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13화 (13/21)

13장.

“…아버지는 어머니와 남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면서 자책하셨습니다. 나라를 지켰으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고.”

그때부터였다. 일리야 몬 디에스는 지켜야 한다는 것에 강박을 가지기 시작했다. 변경에 주둔하는 수비대들을 배로 늘렸고, 이자크와 엘리사에게는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그 냉철하시고 강하시던 아버지가 무너지는 모습을 봤습니다. 지키지 못해서 무너진 그 모습이 두려웠습니다.”

항상 강해 보이시던 분이었다. 또한 강한 분이었다.

무뚝뚝하고 냉철하시던 아버지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어머니와 보자기에 쌓여있는 피투성이의 갓난아기를 어루만지며 손을 덜덜 떨었다.

계속해서 신이시여, 신이시여! 어찌! 만을 반복하며 오열하는 아버지를 본 8살의 이자크는 그 장면이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고 트라우마가 되었다.

독실한 신자이셨던 일리야 몬 디에스는 그 이후부터 신을 믿지 않게 되었고 자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자신이 지키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이 이자크를 완벽한 변경백의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욕심으로 변질되었다.

난 지키지 못했다. 그러니 너는 나처럼 되지 말거라. 지키지도 못할 거면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 오만에 대한 천벌은 지켜야 할 대상이 받게 될 테니까.

그 이후로도 일리야 몬 디에스는 변경백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했지만, 그는 어딘가 텅 빈 사람 같았다. 아직도 죽은 아내와 태중의 아이를 잊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의 친우였던 벤자민 선왕과 버트랜드 대공은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며 백작 가문의 얌전한 규수를 소개시켜줬다.

백작 가문의 막내딸이었던 그분은 매우 착한 사람이었다. 엘리사는 그녀를 좋아했고 이자크 역시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 같아 안정감을 받았다. 하지만 일리야는 여전히 공허해 보였다.

일리야는 자주 출정을 나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의지할 다른 이가 필요했다. 엄마가 필요했던 거다. 일리야는 넬리 양에게 청혼한다. 백작 가문의 막내딸이던 넬리 양은 그렇게 이자크와 엘리사의 새어머니가 된다.

“새어머니는 정말로 좋은 분이셨습니다. 당신 친자식도 아니면서 정말 저희를 아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새어머니에게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지켜야 할 것을 더 늘리고 싶지 않으셨겠죠. 어머니는 매번 그것에 상처받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같이 처형당하셨지만.”

“….”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에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이자크의 목소리 끝부분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이 좀 뒤죽박죽이 되었네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정말 기쁩니다. 에스텔라가 제 아이를 가져서 정말 기쁩니다. 다만, 내가 당신과 쌍둥이들 그리고 태중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졌습니다.”

이자크가 허탈하게 미소지었다. 이내 그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이자크의 가느다란 검정색 머리칼이 그의 얼굴을 가려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기쁜데 두려웠어. 내가 한심했고. 미안해 에스텔라. 상처 줄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에스텔라와 눈을 마주쳤을 땐, 그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그를 보다 이내 양팔을 벌리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이자크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에스텔라에게 다가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에스텔라는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이자크의 등을 토닥였다. 에스텔라를 껴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안 지켜도 돼요. 당신의 존재 자체로도 큰 버팀목이 되니까. 우린 당신의 짐이 아니에요. 당신의 가족이에요. 가족은 한사람이 모두를 지키는 게 아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거랬어요.”

“에스텔라. 미안해요. 상처 줄 생각은 전혀 없었어. 누구보다 기뻤는데,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어디 얼굴 좀 봐요. 세상에. 루스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우는 얼굴이 이자크랑 똑같네.”

에스텔라는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이자크의 양 볼을 감싸며 얼굴을 확인했다. 굵은 선, 강한 이목구비,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양쪽 눈이 빨개져서는 그렁그렁댄다.

우는 얼굴이 루스랑 똑같다. 말랑말랑한 네 살배기 아가랑 걸걸한 스물여섯 살의 애 아빠가 우는 얼굴이 이리도 똑같으니 에스텔라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자크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새빨개졌다.

“화 다 풀렸습니까?”

“애초에 화 안 났었어요. 조금 서운은 했지만, 이자크의 우는 얼굴이라는 장관을 구경했으니 제가 한발 물러서겠습니다.”

“장관까지야….”

이자크는 귀 끝까지 빨개졌다. 결국 그가 고개를 푹 숙인채 하, 짧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수치스럽고 창피한지 모르겠다. 연하의 아내 앞에서 꼴사납게 우는 모습을 보이다니.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에스텔라의 배가 눈에 들어왔다. 이자크는 잠시 그 배를 가만히 쳐다봤다. 에스텔라가 그의 시선을 눈치챈 건지 제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분명 아가도 서운했을 테니, 태명은 이자크가 심사숙고해서 지으세요.”

“네.”

이자크가 슬쩍 웃으며 손을 에스텔라의 배 위로 가져갔다. 아직은 홀쭉하다. 이 안에 애가 들어섰는지 티도 안 난다. 이자크의 커다란 손이 에스텔라의 배를 다 가렸다.

에스텔라가 쌍둥이들을 처음 임신했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도 이렇게 배 안에 쌍둥이가 들어있다며 신기한 듯 제 배를 통통 두드렸다.

에스텔라는 다 짊어지지 말라 했지만 이자크는 제 사랑스러운 가족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고 싶다.

모든 걸 다 잃은 그때의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

“에스텔라. 당신한테 할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당신의 대부에 대한 일입니다.”

“버트랜드 대부님이요?”

에스텔라는 뜬금없이 버트랜드에 대한 말을 꺼내자 의아한 듯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불안했고,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어렴풋이 알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아버지의 용안을 찾아뵙고자 왕궁에 찾아갔을 때 대부님을 만났을 때도 들었던 기분이다. 후에 그에게서 편지가 도착했을 때도, 그리고 그 편지에 거짓을 고해 보냈을 때도.

이자크는 지금의 에스텔라에게 이걸 말해야 할지 말지 계속 고민했다.

태중에 아이가 있다.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고 무리를 해도 유산될 가능성이 있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나중이든 언젠가 그녀에게는 꼭 말해야 한다.

결국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손을 꽉 잡으며 입을 뗐다.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에게 말했다가 당신이나 태중의 아이에게 무리가 갈까 싶어 조심스럽습니다.”

그러자 에스텔라가 심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길 두어 번 정도 반복하더니 말했다.

“마음의 준비 다 했어요. 뭐죠?”

에스텔라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저를 배려하여 저렇게 장난스럽게 군다는 걸 안 이자크가 슬쩍 웃어주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며 이야기를 꺼냈다.

맨 처음은 버트랜드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사 종료가 된 뒤, 친우의 도움을 받아 검찰청에서 정보들을 몰래 빼 와 마저 수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확증은 없으나 심증은 버트랜드가 진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트랜드를 찾아가 떠볼 생각이었으나 버트랜드는 순순히 인정했고, 오히려 그를 협박했다.

에스텔라는 이야기 중간중간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손이 덜덜 떨리면 이자크가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이자크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줬다. 오르테즈 남매와 버트랜드의 부정부패를 목격한 소수의 사람이 모여 만든 이름 없는 단체. 그들이 이제부터 뭘 할 건지, 목표는 뭔지에 대해 이자크는 조곤조곤 설명해줬다.

그 모든 이야기를 끝낸 이자크는 가만히 에스텔라의 안색을 살폈다.

역시나 에스텔라는 혼란스러워하고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며 생각하던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대부님이. 그러니까. 아버지를, 당신의 아버지도- 세 분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잖아요.”

에스텔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안 되는데, 어째서 나는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수긍하고 있는 거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착잡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자신의 모습에 에스텔라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녀에게는 버트랜드와 좋은 기억밖에 없다.

그녀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의지하는 대부이기도 했으며, 생명을 구해줬던 은인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어째서 나와 이자크에게 이런 짓을 한 거지?

“믿기지가 않는데, 당신은 나한테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대부님은….”

에스텔라는 말을 잇지도 못하면서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에스텔라.”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너무 화가 나요. 너무 화가 나. 제 친구들을 둘이나 배신한 주제에, 저번에 봤을 때 나한테 그렇게 환하게 웃어주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내가 얼마나 웃겼을까!”

“에스텔라.”

“…나도 같이해요.”

“위험한 일입니다. 언제 폭력적으로 변질될지도 모르는 조직이고요.”

“뭐라도 할래요. 메시앙의 공주가, 눈앞에서 반역자한테 왕국을 뺏길 순 없으니까요. 위험한 일은 끼지 않을게요. 태중에 아이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집에서 당신이 버트랜드한테 복수하기만을 얌전히 기다리고 싶진 않아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자크. 나한테도 예전에 이 얘기 해준 적 있었나요? 버트랜드가 진범이라는….”

“네. 했었는데, 그때 당시에 에스텔라는 쌍둥이들을 임신하고 있어서 예민한 시기였고, 게다가 대부가 그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에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내가 정말 안 믿었을까요?”

“네?”

“내가 당신 말을 안 믿을 리가 없는데.”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왜 그때의 나는 이자크를 믿지 않았지?

정말 믿지 않았던 걸까?

“이상해요. 그때의 나는 참 나 같지 않은- 물론 그 이후로도 계속 그랬지만.”

“그때의 당신도 당신 같았고 지금의 당신도 당신 같아요. 그렇게 자꾸 자책하지 말아요.”

이자크가 신경 쓰지 말라며 에스텔라의 손을 토닥였다.

“이자크. 과거의 나는 당신 말도 들으려 하지 않고, 비밀도 많고, 바깥으로 나돌고 그랬는데… 왜 먼저 이혼 얘기도 꺼내지 않았어요?“

“그때 당신이 말했었으니까.”

“뭐를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다려 달라고.”

“….”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기다리니까 다시 돌아와 줬네요.”

*

평소라면 아직 단잠에 빠져있을 루시와 루스는 동 틀 무렵부터 눈을 반짝이며 저택 이곳저곳을 달리고 있다. 우다다다, 마치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 술래잡기를 하는 양.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와 꺄르륵 웃는 소리에 에스텔라와 이자크도 침실에서 눈을 떴다.

“…애들이 벌써 일어났나….”

아직 피곤한 눈으로 에스텔라가 중얼거리자 이자크가 로브 가디건을 걸친 뒤 밖으로 나간다. 문밖에서는 이자크가 나지막이 아이들을 훈육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텔라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는 문밖의 소리에 집중했다.

“엄마 뱃속에 동생이 들어있어서 잠을 좀 더 자야 해. 그런데 이렇게 뛰어다니면 동생이 잠을 잘 수 있을까?”

“에에, 아니요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루시, 루스.”

“어- 어- 살금살금 뛰어야 해요.”

“하….”

이자크가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 아이들과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끙끙 앓는 그의 모습과 천진하게 살금살금 뛰어야 해요- 하며 발꿈치를 들고 뛰는 시늉 하는 루시, 그리고 루시를 따라 하는 루스의 모습이 그려져 살풋 웃음이 나왔다.

“아, 마따. 압빠. 나랑 루쓰 동생이한테 할 말 있써! 할 말!”

“아빠가 전해줄게.”

“아아 싫어어- 나랑 루스가 직접 말해줘야 해. 왜냐면 아가한테 우리가 누나인 거 알려조야지! 막 말 걸어 조야 우리가 누나인 거 알지이!”

“맞아. 우리가 누나인 거 알려조야 해.”

루스는 누나가 아니고 형일 텐데- 에스텔라가 킥킥 웃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이자크는 기운 철철 넘치는 쌍둥이들을 양 허리에 하나씩 끼고선 들어왔다.

“엄마! 엄마아!”

“오늘이 무슨 날이게에!”

“쉿. 작게 말하기로 아빠랑 약속했잖니.”

방에 들어오자 자길 내려달라며 발버둥치는 악동들. 이자크는 행여나 아이들의 고음에 가까운 목소리에 에스텔라가 화들짝 놀랄까 아이들을 주의시켰다. 에스텔라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아이들이 들어오자 이불을 들어줬다.

루시와 루스는 그대로 이불 안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그러더니 에스텔라의 배에 속삭이듯 손을 모아 말했다.

“야 동생아-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어?”

“맞춰봐. 맞춰봐아.”

“오늘은 누나랑 형 생일이지요.”

에스텔라가 가성을 내며 답하자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며 정답이야! 박수를 쳤다. 그렇다. 오늘은 루시와 루스의 생일이다. 지금쯤 아래층에선 쌍둥이들의 생일파티를 위해 다들 정신없이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나 빨리 일 층에 내려가고 시포.”

“안 돼. 더 기다렸다가 베이먼이 내려오세요- 하면 그때 내려가야지 선물이 있는 거야.”

“아앙, 언제까지 기다리냐구.”

루스가 빨리 내려가서 선물들을 뜯고 초콜릿 케이크를 먹고 싶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루시가 푹 한숨을 내쉬며 한소리 한다.

“루쓰. 참을 줄 알아야 누나지. 너 이제 아가 아니잖아.”

“알아. 아는데… 그래도 빨리 선물 받고 싶어….”

“참아. 난 이제 누나니까 참을 거야.”

아이고, 웃기지도 않아. 에스텔라가 제 앞에서 들으란 듯이 대화하는 꼬맹이들의 모습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이자크 역시 아이들의 대화가 웃기긴 했는지 집사 할아범을 불러다가 이제 그만 내려보내주자고 말했다.

“마침 준비가 거의 다 되었으니, 그럼 아가씨랑 도련님은 먼저 내려가 계실까요.”

“야호!”

“뭐야, 루시 너 참을 줄 안다매!”

“참을 줄 안다고 했지 안 신난다고는 안했거든?”

집사 할아범과 함께 쪼르륵 일 층으로 내려간다.

오늘은 루시와 루스의 네 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저택에 손님들이 온다. 집사 할아범이 알아서 초대장을 모두 보내놨다며 신경쓰지 말라 하더라. 에스텔라가 셋째를 임신했다는 건 아직 이 저택의 사용인들밖에 모른다.

유모는 하나라도 더 불러 우리 공주님과 이자크님 사이에서 셋째 애기씨가 태어난다고 사방팔방 자랑해야 한다 말했다. 아마 집사 할아범과 초대장 명단을 만들 때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 같다.

아이들이 먼저 내려가고 에스텔라와 이자크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로 내려갔다. 루스와 루시의 탄생화인 단풍잎들로 만들어진 화환이 곳곳에 걸려있다. 단풍이 빨갛게 물든 것을 보니 어느새 가을이 왔다.

주방에서는 루시와 루스를 위한 거대 초콜렛 케익을 만드느라 여념이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난 뒤 쌍둥이들은 멜리사와 유모의 손에 붙들려 욕탕으로 끌려갔다. 오늘 하루 때 빼고 광내서 다른 사람들한테 우리 아가씨랑 도련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고 유모가 포부를 밝혔다.

쌍둥이들은 유모가 악마처럼 웃는다고 질색했다.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귀족들이 선물을 보내왔다. 명단에 초대된 이들이 아니어도 다른 귀족들 모두 아이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선물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이 쓰기 과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 선물을 빙자한 어른을 위한 뇌물같이 느껴질 정도로.

에스텔라는 어렸을 적 자신의 생일연회 때를 떠올렸다.

생일 주인공은 난데, 귀족들은 아버지한테 가서 아양을 떤다. 선물도 10살 여자애가 쓰기 과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진한 연지, 성인 목에나 맞는 목걸이, 구두 등등. 그건 그 아이의 생일을 축하한다기보다는 그 아이의 부모에게 겉치레 식으로 보여주는 거나 다름없다.

보통 그런 선물을 보낸 이들은 버트랜드의 집권 이후 상승세를 탄 귀족들이었다. 그중 선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릴리 버트랜드가 보낸 선물이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크기가 작았으나 직접 포장한 것인지 어딘가 엉성하면서도 세심하게 포장된 선물이었다.

선물을 묶은 리본 옆에는 릴리 버트랜드가 쓴 듯한 편지도 있었다.

나의 동생과도 다름없는 에스텔라에게, 쌍둥이들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에스텔라는 편지를 떼 읽었다. 저번 만남 때 갑자기 미안하다면서 간 사람이기에 편지에 그날의 일에 대해 말한 것이 있나 싶었지만, 특별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에스텔라. 항상 왈가닥이었던 네가 아이 엄마가 된지 4년이나 흘렀다니. 나는 매우 신기할 따름이야. 쌍둥이라는 소식을 들었을땐 내 일이라도 된 것 마냥 기뻐했단다. 이제서야 직접 선물을 주며 축하해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준비했어. 너도 매우 좋아할 거야. 예전 버트랜드 저택에서 찾은 건데 네가 기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꽤나 소중했던 물건이니까. 아이들이 하나 가지고 싸우면 안 되니까 두 개 다 보낼게. 아이들이 언제나 건강하길 빌며, 너와 이자크도 행복하길.

다 읽은 편지를 다시 선물상자에 붙였다. 안에 뭐가 들었길래 소중한 거라고 말한 걸까. 어렸을 적 버트랜드 저택에서 논 기억이 많다. 릴리는 에스텔라를 친동생으로 여겼고 에스텔라 역시 릴리를 친언니로 여겼다.

‘릴리 언니도 알까? 한통속인가?’

버트랜드가 모든 사건의 진범이라는 걸 안 이상, 에스텔라는 어째서 릴리가 선물을 보냈는지 그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버트랜드의 친딸인데 설마 아무것도 몰랐을 리 없을 거다.

‘만일 언니도 한통속인 거라면… 그래서 그때 미안하다고 한 건가?’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람한테 너무 큰 실망을 하고 말았다.

가족이라 생각했던 이들인데.

에스텔라는 릴리가 보낸 선물을 빼버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뽀송하게 씻고 나온 쌍둥이들이 꺄! 선물이 산처럼 쌓였네! 하며 달려오는 바람에 그렇게 하질 못했다.

메라 신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성 메라 순절에나 볼법한 선물 꾸러미가 방 한편 가득히 쌓여 있다. 아이들은 펄쩍펄쩍 뛰며 선물 포장들을 뜯기 시작했다.

에스텔라가 예상했던 대로 장난감보다 악세서리나 보석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선물 내용보다 포장지와 상자 여는 것에 더 열중하는 느낌이다.

그러다가 릴리가 보낸 선물을 발견했다. 리본이 워낙에 꼼꼼히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에스텔라에게 대신 리본을 풀어달라며 건넸다. 리본을 풀어주자 루시와 루스가 얼른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열었다.

에스텔라 역시 그 안에 뭐가 들었나 궁금해 슬쩍 엿봤다.

“어! 동화책이다!”

“인형두 있따!”

포장지 뜯는 거에만 관심있던 녀석들이 처음으로 상자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세월감이 있으나 찢어진 곳 없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는 낡은 동화책과, 포쉘린으로 만들어진 금발의 어린 여자아이 인형 두 개.

그 둘을 보자마자 에스텔라는 릴리가 편지에 썼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엄마! 이거 읽어줘!”

아이들은 사이좋게 인형을 안은 뒤 에스텔라에게 동화책을 내밀었다. 동화책 표지에는 아이들이 안고 있는 인형과 똑같이 생긴 인형이 그려져 있었다.

<모든 걸 알려주는 인형>

에스텔라가 책표지를 열었다.

오로라 왕비는 공주를 낳고 급속도로 몸이 약해졌다. 병에 걸려 생사를 오고 가자 선왕 벤자민은 피를 토하며 발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해서 에스텔라는 한동안 버트랜드 대공의 저택에 맡겨졌었다.

그때 의기소침한 에스텔라에게 릴리가 선물했던 책이다.

에스텔라가 책장을 넘기며 운을 뗐다.

“모든 걸 알려주는 인형이 있었습니다-”

그 인형은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형은 혼자였고, 주인을 찾고 있었어요. 혼자는 너무 외로웠거든요.

어느 날 한 사내가 길을 가다 모든 걸 알려주는 인형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수도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인형이 지나가는 그를 불러세웠어요.

날 데려가 주세요. 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요.

그러자 사내가 물었습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그럼 이 문제도 풀 수 있니?

날 데려가 주면 말해줄게요.

사내는 인형을 데리고 수도로 갔습니다.

사내는 인형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풀 수 없다는 문제를 냈어요.

인형은 답을 알고있었지요. 자신을 데려가 줬으니 답을 말해줬습니다.

사내는 감탄하며 인형이 말해준 대로 학회에서 발표했어요. 다른 학자들은 그 누구도 풀 수 없었던 문제를 푼 사내에게 최고 학자 권위를 내려줬습니다. 사내는 큰 명예를 얻었어요. 그는 계속해서 인형에게 어려운 문제들을 물었습니다. 인형이 말해주면 말해줄수록 사내를 찬양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났어요.

사내는 자신이 최고의 학자라며 우쭐해했어요. 그는 어느 날 우스갯소리로 인형에게 물었어요. 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지? 그러자 인형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내가 답해준 대로 말을 옮기는 앵무새일 뿐이죠.

사내는 분노했고, 인형을 다시 길바닥에 버렸습니다.

인형은 다시 주인을 찾아다녔어요.

어떤 노인이 지나가는군요. 인형이 말을 걸었습니다.

날 데려가 주세요. 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요.

그럼 내가 부자가 되는 법을 알 수 있니? 내가 부자가 될 수만 있다면 널 데려가 주마.

인형은 노인에게 금화가 잔뜩 들어있는 금괴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려줬습니다. 노인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행복해하며 인형을 데리고 갔어요.

노인은 매일 매일 인형에게 금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보석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물었고 인형은 대답해줬습니다. 노인은 왕국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어요. 노인은 인형을 꽤나 아꼈습니다. 인형이 알려주는 곳마다 엄청난 보석과 금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인형은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나쁜 도둑이 들어 노인을 죽여버리고 보석들을 차지하고 말았거든요. 도둑은 저택의 모든 것을 훔쳐갔습니다. 인형까지 포함해서요. 그러다가 진흙탕에 인형을 떨군 채로 가고 말았습니다.

인형은 더는 주인을 찾아다닐 힘이 없었어요.

그저 진흙탕에 가만히 누워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누군가 인형을 진흙탕에서 건져 올렸어요. 그 누군가는 자신의 집에 데려가 진흙투성이가 된 인형을 깨끗하게 닦아줬습니다. 머리도 빗겨주고 새 옷도 입혀줬어요.

인형이 말했습니다. 난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요. 명예를 얻는 법도 부를 얻는 법도 알아요.

인형을 주워다가 씻겨준 이가 말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 딸이 널 선물 받고 기뻐할까?

그건 잘 모르겠네요. 주관적인 건 잘 몰라요. 그런 것 말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나, 금이 있는 곳을 물어보면 답해줄 수 있어요.

오, 나는 그런 건 필요 없단다.

인형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어린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군가는 인형을 등 뒤에 숨겼다가 딸에게 건넸습니다.

딸 아이는 매우 기뻐하며 방방 뛰었습니다.

인형을 꼭 껴안고 잤고요,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인형에게 동화책도 읽어줬습니다. 인형이 말했습니다.

난 모든 걸 다 알고 있어. 뭐든 물어보면 다 알려줄게.

그러자 딸아이가 물었습니다.

이 그림을 엄마한테 주면 엄마가 기뻐할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피. 그럼 다 아는 게 아니네. 나는 다 알 수 있어.

뭘?

우리 엄마가 이걸 받으면 기뻐할 것도, 나를 매우 사랑하는 것도!

그렇구나. 넌 다 알고 있구나.

인형은 더 이상 다 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매우 작은 집에 살았지만 인형에게 금이 어디 있는지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도 묻지 않았어요. 인형이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물어보는 걸 아무것도 모르는데 난 쓸모 없는 걸까?

그러자 딸이 말했습니다.

모르는 건 내가 알려줄게! 나랑 평생 같이 있자!

인형은 더 이상 주인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거든요.

대신에 인형이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인형은 질문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엄마와 딸은 인형이 묻는 것들을 알려줬어요. 인형은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알아갔습니다.

동화책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인형은 행복한 얼굴로 소녀와 함께 침대에서 잠이 드는 걸로 이야기가 끝이 났다.

에스텔라는 릴리와의 추억을 상기했다.

어머니가 아파 의기소침해진 에스텔라에게 릴리는 항상-

‘에스텔라. 모든 걸 다 아는 인형한테 물어보자!’

-하며 동화책에 나오는 인형을 들고 왔다. 에스텔라는 그럼 시무룩한 목소리로 우리 엄마가 다 나을까? 물어봤고 릴리는 어설픈 복화술로 그럼! 당연하지! 너의 엄마는 금방 나아! 말해주곤 했다.

어렸을 때는 그 인형이 진짜 말하는 줄 알고 신나서 방방 뛰었다.

인형은 두 개. 하나는 릴리 것, 하나는 에스텔라 것. 왕비의 병이 조금 호전되자 에스텔라는 인형을 두고 왕궁에 돌아갔다. 릴리는 그 인형과 동화책을 아직까지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화가 끝이 나자 아이들이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

“인형이는 아무것도 몰라? 그럼 우리도 가르쳐 주자!”

“나눈 그럼 일단 아이스크림 알려줄래. 그게 얼마나 달콤한 건지!”

“루스 너가 먹고 싶어서 그런 거자나.”

“아니거드은-”

에스텔라는 릴리 버트랜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확실히 알았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자신의 아버지가 한 짓을 모를까? 전혀 모르고 있을까? 아니야. 분명 알고 있던 게 분명해.

그렇다면 이 동화책을 보낸 이유는?

미안하다고 말한 이유는?

왕실 연회 초대장을 직접 건네주러 온 이유는?

5년 만에 온 이유는?

릴리의 모든 행동이 미심쩍다. 릴리는 목표 없이 아무 행동이나 하지 않는다. 릴리는 말수가 적은 대신 표정이나 행동으로 나타낸다. 에스텔라는 그런 릴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들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에스텔라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쯤 미엘라가 다가왔다. 파티에 초대된 이들이 모두 도착했다고 한다. 에스텔라의 무릎에 팔을 괴고 동화책을 듣고 있던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연회장으로 달려갔다. 에스텔라 역시 찝찝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티에 초대된 이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델라 랭, 가브리엘, 그리고 작위가 낮은 귀족 가문 몇몇, 오르테즈 남매와 이자크의 전 직속부대 기사들.

그래도 모든 이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에스텔라와 이자크, 그리고 아이들이 연회장에 나타나자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던 이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생일 축하드려요, 루시 아가씨, 루스 도련님!”

귀족들이 일제히 아이들에게 축배를 들어 올리며 말하자 루시와 루스가 신나서 박수를 짝짝 쳤다. 그들이 가져온 선물들을 또 하나씩 풀어보며 와! 목마다! 와! 장난감이야! 와! 인형이야! 와! 동화책이다! 하며 흥분한 아이들은 그 많은 에너지를 선물 풀어보는 것에 쏟아부었는지 한참 연회장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잠에 들고 말았다.

아이들이 시녀들의 품에 안겨 연회장을 빠져나가자 드디어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해야 할 말을 하기 위해 자그마한 단상 위로 올라갔다. 먼저 그들에게 와준 것에 감사하다는 말을 한 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의 그들에게 거대한 폭탄을 하나 떨궜다.

저희가 셋째를 가졌습니다.

간단명료한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꾹 웃음을 참았다. 보통은 장황하게 말할 텐데 이자크는 참 그답게도 말한다. 오히려 장황한 설명일수록 듣는 이들은 점점 수긍을 하게 되는데, 어떠한 부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셋째가 생겼다는 말만 하고 내려오니 다들 입이 턱까지 내려와 그와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더 설명을 해달라는 얼굴이다.

설명할 게 뭐가 있나. 그저 돌아섰던 마음이 다시 서로를 쳐다봤고, 어쩌다 보니 마음 맞고 눈 맞고, 그러다보니 배꼽도 맞대게 된 것 아니겠는가.

에스텔라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돌렸고, 델라 랭의 눈이 커지며 집사 할아범을 쳐다봤다. 너 나한텐 이런 말 없었잖아?! 하는 눈빛이었다. 아르텔이 얼른 델라 랭의 눈을 피했다. 가브리엘은 정말 축하한다며 자리에서 동동 발을 구르며 배내옷은 자기가 책임지겠다 한다.

오르테즈 남매는 약간 혼란스러운 듯 서로를 바라봤다. 귀족들은 이 소문을 빨리 퍼트려야 한다며 난리였고 이자크의 전 직속부대 기사들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자크에게 슬쩍 엄지를 들었다.

반응들이 다 제각각이었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이 어쩐지 뿌듯했다. 이자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오자 델라 랭과 가브리엘이 얼른 달려왔다.

델라 랭의 눈은 촉촉했다.

“공주님. 공주님 드디어… 아휴, 제가 주책이네요. 정말 축하드려요. 부디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길 기도하겠습니다. 아이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말하며 에스텔라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리고는 잠시 자리를 비켰다. 가브리엘이 작게 속삭이며 이번 왕실 연회 때에도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며 목표량에 도달할 것 같다 귀띔했다.

에스텔라가 가브리엘에게 말했다.

“아. 그래요? 나중에 사업 관련하여 할 말이 있으니 내가 찾아갈게요. 가브리엘의 의상실에.”

“네!”

사실 에스텔라는 가브리엘이 말한 목표량에 도달한다는 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인지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사주가 있는 건지, 모두들 그녀가 과거에 정확히 무슨 일을 하려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가브리엘이 가자 이번엔 오르테즈 남매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약간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내 남동생 쪽에서 슬쩍 에스텔라에게 물었다.

“그럼 공주님, 후원에 대해서는 이자크님한테-”

“알렌.”

누이가 그의 이름을 나지막히 부르며 저지하더니 이내 방긋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더니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남동생을 데리고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이자크와 사업을 할 거란 얘기는 들었는데. 나와 오르테즈 남매가 서로 아는 사이인가? 이자크는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에스텔라는 오르테즈 남매를 관찰하기 위해 목을 쑥 빼고 그들을 찾아 시선을 돌렸지만, 이내 축하하러 온 다른 귀족들 때문에 정신이 사나워졌다.

“공주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세상에, 셋째라니,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가 태어날까요.”

“공주님께는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셨으면 해요.”

에스텔라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축하의 말을 듣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델라 랭의 지시로 몰래 빠져나온 오르테즈 남매가 연회장 뒤편으로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알렌 오르테즈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누이 로안 오르테즈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님께서 기억을 잃으셨다는 소문이 있었잖니.”

“그럼 공주님한테 다 말해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여태까지 공주님께 받은 후원이나, 도움 같은 거요. 그리고 앞으로도 뭘 해야할지도 물어봐야 하고-”

그러자 델라 랭이 말했다.

“공주님은 스스로 다 알아내실 수 있어. 거의 다 기억하시는 중이니까 너무 걱정 말고. 공주님께서 직접 물어보기 전에는 절대 먼저 다 말하지 말렴.”

“네, 마담.”

“…네에….”

말로는 알았다 대답했지만 알렌 오르테즈는 사실 여전히 어른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질질 끌 일인가? 어차피 셋째가 생긴 걸로 보아 공주님과 이자크 님의 사이도 회복된 것 같은데 괜히 오해를 만들기 전에 두 분이 서로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희생했는지 말해주면 사이가 더 좋아지는 것 아니던가?

참으로 이상한 상황 아니던가. 당사자들은 모르고 있는데 동업자들만 서로를 아는 상황이. 나중에 밝혀지면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

알렌 오르테즈는 정말 사랑해서 보내준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는 이였다. 정말 사랑하면 끝까지 놓지 말아야지. 왜 서로를 놔주는데?

때로는 사랑하는 제 감정보다 그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는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을 이해하기에 그는 매우 어렸다. 로안 오르테즈는 여전히 이해 못 한 듯 보이는 제 남동생의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럼, 마담. 일단 사업은 계속해서 하겠습니다.”

“네. 그리하세요. 둘 먼저 들어가세요. 전 조금 더 있다 들어가겠습니다.”

오르테즈 남매가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텔이 다가왔다. 노인의 모습에 매번 적응 안 된다 하던 그녀이기에 아르텔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왜요.”

“왜요? 너 진짜 자꾸만-”

“극적인 반응을 보고 싶어서 그 부분만 빼고 말했어요-”

아르텔이 장난스럽게 웃자 델라 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 말대로 정말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공주님께서 셋째를 가진 건 이례적인 일이지?”

“네.”

“어쩌면 이번엔 정말 끝이 날지도 몰라.”

델라 랭의 얼굴이 희망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반대로 아르텔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표정을 읽은 델라 랭이 그를 툭 치며 물었다.

“잠깐이라도 그냥 순수하게 기뻐해 봐. 매번 그렇게 걱정부터 하지 말고.”

“그럴 상황이 아니란 걸 알잖아요, 델라. 이제 버트랜드랑 정면으로 마주하시면 위험할 수도 있는데 태중에 아이까지 그놈에게 알려지면-”

“아르텔. 네가 공주님을 생각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야. 우리가 공주님을 보호하면 되잖니. 공주님이 기억만 다 돌아오면, 그 책만 찾으시면 된다고. 다이어리를 찾으셨다니까 곧 메라의 금서도 찾아내실 거야.”

“하지만 그러면-”

“혼란스러우시겠지. 그 많은 시간들과 기억들을 한꺼번에 버텨야 하니까. 하지만 공주님은 강해. 알고 있잖아?”

델라의 말에 아르텔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메라 신이 네가 만난 인간들 중 누가 가장 강하느냐 물으면, 아르텔은 인간과 신 모두를 통틀어 에스텔라 공주님만큼 강한 분은 없노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건 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델라. 여기 있었군요.”

“공주님.”

연회장 밖에 나온 에스텔라가 델라 랭에게 다가왔다. 델라 랭이 당황했고 아르텔 역시 제 본 모습을 보여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이분은? 못보던 분인데.”

“아. 제 비서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군요?”

아르텔은 얼른 중절모를 벗어보이며 에스텔라에게 인사했다. 아르텔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아르텔?”

“…예?”

“아, 아니에요. 이름이 아르텔이 아닌가 하고….”

확실히 에스텔라의 기억이 다 돌아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델라 랭이 웃으며 제 비서를 기억하시는군요! 하고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에스텔라에게 팔짱을 끼고 천연덕스럽게 행동하며 델라 랭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텔은 얼마 남지 않은 이 평화가 깨지는 것이 매우 슬펐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릴리에게서 받은 왕궁 연회 초대장에 써진 날짜가 점점 더 다가오더니 일주일을 앞두고 있다. 오늘은 저택에 왈츠 선생이 찾아왔다.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두 쌍둥이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자신들이 직접 선생님을 맞이하겠다며 중정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쌍둥이들이 왈츠를 배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왕실 연회에는 모든 귀족들이 다 참석해야 한다. 갓 태어난 아이까지 황금 자수 포대기에 데리고 오는 것이 이 왕실 연회이다. 왕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금쪽 같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어린 귀족가의 자제들을 위해 어린애들끼리 따로 방을 만들어 둔다. 왕에게 아이들을 소개시킨 뒤 조금 데리고 있다 그 방에 맡기면 아이들끼리 또 친해진다.

에스텔라는 이번 연회에 아이들을 데려갈지 말지 고민했다. 단순히 즐기러 가는 연회가 아니지 않나. 두 사람이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부터 왕궁 연회에는 에스텔라만 갔다고 한다. 항상 변명을 둘러대며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았다고.

해서 루시와 루스는 또래 친구들이 하나도 없다. 아마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매일 수도에서도 떨어져있는 변경백 저택에서 자랐었으니까.

이번에도 데려가지 말까, 이자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이들이 귀신같이 알고 달려와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며 재투성이 아가씨 책을 펼쳐 보였다.

“나도 엘라처럼 가고싶어요.”

“여기 반짝반짝 하구, 이쁘다?”

왕궁연회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찬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맨 처음엔 위험하니 안 돼. 단호하게 말했던 이자크와 에스텔라도 일주일 동안 아이들의 반짝거림을 마주하니 별수 없었다.

결국 그리하여 왈츠 선생이 저택에 방문하게 되었다.

누군가 문고리를 두어 번 두드리자마자 아이들이 쏜살같이 달려나가 문을 열었다.

“선샌미! 어서 와요!”

“선샌님이다! 선샌님!”

왈츠 교사는 열렬한 환영에 당황한 듯 보였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교습실에 도착하니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먼저 테이블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교사는 부부에게 인사를 올린 뒤 바로 같이 온 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서로 파트너가 되어 어떻게 상대방의 몸을 잡는지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에스텔라를 닮아 춤에 소질이 있는 건지 곧잘 따라 한다.

교사 역시 진땀 빼지 않고 박자에 맞춰 동작들을 가르쳐줬다. 에스텔라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작은 것들이 자기들도 춤춰 보고 싶다며 학구열을 올리는 것이 참 귀엽지 않은가.

“루시랑 루스가 의외로 춤을 금방 배우네요.”

“그러게요. 에스텔라를 닮았나 봅니다.”

“이자크보다 더 잘 출 것 같은데.”

에스텔라가 그를 슬쩍 쳐다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로도니아 살롱에서 어찌나 발을 밟으시던지. 발가락이 좀 많이 아팠습니다? 하자 이자크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사실 에스텔라가 이자크를 데리고 이곳에 와 있는 이유는 단순히 아이들이 꼼지락대며 추는 춤만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이자크도 오늘 수업의 학생 중 하나이다.

아이들의 수업이 한차례 끝나자 이자크의 차례가 되었다.

상대역은 에스텔라.

교사는 친절한 목소리로 이자크의 손부터 교정시켜줬다. 여긴 여길 잡으시고요, 여긴 이렇게 잡으시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그럼 첫 번째 스텝부터 시작할게요-

교사가 1-2-3- 숫자를 부르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자 에비보부터- 내추럴 턴, 오픈 임피턴스, 위브 투 피피. 박자 맞춰서 빠르지 않게-삿세,내추럴, 턴닝-윙 한번 가시고- 발 박자 맞추시면서 가세요-”

“악!”

“미안합니다. 에스텔라.”

분명 네 살 어린애들을 가르칠 땐 이렇게 땀이 나지 않았는데. 왈츠 교사는 자꾸만 리듬을 틀리는 이자크의 발이 에스텔라의 발을 밟을 때마다 저가 다 진땀을 빼기 시작했다.

아직 연주에 맞춰 가지도 않는데 이 정도면 심히 몸치가 아닌가 싶다.

에스텔라는 열넷, 그를 처음 온실에서 봤을 때 왜 남들처럼 연회장에서 춤을 추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춤에 관심도 재능도 없는 게 분명했다.

“잠시 쉬었다 하겠습니다.”

결국 교사가 휴식시간을 줬다. 이자크는 버벅대면서 춤을 추다 그제야 살겠는지 곧바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발을 많이 밟지는 않네요.”

에스텔라가 위로랍시고 말했다.

“당신은 좀 쉬고 있어도 되는데.”

“어머, 다른 여자랑 파트너 하는 꼴을 보라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버벅대는 창피한 모습을 들키기 싫은 것이다. 사랑하는 이자크가 수치심을 느끼든 말든 에스텔라는 지금 사심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셋째 임신 소식을 안 그 이후부터 일체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겨우 하는 것이 손잡기 정도.

그는 포옹도 하지 않으며, 뽀뽀는 당연지사 심지어 키스도 안 한다. 에스텔라가 먼저 하려고 하면, 초기에는 자제해야 한댔어요. 하며 딱 부러지게 말한 뒤 잠을 자는 것 아닌가.

어이가 없다. 에스텔라는 어이가 없어 밤마다 제 허벅지만 꼬집으며 자야 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에스텔라와의 밤을 진짜 손만 잡고 자고 있으니 에스텔라는 이런 식으로라도 사심을 채워야겠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려면 아직 한참 남은 거 같아 연주자는 바이올린을 꼭 껴안은 채로 구석에 앉아 졸기 시작했다.

“삿세부터 다시 시작할게요. 자, 삿세- 아웃사이드 체인지, 네추럴 턴, 스핑 턴! 스핑 턴 잊지 마시구요. 다시 리버스 턴, 더블 리버스, 리버스턴 다시 한번, 하이 호버 코르테-”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채로 그가 실수를 하든 말든 딱 붙었다. 그러다가 이자크가 박자를 놓치면 다시 관대한 표정으로 팔을 벌리며 이리 오라 손짓했다.

이자크는 제 품에 얼굴을 묻고 눈을 꼭 감고선 흐뭇하게 미소짓고 있는 에스텔라를 내려다봤다.

이 여자가 진짜.

타들어가는 남편 마음도 모르는 야속한 아내다. 이자크도 뭐 이러고 싶어서 내외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매번 토끼 같은 눈망울로 자신을 쳐다보다가도 밤만 되면 살짝 풀어진 눈으로 야릇하게 여보- 하며 이름을 부르는데 거기에 동하지 않을 남편이 어디에 있냔 말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동생이 생겨 엄마를 뺏기고 싶지 않은 쌍둥이들이 밤만 되면 같이 자겠다고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는 데다가, 뱃속의 아이도 아직 다 자리 잡지 않은 상태라 위험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에스텔라는 저만 허벅지 꼬집으며 자는 줄 알지만 사실 이자크도 같은 상황이란 말씀이었다. 에스텔라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며 한껏 느낄 때마다 이자크의 심장만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물론, 그 둘의 모습을 보면서 네 시간 정도의 수업을 해야 하는 왈츠 교사가 제일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마 왈츠 강사는 오늘 저녁 저택에 돌아가 거나하게 술 한잔할 것이다.

*

왕궁 연회 날 당일이 되었다. 오늘 오후부터 열리게 될 왕궁 연회를 위해 수도 광장의 거리가 귀족들의 마차로 꽉 찼다. 국경선에 위치한 변경백의 저택에서 왕궁까지 제시간에 가려면 적어도 4-5시간은 잡아야 했다.

준 여정에 가까운 날이기에 저택의 시종들은 모두 바삐 움직였다.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시중을 들고, 중간중간 먹을 야참을 준비하고, 마차를 점검하고 기타 등등 모든 일이 다 끝나갈 때쯤 에스텔라와 이자크, 그리고 들뜬 쌍둥이들이 커다란 마차에 올랐다.

“다녀올게!”

쌍둥이들은 릴리에게서 받은 인형을 품에 꼭 껴안으며 시종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곧 죽어도 얘네를 데려가야 한다며, 인형은 아직 연회에 가본 적이 없어 모를 테니 알려줘야 한다는 통에 결국 인형들까지 같이 왕궁에 가게 되었다.

에스텔라는 아직 그 인형들이 찝찝했다. 릴리 버트랜드의 의중이 뭔지 도통 모르겠다.

왕궁 연회에 가면 버트랜드를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에스텔라는 이번에 다시 한번 반사 상태인 아버지를 이곳 변경백 저택으로 모시고 싶다 청할 예정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버트랜드가 반사가 된 아버지의 육체를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그의 진심을 몰랐을 때는 저번처럼 그의 연기에 넘어갔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버트랜드는 분명 아버지의 육체를 제 손에 쥐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일까. 에스텔라에게 인질로 잡기 위해? 아니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떠오르는 이유는 적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적의 손에 아버지를 방치한 것 같다는 죄책감은 지울 수 없었다.

에스텔라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목격한 이자크가 조용히 손을 내려 에스텔라의 손을 다독였다. 앞에서는 아이들끼리 인형에게 마차 밖의 풍경을 보여주느라 조잘댄다.

“내가 지금 맞게 행동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이 떼를 쓴다 해도 조금 더 강력하게 나가 왕궁 연회에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 하나.

버트랜드를 보면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아이들 앞에서 나는 눈물 흘리겠지?

“당신 선택은 틀리지 않습니다. 버트랜드와 금방 대적할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힘들겠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을 내려놓고 갑시다. 일단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러 가는 거니까요.”

엄마가 이렇게 표정이 안 좋으면 태중의 아이가 분명 걱정할 겁니다. 이자크가 나직이 말하며 싱긋 미소지었다. 에스텔라 역시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이자크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자.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닥쳐올 불행을 먼저 걱정하기보다 지금의 평화를 더 견고하게 만들고 기억하자. 훗날에 힘이 되는 것은 행복했을 때의 기억뿐이니까.

그게 힘들 거라는 건 이자크도, 에스텔라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간질한 적을 직접 만나러 가야 하고, 그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침을 떼야 한다.

하지만 버트랜드는 이미 이자크를 견제하고 있다.

풀숲에 들어간 맹수들이 풀 사이로 몸을 숨기고 적을 관찰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 누구 하나 먼저 달려들지 않고 서로 그르렁대며 경고와 경계만 주고받는 그런 상황.

에스텔라는 갈대밭 사이로 한껏 몸을 숨긴 와중에서도, 적의 시선이 계속해서 이곳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위협적이지 않은 척 노련하게 움직이며 그를 궁지에 몰아야 한다.

이 이상한 관계성을 어떻게 해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만들지, 에스텔라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

연회장에 도착했다. 수많은 귀족 마차들이 왕궁 정원에 줄지어있다. 아이들은 이렇게나 많은 마차는 처음 보는지 와! 마차가 엄청 많다! 하며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잠깐의 체증이 끝나고 에스텔라와 이자크, 그리고 쌍둥이들이 마차에서 내렸다.

커다란 왕궁 계단을 오르려 하자 멀리서 왕의 보좌관이 뛰쳐나왔다.

“공주 전하, 연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보좌관은 오늘 하루 종일 연회장 계단 앞에 죽치고 앉아 에스텔라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에스텔라가 도착하면 즉시 맞이하라는 국왕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좌관과 호위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연회장 안에 들어가자 귀족들의 수많은 눈이 공주와 이자크, 그리고 쌍둥이들에게 쏠렸다. 공주가 제 가족과 함께 나타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루시와 루스는 이렇게나 많은 이목이 자신들에게로 쏠리는 것이 무서웠는지 에스텔라의 치맛자락 뒤로 숨으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귀부인 중 나이가 많은 이들은 머리에 계란 칠을 하여 높이 높이 머리카락을 올려 탑처럼 만드는 이들도 곧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년의 귀족 중 몇몇 역시 하얗게 분칠을 하고 볼과 입술만 빨갛게 칠한 이들이 있었는데 아이들 눈에는 그것이 꽤나 기괴하게 보였다.

“무져워-”

“괜찮아, 안 무서워.”

에스텔라가 제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기며 칭얼거리는 루스를 번쩍 들어 안았다. 루시 역시 나도, 나도! 하며 손을 뻗자 이자크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매우 신기한 듯 쳐다봤다.

소문의 에스텔라 공주는 분명 이혼 신청도 한 데다가 남편과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들었는데. 지금의 그녀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는 아이를 달래는 평범한 엄마였다. 어디 그뿐일까. 이자크와 눈을 마주치며 편하게 대화하는 모습에 귀족들은 놀란 듯 보였다.

그들의 반응들은 한결같았기에 에스텔라는 이제 신경 안 쓰기로 했다. 그건 이자크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귀족들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어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눅 들지도, 오히려 과하게 그들의 애정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공주와 그의 가족이 마치 서커스단의 원숭이라도 되는 양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는 귀족들 사이를 헤치며 누군가 공주님! 에스텔라 공주님! 하며 이름을 불러왔다. 체스 부인이었다. 아주 예전에 에스텔라가 조언을 구했었던 체스 부인의 모습에 에스텔라가 반가운 듯 웃으며 체스 부인에게 다가갔다.

“체스 부인!”

“공주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머, 도련님이 너무 귀엽게 생기셨다.”

“앙녕하세요….”

루스가 손가락을 빨며 인사를 하다가 이내 에스텔라 품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럽고 낯설어서 그런지 평소 활기차던 루시도 조용히 이자크의 품에 얼굴을 묻고만 있다. 체스부인이 아이들의 등을 한 번씩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쪽에 아이들을 위한 방이 따로 준비되어 있어요.”

체스 부인이 손짓하자 시녀들이 다가왔다. 루시와 루스는 엄마 아빠와 떨어지기 싫은 듯 싫어, 싫어어- 같이이- 하며 떼를 썼다. 체스 부인이 호호 웃으며 어쩜 아이들이 엄마랑 아빠를 너무 좋아하네요, 라며 일부러 다들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결국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루시와 루스를 데리고 어린 귀족 자제들을 위해 만들어진 놀이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어린애들과 함께 온 부부들이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비교적 젊은 부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들어오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올려다봤다.

체스 부인이 레일리, 에단- 하며 아이 이름을 부르자 구석에서 나무 블록을 가지고 놀던 7살, 9살 난 남자애 둘이 쪼르르 달려왔다.

“레일리. 에단. 인사하렴 메시앙의 공주님이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둘 다 체스 백작을 똑 닮았다. 에스텔라가 그래, 안녕. 하며 인사를 하자 남자애들은 아직 엄마와 아빠 품에 안겨있는 쌍둥이들을 쳐다봤다.

“둘이 완전 비슷하게 생겼다. 몇 살이에요?”

“루시. 몇 살인지 말해줘야지.”

루시는 저랑 비슷한 또래의 어린애들과 직접적으로 만난 적이 없어 잔뜩 긴장한 채로 손가락 네 개를 슬그머니 폈다.

“네 살? 너 네 살이야?”

“응.”

“쟤는?”

“루스도.”

“둘이 쌍둥이구나? 가서 우리랑 블록 가지고 놀래?”

루시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자크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에스텔라 품에 안겨있던 루스가 루시를 부른다.

“루시이 가지마아-”

“루쓰, 너두 와.”

“이름이 루스야? 루스! 우리랑 놀자!”

“…히잉….”

엄마 품에 안겨있고는 싶은데, 그렇다고 루시가 또래 애들과 가버리는 건 싫고. 한참 고민하던 루스도 결국 에스텔라 품에서 내려와 아이들을 따라갔다.

체스 부인의 두 아들은 루시와 루스를 데리고 블록 놀이를 시작했다. 조심조심 탑을 쌓아 올리다가도 와아아! 함성 소리를 내며 높이 올린 탑을 와르르 무너뜨리자 루스와 루스가 신나서 꺄르륵 웃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친화력이 좋네요. 루시랑 루스는 은근 낯을 많이 가리는데….”

에스텔라가 네 명의 아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체스 부인이 저 붙임성 좋은 성격은 절 꼭 닮은 거 같아요. 그쵸, 여보? 하며 묻자 어느 새인가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체스 백작이 그럼요, 여보. 하며 대답했다. 그러다가 에스텔라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체스 부인이 그때 조언해준 덕분에 이자크와의 사이가 많이 좋아졌어요.”

에스텔라가 체스 부인에게 조심스레 말하며 고맙다 인사를 하자 체스 부인이 얼른 손사래 쳤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나요. 공주님께서 진심을 보여주셨으니 통한 거죠. 오늘 공주님께서 혼자 오시려나 했는데 다 같이 오신 것 보니까 너무 보기 좋더라구요.”

“고마워요. 그나저나 저번 부부 연회때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려서 미안했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덕분에 그 재수없는 올란도 후작 얼굴이 완전히 뭉개지는 장관도 구경했는걸요.”

그놈, 공주님 가시고 난 뒤에 아내랑 대판 싸웠는지 얼굴이 시무룩하던걸요? 하며 체스부인이 귓속말했다.

어느새 아이들은 서로 술래잡기 놀이를 할 정도로 친해졌다. 루스가 신나서 형! 형아! 루시! 내가 다 잡을 고야! 하며 달려간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친해지고 부인들은 부인들끼리만의 대화에 빠져 있는 와중에 두 남편은 어색하게 아내 뒤에 서 있다가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곤 또 어색하게 목례하며 딴청 피우길 반복했다.

연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을 잠시 방에 둔 채로 귀족들 모두가 연회장에 모였다. 곧 이 층에 있는 금색 대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 레드카펫을 밟으며 국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버트랜드를 쳐다봤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에게 인사를 올리는 귀족들을 둘러보다 에스텔라와 눈이 마주치자 오랜만에 딸을 만난 아비처럼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역겨워.

에스텔라가 배신감에 살짝 손을 떨었다. 얼른 드레스자락을 잡고 자신 역시 다른 귀족들처럼 인사를 올렸다.

어째서?

어째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척까지 하면서 그러는 거죠?

믿었던 대부님이다. 당신 다리보다 제 목숨을 더 중요시 여겨줬던 사람이었다. 생명의 은인이었던 분이 어째서 철천지원수가 되고 만 것인가.

이자크가 거짓말할 리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자신을 보며 유한 미소를 짓는 대부님과의 추억이 자꾸만 떠올라 괴로웠다. 언젠가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는 내가 저분과 대치해야 할 날이 오겠지. 나는 저분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하겠지.

그 과정이 쉽고 평화로우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에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제 배를 감쌌다.

국왕의 연설이 끝난 뒤 모여있던 귀족들이 각자 흩어졌다. 연주가 시작되고 귀족들은 서로 안부와 사업을 물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이 있던 놀이방에 가니 엄마와 아빠는 안중에도 없고 그사이 또 새로운 친구를 사귄 듯 복작거렸다.

문가에 에스텔라가 온 것을 본 루시와 루스가 아이들과 놀다 냅다 달려왔다.

“루시. 루스. 친구들 많이 사귀었어?”

“웅!”

“우리 다 같이 블록 놀이 할 거다?”

“그래. 그럼 잠시만 친구들이 더 놀고 있어. 엄마랑 아빠 조금만 이따 올게.”

“응-!”

아이들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다시 무리 사이에 돌아갔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쳐다보다 방을 빠져나왔다.

연회장에 돌아가니 악단의 음악소리와 귀족들의 떠드는 소리에 살짝 정신이 없어졌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지? 에스텔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자크를 찾아 주변을 둘러봤다. 이자크는 어느새 에스텔라 옆으로 와 있었다.

“이자크, 무슨 일이라도 났나요? 왜들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건지.”

“아마 직접 보는 게 좋을 겁니다.”

이자크는 에스텔라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의 턱끝이 향한 곳을 보니 귀족들 중 일부가 누군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에스텔라는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오르테즈 양이 여긴 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초대받아 온 것입니다.”

“초대? 국왕전하께서 초대를 하셨다고? 그러니까 전하께서 왜 쫄딱 망한 오르테즈 가문의 남매를 초대한단 말이죠?”

“국법상 노블레스들은 모두 왕실 연회에 초대받게 되어 있으니까요.”

진부한 레파토리였다. 집안이 몰락한 오르테즈 남매를 무시하는 귀족들. 도대체 누가 천한 피고 누가 고귀한 피인지 구분을 못 하겠다.

“오르테즈 가문이 노블레스인가요? 파산하여 몰락한 노블레스는 껍데기일 뿐이죠. 아. 설마 이번에 사업을 시작해서 어떻게 해서든 눈에 들려고 온 건가요? 사업 자금은 어디서 난 걸까-? 노블레스 증명서라도 팔아 마련했으려나? 그럼, 더는 노블레스가 아니지 않나요?”

다들 들으라는 듯 카랑카랑 얄미운 목소리로 말하는 이는 올란도 후작 부인. 그러니까, 오르테즈 가문이 몰락하기 전 비슷하게 은행을 운영했던 피올라 가문의 장녀였다.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그 찌질한 올란도 후작과 결혼하나 했더니, 역시 끼리끼리였군. 에스텔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여운 오르테즈 남매는 올란도 후작 부인을 주축으로 자신들에게 잔뜩 가시 돋친 귀족들에게 빙 둘러싸여 공격당하고 있었다.

아, 공격이라기에는 조금 덜 위협적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들을 상대하는 헬렌 오르테즈가 대담한 걸까. 헬렌 오르테즈는 공격에도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제 막 열다섯 된 제 남동생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지도 모른다.

오르테즈 남매를 심술궂은 올란도 후작가문과 그의 떨거지들로부터 보호하려던 에스텔라는나서려다 말았다. 헬렌 오르테즈가 에스텔라에게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듯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증명서를 팔아 사업을 시작한 것도 아니며, 당신네들 눈에 잘 보이고 싶어 이 연회에 온 것이 아닙니다. 나와 내 동생은 그저 후원자님의 초대를 받아 왔을 뿐, 가문을 모욕하는 짓 따윈 하지 않았습니다만, 올란도 부인. 이렇게 사람들 모아 공격하는 그대의 성격은 결혼해서도 어딜 가지 않나 보네요.”

“후원자? 누구의 후원을 받아 왕실 연회 초대장을 손에 얻는단 말이죠?!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을 고하세요. 나중에 들키면 그때는 배로 망신당하지 않습니까. 초대장이 있으면 어디 한 번 꺼내 보시죠.”

왕실 연회에는 세 부류의 귀족이 있다. 국왕이 직접 초대하는 사람, 국왕이 초대한 사람에게 초대받은 사람, 초대받지 않았는데 온 사람.

귀족이라면 누구나 이 연회에 올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초대장 없이 온 귀족들은 그걸 숨기려 든다. 이 자리에 올 만한 가문의 힘도, 능력도, 권력도, 재력도 없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혹은, 부르주아들에게 망신을 주려는 노블레스들의 심술이기도 했다. 노블레스는 집안 대대로 명망 있는 귀족 가문. 부르주아는 사업을 시작하여 부를 축적한 평민 혹은 하급 귀족들.

귀족들은 그들을 ‘졸부’라 칭하며 비하했다.

부르주아들은 아직 패권을 쥐고 있는 노블레스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몰락한 귀족 가문에게서 거금을 주고 노블레스 증명서를 사기도 한다. 노블레스 증명서는 국왕에게서 승인받은 귀족 가문이라는 걸 의미하는 일종의 족보와도 같았다.

올란도 후작 부인의 비아냥거림에 결국 헬렌 오르테즈가 품에서 초대장을 꺼내 들이밀었다. 그들은 눈으로 봐도 조작된 초대장이라 믿지 않을 이들이 뻔할 테지만.

헬렌이 초대장을 건네다가 저 멀리서 에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에스텔라는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고 헬렌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메시스? 후원자가 네메시스라고요? 거짓말! 어딜 감히 조작된 증명서를 들고 와서는-!”

“당신은 뭘 들이밀어도 조작이라 믿고 싶을 겁니다. 올란도 후작 부인. 하지만 보이는 그대로, 우리 오르테즈 남매는 네메시스의 초대를 받아 이 자리에 온 것뿐이에요. 그리 믿지 못하겠다면 네메시스에게 직접 물어보시던지요.”

“얼굴도 이름도 정체도 모르는 네메시스가 누군 줄 알고 물어본다는 거죠? 하, 머리 좀 쓰셨네, 헬렌 오르테즈. 귀족 중 그 누구도 네메시스의 정체를 모르는 데다가, 본인도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걸 이용해서 잘도!”

“그리 믿고 싶으면 그리 믿으세요. 저희는 네메시스의 후원을 받아 사업을 시작한 것이며, 또한 그분의 초대를 받아 이 자리에 온 것이지 어떻게든 당신에게 잘 보이려 온 게 아니랍니다, 올란도 후작 부인. 당신 말고도 제가 비빌 곳은 아주 많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헬렌이 흘깃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에스텔라는 그녀가 자신을 쳐다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메시스.

메시앙의 귀족들이라면 네메시스에 대해 모를 리 없다. 네메시스는 가문의 이름이 아니다. 그저 익명의 귀족이었고, 자기 자신을 네메시스라 부르기 때문에 별칭처럼 굳혀진 이름이었다.

에스텔라가 어렸을 적부터 네메시스에 대한 추측은 무성했다. 버트랜드 대공이라는 말도 돌았었고 피츠버그 후작이라는 말도 돌았었다. 높으신 귀족들은 오히려 네메시스일지도 모른다고 거론되는 일이 사회적으로 꽤나 높은 영향력을 가진 이라고 거론되는 거나 마찬가지라 여기기도 했다.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그 네메시스는 엄청난 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만 나 있다. 그가 투자한 사업들은 줄줄이 성공했고, 메시앙의 경제를 움직이는 이라는 말도 돌 정도였다. 그 돈으로 항상 누군가를 후원했었기에 네메시스의 후원을 받은 이들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아무리 부르주아라 한들 무시 못 할 존재가 되기도 했다.

왕국의 보이지 않는 실세라고도 평이 되었던 것이 바로 그 네메시스. 그의 정체는 국왕과 그의 최측근들만이 알고 있다고.

“자. 이거면, 어떻게 인증이 좀 되었으려나요?”

헬렌이 품에서 브로치 하나를 꺼내더니 제 옷에 달았다. 네메시스를 상징하는 금색 독수리와 그를 가로지르는 엇갈린 긴 창이 새겨진 브로치였다. 그 브로치는 일반 대장장이들이나 세공사들에게 맡긴다고 하여 받을 수 있는 브로치가 아니었다.

아다만트라는 특별한 광석으로 만들어지는 브로치로 이곳 메시앙 왕국에서 오로지 딱 한 명만이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세공사는 아무리 거금을 주고 네메시스의 브로치를 따라 만들어 달라 해도 주문을 받지 않는다고 소문 나 있는 사람이었다. 헬렌이 그 브로치를 꺼내자마자 귀족들은 웅성댔다.

코웃음 치려던 올란도 후작 부인도 결국엔 입이 떡 벌어진 채 눈만 끔뻑였다.

에스텔라 역시 그 브로치를 보자마자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저 브로치는….”

그 누구도 네메시스의 진짜 정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오로지 네메시스 본인만 알 수 있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오르테즈 남매가 꺼낸 브로치를 보자마자 확신했다.

네메시스라는 이의 정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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