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저택에 도착했다.
유모는 자그마한 배냇옷을 오랜만에 본다며 추억에 빠진 듯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쌍둥이 들이 입었던 배냇옷도 가져와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나도 이러케 작아써?”
“완전 아가였네?”
자신들도 이렇게 작았었냐며, 지금도 작은 녀석들이 신기해한다. 자신들의 배냇옷을 보며 또 아가한테 줄 거라고 한다.
“아가는 좋겠네. 언니 오빠가 이렇게나 아가를 예뻐해 줘서.”
“언니 오빠 아니구 누나랑 형아야.”
“응?”
“아가. 누나랑 형이라구 불러. 우리.”
“진짜?”
“웅! 아가 남자애야.”
루시와 루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진짜 너희 아가랑 대화라도 하는 거니? 에스텔라가 신기한 듯 제 배를 문질렀다.
“아가는 엄마가 엄-청 좋대. 그리구 누나랑 형아랑 아빠도 엄-청 좋대.”
“진짜?”
“웅! 오늘 산 옷들도 다 마음에 든대! 아가도 빨리 나와서 입구 싶대!”
꺄륵 꺄륵 신이나서 말하는 아이들이다. 에스텔라 역시 얼른 아이를 보고 싶다. 부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아주 얕은 평화라도 괜찮으니 지속되길.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에스텔라 옆에서 동화책을 읽어줬다. 며칠 전만 해도 동화책을 읽어달라 칭얼거리던 애들이 이제는 저들이 아가에게 읽어주겠다며 에스텔라를 소파에 앉히고 그 옆에 끼어 앉았다.
책을 읽다가 졸려운지 눈을 끔뻑거리기에 유모와 멜리사가 결국 들쳐업고 아이들 방으로 갔다. 에스텔라는 오늘 가게에서 사온 배냇옷들을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와서 옷을 치울까요? 했지만 에스텔라는 그 옷들을 좀 더 보고 싶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 안있어 훈련소에서 돌아온 이자크가 방에 돌아왔다.
“이자크. 왔어요?”
이자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에스텔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튀어나온 배에도 살짝 입을 맞췄다. 에스텔라는 그에게도 아이 옷을 보여주고 싶어 얼른 다시 박스에서 옷을 꺼냈다.
“이거 봐요. 루시랑 루스가 아가한테 사줘야 한다면서 직접 골라준 옷이에요.”
이자크의 손바닥만한 작은 옷이다. 이자크는 이렇게나 작을 수도 있냐면서 작게 미소지었다. 예전 쌍둥이들의 갓난쟁이 시절이 떠오른다. 그래. 아가들은 원래 이렇게 작았지.
“오늘 로먼이 진찰했는데, 애가 건강하대요. 이제 6개월 차니까, 앞으로 4개월만 더 있으면 우리 아가가 세상에 나오겠네요. 아이들 말로는 남자애래요. 신기하죠? 애기들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는 건지. 맨 처음 임신했을 때도 의사보다 먼저 알아챈 게 아이들이잖아요.”
4개월. 앞으로 4개월 뒤면 아이가 태어난다.
그때까지 전쟁이 끝이 날까?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까?
이자크는 아무것도 모른채 태어날 아이를 만날 생각에 기대하고 있는 에스텔라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래요?”
그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에스텔라가 물었다.
“에스텔라.”
“응?”
“…출정 명령이 떨어졌어요.”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던 에스텔라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왔다. 잘못 들은 듯, 에스텔라가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다시. 다시요, 이자크. 에스텔라의 눈동자가 동요했다.
“…네?”
“오늘 아침에 서북 요새가 기습을 당했어요. 에테리아 군이 남하했고 그쪽에서 고전 중이라고 합니다.”
“….”
“급하게 출정명령이 떨어졌습니다.”
“… 버트랜드 그 인간이….”
아이 옷을 쥐고 있는 에스텔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노란 개나리 같은 아이의 옷이 와그작 구겨졌다.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손을 잡으며 구겨진 옷을 빼냈다. 그러더니 에스텔라의 손에 입을 맞췄다.
“에스텔라. 살아 돌아올게요.”
“흐윽….”
“울지 말고.”
“혼자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다시 돌아올거야.”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눈 역시 슬퍼 보인다. 울지 말자. 그도 울고 싶을 거야. 내가 울면 이자크의 마음도 더 무거워지겠지. 에스텔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에서 겨우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약속했어. 나랑. 안 돌아오면. 내가 찾아 갈 거야.”
“위험해.”
“갈 거야. 나 고집 세잖아요.”
“그랬지.”
이자크가 손을 들어 에스텔라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훔쳤다.
*
이자크가 출정한다는 소식은 금세 귀족들 사이에 퍼졌다. 사람들은 국왕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수근댔다. 공주의 남편 아닌가. 출정이라니. 서북 요새라니. 에테리아 군의 절반이 겨우 될까 하는 숫자로 맞서 싸우라니. 이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 아닌가.
공주와 국왕의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니냐 하는 말들이 나돌았다. 하지만 버트랜드는 입을 잘 터는 인간이었다.
“짐은 이자크 경의 능력을 알고 있소. 내 오랜 친우 디에스 변경의 아들이자, 변경백의 후계자였소. 비록 지금은 죄를 짓고 몰락한 가문이지만, 나는 이자크 경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소.”
선왕을 독살하려 했던 것은 그의 아버지일 뿐, 이자크 경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니 자신은 그가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여 다시 민심을 얻고 명예를 회복했으면 한다는 말이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시 다시 변경백 가문을 복기시켜주겠단다.
자신은 그를 믿는다고. 그는 분명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거라고. 혹시라도 대군을 이끌게 했다가 그의 능력이 아닌, 머릿수로 이긴 거라는 말이 나돌지 못하게 하려고 절반의 숫자만 보낸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에스텔라는 기가 막혔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뻔뻔할 수가 있구나. 국왕의 말에 어폐가 있다는 걸 눈치챈 귀족들도 차마 나설 순 없었다. 이자크가 나가지 않으면 다른 이가 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해야 하는데, 차마 급습당해 아비규환일 서북 요새에 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누구하나 반박하지 않고 이자크의 출정이 결정되었다.
오늘은 이자크의 출정 날이다.
새벽의 여신이 이제 그만 그를 보내줘야 할 시간이라며 달래듯 서서히 어두운 장막이 걷혔다. 산 너머 주황 빛과 함께 해가 뜨는 것이 이토록 암담할 수가 없다. 에스텔라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침대에 누워 해가 떠오르는 것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자크의 두꺼운 팔이 에스텔라의 어깨를 감쌌다.
알몸이라 추울 것이라며 이불을 끌어다 그녀 위로 덮어준다.
그러다가 에스텔라의 눈이 초점 없이 떠져있는 것을 보고 이자크가 다시 한번 에스텔라를 꽉 끌어안았다.
“에스텔라.”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그냥 계속 당신을 봤어요. 근데 밤 내내 보고도 모자란데, 지금은 또 이상하게 당신을 볼 수가 없어.”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고개를 부드럽게 잡아 제 쪽을 향하게 했다. 에스텔라. 나 좀 봐. 이자크의 다정한 음성에도 에스텔라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머리통을 쓰다듬어주며 그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이내 침대에서 일어나 출정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속 기사단이었던 동료들과 왕실에서 보내준 100명의 군사가 변경 저택의 마당에 집결했다. 에테리아에서는 400의 군사에 200명을 더 보내준다는 말이 돌던데. 서북 요새는 이자크가 가도 겨우 300이 채 될까 말까다.
저택은 고요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죽은 이는 아무도 없는데 초상이라도 치룬듯 저택 전체가 우울했다.
출정준비를 마친 이자크가 마당으로 나왔다.
사용인들 모두가 밖에 나와 이자크의 출정을 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 아빠에게 손을 흔들었다. 전장터에 나가는게 어떠한 것인지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압빠! 다녀오세요!”
“올 때 턴물 사오세여!”
이자크가 아이들에게 팔을 벌렸다. 쌍둥이가 아빠에게 달려갔다. 이자크는 루시와 루스를 번갈아 번쩍 들어 볼에 입을 맞췄다. 쌍둥이는 신나서 꺄르륵 웃고는 다시 에스텔라에게 돌아갔다.
그저 저택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신기할 뿐. 아이들은 아직 전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유모와 미엘라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에 더 슬픈지 이내 아이들을 안아 들었다.
에스텔라가 이자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에스텔라는 그때까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다. 그 눈을 바라보는 순간 체면이고 뭐고 그냥 다리에 매달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요, 이자크, 가지 마. 하며 엉엉 꼴사납게 울어버릴까봐.
이자크는 에스텔라를 꽉 껴안았다.
“나좀 봐줘. 에스텔라.”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턱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고개가 들려도 아래로 향하고 있던 시선이 마구 흔들리며 그에게로 향했다. 톡 치면 눈물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다는게 이런건가. 이자크는 제 아내가 안간힘으로 자기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한테 해줄 말 없습니까.”
이자크는 일부러 농담조로 말했다. 어젯밤 그렇게 뜨겁게 달려들 때는 어쩌고 이제 와서 이리 냉랭하게 굽니까. 응? 픽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에스텔라가 농담할 때냐며 야속한 듯 그를 툭 쳤다. 에스텔라가 우물쭈물 거리다 이내 겨우 말했다.
“…잘 다녀와요.”
“네.”
“다녀오는 거예요. 다시, 돌아오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안 울려고 하는데 자꾸만 히끅대며 울음이 새어 나온다. 울지 말자고 그렇게 전날까지 다짐했으면서. 애꿎은 눈물샘은 자꾸만 눈물을 내보낸다.
이자크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반지였다. 그는 에스텔라의 손을 들어 왼손 약지에 반지를 꼈다.
금으로 만들어진 반지였는데, 커다랗고 화려한 보석이 박힌 것이 아닌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 광석이 반지 안에 콕 박혀 있는 것이었다.
같은 반지가 이자크의 왼손 약지에도 껴져 있다.
“당신 혼자 두지 않아. 같은 반지를 끼고 있으니까 우리는 계속 이어져 있는 겁니다.”
반지 겉면을 빙 두르는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그대의 손을 잡고 이생의 끝까지 살아간다
제 약지에 낀 반지를 보며 에스텔라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어떤 화려한 반지들보다, 그 어떤 빛나는 보석보다, 그 어떤 달콤한 말보다 아름답고 소중했다. 에스텔라가 울음을 꾹 참으며 이자크를 다시 한번 껴안았다.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고, 불룩 튀어나온 배에 입을 맞췄다.
“다녀오마. 아가.”
태중의 아이에게 나직하게 말한 뒤 이자크는 말위에 올라탔다. 에스텔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이자크 역시 에스텔라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이내, 이랴- 짧은 소리와 함께 이자크가 발로 말을 찼다. 말이 소리를 내며 빠르게 내달렸다. 그 뒤로 그의 전속 기사단이 에스텔라에게 짧게 목례를 한 뒤 뒤를 따랐다. 100명의 군사 들 역시 저택을 빠져나갔다.
에스텔라는 멀어져가는 이자크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르텔이 다가와 옆으로 기울어지려는 에스텔라를 부축했다.
“흐윽… 제발, 제발….”
신이시여. 저 이를 보호하소서. 제게서 더는 그를 뺏지 말아 주소서. 제 아이들이 아비와 함께 자랄 수 있도록 해주소서. 우리가 이생의 끝을 함께 할 수 있도록, 그의 시간을 뺏지 말아 주소서.
*
서북 요새로 가는 길, 백 명의 병사와 그 앞에 선두로 가고 있는 이자크, 그리고 그의 전속 기사단은 가는 길 내내 어떠한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모두들 알고 있다. 패전이 확실한 서북 요새에 겨우 백 명의 군사로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제아무리 대단한 전술을 펼친다 한들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백 명의 군사들 중 끄트머리에서는 종종 우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도 탈주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해야 할까.
장장 7시간을 걸쳐 서북 요새 근처에 도착했다.
강가 건너편이 서북 요새다. 붉은 화염과 천둥 같은 포탄 소리, 바람에 실려 오는 피비린내와 타는 냄새. 강을 건너는 순간 그들은 지옥으로 입성하는 것이다.
강에서 서북 요새로 넘어가는 길은 하나.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다리. 수심이 굉장히 깊은 강인지라 다른 방법은 없었다. 다리를 지나갈 때마다 끽, 끽, 끼익, 끼기긱, 하는 기괴한 소리들은 마치 지옥에 온걸 환영하는 악귀들의 인사같이 들렸다.
한참 다리를 지나 드디어 서북 요새에 다다랐다.
아직 전투에 참가하기도 전이지만 병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버트랜드가 보낸 100의 군사는 대부분 이제 갓 병사가 된 어린 청년들 위주로 전쟁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었다. 벌써부터 우는 녀석들, 시체를 보고 토하는 녀석들이 나온다.
서북 요새의 영주가 원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동쪽의 변경에서 오셨다고요. 꽤나 피곤하실 텐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하던 영주가 이자크 뒤의 어린 병사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내 절망하듯 고개를 떨구며 애써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 보였다.
기껏 원군을 보내준 것이, 저렇게 어린아이들이라고?
300명을 보내줘도 겨우 에테리아와 맞설 수 있는 것을, 겨우 100명? 국왕은 우릴 살릴 생각이, 서북 요새를 지킬 생각이 없구나.
이자크는 그런 영주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놨다. 절망에 빠진 표정의 영주가 그를 올려다봤다. 이자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대략적인 상황을 알려주십시오. 곧장 준비를 마치는 대로 전선에 참가할 테니.”
겨우 이성을 되찾은 영주가 제 보좌관에게 지도를 가져오라 명했다.
지도를 펼친 뒤 에테리아 군인이 잠시 퇴각한 장소와, 에테리아의 원군이 오는 경로 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테리아에서 원군을 보낸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이쪽과 이쪽은 저희가 손을 써서 막아놨으니 서쪽 사막, 아니면 협곡을 통해 들어올 것 같은데, 만일 이번 주 안에 원군을 파견하게 된다 해도 적어도 열흘은 걸릴 것입니다.”
“에테리아 군이 진을 친 장소는요.”
“사막과 협곡의 중간입니다. 요새로부터는 10마일 정도 떨어져 있고요. 오늘 아침 퇴각한 뒤로 다시 공격하고 있지는 않고 있습니다. 저희는 최대한 요새 방어에 집중하고 있고요.”
“요새 쪽 피해 규모는요.”
영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총 300의 군사가 있었으나 중상 환자가 70명, 경상 환자가 50명, 사망자가 60명. 에테리아 역시 부상자와 사망자를 감안하더라도 300의 병사 정도는 될 거라더라. 거기에 곧바로 200명의 원군을 보내준다 하니, 저들이야 두려울 것이 없을 거라 말했다.
영주는 이미 많이 지친 표정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일주일 만에 내려온 이자크의 원군이었지만, 그마저도 전쟁 겪어본 적 없어 토하고 울기 바쁜 어린 병사들.
“…이기기는커녕, 요새를 지켜낼 수도 있을까 의문입니다.”
영주가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요새가 함락되면 저들은 분명 강을 넘어가 민가를 습격할 것이다.
“전하께서는 이곳을 버리신 것입니까.”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병사들 수준을 보십시오. 아직 얼굴에 솜털 난 어린애들입니다. 이탈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왕실 병사들 중에서 어린 병사들은 거의 경험이 없다 봐야 하지 않습니까.”
“….”
“이자크 경이 오신다 했을 때, 안심이 되었습니다. 경은 예전 카프카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경 역시 좌천이라도 된 겁니까? 국왕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건지-”
“드와이트 남작. 저는 죽으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자크의 말에 영주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이자크의 표정에는 자신처럼 절망이나 두려움, 분노 따위가 없었다.
“살아 돌아가려고 이곳에 온 겁니다.”
“….”
“우리는 살아 돌아갈겁니다.”
“…예.”
영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자크가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이해한 듯하다. 짧게 목례를 한 이자크가 전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임시 거처에서 나온 그는 쑥대밭이 된 요새를 한번 빙 둘러봤다. 다음 공격은 언제부터인가. 당장 오늘? 아니면 내일?
뭐가 되었든 간에 벌벌 떠는 어린 병사들을 조금이라도 교육시켜야 했다. 호위기사이자 전속 기사단 중 하나인 델버트가 와서 당혹스러운 듯 말했다.
“단장. 가망이 없을 것 같은데요.”
“왜.”
“울고 난리났습니다.”
“….”
“토하고 실신하는 애들은 부지기수고요.”
“….”
“아무리 그래도 진짜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버트랜드 그 개새끼 진짜-”
델버트가 쌍욕을 뱉기 시작했다. 이자크는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떠는 어린 애들을 쳐다봤다. 16살 정도가 될까 말까 한 어린애들.
“자네 나이가 몇인가.”
이자크는 공포에 질려 턱에서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떨어대는 병사에게 물었다.
“여, 열, 열다섯입니다….”
“학술원은 졸업한 건가?”
“예… 작년에 졸업했습니다.”
“어느 가문인가.”
“저, 저는 귀족이 아닌지라, 가문은 없습니다.”
상관에게 혼날까 눈치를 보면서 대답하는 어린애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아 보였다. 말없이 아이를 쳐다보던 이자크가 옆의 병사에게 물었다.
“자네는.”
“슈니엔 가문입니다….”
대부분 힘이 없는 하급 중의 하급 가문의 아이들, 그도 아니면 중산층의 학술원 졸업생들이다. 분명 높은 가문의 아이들은 돈 받고 빼줬겠지.
정말로 버트랜드는 개새끼다.
천하의 비열하고 더러운 놈이다.
아무리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이어도, 이곳에서 내가 죽길 바라도, 이 어린 애들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길 보내나. 전투 능력이 충분한 병사들은 혹시라도 반란이나 위험을 대비해 제 곁에 두고, 최전선에서 나라를 지켜야 할 곳에는 어린 애들을 죽으라고 내모는 것 아닌가.
“저, 저기. 단장님께서는 정말로 열여섯에 전투 승리를 이끄셨습니까?”
한 소년 병사가 물었다. 그러자 델버트가 대신 대답했다.
“그래. 단장님께서는 너희 나이 때 이미 전투 지휘까지를 하신 분이다.”
이자크는 열여섯에 전투 지휘 대장이 되어 승리를 이끈 적이 있었다. 열일곱에도, 열여덟에도, 열아홉에도. 아버지를 따라 맨 처음 전투에 참가한 열넷의 나이 때부터 5년 동안 수많은 적진을 누볐다.
하지만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내가 했으니 너희도 할 수 있다.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다.
변경백의 후계자였으니까. 메시앙의 그림자로 자랐으니까. 어린 나이 때부터 아버지에게 직접 훈련을 받아왔었으니까.
“그럼 단장님께서는 지금 저희가 어떤 정도인지도 아시겠군요….”
저 아이들은 자신들이 전혀 도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이자크가 말했다.
“기초훈련은 배웠겠지.”
“예.”
“기초훈련부터 다시 들어간다. 다들 준비해라.”
다들 이제 와서 무슨 훈련이야…? 하는 눈빛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자크의 말에 반기 드는 이는 없었다. 병사들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영주가 다가와 이자크에게 물었다.
“무슨 계획이십니까?”
“저 애들이 최대한 죽는 걸 막아야죠.”
*
이자크가 출정한 그 날부터 에스텔라는 매일 창밖을 바라봤다.
아이들과 놀다가도 퍼뜩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기를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했다. 서북 요새의 깃발을 단 전령이 혹여라도 달려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으로. 전령이 오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또 그다음 날에는 또다시 창밖을 보며 마음을 졸인다. 야속한 전령이 비보라도 들고 올까봐.
에스텔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매일매일 편지를 써 이걸 서북 요새에 보낼지 말지를 한참 고민했다. 결국 아르텔이 그냥 보내라며 편지를 가져가 전령에게 건넸다.
안돼. 이자크가 혹시라도 내 편지 때문에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면 어떡하려고.
아르텔을 야속하게 쳐다보자 아르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자크 님이 그럴 분이십니까. 그렇게 불안해하시면서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속 시원히 보내십시오. 루시 아가씨랑 루스 도련님도 많이 불안해하십니다. 공주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일 테니까요.”
“…만약에 이자크가 전쟁터에서 죽으면 어떻게 해.”
“그런 생각일랑 하지도 마십시오.”
“그래도 만약에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래서 내가 또 주술을 행하게 되면, 이번엔 어디쯤에서 기억을 잃게 될까. 태중의 아이도… 없어지겠지.”
“공주님!”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이자크도 잃을 수 없고, 배 속의 아이도 잃을 수 없어. 두 번 다시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없을 거야.”
아르텔이 걱정스럽게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오늘도 어김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왼손 약지의 반지를 계속해서 만지작댔다. 그러다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는 반지에 각인 된 문구를 중얼거렸다.
이자크가 출정하게 된 후 에스텔라는 귀족회의를 열었다.
이제 정면승부다.
후계권을 다시 얻을 생각입니다. 대부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에스텔라는 제 맞은편에 앉아있는 버트랜드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버트랜드는 뻔뻔스럽게도 당연히 물려줘야지. 대답했다.
“릴리 언니는 트라비아의 왕비가 되었고, 이제 곧 나올 아이는 트라비아의 후계자가 되겠지요. 만일 대부님께 변고라도 생기면, 메시앙의 차기 왕은 제가 될 텐데, 갑작스럽게 물려받게 되는 것보다 미리 준비하는 것이 맞다 생각해요. 이제 저도 슬슬 제 자리를 되돌려받아야 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귀족들은 일리 있다 생각했다. 버트랜드의 나이가 아흔이 넘었다. 릴리 외의 다른 자식도 없는 데다가 원래 공주가 정당한 후계자였으니, 공주가 원할 때 언제든지 왕위를 물려받는 것은 문제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나 역시 나이가 들어 이제는 슬슬 국정에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던 참이었고. 한데, 지금 그 몸으로 괜찮겠느냐?”
“문제없습니다.”
“에스텔라. 혹시, 내가 이자크 경에게 출정 명령을 내린 것에 원망하고 있는 것이냐.”
일부러 보란 듯이 귀족들 앞에서 묻는 꼴이 참으로 역겹다. 에스텔라가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대부님의 숨은 뜻을 저희가 모를 리 없습니다. 이자크는 전쟁에서 승리할 거고, 대부님이 약속하신 대로 디에스 가문을 복기시켜 주실 테니까요.”
그러자 귀족들이 술렁댔다.
디에스 가문을 복기시켜주신다고요? 허나, 아무리 이자크 경이 전쟁영웅이 된다 해도, 선대 디에스 가주가 반역자 아닙니까.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스텔라의 말에 귀족들 모두 그녀를 쳐다봤다.
“진범이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대부님께서도 모든 진실을 알고 계시죠. 디에스 가문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도 모두 알고 계시니 이런 조건을 내건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입니까, 전하?”
“대부님께서는 배려심이 매우 넘치셔서, 제게 이자크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후에 모든 걸 밝히자 하시더군요.”
“하나 공주님, 만일, 정말 만일의 일이지만, 이자크 경이 전쟁터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제 남편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인간들만이 그리 생각하겠지요.”
다른 귀족들에겐 시선도 안 주고 오로지 버트랜드만 쳐다보며 에스텔라가 말했다. 웃음기는 없었다. 버트랜드 역시 에스텔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공주의 말대로. 지금 시국에는 맞지 않다 판단했네. 이자크 경이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대로 모든 진실을 밝힐 걸세.”
그의 말에 키에프 공작이 슬쩍 버트랜드와 에스텔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지? 하는 눈빛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왕궁을 빠져나가려는 에스텔라에게 보좌관이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 잠시 대화를 청하셨습니다.”
에스텔라는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보좌관을 따라갔다.
국왕의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던 버트랜드는 에스텔라가 들어오자 맞은편 테이블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에스텔라가 정중히 거절했다. 차를 내오라 말했지만 에스텔라는 시종에게 그럴 필요 없다 말했다.
버트랜드가 에스텔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에스텔라의 눈에는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다 알아버렸더구나.”
“다 알아버렸죠.”
“…회의장에서 한 말, 진심이더냐. 네가 한 말에 후회하지 않느냐.”
“그럴 리가요. 제가 후회하는 것은 버트랜드 당신을 한때 진심으로 대부라 믿은 것뿐입니다.”
“….”
“이자크를 전쟁터에 보낸 걸로 제 약점을 잡은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이자크와 아이들은 제 약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든든한 무기죠. 그들 아니면 제가 강해질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자크는 전쟁터에서 승리할거고, 당신은 결국 제 무덤을 판 꼴이 될 거에요.”
“….”
“부디, 당신이 모든 죄를 받을 때까지 정정하시길.”
에스텔라가 목례를 한 뒤 방을 나섰다.
에스텔라는 귀족들에게 후계권을 받아갈 생각이라 발표했다.
이제 버트랜드가 어떤 비열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에스텔라를 굴복시키려 할지는 몰라도, 에스텔라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믿는 수밖에 없다. 이자크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버트랜드는 언젠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갈 것이고, 그는 죗값을 치를 거다.
왕궁에서 나와 마차에 올랐다. 숲을 지나고 있는데 저 멀리 앞에서 키에프 가문이 새겨진 마차가 세워져 있다. 에스텔라가 마부에게 멈출 것을 명령했다.
에스텔라의 마차가 멈추자 키에프 공작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에 에스텔라 역시 마차에서 내렸다. 호위기사들을 물린 키에프 공작이 잠시 대화를 할 수 있냐는 듯 공손하게 기다렸다. 에스텔라 역시 제 호위기사들을 물렸다. 에스텔라가 먼저 그쪽으로 갔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키에프 공작.”
버트랜드와 비슷한 나이대의 키에프 공작은 일부로 이곳에서 에스텔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궁에서는 보는 눈이 많다. 왕의 최측근인 자가 왕의 눈을 피해서라도 할 말이 있다는 것은 에스텔라에게 꽤나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공주님께서 진심으로 후계권을 얻을 생각이십니까.”
“그럼 내가 허튼 말을 할 거라 생각합니까.”
“자신 있으십니까? 이자크 경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거라는.”
“키에프 공작. 빙 두르지 말고 얘기하세요. 저와 뜻을 같이하고 싶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
“아직 확신이 안 서나 보군요. 이런. 선대 올란도 후작이 어떤 꼴을 맞이했는지 두 눈으로 보셨을 분이. 나이가 들어 총기가 흐려지신 걸까요.”
“….”
“여기서 기다리실 만큼 버트랜드를 믿지는 못하겠는데, 그렇다고 제게 붙자니, 그건 또 확신이 안 서고. 참으로 박쥐 같으신 분이십니다. 키에프 공. 박쥐를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원래 습성이, 그런 것 아닙니까. 우화 속 박쥐가 되시지 않길 빕니다.”
그렇게 말한 에스텔라가 이 이상 할 말이 없으시면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며 인사 한 뒤 마차에 올랐다. 키에프 공작은 에스텔라의 마차 뒤꽁무니만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에게 숨겨둔 비장의 무기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상대는 버트랜드다. 키에프 공작은 올란도 후작의 죽음과, 그 가문에 뒤집어씌어진 오명들을 제 눈으로 확인했다. 버트랜드는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짓을 기가 막히게 잘한다. 어느 타이밍에서 어떤 증거를, 제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뒤집는 능력이 탁월하다. 어느 때 이 사람을 이용하고, 어느 때 이 사람을 버릴지.
원래도 께름칙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이번 올란도 가문의 사건을 보고 난 뒤 키에프는 어쩌면 자신도 저런 꼴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공주는 후계권을 가져가겠다 선포를 했고, 두사람의 눈치를 보니 마치 공주는 버트랜드가 한 짓들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쪽에 붙어야 하지?
버트랜드가 그리 쉽게 무너질 리 없다. 그에게는 트라비아의 군대는 물론 왕궁에 주둔하는 최소 1만의 군사가 있지 않나. 무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어떤 계략이라 한들 버트랜드를 구석까지 몰고 갈 결정적인 증거도 없을 것이다.
“미치겠구만.”
키에프 공작이 중얼거렸다.
누굴 택해야 하나.
누구에게 가서 기어야 하지?
*
이자크가 서북 요새로 출정한지 3주가 지났다. 그에게서 처음 답장이 왔다.
사랑하는 에스텔라.
다친 곳은 없습니다. 건강해요. 그저 당신이 많이 보고 싶을 뿐. 당신과 쌍둥이 그리고 아가를 위해 돌아갈 거라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배가 더 불렀겠군요.
몸은 좀 어떱니까. 음식은 잘 챙겨 먹고 있겠죠. 건강이 제일 중요합니다. 매일 밤 창가에서 당신이 날 기다리듯, 나 역시 매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당신을 떠올립니다.
에스텔라는 얼른 답장을 썼다.
보고 싶은 이자크.
로먼 말로는 이제 제 목소리를 완전히 들을 수 있을 정도라 하더군요. 의사의 말을 듣고 루시와 루스가 더 신나서 말을 걸어요. 때때로 아빠가 보고 싶다며 칭얼거릴 땐 저 역시 같이 울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엄마라는 건 강해야 하니까.
이자크. 당신이 무사할 거라 믿어요.
당신이 정문에 들어와서 나를 안아줄 때까지 기다릴게요.
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올 때마다 에스텔라는 안도한다. 아직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닌가. 그의 정갈한 필체를 보면서 에스텔라는 미소지었다. 그가 보낸 답장들을 매일매일 읽고 또 읽고, 새 답장이 오면 얼른 답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편지 내용을 읽어주고.
에스텔라. 아가 이름은 루멘이 어떨까요. 별을 보다 떠올렸습니다. 빛의 아이. 루멘.
“루멘.”
에스텔라가 아이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그러자 태동이 느껴졌다. 그래. 루멘이 좋겠어. 루시와 루스를 불러다가 아이의 이름을 루멘으로 짓는 게 어떠냐 물었다. 아이들 모두 좋다며 방방 뛰었다.
이자크가 출정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에게서 여전히 답장이 꼬박꼬박 온다. 그래도 여전히 에스텔라는 매일 서북 요새에서 전령이 오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며 하루를 보낸다.
배는 날이 갈수록 불렀다. 그만큼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오르테즈 남매가 종종 집에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며, 앞으로의 사업 방향에 대에 회의도 했다.
“공주님. 이제 한 달만 더 지나면 막달에 들어서네요.”
“이번 달만 지나면 8개월이에요. 이자크가 돌아오기 전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까 싶네요.”
에스텔라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에테리아에서 원군 200을 보내고 또 100을 보낸다는 소문이 퍼졌다. 후계권을 정식으로 가지게 된 에스텔라가 최대한 압박을 가해 추가로 얻어낸 병력은 고작 100. 아직 에테리아의 600군사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버트랜드는 온갖 변명을 해대며 병력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이자크는 걱정 말라는 말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해서 벌써 두 달이 지나지 않았나.
이자크는 편지에 전투에 대해 꺼내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인지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에스텔라가 물어도 그 부분만 쏙 빼놓고 대답한다.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행동일지는 몰라도,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는 서북 요새의 반이 무너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째서 국왕 전하께서는 서북 요새에 병력을 더 보내지 않으시는 건가.
그거야 이미 가망 없는 지역에 병력을 보낸다 한들 죽으라고 보내는 것밖에 되지 않나.
애초부터 질 싸움이었어. 그저 전하께서 에테리아에 서북 요새를 내어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에테리아와 협상이라도 해보시지.
그쪽 국왕이 워낙에 자존심도 세고 고집도 세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밀 거라는군.
또 한 달이 지났다. 이자크가 서북지대로 출정한 지 세 달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잘 지내던 루시와 루스도 점점 아빠는 언제와? 아빠 어디갔는데? 아빠 왜 안와? 등의 곤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에스텔라는 그때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아이들을 껴안아 주거나,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기도 했다.
오늘은 유독 루시와 루스 둘 다 칭얼거림이 심했다.
저택의 분위기가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것을 어린아이들 역시 느낄 수 있었던 건지, 평소라면 유모와 미엘라와 잘 놀고 있을 아이들이 에스텔라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울기 시작했다.
“루시. 루스. 엄마 해야 할게 있어서 그래. 금방 끝나고 놀아줄게.”
“시러, 싫어어! 엄마 미워. 엄마 미워어- 흐아아아앙-”
“알겠어. 가자. 지금 놀자.”
“싫어! 엄마 미워! 아빠 데려와. 아빠아아아- 아빠 보고싶어어어-”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루시와 루스 둘 다 우는 걸 한참 동안 멈추지 않았다. 유모와 미엘라가 아무리 달래봐도 아이들은 계속해서 아빠 데려오라며 발을 굴렀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미엘라가 아이들을 번쩍 안고 나가려 하자, 쌍둥이들은 싫다며 더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에스텔라는 유모와 미엘라에게 괜찮으니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공주님,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달래볼게.”
미엘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모와 함께 방을 나갔다. 에스테라는 책상에서 일어나 여전히 바닥에 뻗어 우는 아이들에게 갔다.
“바닥 더러운데 그렇게 누워있으면 옷도 더러워질텐데.”
“엄마 미워! 아빠 보고싶어! 아빠 왜 안와!”
엉엉 울며 말하는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에스텔라는 가만히 고개를 천장으로 들어올렸다. 눈시울이 붉어졌고 코가 시큰거리는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루시. 루스. 엄마도 아빠 보고 싶어.”
엄마도 아빠가 보고 싶어. 매일 매일 생각나. 에스텔라가 그렇게 말하는데 눈에서 뜨거운 것이 주륵 흘러내렸다. 아이들을 품에 안은 손에 더 힘을 줬다.
우는 모습을 아이들에게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는데,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는데. 쌍둥이들 역시 아빠가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엄마가 매일 한숨을 쉬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얘들아. 아빠는. 아빠는 말이야, 루시랑 루스랑 엄마랑, 우리 저택 사람을 지키려고 나쁜 사람들이랑 싸우고 있어. 나쁜 사람들이 자꾸 우리 저택에 쳐들어오려고 해서, 그래서 아빠가 조금 늦게 돌아오는 거야.”
그치만 아빠는 금방 돌아올 거야. 아빠가 곧 온댔어. 우리 루시랑 루스랑, 그리고 곧 태어날 동생 루멘을 위해서 금방 이기고 온다 그랬어.
“아빠 금방 온대?”
“그럼. 아빠가 얼마나 강한데. 금방 다 무찌르고 돌아올 거야.”
엄마는 아빠가 금방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 쌍둥이들, 아빠 보고 싶어도 조금만 꾹 참자. 그러자 칭얼거리던 아이들이 슬며시 에스텔라의 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꾹 참아?”
“응. 믿고 기다리면서 꾹 참으면. 아빠 금방 올 거야. 엄마가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에스텔라가 가만히 아이들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이들이 단풍잎 손을 들어 에스테라의 얼굴을 만지작댔다.
“…엄마 울어?”
“울디마, 엄마아…”
믿고 기다리면서 꾹 참기로 했으니 울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도 안 우는데 내가 울면 어떡해. 에스텔라가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엄마 안 울어. 엄마도 아빠 보고 싶은데 꾹 참는 중이야.”
*
꾹 참고 기다리는 중이라 말한 에스텔라는 사실 몇 번이고 서북지대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따금 부들거리는 제 몸을 꽉 껴안으며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매일 아침, 에스텔라는 신문을 확인했다.
신문 1면에는 대문짝만하게 서북 요새에서 전투 중인 그림이 실려 있었다. 그쪽으로 파견된 화공이 두 눈으로 보고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그 밑에는 서북지대의 전쟁 현황에 대해
서북 요새에 대한 기사가 게재되자 많은 백성들이 호소하기 시작했다.
병사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면 저희들도 참전하겠습니다.
국왕은 그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북 요새에서 원인 모를 역병이 돌고 있다.
역병의 감염 속도가 매우 빠르다 하니, 흑사병 꼴이 나고 싶지 않으면 다들 서북 요새에 갈 생각은 추호도 말라.
전쟁터에 역병이 도는 것은 당연했다. 바로 옆에서 언제 죽었는지 모를 시체가 썩고 있고, 그 시체를 일일이 수습해 땅에 묻거나 태워버릴 여유도 없을 테니까. 공급받는 식수가 부족하여 다들 영양 상태도 최악일 것이다.
에스텔라가 몇 번이나 왕실 병사를 더 풀어주고 그들에게 식수를 최대한으로 공급해달라며 다른 귀족들까지 서명한 탄원서를 냈으나 번번이 무시당했다.
이제 버트랜드는 막무가내로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항간에서 공주와 국왕의 사이가 틀어져 국왕이 일부러 이자크 경이 있는 서북 요새를 버리려는 것이라는 말이 돌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 이번 전투가 패하고 메시앙이 공격받아야 트라비아에 원조를 받는 척하며 모든 주권을 넘길 수 있을 테니까.
트라비아 군이 보호를 명목으로 이곳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라가 빼앗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 꼴은 죽어도 못 본다. 선대 조상들은 물론 아버지까지 이 나를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감히 탐욕에 눈먼 놈 하나 때문에 이 나라를 빼앗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공주님! 공주님! 큰일 났습니다!”
서재에 앉아 고뇌하고 있던 에스텔라에게 미엘라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헉헉 숨을 몰아 내쉬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서북 요새로 넘어가는 강의 다리가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국왕이 역병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명목으로 철거했다 합니다!”
“뭐?”
“게다가 이제 곧 장마 기간이라 태풍까지 오게 되면 배도 띄울 수가 없습니다. 급하게 민가에서 음식과 물을 길어다 나르려고 하지만, 왕실 근위대에서 강가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면서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에스텔라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버트랜드 그 인간이 기어코 이딴 짓을. 아무리 최악이어도 이런 수까지는 안 쓸 줄 알았던 내가 멍청했지.”
중얼거리던 에스텔라가 아, 탄식하며 제 배를 부여잡았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됐어. 일일이 부르는 것도 서로 피곤한 일일테니까.”
“그치만요, 공주님.”
“이자크한테 답장 온 것은 없더냐. 오늘 아침이라도 출발했으면 도착은 했을 텐데.”
다른 이들에게 이자크를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것을 티 내는 편은 아니었다. 편지를 보낼 때의 초조한 마음도, 다시 편지가 돌아왔을 때의 안도함도 겉으로는 표 내지 않았다.
해서 저택의 사용인들은 생각보다 에스텔라가 평정심을 잘 지키고 있다 생각했었다.
편지가 늦더라 해도 유모나 미엘라를 불러다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냐, 왜 안 온 것이냐, 진즉에 도착했을 텐데 등의 말을 하는 편도 아니었다.
헌데 오늘은 달랐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공주님.”
“….”
하지만 아침 꿈자리부터 사나웠는데, 일어나서 들은 소식이 서북지대 폐쇄 아니었던가. 에스텔라는 오늘 아침부터 계속 오른쪽 귀에 거슬리는 이명 때문에 좀체 안정을 되찾을 수 없었다.
커다란 왕벌이 바로 옆에서 날갯짓하는 것처럼 시끄럽고 초조한 소리가 계속해서 귓전을 때렸다.
에스텔라는 어쩐지 머리도 아파 오는 것 같아 가만히 이마에 손을 올리고 책상에 기댔다. 무의식적으로 부어오른 배에 손을 올리며 둥글게 쓸었다.
괜찮을 거야, 아가. 괜찮을 거야.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전령이 도착했다.
“전령이오! 전령이오!”
창밖으로 보이는 서북 요새의 깃발을 단 전령의 모습에 에스텔라가 얼른 미엘라의 부축을 받으며 일 층으로 내려갔다.
전령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전쟁터에서 있는 이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부상이나 고생한 흔적이 여실하긴 하지만, 지금은….
“이보세요, 이봐요! 괜찮습니까?!”
화살에 꽂힌 채로 이 먼 거리를 내달렸던 건지, 전령은 있는 힘을 다해 이곳에 도착한 뒤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쓰러진 그를 집사와 유모가 얼른 받았고, 에스텔라는 얼른 로먼을 불러오라 말했다.
기절한 전령의 상처는 꽤나 깊었다.
들고 온 편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에스텔라는 전령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변경 저택에 온 지 하루가 지났을 때쯤, 겨우 정신을 차린 전령이 말했다.
“요새는 완전히 함락되었습니다. 원군이 온다고 했는데 오질 않아 다들 포기상태입니다. 식량은 이 주일 치밖에 남지 않아 다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강가를 건너려는데 왕실 근위대가 갑자기 공격을 하는 바람에….”
전령의 말을 전해들은 에스텔라가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왕실 근위대가 강가의 다리를 철거했네. 역병이 도는 걸 막는다는 명목이었지. 아마 자네도 그래서 공격했을 거야. 민가에서 식량과 물을 공급하려 해도 막는다는 군.”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다 죽을 것입니다.”
“이자크가 내게 전달하라한 편지 같은 건 없었는가.”
“단장님께서는 지금 행방불명되셨습니다.”
“뭐?”
“사실 저 역시 급히 전령으로 나온 것입니다. 영주님께서 아무나 도움을 청할 곳을 찾아가라 명령하셨기에 생각나는 곳이 이곳밖에 없어서….”
“행방불명이라니. 그게 무슨.”
“서북 요새가 함락된 후에 얼른 포트먼 요새로 진을 옮겼습니다. 병력을 나눠 공격과 수비를 하고 있었는데, 저희가 갔을 때는 요새가 모두 무너져 있고 이자크 님은 보이질 않아서….”
서북 요새가 최전선에 있고 그 뒤로 포트먼 요새, 메리언 요새, 베리타 요새가 지키고 있다. 삼각형의 형태로 위치한 이곳에서 이자크가 맡은 포트먼 요새는 꼭짓점 선두에 있는 곳. 아마 에테리아의 공격을 직격으로 막아내는 곳일 터였다.
포트먼 요새는 무너졌고 그 안에 살아있는 이들은 없었다고 한다. 그들이 에테리아 군에 끌려갔는지, 아니면 근처로 몸을 숨기고 있는지는 여유가 없어 알아내지 못했다고.
“…이걸 줍기는 했었습니다. 단장님께서 매일 끼고 계셨던 것이 생각이 나서….”
요새에서 생존자를 찾아다니다가 주웠다며 뭔가를 건넸다.
그가 꼈던 반지.
이자크가 내게 줬던 반지.
에스텔라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아득해졌다. 겨우 침착을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끊이 툭, 하고 끊겼다.
“부인!”
“아윽-!”
그와 동시에 배에서 강한 진통이 느껴졌다. 에스텔라가 배를 부여잡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
기억은 드문드문 났다.
산파의 다급한 얼굴이 얼핏 보였다가, 유모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분주한 발걸음 소리, 휙, 휙 침대보를 가는 소리,
“공주님, 제발 좀만 더 힘을 주셔요. 공주님!”
그리고 느껴지는 강력한 고통.
저절로 이가 악물어지는 고통과 압박. 아마 제 입에 물린 천이 아니었으면 이가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으으윽! 아윽! 아악!”
천에서는 피의 비린 맛이 났다. 급하게 천을 물렸지만 아마 입 안이 찢어진 것 같다. 에스텔라는 제 손을 잡고 힘을 내라며 다독이는 유모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다. 산파가 안 되겠는지 에스텔라의 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귀에서는 이명이 났다.
눈앞에서는 소리 없는 천둥이 몇 번이고 치는 것 같았다.
아. 내가 갈가리 찢기면 이런 기분인 걸까. 쌍둥이를 낳을 때도 아픈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혼자가 될 거라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지금은 미친 듯이 그녀를 후려쳤다. 커다란 파도에 어떠한 옷가지 없이 그대로 맞는 것처럼, 온몸이 아리고 따갑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째서 지금 아이가 나오는 거지?
아직 3주는 더 남았는데.
아직 아이가 나올 때가 아닌데.
아직 아닌데.
혹시라도 어딘가 잘못된 걸까.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아주 찰나일 뿐, 사고라는 걸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또 한 번 그녀를 덮쳤다.
“아-!”
너무 아파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누군가 척추를 하나하나 잡아 뜯다가 그대로 골반까지 반으로 잘라낸 기분이다. 에스텔라의 연한 갈색빛 눈동자는 몇 번이고 뒤로 넘어갔다. 눈을 까뒤집고 숨을 쉬지 못해 혼절하기를 반복했다.
이자크가 보고 싶다.
이자크가 곁에 있었으면 한다.
단장님께서는 지금 행방불명되셨습니다.
차마 말을 전해 죄송스럽다는 전령의 얼굴. 이자크가 행방불명되었다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확인할 수가 없다고.
만일 죽었다면 나와 아이들은 어쩌지?
내가 그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에스텔라는 제 손을 있는 힘껏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피가 나기 시작했다. 피범벅이 된 손바닥 안에는 이자크가 끼던 반지가 들어가 있었다. 에스텔라의 피로 은색 반지가 얼룩졌다.
“공주님, 제 손을 잡으셔요, 상처가 더 깊어진단 말이에요, 차라리 이 유모의 손을 파세요, 아이고, 아이고!”
유모가 얼른 다시 손을 잡았다.
“…공주님? 공주님!”
팅, 팅, 바닥에 철이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자크의 반지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유모가 다급하게 에스텔라를 불렀지만, 이미 에스텔라는 정신을 잃은 후였다.
에스텔라는 아주 깊은 심연에 빠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속에 몸이 부유하는 듯한 중력을 거스르는 기분과 방금 전까지 느껴졌던 고통이 점점 몸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 마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사방이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잠옷 차림의 에스텔라 뿐이다. 그때 어떠한 빛이 에스텔라의 몸에서 빠져나가려 한다.
꿈인지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스텔라는 그 빛이 제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안 돼. 가지 마. 가지 말아줘! 빛은 아무리 꽉 껴안아도 에스텔라의 손 틈새로 빠져나갔다. 에스텔라는 더 힘껏 그걸 껴안았다.
가지 마.
보낼 수 없어!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빛을 얼마나 오랫동안 안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 아주 멀어졌던 고통이 다시금 그녀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프다. 엄청 아프다. 이를 악물고 바닥에 주저앉을 만큼 아프다.
다시 어디론가 불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물속에 빠져나온 것처럼 감각들이 생생해졌으며 먹먹하게 들리던 유모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공주님,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거의 다 나왔습니다!”
에스텔라가 입에 물린 천을 꽉 물었다.
“아으윽! …하아….”
이내 온몸의 힘이 풀렸다. 모든 힘을 소진해 고개를 들 힘조차, 눈을 뜰 힘조차 없었다. 우렁차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텔라가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지는 동안 유모는 얼른 아이를 받아다 대야에서 깨끗하게 씻겼다.
그런 뒤 깨끗한 면 포대에 돌돌 말아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에스텔라에게로 갔다.
“공주님. 보셔요. 건강한 왕자님이셔요.”
에스텔라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아이를 쳐다봤다. 산파가 후처리를 한 뒤 에스텔라에게 다가가 산발이 된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산파는 로먼의 아내로, 쌍둥이를 낳았을 때도 아이들을 받아줬던 이였다.
“공주님. 아주 건강한 사내를 낳으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축하드려요.”
에스텔라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문밖에서 미엘라가 루시와 루스에게 안에 들어가지 말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들어오렴. 아이들도 불안해서 그래.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쉴 대로 쉬어서 쇠 긁는 소리만 나온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온 몸은 너무 무겁게만 느껴진다. 유모는 갓 태어난 아이를 따듯하게 돌돌 만 뒤 에스텔라 옆에 놔줬다. 하지만 아이를 보며 감동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이자크가 행방불명 되었다고.
꼼지락 거리는 작은 핏덩어리를 겨우 내려다봤다.
루멘… 아가…. 어떡하니. 어떡하니 아가야.
에스텔라는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
에스텔라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틀이 지난 후였다.
아직 몸을 다 풀지 못해 거동도 불편했기에 모든 생활을 침실에서만 해야 했다. 정신이 들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일단은 웃기. 입꼬리가 통제가 되지 않아 씰룩대며 내려가길 반복했지만, 그래. 나는 엄만데 아이들한테 이런 모습만 보여줄 순 없어.
내가 불안해하면 아이들은 더 불안해해.
그러니까. 일단은 정신 차리자.
몸을 추스르자.
침실 한 켠에는 아가용 흔들 침대와, 그 옆 의자에 앉은 미엘라가 꾸벅꾸벅 졸며 선잠을 자고 있었다. 애가 칭얼거리자 퍼뜩 깬 미엘라가 아유, 도련님, 예, 예, 그럼요- 하며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에스텔라가 깨자 얼른 로먼과 유모를 불렀다.
의사는 에스텔라를 진찰한 뒤 산후 먹을 탕약등을 조제해줬다.
“제 아내가 유모를 도와 며칠 동안 산후조리에 힘쓸 테니, 공주님께서는 이제 회복하시는 것에만 집중하시지요.”
저택의 사람들 모두 이자크가 행방불명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왕이 강가의 다리를 폐쇄시킨 것도, 서북 요새 쪽이 아비규환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들 모두 애써 과하게 밝은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혹여라도 자신들마저 이자크님 어쩌면 좋아, 우리 공주님이랑 아기씨들 어떡해, 하며 우울해했다간 공주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로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이자크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도 에스텔라 앞에서는 꺼내지 않았다.
로먼이 진찰을 끝내고 밖에 나갔다. 에스테라는 미엘라에게 손짓했다. 미엘라가 흔들 침대에 누워 있는 루멘을 조심스레 안아 에스텔라에게로 갔다.
뽀송뽀송한 아이를 안아든 에스텔라가 조심스레 볼을 매만졌다.
잠을 자던 루멘은 제 엄마의 손길이라는 걸 단번에 안 건지 슬며시 눈을 떴다.
“안녕. 루멘. 네 이름은 루멘이란다. 아가.”
에스텔라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신기하게도, 그 어린 것이 알아먹은 것처럼 슬쩍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란다. 루멘. 빛이라는 뜻이야.”
그때 누군가 방문을 똑똑똑, 작게 세 번 두드렸다. 아마 루시와 루스일 것이다. 에스텔라가 들어오세요, 하자 꼬맹이들이 문 틈새로 얼굴만 빼꼼 들이민다.
“엄마, 이제 안 아포?”
“우리 들어가두 대?”
아마 에스텔라가 정신을 잃은 동안 유모와 미엘라가 단단히 주의를 줬는지, 원래라면 엄마! 하며 달려와 안기며 울먹였을 아이들이 조심스레 행동한다. 에스텔라가 조용히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그러자 쪼르르 달려와 에스텔라 앞에 주춤대며 섰다.
“왜 그러니, 얘들아?”
쌍둥이들답지 않은 모습에 에스텔라가 물었다.
그러자 루시가 말했다.
“참는 중이야.”
루시의 말에 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주듯 양 손을 꽉 쥐어 올렸다. 그러면서 끄응- 힘주는 소리를 낸다.
“왜 참아? 뭘 참는 건데?”
에스텔라의 말에 아이들이 답했다.
“유모가 엄마 많이 아프대써.”
“보고 싶어도 꾹 참아야지 엄마 낫는대.”
그러면서 둘 다 응가 할 때나 내는 소리로 끙끙거렸다. 에스텔라가 살풋 미소 지으며 아이들에게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이제 그만 참아도 돼. 루스랑 루시, 대견하네. 참을 줄도 알고.”
“그만 참아두 대?”
“우리 다 참은 고야?”
에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들이 그제야 환하게 웃는다.
그러더니 둘 다 눈물을 그렁대며 에스텔라의 다리 쪽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 루시랑 루스가 참느라 고생했네. 열심히 꾹 참았네.”
“웅, 루시랑 루뜨 엄청 꾹 참았어!”
“다음부터는, 꾹 안 참아도 돼. 알았지?”
아이들은 모르지 않는다. 지금 아빠가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도, 엄마는 동생을 낳아 많이 아프다는 것도, 저택의 사용인들이 숨기려 하는 것들을 다 알고 있다.
“…그래두 돼?”
“그럼. 루멘이 태어나서 루시랑 루스는 이제 누나, 형이지만 그래도 너희는 아직 엄마의 사랑스러운 아가들이니까. 아직 더 어리광부려도 돼. 너무 빨리 철들지 않아도 돼.”
불안했을 거다. 엄마는 아프지, 사용인들은 심각한 얼굴로 아빠 얘기를 하다 저들만 보면 아닌 척하지.
그 와중에 동생이 생겼으니 이제 누나와 형답게 굴어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까지.
다섯 살짜리들이 감내하기는 어려웠을 거다.
이만큼이면 대견해.
수고했어.
에스텔라가 그리 말하며 아이들의 엉덩이를 토닥여줬다.
한차례 눈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루스와 루시는 동생을 구경했다.
“이름은 루멘. 루시랑 루스랑 이름 비슷하지?”
“근데 얼굴은 안 비슷해.”
루시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비슷해? 엄마 눈에는 너희 셋 닮았는데.”
그러자 루스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아니야아! 안 비슷해. 아가 쭈글쭈글해. 왜 쭈글쭈글하지? 나이도 어린데.”
“원쑹이 같아.”
자비 없는 평가에 루멘이 서러웠는지 꼼지락대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우왓, 운다. 울지 마 루멘- 하며 고사리손으로 등을 토닥여줬다.
에스텔라는 그런 아이들과 제 품에 안긴 루멘을 가만히 쳐다봤다.
막연했던 뭔가가 다잡아지는 기분이 든다.
이자크가 행방불명 되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엄마이자 그의 부인이며 메시앙의 공주인 나는 뭘 해야 하는가.
이대로 버트랜드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둘 셈인가.
아니.
에스텔라의 눈빛이 요요하게 빛났다.
메시앙의 빛이다. 빛은 그림자 앞에서 더 밝아진다.
*
포트먼 요새가 무너졌다.
에테리아는 요새를 붕괴하기 위해 작정이라도 한 듯 거대한 투석기들을 죄다 포트먼 요새로 보냈다. 포트먼 요새가 함락되기까지는 사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초 훈련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어린 병사들은 국경선과 자국을 지키겠다는 책임감보다는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제 옆의 전우가 죽어갈 때마다 무너져 내려갔으며, 이런 말도 안 되는 병력으로 이기기는커녕 살아남을 수조차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애들을 다그쳐 빨리 요새를 지키고 적군을 무찌르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대한 돌덩이들이 요새의 성벽을 무너뜨릴 때마다 병사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이자크의 마지막 기억은, 거대한 투석기가 그를 향해 날라오는 것이었다.
“…단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골이 울리는 듯한 통증에 이자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주 조금만 늦었더라도 그는 돌덩어리 밑에 깔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순간적으로 몸을 틀었기에 오른쪽 어깨가 탈골된 것 말고는 심각한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자크는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우리처럼 만들어진 달구지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의 전속 기사단이었다. 뒤를 돌자 무기도 들지 않은 채 쇠고랑을 차고 터덜터덜 달구지 뒤를 따라오는 어린 병사들이 보였다.
다들 여기저기 붕대를 두르거나 부목에 의지한 채 걷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델버트를 쳐다봤다. 그 역시 팔이 부러진 듯 보였으며, 머리에는 붕대를 감아 오른쪽 눈만 겨우 보였다.
이자크가 중얼거렸다.
“결국 포로로 잡혔구나.”
그의 말에 달구지 안의 이들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는 이렇게 패배하여 포로로 붙잡혀 갈 것이라고 예상한 적이 더 많았다.
말 위에 탄 적군의 기사가 투구를 벗으며 달구지에 다가왔다.
“예상보다 더 오래 버텼던데요? 한 일주일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누가 지원군으로 와서 세 달이 넘도록 대치 중인가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그는 이자크를 알고 있다는 듯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야. 이런 곳에서 이자크 몬 디에스 경을 보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말이지. 만나서 반갑소. 나는 에테리아 왕실 근위대 부대장 헤롤드 아몬이요.”
그렇게 말하며 이자크에게 악수를 요청했다. 그의 악수를 받아 줄 리 없었다.
“에테리아의 왕실 근위대 부대장이, 왜 이곳에 있는 거요?”
이자크의 질문에 헤롤드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지금 이곳에 국왕 전하께서 계시니까요.”
서북지대에 에테리아의 국왕이?
이자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직 포트먼 요새를 제외한 다른 요새들은 방어 중일 텐데. 벌써 서북 지대를 모두 에테리아에게 빼앗겼다는 것인가.
이자크의 표정을 눈치 챈 헤롤드가 진정하라며 말했다.
“잠시 휴전에 들어갔소. 포트먼 요새 함락에 우리도 꽤 많이 지쳤거든. 다른 병사들 모두 철수하여 정비 중일 테요. 아직 서북은 에테리아에게 빼앗기지 않았소. 다만, 당신네들은 포로로 잡혀가는 중이고.”
“….”
“보아하니 나는 기억도 못 하는 것 같군. 11년 전에 체르노 전투에서 같이 야만족들과 전쟁했었는데 말이야.”
근위대 부대장의 말에 이자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체르노 전투에서 같이 전투를 했었다고? 체르노 전투의 부대 대장 중에서는 이자크가 제일 어린 나이였다.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병사가 있었던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이자크가 떠올린 듯 중얼거렸다.
“아. 그때 그 화동.”
에테리아와 협력하여 체르노 전투에 원군으로 갔을 때 구해줬던 늙은 장수의 조수.
“거 참. 화동이라니. 말이 심하네. 조수라고 해주시지. 아무튼, 이렇게 보게 되니 기분이 좀 뒤숭숭하군요. 비꼬는 게 아니라, 어째서 당신 같은 분이 최전선으로 보내지신 건지.”
그는 꽤나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자크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저 혼자 재잘재잘 잘도 떠들어댔다.
이윽고 달구지가 멈췄다. 에테리아 적진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이었다. 달구지가 멈추자 병사들이 다가와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다른 병사들은 모두 다른 이들의 인솔을 받아 포로들만 지내는 곳으로 데려가는데, 헤롤드가 와서 이자크만 따로 빼냈다. 그는 이자크를 데리고 거대한 막사로 향했다.
“전하께서 당신을 꼭 만나고 싶다 하여서 말이오.”
“나를?”
헤롤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에 들어가 보라는 듯 몸을 비켰다.
막사 안에 들어가자 꽤나 젊은 에테리아의 국왕이 갑옷을 입은 채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자크를 보자마자 반가운 듯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유감이지만, 꽤 반갑기도 하군. 선대 변경백과 매우 닮았어. 헤롤드 경, 그의 족쇄를 풀어주게나. 이런 대접 받을 만한 인재가 아니니까.”
에테리아 국왕이 대체 무슨 생각 하는지 그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포로로 잡혀 온 적군의 기사를 봐서 뭐 하려고?
이자크는 자신의 족쇄를 풀어주는 헤롤드와 에테리아의 국왕을 번갈아 쳐다봤다. 헤롤드 역시 제 주군의 뜻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손과 발이 자유로워졌다. 에테리아의 국왕은 맞은편에 앉으라며 시종들을 시켜 친히 자리까지 만들어줬다. 그러더니 이번엔 시장할 터이니, 일단 음식부터 먹으라며 윤기 좋은 바비큐를 내왔다.
에테리아의 왕이 말했다.
“내 디에스 변경백에게는 꽤나 깊은 인상을 가졌거든. 자네 아버지도, 자네도 둘 다 말이야.”
“더는 디에스 가문도, 변경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유감이야. 전 변경백이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야.”
“절 따로 불러내신 데는 단순히 옛날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돌려 말하는 거 싫어하는 것도 제 아비랑 똑같다니까.”
제 아버지가 에테리아의 왕자와 친우 사이였다는 것은 일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왕자가 왕이 된 것인가. 아직 에테리아의 국왕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었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나는 아직 국왕은 아니네. 물론, 이제 곧 국왕이 되겠지만. 즉위식은 내년 2월이야. 하지만 나는 그전까지 백성들에게 내 업적을 확실히 해 두고 싶거든.”
“업적이라면.”
“음. 변심해 버린 메시앙 국왕을 혼쭐낸다던가, 흐음, 아니면 메시앙을 집어삼키거나, 그것도 아니면, 우리 에테리아를 위협하는 카루체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젊은 에테리아의 차기 국왕은 단순히 왕자에서 국왕으로 이어받기만을 원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야심가였다.
이자크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메시앙의 서북지대는 사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국경 수비대만 주둔하는 곳입니다. 역사에 남을 만한 업적과 함께 차기 에테리아 국왕이 되실 분이 어째서 서북지대를 남하하신 겁니까.”
확실히 서북지대는 야심가의 눈에 찰만한 땅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북지대가 아닌, 남동지대의 비옥한 토지가 수많은 에테리아의 이민자들을 수용할 수 있을뿐더러, 혹한기가 찾아오는 에테리아 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땅이었다.
“충분히 서북이 아닌, 남동으로 남하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이자크의 말에 에테리아의 차기 국왕이 호탕하게 웃었다.
“자네 말이 맞긴 하지. 메시앙의 남동지대는 땅이 비옥하고, 산맥이 자리하여 겨울과 여름에도 충분히 농작을 지을 수 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남동을 쳤어야 하는 게 맞는 말이지. 불필요한 서북이 아닌.”
“헌데 어째서-”
“나는 조금 더 큰 걸 원하거든.”
국왕이 여유롭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