 팔아넘긴 그 문서.

“아아… 예. 제게 보관하라 하셨었지요.”

“일전에 내가 말한 건 했는가?”

“예. 문서들은 모두 불태웠습니다. 실존하는 증서가 없으니, 차후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버트랜드는 그 문서를 키에프 공작에게 보관하라 일러뒀다. 그런 식으로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 버트랜드의 수법이다.

후에 트라비아 원군이 도착했을 때 거주권 문제로 일이 복잡해질까 염려한 버트랜드가 키에프 공작을 시켜 문서를 태우도록 명령했다.

일반적으로 이쪽에서 문서를 태워버렸으니, 카루체족에게 덤터기를 씌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 듯하다.

“이제 슬슬 들여와도 될 때가 된 것 같군.”

버트랜드의 말에 키에프 공작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전하. 올란도 후작 재판은 어찌하실 겁니까.”

“알 게 뭔가. 대충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장단 맞춰주게나.”

“…후작 부인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버트랜드의 권태로운 표정이 순간 사라졌다.

“…후작 부인이 아직 살아있다니?”

“병원에서 후작부인과 비슷한 생김새의 여자를 봤다는 이가 있습니다. 시체, 찾지 못하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천장에 깔렸는데 살았을 리가. 현장에서 헌병들도 확인을 했을 테고. 병원에서는 사망진단을 받았잖나.”

“혹시 모를 일이죠. 만일 후작 부인이 맞다면, 그 여자 성격에 가만히 있겠습니까? 혹시 모르지요, 박쥐처럼 공주한테 붙어 모든 걸 나불댈지.”

버트랜드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적어도 키에프 공작은 그가 아주 잠시라도 고민을 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자네가 처리해야지, 그걸 왜 내게 말하고 있는 건가. 키에프 공작.”

“…예?”

“올란도 후작 가문은 자네가 처리하기로 하지 않았나. 선대 후작을 죽인 것도, 폭약을 대거 사들여 극장을 창고로 쓰는 것도, 모두 키에프 자네 아닌가.”

버트랜드는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귀를 후비적대며 다시 권태로운 얼굴로 돌아갔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키에프 공작이었다.

“나 참, 자네도 나이가 들어 총기가 흐려진겐가?”

“…아닙니다, 그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면 좋을 듯싶어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이미 저희 쪽에서 조치는 다 취하였습니다.”

“기껏 에스텔라가 꼬리를 내렸는데, 같잖은 걸로 날 겁주지 말게나. 하하하.”

버트랜드가 이만 나가보라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키에프는 더는 할 말이 사라져 이내 목례를 한 뒤 얼른 중앙 홀을 빠져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작의 비서가 얼른 그의 외투를 받아들었다.

“각하?”

“젠장, 늙은 여우같으니라고….”

공주가 말하던 그대로다.

버트랜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충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같이 쓰다 버릴 장기말로만 본다는 공주의 말이 맞았다.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다.

이미 버트랜드는 예전의 버트랜드가 아니다.

나이가 들어 총기가 흐려진 건 키에프가 아닌 버트랜드였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해 공주에게 이도 저도 아닌 행동을 하는 것부터가 이미 그 전조였던 것이다.

“제시.”

“예, 각하.”

“공주한테 그걸 전달해라.”

“…예, 각하!”

박쥐 같았던 그가 드디어 붙을 곳을 정했다.

*

마차에 오를 때까지 에스텔라는 유모의 부축을 받았다. 그 모습에 서북지대로 가는 것을 반대하던 가신들도 조금은 안쓰러운 눈길로 공주를 바라봤다.

호리호리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제압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공주도 한낱 사랑에 빠진 여자. 사랑하는 남편이 토끼 같은 세 아이만 놔두고 먼저 죽었다니 그 누가 동정하지 않을까.

에스텔라는 손수건을 꺼내 들어 눈 밑을 톡톡 두들겼다.

마차 문이 닫히자 에스텔라는 그 손수건을 휘릭, 내던졌다. 유모가 헐레벌떡 그걸 잡아들었다.

“아직 누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공주님!”

“됐어 이 정도면. 어때 유모, 내 연기 어땠어?”

에스텔라의 말에 유모가 조용히 엄지를 치켜들었다.

우리 공주님이야 옛날부터 연기력이 출중하셨죠. 선왕께 혼날 때면 세상 처연한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올려다보셨잖아요? 이 유모며, 시녀며, 가신들까지 모두 거기에 끔뻑 넘어갔는데 말이죠.

유모의 말에 에스텔라가 씩 미소지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국왕이 속았을까요?”

“속단은 일러. 그 작자는 나를 잘 아니까. 하지만 글쎄, 이번에는 좀 통한 거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이자크 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꽤나 충격받으실 텐데요,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갑자기 죽여버렸으니 말이죠….”

“그러게 누가 그렇게 걱정시키래? 조금의 벌이라고 생각하라지 뭐.”

에스텔라가 콧방귀를 끼었다.

“살아있으면 재깍 전보를 치란 말이야. 여기 남겨진 사람은 심장 졸려 죽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스텔라가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유모는 그런 공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참 다행이에요, 공주님. 그쵸.”

“…응 다행이야.”

며칠 전, 이자크로부터 전보가 왔다.

에스텔라,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이 말을 가장 먼저 하고 싶었어요.

비록 거창한 표현을 하지 못하는 나지만, 한글자 한글자 진심을 담아 보냅니다.

몇 주간 연락이 끊겨 불안해하게 만들어 미안해요.

포트먼 요새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당신도 들었겠지. 하지만 난 무사합니다. 에테리아의 포로로 끌려왔지만, 차기 국왕이 내게 제안을 하나 했어요. 서북지대에서 거주하고 있는 카루체 족과 전투를 해서 이기면 더 이상 요새를 공격하지 않겠다 하더군요.

나는 바로 에테리아 국경선으로 떠날 겁니다.

반드시 이기고 돌아와 당신과 아이들을 안고 싶어요.

p.s. 내 반지가 사라졌어요. 아무래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화내지는 말고. 울지도 말고.

사랑해요. 살아서 돌아갈게.

정말이지 사람을 이렇게나 밀었다 당기다니. 그날 전보를 받은 에스텔라는 한동안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긴장이 풀려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전보는 아니었다.

이 편지를 쓴 당시로서는 살아있을진 몰라도, 또 카루체 족과 싸우다 죽을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살아있음에 안도를 하고, 그와 동시에 또다시 불안에 떨어야 한다.

에스텔라는 이러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거 같다 생각했다.

만나지도 못하는 사람 계속 걱정하며 불안에 떠느니, 차라리 직접 가자 마음먹었다.

하여, 공주가 서북지대로 가는 것이다.

계획을 들은 모두가 펄쩍 뛰며 에스텔라를 만류했다. 특히나 아르텔과 델라가 결사반대했다. 아직 몸도 다 풀지 못한 상태에서 서북지대에 갔다가 역병에 걸리거나, 만에 하나 전투에 휩쓸리기라도 한다면 어쩔 거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겨우 남편 얼굴 보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버트랜드는 서북지대의 전쟁을 끝내기는커녕 부추길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고, 에테리아의 국왕은 당연히 서북지대를 너머 메시앙에 쳐들어올 생각일 테니, 누가 하나 나서서 중재를 해야 했다.

“집사 영감이랑, 랭 마담도 반대하던데, 공주님. 정말 마음 바꾸지 않으실 거세요? 저 역시 서북지대 가는 건 너무 위험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요, 이자크 님은 워낙 전투 경험도 많으신 분인데 공주님은 지금 몸도 약하시고, 그런 곳에 가보신 적도 없을 텐데.”

유모 역시 가지 않았으면 하는 기색을 은근히 내비쳤다.

“이자크가 걱정되어서 가는 것도 맞긴 해. 하지만 단순히 그가 보고 싶어 미치겠어서 아이들을 내버려 두면서까지 가는 게 아니야, 유모.”

“공주님….”

“더는 보고 있지만은 못하겠어. 너무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의 탐욕 때문에 죽어가.”

“….”

“나도 저택에서 아이들과 함께 이자크를 기다릴 수만 있다면 좋을 거야. 그럴 수 있겠지. 그저 세 아이의 엄마였다면 그랬을 거야. 하지만 난 그저 평범한 세 아이의 엄마가 아니잖니. 이 나라의 공주고 차기 국왕 후계자니까.”

에스텔라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미움받아 본 적 없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잠행을 나간 적이 있었어도 어디까지나 안전지대까지만. 메시앙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은 사실 말로만 들어봤을 뿐 두 눈으로 확인해본 적은 없다.

그때의 아버지는 아직 에스텔라에게 많은 걸 알 필요는 없다 말씀하셨다. 당신은 정정하셨고, 앞으로 에스텔라가 왕위를 잇는 것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당장의 순수함과 행복을 더 누려봤으면 해서였다.

그 결과 에스텔라는 구김 없이 자랐다. 티 없이 맑은 것은 에스텔라의 장점이었으나 큰 단점이기도 했다.

남을 미워하지 못하고 의심하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

버트랜드의 위선이 오랜 시간 들키지 않았던 것 역시 에스텔라의 그런 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버트랜드에 대한 진실을 알고,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리면서 에스텔라는 자신의 티 없이 맑은 그 성격을 제일 후회스러워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 빛의 최대 수혜자이면서 자신이 받는 빛으로 인해 제 아래 사람들은 더 짙은 그림자를 가지게 될 걸 몰랐던 것이다.

이제는 안다.

이제는 더 알고 싶어졌다.

그러니 더는 버트랜드의 독재도,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공주의 이미지도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그러니 서북지대로 간다.

남편을 구하기 위해, 백성을 구하기 위해, 버트랜드를 저지하기 위해.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 유모는 더는 말릴 수 없지요, 근데 그래도 제가 제일 걱정되는 것은요, 이자크 님이 과연 동의하실지….”

“무슨 소리야 유모. 당연히 모르게 가야지.”

에스텔라가 상큼하게 대답했다.

*

카루체 족은 에테리아의 국경선을 넘어 가장 밑에 위치한 작은 도시 티몰리를 장악했다. 다행히 바로 다음 도시 볼레르에서는 티몰리의 백성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곧장 성벽을 걸어 잠가 더 이상의 침입은 막았으나, 언제 성벽이 열릴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자크가 할 일은, 볼레로의 영주와 함께 성벽을 지키고 카루체 족을 티몰리 외곽까지 몰아내 도시의 일부를 탈환하는 것.

적군의 용병이나 다름없는 제안에 같이 끌려온 메시앙의 병사들과 이자크의 기사단이 분개했다.

하지만 에테리아의 왕이 내건 조건이 무려 ‘서북지대 철수’였기 때문에, 그들 모두 적국의 왕의 제안을 거부하라 쉽게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하여 이자크와 그의 전속 기사단 병사 10명, 그리고 포로로 끌려온 메시앙의 어린 병사 50명이 볼레르로 향했다.

에테리아 국왕이 힘내랍시고 자신들 무기를 지원해줬다.

물론 그래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만, 그래도 에테리아식 엽총이 잔뜩 든 박스를 보자 어린 병사들이 이거면 이길 수 있을 거라며 신나 했다.

에테리아의 엽총은 메시앙의 것보다 조금 더 신식이기 때문에 수비를 할 때든 열을 맞춰 공격을 할 때든 훨씬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자크는 그 총들을 내려다보다 이내 검을 갈기 시작했다.

“총은 성벽 수비용이다. 티몰리 외곽까지 빠르게 몰아내기 위해서는 전투가 필요해.”

총알 하나 발포하는 데 오랜 시간과 정성이 들이는 지금의 엽총으로는 성벽 수비밖에 못 한다. 철퇴와 창을 들고 다니며 우르르 빠르게 몰려와 공격하는 이들이다.

서슬 퍼런 검날을 칼집에 넣은 이자크가 제 부하들에게 말했다.

“전투는 나 혼자 한다. 너희들은 영주와 함께 성벽 수비를 해라.”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혼자 싸우시겠다니요.”

델버트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이자크는 아직 팔이 다 낫지 않아 붕대를 둘둘 감은 부하의 팔을 쳐다봤다. 어디 델버트 뿐인가. 다들 어디 하나씩은 부러지고, 찢어졌다.

그건 이자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석기로 날려진 거대한 바위에 온몸을 맞아, 어디 하나 특출나게 부러진 건 없어도 온몸이 전반적으로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졌다.

에테리아의 국왕은 부상당한 자국민을 전투에 내몰지 않는 인자한 왕이긴 했으나, 타국의 기사에게는 그 자비심이 발동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제대로 된 휴식과 치료도 없이 바로 볼레르로 왔기에 몸의 상태는 최악 중 최악이었다.

아마 이 자리의 모두가 그렇겠지.

카루체 족은 빠르게 몰려다니며 철퇴와 창 같은 긴 무기를 휘두르며 공격하는 종족. 지쳐있는 이자크의 수하들은 높은 확률로 질 것이 분명했다.

“이자크 경. 족장이 전서에 응했습니다.”

볼레르의 병사 하나가 전서를 가져왔다. 델버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이자크보다 먼저 그 전서를 펼쳤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립니까, 단장?”

“보이는 그대로지. 델레가투스를 신청했다.”

델레가투스.

적진에서 각각 한 명의 대표 장수가 나와 일 대 일로 싸우는 것.

딱 한 명의 대표가 딱 한 번의 전투로만 싸우는 것으로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카루체의 고대 전술 중 하나였다.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카루체 족에 대해 들은 적이 있던지라,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는 카루체 족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라 생각했다.

물론, 델레가투스에서 이자크가 지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단장, 만약 거기서 지기라도 하시면, 에테리아 국왕이-”

“뭐. 죽기밖에 더하겠어? 델버트. 그리고 내가 그리 쉽게 질 것 같은가.”

이자크의 말에 델버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부상도 다 낫지 않으셨잖습니까. 적어도 조금만 시간을 가지시고 하시지….”

“미안. 내가 조금 급해서 말이야.”

“예? 급하시다니… 아, 아…. 그렇군요. 지금쯤이면.”

지금쯤이면 에스텔라가 아이를 낳았을 텐데. 너무 오래 집안을 비워두면 많이 불안해할 거 같아서. 이자크가 답지 않게 민망스러운 듯 괜히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였다.

이자크에게 이겨야만 하는 이유는 아주 많았다.

그중 제일 으뜸이 에스텔라와 세 아이다.

에테리아의 국왕이 꽤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으니, 이참에 빨리 해치우고 메시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실 이자크는 에스텔라와 아이들에게 굉장히 미안하고 후회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그가 아내 옆에 붙어 있지 못했다는 것.

아이를 낳는 건 매우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라 들었다. 그런 상황에 자신이 옆에 있어 줘도 모자랄 텐데 더 불안하게 전쟁터에 나가 있으니 에스텔라의 기분이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에테리아 국왕은 아내에게 전보를 치게 해 달라는 이자크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다. 전보가 최대한 빨리 도착했으면 싶었다.

카루체 족장이 도착했다는 전언을 받았다. 이자크와 그의 군대 역시 나갈 준비를 했다.

양 측 모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티몰리와 볼레르의 사이에 있는 황무지로 이동했다.

카루체 족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키와 체격이 컸다. 카루체 족의 군대는 오로지 성인 남성만 자원입대한다지. 그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 상체는 여실히 드러냈다. 새까만 피부에 근육질 몸, 갑옷을 입은 메시앙 인들과 달리 문신으로 가득 채워진 맨살을 드러낸 이들.

짐승의 뿔을 머리에 쓰고 목에는 목걸이들이 잔뜩 걸려있다.

메시앙에서는 절대 본 적 없는 인종이었던 지라, 이자크를 제외한 그의 부하들은 위화감에 위축되어 조용히 침만 꿀꺽 삼켰다.

이자크가 앞으로 나가자, 카루체 족의 족장이 앞으로 나왔다.

건실한 남자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던 이였다. 메시앙에서 유난히 키가 크고 체격이 넓기로 유명한 이자크였는데, 카루체 족장은 그런 이자크와 비등해 보였다.

“델레가투스를 신청할 줄이야. 에테리아 국왕보다는 똑똑한 놈이군.”

카루체 족장은 이자크 뒤에 만신창이나 다름없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린 오합지졸 혹은 부상당한 기사단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수비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대표자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자크를 유심히 살펴보던 족장이 고개를 갸웃댔다.

“에테리아의 갑옷이 아니군.”

“나는 메시앙의 기사다.”

“메시앙? 에테리아 국왕이 드디어 메시앙의 뒤에 숨기라도 시작한 건가. 메시앙의 국왕이 자네보고 우릴 몰아내라 하던가? 먼저 협정을 어긴 건 에테리아다. 우린 그저 침입자들에게 그대로 돌려준 것뿐.”

“메시앙의 국왕이 당신들에게 서북지대를 팔았나?”

“우린 정당하게 돈을 주고 샀어.”

“당신은 메시앙의 국왕에게 놀아났어. 그는 일부러 서북지대에서 전쟁이 발발하도록 계획했을 뿐이야. 성벽 수비를 하면서 카루체 족도 많이 희생당한 걸로 아는데. 의미 없는 희생은 그만하는 게 어떻소?”

“우리 카루체족의 터전을 빼앗은 건 다름 아닌 메시앙과 에테리아다. 원래 이곳 대륙의 주인은 우리였어. 의미 없는 희생?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그렇게 말한 카루체 족장이 제 부하에게 손짓했다. 무기를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족장의 무기가 드러나자 다들 기겁했다.

사람 머리통만 한 거대한 철퇴였다. 철퇴 손잡이 뒤쪽에는 도끼가 달려 있었다.

끔찍한 혼종이라는 것이 이런 말일까. 메시앙의 어린 병사들은 괴수 같은 기괴한 생김새의 무기를 보고 저걸 진짜로 들고 싸우는 거냐고, 대장님이 불리한 것 아니냐며 원성을 보냈다.

거대한 철퇴에 맞으면 뼈는 으스러질 것이 분명했고, 철퇴를 감싼 뾰족한 징에 박히면 정육 고기처럼 다져질 것이 분명했으며, 그 뒤에 달린 도끼는 언제 몸이 썰릴지 모를 무기였다.

이자크 역시 델버트에게 손짓했다. 델버트가 떨떠름한 얼굴을 애써 숨기며 그에게 검과 방패를 건넸다.

족장의 것에 반해 이자크의 무기는 저렇게 보여주는 것만으로 상대의 기를 빼앗아갈 만한 무시무시한 검은 아니었다.

아버지께 물려받았던 근접 전투와 원거리 전투가 모두 가능한 변형된 글라디우스 형태의 검과 방패였는데, 족장의 철퇴에 비하면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뭐 저딴 괴물 같은 걸 들고 와? 뒤쪽에서 지켜보는 델버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자크 역시 기가 막힌 듯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족장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오는 제 무기를 휙, 휙 휘두르며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그가 먼저 공격하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기 시작했다.

부-웅- 공기를 가르다 못해 짓뭉개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는 철퇴가 이자크의 얼굴 쪽으로 휘둘러졌다. 얼른 몸을 뒤로 빼며 뒤이어 제 허리 쪽에 들어오는 도끼를 방패로 막았다.

보통의 기사들은 기초훈련이 어느 나라든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 지켜야 하는 규칙이나, 예절 같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카루체 족장은 예절이고 나발이고 다 무시하고 그저 힘으로 있는 힘껏 밀어붙이니, 왜 에테리아 국왕이 카루체 원주민을 야만족이라 하는지 얼핏 알 법도 하다.

고전이 길어졌다.

카루체 족장은 생각보다 강한 이자크를 보며 괜히 저 남자가 델레가투스를 신청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일부러 계속해서 수비만 하고 있었다. 간혹 공격이 들어와도 어디까지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족장은 그가 아직 제 능력을 십분 발휘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델레가투스를 신청했다는 건 제 병사들의 목숨까지 저가 대신 짊어졌다는 건데, 이 메시앙의 장군은 어째서인지 싸움에 제대로 임하려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얼핏 보기엔 이자크가 밀리는 것 같았다.

메시앙 병사들은 거대한 철퇴가 붕- 소리를 내며 이자크에게 달려들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럴 때마다 카루체 원주민들은 그들만의 구호라도 되는 양 우! 우! 우! 단말 소리를 내며 제 족장을 부추겼다.

델버트는 자신들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저쪽은 제 족장한테 힘을 주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우! 우! 거리는데, 자신들은 저들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대장에게 힘을 주기는커녕 못 보겠다며 눈을 질끈 감지 않나.

“에, 에스텔라!”

델버트가 눈을 꼭 감고 소리쳤다.

“루스!”

“루시!”

“루멘!”

그러자 메시앙 병사들은 그게 뭘 뜻하는 건지도 제대로 모른 채 델버트를 따라 이름을 열창하기 시작했다.

한창 족장과 싸우고 있던 이자크는 난데없이 뒤에서 들려오는 에스텔라와 제 아이들의 이름에 황당한 듯 잠시 뒤쪽을 쳐다봤다.

저것들이 왜 이래? 하는 눈빛으로 보던 이자크가 이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무슨 우스꽝스러운 꼴인가.

한쪽에서는 우! 우! 우! 또 반대편에서는 질세라 에스텔라! 루스! 루시! 루멘!을 부르짖고 있는 이 상황이.

“…역시 빨리 끝내고 가야겠어.”

이대로 가다간 웃다 힘 풀려서 질 것 같다. 이자크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아무래도 왼쪽이 낫겠군,

카루체 족장이 다시 한번 철퇴를 휘둘렀다. 이자크는 그대로 쇠사슬에 제 왼팔을 내어줬다. 커다란 철퇴를 이어주는 쇠사슬이 이자크의 팔목에 휙휙 감기더니, 커다란 철퇴가 그대로 이자크의 왼쪽 어깨를 강타했다.

기다란 무기를 휘두르며 전투를 하는 이와 일정 범위 안에 가까워져야 전투를 할 텐데, 시도 때도 없이 날아다니는 철퇴를 잠시나마 멈추기 위해선 제 어깨를 내어야 했다.

단단한 호두 껍질을 으스러뜨릴 때 나는 비슷한 소리가 그의 어깨에서 들렸다. 이자크가 이를 악물며 그대로 왼쪽 손에 힘을 줘 제 쪽으로 당겼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라왔지만, 당황한 카루체 족장이 이자크의 힘과 철퇴의 무게에 딸려 앞으로 쏠리는 것은 그의 허점을 노리는 데 최고의 방법이었다.

이자크가 그대로 제 검을 휘둘렀다.

카루체 족장과 이자크가 맞닿아 있어 멀리서 보는 이들은 누가 이긴 건지 제대로 식별하기 어려웠다.

이내 땅바닥에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시끄럽게 구호를 외치던 양측이 일순간 침묵했다. 누구의 피인 건가. 누가 이긴 건가.

카루체 족장이 아래로 무너졌다.

“….”

“….”

“…이, 이겼다….”

“이겼다, 단장이 이겼다!”

우와아아아- 하며 이자크의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카루체 원주민의 전사들은 땅에 쓰러진 제 족장을 보고 당황한 듯했다. 이자크는 쓰러진 족장을 부축해 카루체 원주민 진영 쪽으로 향했다.

전사 둘이 얼른 나와 제 족장을 받아갔다.

“깊게 찌르지 않았으니 아직 숨은 붙어 있을 거다.”

이자크한테 족장을 넘겨받는데, 제정신이 든 건지 아니면 정신력이 강한 것인지, 카루체 족장이 이자크를 불러세웠다.

“…서북, 지대에서도 나가게 되면… 우리 카루체 족은 더는 갈 곳이 없다. 삶의 터전을 뺏은 것도 그대들이면서… 원주민들을 배척한 것 역시 그대들 아닌가.”

“서북지대에서 나가라는 말은 한 적 없소. 현재 메시앙의 국왕이 나라를 팔아먹기 위해 당신네들을 이용한 것뿐이지.”

그렇게 말한 이자크가 말을 데려온 델버트의 부축을 받으며 말 위에 올라탔다. 그의 왼쪽 어깨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족장은 그런 이자크를 잠시 바라봤다. 충분히 자기를 죽일 수 있었던 남자였다. 옆구리가 아닌 심장이든 복부 정 중앙이든 찔렀다면 아마 카루체 원주민들은 지도자를 잃고 그대로 뿔뿔이 흩어졌을지도 모른다.

카루체 족장이 그에게 목례를 했다. 이자크 역시 짧게 그에 대한 예의를 갖추곤 돌아갔다.

메시앙의 이자크 경이 카루체 족장과의 델레가투스에서 승리했고, 카루체 족이 에테리아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은 곧바로 볼레르 전역에 퍼졌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영주가 뛰쳐나와 이자크를 맞이했다.

비록 적군이긴 했어도, 그의 사정을 들은 볼레르 영주가 그를 영주성으로 초대했다. 그곳 주치의의 치료를 받고, 만찬까지 든든히 챙겨 먹은 이자크와 메시앙의 병사들은 그다음날 바로 서북지대로 떠났다.

에테리아의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국왕의 막사에 불려갔다.

왕은 이자크를 보자마자 친한 친우라도 대하듯 그에게 환영의 포옹을 했다.

“델레가투스를 떠올리다니. 자네도 대단하군. 볼수록 탐난단 말이지.”

“약조대로 서북지대에서 철수해주십시오.”

“서두르지 않아도 그리하겠네. 헌데, 자네 말일세. 메시앙에서 꽤나 미움받는 거로 알고 있는데 에테리아로 귀화할 생각은 없는가? 자네 가족까지 모두 최고의 대우로 받아주겠네. 자네가 귀화하게 되면 아마 바로 왕실근위대장 중 하나로 승격시켜 줄텐데 말이야. 메시앙에서 코흘리개들 가르치는 것보다 더 낫지 않겠는가.”

어차피 왕의 미움을 사 이곳 서북지대에 오합지졸 100명을 데리고 온 것. 에테리아의 국왕은 진심으로 이자크를 제 기사로 두고 싶은지 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리며 말했다.

“잘 생각해보게나.”

이자크는 짧게 목례를 한 뒤 막사에서 빠져나왔다. 오늘 밤만 지나면 다시 메시앙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제 곧 에스텔라를 볼 수 있다.

조금은 쉬어도 될 것 같아 오늘 밤은 에테리아 진영에서 묵게 되었다. 급조된 지푸라기 침대에 누운 이자크가 피곤한 듯 그대로 눈을 감았다.

존 기억조차 없이 그대로 잠에 빠졌던 이자크는 제 막사에 들어온 에테리아 왕실 근위 부대장 헤롤드 때문에 단잠을 방해받고 말았다.

“이봐, 형씨!- 형씨는 좋겠어? 데리러 온 사람도 있고-”

에테리아 진영에 끌려온 그 며칠 사이 친한 척 말을 튼 헤롤드가 이자크를 깨우며 말했다.

“…뭐?”

난데없이 실실 웃으며 형씨 부러운데에-를 연발하는 헤롤드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아주 사랑받는 남편인가 봐?”

“뭐라는 거야. 나가.”

“크, 공주님의 이 불타는 사랑. 부럽다 부러워. 나도 날 구하러 와줄 공주님이 있었으면 좋겠네. 예쁜 사랑하시오. 근데, 공주님이 화나시면 엄청 무서운 스타일인가 봐. 우리 국왕 전하가 진땀을 흘리시더라니까?”

“뭔 소리야 대체?”

“거참, 지금 밖에 메시앙의 공주님이 와 계신다는 소리야.”

뭐?! 이자크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에스텔라가 여길 왜? 얼른 막사를 빠져나가자 마구간 쪽에 커다란 메시앙 왕궁의 마차가 있었다.

“아, 공주님은 지금 전하와 얘기를 나누고 계실 거야. 빨리 가보게.”

헤롤드의 말에 이자크가 지체 없이 왕의 막사를 열고 들어갔다.

“아. 왔는가.”

“이자크!”

“…에스텔라?”

이자크는 제 눈을 믿지 못하겠는지 가만히 제 눈가 부근을 꾹 누르고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틀림없는 에스텔라가 맞았다. 그 옆에는 릴리도 있었다.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

“에스텔라. 당신 지금 막달일… 배가 왜 이래요?”

막달이면 배가 산처럼 불러야 하는데, 에스텔라의 배는 그렇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일찍 애가 나와버렸어요.”

아이를 이미 낳았다고? 예상보다 일찍? 그렇다면 아직 몸이 성치 않을 때 아닌가? 그런 사람이 왜 이 위험한 서북지대에 와 있단 말인가.

“예? 아니, 에스텔라. 그럼 지금 몸 상태도 좋지 않을 텐데 왜….”

“이자크를 데리러 왔죠. 후후.”

에스텔라가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둘을 바라보던 에테리아의 국왕이 호탕하게 웃었다.

“내 살다 살다 이런 공주는 또 처음이야! 하하하! 정말이지 부부가 쌍으로 날 흥미롭게 한다니까!”

이자크는 저한테 달려와 안기는 에스텔라를 당혹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봤다.

“날 데리러 왔다고요?”

“타이밍 기가 막히죠?”

에스텔라가 한쪽 눈을 찡긋, 윙크하며 물었다. 그런 잔망을 떨 때가 아니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이 위험하고 더러운 곳에는 왜 오냐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데, 트라비아의 왕비님은 여기 왜 또.”

이자크는 에스텔라 옆에 앉아있던 릴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릴리가 생긋 웃으며 에스텔라의 연락을 받고 왔어요. 하며 대답했다.

트라비아의 사신, 메시앙의 공주, 에테리아의 국왕.

이 세 명이 고작 공주의 남편 하나 때문에 아침부터 자리를 모았단 말인가?

“에스텔라. 무슨 계획인 겁니까?”

단순히 자신을 데리러 온 것만이 아님을 눈치챈 이자크가 에스텔라에게 물었다.

*

그날,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전보를 받은 그 날.

이자크가 살아있다는 희망감과, 언제 그가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뒤덮여 복잡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멍하니 창문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마망….”

문 뒤에 반쯤 몸을 가린 채 고개만 빼꼼 내미는 아이들의 모습. 에스텔라가 가만히 미소지으며 이리 오라는 듯 팔을 벌렸다.

“마망. 오늘 마망이 재워주면 안 돼?”

“루스도 마망이 재워줬으면 좋겠떠.”

루멘이 태어난 후로 에스텔라는 계속 침실에서 루멘과 함께 지내다 보니, 아이들이 많이 서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은 엄마랑 루시랑, 루스랑 셋이 같이 자자.”

에스텔라는 꼬맹이들이 이불 안에 들어오기 편하도록 제 옆 이불을 활짝 들췄다. 그제야 아이들이 히히, 웃으며 꼬물꼬물 올라와 에스텔라를 가운데에 두고 양옆에 누웠다.

이자크가 출정을 떠난 후로 넓어진 부부의 침대가 오늘은 딱 알맞게 채워졌다. 양쪽 겨드랑이에 열이 폴폴 나는 작은 아이들을 낀 에스텔라가 아이들의 이마에 한 번씩 입을 맞췄다.

루시와 루스는 꼬물댔다. 에스텔라는 제 허리춤에 딱딱한 도자기 같은 것이 느껴져 슬쩍 이불을 들췄다. 릴리가 준 인형을 아직도 잘 들고 다니는 건지, 루시와 루스 둘 다 에스텔라가 자신들을 안아주듯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다.

“루시, 루스. 인형은 잠깐 옆에다 두고 자자.”

허리에 걸리적거려 불편한 듯 에스텔라가 인형들을 빼냈다. 인형을 들어 올리자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부터 아이들이 이 인형을 들고 다닐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것이 신경 쓰였는데, 안에 뭐가 든 건가?

에스텔라가 인형을 살짝 흔들었다.

잘그락, 잘그락.

“이잉, 안대는데.”

“안대에. 그거 소즁히 하랬어. 꼭 안고 다니라구. 그 아줌마가 그렇게 말해찌.”

“아줌마? 아줌마 누구?”

그러자 루스가 말했다.

“이고 준 사람.”

“릴리 언니가? 언제?”

“응. 반짝반짝 파티 간 날에. 엄마 인형이 이렇게 막 놓지 말구 잘 살펴 바바.”

갑자기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인형을 품에 안아 들며 말했다.

“인형 꼭 잘 살펴보랬어. 이거 준 아줌마가. 엄마 기억 못 하는 거 같대.”

반짝반짝 파티? 일전에 왕실연회를 말하는 건가? 에스텔라는 몇 달 전 아이들이 이 인형을 다시 에스텔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때는 별거 아니라 치부했었는데, 아이들의 말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에스텔라가 인형을 가만히 쳐다봤다.

인형을 살펴보라고 했다고?

기억 못 한다니, 뭐를?

에스텔라가 다시 한번 인형을 흔들었다. 잘그락, 잘그락. 그제야 에스텔라가 뭔가가 떠오른 것인지 아! 하며 짧은 단말마를 냈다. 이 인형, 맞아. 이 인형은 그때 동화책에 나온 인형처럼 말을 할 수 있는 인형이었다.

레온 스콧이라는 먼 타국의 발명가가 만들었었다는 이 인형은, 사람 말을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는 녹음 기능이 있었던 것.

어린애들 장난감으로 발명되었던 것이고, 이후 그의 종적이 묘연해져 어떤 기술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 인형은 과거의 기술은 물론 지금의 기술로도 만들기 어려운 고도의 기술이었다.

인형의 등 쪽 부근에 직접 말을 녹음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별 관심 보이지 않았지만 당시 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말하는 인형이라며 굉장히 신기해했었다.

에스텔라가 인형을 뒤집어 옷을 들춘 뒤 등 부근을 확인했다. 등 부근에는 문처럼 작은 손잡이가 있었다. 그걸 잡아당기자 등에서 똑, 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안쪽의 기계의 태엽을 돌리면 마치 오르골처럼 녹음된 말이 흘러나온다.

치지직 거리는 음질과 함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음질은 좋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확실한 버트랜드의 목소리였다.

치직… 변경 지역을 … 치지직 … 드리겠습니다. 변경에 대해서는 …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어차피 전투밖에 모르는 이들이라. … 땅의 거주권이니, 주인이니, 그런 건 모를 겁니다. 예. 그럼요. 사업용지로 …지지직… 쓰기에도 적합하실 겁니다.

거기에는 버트랜드가 변경 부근의 개발되지 않은 땅들을 트라비아 귀족들에게 매도하는 정황의 대화가 녹음되어 있었다.

에스텔라는 다른 인형도 확인했다.

치지직… 변경백이 …지지직…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아 …치직, 아마 국왕에게 …치지직, 지직, 말하겠지. 젠장. … 밀수꾼을 … 지지직 … 데려와라… 국내에 …없는 약… 독약 말고 …일정량 이상 섭취하면 …독성을 띠는 약재… 지지직

릴리 언니는 이걸 알고 내게 준건가?

이런 걸 녹음해서 보낸 이유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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