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며칠 뒤, 아침부터 새벽 비가 추적추적 내려 온 세상이 어둡고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한 날이었다.
변경백 저택에 새벽부터 급히 전보병이 들어왔다. 왕실 깃발을 든 전보병이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저택 마당에 멈춰 섰다. 마침 중정을 지나가던 유모가 전보병이 건넨 편지를 받았다.
유모는 급히 부부 침실로 올라갔다. 다급하게 문 앞에 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들어오라는 이자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모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에서 막 깬 듯 에스텔라가 눈을 비비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유모? 이 아침부터-”
“공주님. 왕궁에서 전보가 왔습니다.”
불안한 눈빛으로 에스텔라에게 전보를 전한 유모가 편지를 읽는 에스텔라의 눈치를 살폈다.
“…급히 채비를 해야겠구나.”
에스테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에스텔라가 건네준 전보를 읽은 이자크 역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모가 에스텔라를 불렀다.
“공주님. 설마.”
“…유모도 갈 준비해. 유모는 그럴 자격 있으니까. 하지만 아이들은 데려가지 않을 거야.”
유모는 에스텔라의 말이 뭘 뜻하는 건지 알았다.
벤자민 데 메시앙. 선왕이 타계했다.
*
“유감이구나, 에스텔라.”
창백한 선왕 벤자민의 시신을 앞에 둔 에스텔라에게 버트랜드가 한 말이었다.
“….”
“그 주치의가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어제 네가 네 주치의까지 데려왔는데 이런 일이 생겨 정말 유감스럽다.”
어제 에스텔라는 아버지의 호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자신의 전담 주치의 리먼과 함께 왕궁에 왔었다. 이국의 독특한 의술까지 배워왔다던 이이기에 뭔가 다른 방법을 알지 않을까 싶었지만, 비쩍 마른 환자에게 길고 뾰족한 침을 여러 개 놓는 것 말고는 달리 하는 일이 없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의술을 하는 이를 데려올 정도로 에스텔라 공주가 절박한 건가, 안타까워했던 대신들은 오늘 아침 차갑게 식어버린 벤자민의 시신을 발견했고, 급하게 에스텔라에게 전보를 넣었다.
벤자민은 살해당했다.
그의 충신이자 주치의였던 켈리언에게.
에스텔라가 지친 눈으로 버트랜드에게 물었다.
“…그자는 어찌 되었습니까.”
“곧장 체포하여 가두긴 했다. 아무리 형님의 유서에 특권을 부여한다 적혀 있어도, 에스텔라. 네가 원하면 처형시키마.”
“….”
“에스텔라야….”
“아버지는, 계속 어머니를 그리워하셨어요.”
“…”
“그러니까. 지금쯤 어머니를 만나셨을 거예요. 주치의에 대한 처벌은, 아버지의 장례 이후에 다시 얘기하죠, 대부님.”
“그래.”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
“알았다. 나가 있으마. 천천히 나와도 된단다.”
버트랜드가 에스텔라의 어깨를 다독이며 방을 나갔다.
오늘 아침 에스텔라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대로 급히 마차를 타고 왕궁에 올라왔다.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다. 에스텔라는 잠시 아버지의 시신을 쳐다보다 이내 여전히 흐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온갖 향내 그득하면 별궁에 생소한 향내가 퍼졌다. 아마 시체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피운 것일 거다. 아버지가 누워계시던 방에는 이미 버트랜드와 대신들이 도착해 있었다.
에스텔라와 이자크, 그리고 함께 따라온 유모까지.
버트랜드가 몸을 비키며 시신을 확인하라 말했다. 에스텔라가 천천히 아버지의 시신 앞으로 갔다. 대신들은 휘청대는 공주의 모습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말, 정말 돌아가신 게 확실합니까?”
“확실하단다. 맥박도 뛰지 않고 숨도 쉬지 않아.”
에스텔라가 선왕의 몸을 덮고 있는 흰 천을 잡아 내렸다.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 모습은 시신이 맞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말 돌아가셨네요.”
에스텔라는 허탈하게 말했다. 뒤에서 유모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텔라가 다시 몸을 휘청이자 이자크가 얼른 에스텔라를 부축했다.
“모두 나가 주세요.”
에스텔라가 말했다. 공주의 말에 다른 대신들과 이자크, 유모는 모두 별궁 밖으로 나갔다. 버트랜드는 끝까지 에스텔라 옆에 남아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
“어쩌다 돌아가신 거죠?”
“형님의 주치의가 유언을 따르겠다며 독약을 주사한 것 같구나.”
“…아버지의 유언이요?”
“유감이구나, 에스텔라.”
버트랜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에스텔라는 그의 말에 진심이 담겼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에스텔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혼자 있고 싶다 말했다.
딸이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라 생각하는 건지 버트랜드는 천천히 나오라며 방을 나섰다.
*
회의가 열렸다. 에스텔라가 대신들과의 회의에 참석한 것은 매우 오랜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마치 평소에도 그래왔다는 듯 자연스레 상석에 앉으며 공주로서의 위엄을 뽐냈다.
맨 처음은 주치의 캘리언의 처벌에 대한 것이었다.
선왕의 유서에 따르면 켈리언에게는 면책의 특권이 있다. 선왕의 유언을 그대로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왕의 명령을 어긴 것도 마찬가지이기에 대신들은 그를 처형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에스텔라가 물었다.
“유언의 효력은 유언장을 쓴 후 4년입니다. 4년 주기로 국왕과 왕권 후계자가 유서를 고쳐 써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고요. 주치의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른 것은 맞으며 그에 따른 면책이 가능하긴 하나, 그건 어디까지 3년 전에 행했을 때의 일입니다. 또한 제 주치의 리먼의 말대로라면 아버지는 살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해외로 추방시키고, 그는 처형하세요.”
냉담한 얼굴의 에스텔라의 모습에 대신들은 별다른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버트랜드는 자신 역시 그에 동의한다며 옳다구나 그 말을 집어 들었다.
버트랜드에게 있어 켈리언이 처형당하는 것은 반길 일이다. 만일 에스텔라가 디에스 가문을 재조사한 것처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재조사해야 한다 말했더라면 골치 아파졌을 것이다.
그래. 태중에 아이도 있으니 너무 파고들지 말거라.
“에스텔라의 말대로 그리하는 것이 좋겠군. 주치의 처형은 일주일 뒤에 하지. 그 가족들은 켈리언 처형 이후에 추방시키도록 하고.”
버트랜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다음은 국왕의 시신을 어디에 안치를 할지에 대한 논의였다. 당연히 역대 선왕들을 모셔놓은 곳에 모셔야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에스텔라가 반대했다.
“어머니의 무덤 옆에 안치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버트랜드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건 메시앙의 율법에 맞지 않단다. 왕비들은 왕비들의 묘가 따로 있고 선왕들은 선왕의 묘가 따로 있어.”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따로 묘지를 세우셨잖아요. 거기에 안치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에스텔라는 조용히 어머니의 장례식날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는 듯 숙연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신들 역시 하나둘 그냥 공주님 의견에 따릅시다, 하며 안타까운 눈초리를 보였다.
결국 에스텔라의 결정에 따라 선왕 벤자민의 관은 오로라 왕비의 묘지 옆에 안치하기로 했다. 두 번째 안건이 나왔다.
“하면, 선왕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아니요.”
“하지만, 공주님-”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는 소수 인원으로만 할 것입니다.”
장례식을 크게 치루려 했으나 에스텔라가 반대했다.
“에테리아의 병사들이 변경에 자주 나타난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는 시국입니다. 이 시국에 선왕이 결국 죽었다는 소리까지 들으면 분명 어떠한 식으로든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합니다.”
“해도, 선왕에 대한 예우는 갖춰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형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셨는지 많은 이들에게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도록-”
“진정 어진 왕이라는 것은 자신의 장례가 얼마나 성대하게 치러지는지가 아닌 자신의 죽음 이후에 혼란에 빠질 백성들을 더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분명 저와 같은 뜻일 겁니다. 장례는 제가 주선하여 최대한 빠르고 협소하게 치르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요, 대부님.”
단호한 어조에 결국 버트랜드가 그리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스텔라가 한 가지 더 요청했다.
“장례식 전까지 저택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싶습니다. 그동안 제가 모시지 못해 많이 죄스러웠으니….”
버트랜드는 소름 끼치도록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리하라 말했다.
회의가 끝나고 회의실에서 나오는 대신들은 저들끼리 공주에게 의외의 모습이 있었다며 입을 모아 말했다.
공주가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건가?
원래도 똑똑하셨던 분이긴 했지만, 이자크 경이랑 결혼 뒤에 완전히 향락에 빠지셨었잖나.
선왕의 죽음으로 뭔가 느끼시긴 한 건가….
솔직히 에테리아까지 생각하신 건 놀라긴 했습니다.
후계권에 관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하께서는 공주님께 다시 왕위를 물려주실 생각이신가?
자네도 참, 몰라서 묻나. 트라비아랑-
쉿. 다른 이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버트랜드의 측근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살피며 먼저 앞서나가고 있는 에스텔라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때 원로 대신이 천천히 그들을 지나치며 말했다.
“공주님께서는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 나신 분이지.”
“원로대신!”
“자칫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발언입니다.”
다른 대신들이 말리든 말든 원로대신은 개의치 않으며 이자크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는 에스텔라의 모습을 지켜봤다.
원로대신은 선왕 벤자민때부터 모든 대신들을 통솔하는 이였다. 열일곱에 대신이 되어 초로가 넘는 긴 시간 동안 원로대신은 세 명의 왕을 모셨다.
버트랜드는 국왕으로서의 자질이 없다. 하지만 원로 대신으로서 그를 보필하는 이유는, 버트랜드가 공주 에스텔라로부터 정당하게 일임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국정을 대신 보는 그라면, 버트랜드가 진즉부터 에테리아의 남하를 일부러 돋구고, 트라비아 왕국에 주권을 팔아넘기려는 것을 알아챌 수밖에 없다.
다른 대신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하나.
세력이 매우 약해서.
제 목숨을 가망 없는 이 나라에 내놓을 수는 없으니까.
버트랜드는 국왕으로서의 자질은 없으나 영특하다 못해 영악한 인간이었다. 두고 보면 누가 자신에게 해가 될 사람인지 귀신같이 판별해냈다.
자신과 상극인 가문들을 디에스 가문을 몰락시킬 때 줄줄이 엮어 파문시켜버렸다. 그러니 자연스레 남는 이들은 머리를 조아리거나, 혹은 몸집을 잔뜩 웅크려 숨기고 있는 이들뿐.
‘공주님께서 다시 후계권을 얻어내시기만 하셔도….’
하지만 초로의 원로 대신은 괜한 기대 말자며 고개를 내저었다.
회의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장한 기사들이 어깨에 선왕의 관을 들고 마차 앞으로 왔다.
화려한 은장식 된 관 마차 안에 관을 넣었다. 버트랜드는 뚜껑을 닫기 전 관 안에 차분히 누워있는 벤자민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 뒤로 왕이 죽을 때 같이 묻을 보석함과 궤짝들이 줄줄이 운구 마차 안에 들어갔다.
그러자 운구를 했던 기사 중 하나가 다가와 에스텔라에게 말했다.
“공주님. 비가 많이 와서 지반이 많이 약해졌을 겁니다. 운구 마차가 이 이상 무거워지면 절벽 부근을 지나다가 추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궤짝 몇 개는 공주님의 마차에 싣는 것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그리하도록 해라. 이자크와 유모는?”
“먼저 마차에 타 계십니다.”
에스텔라가 뒤돌아 버트랜드를 쳐다봤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대부님.”
“그래. 잘 가거라. 에스텔라. 너무 상심하지 말고.”
“네. 그럼요.”
이내 에스텔라 역시 마차 안에 올랐다. 이윽고 에스텔라 네의 마차가 먼저 출발하고 운구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버트랜드는 마차가 왕궁 정원을 지나 대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벌써 죽어버리다니.
버트랜드가 쯧 혀를 차며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대신들과 보좌관까지 모두 물린 버트랜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오거라.”
그의 말에 버트랜드의 모든 명령에 복종하며 살인까지 마다않는다는 그의 그림자가 슬며시 앞에 나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왕의 명령을 기다렸다.
“마차를 따라가라. 공주와 이자크가 달리 무슨 짓을 하려는지 확인하고.”
그는 대답 대신 복종을 뜻하는 목례를 하고 나서는 곧장 명령을 이행하러 나갔다.
버트랜드는 미간과 안와 부근을 꼬집듯 잡아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감았다가 뜨는 눈에 의심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벤자민이 죽었다.
믿지 않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제 주치의에게 재진단을 내렸다.
정말 죽었다.
버트랜드가 이를 부득 갈았다.
쉽게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나의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간 놈이, 이렇게 쉽게 죽는 것 따위 바라지 않았는데.
“형님은 언제나 운이 좋은 거 같습니다.”
오로라 왕비의 묘지에 같이 안치하자는 에스텔라의 말이 떠오른 듯 버트랜드가 손을 부들부들 떨다 이내 의자 팔걸이에 세게 내리쳤다.
정말로 운도 좋지.
아니. 정말로 뻔뻔도 하지.
제가 죽인 여자 옆에 감히 누울 생각을 해?
오로라는 그때 살 수 있었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그런 그녀의 손을 먼저 놓은 건 네 놈인데. 어째서 네놈이 애처가와 로맨티스트로 포장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거지.
그저 죄책감에 오로라의 묘지를 따로 만든 것 아닌가?
오로라가 죽고 난 뒤 그 묘지 한번 찾아가지 않은 놈이,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그 옆에 누우려고 해.
다 빼앗아 간 놈이. 그래, 이제 와서 내가 뺏긴 것들 다시 되찾으려고 하는데. 나라를 위해 오로라까지 버린 놈이, 그렇게 아끼던 이 나라가 결국엔 어떤 꼴이 나는지까지 보고 죽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참으로 아쉽다.
정신은 또렷하나 손가락 하나 까닥 못 해 덜덜 떨기만 할 수 있는 그 꼬라지를 더 보고 싶었는데.
버트랜드는 마치 온몸에 독을 품은 사람처럼 독기와 살기를 잔뜩 뿜어냈다.
그는 에스텔라의 예상보다 더 선왕을 증오하고 혐오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보좌관이 급히 대문을 열고 중앙 홀로 뛰어왔다. 전하! 전하! 큰일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정신없게 소리치며 달려오는 보좌관의 모습에 버트랜드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전하, 허억, 허억-”
얼마나 달려온 것인지 숨이 턱끝까지 차 헉헉 대면서도 보좌관이 말을 이었다.
“전하. 큰일났습니다!”
“도대체 뭔데 이리 소란이야?”
“허억, 허억, 선왕의 관 마차가 산사태에 휩쓸려 아래로 추락했다 합니다!”
“뭐?”
“공주님이 타신 마차도 산사태에 휩쓸리셨습니다.”
“에스텔라도?!”
버트랜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람을 보내 구조하지 않고 뭘하는 것이냐! 다치진 않았다더냐?”
국왕의 말에 보좌관이 우물쭈물대며 말했다.
“지금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데다가, 다행히 저택 근처에서 봉변을 당하신 거라 왕궁 사람들보다 저택 인부들을 불러 구출하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변경에서 구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버트랜드가 창밖을 쳐다봤다.
정말로 비가 폭포처럼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 새벽부터 날씨가 우중충 했다. 에스텔라는 우스갯소리로 어머니가 울고 계신가 봐요. 이제 아버지도 함께시니 덜 외로우실 텐데. 울지 마시고 화창하게 반겨주시지. 라며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버트랜드가 다시 풀썩 자리에 앉았다.
보좌관은 국왕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나 선왕을 증오하던 사람이 그의 딸은 저리도 아끼는 이유가 뭘까. 선왕의 죽음에는 그냥 혀만 차던 이가 에스텔라 공주가 산사태에 휩쓸렸을지도 모른다 하니 저리 불안해하는 이유가 대체 뭐냔 말이다.
‘오로라 왕비를 어지간히도 사랑했나 보네. 공주가 아무리 왕비랑 똑 닮았다고는 해도 어찌 보면 결국엔 선왕의 딸인 것을.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
보좌관은 그리 생각했다.
그 이후로 버트랜드는 에스텔라가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계속해서 공주는 어찌 되었느냐 물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선왕의 마차가 뒤집혀 떨어진 것은 묻지 않았다.
구조된 운구 마차 마부가 와서 당시의 일들을 증언했다.
“공주님이 타신 마차는 무사했습니다. 운구 마차보다 훨씬 앞서 가셨었기 때문에 같이 휩쓸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운구 마차 위로 산사태가 쏟아졌고, 저는 다행히 마차가 흙에 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나무뿌리를 잡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 산사태 방지 작업을 하러 왔던 인부들이 절 구출해줬고요. 하지만 선왕의 관은 이미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그러니까 공주는 무사하단 말이지?”
“예. 전하.”
에스텔라가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버트랜드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보좌관이 그 이후 선왕의 장례식은 그럼 어찌할까요, 물었지만 버트랜드가 피곤하고 지친 얼굴로 대충 말했다.
“시신이 없으면 없는대로 장례를 치르거나 해야지 달리 방도가 있느냐.”
벤자민에 대한 유감은 없는 듯했다.
보좌관이 다시 한번 그의 눈치를 봤다. 국왕이 에스텔라 공주에게 가진 감정이란 대체 뭘까?
국왕의 보좌관은 버트랜드가 대공 지위였을 때부터 그의 비서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대공이었을 때 그가 공주와 제 친딸에게 대하는 모습도 모두 봤다. 버트랜드는 제 딸도 무척 아꼈으나 그보다 공주를 더 아꼈다. 한때 설마 버트랜드의 숨겨진 딸이 에스텔라 공주였던 건가, 하는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확실히 아니었다.
공주를 구하려다 다리 한쪽이 불구가 된 사람이다. 제 친딸이 열병에 걸렸을 땐 공주 생일파티에 간 사람이다.
보좌관은 국왕이 공주 에스텔라에게 가진 감정이란 애증이라 생각했다.
오로라를 꼭 닮은 딸이라 그녀를 볼 때마다 오로라가 떠올라 애처롭고 안타깝고 자꾸만 눈에 밟히지만, 그녀는 그토록 증오하는 벤자민의 딸이기도 했으니까.
“전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뭔데.”
“에스텔라 공주님께서 만일 모든 일을 알게 되시면 어찌하실 겁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진실은 언젠가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만일 공주님께서 모든 걸 아시게 되고 이자크 경과 뜻을 같이하실 생각이라면 어찌하실 겁니까?”
“주제 넘는 질문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저는 전하의 보좌관입니다. 그전에 대공의 비서이기도 했습니다. 그전에는 오로라 왕비전하의 친척이자 셋이 함께 놀던 친구이기도 했고요. 전하께 충성을 맹세한 자이니 전하의 결단을 듣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 옳다 생각했습니다.”
버트랜드는 가만히 보좌관을 쳐다보다 이내 답했다.
“에스텔라는 오로라의 딸이야. 오로라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애를 내가 직접 죽일 일은 없을 거다.”
버트랜드는 최대한 에스텔라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다. 오로라의 얼굴을 그대로 한 아이였으니까. 에스텔라가 울면 마치 오로라가 우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벤자민의 딸이니까.
그놈의 성정을 똑 닮아 고집 있고 강단 있기도 했으니까.
에스텔라는 버트랜드의 약점이기도 했으며 그가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많이 골치 아파지겠지. 에스텔라는, 최대한 아무것도 몰랐으면 해.”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공주로 영원히 남았으면 한다.
이제 셋째 아이까지 가졌으니 이자크도 당분간 허튼짓은 못할 것이다. 그 역시 가정을 생각하는 남자라면 이미 죽어버린 제 가족들의 복수보다 현재의 가족들을 지키는 것이 맞다는 걸, 그러기 위해서라면 버트랜드에게 반항하지 않는 것이 최고라는 걸 받아들일 것이다.
“자네 염려대로 공주가 모든 걸 알아버리는 날은 오지 않을 걸세. 이자크는 그 애를 매우 사랑하니까.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말하면 그 애가 미쳐버릴 거라는 걸 잘 알 테니까.”
버트랜드의 말을 들은 보좌관은 그저 그의 눈치를 살피다 방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버트랜드가 저렇게 변했던 걸까. 자신의 입양 사실을 안 이후부터? 선왕 벤자민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로라가 그를 좋아한다 말했을 때부터?
지독한 자격지심과 피해망상,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한 집착과 증오.
버트랜드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더는 자신이 알던 그 시절의 버트랜드가 아니었다.
*
나흘 동안 비가 내렸다. 매년 겨울마다 메시앙을 찾아오는 장마 기간이었다.
물러진 땅은 몇 번이고 흐물어져 산사태가 반복되었고, 선왕의 마차는 밀려 나간 흙에 의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변경으로 가는 길목은 한동안 산사태로 길이 막혀 병사들이 며칠 동안 흙을 파내야 했다.
결국 선왕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절벽 아래로 내려갈 기술도 없을뿐더러 이미 너무 많은 흙들이 위에 떨어져 파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왕의 시신 수습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버트랜드는 에스텔라에게 정말 유감이라는 짧은 글을 보냈다. 에스텔라 역시 이 시국에 아버지의 시신을 무리하게 파내 인력 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며칠 뒤 겨울 장마가 끝나 겨우 하늘에 해가 반짝 떴을 때. 시신 없는 선왕의 장례식이 조촐하게 이뤄졌다.
시신이 없으니 빈 관 안에 선왕의 이름을 적어둔 위패를 올려놓고 장례를 치렀다. 장소는 오로라 왕비의 시신이 안치된 자그마한 궁에서 열렸다. 대신들과 고위 귀족 몇몇만이 이곳에 참석하여 왕을 추모했다. 에스텔라는 맨 앞줄에 앉아 왕의 안식을 기리는 성직자의 추도사를 가만히 들었다. 이자크와 손을 꼭 잡은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버트랜드는 그런 에스텔라를 쳐다보다 시선을 돌려 빈 관 옆에 놓인 흰색의 크고 화려한 관을 쳐다봤다. 저 안에는 오로라의 시신이 들어있다. 버트랜드는 어쩐지 그 관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빨리 이 멍청하고 한심한 장례가 끝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왕의 장례는 금방 끝났다. 귀족들은 에스텔라에게 심심찮은 위로의 말을 건넨 뒤 저들 마차에 올라탔다.
“에스텔라. 괜찮니?”
버트랜드가 물었다. 에스텔라는 애써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어머니 오로라 왕비의 관에 가 있었다.
“괜찮아요, 대부님.”
“…두 분 다 편히 쉬실 수 있을 거다.”
“네. 그럼요.”
“형님의 시신은 나중에라도 다시 찾아보자꾸나.”
“…불가능한 거 알고 있어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태중에 아이도 있는데 너무 상심하지 말고. 분명 좋은 곳으로 갔을 테니까.”
“네.”
그렇게 역사상 가장 짧고 조촐한 선왕의 장례식이 끝이 났다. 귀족들은 이미 7년 동안 반사 상태였던 선왕의 죽음이 그렇게까지 안타깝거나 유감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이미 진즉에 죽었어야 할 분이 이제야 가셨군. 그리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건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몇은 그 좋은 분이 이제야 안식을 얻었다며 안도하는 이도 있었다.
오로라 왕비의 무덤은 온통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작고 아담한 왕궁이었다. 12년에 걸쳐 만들어졌던 무덤이다.
평소 백성들을 사랑하던 어진 왕비였기에, 23년이 지난 지금도 백성들이 종종 꽃을 꺾어다 무덤 입구 쪽에 놓기도 했다.
선왕의 죽음을 들은 백성들 중 몇몇이 이미 꽃을 놓고 간 것인지 입구 쪽에 엉성한 꽃다발들이 놓여있었다. 에스텔라는 그 꽃을 들고선 마차 안에 올랐다. 버트랜드 역시 마지막으로 오로라 왕비의 무덤을 쳐다본 뒤 마차에 올랐다.
에스텔라는 꽃다발을 손에 들고 저택까지 향했다. 한참을 달려 변경의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마당에서 갓 태어난 병아리들과 놀고 있던 루시와 루스가 얼른 달려왔다. 농장에서 기르던 닭들의 알이 부화한 것인지 노란 병아리들이 루시와 루스를 졸졸 따라다닌다.
“엄마! 아빠! 얘네 봐, 노랗지이-”
“완전 보송보송해!”
삐약거리는 루시와 루스의 머리통을 한 번씩 쓰다듬으며 에스텔라가 말했다.
“그래. 엄청 노랗고 보송하네.”
“있잖아. 멜리사가 구랬는데, 얘네는 우리가 엄만 줄 안데.”
“그래?”
“웅! 얘네가 알을 이러케, 이러케 열심히 깨고 나와서 나랑 루스 먼저 봐서, 어, 어, 그래서 우리가 엄만 줄 안대!”
“그렇구나!”
“그럼 있짜나, 만약에 아가가 먼저 나와서 나랑 루스 보며언- 어, 우리가 엄만 줄 알아?”
꽤나 일리 있는 질문에 에스텔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가가 헷갈리지 않게 루시랑 루스가 말 많이 걸어줘. 평소에 말 많이 걸어주고 이것저것 알려주면 아가가 태어났을 때 아, 루시랑 루스구나! 하고 알 테니까.”
“알아쩌! 아가한테 우리가 말 많이 걸어줄게!”
“우리 다 아니까 우리가 다 알려줄 거야!”
아이들이 신나서 말했다. 에스텔라는 그런 아이들에게 동생이 되게 기뻐하겠네, 하며 말해준 뒤 이자크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와 루스 역시 병아리들이 그러했듯 제 엄마와 아빠 뒤를 졸졸 따라갔다.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4층으로 올라갔다. 멜리사와 집사 베이먼이 따라 올라가려는 아이들을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안아 들곤 내려왔다.
계단을 올라가는 에스텔라의 얼굴에 근심걱정이 가득했다.
“에스텔라.”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어깨를 감싸며 이름을 불렀다.
“… 버트랜드가 제발 속아넘어가길 바래요.”
“속고도 남을 겁니다. 당신 연기는 완벽했으니까.”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굳어있던 에스텔라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를 따라 씩 웃으며 에스텔라가 말했다.
“나 아무래도 연기에 소질이 있나봐요, 이자크.”
*
4층에는 에스텔라의 주치의가 와 있었다. 간단하게 에스텔라를 진맥한 뒤 곧장 넓은 방으로 들어갔다.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침실, 그리고 아이들의 침실은 모두 3층에 있다. 원래 부부 침실이 4층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하는데 에스텔라가 쌍둥이들을 가졌을 때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 이자크가 4층의 모든 짐들을 3층으로 가져온 것이었다.
2층은 시녀와 유모, 집사가 지내며 별관과 1층에는 하녀와 시종들이 지낸다. 4층에는 그저 간간이 청소하러 올라가는 것뿐이었는데 최근 들어 변경의 하녀들이 4층을 자주 올라가게 되었다.
특히나 주치의 로먼이 이곳을 드나드는 일이 많아졌는데, 그건 에스텔라 때문만이 아니었다.
“마취향이 생각보다 강했기 때문에 해독하려면 꽤 긴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래도 해독을 하게 되면 몸을 움직이거나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에스텔라의 질문에 로먼이 확답은 어려운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그때가 돼야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워낙 오랜 시간 동안 향과 약에 중독되셨었기에 그 부작용이 어떻게 나타날지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일단 이번에 새 약을 가져와 봤으니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로먼이 그리 말하며 방 한가운데 위치한 커다란 캐노피 침대로 향했다. 청녹색 벨벳 커튼이 짙게 드리워진 캐노피였다. 주치의가 커튼을 걷으며 안에 누워있는 이의 진맥을 잡았다. 불안정하나 확실히 첫날보다는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에스텔라가 이자크와 함께 그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분명 손가락을 움직이셨었어. 한데 왜 지금은 다시 움직이시지 못하는 걸까.”
“그 순간 정말 온 힘을 다해 움직이셨던 걸지도 모르지요. 공주님, 너무 염려 마십시오. 마취향이라는 것은 언젠가 몸에서 다 해독이 되기 마련입니다. 빠른 시일 내로는 불가능할지어도, 몇 개월 정도 지나면 전하께서도 점점 차도가 눈에 띄실 겁니다.”
로먼의 말에 에스텔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자크에게 몸을 기댔다.
“엄마?”
“저 사람 누구야?”
아이들의 목소리에 이자크와 에스텔라가 얼른 뒤돌았다. 서로 손 잡고 방문 앞에 서 있던 루시와 루스는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는 삐쩍 마른 이를 보고 물었다.
“어머, 아가씨! 도련님! 언제 여기까지-”
루시와 루스를 찾아다니던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달려왔다. 이미 아이들에게 이곳을 들킨 이상 호기심 대마왕인 두 녀석들에게 벗어나기는 힘든 일이었다.
이자크가 방에서 나와 아이들을 안아 들며 말했다.
“루시와 루스의 할아버지야.”
“할아버지?”
“할아버지이? 우리 할아버지? 그러면 엄마의 아빠인 거야?”
“그래. 맞아.”
“할아버지 처음 보는데.”
“근데 왜 누워있어? 할아버지 아포?”
“지금은 좀 아프셔.”
“죽어써?”
“아니. 살아계셔.”
“루시랑 루스 알아?”
“모르실 거야.”
“그러면 가서 인사할래.”
루시와 루스의 말에 이자크가 곤란한 듯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아이들은 이해 못 할 상황이다. 오히려 무섭기만 할 것이다. 에스텔라와 눈을 마주친 이자크가 아이들에게 다음에 인사하자. 했지만 에스텔라의 똥고집 피를 물려받은 두 아이들이 이이잉- 지금, 지금 할 거야, 할아버지 아야 하니까 우리가 가서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해줘야지. 하며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결국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항복하고 말았다. 지금이 아니어도 당장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요 짓궂은 쌍둥이들이 몰래 이곳에 기어들어 와 단둘이서 확인하는 것보다 지금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결국 에스텔라가 들어오라 손짓했다. 쌍둥이들을 양팔에 안아 올린 이자크가 캐노피 가까이 다가갔다. 침대에 누워있는 이는 선왕 벤자민이었다. 오늘 아침 장례식을 치른 그 벤자민이 맞다. 심장이 멎어 죽음을 판정받은, 산사태에 관과 함께 휩쓸려간 그 벤자민.
루스는 삐쩍 마른 할아버지의 모습에 살짝 놀란 것인지 이자크의 옷가지를 꽉 잡아당기며 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루시는 할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
“할아버지 왤케 작아?”
마르다는 단어를 몰라 작다고 묻는다. 에스텔라가 루스를 달래려는 듯 그의 통통한 손등을 만지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못 드셔서 작아.”
“할아버지 얼마큼 아픈데?”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말도 못 해?”
“응.”
“그럼 아가가 태어나서 할아버지 보고 누군지 모르겠네?”
“…응?”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에스텔라가 루시를 쳐다보자 루시의 시선은 에스텔라의 아주 조금 볼록해진 배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는 할아부지 목소리 못 듣잖아. 그러면 누군지 모르지. 왜냐면 나랑 루스 맨날 말 걸어줄 거고, 유모도 집사두, 멜리사도 맨날맨날 내가 말해줘서 누군지 아는데에, 할아버지 목소리 모르잖아.”
요컨대, 유모나 집사의 목소리는 들어서 태중의 아이가 누군지 구별할 수 있지만,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 나중에 태어났을 때 누구인지 모를 거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루시가 말했다.
“그러면 엄마랑 할아부지랑 헷갈리면 안 대지. 왜냐면 엄마가 아가 낳고 아프니까 쉬어야 하잖아. 그럼 헷갈리지? 그럼 안대니까 나랑 루스가 할아버지라는 거 아가한테 알려줘야 해.”
그러면서 루시가 에스텔라의 배에 대고 말한다.
“아가야. 저 사람이 할아버지다? 보고 이찌?”
“루씨이, 아가가 무서워해.”
루스가 그러지 말라며 루시의 손을 잡아 끈다. 그러자 루시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야. 아가 안 무서워해. 아가도 보고 있어. 여기로 이렇게 해서 보고 있단말이야. 그러니까 할아버지인 거 알려줘야지!”
에스텔라가 신기한 듯 물었다.
“아가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
그러자 루시가 말했다.
“이렇게. 보고 있다. 나랑 루스도 예전에 이렇게, 보고 있었어.”
제 작은 양손을 마치 망원경 보듯이 모아 눈에 갖다 대며 말했다.
“예전에 본 적 이떠. 엄마가 엄청 큰 방에서 있었지? 나 기억나. 나 할아버지 본 적 이떠.”
아이들이 태중에 있었을 때 몇 번 찾아간 적은 있어도 태어난 이후 아이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루시가 말하는 것은 태중의 일인 것인가.
실제로 태중의 일을 기억하는지, 아니면 그냥 어린애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스텔라는 생긋 웃으며 루시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럼 루시가 아가한테 할아버지라고 잘 말해줘.”
“웅.”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이자크의 품에서 내려와 벤자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주치의 로먼은 겁내지 않는 루시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루시는 신기한 듯 벤자민을 쳐다봤다.
“이짜나, 할아버지 울었었따?”
“응?”
“내가 이러케 해서 봤을 때 할아버지 울었었어. 지금은 안 우네?”
루시가 그렇게 말하더니 벤자민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댄다.
“웅. 안 운대. 기쁘데. 금방 나을 거래.”
그러더니 루시가 히히 웃는다. 그러자 이자크의 품 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루스도 루시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할아버지 안 무셔?”
“안 무서워, 겁쟁이 루스야-”
“나 겁쟁이 아니야.”
“맞잖아.”
“아니야아 나도 아가한테 말해줄 거야아-”
루스 역시 이자크 품에서 내려와 벤자민에게 가까이 갔다. 루시만큼 대범하게 가까이 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주춤대면서 벤자민 쪽으로 갔다.
“할아버지 너무 작아. 맛있는 거 많이 먹어야겠다.”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다 한 말이 저거였다.
에스텔라는 이자크와 눈이 마주치더니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게. 할아버지 얼른 맛있는 거 많이 드셔야겠네. 빨리 기운차리시게.
아이들이 쫑알대는 것을 벤자민 역시 듣고 있을 것이다. 쌍둥이들 덕분에 침울하던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이자크가 아이들과 먼저 내려가고 주치의 역시 돌아갔다. 아버지와 단둘이 방에 있던 에스텔라가 벤자민에게 말했다.
“귀엽죠. 루시랑 루스는 처음 보실 텐데 놀라셨을지도 모르겠네. 둘 다 완전 저랑 이자크를 빼다 박았어요.”
“….”
“유모 말로는 루시는 완전 제 어릴 때랑 판박이래요. 엄청 왈가닥에 발랄하고. 그런데 루스는 누구 닮았는지 아세요? 이자크랑 똑같더라고요. 우는 얼굴이. 예전엔 누굴 닮아 저렇게 잘 우나, 했는데. 이자크가 우는 모습 보고 알 것 같더라고요.”
“….”
“아직 태명은 못 지었어요. 이자크는 더 안정기에 들어서면 그때 짓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루시랑 루스는 태명이 아가라고 생각해서 그냥 아가라고 계속 부를 것 같아요. 이름은 뭐로 지을지 생각해야겠어요.”
“….”
“…많이 답답하시죠. 조금만 더 견뎌주세요. 켈리언도 곧 빼올 거고, 리먼도 얼마나 실력 있는 주치의인데요.”
“….”
“그러니까. 보고 싶네요. 절 보면서 웃는 아버지 모습이.”
“….”
“어때요. 철 좀 들었나요, 저?”
“….”
“이자크 말로는 한참 멀었대요.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내일 또 올 테니 아버지도 그만 주무세요. 내일 봐요, 아빠.”
에스텔라가 벤자민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곤 방을 나왔다.
메시앙의 모든 사람들이 벤자민은 죽었다 생각할 것이다.
심장이 멎은 것을 버트랜드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한 데다가, 시신을 실었던 마차는 산사태에 떠밀려 저 절벽 아래로 떨어졌으니까.
하지만 벤자민의 심장을 잘 뛰고 있으며 그는 마차와 함께 절벽 아래 흙 속에 파묻히지도 않았다.
모든 건 버트랜드를 속이기 위함이었다.
*
주치의 켈리언은 에스텔라에게 벤자민을 이곳에서 구출해달라 청했었다. 하지만 에스텔라와 켈리언 둘 다 벤자민이 죽기 전까지 버트랜드가 꽉 쥐고 있는 이 왕궁에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정신이 돌아와 있는데도 버트랜드를 속이기 힘들다 하여 포기할 수는 없었다. 또한 버트랜드가 언제든 아버지를 인질로 협박할 수 있기에 에스텔라는 무조건 아버지를 그곳에서 빼 와야 했다.
이자크와 에스텔라는 어떻게 해야 벤자민을 왕궁에서 꺼내올지 생각했다.
“어떤 명분을 대도 버트랜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거절할 게 분명합니다. 게다가 버트랜드는 눈치가 빠른 인간이라 어설픈 명분을 대면 분명 의심하기 시작할 거고요.”
이자크의 말이 맞았다. 속으론 어떤 음흉한 짓거리를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버트랜드는 대외적으로 선왕을 매우 아끼는 사람이다.
에스텔라 역시 버트랜드가 그랬으리라는 생각조차 못했을 정도니까. 그는 오페라 가수들도 울고 갈 연기력을 가진 배우였다.
에스텔라가 골치 아픈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정말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는 한 버트랜드가 아버지를 왕궁 밖으로 내보낼 일은 없을 거예요. 그 역시 아버지의 정신만은 또렷하다는 걸 알잖아요. 만일 마취향에서 깨어나면 후에-”
“그겁니다.”
“네?”
“그거라고요, 에스텔라.”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그러다가 이내 자신 역시 이자크의 말을 눈치 챈 것인지, 아-! 하며 감탄사를 냈다.
버트랜드는 오페라 가수들도 울고 갈 연기력을 가진 배우다. 배우는 거짓에 능통하다. 배우를 속이려면 그보다 더 연기를 잘하면 된다.
그러니까, 버트랜드가 그들 모두에게 연기를 하며 속였듯 그들 역시 연기를 하며 버트랜드를 속이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죽음을 위장하여 속이냔 말이다.
버트랜드는 분명 몇 번이고 벤자민의 죽음을 확인할 것이 분명했다. 의심이 많은 인간이니까.
“아주 잠깐 동안 숨을 멎게 하고 심장을 뛰지 않는 것처럼 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렇게까지 해야만 버트랜드를 속일 수 있을 텐데.”
그런 약이 존재하려나. 에스텔라는 아주 오래전 읽었던 소설을 떠올리며 말했다. 왜 소설 중에 그런 약이 있지 않나.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앙숙인 서로의 가문 때문에 죽음을 위장하려던 영애가 마셨던 약. 그런 약이 없을까?
가만히 에스텔라의 말을 듣던 이자크가 말했다.
“리먼이 동쪽 대륙에서 의술을 배워왔다고 했습니다.”
“리먼이요?”
“동쪽 대륙의 의술은 서쪽의 것보다 더 세부적이라고 하죠. 어쩌면 리먼이 비슷한 걸 알지도 모릅니다.”
이자크가 전쟁터에 나갔을 때 구출했던 포로. 가족들과 함께 적군에게 죽임당할 뻔했던 그는 동맹국의 용병으로 참가했던 이자크 군대에 의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당시 듣도 보도 못한 특별한 방법으로 이자크의 병사들을 치료해줬다. 이를 눈여겨본 이자크가 그의 가족까지 함께 이곳으로 데려왔고, 변경백의 전담 주치의로 일하게 된 그는 후에 에스텔라의 전담 주치의가 되었다.
원래는 동쪽의 국가에서 태어났다던 그.
이쪽과는 전혀 다른 문명을 가졌다는 신비의 동쪽 대륙.
그곳의 의술은 바늘 하나만으로 사람을 죽였다가 다시 살릴 수도 있다더라. 어쩌면 그런 의술을 배웠던 리먼이 뭔가를 알지 모른다며 이자크가 말했다.
에스텔라는 곧바로 리먼을 불렀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리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걸 하는 주치의가 이 혈자리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가능합니다. 한두 번 보고 배운 걸로는 불가능합니다.”
에스텔라는 리먼을 데리고 왕궁에 찾아갔다. 자신의 주치의가 동쪽 대륙의 신기한 의술을 할 줄 아는 자이니 그를 데리고 아버지의 상태를 살펴보게 하고 싶다 청했다. 버트랜드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리먼을 살펴봤다.
“동쪽 대륙? 그곳의 의술이 그리도 대단한가?”
에스텔라가 대신 답했다.
“메시앙의 의술과는 다른 방법을 쓴다 합니다. 막혀 있는 혈관을 깨어 내는 방법을 안다 합니다. 대부님. 혹시라도 모르니 한번 진찰이라도 받게 해주세요.”
버트랜드는 의외로 흔쾌히 허락했다.
그는 한 번의 진찰로 벤자민이 깨어나지는 못할 거라 확신했다. 7년이다. 7년 동안 독약에 중독은 물론 마취 향에 중독되어 꼼짝도 못 하는 사람이다. 신의 기적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 단 한 번의 진찰로 온몸이 마비된 사람이 바로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리먼이 벤자민의 진찰을 했다. 그 모습을 켈리언이 가만히 쳐다봤다.
켈리언에게 별도의 말을 전해주지는 못했으나 그는 에스텔라가 다시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어떤 생각인 건지 눈치챈 것 같았다.
리먼은 맥박을 재고, 벤자민의 동공을 확인한 뒤 입을 벌리고 혀를 잡아 내렸다. 어찌 선왕의 용안에 함부로 손을 대냐며 대신들이 당황했다. 그런 뒤 기다란 원형 통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기다란 침이었다.
리먼이 기다란 침을 벤자민의 신체 이곳저곳에 꽂기 시작하니 대신들이 웅성댔다. 저것이 의술이 맞기는 하냐면서, 공주님께서 돌팔이를 데려온 것이 아니냐면서, 저러다 전하께서 돌아가시면 어쩌려고 등등의 말들이었다.
“전하의 막힌 혈들을 뚫어주는 침을 놓았습니다. 몇 번 더 반복하다 보면 움직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리먼의 말에 대신들과 버트랜드는 반신반의한 표정이었다.
“아주 미약하지만 선왕의 혈색이 조금 돌아온 것 같기도 하고….”
대신들이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버트랜드는 리먼에게 좋은 결과를 보여달라 말한 뒤 별궁을 떠났다.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걸로 보아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대신들은 리먼이 행하는 의술이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물어봤다.
관심이 리먼에게 가 있는 동안 아버지를 살펴보던 에스텔라와 그 옆에서 주변을 정리하던 켈리언이 저들만 들리도록 작게 대화했다.
“아버지는 오늘 밤 숨이 멎고 맥이 잡히지 않을 거예요.”
“…! 공주님, 어찌하여-”
“하지만 그건 진짜로 숨이 멎고 맥이 안 잡히는 것이 아니에요. 리먼이 아버지의 혈을 순간적으로 막아놨대요. 숨이 멎은 것은 아니지만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우 미약해지고, 손목에 잡히던 맥 역시 마찬가지가 될 거예요. 웬만한 이들은 죽은 줄 알 겁니다.”
하지만 이틀 정도 지나면 다시 정상으로 호흡과 맥박이 돌아온대요. 어디까지나 눈속임 용입니다. 그전까지 우리는 아버지가 진짜로 죽었다고 버트랜드가 믿게끔 만들어야 해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에스텔라의 말에 켈리언이 비장하게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아버지를 죽인 척하세요. 감옥에 갇히세요. 처형일을 받으시고요. 하지만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겁니다, 켈리언. 당신의 가족들에게 보내줄게요.”
“….”
켈리언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물론 위험이 따르는 거라, 당신이 누명 쓰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버트랜드를 완벽하게 속이려면-”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켈리언은 만일 일이 틀어져 자신이 진짜 처형을 당해도 상관없다 생각했다. 이미 진즉에 왕을 죽이고 같이 죽었어야 할 몸 아니던가. 공주는 그런 자신의 가족까지 보호해주겠다 말한다. 켈리언에게는 그 어떤 불안감도 들지 않았다. 공주를 믿을 수 있다.
에스텔라의 언질대로 저녁이 지나고 새벽이 되면서부터 벤자민의 맥과 숨소리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켈리언은 준비해뒀던 사발에 독극물을 반절만 담았다. 자신이 묵고 있는 숙소에서 경비들이 조금 느슨해지기 시작했을 때 몰래 다시 선왕의 방으로 들어갔다.
선왕의 흉곽은 움직이지 않았으며 맥을 짚어도 맥이 잡히지 않았다. 온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서 진짜 돌아가신 게 아닐까, 그 의사가 뭔가 실수한 것이 아닐까, 당황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일은 해야 했기에 켈리언은 일부러 부스럭거리며 소리를 내다 경비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경비들은 국왕의 입에 사발을 대고 있는 켈리언을 보고 달려들어 제압했다.
새벽 소란은 버트랜드에게도 알려졌고 버트랜드와 그의 주치의가 급히 별궁에 도착했다. 버트랜드의 주치의는 맥박이 뛰지 않는 데다가 숨도 쉬지 않는다 전했다.
“네놈이 기어코, 가족들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왕의 주치의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버트랜드가 호위병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켈리언은 우악스럽게 저를 포박하는 이들의 손에 끌려 북쪽 첨탑에 갇혔다.
버트랜드는 몇 번이고 주치의를 시켜 벤자민이 진짜 죽었는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주치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전하. 이미 시체이옵니다. 라는 말을 반복했다. 안다. 죽었다는 거 안다. 그의 눈으로 봐도 파랗게 질린 이는 시체가 확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죽어 버린다고? 아직 네 놈이 고통받으려면 멀었는데?
버트랜드가 이를 부득 갈았다. 이내 침착함을 되찾으려는 그가 보좌관에게 말했다.
“공주에게 소식을 알려라.”
에스텔라는 급히 소식을 받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마차에 올랐다.
가는 길에 유모가 손을 모아 기도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오로라 님, 부디 전하를 따스하게 반겨주세요- 하며.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이미 이 모든 일이 연극이라는 걸 알았지만 유모는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유모는 거짓말에 서투르니 직전에 알려주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자크의 말을 떠올리며 에스텔라가 기도하는 유모를 가만히 토닥였다.
유모는 별궁에 도착해 흰 보자기에 씌여 있는 선왕의 모습을 봤을 때만 해도, 에스텔라가 대신들과 버트랜드와 함께 회의를 하러 들어갔을 때만 해도 선왕이 진정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다.
에스텔라가 회의에 들어가자 이자크가 유모를 따로 불러냈다. 유모는 팅팅 부은 얼굴로 이자크에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냐 물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관을 바꿔치기할 거야, 유모.”
“예…?”
유모는 도대체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이자크는 간결하고 빠르게 설명했다.
우리는 선왕을 이곳에서 빼내는 것이다. 선왕은 죽은 것처럼 보이나 살아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해줄 테니 일단은 내 말대로 해.”
“예, 예?! 예, 알겠습니다요.”
유모는 얼이 빠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자크가 뭔 소리를 하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에스텔라가 그리하라고 언질해줬다는 이자크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지 않나.
이자크가 시킨 대로 일단 선왕을 모셔둔 방 앞에 서성댔다. 당연히 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유모를 제재했다.
하지만 워낙에 초로의 여인이었고, 왕궁에서 오랜 시간 지내온 자들은 모두들 유모를 잘 알기에 유모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듯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았다.
게다가 경비병 둘 다 어렸을 적부터 이곳에서 일하던 시동이었기에 오랜만에 유모를 본 것에 반가운 눈치였다. 유모는 왕궁의 모든 이들과 안면을 틀 정도로 꽤나 사교적이었던 사람이니까. 유모 역시 어린 시동들이 건장하게 자란 것이 신기한 듯 어색하게 주춤대다 이내 조금 더 자연스럽게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는 사이 시체를 운구하기 위한 기사들이 방에 들어갔다.
관을 지고 나온 이들은 이자크의 정예부대원들이었다. 왕실 기사복을 빼돌려 입은 그들은 왕실 부대원인 척하며 운구 마차에 관을 실었다. 왕이 죽었을 때는 보물들도 함께 묻어주기 때문에 왕의 관을 지고 나온 이들 뒤로 커다란 보석 궤짝들이 줄줄이 나왔다.
때마침 회의를 끝나고 나온 에스텔라와 버트랜드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 버트랜드는 관뚜껑을 닫기 직전 벤자민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똑똑히 쳐다봤다.
이는 버트랜드에게 저 안에 벤자민이 들어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제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의심하려면 제 눈을 의심해야 할 것이다.
기사들이 관뚜껑을 닫은 뒤 그대로 운구 마차 안에 실었다.
미리 운구 마차에 숨어있던 이자크가 관뚜껑을 열었다. 선왕 벤자민은 매우 말랐고 키가 작은 편이었기에 이자크가 쉽게 들 수 있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장인어른.”
이자크가 나지막이 말하고 그를 번쩍 들더니 보석 궤짝 하나를 열어 그 안에 집어넣었다. 정신이 온전하신 분을 이리 대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버트랜드의 눈을 속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공주님. 비가 많이 와서 지반이 많이 약해졌을 겁니다. 운구 마차가 이 이상 무거워지면 절벽 부근을 지나다가 추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궤짝 몇 개는 공주님의 마차에 싣는 것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공주가 그리하라 말하면 기사들은 다시 운구 마차에서 궤짝 몇 개를 꺼낼 것이다. 그때 이자크가 보석 대신 벤자민이 들어있는 궤짝을 건넬 것이다. 기사들이 이자크에게서 궤짝을 받아 옮기는 동안 이자크 역시 마차에서 몰래 빠져나와 다시 마차 바닥 부분에 있는 문을 통해 들어왔다.
마차가 출발했다.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메시앙은 매번 이맘때쯤의 겨울이 되면 겨울 장마가 나흘 동안 지속된다. 에스텔라는 일부러 이때를 기다려왔다. ‘사고’를 위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요건이었으니까.
마차가 절벽을 지나갈 때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폭약을 터트렸다. 지반이 약해져 그대로 산사태가 일어났다. 에스텔라의 마차가 휩쓸리지 않게 차이를 두고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운구 마차만 산사태에 휩쓸렸다.
이자크는 원래 이 방법에 찬성하지 않았다. 위험한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지반이 약해질 때 폭약을 터트렸다가 더 거대한 산사태에 자신들까지 휩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신은 그들의 편이었던 걸까. 산사태는 정확히 운구 마차만 덮쳤다. 사고의 목격자이자 증인이 될 버트랜드의 수하는 운구 마차가 떨어지는 순간 잽싸게 몸을 던져 살 수 있었다.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그는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었고, 그는 그대로 궁에 돌아가 산사태에 휩쓸려 선왕의 마차가 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증언할 것이다.
버트랜드는 선왕의 숨이 멎은 것도, 맥박이 뛰지 않는 것도, 창백하게 질린 것도, 운구 마차 안에 들어가는 것도 모두 제 눈으로 확인했다. 그런 뒤 자신의 수하로 붙여뒀던 운구 마차 마부가 저렇게 덜덜 떨며 당시 일을 증언하는 걸 믿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버트랜드는 속았다.
속아 넘어간 것이다.
*
벤자민은 리먼의 의술로 날이 갈수록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너무 쪼글쪼글 말라서 무섭다던 루스도 이제는 곧잘 아침마다 루시와 함께 방에 와서 아침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할아부지 안녕히 주무셨써요오-”
커다란 캐노피 침대에 까치발을 들고선 아이들이 날이 갈수록 안색이 돌아오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두 달쯤 지났을까. 리먼이 매일같이 특별한 의술로 침을 놔 온몸의 혈을 뚫어서인지, 아니면 아이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쫑알쫑알 말을 시켜서인지, 벤자민은 이제 손가락 까닥이는 것은 물론 온몸을 움찔대면서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벤자민의 몸이 호전될수록 에스텔라의 몸 역시 빠르게 변했다. 어느새 임신 5개월이 되었다. 에스텔라는 배는 이제 누가 봐도 임산부의 태가 났다. 이제는 간간이 태동도 느낄 수 있다.
에스텔라가 아이들의 얼굴을 제 배에 살짝 대며 말했다. 루시와 루스는 온몸의 감각은 제 오동통한 볼에 집중시켰다.
“…어! 우와! 우와아!”
에스텔라의 배에 얼굴을 한참 동안 대고 있던 루시와 루스가 어! 움직였다! 방금 움직였써! 하며 박수를 치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압빠! 아가가 발을 이렇게, 이렇게 찼다?!”
루스가 꺄르륵 신나 이자크에게 말했다. 이자크 역시 그런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그래? 아가가 움직였어? 하며 그 역시 에스텔라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버트랜드와 언제 대면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아이를 잃을 불안감보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남에 더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아직 평화로운 이 시기를 최대한 만끽하려고 한다.
이자크가 손을 올리자 배에서 툭, 하고 다시 한번 태동이 느껴졌다. 이자크가 씩 미소를 지으며 에스텔라와 눈을 마주쳤다. 벌써부터 태동이 이렇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움직이는 걸로 보아 막달이 되면 발차기도 심심찮게 할 것 같다.
“아빠! 아가가 툭! 해찌? 툭 해써?”
“응. 아가가 툭, 움직였네.”
“아가가 우리 이제 다 아는 거야아! 우리가 매일 매일 알려줘서 이제 우리가 누군지 다 아는 거다?”
루시와 루스가 방방 뛰어다니며 자랑스레 말했다. 루시와 루스는 빨리 아가가 보고 싶다며 얼른 나와라- 얼른 나와- 노래를 부르며 방을 돌아다녔다. 아직 5개월은 더 있어야 해 얘들아. 에스텔라가 벌써 나오면 큰일 난다며 말했다.
“그래도요- 빨리 동생이 보고 싶어요- 내가 아가 태어나면 인형도 주구, 책도 읽어주구, 그리고, 그리고 어- 같이 산책도 가구, 소꿉놀이두 하고-”
“너 글 못 읽잖아.”
“너도잖아 루시!”
“난 이제 다섯 살이라 알파벳은 외워.”
“…나도 외우면 돼. 그쵸? 나 이제 외울 거죠?”
루스가 지기 싫다는 듯 에스텔라를 보며 물었다.
알파벳 공부는 질색하던 응석쟁이 루스가 이렇게 말하니 이자크가 피식 웃으며 에스텔라의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아가 덕분에 루스가 응석을 덜 부리네. 동생 생기니까 책임감이라는 게 생기는 건가.”
태명은 그냥 아가가 되어버렸다. 루시와 루스에게 태명을 지어달라 하니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아가니까 아가지. 우리집 아가니까 아가인 거야! 명쾌한 답을 내놨다.
“있자나, 이번 안식일 때느은- 어어, 아가 선물도 내가 준비해줄게!”
루시가 다가오더니 에스텔라의 배에 작게 속삭였다.
“아가는 뭐 가지구 싶어? 응? 내가 엄마한테 말해서 다 준비해줄게. 나는 다섯 쌀이라서 다 해줄 뚜 이써! 응? 블록이 가지구 싶다구? 인형이 가지구 싶어? 엄마! 아가가 새 인형 가지고 싶대요!”
“루시가 가지고 싶은 게 아니고?”
“헤헤.”
루시가 들켰다는 듯 뒤통수를 어색하게 긁으며 개구쟁이 미소를 지었다.
“인형 저렇게 많은데? 며칠 전까지만해도 릴리 이모가 준 인형 들고 다니더니.”
“그거느은- 이제 엄마한테 돌려줘야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