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에스텔라는 이미 연회에 참석해 다른 귀족들한테 아직 자신들의 사이가 좋다는 걸 확인시켜줄 셈이다. 어디까지나 이혼 숙려기간 아닌가. 이혼 숙려를 고려하는 부부들이야 쌔고 쌨다. 어린 에스텔라의 기억에서도 다른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게 두려워 꾹 참고 살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아버지를 찾아온 귀족들을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귀족들은 대부분 정략결혼을 하기 때문에 금실 좋은 부부를 찾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자유연애를 하다 운 좋게 서로 귀족이고 가문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결혼하는 이들은 드물다. 다들 가문을 위해 억지로 하는 결혼이 대다수.
후계자를 낳은 뒤 서로 애인을 두는 부부도 많다.
그런 귀족들 사이에서 에스텔라는 절대 그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살기 위해 몸 팔았다는 말을 듣는 이자크가 결국엔 버려졌군, 그런 말 따위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로도니아 살롱에서 초대장을 받으면 귀족들은 대부분 참석한다. 초대장을 받지 못한 귀족들은 망신을 당하는 것이고 귀족들 사이에서 있는 미묘한 위계질서의 최하 끄트머리라는 걸 인증하는 셈이다.
만일 초대장을 받았는데 참석하지 않으면 귀족들은 그 이유를 알아내려 혈안이 될 것이다.기본적으로 백성들과 달리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의 무료한 일상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제일 재밌는 일과 아니던가.
이혼 신청을 한 부부여도 부부동반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온갖 소문에 시달리기 마찬가지다. 귀족들의 혀는 가볍고 귀는 밝은 경우가 아주 많기에.
이혼 후에 그나마 조용하게 살고 싶으면, 이혼 전까지는 평범한 부부임을 연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하지만, 그게 ‘가정적’임에 집착하는 메시앙 귀족들의 양면성이었다. 이혼과 재혼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였으나 이혼한 부부에게는 평생 꼬리표가 붙게 되는. 어찌보면 그 런 국민성이 부부의 이혼을 막는 일이기도 했다.
사이가 좋은 부부는 별로 없으나 이혼하는 부부는 더 없다.
그러니 이번에 이혼 숙려기간을 가지게 된 에스텔라와 이자크에게 관심과 온갖 추측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에스텔라는 이 기회에 귀족들의 혀로 고통받는 자신의 가족들을 지킬 겸, 이자크와의 관계 회복에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겸, 자신의 사적인 욕심을 채워줄 겸, 꼭 이 연회에 참석해야만 한다.
*
“왜 요즘 다시 각방을 쓰는 거죠?”
에스텔라가 물었다. 며칠 전부터 이자크는 자연스럽게 다른 방에 가서 잠을 잤다. 에스텔라의 물음에 이자크는 딱히 할 말이 없어졌다. 왜, 라니. 특별히 이유를 대라고 하면 그저 어색한 게 싫어서 정도일까.
“…합방하기로 약속했잖아요. 이제부터 각방 금지예요.”
에스텔라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어색한 게 불편해서 싫습니다.”
“뭐가 그리 어색하다고.”
“옆에 눕기만 하면 목석처럼 굳어버리는 부인인데, 저라고 편히 자겠습니까. 옆에 통나무가 누워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뭔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에스텔라는 이자크가 침대에만 누우면 제 양팔을 교차해 제 가슴 부분을 가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굳어 천장만 바라보지 않나.
“…그리고 자꾸 이불을 다 가져가 춥습니다.”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있을 땐 언제고, 숙면에 들기 시작하면 온 침대를 점령한다. 이불 뺏어가는 것은 다반사요, 어쩔 땐 자고 있는 이자크를 손으로 툭툭 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유치하게 다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이자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에스텔라가 어려지니 자신도 같이 어려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이자크는 괜히 말해놓고도 창피해져서 얼른 에스텔라의 시선을 피했다.
“그럼 이불 두 개 준비하라고 하죠, 뭐. 저 이제 통나무 아니에요. 나 이제 막, 침대에서 유혹하고 막, 어? 그럴건데요?”
“갑자기 유혹은 왜요.”
“연회 같이 참석하자고.”
에스텔라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고, 이자크는 곧장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 에스텔라가 얼른 그의 옷가지를 잡아 늘어졌다.
“아 왜요! 왜! 귀족들한테 우리 잘살고 있다, 보여줘야 나중에 이자크도 편할 텐데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다 알면서, 모르는 척은!”
“가봤자 무슨 소리를 듣겠습니까. 부인과 사이가 좋아 보이면 어떻게든 악착같이 매달리는 남자라 욕을 먹을 테고,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면 결국 버려지는 놈이라 욕을 할 텐데요.”
“그렇다고 아예 연회에 안 나가면 그 귀족들이 더 신나서 떠들어댈 거예요.”
“이미 충분히 그래 왔습니다.”
이자크는 단호했다.
에스텔라의 손아귀 힘이 약해지자 그는 얼른 옷자락을 빼내곤 옷가지를 정돈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제 방으로 가려던 이자크는 문고리를 칭칭 감은 쇠사슬을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에스텔라의 짓이 뻔하다.
결국 부부 침실로 발걸음을 돌린 이자크는, 문을 열자 보이는 풍경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풍경.
살구색의 기다란 슬립 드레스에 레이스 숄을 두른 에스텔라가 옆으로 누워 이자크를 기다리고 있다. 이자크는 이 해괴한 광경에 눈만 껌뻑이다가 기가 막혀 물었다.
“부부 연회에 참석하는 것과 지금 부인의 자세가 무슨 연관성이 있죠.”
“우리 사이가 가까워지면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러긴 뭐가 그럽니까.”
에스텔라는 말해 뭣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깨 위를 덮고 있던 레이스 숄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하얀 에스텔라의 어깨가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크의 눈빛에는 동요가 없었다.
에스텔라는 한껏 요사스럽게 몸을 배배 꼬며 책으로만 배워온 유혹의 기술들을 써먹었다.
열아홉 살의 그녀가 어디 남자를 유혹해본 적이 있어야지.
엉거주춤 몸을 꼬던 에스텔라는 하다가 힘이 부치는지 다시 엉거주춤하게 다리를 위로 올리기도, 입술을 쭉 빼기도, 눈을 게슴츠레 뜨기도 했다.
“…뭐 하십니까.”
“유혹이요.”
고개를 사선으로 삐뚜름하게 돌리며 에스텔라가 제 날카로운 턱선을 그에게 뽐낸다. 잘록하게 패인 허리를 이리 꼬고 저리 꼬고.
“뭐, 좀 동하는 게 있나요?”
한참 어린 부인의 말에 이자크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부인.”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다. 에스텔라는 최대한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이자크를 쳐다봤다.
동한 것인가?
“차라리 알레스가 더 요염해 보이네요.”
“알레스?! 알레스가 누구… 지금 설마 저를 말보다도 못하다고 하는 거예요? 네?!”
알레스는 이자크의 명마로 나이가 22살 된 흑마였다.
에스텔라는 기가 막히는지 연신 허! 허! 하!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든 말든 이자크는 조끼를 벗곤 침대에 누웠다.
“저기요, 이자크. 내가 진짜 말보다도 요염하지 않냐고요. 게다가 걘 수컷이거든요?!”
자신에게 등 돌린 채 누워있는 이자크를 쿡쿡 찌르며 에스텔라가 물었다.
아니, 말보다도 못한 요염이라니. 이건 좀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
이자크의 명마 알레스는 말 중에서도 잘생기기로 유명한 명마였다. 온몸이 검고, 밤하늘보다 검은 갈기는 윤이 나며, 기다란 속눈썹 아래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흑진주 같다.
근육 빵빵한 몸으로 초원을 내달릴 때면 저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라고.
그래도 그렇지 어쩜 제 아내에게 말이 더 요염하다고 할 수 있는가. 에스텔라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물었다.
“지나가는 유모나 다른 시종들한테 똑같이 해보십시오. 어떤 반응이 오나.”
“뭐라고요?!”
“절 웃기시려는 거였다면 성공하셨습니다. 재능이 있네요.”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한 이자크는 이만 자겠다며 다시 등을 돌렸다. 에스텔라는 황망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이자크를 노려봤다.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
기껏 하는 짓들이 꽃을 보내거나 되도 않는 유혹을 하는 거라니. 이자크는 단순한 에스텔라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특히나 제 앞에서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몸을 꼬아대는 에스텔라를 보면 더더욱.
이자크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 입꼬리를 내렸다.
등 뒤에서는 에스텔라의 투정이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어쩜 여인에게 말보다도 못하다 하다니… 구시렁대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그는 오래간만에 소리죽여 웃고 말았다.
아침이 되자 눈을 뜬 그는 옆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세숫물로 얼굴을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에스텔라는 또 그의 이불까지 죄 가져가 덮고 있었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내려다보며 픽 웃고 말았다. 이불 세 개를 준비해도 다 빼앗기게 생겼군.
그리 생각하며 부인을 쳐다보고 있는데, 에스텔라가 강아지 앓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린다. 어디 그뿐일까. 이마 목 부근에는 식은땀이 줄줄 나 베개가 축축해질 정도였다. 이불 때문에 더워서 그런 걸까. 이자크는 이불을 치워주기 위해 에스텔라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에스텔라가 뭐라 중얼거렸다.
“…왜… 째서… 기억해내….”
“부인?”
“…기억… 해야만… 살릴 수 있…. 살려야만….”
“부인.”
“안 돼…! 어어… 안 돼… 흐으….”
흐느끼듯 잠꼬대를 하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결국 이자크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에스텔라!”
“…음…. 이자크?”
방금 전까지 잠꼬대를 하던 에스텔라는, 흐느끼듯 나지막이 소리치던 에스텔라는 무슨 일 있냐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자크를 바라봤다. 잠이 덜 깨 몽롱한 눈빛이었다.
“괜찮습니까?”
“네?”
“무슨 꿈을 꿨길래 그렇게 잠꼬대를 합니까.”
“제가 잠꼬대를 했어요? 미안해요. 많이 시끄러웠어요?”
“시끄럽진 않았습니다.”
“무슨 꿈이었냐면… 궁금해요? 궁금하면 나랑 같이 연회가요.”
“별 꿈 아니었나 보군요.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쳇.”
에스텔라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이자크는 루시와 루스를 데리러 가기 위해 방을 나섰고 에스텔라는 옆에 놓인 수건으로 땀범벅이 된 몸을 닦았다.
이자크 앞에서는 별것 아닌 것처럼 굴었으나, 사실 에스텔라는 오늘도 알 수 없는 꿈들을 꿨다. 이번엔 저번과 달랐다. 미래의 에스텔라나 이상적인 에스텔라가 나온 게 아니라 목소리만이 들렸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워낙에 구슬프게 울어 듣는 에스텔라도 같이 슬퍼졌다.
비명에 가까운 절규, 오열. 여자는 저러다 죽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악을 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암흑 속에서 에스텔라는 그렇게 한참 동안 여자의 절규를 들었다.
아악! 아아악! 내 새끼, 내 새끼! 내 아가들!
하도 울어 갈라지는 소리로 여자가 울음을 토해냈다. 꺽꺽 대면서 울다가도 울음을 먹다 토해내 콜록거리는 것도, 이내 하도 울어 게워내는 소리까지.
에스텔라는 그 끔찍한 소리를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 그만 듣고 싶어!
그러던 찰나 이자크가 에스텔라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뜨니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방 안에 이자크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걱정하는 눈빛인가. 에스텔라는 어쩐지 안도하였다.
그 목소리를 듣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자신의 가슴 한쪽이 저려 오는지 모르겠다.
에스텔라는 이자크가 나가고도 한참 동안 숨을 고르며 찝찝한 꿈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노력했다.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가자, 루시와 루스가 식당 앞에서부터 에스텔라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부터 찝찝했던 기분이 아이들을 보자 응어리가 풀린 기분이다.
아니다. 그런 류의 기분이 아니라 응어리가 풀리면서 동시에 안심이 되는, 그런 이상한 느낌. 저절로 다리가 풀리며 계단에서 내려오다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마망!”
루시가 빽 소리를 질렀고, 뒤이어 계단에서 넘어진 에스텔라의 비명에 이자크가 얼른 뛰어나왔다. 뒤이어 주변의 시종들도 달려왔다.
“아윽…!”
에스텔라가 제 발목을 부여잡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도 높은 곳에서 구른 것이 아니라 부러지진 않았지만 어느새 발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좀 봅시다.”
“아, 아파….”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손을 치우며 부은 곳을 확인했다. 유모는 얼른 의사를 부르러 나갔고 삔 곳을 확인한 그는 잠깐 인상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에스텔라를 들쳐 안았다.
“엄마야!”
이자크의 품 안에 안긴 에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 부분을 꽉 잡아당기고 말았다. 루스와 루시는 이자크의 바지를 잡아당기며 연신 엄마가 괜찮은지 물어봤다.
“엄마 괜찮아, 얘들아. 별로 안 아파.”
에스텔라가 살짝 파리해진 얼굴로 말했다.
안 아프기는. 엄청 아프다. 그래도 머리통 안 깨진 게 어디야.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에스텔라가 울먹이는 아이들을 달랬다.
“유모가 의사 불러올 테니 위로 올라갑시다.”
이자크는 위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침실로 들어가 다시 에스텔라를 침대 위에 앉힌 뒤 아까보다 한층 더 부은 발목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쉰다.
“그러니까 왜 계단에서 한눈을 팝니까. 어린 애들도 안 그러는데.”
“한눈 판 거 아니에요.”
에스텔라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그럼 가만히 있던 계단이 스스로 움직이기라도 했답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 것뿐이에요. 뭐 엄청 크게 다치지도 않았- 악! 왜 눌러요! 아, 아파….”
“이게 크게 다친 게 아니면, 뭐가 크게 다친 겁니까. 퉁퉁 부었네.”
둥글게 부어오른 부위를 살살 손으로 만지작대던 그가 에스텔라의 말에 세지 않게 상처 부위를 눌렀다. 크게 다친 게 아니기는. 살짝만 눌러도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왔다.
의사는 에스텔라의 발목을 찬찬히 살펴보며 얼음찜질을 해주곤, 약초 몇 개를 빻아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 약초는 부기를 빼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자네는 공주님께 꾸준히 뜸을 놔드리게.”
시녀 미엘라가 얼른 약초를 받아 챙겼다. 에스텔라는 그 와중에도 질문했다.
“다음 달쯤 연회가 있는데, 그때까지 발이 다 나을 것 같은가?”
“전까지 무리하지 않으시면 가능하실 것 같지만요, 저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러니까, 연회는 참석할 수 있냐고.”
의사는 고개를 슬슬 내저었다. 어쩜 열아홉 살 때랑 똑같이 행동하셔. 철부지 손녀딸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의사가 말했다. 왕궁에서부터 그녀의 주치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공주님. 공주님은 항상 더 일찍 나을 것을 더 오랫동안 앓으셨죠, 그게 다 하지 말라는 걸 하셔서 그런 것 아닙니까.”
“아니, 그래서 갈 수-”
“아유, 제가 안 된다고 하면, 안 가실 겁니까?”
“…아니?”
“것 보십시오!”
의사는 툴툴대며 왕진 가방에 도구들을 넣은 뒤 침실을 나갔다. 의사가 치료하고 있는 동안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자크가 의사와 마주쳤다.
“부인 다리 상태는 어떤가.”
“심한 정도는 아닙니다만, 언제든지 덧날 위험이 있긴 합니다.”
“…그렇군.”
“참, 공주님께서 어지간히 연회를 기대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막는 건 불가할 거 같고, 부군께서 무리하지 않도록 잘 봐주십시오.”
의사의 말에 이자크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저렇게 발목이 퉁퉁 부은 와중에도 연회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이자크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의사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계단을 내려가려던 의사가 잠시 멈추더니 몸을 돌려 이자크에게 물었다.
“공주님께서는, 혹여 돌아오신 기억이라도 있으십니까?”
“없는 것 같네.”
“그렇군요.”
의사가 다시 인사를 한 뒤 내려가려던 찰나, 이번엔 이자크가 그를 불러세웠다.
“혹시 약초 중에서 악몽 같은 거 안 꾸고 자게 하는 약초가 있는가?”
“악몽이요? 꿈자리가 많이 사나우십니까? 있긴 한데 남성분들이 섭취를 할 시 부작용이 달리 있어서요.”
“내가 먹을 건 아니야. 아내가 요즘 악몽을 꾸는 것 같다길래. 아무래도 또 몸이 약해져 예민해지는 것보단 지금 이 상태가 좋을 듯하여….”
이자크는 답지 않게 말이 많아졌다. 의사는 그런 이자크를 가만히 보다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약재상한테 효과 좋은 약재를 주문해 배달시키겠습니다.”
“…수고 좀 해주게, 그럼.”
이자크는 괜히 간파당한 기분이 들어 얼른 자리를 비켰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에스텔라가 발목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에스텔라는 이자크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꼬리만 없지 주인 따르기 좋아하는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발목 별로 안 심하대요. 다행히 연회에는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참석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요양이나 하세요.”
“에이,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시던 분이 또 차가워졌네.”
에스텔라가 눈웃음 지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이자크는 뭔가 찔린 듯 당황한 얼굴로 잡아뗐다.
“제가 언제-”
“저 넘어지는 소리 들리자마자 이자크가 제일 먼저 뛰어나온 거 알죠? 그치, 얘들아?”
어느새 에스텔라의 양 옆구리에 딱 달라붙어 있는 두 아이에게 에스텔라가 묻자, 루시와 루스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는 이자크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루스의 말에 동의한다.
“아빠 힘 완전 세. 이렇게, 이렇게 엄마 들었지-”
짧고 오동통 살이 오른 두 팔로 이자크가 에스텔라를 안아 올린 장면을 재연한다. 루시가 박수를 짝짝 쳤다.
“맞지, 맞지이- 그리고 아빠가 막 이렇게 엄마 발목 만지작만지작, 하구 막 인상 찌푸렸지이-”
“웅! 그리고 압빠 문밖에서 계속 엄마 쳐다봤지이-”
“압빠가 일등으로 엄마한테 왔어.”
작은 입으로 조잘조잘 맞는 말만 해댄다. 이자크는 저 작은 입들이 난생처음으로 야속해졌다. 그만 말해라, 그만.
두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동그란 두상들을 쓰다듬은 에스텔라가 당당한 눈빛으로 이자크를 쳐다봤다.
이렇게 진실된 목격자가 둘이나 있는데도, 잡아뗄 셈은 아니겠지. 그런 눈빛이었다. 이자크는 하는 수 없이 시인했다.
“아내니까 걱정되는 건 당연할 수밖에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제가 연회에 참석할 거라 속단하지 마세요.”
“뭐, 좋아요. 원래 이자크는 철벽 치는 매력이 있었으니까.”
“철벽?”
“몰라요? 이자크 별명이 철벽의 이자크였는데. 벽돌로 만든 것보다 더 견고한 철로 만든 벽을 치는 철벽의 이자크.”
“….”
“그걸 깨는 것이 승자죠. 그쵸?”
에스텔라는 기분이 꽤나 좋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계단에서 넘어지자마자 쏜살같이 달려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이자크였다. 누구보다 빨리 달려와 에스텔라의 발목을 살펴보던 남자.
마치 제 일인 양 아픈 표정으로 부은 발을 이리저리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주저 없이 안아들어 올라가던 그런 남자.
아주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니까? 에스텔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저 철벽에 틈이 보인다. 철벽을 허물기가 어렵다고? 당연히 힘으로 부수려고만 하니 어렵지. 천천히 녹여야 하는 거다.
틈이 보이면 그 틈을 비집고 천천히, 부드럽게, 하지만 재빠르게 녹이는 거지.
“아, 그런데 다리가 이렇게 되어서… 영 움직이기 불편하네. 우리 아가들이 엄마를 안아줄 수도 없고. 시녀들은 힘이 그렇게 세지 않고, 그렇다고 남자 시종들한테 이 몸을 맡기자니….”
그렇게 말하며 에스텔라가 이자크를 흘깃 쳐다봤다.
“아, 배고파서 식당가로 내려가야 하는데….”
“압빠, 와서 엄마 도와줘요!”
잘한다, 우리 루시!
“맞아. 엄마 아야해. 아빠가 도와줘야지 착한 아빠야. 안 그럼 나쁜 아빠.”
잘한다, 우리 루스!
이자크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에스텔라와 두 아이를 쳐다봤다. 약간의 억울함이 올라오려고 한다. 그전까지 아이들과 놀아주고 사랑을 줬던 건 자신인데, 엄마는 엄마다 이건가. 낳아준 사람이 최고다 이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넘어갈 이자크가 아니었다. 그는 쉽지 않는 남자였다. 넘어오지 않는 남자였다.
“가서 공주님한테 지팡이 좀 가져다드려라.”
이자크가 시종 하나를 부르더니 지팡이를 가져오라 시킨다. 에스텔라를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내저었다. 옆구리의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꽤나 모양새가 이상했다.
절뚝대며 지팡이를 짚는 에스텔라의 양옆에서 루시와 루스가 혹여나 에스텔라가 넘어지진 않을까 딱 달라붙어 있다. 그것이 오히려 걷는 데 더 힘이 든다는 걸 두 천사는 알지 못했다.
결국 에스텔라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꼬맹이들. 엄마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이렇게 드레스에 달라붙어 있으면 더 위험해요.”
“하지만 압빠가 엄마 안 도와줘서 또 꿍하면 안 대. 루시가 루스랑 같이 도와줄게.”
마음은 기특하지만, 정말로 위험하다니깐. 자칫하다 꼬맹이들도 또 계단에서 구르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지 않나.
그러든 말든 루시와 루스는 에스텔라의 허리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아까 전 에스텔라가 계단에서 굴렀을 때 아이들도 많이 놀랐나 보다. 둘 다 고집이 상당해서 결국 에스텔라는 양 허리에 네 살짜리 아이 둘을 달고 지팡이를 짚었다.
한걸음 나아가려는데, 결국 보다 못한 이자크가 루스와 루시를 에스텔라에게서 떼어냈다.
“그렇게 달라붙어 있으면 엄마가 더 힘들지.”
“그럼 아빠가 도와줄 거야? 엄마?”
루시의 질문에 이자크가 항복한다는 듯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갈 겁니까?”
이자크가 에스텔라에게 물었고 에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자크가 한쪽 손으로 에스텔라의 허리를 감쌌다. 갑자기 들어오는 그의 손에 에스텔라가 빳빳하게 허리를 세우며 배에 힘을 줬다.
“편하게 숨 쉬세요.”
“이자크, 손이 엄청 크네요. 설레게….”
“그냥 도와주는 것뿐이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팔뚝도 되게 굵네요, 이자크.”
“혼자 내려갈 겁니까.”
“알았어요. 조용히 할게요.”
에스텔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자크가 단단한 팔로 허리를 감싸 지탱해주니 확실히 혼자 지팡이를 짚는 것보다 걷기 수월했다. 아까 전까지 고집부리던 아이들은 어느새 뒤에서 조용히 유모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왔고,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일 층으로 내려왔다. 지팡이가 익숙지 않은 듯 에스텔라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후들거렸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것을 이자크가 몇 번이고 잡았다.
“지팡이 짚는 게 은근 어렵네요.”
“한 달 안에 못 낫습니다. 연회는 포기하세요.”
“어우, 싫어요. 못해요. 내가 불로초를 찾아서라도 그전까지 다 나을 거예요. 한 달 안에 다 나으면, 같이 가줄래요?”
“혼자 실컷 가십시오.”
“…쳇. 별수 없지. 그 방법뿐인가.”
에스텔라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이자크가 힐끔 에스텔라를 내려다봤다. 또 무슨 꿍꿍이인가. 괜히 불안해졌다.
“이자크. 무슨 꽃 좋아해요?”
“그런 거 없습니다.”
“에이.”
날 뭐로 보고, 하는 눈빛으로 에스텔라가 씩 미소 지었다. 다 알고 있는데 물은 거다. 6년의 세월 동안 이자크의 취향 하나 모르고 있을까.
알면 알수록 반전 매력이 있는 사내라는 걸 본인만 모른다.
이자크는 꽃을 좋아한다. 저렇게 덩치 크고 온몸이 근육에 전쟁영웅으로 불리는 남자가 쇠나 철로 된 무기들이 아닌 향기롭고 오색 찬란한 여리디여린 꽃을 좋아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물론 그 사실은 에스텔라만 안다. 자신의 10대 시절을 죽어라 이자크 뒤꽁무니만 쫓아다닌 불굴의 집념으로 알아낸 비밀스런 그의 취향이다.
그놈의 ‘남자다움’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다만, 남자다움에 집착하는 메시앙의 남성들의 별 볼 일 없는 무기 저장고 자랑보다, 온실에 앉아 꽃들에게 물을 주는 이자크의 모습이 몇 배는 더 강인하고 섹시하다는 걸 그 누가 알까.
천천히 녹이는 거라니까, 철벽이라는 건.
*
이자크는 일주일, 길면 이 주일에 한 번씩 기사학도들을 가르치는 강사 일을 한다. 귀족이 무슨 일이냐고 하겠지만, 이는 버트랜드 국왕이 에스텔라와의 결혼을 승낙하는 대신 내린 명령이었다.
귀족들은 그런 버트랜드가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지만 실상 버트랜드의 의도는 이자크의 자존심을 밟겠다는 것이었다. 변경백 후계자가, 전쟁터에서 몇 번이나 승기를 잡은 그런 대단한 기사가 갓 입학한 꼬맹이들에게 검 쥐는 법이나 알려주다니.
어디 그뿐일까. 어린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악의없는 질문들은 당연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반란자의 아들이라면서요? 어떻게 살아남으셨어요? 반란자가 왕을 독살하려던 게 사실인가요? 진짜 생명을 위해 억지로 공주님과 결혼한 거예요?
악의 없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천진한 얼굴로 묻는 것은, 아마도 부모님이 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일테다.
이제는 그런 질문에 일일이 대꾸하거나 기분 나빠하지는 않는다. 이자크는 아이들의 배려없는 질문보다 뒤로 더러운 짓을 벌이는 버트랜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다.
밀수꾼을 시켜 그렇게 경고까지 해놓고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무슨 꿍꿍이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학술원 별관에 위치한 훈련소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업을 하던 도중이었다.
“저, 이자크 님.”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뭔가.”
“그… 훈련장 앞에 뭐가 와 있습니다.”
“뭐가 와 있다니.”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배달이 오긴 했는데요. 이자크 님 앞으로 온 것이라.”
당황한 기사의 말에 이자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수업을 멈췄다. 훈련소 앞에 커다란 마차가 와 있다. 어린 학도들이 훈련 외의 것에 관심을 가진 건지 철창으로 다들 몰려왔다.
이자크가 문 앞으로 나가자 마차에 앉아있던 마부 두 명이 얼른 내려 인사를 한 뒤 마차 문을 열었다.
벌컥, 하는 소리와 동시에 땀 냄새만 폴폴 풀기는 훈련소장에 향기롭고 싱그런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자크는 제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어린 학도생 하나가 눈치 없이 소리쳤다.
“어, 꽃이다. 꽃 진짜 많아!”
“와, 진짜 이쁘다!”
그렇다. 학생의 말대로 마차 안에는 꽃으로 꽉 차 있었다. 사람이 들어갈 자리도 없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노란색의 수선화가 꽉꽉 채워져 있었다. 황수선화는 이 메시앙 왕국에서 흔치 않은 품종이었다. 이게 다 어디서 난 건가 싶어 이자크가 마부를 쳐다봤다.
마부가 주문서에 써진 대로 크게, 아주 크게 말했다.
“에스텔라 공주님께서, 부군 이자크 몬 디에스 님께 보내는 꽃입니다!”
이자크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뒤에 있던 어린 학생들이 신나서 소리쳤다.
“헐, 공주님이 보내신 거래!”
눈을 감고 있던 이자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어이가 없는 건지 픽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자신이 에스텔라에 대해 한참을 모른다는 걸 다시 한번 체감했다.
마부는 이자크의 눈치를 살핀 뒤 마차 안에 가득 채워진 황수선화를 조심조심 꺼냈다. 꽃은 뿌리를 자르지 않아 싱싱한 채로 훈련소 앞에 다시 심어졌다. 흙투성이가 된 마부는 뿌듯한 얼굴로 깔끔히 자리 잡은 황수선화를 바라보곤 제 갈 길 가버렸다.
워낙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이자크는 마부 둘이 꽃을 옮겨심는 걸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작업이 모두 끝나 돌아가고 나서도 이자크는 한동안 가만히 꽃을 쳐다봤다. 뒤에 서 있던 기사가 슬며시 이자크를 불렀다.
“이자크 님?…. 괜찮….”
괜찮냐고 물어보기엔 어감이 이상했다. 봉변을 당했다기엔 꽃은 너무나 예뻤고, 삭막해 보이던 훈련소에 생기가 돌았다.
이자크는 한동안 그 자리에 돌처럼 서 있다 이내 기사에게 나지막이 말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물 주는 것 잊지 말거라.”
“예?”
당장에 뽑아버릴 기세로 쳐다보던 분이, 물 주는 것 잊지 말라니. 기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기에는 이자크의 귀 끝부분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으나, 과거 전장에서 적군의 장수 목을 베던 이자크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사는 눈감기로 했다.
그날 학술원 훈련생들 사이에서 이자크 교관의 꽃다발 사건은 꽤나 큰 화젯거리였다.
남자가 그렇게 많은 꽃을 받은 건 처음이야.
아니, 사실은 교관님께서 공주님한테 주려고 대량구매 하신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애들 말로는 공주님이 교관님한테 보낸 거라는데?
영식들의 눈이 궁금증으로 반짝였고, 이자크는 그 눈빛을 모른 척하며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니 저녁 식사가 미리 다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오늘따라 저택이 좀 어두운 것 같은데.”
외투를 벗어 집사에게 건네며 이자크가 물었다. 확실히 저택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어두워졌다. 어두운 걸 싫어하는 에스텔라와 쌍둥이들 때문에 집 안 전체는 밤늦게까지 양초를 환히 켜놓는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반절 될까말까 한 양초들이 복도에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이자크 님, 식사가 바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종은 얼른 이자크를 식당 쪽으로 안내했다. 이자크는 오늘따라 시종들이 모두 제 눈치를 살핀다는 걸 느꼈다. 의아했지만 별 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 오셨씁니까아.”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루시가 마치 웨이터처럼 한쪽 손을 구부린 채 인사를 한다. 뭐 하는 거지? 싶은 눈으로 루시를 쳐다보자 루시가 생긋 웃으며 이자크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긴다.
“자리 안내해드릴게요.”
웨이터 놀이가 이번엔 꽤나 발전한 듯하다. 이자크는 이것 역시 또 하나의 놀이인 건가 싶어서 얌전히 루시가 안내하는 곳에 앉았다.
기다란 식탁, 이자크는 오른쪽 끝에 자리 잡아 앉았고 고개를 돌리니 반대편 끝자락에 에스텔라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거지? 싶어 에스텔라를 쳐다보자, 에스텔라는 마치 낯선 남자를 대하는 것 마냥 홱하니 고개를 돌려버린다.
자리에 앉자 이번엔 루스가 음식들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왔다.
금방이라도 수프가 든 그릇을 엎지를 것 같다. 이미 오다가 몇 번 흘린 건지 그릇 여기저기 수프가 묻어있었다. 오다가 삐끗, 발을 헛디디자 이자크는 벌떡 일어나 루스를 도우려 했다. 하지만 루스가 손님, 가만히 앉아 계세요! 하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이자크는 다시 뻘쭘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반은 사라진 수프를 바라보며. 루스는 스스로 그릇을 옮긴 자신이 대견한 듯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프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스푼을 들어 한 술 뜨곤 주변을 둘러봤다. 집안의 모든 사용인들이 루스와 루시를 주시하다가 얼른 다시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시종들이 제 일들을 게을리하는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쌍둥이들이 새로운 놀이를 개발한 건지, 아니면 오늘 아침 자신에게 한차례 당혹스러움을 안겨준 에스텔라가 꾸민 짓인지. 이자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또 다음 관문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조용하던 에스텔라가 손을 번쩍 들어 웨이터를 부른다.
“웨이터?”
루시가 쪼로록 달려간다.
“네, 손님?”
에스텔라가 허리를 숙여 루시에게 뭔가를 속삭인다. 이자크는 불안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봤다. 루시가 씩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다시 루스에게 가 그대로 전한다. 둘은 키득대더니 갑자기 식당 밖으로 나간다.
그러더니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장미 한 송이와 와인 한잔을 아주, 아주 천천히 들고 왔다. 웃기는 상황이었다. 붉은색 벨벳 리본이 묶인 가시 정돈된 장미 한 송이와, 레드와인 한 잔. 와인을 쏟을까 천천히 한 걸음 내딛는 두 아이, 그 광경을 뒤에서 조마조마 바라보는 사용인들. 그리고 관심 없는 듯하지만 힐끔거리는 에스텔라.
아이들이 이자크 앞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쪽의 숙녀분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더니 손수 장미 잎 하나를 떼 와인 안에 띄워준다.
“허.”
이자크가 실소를 내뱉었다.
에스텔라를 쳐다보자 에스텔라가 세상 느끼한 눈빛을 보내다가 한쪽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인 양 오른쪽 눈을 깜빡였다.
*
그러니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에스텔라의 회복력은 그녀의 정신력과 비례하는 것일까. 의사는 놀랍게도 발목의 부기가 거의 다 빠졌으며 이제는 지팡이 없이도 다녀도 되겠다고 말했다. 에스텔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목을 위아래로 한번 움직였다.
음. 연회에 가고도 남는다니까! 에스텔라가 신나서 소리쳤다.
근 이 주 동안 이자크의 감시 때문에 생활반경이 매우 좁아졌다. 이자크는 아닌 척하면서 에스텔라의 발목을 매우 걱정했다. 하지만 다정한 걱정보다는, 조금 많이 엄했다고나 할까.
성격 급한 에스텔라가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빨리하면 이자크가 자그마한 에스텔라의 머리통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마치 루시와 루스를 훈육하듯이 짧고 굵게 말했다.
둘의 키 차이는 머리통 한통 반의 차이가 나 체격 차이도 그만큼 컸다. 그의 손은 에스텔라의 머리를 모두 감싸고도 남을 만큼 컸다.
“천천히. 다친다니까.”
그럴 때면 또 심장은 빨리 뛰어댔다. 아니 왜 반말하는 것도 멋지고 난리람? 에스텔라는 붉어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각설하고. 아무튼 간에 에스텔라는 발목이 다 나은 것을 기념하여 어디든 돌아다니고 싶었다. 오늘 아침 시녀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서는 절대 아니다.
“제시, 오늘 항구에 장터가 선댔지?”
“오늘 캘리아나 왕국에서 돌아오는 배가 있대. 엄청나게 신기한 물건도 많다는데?”
“재밌겠다. 아, 나도 가고 싶다. 또 항구에 엄청 큰 시장이 열리겠지?”
에스텔라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시장? 항구? 수입물품? 화려한 옷감! 이국적인 장신구!
너무 좋지 않은가. 에스텔라는 그 길로 시녀들을 모았다. 시장 구경하고 싶은 이들은 모두 모두 모여라, 하는 말에 저택의 시녀들이 대부분 몰려들었다.
“오늘은 다 같이 야유회 가는 거라 생각하자. 마침 발목도 다 나았고, 가끔은 너희도 기분전환을 해야 더 열심히 일하겠지?”
에스텔라의 말에 시녀들은 물론 시종들까지 놀란 눈치였다. 역시 사람이 바뀐 것이 맞다니까. 항상 무표정에 예민하던 주인마님이 저리 환하게 웃으시면서 사용인들에게 놀러 나갈 기회를 주다니! 사실 에스텔라는 본인이 제일 가고 싶었던 거지만 말이다.
시녀장과 집사는 극구 말렸지만 에스텔라는 커다란 마차 몇 대를 준비했다. 시녀들은 신나서 특별한 날에만 입는 저들의 드레스를 꺼내입었고 오랜만에 다들 양 뺨을 붉히곤 마차 앞에서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에스텔라 역시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루시와 루스도 동행이다.
“마망, 우리 오디 가?”
프릴이 예쁘게 수놓아진 외출용 보닛을 루시에게 씌어주자 루시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유모, 루스도 루시랑 같은 거 쓸래.”
“아이고, 도련님은 모자를 쓰셔야죠. 보닛은 여자만 쓰는 거예요.”
“이이잉….”
에스텔라는 상관없으니 똑같은 걸 씌우라며 루스에게도 똑같은 프릴 보닛을 씌어주며 루시에게 말했다.
“응. 우리 오늘 항구에 갈 거야. 항구 알아?”
“항구? 아니!”
“푸른색 바다가 있는 곳인데, 다른 나라에서 온 배들이 정박해. 이국의 물품을 가득 싣고. 그럼 우리는 그 나라에 가보지 못했지만 그 나라의 물건을 볼 수 있는 거야. 재밌겠지?”
“와아! 응!”
“루스도, 엄청 신난다!”
루스는 제 보닛 프릴을 잡아당기며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리하여 전 변경백의 저택에서 4대나 되는 마차가 줄줄이 빠져나왔다. 두세 시간을 빠르게 달려 항구에 도착했고, 마차에서 내린 이들은, 심지어 극구 반대하던 집사 할아범마저도 들뜬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4시간 정도 뒤에 다시 여기서 모이자꾸나. 다들 좋은 물건, 좋은 옷감, 좋은 장신구 장만하고.”
웬일로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 에스텔라는 꽤나 통 크게 특별 임금까지 건네줬다. 금화 세 잎씩을 받자 사용인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
돈이야 많고, 넘쳐나고, 썩어나고. 에스텔라는 미래의 자신이 얼마나 야박하게 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의 자신은 조금 풀어주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중심가에서 벗어난 전 변경백의 저택에서만 지내 갑갑했을 터이다.
원래 성군이 되려면 베풀어야 한다고 아버지가 항상 그러셨다.
백성이든 사용인이든,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들에게 베풀 줄 알고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가르쳐주셨죠, 아버지? 에스텔라가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은 그런 엄마를 올려다보며 가만히 치맛자락을 쥐었다. 그제야 에스텔라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밝게 웃어보였다.
시종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에스텔라와 루스, 루시는 집사 할아범과 함께 시장 나들이를 시작했다. 사실 에스텔라가 기분 좋은 이유는 발목 때문만은 아니었다.
캘리아나 왕국은 사시사철 따듯하고 햇빛 쨍쨍하기로 유명하지. 비가 오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라 하고, 심지어는 겨울이라는 계절도 없다고 한다.
그런 캘리아나 왕국은 땅도 비옥해서 온갖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하였다. 사계절이 뚜렷한 메시앙 왕국에서는 보지 못할 품종들의 꽃과 나무들이 무성하다.
캘리아나 왕국에는 황수선화가 그리도 많다지.
이자크는 황수선화를 매우 좋아한다.
아주 오래전, 에스텔라는 메시앙 왕궁의 온실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맞다. 그녀는 그때 이자크에게 반해버렸다.
메시앙 왕궁의 온실에는 황수선화 몇 송이가 심어져있었다. 14살이었을 때니 13년 전만 해도 캘리아나 왕국과의 수교가 원활하지 않았던 때라 메시앙 왕국에서 황수선화를 보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날은 왕궁 연회 날이었고, 많은 영애와 영식들이 에스텔라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다.
에스텔라에게 구애할 생각인 영식들은 잔뜩 허세에 찌들어 자기네 집에 금괴가 몇이니, 다이아가 몇 개니, 광산이 몇 개가 있고 시종 몇십 몇백을 부리고, 마차가 몇 대냐는 등의 부질없는 자랑을 해댔다.
기사 출신 영식들은 자신이 가진 무기들이 몇 개고, 물리친 적이 몇이고, 대련하여 이긴 적이 몇 번이고 등의 근육 자랑과 힘자랑만 해댔으며, 에스텔라는 그들에게 질릴 대로 질린 참이었다.
그들이 에스텔라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얌전하고 아름답고 심성 고우신 공주님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 그리고 부군의 권력을 가지는 것. 그쯤이 다였다.
“하여튼 눈에 음흉함만 가득 차서는. 에이씨.”
에스텔라는 눈만 버렸다며 제 눈을 거침없이 비벼댔다. 못생긴 것들이 감히 누굴 넘봐? 귀찮게 구는 이들을 피해 연회장을 나가도 영식들 몇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결국 피하고 피하다 웬만한 이들은 잘 못 찾는 온실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이자크를 처음으로 만났다.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기보다는 남색 벨벳으로 만든 정갈한 의복을 입고 있는 사내아이.
저녁때가 되어 하늘은 어두웠고 온실 주변에 켜진 양초들이 은은하게 그를 비추고 있었다. 짧은 흑발의 머리칼은 깔끔하게 뒤로 넘겨져 있었고, 하얗게 분을 칠한 영식과는 달리 태양의 그을림을 가지고 있는 남자.
짙은 이목구비와 빛나는 금안. 무표정으로 보이지만 따듯한 시선을 가진 그.
큰 키와 체격, 그리고 탄탄해 보이는 몸은 집에서 마냥 빈둥거려 배가 나오거나 비쩍 마른 영식들과는 달라 보였다.
단정하게 옷을 입은 매무새는 그렇다고 자신의 야생미를 뽐내는 사내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잘생긴 미청년은 그저 조용히 혼자 황수선화에 물을 주고 있었다.
에스텔라는 조용히 침을 꿀떡 삼켰다.
그런데 그 목 넘김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렸는지, 이자크가 인기척을 눈치채곤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
작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에스텔라는 다시 한번 제 눈을 비볐다. 왜 저 남자 옆에 꽃이 만개해보이지? 왜 주변에 꽃이 떠다니는 것 같은 환각이 보이지? 다시 눈을 비비고 봐도 이자크는 매우 잘생겼다.
“…그대는 누구죠? 이곳은 나와 내 어머니가 아끼던 곳이라 웬만한 사람들은 들여보내선 안 되는데.”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에스텔라가 얼른 정신 차리곤 도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이자크가 기다란 다리로 성큼 다가와 에스텔라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에스텔라가 손을 내밀자 이자크는 손등 위에 입 맞추는 시늉을 하고선 고개를 들어 에스텔라와 눈을 마주쳤다. 잘생긴 남자가 아래에서 눈을 맞춰오자 에스텔라는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공주님을 바로 뵙지 못한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전 디에스 가문의 장남, 이자크 몬 디에스입니다.”
“디에스 가문이라면, 변경백의 후계자겠군요. 디에스 변경백은 아버지의 오랜 친우라 영식에 대해 말은 많이 들었는데, 실물은 오늘 처음 보네요.”
“공주님을 더 빨리 뵙지 못해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에스텔라는 그에게 잡힌 제 손이 간질대는 기분이 들었다. 얼른 부채를 펴 도도하게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얼굴은 붉어진 후였다. 조명이 어두워 망정이었다.
“예서 뭘 하고 계셨나요? 이 온실은 찾기도 힘들 텐데.”
“아. 그것이… 꽃이 아름다워서, 국왕 전하께서 꽃을 좋아하면 이곳으로 가라 하셨기에. 몰랐습니다. 온실의 주인은 공주님이신데 제가 공주님께 허락을 받지 않은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곳의 꽃들은 다 아름답죠. 제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니까요. 영식께서는 어떠한 꽃이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공주의 물음에 이자크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황수선화가 제일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황수선화. 보기 드문 품종이긴 하죠.”
하지만 이 온실은 황수선화보다 더 비싸고 귀한 꽃들 천지였다.
“밤하늘의 별들이 내려온 것 같아 참 예쁩니다. 공주님의 성함처럼 빛나는 별 같지 않습니까.”
열여섯의 이자크는 해사하게 웃으며 여심을 흔들 줄 아는 소년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일부러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닌, 저도 모르게 사람의 마음에 들어선다는 점이다.
“….”
“공주 전하께서는 어떤 꽃을 가장 어여삐 여기십니까? 온실이 이리 깔끔한 걸 봐서는 공주님께서 차별 없이 다 예뻐하시는 것 같은데. 풀 내음이 진한 온실입니다. 참 좋습니다.”
이자크가 황수선화 잎사귀를 손끝으로 살짝 매만지며 물었다.
에스텔라는 그 잎사귀를 만지는 그의 손길이 꼭 제 마음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나는….”
에스텔라가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이자크는 옅은 미소를 띤 채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에스텔라는 괜스레 목이 콱 막힌 기분이 들었다.
얼굴은 수치를 모르고 점점 더 뜨거워졌고, 눈은 깜빡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온실의 온도가 너무 올라간 건지 왜 이리 더워. 애꿎은 부채질만 연신 해대며 에스텔라는 주체 못 하고 뛰어대는 제 심장 부근에 오른손을 올려놨다.
엄청 뛰어댄다. 소리가 들리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 목소리를 밀어냈다. 양도 아니고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저 역시, 황수선화가 제일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희 둘이 취향이 같군요.”
“…그러게요.”
이제부터.
오늘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에스텔라 역시 황수선화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며 잊을 수 없는 꽃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캘리아나 왕국의 선박이 들어와 장이 서는 날. 14살, 그날 이후로 에스텔라는 아버지께 간청을 하여 캘리아나에서 황수선화를 매번, 대량으로 수입해왔었다.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 시장 근처 꽃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망, 기분 좋아?”
루스가 에스텔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그마한 손이 제 손가락에 얽혀들자 에스텔라가 두 아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응. 기분 좋아. 얘들아 우리 아빠한테 줄 선물 사러 갈까? 아빠는 오늘 여기 못 왔잖아.”
“응!”
“꺄악! 좋아, 좋아!”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뛰어댔다. 에스텔라 역시 그런 아이들이 귀여워 얼른 발걸음을 재촉했다.
항구에 있는 커다란 꽃집. 에스텔라의 예상처럼 오늘 새벽 갓 들어온 황수선화가 싱싱하게 피어있다. 메시앙에서는 이상하게 황수선화 씨앗을 뿌려도 캘리아나 왕국만큼 싱그럽고 촉촉한 꽃잎이 피어나질 않았다. 기후와 온도의 차이 때문일까. 아니면 캘리아나 왕국은 신비한 마력을 통해 꽃을 더 싱그럽게 한다는 말이 사실일까.
아무튼, 꽃집 가득히 들어온 황수선화가 제 향기를 뽐내며 에스텔라를 반겼다.
“황수선화가 아주 싱그럽네.”
에스텔라가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꽃집 주인은 한눈에 봐도 귀한 분인 에스텔라 앞에 얼른 뛰쳐나오며 말했다.
“예, 오늘 아침 캘리아나에서 막 들어온 꽃입니다. 참으로 신기하지요? 몇 주 동안 선박에 있었을 꽃들이 이리 상처하나 없이 싱그럽다니.”
“그러게. 싱그럽네. 자네 가게에 이 꽃들이 다인가?”
에스텔라가 꽃집 가득히 메운 황수선화를 둘러보며 물었다.
“예.”
“황수선화가 인기가 좀 많나보네?”
에스텔라가 19살 시절일 때만 해도 황수선화는 그리 인기가 없는 꽃이었다.
“아, 그것이, 메시앙의 공주님께서 황수선화를 매우 좋아하시거든요. 이 꽃들도 다 공주님께서 매년 일정 이상의 꽃을 수입해오라고 선왕께 간청해서 그런 것이래요.”
꽃집주인은 애석하게도 공주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눈앞에 공주를 두고도 그리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수입을 많이 해오라 한들, 아무도 사 가지 않으면 적자가 나지 않나?”
에스텔라가 시침 떼며 물었다.
“아, 상관없습니다. 매년 공주님께서 다 사들이셨거든요.”
“내가?!”
“예?”
“아, 아니. 공주가?”
꽃집 주인은 의아한 눈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에스텔라가 얼른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공주가 매번 여기서 꽃을 사갔다는 소리인가?”
“아…. 직접은 아니고, 매번 하인을 시키셨습니다. 솔직히, 이 나라에서 황수선화 사가는 분이 공주님 말고는 또 별로 없거든요. 게다가 신기한 것이, 저희 가게 말고도 메시앙 전역에 있는 황수선화들을 모두 사들이셨어요.”
“해서? 그 많은 꽃들을 사다가 무얼 했는데?”
“그거야 제가 알 길이 없습죠. 뭐… 부군께 드릴 일은 없는 것 같고. 아시잖아요, 두 분 사이 안 좋은 거 만백성이 다 알고 있는데.”
꽃집 주인의 말에 에스텔라의 눈썹이 꿈틀댔다.
“사이가 안 좋아?”
“어휴. 뭐, 저희가 두 분 속사정 다 알겠느냐마는, 솔직히 공주님 이야기 모르는 메시앙 백성들이 어딨습니까. 그렇게 큰 나라도 아닌데. 귀족들한테서 얘기 들으면 그 하인, 하녀들이 고대로 옮기는 것이죠.”
“그 귀족들이 뭐라던?”
“뭐, 두 분이 이제는 갈라서신다고…. 이자크 님은 아예 이국으로 쫓겨나신다는데요?”
에스텔라는 속이 부글 끓는 기분이 들었다.
미래의 자신에게 또 한 번 화가 났고, 남일 얘기하기 좋아하는 귀족들에게도 화가 났으며, 이리 무감각하게 말하는 꽃집 주인에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역시 모든 원흉은 자신 아닌가.
“마망, 아빠 쫓겨나? 쫓겨나는 게 뭐야?”
루시가 에스텔라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 신나서 꽃집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꽃내음을 맡던 아이들이 어느새 에스텔라 곁에 와 울먹이는 눈으로 쳐다본다.
“…아빠….”
꽃집주인은 아빠라는 말에 에스텔라와 쌍둥이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 어어? 하는 얼굴로 눈이 점점 커진다. 에스텔라가 가까스로 화를 참고는 교양있는 목소리와 생긋 웃는 미소로 말했다.
“확실히 그런 소문이 돌고 도는 걸 보면 메시앙은 작은 나라긴 한데, 또 그렇게 작지만은 않은가 봐. 그대는 메시앙의 공주가 어찌 생겼는지도 모르는 걸 보면.”
“…비, 비천한 놈이, 결,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
주인은 그제서야 공주의 특징들을 떠올렸다. 햇살 가득 머금은 백금발의 긴 머리칼, 아름다운 갈대밭을 연상시킨다는 연한 갈색의 눈동자, 왕비를 꼭 닮았다는 아름다운 미모, 살짝 올라간 눈매. 마지막으로 공주는 쌍둥이를 낳았다지.
왜 이제야 알아봤을까!
메시앙에서 흔치 않은 백금발인데!
주인이 얼른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제 혀를 당장이라도 뽑고 싶다.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꺼냈는데 살아남을 리가! 땅에 머리를 박을 듯이 조아리며 사죄하자 에스텔라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게나. 난 그대를 벌할 생각이 없어. 왕국의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은 내 잘못이야.”
“예?”
“다만 나와 내 남편의 이야기가 그리 나도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구나.”
“죄송합니다, 죽음으로서 사죄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에스텔라가 생긋 웃으며 꽃집 주인장의 어깨를 꽉 잡았다.
“자네가 친히 해줘야할 일이 있네.”
“예?”
“내가 매년, 꽃을 다량으로 사갔댔지, 갑작스럽지만 지금도 필요해. 아주 많은 꽃이.”
“예…?”
“우리 사랑스러운 남편한테 내가 구애하는 중이거든? 그러니 자네는 지금 항구 근처의 모든 꽃집에서 황수선화만 골라 훈련장으로 보내줄 수 있는가?”
“훈련…장이요?”
“응. 나의 이자크가 좋아하는 꽃이 황수선화거든.”
에스텔라가 씩 미소지으며 야살스럽게 말했다. 할 수 있지? 주인 양반. 하는 에스텔라의 말에 넋을 놓고 있던 꽃집 주인이 퍼뜩 정신 차리며 얼른 고개를 끄떡였다.
꽃집 주인은 그대로 제 아내와 함께 근처 꽃집에 전보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텃밭 하나쯤은 꽉 메울 수 있는 황수선화 화분들이 마련되었다.
“안에 뿌리까지 모두 싱싱한 것들이라, 바로 땅에 옮겨심으면 한동안 잘 자랄 것입니다.”
“고마워. 수고했네, 다들.”
에스텔라가 생긋 웃으며 거금을 건넸다. 꽃집 주인들은 이게 웬 횡재냐 싶으면서도 매년 같은 날마다 꽃을 사가는 공주님의 실물이 신기한 듯 힐끔댔다.
주인장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저, 그럼 공주님. 부군과는 사이가 틀어지지 않으신 겁니까…?”
“내가 열심히 매달리는 중인데. 자. 다들 가서 마음껏 퍼트리게나. 에스텔라 공주는 부군인 이자크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매년 황수선화만 죄다 사들여 남편한테 바친다고.”
그렇게 말하곤 다들 흩어지라는 듯 에스텔라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상인들은 얼른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제 갈 길 갔다.
딱 한 명, 에스텔라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꽃집 사장만 빼고.
“자네는 왜 안 가는가?”
“아니 그, 제가 정말 궁금했던 것이 있어서요.”
“뭔데?”
“그… 이자크 님과 사이가 좋지 않으신데 매년 꽃을 사셔서 드린 것이면, 왜 그런 소문이 났을까에 대한….”
에스텔라가 잠시 생각하는 듯 지평선 너머 쳐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말했다.
“글쎄, 나와 그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
중얼거리던 에스텔라는 퍼뜩 정신이 드는 느낌에, 제가 한 말을 곱씹었다.
이간질하려는 이들.
이간질하려는 이들….
에스텔라가 멍하니 있자 루스와 루시가 다가와 에스텔라의 손을 꼭 잡았다. 느껴지는 온기에 아래를 쳐다보자 루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마망. 우리 배고파. 그치? 루스?”
“웅. 배고파.”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어른의 생각보다 더더욱 눈치가 빠르고 어떤 반응을 해야 그 상황을 환기시킬 수 있는지 아는 것 같다. 에스텔라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그럼 뭐 좀 먹으러 갈까? 어디갈까. 식당 갈래?”
“응!”
에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 할아범이 근처 식당을 찾아왔다. 항구 쪽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작지만 깔끔하고 정갈한 레스토랑이었다. 집사 말로는 이게 요즘 이국에서도 유행하는 카페라는 곳이라고 한단다.
“카페가 뭔데?”
“흐음, 일종의 보급형 살롱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살롱에서는 귀족들이 모여 다과회를 열거나 간단한 연회를 열거나 하잖아요? 여기는 일반 백성들이 간단하게 차나 빵, 혹은 커피를 즐기는 곳이라고 합니다. 일정 돈을 내면 카페의 주인장이 음료를 만들어준다고 하더군요.”
“흠. 나쁘지 않은데?”
“그렇죠? 아직 메시앙에는 카페가 많지 않지만, 이곳 주인장 말로는 반응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중산층 이상은 다니기 힘들겠구나.”
에스텔라가 카페의 가격표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귀족들만의 특권이었던 차, 커피, 디저트 등을 싼 원료로 싼값에 팔아 일반 백성들이 즐기게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취지였으나, 어디까지나 중산층 이상의 정도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층민들은 접하기 힘들겠지요. 하지만 물가 원가를 생각하면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 모두를 위해 주인장이 적자를 내며 일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니.”
그렇게 말하는데 에스텔라는 뭔가 예전에도 이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다시 한번 카페 안을 둘러보니 낯익어 보이는 느낌. 고개를 돌려 카페 주인을 쳐다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카페 주인이 에스텔라와 눈을 마주치고는 씩 미소 짓는다.
‘나를 아나?’
이곳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래의 에스텔라가 이곳을 다녔던 건가? 에스텔라는 우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고 에스텔라는 포크를 들어 마카롱을 자그맣게 잘라 아이들의 입에 넣어줬다. 작은 새들이 모이 먹듯이 조그마한 입을 오, 하고 벌려 받아먹는 것이 귀엽다.
여유를 즐기며 차를 마시고 있는데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던 루시가 에스텔라의 팔뚝을 톡톡 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게 뭐야?”
“응?”
“저기. 저기는 뭐야?”
“아, 저기는… 백성들이 노는 곳이야. 축제라고나 할까? 왜. 궁금하니?”
“응!”
한창 궁금한 것 많은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사실 에스텔라도 궁금한 곳이긴 하다. 귀족들의 교오양 있고, 우-아한 연회와는 달리 시끌벅적한 백성들의 축제가 항구 광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에스텔라와 쌍둥이 둘이 빛나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집사 할아범을 쳐다봤다.
“안 됩니다. 사람도 많고….”
“히잉.”
루스의 풀죽은 목소리에 집사는 앓는 소리를 내다 결국 그럼, 아주 잠깐 정도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잔뜩 신나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 쪽으로 향했다.
루스와 루시만큼이나 에스텔라도 신나있었다.
속알맹이는 여전히 궁금한 것 많고 궁정 생활이 지루한 열아홉의 공주님인지라, 에스텔라는 곧 스물여섯 두 아이의 엄마라는 걸 망각한 채 루스와 루시의 손을 잡고는 한창 노랫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무리에 끼어들어 갔다.
백성들은 에스텔라가 그저 귀족놀이에 지친 귀한 영애가 잠시 도망쳐나온거라 생각했는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화환을 씌워주고,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조용하고 웅장한 음악에 맞춰 조심스레 움직이는 귀족들의 춤과는 달리 백성들은 박수를 짝짝 치고, 웃고, 떠들고, 끼어들고, 갑자기 술을 마시고, 또 갑자기 음식을 건네며 신나고 가벼운 가락에 맞춰 요란스레 춤을 춰댔다.
처음이었다.
왕궁에서 평생을 살았고, 가끔씩 하는 외출도 오로지 귀족들의 저택에 가는 정도. 커다란 마차, 수십이 되는 호위기사. 선을 지키고, 그 선에 들어와 아부를 떨어대는 귀족들. 그런 류가 열아홉 에스텔라가 겪은 세상이었다.
다들 그녀를 찬양하고 다들 그녀를 반기지만, 속은 알 수 없는.
걸음걸이, 미소, 손짓, 발짓, 목소리 톤까지 어느 것 하나 신경 쓰지 않아서는 안 되는. 그렇지 않으면 책잡히고 마는, 그런 세계였는데.
“와하하하하! 마망! 마망! 이거 봐! 아기 당나귀라는 거래!”
루시가 너무 신난 나머지 요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에스텔라를 불렀다. 그 옆에선 루스가 신기해, 신기해-. 하며 어린 당나귀의 귀와 주둥이 부분을 조심스레 쓰다듬고 있었다.
“완-전! 못생겼어! 꺄하하하!”
“못생겼다아! 우하하하!”
아마 그런 신선한 충격을 받은 건 에스텔라뿐만이 아닐 것이다. 쌍둥이 루시와 루스는 4살 인생 중 가장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제약 없이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놀 수 있는 그런 것.
에스텔라가 그런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꺄하하하! 진짜! 진짜 못생겼다!”
같이 신나서 소리쳐주는 것.
그깟 못난이 당나귀가 그리도 웃길 일인가. 하지만 적어도 셋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멀리서 집사 할아범이 미소를 띠면서도 짠한 눈으로 셋을 쳐다봤다. 잠시 뭔가를 느낀 집사가 고개를 돌려 기웃거렸다.
멀리서 델라 랭의 모습이 보였다.
델라 랭은 집사에게 가만히 손짓했다.
“흠흠, 공주님. 제가 다른 먹을거리를 좀 사 올 테니, 그동안 다른 곳 가지 마시고요. 혹시나 괴한이 집적대기라도 한다면….”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말아, 할아범.”
에스텔라가 잔뜩 신나서는 말했다.
집사 할아범은 에휴, 한숨을 쉬고는 길거리 음식점 사이로 가는 듯 싶더니, 다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델라 랭이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에 들어간 집사 할아범이 델라 랭 앞으로 갔다.
“…어색하니까 본모습으로 돌아와.”
델라 랭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픽 웃으며 집사 할아범의 모습이 예의 검은 중절모 사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저도 이 모습으로 계속 있는 거 힘들거든요. 만날 노인네 목소리도 내야하고. 아, 귀찮아. 그냥 랭이 하면 되는 것을.”
“이게 갈수록 건방져지네. 해서, 공주님이 계단에서 굴렀다니. 뭔 일이야?”
에스텔라가 계단에서 굴렀다는 전보에 잠시 이국에 나가 있던 델라 랭이 급하게 들어왔다. 델라 랭은 당장이라도 집사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갔다.
“공주님께서 뭔가를 느끼신 거지? 그치? 원래 그렇게 덤벙대던 분 아니었으니까.”
“그거야 저도 모를 일이죠. 그냥 단순하게 발을 접질린 걸 수도 있고. 설마 지금 그것 때문에 절 부른 겁니까? 이국에서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아니, 계단에서 잘못 구르면 큰일 나니까….”
“와. 정말 대단합니다. 대단한 충성심이에요. 메라 님도 눈물흘릴 정도로 충성심이 있으시네요.”
집사는 짝짝 손뼉을 치며 놀리듯 말했다. 그러자 델라 랭이 반박하듯 그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러는 너도 아까 진짜 할아범처럼 미소 짓고 있었거든? 공주님이랑 쌍둥이들만 보면 헤벌레해져서는. 우리의 임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애초에, 다리 다친 사람을 왜 항구까지 데리고 나와?! 정신이 빠져서는.”
괜히 찔리는 것이 있으니 되레 큰소리 치는 것 같다. 델라랭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이국에서의 일들은 대부분 정리가 되고 있어. 나머지는 공주님께서 기억이 돌아오시면 할 일이야.”
“나참. 저희가 왜 이런 잡일까지 하고 있는 건지. 그냥 책 속에 있었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너 그렇게 말은 하면서 공주님 아끼는 거 다 알고 있거든? 빨리 자리 비우지 말고 얼른 돌아가. 그리고, 공주님 신변에 무슨일 생기기라도 하면 바로 말하고.”
델라 랭이 얼른 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러나 집사는 가만히 서 있는 채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그런데. 굳이 과거처럼 뭔가를 해야 할까요?”
“뭐?”
“그냥. 공주님께서 이대로 기억을 잃으신 채로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 지금 뭐라는 거야? 제정신이니?”
델라 랭이 가려던 발걸음을 돌리며 기이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제정신입니다. 그 어느때보다 객관적입니다.”
“그런 놈이, 그딴 말을 해?”
“그런 놈이니까요.”
“아르텔!”
“아까 전 공주님의 표정을 봤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공주님의 모습 중 가장 행복해 보였습니다. 굳이 과거처럼 복수를 해야 합니까? 지금은 이자크와도 사이가 그리 나쁘지가 않아요. 제 생각엔 이혼을 하지 않고 둘이 다시 합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사, 할아범, 영감. 하지만 진짜 이름은 아르텔. 아르텔 역시 에스텔라가 그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아르텔은 아까 전 에스텔라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꼭 모든 것을 다 기억해내야 하는가? 기억하면 뭐? 또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서 몸부림치라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 그때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건가?
“너 이 미친놈이!”
“저희의 존재 이유가 뭡니까? 메라의 책에서 풀려난 그 이후부터, 쭉. 공주님의 최대 행복이 이유 아닙니까?”
“입 다물어.”
“솔직히, 델라가 복수하고 싶은 건 아니고요?”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집사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델라는 진심으로 분노한 듯 손을 덜덜 떨어댔다.
“네가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모습을 봤으면서, 그 모습을 봤으면서도!”
“그런 모습을 봤으니까… 그래서요. 지금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요. 다시 그 나락을 상기시키게 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해서, 계속 그 망할 버트랜드의 손에 놀아나라고?”
“그게 아니라-”
“네가 말하는 게 그거야!”
델라 랭이 숨을 몰아쉬며 애써 진정하곤 말을 이었다. 아르텔은 델라 랭의 모습에 가만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
“잊지 마. 버트랜드 그 새끼가 공주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그건 필연적인 거야.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금 당장이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겠지. 그래. 네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님의 모습이 더 행복할 수도 있어. 하지만 잊지 말라고. 궁극의 적은, 버트랜드야.”
“….”
“알아들었어?”
“네. 죄송해요. 델라.”
“뺨이 부었네. 미안해. 그만 가봐. 나도 가봐야겠어. 공주님 옆에서 잘 보필해주고.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으면 바로 말해줘.”
델라 랭은 미안한 듯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아르텔은 그런 델라의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다 다시 집사 할아범의 모습으로 돌아온 뒤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길거리 음식점에서 싸구려 간식거리를 산 뒤 여전히 신나서 축제를 즐기고 있는 에스텔라와 쌍둥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누군가 에스텔라 근처에 다가온다.
이상함을 느낌 아르텔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사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텔라에게 다가왔고, 쌍둥이들은 낯선 남자의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에스텔라의 드레스 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아르텔이 남자에게 다가가 제압하려는 순간, 루시가 소리쳤다.
“우리 엄마예요!”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1권
지은이 : 신양이
발행인 : 민경찬
발행처 : 페퍼민트
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방울내로9길 17 201호(망원동, 세종빌딩)
등록번호 : 2010년 10월 7일 제2010-0002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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