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마차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줬다. 풍성한 연보랏빛 러플 드레스들이 너울거리자 이자크는 제 마음도 덩달아 너울거렸다. 멀미가 나는 느낌.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런 익숙지 않은 감정이었다.
“엄마! 압빠! 다녀오세요오!”
미엘라와 유모의 품에 안긴 쌍둥이들이 에스텔라와 이자크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들도 가고 싶다며 떼를 쓸 법한데 보채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 에스텔라가 말했다.
“금방 올게. 루시, 루스 그동안 유모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
그러자 루스가 호통을 친다.
“뭘 금방 와아- 늦게 와야지. 아빠랑 오랫동안 둘이 있으라고 보내주는 건데!”
루시도 아닌 루스의 인생 경험 많아보이는 호통에 저택의 사람들 모두 안간힘을 다해 웃음을 참았다. 에스텔라와 이자크 역시 당황했다.
“어? 어어, 미안. 늦게 올게, 그럼!”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풉,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저택사용인들이 푸하하 도련님 최고예요!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루스가 저런 말도 다 하고… 나 참.”
생각해보니 이자크와 단둘이 마차를 타는 건 처음 아닌가? 잔뜩 끼를 부리며 그를 유혹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마차에 단둘만 남으니 헛기침만 나오고 괜히 어색함에 얼굴만 긁적댔다.
항상 루시나 루스가 껴있어서 이런 어색함은 느낄 수 없었으니까. 에스텔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항상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을 걸며 둘 사이를 이어줬었으니까. 진정 큐피트 같았던 아이들이 사라지니 매번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던 에스텔라도 오늘따라 얌전해졌다.
눈만 도륵도륵 굴리다가 창밖을 보다가 괜히 제 드레스 자락만 만지던 에스텔라가 말했다.
“그, 동화 아세요? 재투성이 아가씨라고.”
이자크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가 싶어 다리를 꼰 채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알고 있습니다. 루스가 좋아하는 동화책이죠.”
“오늘 이자크, 되게 푸른 요정 할머니 같았어요.”
“네?”
“엘라가 자기만 연회 못가서 되게 속상했잖아요. 입고 갈 드레스도 없지, 마차도 없지, 시종도 없지. 근데 푸른 요정 할머니가 나타나서 누더기 옷을 드레스로 바꿔주고, 호박도 마차로 만들어주고, 생쥐랑 도마뱀도 말이랑 시종으로 만들어주잖아요.”
“….”
“뭐, 엘라랑 저랑 상황이 비슷한 건 아닌데, 그래도 오늘 아침의 일들 진짜 마법 같았거든요. 저 정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 못 했어요.”
“….”
“아무튼, 정말 고마워요. 요정 할머니.”
에스텔라가 활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보며 살짝 미소짓고는 다시 창밖을 쳐다봤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이자크가 꽤나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내가 요정 할머니면, 왕자는 누굽니까? 엘라.”
“네?”
“나 참. 아내한테 요정 할머니 소리 들으니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왕자는 누굽니까.”
“어… 왕자요?”
“예. 엘라가 무도회 가서 사랑에 빠지는 왕자요.”
이자크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리 그래도 요정 할머니라니. 동화 속에서 요정 할머니 말고도 조력자는 많지 않나? 이를테면 백마 탄 왕자라던지, 기사라던지, 기타 등등 멋진 거 많은데.
그냥 비유라는 거 아는데도 이자크는 이상하게 딴지 걸고 싶어졌다.
그건 아마 그 역시도 에스텔라와 비슷하게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 어색한 침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어린 소년 같았다.
에스텔라가 벙찐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왕자는 누구냐고?
“왕자, 어. 왕자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왕자 하고 싶어요?”
“….”
생각해보니 얼마나 유치한 질문이었는지. 이자크는 뒤늦게 수치감이 밀려왔다. 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이자크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에스텔라가 씩 미소를 지었다.
“아이, 왕자님 하고 싶으면 미리 말해주지.”
“딱히 그런 의도로 물어본 건 아니고-”
“그런 의도가 아니면요?”
“그냥.”
“그냥은 없어요, 이자크.”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에스텔라가 말했다. 이자크는 제 무덤을 제가 판 격이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괜히 고맙다는 말 들으니까 어색해서 한 소리입니다. 그런 말 들을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왜 그런 말 들을 정도가 아닌데요?”
“어차피 이 저택과 저택의 모든 재산 다 에스텔라 겁니다. 당신 돈으로 사람을 불러다가 구매한 것들인데 제가 생색낼 이유는 없죠.”
“아니죠. 제가 고마워하는 포인트는, 돈으로 사람 불러다가 예쁜 드레스, 장신구 이런 거 구해다준 게 아니고, 오로지 제가 실망했을까 봐. 그래서 그 늦은 밤까지 직접 항구로 나가 가브리엘을 데려온 거. 그 늦은 밤까지 웃돈 줘가면서 매분구 죄다 모아놓은 거. 그거라구요. 내가 실망하지 않게. 내 기분을 위해서. 알겠어요?”
“….”
“바보. 이 왕국에서 나보다 경제력 높은 사람이 국왕 말고 누가 있어요. 난 돈이나 권력으로 감동 받는 사람 아니에요. 날 얼마나 생각해주는지에 감동 받지. 이자크는 나 생각해서 한 게 아니었어요?”
이자크는 가만히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나이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데도 이렇게나 솔직하고 당당하다. 저보다 더 어른스러울 때가 있다. 덜 비겁하다.
“실망하는 모습 보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 고맙단 소리 들어도 충분한 거예요! 바보! 이렇게나 여자 마음을 모른다니까. 그냥 고마워요, 하면 예, 하고 좀 생색내도 될 일을. 이자크는 너무 이자크같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자크는 너무 이자크같다고요. 고유명사로 써야 된다니까. 사람이 좀 능글맞을 줄도 알고, 좀, 막, 비열할 줄도 알고, 생색낼 줄도 알아야 하는데. 너무 올곧아. 물론, 제가 거기에 반한거지만요. 저한테는 그렇게까지 올곧지 않아도 되는걸요.”
“제가 능글맞지도 않고 비열하지도 않고 생색내지도 않고 올곧기만 합니까?“
“네. 완전.”
“에스텔라 생각만큼 그런 사람은 아닌데요, 저.”
이자크가 나지막이 웃었다. 그는 에스텔라의 생각만큼 올곧은 사람이 아니다. 제 마음 하나 말 못 하는 겁쟁이에 비겁하기까지 한 놈이다. 그녀의 마음을 돌릴 능력도, 그렇다고 제 미련을 떨칠 용기도 없어 도망가기에 급급한 그런 남자다.
“에스텔라는 날 너무 좋게만 봅니다.”
“원래 좋은 사람 맞아요.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그런 맹목적인 믿음이 자꾸마 이자크를 따끔거리게 했다. 어디가 따끔거리는지 모르겠다. 양심인 건지, 아니면 심장인 건지.
“자. 그럼 다시 한번 말할게요. 오늘 정말 고마워요, 이자크. 그럼 이제 뭐라고 대답해야 하죠?”
“…당신 기분 좋아 보이니 저도 좋습니다.”
짝짝짝! 에스텔라가 환하게 웃으며 정답! 외쳤다. 이자크 역시 피식 미소지었다. 참 대단한 여자다.
*
로도니아 살롱의 부부 연회는 일년에 한번 밖에 열리지 않는 특별한 연회다.
사실 부부 연회 역시 단순히 ‘사교’라는 명목으로 모이긴 하지만, 다른 연회에 비해 특별함을 갖는 이유는 바로 부부만 참석할 수 있다는 것과, 약혼을 마친 일부 연인들만이 엄선되어 초대받는 것 때문일 거다.
이번에 열리는 부부 연회에 특히나 많은 귀족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아마 공주 부부 내외도 참석한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서일 것이다.
“공주님께서 앓아누우셨다는데, 과연 참석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미 연회는 시작되었다. 귀족들은 연회장을 둘러보며 공주와 이자크가 나타났는가 안나타났는가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게 과연 앓아누우신 건지, 아니면 대외적으로 그런 이유를 대신 건지는 모를 일이죠.”
“신혼 때 말고 한 번도 참석 안 하신 분이 웬일이래요?”
“그거 들으셨어요? 공주님께서 이자크 경이 일하는 훈련장에 수선화를 대량으로 사서 보냈데요.”
“세상에. 갑자기 왜요? 둘이 이혼조정기간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공주님께서 먼저 이혼 요구하셨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수선화도 대량으로 사서 이자크 경한테 보내고, 아. 게다가 그 바실리스 남작 있죠?”
“아. 캘리아나 왕국의 그 어린 가주요? 우리 남편은 그 가주 싫어하던데. 오만하고 젊기만 한 놈팡이라고.”
“아무튼, 그 남작이랑 이자크 경이랑 대련을 했는데, 그 남작 코를 아주 눌러버렸었나 봐요, 이자크 경이. 아무튼 그 어린 가주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뒤에서 공격을 했는데- 공주가 달려나가서 우산으로 남작을 때렸다지 뭐에요.”
“공주님이요?!”
“어머. 앨리어스 부인은 그 소문 못 들으셨군요? 위쪽에서는 이미 다 소문나서 알 텐데.”
지방에서 올라오는 귀족들은 이런 흥미로운 소문을 바로 알지 못해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진짜로 오셨네.”
귀족 중 하나가 다른 귀족을 툭툭 치며 문을 가리켰다. 귀족들의 시선이 단번에 정문으로 향했다.
“에스텔라 데 메시앙, 이자크 데 메시앙 부부 내외 입장하십니다-!”
쩌렁쩌렁한 기사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렸다.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팔에 팔짱을 낀 채로 한걸음 내디뎠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다들 신기해하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왔냐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왔긴 내 남자랑 같이 왔지.
당당한 자세로 나가니 사람들은 오히려 두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눈치 보는 것 같았다.
“세상에, 공주님! 어서 오세요!”
델라 랭이 화려한 차림새로 달려 나와 에스텔라를 꼭 껴안았다. 그러더니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텔라 한번, 이자크 한번 쳐다봤다.
“두 분이 오실 줄 알고 있었어요. 이 연회가 드디어 주인을 만났네요.”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고. 헤헤.”
에스텔라는 자신을 격하게 환영해주는 델라 랭에게 실없이 웃어 보였다. 이자크는 긴장되는 듯 숨을 살짝 들이마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6년 만에 온다. 부부 연회든, 왕궁 연회든.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은 날카롭다.
“이자크? 괜찮아요?”
답지 않게 긴장한 그의 모습에 에스텔라가 작게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을 감수하고 에스텔라와 온 것 아니지 않나.
델라 랭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다른 귀족들이 얼른 에스텔라 앞에 몰려왔다. 신기한 광경이니 놓치고 싶지 않겠지. 귀족들은 달려 나와 에스텔라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켰다.
대부분 다른 이들에 대한 소문이나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사이를 떠보고싶은 마음 가득한 질문들이었다.
이자크가 연회에 오기 꺼려 하는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었다. 연회에서 만난 귀족들은 그동안 서로 수집해온 소문들을 마치 매분구들이 짐 풀어놓는 것처럼 하나둘 꺼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공주님께서는 기억을 잃으셨다던데.”
귀족 중 하나가 다른 귀족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가장 재밌고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을 가진 이들일수록 함구하고 있다가 장사치들마냥 마지막에 슬쩍 꺼내며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려 하지.
“네? 정말이세요, 공주님?”
“뭐. 어쩌다 보니, 기억을 잃고 말았네요.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혔나 봐요.”
에스텔라는 능숙하게 사람들의 의도 있는 관심을 받아쳤다. 생긋 웃는 얼굴로 말을 꺼낸 귀족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저놈이, 아, 올란도 후작이군.
올란도 후작은 에스텔라에게 5번 구애하여 5번 다 뻥 차인 후작 가문의 영식이었다. 제 재력 과시할 줄만 아는 망나니라 과연 올란도의 가주가 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결국 되었나 보군.
에스텔라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차라리 저 집 둘째 딸이 가주가 되었으면 올란도 가문이 망하지는 않을 텐데, 올란도도 얼마 못 가겠군. 그리 생각하면서.
“해서, 어디까지 기억을 잃으신 겁니까? 남편인 이자크 경은 기억하시는 것이지요?“
올란도 후작이 대놓고 이자크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설마 아직도 에스텔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가. 맞다. 올란도 후작은 아직 에스텔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에스텔라에 대한 애정보다는, 아마 자신을 차버린 에스텔라에 대한 원망과 와그작 구겨진 제 자존심을 어떻게든 회복하고 싶어서일 테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미 결혼했으니 이 연회에 온 것 아닌가. 제 아내까지 와 있는 곳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니 한심하고 안타까우며 후작부인이 아까웠다.
“그럼요. 제가 어찌 제 남편까지 기억 못 하겠어요? 다들 저희 부부에 관심이 아주 많으시네요. 좋은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자신이 그 소문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이게 이렇게 재미질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소문의 대상이 되면 사람들의 힐끔대는 시선과 그들 주변의 공기마저 폐부를 찌른다.
이자크는 이런 자리가 싫다. 싫지만 제 손을 꽉 잡고 있는 에스텔라의 땀 차서 축축한 손 때문에 버틸 수가 있었다.
아닌 척 하지만 에스텔라도 긴장한 걸까.
그럴 만도 할 테다. 에스텔라의 속은 열아홉 살. 지금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 결혼까지 한, 에스텔라의 기억 속과는 전혀 다른 이들이 되어 있으니까.
이자크가 손에 힘을 줘 단단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에스텔라가 놀랐는지 슬쩍 그를 올려다봤다.
두 사람의 기류를 눈치 못 챈 후작이 계속해서 입을 털었다.
“하지만 기억 잃으신 것은 확실한 거죠?”
“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연회에 오시지 않으셨겠지. 안 그런가? 공주님께서 다른 연회는 다 참석하셨어도, 이 연회만큼은 절대 안 나오시지 않으셨나!”
일부러 보란듯 다른 귀족들에게 물어본다.
에스텔라는 이렇게까지 가시돋힌 반응은 처음이라 살짝 당황했다. 열아홉 살 기억만 가진 그녀의 기억 속 연회는 모두가 그녀에게 호의를 가진 이들 뿐이었으니까.
다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나고, 부정적 관심보다 긍정적 관심이 더 많았었으니까. 그때 이자크가 에스텔라에게 작게 속삭였다.
“예전에 당신이 올란도 후작의 사업 투자를 거절한 이유로 더 저럽니다.”
“아. 진짜요?”
“그건 일부고. 8번째 구혼도 걷어차서 그렇겠죠.”
“8번째나요? 뭐야 진짜로 좋아한 거야, 뭐야….”
에스텔라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다른 귀족들과 웃고 있는 올란도 후작을 쳐다봤다.
“결혼 언제 했는데요?”
“한 달 전에 했습니다. 그것도 정략결혼으로.”
“어느 가문이랑요?”
“피올라 남작가문의 장녀와요.”
“8번째 구혼은 언제 했는데요?”
“부인이 나한테 이혼서류 내밀고 일주일 뒤에.”
“허….”
무슨 자신감으로? 에스텔라가 헛웃음 소리를 냈다. 이자크 역시 올란도 후작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귀족 중에서 제일 이자크에게 시비를 많이 건 사람이 아마 올란도 후작과 그의 똘마니들일 것이다.
어떤 식이냐면,
“그나저나 공주님께서 머리를 다치실 일이 뭐가 있습니까? 설마, 이자크 경 자네가 사주한 일은 아니지? 왜, 피는 못 속인다 하지 않나. 이혼당하면 재산 하나 없이 이국으로 쫓겨날 테니까, 어떤 미친 여자가 애 둘 딸린 돈 한 푼 없는 남자와 결혼하겠어! 하하하! 기분 나빴는가? 뭘 그리 기분 나빠하나. 그저 장난일세!”
올란도 후작이 그리 말하며 이자크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한다. 키도 작은 놈이 하이힐까지 신고선 저러니 안타까울 뿐이다.
장난을 빙자하여 해도 될 말과 하면 안 될 말을 구분하지 않는 인간들.
그게 딱 올란도 후작과 그의 측근들이었다.
이자크는 저 ‘피는 못 속인다’라는 게 뭘 뜻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챘다. 에스텔라는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네 아비가 선왕을 조종하기 위해 독살하려 했던 것처럼 너 역시 공주를 바보로라도 만들어 조종하려던 것 아니냐-는 그런 뜻이었다. 이자크는 어색하게 웃으며 올란도 후작의 벨트 고리에 끼워져 있는 열쇠에 손을 가져갔다. 올란도 후작은 제 벨트 고리에 끼워져 있던 열쇠가 사라지는 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이자크의 성질을 슬슬 긁어댔다.
이자크는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 저런식으로 그에게 망신과 흠집을 주려던 사람은 넘쳤고 이제는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그는 올란도 후작에게서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그에게 볼일은 없었다.
“…뭐라 했냐, 지금.”
그러나 에스텔라는 그 말뜻을 이제 이해했다.
“에?”
당황한 올란도 후작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에스텔라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
“뭐라 했냐고. 너.”
“…공주님?”
올란도 후작은 당황한 듯 에스텔라와 이자크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자크 역시 당황했다. 이렇게나 상큼하게 웃는 얼굴로 거친 말을 내뱉는 부인은 처음이었다. 아니지. 바실리스 남작에게 한 언행들이 이자크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처돌았나, 감히 어디 앞에서 그딴 개 같은 소리를 씨부려?”
“부, 부인.”
“뭐? 피는 못 속여? 그래. 피는 못 속이니 올란도 후작이 이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겠지요.”
이자크가 얼른 에스텔라의 입을 막으려 손을 가져갔지만 에스텔라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덕분에 화살보다 빠르고 투포환보다 묵직한 말들이 올란도 후작을 겨냥했다.
“공, 공주님. 그거 지금 저희 가문을 모욕하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요?”
“잘 받아들이셨네요. 그전에 후작이야말로 이 에스텔라 데 메시앙을 모욕했다는 건 알아두셔야겠는데.”
“제가 어찌 메시앙의 별을 모욕한단 말입니까?”
“내 남편을 모욕했으니 날 모욕한 것이지. 후작은, 바실리스 남작에 대한 소문은 못들으셨나봐요? 측근들 입이 깃털보다 가볍고 쥐보다 귀가 밝아 놓치는 소문은 없을 텐데.”
바실리스 남작이 공주의 우아한 양산에 엉덩이, 등, 얼굴, 목 있는 곳은 다 맞았다는 소문이야 당연히 들었다. 에스텔라는 아주 우아하고 정중하면서도 대놓고 비아냥 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너도 그 꼴 나고 싶냐는 공주의 말귀를 못아들은 이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멍청한 올란도 후작마저도 말이다.
“올란도 후작. 날 향한 그대의 집착에 가까운 마음은 알겠어요.”
“…예?”
에스텔라가 조만간 안타까워 마지않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후작의 구애를 16살 때부터 지금까지 총 8번이나 거하게 차버렸으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테지요. 게다가 후작의 사업 투자도 거부했으니 더더욱 자존심 상했을 거고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랑 이자크, 비교할 걸 비교해야죠.”
“허….”
“결혼까지 한 사람이 뭐가 그리 아쉬워 이런 심술을 부리는 건지 이해는 못 하겠지만. 올란도 후작. 저는 남편으로 들일 사람을 볼 때 재력과 권력을 보지 않습니다. 나보다 재력과 권력이 많은 남자는 우리 아버지뿐이거든요.”
“….”
“전 남자를 볼 때 얼굴, 몸매, 인성, 능력 순으로 본답니다. 거기서 올란도 후작은 얼굴부터 탈락이고요. 물론 몸매와 인성 능력 다 탈락입니다.”
올란도 후작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이렇게까지 혹독한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올란도 후작이 불쌍해질 정도로 에스텔라의 ‘진실의 입’이 열렸다. 원래 에스텔라는 이렇게까지 진실에 기반한 악담을 퍼붓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다.
에스텔라는 본인을 건드리는 것에는 관대하다. 어차피 그리 툭툭 건들며 시비튼다 한들 그녀가 이 왕국에서 제일 돈 많고 권력 높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제가 아끼는 사람, 물건을 건드려 흠집을 내면 그때부터 그걸 건드린 놈은 죽는 거다.
감히 공주의 물건에 흠집을 낸 죄로.
후작은 오랜만에 에스텔라의 원래 성질머리를 건드리고 말았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공주가 햇살처럼 웃고 다니니 공주님의 성정이 진정 햇살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이 실수였다. 공주는 햇살이 아니다. 불꽃이다. 그 불꽃은 예쁘게 타닥타닥 빛을 내며 꽃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 건드리면 팡 터지고 마는 폭탄의 불꽃이 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후작은 폭탄을 고르고 말았다.
“부인. 말이 너무 심한 것-”
“가만 있어 봐요, 이자크. 맞는 말인데 뭐가 심해요. 후작도 자기 객관화를 할 줄 알아야 할 나이가 되었어요.”
올란도 후작은 그 이상 입을 뻐끔대지 못했다.
“후작. 제가 후작의 구애를 거절한 이유를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까요? 우선 후작 가문 대대로 머리 벗어지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요. 몸은 그리 말라서 배만 올챙이처럼 톡 튀어나온 것도 싫습니다. 인성이야 지금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면 알 테지요. 누가 봐도 이자크를 겨냥한 따가운 말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내가 말하고 있잖아요. 내가 후작의 사업에 투자를 하지 않은 것도 올란도 가문은 대대로 사람 등쳐먹는 사업을 하잖습니까. 고리대금업이 어디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돈 없는 하위 귀족, 백성들 등쳐먹는 일이지.”
“등, 등을 쳐먹다니요!”
“잠깐 돈을 빌려주고 빌려준 돈보다 더 큰 이자를 요구하는 게 등쳐먹는 게 아니고 뭡니까. 후작도 떳떳하지 않으니 대외적으로 두루뭉술하게 은행 사업을 한다 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피올라 남작 가문의 장녀와 결혼한 거고요. 피올라 가문은 은행 사업을 하던 집안이니까. 본인의 가문이 뭘 하는지 아직 숙지가 되지 않은 건가?“
“….”
“날 건드리는 건 상관이 없는데, 내 걸 건드려서 흠집 내면 안 되지. 댁은 내 걸 건드렸고, 그래서 나도 너 좀 건드려봤습니다.”
“….”
“하하, 너무 기분 나빴어요, 올란도 후작? 너무 노여워 마세요. 장난입니다. 장난-.”
에스텔라가 조만간 하하, 웃음을 터트리더니 올란도 후작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후작은 물론 주변의 모든 귀족이 얼빠진 상태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마음 같아서는 뭘 그리 쳐다보냐, 니들 할 일 안 해? 하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옆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이자크를 위해 한 성질 참았다.
“오늘 제가 이자크와 6년 만에 이곳에 온 이유는. 여러분들께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귀족들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거린다.
“제가 드디어 6년 만에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이자크한테 열심히 구애 중이거든요.”
웅성대는 소리에도 에스텔라는 기죽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너무 고깝게만 보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아무리 제가 이자크랑 최악으로 치달아 이혼을 한들, 제가 누군가의 두 번째 아내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재혼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선왕을 독살하려다 실패한 반역자의 아들입니다. 제 아비를 죽인 핏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다니, 시야가 맑아지신 줄 알았는데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에스텔라 뒤에서 올란도 후작이 소리쳤다. 그는 어떻게든 산산 조각 난 제 자존심을 이런 식으로라도 주워 담고 싶었다.
“남자에 미친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요.”
그의 말에 에스텔라가 뒤돌아 물었다.
“나랑 내기 하나 할래?”
“…내기요?”
“이제부터 7년 전의 사건을 다시 파헤칠 생각입니다. 사법부에 가서 정당한 방법으로 재수사 신청하고, 그날 목격자들 다시 모으고. 해서, 진범을 다시 가려낼 겁니다.”
“7년 전이면 진짜 범인은 도주하고도 남았을 테고, 목격자들도 이 나라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텐데 무슨 재수사를 한답니까. 하!”
“무슨 소리지? 그날의 목격자가 떡하니 내 앞에 있는데. 내 남편, 그리고 내 시동생. 그 둘의 진술을 다시 모아 증인으로 세울 거고. 그 과정에서 정말 내 아버지를 그리 만든 놈이 전 디에스 변경백인지 아닌지 내기하자고.”
“그게 무슨-”
“네놈 말대로 정말 전 변경백이 진범이라면, 그래. 나는 이자크와 이혼하고 널 찾아가 오늘의 일을 사죄하지. 하지만 진범을 가려내어 전 변경백이 누명을 쓴 것이면, 넌 이자크를 찾아와 무릎 꿇고 오늘 일을 사죄해.”
“증인들이 모두 반역가문의 자식들이라면 너무 기울어진 저울 아닙니까?”
“재판이 열릴 때 참여해 봐요, 그럼. 정말 기울어진 저울인지. 애초에 7년 전 초기 수사 때가 난 더 기울어진 저울 같던데. 그쵸? 올란도 후작은 알 텐데. 그때 전 변경백의 처형을 가장 빨리 주장한 이가 올란도 전 후작이라는 걸.”
“….”
“이 자리에서 이렇게까지 밝힐 생각은 없었는데. 덕분에 오늘 이후로 모든 귀족이 이 일에 대해 알게 되겠네요. 좋은 쪽으로 생각하죠, 뭐. 난 관심 받는 거 좋아하거든. 다들 가서 실컷 떠드세요. 메시앙 공주가 작정하고 그날 일 다시 파헤칠 테니까. 이번 기회에 나한테 줄 서고 싶은 사람들은 막지 않고 환영한다고요.”
에스텔라의 발언에 그 자리의 모든 귀족이 웅성댔다. 7년 전 사건을 재수사하겠다고? 궁금함을 참지 못해 공주에게 질문하고 싶다가도 눈치가 보여 저들끼리 수근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요. 이자크.”
“아직 저와의 대화가 다 안끝났습니다, 에스텔라 공주-”
올란도 후작이 발끈하며 에스텔라에게 다가갔다. 이자크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조용히 어깨를 꾹 밀었다. 더 이상 에스텔라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무언의 의미였다.
올란도 후작은 하! 완전히 주인 지키는 개 꼴이구만? 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자크는 그런 그를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왜, 공주가 네 머리 좀 쓰다듬어주니, 네깟 것이 날 이리 무시해도 된다 생각하나? 응? 노블레스도 아닌 반역자 가문이 몸 좀 팔아서 공주한테-”
그는 수치심으로 목소리 끝이 떨리면서도 이자크에게는 잘도 악담을 퍼부었다. 에스텔라와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음성이었다.
안타까운 사내였다. 에스텔라에게 짓밟힌 알량한 자존감이 이런식으로 찌질하게 표출되다니. 이자크는 그런 올란도 후작이 안타깝고 한심하고 우스웠다.
이자크가 그에게 살짝 다가갔다. 키 차이가 워낙에 커 올란도 후작이 주춤댔다.
올란도 후작을 내려다보는 이자크의 금안이 요요하게 빛났다. 저 멍청한 자식이 그리 큰 돈을 쥐고 있단 말이지. 쯧. 작게 혀를 찼다. 이자크가 혀를 차는 것을 본 올란도 후작이 더 격분해 그에게 달려드는 척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자크는 그런 올란도 후작의 어깨를 꾹 눌렀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올란도 후작이 휘청댔다. 그는 당황한 듯 했다. 바보같은 남자였다. 이자크는 비록 반역자 가문으로 몰렸으나 전 변경백의 후계자. 전쟁의 영웅이다. 힘으로 따지자면 올란도 후작은 이자크에게 있어 루시나 루스와 놀아주는 것보다도 덜 힘드는 상대였다.
이자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개한테 물린다. 그러다가.”
그리 말하며 이자크는 올란도 후작의 바지춤에 걸린 화려한 보석달린 열쇠꾸러미들에 슬쩍 손을 가져갔다.
이자크가 올란도 후작의 열쇠꾸러미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올란도 후작의 옷이 워낙에 주렁주렁 뭐가 달려있는데다가, 허세로 인한 제 몸집만한 망토와 장식물들에 가려져있었기 때문이다.
“이자크. 그런 놈 상대하지 마요. 입만 아프니까.”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자크 역시 그제야 힘을 줘 누르고 있던 올란도 후작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이자크가 손을 거두고 나서야 올란도 후작은 강력한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올란도 후작은 어깨부근이 뻐근하게 아파왔지만 차마 내색할 수 없었다. 얼굴이 분노와 수치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멀리서 후작 부인이 제 남편의 망신당한 이야기를 듣고 달려왔다.
그는 애꿎은 아내에게 투덜대며 자리를 벗어났다.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연회장 밖으로 나가고 델라 랭은 그제야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발 늦게 이 재미난 내기를 듣게 된 귀족들은 그 자리에 없어 아쉬워했고, 이야기를 들은 델라 랭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한편 에스텔라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 밖으로 끌려나온 이자크는 제 앞의 자그마한 여자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걸 느꼈다.
“에스텔라.”
“얼른 가요. 이 재수 없는 족속들이 나이를 처먹더니 한층 더 재수 없어졌네. 나날이 발전하는 재수탱이들.”
“에스텔라.”
“이자크 당신 말이 맞았어요. 다시는 연회 같은 곳에 오지도 마요. 두고 봐.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저 자식이 이자크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오늘 일 사죄하게 만들 테니까-”
“에스텔라. 나 좀 봐요.”
이자크는 앞만 보고 걸어가는 에스텔라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발걸음을 멈춘 에스텔라는 고개를 푹 숙여 이자크가 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고개 들어보세요.”
“싫어요.”
“왜요.”
“…지금 이자크 얼굴 보기 싫어요.”
“그러니까 왜요.”
“그냥요.”
“그냥은 없다면서. 나 봐요. 얼른.”
에스텔라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빨갛게 충혈되어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요즘 들어 자주 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에스텔라.”
“….”
“잘 받아쳐 놓고 왜 울어요.”
울어야 될 사람은 올란도 후작 아니던가. 사람들 앞에서 인신공격과 집안 사업 망신까지 있는 대로 다 당한 사람은 그쪽이다. 후작에게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독설을 마구 내뱉던 사람이 왜 이렇게 가련하게 우냔 말이다.
울음 참는 모습이 제 딸이랑 아주 똑같네.
자존심 상해서 우는 거 안 들키려고 입 앙다물고 인상 팍 찡그린 표정까지 아주 루시랑 똑같아.
“…해서요.”
“네?”
“속상해서요!”
에스텔라가 울음을 터트렸다. 뿌애앵, 요상한 소리가 났다.
“흐어어엉, 흐어어어-”
“에, 에스텔라.”
“미안해요오오, 허어어- 흐엉, 헝, 허어엉- 미안해요 이자크으-”
“저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습니까?”
“나, 이 정도까지 사람들이 못된 줄 몰랐어요. 나는, 허엉, 나한테만 잘해주고, 다 내 비위 맞춰주고 그랬으니까아-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공격적일 줄 몰랐어요. 이자크는 이거 엄청 많이 당했을 거 아니야. 근데 나 좋자고 막, 막 이자크 꼬시려고 하고오- 흐윽, 미안해요. 내가, 너무 속상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에스텔라는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퍽퍽 치며 말했다.
속상하고 화가 난다.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난다. 이자크가 이래서 오기 싫다 한 건데, 근데도 제 입장만 고려해 기어코 끌고 온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이었다. 그런 무례한 언행들을 이자크는 반역자의 아들로 낙인찍혀 7년 동안이나 견뎌야 했다. 그게 싫어 연회든 뭐든 참석하지 않고 조용히 살려는 사람에게 너무 고집만 부린 것 아닌가.
누구보다 이자크를 사랑하고 위한다고 말만 떠들어대고. 난 정말이지 최악이야. 에스텔라가 꺼이꺼이 울면서 말했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가만히 쳐다보나 이내 그녀를 끌어당기며 제 품에 껴안았다. 이자크의 가슴팍이 떨리는 걸로 보아 그도 우는 걸까. 에스텔라가 울지 말라며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울지 마요, 이자크. 내가, 내가 진짜 미안해요-”
“푸흡.”
“…뭐야?”
“에스텔라. 당신 진짜….”
우느라 떨리는 게 아니고 웃음을 참느라 가슴팍이 떨린 거였다. 이자크는 그 근래 본 그의 표정 중 가장 웃겨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왜, 왜 웃어요? 난 이렇게 속상하고 슬픈데…?”
에스텔라는 그가 웃는 게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지금 왜 웃는 거야? 뭐가 웃긴 거야? 너무 슬퍼서 일부러 웃는 건가?
“이자크. 내 앞에서는 울어도 돼요.”
그가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웃는 거라 생각한 건지 에스텔라가 애처로운 눈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자크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음을 알리고 싶었다.
이자크는 가만히 제 손을 끌어다가 에스텔라의 눈 위에 올려놨다. 손바닥은 뜨거워졌고 금세 축축해졌다. 기다란 그녀의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다시 손을 떼자 눈물이 쏙 들어간 에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이자크의 길게 찢어진 사나운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눈이 아주 마카롱이 됐네.”
“놀릴 때가 아니라고요. 나는 이렇게 심각하게 사과하고 있는데 이자크는 자꾸만-”
조잘대던 입이 조용해졌다.
쌍둥이들이 곧잘 만들어주던 퉁퉁한 마카롱처럼 부은 눈이 커졌다.
몸은 그대로 얼었다.
손은 허공에서 멈춰있었다.
커다란 손 두 개가 그녀의 양 볼을 잡고 있다.
따듯하고 촉촉한 것이 입술에 닿았다. 에스텔라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신이 아찔해졌다. 눈을 감고 있는 이자크의 속눈썹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에스텔라도 얼른 눈을 꽉 감았다.
허공을 배회하던 손이 이자크의 허리춤을 잡았다. 어찌나 긴장했으면 손이 부들부들 떨렸는지 모른다. 이자크가 입술을 떼려 하자 에스텔라가 까치발을 들며 그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이자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에스텔라는 여전히 눈 꼭 감은 채 입술 역시 앙다물곤 까치발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입술을 톡톡 쳤다. 그러자 앙다물고 있는 입술이 쭉 튀어나온다.
음. 그런 뜻이 아닌데. 하지만 여기서 더 나갔다간 속은 아무것도 모르는 열아홉의 부인을 잠 못 이루게 할 것 같아 그만하기로 했다. 이자크가 웃음을 참으며 에스텔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꼭 껴안았다.
에스텔라의 심장은 쿵쿵쿵쿵 쉬지 않고 빠르게 뛰었다. 이러다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 아니야? 방금 무슨 폭풍이 지나간 거지? 방금 전까지 우리가 뭔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입술이 제 입술 같지가 않다. 뭔가 남의 입술을 떼다가 붙여놓은 것처럼 어색하고 입술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원래 내 입술이 살짝 벌어졌었는지, 아니면 딱 다물려있었는지. 어색한 느낌에 입을 다물어도 보고 잘근 씹어도 본다.
속상해서 줄줄 흐르던 눈물이 감쪽같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와 함께 에스텔라의 넋도 나가버렸다.
우리, 지금, 그러니까, 방금, 이자크가 먼저 뽀뽀한 거 맞죠? 그렇게 물어봐야 하는데. 왜 나한테 뽀뽀했어요? 나 좋아해요? 나 사랑해요? 라고 물어봐야 하는데 아직 정신이 멍하다. 그렇게 멍한 상태로 이자크의 품에 안겨 있다가 가출했던 넋이 돌아올 때쯤 연회장 안에서 무도 시작을 알리는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손을 잡아당겼다.
“들어가요. 당신 춤추는 거 좋아하잖아.”
“그치만….”
귀족들 앞에서 그 난리를 부려서 들어가기 창피하다. 그 마음을 눈치챈 이자크가 웃으며 손을 끌어당겼다.
“남들 눈이 뭐가 중요하냐면서요. 다 보라고 해. 나랑 당신이랑 어떤 사이인지.”
그렇게 이자크를 따라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에스텔라는 연회장 안을 들어가 이미 춤을 추고 있는 군중 사이로 들어갈 때까지 이자크만 봤다. 그의 넓은 등을, 그리고 제 허리를 감싸는 굵은 팔을. 고개를 들면 자신만 담고 있는 그의 금안과 눈이 마주친다.
이자크는 춤에 능하지 않았다.
6년 만의 연회라 스텝도 죄다 까먹었고 툭하면 에스텔라의 발을 밟아 미안합니다를 반복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열아홉 에스텔라의 인생 중에서, 미래로 넘어와 그와 같이 살고 같은 방에서 잔 날들 중에서 가장 가슴 떨리는 날이었다.
어떻게 춤을 끝내고,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고, 어떻게 저택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에스텔라의 모든 기억은 딱 그 부분. 이자크와의 입맞춤에서 멈춰있었다.
*
연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저택의 사용인들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이자크는 평소와 비슷하게 차분해 보이지만 공주님의 경우는 많이 달랐다. 하루 종일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며 빨개진 제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올란도 후작과의 일은 전해 들었는데, 그것 말고도 더 있는 것 같지?”
“그렇지 않고서야 공주님이랑 이자크 님의 기류가 저리 분홍빛일 리가 없지.”
“그치? 공주님이 저렇게까지 수줍어하시는 걸 보면, 뭔가 일이 더 있었는데-”
확실히 공주님은 이상했다.
위에 나열한 것 말고도 가끔 식사를 하다 이자크와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거나, 이자크를 유심히 쳐다보다 깜짝 놀라 손부채질을 하거나.
“원래 평소에도 이자크 님에 대한 주접이 심하시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셨거든요.”
“두 분이서 뭐라도 하셨나?”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다들 어머, 어머, 진짜 그럴 수도 있네, 세상에, 웬일이야! 하며 조용히 주접을 떨었다. 공주님을 따라 왕궁에서부터 이곳까지 따라온 시녀들은 제 주인만큼이나 주접을 잘 떨었다.
“그러지 말고 직접 물어보는 건 어때요? 미엘라, 가서 한번 떠보세요.”
“아이 뭘 또 떠보고 그래. 두 분이서 알아서 하시겠지.”
“에이. 빨리요- 두 분의 변화를 눈치채야 저희도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고런 분위기들을 두 분께 만들어드리죠.”
“말들은 잘해….”
에스텔라와 시녀들의 사이가 다른 가문의 영애와 시녀들과는 달리 진짜 친자매같은 느낌이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의 영애들이라면 어딜 건방지게! 하며 한소리 하겠지만, 에스텔라의 경우 이자크에 대한 짝사랑을 시작한 열넷부터 꾸준히 제 전속 시녀들에게 연애 상담을 해왔던 터였다.
결국 미엘라가 정원에서 멍하니 아이들과 놀아주는 이자크를 쳐다보고 있는 에스텔라에게 가까이 갔다.
“공주님. 어디 아프셔요?”
“아니?”
“그런데 요즘 들어 꽤 자주 멍하니 계신 거 같아요. 부부 연회 이후부터 그러시던데. 오늘 아침도 따로 드시고. 두 분이서 싸우신 건 아니죠?”
“싸우기는! 걱정 안 해도 돼.”
저 멀리서 이자크가 번갈아 가며 아이들에게 목말을 태워주다 에스텔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에스텔라가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댔다. 미엘라가 그런 에스텔라를 유심히 보다 곧장 물었다.
“연회에서 무슨 일 있으셨죠.”
“어?”
“올란도 후작 일 말고요. 두 분이서 무슨 일 있으셨죠.”
미엘라의 눈은 독수리보다 매서웠다. 에스텔라는 그 눈초리에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아.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긴 했지. 에스텔라가 운을 떼었다.
에스텔라에게 있어 왕실 시녀들은 그녀의 친언니나 다름없지 않나.
“-그. 그. 뭐냐. 그-”
“왜 이리 말을 뜸 들이세요?”
“아니, 그. 했어.”
“예?! 뭘요?!”
미엘라의 동공이 커졌다. 콧구멍도 같이 벌렁거렸다. 하다니요, 뭘요, 연회장에서요? 아니면, 밖에서요?! 에스텔라가 그때를 회상하는 건지 쑥스러운 듯 몸을 배배 꽜다. 세상에. 진짜로 하신 거예요? 에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엘라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뽀뽀했어.”
“…네?”
흥분해있던 미엘라의 콧구멍이 단번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뭘 했다고요? 뽀뽀요? 미엘라의 눈이 가자미 눈으로 변했다. 뽀뽀를 하셨다고요.
“자꾸 이자크 입술만 보여…. 자꾸 의식하고. 미쳤나 봐. 나 변태 맞나 봐.”
“….”
“어뜩해.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워. 꺄!”
에스텔라가 제 양손으로 불타는 뺨을 식혔다. 아무리 기억을 잃으셨다고 한들 공주는 스물여섯 살이다. 스물여섯 살짜리가. 그것도 쌍둥이 애 엄마가. 남편이랑 뽀뽀 좀 했다고 저리 몸을 배배 꼬는 꼴을 보자니 미엘라는 어쩐지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어뜩해? 미엘라. 나 진짜아- 어후….”
“아니. 뭐 축하드리기는 한데, 더한 것도 하신 분이 뽀뽀 가지고 부끄러워하니까 더 놀리고 싶어지는데요?“
미엘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에스텔라가 홱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더한 것도 했다고?”
에스텔라의 말에 미엘라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루시 아가씨랑 루스 도련님은 뭐 새가 물어다 줬대요?“
“….”
에스텔라가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그러네. 우리 귀염둥이 루시랑 루스는 새가 물어다주지 않았지. 분명 나와 이자크가….
“세상에, 공주님 코피!”
“…와.”
미엘라가 급히 손수건을 꺼내 에스텔라의 코를 틀어막았다. 에스텔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멀리서 아이들과 놀아주던 이자크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애들 손을 잡고 이리로 오고 있다. 에스텔라가 얼른 미엘라에게 소리쳤다.
“안으로 들어가자! 얼른!”
“네? 지금요?”
미엘라의 손수건을 뺏어 제 코를 콱 틀어쥔 뒤 에스텔라가 얼른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미엘라도 당황하여 그 뒤를 얼른 따라갔다. 제 아내의 속이 뻔히 다 보이는 행동에 이자크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빠. 엄마 왜 요즘 압빠 피해?”
“엄마가 부끄러운가 봐.”
“부끄러워? 왜 부끄러워?”
“아빠가 좀 짓궂게 굴었거든.”
“나도 엄마한테 짓궂게 굴래!”
“나도! 나도!”
“안 돼.”
이자크의 단호한 말에 아이들이 매달리며 물었다.
“왜에에- 나도오-“
“안돼. 엄마는 아빠 거라서 가능한 거야.”
“엄마 아빠 거야? 아빠는 누구 건데?”
루스의 동그란 이마를 한번 쓰다듬으며 이자크가 말했다.
“아빠는 엄마 거.”
그러자 루시와 루스의 표정이 씰룩대기 시작했다. 동그랗고 조그마한 광대가 씰룩씰룩, 입꼬리가 쌜룩쌜룩. 엄마가 그 말 들으면 되게 좋아하겠다! 하며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요 작은 꿀벌 같은 것들은 그런 걸 또 어떻게 알아냈을까.
“엄마 도망갔으니까 잡으러 가자, 압빠!”
루시를 선두로 이자크와 루스가 저택 안에 들어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쌍둥이들에게 동화책을 네 권 정도 읽어준 뒤 이자크가 풀려났다. 원래는 한 열 권 정도를 읽어줘야 하는데 우리 눈치 빠른 꼬맹이들이 능글맞은 눈빛으로 씩 웃더니, 아빠. 오늘은 그만 가봐- 하며 선심 써줬다.
“아빠 벌써 가라고? 아직 네 권밖에 안 읽어줬는데?”
이자크가 웬일이야, 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루스가 반쯤 풀린 느끼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이참, 방에서 엄마가 기다리는데 모하는 고야-”
“맞아. 보내줄 때 가라구-”
너희 진짜 네 살 맞니. 이자크는 당황한 눈빛으로 어어, 그래. 고맙구나. 하며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옆 의자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던 유모는 생각보다 빨리 나온 이자크에게 오늘 도련님이랑 아가씨가 많이 졸려우신가요? 하고 물었다. 이자크가 잠시 유모를 쳐다보다 물었다.
“유모.”
“네, 이자크 님.”
“자네 혹시 동화책 말고 쌍둥이들한테 달리 읽어주는 책이 있는가?”
“동화책 말고요?”
“뭐, 예를 들면 로맨스 소설이라든지….”
“어우, 무슨 소리셔요. 그걸 읽어드려서 뭣에 쓴다구.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가끔 네 살짜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자크는 여전히 미심쩍은 듯 고개를 삐뚜름하게 갸웃대며 방으로 향했다. 유모가 살짝 긴장되는 듯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더니 얼른 쌍둥이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 가찌?”
“유모, 빤니 읽어조! 빤니!”
“쉿, 쉿, 조용히 하셔야지 저희가 안 들키고 읽어드릴 수 있단 말입니다.”
유모가 검지를 입에 대며 쉿- 하자 쌍둥이들도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쉿, 할게- 하며 속삭였다.
“그런데 아가씨랑 도련님, 둘다 이자크 님 앞에서는 자중하셔요.”
“왜에?”
“이자크님이 자꾸 의심하시잖아요. 동화책 말고 다른 책이라도 읽어주냐면서.”
“혹, 아빠 눈치 빨라아- 알게떠, 도심할께!”
이자크는 전혀 모를 것이다. 작은 꿀벌들이라 불리는 메시앙 가문의 귀여운 사랑둥이들이 알고 보면 그 누구보다 로맨스 소설에 빠삭한 연애 고수들이라는 걸. 차마 아빠의 쑥맥 같은 모습들이 답답해 아이들이 코치해주고 있다는 건 전혀, 전혀 모를 것이다.
유모와 멜리사는 매번 어린아이들에게 로맨스 소설을 읽어주는 것이 교육적으로 좋을지 고민한다. 시녀들이 몰래 돌려 읽는 로맨스 소설을 발견한 아이들이 맨 처음 읽어달라 했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물론 이자크가 동화책을 읽어주고 에스텔라가 가끔씩 전문 교육을 해주니 자신들은 로맨스 소설을 읽어줘도 된다 생각을 한다. 결론적으로 이자크와 에스텔라의 답답한 행동들을 쌍둥이들이 큐피트가 되어 이어준 거나 다름없지 않나.
아무튼간, 쌍둥이들은 착실히 유명 로맨스 소설을 들음으로써 남녀 간의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와 갈등의 낭만적인 해소법을 잘 알고 있다. 루시와 루스는 그걸 잘 듣고 있다가 아빠나 엄마가 답답하게 굴면 중간에서 중재할 것이다.
“요즘은 압빠 별로 안 답답하지, 루뜨.”
“웅.”
“그래도 갈 길이 멀어!”
“맞아!”
“유모 빤니 읽어조! 그래서 루밀라랑 헤르뗀이랑 오또케 된거야!”
“둘이 사랑하게 내버려 둬야 해….”
유모는 잠시 고민했다. 물론 로맨스 소설을 읽어달라 하신 것도 아가씨랑 도련님이고, 두 분도 이 소설을 매우 즐겨 하시는 데다가, 이 소설은 꽤나 명작에 드는 소설로 교육적으로 그리 나쁠 건 없다만, 그래도 역시 네 살 같지가 않다는 이자크의 고민이 어렴풋이 뭘 뜻하는지 알 것 같아졌다. 정말 로맨스 소설을 그만 읽어드려야 하나….
한편 루시와 루스가 착실히 로맨스 소설로 큐피트 역할을 발전시키는 그때, 아직 갈 길이 먼 이자크와 에스텔라는 어색하게 같은 침대에 누워있다. 정확히 이자크는 침대에 누워있고 에스텔라는 침대가 아닌 맞은편 소파에 잔뜩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다.
“왜 거기에 그러고 있습니까.”
“…여기가 더 편해요.”
“아닌 것 같은데.”
“진짜예요.”
잔뜩 몸을 말고 있는게 누가 봐도 경계하는 거지 어딜 봐서 쉬는 모양새인가. 이자크가 몸을 일으키자 에스텔라가 흠짓 놀랐다. 이자크는 그 모습에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에스텔라. 싫었다면 미안합니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그러고 말았습니다.”
“네?”
“당신이 원하기 전까지는 손대지 않을 테니, 긴장 풀고 이리 와요. 영 미심쩍으면 다른 방으로 가서 잘 테니까-”
“그게 무슨….”
“내가 멋대로 입 맞춰서 싫은 것 아닙니까?”
“전혀요!”
“그럼 왜 그리 내외하십니까. 나랑 눈도 안 마주치고, 같이 밥도 안 먹고, 다가가면 도망가고. 내가 아내랑 술래잡기하려고 입 맞춘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럼….”
“그럼?”
“그럼 왜 나한테 뽀뽀한 건지 이유를 대세요!”
“이유를 대라고요?”
“그래요, 이유요! 왜 나한테 뽀뽀했어요? 남, 남의 첫 뽀뽀를 막 그렇게 울고 있어서 못생겼을 때….”
“울고 있는 부인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했습니다.”
태연한 이자크의 대답에 에스텔라가 기가 막혀 어버버거렸다.
“사랑해서도 아니고 사랑스러워서 했다뇨! 그럼 저랑 이혼 안 할 거예요?”
“그건 두고 볼 일이지만-”
“두고 볼 일이라니!”
천인공노할 짓이라며 에스텔라가 펄쩍 뛰었다. 알고 봤더니 사람 마음 들었다 놨다 하는 나쁜 남자였다. 철벽의 이자크가 아니라 나쁜 남자 이자크였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건가! 그저 사랑스러워서 뽀뽀를 하다니, 사랑해서도 아니고!
“이자크는 사랑스러운 모든 것들에 막 그렇게 주둥이부터 갖다대나 봐요?!“
“주둥이….”
“그래요 주둥이요! 꽃이 사랑스러우면 뽀뽀하고, 말이 사랑스러우면 말 주둥이에 뽀뽀하고, 그런가 보죠?! 나는 사랑해야지만 뽀뽀하거든요? 사랑스럽다고 뽀뽀하지 않거든요?!”
“사랑스러운 거나 사랑하는 거나 똑같은 거 아닙니까?”
“달라요!”
“그럼 사랑해서 뽀뽀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에?”
“당신을 사랑해서 뽀뽀했다고요.”
“….”
“아닌 척하려 했는데, 못하겠어. 이 짓도.”
“….”
“그러니까, 이리 와요.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에스텔라. 얼른.”
이자크가 팔을 벌렸다. 에스텔라가 그 자리에서 멍하니 그만 바라보고 있자 이자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몸을 말고 있는 에스텔라를 번쩍 들어 침대 끄트머리로 옮겨준다. 부인의 눈높이에 맞춰 한쪽 몸을 웅크리고 앉은 이자크가 조각상처럼 굳어버린 에스텔라를 보며 놀리듯 물었다.
“왜 이렇게 얼었지? 본인은 잘도 고백하면서.”
“…그거야…. 내가 하는 고백이랑 이자크가 하는 고백은 정도가 다르다구요….”
“뭐가 다르단 겁니까?”
“나야 맨날 맨날 하는데 이자크는 이번이 처음이잖아요!”
에스텔라는 제 마음도 모르고 자꾸만 질문해대는 이자크가 얄미워 가슴팍을 툭툭 쳤다. 이자크가 낮게 웃으며 제 가슴팍을 치는 에스텔라의 손목을 잡았다.
“처음 아닙니다.”
“그럼요.”
“당신이 스무살 때는 내가 맨날 고백했었는데요.”
“…난 기억에 없어요.”
“그럼 없는 셈치고 다시 해드리죠.”
이 남자는 뭐가 이렇게 여유롭지? 에스텔라는 억울한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이자크가 삐죽 튀어나온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나자 에스텔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또 뽀뽀를!”
“어, 하라고 내민 거 아닙니까?”
능글맞고 태연한 그의 말에 에스텔라가 야속한듯 눈을 흘겼다.
“씨….”
“얼굴 엄청 빨갑니다. 에스텔라.”
“알고 있어요….”
“불나는 것 같네.”
“놀리지 마요….”
“사랑해서 그럽니다.”
“아, 진짜….”
에스텔라가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 남자가 원래 이렇게 사람을 잘 가지고 놀았던가. 에스텔라의 기억상 이자크는 항상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나까 말투만 쓰던 이였다. 그런 사람이 이런 짓궂은 말을 하니 부끄러워서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다.
“에스텔라.”
“왜요”
“아무래도 나는 평생 당신한테 휘둘릴 것 같아.”
“….”
“지금의 에스텔라도, 과거의 에스텔라도, 미래의 에스텔라도, 나는 당신을 미워한 적이 없어.”
그렇게 말하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에스텔라의 손을 잡아 내렸다. 촉촉해진 눈망울과 눈이 마주쳤다. 이자크가 가만히 에스텔라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항상 사랑했습니다.”
“이자크.”
“지쳤다는 거, 그거 나한테 지친 거지 당신을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
“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만했나 봅니다. 난 당신 앞에서 참을 수 없어.”
이자크는 터질 듯이 빨간 에스텔라의 양 뺨에 손을 포갰다. 에스텔라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자크가 떨리는 턱을 살살 쓸며 긴장을 풀어줬지만 긴장이 풀릴 리 없었다.
그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에스텔라는 이번엔 그때처럼 눈을 또랑또랑 뜨며 무슨 일인가, 상황파악을 하느라 눈을 굴리지 않았다.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처럼 낭만적이게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이 닿는 걸 느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에스텔라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손에서는 땀이 흥건하게 묻어나왔고 에스텔라는 그의 몸이 점점 제 쪽으로 밀려들어 올수록 더 세게 주먹을 쥐었다.
“…응!”
에스텔라의 입에서 낯뜨거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자크의 혀가 에스텔라의 입술을 가르고 안으로 들어오자 당황하여 나온 소리였다. 혀가 들어왔다. 에스텔라는 말아쥐었던 주먹을 펴더니 이자크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자크는 그러든 말든 계속해서 에스텔라 품 쪽으로 파고들었다.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에스텔라는 숨이 점점 차오르는 기분에 이자크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잠시 숨통을 트여주는가 싶더니 이번엔 뒤통수를 단단히 잡으며 입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에스텔라. 코로 숨 쉴 수 있잖아.”
이자크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그제야 에스텔라는 코로 숨 쉴 수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고난이도 아닌가! 에스텔라가 눈을 질끈 감으며 이자크의 목에 팔을 둘렀다.
제 목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아내가 귀여운 듯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에스텔라의 몸이 완전히 뒤로 젖혀졌다.
점막끼리 붙었다 떼어지는 촉촉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날 에스텔라는 얼굴뿐만 아니라 몸 이곳저곳 붉게 물들었다.
*
평소와 다름없던 메시앙 왕궁이 오늘은 제법 발소리가 들렸다. 예정보다 일찍 메시앙에 도착한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릴리 버트랜드 메시앙. 그녀의 이름 앞에 메시앙라는 성이 하나 더 붙었다. 직계 왕족이 아니면 붙일 수 없는 이름. 누구나 메시앙라는 성을 우러러보지만 릴리 버트랜드는 제 왕궁에 온 것이 그리 기뻐 보이지 않는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왕이 있는 중앙 홀로 향했다. 릴리 버트랜드는 아버지가 보낸 왕의 보좌관에게 비아냥대듯 물었다.
“국정은 보신다니?”
“예?”
“중앙 홀은 왕이 국정 볼 때만 들어가는 곳 아니냐. 아버지께서 국정은 보시냐고.”
“예. 그럼요, 공주님.”
공주님이라는 칭호에 릴리 버트랜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부인? 어디 불편하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릴리 버트랜드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레 묻는 이는 트라비아 왕국의 왕자. 왕자는 이제 곧 왕위를 눈앞에 두고 있다.
중앙 홀에 다다르자 거대한 대리석 문이 열렸다. 왕좌에 앉아있던 버트랜드 국왕은 제 딸이 오자 느긋하게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했다.
“내 사랑스러운 딸. 어서 오거라. 먼 길 피곤하지 않았느냐. 여독을 풀고 날 만나러 와도 될 것을.”
왕은 다정하게 딸 부부를 맞이했다.
릴리는 그런 아버지에게 화답하듯 생긋 웃었다.
“…딸 된 도리로서 아버지 먼저 찾아봬야지요.”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릴리 버트랜드는 피곤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버트랜드 국왕이 시선을 돌려 제 딸의 남편이자 트라비아의 왕자에게 안부를 건넸다.
“내 딸이 이렇게나 아비를 생각하는군. 베인 왕자. 트라비아의 국왕께서는 몸이 많이 편찮으시다 들었네만. 내 직접 찾아뵙지 못하는 것이 매우 유감일세.”
“아닙니다, 국왕 전하. 아버지께서도 전하의 마음에 감동 받으셨습니다. 일전에 보내주신 것들은 모두 감사히 받았습니다.”
“감사히 받기는. 그저 병문안 선물쯤이라 생각하게나. 해서. 자네가 요즘 대리청정을 하고 있다 들었는데.”
“예. 미흡하지만 대신들의 도움으로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거참 다행이로군. 나중에 자네와 따로 긴히 할 말이 있네만-”
버트랜드가 말을 이으려던 참에 릴리 버트랜드가 헛구역질을 했다.
“우웁.”
“이런. 여독이 심한 거니, 릴리야.”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얼른 가서 쉬거라. 뱃속에 장차 트라비아와 메시앙을 통치할 씨앗이 있는데 최대한 몸을 아껴야 하지 않겠니. 자네와는 나중에 얘기합세.”
“….”
“예. 전하.”
릴리 버트랜드는 창백한 얼굴로 인사를 올린 뒤 뒤돌았다. 아버지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다. 그때 뒤에서 버트랜드가 흘리듯 말했다.
“참. 이번 연회 때는 에스텔라와 이자크가 같이 참석할 거 같더구나.”
발걸음이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릴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딸 부부가 나가자 유한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올란도 후작이 한 말이 사실인가?”
버트랜드의 질문에 전 올란도의 가주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국왕 전하. 제 아들놈이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들 대부분이 공주님의 발언을 들었다 하옵니다.”
“전하. 진정 공주님께서 7년 전 일을 재수사하시도록 허락하실 것입니까?“
대신 몇몇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국왕을 쳐다봤다. 다들 하나같이 에스텔라가 재수사하는 것을 막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건 국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게 사법권이 없다는 걸 자네들 모두 잘 알지 않나.”
“국왕 전하는 곧 메시앙, 메시앙은 곧 국왕 전하. 무엇이 전하보다 위에 있단 말입니까.”
“재수사부터 반대하면 공주는 필시 눈치챌 것이다.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에 이제야 발톱을 드러내는 걸지도 모르지.”
국왕의 말에 대신들이 웅성거렸다.
버트랜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왜 자꾸 파국으로 치달으려 하는 것이니, 에스텔라야…. 나는 널 해치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날 저녁, 버트랜드 대공은 저녁 식사도 마다한 채 어디론가 향했다. 왕궁 별채에 들어간 버트랜드는 오랜만에 이곳에 오는 듯 이따금 낯선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그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왕에게 두건을 건넸다.
“전하. 이걸 쓰셔야 합니다.”
버트랜드는 두건을 얼굴에 두른 채 다시 별관 안으로 들어갔다. 자욱한 향 내음에 기사 몇몇이 소리죽여 기침 소리를 냈다. 버트랜드는 방 앞에 다다르자 저 혼자 방 안에 들어갔다.
“형님.”
그 안에는 선왕 벤자민 데 메시앙이 누워있었다. 선왕 옆에서 약을 조제하던 의사가 버트랜드가 들어오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버트랜드는 미라처럼 마른 선왕을 쳐다보더니 의사에게 물었다.
“약은 계속 주입하는 중인 것이냐.”
“예. 전하.”
“…잠시 나가보거라.”
의사는 얼른 방을 나갔다. 버트랜드는 침상에 누워있는 선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
“에스텔라는 참 오로라를 닮은 것 같으면서도 형님을 닮았다니깐요.”
그저 모른 척 있으면 될 것을, 그러면 그토록 원하는 가족과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텐데 왜 자꾸 일을 크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
“왜 자꾸 스스로 무덤을 파는 건지.”
“….”
“오로라를 봐서라도 에스텔라에겐 손대고 싶지 않은데 말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형님.”
“….”
“듣고 계시나? 아니면, 이미 청각까지 마비되어 산송장이 되었으려나.”
미동 없는 벤자민을 내려다보던 버트랜드가 그대로 방을 나갔다. 방에 나가자마자 어지러운 듯 벽을 짚자 기사들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
오늘의 에스텔라는 굉장히 비장한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이자크 역시 조용히 마차에 올라탔다. 마중 나온 저택의 식구들 역시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웬일인지 쌍둥이들도 조용했다.
“출발해, 길버트.”
“예. 공주님.”
마차는 출발했다. 이 마차는 오르테아 광장으로 향할 것이다. 오르테아 광장 정중앙에는 정의를 심판하는 대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그 조각상을 정 가운데에 두고 커다란 법원과 검찰청, 그와 관련된 부처들이 커다란 원형을 그리며 세워져 있다.
메시앙 왕국은 ‘정의’에 엄격한 나라였다. 그러니 법 또한 엄격했다. 범죄를 저지를 경우 그 이유와 타당함에 근거하여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가차 없이 사형 또는 태형이었다.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경우 귀족이든 평민이든 할 것 없이 모두 공평하게 처벌받았다.
특히나 귀족들은 죄질이 나쁠 경우, 벌금형이 불가하며 무조건 태형 또는 사형이었다. 해서 메시앙의 귀족 중 죄를 저지르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선왕 벤자민이 재위했을 때가 가장 법에 엄격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법을 저지르면 태형이나 사형에 처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이가 음식을 훔치면 위법에 대한 처벌로 사회봉사를 시키면서도 가난한 이가 굶어 죽지 않도록 일자리를 알선해주기도 했다.
해서 메시앙 왕국은 그리 크지 않은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아 오랜 시간 동안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에스텔라가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딱 한 번 잠행을 나갔을 때. 그때 에스텔라는 웃음꽃 만발하던 백성들을 마주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구나. 나 역시 그런 왕이 되어야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물론, 지금은 전 변경백 가문을 재수사하는 것부터 해야겠지만.
한참을 달려 마차는 오르테아 광장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에스텔라는 손에 문서를 꼭 쥔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늘은 8년 전 일어난 선왕 벤자민 살인미수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요청할 예정이다. 또한 전 디에스 변경백 가문의 반역에 대해서도.
긴장한 듯 보이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이자크가 가만히 손을 잡았다. 에스텔라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아. 아직 손잡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에스텔라의 손에서 땀이 슬쩍 나기 시작했다.
“가볼까요?”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는 가만히 고개를 내려 에스텔라를 바라봤다. 에스텔라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정의를 심판하는 대천사는 한 손에는 저울을,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있다. 두 눈이 천으로 가려져 있는 거대한 조각상을 지나가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흰색과 검정색의 체스판처럼 나열되어 있는 대리석 바닥과 웅장한 기둥 네 개가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검찰청 한가운데에는 마찬가지로 앞에서 봤던 심판의 천사가 작게 조각되어 있었다. 접수창구로 가니 직원들이 두 사람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미 연회에 왔던 귀족들이 사방팔방 소문을 냈을 것이다.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등장만으로도 직원들은 왜 그들이 이곳에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공주가 연회에서 한 말이 진심이신가 봐. 그들 눈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재수사 요청을 하려고 하는데.”
직원은 에스텔라를 왼쪽 복도 끝으로 한참 안내했다. 왼쪽 복도에는 수많은 방이 있었는데, 그 방 앞에는 저마다 이름이 붙어있었다. 아마도 그 방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름일 것이다.
그들은 안내받은 방에 다다랐다.
데미안 허스트.
에스텔라는 어쩐지 그 이름이 낯익었다. 데미안 허스트? 분명 열아홉의 그녀는 모를 이름인데 입에 붙는 이름이다.
‘데미안. 나는 이제 사람이 무서워지려고 해.’
‘어떻게 그런 모습을 나는 몰랐던 걸까. 어떻게 그렇게 꽁꽁 숨기고 살았던 거지?‘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야. 그와 맞서서 이 모든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것.’
‘모든 건 내 탓이야. 내가 모든 걸 망치고 말았어.’
‘방법이 하나 있어. 있는데. 그래. 그래… 실수를 바로잡아야 해.’
에스텔라의 머릿속에 자신의 목소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를 알고 있나?
직원이 방문을 두드리고 안에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바로 마주하게 되는 그의 사무실 책상. 그리고 의자에 앉아 에스텔라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
데미안 허스트. 나는 이 남자를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