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남편과 자식이 생겨버렸습니다-5화 (5/21)

5장.

에스텔라는 더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평소처럼 장난으로 받아치며 가볍게 넘기기에는 그가 벌써부터 이 모든 것의 끝을 예상했다는 것이, 관계의 회복보다는 다시 돌아올 상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궁금하다.

미래의 에스텔라는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한 걸까.

누군가 자신을 이곳으로, 미래로 데려온 것이라면,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본인이 아니라면 신이 한 짓일까?

억울함보다는 그의 상처가 너무나도 크다는 것이 실감이 돼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 역시 많은 상처를 받아왔고 아이들 때문에 내색하지 못한다는 걸 느낄 수 있어 더욱 슬펐다.

사랑하던 남자에게 상처를 준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자책감.

그는 정말로 지쳤던 것이다.

에스텔라와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들 중에서 행복했던 것은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그는 아직 낫지 않은 생채기들을 지닌 채.

“…나는….”

에스텔라의 목이 메었다.

울고 싶은 것은 그일 텐데 왜 내가 우는 거야. 에스텔라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얼른 고개를 쳐들고 숨을 내쉬었지만 헛수고였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코가 시큰거려 자꾸만 훌쩍 거렸다.

“난… 미안하다는 말 밖에 못해요. 이자크.”

그 이상의 것을 물어봐도 에스텔라가 줄 수 있는 확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스텔라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그녀는 정말로 이자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못 하겠다.

그렇게 확신을 하면 뭐 하나. 이미 이자크는 자신에게 상처를 받았는데.

“흑… 나는… 나는….”

에스텔라가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닦으면 새로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테이블 위 흙으로 빚어진 만찬들은 에스텔라의 눈물로 얼룩졌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지금의 에스텔라가 결백하다는 거야 잘 안다.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것도 맞다.

그전의 에스텔라에게는 자신의 어떠한 말도 닿지 못했는데, 지금의 에스텔라에게는 자신의 모든 말들이 닿으니까. 심술부리는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절박한 것도 맞았다.

하얀색 레이스로 만들어진 손수건은 이미 축축해져서 물기를 닦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려 했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 그의 등을 때렸다.

“압빠 엄마 괴롭히지 마!”

“미, 미워! 엄마 울리지 마!”

고사리손으로 커다란 그의 등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루시와 루스. 덩달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는 잔뜩 자신을 원망하는 두 아이를 보며 이자크는 마음이 한층 더 착잡해졌다.

아이들은 두 손을 이용해 주먹을 쥐곤 계속해서 투닥투닥 이자크를 때렸다.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때리는 거라 아프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이자크는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아빠 미워! 아빠 나빠!”

“엄마 울지마, 엄마 뚝해… 뚝!”

루시는 눈을 질끈 감고 계속해서 이자크를 꼬집고 때렸다.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꾹 감은 눈 끄트머리에 눈물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루스는 얼른 엄마한테 달려가 그 작은 고사리손으로 얼굴을 닦아줬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더 서러워져 엉엉 울었다.

당황한 이자크가 얼른 루시를 안아 들며 진정시켰다.

“루시. 아빠가 울린 거 아니야.”

“아빠가 울린 거 맞아! 아빠 나빠! 엄마 괴롭히지 마! 나능 엄마 좋단 말이야, 아빠 미워! 미워! 엄마 가면 어떡할 거야! 아빠 미워! 아빠 가!”

이자크는 가만히 아이를 고쳐 안고는 등을 토닥였다.

언제나 밝았던 루시.

울보 루스 옆에서 항상 씩씩하게 웃던 아이였다. 그랬던 그 아이가 루스보다 더 엉엉 울며 이자크를 때린다. 엄마가 가면 어쩔 거냐고, 아빠 밉다고.

히끅대며 숨을 고르는 루시를 꽉 껴안은 이자크는 루시가 계속해서 자신을 꼬집고 때려도 묵묵히 아이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이내 아이를 꽉 껴안으며 얼굴을 묻었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던 걸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걸까.

에스텔라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래의 자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자크의 품에 안겨있던 루시가 꿈지럭 대면서 아빠 품을 밀어냈다. 그리곤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선 에스텔라에게 가 안겼다. 루시가 그러자 루스 역시 에스텔라에게 손을 벌렸다.

에스텔라는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접고는 두 아이를 껴안았다. 제 목을 감싸는 작은 손들이, 제 품을 파고드는 작은 몸들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에스텔라는 있는 힘껏 아이들을 껴안았다.

“안 갈 거야. 엄마 안 갈게. 울지 마. 응? 아빠 미워하지 마. 엄마가 잘못한 거야.”

“안 갈 거야?”

“응. 안 갈게. 엄마 절대로 안 갈게. 잊지도 않을 거야.”

에스텔라가 그렇게 말하며 이자크를 쳐다봤다. 가만히 그들을 내려다보던 이자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실을 나가버렸다. 루시와 루스는 에스텔라에게 안겨있는 상태로 아빠가 나간 문을 가만히 쳐다봤다.

“압빠 화났어….”

루스가 중얼거리자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책했다.

“루시가 나쁜 말 해서 그런 거야. 내가 막 아빠 때려서 그런 거야. 아야한 거야.”

짧은 손가락끼리 문대면서 루시가 훌쩍였다. 에스텔라는 얼른 아이를 달래기 위해 말했다.

“아니야. 아빠는 세서 루시가 때려도 하나도 안 아파.”

“아니야. 아빠 아파. 이쪽이 아야하는 거 아니고, 여기가 아야하는 거야. 루시가 나쁜 거야.”

그렇게 말하며 루시는 제 등이 아닌 제 심장 부근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마음이가 아야하는 게 더 아야해. 예쁜 말만 하랬어. 루시가 아빠 가라고 해서 간 거야.”

“누가 그렇게 말해줬어?”

“아빠가.”

언젠가 이자크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몸에 난 상처는 치유가 되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몸에 난 상처보다 치유되는 것이 더 느리고 아프기도 아프다고. 그러니 서로에게 상처 되는 말은 하면 안 된다고. 서로 때리고 꼬집어도 몸은 금방 낫지만 미워하는 마음에서 한 행동들로 얻은 상처들은 오래오래 아프다고.

“아빠가 그렇게 말했어?”

“웅.”

에스텔라는 놀란 듯한 눈치였다. 그 말은 그녀의 아버지 벤자민이 하던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빠, 루시 이제 미워하겠지?”

루시가 주눅 든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루시 목말도 안 태워주고, 그네 놀이도 안 해주고, 전쟁놀이도 안 해줄거야. 소꿉놀이도 이제는 루스랑만 할 거야. 히잉….”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생각하니 서러워지는 것인지 다시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이 닭똥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항상 위로받던 루스가 이번에는 루시를 꽉 껴안아주며 말했다.

“아니야, 루스 혼자서 아빠랑 놀지 않을게! 루스는 항상 루시랑 다닐 거야. 루시 혼자 안 놀게 할 거야!”

“거짓말하지 마아… 흐앙….”

작은 주먹을 쥔 채로 루시가 제 얼굴을 마구마구 비볐다.

에스텔라는 더는 이렇게 분위기가 침체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에스텔라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멍하니 있더니, 이내 루시를 번쩍 안아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눈을 빛내며,

“우리 그럼 아빠한테 사과하러 갈까?”

“…사과?”

“루시가 아빠 아야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웅. 미안해.”

“아빠가 이제 루시 미워할까 봐 걱정돼?”

“…웅….”

“그럼 가서 사과하고 화해하자. 아빠 지금 아야해서 슬플 거야. 루시가 가서 상처 난 곳에 호, 해줘. 그럼 아빠도 안 아플 거야.”

“연고 발라줘? 루시가?”

“응. 루시가 가서 연고 발라주자. 엄마랑 루스도 같이 가자. 엄마도 아빠한테 연고 발라줄 거야. 우리 셋이서 같이 연고 발라줄까?”

에스텔라가 높은 목소리로 밝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금세 활짝 웃으며 응! 대답했다. 셋 다 눈이 퉁퉁 부어서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굴을 파고 들어가는 분위기가 어느새 밝아졌다.

*

이자크는 온실에서 나와 그대로 저택 밖으로 나가버렸다. 야외정원으로 나간 그는 숨을 크게 내쉬며 하늘로 고개를 쳐들곤 붉어진 눈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손바닥에서는 열감이 느껴졌다. 눈이 뜨거웠다.

다시 허리를 숙여 벤치에 앉았다. 그는 뭔가를 억누르려는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고르길 반복했고, 이따금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누그러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이런 것쯤엔 무뎌졌다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던 걸까. 에스텔라의 우는 모습을 보고, 루시의 원망하는 모습을 보고, 이자크는 심장 부근이 묵직해졌다.

두렵다. 에스텔라에게 다시 마음을 열게 될까 봐.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될까 봐.

같은 실수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에스텔라는 확신을 할 수 없는 에스텔라 아니던가.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다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자신을 싫어하던 때의 에스텔라가 돌아오게 된다면?

다시 한번 냉담해진 그녀를 버텨낼 자신이 없다.

다시 한번 버려질 아이들을 버텨낼 자신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는 단번에 루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루시와 루스의 손을 잡고 오는 에스텔라가 보인다.

신의 미움이라도 산 건가. 어째서 항상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귀신같이 알고 모습을 보이는 건지. 그의 다짐은 신에게 있어서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은 걸까. 그저 흥밋거리에 불과한 걸까. 그런 원망스러운 생각들이 잠깐 들었다.

“아빠-!”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 오던 루시가 엄마의 손을 놓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이자크를 부르며 달려오는 모습에 혹여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이자크는 걱정되어 자신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났다.

헥헥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루시가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

“아빠 미안해요! 아빠 안 미워! 아빠 가면 안 돼!”

그리고는 이자크를 꼭 껴안아 줬다.

“루시?”

“아빠 내가 호 해줄게. 루시가 호 해줄게.”

그러면서 이자크의 심장 부근에 빨개진 볼을 부풀리며 호, 호,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 이게 뭔가 싶어 이자크가 루시에게 물었다.

“루시, 왜 호 해주는 거야?”

“아빠 아야하니까. 루시가 아빠 밉고 가라고 해서 아빠 여기 아야하지. 루시가 미안해. 아빠 사랑해요.”

그리곤 이자크의 가슴 부분을 슬슬 문대준다.

“엄마가 연고 발라주랬어.”

“연고?”

“웅. 엄마가 아파 슬플 거니까 우리가 가서 연고 발라주자고 했어. 압빠, 루시 미워? 루시가 아빠 밉다고 해서 아빠도 이제 루시 미워?”

조심스레 물어보는 루시를 다시 안아주며 이자크가 말했다.

“아니야. 아빠는 루시 안 미워해. 루시가 아빠 미워해도, 아빠는 언제나 루시를 사랑해.”

“그럼 루시 계속 목말 태워줄 거야?”

“그럼. 매일매일 태워줄게.”

“그네 놀이도?”

“그럼.”

“그럼 전쟁놀이도? 인형 놀이랑 소꿉놀이도 매일 매일 해줄 거야?”

“루시가 원하는 건 아빠가 다 해줄 거야.”

“정말이야?”

“그럼. 약속할게. 아빠는 언제나 루시와 루스를 사랑해.”

그러자 루시가 새끼손가락을 건넸다. 새끼손가락 거는 것이 약속이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 새끼손가락 거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그저 내미는 수밖에 없었다.

이자크는 픽 웃으며 루시의 작은 새끼손가락 제 손가락을 걸었다.

그제야 루시가 안심이 된다는 듯 씩 웃었다.

그리곤 뒤 돌아 에스텔라에게 소리쳤다.

“아빠랑 화해했어! 엄마도 빨리 호- 해줘! 엄마도 약속해!”

눈이 마주친 이자크와 에스텔라는 서로 어색하게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에스테라는 괜히 루스의 오동통한 손을 만지작댔고, 이자크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빨리 엄마도 호- 해줘.”

루시가 에스텔라의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며 이자크 쪽으로 오게 했다. 엉거주춤 끌려온 에스텔라가 멋쩍은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이자크의 말도 일리 있어요. 그런데 나는….”

“….”

“나는, 내가 이자크를 사랑한다는 걸 의심치 않아요. 그러니까… 나 좀 믿어줘요.”

“….”

말이 끝났다. 딱히 더 할 말은 없었는지 에스텔라는 제 손톱을 튕겼다. 아직 성에 차지 않은 건지, 루시가 에스텔라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제 빨리 호- 해주라니까.”

“응?”

“엄마도 여기에 호- 해줘야지.”

루시가 이자크의 가슴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엄마도 앉아서 아빠 호, 해줘. 연고 발라줘야지. 에스텔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중에, 나중에, 하자 루시가 혼내듯 입술을 깨물곤 습, 소리를 냈다.

“안 돼. 아빠 아야 안 하게 호, 해줘야지! 나도 했는데 왜 엄마 안 해.”

엄마도 호 해줘야지 아빠가 이제 안 아프다며 루시가 계속 에스텔라를 채근했다. 그러자 언제나 루시의 편을 드는 루스도 에스텔라에게 빨리 호 해주라며 보채기 시작했다. 두 아이의 성화에 에스텔라는 잠시 이자크와 어색한 눈 맞춤을 한 뒤 슬그머니 주저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호-”

그리곤 그의 가슴께 쪽에 입을 모아 호, 부는 시늉을 했다.

루시가 말했다.

“또 해줘야지. 여러 번.”

에스텔라는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아이들 눈치를 보고는 다시 입을 오므려 호, 바람을 불었다. 이자크는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스도 호 해줄래. 그냥 호 해줄래.”

자신만 호, 불어주지 않은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루스가 끼어들었다. 모양새가 이상했다. 작은 아이와 어른이 각자 이자크의 가슴을 향해 호 바람을 부는 건 굉장히 요상한 광경이었다.

결국 이자크가 말했다.

“이, 이제 안 아프니까 다들 그만해도 되겠다 루시.”

“이제 아빠 아야 안 해?”

“응.”

“그럼 아빠도 이제 엄마 안 미워할 거지?”

“.. 응?”

“아빠도 이제 엄마 안 미워할 거지? 엄마 호 받아줬으니까? 이제 엄마랑도 같이 놀아줄 거지?”

루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자크는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요 깜찍한 작은 것들의 꾀에 넘어간 건가 싶다가도 아이들 앞에서는 더는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작은 머리로 얼마나 고심을 했을지 눈에 보였다.

“…그래.”

아이들 앞에서만은 사이좋은 척이라도 해야 하나. 이자크가 그리 생각하며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듣고 나서야 루시는 안심된다는 듯 헤, 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자크는 그런 루시를 보며 생긋 웃고는 아이를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뚝으로 루시를 받쳐 안아 든 뒤 에스텔라에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죠. 해가 지는 듯합니다.”

루시가 안겨있는 게 재밌어 보였는지 루스가 이자크의 바지를 잡아당기며 아빠 나도, 나도, 보채기 시작했다. 이자크는 루스도 간단히 안아 들고는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자크의 미소를 보았고, 루시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와의 깊어진 골을 메우기는 부족했다.

자신이 할 일은 단 하나.

미래의 자신이 해왔던 일들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를 알아내는 것.

자신이 정말 바람을 피우고 가정에 소홀했다면,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고 정말로 단순한 마음의 변심으로 그들에게 상처를 준 거였다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사죄하며 이자크와 아이들을 보내주자고. 에스텔라는 그리 마음먹었다.

*

온종일 엉엉 울어 진이 빠진 건지, 루시와 루스는 저녁 식사 도중부터 꾸벅꾸벅 졸며 식욕과 수면욕끼리 서로 싸워댔다. 승리는 수면욕이 가져갔던 걸까. 아이들은 결국 입에 음식을 문 채로 고개를 까딱대며 졸기 시작했다.

유모가 데려가려는 것을 이자크가 제지했다. 에스텔라 역시 얼른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를 안아 들었다.

“우리가 재울 테니 유모는 쉬어.”

에스텔라의 말에 유모가 놀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크와 나란히 아이를 안고 가는 모습이 영 적응되지 않았는지, 유모는 한참 동안 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루시를 안아 든 에스텔라는 곤히 잠든 아이를 쳐다봤다.

금색 기다란 속눈썹이 이따금 파들거렸다. 자그마한 입술로 오물대며 잠꼬대를 하는 모습이 귀여운 듯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시선을 돌려 앞서 걸어가는 이자크를 바라봤다. 양팔로 안아 든 루스의 모습은 그의 덩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방에 들어가 각자의 침대에 눕혔다.

에스텔라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나가려는데, 루시가 그녀의 소매 레이스를 잡았다. 잠결인 건지 비몽사몽한 눈으로 에스텔라에게 말했다.

“마망, 머리 쓰다듬어줘. 맨날 그랬잖아.”

루시의 말에 에스텔라가 살풋 미소지으며 동그란 두상을 몇 번이고 천천히 쓸어내려 줬다. 볼록 튀어나온 이마에 입을 맞추자 그제야 루시는 손에 힘을 풀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 아이가 귀여워 가만히 내려다보던 에스텔라는 문득 루시의 말을 곱씹어봤다.

맨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고?

과거에서 미래로 온 뒤로 잠이 들기 전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루시는 마치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일상적이었던 것처럼 말했다.

미래의 에스텔라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에스텔라는 그저 루시가 의미 없이 한 말일 거라 치부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고 나온 그녀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자크를 보고 잠시 놀란 듯 숨을 멈췄다.

“…먼저 방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에스텔라가 말끝을 흐렸다.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를 보니 줏대 없는 심장이 또 쿵쿵 울렸다. 하지만 설렘보다는 혹여나 그가 자신에게 아이들이 잠든 틈을 타 또 선 긋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닌지, 불안함이 더 컸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말없이 자신만 보고 있는 이자크에게 에스텔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하나.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울 줄은 몰랐어요. 나도….”

괜히 책잡힐 것은 없는지 이것저것 생각하던 에스텔라가 먼저 자신을 변호했다.

“비방할 생각으로 기다린 것 아닙니다.”

이자크의 말에 그럼 왜 기다리고 있냐는 눈빛으로 에스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이자크는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갑시다.”

설마 그저 단순하게 자신을 기다려준 건가 싶어 에스텔라는 기분이 좋아졌다. 별거 아니지만, 정말 아무런 감정 없이 기다려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에스텔라는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 복도를 거닐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침실로 가는 길이 긴 건지. 어색한 정적을 깨고 에스텔라가 물었다. 다소 진지한 물음이었다.

“저… 이자크.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왜… 먼저 나를 떠나지 않았던 거예요?”

에스텔라의 질문에 이자크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얼른 말을 덧붙이며 자신이 이상한 질문을 한 것이 아님을 알렸다.

“제가 이런 말 묻는 것도 이상하겠지만, 솔직히… 미래의 제가 그렇게나 가정에 소홀하고 외도의 가능성까지 있었던 데다 이자크한테 못된 짓만 했는데….”

“…….”

에스텔라는 그의 눈치를 슬쩍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혼 통보도 제가 먼저 했다면서요. 왜 이자크는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떠나지 않았던 건가요?”

단순히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해서?

그런 거라면 더더욱 에스텔라를 일찍 떠났어야 했다. 생물학적으로 엄마이지만 정서적으로는 결코 좋은 엄마가 아니지 않았나.

“…제가 생모라서 그런 거였나요? 아이들에게는 친엄마여야만 한다는 그런….”

“단지 생모라는 이유만은 아니었습니다.”

“….”

“제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네?”

“그때 당신이 했던 말. 그 말 하나 때문에 미련하게 못 떠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기다려 달랬으니까. 믿어주자. 믿자.”

이자크. 어떠한 순간에도 날 믿어주고 기다려줄 수 있나요? 꼭 그래 줘야 해요. 왜냐면 전 이자크를 엄청 사랑하니까요. 그 말 하나가 이자크를 족쇄처럼 묶었다. 이자크는 그 말을 믿었다. 에스텔라를 기다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줬던 그 진실된 모습들.

볼을 붉히며 말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그때는 믿었다.

하루, 이틀, 한 달이 모여 그렇게 일 년이 넘어가고 이 년이 되고 삼 년이 되고 사 년째가 되던 해, 먼저 그를 놔버린 것은 에스텔라였다.

“내가 대체 뭐라고 말했었는데요?”

에스텔라가 물었다.

대체 자신이 무슨 말을 했길래 이자크가 이렇게까지 미련스럽게 남아있었던 건가.

언변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욱하는 성격에 다급한 성격이다 보니 충분히 생각하고 말하는 편은 아니었다. 해서 말실수를 해서 항상 아버지에게 혼나면 혼났지 자신이 쓰레기 같은 짓을 해도 곁에 남아줄 정도로 대단한 말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이자크는 한참 동안 말없이 먼 곳만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에스텔라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어떠한 순간에도 날 믿어주고 기다려 줄 수 있냐고. 꼭 그래 달라고. 왜냐면… 당신은 날 엄청 사랑하니까.”

“….”

“그게 답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말은 아니었는데, 나한테는 대단한 말이었나 봅니다.”

복도에 서 있는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에스텔라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이자크가 말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이제는- 대단한 말 아닙니다.”

“이자크.”

“피곤하실 텐데 어서 들어가죠.”

이자크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전만 해도 에스텔라와 보폭을 맞춰주던 그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드레스 자락을 잡고 뒤를 쫓아갔다.

빠른 보폭으로 가던 그를 따라잡은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손을 잡아 세웠다.

“헉… 허억… 왜 이렇게 발이 빨라요… 헉….”

허리를 숙여 숨을 고르던 에스텔라는 여전히 이자크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이자크는 당황한 듯 얼른 에스텔라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에스텔라는 절대 놔줄 마음 없는 듯 더 힘을 줘 잡았다.

“뭐 하시는….”

“내가 말주변이 부족해요. 철없는 공주라서, 해달라는 거 다해주니까 내 세상이었어서. 굳이 청산유수 아니어도 다 들어줬으니까. 그래서 말로 남 설득하는 거 잘 못 해요.”

“….”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말하는 게 다예요. 그거 내 진심 맞았을 거예요. 아니. 맞아요. 진심이에요.”

“….”

“궁금하지 않아요? 난 내가 궁금해 미치겠어요.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내가 진짜로 이자크를 사랑한다는 건데. 이상하잖아요. 내가 6년을 짝사랑했는데 고작 4년 조금 안 돼서 변심이라뇨.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나는 이상해요. 내가 그럴 리가 없거든요. 진짜 이상한 거거든요, 이거는.”

“일단 손 좀 놓고-”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손을 풀려 하자 에스텔라가 다시 힘을 줘 잡았다.

“안 놔요. 안 놓을 거예요. 하나 약속하죠. 정말로 미래의 내가 단순 변심으로 그렇게 냉대한 거면, 깔끔하게 사죄하고 포기할게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기회 줄 거죠.”

“무슨 뜻입니까, 그거.”

“내가 뭐 하고 다녔는지 다 조사해올게요. 거짓말은 안 해요, 나. 단순 변심이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니까….”

“부인이 그렇게 변한 데에 달리 이유가 있을 거다, 이겁니까.”

“네. 확신해요.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단순 변심 때문에 이자크랑 아이들한테 상처를 줄 것 같진 않거든요.”

이자크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단순 변심이 맞으면요. 부인. 날 어디까지 초라하게 만들 셈이십니까. 잔잔한 호수라고 그렇게 막 돌멩이 던져도 되는 거 아닙니다. 마음껏 들이댔다가 아니다 싶으면 버려도 되는 사람 아닙니다.”

“이자크, 저는 그 뜻이 아니라-”

“그 작은 돌멩이들이, 나한테는 얼마나 큰 잔물결을 만드는지, 에스텔라는 아십니까?”

이자크는 진심으로 지친 표정을 지었다.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넘기고는 울분을 억누르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 변심이든, 다른 이유가 있든 나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궁금하지 않다고요. 당신이 돌멩이를 던져 나한테 파장을 만들어도 내가 인내하겠습니다.”

“….”

“가벼운 마음으로 내게 사랑 고백하는 거?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열아홉의 에스텔라고 죄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 이상의 것은 던지지 말아 주세요.”

“….”

“단순한 해프닝이고 싶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이 이상 깊이 들어오지 마세요. 열아홉 살의 부인한테도 상처가 될 겁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고집불통이니까요, 제 마음대로 할래요.”

“부인!”

이번에는 에스텔라가 이자크를 두고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어째 매일의 끝이 항상 이런 식의 언쟁인 건지. 골치 아픈 듯 이자크는 다른 방에서 자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에스텔라가 고개만 쏙 빼놓고는 소리를 빽 질렀다.

“다른 방에서 자지 말아요! 맨날 도망치기만 하고!”

“제가 언제 도망쳤다는 겁니까?”

“도망치는 거 맞죠! 내가 이자크였으면 단순 변심인지 아닌지 확인해서 단순 변심이면 위자료든 저택이든 뜯어갈 수 있는 건 다 뜯어갔을 거다! 그래서 나쁜 에스텔라를 털어서 거렁뱅이로 만들고 해외로 날랐을 거야! 왜 사람이 참을 줄만 알어! 밉지도 않냐고요!”

“안 미워요!”

“왜요!”

“사랑하니까!”

“….”

“….”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방금 전까지 진지하게 화를 내던 이자크는 가만히 눈을 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듯한 한숨이었다. 에스텔라 역시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이자크가 얼른 말을 정정했다.

“…사, 랑했었으니까요. 됐습니까. 나는 한때나마 사랑했던 여인이 그렇게 망가지는 거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라고요.”

“….”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제, 제가 언제 그런 오해를 했다고….”

“…다른 방에서 자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에스텔라는 더는 그를 잡지 않았다. 이자크는 진심으로 피곤한 듯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큰 키에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비틀거리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에스텔라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방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는 양손을 들어 뜨거워진 볼을 식혔다.

“…어후, 나한테 말하는 줄 알았네.”

그런 식으로 화내면서 말하는 이자크의 모습은 처음이었는데, 화내면서 사랑하니까! 소리치니 눈치 없는 심장은 그저 쿵쿵 설레발을 칠뿐이다.

에스텔라는 얼굴을 식히고선 소파에 앉았다. 근처에 있던 시녀들은 얼른 씻을 물을 받아와 대령했다. 시녀 중 하나가 물었다.

“공주님, 부군께서는 안 들어오십니까?”

“…어, 오늘은 각방 쓰기로 했어.”

“에이, 잘 지내시다가 왜 또 싸우십니까.”

그녀가 왕궁 생활을 할 때부터 같이 있던 시녀였기에, 시녀는 꽤나 스스럼없이 에스텔라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아- 몰라, 몰라.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감도 안 오고.”

“공주님께서 모르시면 어째요. 이 집안 사람들 모두 공주님이랑, 이자크 님이랑 다시 사이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리는걸요?”

“나도 그래. 나도 그러기만을 기다린다고…. 미엘라. 유모 말로는 내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다는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유모랑 너는 내가 이자크 짝사랑부터 알고 있었잖아. 나랑 같이 궁정 생활하면서.”

시녀 미엘라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뭐… 저도 그래서 놀라긴 했지만요….”

“…너도 그렇게 생각했구나. 내가 쓰레기라고.”

에스텔라 차게 식은 수프처럼 밍밍한 얼굴로 씁쓸하게 말했다. 미엘라는 얼른 에스텔라의 눈치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어우, 제가 어떻게 공주님을 그렇게 생각해요! 전 그래도 공주님께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공주님이 루시 아가씨랑 루스 도련님 잠잘 때마다 몰래 방에 들어가시는 거 몇 번이나 봤는데요.”

“그래?”

시녀 미엘라는 잠시 뭔가를 고심하는 듯하다 주변을 둘러보곤 말했다. 주변에 듣는 이는 없었다. 미엘라는 작게 속삭이듯 에스텔라에게 말했다.

“네. 지금 공주님께서 기억을 잃으셨으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건데, 솔직히 그동안에 공주님이 이상하시긴 했어요. 저한테 항상 비밀이라고 하셨거든요.”

“뭘?”

“공주님이 아가씨랑 도련님 잠잘 때마다 몰래 가셔서 한참 동안 바라보고, 쓰다듬고… 뭐 그런 것들이요.”

“내가 그랬어?”

에스텔라는 아까 전 루시가 했던 말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미엘라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예. 공주님께서 꼭 비밀로 하시라고… 전 참 이상했죠, 그렇게 아가씨랑 도련님을 아끼시는 분인데 왜 아닌 척하시는 건지….”

“미엘라. 내가 평소에 누구와 제일 가깝게 지냈지?”

“네? 공주님께서는… 딱히 가깝게 지내는 분은… 아! 로도니아 살롱 마담이랑 친하셨어요.”

“마담이라면, 델라 랭?”

“네. 그 에테리아 인이요. 공주님께서 직접 로도니아 살롱까지 넘겨주셨죠.”

“내가 그 살롱을 넘겨?”

“공주님께서 로도니아 살롱을 매매하셔서는 그 여자한테 넘겼어요. 그때 한동안 난리였었죠. 외국인한테 이 메시앙에서 가장 큰 살롱을 넘기신 거니까요. 이유는 절대로 안 알려주시더라고요.”

마담이 남자였다면 정부다 뭐다 말이 나왔을 텐데, 델라 랭은 정말이지 평범한 에테리아 인이었다. 에텔리아에서는 뭘 하다 왔는지 알 길이 없었고 사람들은 델라 랭과 에스텔라의 관계를 어림짐작하기 바빴다.

가장 유력한 것은 배다른 언니다, 라는 소리가 제일 유력했다고.

하지만 델라 랭은 왕과 왕비와도 전혀 닮지 않았고 에스텔라와도 전혀 비슷한 구석도 없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도 그 정도로 각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델라 랭과 에스텔라의 사이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각별한 사이 같지는 않으나 커다란 건물을 매각해 그냥 주는 사이라. 참으로 이상한 관계 아니던가.

에스텔라는 몇 주 전 로도니아 살롱에서 이혼 위기를 이겨낸 부부와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델라 랭은 뭔가를 알고 있었다. 에스텔라가 정체 모를 사내들과 패물들을 주고받는 다는 것을.

‘중간책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보석을 받지 말라 했을 때의 표정은 당황한 얼굴이었어.’

진즉에 이 생각을 하지 못하다니. 에스텔라는 답답한 제 머리통을 두어 번 정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시녀 미엘라가 깜짝 놀랐다.

“공주님!”

“아, 난 정말 왜 이렇게 칠칠맞지 못한 거지? 더 섬세하게 알아봤어야 했는데! 미엘라. 내일 델라 랭을 저택으로 불러들여.”

“네?”

“델라 랭은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 어휴, 왜 진즉에 이런 생각을 못 하고!”

“어어, 또 때리지 마셔요! 귀한 몸을!”

에스텔라가 또 제 머리를 치려 하자 미엘라가 얼른 손을 잡으며 말렸다.

“미엘라.”

“또 왜 그러세요.”

“내가 비밀로 하라고 했던 것들 더 없어?”

“네?… 그것 말고는 잘… 아, 서재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셨어요. 청소도 직접 하셨고….”

“서재? 그래. 알겠어. 지금 나한테 말한 것들 앞으로도 계속 비밀 지켜.”

“네. 당연하죠, 공주님.”

미엘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막았다.

몸을 씻고 침대에 누운 에스텔라는 가만히 오늘 하루의 일들을 회상했다. 울고 또 울고 또 울다가 웃다가 싸우다가 주눅 들었다가.

“…그래도, 날 사랑하긴 했었구나.”

에스텔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희망은 있네. 뭐.”

이자크의 입에서 미래의 자신을 사랑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아주 조금 위로는 된다. 에스텔라는 사실 많이 걱정했었다. 자신에게 관심도 없던 그 철벽 같던 남자가 어째서 자신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길렀는지.

혹시나, 정말 생명 부지를 위해 자신과 결혼한 것뿐이 아닐까. 애초에 기대도 없었기에 그 대우를 받으면서도 이곳에 있었던 것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혹여나 자신이 제 짝사랑을 가지기 위해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사랑했었기에 결혼했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적어도 그때 당신의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을 테니까.

*

이자크는 붉어진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아까 전 자신의 말실수에 수치스러워하는 건지, 평소 무감각해 보이는 얼굴이나 아이들 한정으로 보여주는 다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하….”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이자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걸 물어서, 사람을 이렇게 창피하게 만드는 건가. 이자크가 중얼거렸다. 부끄러워하는 에스텔라의 얼굴이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도 이렇게까지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 동안 문에 기대 열을 식히던 이자크가 고개를 들어맞은 편에 걸린 액자들을 쳐다봤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붉어진 얼굴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액자를 보자마자 씁쓸하게 내려왔다.

그가 들어온 방은 에스텔라와 각방을 쓸 때 묵었던 방이자 그가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쓰던 방이었다. 방에는 가족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었고, 이자크는 이 방을 각별히 아꼈다.

에스텔라와 결혼했을 때, 그리고 그녀가 임신을 했을 때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이 방에 걸어두기도 했다. 이곳은 그의 추억들을 모아놓은 방이기도 했다.

가에 부분이 불에 탄 액자 속에는 그의 부모님과 여동생이 함께한 네 명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배가 불룩 나온 에스텔라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이자크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이자크의 모습이 걸려있다. 거기에 에스텔라는 없었다. 초상화를 그리려 했을 때 에스텔라는 저택에 없었다.

로도니아 살롱에서 초대한 연회에 나가느라 여념이 없었을 테지. 그 이후부터 집에 화가를 들이지 않았다. 가족 초상화를 1층 현관에 걸어두는 것이 메시앙의 전통인데 그 전통도 못 지키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한 명이 빠져버렸으니 ‘가족’ 초상화일 수가 없지 않나.

이자크는 가만히 초상화 앞으로 갔다. 선반 위에 놓인 함을 여니 종이들이 고이 접혀 있었다. 이자크는 그 편지를 열어 가만히 읽어 내려갔다. 에스텔라와 주고받은 편지들이었다.

그는 항상 이렇게 추억을 한다.

미련하게도, 한심하게도, 사랑스러웠던 에스텔라를 추억한다.

그것만이 에스텔라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믿고 기다려달라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과거를 물고 늘어져야만 했다.

사랑한다. 지금도 사실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보다 이제는 쉬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지금까지 제 미련으로 그녀 곁을 떠나지 못했지만 이제 아이들이 더 커서 상처받기 전에 그녀를 떠나려 한다. 사랑하지만 떠난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걸 더 체감하기 전에 도망치는 것과 같다.

이자크는 차라리 이혼 얘기를 먼저 꺼낸게 그녀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더랬다.

만일 이자크가 이혼해달라 했을 때 에스텔라가 너무나도 쉽게,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요. 라고 대답했었다면 그것이 더 큰 상처가 되었을 거다.

이제는 자존심을 챙겨줄 때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랑 고백을 해오는 과거의 에스텔라에게 현혹돼서는 안 된다.

그녀를 떠나는 것만이 네 가족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이다.

상처받고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했고,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다. 그러니까 자신은 에스텔라를 사랑하지 않는 거다. 그래야만 하는 거다.

절대 넘어가서는 안 돼.

따듯한 금색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

그 이상한 꿈은 단발성에 그치지 않았다. 에스텔라는 밤새 낑낑 앓는 소리를 내듯 뒤척였다.

꿈속에서는 여전히 세 명의 에스텔라가 나타났다.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에스텔라와 그걸 부러워하는 현재의 자신, 그리고 담담해 보이는 미래의 에스텔라.

단순한 꿈이 아니다.

에스텔라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미래의 에스텔라 옆으로 갔다.

“정말 말 안 해줄 거예요?”

“그러니까 직접 알아내야만 한대도.”

“그러니까 왜 내가 직접 알아내야만 하는 건데요?”

“남이 말하는 자신만 찾다가는 진짜를 못 찾는다고. 이 멍청아.”

“멍, 멍청이?!”

“내가 저렇게 철이 없었다니.”

미래의 에스텔라가 진심으로 한심한 듯 에스텔라를 쳐다보며 끌끌 혀를 찼다. 에스텔라가 익익, 분을 삭이지 못해 이상한 소리를 내다 소리쳤다.

“그러는 본인은?! 이자크랑 꼬맹이들한테 막말이나 해서 상처를 주고! 댁이 못 하는게 있으니까 과거의 나를 부른 거 아니에요?”

미래의 에스텔라는 꿈쩍도 안 하는 듯했다. 그런 말을 듣든 말든 차분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기만 했다.

에스텔라는 기분이 나빠져 그 책을 홱 잡아 치웠다.

“이봐요. 그렇게 담담한 척만 하지 말고!”

그제야 미래의 에스텔라의 시선이 에스텔라에게로 꽂혔다. 그녀의 눈은 텅 빈 사람 같았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에 흠칫 놀라 주춤댔다.

“에스텔라. 넌 정말 솔직하고 철없어.”

“뭐?!”

“…어쩔 땐 그게 큰 무기가 되기도 하더라.”

“…무슨….”

“에스텔라. 기억해내. 그것만이 모두가 살길이야. 나는 이 이상 말할 수 없어.”

“왜요?”

“왜냐면 이 모든 것들은-”

순간 시야가 흐릿해지고 에스텔라는 꿈에서 깼다. 몸이 무겁고 축 늘어진 기분이다. 겨우 몸을 일으켜 목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방 안에 들어온 유모는 들어오다 말고 얼른 놀라 에스텔라 곁으로 갔다.

“세상에 공주님! 이번에도 이렇게 땀을… 어디 몸이라도 안 좋으신 거 아닌가요? 정말 의사라도 불러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정말로 나 괜찮아.”

에스텔라는 마지막으로 미래의 에스텔라가 했던 말을 기억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다고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 진짜 뭐라고 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나네! 아, 답답해!”

에스텔라는 제 가슴을 퍽퍽 치며 호소했다. 유모는 수건을 돌돌 말아 에스텔라의 몸에 난 땀들을 닦아주면서도 이상하게 구는 제 주인 눈치를 살폈다.

“뭐가 그리도 기억이 안 나신다는 겁니까?”

“…꿈에서 누가 나한테 말을 했는데, 그게 정말로 중요한 말 같거든? 근데 그게 곧 죽어도 기억이 안 나잖아. 듣자마자 바로 깼는데 기억이 안 나. 미치겠네!”

에스텔라가 다리를 버둥댔다.

“아휴, 그만하시고 얼른 준비하셔요. 손님이 오고 있다고 전보 들어왔으니까요.”

“델라 랭?”

“예. 어떤 사이이시길래 도통 말도 안 해주시면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집으로 불러들이십니까?”

“있어.”

“있기는 무슨….”

유모가 입을 삐죽댔다. 업어 키운 자신에게까지 비밀로 하다니. 게다가 더 웃긴 건 시녀 미엘라는 뭔가를 아는 듯이 군다는 것이었다.

죽어도 말 못 한다는 미엘라의 모습에 괜히 공주님에게 있어 자신이 못 미더운 건 아닌지 그런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공주님께서 저만 쏙 빼놓으시고 미엘라 고 년이랑만….”

“에이, 삐치지 말고 가서 드레스나 가져와.”

“에잇, 제가 아가씨 도련님 유모지 뭐 공주님 유모입니까? 흥. 미엘라 고 년한테 시키세요!”

그러면서도 조금 있다가 드레스를 들고 오는 유모였다.

유모는 에스텔라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며 슬그머니 델라 랭에 대한 것을 물어보기도 했으나, 에스텔라는 답답한 듯이 반문했다.

“유모. 유모는 내가 기억상실인 걸 잊은 거야?”

“아차차….”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해온 건지 자세히 좀 알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에스텔라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에스텔라가 가만히 거울 속의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으니까.”

“공주님….”

“내가 아는 나는 전혀 안 그랬을 것 같은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상처 줄 만한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라고 확신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까 이상하잖아. 유모는? 유모는 그런 내가 이상하지 않았어?”

에스텔라의 말에 유모가 한숨을 푹 쉬며 그 옆 의자에 앉아 에스텔라의 머리칼을 빗겨줬다.

“솔직히, 예. 이상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공주님은 제가 알던 공주님 같지도 않았고… 남들은 그런 공주님보고 드디어 철이 들었다, 얌전해졌다… 그렇게 말했지만, 제 눈에는 뭔가를 잃은 사람이었어요. 시체처럼…. 차라리 이렇게 막무가내인 공주님이 더 좋습니다. 기억이 안 돌아와도 좋으니까-”

“유모.”

“네?”

“내가 시체 같았어?”

“아니,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말이- 아휴, 이 입이 주책이라-”

유모가 제 입을 찰싹 때리려 하자 에스텔라가 얼른 저지하며 물었다.

“눈에 막 초점도 없고, 텅 비어 보이고.”

“…예.”

“내가 혹시 막 마약 같은 걸 했었니?”

“어휴, 그럴 리가요!… 뭐… 확신은 못 하지만….”

유모가 슬쩍 에스텔라의 눈치를 보며 확실히 그런 눈이나 행동은 정상 같지는 않았죠… 하며 말끝을 흐렸다. 유모의 말에 빌리면 에스텔라는 마치 껍데기만 있는 사람 같았다고 한다.

이자크와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이 점점 피폐해졌다고, 텅 비었다고.

“그런데 뭐 그게 중요한가요! 제가 이럴까 봐 그동안 말씀 안 드린 거예요. 자꾸 자책만 하시니까.”

“자책은 해야지. 나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이 있는데.”

“공주님….”

유모는 에스텔라가 정말로 철이 들었다고 생각한 건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옷을 갈아입고 델라 랭이 도착하기 전까지 에스텔라는 잠깐의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번화가에서부터 전 변경백의 저택까지 거리는 꽤나 걸리기 때문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온실에 모여 티타임을 가지는데 이자크가 슬쩍 떠보듯 물었다.

“손님맞이용 드레스를 입으셨네요.”

“네. 로도니아 살롱의 마담을 잠시 불러들였어요.”

살롱 마담이라는 말에 이자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잠시 에스텔라의 표정을 살펴보는 듯했다.

“…아무래도 제가 뭔 짓을 하고 다녔는지 제일 잘 알 것 같아서요. 제가 살롱 마담과 친하다는 소리를 들어서.”

“아.”

이해됐다는 듯 이자크가 시선을 거뒀다. 아주 잠시나마 원래의 에스텔라가 돌아 온 건 아닌지 고민했던 것 같았다.

에스텔라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시녀 미엘라가 다가와 델라 랭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에스텔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 잠시만 자리 좀 비울게요. 티타임은 이따가 마저-”

“마망, 누구 만나?”

옆에서 인형 놀이를 하고 있던 루시가 물었다. 에스텔라는 생긋 웃으며 루시의 볼을 한 번 쓰다듬고는 방을 나갔다.

“압빠. 엄마 왜 말 안 해주고 가?”

“…그냥 잠시 친구를 만나러 간 거란다, 루시.”

이자크는 델라 랭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자만 만나면 에스텔라는 점점 더 신경질적이게 되었으니까.

그 여자를 통해 남자들을 만난 걸까? 로도니아 살롱은 귀부인들이 모여 저들만 아는 은밀한 유흥을 즐긴다고도 했으니까.

아무렴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자크는 루시와 루스와 노는 내내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델라 랭은 실로 오랜만에 에스텔라의 부름을 받고 저택으로 향했다. 밤늦게 도착한 시종이 내일 아침 전 변경백의 저택으로 와달라는 전보를 전했고, 델라 랭은 드디어! 하며 부랴부랴 준비를 한 채 저택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도착한 랭은 시녀 미엘라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갔다.

내온 차를 마시며 기다리자 에스텔라가 왔다. 랭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에스텔라의 얼굴을 살피는데 무표정의 얼굴이라 잘 모르겠다.

저번에 봤을 때는 자신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는데, 이리 저택으로 따로 불러들인 걸 보면 공주님의 다른 계획인 건가 싶었다.

“앉으세요, 마담. 모두 물러가 있고.”

응접실에 있던 하녀들이 방을 나갔다. 비장해 보이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델라 랭 역시 같이 긴장한 듯 가만히 침을 꼴깍 삼켰다.

“공주님? 혹 계획에 차질이-”

“델라 랭. 그대는 어떤 사람이죠?”

“네?”

“소문 들으셨을 텐데요. 로도니아 살롱의 주인이면 모든 소문을 다 알고 계실 텐데.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요.”

델라 랭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주 전부터 로도니아 살롱에서는 에스텔라에 대한 온갖 추측성 소문들이 퍼졌다. 공주가 기억을 잃었다느니, 큰 사고를 당해 연회에 나오지도 않는다느니, 이자크와 크게 싸워 서로 몸에 상처가 가득하다느니.

마담은 그저 말도 안 되는 소문이거나, 에스텔라가 일부러 그런 소문들을 잡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실제로 기억을 잃었어요.”

정확히는 과거에서 온 것이지만. 에스텔라는 뒷말은 하지 않은 채 마담 랭의 얼굴을 살폈다. 당황한 눈치인가? 맨 처음 당황해 보이는 것 같던 델라 랭은 이내 담담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렇군요.”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말하시네요.”

에스텔라의 말에 델라 랭은 가만히 앞에 놓인 차를 들이켰다. 방 안에는 다기 놓는 소리만 났다.

“그렇다면 공주님께서는 절 왜 부르신 건가요?”

“내가 그동안 뭘 해왔는지, 그대가 제일 잘 알 것 같아서요. 그대와 나는 무슨 관계입니까? 듣자 하니 로도니아 살롱을 내가 사서 그대에게 줬다는데요.”

“네. 공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왜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어째서죠?”

델라 랭이 고개를 들어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테리아 인 특유의 푸른 눈이 에스텔라의 탁한 갈색 눈과 마주쳤다.

“이유는, 공주님께서 그리 제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 공주님께서 제게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것을 제 입으로 말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공주님께서, 직접 알아내셔야 한다고.”

“그건 마치 미래의 나, 아니. 나 스스로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델라 랭은 담담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져온 패물들은 지금 당장 쓰일 수 없겠군. 그들에겐 당분간 계획을 미뤄야 한다고 말해야겠어. 그리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물어보죠. 그대가 보기에 나는 어땠습니까?”

“…존경할만한 분이셨습니다. 공주님. 제가 모든 것을 말해드릴 수는 없지만, 공주님께서 기억을 되찾으실 때마다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먼 길까지 오느라 고생했는데 너무 빨리 보내는 것 같아 미안하네요. 집사가 그대를 바래다 줄테니, 부디 조금이라도 편히 쉬시며 가세요.”

“아니요. 그리 말씀하시지 마세요. 오랜만에 공주님을 뵈어 반가울 뿐입니다…. 종종, 로도니아에도 놀러 오시지요. 사라졌던 기억들이 돌아올지 누가 압니까.”

그렇게 말하며 델라 랭은 클러치에서 작은 초대장을 하나 건넸다.

“드리기에 이른 시기지만, 이번에 부부 연회가 로도니아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공주님과 친한 다른 귀부인들도 참석하니… 와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공주님께서는 지금 부군과의 관계 회복이 최우선이지요?”

“….”

“오세요. 꼭.”

델라 랭이 생긋 미소 짓고는 방을 나섰다.

에스텔라는 마담이 건넨 초대장을 열었다. 한 달 뒤쯤 열리는 부부 연회였다. 델라 랭은 확실히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하나 절대 말하지 않을 것 같다.

마치 꿈속에서 만난 미래의 에스텔라 같지 않나.

그놈의 ‘스스로 찾아내라’가 뭐라고. 뭔가 알고 있는 이들은 속 시원히 말해주면 안 되는 것인가. 에스텔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델라 랭은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은 빠르게 출발했다. 응접실 창문 쪽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에스텔라와 살짝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 델라 랭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맞은편 검은색 중절모를 쓴 사내가 물었다. 에스텔라가 말한 집사 할아범보다는 청년이라 부르는 것이 더 맞을 듯싶었다.

“공주님과 얘기가 잘 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우려하신 대로 일이 터지고 말았어.”

랭의 말에 모자를 푹 눌러썼던 남자가 슬며시 고개를 들며 탄식을 했다.

“이런.”

“뭐… 더 어려지지 않은 게 어디니. 당분간 계획은 미뤄야겠어. 다른 이들한테도 그리 말하고.”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일을 미룰지 확답을 줘야 단원들도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기억이 돌아오시도록 기도할 수밖에. 그것도 아니면, 이 모든 상상황을 직접 눈치채시거나.”

착잡한 얼굴로 말하던 델라 랭은 부채를 펼쳐 얼굴에 살살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많이 불안하십니까?”

“예상했던 일이라고, 항상 마음 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저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공주님을 뵈니 불안하긴 하구나.”

“그냥 말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부채질을 하다 말고 델라 랭이 고개를 홱 돌려 남자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절대로! 너, 혹여나 공주님한테 허튼소리라도 해봐. 네 놈 혀를 뽑아버릴 테니까. 너 같은 게 집사라고 옆에 붙어있으니, 내가 아주 불안해 죽겠다니까.”

“뭘 그리 무서운 말까지 하시고 그럽니까. 압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그건 규칙에 위배된다는 것도요.”

“…겨우 희망을 가지셨던 분이야. 이번에도 실패를 하신다면 공주님, 정말로 무너지실 거야.”

그녀의 말에 앞에서 장난스레 미소짓던 남자도, 델라 랭도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에스텔라가 무너지는 것을 한 번 봤다. 산송장처럼, 아니 이미 시체처럼 표정도 감정도 없던 그녀였다.

자신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모시던 그분이 그렇게 망가지는 것을 옆에서 두 눈으로 봤던 그들이었기에, 델라 랭은 이번만큼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부군과는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델라 랭의 질문에 중절모 사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보아하니 두 사람 다 한 고집, 한 답답 하는 것 같아서. 버트랜드가 공공의 적이라는 것만 알게 되어도 두 분 사이는 급속도로 좋아지실 텐데 말이죠.”

델라 랭이 이번엔 가자미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개입하지 말라고 그랬어. 너. 그거 공주님 위하는 거 아니다. 규칙을 지켜야 해.”

“그놈의 규칙, 규칙, 규칙. 신이 무슨 규칙을 지킵니까?”

이게 진짜! 델라 랭이 기다란 레이스 부채를 접어 남자의 어깨를 딱, 딱 때렸다.

“입 잘못 놀리지 마. 신은 무슨. 인간들이 신이라고 올려쳐 주니 기고만장해져서는… 잊지 마. 우리의 주인은 에스텔라 공주님이야. 네가 뭐라도 될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아, 알겠어요. 진짜….”

커다란 덩치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남자는 델라 랭 앞에서 맥을 못 맞췄다. 아마 그 이유는 그가 델라 랭에 비해 압도적으로 어린, 아주 늦게 태어난 새끼 신이기 때문이리라.

델라 랭은 멀어져가는 에스텔라의 저택을 바라봤다.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델라 랭. 그것은 에스텔라가 지어준 이름.

인간들은 신, 악마, 천사, 미물, 마물 그렇게 선을 그어 종류를 나누고 누군 선망하고 누군 두려워한다. 누군 환영하고 누군 몰아내려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구분하는 것.

초월적인 존재들에게는 그런 구분이 없다. 해서 신이면서 천사고, 천사면서 악마이며, 성물이자 타락한 존재이기도 하다.

델라 랭과 검은 중절모의 사내는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은 필연적으로 한 여인을 섬기게 된다. 메시앙의 초대 왕이자 초월적 존재들을 다스리는 태초의 신 ‘메라’의 금서를 읽을 수 있는 자.

에스텔라였다.

*

모든 것에 규칙은 존재한다.

시간의 흐름, 공간의 존재. 하나의 공간에 같으나 다른 두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 무조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뉠 뿐이다.

수많은 연금술사가 그 규칙을 깨기 위해 연구해왔고, 연금술이 사그라들자 신진 학자들이 과학이라는 걸 들고 나타났다.

하지만 그 규칙은 깰 수 없었다. 이 규칙은 초월적 존재들마저 개입할 수 없는 규칙이었다. 오직 태초의 신 메라만이 그 규칙을 깰 수 있다. 그러나 메라는 규칙을 깨는 공식들을 모두 적어 책으로 만든 뒤 금서로 지정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수고를 했던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 금서는 메시앙의 왕궁 어딘가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에스텔라가 이 태초의 신 ‘메라’와 금서의 존재에 대해 알 리 없었다. 메라는 이제 메시앙의 건국 신화 같은 허구의 존재로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델라 랭이 돌아가고 난 뒤 에스텔라는 터덜터덜 힘 빠진 걸음걸이로 돌아갔다.

온실로 들어가니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던 이자크가 왜 벌써 왔냐는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러든 말든 아이들은 신나 에스텔라에게 달려갔다. 방금 전까지 이자크가 번쩍 들어 높이 높이 올려 주는 놀이를 하던 루시는 빨리 내려줘! 압빠, 빨리 내려줘! 하며 이자크의 얼굴을 꾹 눌렀다.

“왜 벌써 왔습니까?”

“…뭐, 딱히 할 말이 없어서요.”

“부인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사람인데, 별다른 말을 안 해줬습니까.”

“나보고 스스로 기억하래요. 꿈에서나 여기서나 뭐 죄다 나보고 알아서 알아내래….”

어휴, 한숨을 내쉬며 에스텔라가 탁자에 풀썩 앉았다. 이자크는 답답해 죽겠다는 에스텔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에스텔라의 꿈에 대해 물었다.

“꿈?”

에스텔라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유모가 와서는 요즘 들어 에스텔라가 아픈 것 같다고 운을 뗐다. 아마 속마음은 아프신 것 같으니 잘 좀 봐달라, 그런 식인 것 같겠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리신다며, 어디 용하다는 약재상들을 모아다 보약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거냐며 연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에스텔라가 며칠 전 아침 식사에 늦었을 때도, 먼저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던 이자크가 땀을 뻘뻘 흘리는 에스텔라를 보고 창문을 열어주고 나간 적이 있었다.

원래 더위에 약했던 사람이니, 잠결에 오른 열 정도겠거니 했는데 아닌 건가.

이자크가 꿈에 대해 궁금한 듯 에스텔라를 쳐다봤고, 에스텔라는 괜히 뒤숭숭한 꿈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챈 건지, 귀여운 두 꼬맹이 에스텔라의 양팔에 매달렸다. 루시가 에스텔라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홱 잡아챘다.

이제 막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한 루시가 드문드문 소리 내 읽었다.

“로…니…아…살…초…니…다!”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에스텔라를 올려다본다. 빨리 칭찬해! 빨리 머리를 쓰다듬어! 그런 반짝거리는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 에스텔라가 얼른 에스텔라의 작은 엉덩이를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와, 루시가 초대장을 읽었구나!”

“루스도 읽을 수 있어. 이거, 이거는 합이야. 이거는 도. 이거는… 이거는 롱!”

“루스도 읽을 줄 아네. 와!”

“압빠도 읽을 수 있지?”

루시가 쪼르르 이자크 앞으로 가 초대장을 건넸다.

우리 딸. 정말로 큐피트의 역할에 충실하구나. 누굴 닮아 이렇게 눈치가 빠를꼬. 에스텔라가 속으로 생각했다. 본인 손으로 주기에는 둘의 사이가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지 않나. 그 문제를 루시가 깔끔하게 해결해줬다.

이자크는 루시가 건넨 초대장을 받아 펼치더니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종이 가운데를 한동안 빤히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긴장되는 듯 두 손을 모아 꼭 잡았다.

[6월 9일 사랑의 날을 맞이하여 로도니아 살롱에서 주최하는 부부 동반 연회에 에스텔라 데 메시앙, 이자크 몬 디에스 부부 내외를 초대합니다. 부디 귀한 걸음 해주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 마담 델라 랭]

이자크는 가만히 그 종이를 읽다 세상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여 루시에게 말했다.

“글쎄다. 아빠는 뭐라고 쓰여있는지 모르겠네.”

그러면서 다시 초대장을 루시에게 건네는 것이다.

“에이, 아빠 바보구나? 이것도 모르고. 나랑 루스는 읽을 줄 아는데.”

“그러게. 아빠한테 보여줘도 뭔 소린지 모르겠으니 다시 엄마한테 주렴. 엄마 거란다.”

루시는 그 초대장을 받아 에스텔라에게 건넸다. 에스텔라는 떨떠름하고 야속한 얼굴로 이자크를 바라봤다. 이자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래. 같이 가자는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을 테지. 같이 참석하자 하여 얌전히 따라올 그런 남자도 아니라지만, 그래도, 13살의 나이에 고대 기사 서적문을 읽은 영재라고 알려진 사람이 문맹인 척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에스텔라가 너무하다는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그러다가 든 생각이, 그렇게 치사하고 유치하게 나온다면 이쪽도 되로 받아쳐 주겠다는 것이었다. 에스텔라가 씩 웃더니 루시에게 뭐라 속삭였다.

이자크는 또 무슨 꿍꿍이일까 싶어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흘겼다.

루시가 킥! 하고 참지 못한 웃음을 흘렸다.

에스텔라는 이자크가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테이블로 가 의자에 앉았다. 루시는 엄마를 따라 쪼르르 갔다. 탁자 위 화병에 꽂힌 꽃 한 송이를 빼더니 이내 향기를 음미하듯 숨을 들이쉰 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루시에게 건네며 또 뭐라 귓속말을 한다.

무슨 얘기를 했길래 저렇게 활짝 웃을까. 루시의 조그맣고 가지런한 이가 보일 정도였다. 루스가 궁금한 듯 에스텔라의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기자 에스텔라가 이번엔 루스에게도 말했다. 항상 울먹이는 듯한 억울한 눈매를 가진 루스도 이번엔 무슨 이유에선지 루시처럼 활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라가 굽혔던 허리를 다시 올리자 그것은 신호가 되었다. 두 아이는 서로 손을 잡더니 이자크가 있는 쪽으로 다다다 뛰어오기 시작했다.

루시가 이자크에게 꽃을 건넸다.

이게 뭔가 싶어 에스텔라를 한 번 쳐다보고 루시와 루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자 루시가 뿌듯한 미소로,

“저쪽의 숙녀분께서 보내셨습니다아-.”

“보내셨습니다아-.”

“뭐?”

이자크가 얼떨결에 꽃을 받아들곤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세상 느끼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여유롭게 치켜올리며 미소짓더니 이내 한쪽 눈을 감으며 어울리지도 않는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메시앙에서는 남녀 파트너 연회가 열릴 때면 항상 같이 가고픈 상대에게 꽃을 선물하는 것이 기본 예의였다. 보통은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편인데, 이쪽은 그럴 가망이 없으니 과감하게 에스텔라가 하는 것이다.

그로도 부족했는지 에스텔라가 입모양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받아줄 때까지 보낼 거예요.

뭘 받아줄 때까지 보낼 거라는 거지. 하던 이자크는 그게 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든 말든 누가 더 질긴지 재봐야 아는 법. 절대로 마음이 동할 리 없으니 이자크는 자신의 승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자크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에스텔라는 정말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온 공주다. 왕의 하나뿐인 딸.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 하나뿐인 후계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얻을 때까지 울든 떼를 쓰든 자신만의 비장의 무기를 꺼내든, 그리하는 여자였다.

고개를 홱 돌려 간접적이지만 확고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는 이자크의 모습에 에스텔라의 몸속 깊숙이 봉인되어 있던 승부욕이 해제되고 말았다.

이제부터 게임 시작이다.

누가 이기나 보자.

에스텔라가 생긋 미소지었다. 6년 짝사랑, 6년간의 주접. 그거 웬만한 사람은 못 하는 일이래도. 에스텔라가 쯧쯧 혀를 찼다. 이 사람아, 내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여자가 아니라니깐. 이쯤 되면 공부 머리나 전략 머리와는 별개로 이자크가 그리 똑똑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잡초 같은 자존심으로 밟혀도 밟혀도 계속 고개를 쳐드는 걸 몇 번이나 봤는데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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