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응?”
“이모가 잘 가지고 있다가 엄마한테 돌려주랬딴 말이야.”
“언제?”
“웅. 예전에 릴리 이모가 그래쩌.”
“그게 무슨 소린지 엄마한테 자세히 말해줄래?”
루시가 아이참, 하면서 제 인형을 가지러 방을 나갔다. 조금 있다가 도도도 복도를 달려오는 루시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루시가 포세린 인형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이거! 이거 말이야! 이거는 이모가 엄마한테 다시 돌려줄 수 있냐고 그랬딴 말이야아. 이거 돌려주며는 우리는 새거 가져야지.”
루시가 설득하려는 듯 말했다.
“릴리 이모가 엄마한테 돌려주라고 했다고?”
“웅. 엄마가 아직 인형 기억 다 못하니까. 기억 다 하면 그 때 돌려주래써.”
그러면서 포세린 인형 두 개를 에스텔라 무릎 위에 올려놨다.
“그러니까 새 거 사주세여.”
히히. 루시가 웃으며 말했다. 에스텔라는 그저 새 인형을 가지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루시와 루스는 떼를 쓰면 썼지 거짓말까지 할 애들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에스텔라는 잠시 인형을 쳐다봤다.
이걸 왜 나한테 돌려주라 한 거지? 릴리가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인가? 아이들이 곧장 안식일 선물로 어딜 놀러 가자, 뭘 사달라, 떼를 쓰기 시작했기에 에스텔라는 인형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메시앙에는 안식일이 두 번 있다. 3월부터 4월 말까지 시작되는 안식일 달에는 모두들 메라 안식일이라 부르며 메라를 위한 축제를 전국적으로 한다.
날씨가 풀리며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아가한테 꽃놀이를 알려줘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요즘 들어 이 녀석들, 자기들이 하고 싶은 걸 자꾸만 아가가 하고 싶어 하니까 해줘야 한다며 머리를 굴린다.
“우리 버꼬나무도 보러 가야대. 왜냐며언, 어. 레일리랑 에단이 버꼬나무가 진짜 이쁘다고 했거든.”
체스 백작 부부네 아이들과 연회 때 많이 친해졌는지, 종종 레일리와 에단이 저택에 놀러 오기도 했다. 며칠 전에 놀러 왔던 아이들에게 레일리와 에단이 벚나무 얘기를 했나 보다.
“벚꽃나무가 보고 싶어?”
“웅.”
“변경 부근에는 꽃놀이할 만한 장소가 여의치 않아. 벚나무를 보고 싶으면 토렌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럼 가자! 나도 레일리랑 에단한테 자랑할래. 걔네가 엄청 자랑했단 말이야.”
“아가 때문에 멀리 가면 엄마 힘들지도 몰라, 루시. 내년에 가자.”
이자크가 다정한 목소리로 루시를 달래며 말했다.
“이이잉 싫어어- 나는 보고 싶단 말이야. 루스도 막 보고 싶다고 했구 우리 엄청 부러웠단 말이야.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단 말이야.”
하지만 체스 백작 부부네 아이들에게 어지간히 큰소리쳐놨던 건지, 루시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 루스 역시 보러 가자며 칭얼거렸다.
“가요, 이자크. 나도 오랜만에 꽃놀이나 하고 싶고.”
에스텔라가 가자니 또 가야지. 이자크가 그럼 날씨 좋은 날 가자며 단번에 수락했다. 그 모습을 본 루시와 루스가 아빠는 엄마만 좋아하지! 하면서 땡깡 부렸다.
“오늘 가요 오늘-”
“오늘은 안돼. 오늘은 손님이 찾아오기로 했거든. 도시락도 싸고, 그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치. 네에.”
삐친 모습도 귀엽네. 에스텔라가 입이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온 아이들의 입술을 쭉 잡아당겼다. 그러자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며 다시 아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공주님, 이자크 님, 오르테즈 남매가 도착하셨습니다.”
하녀가 방문을 두드리더니 밖에서 말했다.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방을 나오자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멜리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오르테즈 남매가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갔다.
몇 개월 전 왕궁 연회에서 봤을 때보다 두 사람 다 신수가 더 훤해졌다.
“공주님! 기억이 다 돌아오셨다는 소식 받았습니다.”
에스텔라가 들어오자 헬렌 오르테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오르테즈 남매 옆에는 델라 랭이 앉아있었다. 델라는 오랜만에 에스텔라를 만나 기쁜 듯해 보였다.
기억이 돌아오고 났다는 소식은 아마 진즉에 아르텔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찾아가 모든 기억이 돌아온 제 주인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모든 기억과 감정으로부터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
“다들 와줘서 고마워요. 이제부터는 이자크와 저, 다 같이 움직이기로 했어요. 기존 계획에서 조금씩 바뀌는 부분이 생길 것 같아 미리 말을 맞추려고요.”
먼저 연락한 것은 에스텔라였다.
아버지를 왕궁에서 빼 왔고, 태중의 아이도 안정기에 들어섰으니 이제 슬슬 일을 시작해야 했다.
오르테즈 남매가 이자크에게 서류를 몇 가지 건넸다. 이자크는 익숙하게 그 서류들을 읽었다.
“어떠십니까? 초안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네요.”
이자크가 서류를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라가 그가 읽던 것을 건네받아 읽기 시작했다. 서류는 오르테즈 남매들이 시작한 사업에 관한 것이었다.
오르테즈 남매는 왕궁 연회 이후 귀족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정체를 알 순 없지만 대부호가 확실한 네메시스의 후원 받는 이들이었으니 그들이 시작할 사업에도 관심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모두의 관심 속에서 오르테즈 남매가 사업을 시작했다.
기대하던 뚜껑이 열리자 귀족들 모두 그 안을 살펴보려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다들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을 것이다.
오르테즈 정보사.
정보사? 정보사가 뭔데? 귀족들은 난생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댔다. 오르테즈 남매는 정보를 취재하고, 그 취재를 토대로 신문을 발행할 거라는 부연설명을 했다. 그러자 귀족들이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결국 종이 쪼가리에 대충 소문 몇 개 적어 파는 사업이라는 거 아닌가?
네메시스는 왜 이런 사업에 투자한 거지? 여기에 무슨 가치가 있는 건데? 종이에 정보를 끄적여서 판다고? 그냥 사람 시켜서 알아내면 되는 걸 뭣 하러? 누가 돈을 내고 저런 걸 사서 본다는 거야? 뭐? 겨우 1실링도 안 한단 말이야? 무슨 수익을 얻겠다고?
모두들 네메시스 감이 많이 떨어졌다 했다.
그렇게 투자하는 사업들마다 성공을 하던 그의 직감도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종이 쪼가리에 거는 걸 보면 끝물이라고.
오르테즈 언론사는 동시에 다섯 군데에서 문을 열었다. 수도 광장에 본점을 두었고 나머지 네 군데는 모두 지방이었다. 귀족들은 오르테즈 남매가 처참히 파산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오르테즈 남매는 이 사업으로 큰돈을 벌 생각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걸로 정말 백성들이 선동이 될까요?”
알렌 오르테즈가 아직 잘 모르겠다며 이자크에게 물었다.
먼저 이 사업을 제안한 것은 이자크였다.
“버트랜드는 백성들이 무지해지길 바라니까, 우리는 그에 반대되게 정보를 자꾸 제공해줘야죠.”
버트랜드는 백성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싫어했다. 일부러 신문물들은 받지 않았으며, 도시 간 경계를 강화하여 백성들을 고립시키려고 했다. 후에 주권을 트라비아에 팔아넘겨도 뭐가 뭔지 모르는 백성들은 반항도 제대로 못 할 테니까.
그동안 운 좋게 어진 왕들만 만났던 메시앙의 백성들이다. 싸워서 쟁취하는 것? 그런 것들보다 그저 왕이 알아서 잘 다스려주시겠지. 하며 마음 편히 지내는 이들이다.
이자크는 그런 이들에게 현재의 상황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전쟁터에 나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알려줬던 전술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적군에 가짜 정보를 만들어 퍼뜨리는 것. 실제로 역병이 퍼지지 않았음에도 역병이 퍼졌다는 거짓 정보에 넘어간 적군들이 감염된 증상을 호소하며 퇴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자크는 그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전쟁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을 모아 여론을 형성하는 것은 꽤나 큰 힘을 휘두를 수 있다. 사람의 심리를 조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차, 담배, 디저트 등의 사치재 사업이 판치는 이 메시앙에 처음으로 언론사가 세워졌다.
“가장 처음은. 올란도 후작이 좋겠군.”
이자크가 서류들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협회장한테 제가 열쇠를 넘겼었는데. 어찌 되었습니까.”
“모조리 털었다고 합니다. 먼지 한톨 안나올 정도로요.”
헬렌 오르테즈가 손을 펄럭대며 말했다.
“자료 정리해서 내보내면 시기적으로 딱 맞을 겁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정산 시기일 텐데 아직도 올란도 후작은 잠잠하네요. 아니면 잠잠한 척하는 건지.”
에스텔라가 고개를 갸웃대며 말했다. 제일 중요한 장부 금고 열쇠가 사라졌으면 지금쯤 올란도 후작가는 발칵 뒤집혀야 하는데, 정말 멍청이라 아직까지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세간의 시선 때문에 조용히 저들끼리 뒤집힌 건지.
에스텔라가 차분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뭐, 뭐가 되었든 이제부터 차근차근 조지면 되니까요.”
“조, 조지다니. 에스텔라.”
“맞는 말이잖아요. 신난다. 이제부터 도미노처럼 나가떨어질 놈들 생각만 하면.”
농담조로 말하긴 했으나 에스텔라의 눈빛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
“야, 이 멍청한 놈아!”
올란도 후작가에 고성이 울려퍼졌다. 올란도 후작이, 정확히 한스 올란도가 얼른 귀를 막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다가 저한테 날라오는 책들을 피해 으악! 으악! 이상한 비명 소리를 지르며 몸을 요리조리 움직였다.
“아, 아버지. 왜 책을 던지시고-!”
“이런 우라질 놈! 네놈한테 가업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병상에 누워있던 선대 올란도 후작이 제 가슴을 퍽퍽 치며 소리쳤다. 제 아들놈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장부 금고 열쇠를 잃어버렸단다. 그것도 언제부터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단다.
“이제 곧 정산해서 올려야 하는데 네 놈이 장부 열쇠를 잃어버리면 뭘 올리냔 말이야!”
“그냥 대충 적어서 올리면 되죠!”
“…아, 아이고. 아이고 내 뒷골-!”
아들놈의 망발에 선대 후작이 제 뒤통수를 잡으며 허우적거렸다. 그의 보좌관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너는 네 남편이 이렇게나 멍청한데 너라도 정신 안 차리고 뭣 하는 거야!”
화살이 한스의 아내, 앰버 피올라에게 향했다.
“그게, 저도 몰랐습니다….”
“…아이고. 가업을 다 망치게 생겼구나. 국왕 전하께서 이를 아시면 네놈들 모가지는 물론 우리 그냥 다 죽는 거야 이놈들아…!”
그 열쇠가 어느 열쇠인데. 내가 그렇게 누누이 말했거늘! 선대 후작이 결국 몸져 눕고 말았다. 아들 부부 내외는 선대 후작에게 욕과 책 세례를 받은 뒤에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가업을 물려받은 지 이제 겨우 반년째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줄 몰랐었지….”
“당신 정말로 잃어버린 건 맞아요? 어디 옷이나 주머니에 흘려놓고 못 찾는 건 아니고?”
“내가 그렇게 바보겠어?”
남편의 말에 앰버 피올라가 속으로는 어디 바보뿐일까. 바보 천치지.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굴렸다.
원래 한스 올란도는 가업을 물려받을 예정이 없었다. 선대 후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아들놈에게는 절대 가업을 잇게 하려 하지 않았다. 저를 닮았으면 두뇌도, 탐욕도 둘 다 골고루 있어야 하는데 어쩜 두뇌는 쏙 빼놓고 욕심만 많지 않나.
어차피 제 몸도 건사하니, 손주를 보기 전까지만 자신이 계속 일하자 생각했었다. 하지만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며 급하게 아들놈에게 사업을 일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진짜 이게 어딜 간 거지?”
한스 올란도가 한심하게 제 바지 주머니들을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내가 남편을 보며 혀를 찼다.
“당신 다음부터는 그렇게 열쇠꾸러미 좀 벨트에 차고 다니지 말아요.”
“왜?”
“누가 그거 훔쳐 가면 어쩌려고요. 잠깐, 당신이 잊어버린 게 아니라 누가 훔쳐간 거 아니에요?”
“아니 이렇게 보석 박힌 열쇠들이 달려있는데 왜 하필 그걸 훔쳐 가겠어?”
“장부 열쇠인 줄 알고 훔쳐 간 걸 수도 있죠!”
“금고 열쇠 놔두고 왜 장부 열쇠를 훔쳐 가겠어? 다른 열쇠들 훔치면 금은보화가 눈앞에 펼쳐질 텐데. 장부 종이 쪼가리들 훔쳐다가 뭣하게?”
“누가 우리 사업을 시기 질투하면 충분히 훔쳐가죠. 메시앙의 회계는 전부 우리가 관리하는 건데. 아까 아버님 말 못 들었어요? 우리 목이 달아날 수도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잖아요.”
“다 암호로 적혀있어서 해독도 못 할걸.”
피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이 한 말은 진심인 거다. 남편이야 워낙에 모지리로 자라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녀가 이 남자와 결혼한 것도 있는 거다. 어차피 멍청한 남편은 대외적으로 바지사장이나 시키고, 자신이 이 사업의 결정권을 쥐기 위해서.
선대 후작도 피올라에게 그런 야망이 있다는 걸 아니까 들여온 거고.
‘저 멍청이 때문에 목이 잘려나갈 순 없지.’
만일 장부 금고가 털려 그간의 내역들이 세상에 공개되면, 정말 우리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버트랜드가 국고를 이용하여 사치한 것은 물론, 주권을 야금야금 팔아넘기며 챙겨온 돈과 지대, 패물들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그 장부는 그들의 약점이자 적의 최고 무기다.
저 머저리가 그걸 몰라서 저러지. 그저 은행 놀이나 하는 줄 알고 있는 저런 놈에게.
적어도 책임을 조금이라도 회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뭔가가 필요했다.
“누가 훔쳐 갔다고 하죠. 여보.”
“누가 훔쳐 갔다고 말하는데?”
한참 동안 생각하던 피올라가 뭔가 떠올린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 오르테즈 남매가 이번에 정보사를 차렸댔죠?”
*
아침부터 변경 저택의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건 바로 꽃놀이 소풍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토렌 지방은 거의 하루 내리 내려 가야 하는 지방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걸 준비해야 했다.
다들 바빴다.
엄마와 아빠는 아침부터 서류들을 보느라 정신없었고 유모와 멜리사 역시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른 하녀들과 시종들 역시 말을 붙이려 하면, 잠시만요 아가씨, 죄송해요 도련님, 나중에요. 하며 제일들 하기 바빴다.
“완전 심심하다. 그치.”
“완전 심심하네.”
루시와 루스는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사용인들의 다리를 쳐다보며 가만히 바닥에 앉아 놀았다. 어쩌다 말을 걸어주면 다들 바닥에 앉지 마셔요. 조금 있다 놀아드릴게요. 하며 후다닥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우리 내일 꽃놀이하잖아.”
“번나무 본 거 레일리한테 자랑하자.”
“에단한테도 자랑할 거야.”
“당연하지. 나는 번나무 보면, 꽃 주워서 아가한테 보여줄래.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나도 그럴래.”
“따라 하지 마.”
“안 따라 했어.”
“따라 한 거거든. 따라쟁이야.”
“나 따라쟁이 아니고 루스거든.”
시시콜콜한 말싸움이나 하면서 쌍둥이는 시간을 보냈다. 도대체 언제 출발하는 걸까? 루스의 질문에 루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한테 빨리 가자고 하자. 이러다가 시간이 없어.”
“나도 갈래.”
결국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쌍둥이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있는 서재로 달려갔다. 문을 벌컥 열고는 엄마! 아빠! 소리를 친다. 그리고 와다다 달려가다가 에스텔라 앞에서 우뚝 섰다.
“아가야. 미안해. 놀라찌?”
에스텔라의 배를 한번 쓰다듬어주곤 루시와 루스가 말했다.
“엄마 우리 대체 언제 출발해요?”
“엄마랑 아빠 이것만 다 보고 가자.”
“치. 압빠. 모해?”
바빠 보이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이번엔 이자크로 타겟이 변경되었다. 이자크는 아이들의 이마를 한 번씩 쓰다듬어준 뒤 마찬가지로 뭔갈 읽고 쓰고 있었다.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루시와 루스는 터덜터덜 방을 나왔다.
“우리 심시매.”
루스의 말에 에스텔라가 안쪽에서 말한다.
“온실에 가서 놀고 있어. 엄마랑 아빠가 금방 갈게-”
루시와 루스가 결국 손잡고 온실로 향했다. 모래사장으로 만들어져있는 곳에서 흙 놀이를 한참 하다가 또 저들끼리 소꿉놀이를 하다가, 잠깐 투닥대다가, 또다시 재밌게 놀기를 반복했다.
어느 정도 일이 끝난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아이들이 있는 온실로 향했다.
잠시 걷던 에스텔라가 뭐가 느껴졌는지 발걸음을 멈췄다.
“왜그래요, 에스텔라.”
“깜짝아. 갑자기 태동이 크게 와서. 어. 또 이러네. 화가 난 것처럼 구네요.”
에스텔라가 당황한 듯 말했다. 태동이 꽤나 심하다. 에스텔라를 부축해주며 이자크가 배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잠잠해졌는지 에스텔라가 이제 되었다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전만큼은 아니었지만 온실까지 가는 내내 태동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에스텔라는 어째서인지 불안한 느낌이 엄습해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불안한 느낌이 들지?
마치 태중의 아이가 뭐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온실에 도착한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루시? 루스?”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다. 이자크가 안에 들어가 둘러봤다. 인형부터 장난감까지 잔뜩 어질러놓은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놀다가 다른 곳으로 갔나 봅니다.”
워낙에 여기저기 쏘다니는 녀석들이다. 3층 전체를 돌아다녀 봤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4층 할아버지 계신 곳에서 놀고 있나? 올라가 봤지만 방에 아이들은 없었다.
베이먼을 치료하고 있는 로먼에게 에스텔라가 물었다.
“로먼. 혹시 루시와 루스가 여기 왔었나요? 애들이 안 보여서.”
“아까 전에 잠깐 놀다 가셨습니다.”
“아, 그래요? 얘네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건가.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못 말린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들이 평소 자주 숨는 공간들을 찾아갔다. 다락방, 중정의 숨겨진 비밀방, 지하 계단으로 내려가는 곳, 응접실의 커튼 뒤까지 한참 동안 찾아다녔지만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얘네가 어디에 숨은 거야 정말.”
슬슬 걱정도 되고 태중의 아이 때문에 지친 에스텔라가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이자크는 에스텔라에게 앉아서 쉬라 한 뒤 아르텔과 멜리사, 그리고 유모와 함께 마저 아이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저택의 모든 시종들과 하녀들이 루스 도련님! 루시 아가씨! 어디 계세요! 하며 샅샅이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에스텔라 역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 이곳저곳 다니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다가도 배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질 못했다.
“가서 누워있어. 응? 아마 지하나 다락방에 숨어서 장난치고 있을 테니까.”
“이자크. 나 계속 불안해요.”
“에스텔라.”
“…제발 그저 장난이었으면 좋을 텐데.”
에스텔라가 눈에 띄게 불안정해졌다. 태동이 강하게 느껴졌다. 마치 태중의 아이가 자꾸만 뭐라 말하는 것 같다. 루시와 루스가 위험하다고. 마치 그렇게 경고하는 것 같다.
이자크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장난꾸러기들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는 걸로 보면 정말 무슨 일이 생기긴 생긴 것이다.
태중에 아이가 있는 에스텔라를 겨우 안정시킨 뒤 이자크가 집사와 유모를 불러들였다. 그 순간에도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이 루시와 루스를 찾아다니느라 모든 일들을 중단한 상태였다.
“혹시 숲속에 들어가신 건 아닐까요.”
아르텔의 말에 이자크가 고개를 내저었다. 일전에 루시와 루스가 물에 빠졌을 때 이후로 절대 둘이서만 숲속이든 저택 밖에 나가지 말라 그리 단단히 일러뒀다.
그때 누군가 착잡한 얼굴로 다가왔다.
“단장. 숲속 일대를 모두 다 뒤져봤지만 아가씨랑 도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몰라 주변의 호수도 모두 뒤져봤는데, 다행히 아직까지 물속에서 발견되지는 않았습니다.”
저택 근처 호수와 숲속을 뒤지고 있던 이자크의 정예부대의 부단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자크가 가만히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눈을 꽉 감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이자크가 고개를 들었다. 살짝 열린 방문을 닫아 에스텔라가 듣지 못하도록 나직하게 말했다.
“어쩌면 납치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말에 아르텔과 유모 둘 다 서로를 쳐다보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감히 변경의 저택에서 공주님과 이자크의 아이들을 납치한단 말인가.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저택의 비밀 공간들은 이미 내가 다 찾아봤어. 그 어떠한 곳에도 아이들이 없어. 단순히 숨바꼭질을 하다 어딘가에 갇힌 게 아니면.”
“하지만 누가 납치를 한단 말입니까?”
“할 사람이야 있지.”
이자크의 말에 아르텔이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떠오르는 이는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 이 시기에?
“이자크 님께서는, 버트랜드가-”
“…그게 무슨 소리야, 아르텔?”
깜짝 놀라 뒤돌자 에스텔라가 서 있었다. 언제 방문을 열고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이자크 역시 당황해서 말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이자크.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이들이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온다니. …납치일지도 모른다고요?”
“에스텔라.”
“이 집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이 저택에서. 내 아가들이 납치된 걸지도 모른다고요?”
“에스텔라. 진정해요. 일단 우리 들어가요.”
이자크가 얼른 무너지려는 듯 문에 기대는 에스텔라를 부축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자크. 똑바로 말해줘요. 응? 지금 애들 찾고 있는지 5시간이 넘었잖아. 아직도 안 찾은 거면, 당신 말대로 납치일 수도 있는 거죠? 버트랜드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거죠? 응? 똑바로 말해줘요. 이자크. 내가 당장 버트랜드를 찾아가서-”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옷가지들을 잡아당기며 절박하게 물었다. 이자크는 그때의 눈빛이 마치 호숫가에서 미친 듯이 달렸던 에스텔라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자크가 제 멱살을 쥐려는 에스텔라의 손을 잡아 내리며, 이성을 되찾으라는 듯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무너지지 마, 에스텔라.”
“….”
에스텔라의 숨소리가 가녀리게 떨렸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다.
“무너지면 안 돼.”
“…흐윽.”
“아이들 무사할 거야. 납치된 거면 분명 우리한테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진 아이들을 살려둘 겁니다. 우리가 구해오면 되잖아요.”
이자크는 납치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버트랜드가 있을 것이라는 것도 확신한다. 단순히 그 사람이 악인이라서가 아니다. 그의 직감이 그리 말했다.
버트랜드의 짓이 분명하다고.
에스텔라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애들이 무서워할 텐데.”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창백한 얼굴로 관속에 누워있던 두 아이들의 모습. 이번에도 그렇게 되면 어쩌지. 에스텔라가 어깨를 떨면서 이자크의 품 안에 무너졌다. 이자크가 받치려는 듯 에스텔라를 껴안았다.
“무서워. 무서워요, 이자크.”
“걱정 마요. 내가 꼭 구해 올 테니까. 아이들은 무사할 겁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 따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요. 약해지면 안 됩니다. 분명 납치범한테서 먼저 연락이 올 겁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아이들을 납치했다. 바라는 것이 있으니 인질로 삼은 거겠지. 그렇다면 먼저 그쪽에서 연락을 해올 것이다.
“에스텔라. 나 봐요.”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턱을 조심스레 잡아 올리며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이번엔 내가 지킬게.”
“…여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낼 테니까.”
“….”
“당신은 나 믿고 기다려요.”
이제 에스텔라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질 수는 없다. 이미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쳤다. 이제는 쉬어야 한다. 자신은 그녀에게 큰 빚을 진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이번엔 이자크의 차례다.
그의 말에 에스텔라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침착함을 되찾으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배가 당기는 건지 불룩한 배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로먼을 불러 진찰을 받게 한 뒤, 에스텔라가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 손을 잡고 있었다.
에스텔라가 잠이 들고 나서도 이자크는 계속 손을 잡고 있었다.
누군가 조용히 문에 노크했다. 이자크가 잠시 에스텔라의 손을 놓고 방 밖으로 나갔다.
“뭔가 찾았나?”
이자크가 묻자 부단장이 고개를 끄덕이곤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루시와 루스가 놀고 있던 온실에서 찾은 것이었다. 납치범이 분명 뭔가를 남기고 갔을 거라 생각한 이자크가 에스텔라가 자는 사이 온실을 샅샅히 뒤지도록했다.
“모래사장 부근에 꽂혀있었습니다.”
자그마한 쪽지였다. 이자크가 쪽지를 건네받아 얼른 펼쳤다.
아이들을 해칠 생각이 없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이들은 무사할 거야.
물론 네가 훔쳐 간 것들은 들고 와야겠지. 또한 앞으로 너희들이 할 것들도 모두.
정갈한 필체였다.
너희들이 훔쳐 간 것을 들고 오라 했다. 올란도 후작의 짓인가. 그 멍청이가 사람을 납치해 위협할 정도로 약아빠졌던가. 아니. 그놈은 분명 열쇠가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그 중요성도 모를 놈이었다.
“…선대 후작이거나 피올라 쪽이겠군.”
피올라의 장녀는 꽤나 똑똑하다 소문나 있었으니까. 장부 금고 열쇠가 사라진 걸 알게 되었을 때 아마 오르테즈 남매들과 연관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자가 버트랜드를 찾아갔을까?
장부 금고 열쇠를 잃어버리면 저들도 불리한 건 마찬가지니까 책임을 돌릴 다른 뭔가가 필요했겠지.
이자크가 손에 쥔 쪽지를 와그작 구겼다.
엄마와 아빠를 찾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을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은 건드려선 안 됐다.
*
무료한 아침이었다. 벤자민의 장례식 이후 버트랜드는 많이 무료해졌다. 그토록 증오하던 이가 갑작스럽게 죽어버렸다. 허무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켈리언을 찾아가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네가 그렇게 충성을 맹세했던 그 왕이 어떤 핏줄인지는 아느냐. 먼저 빼앗아간 건 그놈이다. 날 그런 혐오스러운 눈으로 봐도, 도둑놈은 내가 아니라 벤자민인 것이야.
무슨 말을 해도 켈리언은 동요하지 않았다.
“당신과 전하의 과거사 따위 제가 알 바 아니오.”
“앞으로 나흘 뒤면 너는 죽는다.”
켈리언은 처형일이 다가오든 말든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버트랜드를 봐도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두 눈을 꾹 감고 명상을 하듯 앉아있을 뿐이다.
“네놈은 이미 알고 있었지?”
“….”
“그래. 그때 엿들었다는 게 너라는 걸 알고 있었어.”
버트랜드가 낄낄대며 웃었다.
“공주에게 다 말했나?”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벤자민에게 하는 말을 엿들었던 게 네놈 아니야. 공주에게 다 말했나? 내가 제 아비를 독살하려던 진범이라고.”
“한때 당신도 좋은 사람이었던 적이 있겠지.”
“….”
“당신이 오로라 왕비님을, 감히 불경스러워 입에 담지도 못할 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소. 나 역시 전하의 명령을 들었으니 그 죗값을 치르는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불경스러워 입에 담지도 못해?”
버트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하가 첩의 자식이라는 건 이미 진즉에 알고 있었소. 그래서 그게 뭐. 안타깝지만 당신네 어머니는 권력 싸움에서 져버려 쫓겨난 것뿐이지. 전하가 당신의 자리였던 걸 뺏은 게 아니야. 원래부터 그 자리는 당신 게 아니었어.”
“….”
“오로라 님도 마찬가지야. 그분은 원래 당신 게 아니야. 왕비님께서 직접 전하를 고르신 거지. 당신은 탈락한 거야. 애초부터 그 자격이 없었던 거라고!”
“….”
“그거야말로 불경스러운 감정 아닌가? 당사자는 어떠한 이성적 감정이 손톱의 때만큼도 없는데, 당신은 원래 자신의 여자였어야 했다고 생각하니!”
켈리언이 껄껄 소리 내며 비웃었다.
버트랜드가 이를 부득 갈더니 이내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생각하나? 그럼 이제 네놈 가족들이 그 혀 때문에 죽을 거라는 것도 잘 알겠군.”
그의 말에 껄껄 웃던 켈리언이 뚝 웃음을 멈추고 조용히 버트랜드를 쳐다봤다. 어째서인지 두려움이 없는 눈동자였다. 버트랜드는 그 꼴이 재수 없어 이내 첨탑을 나와버렸다.
배알이 뒤틀렸다.
일개 주치의 따위도 저를 무시한다.
첨탑을 나오자마자 사람을 시켜 켈리언의 가족들을 당장에 끌고 오라 명령했다. 어디 시골구석에 직위를 몰수하고 처박아 뒀다는데, 데려오려면 한 삼 일 정도 걸릴 거란다. 상관없으니 데려오라 했다. 반항하면 죽여도 좋으니 대신 모가지를 따서 들고 오라 했다.
그는 격렬하게 분노했다. 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자신의 치부를 들켜 매우 분노했다.
벤자민. 죽어서도 나를 이렇게 욕보이는구나.
그 뻔뻔한 얼굴이 역겹다.
감히 오로라를 죽인 것들이, 이제 와 내게 분노할 자격도 없다 입을 털어?
그녀는 더 살 수 있었어. 약을 구하면 호전될 가능성도 있었다고. 그렇게나 오로라에게 사랑한다 입발린 소리를 하던 놈이, 빌빌대며 생명력을 잃어가는 오로라를 견디지 못하고 죽여버렸다. 약을 먹여 죽였잖아. 오로라는 살 수 있었는데!
버트랜드가 숨을 고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내 보좌관이 급히 달려왔다.
“전하. 올란도 후작 부인이 급히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돌려보내라.”
“매우 급한 일이라 합니다.”
“돌려보내라니까.”
“그게, 네메시스에 대한 정보랍니다.”
“…뭐?”
“오르테즈 남매랑 네메시스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매우 급한 일이라 합니다.”
버트랜드는 잠시 수염을 쓸어내리다 이내 후작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접실에서는 올란도 후작 부인이 긴장되는 듯 창가를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올란도 후작 부인이, 짐을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유가 있다던데.”
“엠버 피올라 올란도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언제 들어도 어울리지 않는 성씨들이야. 부인처럼 유능한 여인이 피올라 가문의 딸이라는 것도, 또 피올라 가문이 올란도의 성씨를 달고 있는 것도.”
“미천한 제 가문이 전하의 은덕을 받아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오르게 되었습니다.”
“해서. 오르테즈 남매와 네메시스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버트랜드의 말에 엠버가 숨을 살짝 들이마시며 긴장한 듯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제 남편 한스 올란도가, 장부 금고 열쇠를 도둑맞았습니다.”
버트랜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장부 금고 열쇠를 도둑맞아? 그 장부가 어떤 장부인지-”
“오르테즈 남매가 훔쳐 간 것 같습니다.”
“…그저 분실해놓고 처벌이 두려워 남 탓 하는 것이 아니고?”
“아닙니다, 전하. 오르테즈 남매는 정보사 사업을 열었습니다. 자신들이 알아낸 내용들을 종이에 적어 귀족들에게 돈을 받고 판다더군요. 지금 대대적으로 정산을 앞둔 이쯤에 도둑맞았습니다. 필시 오르테즈 남매의 짓일 겁니다.”
버트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멍청한 아들 놈에게 열쇠들을 쥐여주지 말라 그리 얘기했건만. 이제 올란도 가문을 버릴 때가 된 것일까. 만일 그 장부가 세상에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꽤나 시끄러워질 것이다.
“오르테즈 남매를 한동안 감시했습니다.”
엠버가 독기 서린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 오르테즈 남매들. 반역을 꾀하는 것 같더군요. 누추한 오두막에 모여 뭔가 작당을 하더이다. 그렇게 숨어서 모의를 한다는 건 숨겨야 할만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 남매들, 네메시스의 후원을 받았다 하지요. 전하. 제 생각에 그 네메시스 역시 반역을 꾀하는데 일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천치가 사치재도 아닌 사업에 이리 큰돈을 쓴단 말입니까.
그 정보사, 정보들을 취재하여 커다란 종이에 실은 뒤 무료로 백성들에게 나눠 준다고 합니다. 분명 그놈들이 저희 장부 열쇠를 훔쳤을 겁니다.
장부를 퍼트리고 부풀려 저희 올란도 가문은 물론 전하까지 공격하려 들 셈인 겁니다.
엠버가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버트랜드의 흥미를 잡아내진 못한 것 같다.
결국 엠버가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네메시스가 공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전하?”
그제야 버트랜드의 시선이 엠버에게로 향했다.
“저도 최근에서야 알았습니다. 오르테즈 남매들을 한동안 감시했지요. 사람을 심어 그가 만나고 다닌 이들을 모두 확인했습니다. 변경의 저택에만 네 번을 가더라고요. 그놈들이 공주님이랑 만날 이유가 무어 있겠습니까?”
“그 이유만으로 네메시스가 공주다?”
이유를 들은 버트랜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사람을 매수했습니다. 그 저택에 노름 때문에 빚을 져 가족이랑 떨어져 지내는 한심한 시종 하나가 있더군요. 이미 공주님께서 몇 번이나 구제해주셨다가 포기하신 건지, 아니면 저도 더는 면목이 없어 말을 못 꺼낸 건지 몰라도, 돈을 준다 하니 술술 불더이다.”
“무엇을.”
“델라 랭, 오르테즈 남매, 그리고 이자크 경, 그리고 공주님 이렇게 넷이서 회의를 하는 날이 많다고요.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공주님과 이자크 경이 한동안 수많은 서류들을 훑어본다고 합니다.”
이자크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버트랜드는 엠버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이자크가 에스텔라에게 다 말한 건가. 언제부터. 에스텔라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에스텔라가 네메시스라고.
하지만 네메시스는 그 애가 어렸을 때부터 존재하던 이 아니었던가.
아. 애나그램.
네메시스(NEMESIS)의 철자를 재배열하면, 완벽한 철자가 맞지는 않아도 메시앙(MESIENS)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구원자. 그리고. 처벌자.
벤자민이 네메시스였던 건가.
귀족들의 사업을 적당한 선에서 누르고, 개입하기 위해 네메시스라는 존재를 만들어냈던 건가. 에스텔라가 그 이름을 물려받은 건가.
버트랜드가 허탈한 듯 웃음소리를 냈다.
에스텔라. 넌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실성한 듯 웃는 국왕의 모습에 올란도 후작 부인이 당황한 듯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한참 웃던 버트랜드가 말했다.
“그대가 뭘 바라는지 알겠네. 이만 돌아가 봐. 올란도 후작은 후작 부인에게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겠군. 떨어져 나갈 목을 아내의 지략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
“그런데, 엠버. 자네는 그저 올란도 후작 부인에서 만족할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나.”
버트랜드가 가만히 손짓했다. 엠버가 그의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버트랜드가 뭔가를 속삭였다. 엠버가 긴장되는 듯 제 입술을 깨물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루시와 루스는 평소처럼 온실 한곳에 비치된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었다. 미니어처로 만들어놓은 폭포수에서 조금씩 물을 길어와 모래에 물을 섞어 저들끼리 단단해지도록 두드렸다.
“이렇게 만들면 왕궁이 댄다.”
“우와. 루스 잘 만드네. 나는 자꾸 무너진다?”
“그거느은, 루시가 너무 세게 토닥토닥해서 그런 거야. 이렇게, 이렇게 아가 만지듯이 해야지이.”
“아가랑 놀고시퍼.”
“…나두.”
둘이서 잘 놀다가 또 갑자기 시무룩해진다.
“엄마랑 아빠 너무 바빠. 우리 오늘 꽃노리 가야대는데. 가서 번나무 보기로 해짜나.”
“그래두 좀만 기다리면 갈거야 루시. 좀만 참자.”
“치.”
한참 재밌게 놀고 있는데 누군가 온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가씨! 도련님!”
“어. 마구간지기 필립-”
“예. 맞아요. 필립입니다요.”
“여긴 왜 와써?”
“공주님이랑 이자크님이 아가씨랑 도련님 찾으세요.”
마구간지기 필립이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자 루시와 루스가 벌떡 일어났다.
“가야지!”
“어어, 잠시만요! 저랑 같이가요. 공주님이 꼭 저랑 같이 오라고 하셨거든요. 지금 두 분 다 밖에 계세요.”
“구래?”
“아까 공주님이랑 이자크 님께서 두 분 주시려고 선물 숨겨놓은 거 제가 봤는데, 저희 몰래 찾으러 나가볼래요?”
“턴무우울?!”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이게 방법이라는 걸 깨달은 마구간지기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주변에 다른 이는 없는지 둘러봤다.
쌍둥이들은 의심 않고 필립의 손을 잡은 채로 온실 밖에 나갔다.
뒤뜰에 숨기는 거 제가 봤어요.
순진한 아이들을 꾀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루시와 루스는 마구간지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이 집에서 일했던 이였으니까. 이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
낯선 이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잘 아는 이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뒤뜰에 나가 여기저기 화환과 분수대 쪽을 뒤졌다.
“선물 없는데?”
“필립 거짓말쟁이야.”
“아니에요, 잘 찾아보셔요. 저도 찾는 중이에요.”
그때 누군가 분수대 쪽을 뒤지던 루시 앞에 나타났다. 연노랑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이걸 찾는 건가?”
예쁘게 포장된 포쉐린 인형.
“와! 새 인형이다! 근데 아줌마는 누구세요?”
“어머. 루시, 아줌마 기억 못 하니? 저번에 왕궁 연회 때 봤었잖아.”
“음… 어….”
“아줌마 서운하네. 아이 슬퍼라. 루시가 기억해줄 줄 알았는데.”
여자가 눈물 흘리는 척 훌쩍대며 손수건을 눈에 가져다 댔다. 루시가 당황했다.
“나는 루시 주려고 이렇게 선물도 찾아놨는데.”
“어, 어 기억났어요!”
“그래 기억났어? 루스도 아줌마 기억해?”
루스 역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 적이 있긴 하다. 친하진 않지만.
“아줌마는 너희 엄마랑 친구야. 저번에 연회 때 같이 대화하는 거 봤지?”
“네.”
“엄마랑 아빠가 너무 바빠서 빨리 꽃구경도 못 가고 속상하겠네.”
“네. 빨리 가고 싶어요.”
“그럼 엄마랑 아빠 일 끝날 때까지 우리 같이 놀고 있을까? 아줌마가 너희 주려고 쿠키도 구워왔어.”
“쿠키요? 초코 쿠키예요?”
“그럼. 초코 쿠키지. 아줌마는 너희 엄마 아빠랑 엄청 친해서 루시랑 루스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알고 있거든. 쿠키를 엄청 많이 구워 와서 저기 마차 안에서 먹어야 하는데, 먹으러 갈래?”
“네-!”
엠버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조금 떨어진 마차로 향했다. 아이들은 쿠키를 먹으면서 새 인형을 가지고 놀 생각에 들뜬 듯했다.
마차 안에는 귀여운 모양의 쿠키들이 바구니에 잔뜩 담겨 있었다. 엠버는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대하며 쿠키를 하나씩 쥐여준 뒤 우유까지 컵에 따라줬다.
루시와 루스는 배가 볼록해질 정도로 쿠키를 마구 먹었다.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아이들에게 쿠키를 많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루시와 루스는 이렇게 산처럼 쌓여있는 쿠키의 모습에 신기한 듯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그리고 푹 잠이 들었다.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이었다.
엠버는 쿠키와 우유에 아주 조금의 수면제를 탔다. 어린아이들인지라 조금만 약을 타도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마차에 올라타 나가려는데 주변을 살피던 필립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저, 근데, 부인, 정말로 도련님이랑 아가씨가 위험하지는 않은 거죠?”
“그렇대도 그러네.”
“하, 하지만 공주님이랑 이자크 님이 정말로 걱정하실 텐데… 만약에 사고라도 나면….”
“필립. 돈이나 받아. 자네도 이제 공범이야. 아이들은 내가 아주 잘 데리고 있다가 원하는 것만 돌려받으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보내준다니까?”
“….”
“어쩔 수 없잖니. 나와 내 남편 태중의 아이에게 매우 중요한 열쇠를, 네 주인들이 훔쳐갔는데.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란다? 애들 죽이는 짓 같은 거 절대 할 생각도 없어. 나도 이제 애 엄마 되는데 내가 어떻게 애들한테 손을 대겠니. 날 설마 그 정도로 최악의 인간으로 보는 게냐? 네 놈이 감히?”
“어우, 그, 그럴 리가요, 부인! 아닙니다! 부인께서 그럴 분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그럼 처신 잘해. 그 쪽지 잘 남기고.”
“예.”
“일이 무탈하게 끝나면 자네의 모든 빚을 대신 갚아주마.”
그렇게 말한 뒤 엠버가 마차 문을 닫았다. 얼마 안 있어 바로 마차가 출발했다. 아이들은 엠버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었다.
잠든 쌍둥이의 금발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엠버는 자신이 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버트랜드가 약속한 것을 받아낼 수만 있다면.
어차피 얘네를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먼저 훔쳐 갔던 걸 돌려주기만 하면 나 역시 아이들을 무사히 보내줄 거니까.
설마, 아무리 버트랜드에 대한 복수가 중요하다 해도 제 아이들의 생명과 맞바꾸겠어?
그 어떤 부모가 그러겠냐고.
가서 쌍둥이를 납치해오게. 빼앗긴 열쇠를 받아오고.
그들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알아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자네는 그럼 반란군을 저지하게 되는 거야. 공신이 되는 거지. 후에 트라비아에 흡수되면 자네에게도 작위를 보장합세.
원한다면 이혼도 시켜주지. 그 멍청한 남편을 혐오하는 건 내 그 눈빛을 봤을 때부터 아니까. 배 속의 아이도 다른 남자의 애지? 한스 올란도가 고자라는 건 내 이미 알고 있네.
버트랜드는 엠버에게 협상을 했다.
공주의 아이들을 납치해 장부 열쇠는 물론 그들이 뭘 할지에 대한 증거 서류들을 가져오면 남편 몰래 외도한 것도, 다른 씨를 벤 것도 눈감아주며 오히려 이혼도 시켜주고 새 작위까지 보장해준단다.
엠버로서는 마다할 이유 없었다.
딱히 인간으로서 저지르지 말아야 할 큰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버트랜드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회유책과 강경책을 같이 쓰는 것 아닌가. 그저, 협상인 것이다.
그러니까 죄책감 갖지 말자.
엠버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
에스텔라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그게 꿈이었던가? 아이들이 사라진 것이 꿈이었던건가? 에스텔라가 얼른 주변을 둘러봤다.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 잠들어있다. 에스텔라가 몸을 일으키자 이자크 역시 잠에서 깬 듯 고개를 들었다.
에스텔라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아이들이 사라지는 악몽을 꿨는데. 그게 진짠지 아닌지를 모르겠어요. 이자크.”
이자크의 눈빛이 애처롭게 변했다. 에스텔라의 손을 다시 한번 꽉 잡으며 이자크가 말했다.
“꿈 아니에요, 에스텔라.”
“….”
아주 미약하게나마 붙들고 있던 희망이 사라졌다. 에스텔라의 표정은 다시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변했다. 간신히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무너져내렸다.
“…버트랜드가 확실한 거예요?”
이자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란도 후작가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훔쳐 간 열쇠를 가져오라더군요. 그리고 오르테즈 남매들과 하는 사업도 눈치챈 것 같고요.”
“올란도 후작가도, 가담했다는 거예요?”
이자크가 가만히 에스텔라에게 쪽지를 건넸다.
그건 엠버가 사라진 뒤 필립이 몰래 아이들이 놀던 모래사장에 꽂아둔 쪽지였다. 열쇠는 물론 사업 관련 서류들과 반란군의 명단까지 가져오라는 내용. 에스텔라가 분노하며 쪽지를 쫙쫙 찢어발겼다. 그로도 모자란 건지 아아아악!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내가 아이들과 이자크를 지켜내기 위해 무슨 짓들을 해왔는데, 이제 겨우 그 평화 좀 누려보자 하는데, 감히 내 아이들을 납치해갔단 말이지!
감히 내 아이들을!
에스텔라의 절규를 들은 아르텔과 유모 모두들 방 앞에 모여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저택을 한번 갈아엎듯이 뒤져봤지만 쌍둥이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 아가씨랑 도련님 어떡해.
유모는 눈물을 터트렸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아가씨랑 도련님을 잘 지켜보고 있어야했는데. 그러자 미엘라 역시 아니에요, 제 탓이에요, 하며 서로 제 탓이라 울기 시작했다.
아르텔 역시 착잡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제 능력이라도 사용하여 아가씨와 도련님을 다시 이곳에 안전히 데려오고 싶다. 하지만 망할 메라의 규칙 때문에 인외의 존재라 한들 아르텔과 델라 랭 모두 마음껏 능력을 쓸 수 없는 것이다.
젠장. 이럴거면 도대체 왜 우리를 조력자로 두는 건데? 우리의 존재가 대체 뭔데?
함부로 발설도 못 해.
인외의 능력을 가졌다 한들 그걸 마음대로 사용도 못 해.
그저 에스텔라가 몇 번이나 회귀 하여 기억을 잃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만 볼 수밖에 없다.
답답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만일 이번에도 쌍둥이가 죽어버린다면, 에스텔라는 정말로 미쳐버릴지 모른다. 아니, 미쳐버릴 것이 확실하다. 또다시 회귀를 선택하든 그렇지 않든, 에스텔라는 이번에야말로 분명 무너질 것이다.
다들 하나같이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만 떨구고 있는데, 구석에서 불안한 듯 손톱을 틱틱 깨물며 유독 이리저리 두리번대며 눈치를 보는 이가 있었다. 아르텔이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마구간지기 필립이었다.
그는 자신을 자책하는 듯 소리죽여 탄식했다. 그러면서도 남의 눈치를 살핀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자책하긴 했지만, 그는 뭔가 좀 더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자책도 자책이지만, 마치 뭔가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이자크가 방에서 나와 다들 이만 할 일 하라며 무리를 해산했다.
사용인들이 다들 한숨을 내쉬며 제 위치로 갔다.
마구간지기도 다른 이들과 함께 은근슬쩍 가려는데 누군가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엄청나게 센 힘으로 잡아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평소 유하게 미소짓던 집사 할아범이었다.
“집사님…?”
항상 유하게 웃는 얼굴이던 베이먼의 얼굴이 무섭게 저를 쳐다본다. 마구간지기가 왜 그러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잠깐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예? 예….”
뭔가 쎄한 분위기에 마구간지기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앞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마구간지기가 베이먼에게 끌려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에스텔라는 몸져누웠다. 안 그래도 태중의 아이가 체력과 양분을 야금야금 제 것으로 만들고 있는데, 거기에 아이들이 납치되었다는 충격적인 말까지 들으니 몸져누울 수밖에 없었다.
이자크의 손을 잡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리곤 들어왔다.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던 집사였다. 잔뜩 성난 모습의 집사는 처음인지 이자크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집사는 넝마가 된 뭔가를 방에 끌고 들어왔다.
“아르텔, 이게 무슨-”
에스텔라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러자 아르텔이 마구간지기를 매서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한 짓을 모조리 고해라. 이 한심한 인간말종아.”
“…히익, 그, 그게-”
이자크 역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아르텔에게 물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저놈이 제가 한 짓을 모조리 다 말하게 해야 합니다. 빨리 말 안 해?!”
아르텔의 호통 소리에 마구간지기가 결국 눈물 콧물 펑펑 쏟으며 제 죄를 고하기 시작했다. 노름에 빚을 져 아내와 자식은 외가로 가버려 만나주지도 않는 데다가, 빚쟁이들이 찾아와 돈 안 갚으면 죽여버린다 하더라, 급한 마음에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는데, 글쎄 이자가 날이 갈수록 두 배 세 배 붙어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근데 자신이 빌린 대금업체를 소유한 여자가 찾아와 자신을 도와주면 빚을 모두 없애준다 하지 않던가. 마구간지기가 죄송하다며, 정말 그때 머리가 어떻게 돌아버린 것 같았다며 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기 시작했다.
“올란도 후작 부인이, 아이들은 절대 안 건드릴 거라 했습니다. 정말로 손 하나 안 댈 거라고 해서 제가, 그럼, 그럼 괜찮지 않을까 해서… 살려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에스텔라가 이마에 손을 짚고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이자크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손짓을 했고, 아르텔이 살려달라 비는 남자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엠버. 그 여자가….”
앓는 소리를 내던 에스텔라가 이를 부득 갈며 엠버의 이름을 곱씹었다. 마치 그 여자를 입속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버릴 것처럼 살기 들어간 목소리였다.
“…버트랜드가 사주한 거면, 어째서 엠버에게 직접 하라고 사주를 했을까요. 뭔가 이상해요. 그저 일꾼을 시켜서 해도 될 일을 왜 엠버까지 끌어들여서.”
에스텔라는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일모레까지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이자크. 아이들이 만약에 사고라도 나면, 그 여자가 죽일 생각이 없었다 해도 만약 아이들이 죽게 되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요, 에스텔라.”
“다시 시간을 되돌릴 거야. 그렇게 되면.”
“에스텔라. 아르텔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이상 반복되면 당신도 위험해. 그런 생각 마요. 아이들은 무사히 돌아올 거고, 당신이 그 지옥 같은 짓을 반복하게 두지 않을 거니까.”
“자꾸만 최악의 상황이 상상돼요.”
“에스텔라.”
“…그치만 내가 이렇게 약해져서는 안 되는 거겠지. 아이들은 나랑 당신을 엄청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에스텔라가 코를 훌쩍이며 애써 미소짓는다. 슬픔과 절망,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눈빛이 요요하게 바뀌었다.
“…내 새끼 내가 지켜야지. 그쵸. 그러니까. 나는 그것들을 최대한 밟아버리겠어.”
*
아이들이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 쌍둥이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에 급히 귀족회의가 열렸다. 주최자는 에스텔라다. 에스텔라는 어젯밤 귀족회의의 일원들에게 급히 서신을 적어 보냈다. 밤새 말을 달려 각 저택에 전달한 덕에 귀족회의는 제시간에 열릴 수 있었다.
“모두들 급히 와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밤사이 수척해진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부축을 받으며 회의실에 들어왔다. 귀족회의가 열리는 곳은 메시앙 왕궁의 회의실이다. 버트랜드 역시 귀족회의가 열렸다는 소식에 아마 큰 관심을 보일 것이다.
올란도 가, 피올라 가, 키에프 가의 세 가문이 버트랜드의 수족이라 불리는 가문이다. 이 가문들을 따르는 세 가문과, 선대 왕 때만 해도 최상위 기득권이었던 나머지 네 개의 가문은 버트랜드의 집권 이후 배척당하거나 쇠약해져 한 차례 귀족회의의 전반적인 위치가 뒤엎어졌다.
에스텔라는 퀭한 눈으로 귀족회의에 모인 각 가문의 수장들을 한번씩 훑어봤다.
올란도 후작은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꾸벅꾸벅 졸고 자빠졌다. 그의 뒤에 서 있던 후작의 보좌관이 가주님, 하며 슬쩍 툭 치니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제 턱에 흐르는 침을 닦았다.
저렇게 멍청한 놈이 먼저 왕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의장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에스텔라의 표정을 살피고 무슨 계획으로 이 회의를 열었는지에 대해 관찰하기보다는, 졸려 죽겠는데 아침부터 왜 부르고 난리냐, 의 불퉁한 표정이었다.
이자크의 말대로 올란도 후작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 아내가 버트랜드를 찾아간 게 확실하다.
‘에스텔라. 아마 올란도 후작은 제 아내가 벌인 짓에 대해 모를 겁니다.’
‘엠버 혼자 일을 벌였다는 건가요?’
‘열쇠가 사라진 걸 알아챈 후작 부인이 면책을 받기 위해 오르테즈 남매를 들먹였을 겁니다. 어쩌면 이미 감시를 붙여 그들이 우리와 연락한다는 것도 알아냈을 수도 있고요. 만일 감시를 붙였었다면 저희랑 만나는 것도 알았을 겁니다.’
에스텔라는 유리 창문 너머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자크와 눈을 마주쳤다.
‘귀족회의에서 후계권을 다시 얻어올 생각이라 하십시오. 아마 귀족들 대부분은 별생각 없을 겁니다. 아직 버트랜드가 트라비아에 나라를 팔아버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을 테니까요.’
버트랜드가 트라비아에 주권은 물론 귀족들 소유의 땅덩어리들까지 야금야금 팔아치우고 있는 걸 아는 이는 매우 적다. 선대 올란도 가주와 올란도 후작, 피올라 남작과 키에프 백작. 버트랜드가 나라를 모조리 팔아치우기 전까지 고리대금업과 사업을 바짝 당겨서 한 뒤 아마 다들 트라비아에 들러붙을 것이다.
나머지 귀족들 중 그들과 친하게 지내려는 이들 몇몇은 슬슬 낌새를 눈치채는 것 같으나, 아직 자신들의 재산에도 손을 대려 한다는 건 모르고 있는 듯하다.
“자녀분들이 납치를 당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이십니까, 공주님? 정말로 납치당하신 겁니까?”
가주 중 하나가 물었다. 에스텔라가 숨을 들이쉬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어제 저녁, 제 아이들이 납치되었습니다. 범인은 이런 쪽지를 남겼더군요.”
에스텔라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테이블 정 중앙에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