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에스텔라가 물었다.
“나, 몇 시간 동안 잔 거죠.”
목소리가 가라앉아 걸걸한 소리가 나왔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에게 물 한잔 건네며 몸을 부축해 앉혀줬다. 그가 착잡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한번 하더니 대답했다.
“나흘 동안 내리 잠만 잤습니다.”
나흘? 에스텔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흘 동안이나 잠만 잤다고? 물론 엄청 아팠던 기억은 있지만 그 정도로 아팠단 말이야? 에스텔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와, 미쳤네. 하며 물을 마셨다.
사막이 되어버린 식도에 물이 들어가자 갈증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에스텔라는 그대로 기다란 컵 안의 물을 한 번에 마셨다. 그래도 부족한 듯 제 목을 만지작대자 이자크가 다시 한번 물을 따라줬다. 에스텔라는 컵 안에 얼굴을 딱 붙이곤 허겁지겁 마시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천천히 마셔요. 물 많으니까.”
사레들린 에스텔라가 기침하자 이자크가 얼른 등을 두드려줬다.
“몸은, 몸은 이제 좀 괜찮습니까. 아직 열은 있는 것 같은데. 나흘 동안 먹질 못해 안 그래도 몸이 더 약해졌을 테니 얼른 다시 누우세요.”
과묵하던 사람이 말이 많아졌다. 이자크는 얼른 에스텔라의 등을 쓸어준 후 다시 눕혔다. 그런 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주고는 잠시 문가로 가 시녀들을 불렀다.
공주님께서 깨어나셨대! 문밖에서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달려가는 소리와 함께 선생님! 로엘 선생님! 하며 주치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자크는 다시 방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에스텔라는 눈만 도륵도륵 굴렸다. 어색한 분위기가 참기 어려웠다. 그러다 협탁과 베개 주변에 놓여있는 수많은 인형들을 보게 된다.
“이 인형들은 다 뭐예요?”
비스크 인형부터 시작해서 동물 인형까지. 온갖 인형들이 에스텔라 주변에 모여 있다. 인형에 파묻힌 에스텔라를 보며 이자크가 살풋 미소짓더니 이내 인형 하나를 들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엄마 외롭지 말라고.”
“응?”
“엄마 외롭지 말라고 쌍둥이들이 갖다놓은 겁니다.”
이자크가 건넨 코끼리 인형을 가만히 받아들어 쳐다봤다. 그러자 픽 웃음이 나왔다. 아직 아픈데, 안 아픈 기분이다. 갑자기 힘이 막 솟는 것 같다. 에스텔라는 실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인형들을 한 번씩 만지작댔다.
“꼬맹이들이 엄마 외로워할 것도 걱정해주고 말이야. 다 컸네. 다 컸어.”
격리된 엄마 지켜주겠다고 저들이 아끼던 인형들을 날마다 갖다 놨을 생각을 하니 고맙기도 하고, 또 얼마나 걱정했을지 미안하기도 하고. 코가 시큰거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아까 전 꿈속 영사기 속에서는 그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지 않는다.
에스텔라는 그 영상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했다. 그동안에 꾼 꿈들은 꿈의 일부만 기억나거나 아니면 아예 기억나지 않는 것이 태반이었는데. 이번 꿈은 지나치게 생생하다.
마지막 자신의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다.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에스텔라가 상념에 빠진 듯하자 혹여나 또 아픈 걸까 싶어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어디 불편한 데 있으면 말하세요.”
“아, 그건 아니고. 그냥… 이제는 진짜 괜찮아요. 살짝 정신이 몽롱한 정도니까.”
이자크는 계속해서 멍하니 있는 에스텔라를 주시했다.
때마침 주치의가 도착해 얼른 에스텔라를 검진시켰지만, 의사에게 진찰받는 와중에도 자꾸만 뭔가에 정신이 팔린 듯한 아내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열은 많이 내렸네요. 미열만 있으신 정도입니다. 음. 식도도 붓기가 가라앉았고요. 공주님. 전반적으로 느끼시기에 어떠십니까.”
“아직 피곤한 것만 빼면 괜찮아.”
“참 다행입니다. 고열이 계속되셔서 큰 병인가 하던 찰나였거든요.”
“그 정도였어? 난 기억이 없으니 몰랐네.”
“어휴. 그럼요. 부군께서 나흘 밤낮 동안 옆-”
주치의가 혀를 내두르며 말하려던 찰나, 이자크가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놓더니 위압감을 내뿜으며 말했다.
“진찰이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게. 자네도 대기하느라 피곤할 테니.”
“…옙.”
이자크와 무언의 대화를 나눈 듯한 주치의는 얼른 입을 다물고 합죽이가 된 양 진찰 도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흘 밤낮 동안 뭐. 옆에 있었다는 건가? 에스텔라는 눈치가 빠르다. 이자크는 아닌 척 시침 뗐지만, 에스텔라는 이미 아까 전부터 제 모든 행동 하나하나 눈여겨보는 이자크를 알고 있다.
밤낮으로 간호했다 이거지.
에스텔라가 슬쩍 미소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이자크는 자신이 한 짓을 들켰다는 걸 직감했다. 하. 그가 작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가 나가려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꼬맹이들이 들어왔다.
“엄마아!”
“우에엥! 어마아!”
품 안에 인형을 가득 들고 온 루스와 루시는 그대로 두다다 침대로 달려왔다. 키가 작아 에스텔라가 있는 높은 침대를 올라오려면 담을 넘듯이 낑낑대야 했다. 에스텔라는 마치 맨 처음 7년 후 미래에서 눈 떴을 때의 꼬맹이들과 지금의 꼬맹이들이 겹쳐 보였다.
“엄마!”
“보고 싶었더!”
낑낑대며 침대에 올라온 아이들이 에스텔라에게 와락 안겼다. 에스텔라는 힝, 히잉, 울먹이는 아이들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엄마, 이거. 이거 엄마 줄려고오….”
에스텔라에게 엉덩이 토닥임을 받으며 심신의 안정을 찾은 쌍둥이들이 슬그머니 저들 품에서 인형들을 꺼냈다. 이렇게 많은데 또? 에스텔라는 활짝 웃으며 인형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우리 루시랑 루스가 엄마한테 친구들 양보해준 덕에 엄마 하나도 안 외로웠어.”
“진짜루?”
“응! 그래서 엄마가 금방 나았나 봐. 엄마 이제 하나도 안 아파.”
“다행이다아!”
루시와 루스는 서로를 쳐다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에스텔라의 허리를 껴안고선 떨어질 생각 없어 보였다.
“루시. 루스. 아직 엄마 다 나은거 아니니까 무리하게 하지 말자. 이리 와.”
“히잉. 티러어-”
“괜찮아요 이자크. 나도 애들이랑 있고 싶어요.”
이자크는 혹여나 아이들이 매달려 힘이 들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에스텔라는 정말로 괜찮았다. 제 품 안에서 꼬물대는 이 어린것들을 느끼고 싶다. 그래. 얘들은 이렇게 살아있어. 고개를 들면 자신을 보고 있는 이자크도 보인다. 그래. 그도 저렇게 살아있잖아.
그래. 그건 그냥 악몽인 거야.
그때 부르튼 입술이 기억났다.
이 모든 건 일어났던 일이야.
에스텔라는 그 말을 하는 자신도 기억해냈다. 아이들을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각하지 못했으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본 이자크가 아이들을 건네 안고는 방을 나갔다.
자각하지 못했으니 왜 이자크가 자신과 아이들을 떨어뜨리는지도 에스텔라는 몰랐다. 한참 뒤 혼자 들어온 이자크에게 에스텔라가 물었다.
“왜 아이들을 데려갔어요? 애들은 지금 뭐 하는데요? 왜 나한테서 애들을-”
“에스텔라. 무슨 일입니까.”
“네?”
“왜 그렇게 손을 떠냐고요.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거 아닙니까?”
“내가 손을-”
내가 손을 떨긴 뭘 떨어요, 하며 내려다보는데 누가 봐도 덜덜 떨리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에스텔라는 주먹을 말아 쥐며 떨리는 손을 숨겼다.
“에스텔라.”
“몸은 정말 괜찮은데. 그… 악몽을 꿔서. 그래서 그런가 봐요. 진짜 생생한 악몽이었어서.”
악몽?
과연 악몽이 맞았을까.
그저 악몽에 불과했던 걸까. 에스텔라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직감이 그랬다. 정말로 일어났던 일이라면? 그랬던 거라면? 그럼 이자크와 쌍둥이들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다시 머리가 복잡해질 때쯤 이자크의 커다란 손이 에스텔라의 말아쥔 주먹을 감쌌다. 에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이자크를 쳐다봤다.
“어떤 악몽이었습니까.”
“이자크랑, 꼬맹이들이… 죽는 꿈이요.”
“그동안 꾼 악몽들이 죄다 그런 것들입니까?”
“아뇨. 이번이 처음이에요.”
“지금 내 체온 느껴지죠.”
이자크의 손은 따듯했다. 따듯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했다. 에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 아이들도 따듯했죠.”
에스텔라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다 살아있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의 말에 에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다 왈칵 눈물을 쏟았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그 끔찍한 장면들이 실현될까 봐. 아니라고, 살아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도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런데 이자크가 안심하라고 하자 신기하게도 떨렸던 손이 멈췄다.
그의 손은 강하게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자크는 오히려 자신이 두려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흘 내내 잠만 자는 당신이 이대로 깨어나지 않을까 봐. 창백해진 얼굴로 몸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가를 반복하는데 어찌 발 뻗고 잔단 말인가.
당신 죽는 줄 알았어. 나흘 동안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쓰러져있었어. 의사들은 병명을 모른다고 하지, 애들은 울지.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당신만 지켜보고 있었어.
열이 펄펄 끓다가도 어느 순간에선 입술까지 파래지는데 내가 뭘 해야 할까. 뭘 해주면 당신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서 그냥 보고만 있었어.
그 말들을 모두 함축한 것이 안심하세요, 였다.
그건 에스텔라뿐만 아니라 자신한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안도한 것인지 눈물을 흘리며 제 품에 기대는 에스텔라를 내려다봤다. 이자크의 반대쪽 손이 어설프게 에스텔라의 어깨를 감쌌다.
이자크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 나는 아직도 이 여자를….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이자크는 깨닫고 말았다.
*
에스텔라의 몸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몽롱하던 정신은 이제 개운해졌고 무거운 바위를 올려놓은 것 같은 몸은 이제 가벼워졌다. 흙모래를 잔뜩 부어놓은 것처럼 메마르고 따갑고 건조했던 목은 이제 육류부터 채소까지 남김없이 흡입했으며, 가라앉았던 목소리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마냥 기쁘지 않다.
오늘이 바로 로도니아 살롱의 부부 동반 연회가 열리는 날이니까.
시녀 중 하나가 아침 식사를 들고 와서는 눈치도 없이 아, 공주님 결국 연회는 못 가시겠네요. 라고 말함으로써 에스텔라는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는 걸 알아버리고 말았다.
입을 잘못 놀린 시녀는 곧바로 멜리사에게 끌려가 욕을 한 바가지 먹었겠지만, 에스텔라는 멜리사를 말릴 힘도 없다.
아.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니.
에스텔라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푹푹 한숨만 내쉬었다.
“공주님. 그래도 다른 연회들 많잖아요. 공주님이 독감 걸려서 못 오신다는 거 다 알 겁니다. 네?”
“그래….”
하지만 누군가는 과연 공주님이 독감에 걸렸을까? 하며 비아냥거리겠지. 그러면서 또 다들 나와 이자크의 이혼 조정 기간에 대해 말을 꺼낼 거야. 귀족들의 뒷담화는 눈에 뻔히 보인다. 궁정 생활을 하는 동안 봐 왔던 것이 그런 것들뿐이니까.
오늘은 누구를 안줏거리 삼아 뒷담화할지. 그런 걸로 재미 보는 사람들이니까.
에스텔라는 결국 포크를 내려놨다.
“그만 물리거라. 누워 있을래.”
“네? 세상에, 이게 다 드신 거예요?”
“응.”
“아직 입맛이 안 돌아오셨나. 드신 게 거의 없으신데….”
“입맛 없는 거 같으니까 들고 나가봐, 멜리사….”
“공주님….”
“에휴….”
결국 멜리사는 거의 건들지 않은 아침 식사를 들고 방을 나왔다. 내 릴리안 이년을 아주 경을 쳐야지, 아휴 고년의 주둥아리 때문에 공주님이! 한껏 욕을 장전하고 나가려는데 이자크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멜리사는 얼른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였다. 이자크는 그냥 지나가려다 새것 그대로인 에스텔라의 식사를 쳐다보곤 멜리사를 불렀다.
“에스텔라가 아침을 먹은 건가, 그게?”
“아. 그것이. 공주님께서 입맛이 없으시다 하여….”
“입맛이 없어? 역시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건가. 주치의를 불러 다시 진찰을-”
“그것이 아니라 사실….”
시녀 멜리사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게 손짓을 했다. 이자크가 고개를 갸웃대다 잠시 몸을 수그렸다. 멜리사는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작게 오늘 아침의 일을 고했다.
“-해서. 공주님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뿐입니다. 몸은 정말 건강하십니다. 릴리안 고년은 제가 아주 혼쭐을 내겠습니다. 이자크 님께서는 저희 공주님 기분 좀 풀어주셔요. 그렇게나 고대했던 연회다 보니 아마 더 상심이 크신 것 같습니다.”
“…음식들은 다 식었나?”
“아뇨. 아직 식지도 않은 음식들입니다.”
“이리 주게나.”
“예? 아, 네.”
이자크는 멜리사가 들고 있던 트레이를 넘겨받고는 에스텔라가 요양하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멜리사는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물론. 일단 주둥이를 잘못 놀린 릴리안 먼저 아작 내고 말이다.
멜리사가 콧김을 내뿜으며 릴리안이 있는 곳으로 가던 때, 이자크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스텔라는 문을 등진 채로 새우처럼 옆으로 누워 있었다.
“나 혼자 있고 싶다니까아… 입맛 없다고오….”
“진짜 입맛 없습니까? 주방장이 당신 좋아하는 거 죄다 만들었는데.”
이자크의 목소리에 에스텔라가 토끼처럼 귀를 쫑긋대다 힘없이 뒤돌아봤다.
“…입맛 없어요.”
“왜요.”
“그냥요… 말 안 하고 싶어요….”
차마 연회를 못 가서 실망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애도 아니고 연회를 못 가서 단식 투쟁이라도 하는 거냐는 말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본인이 생각해도 연회를 못 가서 서러운 것이 창피하긴 했다.
“그래도 식사를 해야 약을 먹죠. 약을 먹어야 몸이 완전히 쾌차하고요.”
“쾌차를 하면 뭐 하나… 연회도 못 가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겠지….”
무의식적으로 신세 한탄을 하고 만 에스텔라가 화들짝 놀라며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다가 이내 자포자기한 듯 그래요, 그래. 그게 서럽다고요. 하며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내리곤 중얼거렸다.
이자크는 그 모습이 삐친 루시와 너무나도 똑같아 필사적으로 웃음소리를 죽였다.
“그래도 먹어야 합니다.”
“아, 싫다니깐요….”
“자. 아.”
“…응?”
“아 하세요. 먹여줄 테니까.”
“…에?”
“뭡니까. 설마 쌍둥이들 먹일 때처럼 동요라도 불러줄까요. 그러면 먹겠습니까.”
나흘 동안 아무것도 안 먹은 사람이 입맛이 없을 리가 없다. 만에 하나 입맛이 없다 한들 살기 위해서라도 꼭 먹어야 한다. 어젯밤 이자크는 파자마를 입고 꿈나라에 갔던 주방장을 친히 깨워 오늘 아침 식사 메뉴를 직접 선별했다.
이자크의 특별주문을 접수한 주방장과 시종들이 새벽시장에 달려가 가장 신선한 재료만 엄선해서 만든 요리다.
쌍둥이들도 밥 안 먹겠다고 고집부린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럴 때마다 이자크는 수프를 떠서 날아다니는 새 소리를 내며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해 먹이곤 했다.
자. 마녀 빗자루가 날아간다. 슈우웅- 하면 쌍둥이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스푼을 보며 꺄르르 웃다가 제 입으로 스푼을 넣어달라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곤 했다.
이자크는 에스텔라에게 그대로 똑같이 했다.
“자. 마녀 빗자루가 날아갑니다. 입 벌리세요. 슈웅.”
“…아.”
에스텔라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양송이 스프를 받아먹었다. 따듯한 수프에서는 신선한 양송이 냄새와 고소한 향기가 물씬 올라왔다. 이자크가 자신을 애 대하듯 대하니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뭔가 응석 부리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스프를 다 먹을 때까지 손수 먹여줬다. 에스텔라는 그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라 당황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그가 스푼을 입술에 댈 때마다 착실히 입을 벌리긴 했다.
스프를 다 먹으니 이번엔 얇게 썬 고기와 채소를 곁들어 입에 넣어준다. 이자크는 무심한 얼굴로 그 짓을 반복했다. 입맛 없다고, 안 먹겠다고 고집 피우느라 음식 가득했던 그릇에 어느새 바닥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에스텔라에게 따듯하게 데운 탕약을 마시게 하고 나서야 이자크의 에스텔라 밥 먹이기 작전이 끝이 났다.
에스텔라의 얼굴은 발그레했다. 그 와중에 부끄럽긴 했나 보다.
“잘했습니다.”
이자크가 그리 말하며 에스텔라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트레이를 들고 방을 나갔다. 에스텔라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왜 이러지. 왜 갑자기 밥까지 먹여주고 머리를 쓰다듬고 가는 거지.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그에게 일어난 건지 에스텔라는 알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내가 많이 아프긴 아팠나 보네. 그리 생각하며 주섬주섬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방문이 똑똑 두들겼다. 곧장 문이 열렸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에스텔라가 몸을 수그려 저 아래를 쳐다보니 쌍둥이들이 문 뒤에 숨어 에스텔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모해?”
“모해에?”
반짝거리는 눈으로 에스텔라에게 물어보는 아이들의 얼굴에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 에스텔라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팔을 벌리자 꼬맹이들이 두다다 달려와 얼른 품에 안겼다.
“요 녀석들 왜 이렇게 신이 났지? 응? 무슨 꿍꿍이길래 이런 개구진 미소를 하고 있는 거지이-?”
에스텔라가 장난스레 아이들을 간지럽히며 묻자 루시와 루스가 꺄르륵 웃으며 자지러졌다.
“비밀! 비밀이야! 그치이- 비밀이랬지이-!“
“비밀이랬지이-”
아이들은 조그마한 단풍 손으로 제 입을 꽉 틀어막으며 배시시 미소지었다. 에스텔라만 쏙 빼놓은 채 저들끼리 비밀이라며 입을 막는 모습에 에스텔라가 괜히 오기가 생겼다.
“뭐가 비밀인데. 응?”
“비밀인 게 비밀이지!”
쌍둥이들은 절대 비밀이며, 뭐가 비밀인지도 비밀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광대들이 들썩이는 걸 보면 장난이라도 치려는 걸까.
루스는 말하고 싶어 죽겠는지 제 입을 틀어막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루시가 루스, 절대 안 돼! 절대 비밀이랬어! 하며 단호하게 루스를 다그쳤다.
“알아. 아는데에, 말하고 싶단 말이야.”
“안 된다구 해찌. 너 그럼 나중에 아빠한테 혼나.”
“힝. 말하고 싶은데에.”
“그럼 우리 힌트만 조금 주까?”
저들끼리 힌트를 주네, 마네 하며 에스텔라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에스텔라가 얼른 궁금해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아, 엄마 너무 궁금해. 조금만 알려주라. 응?”
“아이 안 되는데. 안 된다구 했는데에-”
“아이 조금만 알려 줘라 꼬맹이들아-”
에스텔라가 애원하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루시와 루스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씩 웃으며 입을 움찔대기 시작했다. 에스텔라는 그렇게까지 궁금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청 궁금한 척을 하며 애원해야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매달리자 결국 입이 근질근질했던 루스가 먼저 말하고 말았다.
“어어- 압빠가- 선물을 준비해떠.”
“선물? 누구한테?”
“엄마한테!”
이자크가, 나한테? 선물을? 어떤 거를? 왜? 에스텔라의 머릿속은 무슨 선물을 받게 될지에 대한 설렘보다 온통 물음표였다. 갑자기 웬 선물? 오늘 내 생일이던가? 내 생일은 아직 한참 멀었는데?
아이들은 에스텔라가 그러든 말든 저들이 더 신나 침대 위에서 방방 뛰기도 했다.
“선물! 선물!”
“엄마! 선물! 엄마! 선물!”
결국 멜리사가 달려와 쌍둥이들을 양쪽 허리에 하나씩 끼고 돌아갔다. 다시 혼자 남게 된 에스텔라는 여전히 물음표 가득한 상태였다. 이자크가 나한테 선물을 준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으나 뒤늦게서야 설레이기 시작했다. 뭘 줄까.
“설마 이혼서류 도장은 아니겠지…?”
아무튼 간에 쌍둥이들이 말한 선물은 대체 언제쯤 오는 건지 에스텔라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물은 오지 않았다. 쌍둥이들이 잘못 듣고 전한 건가? 그냥 장난인 건가? 한참 기다리다 졸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오후가 되었다.
이번에도 이자크가 점심을 들고 왔다. 에스텔라는 모를 테지만 점심은 물론 저녁 식단까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로 이뤄진 이자크의 특별주문이다.
이자크가 들어오자 에스텔라의 눈이 반짝였다. 슬쩍 그의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선물을 가져왔나? 어디다 숨긴 건가? 무슨 선물이지? 하지만 이자크의 등 뒤에도, 주변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리 두리번거립니까?”
“아, 아뇨. 그냥. 뭐 두고 온 게 있지 않나 싶어서….”
이자크는 그런 거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역시 쌍둥이들이 엄마를 놀린 건가? 에스텔라는 괜히 기대한 건가 싶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애들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어버렸다. 에스텔라는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해? 오늘은 내 생일도 아니고. 라고 아주 작게 중얼거리며 그가 건넨 점심 식사를 받았다.
이자크는 이번에도 에스텔라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고 옆을 지켰다. 에스텔라는 아까처럼 이자크에게 먹여달라 해볼까 싶어 슬쩍 그를 쳐다봤지만, 뭔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거 같아 저도 모르게 열심히 식사를 하고 약까지 깨끗이 먹고 말았다.
사실 이자크의 무시무시한 눈빛은 에스텔라가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이따금씩 눈웃음으로 변하기도 했다.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왜 두리번거리는지, 왜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거야 꼬맹이들이 그새 에스텔라에게 가서 말해버렸다는 걸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압빠. 우리가 엄마한테 쪼꼼 힌트줘떠.’
‘근데에 다는 말 안해떠!’
그게 무슨 소리니, 루시, 루스? 이자크는 멜리사의 양 허리에 끼어 에스텔라가 있는 방에 강제 퇴장당한 아이들을 받아들며 물었다.
시녀 멜리사가 말했다.
‘아가씨랑 도련님께서 공주님 침대에서 어찌나 방방 뛰시던지요. 선물! 선물! 이러시면서.’
그제야 이 쬐깐한 것들이 눈치가 매우 빠르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아빠가 엄마 선물 준비한 거 맞자나. 그티? 그치이?’
‘나랑 루시가 봤는데에요, 선물 맞지요오-’
‘아빠가 막, 막 드레스랑, 목꺼리랑- 막 준비해놨잖아.’
‘우리 다 들어쩌.’
쌍둥이들은 다 알고 있다며, 우리도 엄마한테 선물 줄래! 하며 이자크에게 매달렸다. 아빠의 굳건한 양쪽 다리에 하나씩 대롱대롱 매달려서는 이자크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런. 에스텔라가 또 기대해버리면 어쩌나.
딱히 선물이라 부르기 뭐한 것이었다. 그저 몸이 쾌차한 걸 축하하는 정도의 의미에서 준비한 거다. 그렇게나 아쉬워하니까. 너무 실망해하니까. 그냥,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게 건강에도 좋을 거 같아서. 그 외에는 진짜 별 이유 없다.
‘압빠. 엄마랑 다녀올 거야?‘
루시의 말에 이자크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응. 그동안 유모 말 잘 듣고 있을 수 있지?’
‘우리도 따라갈래.’
‘그건 다음에. 아직 루스 미열이 다 안 떨어졌잖아.’
‘치이….’
그럼 다음번에는 꼭 네 명 다 같이 참석하자며 루시와 루스에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다.
“푸흐….”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무슨 선물을 준비했을까 그의 눈치를 보며 기대하는 모습에 이자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실망한 눈썹이 아래로 축 내려가는 모습도, 선물 준비한 걸 알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는 것도, 아이들이 자신을 놀린 거라 생각한 건지 빵빵해진 볼도 귀엽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었다.
귀엽긴 무슨.
그러다가 다시 유해졌다.
아니. 귀엽긴 하지. 애들이랑 똑같다니까.
이자크는 괜히 에스텔라를 놀리고 싶어졌다.
“뭐 기다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네?”
“아니 자꾸 뭘 찾는 것 같아서.”
“아뇨. 아무것도요.”
에스텔라는 괜히 헛기침하며 식사를 마저 했다. 그러다가도 정말 선물이 없는 건가. 우리 애들이 거짓말할 애들은 아닌데. 생각하며 이자크를 떠봤다.
“근데요 이자크, 혹시 우리 결혼기념일이나 그런 게 가까운 시일 내로 있나요?”
“저희 결혼은 12월에 했습니다.”
“아. 12월. 멀었네요. 두 달은 남았네. 하하. 저기, 혹시 내 생일은 알아요?“
“알죠. 5월이잖아요.”
“알고 있네.”
“아. 맞다.”
이자크가 그때 뭔가를 잊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에스텔라의 눈이 빛났다. 선물인가?!
“잊을 뻔했네요.”
“네? 뭔데요? 응?”
“드릴 게 있습니다.”
그는 제 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에스텔라의 표정이 얼마나 기대감에 찬 얼굴인지, 이자크는 그런 표정은 또 처음보는 것 같아 겨우겨우 웃음을 참았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에스텔라에게 건냈다. 에스텔라는 쏜살같이 그걸 받아서는 포장지를 뜯었다.
기대 만발하던 얼굴에 의문이 하나 뜨더니 이내 당혹감으로 변했다. 실시간으로 휙휙 변하는 에스텔라의 표정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게….”
에스텔라는 포장지 안의 물건을 들어 올렸다. 요상한 환들이 들어있는 통.
이게… 뭐야?
이자크는 시침 뚝 떼고 태연하게 말했다.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이게 뭔데요?”
“주치의가 새로 공수해온 약입니다.”
“…약?”
“불면증에 좋다길래.”
“…아.”
에스텔라는 가만히 그 약을 쳐다봤다. 실망한 건가?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으려 했다. 분명 대단한 거라 생각했는데 분위기 없는 약 선물에 당황도 하겠지. 애써 고마워하겠고.
“고마워요, 이자크. 정말로.”
그런데 에스텔라는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이자크였다. 저렇게까지 환한 웃음을 보일 물건이었던가. 그건 연기가 아니었다. 에스텔라는 정말로 행복한 듯 약통을 손에 꼭 쥔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나 걱정해준 거죠? 그쵸?”
“….”
벙찐 것은 오히려 이자크.
당황한 것도 오히려 이자크.
할 말을 잃은 것도 오히려 이자크.
“되게 기분 좋다. 날 위해서, 주치의한테 약을 주문했다는 거잖아. 그것도 내가 걱정돼서. 그쵸. 나 걱정한 거죠. 나 신경 쓰이는 거죠? 그쵸? 솔직히 다 말해봐요. 나 아팠을 때도 이자크가 밤새 간호해줬죠? 나 다 알아.”
“….”
“부끄러워하기는. 진짜! 아휴, 난 선물 이대로 못 받는 줄 알았네. 흐흐. 사실 우리 꼬맹이들이 아까 와서 다 말해주고 갔거든요. 아빠가 엄마한테 선물 준대- 하고. 우리 꼬맹이들 다 내 편이거든요.”
정말 기분이 좋은지 에스텔라가 말이 많아졌다. 괜히 약통을 흔들자 안에 들은 환이 잘그락 거리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도 듣기 좋다며 에스텔라가 콧노래를 불렀다.
이자크는 괜히 머쓱해졌다. 저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정말 몰랐다. 이게 선물이야? 하며 당황할 줄 알았던 얼굴에 행복감과 수줍이 들어서자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만히 에스텔라를 보던 이자크가 결국 픽,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걱정한 거 맞습니다.”
“…바로 인정할 줄은 몰랐네….”
“그러니까 아프지 좀 마세요.”
에스텔라는 어쩐지 인정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이자크를 힐끔 쳐다봤다. 이 남자가 저번부터 왜 이러지?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봅니까?”
“아니. 그게. 이상하잖아요. 보통의 이자크라면 완전 이런 눈으로, 당신이 잠 못 자서 예민해지면 또 애들한테 화살이 향할까 봐 미리 조치를 취한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할 텐데.”
못된 말만 내뱉을 때 이자크는 표정이 한결같아진다. 에스텔라는 그의 표정을 따라 하기 위해 검지로 제 눈을 쫙 옆으로 찢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그렇게 생겼어요?”
“이거보단 훨-씬 잘생겼지만. 보통은 이렇게 매서운 눈으로 말하잖아요.”
“지금은요.”
“지금은 안 그런데. 지금은 엄청 잘생기게 웃고 있는데요. 뭐예요. 왜, 왜 갑자기 그런 눈으로 웃어요?”
에스텔라는 이유 없이 슬슬 웃고 있는 이자크가 불안해졌다. 왜 갑자기 웃는 건데? 내가 웃긴 말을 했던가? 아니, 이 남자 설마 방법을 바꿔서 잘 대해주는 척하다가 뒤통수치려는 건가? 그럼 내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포기할까 봐? 그런 건가?
“그 약 받은 게 그렇게 기뻐요?”
이자크가 다정하게 물었다. 에스텔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감싸 제 품에 안는다.
“당연하죠. 찬바람 쌩쌩 불던 남편이 나 걱정해줘서 준 약인데.”
“선물이라고 하면 보통 화려하고 예쁜 액세서리나 꽃 같은 거 기대하지 않나.”
“이자크한테 선물 받으면 뭔들 안 좋을까. 그렇다고 쓰레기는 주지 말고요.”
“내가 왜 에스텔라한테 쓰레기를 줍니까.”
“뭐, 쓰레기통한테 쓰레기 주는 겁니다. 하면서 말할 수도 있죠.”
“그런 말 안 해요.”
“진짜요?”
“그럼요. 자기 전에 약 드세요. 그거 효과 좋다고 하니까.”
“네. 고마워요. 그런데- 아직 점심인데. 오늘 저녁때는 안 올 것처럼 말하네.”
“저녁에 제가 잠시 다녀와야 할 데가 있어서요.”
“어디요?”
“말 안 해줄 겁니다.”
“다른 여자 만나는 건 아니죠?”
이자크는 어깨만 으쓱이곤 방을 나왔다. 뒤에서 에스텔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다른 여자 만나는 거면 진짜 안 돼요! 그건 반칙이야! 저주할 거야! 이자크는 결국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하여튼 돌려 말하는 걸 못 하는 여자다.
에스텔라가 약을 먹고 자는 동안 이자크는 외출 준비를 했다. 외투로 갈아입는 아빠의 모습을 꽃받침을 한 채로 소파에 누워 바라보고 있던 쌍둥이들이 물었다.
“엄마가 내일 엄청 좋아하겠따.”
“엄마도 우리처럼 막 침대에서 뛸걸.”
이자크는 그런 아이들의 볼을 한 번씩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번엔 진짜 비밀로 해야 해. 너희.”
“알게떠 아빠, 우리만 믿어!”
“엄마 심심하면 우리가 잘 놀아주고 이쓸게!”
과연 우리 귀여운 악동들이 비밀을 잘 지켜줄지는 모르겠다만.
“그래. 엄마 심심하지 않게 인형들도 갖다 주고.”
“아빠. 이제 엄마 안 미오?”
생각보다 묵직한 질문이 들어왔다. 루시의 질문에 루스도 가만히 아빠의 눈치를 살피며 루시의 손을 잡았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고 아는 것도 많다. 그리고 직설적이지.
“아빠가 엄마를 미워하는 것 같았어?”
“웅.”
“아니야. 아빠는 엄마를 미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그러니까 루시랑 루스도 그런 걱정하지 마.”
“웅!”
애들 앞에서는 거짓말이 안 통하는 걸 인정해야 한다. 어차피 들킬 마음, 그냥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솔직해져 보려고. 그게 나중에 덜 후회되지 않을까. 이자크가 그리 생각했다.
*
이자크는 정말 그날 저녁 내내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몸도 좀 괜찮아졌고, 저택 여기저기 돌아다녀봤지만 이자크는 저택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일이 있어서 나간 건가?”
하지만 저택의 사용인들 중 그 누구도 이자크가 뭘 하러, 누굴 만나러 나갔는지는 모른다 대답했다. 설마 진짜 다른 여자는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날 위해 약까지 준비해줬는데.
“엄마! 심심하디! 우리가 놀아줄게!”
심란한 엄마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쌍둥이들이 에스텔라와 함께 저택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았다. 밤이 깊어졌고 결국 에스텔라가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도 이자크는 오지 않았다.
주치의가 열을 체크하기 위해 잠시 들렀다.
“로먼. 도대체 이자크가 어딜 갔을까?”
“그거야 제가 알 길이 없지요. 일단 열 먼저 재보겠습니다.”
“설마 바람은 아니겠지?”
“목이 부었나 살펴볼게요-”
“진짜 다른 여자가 있는 거면 어떡해?”
“목은 안 부었고요, 미열도 없네요. 이만하면 거의 완치라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아이참, 로먼! 대답 좀 해줘 봐!”
“이 늙은이가 젊은 부부 일을 어찌 안다고요. 공주님이 제일 신경 쓰셔야 할 것은요, 약을 꼬박꼬박 먹는 것뿐입니다요.”
“다 나았다면서.”
“겉보기엔 그런데 혹시 모르니까 일주일간은 계속 무리하지 마시고 약 드셔야 해요.”
주치의는 에스텔라의 고민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진찰이 끝나자 새 약을 조제해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그 뒤 미엘라가 들어와 에스텔라의 침구를 따듯하게 데워줬고, 에스텔라는 제 고민을 미엘라에게 털어놨다.
“미엘라, 네가 봤을 땐 어떤 것 같니. 이자크가 훈련 때문에 나간 거 아니잖아. 그럼 달리 무슨 일이 있어 점심쯔음 나가 아직까지 안 돌아오는 거야?”
“침구 다 데워졌습니다, 공주님. 걱정 마시고 푹 잠 주무셔요.”
“이자크 진짜 아직도 안 돌아왔어?”
“예. 많이 바쁘신가 보죠.”
“씨이… 나 혼자 심각한 거야? 너희 내가 이혼하면 좋겠어? 응?!”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마시고요, 공주님. 약 드시고 푹- 주무셔요.”
이것들이 다들 하나같이 내 진지한 고민은 들어주지도 않고. 다들 내 말에 끔뻑 죽었을 때는 언제고! 에스텔라는 자신의 진지한 고민에 관심도 안 가져주는 주치의와 미엘라를 비롯해 모든 시종이 야속해졌다.
에스텔라는 이불을 팡팡 차며 혼자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내일 있을 연회 못 가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이자크는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씨이, 내가 그렇게 노력했는데. … 부족했나? 더 꽃을 보냈어야 했나? 아니, 이만하면 충분한 거 아닌가? 이씨….”
오른쪽으로 누워도 보고 왼쪽으로 누워도 보고. 다시 일어나 이자크가 선물해준 약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짓고 누웠다가 또 아직도 안 들어온 건가 싶어 시녀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아홉 시가 되었는데도 안 들어와!
“됐어. 기다리지 마. 잠이나 자자. 이자크가 준 약 먹고 숙면을 취하는 거야.”
혼자 중얼거리다가 괜히 협탁 안에 넣어둔 로도니아 살롱의 초대장을 꺼내 펼쳐봤다.
“어차피 못 갈 거 미련 갖지 말자.”
몸도 안 좋은데, 어차피 연회야 많잖아. 이 시기쯤이면 왕궁연회도 열릴 테고. 그래. 그때 가서 다른 귀족들한테 짜잔 하고 보여줘야지. 지금은 나 몸도 안 좋고 하니까. 물론, 다 나았지만. 그래도 아직 옷도 없고 준비도 못 했으니까. 응. 이자크도 분명 무리하지 말라고 말릴 거였을 거야.
무릇 연회를 가기 위해서는 필수로 거쳐야 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시즌마다 유행하는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둘러보며 연회 전 설렘을 만끽하는 것 아닌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연회에 초대된 이들이라면 당일 날 갈 연회보다 의상과 액세서리 등을 고르는 것의 설렘을 더 즐길 것이다.
에스텔라는 특히나 그걸 더 즐기는 사람이었다. 메시앙의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이었으며 지금도 그건 변치 않으니까. 누군가는 사치를 즐긴다 욕을 할지 모르겠다만, 귀족들에게 사치는 경제 순환에 매우 도움 되는 것이다. 에스텔라는 적정 수준의 사치를 즐겨 하는 사람이기에 그녀에게 있어 연회 전 준비 기간을 거치지 못한 것은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연회는 안 가도 괜찮아. 응. 하나도 안 아쉽다고.”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에스텔라는 잠이 들었다.
이자크가 선물해준 약만으로도 연회 이상의 것을 얻었노라고, 에스텔라는 그리 생각했다.
*
그날따라 유난히 방 안에 햇살이 많이 들어왔다. 기분 탓인가. 어째 양 옆구리가 과하게 뜨듯한 기분이라 에스텔라는 몸을 꾸물대며 이불을 들췄다.
“까꿍!”
“부!”
“루시? 루스?“
이불 안에는 꼬물대던 루시와 루스가 에스텔라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깜짝 놀래켰다. 꼬맹이들의 작전은 성공한 건지, 아직 잠에서 다 깨지 못해 몽롱한 에스텔라가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너희 언제 방에 들어온 거니?”
“엄마! 얼른 앞을 봐!”
루시와 루스가 얼른 이불을 아래로 내리며 앞을 가리켰다. 아이들의 손가락 끝은 뭔가를 가리켰다. 에스텔라는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눈을 비볐다.
“저게 다 뭐야?”
아직 꿈속인 건가 싶어 에스텔라가 눈만 깜빡였다. 아직 무슨 일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저것들이 왜 지금 이 방에 있는 거지?
열댓 개는 되어 보이는 구두들이 화려한 포장 박스 위에 올려져 있다.
이게 다 뭐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도 전에 방문이 또 열렸다. 널찍한 행거에 온갖 화려한 드레스들이 잔뜩 걸려 방안에 들어왔다. 행거를 나르던 시녀들이 에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미엘라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고개를 끄덕이는 거지?
성인 남자가 양팔을 길게 벌린 것 같은 행거 네 개 정도가 들어오고 난 뒤, 매분구들이 방 안에 들어왔다. 그들은 에스텔라를 보고는 한 번씩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자신들이 들여온 화장품과 액세서리들을 진열하기 시작했다.
잠옷 차림에 씻지도 못한 에스텔라는 방을 가득 메운 옷과 신발, 액세서리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기다리는 매분구들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이뿌다!”
“우웅, 나는 이게 더 이뿐데?”
침대에서 달려나간 루시와 루스는 드레스들을 펄럭이며 어느 것이 엄마에게 어울리지 서로 아웅대며 다퉜다.
“공주님! 뭐 하셔요, 얼른 준비하셔야죠!”
미엘라가 아직 얼이 빠져 있는 에스텔라의 눈앞에 손을 흔들며 말했다.
“무슨 준비?”
“아이참, 공주님도….”
다시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녀들이 커다란 오크 욕조 통을 들고 왔다. 저걸 왜 여기에? 저건 에스텔라가 특별한 날에만 향유와 꽃잎을 풀어 목욕하는 고급 욕조 통 아니던가!
“오늘 연회 가셔야죠!”
“응?!”
“로도니아 살롱 연회요! 시간이 없다구요, 얼른! 얼른!”
미엘라의 재촉이 재밌었는지 꼬맹이들도 달려와 에스텔라의 손을 잡아당겼다.
“엄마! 얼른! 얼른 준비해야지이!”
“안 그러면 지각한다요-!”
“나 연회 가?!”
에스텔라의 눈이 더 커졌다.
“얼른 준비 안 하면 늦습니다.”
문가로 홱 고개를 돌리자 이자크가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 셔츠를 입고 이제 막 씻은 건지 머리칼에 물기가 맺혀있는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나, 아니, 진짜 연회가요?”
이자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루?”
에스텔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짜? 진짜루요? 거짓말 아니고? 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루시와 루스가 아이 진짜라니까! 하며 에스텔라의 손을 잡아당겼다.
“꺄악! 연회 간다!”
신나서 펄쩍 튕겨 올라가듯 일어난 에스텔라가 바닥에서 방방 뛰었다. 쌍둥이들은 엄마가 방방 뛰니 저들도 신나서 옆에서 와! 엄마 연회 간다! 하며 방방 뛰었고, 그 광경을 목격한 유모와 집사 할아범은 공주님 제발 체통 좀…. 하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크는 그런 그들에게 내버려 두라며 피식 웃고는 마저 준비하러 그의 방으로 향했다.
미니 파티션을 치고 오크 나무 욕조 안에 들어갔다. 미엘라는 향유와 꽃잎을 듬뿍 뿌렸다.
“향이 너무 좋다. 처음 맡아보는 향인데, 새로 산 거니?”
“오늘 아침에 새로 들여온 향유에요. 수선화 향을 재현한 거라는데, 너무 좋죠? 장미꽃 대신에 일부러 수선화 꽃을 따왔어요.”
“응. 너무 좋다.”
“기분 좋으셔요, 공주님?”
“당연하지. 사실 나 엄청 속상했걸랑. 몸 아픈 거 서러운 것도 서러운 거지만, 내가 이자크랑 부부연회를 얼마나 가고 싶었는데. 거긴 일반적인 왕궁 연회랑 완전 다르잖아. 그치.”
“그럼요. 저도 잘 알죠. 공주님이 그 연회를 얼마나 가고 싶어 했는지 이 저택의 모두가 잘 알죠.”
“어떻게 된 거야? 드레스들이랑 매분구들. 하루 만에 어떻게 구한 거지?”
“이자크 님께서 손 좀 쓰셨죠.”
미엘라가 흐뭇하게 웃으며 에스텔라의 몸을 닦아줬다. 미엘라에게 몸을 맡긴 채 느긋하게 향기를 음미하던 에스텔라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자크가?”
“어머, 그럼 이자크 님 말고 누가 이런 걸 다 준비하시겠어요?”
“그렇긴 한데, 이자크가 왜?”
“아이참, 공주님도. 그게 다 이자크 님이 공주님께 마음을 여셨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에스텔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안 그래도 밝아진 얼굴이 더 환해지니 마치 별이 기뻐 빛을 내는 것 같았다.
“그런 건가?”
“그럼요. 어제 밤늦게까지 나가셔서 이국에서 돌아오던 디자이너 직접 데려오셨잖아요. 게다가 매분구들도 웃돈까지 줘가면서 죄다 모아오시고.”
“진짜?”
“저희도 얼마나 놀랐는데요. 보통 연회 전날에는 매분구며 드레스들이며 모두 동이 나잖아요. 근데도 그렇게 예쁜 것들만 싹 골라온 거 보면….”
연회 전날에는 준비를 할 수 없다. 푸른 망토를 쓴 요정 할머니가 나타나 비비디바비디 부! 마법봉을 휘두르기 전까지는 그 어떠한 것도 구하기가 어렵다. 돈 많은 귀족은 저들이 다 입을 것도 아니면서 고가의 액세서리나 드레스들을 모두 다 사들인다.
해서 연회가 열리는 기간만 되면, 특히나 로도니아 살롱의 부부 연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궁 연회까지 같이 열리는 일명 ‘메시앙 소비의 기간’이 지나고 나면 한동안 매분구들과 디자이너들은 등 따시게 지낼 수 있다.
연회라는 게 단순히 놀러가는 게 아니지 않나. 귀족들은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면서도 끊임없이 서로 경쟁하고, 서로를 가늠하기 위해 가는 것이다. 어느 가문과 친분을 쌓을지, 어느 가문을 적당히 무시할지, 이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을지, 이 가문과의 동맹을 파기할지까지.
해서 연회는 ‘우리 가문이 아직도 이만큼 건사하다’를 알리러 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재력을 가장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의상과 액세서리. 그리고 부부가 보여주는 연기까지.
“게다가 가브리엘 디자이너의 드레스는 줄을 서도 못 받잖아요? 그 디자이너는 주고 싶은 사람만 드레스를 주니까. 근데 그 디자이너가 공주님 드레스를 죄다 골라왔대요.”
“가브리엘.”
“네. 그 가브리엘이요. 그 가브리엘은 제 후원자가 허락한 사람 드레스만 만들잖아요.”
미엘라는 원래도 말이 많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말이 많았다. 아마도 에스텔라를 위해 이 모든 걸 준비한 이자크의 모습에 단단히 감동 받은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가시는 거네요, 부부 연회요.”
“예전에도 간 적 있어?”
“참, 공주님은 기억이 안 나시겠지. 네. 결혼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도니아 살롱에 초대되셔서 두 분이서 가셨었죠. 그때가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려요.”
“어땠어?”
“두 분 다 어찌나 아름답고 잘 어울리시던지. 아직 어리셨던 때라 얼굴에 풋풋함도 남아있고. 저랑 유모랑 집사 영감님이랑 셋이서 부여잡고 울었었다니까요. 이자크 님이랑 공주님이 너무 행복해보여서 저희도 행복하다고 막 그러면서.”
미엘라는 아직도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다른 날은 긴가민가해도, 그날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에스텔라는 라일락 같은 연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이자크는 남색의 수트를 입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자크는 특히 에스텔라를 보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었다. 저택의 사용인들 눈에도 둘은 서로를 진득히 사랑하는 것이 보였을 정도였다.
갓 결혼한 어린 부부의 부부동반 연회.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아직 부부라 하기에도 뭣한 부끄러움과 어색함 설렘이 남아있던 때.
스물두 살의 이자크는 스무 살의 에스텔라에게 말했다.
부인, 너무 예쁩니다. 하늘의 천사도 울고 갈 정도로 너무 아름다워요. 심장이 엄청 뜁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을 배웅하던 사용인들 모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우리 주인 부부님 너무 귀여우시다고. 너무 사랑스럽다고. 두 분은 정말 천생연분이라고.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을 넘기고도 사랑하실 분들이라고.
부부 동반 연회에 가면 항상 올해 메시앙 최고의 부부를 암묵적으로 뽑는데, 그건 아마 우리 공주님과 이자크 님일 거라고. 그건 매년 똑같을 거라고. 그런 주접들을 부렸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들은 부부 연회에 간 적이 없었다.
영원히 서로를 사랑할 것 같았던 그 아름다운 연인들이 급속도로 틀어지고, 아이들이 태어난 뒤에도 금이 간 감정은 붙질 않았다.
에스텔라는 부부 연회를 제외한 모든 연회를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자크는 집에 틀어박혀 아이들을 보거나 이따금 말도 없이 외출하기도 했었다.
온전히 서로만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는 걸 잘 알던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감히 두 사람의 관계에 간섭할 수는 없었어도 안타까워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거의 6년 정도 냉랭한 사이이셨던 분들이 참, 세상 일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저는 그냥 너무 기뻐요. 다들 그렇게 말해요. 다들 신나서 오늘 아침 내내 입이 귀에 걸렸었다니깐요. 자랑하고 싶을 정도예요.”
“미엘라도 아줌마 다 됐네. 뭘 그런걸 자랑을해.”
에스텔라는 괜히 할 말이 없어 애꿎은 미엘라만 놀렸다. 미엘라는 에스텔라의 머리칼을 빗겨주며 말했다.
“저 아줌마 맞는데요? 나이 마흔 넘었으면 진즉에 딸도 있을 나이인데 아줌마 맞죠.”
“미엘라는 결혼 안 할거야?”
“전 아직 생각 없어요. 우리 공주님 행복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요.”
“유모랑 똑같은 말을 하네. 다들 자기 행복 생각해야지, 왜 내 행복만 생각해.”
“저희한테는 공주님이 딸이나 다름없잖아요. 갓난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옆에 꼭 붙어있는 건데. 제겐 공주님이랑 이 저택 사람들이 가족이에요. 이미 가족이 이렇게나 많은데 결혼할 필요가 있나요.”
오늘 무슨 날인가.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지 모르겠다.
“…고마워. 미엘라. 내가 그동안 너한테도 많이 쌀쌀맞게 굴었니?”
“저는요, 공주님이 일부러 쌀쌀맞게 군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본심이 아닌데도요.”
“내가?”
“네. 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공주님을 모셨잖아요. 단순 변심으로 인해서 외도를 하거나 아가씨랑 도련님을 외면할 분이 아니신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그건, 아마 이 저택 모두가 그럴 거예요. 이자크 님도요. 그러니까 이자크 님도 아직까지 공주님 곁에 있는 거 아니겠어요?”
“….”
“그러니까 제 말은, 다시 예전처럼 두분 사이가 좋아지셨으면 해요. 온전히 서로만 바라보던 때로요.”
“응.”
“오늘 때 빼고 광내서 이자크님을 아주 홀려버립시다.”
“좋아!”
미엘라가 소매를 걷어 부쳤다. 저번에 무역상인들이 왔을 때 제가 눈여겨 보고 있던게 있거든요? 하며 들고온 목욕 바구니를 뒤적이더니 뭔가를 짠 하고 꺼냈다.
“이게 뭐야?”
“이게 말이죠, 로베아 왕국이라고 아십니까?“
“로베아? 그 섬나라 말하는 건가?”
“예. 거기에 이번에 어마무시하게 커다란 온천탕이 생겼대요.”
“온천탕?”
“예. 실렌티움이라고 하는 온천탕인데, 거기가 그 땅 아래에서 저절로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이래요. 아무튼 거기에 한 번 들어가면 살이 뽀얘지고 부드럽고 매끄러워진다는데- 이게 거기서 수입해온 거거든요.”
미엘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거기 사람들이 원래 잘 안 씻잖아요? 저희는 그래도 일이 주일에 한 번은 목욕하는데, 거기는 아예 목욕하면 죽는다 뭐다 그런 소문이 있어서 진짜 안씻었대요. 그런데 거기 사장이 로베아인답지 않게 엄청나게 깔끔 떤대요. 유난스러운 건가 했는데, 그 사장이 지나간 자리에는 꽃향기도 은은하게 나고 사람 살결이 그렇게나 빛이 날 수가 없대요.”
“오….”
“그 사장이 발명해낸 제품이라더라고요. 이거 쓰면 진짜 피부가 엄-청 부드럽고. 윤이 난답니다. 그러니까. 제가 오늘 공주님 진짜 메시앙의 별로 만들어드릴게요. 이걸 피부에 문대면 분명 안 그래도 하얀 분이 더 하얘질 거야.”
비장한 미엘라의 말에 에스텔라가 신뢰를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녹색의 까끌한 타올 같은 것을 꺼낸 미엘라가 에스텔라의 팔을 잡더니 그대로 대패질하듯 살을 밀기 시작했다.
“아악!”
에스텔라의 비명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파티션 뒤에서 놀고 있던 쌍둥이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미엘라는 이게 원래 아파야 맞는 거예요. 아름다워지기 위한 고통이라 생각합시다! 이거 봐요, 이렇게 나오는 게 때라는 거래요! 아이고 뭔 때가 이렇게 많아! 하며 에스텔라의 몸에 대패질을 시작했다.
아악!
꺄악!
으으윽!
에스텔라의 비명 소리가 저택 한가운데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꽤나 멀리 떨어진 이자크의 투왈렛 룸에까지 그 소리가 들렸다.
“목욕이 아니라 고문을 하는 건가.”
“미엘라가 이국에서 들여온 목욕 도구를 오늘 쓴 것 같네요.”
“목욕 도구?”
“예. 저도 한번 당해봤는데, 목욕 도구가 아니라 사람 껍질을 벗겨내는 것 같습니다.”
“…뭐?”
“허허. 뭐, 살결이 부드러워지긴 하더라고요.”
집사 베이먼이 느릿하게 껄껄 웃으며 이자크의 옷매무새를 만졌다. 이자크는 그게 뭔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대다가도 피곤한 듯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공주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지요.”
“그래야겠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려는데, 멀리서 두다다닥 정신 사나운 발소리가 들렸다. 집사와 이자크 둘 다 그 발소리를 듣고 꼬맹이들이군.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압빠!”
“압빠! 미엘라가 엄마 괴롭힌다!”
“엄마 살 빨개!”
“엄마가 살려달래!”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이자크에게 매달리니, 집사 할아범이 정성을 다해 잡아놓은 옷매무새가 단번에 주름 잡혔다. 베이먼은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시종들은 그런 집사의 어깨를 다독였다.
“엄마가 살려달래?”
이자크는 틈만 나면 제 다리에 매달리는 아이들을 안아 들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자크의 목에 대롱 매달렸다. 루스 역시 루시가 하는 대로 똑같이 따라 한다.
“근데 엄마가 엄청 좋아한다?”
“맞아. 엄마 엄청 좋아해.”
“막 아프다고 그러면서도 계속 웃어.”
“연회 가는 게 디게 좋은가 바.”
아이들은 쉬지 않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엄마가 아빠가 이상해진 거 같대.”
“막 갑자기 아푼데 간호도 해주구, 막, 머리도 쓰다듬구, 막, 약도 챙겨주구, 막- 막 그런데.”
에스텔라는 자신이 미엘라에게 한 고민 상담들이 아이들의 입을 통해 이자크에게로 새어나갈 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싫대?”
이자크의 질문에 쌍둥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엄-청 좋대. 이만큼, 이따만큼!”
이자크에게 매달려 있던 팔을 번쩍 들어 최대한 크게 동그라미를 만든다. 애가 떨어질까 얼른 고쳐 안은 이자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그렇게 좋대?”
“웅! 근데 압빠. 피곤해? 졸려워? 여기가 이러케 거매.”
루시가 이자크의 눈밑을 콕 찌르며 물었다. 아빠 졸려워? 자고 싶어? 어제 늦게 와서 졸려운 거구나? 누가 그러게 늦게 잠자래. 우리보고 맨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면서. 루시는 그동안 이자크가 자신들에게 했던 잔소리를 그대로 되돌려줬다.
이자크가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필 외국으로 출장 간, 일전에 본 디자이너를 직접 마중 나갔다. 가게로 가거나 전보를 남기는 것보다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바로 만나는 것이 제일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한 것뿐이지 그밖의 다른 이유는 없다.
매분구들을 웃돈 주고 부른 것도 그냥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빠르니까 그런 것뿐이다. 어차피 이거 다 에스텔라의 재산이다. 그의 재산들은 모두 반역자로 몰렸을 때 압수당하지 않았나.
에스텔라의 돈으로 사람들을 사들인 것뿐인지라 딱히 생색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만, 아이들 입으로 이렇게 좋아한다는 말을 전해 들으니 피곤했던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빠 별로 안 피곤해. 루시.”
“그으래에?”
“흐음-”
루시와 루스는 거짓말 치지 말라는 눈빛으로 아빠를 올려다봤다.
“아빠도 기분 좋아?”
“응?”
“아빠두, 엄마 기분 좋으니까, 기분 좋아?”
“…응.”
“그럼 엄마 좋아?”
아이들은 정말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걸까. 가끔씩 이렇게 꿰뚫어보는 듯한 질문을 할 때면 참 난감해진다.
이자크는 괜히 제 옆에 있는 집사 할아범을 힐긋 쳐다봤다. 베이먼 역시 대답을 듣고 싶은 듯 헛기침을 하며 이자크를 슬쩍 쳐다봤다.
“엄마 좋아하는 거 맞지?”
“맞지이-”
“거짓말하면 나쁜 어른이래떠.”
“웅, 웅.”
“…글쎄. 아빠는 잘 모르겠네.”
그러자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며 말했다.
“아빠 바보잖아- 자기 마음 자기가 모루면 어뜩해에-”
“바부- 루스는 루스 마음 잘 아는데. 루스는 루시랑 엄마랑 아빠 디게 좋아하는데에- 집짜랑 유모랑 멜리사두, 그리구, 그리구, 그리구우- 다 좋아하는데에-”
아빠는 바보구나 하며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며 손을 잡고 방을 나가버렸다. 이자크는 어쩐지 한 방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 살 아닌 거 같다니까.”
이자크가 멋쩍게 집사와 눈을 마주친 후에 중얼거렸다.
“이번엔 인정하셔야죠, 이자크 님.”
“…피곤하네.”
“잠시 눈 좀 붙이시죠. 공주님 준비 끝나려면 멀었을 테니까요. 옷은, 음. 나중에 다시 잡아드리겠습니다.”
이자크의 구겨진 옷매무새에 허탈하게 웃으며 집사가 방을 나섰다. 이자크는 그대로 소파에 다시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쪽잠을 자려는데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니.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뭐. 나쁘지는 않네.
*
에스텔라는 아직도 얼얼한 제 살갗의 열감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했다. 미엘라는 이래야 때가 벗겨진다니깐요. 이래야 살이 부드러워진대요. 하며 자비 없이 대패질을 해댔다. 순간 미엘라는 목수요, 자신은 벌목된 나무가 된 줄 알았을 정도였다.
한바탕 전쟁 같은 목욕을 치르자 신기하게 미엘라의 말대로 살결이 부드러워졌다. 마치 미끄러져 내리는 듯한 느낌. 저 고문 기구 같은 것이 의외로 효과가 있는 것인가.
제 살결에 감탄하며 에스텔라가 옷을 입었다. 속옷을 착용하고 파티션 밖으로 나가자 오색찬란한 드레스들이 에스텔라를 반겼다. 에스텔라는 그 아름다운 것들에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씩 옷들을 만지기 시작했다.
“아. 너무 예뻐. 너무 예쁜 것들만 모아놨어.”
다른 한편에는 매분구들이 공수해온 액세서리들이 진열되어 있다. 에스텔라는 사실 아직까지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닐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연회는 꿈에서나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자크가 정말 이 모든 걸 다 준비해줬다고? 날 위해서?
“공주님!”
방문이 열리더니 줄자를 들고 있는 한 가브리엘이 에스텔라를 보자마자 반갑게 부르며 달려왔다.
“세상에, 많이 아프셨다면서요.”
“네. 고마워요. 여기 와줘서.”
“에이, 제가 뭘요. 부군께서 다 하신걸요. 자. 가봉해드릴게요. 많이 아프셔서 살이 그새 빠지신 거 같다 하시던데, 정말 그런 거 같아요. 치수 재고 드레스 몸에 꼭 맞게 해드릴게요.”
가브리엘이 에스텔라의 몸에 줄자를 대며 정확한 치수를 쟀다. 그런 뒤 제일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고르라며 행거들을 앞으로 끌고 왔다. 에스텔라는 뭘 골라야 할지 몰라 행복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예쁘고 아, 뭘 골라야 할까… 하고 있는데 드레스 하나가 눈에 자꾸 밟힌다. 저거. 저거요. 하며 에스텔라가 드레스 하나를 골랐다.
에스텔라가 가리키는 드레스를 꺼낸 미엘라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연보랏빛 라일락이 떠오르는 러플 드레스. 레이스나 자수가 많이 들어간 화려한 드레스들 제치고 눈에 띈 것이 일전에 가게에서 봤던 그 연보라색 드레스였다.
어쩜 그때랑 너무 비슷해요. 미엘라의 눈에는 심지어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에스텔라는 그때 입었던 옷이 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저 드레스가 제일 눈에 띄었다.
“역시 나는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
에스텔라가 드레스를 가봉하며 말했다. 가브리엘은 그럴 줄 알았다며 그 드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레이스나 자수 하나도 없는데 되게 눈에 잘 들어오죠? 이거 가져가고 싶다는 마담이나 영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제가 절대 안 줬어요.”
“왜?”
“이건 공주님만 입을 수 있는 드레스니까요. 언제 입으실까 했는데, 이제야 입어주시네. 이 드레스 엄청 옛날에 공주님께서 주문 제작하신 거예요. 한 4년 전? 아니, 6년 전?”
그때 가브리엘은 무명이었다. 못된 디자이너 밑에서 노동을 착취당하고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던 때. 사장에게 자신이 한 디자인들을 모두 뺏기고 심지어 추행까지 당하던 그때. 그런 자신을 구해준 에스텔라가 의뢰한 일.
‘디자인 꽤 잘하던데. 내가 가게 내주면, 나만을 위한 드레스도 만들어 줄 수 있나?’
‘어떤 드레스를 원하시는데요?’
‘…추억이 담긴 연보라색 드레스. 화려하지 않지만,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풋풋함과 사랑스러움이 담긴 그런 드레스. 어때요. 되게 주관적이고, 까다롭지.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내 사람 해요.’
그때 에스텔라는 대체 뭘 보고 무명 잡역부에게 이런 의상실을 만들어준 걸까. 그 이유는 한참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가브리엘은 그때부터 에스텔라가 주문한 연보라색 드레스를 매번 디자인해 선보였지만, 그때마다 에스텔라는 그 드레스들을 퇴짜 놓았다.
이제는 오기가 생겨 연보라색 드레스를 매번 꾸준히 새 디자인으로 내놓는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의상실에 진열해놓을 때마다 수많은 영애와 귀부인들이 웃돈을 줄 테니 팔아라, 부르는 대로 줄 테니 팔아라. 그리 말했지만 가브리엘은 절대 팔지 않았다.
에스텔라만이 입어야 하는 드레스니까.
그때 그 드레스를 주문했을 때 에스텔라의 표정이 잊히지가 않아서.
도대체 어떤 추억이 담긴 드레스인가 했더니, 오늘 에스텔라의 시녀 미엘라의 말을 듣고 이해가 되었다. 역시 공주님은 부군을 매우 사랑하셨어. 가브리엘이 그리 생각하며 에스텔라의 몸에 맞게 옷을 수선했다.
“내가 이 옷을 그렇게나 오래전에 주문했었어요?”
“네. 뭐, 매번 디자인이 여기는 별로다, 이 느낌이 아니다- 하시면서 퇴짜 놓으셨는데 이제야 통과되었나 봐요. 다행이다. 정말 마음에 꼭 드시도록 만들고 싶었거든요.”
에스텔라는 괜히 드레스를 만지작댔다. 반투명한 옷감이 겹겹이 층을 쌓여 그라데이션을 만들어내고 있어 부차적인 장식물이 들어가지 않아도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스퀘어 넥의 네크라인은 가슴팍이 너무 파이지도, 그렇다고 답답하게 목을 가리지도 않았다. 에스텔라의 쇄골이 가장 완만한 선을 보이도록 그녀의 몸에 맞춤되어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던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문제는 디자인이 아니라, 그때의 내 마음이었네. 그때는 다시 추억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응. 예쁘다.”
“네?”
“응? 내가 뭐라 말했어?”
“방금 뭐라 말하셨었는데….”
“…내가? 그래?”
미엘라와 가브리엘 둘 다 에스텔라가 중얼거리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자신이 말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미엘라가 호들갑을 떨며 어쩜 공주님 너무 예쁘세요! 하며 정적을 깨뜨렸다.
곧바로 쌍둥이들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드레스를 입은 엄마를 보며 진짜 예쁘다아! 천사다아! 하며 박수를 치고 발을 굴렀다.
드레스에 어울리게끔 과하지 않은 목걸이와 귀걸이를 한 뒤 옅은 화장을 했다. 머리까지 단정하게 틀어 올린 후에야 모든 준비가 끝났다.
준비시간이 꽤 길었는데 그 과정은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어느새 연회 시작 시간이 가까워졌다.
“공주님, 이제 얼른 갑시다, 얼른요. 늦겠어요, 이러다가!”
미엘라가 방문을 열었다. 가브리엘은 에스텔라의 드레스 뒷자락을 들어주며 에스텔라가 빨리 방을 나갈 수 있게 도왔다.
일 층 중정으로 나가니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자크와 눈이 마주쳤다.
이자크는 남청색의 수트를 입고 있었다. 그때 에스텔라의 눈에 과거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분명 그녀는 봤을 리 없을 부부의 첫 번째 연회 참석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미엘라가 말해준 내용을 내가 기억해냈다고 착각하는 걸까?
그러기엔 그때 그의 눈빛과 웃음, 그리고 행동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때 이자크는 준비를 마치고 나온 에스텔라가 계단을 내려올 수 있게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내려오세요. 다치니까.”
지금 바로 그처럼.
에스텔라는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고, 계단을 다 내려가자 그때의 이자크가 에스텔라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라일락 같네요.”
지금 그가 한 말 그대로.
“…그때도 이 말 하지 않았어요?”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뭔가, 기억이… 나는 것 같아서.”
이상했다. 나는 분명 과거에서 미래로 온 사람인데, 미래에 있었던 일이 기억 난다고? 에스텔라는 자신이 말한 어폐에 고개를 갸웃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