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진짜 네메시스의 후원을 받는다고? 오르테즈 가문이 대체 뭐라고!
귀족들이 웅성댔다.
“딱히 사업 홍보를 위해 나온 건 아니었는데, 후작 부인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정말 홍보라도 하고 가야겠어요. 이왕 온 김에 홍보하겠습니다. 저희 오르테즈 남매가 네메시스 님의 도움을 받아 가문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거기에 네메시스 님도 함께하시니 다들 관심 많이 가져주세요.”
네메시스가 사업에 투자까지 한다는 것은 이제 곧 그 사업이 대성하게 될 거라는 말이기도 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냉담했던 귀족들의 반응이 이제는 그녀에게 정확히 무슨 사업을 시작하는지, 또 다른 투자자를 찾지는 않는지, 네메시스와는 어떻게 연이 닿았는지, 그의 정체는 무엇인지 묻고 싶어 안달 난 듯했다.
전화위복 되어버린 그들의 관계를 못 버틴 올란도 후작 부인이 악을 쓰듯 물었다.
“그럼, 오르테즈 양. 당신은 직접 네메시스 님을 보았으니 그 정체를 알겠군요? 그가 누군지 말해보세요.”
“네메시스 님의 후원을 받은 후원자들에게 가서 그리 물어보시지요. 다들 그리 쉽게 말해주나. 네메시스 님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그분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짓입니다. 올란도 후작 부인, 그러니 이 이상 네메시스님을 겨냥한 무례한 질문들은 삼가 주세요.”
헬렌의 말이 끝나자 후작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코에서는 성난 무소처럼 콧김이 쒸익 하고 나오는 것 같다. 얼마 안 가 후작 부인은 제 남편을 찾으러 가야겠다며 급히 자리를 떴다. 그녀를 따르는 다른 귀족들마저 사라지자 남은 귀족들이 헬렌과 알렌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오르테즈 남매에게 몰려드는 귀족들을 에스텔라는 멍하니 쳐다봤다.
“에스텔라? 왔구나.”
뒤에서 가녀린 음성이 들려왔다. 뒤를 도니 릴리와 그의 남편이 다가오고 있었다. 릴리는 에스텔라가 와준 것에 기뻐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에스텔라의 뒤에 서 있는 이자크를 보더니 이내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릴리는 이자크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자크는 과거 결혼까지 했었던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자크는 오로지 에스텔라만 쳐다보고 있었다.
“릴리 언니.”
“그래. 연회 와줘서 고마워. 저들은 왜 이리 몰려있는 거니?”
“…오르테즈 남매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죠.”
“그, 그래? 노블레스들이 그렇지 뭐.”
릴리는 묘하게 차가워진 에스텔라의 모습에 더 몸 둘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릴리는 매우 불안해 보였다. 눈동자는 이리저리 초점을 못 맞추고 흔들렸다.
“릴리 언니…?”
죄책감이 들어 눈을 못 마주치는 건가. 역시 뭘 알고 있으니 이런 반응인 거겠지. 에스텔라는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한때 친언니처럼 따랐는데. 아버지처럼 따르던 대부가 배신을 했는데 그 딸이라고 다를까.
“귀족들에게 가서 인사 좀 해요. 언니 오랜만에 온 거잖아. 일국의 공주님이시니까 가서 상황정리 좀 해줘요. 나는 잠시 아이들을 보러 가야겠네요.”
에스텔라가 이자크와 함께 릴리를 지나쳐 가려 할 때였다. 릴리가 다급한 손으로 에스텔라를 잡았다.
“…쌍둥이들 생일 축하해.”
“선물 고마웠어요.”
“선물 잘 받았니?”
“오랜만에 추억을 떠올렸어요.”
“그 인형들. 기억나지, 그치?”
에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가 활짝 미소를 짓는다. 에스텔라는 도대체 릴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왜 이제 와서 그때의 추억거리를 떠올리라는 건지, 정말 아버지의 일에 언니만은 연관이 없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릴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뿐더러, 그녀는 버트랜드의 딸이다.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야, 에스텔라. 나는 네가 그 인형들 기억 못 할까 봐 걱정했어.”
“그걸 어떻게 잊겠어. 언니가 항상 어머니 때문에 우울해하던 날 그 인형으로 위로해줬잖아.”
“그치?”
“애들이 그 인형을 엄청 좋아해. 오늘도 들고 왔어.”
“그래? 그러니?”
릴리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뭐가 그리 기쁜 걸까? 에스텔라의 속마음은 타들어 가는데 말이다. 에스텔라는 더는 마냥 모른 척 웃는 얼굴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에스텔라. 그 인형, 그 인형….”
릴리가 뭐라 말을 하려 할 때쯤이었다. 와아아아앙! 우는 소리가 들렸고, 시녀들이 다급하게 에스텔라에게 달려왔다. 뒤이어 다른 시녀에게 안긴 루시와 루스가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이름을 서럽게 부르며 품에 안겼다.
“흐아아앙! 엄마!”
“압빠아아-”
어찌나 목청 크게 울어대는지, 오르테즈 남매에게 쏠려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단번에 에스텔라와 릴리 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때를 찾은 오르테즈 남매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이자크와 모종의 대화가 있었는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그들은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루시? 루스, 왜 이렇게 울까? 응?”
“흐아아앙-”
무슨 억울한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서러워하는지 모르겠다. 에스텔라가 루시를 안아 들었고 이자크는 루스를 안아 들며 얼른 다독이기 시작했다. 릴리는 아이들의 품에 안겨있는 포쉐린 인형과 에스텔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기, 에스텔라-”
뭔가 말하려 했으나 아이들 다독이는 것에 정신없어 보이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이내 가만히 제 입술을 깨물다가 시녀에게 상황을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니?”
시녀들이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잠깐 애기씨들끼리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루시와 루스가 서로 싸웠다는 거니?”
에스텔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둘이 싸우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자 시녀가 에스텔라의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아니요, 아가씨와 도련님이 싸우셨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문의 자제분과 말다툼이….”
“한스 키에프 때문이에요.”
체스 백작 부부네 장남인 레일리와 에단이 어느새 방에서 나와 에스텔라에게 말했다. 키에프 공작 가문의 애와 쌍둥이들이 싸웠다고? 에스텔라의 질문에 레일리가 문 뒤에서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는 키에프 공작 가문의 어린 영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쟤가 루시한테 먼저 시비 걸었어요.”
그러자 문 뒤에 숨어있던 키에프 가의 영식이 빽 소리쳤다.
“시비 안 걸었어!”
“시비 건 거 맞거든.”
어느새 상황을 전해 들은 키에프 공작 부부가 얼른 귀족들 무리를 뚫고 나왔다. 그들은 제 사고뭉치 어린 아들을 흘겨보며 얼른 문 뒤에서 나오라 손짓했다. 키에프 공작이 물었다.
“뭐라 시비 걸었니.”
“저 진짜 별말 안 했는데….”
어린 녀석이 풀이 죽었다. 에스텔라는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고 싶진 않아 점잖게 키에프 가의 영식에게 물었다.
“무슨 말은 했는지 말해보렴.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지.”
“….”
어린 영식은 에스텔라와 제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입만 삐죽댔다. 그러자 에스텔라 품에 안겨있던 루시가 그에게 삿대질하더니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빨리 말해바! 너가 그랬잖아! 나는 이제 엄마 없다고! 아빠 따라가면 우린 이제 거지라고!”
“그렇게 말 안 했거든! 그냥 너네 엄마 아빠 이혼하게 되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 거거든!”
“우리 엄마랑 아빠 이혼 안 하거든!”
“우리 엄마 아빠가 너네 엄마 아빠 이혼한다고 말했단 말이야!”
“우리 엄마 아빠 이혼 안 해! 너네 엄마 아빠가 틀린 거거든! 우리 애기도 있거든?! 너는 애기도 없자나!”
“애기가 어딨는데!”
“요기에 이따!”
루시가 정확히 에스텔라의 배를 가리켰다. 루시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귀족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이런. 망했네. 에스텔라는 당황한 얼굴로 이자크와 눈을 마주쳤다.
“…하….”
이렇게 갑작스럽게 밝히는 건 또 내키지 않지만,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엄마! 요기에 아가 이찌! 있지요!”
“…으응….”
“엄마랑 아빠 이혼 안 하지요!”
“…그, 그럼….”
“거봐! 이 바보야, 너는 틀려써! 알지도 못하는데 왜 아는 척하냐!”
루시가 의기양양하게 키에프네 어린 영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키에프 영식은 나는 몰랐지, 미안해에, 하며 뒷통수를 긁었다. 체스 부부의 두 아들들은 어른들의 눈치를 한번 둘러보다 이내 루시와 루스에게 우리 다시 방에 가서 놀까? 하며 손짓을 했다.
자신들이 또 얼마나 커다란 폭탄을 투척한 줄도 모른 채 기분이 풀린 건지 루시와 루슨 엄마 아빠 품에서 내려와 체스 백작 부부네 아이들과 손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어른들만 어색해졌다.
정확히는 에스텔라와 이자크만.
그리고 어쩌다 보니 제 아들이 공주님네 셋째 소식을 밝히는데 일조해버린 키에프 공작 부부 역시. 어색한 공기를 깨고 누군가 물었다.
“세상에, 에스텔라. 셋째를 임신한 거니?”
릴리였다. 릴리는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에스텔라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귀족들 역시 세상에, 부부 연회에서 한 말이 사실인가 봐요. 하며 에스텔라와 이자크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제 체스 백작 부부네처럼 이혼 신청 취소하겠네요. 아마 메시앙에서는 두 번째겠지요? 그럼 애가 들어섰다는 것은- 어머, 정말 사이가 돌아온 게 맞나보네. 하며 저들끼리 수근거렸다.
“너무 축하해, 에스텔라!”
릴리 버트랜드 공주는 에스텔라의 마음도 모른 채 환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도 질세라 축하드립니다 공주님, 세상에 두 분 사이가 좋아지셨다는게 사실이었군요! 하며 하나둘 말을 얹기 시작했다.
사실 안정기에 들기 전까지는 이들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 셋째를 임신한 지 이제 겨우 세 달쯤 되어 갈까 하는 임신 초기였고, 의사 말로는 이때 유산이 제일 많이 된다고 조심해야 한다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괜한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 말을 아끼려 했건만, 우리 깜찍이들이 또 요로코롬 실토하게 만들어 주네…! 에스텔라가 못 살겠다는 듯 웃음을 꾹 참으며 이자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와 꼭 잡은 손을 들며 말했다.
“다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아요. 저희 셋째 생겼어요.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발표할 계획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오늘 말하게 되었네요.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배 속의 아이가 축하를 받는 건 기쁜 일이니까요. 그쵸, 여보?”
에스텔라가 고개를 위로 젖히며 저보다 머리 한 뼘 반이 큰 이자크를 올려다봤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 광경에 마치 저들이 당사자라도 된 양 광대가 도드라지게 웃으며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에스텔라의 임신 소식은 이 넓으면서도 좁은 왕궁 연회장에 빠르게 퍼졌다. 귀족들은 세상에 정말 금슬이 좋아진 건가 봐요, 하면서도 근데 그게 이자크 경의 애라는 게 확실할까요? 등의 심술궂은 추측들도 나왔다.
물론 그런 못된 추측들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이혼하길 바라는 이들이 하는 말이었을 뿐, 의외로 많은 귀족들이 둘의 재결합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소식은, 잠시 연회장에 빠져나가 있던 국왕 버트랜드에게까지 전해졌다.
사실 버트랜드는 연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대공이었을 때도 그저 ‘일’을 위해 간 것뿐이지 그는 사실 귀족들과 떠드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장소를 제일 싫어하는 버트랜드였기 때문에 그는 오늘도 이렇게 큰 연회를 열고도 잠시 축사만 한 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휴게실에 가 있었다.
연회장에는 보이지 않는 국왕의 두 번째 귀와 입이 존재한다. 평범한 귀족들처럼 분장하고 그들 사이에 껴서는 귀족들이 하는 말들을 죄다 들은 뒤 국왕에게 전달하거나, 국왕이 원하는 것을 대신 소문처럼 퍼뜨리는 일을 하는 이들이었다.
올란도 후작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리비에 가와 헤르츠 가문이 결혼 동맹을 맺을 예정 같습니다. 헤르트 가문은 도노반 가문과 틀어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주 잡다한 이야기까지도 국왕에게 전했다. 오르테즈 남매가 네메시스의 후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버트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에스텔라 공주님이 셋째 임신을 하셨다 합니다. 버트랜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에스텔라가 셋째를 임신했다고?”
“예, 전하. 곧 이혼 신청을 철폐할 것이라 합니다.”
“셋째를 임신했다고…. 이자크의 애가 맞단 말이더냐.”
“두 사람의 사이가 진정으로 좋아 보이는 것이, 거짓으로 꾸며낸 사이 같지는 않았습니다.”
버트랜드가 가만히 제 수염을 쓸어내렸다.
요 며칠 새 이자크가 잠잠하더니, 이런 이유였던 건가. 본의 아니게 커다란 약점 하나가 잡힌 셈이다. 이자크 역시 에스텔라를 사랑한다면, 태중의 아이를 지키고 싶다면, 제 아비꼴 나고 싶지 않다면 저 이상 허튼수작은 부리지 않을 것.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 위협이 되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거슬리는 그런 존재. 그게 바로 이자크였다. 아무리 몰락한 변경백의 후계자라 한들, 변경백의 후계자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슬린다.
겨우 죄를 뒤집어 씌워 변경백 가문을 처리했지만, 사실 버트랜드는 알고 있다. 아직 국민들 대다수가 디에스 가문에 대한 평판을 매우 좋게 내린다는 것을. 분명 오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디에스 변경백께서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을 거라고 믿는 이들이 대다수다.
귀족들이라고 다를까. 지금이야 그 세력들이 거의 힘을 잃어 저 구석에 처박혀있다지만 맨 처음 디에스 가문의 재판을 했을 때 귀족들 대다수가 그가 했을 리 없다 믿었다. 조작된 증거와 매수된 판사로 급하게 판결만 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히려 내가 발각되었을지도 모르지.’
버트랜드가 후, 한숨을 내쉬며 제 안와 부근을 꾹꾹 눌러댔다. 그러니까 왜 자꾸 일을 크게 만들어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네, 디에스.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버트랜드가 중얼거렸다.
그는 이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허공을 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에스텔라가 셋째를 가졌다니, 내 직접 가서 축하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나.”
호위기사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내려간 버트랜드는 제 딸과 함께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시달리고 있는 에스텔라를 발견했다. 릴리 버트랜드는 제 아비와 눈을 마주치자 활짝 웃고 있던 얼굴을 빠르게 굳히곤 입을 다물었다.
아직 내게 화가 나 있군.
버트랜드는 저와 눈을 마주칠 생각을 안 하는 릴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끝난 이야기를 아직도 저리 붙잡고 있는 딸아이를 보니 답답한 마음이 든다. 결국에 저 역시 아비가 한짓거리로 이득을 얻은 셈이면서 어찌 아비를 저리 불한당 보는 눈빛으로 본단 말인가. 괘씸한 마음이 들어 버트랜드 역시 릴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귀족들은 국왕이 나타나자 얼른 인사를 올렸다. 그들에게 인자한 척 웃으며 고개를 까딱인 뒤 에스텔라를 불렀다.
“에스텔라야.”
귀족들은 양 갈래로 나뉘어 국왕이 에스텔라에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했다. 에스텔라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혀를 찼다. 이자크와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 매우 기쁜 소식을 들었단다. 네가 이자크와의 사이에서 셋째를 가졌다는 게 사실이니.”
“네, 전하.”
“축하한다 에스텔라. 자, 여러분, 오늘의 연회는 에스텔라 공주와 이자크 경, 그리고 태중의 아이를 위해 축배를 듭시다.”
국왕의 말에 귀족들이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에스텔라와 이자크 역시 와인잔을 살짝 들며 분위기를 맞췄지만, 에스텔라는 속으로 버트랜드를 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뻔뻔스러운 인간.
태중의 아이를 위해 축배를 들기는커녕, 이제 이 태중의 아이로 나와 이자크 그리고 우리 가족들을 협박할 거라는 걸 내가 모를 거 같아?
“전하.”
“평소처럼 대부님이라 부르거라. 에스텔라야.”
“대부님, 오늘 왕궁에 온 겸, 아버지를 뵙고 싶어요. 또 너무 오랫동안 왕궁에서 떨어져 지냈기에 오랜만에 이곳에서 묵고 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 되다마다.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실 거다. 통탄스러운 일이구나. 선왕께서 오늘 네 소식을 들으셨다면 분명 기뻐하셨을 텐데.”
버트랜드는 수준급의 실력을 가진 연기자였다.
그는 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진심으로 안타까운 열연을 펼쳤다. 과거에는 어땠을진 몰라도 지금의 내겐 안 통해요, 버트랜드 대공. 에스텔라가 그를 보며 방긋 미소지었다.
*
에스텔라는 그동안 회피하고 있었다. 반사 상태의 미라처럼 말라버린 아버지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너무나 달라져 버린 왕궁의 모습에, 그리고 혼란스러웠던 상황까지 모두 더해졌기에 에스텔라는 아예 왕궁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살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멍청했던 짓이었는지 모르겠다. 더 자주 오고 더 자주 생각하고 더 자주 의심해볼걸. 에스텔라는 여전히 미라같이 비쩍 마른 아버지의 손을 만지작댔다.
쌍둥이들은 데려오지 않았다. 이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분명 무섭다고 울며 도망갈 것이 뻔했다. 그러면 아버지한테도, 아이들한테도 안 좋은 기억을 심어주는 거니까. 이자크가 아이들과 다른 곳에서 놀아주고 있는 동안 에스텔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말 없이 아버지의 손만 잡고,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밖에 나가 있던 선왕의 주치의가 시간이 흐르자 안으로 들어왔다.
“공주님.”
주치의는 이제 그만 나가야 될 시간이라는 듯 에스텔라 뒤에서 서서 그녀를 불렀다. 에스텔라가 물었다.
“켈리언, 자네는 아버지가 눈을 뜰 거라고 생각하는가?”
“….”
“대부께서는 좋은 약재들은 모두 모아다 쓴다 하시던데.”
“예. 이국의 약재들도 모두 사들이십니다.”
“한데 차도가 없어 보이는구나.”
“….”
“저번에는 약재 향기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했는데 오늘은 약재 향기도 나질 않고.”
“오히려 과한 약재를 쓰면 환자에게 좋지 않다 하여 하루에 적당량만 쓰고 있습니다. 공주님.”
“아버지의 영혼이 이 몸 안에 들어있다 생각하는가? 영혼이 몸 안에 없으면, 그건 죽은 상태가 아닌가.”
“….”
“만일 영혼이 있다 하여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데 그게 산 거라 할 수 있을까.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지낼 수는 없지 않는가.”
“공주님.”
“나는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잃었어. 그때의 어머니 역시 반사 상태셨지. 폐렴에 걸리셨는데 약의 부작용 때문에 숨은 쉬지만 정신과 몸이 깨어나지 않으셨어.”
에스텔라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반사 상태라 언젠가는 깨어날 거라고, 모두들 날 그리 위로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어. 어머니의 영혼은 이미 천국으로 갔는데, 아직 육체가 따라가지 못한 것이라면서, 어머니를 정말 사랑하지만, 보내줘야 한다고. 아버지가 잔뜩 울음을 참으시며 날 잡고 말해주던 기억이 나.”
에스텔라의 말을 의사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때, 어머니에게 죽는 약을 먹인 것이 자네였지?”
의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로라 왕비는 병세가 매우 심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피를 토하며 기절하기를 반복했고, 약재를 먹이면 어김없이 게워냈다. 곤히 잠을 자다가도 호흡곤란과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빈번한 일이었다. 삶에 의욕이 없어졌다. 왕비는 사는 것 자체가 매우 고통스러웠다. 매일 남편에게 그냥 죽여달라 애원했다.
벤자민은 사랑하는 아내를 죽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녀 스스로 반사 상태에 들고 나서야 벤자민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의사를 시켜 왕비에게 고통 없이 죽는 약을 먹이도록 했다. 원래는 마취제나 수면제로 쓰이는 약재인데 그걸 과다복용하게 될 시 마치 잠에 빠진 것처럼 온몸의 기능들이 멈추고 죽게 되는 것이었다.
벤자민은 어린 에스텔라가 이 일에 대해 모를 거라 생각했겠지만,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새벽에 잠이 깨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머니의 방에 들어가려던 때. 이미 안에 불이 켜져 있고 울고 계신 아버지와 그 옆의 의사를 봤을 때. 하얀 천으로 덮인 어머니의 모습을 봤을 때. 그때부터 에스텔라는 알게 된 것이다.
“공주님. 저는-”
“원망하지 않는다. 아버지도, 자네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오히려 어머니에겐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매일 그렇게 아파하셨던 분이야. 죽여달라 아버지에게 청하셨던 분이 그제야 편히 뜨신 거지.”
“….”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 중이네.”
“공주님…!”
“자네는 아버지의 주치의였으니 잘 알 테지.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생명을 악착같이 연장시키는 걸 원하시지 않는 걸. 그치? 자네가 아버지의 주치의가 된 지 몇 년째더라. 거의 30년이 넘지 않았나.”
벤자민의 주치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보필해온 사람이었다. 열여섯, 벤자민이 왕자였던 시절 때부터 왕이 되고 지금까지.
“예. 그렇습니다. 공주님.”
에스텔라가 조만간 뒤를 돌아 의사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말해보게. 켈리언. 자네는 뭘 숨기고 있는 거지?”
“…예?”
“질문을 바꾸겠어. 버트랜드 국왕이 자네한테 뭘 명령했지?”
메시앙의 국왕은 원래 항상 미리 유서를 작성해놓는다. 한 나라의 국왕이기에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를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사고사든, 병사든, 타살이든, 자살이든. 맨 처음 국왕이 되던 해에 유서를 하나 작성해둔 뒤, 내용 변경이 있을 때마다 유서를 고쳐 써야 한다.
나라의 후계는 누구에게 넘기고, 장례 방식은 어찌하고, 남겨진 가족들에겐 얼마큼의 유산을 넘겨주며 기타 등등.
에스텔라는 아버지의 유서를 본 적이 있다. 그녀 역시 아버지를 따라 유서를 써본 적이 있다. 아버지의 유서 내용에서는 항상 후계자는 에스텔라이며, 에스텔라가 후계를 거부할 시 그 후계를 이을 이는 에스텔라가 정하거나, 아직 그럴 판단이 서지 않을 나이면 에스텔라가 성인식의 나이가 될 때까지 버트랜드 혹은 변경백이 대리 수행할 것을 명시해놨다.
그런 뒤 오로라 헤르츠 가문에 70만 골드의 금화를 포상으로 내려주고 오로라가 재혼을 할시 50만 골드를 더 지불하라는 내용까지 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먼저 죽었는데 어머니가 나중에 재혼을 했으면 좋겠어요?
어린 에스텔라가 물었다. 아버지는 이리 말하셨다. 날 잊지만 않으면 된다. 나는 오로라가 날 그리워하며 고통스럽게 사는 것보다, 너와 오로라를 사랑해줄 다른 좋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
아버지의 유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한 차례 바뀌었다. 후계자 명시는 똑같았으나 자신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반사 상태가 되었을 경우 방도를 생각하지 말고 바로 장례를 치르라는 유서였다.
“아버지의 유서에는 그리 명시되어있는데, 주치의인 당신이 집행하지 않을 리 없다 생각했어. 아무리 국왕이 바뀌었다 한들, 선왕의 유서를 선왕의 주치의가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버트랜드 국왕께서 워낙 선왕을 아끼시다 보니-”
“자네에겐 선왕의 특권이 있잖나? 유서에도 명시되어 있고.”
만일 에스텔라나 그 이후의 국왕이 된 자가 나의 장례를 불허하고 계속해서 생명 유지를 시키려 할 때, 나의 주치의 켈리언에게는 국왕의 명령에 불복종할 특권을 부여한다.
“….”
“맨 처음 아버지가 반사 상태라 했을 때부터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었어. 자네는 버트랜드의 명령이나 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도 면책을 받을 특권이 있는 이인데 어째서 아버지를 아직까지 잡아두고 있는 건지. 무려 7년이나.”
“….”
“곰곰이 생각을 해봤지만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네. 그런데, 지금 바로 확신했어.”
“예…?”
“아버지는 반사 상태가 아닌 거지?”
“…”
의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스텔라가 다시 한번 물었다.
“버트랜드가 자네에게 뭘 명령했지?”
사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에스텔라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서는 공주와 그의 주치의, 그리고 차기 국왕 후보와 고위 대신 몇몇만이 볼 수 있다. 캘리언은 단순히 국왕이 명령했다 하여 선왕의 명령을 불복종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국왕의 주치의는 단순히 의술이 뛰어나서 뽑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전담으로 맡기 때문에 자신이 맡은 이에 대한 충성심, 신뢰도, 능력, 학벌, 혈연을 모두 살펴본다. 가족 중에 반란자가 있진 않은지, 사상검증은 기본이며 주치의는 국왕이 직접 뽑는다.
메시앙 왕국에서는 공주의 주치의가 따로, 왕비의 주치의가 따로, 국왕의 주치의가 따로 존재한다.
현재 버트랜드 역시 그의 전담 주치의는 따로 있다.
선왕 벤자민은 왕비가 병에 걸리자 왕비의 주치의를 물리고 켈리언을 왕비와 왕 둘 다 보필하는 주치의로 세웠다.
그건 벤자민이 켈리언의 능력을 매우 높이 사는 것은 물론 그만큼 그를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나 신뢰했던 사람이다. 아버지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보이는 면이 좋아 보인다 하여 무한 신뢰를 할 사람이 아니다.
켈리언은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에스텔라는 지금의 켈리언이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어째서 아버지의 유언을 이행하지 않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아주 살짝 꿈틀대며 에스텔라의 손을 잡으려 하기 전까지는.
에스텔라가 아버지에게 말을 걸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을 때쯤. 에스텔라의 손이 가늘고 비쩍 말라진 아버지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을 때쯤. 분명히 그녀는 보았다. 아버지의 손이 꿈틀거렸다는 걸. 매우 미약했으나, 확실했다.
“아버지?”
“….”
“제 말 들리세요?”
아버지의 손이 또 꿈틀댔다. 에스텔라가 헉, 숨을 들이마셨다.
“제가 가서 주치의를-”
미약했으나 아버지의 손이 에스텔라의 손을 잡았다.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으나 에스텔라는 아버지가 주치의 불러오는 걸 반대한다는 걸 알았다. 에스텔라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아버지. 힘드시겠지만, 맞으면 손가락을 한번, 아니면 손가락을 두 번 까닥여 주세요.”
벤자민이 손가락을 한번 까닥였다.
“버트랜드가 이 모든 짓의 원흉이죠?”
손가락이 천천히 한 번 더 까닥였다.
“변경백은 무고하고요.”
한 번 더 까닥.
“주치의는 버트랜드의 편인가요?”
한 번 더 까닥- 이다가 천천히 또 한 번 까닥였다. 버트랜드의 사람이 아니다. 주치의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그 뒤 에스텔라가 몇 가지의 질문을 더 했으나 그 이상 아버지는 손을 까닥이지 않았다. 그런 뒤 주치의가 들어왔고, 에스텔라는 아버지의 주치의 켈리언에게 묻기로 결심했다.
“켈리언. 어서 말해요. 다 알고 있으니까.”
“….”
“듣는 이가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마음 놓고 말해도 됩니다.”
아까 전 이자크가 이곳에 에스텔라를 데려다줬을 때 이자크가 말해줬던 것이다. 그의 주치의가 뭔가 아는 것이 분명한데 항상 이곳에 주둔하는 버트랜드의 ‘귀’ 때문에 함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오늘은 연회장에 그 ‘귀’들이 일하느라 바쁠 테니, 또한 공주는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있으니 주치의를 떠보려면 오늘이 적기라고.
아무리 귀신같이 숨어있는 인간이어도 그 기척을 느낄 수 있도록 훈련받은 이자크가 방을 빙 둘러보며 아무도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가 듣고, 미약하게나마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사실 에스텔라는 오늘 켈리언을 떠보기 위해 온 것이기도 했었다.
“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로 징징대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켈리언. 당신은 아버지의 주치의예요. 아버지의 충신이라고요. 그러니 내게 말하세요. 지금만이 기회입니다.”
결국 켈리언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에스텔라의 얼굴은 굳어지고 착잡한 듯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다가도 분노에 몸을 떨었다.
*
루시와 루스가 메시앙 왕궁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리 변경의 저택이 크고 넓다 하여도 왕궁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아이들은 하늘만큼 높은 천장과 들판만큼 넓은 복도를 보며 연신 감탄을 했다.
복도나 천장에 장식된 금과 보석들이 비싼 걸 알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넓은 곳에서 뛰고 싶어 감탄하는 것이었다.
에스텔라가 잠시 선왕을 모셔놓은 별궁에 가 있는 동안 이자크와 아이들은 왕궁을 둘러보기로 했다. 왕궁을 안내해주는 국왕의 보좌관이 이곳저곳 소개해줬고 아이들은 그때마다 두다다다 넓은 복도를 제집인 양 뛰어다녔다.
결국 이자크는 아이들을 붙잡고 눈높이를 맞추며 얘기해야 했다.
“루시, 루스. 여긴 왕궁이야. 함부로 뛰어다니면 예의에 어긋나겠지?”
“하지만요- 여기 완-전 넓어서요- 술래잡기하면 재밌겠다요!”
“술래잡기는 집에 돌아가서 하자. 여긴 우리가 사는 집이 아니잖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너희가 루시와 루스로구나.”
절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버트랜드와 그의 호위무사들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자크의 얼굴이 미묘하게 험상궂어졌다.
이자크가 몸을 일으켜 아이들을 제 뒤로 보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루시와 루스는 제 아버지가 왜 이리 구는지도 모른 채 그저 아버지의 다리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놓고 버트랜드를 구경했다.
버트랜드는 이자크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채 그대로 아이들의 머리통을 한 번씩 쓰다듬었다.
“네가 루시고, 네가 루스로구나.”
루스와 루시는 살짝 경계하듯 이자크 바짓단을 쥐고 몸을 움찔댔다. 버트랜드를 한참 동안 쳐다본 루시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여? 수염이 완전 많아. 할아버지 맞죠?”
루시가 물었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저 할아버지였다. 버트랜드는 긴 수염을 한번 쓴 뒤에 껄껄 웃었다.
“에스텔라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에스텔라가 맨 처음 버트랜드를 본 날 했던 말이기도 했다. 그는 젊은 나이 때부터 수염을 풍성하게 길렀기 때문에 어린 에스텔라 눈에는 아버지의 친구가 아닌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린 에스텔라가 워낙에 수염 풍성한 것을 싫어해 그 이후부터는 수염을 깎고 다녔던 것이 기억난다. 버트랜드는 루시와 루스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에스텔라랑 똑 닮았어. 에스텔라는 오로라를 똑 닮았고.
“우리 엄마 아세요?”
“그럼. 알고말고. 너희 엄마가 딱 너희만 할 때 이 할아버지를 만났거든.”
“우리 엄마가 우리만 할 때요?”
“그래. 딱 키가, 이 정도였다.”
버트랜드가 루시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대며 말했다. 그러자 루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아닌데! 우리 엄마 키 큰데요?!”
그러자 버트랜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쩜 에스텔라와 이리 똑같은 말을 할까! 에스텔라가 루시만 했을 때, 버트랜드가 맨 처음 만나 말했다. 안녕. 나는 네 엄마와 오랜 친구 사이란다. 오로라가 딱 네 키 정도 때부터 나와 친구였지.
그때 에스텔라의 반응은 루시와 똑같았다. 아닌데! 우리 엄마 키 큰데요?! 하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때. 버트랜드는 루시와 루스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고는 잠시 이자크와 눈이 마주쳤다.
“에스텔라와 사이가 많이 좋아졌나 보군. 셋째 소식은 진심으로 축하하네. 자네도 이제 평범한 행복을 누릴 때 되지 않았나. 무사히 셋째가 태어나길 내 기도하지.”
그렇게 말하곤 루시를 보며 활짝 미소 짓더니 이내 지나쳐갔다.
아빠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안 것인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방방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얌전하게 이자크의 바짓가랑이만 잡고 있다.
“아빠. 저기는 모예요?”
그때 루스가 뭔가를 가리켰다. 눈치를 보고 있던 보좌관이 얼른 대답했다.
“저기는 선대 왕비님의 온실입니다, 도련님.”
“온실?”
“예. 오로라 왕비님께서 아끼시던 온실입니다. 진귀한 식물들이 저곳에 다 모여 있습니다. 공주님께서도 열심히 가꾸셨던 곳이지요. 한번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아직도 보존이 잘 되어 있습니다.”
“우와! 네!”
아이들이 신나서 이자크를 쳐다봤다. 이자크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보좌관과 함께 온실 쪽으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텔라가 온실에 들어왔다. 보좌관은 눈치껏 알아서 빠질 생각인 건지 살짝 목례를 한 뒤 온실 문을 닫고 나갔다.
“엄마! 엄마! 여기 되게 이뿌다아! 완전 숲속 같아!”
한 바퀴 온실을 둘러보던 쌍둥이들은 저 멀리 에스텔라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달려와 치마폭에 안겼다.
오로라 왕비가 생전에 가장 아끼던 장소, 메시앙 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꼽으라면 아마 이 온실이 단연 뽑힐 것이다. 온실의 이름도 왕비의 이름을 따 ‘오로라 가든’이다.
귀족들이 저택에 둔 유리온실 정도가 아니다. 이곳은 마치 자연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한 온실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식물들은 각 온도에 맞춰 방이 나뉘어져 있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꽃들은 초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싱그럽게 피어있다.
총 이 층으로 되어 있는 이 온실은 아래 지하동굴과 이어진다. 그 지하동굴은 모양만 그럴싸하게 만든 인조 동굴이 아닌, 진짜 왕궁 밑에 존재하는 지하동굴이었다.
오로라 왕비가 죽고 난 뒤에는 그 동굴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소문에는 선왕 벤자민이 그곳에 왕비의 진짜 시신을 안치시켰다는 말도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에스텔라가 온실을 가꾸기 시작했다.
지금은 거의 흐릿해졌지만, 오로라 왕비가 살아있었을 때 에스텔라는 항상 어머니와 이곳에서 다과 시간을 가지거나, 공주를 무릎에 앉히곤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했었다. 오로라 가든은 에스텔라에게 있어서 수많은 추억을 남겨준 곳이다. 이자크를 처음 만난 곳 역시 이곳, 오로라 가든이었으니까.
“다행히 이곳만은 예전 그대로네.”
에스텔라가 온실을 빙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버트랜드가 집권하게 된 후로 메시앙 왕궁은 예전과는 매우 달라졌다. 해서 자신의 유년시절이 모두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에스텔라는 오로라 가든만큼은 예전 그대로라 안도한 듯했다.
에스텔라는 자신의 예전 기억 속 그대로인 이곳에 잠시 동심을 느낀 건지, 굳어있던 표정이 살짝 풀어지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작은 온실에 들어가 있는 이자크의 모습이 보였다. 에스텔라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다. 맨 처음 이자크를 만났던 곳. 황수선화가 잔뜩 피어있는 이곳. 이자크는 열여섯의 그때와 똑같이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거봐. 역시 꽃 좋아하잖아.”
에스텔라가 뒤에서 그를 천천히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자크가 뒤 돌아 에스텔라를 품에 꼭 껴안았다. 아버지를 만나고 온 그녀가 평소와 같을 리 없다. 위로하듯 천천히 꽉 껴안으며 등을 쓸어내려 주는 손길에 에스텔라는 눈을 감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이자크.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 그때도 당신 여기서 꽃에 물 주고 있었잖아.”
에스텔라는 애써 괜찮은 척 미소지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눈이 살짝 충혈되어 있다. 평소라면 마카롱 같다느니, 한입 먹어도 되겠냐느니, 빵 같이 부었다느니 장난이나 쳐댔을 이자크는 조용히 에스텔라의 눈가를 쓸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자크를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너무 잘생긴 거야. 근데 잘생긴 남자가 조신하기까지 해. 바깥에는 잔뜩 허세만 부리는 놈들 투성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에서, 제일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사람이 있는 거야….”
에스텔라가 그때를 생각하니 웃긴 듯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한테 얼마나 졸랐는지. 나 결혼 변경백의 후계자랑 하겠다고, 하겠다고. 나 안 그러면 혼자 늙어 죽을 거라고. 상사병 걸려서 죽는다고. 어떻게 좀 해보라고. 진짜 철없었죠.”
“에스텔라.”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을지. 버트랜드의 딸이랑 결혼할 사람이랑 결혼시켜달라는 딸이 얼마나 고민이었을까요.”
“…”
“그런데 지금 당신이랑 나, 그리고 우리 쌍둥이들이랑 태중의 아이까지 알게 되시면 얼마나 놀라실지. 분명 눈이 엄청 땡그래져서는 에스텔라야! 이게 무슨 일인 것이냐! 하며 물어보실 게 뻔해.”
건강하셨을 때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인다.
에스텔라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울고 싶지 않은데. 울고 싶지 않은데.
“아버지는 이자크를 엄청 좋아하시니까,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에스텔라. 우리 잠시 앉아서-”
“이자크. 있잖아요. 으흑. 아버지가. 아버지가 살아 계세요. 흐엉, 반사 상태 아니고요, 내 말 다 들을 수 있대요… 허어엉-”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에스텔라가 꺼이꺼이 울었다. 이자크의 품에 안겨 목놓아 울었다. 아이들이 저 멀리서 꽃구경하느라 다행이다. 엄마가 이렇게까지 우는 걸 보면 분명 놀라서 따라 울 것이 뻔했다. 온실 유리문이 두꺼워서 다행이다. 그들의 대화가 새어나가지도, 에스텔라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새나가지도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자크는 손수건을 꺼내 엉망이 되어버린 에스텔라의 얼굴을 닦아줬다.
“에스텔라. 아까 전에 한 말,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를 집에 모셔와야겠어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한참을 눈물 콧물 쏟아내던 에스텔라는 겨우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야 주치의와 있었던 일을 말할 수 있었다.
*
선왕 벤자민의 주치의 켈리언이 말했다.
“선왕께서는… 반사 상태가 아니십니다.”
“….”
“지금도, 저희의 대화는 모두 듣고 계실 겁니다.”
“그게 무슨-”
반사 상태였던 것은 맞았다. 켈리언은 원래 선왕의 유언을 따르려 했다. 반사 상태 판정을 받고 1년째가 되던 해, 그는 오로라 왕비에게 먹였던 것과 같은 약을 들고 벤자민이 누워있는 방을 찾아갔다.
방해받지 않도록 새벽에 찾아가 약을 먹인 뒤 본인 역시 같은 죽음을 택하리라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한 채 혼잣말을 하고 있던 버트랜드 국왕이었다.
벤자민의 충신이자 주치의 켈리언은 그곳에서 버트랜드의 진심을 듣고 만다. 모든 건 버트랜드의 짓이며, 변경백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그, 이자크의 처형을 이용하여 에스텔라의 후계권을 넘겨받은 것도 바로 그의 짓.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켈리언은 죄송하게도 선왕의 명령을 불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악착같이 연구하여 반사 상태의 왕을 다시 깨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돌아가셔서는 안 됩니다, 전하. 오로라 왕비님께서 이대로는 절대 받아주시지 않을 겁니다.
버티십시오. 일어나십시오. 제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전하를 다시 깨울 겁니다.
그날부터 켈리언은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를 하던 도중 독을 먹어 반사 상태가 된 이는 뇌나 다른 신체의 문제가 아닌 독의 종류에 따라 몸의 일부가 ‘마비’된 것이라는 걸 알아냈다.
어떤 종류의 독을 먹었는지, 수만 가지의 해독제들을 일일이 먹여가며 연구했고 마침내 3년째가 되던 해, 벤자민이 의식을 차릴 수 있도록 호전시켰다.
물론 어디까지나 호전이었다.
정확한 대화는 불가능했다. 그저 신체를 조금씩 움직일 수 있다는 것과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만. 하지만 버트랜드의 ‘귀’들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켈리언은 그 일로 가족을 인질로 잡혔으며, 다시는 반항하지 말라는 의미로 오른쪽 손이 잘려버렸다.
켈리언이 그리 말하며 자신의 의수를 보여줬다.
에스텔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이후로 버트랜드 국왕은 절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제 가족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아들한테서 편지가 옵니다. 살아있다고 믿는 수밖에요. 얼굴은 절대 볼 수 없습니다. 전 이곳에 선왕과 함께 갇혔으니까요.”
참 이상한 것은, 버트랜드는 벤자민이 의식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도 그를 다시 죽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벤자민에게 꼴 좋다는 듯 비소를 짓더니, 이대로 계속 유지시키라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주치의를 시켜 매일 매우 강한 마취향을 피우도록 했다. 그 마취향은 정신은 멀쩡하나 몸을 마비시키는 향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벤자민의 정신은 깨어날 것이다. 하지만 몸은 절대 움직일 수 없다.
켈리언의 말을 들은 에스텔라가 다시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
에스텔라가 나지막이 부르자 벤자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떨어졌다. 딱 한 방울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에스텔라가 다시 소리 죽여 눈물 흘렸다.
“공주님. 전하를 데려가십시오.”
“하지만 버트랜드가 절대 그러지 못하게 할 거야. 이미 내가 모셔가고 싶다 했었을 때도-”
“이제 전하의 몸은 더는 마취향을 버티지 못하십니다. 공주님. 무슨 방법을 쓰셔서라도 전하를 이곳에서 빼내 주십시오.”
“켈리언, 자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선왕의 주치의는 어떤 일에서도 선왕의 목숨을 가장 먼저 중시하는 직업입니다.”
켈리언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버트랜드는 벤자민과 켈리언을 협박할 때 에스텔라를 들먹이기도 했었다.
공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사랑받기만 한 아이라 사람을 쉽게 믿지요. 그 애는 사랑 때문에 후계권도 버린 아이입니다. 그런 철없고 낭만 좇는 공주가 이 모든 걸 버틸 수 있겠습니까?
나는 에스텔라를 아껴. 형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끼지요. 오로라의 딸이잖습니까. 그래서 그 애가 형님처럼 되질 않길 바랍니다. 내 말이 들릴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님의 주치의가 허튼짓 안 하도록 기도하는 것만이 형님이 할 수 있는 거겠지요.
사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무능한, 산송장.
그쵸?
선왕 벤자민은 메시앙 역대 왕들 중에서도 매우 좋은 왕이었다. 귀족들의 수탈을 막고 백성이 우선이었던 사람이다. 버트랜드가 감히 이렇게 농락할 분이 아니란 말이다.
“공주님께서 모든 걸 아신다니 제가 감히 드리는 말씀입니다. 공주님. 부디, 전하를 구해주십시오.”
켈리언의 말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
에스텔라의 말을 들은 이자크 역시 충격받은 듯했다.
몇 년 동안 제정신을 가지고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자크는 이 모든 건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는 에스텔라를 꽉 껴안았다.
에스텔라가 엉엉 울었다. 분했다. 버트랜드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분했다.
7년이란 세월 동안 난 뭘했던 거지?
난 정말 뭘 했던 거지?!
분노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나는 실수하지 않을 거야. 절대 실수 같은 거 하지 않았을 거야.
순간 눈앞이 번뜩였다. 중심을 에스텔라가 휘청댔고, 이자크가 얼른 그녀를 잡아 부축했다.
“에스텔라!”
“우욱-”
두통이 그녀를 덮쳤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순간적으로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는 것 같아 헛구역질도 나왔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에스텔라가 걱정되었다. 극심한 죄책감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인가. 태중의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한 이자크가 급히 온실 밖으로 에스텔라를 데리고 나갔다.
소식을 들은 버트랜드가 자신의 주치의를 보냈다.
버트랜드의 주치의는 그저 태중의 아이 때문에 몸의 불균형이 심해져서라는 말과 수면향을 피우면 나아질 거라는 말만 한 채로 돌아갔다.
루시와 루스는 엄마가 아픈 거냐며 울먹이며 물었다. 이자크는 아이들에게 잠시 뱃속의 동생이 심술을 부린 거라 둘러댔다. 아이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려는데 방에 왕의 보좌관이 찾아왔다.
아이들과 함께 저녁 만찬을 하고 싶다는 버트랜드의 전언이었다.
이자크는 당연히 거절했다. 아이들이 엄마와 떨어지려 하지 않으니 마음만 받겠다며 정중하게 말했지만, 보좌관에게 그리 전하라 말하는 이자크의 표정은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보좌관이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안 그래도 에스텔라의 몸이 약해 걱정되어 예민해진 이자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에스텔라가 쓰러졌다고 해서….”
“트라비아 왕비께서 여긴 어찌.”
“그냥 릴리 버트랜드라고 불러줘요. 여기서는 릴리 트라비아라 하면 다들 어색해하니까. 저도 그렇고….”
릴리였다. 릴리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또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 아까 그 아줌마다!”
“루시. 루스. 아줌마라니. 트라비아 왕국의 왕비님이란다.”
이자크가 아이들의 머리칼을 흩트리며 말했다. 릴리는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다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걸요. 누구는 공주님, 누구는 왕비님, 누구는 버트랜드… 누구는 트라비아… 이름으로 불러줘요. 에스텔라는 항상 이름으로 불러주니까 난 그게 좋더라고요. 얘들아, 너희는 릴리 이모라고 불러줄래?”
“릴리 이모?”
“응. 릴리 이모.”
“웅, 알겠어! 릴리 이모! 근데 릴리 이모도 배에 아가 있어? 있잖아, 배가 요렇게 나왔따. 아직 우리 애기는 이만큼 안 나와떠.”
루시와 루스는 릴리를 경계하지 않았다. 릴리의 툭 튀어나온 배가 신기한 건지 아이들은 작은 손으로 릴리의 배를 살짝 쓰다듬기도 했다. 릴리는 아이들 품에 안겨있는 인형을 발견했다.
“그 인형…. 그 인형이 좋니, 얘들아?”
“네.”
“다행이다. 동화책도 읽어봤어?”
“네. 엄마가 읽어줬어요.”
“에스텔라가 읽어줬어? 그래. 다행이네. 그 인형, 너희 엄마랑 릴리 이모랑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이야. 소중하게 대해줘.”
“네.”
아이들과 평범하게 대화하던 릴리가 잠시 뜸 들이더니 침대 쪽으로 흘깃 쳐다봤다. 다시 눈을 돌려 이자크를 쳐다보려다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이만, 가볼게요. 에스텔라가 얼른 몸이 건강해졌으면 좋겠어요.”
릴리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것 같았다. 이자크는 팔짱을 낀 채로 릴리를 쳐다봤다. 사람 눈치를 있는 대로 보는 그녀는, 과거 이자크가 알던 릴리와는 꽤 많이 바뀌었다.
“에스텔라에게 미안하다고 했다면서요.”
“….”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말뜻 그대로예요.”
“그 말은 당신이 모든 걸 알면서도 방관했다는 소리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날 원망해도 좋아요.”
“당신을 원망하진 않습니다. 당신이 국왕과 사이가 틀어진 걸 보면 같은 쪽은 아니라는 걸 알겠으니까.”
“….”
“그동안 많이 바뀌었군요. 예전에는 좀 더 활기차고 당당했는데 말이죠.”
“에스텔라처럼 되고 싶었으니까요.”
릴 리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결과 당신한테 관심은 어느 정도 끌었으니까. 근데 아무리 발악해도 진짜처럼은 안 되더라고요.”
“….”
릴리는 그렇게 말한 뒤 루시에게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더니 루시와 루스에게 작게 말했다.
“이거, 엄마가 아직 다 기억을 못 하는 거 같아. 엄마한테 이 인형 잘 살펴보라고 말 전해줘.”
잘 살펴 보라는 말에 릴리가 힘주어 말했다.
그러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인형을 만지작대다 다시 아이들에게 인형을 건넸다.
“꼭, 잘 살펴보라고 해야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 알았지?”
“네에-”
아이들의 머리통을 한 번씩 쓰다듬어준 뒤 릴리가 방을 나갔다. 릴리는 많이 불안정해 보였다. 사람의 눈도 못 마주치고, 웃어도 활짝 웃질 못한다. 물론 그런 미소를 보일 만한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이자크는 릴리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릴리는 착한 사람이다. 그건 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를 매우 두려워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에스텔라를 부러워하는 사람이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그녀였다.
‘당신이 에스텔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물론 에스텔라에게 당신이 다가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요. 모른 척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이자크. 미안해요. 당신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당신의 시선이 날 향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래도. 그래도 난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이자크는 정말 릴리에게 손톱만큼도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에스텔라에게 말했듯이, 그는 메시앙의 그림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었다. 공주가 그와 결혼했다간 과부가 될지도 모르는. 릴리는 자신과 결혼하자 말했다. 에스텔라를 좋아해도 평생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어도 좋으니 결혼해달라고.
그리하여 그녀와 결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가 무릎 꿇고 울며 사죄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자크… 미안해요… 내가 두 사람한테 못 할 짓을 했어요. 이혼해주세요. 아니. 이혼하게 될 거예요, 우리는….’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반역자로 몰리며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릴리를 만난 적이 없다. 그녀는 이후 트라비아 왕국의 왕자에게 팔려가듯 시집갔고, 이번이 처음 메시앙에 돌아온 것이었으니까.
에스텔라는 릴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자크 역시 그녀가 무슨 생각인 건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죄책감은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하니까.
이자크는 릴리가 찾아온 것이 별일 아닌 듯 아이들과 다시 놀아주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다. 신나게 놀던 아이들도 졸려운 듯 꾸벅꾸벅 목을 이리저리 흔들며 졸기 시작했다. 이자크는 아이들을 재운 뒤 다시 방에 돌아왔다.
에스텔라는 아직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있다. 어쩐지 두려워졌다. 에스텔라의 가슴께에 귀를 가져가 그녀의 심장이 잘 뛰고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이자크도 그 옆에 누웠다.
에스텔라의 옆에 누운 이자크가 생각했다.
어쩌면, 버트랜드와 릴리 덕분에 에스텔라와 함께하게 된 것도 없잖아 있다.
그들이 이자크를 나락으로 몰아넣지 않았더라면, 빛나는 별이 그에게 손을 내밀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조적으로 웃으며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머리칼을 정리해줬다. 왕궁에서 제대로 잠들 수는 없다. 버트랜드가 섣불리 그들에게 손댈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자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에스테라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다 보니 경직되어 있는 몸도 조금은 풀어졌다.
아주 잠깐 졸았을까. 퍼뜩 놀라며 잠에서 깬 이자크는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깨닫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방안에 에스텔라가 보이지 않았다. 슬리퍼는 그대로 있는데 방문이 열려있다.
다급하게 방 밖으로 나가자 복도에 숄이 떨어져 있다.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간 건가 싶어 얼른 쌍둥이들이 자고 있는 방에 가봤지만 거기에도 에스텔라는 보이지 않았다. 이자크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왕궁 복도에 드문드문 경비를 서고 있는 호위병들에게 물어봤지만 그 누구도 에스텔라를 보지 못했다.
쌍둥이들이 물에 빠졌을 때의 에스텔라가 떠올랐다.
본인이 했던 말고, 한 행동들도 기억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던 그녀다.
파자마로 갈아입힌 상태라 차가운 왕궁의 밤공기가 몸에 좋지도 않을 것이다. 슬리퍼도 신지 않고 맨발로 대체 어딜 간 거야.
문득 떠오른 곳이 있다.
오로라 가든.
이자크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예상대로 오로라 가든의 유리문이 살짝 열려있다. 그 안에 들어간 이자크는 절대 열리지 않는다는 지하 동굴로 내려가는 문이 열린 것을 보고 한층 더 불안해졌다.
건장한 기사들도 열지 못한다는 지하 문이다.
이자크는 얼른 램프에 불을 붙인 뒤 원형 계단을 죽 내려갔다.
지하동굴의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석주에서 똑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왕비가 가장 아끼던 곳인지 이제 이해가 된다. 동굴 정원은 그야말로 감탄이 나오는 곳이었다.
석주와 석순에 박힌 보석들이 달빛 사이로 찬란하게 빛났다.
동굴을 둘러보던 이자크는 이곳이 단순한 동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동굴은 맞으나, 신전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어떤 신을 모시는 신전인지는 조각상이 없어 알 수 없었다. 계단을 모두 다 내려가니 광활한 지하수가 펼쳐졌다.
지하수 맞은 편에는 거대한 돌로 조각된 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어떠한 경외심을 일으키게 만드는 이곳의 모습에 이자크는 압도되었다.
“에스텔라?”
에스텔라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답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에스텔라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곳에 그녀가 있다고 느껴진다. 이자크가 다시 한번 에스텔라를 불렀다.
그리고 지하 강 맞은편의 신전에서 에스텔라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자크는 그대로 강 속에 뛰어들었다. 맞은편 신전 안 쪽에서는 에스텔라의 비명이 계속 들려왔다.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절규. 이자크는 미친 듯이 헤엄쳐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녀에게 가는 수밖에 없었다.
수심은 생각보다 얕았다. 빠르게 걸어 가로질러가려는 이자크의 발에 뭔가가 턱, 하고 걸려들었다. 다리에 걸린 것을 확인할 시간이 없다. 맞은편에서 에스텔라가 미친 듯이 울고 있으니까. 빨리 그녀에게 가야 한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리에 뭔가가 턱, 턱, 하고 걸렸다. 둔탁한 입체감이 발아래 느껴졌다. 뭐가 자꾸 이렇게 발에 걸리나 싶어 이자크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래를 내려다본 이자크가 헉, 비명을 삼키며 몸을 휘청거렸다.
맑은 물 아래는 에스텔라가 있었다.
눈을 뜬 상태로, 창백하게 질린 상태로. 이자크가 급히 그녀를 건져올렸다. 이미 돌덩이처럼 차가웠다. 저 안 쪽에서는 에스텔라의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그의 손에는 차갑게 식어 죽어버린 에스텔라가 보인다.
“에스텔라…?”
그제야 강 주변을 둘러보던 이자크가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물 밑 아래에는 에스텔라들이 있었다.
여러 명의 에스텔라들은 모두 창백한 얼굴로 죽어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그녀 말고도 몇 명의 얼굴 모를 같은 시체들이 수장되어 있었다. 이 기괴하고 끔찍한 상황에 이자크는 지금 자신이 제정신인가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때 다시 한번 에스텔라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다시 정신을 차린 이자크는 물속으로 가라앉은 에스텔라들을 몇 번 뒤돌아본 뒤 다시 신전을 향해 헤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