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물론 잘 살아 있다. 다만 동공은 확장되어 있었고, 아주 조금만 더 칼날이 다가왔더라면 그대로 그의 목을 댕강 잘라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자크와 바실리스의 눈이 마주쳤다. 이자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대련은 여기서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수준급의 실력을 가지셨습니다. 영광스런 대련이었습니다.”
이자크가 그리 말하며 뒤 돌아 나갔다. 승패가 누군지 너무나도 확실했다. 하지만, 적어도 바실리스 남작에겐 용납할 수 없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수준급의 실력을 가져? 지금 비아냥대는 거지?
영광스런 대련? 사람을 이렇게 망신 줘놓고 영광스럽다고?!
패배에 몸을 부들부들 떨던 바실리스 남작이 그를 노려봤다. 많은 사람 앞에서 저를 대놓고 농락했다.
“아직 끝난 거 아니라고!”
그가 소리치며 뒤돌아있는 이자크에게 달려들었다.
“이자크!”
그 모습을 본 에스텔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바실리스 남작이 이자크의 등을 향해 검을 휘두른 순간,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바실리스 남작이 제 손목을 부여잡았다.
남작의 팔을 제압해 검을 떨어뜨린 이자크가 그대로 그의 손목을 세게 쥐었다.
이 망할 손이 그 가는 허리를 잡았다지.
싫다며 뿌리치는 손을 잡았다지.
“예의를 모르는 이 팔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자크는 마치 네 팔을 부러뜨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실리스 남작이 팔을 빼내려 안간힘 썼지만 빼낼 수 없었다. 뼈가 천천히 으스러진다는 게 이런 걸까. 이 미친놈은 왜 이리 힘이 세. 남작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야 이 망할 놈아!”
조만간 남작의 뒤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로 남작은 후두부를 강타하는 고통에 또다시 억 소리를 내며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머리를 보호했다. 이자크 역시 당황하여 남작의 팔을 놨다.
“부인!”
“이 죽여버릴 놈이, 뒤질라고. 야! 누구한테 감히 검을 들이대, 이 망할 것이!”
욕설과 후두부 강타의 주인은 에스텔라였다. 레이스와 프릴 가득 달린 양산이 의외로 공격에 능한 구조였던 것이다. 에스텔라는 이자크가 자신을 말리든 말든 그대로 양산을 몇 번이고 위아래로 내려치며 남작의 머리와 등, 엉덩이들을 마구잡이로 때려댔다.
“아악! 뭐야!”
남작은 자신을 때리는 이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려다가도 정신없이 구타하는 양산의 프릴과 레이스에 따귀를 맞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부인, 진정하세요!”
이자크가 얼른 에스텔라의 양손을 뒤에서 잡아 저지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에스텔라는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다가 구두 한 짝이 벗겨져 남작에게 날아들었다. 에스텔라가 화를 삭이지 못해 씩씩댔다.
감히 누구한테 그리 무례하게 굴어? 비겁하게 뒤에서 공격을 해?
“이자크. 괜찮아요?”
에스텔라가 씩씩대며 이자크에게 물었다. 이자크는 괜찮다고 진정시켰지만, 그의 등 뒤에서는 미처 다 피하지 못해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아색의 얇은 블라우스가 붉게 물들었다.
이를 확인한 에스텔라가 분노로 까무러치겠다는 듯 다시 남작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겨우 고개를 든 남작은 공주님의 얼굴을 확인하곤 깜짝 놀라 삿대질까지 하고 만다.
“당, 당신은 어제….”
“그래. 내가 어제 그 유부녀다, 이 쌍놈아.”
“아니 공주님께서 어찌-”
남작은 어버버 말을 버벅댔다. 어째서 공주가 어제 그 유부녀인가. 생각해보니 어제는 보닛 안에 머리칼을 모두 집어넣은 상태라 머리칼을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하층민들 모이는 축제에 공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또한 공주의 입이 생각보다 많이 험하고 걸걸한 것에 놀라기도 했다.
“감히 내 남편 등에 상처를 내? 네놈의 무례가 하늘을 넘는구나.”
에스텔라는 화를 한 번 삭히려는 듯 꾹 숨을 내쉬며 이번엔 최대한 교양을 차려 말했다.
“내 남편을 업신여기는 것은 날 업신여기는 것. 메시앙의 공주를 업신여기는 것은 곧 메시앙을 업신여기는 것 아닌가?”
“저, 저는-”
“바실리스 전 가주는 새 가주에게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 건가? 어?! 대답 안 해? 새파랗게 어린 게 감히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서는, 여기가 아직도 널 받들어 모시는 너네 집인줄 알아! 여긴 메시앙야!”
공주의 역정에 바실리스 남작이 당황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남편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들었다. 그리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매우 싫어하는 축에 든다고. 외도를 밥 먹듯이 하는 데다가 남편이 아무리 잡아도 본체도 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한 행동이었다.
관심도 애정도 없는 이제 곧 이혼할 사람보단 새 사람에게 눈독을 들이지 않을까 했는데, 지금 공주의 행동들을 보면 그 소문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에스텔라는 남작에게 불같이 역정을 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울상 짓고는 이자크의 상처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자신이 개길 데가 아니었구나를 너무 늦게 알아버린 남작이 바닥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곤 에스텔라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 무지함에서 비롯된 무례를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십시오.”
에스텔라가 목을 가다듬고 진정했다. 그리고는 역정을 내던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르게 경어를 사용하면서도 결코 친절하지 않은 말투로 차분히 말했다.
“왜 나한테 사과를 하죠? 사과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을 텐데요. 로버트 안 바실리스 경.”
차가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공주의 말에 바실리스 남작은 입술을 꽉 깨물곤 고개를 숙여 이자크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자크 경. 부디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남작의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몸 잘 추스르시고, 특히 손. 의사를 불러드리죠.”
이자크가 오베르에게 손짓했다. 오베르는 그닥 내키지 않는 얼굴로 바실리스 남작을 데리고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뭐 하러 의사를 불러줘요? 알아서 치료하라 해요. 뭐 몇 대 좀 맞았다고 의사까지 불러줘요. 지금 의사가 필요한 건 당신이에요, 이자크.”
“전 괜찮습니다. 다들 훈련 시작해. 이제 구경거리는 끝났으니.”
“피가 나는데 괜찮기는 무슨!”
에스텔라는 훈련원 건물로 들어가는 이자크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나머지 기사들이 훈련생들을 데리고 훈련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훈련생들은 이자크의 말에 빠릿하게 움직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이자크가 붕대를 꺼냈다. 제대로 소독도 않고 바로 붕대를 두르려 하자 에스텔라가 기겁하며 그의 손에 들린 붕대를 빼앗았다.
“제가 해줄게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며 다시 에스텔라의 손에서 붕대를 빼내려던 이자크의 손을 찰싹 쳐내며 에스텔라가 눈을 부릅떴다.
“제가 할 거라고요.”
“…그럼 부탁드리죠.”
“옷 벗어요.”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주춤대다가 이내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뒤로 돌아 앉힌 뒤 그 뒤에 앉은 에스텔라가 상처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깊은 상처였다면 내 그놈을 아주 작살을 내리라, 그리 생각했던 에스텔라였다.
하지만 상처가 깊지 않다 하여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대야에 물을 떠온 에스텔라가 천천히 상처 주위를 닦아냈다. 대야의 물이 금세 핏물로 변했다. 상처를 닦아낸 뒤 연고를 발랐다. 그 위에 붕대를 천천히 감는데, 이자크는 자꾸만 뒤에서 코 훌쩍대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라 물었다.
“우시는 겁니까?”
“….”
“부인.”
“에스텔라.”
“…에스텔라. 정말 우는 겁니까?”
“속상한데 어떡해요, 그럼.”
그러면서 또다시 코를 훌쩍였다. 이자크가 뒤를 돌려 하면 에스텔라가 아직 다 안되었으니 뒤 돌지 말라며 다시 그의 가슴팍을 앞으로 돌렸다. 이자크는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웃긴 상황이었다. 검은 퓨마가 토끼가 우니 불안해하는 모습 같았다.
“부인. 에스텔라. 울지 마세요.”
이자크가 한참 멀뚱히 앞만 보다 어색하게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뒤에서는 훌쩍이는 소리가 난다. 다친 건 난데 왜 부인이 웁니까. 하며 되도 않는 위로를 하는데 에스텔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쳤으니까 울죠! 게다가 등에는 왜 이렇게 흉터들이 많아요! 으헝헝! 속상해 진짜….”
“그거야 전쟁터를 다녔으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들입니다. 큰 상처도 아니고. 다른 이들이 보면 비웃겠습니다.”
“비웃으라 그래요. 내가 아주 아작을 낼 테니까!”
아작 낸다는 말에 강조하면서도 또 훌쩍훌쩍 대는 모습에 이자크가 슬쩍 뒤돌아 에스텔라의 얼굴을 쳐다봤다. 에스텔라가 보지 말라면서 그의 얼굴을 앞으로 돌려버렸다.
“눈이 아주 마카롱이 되었습니다.”
“놀리지 마요! 지금 속상해 죽겠는데 진짜 농담이나 하고… 아무래도 역시 그놈 아작을 내야겠어, 찾아가서 똑같이 등짝을-”
이자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뭘 자꾸 아작을 낸다는 건지.
“왜 자꾸 웃냐고요!”
“에스텔라. 고마워요.”
“…뭐, 뭐가요.”
다정한 목소리로 고맙다 말하는 이자크의 모습에 에스텔라가 괜히 시침 뗐다. 양 볼이 발그레해진다.
“그렇게 화내줘서.”
“당연한 걸 무슨….”
“오늘 이곳엔 왜 오셨습니까.”
“보고 싶어서 왔죠.”
숨기지 않는 마음에 이자크가 괜히 말을 바꿨다.
“아이들은요.”
“집사랑 잠시 근처 시내를 둘러본다고 해서 그러라 했어요.”
“그래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자크는 괜히 할 말이 없어 치료가 끝났으니 옷을 입겠다며 블라우스를 다시 입기 시작했다. 에스텔라가 기겁했다.
“피 묻고 찢어진 걸 입겠다고요? 새 블라우스로 갈아입으세요.”
“어제 급히 오느라 여벌의 옷을 못 챙겨서….”
원래 훈련장에 여벌의 옷을 꼭 구비해두는 편이지만, 오늘은 여벌의 옷들 빨래가 안 되어 있는 상태였다.
“급히 올 일이 뭐가 있다고…. …근데 어제 나한테 예쁘다고 한 거 맞죠?”
이자크가 모르쇠를 시전했다.
“아이들이 늦는 것 같은데, 시내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말 돌리지 말고요. 예쁘다 했잖아, 나한테.”
에스텔라가 씩 미소 지으며 이자크 앞으로가 눈을 마주쳤다. 이자크가 흠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에스텔라는 그런 반응이 서운한 듯 치, 하며 아쉬운 티를 냈다. 이자크가 에스텔라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예쁩니다.”
“에?”
“예뻐요. 객관적으로. 당신은 예뻐요. 고백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지나가는 개를 잡고 물어도 그리 대답할 사실이니까요.”
“….”
“왜 그리 쳐다보십니까.”
이자크는 실실 미소지으며 이자크 주변을 빙 도는 에스텔라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에스텔라가 호호, 요상한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아, 객관적으로, 제가 예쁘다고요?”
“객관적으로요. 주관적 아닙니다.”
“흐음. 일단 이자크 눈에 제가 예뻐 보이기는 한다는 거죠?”
“….”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얼마큼 예쁘죠? 응?”
“그렇게 평가하는 식은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주관적으로 얼마큼 예뻐요, 내가? 이자크 눈에? 응?”
응? 응?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스텔라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키 차이 때문에 그의 가슴팍 정도밖에 닿지 못했지만.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의 이마를 검지로 꾹 밀어내며 침착하게 말했다.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아이들을 데리러 나가볼게요.”
“같이 가요. 가서 새 블라우스도 좀 사죠. 오랜만에 가족끼리 다 같이 쇼핑이나 나가보고.”
“아이들만 데리고 집에 돌아갈 거라 안 사도 됩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아 팍팍하게 굴지 말고요.”
아까만 해도 화내고 훌쩍이던 에스텔라가 방긋방긋 웃으며 이자크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모습이 루시, 루스와 너무나도 똑같아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자크는 못 이기는 척 따라 나가 마차에 올라탔다.
* * *
시내에 도착한 에스텔라는 상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직접 찾아 나서는 게 좋겠습니다.”
이자크가 그리 말했지만 에스텔라는 너무 걱정 말라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싸고돌면 오히려 애들이 더 불안해하는 거 알죠? 집사 할아범이 제 호위기사들호위기사 중 제일 강했던 사람이에요. 불굴의 노장이라고나 할까. 집사랑 여기저기 다니면서 노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내버려 두죠.”
사실 이자크와 단둘이 다니고 싶었던 마음도 조금 있었다.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그리 반박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눈으로 직접 집사 할아범의 실력을 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자크는 빨리 아이들이 왔으면 했다. 에스텔라와 단둘이 있어봤자 또 헛소리가 나오거나, 그녀의 화법에 말려들 것이 뻔할 테니 말이다.
“와, 이 가게 들어가 봐요.”
에스텔라가 가게 진열대에 놓인 액세서리와 드레스들을 보더니 눈을 빛내며 그를 잡아끌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화색을 보이며 익숙하게 말 걸었다.
“공주님! 정말 오랜만에 오셨어요!”
“…제가 여기에 자주 왔었나요?”
에스텔라가 당황하며 물었다.
“몇 주 동안 앓으셨다고, 랭 마담이 말해줘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공주님께서는 제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하니까…. 찾아뵐까 했는데 랭이 어찌나 말리던지.”
진즉에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며 여자가 멋쩍게 웃었다. 에스텔라는 그 맞장구를 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내저었다.
“뭘 그리 미안하다고, 사실 내가… 그 사정이 있어서, 몇몇 일을 기억을 못 해요.”
“네?”
“그러니까, 음. 머리를 부딪혔는데 잠깐의 기억상실이 있어서 모든 걸 다 기억하지 못해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이나 다름없어요. 우리가 무슨 사이였죠?”
에스텔라가 작게 직원에게 속삭였다.
“혹시 내가 여기에 내 다른 애인들 데리고 오거나 그런….”
혹여나 이자크가 듣기라도 할까 아주 아주 작게 물었다. 직원은 그런 에스텔라와 이자크를 슬쩍 쳐다보다 말했다.
“어머, 그런 거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내가 혼자서 막 쇼핑하러 다닐 것 같진 않았어서.”
“공주님은 이곳에 뭔가 사려고 오신 게 아니세요.”
“응?”
“아무튼, 공주님은 저한테 은인이셨어요. 자세한 얘기는 그럼 제가 찾아뵙고 할게요. 랭 마담이 왜 말렸는지 알 것 같네요. 지금 공주님께서는 이야기를 들으실 상황이 된 것 같으니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뵐게요.”
가끔씩 차를 마시며 수다 떠는 그런 가벼운 사이가 아니었던 걸까. 그녀 역시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 에스텔라에게 모호한 말을 했다. 에스텔라는 그리하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직원은 그런 에스텔라와 이자크를 쳐다보더니 뭔가를 눈치챈 듯 크게 말했다.
“아, 공주님. 그러고 보니 랭 마담의 연회 초대장 받으셨죠?”
“아, 네.”
“제가 드레스 원하시는 대로 다 드릴게요. 제가 이렇게 가게 낸 것도 다 공주님 덕이니까. 쭉 둘러보셔요. 제 뮤즈는 공주님인지라, 웬만한 건 다 공주님과 어울리실 거예요.”
이 가게의 사장이자, 동시에 디자이너이기도 한 여자가 에스텔라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에스텔라는 신나서 눈을 반짝였다. 열아홉 살 그녀는 까마귀가 울고 갈 정도로 화려하고 빛나는 것에 환장하던 사람이었다.
에스텔라가 가게를 돌아다니며 옷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와, 너무 예쁘다. 어머. 이것도 너무 예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가게를 돌아다니는 동안, 이자크는 마네킹인 양 가게에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여자가 슬그머니 그에게 가서 말했다.
“부군께서도 골라보세요. 남성복 디자인도 꽤 잘 나가거든요.”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분명 연회에 가시면 두 분께서 제일 눈에 띄실 거예요.”
그리곤 다시 에스텔라 옆으로 가서 직접 옷을 골라주기 시작했다. 에스텔라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아, 옷이 정말로 아름답다. 하며 행복해했다.
“와. 이거 입고 연회 가면 기분 째지겠네.”
고상함과는 거리가 먼 단어가 에스텔라 입에서 나왔다. 평소와는 다른 에스텔라의 모습에 정말 기억상실이 맞으시긴 하구나, 하며 가게 사장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라는 저 멀리서 있는 이자크를 힐끔 보더니 한 번 더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와! 이거 입고 연회 가면 진짜 엄청 행복하겠다!”
물론 이자크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에스텔라는 쳇, 혀를 한 번 차고는 다른 쪽에 걸려 있는 남성복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자크! 얼른 와봐요. 이거 되게 이자크랑 잘 어울리지 않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제가 봤을 땐 이거 정말 잘 어울려요. 어, 이것도 예쁘다.”
“그쵸? 부군께서는 붉은색도 되게 잘 받으실 거 같아요.”
옆에서 사장이 맞장구치면 에스텔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 이자크는 안 받는 색이 없는 거 같아요. 솔직히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호호호, 하며 말도 안 되는 주책을 떨어댔다.
아직 연회에 갈 거라는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걸로 아는데.
일부러 눈치 주는 거라는 것 누가 모를 줄 아나. 이자크는 절대 연회만큼은 가지 않을 거라고 단정지어 놓았다.
“…하아. 다 예쁜데, 연회에 갈지 안 갈지 몰라서. 아니, 아마 이자크는 안 가는 걸로 마음 굳혔을 거야.”
“공주님.”
“드레스는 나중에 줘요. 진짜 나 주는 거다? 선물인 거죠? 나 선물 받는 거 되게 좋아하거든.”
“그럼요. 꼭! 부군과 함께 오세요. 제가 그동안에 공주님과 부군을 위한 옷을 디자인해놓을게요. 만족하실 거예요. 공주님께선 항상 제게 재능이 있다고 말씀해주신 유일한 분이셨으니까요.”
“내가요?”
“네. 되게 다정하셨어요. 되게 다정하시고, 또 부군을 얼마나 사랑하셨는데요. 귀족들의 근거 없는 소문 같은 거 저 안 믿어요. 꼭! 오세요.”
두 분이서 연회 가실 때 여기 방문해주시면,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커플로 만들어드릴게요. 하며 여자가 진심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었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에 고마워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이름을 안 물었네요. 미안해요, 기억 못 해서. 이름이 뭐죠?”
“가브리엘 샤론이요.”
“샤론. 고마워요.”
에스텔라는 그렇게 말하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만 나가요, 우리. 하며 이자크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침 멀리서 집사와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집사 할아범의 모습으로 변한 아르텔은 역시나 이곳저곳 끌려다니며 기진맥진한 상태로 있었다. 아무리 초월적 존재라 한들, 어린 새싹들의 폭발적인 궁금증과 호기심, 모험심, 장난기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거의 두세 시간 동안 공포의 ‘왜?’ 늪에 빠져 있던 아르텔은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등장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
“집사, 좀 쉬고 있을래? 안색이 창백한데.”
에스텔라는 창백하게 질린 아르텔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원래라면 예의상 한 번 거절해주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할 테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궁금함과 체력이 비례하게 높았던 아이들 때문인지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또한 에스텔라 뒤에서 가만히 먼 산만 보고 있는 이자크의 모습에, 눈치껏 빠져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임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에스텔라, 이자크, 루스, 루시. 처음으로 네 가족이 함께 야외 소풍을 나오게 되었다.
이자크의 왼손을 잡은 루시가 루스의 손을 잡고 루스는 에스텔라의 손을 잡는다. 에스텔라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물었다.
“뭐 하고 놀았어. 여기저기 둘러봤어?”
“웅. 베이먼이, 그, 막 맛있는 것두 사주고! 그래써.”
“그랬어? 집사 할아범이 많이 피곤해하던데. 이번엔 우리끼리 놀자.”
“좋아!”
아르텔은 집사 영감으로 변해 있을 때 베이먼이라 불린다. 사실, 베이먼의 몸속에 아르텔이 들어와 사는 것이니 다른 이들은 아르텔의 진짜 정체를 모르고 있다.
초월적 존재도 힘들게 만드는 아이들이, 고작 몇 시간 논 것 가지고 만족감을 느낄 일 없었다. 길을 걷다 공원을 지날 무렵, 주변을 둘러보던 루시가 무언가를 본 듯하다.
잘 걷고 있던 짧고 통통한 다리가 우뚝 멈췄다. 이자크는 무슨 일인가 싶어 루시를 내려다봤다.
“루시? 다리 아프니? 안아줘?”
루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이자크의 손가락을 잡고 있던 손을 푸르더니 한 곳을 가리켰다.
“나도! 저거 하고 싶어.”
루시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루시의 손가락 끝을 쳐다봤다. 잔디 위에서 엄마, 아빠, 아이로 보이는 가족이 돗자리를 깔고 음식을 먹으며 놀고 있었다.
“저런 건 온실에서 자주 하던 거잖아.”
“온실이랑, 여기랑 같아? 아빠 바보.”
“루, 루시.”
“마망, 우리도 저거 하자. 돗자리 깔구 맛있는 거 먹자아-”
루시가 떼를 쓰니 루스 역시 따라 한다.
“먹자아, 소풍 하자아-”
“그런데 지금 음식도 없고 돗자리도 없는데?”
에스텔라가 당황하여 아이들을 달래듯이 차분히 말했다. 다음번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올까? 응?
그 말에 루시와 루스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루시는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맨날 맨날 다음에만 하구. 다음이 언젠데.”
그동안 서운했던 무언가가 있었던 건지 평소 활발하고 울지 않는 아이가 눈에 띄게 실망하며 울먹인다. 에스텔라는 얼른 아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일! 내일 어때? 응? 내일 엄청 큰 라탄 가방 안에, 샌드위치도 넣고, 음료도 넣고, 빵도 넣고, 케이크도 넣고, 과일도 넣고, 루스랑 루시가 좋아하는 인형들도 넣고. 많이많이 넣어서 오랫동안 놀다 들어가자. 봐봐. 지금 하늘이 벌써 어두워지고 있지?”
“진짜루?”
“약속. 그쵸, 이자크 아빠-? 이거 거짓말 아니죠?”
에스텔라가 이자크에게 물었다. 루시와 루스, 그리고 에스텔라의 시선이 이자크에게로 향했다. 이자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 아이들을 안아 들었다.
“그래. 내일 다시 오자. 오늘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까.”
그제야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언제 울먹였냐는 듯 다시 신이 나서는, 그럼 우리 내일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나는 무슨 인형을 가져올 거다, 너는 무슨 인형을 가져올 거다. 나는 케이크 몇 개를 먹을 거다, 주스를 몇 잔이나 먹을 거다 하며 세세한 일정까지 짜기 시작했다.
겨우 집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저녁 식사를 한 뒤 알아서 침실로 들어갔다. 물론, 침대 밑에 괴물이 살 거 같다는 루스는 오늘도 루시의 침실에서 같이 자기로 했다.
평소 같았으면 온실이든 어디든 더 놀다 들어가겠다고 땡깡을 부릴 것들이, 오늘은 시키지 않아도 씻고 옷을 갈아입곤 침대에 누웠다.
아이들을 씻겨주던 시녀들이 우리 아가씨랑 도련님이 웬일로 바로 주무신대요- 하며 장난스레 묻자 둘은 자랑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듯, 응! 우리 내일 가족 소풍 간다! 하며 히히덕댔다.
에스텔라는 아이들이 욕조에서 물장구치며 노는 동안 욕조에 걸터앉아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렇게 내일이 기대되니?”
“네-!”
신나서 꺄르륵 웃어대는 모습에 에스텔라 역시 따라 미소지었다. 그녀 역시 기대된다. 이자크까지 함께 바깥에 나가 도란도란 시간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쯤 이자크가 방에 찾아왔다.
“제가 재울 테니, 그만 돌아가서 쉬세요.”
“같이 있어도 되는데.”
“압빠. 엄마도 같이이-”
루시가 눈을 꿈뻑이며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옷자락을 양손에 쥐었다.
“아빠, 그거 해줘. 그거.”
루스가 말하자 이자크는 아이들 옆에 누워 작은 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돌리자 아이들은 마치 요술에 빠진 것처럼 스르륵 눈을 감기 시작했다.
“자장가.”
루시의 요구에 이자크가 살짝 고민된다는 듯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그녀가 있어서 신경 쓰인다는 걸까. 에스텔라는 저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어깨를 끄덕였다. 이자크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조용조용 음을 읊기 시작했다. 그리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어도 귀에 거슬리는 것 없이,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였다.
가만히 그의 자장가를 듣던 에스텔라가 생각했다. 어, 이거 저번에 내가 불렀던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며 에스텔라는 아이들 옆에 누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에스텔라.”
“헙!”
“쉿. 애들 깨요.”
어느 순간 그가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일어나니 아이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에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든건가 싶어 창피한 듯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자크 목소리가 좋아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봐요.”
멋쩍게 웃으면서 말하는데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왜 그런가 싶어 이자크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이자크가 손가락으로 제 턱 부근을 톡톡 쳤다. 반사적으로 에스텔라가 제 턱을 닦았다. 침이 흐르고 말았던 건가. 턱이 흥건하다. 꼬맹이들도 침 안 흘리고 자는데! 창피함에 에스텔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눈치 못챌 정도로 슬쩍 미소짓곤 방을 빠져나왔다. 에스텔라가 그 뒤를 얼른 따라왔다.
“애들이 내일 엄청 기대되나 봐요.”
뒤따라온 에스텔라가 슬쩍 물었다.
“저도 엄청 기대되는데, 이자크는요? 응?”
“무사히 돌아가기만 기도하는 중입니다. 아이들은 공 같아서 여기저기 튀어다니니까요.”
“저도 같이 있을 텐데 별일 있겠어요.”
그러자 이자크가 발걸음을 멈추며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자크가 말했다.
“에스텔라가 제일 걱정입니다.”
“…제가요?”
“부인이 제일 튀어다니는 공이에요.”
그렇게 말하곤 쌩하니 방으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 그건 마치 당신이 제일 사고 많이 치고 돌아다니는 요주의 인물이라 말하는 것 같아 에스텔라가 얼른 반박하려 안으로 들어갔다.
“내, 내가 왜 공이에요?”
“부인이 잘 생각해보세요.”
“….”
곰곰이 생각해보자 여러 군데 짚이는 것이 있어 더 반박할 수 없었다. 에스텔라는 다만 기가 막힌다는 듯 허! 참! 흥! 같은 요상한 소리를 내며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웠다. 에스텔라가 슬쩍 고개를 돌려 정자세로 누워 있는 이자크를 힐끔댔다.
“왜요.”
“아니 그냥요. 그냥, 내일 이자크도 기대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기대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럼요. 억지로 가는 거면 좀 슬플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하곤 에스텔라가 얼른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언제나 이자크의 옆에 누워도 심장이 떨린다. 맨 처음 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일 설렌다. 이자크는 그걸 모를 것이다. 에스텔라는 그리 생각했다.
에스텔라가 눈을 감고 잠이 들려 하자 이자크가 고개를 돌려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뒤척이며 작은 등이 그를 등졌다. 이 여자는 항상 제 말만 한 다음엔 이렇게 쉽게 잠이 든다.
잠버릇이 어찌나 고약한지. 이불은 죄다 가져가면서 또 그 가져간 이불을 제대로 덮지도 않는다. 이자크는 몸을 일으켜 난장판이 된 이불을 정돈해 에스텔라에게 다시 덮어줬다. 19살의 에스텔라가 이 몸에 들어온 이후로 매일이 이렇다.
헝클어진 에스텔라의 머리칼을 슬며시 만져봤다. 부드럽고 가느다란 머리칼이다. 머리칼을 정리해 그녀의 귀 뒤로 넘겨주며 이자크가 중얼거렸다.
“…나도, 조금은 기대됩니다.”
모두가 그렇듯, 이자크에게도 역시 네 가족이 단란하게 피크닉 가는 건 처음이었다. 에스텔라는 항상 뭔가에 쫓기듯 바빴고,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집에 붙어있어도 서재에 처박혀 뭔가에 몰두하거나 찾아오는 손님들 맞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당신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알고 싶었어. 나는.”
이자크가 혼잣말을 했다. 평소에는 혼잣말하는 성격이 아닌데 요즘 들어 잠이 든 에스텔라에게 이런 식으로 혼잣말을 하는게 늘었다.
분명 열아홉의 그녀는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 생각했다. 본인도 그리 말했었고. 비록 자신의 신분이 역모죄로 인한 파문된 가문의 장남이라고 해도, 에스텔라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자크는 열아홉의 에스텔라를 믿는다. 그때의 그녀와 그때의 자신이 서로를 열렬하게 사랑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에 무엇이 그들을 이리 만들었는지, 그게 궁금할 뿐이다.
그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 거라면, 자신이 바뀌면 모든 것이 행복하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바뀌고 그녀에게 손을 뻗어도 에스텔라는 모르는 척했다. 아니, 뭔가에 쫓기듯 그들을 내버려 뒀다.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철저히 그들을 고립시켰다.
“이대로 지금의 당신이 이 몸에 들어있길 바라지는 않아.”
열아홉의 에스텔라도 사랑스럽지만, 그는 사실 에스텔라 자체를 사랑한 것이다. 가끔 보여주는 슬픈 눈빛, 그리워하는 눈빛, 우수에 찬 그 눈빛이 자신과 아이들을 향해있는 것이 궁금했으니까.
이따금 잠이 든 아이들의 이마를 쓸어 보던 당신이 궁금했으니까.
이미 잠든 아이들에게 옆으로 가 아주 조그맣게 내가 불러주던 자장가를 불러주는 이유가 궁금했으니까.
냉정하게 구는 당신이 미웠지만, 그럼 모습을 보여줄 때면 당신이 뭘 그렇게 숨기고 있는 건지 궁금했어. 이자크는 그 긴 말들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어차피 공중으로 사라질 말들이다.
입 밖에 내지 못한 채로 다시 삼켜 들어간 말들이 너무 많다. 그들의 사이엔 그렇게 사라진 말들이 너무 많다. 이제 와서 그것들을 토해내기엔 시간이 많이 흐르고 많이 무뎌지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크는 어째서 내일이 기대되는지 알 수가 없다.
무뎌진 거라 괜찮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자꾸만 이렇게 기대하고 설레할 때마다 싫다.
싫은데도 어쩔 수 없다.
“나도 내가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에스텔라.”
다만 원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에스텔라를 있는 힘껏 껴안아 주는 것 아닐까. 지금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에스텔라든, 자신을 미워하는 에스텔라든. 그에게는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
기대에 부푼 마음을 다잡고 몸을 뉘였다. 이자크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 몸의 체질은 왜 머리만 대면 잠이 솔솔 쏟아지는 건지. 에스텔라는 또다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한 꿈을 꿀까 걱정되었다. 이제는 꿈꾸는 날이 꿈꾸지 않는 날보다 더 많다.
오늘 아침 이자크에게 아무런 언질 없이 찾아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간밤에 꾼 꿈이 너무나도 불안해서.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에서 깬 에스텔라가 본능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이자크를 만나러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오늘 바실리스 남작과의 일의 전조가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만일 에스텔라가 기습하려는 남작의 낌새를 눈치채고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아니야. 그렇게 하나하나 의미 부여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텔라는 눈을 꽉 감았다. 잠은 금세 들었다. 이쯤 되면 꿈이 그녀를 불러들이는 것이라 여길 정도로.
“…또야.”
에스텔라는 이제 질린다는 표정으로 미래의 자신을 쳐다봤다. 언제나 배경은 똑같다. 창밖으로 보이는 행복한 에스텔라, 저택 안 서재에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열아홉 살의 에스텔라와 스물여섯 살의 에스텔라.
“답답하게 굴지 말고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달라고 한 백번쯤은 부탁한 거 같은데.”
“나도 말하고 싶지만, 이건 규칙이라니까.”
“그니까 무슨 규칙이요.”
“메라의 규칙.”
“…메라는 신화에나 나오는 신이잖아요.”
“백번 말해줘도 백번 다 기억 못 하는 널 보면 내가 이렇게까지 멍청했나 싶어.”
스물여섯의 에스텔라가 얄밉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뭐, 뭐라고요? 그러는 넌! 이자크한테 상처나 준 게!”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최선은 개뿔이.”
“그래 맞아. 최선은 개뿔이. 난 이미 실패했어. 그러니까 다시 너로 돌아간 거겠지. 어차피 이 꿈에서 네가 기억하는 것은 별로 없을 거야.”
“그럼 왜 자꾸 꿈에 나와서 사람을 괴롭혀요?”
“그냥 듣고 싶어서.”
“뭐를?”
“감정에 솔직한 너와 이자크의 이야기들. 분명 지금의 너는 이자크를 품을 수 있을 테니까. 난 그렇지 못했거든. 난, 그저 지키는 거에만 급급해서 그들의 상처를 볼 생각이 없었어.”
그녀는 꽤나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괜히 손가락을 튕기며 애석해진 마음을 추스르는 건 열아홉 살의 에스텔라나 스물여섯의 에스텔라나 바뀐 것이 없었다.
“지키는 건, 이자크와 꼬맹이들을 말하는 거예요?”
“풉, 꼬맹이들. 그래. 작은 꼬맹이들이지. 귀엽지? 어쩜 그렇게 나와 이자크를 반반씩 빼다 박은 건지.”
아이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나오는 건지 스물여섯의 에스텔라가 생긋 미소지었다. 항상 지치고 피곤하고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 아이들 이야기에 금세 유해졌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에스텔라는 그녀가 이자크와 아이들을 싫어하거나 귀찮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그리 느껴오긴 했었다. 물어보기 애매한 분위기였던지라 차마 물을 수 없었지만, 오늘의 에스텔라는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자크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야멸차게 대했어요?”
“…지키는 거에 급급했다니까. 그 이상은 말 못 해. 규칙 위반.”
“오늘 이자크가 다쳤어요. 바실리스 남작이 뒤에서 기습을 해서.”
“그놈은 예전에도 그랬지.”
“알만하다는 듯 말하네요?”
스물여섯의 에스텔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시치미 뗐다. 그러더니 잠시 벽에 걸린 시계를 가만히 쳐다봤다. 에스텔라가 그녀를 따라 벽걸이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 아니던가?
“내일 뭐 하지?”
“내일은, 이자크와 꼬맹이들이랑 같이 소풍 가요.”
“…그래.”
스물여섯 에스텔라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왜 그래요? 아, 규칙 위반인가.”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마, 에스텔라. 아이들에게서 눈을 절대 돌리지 마. 알았지. 아니, 제일 좋은 건 그냥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뿐이야. 바깥은 너무 위험한 것투성이야. 힌트 하나 줄게. 지금 네가 시간을 뛰어넘은 게 과연 이번이 처음일까?”
“…갑자기 무슨-”
“이제 그만 눈 떠.”
그와 동시에 에스텔라가 눈을 번쩍 떴다.
아직 새벽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은땀을 실컷 흘린 채로 에스텔라가 몸을 일으켰다. 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에스텔라가 옆을 살폈다. 이자크는 아직 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행여나 저 때문에 그가 깰까 싶어 에스텔라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심장이 매우 뛴다.
무슨 얘기를 했었더라?
오늘 아침과 마찬가지로 꿈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매우 불안한 마음이 에스텔라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손끝이 시렸다.
탁 트인 숲의 경관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에스텔라는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에스텔라는 답답한 듯 제 머리통을 쥐어박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대며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부인. 왜 안 자고…. 괜찮은 겁니까?”
에스텔라가 옆에 없다는 걸 느낀 이자크가 잠에서 깼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창가에 불안하게 서 있는 에스텔라를 보더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왔다.
왜 안 자냐고 물으려던 그가 부들부들 몸을 떠는 작은 아내를 보더니 이내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얼른 맞은편 소파에서 숄을 찾아다가 에스텔라를 감쌌다.
“이렇게 떠는데 왜 숄도 두르지 않고 창가에 나와 있는 겁니까.”
“이자크….”
“손도 이렇게 차가울 때까지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흐린 초점, 부들부들 떠는 몸, 창백한 얼굴. 에스텔라는 몸에 두르는 것 하나 없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창가에 있는 듯했다. 언제부터였던 걸까? 한 시간 전? 두 시간 전?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려던 이자크는 맨발인 에스텔라의 모습에 기함하고 만다.
“에스텔라! 맨발이잖아요!”
“아.”
그제야 맨발인 걸 눈치챘다는 듯 에스텔라가 엄지발가락을 꼼지락댔다. 어쩐지 발이 차갑고 시리더니. 내가 맨발이었구나. 마치 정신이 반쯤 빠져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자크는 그대로 에스텔라를 안아 들었다.
“이, 이자크?!”
“그쪽에 더 있다간 몸이 꽁꽁 얼 겁니다. 이제 슬슬 겨울이 오는데 그러다 감기까지 걸리면 그렇게 원하는 연회는 꿈도 못 꿀 겁니다.”
에스텔라는 마치 사냥당한 동물 마냥 이자크의 어깨에 엎드려 배를 걸친 상태로 대롱 매달렸다. 에스텔라가 다리를 버둥거리자 움직이지 못하게 다리를 잡은 이자크는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 위로 에스텔라를 올려놓더니 이불을 끌어다 목 부근까지 바짝 당겨줬다.
그리고 그도 그 옆에 새우처럼 모로 누웠다.
“잠 안 와서 저기 있던 건데….”
“또 악몽이라도 꾼 겁니까?”
“악몽은 아닌데, 그냥 기분이 좀…. 잠도 다 깨서 안 오고. 마음도 답답하고. 그래서 저기 있던 건데.”
“그래도 자야 할 것 아닙니까. 대체 몇시간 동안 저기 있었던 겁니까. 몸도 이렇게 차고, 내일 안 그래도 애들이랑-“
“알아요. 애들이랑 한 약속은 지킬 거예요. 그거 걱정돼서 이러는 거면 안 그래도 되는데.”
“그거 때문만이 아니라-“
말을 하려다 말고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등을 토닥였다. 에스텔라의 눈에 초점이 들어오며 살짝 땡그래졌다. 지금 왜 내 등을 토닥이는 거예요? 하는 눈빛이다.
“당신 불면증이 심했으니까, 한동안 잘 자는 것 같더니 또 못 잘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겁니다. …주치의한테 숙면에 들 수 있는 약초 주문해놨으니, 약이 오면 바로 드세요.”
“걱정해주네.”
“네. 걱정하는 겁니다.”
“왜요?”
“글쎄요. 걱정되니까요.”
“내가 잠 못 자서, 막 예민하게 굴까 봐, 그러면 애들이 또 상처받으니까. 그런 거 때문이죠? 이자크의 일 순위는 우리 꼬맹이들이니까.”
“얼른 자요.”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눈부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에스텔라는 그의 말대로 눈을 꼭 감았지만 잠이 올 리 만무했다. 이자크는 한참 동안 에스텔라의 등을 토닥였다.
참 웃긴 남자다. 매번 말로는 지친다, 질렸다, 그만할 거다, 밀어낼 거다, 소용없다 같은 말만 하면서 이럴 때는 참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여 준다.
창가에 있어 차갑게 식었던 몸이 점점 녹아내렸다. 등을 토닥이는 이자크의 손짓과, 모로 누워 가까이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규칙적이다.
잠 안 올 텐데. 잠 안 왔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에스텔라는 점점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애들 상처받는 거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닙니다. 이번엔 당신이 진짜 걱정돼서 그러는 겁니다.”
“진…짜요?”
“그래요.”
“기분 좋다… 걱정해주니까아….”
에스텔라의 목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이내 쌕쌕 소리를 내며 에스텔라가 다시 잠이 들었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기도 하고, 혹여나 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날까 한참 동안 그녀를 주시해야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러진 않았다. 에스텔라가 평소의 그녀처럼 이불을 모조리 빼앗고, 발로 이불을 퍽퍽 차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나서야 그도 안심하고 잠이 들 수 있었다.
*
분명 잘 잔 것을 확인하고 잠이 들었는데, 자고 일어난 에스텔라는 어째서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이자크는 하얗게 질린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 루시와 루스를 불렀다.
아이들은 오늘을 정말 기대한 듯 유모가 깨우기 한참 전부터 저들끼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혼자 빗질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양말까지 신은 뒤 피크닉에 챙겨갈 자신의 애착 인형들을 고르고 있었다. 물론 얼굴은 씻지 않아 눈곱이 껴있었고, 빗질도 엉성한 데다가, 옷은 거꾸로 입었고 양말도 짝이 맞지 않는 걸 신었지만, 그만큼 아이들이 오늘을 기대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에스텔라가 아프니까.
이자크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며 말했다.
“루스, 루시. 오늘 엄마가 많이 아픈 거 같아.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지만, 우리 엄마 안 아플때 다음에 다시 갈까?”
“우웅, 기대했는데에.”
예상대로 아이들의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에스텔라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엄마도 기대했어! 하나도 안 아파. 우리 꼬맹이들이랑 놀 생각에 아픈 거 싹 사라졌어! 가자. 갈 준비하자!”
“부인. 당신 얼굴 창백한 거 안보입니까? 입술도 푸른 기가 도는데-“
이자크의 입을 얼른 막으며 에스텔라가 속삭였다.
“저렇게까지 기대하는데 어디 몸살 난 것도 아니고. 살짝 으슬한 정도니까 그냥 옷 따듯하게 입고 나가요. 네?”
아이들의 기대만땅 초롱초롱 눈빛을 외면하기엔 루시와 루스는 너무 귀엽고,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안타까웠다.
옷이야 두껍게 입으면 되고, 낮이 되면 날씨도 더 따듯해질 테니 감기 걸릴 일은 없을 거다. 물놀이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햇살 아래에서 도시락 먹고 술래잡기 놀이나 해대는 것이 끝일 텐데, 그 어렵지도 않을 것을 고작 몸이 조금 좋지 않다고 저버리기엔 너무 무심한 게 아닐까. 에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에스텔라의 마음을 눈치챈 건지 이자크도 더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상태가 더 안 좋아지면 바로 돌아올 겁니다.”
“좋아요.”
에스텔라가 활기차게 침대에서 내려와 루시와 루스를 껴안으며 말했다.
“꼬맹이들! 나갈 준비 다 한 거야? 엄마도 얼른 준비할게. 오늘 나가서 놀자.”
“진짜루?!”
“응. 진짜루!”
“엄마, 안 아파?”
“엄마 안 아파. 우리 애기들이랑 놀 생각에 엄청 신났어.”
일부러 몸을 크게 움직이며 에스텔라가 제 건강을 과시했다. 아이들은 그래도 여전히 엄마가 걱정되는 듯 우물쭈물하며 이자크의 눈치를 봤다. 에스텔라는 아이들이 조금 더 자신에게 떼쓰고 응석 부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엄마 진짜 괜찮다니까? 애기들, 엄마랑 피크닉가기 싫어?”
“그건 아니지마안….”
결국 이자크가 아이들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며 달랬다.
“아빠가 괜히 앞서 걱정했어. 엄마 안 아프대. 넷이 가서 재밌게 놀자. 미안해. 응?”
그제야 루시와 루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쌍둥이들은 서로 손을 꼭 잡고선 응!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피크닉 때 가져갈 물품들을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곰돌씨도 같이 가고 싶어 해서 데려갈 거구! 그리고 이건 예쁘니까 가져갈 거구….”
조그마한 것들이 힘도 좋지 저 작은 가방 안에 온갖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에스텔라는 역시 오늘 약속을 깨지 않아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가방 안에 빛나는 뭔가가 보였다.
“이건 뭐야? 음, 보석이네? 보석은 왜 챙겼어?”
꽤나 값비싸 보이는 보석이 나왔다. 이런 걸 애들 장난감으로 줬었나? 혹시라도 삼키면 어쩌려고 이런 걸 장난감으로 주나. 에스텔라가 의아한 눈빛으로 이자크를 쳐다봤다. 이자크 역시 저런 보석은 본 적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가 가방에서 보석을 꺼내 루스와 루시에게 물었다.
“응. 엄마랑 아빠 맛있는 거 사줄라구.”
“이게 어디서 났는데?”
“집에서 굴러다니는 거 주워떠.”
루시가 얼른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말했다. 이자크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확신했다. 루스 역시 괜히 손가락을 꼼질대면서 루시의 손을 잡는 걸 보니 거짓말이 확실했다.
“정말 집에서 굴러다니는 거 맞아? 거짓말은 나쁜 거랬지, 루스. 루시.”
“거짓말 아니에요- 진짜 굴러다니는 거 주은 거야. 예엣-날에 아저씨들 왔을 때 바닥에 뚝 떨어진 거 나랑 루스가 주운 거야아-!”
루시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예전에 아저씨들 왔을 때? 에스텔라는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그거, 내가 외도가 의심되는 남자들을 집에 데려왔을 때를 말하는 건가.
“그래. 알았어. 루시랑 루스가 주운 거구나.”
“루시 거짓말 안 해. 그때 엄마가 돈이 필요하다구 해서 내가 잘 간직하고 있던 거란 말이야.”
“돈이 필요하다고 했어? 엄마가?”
에스텔라는 루시의 말에 놀라 물었다.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차고 넘치는 게 돈인데? 아무리 대부가 왕위를 이었다고 해도 공주는 엄연히 왕족이다. 왕족의 재산은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말이 있듯이, 메시앙의 모든 것들이 그녀의 재산이며 그리하여 그녀가 돈이 필요할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 외도를 한다면 돈이 필요해서 보석을 가져오란 말은 안 하지 않나? 사랑의 증표로 보석이나 반지 따위를 주고받는 경우는 있어도.
“응. 엄마가 뭐 할라면 돈 필요하다고 해떠.”
“그 얘기를 들었어?”
“일부러 들으려고 안 했어요.”
루시가 추궁하려는 에스텔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혼내려는 게 아니야, 루시.”
“나는 원래 아저씨한테 줄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나 이르케 머리 쓰다듬으면서 나 가지라고 했단 말이야. 근데 엄마가 방에서 돈 아닌 척할라면 이거 필요하다구 해서 내가 잘 기억하고 가지고 있던 거라구. 루시 억울해! 루시 거짓말 안 하구 나쁜 애도 아니란 말이야!”
계속해서 추궁당하자 결국 루시가 주저앉으며 와앙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루스 역시 따라 엉거주춤 앉으며 훌쩍인다. 이런. 피크닉 가기 전부터 온갖 진을 다 뺀다. 에스텔라는 얼른 나쁜 아이 아니란 거 알아, 엄마가 궁금해서 그랬어 하며 아이들을 달랬다.
“엄마가 루시랑 루스의 마음을 몰라줬다. 이거 엄마 위해서 간직한 거였구나-”
“웅.”
“그래. 그럼 우리 오늘 이걸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럴까?”
“웅!”
다행히 아이들은 단순해서 금방 달랠 수 있었지만, 에스텔라는 아직 의문점이 풀리지 않았다. 돈 아닌 척하려면 이게 필요하다고 했다고?
돈 아닌 척하기?
탈세라면 말이 안 되는 것이, 왕족과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단 말이다.
물론 세금은 내지 않지만 자금들을 어디다 어떻게 썼는지는 꼭 국왕에게 보고서를 갖다 바쳐야 했다.
에스텔라는 어쩌면 루시가 말하는 것이 외도의 현장을 목격한 것이 아닌 그 외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이자크도 있고 하니 이 이상 물어볼 수 없지만, 언젠가 다시 루시에게 그날 일에 대해 상세히 물어볼 생각이다.
아이들은 의외로 많은 것을 기억하고, 보기 때문이다.
에스텔라의 그런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양 이자크는 가만히 준비하기 위해 시녀를 불러들이는 제 아내를 쳐다봤다.
루시가 보석을 주운 얘기를 했을 때 그는 제 아내의 외도 현장을 아이가 목격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에스텔라가 진정으로 외도를 하여 그 상대방이 있다 할지라도, 그녀는 절대 아이들의 눈에 보이게 하지 않거나, 집 자체에 들여올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이자크 역시 루시의 억울함으로 인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제 아내가 만났던 수많은 남자가 어쩌면 단순한 불장난을 위한 이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적어도 쾌락만을 위하는 외도질에 ‘돈 아닌 척하기’ 같은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메시앙에서는 외도를 해도 불법이 아니다. 외도를 한 경우 처벌받는 법도 없다. 해서 서로 대놓고 정부를 따로 만들거나 하는 이들도 태반이다. 외도 상대방에게 제 재산을 주든 말든 상관 안 한다. 메시앙의 국법은 그저 겉보기에 그럴싸한 부부 관계만 유지한다면 별 간섭을 안 한다.
‘그러니 제 애인에게 줄 재산 문제로 한 말은 아닐 테고.’
저번에 가브리엘 샤론이라는 디자이너의 말도 마음에 걸린다. 단순히 쇼핑을 하기 위해 그곳을 들락날락한 것이 아니다?
이자크는 제 아내가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외도를 의심하며 불안해하는 것이 아닌, 왜 그녀가 그렇게 변했는지 이해하고 싶어져서.
“이자크! 나갈 준비 해야죠.”
에스텔라의 밝은 목소리에 상념에 빠졌던 이자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언제 옷을 갈아입고 온 것인지 잠옷 차림이었던 에스텔라가 연보라색의 라일락이 떠오르는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와아! 엄마 되게 이뿌다!”
“라일락 같다, 라일락!”
쌍둥이들이 에스텔라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신나 소리쳤다.
“아빠 늦어-! 빨리 옷 입어야지이!”
얌전한 루스도 신나서 이자크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빨리 가요. 이러다 늦어요! 덕분에 이자크 역시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으러 나갔다.
준비를 마친 네 사람은 루시와 루스가 새벽같이 일어나 주방장과 함께 만든 땅콩잼 샌드위치와 유모와 미엘라 외 저택 시종들의 ‘이혼 철회’ 염원을 가득 담아 만든 5단 도시락을 받아 들고 마차에 올랐다.
오늘 소풍에는 다른 이들 참가 없이 네 사람만 간다.
항상 붙어 다니던 집사 할아범도, 유모도, 시녀도 없이. 집사 할아범은 유독 불안한 눈빛으로 정말 제가 안 가도 되겠습니까, 연신 에스텔라와 이자크에게 물었지만 결국 유모에게 한 소리 듣고 말았다.
“무탈히 다녀오십시오. 공주님. 이자크 님. 그리고 우리 아가씨랑 도련님도 제발 멀리 나가지 마시고 꼭 근처에서 노셔야 하시고-”
“집사도 참. 물가에 내놓은 애도 아니고 왜 이리 불안해하는 거야. 잘 다녀올게. 걱정 말고.”
에스텔라는 베이먼의 말을 잔소리쯤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베이먼은 과거의 오늘 일어난 일을 알고 있다. 몇 번의 반복된 시간 속에서 헷갈릴법한데도, 그날의 에스텔라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에스텔라는 짐승처럼 울부짖고 기절했다. 다시 정신이 들면 또 울부짖다가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이자크 역시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쳤다. 두 사람은 이번 일로 완전히 갈라지고 말았고 이자크는 그 이후 에스텔라를 떠났다. 바다를 건너 해외로 가서 아예 새 삶을 살려던 이자크는 태풍에 휩쓸려 배와 함께 바다 한가운데에서 수몰당했다.
과거의 오늘. 미래의 오늘.
사랑스러운 쌍둥이 루시와 루스는 연못에 빠져 죽는다.
베이먼은, 아르텔은. 그걸 알고 있으나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망할 놈의 규칙. 빌어먹을 규칙. 아르텔은 그저 이 모든 규칙과 예외를 만든 변덕쟁이 메라 신에게 빌 뿐이다. 제발. 제발. 신께서 저들에게 기회를 주기를. 더는 에스텔라를 끝없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지 말기를.
*
마차는 출발했고 아이들은 신나서 노래를 해댔다. 대부분 즉석에서 지어낸 가사들로 하늘 위 구름이 집사 할아범의 콧수염 모양이야, 저 옆의 구름은 유모의 커다란 속바지 같아, 그 옆은- 등의 요상한 가사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가사를 부르면서도 신나 꺄르르 웃는 아이들의 모습에 에스텔라도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대로 잠을 못 자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꿈에서 미래의 자신과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 한참 동안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며 기억해낸 것이 두 개 있다.
눈을 떼지 마.
처음일까?
그거 말고는 당최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두 개가 뇌리에 박힌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잠깐. 그러고 보니 무슨 규칙이 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에스텔라는 다시 한참 동안 미래의 자신과 나눈 대화를 기억하기 위해 애를 쓰다가도 아이들이 엄마! 하고 부르면 아이 잘한다, 아이 노래 잘한다 우리 꼬맹이들! 하며 이상한 노래가사와 박자, 리듬에 맞춰 박수를 짝짝 쳐줬다.
이자크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알을 도륵도륵 굴리다가도 아이들의 부름에 활짝 미소지으며 박수를 쳐주는 에스텔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슬쩍 올라갔다.
그렇게 마차는 저택의 영지를 벗어나 숲을 지나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커다란 공원에 도착했다. 마부가 마차를 멀리 대러 간 사이 네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두툼한 도시락과 돗자리를 챙겨 명당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여긴 돌부리가 너무 많아. 저긴 햇빛이 너무 없어. 저긴 뭔가 무서워. 저긴 별로 안 예뻐. 한참 동안 공원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네 사람의 마음에 쏙 드는 자리를 발견했다. 성인 남자 넷이 팔을 벌려 둘러도 다 못 두를 만큼 커다란 은행나무. 햇빛이 따스하게 내리쬐어 전혀 춥지 않은 데다가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종종 떨어질 때마다 감탄을 자아냈다.
“여기다!”
루시의 말에 세 사람 모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크가 돗자리를 깔자 세 사람 모두 신발을 벗어 던지곤 그 안에 풀썩 드러누웠다.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너무 뜨겁지도, 눈부시지도 않아 햇볕을 쬐기 최적의 장소였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 노란 은행잎, 제 옆구리를 덥혀주는 두 꼬맹이들, 처음으로 같이 피크닉 나온 이자크. 모든 상황에 만족한 듯 호선을 그리며 눈을 꼭 감았다. 지금만큼은 어제 꾼 꿈을 기억하려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기분이 들어 슬쩍 눈을 떴다. 돗자리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자크의 모습이 보인다.
아. 잘생겼다, 내 남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이마에 손을 얹는다. 에스텔라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이자크가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아니. 아파서 눈 감고 있는 줄 알고.”
“압빠. 엄마 걱정해써?”
에스텔라의 옆구리에서 꼬물대던 루스가 동그란 눈으로 묻는다. 그러자 루시도 얼른 고개를 위를 쳐들고 에스텔라 옆구리에서 아빠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걱정한 고야?”
“진짜로 저 걱정한 거예요, 이자크?”
꼬맹이들의 추궁에 힘을 얻은 에스텔라가 기뻐하는 얼굴로 물었다. 이제 이 사람이 알아서 날 걱정까지 해주다니. 꽤나 장족의 발전 아닌가. 이자크는 얼른 에스텔라의 동그란 이마에 붙어있는 제 두툼하고 거친 손을 치웠다. 그러자 에스텔라가 아쉬운 듯 쳇, 소리를 내며 그가 대고 있던 이마에 손을 가져가 만지작댔다.
이자크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인지라 꽤나 당황한 듯하다. 에스텔라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자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이질감 없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을 확인하고 말았다. 이게 가능했던 사이인가? 이자크는 자신이 너무 쉽게 구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애들한테 옮기면 안 되니까 저도 모르게 열을 잰 것뿐입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그가 당황했을 때는 귀 끝이 빨개진다는 건 본인은 모를 거다. 에스텔라는 귀 끝이 빨개진 이자크를 힐끗 쳐다보다 사랑스런 꼬맹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루시가 에스텔라의 귀에 속삭였다.
“엄마. 왜 아빠가 걱정하면서 걱정 안 하는 척해? 부끄러워하는 고야?”
맹랑한 질문이었다. 루시의 말에 에스텔라가 검지를 입에 가져가더니 쉿. 모르는 척해 주자 하면서 씩 미소 지었다. 해사한 미소를 잠시 넋놓고 바라보던 루시가 에스텔라를 따라 활짝 웃으며 제 짧은 검지를 마찬가지로 입술에 대고 엄마를 따라했다.
“음- 알았어요.”
에스텔라가 콧소리 내며 그리 믿어주겠노라, 생색내듯 대답했다. 이자크는 여전히 귀 끝만 빨개진 채로 에스텔라의 생색에 오해라며 변명하려다가, 지금 이렇게 변명하는 스스로도 어이없고 황당하여 입을 꾹 다물었다. 루시 역시 “알았더 아빠. 그래. 그렇게 해. 그렇게 믿어줄 테니까 도시락이나 먹자.” 하며 피크닉 바스켓으로 손을 뻗었다.
가장 먼저 쌍둥이들의 정성이 가득 담긴 눌러 터져버린 땅콩잼 샌드위치를 꺼내 들었다. 아이들이 만든 것답게 빵 이곳저곳이 납작하게 눌려있다. 고사리손으로 일일이 빵을 피고, 그 위에 잼을 바르고 샐러드를 얹고, 유자 소스를 얹었을 생각을 하니 아까워서 못 먹겠다.
식빵에 난 쌍둥이들의 손가락 자국이 마치 눈발 위에 조그맣게 난 고양이나 강아지들의 발자국같이 작고 하찮고 깜찍하다. 아이들은 샌드위치를 꺼내 직접 그릇에 하나씩 나눠 줬다. 엄마 하나, 아빠 하나, 나 하나, 루스 하나. 루시가 뿌듯한 표정으로 ‘아, 힘들었다.’ 하며 제 이마를 슥 닦는다. 그러자 이마에 땅콩잼이 철퍽 묻었다.
에스텔라는 그런 루시의 이마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자크 역시 잼투성이가 된 루시의 이마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얼른 냅킨을 가져가 이마를 닦아줬다. 루스는 그런 루시를 보며 깔깔 웃었고 루시 역시 제 이마에 묻어있던 잼을 보더니 이마에 잼이 묻었잖아-! 하며 꺄르르 웃어댔다.
별거 아닌 걸로도 그 넷은 한참 동안 웃었다.
꼬맹이들의 손맛이 닿아 그런가. 분명 달고 상큼해야 할 샌드위치에 어쩐지 짠맛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애피타이저를 먹고 난 뒤에 루시와 루스는 저기에 꽃밭이 있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채곤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화환 만들어 조.”
루시가 에스텔라에게 꽃다발을 안겨줬다. 코스모스와 토끼풀들 한 아름을 가져와 화환을 만들어 달라는 루시에게 에스텔라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화환? 만들어 본 적 없는데.”
에스텔라의 기억으로는 화환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항상 시녀들이 만들어준 걸 쓰고 다니기만 했지 직접 만들어본 적은 없다. 사랑스런 루시의 부탁을 안 들어줄 순 없어 엉성하게 꽃들을 묶어보다 뚝뚝 줄기가 끊어지길 몇번 반복했다.
기대하던 루시의 눈빛도 꽃줄기가 뚜둑 끊어질 때마다 실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 화환이 이렇게나 만들기 어려웠던 걸까? 에스텔라가 진땀을 빼며 꽃들을 조심조심 묶다가 이번에도 역시나 힘 조절을 잘못하여 뚝 끊기고 말았다.
“엄마. 왜 이렇게 못 만들어어- 그림에서는 잘 만들었잖아!”
“그림? 무슨 그림?”
“방에 있는 그리임- 엄마가 화환 엮고 있는 거 있잖아.”
“그런 초상화가 있어? 기억에 없는데-“
에스텔라의 기억 속에 왕실에서 그린 초상화 중 화환을 엮고 있는 초상화는 없었다. 이자크와 결혼 이후에 그린 초상화인가? 그런 그림은 본 적이 없었다. 이곳 저택의 방들 대부분 둘러봤던 지라 어떤 방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루시는 대체 어느 방에 걸려 있는 초상화를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이리 주십시오.”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손에 들려있는 엉성한 화환을 가져갔다. 그러더니 굉장히 능숙한 솜씨로 꽃줄기들을 엮는 것이 아닌가. 루시는 물론 에스텔라와 루스 모두 입을 떡 벌리고 그의 현란하고 섬세한 솜씨에 감탄했다.
그는 매우 커다란 손을 가졌다. 길고 두꺼운 손가락은 검에 최적화된 거친 손이었다.
그는 과거 전장의 영웅이었고, 그 증거로 몸과 손은 흉터투성이였다. 손가락 중간중간 볼록 튀어나온 흉터들과 손바닥 아래 검을 잡는 모양대로 굳은살이 배긴 그런 손이, 커다란 검을 쥐고 무자비하게 오만한 바실리스 경을 교육하던 그 손이, 지금은 가녀리고 얇은 꽃들을 엮고 있다.
“와, 아빠 진짜 잘 만든다!”
루시의 외침에 루스도 얼른 꽃을 꺾어와 이자크에게 건넨다.
“아빠, 나도! 나도 해 주세여! 루시랑 똑같이 만들어 주세여!”
어느새 루시의 화환이 완성되었고 얼마 안 가 루스의 화환도 멋들어지게 완성되었다. 에스텔라는 머리에 화환을 쓰고 신나서 서로 꺄르륵 웃어대는 쌍둥이들을 쳐다봤다. 이 남자가 원래 이런 쪽의 솜씨가 좋았던가?
굉장한 반전매력을 가진 이다.
아. 아니지. 이자크는 원래 섬세한 사람이니까 그리 반전도 아니지.
에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로의 화환을 바꿔 쓰기도 하는 쌍둥이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참 평화롭고 예쁘다. 사랑스럽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에스텔라의 머리 위에 뭔가가 씌인다. 이자크의 커다란 손이 보였고, 그의 손이 에스텔라의 머리에서 떨어지자 작은 꽃잎 몇 개가 떨어졌다.
에스텔라의 머리 위에는 화환이 올려져 있었다.
“어….”
예상 못 한 선물에 에스텔라가 가만히 손을 올려 화환을 만지작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자크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가만히 에스텔라를 내려다봤다.
루시가 본 초상화는 에스텔라가 볼 수 없는 곳에 있다. 아마도 이자크가 일하는 동안 그의 서재에서 ‘보물찾기’라는 명목으로 책상 여기저기 뒤지다가 발견한 초상화일 거다. 절대 서재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에스텔라와 달리 이자크는 아이들이 제 서재에 드나들며 책을 볼 수 있도록 어린이용 도서로 그의 서재 반을 채웠었으니까.
설마 그 초상화를 찾았을 줄은 몰랐는데.
그건 그의 책상 서랍 맨 아래에 들어있으니까. 그걸 열려면 심지어 열쇠까지 필요하다. 열쇠를 찾아 굳게 잠긴 그의 미련으로 가득 찬 서랍을 열었을 때 루시는 가장 해사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초상화를 발견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