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7화 (7/21)

7장.

“…엄마요?”

낯선 남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스텔라 역시 생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 유부녀인데.”

긴박한 상황인 줄 알았던 아르텔 역시 당황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하지만 이내 곧 당황하며 얼른 사라지는 남자의 모습과, 엄마를 지켰다는 뿌듯한 미소의 쌍둥이들, 그리고 에스텔라의 손에 들려 있는 꽃 한 송이 둥둥 꽂혀 있는 샴페인을 보고선 상황파악을 할 수 있었다.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에스텔라가 콧방귀 뀌며 그가 주고 간 칵테일을 홀짝였다.

“보는 눈은 있떠 가지고.”

“있어서 가지고.”

루시와 루스가 에스텔라를 따라 하며 콧방귀 뀌곤 짧은 양팔을 꽜다. 아,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에스텔라의 양옆에 딸린 쌍둥이를 보지 못한 사내가, 그것도 이국의 사내가, 에스텔라에게 수작을 걸려다 실패한 것이었다.

“아, 집사 왔어?”

“무슨 일입니까, 공주님? 혹여 괴한이라도-”

“아니야. 캘리아나 왕국에서 온 이 같은데. 어쩜, 내가 유부녀에 쌍둥이 엄마인지 몰랐나 봐. 웨이터 하나가 나한테 이걸 건네는 거 있지?”

에스텔라는 기가 막히면서도 기분은 좋은 듯 상기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꾀임은 또 처음이었던지라. 이것이 진정 어른들의 세계인가 싶었다.

에스텔라는 신나게 악단의 연주에 맞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휘젓고 다녔다. 그 모습이 캘리아나 선박을 타고 온 이국의 사내 눈에는 퍽 사랑스럽게 비췄던 걸까. 그는 숨을 몰아쉬며 한 박자 쉬고 있는 에스텔라에게 샴페인 잔에 꽃을 띄워 보냈다.

“이걸 왜 나한테 주지?”

난데없이 샴페인잔을 받은 에스텔라가 묻자, 웨이터가 공손하게 저쪽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의 신사분께서 보내셨습니다.”

“이걸?”

“예.”

웨이터가 가리킨대로 시선을 돌리자 벽안의 눈, 짙은 이목구비를 한 사내가 찡긋 한쪽 눈을 감았다 뜨며 느끼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나한테 보내? 잘못 보낸 거 아니야?

이런 종류의 시시덕거림, 추근댐은 또 처음이었다. 갑자기 술을 보내? 꽃을 띄워서? 어라? 눈이 마주치자 눈 한쪽만 깜빡이네? 왜 저러지? 눈이 아픈가? 설마 저게 유혹하는 거? 귀족 아닌 이들은 이런 식으로 이성을 꾀는 건가?

신선한 두 번째 충격이었다.

오, 백성들의 추근거림은 귀족들의 것보다 더 직설적이었다. 제 재산 자랑이나 해대거나 부채 살랑거리면서 무언의 몸짓을 이해 바라는 것보다 더더욱 직접적이었다.

조만간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에스텔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가왔다. 하얗고 키 큰 사내.

“안녕하세요. 레이디.”

어눌한 메시앙의 언어로 말하는 이는 누가 봐도 캘리아나 인이었다. 세상에, 이국의 사내가 날 유혹하다니! 에스텔라는 난생처음 겪는 이성의 직접적 유혹, 외국 남자의 유혹에 설렘보다는 신기함이 더 컸다.

“캘리아나에서 왔나 봐요?”

“예. 로버트라 불러주세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이를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메시앙 언어를 곧잘 하시네. 한두 번 온게 아닌가 봐요?”

“캘리아나에서 사절단으로 온 로버트 안 바실리스입니다.”

“바실리스? …아, 바실리스 남작 가문?”

“저희 가문을 아시나봅니다?”

얼핏 들었다. 19살 초반, 이자크의 결혼 전, 얼핏 아버지가 바실리스 남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에스텔라에게는 고작 몇 달 전에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바실리스 가문은 주시해야 하는 가문이라고. 메시앙에 들어온 이후부터 이곳에서 뭔가를 하는 것만 같다고. 뭘 하는 것 같은데요? 라는 에스텔라의 질문에 선왕은 아직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며 에스텔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왕은 에스텔라를 아직 품에서 내보내기 싫은 아기새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뭐, 네. 좀. 바실리스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요.”

에스텔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견적을 보아하니, 여자 후리기 다니기 좋아하는 난봉꾼이겠군. 훤칠한 키, 나름 반반한 외모에, 이국에서 온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몇 명의 여인들을 후리고 다녔을지 눈에 훤했다.

에스텔라의 행색이 그리 귀한 분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최대한 정갈한 옷을 입었으니까. 아마, 귀족쯤은 아니어도 중산층 정도의 언제나 윗공기를 열망하는 꾀기 쉬운 아가씨라 생각했겠지.

“그런데 나한테 이 술은 왜 보낸 거죠?”

“저희 캘리아나에서는 마음에 든 이성에게 이렇게 술을 보냅니다. 달콤한 샴페인에, 싱그런 꽃 한 송이를 띄워 그대와 밤을 보내고 싶다는. 뭐, 그런 유치하지만 직설적인.”

밤을 보내고 싶다니. 에스텔라가 기가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백성들의 추근덕거림인 줄 알았더니, 그저 여자 밝히는 놈이 입 털기 딱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에스텔라가 조금만 어리거나 신분이 낮았더라면, 아마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봤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째. 난 그쪽과 밤을 보낸 생각이 없는걸요.”

“순진한 눈빛 아래, 보이는 그 검은 마음이 나한테는 다 보여요.”

“뭐라는 거야.”

“이름을 알려주세요, 레이디. 아까 전 우리 눈을 마주쳤잖아요. 그대도 내가 보낸 술을 마셨고.”

“술이야 주니까 마셨지.”

“아까 전 당신이 순수한 척 내숭 떨며 나와 눈이 몇 번이나 마주쳤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이게 미쳤나! 에스텔라는 제 허리춤에 손을 올리려는 남자의 손을 찰싹 때렸다.

“눈이 마주치긴 뭐가 마주쳤다는 거야. 난 그냥 아무거나 보이는 대로 봤을 뿐이라고. 험한 꼴 보기 전에 이 손 치우지 그래?”

“튕기는 것도 귀엽군요.”

“튕기는 게 아니라 거부하는 거예요. 완전 거부. 댁 완전 싫어. 알아들었어요?”

싫다는 대도 남자는 손을 치우긴커녕 더 제 몸을 밀착하기 시작했다.

아니, 분명 싫다고,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 술을 마신 게 아니고, 순진한 척 내숭 떨며 요염한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다고! 에스텔라는 억울함과 동시에 깊은 분노가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 얼마나 대단한 몸뚱이라고 이리 내숭을 떠는 걸까. 응? 메시앙의 공주라도 돼? 그래서 이렇게 비싸게 구는 거야?”

남자는 자신을 자꾸 밀어내는 에스텔라에게 점점 화가 나는지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겨 작지만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공주 맞다, 이 개새끼야! 하며 에스텔라가 정강이를 차려 다리를 올리려는 순간, 에스텔라보다 더 빠른 무언가가 남자를 밀쳐냈다.

“우리 엄마예요!”

“엄마 괴롭히지 마!”

“악당!”

“맞아, 악당!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우리 아빠 엄청 세!”

“우리 엄마 화나면 진짜 무셔!”

“혼나!”

아이들이 있는 힘껏 소리치며 작은 주먹으로 남자를 때리기 시작했다. 다리에 매달려 다리를 물고, 주먹으로 아랫부분을 치며. 솜방망이인 줄 알았더니, 나름 묵직한 공격이었던 걸까. 남자는 당황해서 뒷걸음 쳤다.

이내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우리 엄마예요, 하며 화내는 아이들. 겁먹은 듯한 여인. 추근덕대는 것 같은 귀족과 당황한 얼굴. 답은 하나였다.

“아니 지금 애 엄마한테 수작 부리는 거야?”

“저놈 저거 뺀질하게 생겨서는 어디 놈이야? 뭐야, 캘리아나 놈이잖아?”

“저 귀족 놈 한두 번이 아니야. 꼭 젊고 어린 여자한테, 그것도 귀족들한테는 못 그러면서 하층민한테나 수작질이지!”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순식간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엄마…?”

남자는 아이들을 뗀 뒤 에스텔라를 보며 다시 아이들을 쳐다봤다. 에스텔라가 생긋 웃으며 쐐기 박았다.

“나 유부녀인데.”

사람들은 유부녀에게 수작질 부린 그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명색이 귀족인지라 돌을 던지거나 하지는 못했어도 사람들은 충분히 그에게 위협을 가했다.

남자는 주변의 반응에 당황한 건지 이내 사과도 없이 에이씨, 하며 인상을 찌푸리곤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그리고 바로 아르텔이 온 것이다.

아르텔은 무슨 일이냐 물었고, 에스텔라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바실리스 놈이군요. 처벌을 할까요. 감히 공주님께-”

“괜찮아. 꼬맹이들 덕에 해결되었고, 저도 창피하니 당분간 같은 짓 못 하겠지.”

“그래도-”

“일 키우기 싫어. 모처럼 놀러 왔는데, 이런 일로 기분 상하기도 싫고. 딱히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집사도 너무 걱정하지 마.”

에스텔라는 정말 별거 아닌 걸로 치부했지만, 아르텔은 감히 공주님의 몸에 손을 댄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집사의 신분이 저가 그를 쫓아가 패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곰곰이 뭔갈 생각하던 아르텔은 묘안이 떠오른 듯 슬쩍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편 에스텔라는 달짝지근한 샴페인을 다 마신 뒤 꽃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잔을 내려다봤다. 분명 바실리스 놈의 행동은 재수가 없고 불쾌했었지만,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술잔을 보내는 건 꽤나 써먹기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저쪽의 신사분이 보내셨습니다, 라니. 굉장히 뭔가 복잡하고 농염하며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가.

‘잘 기억해뒀다가 써먹어야지.’

누구? 이자크에게.

*

바실리스의 파렴치한에게서 얻은 방법을 써먹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스텔라는 돌아오는 마차에서 아이들에게 말했다. 우리 재밌는 놀이 할래? 재밌는 웨이터 놀이. 저 쪽의 숙녀 분이 보냈습니다, 할 때 당황스러움으로 물든 이자크의 얼굴이 궁금하기도 했다.

아마 지금쯤 황수선화를 받았겠지? 어떤 반응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저녁때쯤 저택에 도착했고, 시종들을 물린 채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에스텔라는 오른쪽 끝에, 이자크는 왼쪽 끝에. 모르는 사람처럼 눈도 마주치지 않다가, 루스와 루시가 에스텔라의 지시에 따라 그에게 술과 꽃을 함께 보낸다.

이자크가 고개를 돌려 에스텔라를 쳐다보자 에스텔라는 세상 치명적인 척하며 한쪽 눈을 깜빡였다. 얼굴 근육이 그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오른쪽 한 번 깜빡이다 다시 왼쪽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자크의 반응은.

“…눈병이라도 난 겁니까?”

“….”

“이게 지금 무슨 놀이인 건지.”

참으로 한결같이 재미없는 사내다. 에스텔라는 원하던 반응이 나오지 않아 답답한 듯 제 가슴을 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지금 이자크 꼬시는 거잖아요.”

“…네?”

이자크는 진심으로 몰랐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럴 만도 했다. 이게 지금 장난이나 놀이가 아니고 꼬시는 거라고? 이자크는 한편의 희극을 보는 줄 알았다.

얼굴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고장 난 것처럼 찡긋대는 것이 유혹하는 거였다고?

소꿉놀이의 연장선인 양 아이들이 음식을 죄 질질 흘리고 들고 오는 것이?

주변에서 시종들이 불안한 눈빛과 거친 생각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데도?

이자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은 채로 물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워 온 겁니까?”

“어, 음. 눈동냥?”

에스텔라가 께름칙한 얼굴로 눈을 뱅글뱅글 돌리다 말했다.

“눈동냥?”

그게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스텔라는 얼른 말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루시와 루스가 끼어들었다.

“있잖아, 아빠. 내가 오늘 루스랑 엄마 지켰더.”

“응? 지켜?”

이자크는 루시와 루스를 한꺼번에 안아들어 제 무릎에 앉힌 뒤 물었다. 지키다니, 엄마를? 왜? 아이들은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응. 이짜나, 금발 아저씨가 막 엄마 만졌다?”

“…뭐?”

“엄마가, 막, 싫다, 싫어, 했는데 계속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랑 루스가 막 깨물고 꼬집고 소리치니까 도망갔더.”

“웅. 도망갔어. 나쁜 아저씨 우리가 무찔렀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이자크가 인상을 찌푸린 채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얼른 시선을 피했지만 벗어날 순 없었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입니까. 부인.”

“글쎄요, 나는 잘….”

“부인.”

에스텔라는 이자크에게 그런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분명 왜 위험한 곳에 애들을 데려갔냐며 한소리 할 것이 분명했다.

“그냥 잠깐 항구에 나갔다가….”

“황수선화를 보내셨지요. 그걸 사러 나간 겁니까?”

“아, 아니 그걸 사러 나간 게 아니라 그냥 나간 김에 산 거죠….”

에스테라가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을 만지작대다가 제 금발 머리칼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그건 에스텔라가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 숨기는 일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 이자크가 아이들을 내려놓곤 본격적으로 캐기 시작했다.

“루시와 루스를 데리고 항구에 나간 겁니까. 사람도 많고 그만큼 위험한 곳인데-”

“아, 알아요. 애들 위험한 곳에 데려간 거 아는데, 나는 그냥 캘리아나 선박이 들어온다길래… 아니, 잠깐만요. 근데 그게 이렇게 추궁당하고 혼날 일인가?”

변명을 하던 에스텔라가 억울한 듯 물었다.

나는 이자크가 좋아서 꽃도 보내고 이런 웃긴 상황극도 한 것뿐인데.

고작 항구에 애들 좀 데리고 나갔다고 무거운 분위기를 잡고 혼날 일이란 말인가. 적어도 열아홉 살의 에스텔라에겐 그리 느껴졌다.

꽃이 예쁘다. 당신과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이 난다. 고맙다. 덕분에 미소 지었다. 그런 말은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그녀의 노력을 깡그리 무시한 채 혼나고 싶진 않은 것이다.

“부인, 나는-”

“됐어요. 됐어. 내가 다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애들 데리고 그 시끄럽고 위험한 곳에 가고. 그래요. 다 내가 잘못한 거죠!”

결국 에스텔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철없이 굴면 안 되는데. 그래도 서러운 것을 어쩐다. 이미 눈물이 왈칵 나오는데.

그 자리에 더 있었다간 시종들 앞에서 엉엉 눈물 콧물 흘릴 거 같아 에스텔라가 얼른 자리를 떴다. 쿵쿵쿵, 발소리를 크게 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하아….”

이자크는 제 안와 부근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자크는 자신을 자책했다. 아이들은 엄마가 운다며 따라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결국 집사를 불러 오늘의 일을 모두 물어보기 시작했다.

“집사. 무슨 일인지 자네가 다 말해보게.”

유모에게 아이들을 맡겨 위층으로 올려보낸 뒤에 이자크가 집사를 중앙 홀로 불렀다.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있던 이자크는 오늘 낮의 일들을 모두 들었다.

에스텔라가 항구로 간 이유부터, 꽃집의 일부터, 카페를 갔다가 아이들이 축제에 가고 싶어했다는 점도, 그곳에서 바실리스 가문의 놈팽이가 수작을 부렸던 것도 모두.

이자크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마친 아르텔이 슬쩍 이자크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공주님께 너무하시긴 했습니다. 공주님은 그저 이자크 님께서 황수선화를 매우 좋아하신다 하셔서 그걸 사러 나가신 건데, 그에 대한 말씀은 없으시고 바로 추궁하시기만 하시니…. 미천한 제가 말씀드리긴 뭐 하지만, 지금의 공주님께서는 과거의 기억이 없으시잖습니까. 이자크님과 잘 지내려 그리 노력하시는데….”

“….”

“아까 지나가시는데, 얼핏 보니 우시는 것 같았습니다. 가서 조금이라도 위로를 해주심이 어떨까요. 제가 너무 건방졌다면….”

“아니야. 자네 말이 맞아. 이만 가보게. 부인과는 내가 알아서 풀 테니.”

아르텔이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이자크는 탁탁 타들어가는 모닥불 앞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황수선화를 좋아한다. 그건 에스텔라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열넷, 자신이 열여섯. 온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자크는 에스텔라를 보고 황수선화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얀 얼굴, 백금발의 머리칼, 연갈색의 눈동자. 이 세상 나쁜 것은 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순수한 눈망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하게 보이지 않겠다는 도도한 말투. 메시앙의 별이라 불리는 왕의 하나뿐인 혈육이자 사랑하는 공주. 모두의 사랑만 받고 자란 별처럼 빛나는 존재.

자신과는 많이 달랐다. 변경백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해왔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했고, 열넷이 되고 나서부터는 전투 지휘를 하기도 했다. 수많은 이를 죽이고, 떠나보내고, 피로 물든 언덕을 보기도 했으며 까마귀로 뒤덮인 시체를 보기도 했다.

변경백이라는 것은, 기꺼이 그림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왕을 위해 나라를 지켜야 하는 그림자. 밤같이 어두운 존재. 왕족의 그림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왕이 그에 준하는 권력을 주는 거라고. 아버지는 그리 말씀하셨고 이자크 역시 그리 생각했다.

단순히 놀고먹으라고 그 권력을 준 것이 아니야.

그렇게 살다 보니 이자크는 저도 모르게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말수가 적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렵고. 사교계보다 전장이 더 마음이 편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왕을 뵈었고, 그날 열린 연회를 피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 녹음 가득한 곳을 발견했다.

이자크 영식 역시 꽃을 좋아한댔지? 공주가 가꾸는 온실이 있어. 제 엄마를 닮아 식물을 좋아해서 말이야. 기회가 되면 둘러보게나. 왕의 말이 기억이 났다.

항상 보는 것이 황량한 언덕이나 시체 산이라 그런가. 이자크는 녹음 가득한 숲이나 향기 나는 꽃을 좋아한다. 온실을 가꾸며 식물에 물을 주다 보면 마음에 평화가 온다.

아버지는 그럴 시간에 훈련이라도 더 하라 하셨지만.

이자크는 자신이 온실을 좋아해서 다행이라 여겼다.

그날, 그 연회에서, 온실에 있지 않았더라면 에스텔라와 단둘이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

“흐어어어엉!”

에스텔라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자크는 심지어 쿵쿵 발소리를 내는 자신을 잡지도 않았다. 나 지금 서운하다는 뜻을 담아 그렇게 있는 힘껏 쿵쿵 걸어댔는데, 잡지도 않았어!

“나빠! 나쁘다고! 어어엉!”

에스텔라가 분한 듯 침대에서 다리를 굴렀다. 퍽퍽퍽, 침대 시트와 이불이 이리저리 뭉개졌다. 이자크는 항상 까먹는 것 같다. 자신은 지금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철혈의 26살 에스텔라가 아니라, 이자크가 손으로 쿡쿡 찌르기만 해도 자지러질 19살의 에스텔라란 말이다.

“말 좀 예쁘게 하란 말이야, 이자크 이 나쁜 자식아아아! 흐어엉!”

다시 한번 퍽퍽퍽, 발을 굴렀다.

밖에서는 시녀들이 공주님, 공주님, 하며 발만 동동 굴러댔다.

“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올라오지도 않아?! 뭐야, 이번에도 각방 쓰자 이거냔 말이야아!”

에스텔라가 훌쩍이며 원망 섞인 말들을 내뱉었다. 아니,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이렇게 엉엉 우는데. 우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일 층까지 내려갔을 텐데. 이렇게 목청껏 울어대는데, 남편인데, 남편이. 아내가 우는데. 오지도 않아?

서럽다. 서러워. 에스텔라가 서럽다면서 다시 펑펑 눈물을 흘렸다.

아주 보란 듯이 곡소리를 냈다.

흐어엉, 허어엉, 으어엉, 어엉, 흐흐흑, 흑, 으아앙. 온갖 소리의 울음소리가 부부의 침실에서 들려왔다. 시종들은 제 주인의 눈치를 보느라 제 일을 하기 힘들었다.

바로 위층에서 저리 곡소리를 내는데도 올라가 보지 않는 이자크가 너무한 것 아니냐는 말도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흘러 흘러 이자크가 있는 중앙 홀에도 들려왔다.

바람 소리를 타고 오는 흐느낌에, 의자에 앉아 있던 이자크는 유령의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기괴한 소리에 잠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 뒤에 어느새 와 있는 집사 아르텔이 말했다.

“공주님께서 울음을 멈추시질 않으시네요.”

“….”

가만히 있던 이자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텔라는 계속해서 울어댔다. 어느새 프릴이 잔뜩 달린 린넨 베개가 흠뻑 젖었다. 축축해진 곳에서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들을 쏟아내며 에스텔라는 억울함에 항소하고 또 항소했다. 물론, 그 항소를 받아줄 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더럽고 치사하다, 잘생기면 다야?! 어? 멋지면 다야?! 맨날 화만 내고. 근데 왜 화내는 얼굴도 멋진데. 나는 왜 자꾸 좋아하기만 하는데에에- 허어엉.”

내가 얼마나 억울한데. 얼마나 억울한지 알기나 해?

에스텔라가 그리 중얼거리며 울었다. 묵혀왔던 것들이 한번에 터졌다. 몇 년간의 짝사랑. 그 짝사랑의 결혼식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고, 영문도 모른 채 먼 미래에서 눈을 떴는데 그 짝사랑은 자신을 미워한다.

미래의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유도 모르지만 일단 잘 보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하는데, 그마저도 통하지 않고. 좋아하는 걸 해줘도 타박만 하는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흐어엉. 잘못은 미래의 내가 잘못했지. 나는 아무 잘못 없다고! 좋아한 게 죄냐! 어! 죄야!”

한창 소리치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어번 두드렸다.

“가! 나 혼자 내버려두라고!”

에스텔라가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 보나 마나 또 시녀나 유모겠지. 오라는 놈은 안 오고 꼭! 그리 생각하는데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들린다.

“부인. 접니다.”

“….”

“할 얘기가 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에스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베개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엎드려 있을 뿐이다. 대답이 없자 허락으로 간주한 이자크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끽, 마호가니 원목의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 이자크의 걸음걸이 소리.

침대 시트와 매트리스가 한쪽으로 쏠리며 이자크가 제 옆에 앉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에스텔라는 여전히 가만히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베개가 많이 축축하다.

“부인.”

“….”

“미안합니다.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질 못하고 타박 먼저 했습니다.”

“….”

에스텔라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이자크는 울다 기절한 건가 싶어 에스텔라의 등 쪽에 살짝 귀를 가져다 댔다. 쌕쌕 숨은 쉰다. 베개를 꼭 쥐고 있는 손가락도 꼼지락댄다.

“부인.”

“….”

“에스텔라. 나 좀 봐요.”

“….”

답이 없던 에스텔라는 이자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살짝 몸을 움찔댔다. 지금, 이름으로 불러준 건 처음이지? 저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부르는 건 처음이지?

그는 항상 에스텔라를 이름이 아닌 부인, 당신, 그대 등의 정 없는 것들로만 불렀다.

그런 이자크가 이름을 부른다.

에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나 좀 봐달라며 이름까지 불러주는데 어찌 답을 안 하리. 이자크 한정으로만 한없이 나약해지고 주책맞아지는 자신이 야속하면서도, 이번에도 역시 그에게 져주기로 한다.

“왜요.”

에스텔라가 잔뜩 코 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퉁퉁 부은 눈. 얼굴 여기저기 콧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축축한 것들. 산발이 된 머리칼. 이자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풉. 아, 아니. 에스텔라.”

“…이자크는 내가 웃겨요?”

“미안해요. 꼭 등껍질을 잃어버린 거북이 같아서….”

“뭐, 뭐라고요?”

애 같이 운다, 붕어처럼 운다, 그런 것도 아니고 등껍질을 잃어버린 거북이 같다니? 신박하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나쁜, 그렇다고 마냥 기분 나쁘기엔 본인도 웃긴 비유에 방금 전까지 서러워서 죽죽 흐르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등껍질을 잃어버린 거북이의 심정이 뭔지 알 것도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너무 황당한 나머지 에스텔라는 멍하니 이자크를 쳐다봤다. 이자크는 겨우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에스텔라의 얼굴을 대고 있던 베개에 선명히 보이는 눈, 코, 입의 눈물, 콧물, 침 자국에.

웃으면 안 되는데. 이 상황에 웃으면 진짜 안 되는데. 하지만 너무 웃긴 걸 어쩌나. 이 여자가 왜 이렇게 귀여운지. 이자크는 큭큭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에스텔라는 사과를 하러 온 건지 자신을 비웃으러 온 건지 모를 이자크를 야속한 눈으로 쳐다보다 퍼뜩 정신 차리며 그를 밀기 시작했다.

“놀, 놀릴 거면 나가요! 불난 집에 부채질하나! 나가요! 나가!”

“아니, 그게 아니라. 에스텔라.”

“짜증 나아, 진짜! 그런 비유는 또 뭔데요! 진짜!”

에스텔라가 손을 휘저으며 이자크의 가슴팍을 팍팍 때렸다. 이자크는 가만히 맞고 있다 이내 에스텔라의 손을 잡아 막았다.

“에스텔라. 놀리려는 게 아닙니다. 잠깐 나 좀 봐요.”

“싫어요! 창피해요. 등껍질 잃은 거북이가 뭐야! 진짜. 속상해….”

에스텔라의 얼굴은 땅으로 꺼지려는 듯 푹 숙이고 있었고 이자크는 손으로 살짝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눈을 맞췄다.

어찌나 조심스럽게 턱을 들어 올리던지, 에스텔라는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이자크 역시 제 행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에스텔라의 작은 턱을 들고 있던 손을 뻘쭘하게 치우며 이자크가 어색하게 말했다.

“그. 미안합니다.”

“네, 네?”

“…미안합니다. 황수선화, 정말 예뻤습니다. 제가 못나서 고맙다는 말 대신 나쁜 말만 나갔습니다. 좋은 뜻으로 보내주신 거 압니다.”

“….”

“고마워요.”

“제가 왜 황수선화를 보냈는지 아세요?”

“예. 저와 부인이 처음 마주친 날 봤던 꽃 아닙니까.”

“…기억하네….”

그가 기억하는 건 의외였다는 듯 에스텔라가 벙찐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자신에게만 소중한 기억이고 그에게는 그저 수많은 기억 중 하나쯤으로 생각했었다. 이자크에게 관심있는 여자는 많았으니까.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보며 픽 웃곤 말을 이었다.

“어찌 기억을 못하겠습니까. 그날의 당신은-”

무심코 말을 이으려던 이자크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뒷말은 제대로 듣지 못한 듯 하다. 이자크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뒤 말을 바꿨다.

“아무튼, 이번엔 제 잘못입니다. 꽃 고맙습니다. 덕분에 칙칙한 훈련장도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물었다.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그럼 나랑 연회 갈 거예요?”

“그건 아니죠.”

“…쳇.”

아쉬운 듯 에스텔라가 혀를 찼다. 빈틈이 없어, 사람이. 그리 중얼거리며 팅팅 부은 제 눈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제 기분이 좀 풀렸습니까.”

이자크의 질문 에스텔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자크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억울함과 원망스러움은 빠른 속도로 풀리고 있었다.

에스텔라는 배시시 웃으며 애꿎은 제 얼굴만 만지작댔다. 생각해보니 얼굴이 지금 엉망이네. 예쁜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이런 우스꽝스런 모습까지 보여서야 그를 유혹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늦게나마 들었다. 에스텔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괜히 러플 소매로 얼굴 일부를 가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좀, 얼굴도 붓고 그래서… 좀 나가있어 봐요. 나 지금 못생겼어요.”

“어디 보자.”

“네?!”

이자크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에스텔라의 얼굴을 잡더니 그대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각같이 잘생긴 이목구비가 제 눈앞에 떡 하니 다가오자 에스텔라가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제 행동을 인지 못 하는 건가. 이자크는 그대로 퉁퉁 부은 눈의 에스텔라 얼굴 이곳저곳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예쁘기만 한-”

“….”

굳어버린 에스텔라와 눈을 마주친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먼 산을 바라보며 말을 바꿨다.

“많이 붓긴 했군요. 나가 있을 테니 마저 추스르세요.”

에스텔라가 놀란 듯 그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말을 더듬었다.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하는 희망찬 눈빛이었다.

“방, 방금 나한테.”

“아뇨. 잘못 들으신 겁니다.”

이자크는 단호히 말하고선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에스텔라는 황당한 얼굴로 그가 나간 문만 쳐다봤다. 분명, 분명히, 예쁘기만 한데라고 말하려던 것 아닌가? 미친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리 말한 것이 맞다. 에스텔라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그러니까, 예쁘다는 거잖아. 내가. 에스텔라는 그리 중얼거리며 흐흐, 이상한 소리로 웃더니 이내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다리를 동동 굴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축축한 베개가 찝찝하다며 시녀를 불러 시트를 갈게 했다.

에스텔라는 다시 이자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침실에 들어오면 아까 전에 나한테 분명 예쁘다고 하려고 했죠, 하며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요염하고 가련하게 침대 위에서 그를 유혹이라도 해보려 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에스텔라는 그저 부끄러워 늦는 것뿐이라 생각했고 그런 그가 귀엽다 여겼다.

하지만 한 시간, 두 시간. 달이 휘영청 떴는데도 오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에스텔라가 시녀를 다시 불렀다.

“이자크는 안 온다는 거니?”

“아, 그것이… 급하게 훈련장에서 부르셔서 나가셨습니다.”

“뭐? 훈련장? 지금 이 시간에 거길 왜 가?”

“그게, 내일 중요한 분이 급하게 훈련장에 방문해보고 싶다 하셨대요. 그래서 학술원 측에서 아침부터 와달라고 하셔서 그냥 지금 가기로 하셨나 봐요.”

“뭐?!”

에스텔라가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쳤다. 아니, 내일 아침에 와달라는데 왜 지금 가고 난리야?! 에스텔라가 황당한 듯 소리쳤다.

“사람이 암만 부끄러워도 정도가 있지, 침대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 아 진짜! 이자크 진짜 짜증 나!”

시녀는 에스텔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에스텔라는 몇 번 더 매트리스를 주먹으로 내리치다 이내 쌍둥이들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유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도련님, 이제 그만 주무셔야죠.”

“이잉, 싫어!”

“자꾸 이러시면 루스 도련님 방으로 돌아가게 할겁니다요?”

“유모 미워! 싫어, 나 루시랑 있고 싶단 말이야. 우리 더 떠들어야 해. 그치, 루시.”

“응! 우리 할 얘기 많단 말이야아-”

“아이고, 아까 전부터 항구 얘기만 두 시간째입니다, 이제 그만 주무세요. 내일 또 늦잠 자실라.”

에스텔라가 문밖에서 유모의 한탄을 듣고는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그녀는 표정 갈무리를 한 후 문을 두어 번 두드린 뒤 안에 들어갔다.

“유모는 그만 돌아가봐. 오늘은 내가 애들을 재울테니까.”

유모는 웬일이야, 하는 얼굴로 에스텔라를 쳐다보다 이내 얼른 인사를 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쌍둥이들의 무한 재잘거림을 들어주기엔 유모가 너무 노쇠한 것도 있을 것이다.

“오늘 마망이 재워줘?”

루시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루스 역시 옆에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응. 너희 이렇게 졸려 하면서, 어서 자야지.”

“이잉, 싫어. 더 떠들 고야.”

루시가 고개를 내저었다. 루시 옆에 누워 있는 루스 역시 떠들 고야, 하며 뒷말을 따라 했다. 에스텔라는 아이들의 침대에 앉으며 물었다.

“왜?”

“웅, 왜냐면 엄청 재밌었으니까.”

“오늘 재밌었어?”

“응! 완전!”

졸음 가득한 눈을 애써 뜨며 쌍둥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루스는 루스 방에서 안자고 또 루시랑 떠드는 거야? 너무 재밌었어서?”

“응. 왜냐면, 루시랑 계속 계속 얘기하고 싶었어.”

“마망, 나 맨날맨날 루스랑 엄마랑 놀고 싶다?”

“아빠는?”

루시에게 물었는데 루스가 대변하듯 답한다.

“아빠랑은 많이 놀았오.”

“에이. 아빠가 서운해하겠다.”

“아냐. 아빠 안 서운해해. 아빠도 우리말고 엄마랑 놀고 싶어할걸? 그치 루스-”

“그치-”

“마망, 우리 또 놀러 나가자. 너무 재밌어!”

“웅웅!”

아이들이 키득대며 에스텔라에게 말했다. 아직 밖에 나갔다 왔던 흥분이 가시질 않았던 걸까. 아이들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에스텔라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떼쓰기 시작했다.

그게 뭐라고. 항구에서 몇 시간 놀았던 것이 뭐라고 유모를 잡고 두세 시간 떠들 일인가.

그게 뭐라고 잠이 들기 아쉬울 만큼 오늘의 일을 회상하는 건가.

에스텔라는 괜히 마음이 짠해져 아이들의 이마를 한번씩 쓰다듬었다. 볼록 튀어나온 짱구들이 맨질맨질하다.

“알겠어. 우리 이제부터 여기저기 막 놀러 가자. 아빠도 같이 뒷동산에도 가보고, 시내에도 가보고, 또 항구도 가고-”

“꺄!”

“우와!”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할 일이 많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밤늦게까지 떠들어야 할까? 내일에는 또 새로운 놀이를 해야 하는데 늦게 일어나면 안 되겠지?”

에스텔라의 말에 아이들은 얼른 베개에 머리를 대곤 눈을 꽉 감았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이 귀여워 작게 웃으며 이불을 덮어줬다. 그리고 아이들의 옆에 누워 작고 통통한 배를 문질문질. 간지럽다며 히히 웃어대던 아이들도 이내 노곤해지더니 졸기 시작했다. 잠이 들기 전 루스가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마망, 있짜나… 자장가….”

자장가를 불러달라는 건가. 아는 자장가가 없는데, 말하려는 순간 에스텔라는 무의식적으로 한 멜로디를 읊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그 목소리에 안정감을 찾은 듯 배시시 미소짓다 이내 깊이 잠이 들었다.

작게 울리는 색색거리는 소리. 에스텔라는 자장가를 끝내고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나온 에스텔라가 고개를 갸웃댔다.

내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알지?

‘아빠가 불러줬던 건가? 잘 모르겠네….’

미래의 에스텔라 몸에 밴 것인가? 하지만 미래의 에스텔라는 아이들에게 자장가 한 번 불러준 적 없을 텐데. 에스텔라는 기이함을 애써 누른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

넓은 침대에 양팔과 다리를 벌리고 편하게 누운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아, 침대 한 번 더럽게 넓네….”

새삼 이자크의 체격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이자크 보고 싶다… 나 참나. 분명 나한테 예쁘다 한 거 맞지?”

다시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간다.

그래. 분명 예쁘다 한 거라니까. 그렇게 연신 중얼거리던 에스텔라 역시 오늘 하루 여기저기 뛰어다닌 덕에 금세 잠이 들 수 있었다.

* * *

깊은 새벽. 에스텔라는 넓은 침대에서 뒤척이기 시작했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처럼 미간 사이 자리 잡은 주름이 점점 짙어졌다.

“…으, 안 돼. 안 돼….”

무언가가 그녀를 잡아당기는 걸까. 에스텔라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에스텔라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앓는 소리를 내다가도 뭔가에 분노한 듯 에스텔라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죽여버려, 죽여버릴 놈…! 죽여버릴 놈! 죽여버릴… 허억!”

자신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놀라 에스텔라가 벌떡 일어났다. 숨을 몰아내쉬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미래의 에스텔라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아닌가? 아니, 맞나? 기억해내라고. 같은 말만 반복하던 이가 오늘은 에스텔라에게 이리 속삭였다.

그놈을 죽여.

그들을 살려야만 해.

도망가.

아니, 맞서싸워.

혼란스러워하는 듯이 소리치던 그 모습. 그리고 알 수 없는 분노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사람이 이렇게 슬퍼함과 동시에 분노할 수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이었다.

생생하다. 아직 그 분노가, 그 슬픔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에스텔라는 덜덜 떨리는 제 몸을 꽉 껴안고는 몸을 웅크렸다.

미래의 에스텔라는, 자신에게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뭐야. 돌려 말하지 말란 말이야.

분노는 누굴 향한 것이며 슬픔의 원인은 무엇인가. 열아홉살 의 에스텔라는 왜 미래의 에스텔라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미래의 에스텔라는 왜 사랑하던 이자크에게, 제 배 아파 낳은 아이들에게 그리 야멸차게 굴었는가. 알 수 없는 자장가는 뭐지? 꿈속에서 보이는 그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은?

이불에 얼굴을 처박곤 숨을 고르던 에스텔라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를 죽여야해.”

누굴, 누굴 죽여야 하는 거란 말인가.

에스텔라는 쉴 새 없이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숨을 골랐다. 손바닥 아래 쿵쿵 뛰는 심장은 귓전을 때렸다. 잠들기 두려운 밤이다.

*

이자크는 훈련장 꼭대기의 작은 방 창가에 앉아 가만히 달을 봤다.

그는 제 심장 부근을 부여잡은 채 알 수 없는 제 감정을, 아니. 사실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숨기려는 그 감정을 상기했다.

왜 자꾸 본심이 튀어나오지.

왜 자꾸 그녀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거지.

왜 자꾸 웃음이 나오지.

알고 있다. 자신의 감정이 에스텔라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도, 그는 에스텔라를 싫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도,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것도. 그는 다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잘만 숨겨오지 않았나.

그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제 마음을 숨겨왔던 거, 지난 6년 동안 아주 잘 해내지 않았나. 그는 할 일이 있다. 혁명이 시작되는 날, 이자크는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로 나가버릴 것이다.

피바다와 화염이 판치는 메시앙을 벗어나 새 땅에서, 아이들에게 자유를 줄 것이다. 마음껏 뛰놀 수 있게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집에서 셋이서만 도란도란 살 것이다.

거기에 에스텔라는 없잖아. 없는 걸로 치기로 했잖아. 사랑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러니,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자크는 꾹 참아내듯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금안이 일렁였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스스로 세뇌하듯이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떠나야 한다. 이곳에서 언제까지고 눈치 보며 살 수 없다. 아이들이 자라면 디에스 가문의 이야기를 알게 될 것이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상처받을 것이다.

그렇게 다 정했는데.

할 수 있을 거라 마음먹었는데.

왜 에스텔라는 자꾸만 자신에게 희망을 심어주냔 말이다.

모른 척 그녀의 어린 고백들을 받아주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동요하지 말자. 냉정을 되찾고, 미래를 도모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알량한 감정으로 그르쳐서는 안 된다.

이자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유난히 둥근 달을 바라봤다.

유독 밤이 긴 것 같다. 잠이 들기 어려운 밤이다.

그는 오랫동안 창가에 앉아 북 서 쪽을 쳐다봤다.

아침이 되어서야 이자크는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얼마 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기에 훈련장은 한참 청소하느라 한바탕 파란이 일었다.

중요한 손님이 누구길래 아침부터 이 사달인가.

이자크는 허겁지겁 움직이는 시종들과 열을 맞춰 있는 기사들, 그리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들끼리 훈련하는 어린 생도들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순간 어젯밤 에스텔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풉.”

어린 생도들이 눈을 땡그랗게 뜨며 이자크를 쳐다봤다. 지금 스승님 웃으셨어요? 웃은 거 맞죠? 그런 눈빛이었다. 이자크는 자신이 언제 웃었냐며 시침 뗐다. 하지만 이자크 옆에 서 있던 그의 직속 기사는 모든 것을 봤다. 그 철혈의 이자크가 슬쩍 미소 짓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함으로 치장한 마차 한 대가 훈련장 정문 앞에 멈췄다. 화려함과 거리가 먼 훈련장인지라 마차는 이질적이었다. 그 이질적인 황금 마차 안에서 온통 금실 자수로 된 자켓을 걸친 사내가 내려왔다.

마차가 높으면 뭐 얼마나 높다고. 시종을 시켜 간이 계단까지 놓는 고상함을 보며 이자크와 그의 기사단, 그리고 어린 생도들이 떫은 감 먹은 표정을 지었다.

황금 마차에서 내린 귀족이 구겨진 제 자켓을 펴며 훈련장을 둘러봤다.

“그리, 깔끔하진 않네.”

그럴 만도 했다. 이 훈련장에는 고위 귀족보다는 하급 귀족, 돈을 주고 작위를 산 가짜 귀족, 중산층의 자식들이 기사가 되기 위해 오로지 훈련만 하는 곳이다.

고위 귀족들은 같은 학술원에 있어도 차원이 다르게 고급스러운 훈련장에 따로 다닌다.

귀족은 이자크를 한번 쳐다보더니 피식 비웃듯 웃음을 흘리곤 고상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내, 궁금해서 한번 와봤어요. 전 변경백이 훈련장에서 아이들이나 가르친다길래. 캘리아나에서도 당신 얘기가 꽤나 도니까요. 로버트 안 바실리스입니다.”

바실리스?

이자크의 눈빛이 요요하게 빛났다.

네놈이 바로 그 바실리스구나.

이자크는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악수를 했다. 바실리스 남작은 제 손이 으깨지는 기분이 들어 얼른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자크의 손아귀에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아! 손!”

“아, 죄송합니다. 제가 힘 조절이 잘 안 되는 편인지라. 부러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자크가 보기 드물게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놔줬다. 남작의 손이 새빨개져 있었다. 바실리스는 제 손을 두어 번 털며 얼얼한 부위를 문질렀다. 그러더니 혀를 차며,

“쯧, 뭐.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가진 것이 힘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그 힘 잘 조절해서 아이들이라도 가르쳐야죠. 그런데, 당신이 공주님과 결혼했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남작이 궁금한 점은 그것이었다.

애초에 훈련장이 궁금해서 왔을 리는 없을 터. 설마 지금 여기까지 와서 물어보는 것이 고작 공주와 결혼했다는 것뿐인가? 이자크는 물론 주변의 기사들도 황당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실리스 남작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캘리아나에서는 메시앙 공주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큰 인기를 끈다.

백금발을 가진 미모의 공주님. 캘리아나의 미의 기준은 ‘금발’이다. 메시앙에는 금발이 심심치 않게 보이긴 하지만 백금발은 손에 꼽는다고. 그중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레이디는 메시앙의 공주와, 후작 가문의 막내딸. 남작 부인 그렇게 셋 정도라고.

로버트 안 바실리스는 가주가 된 지 이제 막 한 달이 된 새끼 가주였다. 그가 가주가 되어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아 무역선을 타고 메시앙에 왔을 때,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공주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사실 바실리스 남작은 성인이 되었을 무렵 공주에게 구혼한 이국의 귀족들 중 하나였다. 답장조차 받지 못해 자존심을 구겼지만.

얼굴도 모르는 공주였지만 일단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백금발을 가졌으며, 공주라는 높은 작위, 그리고 그동안 남자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순수함까지.

공주에 대한 엄청난 기대를 하고 가주가 되자마자 이곳을 다시 방문했다.

그런데, 6년 새 공주가 결혼을 했단다.

그것도 반역자 가문의 장남과 함께.

얼굴도 모르는 공주지만 제가 가진 재력으로 충분히 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터였다. 바실리스 남작 가문은 작위는 그리 높지 않을 지어도 재력만큼은 캘리아나에서 손에 꼽혔으니까.

“뭐, 공주님도 뒤늦게 심미안을 되찾으신 거겠지. 듣자 하니 세기의 사랑이 깨져서 이혼 위기라던데.”

일부러 이자크에게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다.

이 시꺼멓고 커다란 사내와 이혼을 하면, 공주는 재혼할 의향이 있는가? 적어도 바실리스는 있었다. 공주와 이자크 사이에 자식이 둘이나 된다는 건 애석하게도 그가 조사하지 못했던 사항이었다. 치밀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사실 바실리스는 이자크를 갈구러 온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여자를 저보다 한참 못 미치는 남자가 채갔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제 페스티벌에서 받은 수모. 애 둘 딸린 중산층의 여자에게 거부당한 것도 짜증 나는데 마음에 품고 있던 공주는 이런 놈이랑 결혼이나 해대고.

철이 없는 바실리스가의 젊은 가주였다.

“훈련장을 둘러보고 싶으시다 하였으니, 한번 둘러보시죠.”

이자크는 그의 말을 싸그리 무시한 채 앞장섰다. 바실리스 남작은 떡 벌어진 어깨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암만 생각해봐도 저 노동의 흔적들이 보이는 몸이 공주한텐 매력으로 다가온 걸까? 본디 귀족 남자란 적당한 근육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또 대상을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자크 몬 디에스는 가문도 파문되었고 공주의 남편으로서 명목만 귀족이며, 심지어는 이제 그 공주와 이혼을 한다지? 그러니 자신이 무시해도 탈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됐습니다. 안 봐도 뻔하겠죠. 이 낡은 훈련장에 파문한 변경백이 스승으로 있는 곳. 마지막으로 전쟁에 참여한 지가 얼마나 되었죠? 이거 원, 이제 전 변경백이라 부르기에도 웃기겠군요.”

그러며 비웃고 있는데, 갑자기 시종 하나가 이자크에게 달려왔다.

“이자크 님, 공주님께서 이곳에 방문하신다고 하십니다.”

“갑자기, 왜?”

“이유는 저도 말 모르겠습니다.”

“생전 안 오던 사람이 왜….”

이자크가 당황한 얼굴을 내비쳤다. 바실리스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공주가 온다고?

왜?

‘남편과 사이 안 좋다던데. 저 남자의 반응을 봐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고.’

그리고 그의 생각은 크나큰 착각으로 발전되고 만다.

‘설마 날 보러?’

듣자 하니 이혼 이유가 공주의 외도 때문이라던데. 바실리스가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이자크에게 말했다.

“공주님이 오신다고요? 뭐, 훈련장 둘러보는 의미 없는 짓은 관두고-”

바실리스는 제 고국 캘리아나에서 꽤나 검술에 능하기로 유명하다.

전쟁터에 참가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제 레이디 하나 지키지 못할 남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했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검술로 다져진 잔잔한 근육들에 많은 레이들이 환장한다는 걸 알아서 인지 바실리스는 꽤나 성실히 검술훈련을 해왔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자신이 이자크와의 검술 대련에서도 밀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막 스물넷이 된 어린 가주. 어린 청년.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은 공주의 귀에 남편과의 검술 대련에서 이겼다는 젊고 돈 많은 이국의 미남 귀족이라는 소리가 들어가길 꿈꾸며 그가 포부를 밝혔다.

“저랑 대련이나 한번 하죠.”

“예?”

황당한 제안에 이자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건가. 이자크의 눈에 바실리스 남작은 키 큰 쭉정이에 불과했다.

마침 마차에서 내린 에스텔라의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에스텔라는 양산을 든 채로 시녀들과 이곳에 오고 있었다. 조만간 시녀가 양산을 받아들자 에스텔라는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이자크는 그 모습을 보며 시종에게 말했다.

“공주님이 앉아계실 의자와 테이블을 준비해라. 그리고 바실리스 남작께서 대련을 신청하셨으니, 내 흔쾌히 받아야겠지. 가서 내 검과 장갑을 가져와.”

이자크가 요요한 눈빛으로 바실리스 남작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시종은 시녀에게 이 이자크와 바실리스의 대련을 전달했고, 시녀는 다시 에스텔라에게 이를 전달했다. 에스텔라는 의자에 앉아 두 남자의 대련을 구경하기로 했다.

사실 에스텔라의 속마음은 이것이었다.

‘쭉정이 하나가 무참히 밟히겠군.’

에스텔라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부채를 편 이유는 바실리스 때문이었다. 마차에 내려 저기 멀리 보이는 잘생긴 내 님, 이자크를 보며 손을 흔들려는데 뒤에 어딘가 익숙한 뒤통수와 금발이 보인다.

뒤를 돌아 제 쪽을 보는 남자의 모습은 예의 페스티벌에서 만난 놈이었다.

“어, 뭐야. 저 새끼가 여길 왜….”

당황한 에스텔라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저놈이 왜 여기에 있어? 에스텔라는 얼른 부채를 펴 얼굴을 가렸다. 만일 바실리스 남작이 에스텔라를 보고 아는 체하면, 어제 그 축제에서의 일을 말해야 하고, 이자크는 그럼 또 자신이 외도하려 했다는 줄 오해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

그러는 와중에 시녀가 말을 전달했다.

“공주님. 이자크 님과 바실리스 남작이 대련을 한대요. 구경하시겠어요?”

“이자크가 대련을 받아줬어? 웬일이래….”

에스텔라의 기억상, 이자크는 수많은 영식과 기사들이 그렇게 요청을 했어도 대련을 받아준 적이 없다. 어차피 다 그에게 질 게 뻔했고, 이자크는 남을 이김으로써 칭찬받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웬일로? 이국의 귀족이라 특별 취급인 건가? 에스텔라는 그리 생각하며 이번엔 저 어린 가주를 보며 물었다. 옆에서 시녀가 맞장구쳤다.

“저 사내는 어차피 질 텐데 뭐하러 까부는 걸까?”

“음, 젊은 혈기로 덤비는 것이죠.”

“맞는 말이네. 그래. 재밌겠구나. 쭉정이 하나가 무참히 밟히는 구경이나 하자.”

그리하여, 난데없이 이자크와 바실리스 남작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에스텔라 뒤로 어린 훈련생들이 조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알아? 바실리스 남작은 캘리아나에서 검술 잘하기로 소문났대. 스승님이 질까? 에이, 그래도 스승님이 이길걸. 그건 모를 일이지. 솔직히 파문당한 뒤로 전쟁터에 참가한 적도 없고. 마지막 전쟁이 언젠데? 열아홉 살 때래. 뭐야, 우리한테 기초 훈련만 가르쳐서 검술 실력 다 죽었겠다. 만약 스승님이 지면 난 아버지한테 가서 스승님을 바꿔달라 할 거야.

“이 조그만 것들이 못하는 말이 없어, 조용히 못 해?”

에스텔라가 뒤를 쳐다보며 호통쳤다.

어린 훈련생들이 기겁하며 얼른 제 입을 막았다. 힉! 공주님 되게 무섭다!

에스텔라는 아이들에게 내가 너흴 지켜보겠다, 하는 신호를 주듯이 제 손가락 검지와 중지를 쫙 펴서는 제 눈에 가져다 댔다. 아이들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내뿜는 공주님이 무서워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긴 누가 져. 이자크가 얼마나 센데.”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저 넓은 어깨와 등을 보라고. 저건 한두 번 훈련해서 생기는 근육이 아니라고.

그러고 있는데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 중 하나가 겁도 없이 에스텔라에게 물었다.

“공주님- 그런데요,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요- 저 앞에 황수선화 진짜 공주님이 보내신 거예요?”

“그게 왜 궁금한데.”

에스텔라는 이제 막 아홉 살 열 살 되었을 사내애를 쳐다봤다. 훈련을 하다 앞니가 나간 건가. 앞니 하나가 없는 아이가 천진하게 물었다.

“그냥요, 스승님이 오늘 아침에도 직접 물 줬어요. 막 해충도 잡고. 엄청 아끼시던데 진짜 공주님이 보내신 거예요?”

이자크가 매일 직접 물을 주고 해충도 잡았다고? 에스텔라의 입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그래. 내가 보낸 거야.”

“왜요?”

“왜긴 왜겠어. 이 공주님이 너희 스승님을 너무 사랑하니까지.”

“우와아-”

에스텔라의 말에 아이들이 입을 모아 감탄했다.

“그럼요- 스승님이랑 이혼 안 할 거세요?”

“난 찰거머리처럼 붙어있을 건데? 왜, 너희 부모님은 내가 이자크와 이혼했으면 좋겠대?”

“그건 아니구- 그냥 궁금하대요.”

아이들은 제 입의 배후를 불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앞니 빠진 조그만 것들이 남의 이혼사정이 궁금할 리가. 그저 부모님이 가서 그런 거 잘 듣고 와, 하며 보냈겠지.

에스텔라가 픽 웃으며 물었다.

“너흰 어땠으면 좋겠는데? 나랑 이자크가 이혼했으면 좋겠니?”

“아뇨-”

“왜?”

“왜냐면- 스승님이 저 꽃을 되게 아끼시잖아요-”

아이의 논리가 이상했으나 묘하게 설득이 되는 이유였다. 에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나도 이혼 안 할 거야.”

그러는 새 어느새 이자크와 바실리스 남작이 대련 준비를 끝내고 훈련장에 나왔다.

*

“단장께서는 이런 식의 대련 절대 안 받아주셨잖아요. 웬일로 받아주신답니까?”

이자크의 오른팔이자 그의 직속 부대 기사인 오베르가 물었다. 오베르의 질문에도 이자크는 묵묵히 대련 장비들을 갖췄다.

“설마, 공주님 때문입니까?”

“갑자기 공주님이 왜 나와. 여기서.”

“어제 집사 할아범이 하는 얘기, 의도치 않게 저도 좀 듣고 말았거든요.”

그의 말에 이자크가 심기 불편한 듯 눈썹을 꿈틀대며 오베르를 쳐다봤다. 오베르가 억울한 듯 말했다.

“아니, 직속 기사고, 시종인데 이자크 님 근처에 항시 대기해야죠. 저라고 궁금해서 들은 것 아닙니다?”

“….”

“바실리스 남작은 공주님인 줄 모르는 것 같던데.”

“오베르. 가서 칼 가는 것 가져와.”

“예? 아니, 진심으로 죽이실 예정입니까?!”

“죽이긴 뭘 죽여.”

하지만 눈빛은 당장이라도 두 동강 낼 기세이신걸요, 하며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곤 오베르가 그에게 칼 가는 돌을 건넸다. 이자크는 의자에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칼을 갈고 또 갈았다.

“그, 바실리스 남작이 남작이긴 해도, 메시앙 왕국에서 하는 사업이 꽤 크신 것 아시죠?”

“뭐 얼마나 큰데.”

“그건 저도 모르겠고, 아무튼 왕실에서도 중요한 손님이라 할 정도인데 배때기에 칼자국을 내면 조금… 눈치 보이지 않을까요, 단장….”

오베르가 그렇게 말하며 이자크의 눈치를 봤다.

“왕실 중요 손님인데, 대련을 받은 것까지는 상관이 없다만 이겨서 그의 대쪽같은 자존심에 생채기라도 내면 어쩌시려고요….”

그의 말에 이자크가 픽 웃었다.

“내가 이길지 질지 어찌 알아.”

“예? 당연히 단장님이 이기시죠. 당연한 소리를….”

단장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테세오 언덕 전투에서 테베리아 왕국의 장군 목을 그대로 날려버린 분 아니십니까. 그것도 열아홉의 나이에요.

오베르의 찬양 담긴 말에 이자크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거야 7년 전이니까. 지금은 갈지 않은 칼처럼 녹이 슬었을지도 모르지.”

“…아닌 것 같은데요.”

오베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적어도 이자크의 실력에 녹이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칼은 항상 갈려져 있으니까. 그것도 버트랜드 국왕을 향해.

칼을 갈던 이자크가 돌을 내려놓더니 날이 선 검을 공중에 들어보이며 확인까지 한다. 오베르는 이 대련의 이유가 에스텔라라는 걸 확신한다.

의외로 단장에게 귀여운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바실리스 남작이 껄떡댄 것 때문에 대련 받아준 것 아니야. 뭐 얼마나 밟으시려고 저렇게 칼까지 갈아…. 아이고, 어린 가주 놈이 지면 길길이 날뛸 건데 어쩌시려고. 뭐, 공주님 몸에 손댄 것 치고는 비교적 평화로운 방법이긴 하다만….’

이자크 옆에 오랜 시간 동안 남아 있는 이들은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직속 기사단 정도가 있다. 그들은 이자크와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고,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하던 동기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오베르는 제 동생뻘인 이자크를 많이 아꼈고, 이자크 역시 형 같은 오베르를 친가족처럼 대했다. 그런 각별한 사이이기에 오베르는 이자크가 아직 에스텔라를 사랑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티를 안 내던 사람이 이렇게 티를 내네. 공주님의 변화에 단장의 마음도 변하는 걸까.

어쩌면, 이자크의 계획 말고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다른 결말이 나오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준비를 마친 이자크와 바실리스 남작이 훈련장 공터로 나왔다. 화창한 날씨에 구경꾼들이 더러 모였다. 바닥에 앉아있는 훈련생들과 멀리서 걱정의 눈으로 보는 그의 기사단 기사들과 양산으로 만든 그늘 안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티타임까지 즐기는 에스텔라까지.

바실리스 남작은 장검을 한 손으로 여유롭게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어린 훈련생들은 그런 남작의 모습에 오- 오- 하면서 감탄사를 내다가도, 에스텔라의 눈초리에 얼른 스승님, 이겨라! 스승님, 이겨라! 하며 손을 들고 흔들어댔다.

이자크는 그런 아이들을 무심하게 쳐다본 뒤 심판을 맡게 된 오베르가 빨리 대련 시작을 알리는 깃발이나 들길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바실리스 남작의 화려한 몸풀기는 계속되었다.

남작은 저기 저쪽. 의자에 앉아 있는 공주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부채로 얼굴의 반을 가린 상태였으나 길고 굽이진 백금발의 머리칼이 햇빛에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저 깊은 사슴 같은 눈망울이 자신을 담고 있다 착각한다.

공주님께서 날 보고 계시군.

에스텔라는 그저 바실리스가 가리고 있는 이자크를 보기 위해 목을 쭉 빼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걸 눈치챌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바실리스 남작은 에스텔라에게 보란 듯이 기교를 부려댔다. 쉭, 쉭, 바람 가르는 장검 소리라든지, 괜히 과하게 몸을 풀며 제 기럭지나 드문드문 보이는 근육을 뽐낸다든지, 웃기지도 않게 치명적인 갸륵한 눈빛을 보내며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든지.

에스텔라 뒤에 서 있는 시녀들이 오히려 그에게 매료된 듯, 어머- 어떡해. 너무 멋지다. 같은 소리를 해댔고 에스텔라는 가만히 부채질하며 중얼거렸다.

“빈 수레가 요란하지.”

이윽고 오베르가 대련 시작을 알리는 빨간 깃발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견제하며 몸을 숙여 방어와 공격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선방을 노린 바실리스 남작이 먼저 그에게 검을 휘둘렀다. 이자크는 유연하게 몸을 뒤로 젖히며 검을 휘둘러 남작의 공격을 방어했다.

남작이 공격을 하면 이자크는 방어만 했다. 보는 사람은 지루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점점 열 받기 시작하는 행동이었다.

“방어 말고는 못 합니까?”

남작이 그를 비꼬며 물었지만 이자크는 대답 없이 그저 방어만 해댔다. 오베르는 그 모습을 보며 차라리 계속 방어만 하다 남작이 제 풀에 지쳐 나가길 염원했다. 사실 이자크가 방어만 하는 것은 그가 정말,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열정을 다해 공격하던 바실리스 남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와 제대로 된 대련을 하여 공주에게 저를 알리려 했는데, 이 사내는 감정이라곤 없는 인간인 양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제 칼만 쳐내고 다시 공격하길 기다리지 않나.

그렇게 몇십 분 정도 의미 없는 대련을 이어나갔다. 초반에 진을 뺀 탓에 바실리스 남작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운 장검이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자세는 점점 흐트러졌고, 숨은 거칠어졌으며, 인상 찌푸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공격하는 것 역시 허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남작은 이 징하고 망할 대련을 빨리 이기고 싶어 다시 한번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검을 휘둘렀다.

세로로 검을 들어 그걸 막아낸 이자크의 모습에 짜증을 내려던 찰나, 이자크의 금안이 요요하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당황할 정도로 강한 힘이 남작의 장검을 강타했다. 하마터면 다리에 힘을 잃고 엎어질 뻔했다.

당황스러움과 황당함, 그리고 괘씸한 눈빛으로 바실리스 남작이 고개를 들어 이자크를 쳐다봤다. 이자크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그야말로, 맹수의 눈이었다.

‘이 남자 뭐야?’

바실리스 남작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 역시 허세가 섞이긴 했어도, 캘리아나에선 손에 꼽히는 검술을 구사하는 사내였다. 캘리아나에서 수많은 기사와 대련을 해봤지만, 이자크처럼 무지막지한 힘으로 검을 때리는 건 처음이었다.

그 이후부터 이자크는 너무나도 쉬워 보이게 검을 휘두르며 공격을 시작했다. 숨 고를 시간도 주지 않으며 바실리스에게 검을 휘둘렀고, 남작은 결국 주춤대며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자크는 한 발 뒤로 물러난 채로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다시 일어나서 검을 집어라.

그 뜻이었다.

바실리스는 욕지거리를 씹으며 얼른 다시 검을 쥐고 일어났다. 달려들 듯 공격해봤자 이미 기력이 약해진 사람의 공격은 이자크에게 먹히지 않았다.

반면에 바실리스 남작은 금 간 둑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으니, 이자크가 방어만 해대도 이제 휘청대기 시작했다. 지구력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것이 패인이었다.

하지만 대쪽 같은 자존심을 가진 철없고 젊은 이국의 중요한 손님. 단순히 공주의 눈에 저를 들게 하고 싶은 가벼운 마음으로 했던 대련은 이제 저 재수 없는 놈을 이기고야 마리라, 하는 독기로 변하고 말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바실리스 가문의 3대 독자. 누구에게 지는 꼴은 보지 못하는 이.

그러든 말든 이자크는 인정사정없이 그를 대했다.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바실리스 남작을 불쌍히 여길 정도로. 상대를 제압해 가볍게 밀어 넘기며 등을 치거나, 다리를 걸거나, 아니면 무시무시한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검을 내리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항복이라는 말을 하기 전까진 대련의 끝을 내지 않았다.

오베르는 해탈한 듯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 결국. 이리되었군. 망했군. 뭐,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도 콧대 높이며 훈련장과 그의 기사단을 비아냥댔던 바실리스 남작이 저리 넝마가 되는 것도 한편으론 통쾌했다.

이자크는 원래 그런 식으로 상대의 화를 돋우며 공격하고 방어하는 편이 아니었다. 다만 바실리스 남작은 예외다. 이자크의 눈빛만 보면, 그는 진심으로 바실리스 남작을 뼈까지 오독오독 씹어버릴 기세였다.

‘유치한 짓을 하고 있군.’

스스로 자각한 이자크가 이제 슬슬 대련의 끝을 내기 위해 빠르게 몸을 숙이며 그의 목 부근에 검을 겨눴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모두가 헉, 숨을 들이쉬며 바실리스가 살아 있는지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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