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12화 (12/21)

12장.

에스텔라가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8년 전 선왕 살인미수 사건과 전 디에스 변경백의 역모죄를 재수사 신청하시고 싶으시다고요.”

책상에 앉아 에스텔라를 올려다보는 남자가 싱긋 미소지었다.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멈칫한 것을 눈치챘다. 방문이 열리고, 아니, 방문 앞에 붙은 남자의 이름을 봤을 때부터 위화감이 느껴졌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방문이 열린 뒤 남자의 얼굴이 보이자 에스텔라가 살짝 동요했다는 것도 눈치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주님.”

데미안 허스트는 사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에스텔라가 자신을 찾아온 것인가. 에스텔라가 다른 계획이라도 세운 건가 싶어 데미안 허스트는 얼른 이자크와 에스텔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부군께서도 아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시면 공주님만 오해를 사십니다.’

‘아니. 데미안. 이자크는 아무것도 몰라야 해. 그게 그와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시면 공주님은 아무것도 남는 게 없으십니다!’

‘나한테는 이자크와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남는 거야.’

‘공주님!’

‘…반대로. 그들이 없으면 나도 아무 의미 없어.’

‘공주님….’

‘이자크에게는 비밀이야. 그의 사람들에게도 모두. 심지어 내가 기억을 잃고 널 찾아온다 해도 비밀로 해. 나한테조차도 숨기렴, 데미안. 오랜 친구로서 하는 부탁이야.’

공주가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은 이미 예전에 들었다. 깃털보다 가벼운 귀족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인지라 신빙성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제 눈앞의 에스텔라와 이자크를 보니 정말 공주가 기억을 잃은 건가 불안해졌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럼 지금까지의 일들은 어찌 되는 거지?

다른 사업들은? 로도니아 살롱과 가브리엘의 의상실은?

나는 공주에게 그간의 일을 말해줘야 하나?

부군과의 사이가 좋아진 것 같은데. 델라 랭은 이걸 다 알고 있을 텐데도 아직 공주에게 아무 말 안 한 건가? 나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데미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갖가지 물음으로 가득 차 혼란이 올 때쯤 에스텔라가 그의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재수사를 하고 싶어요.”

오, 맙소사.

“재수사요. 네. 재수사. 그, 7년 전에 공주님께서 재수사하셨다가 다시 수사 정지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고요.”

“그때의 내가 이해가 안 되어서 다시 재수사하는 겁니다.”

“…그렇군요.”

데미안은 제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닦았다. 에스텔라 뒤에 서 있는 이자크의 눈이 요요하게 빛났다. 데미안은 얼른 눈을 깔고 다시 에스텔라에게 말했다.

“그때 제가 재수사를 하고, 또다시 수사 정지를 할 때도 데미안 당신이 담당 검찰관이었더군요.”

“예. 맞습니다.”

“데미안은 그럼 나와 함께 알아낸 뭔가가 있지 않았습니까?“

“예?”

“나랑 같이 적어도 6개월 정도 수사를 했을 텐데, 그동안에 모아온 정보나 그런 문서들. 다 당신한테 있을 것 아니에요?”

“예. 관련 문서들은 전부 저한테 있습니다.”

“그 문서들을 좀 가져가서 보고 싶은데.”

“자료들이 꽤 많으니, 제가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뇨. 내가 직접 가져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에 쌓아둔 서류창고로 들어갔다. 에스텔라 역시 따라 들어왔고 데미안은 문 앞쪽에서 금새 서류박스들을 찾을 수 있었다. 에스텔라는 서류 박스들을 꺼내는 데미안을 유심히 쳐다봤다.

박스들은 꽤나 양이 많았다. 총 세 박스 정도였다. 데미안이 직원을 시켜 박스들을 마차에 옮기는 와중에 에스텔라가 물었다.

“그런데, 7년 전에 수사 정지시킨 사건 치고 서류들이 죄다 문 가까이에 나와 있네요?”

“네?”

“보통 수사 종료된 사건은 구석에 가 있지 않나?”

“….”

“자료 고마워요. 앞으로 간간이 뵙죠.”

“예. 공주님. 살펴 가십시오.”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사무실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미안은 곰곰히 뭔가 생각하는 듯 하다 종이를 꺼내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뒤 직원을 불러다가 그가 쓴 편지를 로도니아 살롱의 델라 랭에게 보낼 것을 부탁했다.

*

에스텔라는 마차 한편에 자리 잡은 커다란 박스 세 개를 쳐다봤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건지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다. 데미안 허스트. 그와 했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나는 그와 알고 있는 사이야. 데미안 역시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을 접했겠지.

그런데 왜 내게 아무런 말도 안 하지?

보통 자신과 일했던 사람이 기억상실에 걸려 다시 찾아오면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나? 일의 효율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에스텔라가 재수사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동공이 흔들렸다. 눈에 띄게 동요했지. 심지어 이마에는 땀이 맺힐 정도로.

그 정도로 동요하는 걸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 도대체 뭘 숨기려 하는 걸까?

생각해보니, 에스텔라의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에스텔라에게 과할 정도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왜?

보통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그동안의 넌 이런 사람이었고, 이런 걸 해왔고, 앞으로는 이렇게 될 것 같다- 하며 말을 해줄 텐데 모두들 대외적으로 알려진 에스텔라만 말해주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속마음, 속사정 모두 알고 있는 친구 하나쯤은 있을 텐데 말이지.

에스텔라는 그 사람이 바로 델라 랭이라 예측하고 있다.

물론, 그 델라 랭은 에스텔라에게 정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려 하지만.

모두들 에스텔라에게서 뭔가를 숨긴다.

“뭘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자크가 물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네?”

“아니, 다들 나에게 뭔가 숨기는 것 같아요. 내 친구들이고 나와 사업을 같이하는 이들이면 내가 기억을 잃었다 했을 때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공유하기 마련인데, 왜 아무도 나한테 그런 걸 안 말해줄까요? 저 데미안 허스트라는 남자도 그렇고, 델라 랭도 그렇고, 가브리엘도 그렇고.”

델라 랭이 그리 말했다. 직접 알아내야만 한다고.

꿈속 스물여섯 살의 에스텔라도 그리 말했다. 규칙이 있다고.

그 끔찍했던 미치광이 같아진 영사기 안 속의 자신도 그리 말했다. 이 모든 건 일어났던 일들이야.

연못에 빠지기 전 어떠한 목소리가 그리 말했다. 시간을 되돌리라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던 일이라면, 그러니까 영사기 속에서 본 이자크와 아이들의 주검 말이다. 그게 만일 사실이라면 지금보다 더 나중의 일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시기상으로 그리 먼 미래 같지는 않은데.

스물여섯 살의 나는 또 뭐고, 창밖에서 항상 행복해 보이는 나는 또 뭐며,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 건 뭐지? 게다가, 나는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을 거스른 사람인데 어째서 데미안을 알고 있고 이따금 내가 하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거지?

나는 단순히 과거에서 미래로 온 것이 아닌 건가?

에스텔라의 미간이 깊어질수록 머리는 혼란스러워졌다.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미간을 슬슬 쓸어줬다.

“이자크.”

“네. 부인.”

“저는 아무래도 단순히 당신과 아이들과 잘 지내기 위해 과거에서 미래로 온 건 아닌 거 같아요. 그쵸? 다들 내게 뭔가 숨기고 있는 걸로 보면 제가 하던 일이 분명 있는데, 그게 대체 뭘까요.”

에스텔라가 머뭇거렸다.

“나는요, 내가 외도했다고는 정말 생각 안 하거든요. 근데 내가 당신이랑 아이들을 모른척하면서까지 했어야 했던 일이 도대체가 뭔지 감이 안 잡혀요.”

“….”

“사실 많이 혼란스러워요. 아는 거 하나 없는데 매번 꿈들은 이상하고 기분 나쁘지. 가끔씩 내가 한 기억이 없는 행동을 하질 않나,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상황을 겪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질 않나.”

“….”

“만약에 내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무너지게 되면, 그때는 이자크가 꽉 잡아주세요. 날 믿고, 기다려주고. 이기적이지만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이자크가 생긋 웃으며 에스텔라의 손을 잡았다.

저택에 도착하자 정문 쪽에 못 보던 마차 한 대가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에스텔라가 주차되어 있는 마차를 쳐다봤다. 왕실 문양이 그려진 마차. 대부님이 오신 건가?

“대부님이 오셨나 봐요.”

“먼저 안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이자크와 시종들이 박스들을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이제 막 출발하려는 것인지 마부가 고삐를 잡아 당기려 했다. 에스텔라가 다가가자 마부가 얼른 고삐를 놓으며 말들을 진정시켰다.

“대부님?”

왜 안 나와보는 거지? 에스텔라가 이상하게 여겨 창문 가까이 갔다.

“…오랜만이구나, 에스텔라.”

“릴리 언니…?”

그 안에는 대부가 아닌 그의 딸이자 메시앙의 두 번째 공주, 릴리 버트랜드 메시앙이 있었다. 릴리는 에스텔라와 마주치는 걸 꺼려 했던 건지, 매우 당황한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언니가 왜 여길….”

“그냥. 오랜만에 메시앙에 와서 동생 얼굴이나 볼까 했지.”

“아, 그렇구나. 잠깐 들어왔다가 갈래요?”

“아니야. 둘이 바빠 보이는데 방해 말고 가볼게.”

릴리는 마치 뭔가에 쫓기듯 보였다.

“하지만 왕궁에서 여기까지 꽤 오래 걸렸을 텐데, 차라도 한잔하고 가요, 언니. 아니면 나랑 이자크 때문에 불편한가?”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닌데…. 그럼 잠깐 차 한 잔만 마시고 갈까?”

릴리는 결국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안에서는 릴리의 남편인 트라비아의 왕자도 함께 내렸다. 응접실로 향한 셋은 굉장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자크는 쌍둥이들이 놀아달라고 하도 떼를 써서 못 올 거 같아요. 대신 미안하다고 전해달래요, 언니.”

“어어,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나도 그냥 네 얼굴만 잠깐 보고 가려 했던 거라서….”

릴리는 이자크가 못 온다는 에스텔라의 말에 안도한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옆에 분은?”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트라비아 왕국의 호세이오 제 1왕자입니다.”

“아. 트라비아 왕국의 왕자님이시군요.”

눈꼬리가 죽 내려간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에스텔라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다시 릴리를 쳐다보는데 릴리는 꽤나 불안해 보인다. 자꾸만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뭔가를 입술만 달싹였다.

“언니,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어? 그게….”

“여보.”

호세이오 왕자가 조용히 릴리의 손을 잡으며 안심하라는 듯 토닥였다.

“…그냥. 요즘 잘 지내? 아버지 말로는 너랑 이자크, 요즘 들어서 다시 좋아졌다고 하길래.”

릴리의 말에 에스텔라가 조용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그제야 릴리는 안심된다는 듯 조금 밝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사실, 내가 트라비아로 가기 전만 해도 너희 두 사람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었잖아. 그래서 걱정 많이 했어. 다시 좋아졌다니까 정말 잘됐다. 너 얼굴도 예전보다 밝아지고….”

“언니, 제가 기억 잃었다는 소문 들었죠?”

“응? 응.”

“그래서 그런데, 언니 언제 결혼한 거예요? 트라비아로 간 줄도 모르고 있었어. 괜히 미안해지네요. 그렇게 언니, 언니 하면서 따랐는데 이제야 근황 물어보고.”

“아니야. 너도 정신없었겠지. 기억을 잃었으니까. 나는 6년 전에 전하에게 청혼받고 트라비아로 갔어. 거기서 계속 살고 있고. 이번에 6년 만에 온 거야.”

“정말 오랜만에 돌아왔네요. 며칠 동안 있을 거예요?”

“그리 오래는 안 있을 거야. 올해는 메시앙 행사도 있고, 아버지 생신도 그때 겹치니까 오라 해서 온 거고.”

“트라비아랑 메시앙이랑 가까운데 자주 놀러 오세요.”

“아니야. 내가 무슨 염치로….”

“응?”

염치? 에스텔라가 고개를 갸웃대자 릴리의 남편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염치라고 말한 것에 대한 이유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아, 릴리가 여행을 자주 할만한 체력이 안 되어서요. 뱃속에 아가도 있고-”

“어머. 언니 임신했구나?”

“…응.”

릴리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딸도 하나 있어. 아직 왕궁 밖에 나가는 걸 무서워해서 데리고 오진 못했지만.”

“와. 몇 살?”

“다섯 살.”

“우리 애들은 네 살인데, 셋이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럼 좋겠지만…. 웁-”

그때 릴리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얼른 남편이 그녀를 부축했고 에스텔라가 밖의 시종들을 불러 긴 소파에 눕히도록 했다.

“…첫째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둘째가 좀 힘드네.”

“주치의라도 불러줄까요?”

“아니야… 소용없어. 에스텔라.”

“응?”

“사실 너한테 이거 주려고 오늘 온 거야.”

릴리가 프릴 소매 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왕실 연회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을 건네받는데 릴리의 입이 또 달싹였다.

“올 거니?”

“그럼요. 가야죠.”

그녀는 뭔가 할 말이 더 있어 보였지만 제 입술을 꽉 깨물며 함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럼 그때 보자.”

“언니도 몸조리 잘하고요. 조금 더 쉬다 가도 되는데-”

“아니야. 다른 일정도 있고…. 고마워, 에스텔라. 너한텐 항상 미안해.”

“응?”

“…그리고 이자크한테도.”

“그게 무슨 의미야?”

에스텔라가 물었지만 릴리는 대답하지 않은 채로 남편의 부축을 받아 소파에서 일어났다. 에스텔라는 두 사람을 배웅해준 뒤 릴리가 한 말을 곱씹으며 서재로 갔다. 이자크는 데미안에게서 받아온 박스들을 에스텔라의 서재에 가져다 둔 뒤 소파에 앉아 문서들을 읽고 있었다.

“언니가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봐요. 둘째를 임신했다는데, 입덧도 심해 보이고.”

“그렇군요.”

이자크는 별 관심 없어 보였다. 그래도 예전에 약혼에다 결혼식까지 올렸던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무관심할 수가 있나?

“릴리 언니가 미안하대요.”

“….”

“뭐가 미안한 건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근데요, 이자크. 릴리 언니랑, 많이 안 친해요?”

사실, 이자크의 현 부인으로서. 전 부인이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했다. 워낙 릴리 언니와 친해서 둘 사이의 진전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만 그래도 에스텔라는 왜 이자크가 릴리에게 먼저 청혼했는지가 궁금했다.

분명 에스텔라가 봤을 때 이자크와 릴리는 서로에게 관심 없어 보였는데, 어째서 이자크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자마자 릴리에게 청혼을 했을까?

이자크의 결혼 전날까지도 에스텔라는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 분이 났었다. 솔직히 에스텔라에게 있어 체감상으로는 5개월 전의 일이니 그 이유는 더더욱 궁금했다.

“왜 언니한테 청혼했었어요?”

“그게 궁금하십니까?”

“당연하죠! 나 그것 때문에 밤새도록 미엘라 붙잡고 울고불고 난리였는데. 아니, 분명 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는데 왜 이자크가 청혼을 하냔 말이에요- 진짜 짜증 나.”

갑자기 그때를 생각하니 확 열이 뻗친다. 아니, 나한테 웃어줬으면서 왜 애먼 여자한테 청혼을 해?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보며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러게요. 제가 왜 청혼했을까요.”

“뭐야. 무슨 대답이 그래요.”

“그때는, 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는 말을 너무 믿었어서 그런가 봅니다.”

“뭐가 오르지 못할 나무인데요?”

“당신이요.”

“…에?”

“변경백 가문의 후계자가 일국의 공주랑 결혼했다가 공주 과부 만들지 말라고 하셔서요.”

“누가 그딴 소리를!”

“대부분 그리 말하죠. 변경백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신분이니까.”

“….”

“그러니 당신은 저한테 오르지 못할 나무였고, 어차피 정작 원하는 나무에 오르지도 못할 거, 아무나 되라. 그런 철없는 생각이었죠.”

“이제는 오르지 못할 나무 아니죠? 사람 위에 잘만 오르더만.”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사레들린 듯 기침을 쿨럭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하며 이자크가 얌전 떨었지만 에스텔라가 콧방귀 뀌며 맞은편에 앉아 문서를 뒤적거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참으로 어이가 없다. 어쩜 사람이 오를 시도도 안 해보고 포기를 하려 했단 말이야? 하! 전쟁터에서 그리 날아다닌다는 이자크 몬 디에스도 여자 앞에서는 아주 하룻강아지네.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릴리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겁이 많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당신이랑 결혼 후에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처형당하기가 두려워 공주에게 몸을 팔아 생명 연장을 했다고. 그래서 제 아내와 이혼한 거라고.”

“시기상으로 맞지도 않는 소리를 다들 하는군요.”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니까. 최대한 자극적인 내용일수록 그게 사실이길 바라죠. 솔직히 어느 정도 사실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 사실?”

“아버지랑 어머니가 처형당하시고, 그다음이 저였습니다. 처형대에 올라가 밧줄을 목에 거는데 그때 당신이 칙령을 들고 나타났죠.”

“….”

“신기하게도 당신은 항상 내가 뭔가 포기하려 할 때쯤 반짝하고 나타난다니까.”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제가 얼마나 긴박했는지 알아요? 대부님을 찾아가서 대신들을 모으고 왕권을 줄 테니 이자크의 처형과 수사 기간을 늘려달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때의 일을 말하다 에스텔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이자크 역시 놀란 눈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지? 또 이렇게 나도 모르는 새에….”

에스텔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정말로 과거에서 온 게 아니라 기억을 잃은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되돌리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종아리 부근까지 오는 그 연못이 깊어진 이유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잃은 것도 사실, 시간을 건너뛴 것도 사실. 하지만 과거에서 미래로 온 것이 아닌, 더 미래에서 지금 이 시점의 과거로 온 것이라면? 어떠한 이유로 인해 지금의 그녀는 열아홉살 기억만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 스물여섯 살의 에스텔라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라면?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런 걸까. 눈 앞이 하얗게 변하며 에스텔라는 제 몸을 못 가눴다. 앞으로 기우뚱 쓰러지는 것을 이자크가 얼른 받아냈다.

“에스텔라!”

이자크의 어깨너머로 책장의 한 칸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뭔가가 그녀에게 말하고 있다.

“…난 괜찮아요… 이자크. 미안하지만 직접 물 좀 떠다 줄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잠시 누워있으세요.”

에스텔라를 부축해 잠시 소파에 뉘인 뒤 이자크가 방을 나갔다. 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에스텔라는 벌떡 일어나 눈에 띄는 책장으로 가 한참을 뒤적거렸다.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을 펼쳐 그 안의 내용물들을 살펴봤지만 하나같이 그저 평범한 소설책이었다.

아니야. 여기에 뭔가가 있어.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단 말이야.

그렇게 책장을 뒤적대던 에스텔라는 이 책장의 칸이 다른 칸에 비해 유독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들을 모두 바닥에 떨어뜨린 후 벽면을 두드리니 가벽을 세워 안이 빈 소리가 들렸다. 책장 끄트머리를 잘 살펴보니 아주 자그마한 손잡이가 있다. 손잡이를 힘주어 잡아당기다가 밀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뒤의 공간이 열렸다.

손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에 에스텔라는 꾸역꾸역 손을 집어넣었다. 안쪽을 더듬거리자 뭔가가 손에 잡혔다. 틈에서 겨우 꺼내니 자물쇠가 달려있는 작은 다이어리가 나왔다. 낯이 익은 듯한 기분. 에스텔라는 다이어리를 열기 위해 안간힘 썼지만 자물쇠 때문에 열리지 않았다.

열쇠. 열쇠는 어디에 있지?

에스텔라는 다시 책장 뒤의 공간에 손을 넣어 한참을 더듬거렸지만 그 안에 열쇠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자크가 물과 안정제를 들고 돌아왔다.

“에스텔라?”

서재에 돌아온 그는 온갖 책들이 쏟아져 나와 난장판이 된 바닥을 보고 경악한 얼굴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이걸 찾았는데.”

에스텔라가 멍한 얼굴로 자신이 찾은 다이어리를 들어 보였다.

“그게 뭡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여기가 눈에 들어와서 찾아보니까….”

에스텔라는 진이 빠진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자크가 얼른 약과 물을 에스텔라에게 가져다줬다. 예전의 에스텔라는 곧잘 안정제를 먹기 일쑤였으니까.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이자크는 걱정스러웠다.

그녀가 자신을 떠날까 봐, 아이들을 버릴까 봐 두려워서가 아닌 이대로 그녀가 망가질까 봐.

그때의 에스텔라는 누가 봐도 망가져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에스텔라. 일단 물이랑 약 먼저 먹으세요.”

“내가 이상해지는 기분이에요.”

“그럴 일 없습니다.”

“내가 내가 아닌 느낌이에요.”

“당신은 항상 당신이었어. 그러니까, 에스텔라.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요.”

이자크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에스텔라의 몸을 꽉 껴안았다. 원래 이렇게 마르고 작았던가. 그때의 당신도 이렇게 혼란스러워했을까. 잠 못 드는 당신을 이렇게 껴안아 줬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자존심을 굽히고 당신에게 매달렸었더라면, 당신이 기억을 잃는 일도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일도 없었을까?

*

약을 먹고 잠이 든 에스텔라를 침실에 옮긴 이자크는 곤히 잠든 아내의 머리칼을 가만히 정리했다. 데미안의 사무실에서 가져온 문서들을 다시 정리한 뒤 에스텔라의 서재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갖은 책들이 바닥에 뒹굴던 바닥은 시종들이 다시 깨끗이 정리했다. 에스텔라가 발견한 다이어리는 끝내 열지 못했다. 유모는 망치로 부숴 볼까요, 했지만 이자크는 관두라며 다이어리를 에스텔라의 머리맡에 뒀다.

그 다이어리는 뭘까. 에스텔라는 그 안에 뭘 적었을까. 뭘 적었길래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놨을까. 원래 비밀이 많은 여자였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낳고 난 뒤부터는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그때는 그 비밀이 궁금도 하고 불안도 했다. 마치 푸른 수염의 아내처럼,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라는 걸 직감했어도 그게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더 집착하고, 더 매달렸다. 믿지 않으면서 믿을 테니 말해달라 떼썼다.

자신이 과거에서 왔다던 에스텔라가 기회를 달라며 손을 내밀었을 때 이제 그녀의 비밀을 알 수 있을까 작은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비밀이 많아진 이후부터 아내는 많이 예민해지고, 잠을 못 잤으며 종종 쓰러지기도 했다.

이자크는 이제 그 비밀 따위 궁금하지 않으니, 평생 마음속에 묻어놔도 좋으니 에스텔라가 그때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이자크 님.”

에스텔라의 서재에서 나오자 그의 수행기사 길버트가 다가왔다.

“뭔가.”

길버트는 이자크에게 밀봉된 봉투 하나를 건넸다. 오르테즈 가문의 실링 왁스가 찍혀 있었다.

“오늘 집회에 참석하시기로 예정되어 있으신 거,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 있어.”

“그럼 시간 맞춰 준비시켜놓겠습니다.”

“길버트. 이걸 협회장에게 전달해라.”

“예.”

이자크는 열쇠 하나를 건넸다. 그건 일전에 부부 연회에서 만난 올란도 후작에게서 몰래 훔친 열쇠이기도 했다.

그 열쇠는 올란도 후작이 운영하는 사업장의 금고 열쇠다.

아비를 닮아 욕심도 탐욕도 엄청난 올란도 2세는 안타깝게도 아비에게서 영악함만은 닮질 못했다. 그는 항상 제 벨트 고리에 수십 개의 열쇠들을 꿰고는 짤랑대며 과시하기를 좋아했다. 그 열쇠들은 모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금고의 개수라는 허세이기도 했으니까.

이자크는 그중에서 어떤 것이 장부 금고의 열쇠인지 알 수 있었다. 유독 마모가 심하고 도금 칠이 벗겨진 것은 그만큼 자주 열쇠를 여닫고 만진다는 소리 아니던가.

한 달에 한 번 장부를 모두 확인한다고 하니 아마 제일 손때가 탄 것이 올란도 선대 가주부터 사용하던 장부 금고 열쇠일 것이다.

멍청한 올란도 후작은 금고 안에 든 장부의 중요성을 모른 채 지금쯤 제 열쇠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것이다. 후작 작위를 이어받은 지 이제 두 달이 되어가는 어린놈이 알긴 뭘 알겠는가.

올란도 후작이 운영하는 대부업체, 또한 그의 외가인 피올라 은행은 버트랜드의 집권 이후 개인 사업 이상인 국가 차원의 사업으로 몸집이 몇백 배 커졌다.

올란도 백작은 어떠한 국위 선양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후작으로 신분이 상승되었고, 피올라 남작은 수도의 작은 은행 중 하나였지만 올란도 가문과 약혼으로 맺어진 이후부터 메시앙의 유일한 은행이 되고 말았다. 다른 가문에서 운영하던 은행들은 하나같이 모종의 이유로 파산하고 말았다.

귀족들의 모든 재산 관리와 바다 건너와 이곳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이국의 사업가들도, 돈이 없어 대출을 받는 귀족이나 백성들까지 모두 이 올란도와 피올라 가문을 거쳐야만 한다.

모든 귀족이 다 그에게 맡기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국왕이 신용한다 소문난 만큼 메시앙 왕국의 귀족 대부분이 그들에게 돈을 맡긴다.

그렇게 독식을 하게 될 때는 뒤가 구리기 마련이다.

이자크는 자신의 서재로 가 오르테즈 전 백작 가문이 보낸 편지를 뜯었다.

오르테즈 가문은 버트랜드 집권 이전 수도에서 가장 큰 은행을 가지고 있던 백작 가문이었다. 하지만 선왕의 독살 미수 이후 디에스 가문과 함께 역모죄로 몰려 몰락한 가문 중 하나였다.

오르테즈의 전 가주가 심장질환으로 사망 이후 가문을 물려받은 남매에게 이자크가 제안을 하나 했다. 버트랜드의 비리를 밝혀내 탄핵을 하자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희는 역모죄로 몰린 가문들의 후계자입니다. 누가 반역자의 말을 믿습니까?’

‘귀족들 모두가 멍청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도 증거를 대면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버트랜드가 지방 백성들의 세금을 지금의 네 배로 올린 것을 아십니까.’

‘네 배나요? 영주들은 항소하지 않고 대체 뭘 하는-’

‘가담하지 않는 지방 영주들은 하나같이 갑자기 병을 얻어 죽고 마니, 두려워서라도 왕의 명령을 듣겠죠. 버트랜드는 천천히 독재하려는 겁니다. 겉으로는 백성을 위하는 척하며 차근히 나라를 좀먹는 거라고요.’

수도에 사는 귀족들은 지방 귀족들에게 관심이 없다.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으니 백성들에게 관심이 없다.

백성들은 부당함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른다. 여태까지의 왕들이 알아서 잘해줬기 때문에 불만을 갖고, 그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방법을 잊고 만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부당함에 맞설 힘이 있는 사람이 총대를 메야 한다. 몰락한 가문의 귀족이라 한들 귀족은 귀족이다. 그들이 귀족으로 태어난 이유는 단순히 먹고 놀라는 것이 아니다.

편지를 읽은 이자크는 그대로 편지를 태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지는 재가 되어 쓰레기통 안에 떨어졌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옷으로 바꿔 입은 이자크가 침실에 들려 아직 잠이 들어있는 에스텔라를 한번 보고 그 옆에 메모를 하나 남겼다.

다시 방을 나와 뒷문으로 나가자 미리 말을 준비해둔 길버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구간에 있던 그의 애마가 투레질을 하더니 제 주인을 부른다.

“미안. 너는 너무 눈에 띄어서 못 데려가.”

모자까지 푹 눌러쓴 그가 길버트가 준비한 다른 말 위에 올라탔다. 저택의 뒷문으로 나간 그들을 집사 할아범은 유심히 쳐다봤다.

집사 할아범, 베이먼, 그리고 아르텔은 에스텔라가 누워있는 방으로 갔다. 그녀 머리맡에는 낡은 다이어리가 놓여있다.

“드디어 찾으셨군요.”

아르텔은 낡은 다이어리를 떨리는 손으로 한번 쓸어내렸다. 오랫동안 방치된 것 같은 다이어리는 의외로 먼지 없이 깨끗했다.

이걸 찾으신 게 과연 잘된 일일까?

델라 랭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그녀는 굉장히 기뻐할 거다. 고지가 눈앞이라고. 이제 공주님이 모든 걸 기억하시기만 하시면, 그 뒤의 일은 굉장히 수월할 거라고. 이제 버트랜드는 끝장이라고.

과연 그럴까? 정말 기억이 돌아오시기만 하면 수월하게 모든 일이 끝이 날까?

그렇다면 이 지긋지긋한 회귀도 멈출 수 있는 걸까?

아르텔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공주님이 그 많은 시간의 기억들을 다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무너졌던 분이다. 그녀가 나약해서가 아니다. 감정이 존재하지 않던 초월적 존재로 태어난 이들도 무너지는데 인간이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영감?”

“아. 공주님. 깨어나셨습니까.”

“…아, 왜 이렇게 피곤하지.”

에스텔라는 그렇게 자고도 피곤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아르텔이 얼른 에스텔라를 부축했다. 에스텔라가 피곤한 건 당연한 일이다.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기억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갈 때마다 정신적으로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니까.

“당분 섭취라도 먼저 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목이 말라. 왜 이렇게 목이 마르지?”

아르텔은 예상했다는 듯 물을 따라 건넸다. 에스텔라는 숨도 쉬지 않고 그대로 벌컥벌컥 한입에 다 마셨다. 그래도 목이 마른 건지 에스텔라는 제 목을 만지작대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이자크가 남기고 간 메모를 발견했다.

잠시 외출하겠습니다. 주치의를 불러다 놨으니 일어나면 진찰받으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이자크가 외출했어? 어딜?”

“잠시 일이 있으신 거 같습니다.”

“그래.”

아르텔은 에스텔라를 찬찬히 살펴보고 관찰했다. 기억이 모두 돌아오셨나? 아니면 아직 다 돌아오지 않으셨나? 에스텔라가 아르텔을 올려다봤다.

“왜 그리 봐?”

“예?”

“아니,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아. 이 다이어리가 뭔지 궁금하여….”

아르텔이 얼른 다이어리를 가리켰다. 에스텔라는 그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이거 내 서재에서 찾은 건데, 책장 안에 숨겨진 공간이 있더라고. 이런 식으로 내 서재에 비밀 공간이 더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그리고 이거 열쇠가 없어서 열질 못하는데 열쇠 좀 찾아보다가 없으면 힘써서라도 열어봐야지.”

아직 기억이 다 돌아오지는 않으셨군. 아르텔이 그리 생각하며 방을 나가려는데 에스텔라가 뒤에서 물었다.

“그런데, 집사.”

“예, 공주님?”

“자네 원래 이름이 아르텔이야?”

“…예?”

“베이먼이었잖아. 왜 자꾸 자네를 보면 아르텔이라는 이름이 떠오르지?”

“허허, 저도 잘 모르겠네요.”

“참 이상하네.”

“주치의를 일단 불러올 테니 공주님 조금만 쉬고 계십시오.”

아르텔은 방에서 나온 뒤 잠시 문에 등을 기댔다. 거의 돌아오시기는 했네. 이제 그 고서만 발견하시면, 아마 모든 걸 기억하시겠지. 모든 걸 다 기억하시게 되면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아르텔은 더 이상의 회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고통스러워서가 아닌, 더는 제 주인이 몇 번이나 같은 시간을 반복하며 미쳐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으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델라 랭에게 이 사실은 알려야 할 테지.

이제 멈춰뒀던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할 때가 되었다.

“집짜?”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아르텔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공주님의 모든 것인 루시와 루스 쌍둥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엄마 아야해?”

“아닙니다. 잠시 피곤하셔서 그런 듯합니다.”

“안에 들어갈래.”

아르텔은 아직 까치발을 한참 들어야 문고리에 손이 닿는 어린 주인들을 위해 손수 문을 열어줬다. 쌍둥이들이 기운차게 엄마! 소리치며 안에 들어갔다. 아르텔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전의 공주님이 놓치셨던 것들을 지금 다 가지고 계시니까.

그전의 공주님이 포기하셔야만 했던 것들을 지금의 공주님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아르텔은 잠시 쌍둥이들과 에스텔라를 멀리서 지켜봤다.

웃고 있는 공주님, 엄마를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부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상황이다.

“엄마. 엄마 요기가 꺼-매.”

루스가 제 눈 밑을 꾹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푼 거 아니지? 이제 안 아푸지?”

루시 역시 창백한 얼굴의 에스텔라가 걱정되는 듯 말했다.

“엄마 여기가 거매? 이상하다. 엄마 아픈데 하나도 없는데.”

에스텔라의 말에 그럼 다행이구! 답한 아이들이 잠시 에스텔라와 그녀의 배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러더니 서로 엄마를 껴안고 있겠다며 다투기 시작한다.

“엄마. 안아죠.”

“아니야. 루시, 루시 먼저.”

“내가 먼저 태어났잖아-”

“동생한테 양보할 줄 알아야지이-”

“씨이, 루시 나빠.”

“어쩌라구.”

“둘이 왜 싸울까. 하나씩 엄마 양 옆구리에 들어오세요. 자.”

에스텔라가 양팔을 벌리자 쌍둥이들이 티격태격하면서도 에스텔라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는다.

“엄마. 우리 소풍 가자.”

“지금? 아빠 오면 같이 가자.”

“아니야아- 지금 가. 지그음-”

“아빠가 서운해할 텐데?”

“아빠 안 서운해해.”

천방지축이긴 했어도 막 떼를 쓰는 아이들은 아니었다. 안 그러던 애들이 요즘 들어 자꾸만 보채고 떼를 쓴다. 특히나 이제 아빠는 필요 없다는 등 이자크가 들으면 섭섭해할 만한 소리를 한다. 에스텔라 입장에서는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다니 묘하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자크의 눈치를 보게 된다고나 할까.

“가자아- 가자아-”

“왜 이렇게 떼를 쓸까, 우리 착한 루스가?”

그러자 루시가 자기는 전혀 안 그랬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양손을 제 허리에 올리며 말했다.

“그건- 루스가아- 질투쟁이라서 그래.”

“응?”

“나 질투쟁이 아니야아아아-”

“너 질투쟁이 맞아. 루스는 질투쟁이. 나는 안 그래. 나는 아가 좋아해.”

“아가라니?”

그러자 루시가 에스텔라의 배를 가리킨다. 에스텔라는 아직 상황이 이해가 안 된 듯 다시 한번 물었다.

“루시, 루스. 아가라니? 무슨 소리야?”

“요기 이짜나. 아가가 요만해.”

루시가 엄지와 검지의 손톱을 맞대며 아주 아주 작은 것처럼 표현했다. 에스텔라가 멍한 표정으로 루시와 루스를 번갈아 쳐다보다 이내 천천히 제 배를 가리키며 또 한 번 물었다.

“여기에 아가가 있어?”

“웅. 루스 질투쟁이야. 나는 아가 좋아해.”

“나도 아, 아가 좋아해에! 근데 엄마가, 더 좋은 거야아!”

“나도 그렇거든?”

“씨잉….”

에스텔라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보고 있던 집사 할아범을 쳐다봤다. 그냥 장난이겠죠?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자 집사 역시 당황한 얼굴로 벙쪄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그, 아가들이 엄마 뱃속에 동생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고들 하던데…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런 뒤 얼른 방을 나섰다.

에스텔라는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 얼굴로 침대에 앉아있다. 아이들은 그런 에스텔라의 마음도 모른 채 여전히 투닥거리다가도 에스텔라의 배를 쓰다듬기도 했다.

만일 아이들의 말이 맞다면?

잠깐만, 그럼 생각을 해보자. 그럴 만한 행위들이-

아. 저저번의 그때! 아니, 저번의 그때?

에스텔라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

이자크와 길버트가 일반 평민 차림새로 향한 곳은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변두리 지역의 작고 허름한 오두막이었다. 맥주와 칼바사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이곳은 노동을 마친 백성들이 집에 들어가기 전 잠깐 모여 술 한잔하는 곳이다.

남녀 할 것 없이 다들 이곳에서 맥주와 칼바사 소세지를 먹으며 오늘의 고된 노동을 이런 식으로라도 푼다. 주인장은 일흔이 넘은 노인. 남편이 죽고 난 뒤 그가 하던 가게를 이어받은 아내가 50년 동안 지켜온 가게다.

길버트가 문을 열자 오늘도 여전히 땀 냄새 흥건히 내뿜는 노동자들이 맥주를 마시며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다.

“주인장. 저희 왔습니다.”

“아이고, 오셨어요들.”

길버트와 주인장이 오랜만에 본다는 듯 반갑게 인사했다. 이자크가 안으로 들어오자 주인장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아휴,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그동안 별일 없었는가.”

“올란도 사병들이 요즘 들어 자주 길에 보이는데, 그놈들이야 워낙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놈들이라 짜증 나는 것만 빼면 문제 없습니다요.”

“올란도 후작이 새 사업장을 세우려 해서 그러는 걸 걸세. 사람들은 다 모였나?”

“예. 이리로….”

주인장은 길버트와 이자크를 데리고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창고로 이어지는 계단이 하나 나온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맥주 통들과 소시지들이 줄줄이 보관되어 있고, 정육되어 있는 돼지들이 거꾸로 걸려있다. 평범해 보이는 지하창고였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돼지들을 헤치고 지나가니 평범한 돌벽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길버트가 앞으로 나와 돌벽을 옆으로 밀자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돌벽 뒤에는 꽤나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들을 가장 처음 조직하고 사람을 모은 이자크가 나타나자 어수선했던 이들이 일제히 안정을 되찾았다.

거기에는 오르테즈 남매도 있었는데, 남동생 쪽이 이자크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다들 그동안 편지로만 대화했기에 대면하는 것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한 달 전 이자크가 잡은 밀매업자는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그 밀매업자에게 있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 사내는 목을 매지 않았다. 온몸이 꽁꽁 묶여 있지만 그는 밧줄을 풀고 오두막에는 존재하지 않던 검으로 제 심장을 찔렀다.

버트랜드는 일부러 그 밀매업자를 이자크에게 잡히도록 했다. 그건 버트랜드가 이자크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경고였다. 밀매업자는 죽었다. 과연 자결일까?

오두막을 감시하는 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이자크를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해서 두 달이 넘도록 이자크는 그 감시자의 정체를 밝히려 했다. 감시자가 더 이상 없다는 걸 알고 나서야 이자크는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이자크 경! 잘 지내셨습니까.”

“그간 별 탈 없으셨죠.”

“예. 그럼요.”

“아까 전 보내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누이분께서는 오늘 참석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예. 오늘은 저만 왔습니다. 누이는 오늘 후원자를 만나러 가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저도 누이한테 그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오르테즈 남매들은 몰락한 가문의 생존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개인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조금씩 숨통을 튼 이들이었다. 전 재산을 압류당하고 저택에서 쫓겨난 그들을 받아준 곳은 바로 로도니아 살롱.

귀족들은 그저 오르테즈 남매들이 작은 금은방에 기생하며 금은방 주인의 시중을 든다고 생각할 뿐이다. 시중드는 모습이 창피스러워 다른 귀족들 눈앞에 나타나지 못한다고. 몇몇 귀족들은 금은방 주인의 신발을 닦는 오르테즈 남매들을 봤다며 과거 백작이나 하던 이들이 참 안타깝다고 혀를 차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르테즈 남매들이 일부러 낸 거짓 소문이다. 자신들에 대한 소문을 가장 비굴하고 악착같이 소문내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시중을 들기는커녕 사업을 하고 있었다. 작은 금은방의 사업이 아닌, 그들의 익명의 후원자 ‘네메시스’와 함께.

익명의 후원자 네메시스는 오르테즈 남매들에게 금은방 주인을 소개시켜준 이다. 항상 가면을 쓰고 나타나 얼굴도 나이도 성별도 모른다. 어떨 땐 남자가 나오기도 또 어떨 땐 여자가 나오기도 했으니까.

후원자라는 말에 이자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크는 사실 오르테즈 남매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네메시스라는 후원자를 믿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정체조차 밝히지 않은 인물이다. 돈이 매우 많아 보이고 그들이 일으킬 혁명에도 관심 많아 보이지만 절대 직접 관여하려 하지는 않는다.

신분도, 나이도,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익명의 후원자. 그는 도대체 왜 오르테즈 남매를 후원하는 것일까. 오르테즈 남매가 자신과 함께 혁명을 도모하려는 것도 알면서, 그 후원자는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는다.

“그 후원자라는 분은 아직도 정체를 모릅니까?”

“예. 아직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믿을만한 분인 건 확실하죠?”

“그럼요! 누이는 아니라고 하는데, 저는 맨 처음에 만났던 분이 진짜 후원자라고 확신합니다. 그분은 정말로 좋은 뜻에서 저희를 도와주신 분이세요.”

“그리 말씀하시니 믿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그분께 혁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피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자크의 말에 오르테즈가 그리하겠습니다! 하며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이자크가 협회장을 만나러 잠시 자리를 비키자 오르테즈가 휴,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익명의 후원자에 대해 불신하는 이자크가 질문을 할 때면 저도 모르게 말해버릴까 봐 걱정된다. 누이는 항상 넌 그 입이 문제야. 너도 모르는 새에 다 불고 말잖니. 이자크 경 앞에서 후원자님에 대한 말을 되도록 삼가. 넌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어.

“치. 어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냔 말이야.”

누구라도 그 후원자님의 정체를 알게 될 시에는 오르테즈처럼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이는 워낙에 똑똑하고 철두철미한 만큼 거짓말도 잘하고 시침도 잘 떼지만 나는 못 한단 말이야. 오르테즈가 투덜거렸다.

“진짜 믿으셔도 되는데.”

오르테즈는 입이 근질거리는 듯 달싹였다.

절대 말하면 안 돼. 그게 후원자님이 내거신 딱 하나의 조건이었으니까. 알겠어? 신의를 저버리면 안 된다고.

누이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 얼른 제 입을 찰싹 때렸다.

그래도. 그래도 이자크 님께 후원자님의 정체를 밝히면 더 믿으시지 않을까?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무기와 사람들을 모을 자본인데, 이자크 님은 후원자님이 주시는 돈은 최소한으로만 받으려고 하시니까. 믿지 못하겠다면서 안 받으시려고 하려는 걸 우리가 겨우 설득한 거잖아.

이자크 님이 그분의 정체를 아시면 더는 불신하지 않으실 거야.

공주님이잖아. 이자크 님이 그렇게나 사랑하시는!

남동생의 발언에 누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랑하시니 더더욱 비밀로 하라는 거 아니야. 두 분의 상황 모르니? 공주님께서 오해나 받자고 이러시겠어?

아직 열다섯의 어린 오르테즈는 누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하는데 왜 숨기는 거지? 왜 서로 안 사랑하는 척해? 제 목숨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애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려웠다.

*

이자크는 이들 조직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나 ‘그 사람들’같이 불명확하게 지칭했다. 이름이 만들어지면 존재가 확실해지는 것이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공범으로 몰릴 거고, 이름이 점점 사람들 입을 타게 되면 필시 바깥 사람들에게도 알려질 거다.

5년 전 이들을 조직했다. 에스텔라가 이유 모를 수사 종료를 시킨 뒤 이자크는 저 혼자 수사했다. 거기서 버트랜드가 중심인물이라는 걸 알았고 버트랜드를 찾아가 물었을 때 그는 숨기지 않았다.

‘일을 크게 만든 건 자네 아비와 벤자민이라네. 가만히 있으면 살아있을 것을 쓸데없이 날 협박해대니 나 역시 살기 위해 그런 것 아닌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그깟 돈에 미쳐 신의를 저버리다니. 에스텔라는 당신을 아버지처럼 따랐어. 선왕도, 아버지도, 당신을 진짜 친우로 생각했고!‘

‘알고 있어. 디에스는 정말로 좋은 친구였지. 하지만, 벤자민은 말일세, 나는 벤자민을 단 한 번도 친구라 생각한 적 없다네. 형님? 형님으로도 생각한 적 없지. 그 더러운 피가 오로라를 낚아챘을 때부터. 아니. 그놈이 태어났을 때부터.‘

벤자민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했다.

‘이봐, 이자크. 그저 모른 척하고 에스텔라와 행복하게 살게나. 나는 국왕이야. 이 왕국의 정점이고. 자네는? 몸 팔아 목숨 부지한 공주의 진정한 사랑이자 국가의 반역자.’

가장 밑바닥에 있는 놈이 나라의 정점에 반기를 들겠다고?

안타깝지만 전혀 두렵지 않네. 분노하지도 않아.

버트랜드가 하찮다는 듯 킬킬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에스텔라는 내가 정말 아끼는 아일세. 나도 그래서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해서 그 애가 원하는 모든 걸 들어줄 생각이야. 왕위를 달라면 다시 돌려줄 수도 있네만, 왕은 사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지? 또한 반역자는 5대가 지나도 절대 왕의 배우자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에스텔라와 헤어지고 싶다면 그리하게나. 가서 말해. 왕권을 이어받은 뒤 정점이 되어 버트랜드를 벌하라고. 지금의 공주에게는 뭐가 있나? 왕궁의 병사들이 있어 아니면 직접 모은 사병이 있어?

그 애는 똘똘하지만 아무것도 몰라. 세상이 그저 빛으로만 가득 찬 줄 알고 더러움과 어둠에 대해 인지는 해도 그 정도를 모르지. 사람을 너무 쉽게 믿고 사람의 좋은 면만 보려 해. 그 점은 제 엄마와 닮아 사랑스럽긴 하지만, 가끔씩 고집을 부릴 땐 제 아비와 똑같단 말이지.

‘둘이 이혼을 하든 계속 사랑을 하든 나는 아무 상관없네만. 자네가 자꾸 이렇게 곤란하게 나올 때마다 나는 어찌 해야 할지 참 고민되네.‘

버트랜드가 제 풍성한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 죽이는 게 어려울 것 같은가? 뒤집어씌울 수 있는 죄는 무궁하게 많고 자네는 자신의 몸도 지킬 수 없네.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그저 에스텔라에게 기생하는 놈이 뭘 할 수 있어.’

오늘 일은 없었던 일로 할 테니 그만 돌아가게나. 버트랜드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이제 곧 아이 아빠도 되지 않나. 젊은 혈기를 누르고 인내하는 법도 배워야 하지 않겠어. 지켜야 할 게 있지 않나.’

버트랜드는 정말로 약아 빠진 새끼였다. 이자크에게는 에스텔라와 아이들을 인질로, 에스텔라에게는 이자크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는 놈이었다.

에스텔라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버트랜드를 벌할 수는 있겠지만 그녀는 이자크와 이혼해야만 한다. 국법이 그랬다. 이자크는 에스텔라와 이혼할 수 없다. 그녀를 원하고 그녀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그 국법을 무시하면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왕은 사법권이 없어 재수사를 명령할 수 없다.

에스텔라는 지금 아이들을 임신해 몸이 매우 약해져 있는 데다가 버트랜드를 대부로서 매우 의지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면 에스텔라가 분명 무너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아닌 척하지만 선왕 벤자민을 보러 갈 때마다 정신적으로 매우 지쳐 한다는 것을 그는 눈치채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반역이 버트랜드가 꾸민 짓이라는 확증이 없었다. 이자크 역시 심증만 가지고 그를 찾아간 것이었고 의외로 버트랜드가 너무나도 쉽게 인정해버린 것뿐이다.

버트랜드는 알고 있다. 이자크는 지금의 자신에게 어떠한 위협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그에게 있어 에스텔라와 태중의 아이는 그의 목숨보다, 그의 자존심보다 소중하니까.

그때 이자크는 참패했다. 지금의 그는 혼자서 버트랜드에게 맞설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물러났다. 대신 버트랜드가 저지른 만행과 비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해가 지날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그때부터 이자크는 사람들을 모았다. 가장 먼저 그와 뜻을 같이할 다른 몰락한 귀족들. 그들을 주축으로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버트랜드는 도시와 도시 사이의 경계를 그어놨다. 그들을 멀리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백성들끼리의 소통 단절을 꾀했다. 어느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백성들을 모른다. 다른 도시로 가려면 심사와 절차가 매우 길었다. 여행 상인들에게는 특별 주의가 내려졌다. 각 도시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옮길 시 사형이다.

해서 버트랜드가 점점 독재를 하려는 걸 눈치챈 사람들만이 이자크와 뜻을 같이 했다. 이자크는 에스텔라에게 버트랜드에 대한 사실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믿지 않았다.

‘이자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확실한 증거도 없이 지금 제 아버지와 다름없는 분을 그렇게 매도하는 건가요? 전 변경백이 무고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지금 억지를 부리는 거나 다름없어요. 대부님은 아버지의 오랜 친우이자 사촌이고, 변경백과는 학술원 동기였어요. 항상 세 사람이 함께했으니 그들의 일에 관련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확증을 가져오면 믿겠는데 확증도 없이 심증으로만 사람을 의심하는 건 안 돼요.

에스텔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뒤부터 둘의 사이는 멀어졌다.

이자크는 지금의 에스텔라가 그의 말을 믿어줄까 생각해본다.

에스텔라에게 있어 버트랜드는 단순히 명목상의 대부 그 이상이다. 어린 에스텔라를 위해 제 다리 한쪽이 평생 절게 되는 장애를 입어도 그녀를 살리려 맨손으로 흙을 파냈다던 이다. 어렸을 때 고열을 앓으면 이국 약재상을 다 모아다가 대령하는 사람이라고. 친딸보다 더 아낀다고. 사람들은 그리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런 사람이 제 가족을 위협할 거라는 생각 자체가 안 들 것이다.

말하지 말아야 하나. 하지만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에스텔라가 얼마나 충격받을지 생각하면 미리 말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에스텔라가 스스로 그 사실을 알게 내버려 두면?

-에스텔라는 날 믿을 거야. 알 수 있어.

이자크가 확신했다.

“이자크 님. 다른 이들 모두 다 모였습니다.”

부협회장의 말에 이자크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단상에 올라가니 지하의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스무 명 조금 넘는 인원들 옆에는 커다란 종이들이 두터운 묶음으로 묶여져 있다.

“도시마다 고립시켜 백성들끼리 단절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버트랜드가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백성들에게 정보를 알려야 합니다. 가장 중점을 둬야 할 것은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진실을 알리는 것. 이 나라의 주인이 왕이 아닌 백성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 나라의 주인이 왕이 아닌 자신들이라는 걸 알때 비로소 움직일 것이다. 이자크의 말이 끝나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종이 뭉치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수도와 지방에 갈 상인들이다.

검문을 통과하여 지방에 내려간 이들은 수도와 지방의 세금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왕이 ?도시들을 봉쇄하여 단절을 일으킨다는 것이 쓰인 이 커다란 종이들을 백성들에게 뿌릴 것이다.

의심부터 들게 하라.

그런 뒤 오르테즈 남매의 이름으로 설립한 사업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버트랜드의 숨통을 서서히 조일 것이다. 이자크는 이 일을 오로지 사명감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두렵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지켜야 하고 에스텔라를 지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도모하는 이유는, 그는 귀족이니까. 나라를 지켜야 하는 백성들을 지켜야 하는 귀족이니까.

나라의 주인은 백성. 그 백성을 대표하는 것이 왕. 왕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며 백성을 지키는 것이다.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왕은 왕이 아니며 백성을 위하지 않는 귀족은 귀족이 아니다. 아버지의 말을 상기하며 이자크가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일정이 끝나자 이자크와 길버트가 먼저 강가로 이어지는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주인장이 말들을 그리로 옮긴 것인지 말들이 강가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다. 길버트가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눈치를 보더니 슬쩍 물었다.

“공주님이랑 이혼 안 하실 거죠…?”

“갑자기 그건 왜 묻나.”

“예? 아니, 그, 아무래도 일이 커지다 보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에스텔라에게 모든 일을 다 말할 생각이야.”

길버트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절대 말 안하실 것 같은 분이?

“공주님께서 믿어주실까요? 저번에도-”

“에스텔라는 날 믿어.”

이자크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의 단호한 모습에 길버트가 수긍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저택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자크는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향하려 했다. 그때 멀리서 유모가 달려온다.

“이자크 님! 이자크 님!”

“뭔가.”

“그, 그게요, 그것이 말이죠!”

유모는 마치 숨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였다. 아마 넓은 저택에서 이자크를 한참 동안 찾아다닌 것 같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하게.”

“빨, 빨리 공주님께 가보세요. 네?!”

안 그래도 갈 예정이었는데 유모는 자꾸만 이자크의 등을 꾹꾹 밀어댄다. 유모가 원래 호들갑이 많은 사람이기는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겼다기에는 표정이 매우 상기되어 있다. 광대는 잔뜩 올라가 있고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올라간다.

왜 그러나 싶어 이자크가 에스텔라가 있을 침실로 향했다. 침실 안에서 주치의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 역시 상기된 얼굴로 이자크를 보자마자 대뜸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이자크 님!”

“뭐가 말인가.”

“공주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이자크는 제 귀를 의심했다. 에스텔라가… 아이를 가졌다고? 살짝 열린 문틈을 살펴보자 쌍둥이들이 에스텔라의 배에 귀를 대고 있다. 이자크 뒤에서는 유모와 주치의가 서로 기뻐하며 축하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문 밖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에스텔라가 이자크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자크!”

에스텔라가 활짝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이자크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빠! 엄마 배에 아가 있때! 내가 말했잖아!”

“나 질투쟁이 아니야아….”

쌍둥이들이 도도도 달려와 이자크의 다리에 매달렸다. 동생 생기는 것이 기뻐 보인다. 루스는 어딘가 아쉬워 보이고. 이자크는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로 아이들을 안아 들며 방 안에 들어왔다.

“에스텔라. 진짜입니까?”

“저도 몰랐는데, 로먼 말로는 맞대요. 아직 엄청 초기라서 몸조심만 하면 될 것 같다고….”

에스텔라가 얼굴을 붉히며 제 배를 살짝 쓰다듬었다. 홀쭉한 저 배에 아이가 들어있다. 이자크는 눈만 깜빡이며 제 아내를 쳐다봤다.

“정말로 그 배 안에….”

고개를 끄덕이는 에스텔라가 활짝 미소지었다.

정말로 아이가 있다.

에스텔라의 뱃속에 아이가 있다.

아이가 생긴 것은 매우 기쁘다. 심장이 벅차오를 정도로 매우 기쁘지만 그와 동시에 두려워졌다. 지켜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나는 지켜낼 수 있을까? 임신한 아내와 쌍둥이들을 버트랜드로부터 지켜내야만 한다. 에스텔라는 안정을 취해야 하고 어떠한 스트레스도 줘서는 안 된다.

나는 그녀에게 버트랜드에 대한 진실을 말해야 하나.

“이자크?”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행복해하던 에스텔라의 얼굴에 아주 살짝 불안함이 덧 씌어졌다.

그가 기뻐하지 않는 것 같다.

아이가 생기는 것이 싫은 건가?

“…왜 그런 표정을….”

“에스텔라.”

“…나가줘요.”

“그게 아니라-”

“나가줘요.”

이자크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상처받은 에스텔라의 얼굴을 보자마자 목이 막혀버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자크가 마른세수를 하며 에스텔라에게 다가갔다.

“오지 마요.”

에스텔라가 고개를 홱 돌리며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보였다.

이해할 수 있다. 당황한 것이겠지. 갑작스럽게 아이가 생기니까. 이제 다시 재수사에 들어가면 심적으로도 여유가 사라질 텐데 내 건강까지 생각해야 하니까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거야. 시기적으로 좋은 상황이 아니니까 걱정부터 한 걸 거야.

그저 아무 일 없이 평화로웠던 때라면 그 누구보다 기뻐하며 날 번쩍 안아들다가도 도자기 만지듯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을 거야. 그래. 그랬을 거야. 이해할 수 있어. 그는 그럴 사람이니까.

그런데도 서운하고 속상하다.

나도 두려운데, 나도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불안한데, 아이를 낳은 기억도 없어 얼마나 아플지 상상도 안 되는데, 태중의 아이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해야 하는데.

그거 다 알고도 너무 기쁜 건데.

이불보에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에스텔라. 싫어서가 아니에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거짓말. 갑작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야. 난 그래도 불안하고 무서운 것보다 행복한 게 더 컸어.”

“…미안해요.”

“이자크가 아이를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왜 그런 반응인지 이해도 하고요. 그러니까. 이해하니까… 나가줘요. 이자크도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있죠?”

에스텔라는 끝까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부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유모는 이미 아까 전에 쌍둥이들을 데리고 아이들 방에 가버렸다. 아가씨, 도련님, 제가 책 읽어드릴게요. 저희 먼저 방에 가 있어요. 쌍둥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불안한 기류에 눈치를 보다 이내 유모 손을 잡고 가버렸다.

방에서 쫓겨난 이자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새끼. 한심한 놈. 겁쟁이 자식. 그러다가 고개를 들자 아직 가지 않은 주치의가 위로를 건네듯 어깨를 토닥였다.

“이자크 님. 저도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아내는 첫아이를 가졌을 때 매우 기뻐했지만 저는 첫아이를 가진 기쁨보다 이제부터 더 돈을 벌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아내를 안심시키지 못했어요. 아내가 더 불안했을 텐데 말이죠. 저도 정말 기뻤거든요. 정말 기뻤는데, 매번 이리저리 출장을 가느라 임신한 아내 옆에 붙어있지 못했습니다.”

주치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아내가 막달에 쓰러졌어요. 다행히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출장을 끝내고 돌아오니 산파가 아이를 안아보지 않겠냐 묻더군요. 두려웠습니다. 기뻤지만 두려움이 더 컸지요. 그때까지도 전 아주 못난 놈이었어요.”

그러더니 마치 아이를 처음 안아본 그때를 회상하듯 두 손을 달싹였다.

“아이를 안는 순간 제가 얼마나 나약하고 한심한 고민을 했는지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대로 한달음에 아내에게 달려가 울면서 빌었어요. 미안하다고. 내가 너무 못났다고. 아내는 제 말을 가만히 들어주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때 너무 무서웠다고 말하더군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그 상황이 너무 두렵고, 아이에게 미안했다고.”

전 아직도 그때가 가장 후회됩니다.

아내는 건강하고 딸 아이는 장성해서 제 일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그 상황이 전 아직도 너무 후회됩니다. 누군가 제게 시간을 딱 한 번 돌릴 수 있다고 말하면 전 그때로 가고 싶습니다. 가서, 제게 아이를 가졌다고 말한 아내에게 입을 맞추고 꽉 껴안다가 배를 어루만져주며 눈물을 흘리고 싶어요.

그 순간을 오롯이 축하하고 만끽하고 싶습니다.

아이가 생기면 부모는 저절로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불필요합니다. 아이가 날 강하게 만들어요.

주치의의 말에 이자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별말씀을요.”

주치의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제 갈 길 갔다. 이자크는 의사 양반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이내 결심한 듯 방문을 두드렸다.

에스텔라는 혼자 있고 싶다며 들어오지 말라 했지만 이자크는 막무가내로 방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다. 에스텔라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동생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

“정확히는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헤일리라는 이름을 짓고 싶어 했고 아버지는 알린이라는 이름으로 짓고 싶어하셨죠. 그때 저는 8살이었고 엘리사는 4살이었습니다.”

“….”

이자크는 난데없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에스텔라는 갑자기 뭐 하는 짓거리인가 싶었지만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여전히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저와 동생이 어머니 편을 들어 이름은 헤일리로 확정이었어요. 아버지도 결국 항복하셨고요. 그런데… 테제리아인들이 남하를 하더라고요. 급습이었던 지라, 테제리아 국경과 맞닿아있던 저희는 급하게 피신을 갔어야 했습니다.”

테제리아 남하 사건. 그 사건은 워낙에 유명했던 일이다. 에스텔라 역시 어렴풋이 들어본 기억이 있다. 테제리아 국경 수비대가 당시 갑자기 남하를 하여 변경백을 급습했던 사건.

다행히도 변경백은 강을 건너기 전 모든 테제리아 수비대들을 처단할 수 있었지만, 그 일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되었다는.

“위에서는 테제리아 병사들이 남하를 하고, 아버지는 급히 출정을 가시고, 저희는 시종들과 함께 도망쳤지만. 사실 어머니는 움직이기도 힘든 시기셨습니다. 그때는 한파가 지속되던 겨울이었고 새벽에 급히 도망치느라 추위에 덜덜 떨기도 했었죠.”

이자크는 조용히 그날의 일을 상기했다.

그의 아버지도, 이자크도 ‘지켜야 한다’는 것에 집착을 하게 된 사건이었다.

긴박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들, 최소한의 짐만 챙겨 마차에 오르던 새벽녘, 출정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 멀리서 들려오는 군사들의 함성 소리와 언덕을 가득 메운 적군의 봉화 불빛들.

숨을 몰아쉬던 어머니. 피범벅이 된 흰색 파자마, 고통에 몸부림 치시던 어머니, 두려워하는 자신, 울고 있는 엘리사. 급히 요새로 도망쳐 의사가 왔지만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헤일리도 빛을 보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떠났다.

시종들은 그 광경을 보지 못하게 가렸지만 이자크는 그들의 몸 틈새로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보고 말았다.

가까스로 남하를 막고 돌아온 일리야 몬 디에스를 맞이한 것은 차갑게 식은 아내와 자식의 주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은 두 아이.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2권

지은이 : 신양이

발행인 : 민경찬

발행처 : 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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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 2010년 10월 7일 제2010-0002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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