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9화 (9/21)

9장.

이자크는 순간적으로 창피해졌다. 제 딸에게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을 들키고 말았다. 루시가 아니 루스도 분명 알 테지. 둘은 모든 걸 공유하니까. 얼굴로 피가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서랍 안에는 에스텔라가 화환을 들고 웃고 있는 초상화뿐만 아니라 그녀와 주고받았던 편지, 에스텔라가 그에게 보내준 압화 액자, 에스텔라가 머리를 묶을 때 쓰던 기다란 노란색 리본 등이 들어있다.

변태도 아니고. 난 왜 그딴 걸 모으고 있었지. 한숨을 내쉬고 제 손에 들린 세 번째 화환을 내려다봤다. 또 한 번 한숨이 나온다. 뭘 또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는 거냐.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게 점점 늘고 있다.

이자크는 쭈그리고 앉아있던 긴 다리를 펴며 일어났다. 아이들은 꽃밭을 뛰놀며 서로의 화환을 칭찬하고, 내 게 더 예뻐 너 거랑 똑같은 거거든, 하며 귀엽게 투닥거리고 있다. 그는 세 번째로 만든 화환을 내려다보다 아래로 보이는 에스텔라의 정수리 위에 올려놨다.

에스텔라가 고개를 들더니 제 머리 위에 놓인 것이 화환인 걸 알아채곤 예상치 못했다는 듯 놀란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왜 나한테도 화환을 줘요? 하는 듯한 눈빛. 이자크가 부연설명 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에스텔라가 멋쩍은 듯 슬쩍 미소짓다가 이내 다시 한번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를 쳐다본다.

이자크는 한참 동안 화환을 쓴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초상화 속 그녀와 똑같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때는 쌍둥이들이 에스텔라의 뱃속에 씨앗처럼 뿌리내리기도 전.

디에스 가문이 몰락해버리고, 엘리나는 다른 귀족 가문의 시녀로 들어가게 되고, 직위해제를 당해 혼자 남겨져 온갖 멸시와 모욕을 듣고 있을 때쯤 그에게 빛이 하나 내려왔다. 머나먼 하늘에 있어 손에 절대 닿을 것 같지 않았던 별이, 메시앙의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남은 것이라곤 이제 하인들 모두 도망가버린 빈 변경백 저택뿐인 그에게 에스텔라가 다가왔다. 몇몇 하인들은 도망가면서 저택의 금품들도 훔쳐 달아나 집안은 난장판이었고, 그 난장판의 한가운데 계단에 허탈하게 앉아있던 이자크에게 별은 말을 걸었다.

‘세상에, 집안이 아주 난장판이네.‘

동정 어린 눈빛 혹은 혐오하는 눈빛. 그 두 가지만 내비치던 다른 이들에 비해 에스텔라의 눈빛은 동정도 혐오도 아니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자신의 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던 집안의 장남을 찾아오다니.

‘이봐요, 이자크.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있을 거예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가문의 오명? 억울한 죽음? 모든 걸 되돌리기 위한 복수, 그것도 목숨 붙어 있어야 가능한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덩치 큰 사람이 무기력하게 앉아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네. 얼른 일어나요. 난 디에스 변경백이 범인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믿으니 그게 사실이야.’

철없어 보일 정도로 당당하게 말하던 공주.

눈은 새빨갛게 부어서는 어찌나 그리 당돌하게 말하던지.

엘리나는 내가 데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어깨를 으쓱이던 여자.

나만 믿어요. 내가 누구야. 나 메시앙의 공주야.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여자. 그러면서 세상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던 여자.

이자크는 감히 제가 넘볼 여자가 아니라 생각했다. 열여섯 처음 온실에서 공주를 마주했을 때 그는 감히 공주에게 불손한 마음을 품으려던 자신을 다그쳤다. 자신은 변경백의 후계자다. 메시앙의 그림자가 될 이가 감히 빛의 옆에 설 생각을 하다니. 감히 빛을 원할 생각을 하다니.

공주는 메시앙의 왕이 될 몸. 더 귀한 사내와 결혼을 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버트랜드 대공이 제 딸과 결혼해줄 것을 요구했을 때 이자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사랑 없는 결혼. 그나마 그녀와 제일 가까운 이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릴리 버트랜드와의 결혼식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림자 옆에 빛이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자크는 맨 처음 거부했다.

‘저는 그림자입니다. 변경백이었을 때는 왕의 그림자, 반역자가 되었을 때는 메시앙의 암흑이 되었습니다. 어찌 어두운 것을 가까이하시려는 겁니까. 저와 엮여 득 될 것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 에스텔라는 이리 대답했더랬지.

‘원래 빛의 옆에는 그림자가 있는 게 당연한 거예요. 그 그림자 덕분에 빛은 빛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는 건데요? 나는 득을 보고 싶어서 이자크한테 고백하는 게 아니에요. 메시앙의 별이 빛나는 방법을 아니까 좋아하는 거지. 내가 빛나는 방법이 뭔지 알아요?’

에스텔라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별은 원래 저 먼 하늘에 떠 있는 돌덩이에 불과하대요. 그런데 그 돌덩이에 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멀리서 올려다 봐 주고. 계속 그렇게 관심 가지고 보다 보니까 얘가 빛나는 걸 아는 거야. 어? 계속 보니까 예쁘게 빛나네? 어 계속 보면 볼수록 더 많이 반짝거리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에스텔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자크가 날 계속 봐줄수록 나는 더 빛난다는 말이에요.

난 이자크에게 그냥 닿지 못할 별이 아니라 여자로서 빛나는 별이 되고 싶어요. 내가 이자크를 남자로서 사랑하고 있듯이.

아. 나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이자크 앞에만 서면 엄청 어지럽거든요. 설레서.

그러니까, 나 좀 봐달라는 소리예요.

에스텔라는 최대한 여유로운 척 말했지만, 그녀의 붉어진 양 뺨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어디 양 뺨만 붉어졌을까. 자그마한 귀가 불에 덴 것처럼 빨갰다.

‘집중 좀 해줘요. 다른 사람들 말고 나한테만 집중해요. 내 말만 듣고, 내 말만 들어줘요. 5년 동안 좋아했습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거 같아요. 나랑 결혼합시다.‘

그날 에스텔라는 이자크에게 청혼했다.

“이걸 왜 저한테….”

에스텔라가 한참 동안 그를 쳐다보다 어색하게 물었다. 이자크는 그제야 그 옛날의 회상을 멈출 수 있었다. 주책이다. 자꾸 지나간 시절을 기억해서 뭐 하려고 이러는 건지.

이자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에스텔라는 궁금했다. 하지만 그가 큰 키로 햇살을 등지고 있는 바람에 역광이 생겨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등 뒤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에스텔라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자크가 살짝 몸을 틀었다. 역광으로 눈이 부시게 넘어오던 햇살이 더는 에스텔라에게 닿지 않았다. 에스텔라는 그제야 찌푸린 눈을 제대로 뜨며 이자크를 쳐다봤다. 어째서 그의 표정이 이렇게나 시린 건지. 당신은 또 어떤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건지. 에스텔라는 물어보기 두려워졌다.

“…예전에 곧잘 만들어줬었으니까.”

그가 에스텔라의 청혼을 받아들인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연인들이었다. 이자크가 디에스 가문의 장남이라는 크나큰 결점만 없었더라면, 메시앙 왕국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연인이었을 것이다.

에스텔라는 꽃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이자크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둘은 종종 봄이 되면 꽃이 만개하는 변경백 뒤쪽의 동산에 올라가 놀았다. 이자크가 화환을 만들어주고 에스텔라는 그걸 쓰며 세상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자크는 그림도 잘 그리네요?’

‘그냥 취미입니다.’

‘취미치곤 능력이 대단한데요? 진짜 화공한테 맡긴 그림 같아요.’

‘과찬이에요, 에스텔라.’

‘진짠데. 나 사실 이자크가 어렸을 때 그렸던 그림들 봐서 알고 있어요. 그림에도 소질 있고, 못 하는 게 없네, 내 남자.’

‘어렸을 적 그린 그림들을 에스텔라가 어찌-‘

‘예엣날에 디에스 변경백이 궁궐에 오셨을 때 보여주셨었죠. 우리 아들이 있는데 그림을 잘 그립니다, 공주님. 하시면서. 되게 자랑스러워하시던데.’

이자크가 기억하는 그의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는 제 아들에게 호통치던 분이셨다. 왕국을 지켜야 할 변경백의 후손이 훈련은 게을리하고 그림이나 그리고 있다니! 하시면서 매번 어린 이자크가 그렸던 그림들을 모두 압수하셨던 분이었다. 마냥 제 아들을 탐탁지 않아 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이자크. 나 그려줘요. 진짜 초상화로 벽에 걸 수 있게 그려줘요. 나중에 아이들이 생기면 보여주면서 자랑할 거예요. 이거 봐, 너희 아빠가 엄마를 이렇게나 예쁘게 그려줬다. 하면서.’

‘예쁘게 그려준 게 아니라 당신은 원래 예쁩니다. 에스텔라.’

‘…잘도 그런 부끄러운 말을.’

에스텔라는 잘도 이자크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으면서, 이자크가 에스텔라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으면 그렇게나 부끄러워할 수가 없었다. 매번 능글맞게 고백이란 고백은 다 하면서 막상 자기가 고백받으면 몸을 배배 꼬고 얼굴을 붉히는, 그런 귀엽고 모순적인 사람.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사랑했다.

그 그림은 그때 그려진 거다.

에스텔라에 대한 사랑이 커지고 커져서 그 마음이 넘쳐흐르던 때. 이따금 나 혼자 이렇게나 행복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더 이상의 회상은 그를 더 추하게 만들 뿐이다. 에스텔라와 사이가 틀어진 이후부터, 에스텔라가 이자크를 외면한 그 이후부터 그는 그녀에 대한 모든 미련을 그 서랍 안에 잠가놨다. 하지만 제 사랑스런 딸이 그 봉인된 것을 열어버렸으니 미련도 또다시 고개를 빼꼼 내민 것이다.

“그냥.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이자크가 애써 억누르며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냥요?”

에스텔라의 기대하던 눈빛이 씁쓸하게 바뀌었다.

“그래도 고마워요.”

에스텔라는 생긋 웃으며 머리 위에 쓰여진 화환을 만지작댔다. 이자크는 자신이 방금 얼마나 유치하고 비겁한 행동을 했는지 잘 안다. 왜 그러는지 본인이 제일 잘 알면서. 그냥 그때의 사랑스런 당신이 생각이 나서. 루시가 찾아낸 그 초상화와 지금의 모습이 너무나 비슷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서.

어쩌면 정말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봐서.

“이자크한테 선물 받으니까 되게 기분 좋다. 아. 선물까진 아닌가….”

신나서 말하다가도 괜히 면박이나 들을까 얼른 정정하는 에스텔라의 모습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선물, 이라기엔 너무 하찮지 않습니까.”

이자크가 부드럽게 말했다. 주책맞게 말하지 말라고, 과대해석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던 사람이 그리 말하니 에스텔라가 얼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저었다.

“하찮다뇨! 전혀요! 완전 소중한데요? 평생 간직할 건데요?!”

“풉.”

에스텔라가 화환을 머리에서 내리더니 제 품에 조심스레 껴안으며 말했다. 이자크는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가 웃기다고… 어. 비가.”

화환을 소중하게 품는 모습이 그렇게나 가소로운 일인가. 괜히 놀림 받는 기분이 들어 뭐가 그리 웃기냐 따지려던 찰나, 굵은 빗방울 하나가 에스텔라의 얼굴 위로 툭 떨어졌다.

에스텔라의 볼록하게 튀어나온 이마에 굵은 빗방울이 연속으로 투툭 떨어졌다.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급격하게 끼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소나기라 치부하기엔 몰려온 먹구름이 매우 크고 회색이었다. 굵은 빗발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에스텔라의 얼굴 위로 아까 전보다 더 많이 떨어졌다. 이자크가 제 외투를 벗어 에스텔라의 머리 위로 씌워주었다.

고맙다며 인사를 하려던 찰나, 갑자기 눈앞이 번쩍거리는 어지러움과 함께 이명이 찾아왔다. 에스텔라가 휘청였고 이자크가 얼른 그녀를 잡았다.

눈을 떼지 마!

이명의 끝에 들린 날카로운 비명.

“애기들.”

에스텔라가 퍼뜩 정신차리며 이자크를 올려다봤다. 두 사람은 아주 잠깐 서로를 쳐다보다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며 얌전히 있을 리 없는 쌍둥이들을 찾았다. 이미 아이들이 시야 밖으로 나간 지는 오래였다.

언제부터?

세상에, 이런 멍청한 짓을.

눈을 떼지 말았어야 했다. 아이들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제 머리 위로 화환을 올려준 이자크를 바라본 지는 정말 몇 분도 되지 않는다. 정말 몇 분도 되지 않는단 말이다. 그 짧은 순간에 아이들이 사라졌다.

누가 데려간 건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뛰어갔나?

그러는 사이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빗방울들은 어느새 세차게 들이치는 장대비로 변했다.

“애, 애들이 안 보여요, 이자크. 루시? 루스!”

어찌나 세게 비가 쏟아지던지 시야가 흐릿했고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꿈속에서 스물여섯의 에스텔라와 했던 대화가 이거였나?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고? 바보 같은 년! 왜 나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뗐을까! 멍청한 년!

에스텔라는 자신을 있는 대로 자책하기 시작했다. 불안한 듯 손은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이자크가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는 그녀를 데리고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들어갔다.

“이자크. 애들이 안 보인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애들을 찾으러 갈 테니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요.”

“네? 같, 같이 가요!”

“비가 이렇게 오는데 둘이서 다녀봤자 신경만 쓰입니다. 기다리세요. 아마 근처 숲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곤 자신을 두고 가려는 이자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창백하게 질린 손이 그를 잡으며 덜덜 떨고 있다.

“같이 가요. 나도 같이 찾을래요. 내 애들이잖아.”

파란 입술을 꽉 깨무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이자크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조금 신경을 쓰더라도 같이 다니는 편이 나을 듯하다. 혼자 이 나무 밑에 뒀다간 또 얼마나 손톱을 뜯고 입술을 깨물고 몸을 덜덜 떨며 불안해할지 눈에 훤했으니까.

비는 장대처럼 쏟아지다 조금씩 내리다 다시 장대처럼 쏟아지다 또다시 간헐적으로 내리길 반복했다. 두 사람 모두 쫄딱 젖은 생쥐 꼴을 하고선 넓은 공원 이곳저곳을 달렸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으며, 심장은 저 아래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듯 요동쳤다. 머리는 아찔했고 손과 발은 차갑게 식었는데도 땀이 줄줄 났다. 에스텔라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계속해서 이명이 와 더 정신이 없었다.

비가 내리니 단단했던 땅이 철벅거려 드레스 자락은 어느새 진흙 범벅이 되었고 신발은 구제 불가능할 정도로 오염되어 있었다.

정신도 없는데 바닥까지 엉망이라 발을 잘못 디디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제 손을 꽉 잡고 있는 이자크가 일으켜주지 않았으면 아마 땅에 주저앉아 풀린 다리로 애들 이름만 애타게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에스텔라는 제 손을 잡고 있는 이자크의 손이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자신이 더 불안해할까 내색하지 않는 걸까.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엎어질 때마다 묵묵히 잡아 일으켜줬지만 그는 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 넓은 공원을 다니는데 외곽 숲으로 빠지는 갈래 길에서 익숙한 것을 보았다. 에스텔라가 얼른 그 길로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화환….”

얼른 고개를 들어 앞의 어두컴컴해진 숲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 안으로 아이들이 들어간 걸까? 하늘을 빽빽하게 메우는 나무들로 인해 회색 하늘조차 보이지 않다. 어두컴컴한 저곳에 아이들이 정말로 들어갔을까?

시선을 내려 땅을 유심히 살펴보니 작은 발자국 두 개가 나란히 안쪽에 나 있다. 물론 비 때문에 몇 개는 흐무러지고 지워졌지만, 아이들의 발 크기가 맞았다.

비를 피하느라 들어간 건가?

루시는 몰라도 루스는 어두운 걸 극도로 싫어하지 않나?

“루시? 루스? 루시! 루스!”

에스텔라가 얼른 갈래 길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이자크가 얼른 이성을 잃고 뛰어가는 에스텔라의 뒤를 쫓았다. 이자크 역시 아이들이 사라져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는 아이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뭐에 홀린 사람인 양 미친 듯이 달려가는 에스텔라를 보며 그는 불안해졌다. 마치 뭔가를 알아낸 사람처럼. 마치 뭔가에 씐 사람처럼 에스텔라는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엎어져도 앞만 보며 다시 일어나 뛰고 구두가 벗겨져도 맨발로 뛰어갔다.

뒤에서 그가 에스텔라의 이름을 불렀지만 에스텔라는 멈추지 않았다.

“에스텔라!”

그녀는 한참 동안 앞으로 뛰어가다 조만간 방향을 틀었다. 뭔가를 보기라도 한 건가? 길이 아닌 곳으로 한참 뛰어가던 에스텔라는 그대로 호수 안에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자크는 당황할 새도 없이 바로 에스텔라를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물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 안에 루스와 에스텔라가 허우적거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자크는 얼른 둘을 건져냈다. 위에서는 루시가 엉엉 울고 있었다.

“콜록, 콜록- 흐에에엥-“

물에서 건져낸 루스는 울음을 터트렸다. 에스텔라는 물에서 나오자마자 바닥에 엎어져 있는 루스를 뒤돌아 심장소리를 확인했다. 루시가 달려와 루스를 껴안았다. 이자크는 얼른 두 아이를 안아 등을 토닥이며 최대한 안심시켰다. 호들갑 떨지 않고, 화내지도 않고 별일 아니라는 듯 아이들의 등을 두드리며 괜찮아. 괜찮아.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반복했다.

“에스텔라. 당신 괜찮은-”

아이들을 껴안으며 얼른 주저앉아있는 에스텔라를 일으키던 이자크가 흠칫 놀랐다.

“에스텔라?”

“눈을 떼지 말라고 했잖아. 왜… 왜 말을 안 들었니, 왜. 그러다가 또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고. 멍청아. 멍청한 년. 바보 같은 년. 또 돌아가야 되잖아. 또.”

눈이 풀린 채로 뭔갈 중얼거린다. 이상함을 느낀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어깨를 틀어쥐며 다시 한번 크게 이름을 불렀다.

“에스텔라!”

“…우리 애들은요?”

퍼뜩 정신을 차린 에스텔라가 한동안 굳어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자크의 품에 있던 쌍둥이들이 다시 와앙 울음을 터트리며 에스텔라의 품에 안겼다.

“내 아가들.”

“마마앙-!”

“엄마가 걱정했잖아. 어? 어디 보자. 다친 데는? 응?”

에스텔라가 아이들 얼굴과 몸을 샅샅이 살폈다. 온몸이 쫄딱 젖고 하얗게 질린 사람이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았는지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도 아이들의 안위부터 살핀다.

“에스텔라. 확인했습니다. 다친 데 없으니 걱정하지 마요. 일단 마차로 돌아갑시다.”

더 밖에 있다간 아이들과 에스텔라가 감기에 걸릴 거 같아 이자크는 일단 아이들을 양팔에 안은 상태로 에스텔라를 일으켜 세웠다. 에스텔라는 휘청대면서 일어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에스텔라는 모든 힘을 소진한 듯 보였다. 에스텔라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연신 손으로 입을 틀어막거나 괜히 제 머리칼을 만지작댔다. 이자크는 그런 그녀를 보다 눈높이를 맞춰 앉으며 말했다.

“다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아이들만 마차에 내려주고 금방 올 테니 그때까지 혼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내가 애도 아닌데. 혼자 있을 수 있어요. 여기 외투도 있고. 춥지는 않으니까.”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에스텔라는 애써 미소지으며 괜찮은 척했다. 이자크는 쉽게 눈을 떼지 못했지만, 살짝 몸을 떠는 아이들 때문에 얼른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숲 안. 이자크와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에스텔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우곤 아까 전 그가 벗어준 외투를 꼭 잡아 쥐었다. 몸을 둥글게 말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심장이 거세게 뛴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에스텔라는 아주 잠깐 동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들이 사라졌고, 이자크와 빗속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 숲으로 이어지는 갈래 길에서 이자크가 만들었던 화환을 주웠고… 그 뒤부터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자크가 그녀의 어깨를 틀어쥐며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이들은 이자크의 품에서 울고 있었고, 셋 다 물에 쫄딱 젖어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던 건가?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그때 에스텔라의 머릿속을 장악한 것이 있었다. 달려. 달려가. 더 빨리 달려. 살려내. 물 안에서 꺼내. 심장이 뛰는 걸 확인해. 심장이 뛰는 걸 확인해!

그건 에스텔라의 몸이 아니었다. 인지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고, 그다음엔 기억나지 않는다. 에스텔라는 무릎이 따가운 것 같아 슬쩍 치마를 들췄다. 진흙이 묻어 엉망이 된 치맛자락이 들리자 여기저기 까진 무릎과 발이 눈에 들어왔다.

진흙투성이에 돌부리에 걸려 엎어져 까진 상처에서는 피가 흘렀다.

이게 뭘까.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꿈속에서 미래의 자신과 한 대화가 그거였나?

눈을 떼지 말라는 것이 이걸 의미하는 거였나?

미래의 자신은 뭔가를 알고 있었던 건가?

머리가 복잡하다. 아직도 정신이 혼미하고 이명은 계속되었다. 계속해서 누군가 말을 거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아프다. 에스텔라는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무서워.’

소나기였던 건가.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비가 오지 않는다. 비가 그친 뒤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주먹을 꽉 말아쥐며 몸을 부르르 떨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울창한 나무들 아래 갇혀 있는 기분이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해서 찝찝하고 콱 막힌 느낌이 든다.

에스텔라는 눈을 꽉 감았다.

‘무서워. 무서워.’

무섭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는 왜 미래로 왔고 꿈에서는 무슨 대화를 했고, 아이들은 왜 물에 빠져 있었고, 나는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갑자기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무서워.”

질끈 감은 눈에 열감이 느껴지려던 찰나, 몸을 번쩍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숨을 몰아 내쉬는 이자크가 보인다.

“이자크? 어떻게 벌써….”

“근처에, 마차가, 있어서. 금방 왔습니다.”

근처에 있을 리가. 마차는 공원 입구 쪽으로 나가는 걸 봤었다. 그뿐인가? 가까이에 있다는 사람치고 말을 많이 끊어서 한다. 달려온 걸까? 날 걱정해서?

“무서웠습니까.”

이자크가 물었다.

무서웠냐고.

그 말 한마디에 에스텔라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아이처럼 와앙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자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꺽꺽대며 울었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의 등을 아까 전 루시와 루스에게 해줬던 것처럼 찬찬히 쓸어내려 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요. 에스텔라.”

“으흐어어엉. 무서웠어요. 아이들 잃어버린 줄 알고. 내 몸 아닌 거 같고. 어둡고. 춥고. 아프고오- 그런데 이자크는 안 오고. 온다면서어-”

에스텔라가 목놓아 울며 이자크의 가슴을 툭툭 투정 부리듯 때렸다.

“미안해요. 내가 빨리 온다고 온 건데-”

“왜 늦게 와아아! …아니야. 사실 엄청 빨리 온 거 다 알아아….”

그냥 누구한테 투정 좀 부리고 싶었다. 안 먹힐 거 다 아는데. 그냥. 나도 누가 계속 달래주고 얼러주고 안심시켜줬으면 해서.

에스텔라가 그리 생각하며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마음을 알아준다는 듯 이자크는 한참 동안 에스텔라의 등을 쓸어줬다.

*

그날 메시앙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두 기겁했다. 유모도, 집사 할아범으로 변한 아르텔도, 시종들도 모두 다 마차에서 내린 네 명을 보고 입이 턱까지 내려왔다.

“이, 이게 무슨…. 빨리 따듯한 물을 준비해, 얼른!”

아르텔은 진흙투성이에 얼굴은 잔뜩 부은 루시, 루스, 에스텔라의 모습을 보고 얼른 시녀들에게 소리쳤다. 시녀들은 어버버 말을 잇지 못하다 집사영감의 호통에 얼른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아이고, 공주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유모가 얼른 달려 나와 이자크의 품에 매달려 있는 에스텔라를 부축했다.

“다치신 겁니까? 예?”

에스텔라가 대답이 없자 유모는 이자크를 쳐다봤다.

“다리에 힘이 풀린 거야. 내가 데리고 들어갈 테니 유모는 아이들 좀 잘 챙겨줘. 루스. 루시. 아빠 엄마 잠깐 치료해주고 바로 갈게. 가서 씻고 있어. 할 수 있지?”

“녜.”

“웅….”

풀죽은 루시와 루스가 유모와 멜린다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에스텔라는 집사와 다른 시종들의 눈이 신경 쓰여 슬쩍 그에게서 내려오려 몸을 틀었다.

“그만 내려줘도-”

“다리에 힘 풀렸잖습니까. 데려다줄 테니까.”

내려오려는 에스텔라의 몸을 꽉 쥐면서 다시 안아 든 이자크가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따듯한 물을 대량으로 준비한 시녀들이 욕탕 네 개를 들고 왔다. 유모와 멜린다는 아이들 방에서 루시와 루스를 씻겨줬고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파티션을 놓은 채로 침실에서 씻었다.

저택에 전용 욕탕이 있었지만 그 커다란 욕탕에 단시간에 뜨거운 물을 채워 넣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욕조 안에 나란히 들어간 이자크와 에스텔라.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가끔 몸을 움직이면 욕조 안의 물이 움직이는 소리만 났다. 욕조 안에서 피로를 풀기는커녕 무릎을 세워 몸을 웅크리고 있던 에스텔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애들은, 정말 괜찮은 거죠?”

마차 안에 오르자마자 쏟아져 내리는 졸음에 에스텔라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아이들이 괜찮은지 눈을 마주치고 다시 한번 껴안아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조금 놀란 정도입니다. 혹시 몰라 의사도 불렀으니까.”

“왜 거기서 그렇게 잠이 온 건지. 미안해요. 내가 애들 엄만데.”

“당신도 많이 놀랐으니 비난할 생각 없습니다. 미안해야 할 이유도 없고요.”

“내가 눈을 떼서.”

“그거라면 나도 잘못한 건데.”

“…나는 들었는데도, 그런 거니까.”

“듣다뇨. 뭘 말입니까.”

“꿈에서. 미래의 제가 그렇게 말했거든요. 다른 건 잘 기억 안 나는데 그거는 기억해요. 근데 그 말 들었는데도 애들한테 눈을 뗐으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지금 이 사달이 부인의 잘못이다?”

“더 깊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파티션 너머 이자크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화환이나 머리에 뒤집어쓰고 실실 웃으며 남자한테 잘 보일 생각이나 하던 여자라고. 그렇게 생각할 거야.

어쩌면 놀랐을지도 모른다. 미친 사람처럼 엎어져도 다시 뛰고 구두가 벗겨져도 뛰고. 중얼중얼거리면서 투정이나 부리다가 쥐 죽은 듯 잠이나 자는 여자라니.

이상하잖아.

에스텔라는 팔로 감싸 안은 무릎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엄마 자격 없어. 애들한테 눈을 뗐어. 루스가 죽을 뻔했어. 더 늦었다면 루시도 빠졌을 거야. 눈을 떼지 말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간과한 거야. 어찌 보면 당연한 거잖아.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건데.

실격이야. 나는.

에스텔라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무기력이 온몸을 감쌌다. 물은 점점 식어가는데 나가고 싶지 않다. 그냥 계속 이대로 있고 싶다. 추워도 움직이기 싫다.

드르륵.

파티션이 옆으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머리 위로 커다란 수건이 덮어졌다.

“꺅!”

하얀 천에 둘둘 말린 에스텔라의 몸이 그대로 붕 떴다. 욕조에서 순식간에 침대 발치로 이동한 에스텔라는 어리둥절한 듯 제 앞의 이자크를 쳐다봤다. 이자크는 말없이 에스텔라의 입에 다디단 생초콜렛을 넣어줬다.

“뭐, 뭔-”

“그런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는 거 보니 당이 떨어졌나 보네.”

이자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그의 손에는 크리스탈 고블렛 잔 안에 가득 담긴 생초콜렛이 있었다. 에스텔라는 이걸 왜 지금 주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자크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가소로운 듯 말을 이었다.

“당신 원래 배고프면 헛소리 잘하잖아요.”

“헛소리?“

“그래. 헛소리요. 땅굴 파고 들어가는 그런 헛소리.”

그러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곤 에스텔라 옆에 초콜렛이 든 고블렛 잔을 내려놨다. 에스텔라는 당황하여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자크는 뒤쪽 테이블에 올려져 있떤 연고와 붕대를 꺼내 들었다.

“다리.”

“에?”

“다리 내놔요.”

에스텔라가 제 아래쪽을 쳐다봤다. 이런. 상아색 수건 아래 아무것도 안 입었잖아! 에스텔라가 도리질했다. 그러자 이자크가 그런 에스텔라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다시 에스텔라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에스텔라의 가는 다리를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헉!”

에스텔라가 얼른 가랑이 부분을 손으로 꾹 눌렀다. 혹여나 수건이 들려 안쪽이 훤히 보이면 매우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

이자크는 그러든 말든 상관 안 하며 에스텔라의 까진 무릎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아까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멍들이 푸르댕댕한 보랏빛을 띠며 올라왔다.

이자크의 팔뚝보다 가는 다리다. 이런 다리가 몇 번이나 돌부리에 걸려 엎어지고 미끄러지고, 맨발로 내달렸으니 성할 리가 없다. 까지고 찢어지고 멍든 다리를 지나 상태가 더 심각한 발을 살펴봤다.

“발톱이 빠졌는데.”

“아. 어쩐지 엄청 아프더라….”

이자크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에스텔라를 올려다봤다.

“어쩐지 엄청 아프더라?“

“몰랐죠. 나는.”

“….”

다시 한숨을 한번 내쉬고 상처 부위에 연고를 올린 뒤 붕대로 감았다. 붕대를 감을 때마다 아픈 건지 발가락들이 움찔댄다. 아직 상처 많이 남았다. 아파도 하는 수 없다.

“…당신 탓 아닙니다.”

말없이 연고를 바르던 이자크가 말했다.

“애들이 그렇게 된 거. 당신 탓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주의 깊게 아이들을 봤어야 했습니다. 근데 그건 제 잘못이기도 하죠. 아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나 다름없는데, 제가 당신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

“그런 식으로 잘잘못 따지지 맙시다. 그건 그냥 사고였어요. 루스도 루시도 모두 무사하니까 거기서 끝냅시다.”

“….”

“물론. 에스텔라의 발톱은 무사하지 못했지만.”

“아야!”

“벌입니다. 누가 그렇게 제대로 보지도 않고 뛰어갑니까. 아무리 그래도….”

발톱이 빠진 엄지발가락을 장난스레 톡 치던 이자크가 한 손에 들어오는 에스텔라의 발을 내려다봤다.

상처 가득해진 작은 발을 이자크가 손에 쥐었다. 에스텔라는 그게 부끄러운 듯 얼른 발을 빼려 했지만 이자크가 그 발을 놓지 않았다. 아래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났다. 창피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의 손에 붙들려 있는 제 발이 더 창피하다. 발에서 땀이 날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발을 빼려 힘을 줬지만 그는 놓지 않았다.

“저, 저기 이자크? 발 좀….”

“…고마워요. 에스텔라.”

“뭐가요?”

“빨리 달려줘서.”

“….”

“아이들을 찾아줘서.”

기초체력도 없어서 오래 걷는 것도 싫어하던 여자였다. 뛰면 숨이 차서 기분이 나쁘다는 단순한 이유로 절대 뛰지도 않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나 빨리 뛰었다. 쉬지 않고 뛰었다. 발톱이 빠지든 돌부리에 채든 상관없이 계속 내달렸다.

이자크가 당황할 정도로 빨리 내달렸다.

만일 에스텔라가 뛰지 않았더라면, 뭔가에 홀린 듯이 내달려 아이들을 찾아내지 못했더라면.

이자크는 그 뒤의 일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 최악의 경우는 상상도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거기 있다는 걸 알아낸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신 덕분에 아이들이 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

이자크가 드디어 손에 힘을 뺐다. 에스텔라는 그의 손에서 슬쩍 제 발을 빼냈다. 잡힌 발이 따듯하다. 그는 몸을 일으킨 뒤 옷을 건넸다.

“옷 입으세요. 그러다가 감기 걸립니다.”

“먼저 욕조에서 빼낸 사람이 누군데….”

“내가 안 빼냈으면. 물 식을 때까지 무릎에 얼굴 박고 있을 사람이 누군데.”

맞는 말에 에스텔라는 딱히 할 말이 사라졌다. 옷을 건네받고 갈아입으려는데 그가 멀뚱히 보고만 있다.

“옷 좀 갈아입게 뒤돌아줄래요?”

에스텔라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이자크는 그제야 아. 하며 슬그머니 뒤로 돌았다.

“아까 전에 다 봤는데.”

“뭐, 뭐라고요?!”

파티션을 넘어왔을 때 이미 다 봤을 것이 분명했다. 에스텔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쩜 감동이 몇 분도 가질 못하는지! 이자크가 자신을 위로해준 것에 감동받으려던 찰나 또 저렇게 사람을 놀린다.

“그런 일은 없으니 너무 걱정 말고 갈아입으세요.”

“그런 일이 뭔데요?”

“에스텔라가 상상하는 일이 뭐겠습니까?“

저번에 그의 명마보다 유혹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또 한 방 먹은 기분이다. 에스텔라는 허, 참내. 하. 짧은 탄식을 내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게 짧은 감동이 끝나고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쫄딱 젖은 아기 생쥐들은 다시 뽀송하게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었다. 시녀들이 구들장을 데워 침대 발치에 넣어줘서 침대 안이 뜨끈하고 포근했다. 루시와 루스는 베개와 이불 속에 파묻힌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루스는 루시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쪽 손가락은 입에 가져가 쪽쪽 빨고 있었다. 이자크는 그런 루스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자크 뒤에 서 있던 에스텔라가 앞으로 다가와 아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 어루만졌다.

“엄마.”

눈을 감고 있던 쌍둥이들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아직 안 잤네.”

에스텔라가 아이들의 이마를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씩 미소 지었다.

“엄마. 제송해요오.”

루스가 루시 옆에 몸을 웅크리더니 에스텔라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옆의 루시도 덩달아 죄송해요. 하며 그렁그렁한 눈빛을 보냈다.

“걱정시켜서 제송해요.”

“우리가 잘모태써. 엄마 다리 아야야? 많이 아야?”

아이들의 말에 에스텔라가 사랑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들을 껴안았다. 루스와 루시는 침대와 에스텔라 사이에 찌부 된 모양새가 되었다. 에스텔라는 아이들이 혹여나 계속 눈치를 볼까 얼른 두 아이의 오동통한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는 간질간질.

“꺄하하! 간지로워 엄마!”

“꺄아! 간질간질해!”

“요놈들, 다음부터는 엄마 아빠한테 말 안 하고 어디 안 가겠다고 약속해 얼르은-!”

“약똑할게, 약똑할게에!”

“나두, 나두 약쏘옥!”

쌍둥이들이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구르며 항복했다. 한바탕 깔깔대는 소리와 함께 침대 이불이 아래로 떨어지고 나서야 셋은 멈췄다. 이자크가 이불을 들어 올리며 다시 아이들에게 덮어줬다.

“루스. 루시. 엄마 말대로 다음부터 어디 가고 싶으면 꼭 엄마, 아빠한테 말하고 가는 거야. 알겠지?”

“네에….”

“네엡!”

아이들은 다시 기가 살아났는지 우렁차게 대답했다.

에스텔라는 모를 거다. 오늘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있었던 일을.

이자크가 에스텔라를 데리러 숲에 온 이후, 그녀는 이자크의 품에 들리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모든 힘을 다 소진해 기절한 것이 맞을 것이다.

당황한 이자크가 몇 번 에스텔라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이름을 불러봤지만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에스텔라의 상체를 들어 가슴께에 귀를 가져다 댔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자크는 안심할 수 있었다.

기절한 에스텔라를 안고 마차에 도착했다. 마부는 꼴이 말이 아닌 네 명의 주인들을 보고 기겁했다. 이자크는 별다른 말 없이 속히 저택으로 돌아가라 명령했다. 아이들은 마부가 덮어준 담요를 뒤집어쓴 채로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울며불며 이자크에게 매달려 있던 꼬맹이들은 기절한 엄마를 보고 놀라 눈물이 쏙 들어갔다. 마차는 금방 출발했고 여전히 기절해 있는 에스텔라를 보며 아이들이 물었다.

“아빠. 엄마 왜 잠만 자?”

“엄마 안 움직여.”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머리를 제 무릎에 뉘였다. 그런 뒤 아이들의 산발이 된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나긋하지만 엄하게 말했다.

“엄마가 루시랑 루스를 찾아다니느라 온 힘을 쏟아부어서 너무 피곤한가 봐. 루스. 루시. 오늘 왜 엄마 아빠한테 말도 없이 둘이서만 다녔을까.”

“그게에. 그러니까.”

“나비 따라가다 보니까. 죄송해요오.”

“나비를 처음 봐서 신기했구나.”

“웅.”

“신기한 마음은 알겠는데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면 엄마 아빠가 걱정하겠지? 게다가 엄마가 너희를 늦게 발견했으면….”

이자크의 말을 알아들은 아이들이 손을 꼼지락댔다.

“제일 놀란 건 우리 루시랑 루스겠지. 미안해. 엄마 아빠가 눈을 뗐으면 안 됐었는데. 아빠가 잘못했어.”

“아니야. 엄마 아빠 잘못 아니야.”

“아빠는 너희를 혼낼 생각 없어. 루시랑 루스는 나비가 신기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다음부터는 신기한 뭔가를 찾게 되면 가장 먼저 엄마랑 아빠한테 말해주고 같이 가자.”

“네.”

“엄마는 루스랑 루시를 너무 사랑해서 막 뛰어다녔어. 루스 물에 빠졌을 때 무서웠지? 루시도 무서웠고.”

“응.”

“엄마도 루시랑 루스가 무서워했던 것만큼 무서워했어. 너희를 잃을까 봐. 그건 아빠도 마찬가지고. 사랑하는 우리 쌍둥이들이 엄마 아빠를 떠나가면 어쩌나 너무 무서웠어. 그러니까 다음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 아빠가 무슨 말 하는지 우리 아가들은 알아들었을까?”

절대 목소리를 높이지도, 다그치지도 않았으나 아이들은 군기가 잡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크는 다시 한번 아이들의 어깨에 담요를 다정하게 둘러줬다. 얼마 안 있어 아이들마저 잠에 빠졌지만 이자크는 잠이 들 수 없었다.

만일 그때 에스텔라가 아이들을 발견하지 못해 루스와 루시가 물에 빠졌더라면?

그 상상을 하자마자 눈을 꽉 감았다.

평범했던 가족 나들이가 파국으로 치달을 뻔했다. 사실 아직도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실감이 안 난다. 마음 같아서는 왜 너희들끼리 위험하게 놀았니, 강가 주변에 가지 말라 그리 말했는데 왜 말을 안 듣니, 하며 혼내고 싶었지만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주의 깊게 아이들을 주시했어야 했는데.

병신같이 과거에 허우적대느라 제일 중요한 아이들을 잊고 있었다.

욕먹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다.

에스텔라에게 자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호언장담해놓고 이렇게나 휘청댄다.

그는 제 무릎에서 여전히 죽은 듯 자고 있는 에스텔라를 내려다봤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에스텔라의 얼굴이 무릎 끄트머리에서 대롱댔다. 이자크는 조용히 머리통에 손을 얹었다.

마음이 복잡하다.

*

“싫어.”

“드셔야 됩니다.”

“쓰고 맛없어.”

“그래도 약이니까 드셔야 해요.”

“나 별로 안 아파.”

“의사 말로는 독감일 수도 있다는데요.”

“나 진짜 열 없는데.”

“열 매우 있으십니다. 공주님.”

멜리사가 친절하게 웃으며 에스텔라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이 없기는 무슨. 펄펄 끓는데요! 생글생글 미소짓던 얼굴이 순식간에 호랑이처럼 변했다.

“아가씨랑 도련님도 잘만 드시는 약인데 왜 공주님이 못 드십니까?! 얼른 드세요!”

“엄청 쓴데 누가 잘만 먹어….”

에스텔라가 죽상을 하고 멜리사가 건네는 약을 받아먹었다. 단호박 죽의 달큰한 맛에 약의 쓴맛이 더해져 요상한 맛이 났다. 으엑. 이상한 소리를 내며 에스텔라가 혀를 내밀었다. 먹기 싫다.

하지만 멜리사는 꿋꿋이 마지막 한 숟갈까지 에스텔라의 입에 넣어주고는 목까지 이불을 끌어준 뒤 머리 위의 얼음주머니를 새것으로 교환하고 방을 나갔다.

“씨이….”

방 안에 아무도 없다. 에스텔라는 지금 격리 중이다.

왜냐.

에스텔라 혼자 열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직후에는 괜찮더니 이틀 후부터 목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몸살인가 싶어 개의치 않았던 것이 화근일까. 이런 감기는 초장에 잡아야 한댔는데.

아무튼 점점 몸이 무겁고, 살이 아리고, 뼈가 시린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니 목이 콱 막히고 마치 가시가 박힌 것처럼 아파 오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인가. 무기력해져 서 있는 것도 힘들고 천장이 빙글빙글 돌기까지 했다. 다리는 힘이 풀려 몇 번 이자크가 부축도 했고, 심지어 끝에 가서는 기절까지 하고 말았다.

저절로 인상이 써지는 고통에 결국 이자크가 그 상태를 눈치채고 말았다. 곧바로 주치의가 왔고 주치의는 어째서 옷도 제대로 안 껴입고 다니냐부터 시작해 초반에 증상이 있을 때 바로 부르셨어야죠- 등의 잔소리를 거쳐 당분간 외출 금지, 자가 격리하셔야 합니다, 라는 청천벽력을 내뱉고 사라졌다.

외출 금지라니.

외출 금지라니이!

에스텔라는 침대에 파묻힌 상태로 앓는 소리를 내면서 중얼거렸다.

“씨이… 일주일 뒤가 연회 날인데에….”

그렇다. 일주일 뒤에는 에스텔라가 그렇게나 참석하기 위해 이자크에게 꽃도 보내고 온갖 점수를 따내기 위해 갖은 아양을 부리던 이유, 로도니아 살롱의 부부 동반 연회 날이다.

꼭 가고 싶었다.

요 며칠 이자크의 행동을 보면, 정말 잘만 하면 참석할 거 같은 그런 기류도 있었단 말이다.

하필 독감에 걸려 격리될 것이 뭔가.

이 넓은 방 안에 에스텔라 혼자만 남겨졌다. 아이들이 옮으면 절대 안 되니 당분간 귀여운 꼬맹이들과의 만남도 금지. 이자크 역시 미쳤다고 제 발로 찾아올 리 없으니 이제 에스텔라는 이 방에서 신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수밖에.

이틀 전부터 계속 하루 종일 혼자 누워만 있는다.

책 읽는 것도 지겨워졌다. 하루 종일 책만 읽으니 활자에 질렸다고나 할까.

입에서는 자꾸 같은 말만 나온다.

“씨이….”

억울하다. 신은 날 미워하는 게 틀림없어. 어쩜 이렇게 귀신 같은 타이밍에 독감을 걸려!

심지어 에스텔라보다 면역력이 약할 루스와 루시도 멀쩡한데 말이다.

방 안은 고요했다. 그렇겠지. 원래 사용하지 않던 방이었는데 독감 환자가 있으니 격리 방으로 급히 개조했다. 그러다 보니 가구라고는 침대뿐. 휑한 방이 에스텔라의 마음을 더 허전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 열도 나고 목은 아파서 침도 삼키기 힘들고. 온몸은 두들겨 맞은 듯 쑤시고 아리고. 천근만근 무겁고.

이렇게 아픈데 사람을 격리시켜.

내가 무슨 병균도 아니고!

에스텔라는 갑자기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안다. 역병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긴 아는데. 막상 본인이 격리대상이 되어보니 서럽기 그지없다.

멜린다도 얼굴에 수건 두르고 와서는 칼같이 약 섞인 맛없는 수프만 입에 넣어주고 가니 이건 뭐 보살핌받는 것이 아니라 대역죄인이 된 기분이다.

억울하고, 서럽고, 서운하고, 아프고.

코에서는 자꾸만 콧물이 흐르니 훌쩍거리다가 점점 더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흐으으으… 흐어어엉…. 나쁜 새끼. 지 아내가 아프다는데 아무리 정 없어도 그렇지. 흐어어엉. 한 번도 보러 오질 않아! 나쁜 놈. 철벽 왕. 흐엉. 철면피야. 완전 빙하기 인성. 흐엉.”

제일 원망스러운 건 역시나 이자크.

아무리 이혼 조정 기간에다가 이쪽에서 잘못한 게 한참 많다고는 해도. 병자인데.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잔데. 어쩜 한 번도 보러오질 않는가!

애먼 화살이 이자크에게로 꽂혔다. 에스텔라는 엉엉 울면서 이자크 욕을 한참 했다. 물론, 말만 그렇지 실제로는 한참 하지도 못했다. 목이 워낙 아파 더는 말도 할 수 없었을뿐더러 얼마 안 있어 약 기운 때문에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에스텔라의 근본없는 이자크 뒷담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온 이자크는 침대에 파묻혀 골골대고 있는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얼굴은 빨갛게 익어 얼음주머니가 그새 녹아내리고 있다. 간병석에 앉은 이자크는 이마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음주머니를 들어 내려놨다. 그러더니 들고 온 대야를 협탁에 올려놓고 수건에 물을 살짝 묻혀 땀과 녹은 얼음으로 축축해진 에스텔라의 얼굴을 조심조심 닦아주기 시작했다.

대야에 수건을 담가 다시 새 물을 적신 뒤 얼음주머니 대신 이마 위에 올려줬다. 베개가 너무 높아 목이 아프진 않는지 확인해본 뒤 이불 속 온도가 너무 높은지 낮은지도 확인했다.

다시 의자에 앉은 그는 에스텔라의 자고 있는 모습을 감상했다.

“풉.”

그러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흘리고 만다.

나쁜 새끼. 철벽 왕. 철혈. 빙하기 인성이라니. 예전부터 에스텔라가 사람 별명 잘 짓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사교계에서 얻은 온갖 주책스러운 별명들 모두 공주님이 근원지였으니까.

뭐가 있었더라. 그가 사교 파티에 나가서 들은 것만 해도 수십 개는 될 것이다.

전쟁터의 조각상, 근육 미남, 신이 빚어놓은 남자 줄여서 신빚남이라는 이상한 단어도 만들고. 또 뭐가 있더라. 아. 메시앙의 레온델레스. 한창 유행하던 로맨스 소설의 남자주인공 이름을 붙인 별명도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빙하기 인성이란다.

“웃긴 여자야. 그게 그렇게 서운했나.”

이자크는 살면서 병으로 앓아누워 본 적이 없다. 전쟁터에서도 칼에 베거나 화살에 찔리거나 하는 등 물리적인 이유로 병상에 누운 적은 있으나 감기라든지, 열병이라든지, 독감 같은 병을 앓아본 적은 아예 없다.

앓아본 적이 없어 얼마나 아프고 서러운지는 모르겠으나. 저런 말을 하면서 우는 걸 보면 아프긴 많이 아픈가 보다. 일단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갛지 않나.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볼에 손등을 대봤다. 뜨겁다. 익은 사과네. 중얼거리며 또 피식 웃는다. 에스텔라는 자면서 뒤척였다. 인상을 찌푸리면서 뭐라 중얼거리기도 했다.

“으… 억울해… 갈 수 있었는데에… 콜록.”

뭐가 그리 억울해서 자는 와중에도 중얼거리는 걸까.

“가고 싶은데에. 씨이. 연회… 갈 수… 데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나 아픈데도 연회를 가고 싶을까!

이자크는 등받이에 기대 한참 동안 에스텔라를 봤다. 이불을 또 걷어차려고 한다. 저 버릇을 어떻게 고칠지. 신혼 때도 그러더니. 나이 먹고 고쳐진 줄 알았는데 아닌 건가. 아니면 저 스물여섯 살 에스텔라 안이 열아홉 에스텔라로 바뀌어서 그런 건가.

이마에 올려진 수건이 식었을 때쯤 대야에서 한 번 더 물을 적셔 쭉 짠 뒤 얼굴과 목 근처를 조심스레 닦았다. 깨면 안 되니까. 깨면 안 되니까 조심히….

“…이자크?”

“….”

에스텔라가 실눈을 뜬 채로 이자크를 쳐다봤다. 눈동자가 정확히 그를 향하고 있다.

“…꿈인가….”

“네. 꿈입니다.”

이자크가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에스텔라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다시 자세요, 에스텔라. 꿈이니까.”

“응….”

다행히 잠꼬대였던 건가. 에스텔라는 별말 없이 잠들었다. 이자크는 안도의 숨을 내쉰 뒤 다시 에스텔라의 목 부분을 닦기 시작했다. 원래 독감 같은 거에 걸리면 땀을 이렇게나 많이 흘리는 건가. 옷을 갈아입혀야겠는데. 식은땀으로 잠옷이 축축해졌다. 이러면 더 악화될 텐데.

잠옷의 러플들이 땀에 절어 에스텔라의 목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어있다.

찝찝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내가 왜 이 짓을….”

본인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 얼른 에스텔라의 목 부분을 들추고 있던 손을 치웠다. 이자크의 귀 끝이 빨개졌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지.

자각 못 하던 짓을 하고 있다.

이자크는 멋쩍은 듯 괜히 방 안을 둘러보다 나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멜리사가 새 옷가지를 들고 시녀들과 함께 방에 들어왔다. 에스텔라는 제 옷이 갈아입혀지든 말든 깨지도 않고 깊이 잠들었다.

잠든 건지. 아니면 열에 취해 정신을 잃은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에스텔라의 열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종종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일어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정신을 잃고 잠을 자고 있다. 상태를 걱정한 시녀들이 이 상황을 이자크에게 전했고, 결국 밤늦게 주치의가 다시 저택을 방문했다.

여전히 에스텔라는 깨지 않았다.

“더 큰 병이 있는 건 아닌가? 사람들이 이리 왔다 갔다 하는데 한 번 깨질 않고.”

사경을 헤멘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닐까 이자크는 생각했다.

“그러게요. 원래도 잠귀가 어두우신 분이긴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마 몸이 많이 약해지셔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약을 좀 더 처방해주게.”

“약은 지금도 충분히 많습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이게 일반적으로 보고된 감기나 독감 증상과는 달라서, 좀 더 지켜봐야 함이….”

“상태가 더 악화되어 큰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란 말인가.”

“제가 일단 가서 의사 협회인들에게 자문을 구해보겠습니다.”

뾰족한 방도가 없어 답답한 듯 이자크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에스텔라는 지금 이틀 동안 깨지 않고 있다.

단순한 독감이 아니었던 건가?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삼 일째다. 문제가 있다. 더 큰 병일지도 모른다. 주치의와 간호사들이 득시글대고 이자크의 심각한 표정과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를 느낀 쌍둥이들이 엄마 옆에 있고 싶다며 방문 앞까지 찾아왔다.

이자크가 얼른 쌍둥이들에게 갔다. 루시와 루스는 풀죽은 모습이었다.

“엄마 옆에서 잘래.”

“엄마 지금 아파 루시.”

“우리가 호 해주면 나을 거야.”

“엄마가 정신이 들면 그때 해주자. 응? 울지 말고, 루스.”

“엄마 많이 아파? 계속 코코 하는 거야? 안 일어나면 어뜩해?”

많이 불안한 건지 이것저것 질문하다 아이들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서로 자기 탓을 한다. 우리가 그때 말도 안 하고 멀리 가서 그런 거야. 하면서 엉엉 운다. 이자크는 아이들을 안아 쌍둥이 방으로 향했다.

이자크는 우는 아이들 입에 초콜렛 하나씩 넣어줬다.

“오늘만 주는 거야. 오늘만.”

루시와 루스는 코를 훌쩍이면서도 초콜렛을 녹여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서러운 듯 숨을 헐떡이기도 했다.

“힉, 엄, 엄마아, 힉, 많이, 힉, 아파?”

“의사 선생님이 약 구해오실 거니까 금방 나을 거야.”

“아프긴, 힉, 아픈 거지?”

“응. 그러니까 너희가 기도 좀 해줘. 엄마 빨리 낫게 해달라고.”

“엄마, 혼자서, 힉, 방에서, 외롭, 겠다아.”

“아빠가 같이 있을 거니까 루시랑 루스는 걱정말고 자. 오늘 푹 자고 내일 엄마 위해서 기도 해줘야지. 응?”

“네에.”

아이들을 재운 뒤 다시 에스텔라가 격리되어 있는 방으로 갔다.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주치의도 돌아갔고, 간호사들도 없다. 시녀들이 간간히 들어와 에스텔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내가 있을 테니 자네들은 모두 물러가.”

이자크의 말에 시녀들이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다들 하나같이 표정이 어두웠다. 특히나 에스텔라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전속시녀였던 멜리사는 눈가가 벌개진 채로 인사를 한 뒤 나갔다.

이자크는 다시 간병석에 앉았다. 에스텔라는 여전히 숨을 몰아 내쉬며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냥 며칠 앓다 다시 쌩쌩해 질 줄 알았는데.”

이틀 정도 온갖 투정과 엄살을 부리며 나 아파요- 하다가 금세 쌩쌩해져서는 저택 여기저기 쌍둥이들과 활개칠 줄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유혹을 하거나 우리 이번엔 여기로 갑시다, 하며 잡아끌거나, 아니면 연회 날짜가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급해져서 떼를 쓰거나.

그럴 줄 알았다.

그냥 평소처럼 계속 건강할 줄 알았다.

“아. 아니네. 당신 예전에는 불면증도 심해서 허약했었지.”

한동안 밝은 에스텔라를 보니 계속 건강했던 걸로 잘못 기억했다. 그래. 나와 결혼한 이후부터 당신은 불면증에 시달렸지. 잠을 자지도 못하고 자다가고 금세 깨고. 건망증도 심해지더니 예민해지기 시작했어. 잔병치레도 많았고.

“…나 때문인가….”

원래는 안 그랬다니까, 자꾸만 자기 탓이 된 거 같다. 유모나 주치의 말로는 왕궁 생활 하셨을 땐 잠귀도 어두워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잘 주무셨다는 분이 결혼 이후 이곳에서 산 뒤부터는 잠을 자꾸 깨니까.

이번에도 제 탓 같다. 그냥 모든 일이 제 탓 같다.

“에스텔라. 이제 좀 일어나요.”

자꾸 무서워지려고 하잖아. 이자크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불 위에 올려진 에스텔라의 가는 팔목이 보인다. 원래도 말랐다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유독 더 말라 보인다. 뼈밖에 없네. 하며 에스텔라의 손에 제 손을 올려놨다.

차라리 제 반응 떠보겠다고 이를 악물고 아픈 척하는 거였으면.

그런거라면 화는 좀 나겠지만 지금처럼 가슴 한쪽이 저리진 않을 것 같다.

*

그냥 독감인 줄 알았지.

세상에. 이렇게나 아플 줄이야.

에스텔라가 속으로 생각했다. 정신이 없는 건 아니다. 간간이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몸을 꼼짝할 수도 없고 눈을 뜰 기력도 없다. 느껴지는 거라곤 그냥 죽을 것 같이 아프다, 이 정도뿐.

그러다가 다시 잠에 빠지길 반복했다.

사실 잠이 아니라 기절하는 것 아닌가.

웃긴 것은 기절하는 와중에도 꿈을 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미래의 에스텔라가 나와 대화 하는 보통의 꿈들과 달리 뭔가를 감상하는 느낌이다.

에스텔라는 눈을 떴다.

눈이 떠지는 걸 보니 여긴 또 꿈속인가 보다.

몸은 여전히 무겁다. 하지만 움직일 수는 있다. 에스텔라는 주변을 둘러봤다. 의자 하나와 영사기 하나가 있다.

영사기다! 영사기는 요즘 메시앙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신문물이다.

이국의 천재 과학자가 발명했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조작하여 벽에다가 쏘면 영상이 움직인단다. 참 신기한 일이지. 생각해보니, 외국에서는 마차 말고도 다른 운송수단이 있댔는데. 그게 뭐랬더라. 무슨, 기차? 랬나.

요즘 외국 신문물들을 보면 메시앙이 많이 뒤처지는 느낌이 든다. 버트랜드 대부님은 메시앙의 발전에 관심이 없나. 가서 한마디 해야지. 이런 걸 들여와야 나라도 백성들의 의식도 발전하는데 말이지.

그리 생각하며 영사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조작하는 거였지. 음. 이렇게였던가.

에스텔라는 며칠 전 박람회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영사기를 조작했다. 의자 위에 올려져 있는 필름 하나를 넣으니 영사기에서 촤르르르륵, 소리가 나며 환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벽에서 움직이는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신기해라!

아팠던 건 새까맣게 잊고 신기함에 박수를 치며 움직이는 그림들을 쳐다봤다.

‘어?’

에스텔라의 눈이 커졌다.

아직 어려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열아홉? 스물 정도 된 거 같은데.

에스텔라는 누군가의 관을 부여잡고 눈물 흘리고 있다. 누구의 관이지? 누가 죽은 거지? 영상 속 슬픔에 이성을 잃은 에스텔라는 관짝의 문을 열고 시체를 껴안았다. 사람들이 그런 에스텔라를 말렸지만 에스텔라는 사람들의 손길을 거부한 채로 시체 품에 안겼다.

‘이자크…?’

관 속에는 이자크가 들어있다. 이자크의 목 한가운데 빨간 선이 선명하다. 목이 잘려 죽은 듯하다. 처형을 당한 건가.

불길한 영상에 에스텔라는 기분이 나빠져 영사기를 끄려 했다. 안에 들어있는 필름을 뺐는데도 영상은 계속해서 돌아갔다.

차르르르, 한 번 더 소리를 내더니.

산발이 된 자신의 모습이 나온다.

동굴 속을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미친 여자처럼 휘청대며 동굴 속을 돌아다니다가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동굴이 맞나? 마치 신전처럼 조각상들이 몇 개 보인다.

아. 수몰되었던 고대의 신전인가?

미친 듯이 달리던 에스텔라가 곧 물속으로 들어간다. 뭐지. 죽으려는 건가? 물속에서 뭔가를 한참 찾다가 마침내 찾은 듯 들어 올린다.

커다란 궤짝이다. 궤짝은 쇠사슬과 자물쇠로 봉인되어 있었다. 여전히 머리는 산발이 된 채 궤짝을 열기 위해 애쓰는 에스텔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루스랑 루시?’

아이들이 나온다. 꺄르륵 웃으며 어떤 남자에게 달려가 안긴다.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역시나 이자크였다. 이자크는 에스텔라를 향해 미소지으며 손을 뻗었다. 화면이 잠깐 흔들리더니 영상을 찍고 있는 이가 나타났다.

‘나잖아?’

에스텔라가 장난스레 웃으며 화면을 돌리자 이자크가 그런 에스텔라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뺏어 든다. 아이들과 함께 놀며 장난치는 영상들.

기분 나쁜 영상과는 달리 미소가 지어지는 영상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면이 바뀐다.

‘델라 랭 마담? 집사 할아범도 있네?’

갑자기 침울한 표정을 한 이들이 나온다. 랭 마담과 집사 말고도 멜린다와 저택의 모든 시종이 눈물을 흘린다. 왜 울고 있지? 마치 장례식장에 온 기분이다.

화면이 움직이더니 반 열려있는 관으로 향했다. 그 안엔 창백한 얼굴로 단정하게 누워있는 루시와 루스가 보인다. 에스텔라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이게 뭔….’

누군가 아이들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마도 제 손인 거 같다. 손은 부들부들 떨리더니, 이내 영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지럽게 한 바퀴 돈 영상은 마치 바닥에서 찍고 있는 듯한 구도였다.

영상 속의 에스텔라는 관속에 들어간 아이들의 주검을 붙잡고 오열했다. 시선을 조금 더 옆으로 옮기자 이자크의 관도 보인다. 나 빼고 모두 다 죽은 거야? 그 모습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진짜 같아서 에스텔라 역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따라 울었다.

퍼뜩 정신 차린 에스텔라가 얼른 영사기를 넘어뜨렸다. 쿠당탕 커다란 소리를 내며 영사기가 뒤로 넘어갔지만 영상은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

에스텔라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영상은 계속해서 나왔다.

이번엔 화면이 바뀌었다. 에스텔라는 자신의 서재에서 뭔가를 적고 있다. 어두운 눈 밑, 단정치 못한 머리, 앙상하게 마른 몸. 풀린 눈동자,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입.

저 낯선 모습이 자신이라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동화 속에서만 보던 미쳐버린 마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저게 나라고? 진짜 나란 말이야?

검정색 깃털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뭔가를 열중하여 적고 있는 것이다.

뭘 적고 있는 거지?

에스텔라는 자신이 적고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영상 가까이 갔다. 그때 미친 듯이 휘갈겨 쓰던 앙상한 영상 속의 에스텔라가 홱 고개를 들었다.

헉! 에스텔라는 기겁하며 숨을 참았다. 영상 속의 에스텔라는 정확히 에스텔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퀭한 눈과 텅 비어버린 눈동자가 에스텔라의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에스텔라는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아 움직일 수 없었다. 영상 속 자신의 눈동자는 에스텔라를 집요하게 쳐다봤다. 생기를 잃어 하얗게 부르트고 여기저기 찢어진 입술이 소름끼치게 씩 웃는다. 에스텔라가 주춤댔다. 하지만 영상 속 자신에게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끔찍한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듯한 자신의 눈동자를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갈라진 입술이 움직인다.

이 모든 건 일어났던 일들이야.

*

맨 처음엔 초점이 맞지 않아 희뿌옇게만 보였다가 이내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에스텔라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주변을 둘러봤다. 은은한 촛불들이 방을 밝히고 있다. 아. 드디어 깬 건가. 에스텔라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움찔거렸다.

“에스텔라?”

아주 살짝 움직였는데 그걸 감지한 이자크가 얼른 몸을 앞으로 숙이며 에스텔라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은 차가웠다.

에스텔라는 아직 몽롱한 표정으로 이자크를 쳐다봤다.

아. 이자크다. 살아있는 이자크.

“정신이 좀 듭니까? 날 알아보겠어요? 의사를 불러올 테니 조금만 기다-”

방을 나가려는 이자크의 손을 얼른 잡았다. 힘이 없어 도중에 손이 떨어지긴 했지만, 이자크는 가지 말고 있어 달라는 에스텔라의 부탁을 눈치챈 듯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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