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15화 (15/21)

15장.

이건 마치 그때랑 비슷한 느낌이다.

미래의 자신과 나와 기억나지 않는 대화를 하던 꿈이나, 독감에 걸렸을 때 영사기 속에서 보여주던 끔찍한 장면들이나, 서재에서 다이어리를 발견한 후 갑자기 알 수 없는 이름들이 떠올랐던 것이나.

그때 모두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구토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어지럽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며 온몸의 피가 머리에 쏠린 기분이 든다.

누군가 옆에서 끊임없이 속삭인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꾸만 뭐라 속삭인다.

에스텔라는 그게 듣기 싫어 귀를 막고 싶었지만, 아무리 귀를 막아도 그 소리를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에스텔라는 그 목소리가 뭐라 속삭이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이리 와.

이리로 와.

책이 널 부르고 있어.

너의 기억들이 널 부르고 있어.

이리 와.

에스텔라.

어서.

그 목소리는 에스텔라를 어디론가 이끌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따라 발을 내디뎠다. 차가운 대리석이 바닥이 느껴졌다. 꿈인가? 아니면 이게 현실인가? 에스텔라는 몽롱한 기운으로 그 목소리를 따라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이끄는 쪽으로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갔다. 한참을 걸으니 문이 하나 나왔다. 퍼뜩 정신이 든 에스텔라는 이곳이 오로라 가든의 지하 동굴로 내려가는 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지금 잠결에 여기까지 온 거야?

목소리를 따라왔을 뿐인데?

당황한 에스텔라가 가만히 동굴 문에 손을 올렸다. 이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아버지가 단단히 막아 놓은 걸로 왕궁 사람들은 알지만, 아버지가 한 짓이 아니다. 이 동굴은 마치 어머니가 아니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동굴에 손을 대고 있는데 머릿속에 기억이 떠오른다.

에스텔라는 이 동굴에 들어간 적이 있다. 확실한 기억은 안나지만 분명 몇 번이고 이 안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Qua resurget et favilla Judicantus homo reus….”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메시앙의 고대언어. 에스텔라는 사언어가 된 고대 언어를 배운 적이 없지만 자신이 말한 것이 뭘 뜻하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오로라 왕비가 생전에 부르던 노래 가사. 어린 에스텔라에게는 그 노래가락이 매우 구슬프게 들려 물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 그 노래는 왜 이리 슬픈가요? 가사는 무슨 뜻이에요?

그러면 오로라 왕비는 에스텔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눈물의 날. 그날. 티끌로부터 부활하여 죄인은 심판을 받으리라. 하오니 그 사람을 어여삐 여기소서, 신이시여. 자비로우신 신이시여. 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메라 신은 기회의 신이기도 하단다. 최초의 신이며 생명과 죽음의 신이지만, 동시에 기회의 신이기도 하지. 생명과 죽음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니까.

어린 에스텔라가 물었다.

죽음은 기회를 주는 게 아니잖아요.

에스텔라. 죽음은 또 다른 기회를 주기도 한단다.

죽으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죽음으로써 ‘0’으로 돌아가는 거지. 때로는 ‘0’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단다.

어째서 갑자기 그때의 일이 떠오르는 건진 모르겠다.

그때 갑자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내 쿠구구구, 거대한 소리를 내며 꿈쩍도 안 하던 돌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돌문이 열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원형 계단이 나타났다. 에스텔라는 등불도 없이 다시 뭔가에 홀린 듯 발을 내디뎠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자 베일에 쌓여있던 어머니의 동굴 정원이 나타났다. 빛나는 크리스탈들이 영롱하게 지하 틈새의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왕궁 지하가 이렇단 말인가?

에스텔라는 믿을 수가 없었다. 지하 동굴은 생각보다 더 넓고 광활했다. 마치 다른 장소에 온 것처럼. 이 위에 메시앙 왕궁이 세워졌을 거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할 만큼 전혀 다른 곳의 동굴 같았다.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에스텔라의 시선을 잡은 것은 동굴을 가로지르는 강가 맞은편에 있는 신전이었다. 돌로 조각된 매우 커다란 신전. 에스텔라는 어쩐지 그 신전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스텔라는 천천히 강가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물속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신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시 한번 뭔가에 홀린 듯 한참 걷고있는데 뭔가가 턱, 하고 걸린다.

개의치 않고 다시 걷는데 또 다시 얼마가지 않아 턱, 턱 둔탁한 것들이 걸렸다.

돌부리처럼 딱딱했으나 그것보다는 더 크고 입체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뭔가가 턱! 크게 걸렸다. 중심을 잃은 에스텔라가 퍼득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물속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심코 아래를 살펴본 에스텔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입을 틀어막은 채로 비명을 삼켰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에스텔라는 휘청거리다 결국 물에 빠졌다. 주저앉은 에스텔라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바닥을 더듬거렸다. 또 다른 뭔가가 만져진다. 그것을 확인한 에스텔라가 결국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아아아악-!”

그곳엔 에스텔라 자신들이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똑같은 자신이 네 명.

그 네 명은 창백한 얼굴로 눈을 뜬채 물 속에 누워 에스텔라를 보고 있었다.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스텔라가 주저앉았을 때 그녀가 깔고 뭉갠 시체는 에스텔라의 어머니, 오로라 왕비의 시체들이었다. 어머니와 자신의 시체 말고도 얼굴 모를 시체들이 강바닥 아래 깔려있었다. 그들 모두 부패하거나 불지 않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 마냥 갓 죽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허억, 허으…. 아아…!”

공포에 질린 에스텔라는 몇 번이고 휘청대며 겨우 도망쳐나올 수 있었다. 신전에 도착한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강바닥에 수장되어 있는 시체들을 내려다봤다. 맑은 물 아래 보이는 같은 시체들.

에스텔라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쉬고 내쉬며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지금 본 것들이 뭐지?

저게 정말 나인가?

어째서 저기에 어머니도 있는 거지?

저 많은 시체가 어째서 썩지 않고 불지도 않은 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거지?

숨을 고르던 에스텔라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신전 한가운데에 재단이 하나 보인다. 에스텔라는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거의 기어가다시피 그쪽으로 향했다.

재단이 있는 곳은 하늘이 보이는 곳이었다. 분명 왕궁 아래에 매몰되어있는 장소일텐데 하늘이 훤히 보인다. 에스텔라는 그런 이상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재단 위로 올라갔다.

달빛이 재단 위에 있는 책 하나를 비추고 있다.

책은 생각보다 작고 낡아 가에 부분이 모두 헤져있었다. 책 표지에 써져 있는 글씨는 손을 많이 탄 것인지 금장과 잉크들이 모두 흐릿하게 날아가 있었다. 에스텔라가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메라의 금서

이 책의 주인은 모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생명과 죽음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무(無)로 돌아가야 한다.

낡은 책 첫 장에는 누군가 휘갈겨 쓴 것처럼 적혀있었다.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모두 빈 페이지들이었다. 아무런 내용도 없이 한참을 넘기는데, 한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되돌리는 주술

눈물의 날 그 날 티끌로부터 부활하여 죄인은 심판을 받으리라.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에스텔라는 들고 있던 책을 떨구고 말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온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려온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다.

에스텔라가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사라진 기억들이 하나 둘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단두대에 오른 이자크의 모습, 잘려나간 그의 목, 이자크와의 결혼식, 행복한 나날, 그와의 키스, 그와의 입맞춤, 첫날밤, 아이들이 맨 처음 태어났을 때….

“아아아악! 아으… 흐으으… 으아아아악!”

아이들의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자신의 모습, 전쟁터에 나가는 이자크의 뒷모습, 달구지에 실려 온 그의 시체, 물에 뛰어드는 에스텔라, 배를 타고 떠나버리는 그와 아이들….

장면뿐만 아니라 그때의 감정, 고통, 분노, 슬픔까지 모두 다 에스텔라의 몸을 관통했다.

“에스텔라!”

멀리서 이자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텔라! 에스텔라, 날 봐요. 날 봐, 에스텔라!”

“아으으으…! 아악! 하으….”

너무 많은 감정들이 느껴진다. 눈을 뜰 수가 없다. 눈이 터질 것처럼 뜨겁고 아프다. 이자크는 에스텔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얼른 그녀를 껴안았지만 에스텔라는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이자크으- 흐윽, 이자크으….”

“나 여깄어. 에스텔라. 나 여깄어요. 그러니 제발….”

이자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애가 탔다. 에스텔라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이리 힘들어하는데 자신이 대신 아파할 수도 없다. 이자크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제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울부짖는 에스텔라를 껴안고 나 여기에 있다.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스텔라는 한참 동안 그의 이름을 부르고, 아파하고,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다시 울부짖고를 반복했다. 그러다가도 바닥에 떨어진 낡은 책을 더듬거리며 찾고는 그게 마치 아주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품에 꼭 껴안고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자크는 그 상황을 그저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렇게 무능하게 느껴지는 적은 처음이다.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안식처가 되고 보호자가 되고 싶은데. 에스텔라는 이렇게 아파한다.

이자크는 묵묵히 에스텔라를 껴안았다. 에스텔라는 또다시 한참을 울부짖다 결국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이자크는 여전히 품에 책을 껴안고 있는 에스텔라를 들어 안은 뒤 다시 그 시체들 가득한 강가를 건너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올라가고 돌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이자크는 닫혀버린 돌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에스텔라를 데리고 방으로 갔다. 시종을 불러다가 젖은 옷을 갈아입힌 뒤 이자크는 그대로 아이들을 깨웠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이었기에 루시와 루스는 잠결에 칭얼댔다.

아이들은 시녀들의 품에 안긴 채로 꾸벅꾸벅 졸며 마차 안에 들어갔다. 에스텔라는 여전히 기력을 잃고 쓰러진 상태였다. 에스텔라에게 담요를 두른 채 이자크가 안고선 마차 안에 들어갔다. 얼마 안 가 마차는 그대로 왕궁을 빠져나갔다.

“아빠. 엄마 많이 아파?”

쌍둥이들이 아빠의 품에 안겨있는 엄마를 보더니 울먹이며 물었다.

“아가 때문에 많이 아픈고야?”

“아빠도 잘 모르겠구나.”

“엄마, 엄마 죽어?”

“그럴 일은 없단다 얘들아. 집에 가서 푹 쉬면 엄마는 금방 나을 거야.”

이자크는 그리 말하며 아이들에게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 역시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

저택에 도착했다.

이제 막 산중턱에 해가 뜨려고 고개를 내미는 이른 시간이었다. 마차가 도착할 시간이 아닌데 벌써 도착한 것에 심상찮음을 느낀 베이먼이 가장 먼저 뛰쳐나왔다. 그 뒤로 유모와 멜리사, 그리고 다른 시녀들이 뛰쳐나와 루시와 루스를 먼저 안고 들어갔다.

이자크가 에스텔라를 안아 들었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축 처져 있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유모가 기함을 했다. 다른 시종들이 주치의를 부르러 뛰어갔다. 아침 일찍부터 변경백 저택은 불안함과 초조함의 빠른 발걸음 소리로 가득 찼다.

주치의가 급히 왕진 가방을 들고 달려왔다.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 있다가 그가 오자 벌떡 일어나 자리를 비켰다. 주치의 역시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이자크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에스텔라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에스텔라의 맥박을 체크 한 뒤 태중의 아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의사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이자크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다행히 태중의 아이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에스텔라는.”

“약간의 탈수가 온 것 말고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마 패닉으로 인해 잠시 쓰러진 것일 테니 안정을 되찾는 게 우선이겠지요. 태아에게 무해한 허브 향초를 피워놨으니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으실 겁니다. 이자크 님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얼굴이 창백하신 것이-”

“난 괜찮아. 이만, 가봐도 좋아 로안. 고마워. 에스텔라와 아이에게 무해할 만한 약을 좀 찾아다 줄 수 있는가.”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주치의가 돌아가고 난 뒤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에스텔라는 울부짖던 아까와는 다르게 평온해 보였다. 이자크는 그 모습이 아까 전 수장되어 있던 창백한 에스텔라들처럼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에스텔라의 가슴께에 귀를 가져갔다.

요즘 들어 자꾸만 이런 불안한 느낌이 든다.

다행히 문제없이 쿵쿵 뛰는 그녀의 심장에 안심한 듯 이자크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베이먼 집사였다.

“이자크 님. 마차에서 이것을 떨어뜨리셨습니다.”

“아… 고맙네.”

베이먼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자크와 에스텔라를 쳐다본 뒤 다시 방을 나갔다. 이자크는 건네받은 책을 펼쳤다. 에스텔라가 그렇게 오열하면서도 소중하게 품고 있던 책이다. 이 낡아빠진 책이 뭐라고.

메라의 금서

이 책의 주인은 모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생명과 죽음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무(無)로 돌아가야 한다.

맨 첫 장에 휘갈기듯 적힌 글을 봤다. 필체가 익숙했다. 에스텔라가 쓴 것인가. 이자크는 번진 잉크 자국을 매만졌다. 다시 종이를 넘겼다. 빈 종이들이었다. 그다음도 그 다다음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빈 종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책이지?

이자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책을 펄럭댔다. 그때 뭔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툭, 하며 묵직한 금속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아까 전 책장을 넘길 때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떨어진 것을 주워 올리는데 꽤나 묵직한 열쇠였다.

무슨 열쇠인가 싶었던 이자크는 일전에 에스텔라가 그녀의 서재에서 발견한 다이어리 하나를 떠올린다. 그 다이어리. 결국 잠겨있어서 열지 못했다 했지. 그 다이어리는 협탁 옆에 여전히 올려져 있었다. 이자크가 다이어리를 가져와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열쇠는 딱 들어맞았다. 옆으로 돌리자 굳게 닫혀있던 자물쇠가 틱, 하고 손쉽게 열렸다. 망치로 몇 번 두들겨도 열리지 않아 황당해하던 에스텔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랬던 것이 이 열쇠 하나로 이렇게 쉽게 열린다.

에스텔라가 자물쇠로 잠가 놓고 서재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숨겨놨을 정도로 감추려 했던 다이어리다. 이걸 내가 읽어야 하나. 궁금했다. 거기에 무엇이 쓰여있을지. 7년 동안 소원해졌던 이유가 그 안에 들어있지 않을까.

내가 읽어야 하나.

읽을 자격이 있을까.

궁금했다.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제 머리를 쥐어뜯고 듣는이의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아픈 울음소리를 내는 그 이유를,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가져가고 싶었다.

이자크가 다이어리를 조심스레 펼쳤다.

정갈한 필체로 쓰여 있는 맨 첫 번째 장.

거기에는 연도와 날짜가 적혀있었다.

[오르고력 643년 1월 20일

이자크가 죽었다.

그는 반란자로 몰려 숙청당했다. 나는 일국의 공주이며 후계자라는 이유로 그의 처형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디에스 변경이 아버지를 독살하려 했을 리가 없다는 걸 안다. 아버지의 독살 미수부터 디에스 변경의 숙청까지, 이 모든 사건들이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처리되었다.

단두대에 올라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날 쳐다보는 그의 마지막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이자크를 사랑하지만 그를 보호하지 못한 내가 밉다. 그의 무죄를 밝혀내지 못한 내가 밉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죽었다니. 내가 7년 전에 숙청당해 죽었다니.

이자크는 이해할 수 없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종이를 넘겼다.

[643년 1월 27일

지하 동굴로 내려가는 문이 열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어째서인지 나는 이 안에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안에 들어가 나는 진실을 마주했다.

오, 맙소사.

여긴 단순한 동굴이 아니었어.

이제야 어머니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된다.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때로 ‘0’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사실 지금도 나는 두렵다. 내가 과연 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자크를 살릴 수 있다면. 그래. 나는 ‘0’으로 돌아갈 수 있어.]

이자크가 다시 다음 장을 넘겼다.

[642년 12월 25일

큰 운명을 바꿀 순 없다 했다. 메라 신이 야속하다. 어째서 날 죽여가면서까지 시간을 되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큰 틀을 바꿀 수 없다 한 것인가.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을 막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결국 아버지는 독을 드셨고, 디에스 가문은 반역자로 몰렸다.

나는 뭘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이자크만이라도 살릴 수 있는 거지?]

[642년 12월 31일

이미 디에스 변경과 그 부인은 처형당했고 이자크와 그의 여동생이 재판을 받았다. 나는 대부님을 찾아갔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로 나는 자동으로 왕권을 물려받아 수사권을 잃었다. 대부님을 찾아가 왕권을 포기하고 대신 공주로서 수사권을 달라 청했다.]

[643년 1월 13일

재수사가 받아들여졌다. 가까스로 이자크와 그의 여동생을 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아버지는 반사 상태에서 헤어나오시질 못한다. 죄스럽다. 아버지 대신 사랑하는 남자를 선택한 것 같아 자책감이 든다. 하지만 큰 운명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아버지는 독을 드시게 되어 있고 디에스 가문은 반역자로 몰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메라의 금서를 발견할 운명이었던 거지.

이자크를 살려냈으니 이제 진범을 찾아낼 거다. 진범을 찾지 못하면 이자크가 죽을 거라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643년 2월 20일

이자크가 나의 청혼을 받아들여 줬다. 그에게 나의 진심이 닿았던 걸까. 구렁텅이에 빠진 그에게 내가 아주 미약한 촛불이라도 될 수 있길 바란다.]

이자크가 다시 종이를 몇장 넘겼다. 대부분의 일기는 시간 순서들이 이상했다. 맨 처음 처형 이후 다시 과거로 돌아간 건가? 그게 말이 되나? 이자크가 책장을 몇장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645년 11월 30일

배 속에 아이가 생겼다. 나와 이자크의 결실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다. 임신 소식을 들은 이자크의 얼굴이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그가 다시 미소를 찾아서 기쁘다.

의사는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맥이 두 개가 잡힌다나. 쌍둥이라! 빛나는 별이 두 개구나. 이자크가 벌써부터 이름을 정했다며 들어보라 한다. 여자 쌍둥이라면 엘린, 엘레나, 남자 쌍둥이라면 데이빗, 데런, 남매 쌍둥이면 루시와 루스. …이자크는 작명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

글을 읽던 이자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일기를 읽을수록 대체로 행복해하는 에스텔라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던 때가 있었지. 서로의 가족들에게 닥친 아픔까지 잊을 정도로. 그렇게 서로만을 보고 사랑하던 때가 있었지. 아이들이 태어나면 이제 그 아픔들은 모두 잊고 새 가족을 꾸려 다시 행복하게 살 줄 알았다. 이제 슬픈 일들은 모두 끝났다 생각하는.

몇 장 정도 넘기자 정갈하던 에스텔라의 필체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648년 8월 9일

나의 무지와 나의 무모함으로 아이들이 죽었다. 이자크는 전쟁터로 내몰렸다. 버트랜드가 그를 전쟁터로 보낸 것이지만 사실상 내가 내몬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에도 실패다. 기억들이 엉키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걸려 그곳을 기억할 수 있었다. 다시 동굴로 향했다. 문은 날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강가에 가니 나의 시체가 떠오른다. 그래. 이번엔 더 완벽하게. 실수 없이. 이제 죽는 것 따윈 무섭지 않아.]

이자크가 심각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갈수록 에스텔라의 정갈했던 필체는 휘갈휘갈겨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필체에는 고통이 잔뜩 담겨 있었다.

차분하게 글을 읽어가던 이자크는 때때로 감정을 주체 못 해 책을 덮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길 반복했다.

“하….”

탄식에 가까운 짧은 숨을 토해내듯 뱉은 이자크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제 안와 부근을 꾹 누르면서도 덜덜 손을 떨며 책장을 넘겼다. 다 읽어야만 했다. 에스텔라의 고통을 아주 조금이라도 나눠 가지기 위해서는, 그녀의 고통을 알아야만 했다.

*

기억을 흐릿하게 만드는 망각의 안개가 걷혔다. 에스텔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변경백의 저택이었다. 동굴에서 이자크가 날 발견하고 데려온 것인가. 에스텔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속눈썹 사이사이 맺혀 있던 눈물이 또르륵 굴러떨어졌다.

에스텔라는 조용히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메라의 금서가 눈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켰다. 휘청대는 다리를 겨우 지탱해 주변을 둘러봤다. 원래라면 이자크가 옆에 있었을 텐데, 그가 보이지 않는다.

숄을 두른 채로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 집사와 마주쳤다.

“공주님. 조금 더 쉬십시오.”

“걱정 마, 아르텔. 몸은 멀쩡하니까.”

아르텔이라는 말에 집사의 눈이 커졌다.

“기억이 다 돌아오셨군요, 공주님.”

“…꽤 오래 걸렸네. 아니. 이 정도면 빠른 편인 건가.”

“기억의 순서가 더 틀어졌을 수도 있지만, 꽤 빨리 회복하신 편입니다. 회귀 주술은 일반적인 인간이 한 번 이상 감당하지 못하니까요.”

아르텔이 에스텔라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에스텔라는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이자크는?”

“공주님의 서재로 가셨습니다.”

에스텔라는 슬쩍 미소지으며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스텔라의 모든 기억들이 돌아왔다. 델라가 들으면 무척 기뻐할 소식이지만, 아르텔은 기쁨 반, 안타까움 반이었다.

지금의 에스텔라는 그 모든 고통의 기억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사실 지금이 가장 혼란스러울 시기일 것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몇 번이고 에스텔라를 덮칠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인간의 몸으로 메라의 금서를 읽고, 그곳에서 가장 위험한 주술인 회귀 주술을 행한 인간에게는 반드시 따라붙는 부작용이었다.

몸과 정신이 감정과 기억의 반복, 혼동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 그 괴리로 인해 주술을 행한 자는 천천히 기억을 잃고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함은 물론 성격까지 변할 수도 있다.

가장 최악은 미쳐버리는 것이다.

에스텔라는 거의 그 직전까지 갔었다.

아르텔은 조용히 에스텔라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공주님께서는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

태초의 신 메라는 신들이 행한 위험한 주술들은 한곳에 담아 봉인했다. 그것이 바로 메라의 금서다. 거기에는 수많은 주술들이 들어있지만, 읽는 이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주술만을 알려준다.

메라의 금서를 읽을 수 있는 이는 정해져 있다. 그건 단순히 왕족이라고 하여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왕족이든 평민이든, 메라의 선택을 받은 이만이 금서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오로라 왕비는 메라의 피를 물려받은 이였다. 오로라가 왕비가 되던 날, 그녀는 왕궁에서 시공간이 다르게 이어져 있는 지하동굴 하나를 발견한다. 그 동굴은 시간이 멈춘 공간이었다. 그리고 에스텔라가 그러했듯이, 강가 아래 수많은 같은 시체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로라는 하나의 결단을 내린다.

금서를 읽고 가장 원하는 주술을 행하게 된다.

그 이후 에스텔라가 태어났다. 에스텔라는 메라의 금서를 사용하여 태어난 아이였기에 그녀 역시 메라의 선택을 받은 아이이기도 했다.

금서는 에스텔라에게 가장 위험한 주술인 회귀 주술을 권했다.

에스텔라가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것.

시간을 되돌리는 것.

“읽었네요.”

서재에 도착한 에스텔라가 제 책상에 앉아있는 이자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에스텔라의 다이어리는 책상 정 가운데에 있었고 이자크는 이마에 손을 괴고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 에스텔라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얼른 들었다.

“….”

이자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에스텔라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가 들고 있는 서류는 그동안 에스텔라가 그에게 꽁꽁 숨겨왔던, 이자크가 그토록 원했던 ‘진실’이었다.

“이게 다 뭡니까.”

이자크는 뭔가를 꾹꾹 눌러 담듯이 천천히 물었다. 에스텔라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 알면서 왜 물어요.‘”

“에스텔라.”

이자크는 에스텔라에게 화난 듯 보였다. 아니, 미안한 건가. 그의 눈은 이미 토끼처럼 새빨갰다. 할 말이 있지만 목이 메이는 듯 이자크가 숨을 골랐다.

한참 동안 에스텔라의 다이어리에 시선을 고정하던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습니까.”

“말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우린 부부잖아.”

“….”

“서로 아픔을 나누자면서.”

“….”

“서로 의지하자면서!”

“….”

“왜 혼자 다 짊어지는 건데. 왜!”

이자크가 원망스러운 듯 소리쳤다. 에스텔라는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맑았던 시야가 흐릿해진다. 코가 시큰거린다.

가장 처음은 이자크의 처형. 열아홉의 에스텔라는 아버지가 반사 상태가 된 이후 곧장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루아침에 국왕이 되어버린 열아홉의 공주. 사법권을 잃은 그녀는 재수사를 요청하지도 못한 채 디에스 가문이 몰살당하는 것을 가만히 볼 수밖에 없었다.

이자크의 목이 잘려나간 그 날, 에스텔라는 슬픔에 몸부림쳤다.

아버지도 잃고, 사랑하던 남자도 잃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온실에서 그가 좋아하던 황수선화를 바라보며 눈물지었을 때, 무언가가 그녀를 불렀다. 마치 이끌리듯 동굴 앞에 선 에스텔라는 문이 열린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서 에스텔라는 금서를 발견했다.

부패하지 않은 시체들도 발견했다.

에스텔라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회귀 주술에는 규칙이 존재했다.

하나. 한 사람은 두 명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현재가 없어야 한다.

하나. 주술의 대가는 주술자의 목숨이다.

하나. 주술을 반복할 수 있으나 반드시 맨 처음 회귀한 시간의 이후만 가능하다.

하나. 모든 것의 큰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

하나. 튕겨 나간 파편들은 스스로 주워 담아야 한다.

하나. 조력자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일 뿐. 큰 운명에 개입할 수 없다. 조력자가 파편을 대신 주워 담아줄 시 반드시 다시 흩어지게 된다.

하나. 모든 기억들을 되찾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부유하는 상태가 될 뿐이다.

하나. 기억이 돌아올 수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에스텔라는 자신을 제물 삼아 시간을 거슬렀다.

“너무 사랑해서. 아무것도 몰랐으면 했어….”

자신에게 소리치는 이자크에게 에스텔라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처음 회귀했을 때는 행복했다. 여전히 아버지를 살리진 못했어도 이자크를 살려냈으니까. 그와의 사이에서 루시, 루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태어났고 우리 넷은 정말로 행복하게 살았으니까.

하지만 진범이 버트랜드라는 걸 알아챈 이후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복수심에 불타서, 아버지와 이자크의 가족을 몰살시킨 버트랜드를 용서할 수 없어 무리하게 그와 맞서 싸웠다.

그 결과 이자크는 계략으로 인해 전쟁터에 참여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아이들과 이자크의 시체를 부여잡으며 오열하던 에스텔라는 주술을 행함으로써 얻은 초월적 존재인 델라 랭과 아르텔을 시켜 규칙을 위반했다. 어디까지나 조력자로 남아 있어 직접 개입이 불가능한 그들에게 버트랜드를 갈가리 찢어발기라 명한 것이다.

그들은 주인으로 삼긴 에스텔라의 명령을 따랐고, 규칙을 어겼다. 버트랜드는 죽었고 에스텔라는 국왕이 되었으나 규칙을 어긴 그녀에게는 형벌이 내려졌다.

밤마다 죽은 이자크와 아이들이 꿈과 현실에서 환상으로 나왔던 것이다. 미쳐가던 에스텔라는 결국 금서를 찾아 지하동굴에 돌아왔다. 제 시체가 강가에 떠 있는 것을 보고도 에스텔라는 아무렇지 않게 물속에 뛰어들었다.

다시 주술이 행해졌다. 이번엔 이자크와 아이들과 행복했던 그 시간대로 돌아갔다. 에스텔라는 그 행복을 조금 더 만끽하려 했다. 하지만 규칙을 행한 형벌이 끝나지 않았던 걸까. 원래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자크와 쌍둥이들, 넷이서 소풍을 떠난 날, 아이들은 연못에 빠져 죽었다. 이자크는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빠졌고 두 사람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졌다.

에스텔라는 세 번째로 회귀를 했다.

강가에 떠오른 제 시체들을 봐도 에스텔라는 점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주술을 외운 뒤, 시간이 멈춘 강에 스스로 들어가 폐에 물이 차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 고통은 회귀를 한 이후부터 단 한 순간도 잊히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내가 죽어서 시간을 되돌리면 우리는 다시 함께할 수 있어.

“나만 죽으면, 우리는 다시 기회를 얻는데. 내가 마다할 이유가 있겠어요? 나만 희생하면 당신과 아이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데!”

네 번째 회귀를 했다.

에스텔라는 오로지 버트랜드를 저지하고 이자크와 아이들을 살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미 세 번의 회귀로 인해 기억과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행복했던 기억들보다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고, 에스텔라는 매번 자신이 죽었을 때의 고통은 물론 이자크와 아이들을 잃었던 과거의 감정과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 기억들은 그녀가 아무리 잊으려 해도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에스텔라는 미쳐갔다.

어떻게 해서든 이자크와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은 점점 그녀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자크와 아이들을 아예 자신과 버트랜드로부터 떨어뜨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자크가 사람들을 모아 혁명단을 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혁명단에 들어가서 일을 도모해서는 안 돼. 혁명단으로는 버트랜드에게 택도 없어.

그를 빼내자.

그의 의견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제일 중요한 것은 이자크와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것뿐이니까.

일부러 그들에게 매몰차게 대하고 상처를 줬다.

어쩌면 버트랜드가 아닌 내가 문제일 수도 있어. 나 때문에 이자크와 아이들이 자꾸만 죽는 거야.

에스텔라는 과거 아버지가 만들었던 가상의 귀족 ‘네메시스’의 이름을 빌렸다. 델라 랭과 가브리엘에게 투자를 하여 자금줄을 만들었다. 그 자금들을 보석과 액세서리로 바꿨다. 사치품들이라 버트랜드의 의심을 살 일은 없었다.

그 돈으로 오르테즈 남매를 후원했다. 에스텔라는 그 남매들을 도와 사업을 시작했고, 그들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당신네들이 조직한 혁명단에서 이자크를 제외시켜 주세요.

당신들이 버트랜드를 몰아낼 수 있을지 나는 확신이 가지 않아요. 혁명에 성공하든 실패해서 모두 숙청당하든, 나는 당신들과 함께할게요. 하지만 이자크와 아이들은 빼줘요. 그들은 해외로 가서 새 삶을 살아야 해요.

오르테즈 남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라는 그날 이자크를 찾아가 말했다.

‘이혼해줘요, 이자크.’

에스텔라는 그때 자신을 보며 상처받은 듯 묻는 이자크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생긴 겁니까?’

그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본 마지막이었으니까.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고, 이자크는 추방 명령을 받고 아이들과 함께 캘리아나 왕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에스텔라는 이게 그나마 최선이었다 생각했다. 자신은 여기서 버트랜드에게 복수를 끝맺을 것이며 모든 것이 끝나면, 어쩌면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면, 이자크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사는지 몰래 구경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캘리아나로 향하던 선박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만.

바다 정 가운데에서 태풍을 만났다.

배는 산산 조각났다.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다.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메시앙에 남아있던 에스텔라에게 돌아온 것은 그들이 잘 지낼 거라는 말이 아닌, 그들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였다.

비보를 들은 에스텔라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트랜드를 찾아가 당신을 저주할 거라는 말만 남긴 채 그녀는 다시 지하 동굴로 내려갔다.

델라와 아르텔이 말렸다. 이번에도 회귀를 하면 공주님이 위험합니다. 모든 기억을 잃고 미쳐버릴 수 있어요!

상관없다. 지금도 이미 미친 상태야. 이자크와 아이들을 잃고 미치느니 차라리 그들이 살아있을 때 미치는 게 나아.

그리하여 다섯 번째 회귀를 했다.

기억이 완전히 엉켜버려 열아홉 살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잊은 채로 눈을 뜨고 말았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나도 이다음엔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나는 미쳐버려서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도 있고, 어쩌면 또다시 강가에 뛰어들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래도 이번엔 다를 거라 믿어요.”

에스텔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담담한 어조였으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이번에는 꼭 성공시켜야 해. 에스텔라가 제 배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이제는 나만 죽는 게 아니니까요. 이제는….”

“당신만 혼자서 다 짊어진 거잖아. 에스텔라. 당신만 혼자서-”

“나는 내가 죽음을 느꼈을 때보다 당신과 아이들의 시체를 마주했을 때가 더 두려웠어.”

이자크가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텔라 앞으로 다가왔다. 에스텔라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없이 꽉 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에스텔라. 미안해요. 미안해….”

“흐으… 흐어엉….”

“혼자서 무서웠지.”

“허어엉….”

무서웠다.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기억은 점점 뒤죽박죽이 되고, 죽음이라는 건 무뎌진다.

에스텔라는 이자크에게 매달려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

이다음이 존재할까?

나는 언제쯤 이 회귀를 관둘 수 있을까.

강바닥에는 내 시체가 몇 개가 쌓이게 될까.

같은 시간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자신의 시간을 모두 버린 채 오직 이자크와 아이들을 살리는 데에만 쓴 것이다.

“이제는, 같이 가요. 에스텔라.”

“이자크… 흐윽….”

“이제는 같이 가.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게.”

“흐어엉, 또 잃을까 봐 겁이 나.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과 아이들을 잃지 않을지 모르겠어. 무서워. 같은 시간을 계속 반복해서 사는 게 너무 무서운데, 혼자가 될까 봐 그게 더 무서워. 나 혼자 두지 마요, 이자크. 제발. 제발….”

이자크의 옷가지에 매달리듯 에스텔라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더 꽉 껴안았다.

*

정신을 잃고 이자크의 품에 안겨 마차에 오르는 에스텔라, 시녀들의 품에 안겨 급히 마차에 타는 쌍둥이들. 잠이 오지 않아 창가 근처를 서성이던 릴리는 그 장면을 목격했다.

이 새벽에 왜 저리 급히 돌아가는 거지?

시녀를 시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물었지만 시녀들은 사실 저들도 잘 모르겠다며, 물에 빠진 것처럼 쫄딱 젖은 이자크 경께서 마찬가지로 쫄딱 젖었지만 흙투성이에 산발이 되어버린 공주님을 안고 급히 방에 돌아온 것밖에 모른다 대답했다.

흙투성이가 되었다고?

에스텔라의 몽유병이 다시 도진 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에스텔라에게 그리 심하지는 않은 몽유병 증세가 있긴 했다.

“온실에 있다 나오신 것 같은데. 아무튼 저희가 뭘 여쭤보기도 전에 급히 저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도 이를 아느냐.”

“아마 지금쯤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그래.”

릴리는 이만 물러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시녀는 입을 우물거렸다.

“할 말이 더 있는가?”

“저, 국왕 전하께서 오늘 아침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피곤하니 못 가겠구나. 트라비아로 돌아가는 날이기도 하여 좀 더 쉬고 싶다 전해드리거라.”

“꼭, 나오시라 하셨습니다. 트라비아 국왕 전하도 같이요.”

시녀의 말에 릴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와서 가족 행세라도 하고 싶은 건가. 동이 트자 릴리와 그의 남편 트라비아 국왕은 옷을 갈아입고 식당가로 내려갔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건지 버트랜드가 릴리와 트라비아 국왕을 보곤 미소를 지었다. 릴리는 참으로 그 미소가 역겹다 생각했다.

“트라비아로 돌아가기 전에 아침 식사 한 번 정도는 같이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허허, 이해 좀 해주시길 바랍니다. 내 딸이 우리 릴리 하나뿐이라서.”

트라비아 국왕은 이해한다는 듯 씩 미소지으며 릴리를 쳐다봤다.

아침부터 진수성찬이었다. 릴리는 입맛이 없는 듯 고기 한 점만 그릇에 둔 채 포크로 툭툭 고기를 찔러대기만 했다.

“부인, 속이 좋지 않습니까?”

“네.”

“이런. 죽이라도 달라 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전하.”

릴리는 괜찮다며 제 걱정을 해주는 남편을 보곤 살짝 미소 지었다. 트라비아 국왕. 왕자였을 때 만나 정략결혼을 하였지만 그는 좋은 남편이었다. 딸과 아내에게 다정하고 그들만을 바라보는 그런 남자였다.

물론 트라비아 선왕과 버트랜드가 한 협약 때문에 억지로 이 메시앙을 점령하게 돼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간 릴리는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이 행복할 자격이 없다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해서 그의 사랑을 받고, 그에게 사랑을 주면서도 죄책감이 가장 먼저 앞섰다.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난 방관한 거잖아. 아버지가 에스텔라와 이자크, 그리고 그들의 가족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난….

“참. 일전에 말했던 것 말입니다.”

버트랜드가 트라비아 국왕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트라비아에게 메시앙을 팔아치울 생각이었다. 선왕은 욕심이 많은 이였다. 트라비아가 왕국만이 아닌 대륙을 통합한 제국이 되길 바랐다.

다행히 릴리의 남편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지라 제 아버지가 억지로 한 협약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지금도 버트랜드가 그 얘기를 꺼내려 하자 당황하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지 않은가.

“트라비아 대신과의 얘기는 다 끝났습니다. 에테리아와의 협약은 이미 다 철회했고요.”

“아. 그러십니까.”

“해서, 언제쯤이면 제가 공직을 받을 수 있을까요.”

“트라비아에 돌아가 회의를 마치는 대로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저도 정식 국왕은 아닌지라, 아버지와 협약 얘기가 오고 간 것이니 아버지의 의견도 필요하겠지요. 다른 대신들의 의견도 있고요….”

확실한 대답이 아니라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지 버트랜드는 조용히 수염을 쓸어내리며 슬쩍 미소 지었다.

가시방석 같은 식사시간이 끝났다.

남편이 다른 대신들과 마지막으로 사냥놀이를 하러 간 사이 릴리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서재에서 서류들을 보고 있던 버트랜드는 갑자기 찾아온 제 딸의 모습에 안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비를 직접 찾아온 건 처음이구나, 릴리.”

릴리는 메시앙에 도착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직접 찾아간 적이 없다. 자발적으로 먼저 말을 건 적도 없다.

“정말로 메시앙을 트라비아에 팔아넘길 작정이세요?”

릴리가 물었다.

“이미 얘기 다 끝나지 않았니.”

“가만히 계시면 한 나라의 국왕이실 텐데, 뭐하러 트라비아의 속국으로 들어가 공직을 얻으려 하십니까? 이만큼 얻으셨으면 됐지, 얼마나 더 바라시는 거예요?”

“메시앙은 작은 나라다. 트라비아의 반도 되지 않아. 그 작은 나라가 언제까지 왕국이라는 걸 유지하겠느냐. 선대 왕들은 저 잘난 줄만 알고 미래를 볼 줄 몰랐어. 지금의 넌 날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후에는 이해할 것이다.”

“뭘 이해한다는 거죠. 나라를 팔아먹고, 제 딸을 왕비로 앉히려는 걸, 제가 어떻게 이해하죠? 제가 정말 감사해할 것 같으세요?”

“너야말로 이만큼 얻었으면 이제 그만 인정하거라. 이곳에서는 대공의 여식뿐이야. 제국의 황비가 될 수 있는데 넌 그걸 왜 마다하는 게냐.”

“백성들에게 미안하지 않으세요? 아니, 에스텔라와 이자크에게는요. 선왕께는요, 디에스 변경백한테는 미안하지 않으십니까? 보기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제 친구들을 모두 배신하고 죽여서 국왕까지 올라간 사람이, 겨우 제국에 나라를 팔아버리는 게?!”

“릴리아나. 그만해라.”

“전 에스텔라랑 이자크를 볼 때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어쩜 그렇게 뻔뻔하세요.”

“그러는 너도 결국은 내 덕에 이득 본 것 아니냐.”

“….”

“혼자 정의로운 줄 알지, 릴리아나. 넌 정말이지 그저 곱게 큰 대공가의 여식일 뿐이야. 야망도, 목표도 없는 아이였으니까. 네가 가문이라도 제대로 이끌겠어? 아니, 넌 분명 남편에게 가문을 넘겼겠지. 그리 평범한 애를 제국의 황비로 만들어 한 시대의 역사로 기억하게 만들어 주려 노력하는 게 이 아비다!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전 그런 거 바란 적 없어요. 그건 아버지가 원하던 거겠죠.”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 왜, 아비를 고발이라도 할 셈이냐. 무슨 증거를 어떻게 대서!”

“…그저 사람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짓을 한 건지 생각이라도 하셨으면 해서 온 겁니다.”

릴리는 이를 악문 채로 말한 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버지가 끔찍이도 싫다.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짓을 하고도 저렇게 뻔뻔하게 굴 수 있는가.

나는 이렇게 죄스러운데, 너무 죄스러워 내가 행복해서는 절대 안 될 거 같은데.

근데 어떻게 당신은 이렇게나 뻔뻔스러운 건가요?

아버지.

원래 그런 사람이셨던 겁니까?

빠르게 걸음을 걷던 릴리가 그 자리에 멈춰서 고개를 떨궜다.

*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아주 오 랜시간 동안 대화를 했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속삭이는 말이 아닌, 이제부터 어떻게 우리가 함께하여 버트랜드를 저지시킬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버트랜드가 메시앙의 주권을 트라비아에 팔아치울 생각이라는 건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인 에스텔라조차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이유는 상대국가가 매우 큰 왕국이라는 점, 또한 버트랜드는 집권 후 귀족들이 사병을 부리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원한다면 버트랜드는 그들에게 왕궁기사들을 호위기사들로 붙여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호위 뿐만 아니라 감시의 역할도 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두 버트랜드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버트랜드는 집권 전부터 이미 나라의 주권을 팔아치우고 있었어요.”

에스텔라가 말했다.

“그걸 디에스 변경과 아버지가 눈치챘고, 버트랜드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에게 남은 최소한의 신뢰 때문에 결국 아버지는 독을 드시고 디에스 변경은 누명을 쓴 거고요.”

“애초에 왕이 될 생각은 없었다는 거군요.”

“네. 그저 나라만 팔아치우고, 트라비아에서 공직을 받아 떵떵거리며 살 생각이었는데 일이 커진 거죠.”

“버트랜드와 대적하게 되면, 트라비아와도 대적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까, 에스텔라.”

“…아마도요.”

“아마도?”

“트라비아의 왕자가 대리 국왕을 하잖아요. 만약 릴리 언니가 남편을 설득할 수 있다면- 아니. 어려운 일이겠군요. 아군인지 적군인지 파악도 못 하겠는데 설득은 무슨….”

트라비아의 왕자는 제 아버지보다 유한 면이 있지만, 제 아비의 말에 꼼짝도 못 한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아마 대리 국왕을 하고 있어도 병상에 누운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들을 거라는 말이 많았기에 기대는 하지 말아야겠다.

“지금 귀족들이 모두 버트랜드에게 꼼짝 못 하는 상황이라 함부로 움직이기가 힘드네요. 사실, 저 역시 한번 당해봐서 그런지 막 덤비기도 무섭고.”

에스텔라가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무리하게 그와 대적하여 이자크와 아이들을 잃은 것에 아직도 죄책감을 가진 것 같다.

이자크는 그런 생각 말라는 듯 가만히 에스텔라의 손을 잡았다.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네?”

“모든 일이 가장 안정적이게 끝나는 방법이긴 하죠.”

“뭔데요, 이자크?”

“에스텔라. 당신이 다시 왕권을 계승하는 겁니다.”

“…불가능해요. 아버지의 유서에는 제가 원하면 언제든 왕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는 쓰여있지만, 그건 대리 국왕을 하고 있는 자의 승인도 필요하고요, 게다가 귀족 회의에서 만장일치를 받아야 해요. 지금 귀족 회의는 대부분 버트랜드의 사람들이에요. 저도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정면충돌하게 되면….”

에스텔라는 두 번째 회귀 때가 떠올랐는지 말끝을 흐렸다.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가 그녀가두려워한다는 것을 알려줬다. 그때는 그렇게 정면으로 충돌하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엔 실패했잖아. 이번에도 그러면? 이번에도 그렇게 되어버리면 난 정말 버틸 수 없어요, 이자크. 에스텔라가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자크는 잠시 에스텔라를 바라보다, 이내 조심스럽게 턱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대부분 버트랜드의 사람들인 거지, 모두는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당신이 지금 당장 왕권을 계승하지 않아도 됩니다. 분명 버트랜드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은 존재합니다. 당신이 왕권 계승 후계자에 뜻이 있다는 것만 알려도 사람들은 동요할 거예요.”

“하지만 버트랜드는-”

“에스텔라. 버트랜드는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만큼 똑똑하고 강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잘못되면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자크, 난 이미 한번 겪어봤잖아요. 두 번째 때도 당신은 우리가 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단 말이에요.”

“날 믿어요.”

“….”

“에스텔라.”

“….”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에스텔라는 두려웠다. 하지만 결정해야 했다. 한참 동안 이자크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에스텔라가 그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럼 먼저 아버지부터 빼 와야겠어요.”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지금 법원에 와 있다.

[협의이혼 조정 기간 연장 및 폐지 신청서]

당사자 : 에스텔라 데 메시앙

당사자 : 이자크 몬 (전) 디에스

신청의 취지 :

위 당사자 사이에는 진의에 따라 협의이혼을 철폐하고 조정 기간을 끝내기로 합의하였다.

위와 같이 이혼 신청 폐지 의사가 확인되었다.

라는 확인을 구함.

첨부서류 :

남편의 혼인 관계 증명서와 가족관계 증명서 1부

부인의 혼인 관계 증명서와 가족관계 증명서 1부

진술요지서

확인기일 : 오르고력 650년 11월 25일

신청자 : 에스텔라 데 메시앙

신청자 : 이자크 몬 (전) 디에스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각 신청자의 이름에 제 이름을 사인했다. 이 서류를 들고 법원에 찾아가게 되면 두 사람의 이혼 조정 기간은 끝이 나게 된다. 물론 이혼 신청 역시 폐기된다. 이제 두 사람은 완벽히 재결합을 한 것이므로 귀족들도 더는 두 사람이 이혼할 거라는 둥 근거 없는 말을 해댈 수 없게 되었다.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성 옆에 쓰인 (전) 디에스라는 글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버트랜드로 인해 가문이 몰락하면서 그의 성은 (전) 귀족이라는 뜻이 되어버렸다. 버트랜드가 빼앗아 가 버린 그의 가족들을 돌려주지는 못해도, 그의 가문 이름만큼은 돌려주고 싶다.

“에스텔라?”

“네?”

“다 썼으면 내야죠.”

“아. 네.”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서로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쳐다봤다. 에스텔라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작성한 서류를 들고 창구로 향했다.

창구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은 일하느라 바쁜척 하면서도, 그들의 시선은 모두 에스텔라와 이자크에게로 향해있었다. 에스텔라가 창구 직원 중 한 명에게 신청서를 내밀었다. 직원이 얼른 신청서를 받아들었다.

“신청서가 받아들여질때까지 어느정도 시간이 걸리는가?”

“예, 공주님. 마지막 조정기간까지 합하여 일주일 정도 걸립니다.”

“조정 기간은 필요 없는데, 바로 신청하지는 못하는 건가?”

“조정 기간을 빼시길 원하시면, 이틀 내로 가능합니다 공주님.”

“그럼 조정 기간은 빼고 최대한 빨리 처리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에스텔라는 씩 웃으며 이자크에게 팔짱을 꼈다.

“이제 가요. 여. 보.”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보며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세상 다정한 눈빛과 손짓으로 에스텔라의 허리를 감싸며 보란 듯이 답했다.

“그럽시다. 부인.”

두 사람은 그렇게 법원은 모든 직원들에게 꽁냥거림을 보여준 뒤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들은 그들이 나가자마자 서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아니, 분명 몇 개월 전만 해도 찬바람 쌩쌩 불던 부부 아니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사이에 화해도 하고 덤으로 셋째까지 생기는 건데?

방금 두 분 눈빛 봤어? 세상에. 꿀이 떨어진다는 게 저런 걸까. 양봉해도 되겠어.

직원들이 서로 주접을 떨어댔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 잠을 잤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모든 기억을 되찾은 에스텔라.

이제는 버트랜드를 저지할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상태가 아직도 걱정될 뿐이다.

다섯 번의 회귀까지 모두 기억하는 그녀가 과연 괜찮을 걸까.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어갈때의 생생한 느낌까지 잊지 못하는 그녀가 정말 괜찮은 걸까.

에스텔라는 과하게 감정이 올라가 있을 때가 많아졌다.

열아홉 살 때의 그녀랑 별반 차이 없어 보이지만, 이자크에게는 그 미세한 차이가 눈에 보였다. 행동과 말투는 항상 신나 있고 과한 면이 없잖아 있는데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항상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루시와 루스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아끼는 것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 그 이면에는 강박에 가까운 두려움이 보였다.

기억을 되찾고 잠드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저 태중의 아이 때문에 몸의 변화가 일어나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모든 기억을 되찾고 몸과 정신이 더더욱 망가져 자꾸만 잠을 자는 걸까. 마차가 아무리 덜컹거려도 에스텔라는 한번 깨지 않고 저택까지 갔다.

저택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이자크가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고 몸을 흔들어야지만 겨우 잠에서 깼다.

오늘은 그마저도 깨지 않아 결국 이자크가 에스텔라를 안아 들곤 저택 안에 들어갔다.

곤히 자는 에스텔라를 침대에 뉘인 뒤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잠에서 깬 에스텔라는 잠시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과 이자크를 쳐다보다 이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마치 지금이 현실인지, 아니면 과거의 기억인지 인지하려는 것처럼.

“…또 깜빡 졸았네. 요즘 애기 때문에 잠이 많아졌나 봐요.”

“태명은 잠꾸러기로 지어야 하나.”

“귀여운 걸로 지어줘요- 잠꾸러기가 뭐야. 뭐. 잠꾸러기도 귀엽긴하네요.”

이자크는 그게 마음이 아팠다.

아직 그녀는 두려워하는 것이 더 컸다.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심정을 전부 이해하지 못한다. 에스텔라 말로는 목이 잘려서도 죽었고 전장에서도 죽었고 몇 번이나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느낌도 나지 않는다. 그저 남의 얘기를 듣는 것 같을 뿐이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그 모든 순간을 살았고, 느꼈고, 기억하지 않나.

에스텔라는 항상 괜찮다 말한다. 지금 이자크와 아이들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고.

하지만 괜찮을 리가 없잖아, 에스텔라.

이자크가 가만히 에스텔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뭐예요. 왜 유혹해요.”

에스텔라는 그의 손에 얼굴을 부비작대며 말했다.

“유혹하는 건 에스텔라같은데요.”

“에이, 들켰다.”

“의사가 당분간 관계는 금지랬습니다.”

“….”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다는 소리입니다.”

“치.”

에스텔라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자크는 에스텔라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이 든 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아 얼른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에스텔라는 그가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조차 싫어한다. 오히려 지키지 못해 자신이 미안하다 말하는 사람이니까.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행동들만 했다. 아이들과 웃고 떠들고, 식사를 하고, 간간이 저택 뒷동산에 나들이 가고, 같이 차를 마시고, 밤이 되면 한 침대에 한 이불 덮고 자기 전까지 서로 끌어안으며 소소한 얘기를 하는.

아주 사소한 평화들을 조금이라도 악착같이 해내겠다는 마음이었다.

이 평화는 얼마 가지 못할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