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18화 (18/21)

18장

가주들이 목을 쑥 빼며 내용을 읽었다.

선왕의 죽음에 대해 나는 모든 걸 알고 있다. 공주는 제 아비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지. 그저 사치와 환락에 빠져있다. 진정 메시앙의 빛이 맞는가? 그런 이는 후계권을 물려받아서는 아니 될 터.

아이들을 돌려받고 싶다면 너희들이 훔쳐 간 것을 다시 돌려놓아라.

훔쳐 간 걸 조용히 돌려놓기만 한다면, 아이들이 죽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랍니까? 선왕의 죽음에 대해 공주님께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니요.”

“저도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에스텔라는 조작된 쪽지를 보여줬다. 엠버가 마구간지기를 시켜 남긴 것이 아닌 새로 쓴 것이었다. 그때 귀족회의가 열렸다는 것을 듣고 버트랜드가 회의장에 찾아왔다.

“에스텔라. 이게 무슨 일이더냐. 아이들이 납치되었다니?”

누가 그런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이용한단 말이니, 하며 말하는 표정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에스텔라는 최대한 살기와 혐오의 눈빛을 죽이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떨궜다.

귀족들이 나서서 쪽지를 왕에게 전달했다.

그걸 받아 읽은 버트랜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이 와중에 증거를 조작해서 저한테 유리한 쪽으로 만들려 하다니. 버트랜드가 허탈하게 하, 웃음을 내었다. 귀족들 눈에는 그저 아이들 납치한 범인들에게 분노하여 뱉은 소리인 줄 알 것이다.

에스텔라가 버트랜드에게 말했다.

“제가 후계권을 얻어서는 안 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귀족들이 물었다.

“공주님께서는 후계권을 다시 얻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리할 거라 생각한 어떤 이가 이런 짓을 벌인 거겠지요. 내가 후계권이라도 다시 얻는다면 안 될 이유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말이에요.”

그 말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반란군의 짓일까요? 몇 년 전부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조직이 몇 개 있지 않았습니까. 며칠 전에는 타로스 가문의 금고가 모두 털렸다지요.”

“이 훔쳐 간 것은 도대체 뭡니까, 공주님?”

“제가 누구의 물건을 훔친단 말입니까.”

“하긴. 공주님께서 무어가 부족하여 남의 물건을 훔친답니까. 그렇다면 뭔가 마음에 걸리시는 다른 일은 없으십니까? 평소와는 다른 뭔가 말입니다.”

그러다 에스텔라가 잠시 뭔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침묵하다가 아, 짧은 탄식을 뱉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훔친 것은 아니지만, 몇 달 전 아버지와 디에스 가문의 사건을 재조사하기 위해 과거 자료들을 재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에스 변경의 선왕 독살 미수 사건 말씀이십니까. 확실히 이 쪽지에도 선왕의 죽음을 언급하며 공주님을 비하하는 걸로 보아….”

그러자 버트랜드가 얼른 끼어들며 말했다.

“걱정 말거라, 에스텔라. 내 정식 수사대를 꾸려 소탕해버리마. 보좌관. 지금 당장 왕실근위대를 꾸리고 특별 조사원들을 불러들여라.”

“예. 전하.”

“에스텔라. 태중의 아이도 있을 텐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구나. 대부라는 것이 무어냐. 형님께서 돌아가셨으니 내가 이제 네 아버지인 것이다. 아비한테 의지해라.”

“공주님. 왕실 근위대로 정식 수사를 하게 되면 이놈들 꼬리도 금방 잡힐 것입니다.”

“제발, 아이들이 무사히만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버트랜드의 눈에 들고 싶어 안달 났으나, 눈치는 쥐뿔도 없는 귀족 중 하나가 말했다.

“이참에 특별수사관들을 다시 꾸려 선왕의 독살 이전부터 다시 조사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버트랜드가 선왕을 독살하고 디에스 변경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사실을 아는 건 적어도 이 귀족회의에서 버트랜드와 에스텔라, 그리고 피올라 남작과 키에프 공작뿐일 것이다. 키에프 공작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발언을 한 귀족에게 눈치를 줬다.

“국왕 전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피올라 남작이 에스텔라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말했다.

“대부님, 제발 제 아이들 좀 찾아주셔요.”

에스텔라가 그리 말하며 버트랜드를 쳐다봤다. 버트랜드가 이내 눈을 돌리며 회의장을 나왔다.

버트랜드가 회의장에서 나오자 보좌관이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전하. 어떻게 할까요. 수사관들에게 정말 수사를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보여주기식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버트랜드가 불편하다는 기색을 보이며 제 수염을 쓸어내렸다.

에스텔라가 그 상황에서 머리를 쓰는 바람에 특별수사관까지 끌어들이게 생겼다. 정말 이자크가 모든 걸 다 얘기했나 보군. 버트랜드가 혀를 찼다.

자신을 쳐다보던 눈빛은 확실히 증오와 분노가 담긴 눈이었다. 그건, 그래. 벤자민과 디에스 변경이 자신을 쳐다보던 마지막 눈빛과도 닮았다.

배신감에 찬 눈빛, 그리고 안타까움과 혐오.

어쩌다 그렇게 변했니.

하는 듯한 그런 눈빛.

버트랜드가 보좌관에게 혼자 있겠다는 듯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국왕의 모습에 보좌관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물러갔다.

“…오로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의 딸을 내가, 내가 너의 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들지 않으리라 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가 없어.

에스텔라가 다 알아버렸어.

그 애만은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는데.

날 보는 눈빛에 증오와 분노가 가득 담긴 걸 숨기질 못하더구나.

*

납치된 쌍둥이들을 찾기 위해 특별 조사관들과 왕실 근위대가 모였다.

변경 저택에 본부를 두고 혹여라도 납치범들에게서 또 다른 연락이 올까 진을 치고 있다더라. 공주의 아이들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은 메시앙 전역에 퍼졌다.

에스텔라는 쪽지의 내용을 공개했다.

오르테즈 남매들이 신문을 발행하며 그 1면에 커다랗게 장식했기 때문이다.

[쌍둥이 납치, 공주의 후계권을 막으려는 자]

커다란 활자로 크게 제목을 붙인 뒤 기사 내용을 덧붙였다.

근래 메시앙에서 발생한 커다란 사건이었기에, 누가 저걸 돈 주고 사냐며 코웃음 치던 귀족들도 하나둘, 신문을 사기 시작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이 광장에서 신문 내용을 읽어주기도 했다. 백성들은 그 앞에 모여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나, 하며 집중했다.

지난 3월 16일 에스텔라 데 메시앙 공주의 자녀, 루시(4세) 루스(4세)가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온실에서 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쌍둥이는, 괴한에 의해 저택 안에서 납치되었다고 한다.

버트랜드 국왕은 이에 통탄하며 곧장 왕실 근위대와 특별 조사관들로 수사를 꾸렸다. 수사 본부는 변경의 저택이다.

한편, 귀족회의에서 공주는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에게서 받은 협박 편지를 공개했다.

… (아래 전문) …

특별수사관 체르빌 테일러 씨는 공주가 받은 협박 편지의 범인은, 선왕의 죽음과도 연관 있는 이로 보이며, 공주가 후계권을 잇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추정하는 중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읽었다.

공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아이들을 납치한 것에 같이 분노했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을 납치하나. 쯧쯧. 공주가 마음고생 좀 하겠군.”

올란도 후작이 신문을 읽으며 바게트를 바삭 깨물었다. 신문 아래로 빵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엠버가 그를 흘겨보더니 이내 남편 뒤에 서 있는 하녀에게 손짓을 했다. 하녀가 빠릿하게 움직이며 더러워진 카페트를 얼른 빗자루로 샤샥 치웠다.

“신문에 뭐라고 나와 있는데요, 여보?”

“어. 보니까. 와. 그 수사관 말로는 이번에 범인이 잡히면 직위 불문하고 무조건 참형이래.”

“참형?!”

“와.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소리네. 수사관들이 공주의 저택에서 주둔하면서 온갖 조사 중이래. 그 집 사용인들부터.”

“….”

“공주가 재수는 없어도, 그래도 그 집 쌍둥이가 귀엽긴 했는데 말이야.”

“….”

“범인도 참 멍청하지. 하필 골라도 공주의 애들을-”

“여보?”

“응?”

“입 좀 다물어요.”

“왜 갑자기 화를 내?”

“먼저 일어날게요. 속이 좋지가 않네.”

“하여튼 임신이 대수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던 엠버가 다시 그의 앞에 성큼성큼 다가왔다. 신문에 고개를 처박고 글을 읽던 올란도 후작이 흠칫 놀라며 제 아내를 쳐다봤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엠버가 그가 읽던 신문을 낚아챘다.

아니, 이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이야! 하며 뒤에서 올란도 후작이 소리쳤지만 엠버는 그를 무시하며 신문을 들고 식당을 나섰다.

제 서재로 들어와 신문을 갈가리 찢었다.

오늘 엠버가 찢은 신문만 해도 벌써 여섯 개째다.

저택의 시종이고 하녀고 남편이고 모두 죄다 신문만 쳐보고 앉아있잖아! 엠버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일이 점점 커진다. 분명 버트랜드는 그녀에게 아이들만 납치하면 그 이후에는 자신이 다 알아서 한다 하지 않았나.

엠버가 제 호위기사를 불러들였다.

“아이들은?”

“아직 크게 울면서 보채지는 않는데, 슬슬 부모를 찾긴 합니다. 그런데 이제 어떡할까요. 엠버. 신문에 그렇게나 크게-”

“알아. 안다고. 알고 있으니까 당신은 그냥, 애들 잘 보고 있어.”

“엠버. 안전하게 끝나는 거 맞죠?”

“…그럼요. 내 사랑. 국왕 전하께서 분명 다른 계획이 있으실 거야. 우리는 미래만 생각하면서 할 일 하면 돼. 일단은 계속 애들 데리고 있어.”

“알겠습니다.”

남자가 방을 나가자 엠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국왕 전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수사반까지 꾸린 거지?

만일 그 수사관들이 뭔가 눈치라도 챈다면, 설마, 그 마구간지기가 지레 겁을 먹고 다 불지는 않겠지? 젠장. 신문 기사 내용은 또 왜 이런대? 내가 언제 공주의 후계권을 막으려고 했다고-

착잡하고 답답한지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한참을 제 서재에 혼자 있는데 그녀의 전속 시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 하자 시녀가 조용히 들어와 서신을 건네며 말했다.

“부인, 서신이 왔습니다.”

시녀가 건네는 걸 얼른 받아든 뒤 그 자리에서 뜯어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허겁지겁 움직이는 엠버는 처음인지라 시녀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방을 나갔다.

방에 혼자 남아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엠버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안쓰러운 엠버.

당신이 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국왕이 보낸 것이 아닌, 에스텔라에게서 온 편지었다.

날이 지날수록 신문에서는 쌍둥이 납치 사건에 대해 더 크게 보도되었다. 수사관이 증거나 정황을 알아낼 때마다 신문은 대서특필하여 온 국민에게 알려댔다.

귀족들도 살롱에 모이면 다들 그 얘기만 했다.

오늘 신문 봤어요? 새로운 증거가 나왔다는데 수사관이 아직 공개를 하지 않겠다 하더군요.

목격자가 나타났다는 기사도 있었잖아요. 아마 거의 확실해지니까 조심하는 거 같던걸요?

도대체 어떤 인간이 벌인 짓일까요?

선왕의 죽음과도 연관 있을 수 있다면서요.

국왕 전하께서 이번 범인이 잡히면 참형을 하겠다 하시던데요?

그럴 만도 하죠. 제가 감히 누굴 건드렸는데요.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말을 하는지 에스텔라가 델라 랭에게 모두 전해 들었다.

“공주님께서 원하시던 반응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래. 그럼 이제부터는 네가 내 상태에 대해 그들에게 말을 흘리렴.”

델라 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부터 에스텔라가 밤새 눈물로 지새우며 혼절하기를 반복한다는 말을 귀족들에게 흘릴 것이다. 공주의 최측근이 하는 말일 테니, 아마 귀족들은 에스텔라를 더 동정하는 만큼 범인에 대한 흉측함이 더 커질 것이다.

“공주님.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루시 아가씨랑 루스 도련님은 안전할 거예요.”

에스텔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에게 별일 없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모성애로부터 나오는 초인적인 능력인 걸까. 아직까지 아이들에게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걸 왜인지는 모르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분명 엄마와 아빠를 보고 싶어 할 텐데. 루시랑 루스는 밤마다 동화책을 읽어줘야 잠을 잘 수 있는데.

아이들에게 아직 아무 문제 생기지 않았다고 하여 에스텔라의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델라 랭이 귀족들에게 흘릴 말 중에 거짓은 없다. 에스텔라는 실제로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기력이 딸려 쓰러지기를, 이자크에게 부축받기를 반복했다.

델라 랭이 방을 나가자 에스텔라가 지친 듯 소파 팔걸이에 얼굴을 기댔다. 얼마 안 가 이자크가 들어왔다.

이자크는 무기력하게 소파에 늘어진 에스텔라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에스텔라가 잠이 들었다 생각한 것인지 담요를 끌어다 덮어줬다.

“…우리가 하는 게 잘하고 있는 거 맞죠.”

에스텔라가 나직하게 물었다.

“안 자고 있었네요.”

“잠이 들 수가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엄마 아빠 찾으며 울고 있을 애들을 생각하면….”

눈을 감은 상태인데 왈칵 뜨거워지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지금쯤 아이들은 뭘 하고 있을까.

어디 어두운 방에 갇혀 있지는 않을까?

음식은 제대로 먹고 있을까?

루스는 한번 제대로 울음이 터지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음을 안멈추는데.

루시는 오이 알러지가 있는데, 설마 음식에 오이가 들어있지는 않았겠지?

때리진 않겠지? 아이들에게 무서운 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이래봤자 도움 하나도 안 되는거 알면서도, 미안해요. 이자크. 나만 힘든 거 아닌데. 당신도 똑같을 텐데 자꾸 이런 말만 하고. 미안해요.”

에스텔라가 결국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어깨를 떨었다. 그걸 보고 있던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제 품으로 밀어 넣었다.

“자책하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말아요. 우리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도 말고….”

어느 부모가 사랑스러운 자식들이 납치되었는데 이성을 유지하겠는가. 이자크 역시 하루 종일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전쟁터를 나가 수많은 적군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커다란 불화살 때가 그의 본진을 향해 날아왔을 때도 이렇게 떨어본 적이 없다.

에스텔라에게 하는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의 손끝이 정말 미세하게 떨린다는 걸 에스텔라도 느꼈는지, 이내 에스텔라 역시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

엠버의 호위기사이자 정부이기도 한 사내 패트릭이 음식 접시를 들고 방에 들어갔다. 루시와 루스는 둘 다 눈이 퉁퉁 부어서 잠들어있었다. 널브러진 장난감들 사이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아이들을 침대로 옮겨준 뒤 테이블 앞에 음식들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뒤에서 엠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울다 지쳐 잠든 것 같습니다.”

“울지 못하게 해야 해. 우는 소리라도 새나가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엠버. 광장에 나가면 너나할 것 없이 다들 신문을 들고 있습니다. 그 신문에는 저 애들 얘기뿐이고요. 오늘 기사 보셨습니까? 마구간지기가 자백을 했다던데요.”

“누가 그걸 몰라?”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모르지 않았습니까. 그저 물건만 넘겨받으면 바로 보낼 생각이라면서요.”

“며칠 전에 공주한테서 편지가 왔어.”

“예?!”

“쉿. 애들 깰라.”

“… 공주가 뭐라 하던데요.”

엠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내가 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더라고.”

그녀의 말에 패트릭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말했다.

“엠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냥 도망갑시다. 애들 있는 장소를 말해주고 우리는 그사이에 배를 타고 떠납시다. 예?”

그렇게 말하는 급하게 짐을 싸며 말했다. 엠버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저지했다.

“당신 미쳤어? 이렇게 도망가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는 게 없다고. 돈이며 권력이며 아무것도 얻는게 없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렇다면 가만히 앉아서 잡혀갈 겁니까? 애초부터 국왕의 말을 듣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부탁했잖아요.”

“그럼 내가 뭘 했어야 했는데. 이 배 속의 아이가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네가 친부라는 것도 다 알고 있는 사람한테 내가! 멍청한 남편은 장부 열쇠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도 모르고, 자칫하면 목이 다 떨어져 나갈 판인데 한가롭게 크로켓 경기나 하고 있는데!”

“엠버….”

“다 버리고 도망가면 우린 거지꼴이야. 나보고 거리에 나앉자는 거니? 아니면, 너랑 흙투성이가 되어 논밭이라도 꾸리면 내가 행복해질 것 같아? 패트릭, 날 그렇게나 모르니? 나는 다 쥐어야 하는 사람이야. 내가 뭣 때문에 널 두고도 한스 놈이랑 결혼했는데…!”

엠버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고성에 놀란 루시와 루스가 퍼뜩 눈을 떴다.

“흐아아앙-”

결국 루스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은 이제 눈치를 챈 듯싶다. 아이를 좋아하는 패트릭이 심심치 않게 놀아주며 하루 이틀 재밌게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도 이제는 엄마랑 아빠는 언제 돌아오는 거냐며, 보고 싶다며, 집에 돌아가고 싶다며 슬슬 보채기 시작했다.

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꽃놀이는 힘들대. 아줌마랑 대신 가볼까? 뱃속에 아가 때문에 엄마가 아픈가 봐, 너희들은 아줌마랑 잠시 놀고 있으래. 하며 둘러댔지만 이젠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엄마 보고시퍼어어-”

“히잉, 나두우-”

잘 울지 않던 루시도 이제는 울어댄다. 엠버가 당황한 듯 얼른 들고 온 새 인형을 가져다가 아이들에게 안기며 말했다.

“울지 말고. 응? 루시랑 루스 아줌마랑 아저씨랑 노는 거 이제 싫어?”

“싫진 않은데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나두요.”

“집에 가고 싶어요. 히잉. 보내주세요.”

“엄마도 아빠도 유모도 집짜도 미엘라도 보구 싶단 말이야아, 흐앙.”

아이들이 울기 시작하다 엠버가 눈을 꽉 감으며 한계에 다다른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치겠다. 미쳐 돌아가는 상황이다.

오늘 아침 신문에는 마구간지기가 자백을 했다는 기사가 떴다. 패트릭의 말대로 이제 정말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엠버는 에스텔라가 보낸 편지의 내용을 상기했다.

그토록 형님이라 불렀던 내 아버지를, 친우였던 디에스 변경을, 친딸처럼 여긴다며 대부를 자처하면서 배신했던 인간입니다. 그 사람이 한 말들을 엠버, 그대는 정말 그대로 믿을 겁니까?

뭘 준다 하던가요. 후에 트라비아에서 한 자리씩 꿰어준다 하던가요.

아니면 당신이 꼼짝 못 할 약점을 하나 쥐고 협박하던가요.

뭐가 되었든 버트랜드는 당신과의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전혀 없을 거라는 것만 알아두세요.

앞으로 당신은 국왕을 의심하게 될 거예요.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고.

수사는 점점 진전되겠죠.

버트랜드의 속마음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는 내 아이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에요.

금고의 열쇠 같은 거야 원한다면 주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게 고작 버트랜드에게 이용당할 대로 당하는 것뿐인가요?

버트랜드는 당신을 이용하는 거예요.

엠버. 당신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울 거라고요.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공주의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아? 국왕과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내가 그를 배신하게 만들 셈이지. 코웃음 치며 그런 얕은수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시간이 흐를수록 엠버는 애타졌다.

공주의 말이 사실일까.

당신이 버트랜드의 속셈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자꾸 에스텔라가 쓴 글이 떠오른다.

엠버는 결단을 내린 듯 드레스를 말아쥐었다. 그러더니 아이들 앞에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럼 우리 이틀만 더 있다가. 집에 가자. 알았지? 엄마한테 연락이 왔어. 이틀 뒤에 집에 가자. 이틀만 꾹 참는 거야. 루시랑 루스는 이제 동생도 있으니까 꾹 참을 수 있지? 자 약속.”

아이들에게 새끼손가락을 꺼내 보였다. 그러자 루시와 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며칠 뒤, 수사관들이 한창 조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시녀 미엘라가 급히 뭔가를 들고 수사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수사관님! 공주님! 이자크 님! 범인에게서 쪽지가 왔습니다!”

담당 수사관인 헤일리 경이 얼른 미엘라에게서 쪽지를 받아 들었다.

“어디서 났습니까?”

“공주님께 약을 드리려고 중정을 지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살이 날라와 건너편 나무에 박혔습니다.”

화살에는 쪽지가 돌돌 말려져 있었다. 수사관이 얼른 쪽지를 펼쳤다. 옆에서는 오르테즈 남매의 회사에서 파견된 기사가 그들의 모든 모습들을 묘사하며 기사를 쓰고 있었다.

쪽지 내용을 읽은 수사관이 얼른 소리쳤다.

“지금 당장 남쪽의 폐관된 오르치아 극장으로 근위병들을 보내라!”

남쪽의 오르치아 극장에 공주와 그 남편은 훔쳐 간 것들을 들고 와라.

아이들은 그곳에 있을 테니까.

허튼수작은 부리지 마.

아이들의 생명은 근위병들도 지켜줄 수 없을 거야.

쪽지의 내용을 전달받은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급히 마차에 올라탔다. 근위병들은 자신들만 가도 충분할 거라 말했지만, 부모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

남쪽의 오르치아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였다. 폐관된 지 3년이 넘은 노후한 극장.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기색이 역력한 이곳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근위대보다 먼저 도착한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얼른 극장 안에 들어갔다.

“루시! 루스!”

에스텔라가 난장판이 된 극장 안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극장 깊숙이 들어가려는데 엠버와 그의 정부가 에스텔라와 이자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했어요. 이제, 버트랜드의 진심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죠?”

“아이들은 어디에 있어.”

에스텔라가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잡을 기세로 물었다.

“버트랜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아이들은 어디에 있냐고!”

에스텔라가 고성을 지르자 엠버가 그 기세에 눌렸다.

멀리서 아이들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렸다.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가니 루시와 루스가 구석에 숨어서 울고 있었다.

“루시! 루스!”

“어, 어엄마아아-”

아이들이 발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다 이내 에스텔라인 것을 보고 안심했는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얼른 달려가 아이들을 품에 안아 들었다. 세 사람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을 살피며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에스텔라가 울며 물었다.

“어디 보자. 무서웠어? 다친 데는?”

“후에엥- 보고시퍼써어어-”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아가.”

다행히 문제 없어 보이는 것 같아 에스텔라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아이들을 품에 껴안았다. 그때 에스텔라의 등 뒤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버트랜드가 보낸 왕의 그림자 중 하나였다. 그들은 원래 엠버를 죽이라 명령을 받았지만, 망토를 뒤집어 쓴 그녀를 착각한 이는 그대로 에스텔라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뒤늦게 감지한 에스텔라가 얼른 몸을 웅크려 아이들을 보호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억!”

짧은 단말마와 함께 몇 번 쿵쿵 몸싸움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텔라가 슬쩍 눈을 뜨자 괴한을 제압한 이자크가 보였다.

바닥에 축 늘어진 남자를 발로 슬쩍 밀어낸 이자크가 에스텔라와 아이들을 일으키며 말했다.

“에스텔라. 얼른 아이들 데리고 밖으로 나가세요. 건물 안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건물 안을 살펴보던 이자크는 이미 심지에 불이 붙은 폭탄 몇십 개가 들어있는 상자들을 발견했다. 수많은 상자들을 하나하나 불 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에스텔라와 아이들을 대피시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당신은요. 당신은?”

“곧장 따라 나갈 테니 얼른!”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얼른 아이들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길을 가로막은 엠버와 맞닥뜨렸다. 에스텔라가 긴박하게 말했다.

“비켜. 버트랜드가 이미 극장 곳곳에 폭탄을 설치해놨으니까!”

“폭탄?”

“버트랜드는 당신도 같이 죽일 생각인 거라고. 폭탄이 터지지 않아도 당신은 죽게 될 거야. 그의 그림자들이 여기에 와 있으니까! 애초에 그 장부 열쇠에는 관심도 없어, 그 인간은!”

“그게 무슨, 그 장부를 들키면 트라비아에 팔아버리려는 것도 다 알게 될 텐데-”

“당연히 그 죄를 모두 당신네한테 뒤집어씌우겠지. 엠버. 똑똑한 사람이 왜 이래? 그렇게까지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뭔데?!”

“…다 잃게 되니까!”

“죽으면 끝이야. 어떻게 할 거야, 당신. 여기서 이대로 버트랜드한테 이용만 당하고 현실 부정하다 죽어버리든지!”

“….”

“아니면 적어도 이용당한 값을 치르게는 해줄게.”

“….”

“내 아이들에게 손댄 걸 생각하면 머리끝까지 피가 거꾸로 솟구치지만. 나는 자비로운 메시앙의 빛이니까.”

“….”

그때 엠버의 정부 패트릭이 이자크와 복도를 뛰어왔다.

“엠버, 이들 말이 맞아요, 안에 폭약들이 대량으로 있습니다. 심지의 불을 끌 수조차 없고요! 당장 나가야 해요!”

이미 늦어버린 것인지 쿠구구궁, 하며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빨리 뛰어온 이자크가 에스텔라와 아이들에게 몸을 던져 껴안으며 밖으로 나갔다.

커다란 박스 수십 개 안에 폭약이 잔뜩 들었다. 웬만한 건물들은 먼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손을 보지 않아 노후한 극장을 무너뜨리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일 것이다.

네 사람은 데굴데굴 굴렀다. 이자크가 에스텔라와 쌍둥이를 감싸며 바닥부터 떨어졌기에 이자크를 제외한 세 사람은 큰 상처가 없었다.

“이자크!”

하지만 이자크의 등은 건물 잔재와 땅으로부터 긁히고 부딪혔다. 등짝 부근의 옷이 너덜너덜해졌다.

“괜찮아요. 루시, 루스. 괜찮니.”

“아빠아아- 나 여기 긁혀써.”

루스가 제 자그마한 무릎을 콕 짚으며 울상을 지었다. 이자크는 그런 아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무릎에 호, 바람을 불어줬다.

에스텔라가 뒤를 돌아 무너져내린 건물을 쳐다봤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마치 안개가 낀 것 같다. 주변에 주둔하던 근위병들이 얼른 그들을 부축하러 왔다.

“괜찮으십니까!”

“저 안에 사람이 들어있을 거예요. 당장 가서 그 사람들 먼저-”

“일단 이리로 대피하십시오!”

에스텔라는 먼지 틈 사이로 엠버와 그의 정부가 빠져나왔는지를 살폈다. 분명 그녀의 기억상 못 빠져나왔을 것이다. 얼른 건물 잔재들 속을 살펴보라 명했다. 근위병들 몇몇이 입에 두건을 두르고 안쪽에 들어갔다.

“여기 사람이 있다! 당장 가서 들것을 가져와!”

“천장이 떨어지면서 깔렸어, 가서 누가 지렛대 좀 가져와!”

엠버와 그의 정부는 잔재에 깔렸다. 죽을지 살지는 아무도 모른다. 에스텔라는 고개를 돌려 이자크를 부축했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다시 한번 루시와 루스의 볼에 입을 맞추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신문에 기사가 났다.

[쌍둥이들, 무사히 공주의 품으로 … 진범은 ‘후작 부인’과 그의 ‘정부’]

어제 저녁 9시경 광장 남쪽의 폐관된 오르치아 극장에서 거대한 굉음이 들렸다. 당일 오후 5시경 변경 저택에 범인으로부터 온 쪽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공주 부부 내외에게 훔쳐 간 물건을 가져오라 말하며, 아이들이 오르치아 극장 안에 있을 것이라는 쪽지였다.

수사관은 당장에 근위병들을 파견했고, 공주 부부는 그대로 오르치아 극장에 달려갔다.

… (중략) … 이자크 경의 증언에 따르면 극장 무대 쪽에는 수많은 폭약들이 거대한 상자에 담겨 있었다고 한다. … 건물 잔재에 깔린 이는 공주를 협박하던 범인으로 추정된다. … 올란도 후작 부인은 그녀의 호위기사와 부적절한 관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 아내가 납치사건의 범인임은 물론, 외도까지 했다는 사실을 신문으로 알게 된 올란도 후작이 소리를 질렀다. 오늘 아침부터 시종들이 저를 보며 수근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집사가 그에게 신문을 내밀었고, 귀찮음에 대충 보려던 그의 눈이 점점 흔들리며 커졌다.

충격에 빠진 그는 당장에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이것 보세요! 엠버가 공주의 자식들을 납치했대요! 게다가 바람까지 피우고 있었다고요- 역시 태중의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었던….”

분통함을 아버지에게 토로하려던 후작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조용히 침대에 누워있는 선대 후작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평소같았으면 기침하셨을 분이 아직까지 자고 있다.

아니. 자는 게 아닌가?

툭, 하고 아버지를 쳤다. 창백하게 질린 채로 눈을 감고 있던 선대 후작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올란도 후작의 얼굴도 파랗게 질렸다.

“으아아아아악!”

후작의 비명 소리가 저택에 울렸다.

시종들이 급히 뛰어왔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선대 후작과, 그 앞에 주저앉아있는 후작을 발견했다.

“아, 아버지가, 죽, 죽었….”

그때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종들의 발걸음 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열을 맞춰 딱딱 걷지 않으니까. 후작이 아버지의 시신에 혼비백산되어있는 동안 수사관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스 올란도. 지금부터 아동 납치 및 살인미수, 불법 무기 조달, 횡령, 매관매직, 불법 지분 판매 외 10가지의 죄목으로 저택을 수사하겠습니다. 영장은 발부되었으며 지금부터 당신의 행동 모든 것은 제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뭐, 뭐라는 거야? 나는 방금 아버지를 잃은- 이거 안 놔! 내가 누군 줄 알고! 나는 엠버랑 관련 없어! 걔가 독단으로 한 거라고! 나도 신문 보고 알았다고!”

올란도 후작이 근위병들에게 양팔을 붙들려 끌려나갔다.

수사관은 차갑게 식어버린 선대 후작의 맥을 짚었다. 확실하게 죽었다. 혈흔은 보이지 않았다. 독살인 것인가.

“…공주님께서 말한 그대로군.”

수사관이 작게 중얼거렸다.

*

쌍둥이들이 납치된 지 나흘째 되던 일이었다.

신문에서는 연신 쌍둥이 납치에 대해 떠들썩하게 떠들어댔다.

하지만 사실 신문에서 떠들어댄 것만큼 변경에서의 수사에는 진척이 없다. 수사관들은 오히려 이렇게 신문에 내는 행동이 범인의 불안감을 자극시킬 수 있다 우려했지만,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 괜찮을 거라 답했다.

수사관 헤일리는 적어도 그들이 뭔가를 알고 있지만, 자신들에게 모두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신문에서 난 대로 저택의 마구간지기가 울며 공범이라 자백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부부는 침착했다.

쌍둥이납치사건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아이들을 잃은 부모는 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침착해 보였고, 종종 저들끼리 긴 시간 동안 대화를 해댔다. 또한 그의 상관이자 수사반장인 트로프트는 그에게 너무 많이 조사하지 말고, 뭔가 증거를 알아낸 것이 있으면 아이들의 부모보다 자신에게 먼저 보고하라 명했다.

“이자크 경. 아이들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다른 공범을 찾아야 하는데, 마구간지기는 전혀 말을 하지 않는 데다가 당신과 공주님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도 제게 숨기고 있군요.”

결국 아이들이 납치된 지 나흘째 되던 날 헤일리가 이자크를 따로 불러내 진지하게 물었다. 이자크는 그런 수사관을 빤히 쳐다봤다.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수사관들 모두를 믿지 못한다.

에스텔라가 증거를 조작하자 곧바로 머리를 굴려 저택에 제 사람들을 주둔시켰다. 그들이 더 이상의 증거를 조작하지 못하게, 감시하기 위해서.

누가 버트랜드의 사람인가.

이들 중 몇몇만?

아니면 이들 모두 다?

이 사람은 버트랜드의 사주를 받았을까?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수사관의 말에 이자크가 물음으로 대답했다.

“헤일리 경께서는, 범인이 어떤 자라 생각하십니까.”

“…마구간지기는 매우 순종적인 편이죠. 겁도 많고, 죄책감도 많습니다. 빚이 있어 도왔다고 하니 아마 고리대금쪽과 관련된 사람일테고, 순종적인 공범에는 항상 강압적인 공범이 붙어다니죠. 아마 상대편은 계급적으로도, 재력으로도 꽤나 높은 사람일 겁니다.”

“쪽지의 내용은 어떤 것 같습니까. 저희가 훔쳤다는 물건이 대체 무엇일지.”

이자크는 그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 살펴보려는 듯 그를 찬찬히 관찰했다.

“선왕의 죽음에 대해 모른다는 공주를 비난하는 글이 적혀 있죠. 봐서는 선왕을 매우 따르는 것처럼 쓰여있지만 사실상 공주의 후계권을 막으려 하는 걸로 보면 선왕의 사람도, 공주의 사람도 아닐 겁니다.”

“그럼?”

“…공주가 후계권을 받아내면 불리해질 사람. 어쩌면 국왕 전하의 수혜를 입은 귀족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국왕전하의 사람이 벌인 짓일거라고요.”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요. 하지만 국왕전하의 집권 이후 한번 귀족들의 물갈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선왕과 뜻을 같이 했던 귀족들은 지금 대부분 힘을 잃거나 몰락했으니까요.”

“국왕 전하의 사람이 했다는 짓은 국왕 전하가 이와 관련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경께서는 그 발언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인지하고 있습니까.”

“아이를 잃을 위기에 처한 부모 앞에서 제 목숨이 중요해 틀린 말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

“물론, 지금 제 발언은 다른 수사관들과의 상의 없이 저 혼자 독단으로 생각한 것이었고 절대 다른 이들을 대변하는 말이 아닙니다. 국왕전하께서 공주님의 대부님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헤일리 경. 당신은 어떠한 상황이어도 그런 객관적 판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

“잠시 따라오십시오.”

이자크는 수사관을 데리고 에스텔라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 안에 들어가니 에스텔라와 오르테즈 남매, 그리고 로도니아 살롱의 마담 델라 랭이 마주보고 앉아 뭔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왜 데리고 왔냐는 눈빛으로 에스텔라가 이자크를 보자 이자크가 말했다.

“피터 헤일리 경입니다. 이 분이 앞으로 수사를 도와줄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버트랜드의 사람은 아닙니다.”

“확실한가요?”

“헤일리 경. 당신은 아까 국왕 전하의 사람이 이 일의 진범일지도 모른다 말했죠.”

이자크가 수사관을 보며 물었다. 수사관이 잠시 얼띤 표정을 짓다 이내 뭔가를 눈치챈 듯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요.”

“범인을 알고 계신다고요?”

“예.”

“…알고 계신데도 수사관들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혹시….”

“당신들은 수사를 위한 파견이 아닙니다. 저희를 감시하기 위해 버트랜드가 보낸 것이죠.”

“저희는 어떠한 사주도 받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자 에스텔라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 당신 같은 원칙주의자들이 은근 없거든요, 헤일리 경. 당신의 상관은 버트랜드의 수하입니다. 그는 일부러 수사를 질질 끌고 있죠.”

에스텔라의 말에 헤일리는 그간 상관의 행동들을 상기했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건지 충격받은 눈빛으로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국왕과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는 건데, 괜찮으십니까?”

“수사관은 독립된 기간이라 배웠습니다. 누군가의 힘이 두려워 객관적인 판단을 흐리게 되면 그건 더 이상 수사관이 아니라 배웠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저희 아버지께서요. 제 34기 정식 수사관이셨고 수사반장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이군요.”

수사관이 정중하게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34기 정식 수사관이자 수사반장까지 했던 이는 에스텔라도 알고 있다. 그분은 7년 전 아버지의 죽음을 조사하던 수사반장. 이후에 은퇴할 나이가 되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들었다.

“그분이 당신 아버지라면, 선왕의 사건에 대해서도 들은게 있겠군요.”

“아버지께서는 변경백이 진범이 아니라고 말하셨습니다. 물론, 결과는 그렇지 못했지만요.”

그러자 이자크가 수사관에게 문서들을 넘겨줬다. 얼떨결에 문서들을 넘겨받은 수사관이 찬찬히 그 내용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이자크를 쳐다봤다.

“이게 다….”

“버트랜드가 그간 트라비아에 팔아버린 땅덩어리며, 매관매직한 이들의 명단입니다. 전부가 아니고 극히 일부입니다.”

수사관으로서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아마 경이 먼저 눈치를 채고 조사를 해서 보고했어도 상부에서는 무시했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표정은 관두세요.”

“수사관으로서 창피합니다.”

“창피해할 것 없습니다. 다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게 진정 창피한 짓이니까요.”

에스텔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수사관이 이내 문서들을 다시 살펴본 뒤 말했다. 자신 역시 도울 수 있는 만큼 모두 돕겠다고. 뭘 하면 되냐고. 그러자 에스텔라가 말했다.

“올란도 후작 부인이 아이들을 데려갔습니다. 남편은 모르는 것 같고, 아마 엠버 혼자 저지른 일일 겁니다.”

“부인 혼자서요?”

“버트랜드가 뭔가 약점을 쥐고 협박을 하든, 아니면 보상으로 원하는 뭔가를 해준다 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직접 나선 거겠죠. 하지만 버트랜드는 여차하면 모든 죄를 그녀한테 뒤집어씌울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직접’ 하라고 시킨 걸 거고요.”

“….”

“이쯤되면 엠버도 버트랜드를 의심하기 시작할 겁니다. 국왕은 만나주지도 않고, 사람들은 사건에 대해 너무 많은 관심을 두고 분개하니까. 신문을 볼 때마다 불안해할 거고요.”

“만일 그러다가 그 여자가 최악의 선택을 하면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엠버가 그렇게까지 나약한 인간은 또 아니거든요. 피올라 가문의 장녀입니다. 독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거예요. 아들만을 원하는 가문에서 남동생을 제치고 가문을 이어가려 했던 사람이니까. 며칠 뒤에 그 여자한테서 먼저 연락이 올 겁니다.”

“….”

“아마 내가 한 제안을 받아들일 거예요.”

엠버는 에스텔라가 자신이 범인임을 안다며, 협박하는 편지까지 보냈다며 버트랜드를 찾아가 고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버트랜드는 폐관된 극장에서 아이들을 풀어주라 할 것이 분명했다. 열쇠는 다른 방법으로 빼 올 수 있으니,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아이들을 놔주자고.

일이 잠시 사그라들 때까지 몸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줄 테니, 일단은 가서 공주의 아이들을 풀어주라고.

싱겁게 끝나는 마무리여도 엠버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녀 역시 뾰족한 다른 방도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버트랜드가 그 극장에서 엠버와 그 정부를 죽이려 할 거라는 걸 차마 생각하지는 못했을 거다. 버트랜드는 제 그림자를 시켜 둘을 암살하든, 아니면 건물 자체를 날려버리든 어떻게 해서든 엠버를 죽일 생각일 거다.

“엠버를 죽이고, 버트랜드는 모든 죄를 그 여자한테 뒤집어씌우겠죠. 어쩌면 선대 올란도 후작도 위험할지 모르겠네요.”

선대 후작과 엠버는 버트랜드가 과거에 저지른 만행도 알고 있다. 그가 트라비아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알고 있다. 어쩌면 그 장부를 버트랜드는 계속해서 찝찝해했을지도 모른다. 앓던 이였을지도 모른다.

이참에 그 장부의 모든 만행들을 올란도 가문에 뒤집어씌울 생각이라면?

선대 후작과 엠버를 죽여 자신의 죄를 입증할 증인들을 말살한 뒤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것이다. 사람들이 분개하면 모든 상황을 나서서 정리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겠지.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정식으로 올란도 가문의 장부들을 조사해줬으면 해요. 수사반장에게는 말하지 말고 당신이 독단으로 해야 합니다. 사건 종료가 되어도 계속. 수사반장은 분명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장부에 손도 못 대게 할 테니까 우리가 먼저 해야 해요.”

에스텔라가 다시한번 강조하듯 말했다.

“열쇠가 우리한테 있으니, 지금부터 조사를 시작하세요.”

*

얼마 안 가 다시 한번 메시앙 왕국이 발칵 뒤집혔다.

올란도 후작 가문에서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장부의 내역이 모두 탈탈 털린 것이다. 트라비아에 몰래몰래 땅을 팔아넘긴 것도, 매관매직으로 제 친인척들에게 고위직을 내어준 것도, 국고를 횡령한 것까지도 만백성이 알아버렸다.

올란도 은행에 돈을 맡겼던 귀족들 역시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주를 처형해야 한다,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다, 말이 많았다.

올란도 후작 부인이 애를 납치한 이유가 있었네요. 공주의 손에 장부 금고 열쇠가 들어오니 제 발 저렸던 것이죠.

엠버 그 여자가 선대 올란도 후작을 음독 살해했다잖아요. 올란도 후작은 사실 바지사장이라 사업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대요.

그래서,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대요?

극장이 무너지면서 정부랑 그 잔재에 깔렸던데요.

아마 죽었을 테지요.

살았으면 무조건 처형시켜야죠.

이래서 하급 귀족이란. 저가 뭐라도 된 줄 알지. 올란도 가문에 들어가고 욕심이 더 많아져서 그래요.

원래부터가 탐욕이 심했다잖아요.

올란도 후작은 사실 좀, 얼뜨잖아요? 사람이 멍청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선대 후작이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어쩜 그런 여자를 집에 들여서 당신도 살해당하게….

귀족들은 그 여자 이상할 줄 알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알만하다는 어투로 하급 귀족이라 노블레스가 부족해 감히 아랫것이랑 정분이 났다 떠들었다.

신문에서는 나날이 분노하는 백성들을 부추겼다.

지방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자신의 영지가 트라비아에 팔렸다는 소식을 들은 영주들도 들고일어났다. 올란도 후작을 죽여야 한다, 처형해야 한다, 후작 부인이 죽었어도 부관참시를 해야 한다, 말이 많았다.

결국 국왕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올란도 후작가의 재산을 모두 몰수한 뒤, 트라비아에 팔아넘긴 영토들은 책임지고 다시 사 오겠다고, 매관매직의 진상을 알아내어 부정하게 자리에 오른 이들은 직위를 해제시킬 것이며, 올란도 후작 부인은 치료가 끝나는 대로 재판에 세울 것임을, 올란도 후작은 직위를 해제시킨 뒤 재산을 압수할 것이라 공표했다.

올란도 후작 부인은 그의 정부와 함께 건물 잔재에 깔려 죽었다.

근위병들은 물론 수사관까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증언했고, 유해는 곧장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들 역시 그들이 죽었다는 보고서를 버트랜드에게 올렸다.

모든 건 버트랜드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장부가 공개되었지만 그 모든 것을 올란도 가문에 뒤집어씌웠다. 말이야 그럴싸하게 하며 백성들과 귀족들을 진정시킨 뒤 어차피 몰래 다시 팔아넘기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에스텔라다.

공주와 이자크. 그리고 오르테즈 남매들까지.

버트랜드는 이제 더는 에스텔라를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공주님으로 대하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였다. 워낙에 밝고 철없는 모습만 봐왔고, 그러길 바랐던지라 방심했던 것이다. 오로라를 쏙 닮은 얼굴에, 저도 모르게 유해지고 물러진 것이다.

언제부터 눈치챘던 걸까?

언제부터 내가 제 아비를 독살하려 했다는 진범인 걸 알아차렸을까. 이자크가 언제부터 다 말했을까. 쌍둥이납치사건도 내가 사주한 짓이라고 분명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한참 제 서재에서 사색에 빠져있는데 그의 보좌관이 급히 들어왔다.

“전하. 서북쪽 경계선이 뚫렸다는 전갈입니다. 에테리아에서 기습 남하하여 곧장 전투태세에 들어갔다고는 하는데, 얼른 원군 요청이 필요하다 합니다.”

서북 요새에서 올린 전갈을 받아든 버트랜드가 여유롭고 권태롭게 글을 읽기 시작했다. 사상자가 몇, 사망자가 몇, 요새는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질 것 같으니 급히 원군을 요청한다는 글이었다.

에테리아는 원래 우호국이었다. 하지만 트라비아에 주권을 팔아넘기며 에테리아의 국왕이 뭔가를 눈치챈 듯하자 버트랜드는 바로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괴하고 그들과 단절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다. 메시앙에 거주하는 에테리아인들을 무차별 학살, 혹은 체포하며 에테리아와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다. 어찌 보면 버트랜드의 이런 행동 때문에 분개할 대로 분개한 에테리아의 국왕이 전쟁을 선포한 것도 있다.

버트랜드는 일부러 에테리아가 먼저 전쟁을 선포하기를 기다렸다.

나라의 주권을 모조리 트라비아에 넘기려면 그럴싸한 이유가 필요한데, 전쟁으로 인한 몰락만큼 그럴싸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에테리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몇만이 죽든 말든 버트랜드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별 탈 없이 나라를 팔아먹고 난 뒤 제 딸이 제국의 왕비가 되고, 그는 그 외척이 되어 트라비아 제국에서 한자리 꿰차는 것.

보좌관 역시 그가 그럴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원군을 보내도 아마 에테리아에게 지든 말든 상관조차 안 할 테지.

“대충 왕실 병사 100 정도 보내.”

“하, 하지만 전하. 100명으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에테리아에서 남하한 병사 수만 400이라는데, 지금 서북 요새에는 사망자가 150명인 데다가, 싸울 수 있는 병사의 수는 200이 조금 넘는다 합니다. 요새 근처의 민가까지 보호하려면 적어도 300명의 병사가 필요할 텐데요.”

아무리 전쟁의 승패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적어도 메시앙의 국왕으로 있는 한 백성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100명이라는 택도 없는 숫자에 보좌관이 당황하며 말했다. 보좌관의 간언에도 버트랜드는 그럼 200으로 해. 어차피 이제 슬슬 에테리아에게 지는 척하면서 트라비아에 원군을 요청하면 되니까.

그렇게 말하던 버트랜드가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아니. 아니지. 왕실 병사까지 보낼 필요 있나. 하하하!”

조만간 그가 제 수염을 쓸어내리며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스스로도 만족스러워 할 때 버트랜드가 하는 행동이었다. 보좌관은 그런 국왕을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자크 경에게 기회가 생겼구만.”

“…예?”

“몰락한 영웅에서, 다시 백성의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기회 말이야.”

“설, 설마, 국왕 전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훈련소에 가서 이자크에게 출전 명령을 알려라.”

보좌관은 버트랜드가 진심으로 최악의 사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랜 시간 동안 친구였기에, 그를 미화시켰던 것일까. 보좌관은 다시금 그의 자비 없고 무자비한 처사에 충격받았다.

뭐 해? 빨리 가지 않으면 서북의 요새가 함락된다고? 하며 비열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에 보좌관은 결국 침통한 듯 눈을 감아 탄식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

평소와 다름없이 훈련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이자크였다.

꼬맹이들이 검을 쥐거나, 힘을 실어 휘두르는 방법을 봐주고 있는데 저 멀리서 왕궁 깃발을 단 마차가 모습을 보였다. 훈련소 정문에 도착한 마차의 모습에 어린 학도들은 훈련을 멈추고 그 마차를 쳐다봤다.

안에 공주님이 계신가? 또 공주님이 꽃다발을 들고 왔을까? 개구쟁이인 학도들은 그걸 구실로 제 스승님을 놀리기 위해 얼른 다닥다닥 창살에 붙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를 깨고 마차에서 내린 것은, 초로의 보좌관.

에이. 뭐야. 공주님 아니잖아?

어. 왕궁 깃발인데.

그럼 누구지? 엄청 높은 사람 같은데. 옷을 봐.

마차에서 내린 이가 국왕의 보좌관이라는 것을 본 이자크가 아이들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보좌관은 호위기사들과 함께 훈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이자크 앞에 섰다. 그러더니 왕의 칙서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자크 경은 들으라-”

보좌관은 이자크를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버트랜드가 가졌어야 할 죄의식을 보좌관이 대신 느끼고 있었다.

“-하여 국왕 전하께서 그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니, 가문의 죄를 백성들을 지킴으로서 속죄하라. 서북 요새로 가 에테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라. 백성들을 지켜내라.”

출전 명령을 알리는 칙서의 내용에 어린 학도들은 물론 이자크의 전속 기사단 역시 얼굴이 굳어졌다.

칙서를 읽은 보좌관이 왕의 칙서를 둘둘 말아 이자크에게 건넸다. 왕실 기사들이 마차에서 박스째로 담긴 무기들을 그의 앞에 가져다놨다.

이자크는 갑옷과 검이 담긴 박스를 내려다봤다.

서북 요새로의 출전이 뭘 뜻하는지 모를 리 없다.

죽으라고 하는 거다. 버트랜드는 그곳에서 이자크가 죽기를 바라는 거다. 왕의 출전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자크는 한쪽 다리만 무릎을 꿇은 채 보좌관으로부터 왕의 칙서를 건네받았다. 그건 출전 명령에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꼭 살아 돌아오십시오. 이자크 경.”

보좌관이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이자크가 고개를 들어 보좌관을 쳐다봤다. 그는 미안해하는 눈빛이었다. 이자크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

에스텔라는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잔재에 깔려 있던 엠버와 그의 정부가 의식을 잃은 채 입원해있는 곳이다. 버트랜드는 그들이 죽은 줄로만 알 것이다. 근위병들이 잔재를 치우고 밑에 깔린 두 사람을 병원에 옮겼을 때만 해도 근위병들 역시 그들이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게가 나가는 천장에 깔렸던 것이니까. 분명 온몸의 뼈가 바스라졌을 것이다. 폭약들이 폭발하며 날라오는 잔재들에 온몸이 찢기고, 불에 화상을 입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엠버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안타깝게도 태중의 아이는 유산되었어요.”

에스텔라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엠버에게 말했다.

이 병원은 에스텔라가 후원하는 병원으로, 의사들부터 간호사들까지 모두 에스텔라의 사람이다. 해서 근위병들이 이곳에 그들을 데려왔을 때 병원 의사들과 간호사는 에스텔라가 부탁한 대로 엠버와 그의 정부가 죽었다는 가짜 보고서를 만들어 올렸다.

“패트릭은 당신을 감싸면서 천장에 온몸이 부서졌다 하더군요. 죽지 않았지만,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언제 돌아올지는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더군요.”

“…흐. 흐어, 허으….”

엠버는 흐느꼈다. 얼굴에도 상처가 심해 입을 크게 벌리지도 못했다. 해서 우는 것이 사람이 아닌 짐승이 우는 것처럼 들렸다.

에스텔라는 자신의 아이들을 납치해 감히 흥정하려 했던 그녀를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 그녀의 모습에 동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과 당신 정부는 죽은 걸로 처리되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버트랜드가 죽이러 올 테니까.”

“….”

에스텔라가 품속에서 신문을 꺼내 그녀 앞에 놔줬다. 신문 헤드라인을 읽은 엠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대 올란도 후작의 죽음, 현 올란도 가주의 처벌, 피올라 가문의 몰락.

“내가 조금 더 일찍 당신에게 경고했더라면. …미안해요, 엠버.”

“….”

“유감이에요.”

“….”

“버트랜드를 고소할 예정이에요. 당신이 그때까지 재활할 수만 있으면, 그때 증인으로 서줬으면 해요.”

“….”

엠버의 붕대로 싸여진 팔이 덜덜 떨렸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그 손을 잡아준 뒤 병원을 빠져나왔다.

아르텔과 함께 병원 근처 거리를 돌아다니던 쌍둥이들이 에스텔라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그러더니 얼른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얼른! 일루, 일루우!”

이리 오라며 에스텔라의 손을 잡아끄는 루시와 루스. 그들에게 이끌려 작고 아담한 가게 창문 앞으로 향했다. 뭐 때문에 그러는데, 응? 에스텔라의 질문에 루시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창문을 가리켰다.

“이거 아가!”

아이들은 다행히도 예전과 같았다. 물론, 가끔 어두운 밤에는 무섭다며 침실에 찾아오기도 하지만, 아직 자신들이 납치당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밝은 모습에 에스텔라가 안도하며 아이들이 가리키는 걸 확인했다.

창가 안쪽에는 자그마한 마네킹에 유아용 옷이 입혀져 있었다.

“이거 아가한테 입혀주면 이쁘겠지.”

연노랑의 리본들이 단추 대신 콕콕 박힌 귀여운 프릴 배넷 옷이었다. 에스텔라 역시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너무 귀엽다.”

“이짜나. 아가가 노랑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노랑이 옷을 사줘야 해.”

지금 사야 된다며 루시와 루스가 에스텔라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가게 안에 들어갔다. 아직 애가 나오려면 적어도 5개월은 더 있어야 한다니깐. 에스텔라의 말에도 루시와 루스는 그래도 아가가 지금 가지고 싶어 할 거야! 지금도 사주고 나중에도 사주면 되잖아요! 하며 막무가내였다.

결국 에스텔라가 항복했다. 가게 안에 들어가니 미니어처처럼 작은 옷들이 행거에 걸려있다. 이렇게나 작은 옷들이라니. 에스텔라는 마치 소인국에 온 것 같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루시와 루스는 정말 태중의 아이와 대화라도 하는 양 옷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가야, 이거 어때? 이거 시로? 그럼 이거는? 이거 좋아?”

까치발을 하고선 옷들을 보여주는 아이들의 모습에 에스텔라는 기분이 좋아졌다. 결국 예상치 못한 지출을 하고야 말았다. 루시와 루스에게도 두 벌씩, 태중의 아이에게는 아이들이 골라주는 옷대로 다 사다 보니 꽤나 많이 사버렸다.

“빨리 아가가 이거 입었으면 좋게따!”

쇼핑을 마치고 마차에 오른 아이들이 제 동생의 물품들을 보며 뿌듯한 듯 말했다. 에스텔라가 웃으며 불뚝 부른 제 배를 쓰다듬었다. 태중의 아이도 기분이 좋은 걸까. 배를 톡톡 치며 마치 쌍둥이의 말에 답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3권

지은이 : 신양이

발행인 : 민경찬

발행처 : 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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