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가족이 인질로 잡혀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바보가, 안 그래도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뻔뻔하게 난 결백하니 의심되면 죽여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밀수꾼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희 가족 좀 살려주십시오. 제발… 전 정말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팔았던 것뿐입니다….”
가족의 안전을 구걸하며 운을 뗀 남자는 그렇게 7년 전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당시에 작성하던 장부의 존재나 손님의 인상착의 등등을.
일이 터지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밀수꾼은 그대로 밀항을 하여 해외로 도주했다 한다. 그때 그 밀항을 도운 이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약을 사 간 사람이었다고.
그 후로 숨어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 납치되었다고 한다. 가족을 찾고 싶으면 메시앙으로 돌아오라는 메모가 아수라장이 된 집안 식탁 위에 올려져있었고, 그는 그 길로 곧장 배를 타고 돌아온 것이라더라.
이자크가 물었다.
“그래서 그들이 자네에게 뭘 요구했지.”
밀수꾼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말했다.
“…당신들한테 잡혀오는 것입니다.”
“뭐?”
울음을 터트리며 밀수꾼이 말을 이었다.
“국왕 버트랜드께서 이자크 몬 디에스, 당신에게 전하라 했습니다. 공주님과 아이들, 소중한 가족을 지키고 싶다면 여기서 그만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제 가족은 물론 당신의 가족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이 이상 파헤치지 마십시오.”
제발, 제발요. 더 이상 파헤치지 마십시오. 그저 절 죽여 조금의 분노라도 푸십시오. 제발요. 밀수꾼은 애원했다.
순식간에 이자크의 얼굴이 굳어들어갔다.
“버트랜드가 그렇게 전하라 했다고.”
하, 하며 웃음기 없는 웃음을 내뱉은 이자크는 남자의 말을 곱씹는 듯 한참 동안 침묵했다. 버트랜드, 이 악마 같은 새끼. 이자크가 작게 읊조렸다.
“디에스 전 가주님에 대한 일은 유감입니다. 제가, 제가… 제가 그 원흉이라 생각하시면 절 죽이시고 이제는 그만 조사하십시오. 당신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있습니다… 흐흑… 제발요… 당신이 더 조사할수록 제 가족도 위험해집니다. 그 어린것들은 무슨 죄입니까….”
버트랜드는 악질이었다. 사람을 조종할 때 소중한 다른 누군가가 고통받는다는 것을 고통받는 것이 한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일이라는 사실을 잘 이용했다. 네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럴 때마다 네 주변의 누군가가 고통받을 거다. 그 사람이 고통받는 것은 다름 아닌 너 때문이야. 사람의 죄책감을 건드려 복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자크 님, 단원들한테도 알릴까요.”
“아니. 아직 조직이 있는지는 모를 거다. 단원들은 모르게 해. 그가 노리는 것은 나뿐이니까.”
“하지만, 이자크 님. 아가씨와 도련님을 위협하는데… 게다가 공주님까지-”
“두 번 당하지는 않을 거다, 길리언. ”
“이자크 님….”
“예정했던 회의는 다음으로 미루지. 별장 주변에 보초를 더 세우고.”
수행기사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뒤 받들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자크는 별장에서 나왔다.
수행기사 길리언이 따라 나와 저 밀수꾼은 어떻게 할까요, 하며 처분을 물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보낸다 해도 저 남자가 버트랜드에게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내버려 둬. 어차피 그 남자를 미행해온 그림자들이 있을테니까.”
왕에게는 두가지 그림자가 있다. 하나는 국경선에 위치한 변경백 또 하나는 왕의 주변에 보이지 않게 숨어 다니며 그를 호위하거나 그가 내리는 밀명을 수행하는 자들.
벤자민 선왕은 후자의 그림자를 잘 사용하지 않았지만 버트랜드는 그걸 십분 이용할 것이다.
버트랜드의 명령으로 저 밀수꾼이 직접 잡혀들어온 것이라면, 아마 어딘가에서 그와 이자크의 대화를 듣고 있을 것이다. 이자크가 살려서 내보내 준다 한들 어차피 저 밀수꾼은 죽는다.
그 역시 알고 있을게 뻔했다.
“… 시체 처리를 하게 되면 그 때 말해라.”
“네. 이자크님.”
이자크가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3년 전, 에스텔라 몰래 조사를 하던 이자크는 어쩌면 모든 사건의 주범이 버트랜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고,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에스텔라는 그런 버트랜드를 친절한 대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녀에게 있어 버트랜드는 정신적 지주 아니던가.
이자크는 에스텔라에게 버트랜드에 대한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다. 자신이 그렇게 믿고 따르던 이가 제 아버지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주범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큰 충격에 빠질까.
그녀에 대한 애정은 없지만, 그래도 배려는 하고 싶었다.
이자크는 그저 조용히 일을 도모하고, 조용히 이 나라를 뜬 뒤 아이들과 새 출발을 하고 싶다. 거기에 에스텔라는 껴있지 않다.
저택으로 돌아온 이자크는 아이들이 놀고 있을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갔는데 아이들은 없고 바닥에서 인형을 쥔 채 졸고 있는 유모만 있었다. 불쌍한 유모, 육십이 넘어서도 기운 넘치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매일이 피곤하겠지. 이자크는 조용히 유모를 흔들어 깨웠다.
“유모, 루스와 루시는 어딨지.”
“…엇… 아이고…. 아….”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난 유모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자크 님.”
“워낙에 기운 넘치는 녀석들이니까 피곤한 건 이해하네. 작은 것들이 돌아다녀봤자 온실 외에 더 있겠어.”
“아가씨께서 공주님한테 가보시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내가 가볼 테니 유모는 그만 나가봐.”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서재로 향했다. 절대 그곳으로 가지 말라 신신당부했건만. 아직 어린아이들에게는 경고가 부족했던 걸까.
에스텔라는 자신의 서재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남편인 이자크마저도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정도였으니. 옛날에 그 경고를 까먹고 들어왔다가 소리 지르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당황한 적도 있었다.
지금이야 기억을 못하니 불같이 화를 내진 않겠지만, 이자크는 여전히 그녀의 서재로 가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문앞에 다다른 이자크가 가만히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는 답이 없다.
“부인? 안에 있습니까?”
아이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아마 온실에 있겠구나, 하며 이자크가 몸을 돌렸다. 다시 온실로 향하던 도중, 이자크의 발이 멈췄다. 가만히 돌아선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서재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항상 궁금해 왔던 서재 안. 그녀는 뭘 그렇게 숨기길래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걸까.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문을 밀었다. 살짝 들여다본 서재 안에는 평범한 풍경뿐이었다. 이자크는 안으로 더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들여다본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듯 자조적으로 웃으며 다시 방문을 닫았다.
온실로 향한 이자크는 유리문 사이로 들려오는 꺄르륵 웃음소리에 한참 동안 문 앞에서 서 있었다. 살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에스텔라의 우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정말 우는 건가? 에스텔라가 운다는 상상을 할 수가 없었던 이자크가 몸을 달싹댔다.
에스텔라는 이자크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다. 그의 기억 속 에스텔라는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니까. 그래서 엉엉 소리가 들리는 저곳 광경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온실 문을 더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에스텔라가 두 아이에게 말한다. 본의 아니게 엿듣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루스, 루시. 이제부터 엄마랑 아빠랑 여기저기 놀러 가고 재밌게 살자. 응?”
“좋아!”
“나, 나도 좋아….”
“애기들은 엄마랑 아빠가 헤어지면 어떨거 같아?”
“싫어-!”
“실, 싫어어… 히잉….”
루스는 두 손을 쫙 펴서 우는 시늉을 했고, 루시는 절대 절대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에스텔라는 뒷모습만 보여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응. 루시랑 루스랑 엄마가 아빠한테 용서받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해. 엄마 혼자서는 못 해.”
에스텔라의 말에 두 아이들은 신나서 방방 뛴다. 저들 눈에는 무섭고 대단한 어른으로만 보였던 엄마가 너희들이 필요하다, 엄마 혼자서는 못 한다 그리 말하니 잔뜩 기합이 들어갔다.
잔뜩 어깨에 힘을 주는 아이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다가도,
“이제부터 루시랑 루스는 작고 귀여운 큐피트들이야. 알았지, 아가들?”
에스텔라의 그런 말들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그가 계획한 미래에 에스텔라는 없었다.
거기에 그녀는 껴있지 않다.
그런데 지금의 에스텔라는 자꾸만 제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 그들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려 한다.
이자크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까 전 밀수꾼의 말이 떠오른다.
가족을 지키고 싶다면 여기서 그만하라던 버트랜드의 전언.
이자크에게 있어 가장 지켜야할 소중한 존재이자 가족은 루시와 루스뿐이다.
그래. 그 둘뿐이야.
그 이상은 안 돼.
그러니까 에스텔라, 당신이 들어올 자리는 없어야 합니다.
이자크가 발길을 돌렸다.
꿀꺽, 꿀꺽. 이건 물을 삼키는 소리가 아니다. 과하게 긴장한 에스텔라의 몸에서 아밀라아제를 과도하게 분비해서 나오는 소리다.
에스텔라는 매일, 매일 밤을 이렇게 긴장의 연속으로 보내야 한다.
왜냐? 그것은 바로 밤마다 이 방에 찾아오는 그녀의 남편 때문이다. 이자크는 매일같이 세상 그 누구보다 요염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에스텔라를 빤히 쳐다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왜, 왜 또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에스텔라가 힐끔 곁눈질을 해대며 물었다. 대충 푸른 블라우스 사이로 보이는 이자크의 가슴골에 자꾸만 눈이 간다.
“그러는 부인이야말로 왜 그런 눈빛으로 절 보십니까.”
“예? 아니, 그렇게 가슴을 다 드러내고… 그렇게 누워 계시면… 당연히 눈이 그리로 향하죠….”
괜히 부끄러워진 듯 에스텔라가 의미 없는 빗질만 해댔다. 이자크는 그러든 말든 아까 전처럼 계속해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버트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말아.
분명 그녀에게 버트랜드의 진실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그녀 스스로 깨닫고 후회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가 할 복수였는데. 갑자기 이제 와 그걸 고민하는 이유는 또 뭔가.
이자크는 잠시 에스텔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에스텔라는 그의 시선을 느낀 건지 괜히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거나 머리칼을 만지작댔다. 갑자기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지? 에스텔라는 몸둘 바를 몰랐다. 그렇게 들이댈 때는 언제고, 그의 집요한 시선에 안절부절 못한다.
그러다가 이자크가 물었다.
“버트랜드 국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에스텔라가 왜 그런 걸 묻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으신 분이죠. 제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절 친딸처럼 여기시던 분이셨으니까요. 지금도 절 아끼시고, 릴리 언니와도 친자매처럼 지냈고.”
“어떻게 좋은 분이신데요.”
“…죽을 뻔한 적이 있었어요. 지나가던 마차가 산사태에 휩쓸려져서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했는데, 워낙에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구조자도 같이 죽을 수 있는.”
“….”
”마차는 점점 기울어지고, 기사들도 섣불리 오지도 못하고. 그때 대부님이 마차를 덮은 흙을 모두 파내시고 바위도 옮기시고, 마차 안에 들어온 흙을 다 파내셔서 절 들어 올렸어요.”
“….”
“손은 피투성이가 되셔서는, 절 보자마자 안아 들고는 절 달래시더라고요. 괜찮다, 괜찮다. 이제 괜찮다 아가야. 이러시면서.”
“…….”
“그런 건 가식으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때 절 구하시다가 남은 산사태가 다시 밀려오면서 다리를 다치셨어요. 그래서 다리를 저는 거예요. 저 구하다가.”
에스텔라가 작게 미소지었다.
그때 대부님이 구해주지 않으셨으면 아마 진즉에 죽었겠죠. 아니면 제가 다리를 절거나. 대부님은 치료받으시면서도 계속 제 걱정만 했대요.
그 이야기를 들은 이자크는 더더욱 에스텔라에게 버트랜드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없어졌다. 에스텔라는 버트랜드를 매우 따른다. 그녀에게 있어선 또 다른 아버지이자 생명의 은인이고 학술원 시절에는 은사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당신이라면, 만약에. 정말로 믿던 사람이 알고 보면 가장 큰 배신을 한 사람이었다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이자크의 질문에 에스텔라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
“질문이 잘못되었네요. 배신했다는 것을 알면 당신은 어떨 것 같습니까.”
“어떨 거 같냐고요?”
“네.”
“…많이 고통스럽겠죠. 미칠 만큼.”
이자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라는 그것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커다란 손이 에스텔라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어느새 가까워진 이자크의 얼굴이 보인다. 에스텔라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부인.”
“…느, 네?”
얼굴이 가까워진다. 이자크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을 스쳤다. 에스텔라의 몸이 움찔댔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고 그의 목소리가 귓가 가까이에 울린다.
부인.
이게 그렇게 달콤한 단어였던가!
이자크의 목울대가 다시 움직였다. 그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다. 에스텔라의 모든 신경이 그가 말하고 있는 왼쪽 귓가로 쏠렸다. 그의 적당히 도톰하고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뭐지? 뭐지, 이 야시꾸리한 분위기는?
에스텔라의 머릿속에서 경보 종소리가 딸랑딸랑 딸랑 빠르게 울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름다운 말은,
“너무 애쓰지 마세요.”
“…예?”
애쓰지 말라는 말뿐.
공중에서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이자크의 눈은 평소처럼 시렸고 에스텔라의 눈은 잔뜩 흔들렸다.
야속하게도 그가 다시 한번 말해준다.
“너무 애쓰지 마시라고요.”
“무…슨….”
“뭐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이자크가 몸을 세우더니 이내 외투를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
에스텔라는 어쩐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어 그대로 풀썩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와, 정말 이건 너무했다.
에스텔라는 직전까지 거세게 뛴 제 심장이, 발그레해진 제 볼이, 먼저 마중 나갔던 제 입술이 눈물 나도록 야속했다.
이자크는 저택 밖으로 나갔다. 답답한 듯 제 머리를 거칠게 한 번 털어내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자꾸만 원래 계획과 틀어진다.
그중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게 에스텔라다.
분명 아까 전 에스텔라의 눈빛은 엄청나게 상처받은 모습이었다. 이자크는 자신이 한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답답하다. 스스로가 너무 답답하다. 애쓰지 말라니. 주어를 말해야지. 대체 뭘 애쓰지 말라고 한 거였지?
아이들과 친해지는 것? 이제 와 다시 과거의 사건에 관심 가지는 것?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
앞으로 다가올 상황들은 에스텔라에게 있어 좋지 않은 것들뿐이다.
버트랜드의 배신, 아이들과의 헤어짐, 사건의 진실, 이자크와의 이별. 그걸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후에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렇게 믿고 따르던 대부가 실제론 아버지와 남편의 원수라는 걸, 그걸 깨닫고 무너져 내리는 버트랜드와 함께 그녀 역시 같이 무너져 내리길 바랐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아니, 사실은 매우 후회하기를. 그러는 동안 자신은 아이들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유치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람 난 아내에게 바라는 것이 고작 후회뿐이냐? 그의 친우이자 같이 일을 도모하는 이가 비웃으며 물었었다. 이자크는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다 말했다. 그녀가 죽거나 최악의 꼴을 당하기엔, 아직 그녀에게 남아있는 티끌만큼의 정이 있으니까. 게다가 사랑하는 두 아이의 생모 아니던가. 그렇게까지 에스텔라가 육체적으로 고생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괴로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울 테니까.
그는 직접 경험해봤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사람을 갉아먹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자신이 고통스러웠던 만큼 에스텔라가 충격받길 원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찝찝한 건지.
지금의 에스텔라가 너무 해맑아서 싫다. 자신은 그녀가 밉고 복수를 해야 하는데, 떠나야 하는데, 자꾸만 잡으려는 그녀가 싫다.
“이자크!”
지금도 봐. 또 따라 나오지 않나.
이름을 부르는 높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스텔라는 파자마 차림을 한 채 심지어 실내 슬리퍼를 신고 그가 있는 저택 정원으로 나왔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에스텔라는 일단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이자크를 찾다 벤치에 앉아있던 그를 발견하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눈가가 조금 붉은 것을 보니 운 것인가. 이자크가 그리 생각하기도 전에 에스텔라가 버럭 소리쳤다.
“저기요, 이자크 씨! 자꾸만 그렇게 사람 의욕 꺾어버리는 수법을 쓰는 것 같은데, 그런다고 기 꺾일 내가 아니거든요.”
에스텔라가 양손을 허리에 얹고는 당차게 말을 이었다.
“도합 6년이에요, 6년. 내가 6년 동안 짝사랑했는데, 그거 얼마나 힘든지 모르죠?”
“…….”
“짝사랑하는 거, 아무나 못 해요. 특히나 나처럼 모든 방면에서 완벽한 여자가. 안 그래요? 나 좋다고 줄 서던 왕자 영식들이 몇인데. 그런 놈들 다 걷어차고 졸졸 따라다닌 게 이자크 너예요.”
“…너…?”
“그래! 너요!”
삿대질까지 하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놀란 건지 이자크가 눈을 깜빡였다.
“짝사랑 6년, 그거 해탈의 경지에요. 그거 안 해봤잖아요. 이거 해본 사람 별로 없어요. 누가 가망도 없는 짝사랑을 6년이나 해. 안 그래요?”
“….”
“그러니까 내 말은, 나 진짜 찰거머리라는 소리예요.”
“찰거머리?”
“그래! 찰거머리! 그렇게 사람 기죽여봤자, 나 그런 거 상관 안 해요. 내가 누군데. 전쟁터 누비던 사람, 심지어 약혼녀 있는 사람을 6년이나 짝사랑한 에스텔라라고!”
에스텔라가 억울하고 분한 듯 빽 소리를 질렀다. 이자크를 6년이나 짝사랑했다고! 그 눈치 없는 남자 이자크를!
모두들 자고 있는 달밤에 스물여섯 살이나 나이를 먹고 감정에 충실한 열아홉 살 마냥 야외정원에서 소리를 빽빽 지르는 이는 에스텔라 하나뿐일 거다.
에스텔라는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연신 씩씩댔다.
“뭐, 너무 애쓰지 말라고요? 왜요! 애쓸 건데요! 나 엄청 애쓸 건데!”
“저기, 조금 목소리 좀….”
“다 들으라고 해요! 아주 시종 시녀들 모두 다 들으라고. 나 이제부터 이자크한테 대놓고 들이댈 거라고! 그래요! 내가 애들한테 좀 도와달라 했어요! 우리 사이에서 난 애기들이 도와주겠다는데 뭐 불만 있어요?”
이자크는 골치 아픈 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에스텔라는 그러든 말든 당차게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싫으면 계속 밀어내세요! 난 어차피 계속 들이댈 거니까.”
“…부인.”
“두고 봐요. 나 이제부터 아주 뻔뻔하게 굴 거예요. 나 오늘 깨달았어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그거 나랑 당신이랑은 못할 거 같아요. 계속 도망쳐요. 나 계속 쫓아갈 거니까.”
이자크는 말문이 막히는 듯 에스텔라를 한참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손을 모아 제 손톱을 툭툭 뜯으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잘못을 했는지 아니까 이해는 해요. 밉겠죠. 근데 나는 진짜 억울해요. 나도 내가 미워요.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 나쁜 년!”
에스텔라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쥐곤 제 머리를 퍽퍽 때렸다. 이자크가 놀라 얼른 일어나 에스텔라의 손을 잡아 내렸다. 에스텔라가 그를 올려다봤다.
“기회 준다고 했잖아요. 기회 준다면서요. 나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라고… 못 할 거라고, 애쓰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지 마요. 나 포기 못 해요.”
“…….”
“이제부터 나 거머리 에스텔라라고 불러도 좋아요. 나 포기 안 해. 이자크 다리에 딱 붙어서 절대 안 떨어질 거예요.”
“….”
“6년 짝사랑 끝에 얻은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나한테 있어서 지금 이 상황은 기적이에요. 신의 선물이라고요.”
그녀의 열변에 당황한 이자크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신의 선물일 것까지야….”
“열아홉 순정 무시하지 마세요. 아무튼! 자꾸 나한테 의욕 없애려는 수법 쓰는 거 같은데, 두고 보자고요. 내가 아주, 애기들이랑, 어? 두고 봐요! 나중에는 당신이 나한테 매달린다니까!”
정적이 흘렀다.
조금은 모자란 포부를 밝힌 뒤 슬금슬금 뒷걸음치더니 에스텔라는 쌩하니 먼저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간 자리만 가만히 쳐다보다 황당한 듯 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벤치에 다시 앉았다. 단정치 못하게 내려온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이자크는 잠시 양손을 기도하듯 모아 입을 가렸다.
“아… 진짜….”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에스텔라는 방으로 돌아가면서 야속한 제 입을 두어번 때렸다.
“아오, 이놈의 입! 입이 방정이지!”
마지막 말은 뭔데. 왜 항상 진지해지지 못하는 건가. 에스텔라는 방금 전 자신의 발언들이 진지하기는커녕 같잖은 포부만 밝히다 온 것 같아 수치스러워졌다.
같은 얘기를 해도 말의 뉘앙스가 다르지 않나.
“더 진지했어야 하는데, 마지막 말은 뭐니? 이자크가 왜 나한테 매달려! 아효, 이놈의 입, 입!”
다시 한번 제 입술을 찰싹 때려본다.
에스텔라는 얼른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이불을 돌돌 말아 애벌레처럼 누웠다. 이자크가 오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잠들어야 덜 창피할 수 있다.
눈을 감은 에스텔라는 그 뒤로 이불을 몇 번 발로 찬 뒤에 잠을 잘 수 있었다.
한참 뒤 이자크가 방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숙면을 취하고 있는 제 부인을 쳐다보다가 에스텔라가 발로 찬 이불들을 정리해 다시 덮어주며 중얼거렸다.
“…그때랑 같은 말을 하십니다. 부인.”
에스텔라는 이자크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줄도 모른 채 잠꼬대를 하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당신이 이럴 때마다 너무 당황스러워.”
산발이 된 에스텔라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이자크가 쓰게 미소 지었다.
*
아침이 밝았다. 에스텔라는 넓은 침대를 저 혼자 차지하며 달콤한 늦잠을 만끽하다 상쾌하지만 어딘가 불안한 기분으로 눈을 번쩍 떴다. 햇빛은 방 안 가득히 만개하였고, 그 따사로움에 눈이 부셔서 에스텔라는 이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뜰 수밖에 없었다.
해가 중천에 걸렸는데 그 누구도 에스텔라를 깨우지 않았다. 이자크는 이미 나간 건가. 깨우지 말라 시킨 건가. 에스텔라는 꾸물대며 몸을 일으키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창문으로 시선이 갔다. 날씨는 화창하고 이상하리만치 햇빛이 에스텔라를 감쌌다. 바깥을 보는데 루스와 루시가 꺄르륵 웃으며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다. 넓은 야외정원에서 아이들은 서로 술래잡기하며 놀고 있다.
보는 사람도 녹이는 미소들에 에스텔라 역시 따라 미소지었다. 옆으로 시선을 옮기니 이자크가 돗자리 위에 앉아있다. 그 역시 아이들을 보는 건지 미소를 짓고 있다.
누구 남편인지 참 잘생겼구나. 에스텔라가 그런 흐뭇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이자크가 손을 뻗어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 깜짝 놀라 그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뒷모습인데, 여자다. 흰색 레이스 양산을 쓰고 있는 명백한 여자.
에스텔라가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뭐야?”
저 여자 뭔데 이자크의 손을 잡아? 뭔데 유부남이랑 남의 애들이랑 노는 거야? 햇빛이 워낙에 강해서 그런 건지 여자의 얼굴이 자꾸만 역광으로 보인다.
그 여자는 이내 이자크와 껴안았고, 에스텔라는 소리를 지르며 창문에 달라붙었다.
“야, 너 뭐, 뭐야! 야! 유부남이라고!”
들릴 리 없겠지만 에스텔라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다시 한번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에스텔라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윽고 햇빛이 약해지자, 여자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
이자크가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제 볼을 꼬집었다.
“꿈이구나.”
그렇지. 꿈이지. 꿈이겠지. 에스텔라가 허허 웃으며 다시 한번 창문을 바라봤다. 꿈이 아니고서야 자신이 저쪽에 존재할 리도 없을뿐더러, 이자크가 저런 미소를 보여줄 리도 없을 거다.
“거 참 희안한 꿈이로구만.”
에스텔라가 턱을 매만지며 계속해서 창밖의 자신을 쳐다봤다. 정말 행복하게 웃고 있다. 지금 꾸는 것이 예지몽이라면 좋으련만. 그런 흐뭇한 생각을 가지고 한참 동안 창밖을 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보기 좋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에스텔라의 눈이 커졌다. 또 다른 자신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권태로운 표정의 또 다른 에스텔라는 창 앞에서 멍하니 보고 있는 에스텔라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어… 이게 무슨 꿈인 거지?”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방 안의 전신거울을 쳐다보니 어느새 잠옷을 입은 그녀는 열아홉 살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스물여섯 살의 에스텔라야? 당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은 채 짙은 화장을 한 에스텔라를 보며 파자마 차림의 에스텔라가 물었다. 화려한 에스텔라는 대답 대신 그녀 곁으로 가 마찬가지로 창밖의 자신을 쳐다봤다.
“보기 좋네. 저런 모습.”
“당신이 시간을 되돌린 거야? 아니면 과거의 나를 왜 이곳으로 불러들인 거야?”
“저게 너와 내가 바랐던 미래의 내 모습인데. 그치?”
“왜 이자크와 아이들한테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던 거야? 대답 좀 해! 왜 나를 과거에서 미래로 끌어들인 거냐고! 지금의 넌 어디서 뭘 하고 있고? 왜, 왜 이자크를-”
창밖을 보던 26살의 에스텔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어쩐지 주눅이 들어 따지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저게 진짜 미래의 난가? 아니면, 그저 개꿈이라 이런 건가.
스물여섯 살의 에스텔라가 말했다.
“질문이 너무 많아.”
“뭐?”
“틀린 질문을 하면, 틀린 답이 나오겠지.”
“….”
“생각해. 기억하고.”
“뭐를?”
“네가 뭔지. 네가 왜 이러고 있는지. 나는 뭐고, 저 창밖의 애는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말에 에스텔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든 말든 스물여섯 살의 에스텔라는 다시 가만히 창밖의 가족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냥 얘기해주면 안 돼? 왜 꼭 내가 다 생각해야 해?”
“그러지 못해서 내가 후회했었으니까.”
“후회…했었다고?”
“잊지 마. 한 세상에 같은 사람 두 명은 존재할 수 없어.”
“…뭐?”
“같은 사람은 두 명 존재할 수가 없다고. 나는 너고 너는 나야. 시간의 문제가 아니야.”
스물여섯의 에스텔라가 다가왔다.
뒷걸음질 치는 에스텔라의 손을 꽉 잡으며 스물여섯의 에스텔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기억해내.”
“…뭐, 뭐를?”
“기억해내.”
반복적인 말을 하며 에스텔라의 가슴팍에 뭔가를 떠밀었다. 낡은 책 한 권이었다.
“이게 뭐야?”
“네가 기억해내야만 하는 것들.”
“내가 뭘 기억해? 대체?! 나는 과거에서 와서 미래의 네 일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그럼 나에 대해 알아보려 해봐.”
그렇게 말하며 에스텔라의 어깨를 있는 힘껏 밀었다. 중심을 잃은 에스텔라는 어, 어! 하고 소리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물에 빠져있었고, 물 아래로 가라앉으며 에스텔라는 수면 위의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닌가, 울고 있었나.
다시 눈이 떠졌다. 헉하며 숨을 들이마신 에스텔라가 눈을 몇 번 끔뻑였다. 커튼이 잔뜩 쳐진 어두운 방 안. 유모가 들어온 건지 커튼이 양쪽으로 걷혔다.
“아이고, 이제야 일어나셨네. 제가 이 나이 먹고서도 공주님을 직접 깨워야겠습니까.”
에스텔라가 가만히 옆을 바라봤다. 이자크는 없었다.
“이자크는?”
“먼저 내려가셔서 아가씨랑 도련님이랑 같이 식사 중이세요. 얼른 옷 갈아입으시고 내려가셔야죠- 어머. 공주님. 웬 식은땀을 이렇게 흘리세요? 어디 아프셔요?”
유모는 평소처럼 억척스러운 목소리로 한소리 하려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에스텔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에스텔라는 그제야 자신이 땀을 흘린다는 것을 자각했다. 가만히 아까 전에 꿨던 꿈을 상기한 에스텔라가 목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아픈 건 아니고. 그냥 꿈자리가 조금 사나웠나 봐. 물 좀 줄래? 목이 타네.”
유모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얼른 옆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 에스텔라는 물을 마시면서 왜 하필 자신이 물 속으로 떨어지는 꿈을 꿨을까 생각했다.
“유모는 꿈을 믿어? 그러니까… 꿈이 가지는 그런… 미신적인 것들.”
“사람들은 뭐 개꿈이라고들 하지만요, 저는 꿈이라는 것은 일단 굉장히 믿어볼만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
“제가 꿈이 중요하다고 믿는 이유는요, 선대 왕비님께서 공주님을 잉태하셨을 때 꾸셨던 꿈 때문이에요.”
“어머니가?”
“네. 왕비님께서는요, 공주님을 가지셨을 때 계속해서 꿈을 꾸셨대요. 뭐… 전하께서는 그 꿈 얘기를 되게 싫어하시지만. 그리 좋은 꿈은 아니었거든요.”
“무슨 꿈이었는데?”
“왕비님께서는 당신이 일찍 죽을 거라는 걸 알고 계시는 것처럼 항상 말하셨어요. 공주님을 낳으면 자신은 죽을 거라고. 근데 그걸 두려워하지는 않으시더라고요.”
“….”
“전하께서는 그래서 그 꿈 얘기하시는 걸 싫어하셨는데….”
“무슨 꿈을 꾸셨는지, 유모는 알고 있어?”
“왕비님이랑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나와서 말했대요. 공주님을 낳고 넌 죽는다고. 근데 그걸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네가 죽는 것이 아니면 아이가 죽게 되는데, 제발 아이를 구해 달라 했대요.”
처음 들어보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유모는 성인이 된 에스텔라에게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해줬다.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렸었는데, 아 참. 지금은 기억 못 하시겠네. 그러고보니, 이 얘기 했을 때도 공주님이 꿈에 대한 걸 물어보셨었죠, 아마?”
“…그래?”
“자, 수건으로 몸 좀 닦으시고 식사하러 내려가셔요.”
유모는 물에 적신 수건을 건넸다. 에스텔라는 몸을 닦고 세수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는 식당가로 내려갔다. 이미 아이들과 이자크는 한창 식사 중이었다.
“마망!”
“어, 엄마다!”
아이들은 에스텔라가 반가운지 포크질을 하다 말고 에스텔라를 가리키며 손을 휘저었다. 이자크는 그런 아이들의 손을 잡아 내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포크랑 나이프 쥐고 흔들면 주변 사람이 다치겠지, 루시.”
“치이… 네에….”
고개를 든 이자크는 안색이 좋지 않은 에스텔라의 모습을 발견했다. 에스텔라는 조용히 상석에 앉았고 시종들이 음식을 내왔다. 식욕이 없는지 기름기 도는 고기나 싱그런 과일을 봐도 에스텔라는 깨작거렸다.
“엄마, 아파?”
루시가 쾌활하게 물었다.
“아픈거 싫오….”
루스가 울먹이며 에스텔라를 걱정한다. 에스텔라는 그제야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괜찮다는 듯 미소 지었다.
“엄마 안 아파. 걱정해줘서 고마워.”
에스텔라가 웃어주자 아이들은 안심한 듯 했다. 루시는 밥을 먹다 말고 옆에 앉아있는 루스에게 뭐라 귓속말하기 시작했다. 루스는 키득대며 고개를 끄덕였고 루시는 의자에서 내려와 에스텔라에게 향했다.
이번엔 그녀에게 귓속말을 한다. 자그마한 손짓을 하자 에스텔라가 의자에서 허리를 굽혀 키를 낮추었다.
“엄마, 이제 작전 시작이야? 루시랑 루스 쿠피트야?”
혹여라도 이자크에게 들릴까 루시는 작게 손을 오므려 에스텔라의 귀에 갖다대며 말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두 아이들의 눈빛에 에스텔라는 아침에 꾸었던 기괴한 꿈 따위는 잊고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녀 역시 루시의 장단에 맞춰 귓속말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말구, 이따가. 엄마가 도와달라 할 때 도와줘. 알았지?”
“웅!”
기대된다는 듯 루시가 주먹 꽉 쥔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히히 웃었다.
“그럼 우리 이제 아침 마저 먹을까?”
“웅!”
루시는 다시 제 자리로 쪼르르 달려가 의자에 앉았고, 방금 전 한 대화를 루스에게 공유한 뒤 둘 다 신난다는 표정으로 와구와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도와달라는 부탁 하나에 신이 난 아이들을 보며 에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소리내 웃고 말았고,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가만히 보다 다시 식사를 이었다.
*
그저 꿈이야, 하는 한마디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의미심장한 꿈이었다. 게다가 유모로부터 들은 어머니가 꿨던 꿈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꿨던 꿈과 너무나 비슷한 이야기였다.
에스텔라는 잠시 자신의 서재로 들어왔다. 꿈속의 에스텔라가 말했던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녀는 가만히 서재를 빙 둘러봤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기에 에스텔라가 미래로 넘어오고 한 달이 지나서야 방 풍경에 제대로 눈이 갔다.
“평범해 보이는데.”
에스텔라는 책장의 책들을 대충 펄럭이며 중얼거렸다.
“진짜 아무것도 없는데.”
정말로 평범한 일반 서재였다. 에스텔라의 책상 서랍을 모두 열어봤지만 의심해볼 만한 문서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착실하게 이 집안 사람들의 월급이라든지, 자신의 유산 등을 정리해둔 문서들만 가지런히 있었다.
“나에 대해 알라는게 대체 뭔 소리야….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주면 될 것을. 성격 진짜.”
답답한 듯 에스텔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열아홉 살의 그녀로서는 스물여섯 살의 에스텔라가 뭘 하고 다녔는지 감히 감도 안 잡힌단 말이다.
“…만나자마자 머리채나 잡았어야 했는데. 아휴, 그걸 또 까먹어서.”
꿈이니까 그럴 수는 있지 않나. 이 상황까지 오게 만든 미래의 그녀에게 혼쭐을 내주고 싶었는데 범접할 수 없는 그녀의 기에 눌려 찍소리도 못하고 말았다.
“그나저나 내가 그렇게 자란단 말이야?”
7년 후의 자신은 생각보다 많이 멋졌다. 물론, 외적으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사람을 대하는 말투나 눈빛 자체에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것에 권태로워 보였다. 지친 듯한 눈빛. 그리고 창밖의 행복해 보이는 에스텔라를 보며 부러워하던 자신과는 달리 담담해 보이는 그 모습.
에스텔라는 미래의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그저 남들의 입을 통해 들은 것뿐, 스스로 알려 하지 않았다. 에스텔라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가만히 서재 책상에 앉아 상념에 젖었다.
그때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아이들인가 싶어 고개를 들자 조잘대는 두 아이 대신 이자크가 문에 기대 서 있다.
“서재 문을 열고 있는 당신은 처음 봅니다.”
“어… 이자크.”
“뭘 그렇게 소중한 게 있어서 꽁꽁 숨기고 안 보여주나 했는데.”
이자크가 서재를 빙 둘러보며 들어왔다.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무슨 일 있어요? 웬일로 먼저 나를 찾아오고….”
“히히, 엄마 데리러 왔찌!”
이자크의 다리 뒤에 숨었던 두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소리쳤다. 워낙에 조용했기에 에스텔라는 아이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
“세상에, 너희 조용히 있을 수도 있구나!”
에스텔라는 한 달하고도 반 만에 처음 보는 조용한 아이들의 모습이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물론, 한번 입을 연 아이들은 좀체 조용해질 생각이 없었지만.
“엄마! 엄마! 놀자! 놀자!”
“마망… 온실에서 우리 소꿉놀이 아니면 인형놀이… 하구 놀자아….”
꽃 양옆에 활짝 핀 잎사귀들처럼 초록 같은 미소를 띠며 아이들이 보챘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미소가 나오다가도 그럼 그렇지, 이자크가 따로 날 찾아올 리 없지, 하며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놀자.”
에스텔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이자크의 다리에서 떨어져 나가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이자크는 냅다 제 다리에서 떨어져 나간 아이들을 보고 황당한 듯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뭐 문제 될 거 있냐는 듯 그를 지나쳐 온실로 향했다. 멍하니 세 사람이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중, 루시가 뒤돌아 이자크에게 소리쳤다.
“아빠! 빤니 와!”
그리고는 고사리 손을 까딱였다. 루스 역시 루시를 따라 손을 까딱였고, 에스텔라는 두 눈을 깜빡이며 생긋 미소지었다.
아, 셋이 한 패다 이거지.
이자크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이자크는 오늘 아침 인상을 찌푸리며 들어오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설마 현재의 에스텔라로 돌아온 것인가, 하고 아주 살짝 긴장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슴이 철렁댔다. 다시 집 안의 모든 것이 살얼음판처럼 될까 봐.
그래서 가만히 그녀가 어떤 에스텔라인지 지켜보았다. 에스텔라는 아이들에게는 친절했으나 계속해서 뭔가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서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져서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중간중간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아이는 평소처럼 에스텔라에게 달려가려 했고, 이자크는 얼른 아이들을 붙잡아 검지를 입술 앞에 갖다 댔다.
“루시, 루스. 쉿. 엄마가 지금 표정이 안 좋지?”
루시가 에스텔라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가 물었다.
“엄마 아파?”
“아니야. 안 아프다고 아까 말했잖아.”
“근데 왜 인상 썼어?”
“생각하고 있나 봐.”
“왜 생각하는데 이르케 인상 써?”
“너희들 엄마는 원래 깊이 생각할 때 항상 저 표정이야. 자, 둘 다 조용히 하고 엄마가 알아챌 때까지 숨기 놀이할까? 어때, 재밌겠지. 이제부터 큰 소리 내는 사람은 지는 거야.”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 역시 손으로 입을 합, 막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이들은 조용히 이자크의 다리 뒤에 숨었다. 엄마한테 루시랑 루스 있는 거 안 들키면, 너희가 이기는 거야. 그렇게 조용한 내기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꽤나 잘 있었다. 이자크는 간간이 고개를 내려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곤 계속해서 쉿, 너희가 이기고 있어. 하며 아이들을 달랬다.
그리곤 다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서재 문을 이렇게 활짝 열고 있는 것도, 남이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혼자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것도. 그때의 에스텔라라면 하지 않을 짓들이다.
아주 심각한 얼굴로 양손을 깍지 낀 채 이마에 올리곤 중얼거리는 에스텔라의 모습이 웃기다.
“…만나자마자 머리채나 잡았어야 했는데. 아휴, 그걸 또 까먹어서.”
누구의 머리채를 잡는다는 건지.
에스텔라는 손으로 제 동그란 이마를 탁탁 치며 진심으로 아까워했다.
“그나저나 내가 그렇게 자란단 말이야?”
이번에는 또 뭐가 그렇게 자란다는 건지.
아까와는 달리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변했다. 먼 곳을 바라보며 가만히 제 턱을 매만지는 그 모습은 예전의 그가 좋아하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먼저 소리를 낸 것은 이자크.
문을 두들기자 에스텔라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반가워하는 건지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가 있으면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이자크의 다리 아래에서는 루스와 루시가 키득대며 말했다.
“아빠가 졌다. 아빠가 소리 냈어. 루스, 우리가 이겼따.”
“야호.”
왜 그때 문을 두드렸는지는 모르겠다. 이자크는 본인이 기척을 내고도 할 말이 없어 얼른 머리를 굴렸다. 내가 왜 문을 두드렸지? 그리고 급히 생각해서 한 말은, 고르고 고른 게 겨우 비아냥거리기. 스스로도 유치하고 한심하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그의 다리 뒤에서 짜잔, 하고 나타나 에스텔라의 시선을 끌었고, 그는 에스텔라가 느낀 아쉬운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셋은 어느새 많이 가까워졌다. 옛날에는 에스텔라의 구두 소리만 들어도 긴장하던 어린 녀석들이, 이제는 누구보다 경계하지 않는다. 자신들을 낳아준 엄마다 이건가.
두 아이들은 에스텔라의 손을 꼭 잡고 앞뒤로 세차게 흔들며 걸어갔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일상적이어서, 이자크는 가슴이 아팠다.
조금만 더, 만약에 조금만 더 빨리 과거의 에스텔라가 이곳으로 왔다면 지금 그가 이렇게까지 허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스텔라가 힐끔 대면 루시가 따라서 힐끔, 그다음엔 루스가 따라서 힐끔 이자크를 쳐다봤다.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따라 하는 놀이라도 하는 건가.
온실에 들어선 이후부터 이자크만 빼놓고 세 사람은 계속 저들끼리 이자크의 눈치를 보며 귓속말을 하거나 그를 힐끔댔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은 이자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루시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셋이서 놀-”
“우, 우리 소꿉놀이할까?!”
루시가 눈을 빛내며 아빠를 쳐다봤다. 눈치 하나는 빠른 귀여운 내 딸. 이자크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루시뿐인가. 울보 루스도 이럴 때는 제 쌍둥이와 죽이 잘 맞는다.
“좋아. 루시, 우리 맛있는 거 만들어주자. 가게 놀이 하는 거야. 오때?”
“좋아! 엄마랑 아빠 여기서 기다려, 가면 안 돼!”
그리곤 루스 손을 꼭 잡고 둘이 후다닥 온실 저편으로 달려간다.
“….”
“…….”
남겨진 두 사람에게는 아까 전보다 더 끔찍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에스텔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시킨 거 아니에요.”
그렇다. 이자크와 단둘이 남아 어떻게든 대화를 시도하려는 사심을 담은 에스텔라의 머리가 아닌, 합쳐도 열 살이 채 되지 않는 저 조그마한 머리통 두 개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도와달라는 엄마의 말에 막대한 책임감을 가지기라도 한 걸까. 두 아이는 지금쯤 아주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흙장난이나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에스텔라는 그런 아이들이 고마우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색할 때 가버린 건 실수이지 않았나, 나도 지금 일어나서 아이들을 따라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다.
“알고 있습니다. 루시는 워낙에 눈치가 빠르니까요.”
이자크의 대답에 에스텔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번엔 이자크가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던데. 잠이라도 설치신 겁니까.”
그러기엔 어제 이불까지 발로 차며 잘 주무시던데. 하며 꼭 얄미운 말을 덧붙이는 이자크다. 에스텔라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잠은 잘 잤어요. 저 원래 어디서든 잘 자는 체질이라….”
어디서든 잘 잔다는 말에 이자크는 가만히 과거 에스텔라를 상기했다.
3년 전부터 에스텔라는 극심한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이 저택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정도로 그녀는 불면증이 심했다. 아마 에스텔라의 히스테리가 는 이유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기 예민해진 것도 있었을 것이다.
“잘 잤다니 다행이네요. 불면증이 워낙에 심했던 사람이니까, 당신은.”
“제가 불면증이 심했어요?”
“아이들을 가졌을 때부터 심해지더니, 나중에 가서는 수면향을 피워도 잠을 못 자더군요.”
에스텔라는 전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깜빡였다.
머리만 대면 잠이 든다는 말이 바로 그녀를 향한 말이다. 유모도 항상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면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 바로 에스텔라가 그렇게 잠을 잘 잤다는 소리였다. 신생아가 어쩜 그렇게 울지도 않고 잠을 잘 자는지, 정말 다루기 수월한 아가였다고.
한번 잠에 들면 도중에 깬 적도 없으며, 심지어 이자크의 결혼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을 때도 밤에는 숙면을 취하던 그녀였다.
잠은 에스텔라에게 있어서 활력이었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해, 라는 말은 에스텔라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아이들을 가지고 나서부터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에스텔라의 불면증은 4년 동안 점점 더 심해졌고 그것이 더 그녀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힘든 건 이해 갔습니다.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 아이들은 시끄럽게 굴지. 선대 전하께서는 반사 상태지. 남편과는 사이가 남보다도 더 못하지. 이곳이 싫을 수도 있겠구나, 다른 누군가가 필요했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자크는 이해는 한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에스텔라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정말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 누구보다 이자크를 사랑했는데. 그의 결백을 의심할 리가 없는데.
자꾸만 꿈속에서의 자신이 떠오른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 모습을 싫어하는 이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아무런 의미 없는 꿈이었을 뿐일까? 에스텔라는 어쩐지 그 꿈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해하지 마세요.”
에스텔라가 말했다.
“예?”
“그런 거 이해하지 마세요. 그거 이해 아니고 포기하는 거잖아요. 이자크의 상처를 방관하는 거고.”
“….”
이자크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때마침 두 아이가 조그마한 탁자를 끌고 오며 그 위에 이가 빠진 찻잔 몇 개를 올려놨다. 예전에는 나뭇잎이나 장난감 컵에 흙을 가득 채워주더니 이제는 제법 구실을 갖추는 모습에 두 사람은 잠시 어색함은 접어두고 아이들을 칭찬하기 바빴다.
“와, 정말 잘 만들었다.”
에스텔라가 손을 짝짝 박수 치며 말했다.
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욱여넣어 겨우 앉은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저들을 쳐다보는 아이들에 맞춰 얼른 열심히 먹는 척을 했다.
그러자 루시가 양손을 작게 모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손님- 입맛에 맞으시나요? 어머, 두 분이 참, 잘, 어울리세요- 호호!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저런 건 어디서 배운 걸까. 누가 봐도 큐피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려는 노력을 보이는 두 아이다. 루스는 한술 더 떠 꽃 한송이를 화병에 꽂아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뒀다.
그리고는 다시 후다닥 둘이 손을 잡고 가버린다.
에스텔라가 신기한 듯 물었다.
“집 밖에 안 나간다고 들었는데… 저런 건 어디서 보고 배운 걸까요?”
“예전에 딱 한 번 당신이 애들을 데리고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간 가게 종업원을 보더니 그 후로 계속 따라하더군요.”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에스텔라는 아이들을 데리고 번화가 이곳저곳을 다녔다. 이자크 역시 동행했지만 두 사람이 나눈 대화보다 아이들이 신나서 에스텔라에게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하며 물어본 것이 더 많았을 거다.
항상 동화책만 읽던 아이들이 그 이후부터는 저런 소꿉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인형을 사서 재미없는 엄마 아빠 놀이를 하거나 꾸밀 줄밖에 모르던 아이들이 번화가에서 본 상인들이나 가게 직원들을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이.
아이들에게는 그 때가 아마 처음으로 엄마와 함께한 나들이였을 거다.
에스텔라는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나중에 아이들이랑 다 같이 번화가에 나가봐야겠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연극도 보고-”
“에스텔라.”
“네?”
“아이들이 불쌍합니까.”
이자크의 질문에 에스텔라는 그 의의를 알아채기 위해 얼른 머리를 굴렸다.
“불쌍하다기보다는… 그저 미안한….”
“괜찮습니다. 동정도 죄책감도, 필요없습니다.”
갑자기 날을 세우는 이자크의 말투에 에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이자크는 그 누구보다 담담한 얼굴이었다.
“엄마와의 시간이 부족하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그만큼 아이들에게 붙어있었으니까요. 사랑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여태까지 셋이서 잘 지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왜 저는 배제하세요? 또 선을 그으시고 그러네.”
담담한 얼굴로 그렇게 자신과의 거리를 두는 이자크가 야속하다.
에스텔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곤 제 긴 금발의 머리칼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어색하고 멋쩍고, 상처받았을 때마다 에스텔라가 하는 행동이었다.
여태까지 셋이서 잘 지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 그런 식으로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는 소리인 건가. 의욕을 꺾는 게 아닌 상처를 줄 생각이었다면, 성공이다.
“저도 상처는 받아요….”
에스텔라가 나지막이 말하자 이자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를 주거나 부인을 주눅들게 하려는 셈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만일 지금의 당신이 아이들과 친해지고 나와의 사이가 다시 회복된다고 칩시다. 만일 현재의 에스텔라가 다시 돌아오면요. 부인은 다시 부인의 시간대로 돌아가면요.”
이자크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시 사랑과 평화로 가득찬다 한들, 지금의 에스텔라는 ‘지금’의 에스텔라가 아니다.
이자크에게 거침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솔직하고,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노는 에스텔라는 과거에서 온 에스텔라.
반면 현재의 에스텔라는 예민하고, 까칠하고, 모든 것에 무관심하며 이따금씩 이자크나 아이들을 보고도 누군지 모르는 듯한 얼굴을 하는 그런 여자였다.
이자크는 그래서 지금의 에스텔라와 이 이상 사이가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 추억을 만드는 것도 싫다.
다시 그녀가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 스물여섯 살의 에스텔라가 돌아오게 된다면. 아이들은 다시 냉랭하게 변한 엄마를 보며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건 아마 이자크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원래부터 가지지 못했던 것에는 아쉬움도 없지만, 가지고 있던 것이 사라지면 아쉽다.
에스텔라로 인해 그 느낌을 다시한번 상기하고 싶지는 않다.
“…부인이 과거에서 왔다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법이겠죠. 시간이라는 건 거스를 수 없을 테니까요.”
“….”
“난 루시와 루스가 다시 냉랭해진 엄마를 보며 상처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나 하나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