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메시앙 왕궁은 이름답게 매우 빛나는 왕궁이었다. 하늘 높이 찌르는 금색 첨탑 꼭대기에는 커다란 태양을 본뜬 보석이 조각되어 있고, 왕궁 전체 역시 금으로 도금되어 멀리서 보면 마치 태양이 두 개가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에스텔라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 그녀에게는 전 변경백의 저택보다 이곳이 훨씬 더 익숙할 것이다. 적어도 에스텔라는 그리 생각했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완전히… 바뀌었네…?”
에스텔라가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마차에서 내리면 왕궁 앞마당에는 화려한 장미 덤불이 있고 아름다운 분수가 흐를 걸 기대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장미 덤불과 분수는 사라지고 거대한 조각상들만 듬성듬성 세워져 있다.
심지어 그 조각상 대부분은 버트랜드 대공과 닮은 것들이었다.
에스텔라가 마차에서 내리자 기사들이 얼른 달려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공주님.”
다들 에스텔라가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듯싶었다.
“아버지의 용태를 살필 겸, 대부님 좀 뵐 겸 찾아왔다. 안내하거라.”
에스텔라의 말이 끝나자 위에서는 대신으로 보이는 사내가 후다닥 뛰어왔다.
“아, 공주님. 오셨습니까. 얼른 전하께로 모시겠습니다.”
“아버지 먼저 만나야겠어. 대부님은 내가 아버지를 뵌 후에 직접 찾아가지.”
“예, 공주님.”
기사들이 에스텔라와 이자크를 병상에 누워있을 선왕에게로 데려갔다. 궁 깊숙이, 의원 바로 옆 별채에서, 에스텔라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메시앙의 지배자였던 벤자민 왕은 약초 향으로 가득찬 방에서 마치 미라처럼 말라 있었다.
아버지의 용태를 본 에스텔라가 파랗게 질렸다.
“살아계신 것이 맞느냐…?”
목소리 끝이 심히 떨리자, 의원이 얼른 대답했다.
“예, 공주마마. 숨은 붙어 계십니다.”
“이리 마르셨는데 어찌 살아있단 말이야. 치료는 열심히 하고 있는 건가.”
“온갖 방법을 동원에 치료에 힘쓰고 있습니다, 너무 염려 마소서, 공주 전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메마르시고 입술은 파랗게 물들어 계신다. 에스텔라는 메시앙 최고 의사라 불리는 의원의 말에도 믿을 수 없는 듯, 가만히 아버지의 가슴에 귀를 댔다.
쌕, 쌕, 숨소리 같지 않은 거칠고 미약한 소리가 겨우 난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몸을 들어 올렸다. 이자크는 아내의 표정이 어떤지 보이지 않았으나 작게 떨리는 어깨를 보곤 주치의에게 말했다.
“다들 나가 있지.”
왕의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나갔다. 이자크 역시 잠시 에스텔라를 쳐다보다 방을 나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왕의 손을 잡고 있는 그녀가 오늘따라 유달리 작아 보였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에스텔라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러자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이 더 자세히 보였다.
“아버지. 저예요. 저요. 에스텔라예요.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에스텔라요.”
에스텔라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아버지의 손을 들어 제 뺨에 부볐다. 시체라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다. 시체라는 것이 이런 걸까. 사람이 죽으면 차갑고 딱딱하고 무거워진다는데, 지금의 아버지가 딱 그런 것 같다.
눈을 꽉 감았다 천천히 뜨며 에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다.
“죄송해요. 이제야 찾아봬서 정말 죄송해요. 철없어서 죄송해요, 아버지….”
이 얼마나 불효녀인가. 에스텔라가 자책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아버지의 안위를 물어볼 생각도 없었던 자신이. 저가 힘들 때가 되어서야 아버지를 떠올린 자신이 야속했다.
“제발, 제발 눈 좀 떠보세요. 어찌 이리 마르신 거예요. 아버지. 네? 아버지….”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커다란 덩치로 에스텔라를 들어 올려 주던 아버지는 이제 없는 거다.
뿌리가 썩어버린 나무줄기처럼, 아버지는 이제 바스러질 일만 남은 사람 같았다. 에스텔라는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손을 내려놨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멍한 것이, 당장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에스텔라가 방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서는 이자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뒤를 돌며 저를 내려다보는 그를 보자마자 이상하게 눈물이 터져 나온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미안해요. 기다렸죠. 제가 지금 감정 조절이… 안 되는… 흐흑… 흐으윽….”
눈시울이 벌게져서는 애써 침착한 척하려는 그녀가 안쓰러웠을까. 이자크는 저도 모르게 에스텔라를 껴안아 줬다. 가슴께에 오는 작은 여자가 제 품에 들어오자마자 엉엉 우는데, 이자크는 차마 울지 말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커다란 그의 손이 에스텔라의 머리통을 감쌌다. 천천히 등을 두들겨 주는 손은 마치 울지 말라고 하는 것보단 더 울어, 속 시원히 울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일한 에스텔라의 가족이었다. 어머니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게 했을 만큼 벤자민은 에스텔라에게 자신의 모든 시간을 들이부었었다. 그런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도, 넓은 품도, 잔소리들도 이제는 못 들을 생각을 하니 에스텔라의 속이 한없이 무너졌다.
그렇게 무너지는 자신을 받쳐주는 건 이자크의 단단한 팔. 에스텔라는 마치 구명줄이라도 된 양 그의 옷가지들을 쥐며 울었다.
이자크는 그저 말없이 제 품을 빌려줬다.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쯤, 에스텔라는 그의 품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이자크 역시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며 제 손수건을 건넸다.
“쓰세요.”
“고마워요.”
이자크가 건넨 손수건을 들어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았다. 오 맙소사, 눈물은 물론 콧물까지 아주 난리 법석을 떨었다. 에스텔라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얼른 숙이며 마저 얼굴을 닦았다.
“후….”
에스텔라가 숨을 내쉬며 가다듬는다.
목청껏 운다고 해서 아버지가 일어날 리 없으니, 에스텔라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아버지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진범을 찾는 것. 이자크를 믿기로 했다. 전 변경백은 범인이 아니니 아직 진짜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를 잡아서 모든 진상을 파헤쳐야겠어. 에스텔라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먼저 할 일은,
“대부님을 만나 봬야겠구나.”
에스텔라가 멀리서 눈치를 보고 있던 신하에게 말했다.
*
버트랜드 대공은 벤자민 국왕의 친척으로, 두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친한 관계였다. 학술원 동기였으며 같이 훈련도 받았었고, 후에 비슷한 시기에 배우자를 만나 비슷한 시기에 사랑스러운 딸을 얻었다.
벤자민 국왕은 왕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로 한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다. 바로 자신 역시 왕비처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날 경우 어린 에스텔라가 이 커다란 왕국을 통치할 수 있는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세력들에게 피해를 입지 않을까. 요컨대 벤자민은 믿을만한 대부를 찾아다녔다.
그 대부를 자처한 것이 버트랜드 대공이었다.
에스텔라를 제 딸처럼 여기던 이. 에스텔라 역시 자신을 아껴주는 버트랜드를 좋아했고, 그의 딸인 릴리 버트랜드와 친자매처럼 자랐다.
“에스텔라!”
“대부님.”
여전히 버트랜드 대공은, 아니, 버트랜드 국왕은 에스텔라를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집무실에서 일을 하던 버트랜드는 에스텔라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중앙홀로 마중 나왔다.
“자주 좀 들러주거라. 아버지가 많이 적적해하시겠다. 응?”
에스텔라를 꼭 껴안아 주며 버트랜드가 말했다.
“어디 보자. 눈이 빨갛구나. 운 것이야?”
눈가가 빨간 에스텔라의 얼굴을 부여잡더니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누가 보면 친딸인 줄 알 것이다. 에스텔라가 헤헤 웃으며 물었다.
“대부님. 잘 지내셨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갑자기 찾아뵙습니다. 죄송해요.”
“죄송하기는. 넌 이 왕궁의 또 다른 주인 아니더냐. 언제든 환영이란다.”
버트랜드는 유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텔라와 포옹을 했다. 그러다가 그녀 뒤에 벽처럼 서 있는 인물을 보곤 얼굴이 굳어졌다.
“…오랜만이구나. 이자크.”
“국왕 전하를 만나 뵙습니다.”
이자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던 버트랜드가 얼른 에스텔라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해서, 에스텔라. 할 말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여긴 듣는 귀가 많아서요.”
에스텔라가 익숙하게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스텔라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안에 있던 신하들을 모두 물렸다. 대신들은 갑작스러운 에스텔라의 명령에 모두 당황하며 버트랜드를 쳐다봤다. 버트랜드는 그리하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무슨 말이길래 이렇게 다들 물리기까지 하는 게냐?”
버트랜드가 껄껄 웃으며 긴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상석에 앉았다. 에스텔라는 그 맞은 편 의자에 앉았고 이자크는 에스텔라의 옆에 앉았다.
에스텔라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대부님. 놀라지 마시고 들으셔야 해요.”
한껏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에스텔라가 적응이 되지 않는 듯 버트랜드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열아홉 살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응?”
“말 그대로예요. 제 마지막 기억은 릴리 언니가 이자크와 결혼하던 때가 끝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버트랜드가 에스텔라 옆의 이자크를 쳐다봤다. 이자크는 가만히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에스텔라. 허허… 여전히 장난기가 많구나. 그게 무슨 소리니. 여태까지 잠잠하다 했더니 요 녀석, 또 날 놀리려고.”
버트랜드는 믿지 않는 듯 했다.
“진짜입니다. 에스텔라는 현재 열아홉 살 때 이후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장난과는 거리가 먼 이자크가 그렇게 말하자 버트랜드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아니, 어쩌다가?”
“호수에서 발을 잘못 디뎌서 머리를 다친 것 같습니다.”
“정말인 거냐, 에스텔라?”
이자크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버트랜드가 에스텔라에게 물었다. 에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릴리와 이자크의 결혼식이 마지막 기억이라고?”
“네. 그래서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알아야겠어요. 디에스 가문의 일들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아버지가 반사 상태인데 제가 왕위를 물려받지 않은 것이 궁금해서요. 무슨 일이 있었었나요?”
에스텔라는 돌려서 묻지 않았다.
버트랜드 대공이 눈만 깜빡이며 아직 상황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자, 에스텔라가 고개를 돌려 이자크에게 부탁했다.
“죄송한데,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무래도….”
이자크는 별말 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단둘이 되어서야 버트랜드가 입을 열었다.
“디에스 가문의 일들은 이자크에게 들은 것이더냐.”
“네.”
“…네가 왕위를 물려받지 않은 건 너의 의지였단다.”
“제 의지요?”
“그래. 형님이 반사 상태에 빠지시고 너도 많이 충격을 받았던 건지… 아니면 이자크를 살리고 싶어서였는지… 네가 내게 먼저 협상을 걸더구나.”
“협상이요?”
“그래. 이자크를 살려달라고. 대신에 왕위를 넘기겠다고.”
“…제가요?”
“믿지 못하는 눈이다만, 서면으로 남긴 문서가 있단다.”
버트랜드는 오래된 문서를 꺼내며 에스텔라 앞에 놓았다. 돌돌 말려진 문서를 펴니 에스텔라의 필체로 보이는 사인과 버트랜드의 필체로 보이는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에스텔라가 버트랜드에게 왕위를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네가 준비가 된다면 언제든지 나는 다시 너에게 왕위를 돌려줄 의향이 있단다.”
“제가 대부님께 양도를 한 이유는 사법권을 얻기 위해서인 거였나요?”
에스텔라가 물었다.
특이하게도 메시앙 왕국의 국왕에게는 사법권이 없다. 오히려 공주나 왕자에게는 있을 수 있으나, 국왕에게는 사법권이 없다. 아주 오래전 메시앙의 초대 왕이 사법권을 독립시키고 왕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해놨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왕은 사법부서에 의견을 내놓을 순 있어도 주도적으로 일을 명령할 수 없다.
하지만 공주나 왕자는 사법권을 가질 수 있다. 대신, 그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는 사법부에서 판단한다. 사법부에서 보기에 에스텔라는 그 권리를 가질 수 있다 판단했고, 때문에 공주였던 에스텔라는 사법권을 가질 수 있었다.
“에스텔라 너는 디에스 가문의 사건을 계속해서 조사하길 바랐으니까. 그래서 나 역시 네가 나에게 양도한 걸 이해한단다.”
국법에 따라 에스텔라가 곧장 왕위에 오르게 되면 그녀는 더는 사법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에스텔라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왕위를 양도했던 것이다.
버트랜드는 모두 이해한다며 에스텔라의 손을 토닥였다.
“그나저나, 정말로 기억을 모두 잃은 것이냐.”
“네. 열아홉살 이후의 기억들은 모두요.”
과거에서 미래로 왔다고 말하기엔 절대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 에스텔라가 거짓말을 쳤다. 이자크 외에는 다들 그리 알고 있을 것이다.
버트랜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기억은, 돌아온다고 하던?”
“확실친 않다고 하더라고요.”
“많이 놀랐겠구나. 네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루아침에 형님이 저렇게 되셨으니.”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도 대부님이 계시니 마음이 놓여요.”
에스텔라가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바로 버트랜드 아니었는가. 에스텔라의 말에 버트랜드는 감동받은 듯 잔잔히 미소 지으며 에스텔라를 바라봤다.
“그런데, 아버지가 독살을… 당하셨다고 하던데.”
“정확히는 미수였지. 독살에 실패를 했기에 아직 빈사상태로나마 숨이 붙어계신거니까.”
“…대부님도 디에스 변경백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럴 리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이자크는 확신하더라고요. 아직 전 그의 말만 들어서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확실히 나흘 만에 모든 조사와 처벌이 결론 난 건 이상한 것 같아요.”
에스텔라의 말에 버트랜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수사를 종결시켰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제가 왜 그랬는지 아세요?”
“글쎄다… 나 역시 왕위에 오르고 사법권이 사라진 지 오래라….”
“아, 그렇겠네요.”
“에스텔라. 이자크와 사이는 좋으니?”
“잘 모르겠어요. 좋은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에스텔라야, 이런 말 네가 듣기에는 싫을 수도 있겠지만… 왕이 아닌 대부의 입장으로서 말하는 것이니 너무 곡해 듣지는 말거라.”
버트랜드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열아홉 살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고 말한 순간, 나는 솔직히 네가 영영 기억하지 못했으면 하고 생각했단다. 그 7년 동안 넌 너무 힘들어했으니까.”
“…대부님.”
“형님이 갑작스레 저렇게 되시고, 이자크와의 결혼생활도 그리 행복하지 않은 듯했고. 아이들을 낳은 뒤에 우울증이라도 온 건지 넌 항상 눈물로 지새웠단다. 네가 걱정되어 릴리를 보내거나 내가 가서 만나보아도 넌 항상 멍한 표정이었고.”
버트랜드가 그때만 생각하면 속상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며 말을 이었다.
“몸이 좀 괜찮아지고 나니 계속 밖으로 나돌고, 이자크도 너도 서로 상처가 깊다 보니….”
“….”
“열아홉의 널 내가 잘 알잖느냐. 그때의 너는 정말로 행복하고 사랑스러웠지. 차라리… 그 슬픈 기억들을 모두 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대부님….”
“에스텔라. 지금의 넌 이자크를 사랑하느냐?”
에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든 아픔 모두 잊고 그저 이자크와 행복하게만 살아 주거라. 형님도 그걸 바랄 거야.”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이혼 숙려기간이에요. 제가 먼저… 이혼을 원했다고 하던걸요.”
그러자 버트랜드는 그런 것은 걱정 말라는 듯 에스텔라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이자크는 널 많이 사랑했단다. 네가 진심만 보여준다면야.”
“…과연 그럴까요.”
자신감이 떨어진 듯 에스텔라가 고개를떨구자, 버트랜드는 검지로 에스텔라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에스텔라의 코를 톡 치곤 말했다.
“당연히 그렇고말고. 넌 메시앙의 빛 에스텔라 아니더냐. 모두의 사랑을 받던 이. 행복의 아이.”
에스텔라의 아버지가 침울해하는 에스텔라에게 곧잘 해주던 말투와 행동이었다. 에스텔라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버트랜드는 그런 에스텔라를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그러나 따듯한 행동과는 달리 버트랜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에스텔라는 그의 눈빛을 보지 못했기에 충분히 버트랜드가 자신을 위한다 생각 할 수 밖에 없었다.
“에스텔라. 제발 행복해지거라.”
“감사해요, 대부님.”
“감사하기는. 너무 기억하려 무리하지 말고. 최대한 마음을 편하고 가볍게 가지려무나.”
“네. 그럴게요. 감사해요.”
“해서, 에스텔라야. 다시 그날 일을 조사하려고 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라면 내가 아닌 사법부를 찾아가는 것이 더 빠를 거다.”
“…한동안은 이자크와의 사이를 돌리는 데에 더 집중하려고요. 대부님 말대로 그 일들은 저희 모두에게 큰 상처니까요.”
“그래. 서두를 것 없지. 아이고… 걱정이로구나. 이렇게 다 큰 에스텔라가 갑자기 기억상실이라며 찾아오다니.”
“어쩔 수 없는걸요. 겉보기엔 숙녀여도 속은 철없던 열아홉 살 에스텔라니까요.”
“말은 잘하지.”
“대부님. 감사해요. 대부님을 뵈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어요. 오늘 아버지를 보고 난 이제 어쩌나 했는데… 대부님이 이렇게 정정하시니 다행이에요. 자주 찾아뵐게요.”
“그래. 그러거라.”
언제든 환영한다며, 힘든 일이 있을 땐 주저 말고 찾아오라며, 버트랜드는 대부에 충실한 말들을 내뱉었다. 에스텔라는 그에게 감동받은 듯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대부님. 아버지는 제가 저택에서 모시고 싶어요.”
아무래도 딸 된도리로써 그리해야 하지 않을까. 어머니를 일찍 여읜 에스텔라에게 벤자민은 그 빈자리까지 모두 메꿔주던 좋은 아버지였다. 딸이라면 아버지가 반사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도 그 육체를 모셔와 직접 간호해야한다 생각했다.
“에스텔라. 형님은 내가 모시고싶다.”
“하지만-”
“너한테도 좋은 아버지였지만, 나한테도 좋은 형님이었어. 너는 이자크와 두 아이들도 있잖나. 어린 아이들에게 네 아버지의 상태를 보여줬다가 애들이 더 무서워할 수도 있단다.”
“…”
“에스텔라가 7살 때 점술가인 노인을 만나고 울음을 터트렸었지. 넌 그날 일 때문에 아직도 점술가들을 만나지 않잖니. 하물며 형님은 지금… 반사상태란다. 반 죽은 상태라는 것이야. 그게 어린애들한테는 얼마나 큰 충격을 줄지 나는 너와 릴리를 키우면서 깨달았단다.”
“그렇군요.”
“이곳은 왕궁이다. 네가 지내는 곳은 경계선에 위치한 전 변경백의 저택이고. 의사나 약재들이 들고나기엔 이곳이 더 적합할 거다.”
“… 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짧기는. 내가 너였어도 모시고 싶다했을 거다. 7년 전의 너도 그리 말했었지. 나 역시 이리 대답했었고. 그때는 네가 만삭일 때라 더더욱 거절하는 수밖에 없었단다. 반사상태의 아버지를 곁에 두고 보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나도 잘 아니까.”
버트랜드의 눈이 촉촉해졌다.
“내 어머니가 그랬었단다. 병에 걸려서 반사상태가 되셨지. 그때 나는 열 넷이었는데도 그때의 어머니를 잊지 못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단다. 형님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모든 걸 내려놓고 해외로 가버렸을지도 몰라.”
“대부님….”
“그러니 이번엔 내가 은혜를 갚는 거다. 최고의 의사들과 약재들을 항상 쓰는 중이다. 이번에 이국에서 반사 상태의 환자를 살려낸 의사가 있다길래 초빙할 거다. 그러니 에스텔라, 너는 너무 걱정말거라. 아버지는 널 쉽게 떠나지 않을 거야.”
“네.”
“이자크와 아이들이랑도 사이가 좋아지길 기도하마.”
버트랜드가 에스텔라의 손을 꼭 잡으며 토닥였다.
에스텔라는 감사하다며 짧게 그의 볼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집무실 앞에서는 이자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나요? 미안해요.”
에스텔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자크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제 곁에 다가온 에스텔라와 함께 발을 맞춰 걸었다.
왕궁에서 나가기 전, 에스텔라는 별채 쪽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발걸음을 떼는데 발이 너무 무겁다. 또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에스텔라는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저택으로 돌아가던 중 이자크가 처음으로 물었다.
“국왕과는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냥 이것저것요. 왕위 포기나 사법권에 대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힘없이 말하는 에스텔라를 보던 이자크는 사실 그걸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괜찮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물어보지 않았다. 괜찮을 리도 없을뿐더러, 그녀가 만일 괜찮지 않다 하면 어떤 식으로 위로해주려고 그러는 건가?
이자크는 그 자신에게 물었다. 아까는 왜 껴안아 준 거야? 왜 등을 다독여준 거야? 왜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야?
고작 눈물을 보인 걸로 마음이 약해진 건가. 그럴 리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아이들에게 관심도 없고, 자신을 두고도 다른 남자들과 사교 파티나 가던 여자다. 보란 듯이 연인들에게서 받아온 패물들을 모아두는 그런 여자란 말이다.
집 밖에 나가지 않으면 온종일 서재에 박혀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여자. 어쩌다 서재에 들어올라치면 불같이 화를 내던 그런 여자. 남보다도 못했던 아내. 그런 여자가 바로 에스텔라였는데.
그런데 고작 기억 좀 잃었고, 자신에게 좋아한다 말 좀 해줬다고 그새 경계를 푸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서럽게 울었으니까. 그런 모습 처음이니까. 그래. 당연한 거야. 위로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이미 그는 지칠 대로 지쳤다. 이혼 숙려기간만 끝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로 나갈 거다. 거기서는 다 잊고 아이들과 새 출발을 해야지.
“이자크? 내 말 들었나요?”
에스텔라의 목소리에 이자크가 상념에서 벗어나 그녀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그가 걱정이었는지 찬찬히 그의 상태를 살피는 것 같았다.
이자크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물었다.
“미안합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법관할부서에 미리 재수사 요청을 해둬야 할 것 같아요.”
“재수사요.”
“네. 아무래도 걸리는 게 많은 것 같으니까 이번엔… 끝까지 알아봐야겠어요.”
에스텔라가 이자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자크는 초연해 보였다. 에스텔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같이 조사해보지 않을래요?”
이자크는 말 없이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어색해진 기분에 에스텔라가 얼른 말을 이었다.
“아니, 뭐 굳이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니에요. 이런 걸로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뭐. 아니, 싫으면 말고요…. 대부님께서도 최대한 도와주시겠대요.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돕겠지만,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 준비하는 것도 바빠서요. 제 최우선은 아이들이라 재수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벌, 벌써부터 그렇게 준비할 필요가 있나요. 너무 빠른 것 같은데. 게다가 아직 이혼 확정도 아니고….”
힐끔 이자크를 쳐다봤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전혀 농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 맞아. 완전히 지쳤다고 그랬지. 에스텔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요. 대신에 피하지만 말아줘요. 전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러더니 양 손 주먹을 불끈 쥔다.
“수사도 열심히 하고, 당신 마음 바꾸는 것도 열심히 하고! 진범도 잡아내고, 오명도 벗겨내고, 가족도 되찾을 거예요. 나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이자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 말든 난 이혼 무를 생각 없다, 그런 눈빛이었다. 에스텔라의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며칠 뒤 국왕한테서 편지가 하나 왔다. 내용인즉슨 그날 일에 대해 조사할 생각이 정말로 있는지, 사법관할부에 연락은 취해뒀는지, 도와줄 일이 있는지 등에 대한 것이었다.
에스텔라는 깃털 펜을 들어 촉에 잉크를 묻힌 뒤 답장을 쓰려 했다.
언제나 감사한 대부님께, 걱정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빠른 시일 내로 사법부를 찾아가 재수사 요청을 하려고요. 그리고 엘리나 양을 불러들일 생각입니다. 그녀가 유일한 그날의 목격자이니까요.
빠르게 움직이던 깃털 펜이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에스텔라는 손을 멈춘 채 한동안 버트랜드 국왕이 보낸 편지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이내 종이를 와자작 구긴 후 새 답신을 쓰기 시작했다.
언제나 감사한 대부님께. 걱정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원래 재조사를 해볼 생각이긴 했는데, 이자크와 아이들과의 관계에 먼저 집중하려고요. 이 일로 대부님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기억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편히 쉴 생각입니다. 가족 휴가를 계획하고 있긴 한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상하게도 본능적으로 뭔갈 숨겨야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님께 모든 걸 다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 아니, 오히려 뭔가를 숨겨야 한다는, 대부님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느낌이 강력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를 믿지 마!
또 다른 자아가 에스텔라의 안에서 소리친 기분이었다. 에스텔라도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부님은 언제나 에스텔라를 반갑게 맞이했던 분 아니었던가. 사법권을 위해 왕위를 포기했다는 것도 모두 제 필체로 쓰여져 있었다. 하지만, 버트랜드를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에스텔라는 왜인지 모르게 모든 걸 그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그녀는 재수사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왕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집사를 불러 왕에게 전할 편지를 건넸다. 집사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낑낑대며 까치발을 한 루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뒤에 서 있던 루스는 얼른 루시의 손을 잡고 다른 한쪽 손가락을 입에 문채 서 있었다.
“너희 왜….”
유모나 이자크는 어디 가고 너희 둘이 와 있니? 라고 묻기도 전에 루시가 우렁차게 말했다.
“엄마! 놀자!”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에스텔라는 깜짝 놀랐다. 루시는 개구진 얼굴로 꺄르르 웃더니 이내 루스의 손을 잡은 채로 우다다 뛰어 그녀 앞에 도착했다. 까치발을 겨우겨우 들어 에스텔라의 책상 끄트머리에 턱을 올려놓고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또 한 번.
“엄마! 놀자!”
이번엔 루스도 합세했다.
“놀, 놀아요. 같이… 루시랑, 루스랑 같이 놀자요….”
에스텔라가 당황해 얼른 허리를 숙여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 여기 어떻게 왔어? 유모는? 이자크는?”
“압빠는 어디 갔어.”
“어디?”
“몰라. 집따 할아버디랑 이케 얘기하다가 갔어.”
그렇게 말하며 루시가 제 미간을 작은 손으로 있는 힘껏 쭈그러트렸다. 루스 역시 루시를 따라 양손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둘은 그게 재미있는지 저들 얼굴을 보며 또 꺄르륵 웃었다. 에스텔라도 따라 웃으며 물었다.
“유모는?”
“유모랑 노는 거 이제 재미없써….”
“맞아! 유모 자. 유모 피곤해. 코코 해.”
아침부터 내도록 이 기력 넘치는 조그마한 것들과 놀아 주니 당연히 피곤할 수밖에 없을 거다. 아이들은 그렇게 말하곤 ‘그러니까 엄마, 놀자!’ 하며 에스텔라가 앉아있는 의자 옆으로 갔다. 치맛자락을 붙잡고 놔주지 않자 에스텔라가 아이들을 달래며 말했다.
“그래. 그럼 언니랑, 아니. 엄마랑 같이 놀까?”
아직 스스로를 엄마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다. 아이들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건지 좋다며 신나 방방 뛰었다. 매번 울상인 루스마저도 기분 좋은 듯 신나서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 온실로 향했다.
에스텔라의 허리쯤에도 오지 않는 작은 아이들이 그녀의 양손을 잡고 뛰고 있다. 허리를 잔뜩 굽힌 채 에스텔라는 총총 뛰고 있는 두 작은 뒤통수들을 바라봤다.
정말 이 애들을 내가 낳았단 말이지.
볼 때마다 적응되지 않는다. 기억에도 전혀 없지만 분명 제 배 아파 낳았을 아이들인데. 이자크는 매번 그녀가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에스텔라는 아이들을 막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어도 제 애까지 관심 없어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에스텔라는 한창 이자크를 짝사랑했을 시절, 만일 그와 결혼한다면 그와 사이에서 난 아이들은 얼마나 예쁠지 한참 상상의 나래에 빠졌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족 피크닉을 가는 상상을 해대며 혼자 얼마나 베개를 퍽퍽 쳐댔는지 이자크는 모를 거다.
상상만 해도 입꼬리가 스멀스멀, 잇몸이 만개하게 미소 지어졌었는데, 그 모든 호사를 누리면서도 정작 미래의 에스텔라는 가족에게 무심했다니.
“…참 이해할 수 없다니까.”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정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뭐가 그렇게 날 바꾼 걸까. 아버지의 위독한 상태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걸까.
정말 그것뿐이었을까?
의문이 들던 찰나, 온실에 도착했다. 낑낑 문을 여는 아이들을 도와 문을 열어준 에스텔라는 문득 궁금한 점이 들어 물었다.
“얘들아, 그런데 왜 너흰 온실에서만 놀아?”
이 넓은 저택에 아이들이 놀 공간은 여기밖에 없는 건가 싶어 에스텔라가 물었다. 루시가 태연하게 말했다.
“마망이 밖에 위험하다 했자나.”
“내가?”
“웅. 여기서만 놀랬자나.”
“…그래? 여기 재밌어?”
“웅. 꽃도 있꾸, 흙도 있꾸, 여기 놀 거 많아. 그치- 루스.”
루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푸히히 웃더니 엄마, 우리 소꿉놀이하자! 엄마는 여기서 기다려! 하고는 저들끼리 온실 구석으로 갔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테이블에 앉았다. 조그만 것들이 뒤뚱대면서 커다란 담요를 흙바닥에 펴준다. 그리곤 담요를 가리키며, 엄마! 여기 앉아! 하고 말했다.
풍성한 패티코트 때문에 바닥에 앉는 게 영 불편했다. 에스텔라는 여기 있으면 안 돼? 하며 물었지만 루시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돼! 앉아야 해! 피꾸닉이니까 바닥에 앉아야 해.”
“그런 게 피크닉이라고 누가 그래?”
“압빠가. 압빠가 도따리 깔구 앉아서 맛있는 거 먹는 게 피꾸닉이라 그랬어. 엄마, 빨리 앉아- 여기이-”
하는 수 없이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겨우겨우 모아 쥔 뒤 돗자리 위에 앉았다. 이자크는 아이들과 이런 식으로 놀았던 걸까.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온실 안에서만 피크닉이라니.
아니지. 미래의 자신은 밖이 위험하면 뭐 얼마나 위험하다고 나가지 말라 그랬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또 흙으로 마카롱을 만들어 가져왔다.
“또 먹으라는 거지?”
“맛있겠지?”
“아, 맛있네-”
에스텔라는 냠냠냠 소리를 내며 먹는 연기를 한다. 그럼 애들은 신나서 박수를 짝짝 쳐댔다. 특히나 루스가 신나 했다. 둘은 쌍둥이였지만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루시는 밝고 활기차고 씩씩한 성격에 수다쟁이인 것에 비해 루스는 항상 루시의 손을 꼭 쥐고 있거나, 울상이거나, 울먹이거나, 겁이 많고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종종 손가락을 빨며 루시 옆에 꼭 붙어있는 아가 같은 아이.
그런 루스가 오늘따라 유난히 신나 보인다. 연신 웃는 얼굴로 에스텔라의 옆에 꼭 붙어 앉아 그걸로도 부족한지 그녀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다. 그건 루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시는 고개를 갸웃대며 요리조리 에스텔라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이- 엄마 예뻐서. 아이 예쁘다-”
작은 손바닥이 에스텔라의 뺨을 쓰다듬는다. 간질간질, 얼굴도 마음도 간지러웠다. 에스텔라는 작은 생물체가 저를 예뻐하는 것이 신기하고 웃기기도 했다.
“엄마랑 노니까 너무 좋으다. 그치이, 루스.”
“웅. 좋아.”
여전히 에스텔라의 옷자락을 꼭 쥔 채,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루스가 볼만 발그레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자니 어쩐지 마음이 짠해지고 코 부근이 시큰해졌다.
이렇게나 나를 사랑해주는 아이들인데. 그런데도 아직까지 내가 낳은 아이라는 걸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졌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이 아이들에게 부족했던 자신을 채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스, 루시. 엄마가… 그동안 많이 못 놀아줬지. 미안해. 이제부터 엄마가 열심히 놀아줄게.”
“진짜루?!”
“응.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응.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진짜루?!”
“응! 진짜, 진짜, 진짜, 진짜로!”
루시는 그렇게나 믿지 못하겠는지 재차 물었다.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진짜로오-?! 에스텔라가 그렇대도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루시 역시 따라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헤헤, 헤헤… 으히… 히….”
평소처럼 꺄르륵대며 웃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헤헤거리며 웃던 루시의 커다란 눈망울이 점점 그렁그렁해지더니 이내 루시가 작은 손으로 제 눈을 마구 비비적대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 좋다는 듯 입은 웃고 있고, 눈도 예쁘게 휘어져 있는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루시가 우니 루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울디 마, 울디 마. 혀 짧은 소리로 제 쌍둥이 여동생을 다독이면서 저 역시 운다. 그 모습을 보던 에스텔라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아이들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왜 울어, 왜…. 미안하다니까아… 엄마가 미안해에….”
고작 네 살짜리들이다. 그런 애들이 기뻐서 운다. 엄마가 놀아주겠다는 말에 너무 기뻐하면서 운다. 그동안 얼마나 자신을 고파했으면 이럴까.
진즉에 잘해줬어야 했는데.
난 왜 그랬을까. 자책과 죄책감에 에스텔라의 눈에서도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기 시작했다.
“울, 울지마아… 흑, 아 울지 말라니까아-”
손수건을 꺼내 눈물 콧물로 범벅된 아이들 얼굴을 차례로 벅벅 닦아주면서 에스텔라 역시 훌쩍였다. 아니지, 거의 펑펑 운 것이나 다름없다. 나중에 가서는 애들보다 더 울어댔다.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면서 울지 말라니까, 왜 울어 왜. 하면서 저가 울어댔다.
“엄마아- 울지마아- 마망-”
“울디 마아….”
“흑, 아 너희가 우니까, 내가… 흐엉엉… 미안해에… 엄마가… 잘못했어. 미래의 내가 나빴어… 내가 미안해….”
이제는 되려 아이들이 에스텔라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 조그마한 손바닥으로 에스텔라의 등을 톡톡 두드리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엄마 울지 마, 울지 마 하는데 그럴수록 에스텔라의 눈에서는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미래의 자신이 밉다. 야속하다.
왜 그랬니. 너 정말 왜 그랬니? 왜 이렇게 못되게 군 거니? 복에 겨웠구나! 난 너처럼 안 ?그럴 거야. 난 너처럼 소중한 줄도 모르고 오만하게 굴지 않을 거야.
내 가족이야. 내 식구야. 소중한 사람들이야. 이대로 이혼할 수 없어. 가정을 지킬 거야.
잘못을 했으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반성해서 이자크의 마음을 되돌리고 아이들에게 부족했던 사랑을 가득 채워 줄 거야. 잘못한 만큼 더 잘해줄 거야.
에스텔라는 자신을 다독여주는 아이들을 꽉 껴안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두 아이가 에이, 엄마 숨 막혀- 하면서도 에스텔라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작은 것들이 품 안에서 꼬물댄다.
에스텔라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벅벅 닦으며 애써 웃는 얼굴을 했다.
“루스, 루시. 이제부터 엄마랑 아빠랑 여기저기 놀러 가고 재밌게 살자. 응?”
“좋아!”
“나, 나도 좋아….”
“애기들은 엄마랑 아빠가 헤어지면 어떨 거 같아?”
“싫어-!”
“실, 싫어어… 히잉….”
에스텔라는 퉁퉁 부은 눈으로 저와 똑같이 퉁퉁 눈이 부어서는 안겨 있던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셋 다 울기만 하면 눈이 붕어처럼 붓는 것이 꼭 닮았다.
“있잖아. 엄마가 아빠한테 큰 잘못을 했어. 그래서 아빠가 엄마 밉대. 떠날거래.”
루시가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잘못했어? 잘못했으면 때찌때찌해야 해. 아니면 호온-나야 돼.”
“맞는 건 나중에 할게. 좀 봐줘라, 응?”
“알아써.”
“애기들이 엄마 도와줘야 해.”
“도와? 루시가 엄마를 도와?”
“응. 루시랑 루스랑, 엄마가 아빠한테 용서받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해. 엄마 혼자서는 못 해.”
엄마 혼자서는 못 한다는 말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평소 아이들이 에스텔라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는 알 것 같다. 루시가 눈이 커져서는 물었다.
“왜 엄마 혼자서 못 해? 엄마 다 할 수 있자나.”
“아니. 이번에는 루시랑 루스가 꼭 엄마를 도와줘야 해. 그래야지만 가능해. 엄마 혼자서는 못 해. 엄마 약해.”
그러자 두 아이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묻는다.
“엄마, 약해?”
“응. 엄마 되게 약해. 애기들이 엄마 도와줘야 해 그래서. 애기들은 세지?”
에스텔라가 씩 웃으며 물으니, 아이들이 뿌듯한 건지 자그마한 콧구멍들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네 살짜리들을 다루는 법을, 에스텔라는 조금 알 것 같다.
루시가 양손을 허리에 척 올리며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그럼! 루시 엄청 세!”
“꺄-! 진짜로?”
“웅! 내가 루스도 지키는데, 엄마도 지켜줄게!”
“우와아! 엄마 너무 기쁘다!”
에스텔라가 박수를 짝짝 치며 기뻐한다. 루스는 그런 제 여동생이 자랑스러운 듯 루시의 등 뒤로 가서 착 달라붙어 말했다.
“루, 루시 세. 근데 나도 도와줄게!”
“루스도 도와주는 거야? 응?”
“웅!”
“그럼 둘이서 엄마랑 아빠 이어주는 거지?!”
“웅웅!”
“진짜로?”
“웅웅!”
루시는 신나서 방방 뛰었고 루스는 나름 자랑스러운 척 가슴께를 활짝 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이 귀여워 얼른 아이들의 양 볼을 잡아 살짝 흔들어 털며 발그레해진 뺨에 뽀뽀를 해줬다.
“그래. 내가 이자크랑 이혼 안 하게 너희가 도와주는 거야. 이제부터 루시랑 루스는 작고 귀여운 큐피트들이야. 알았지, 아가들?”
에스텔라가 양 손바닥을 펼쳐 아이들에게 내밀자 루시와 루스가 신나서 꺄르륵 웃고는 그 손뼉에 제 작은 손바닥을 마주쳤다.
예이! 이제부터 큐피트 작전 시작이다.
작전명은 <저쪽의 숙녀분께서 보내셨습니다.>
셋이서 신나 깔깔 웃고 있는 와중에, 온실 문이 살짝 열렸다 닫혔다. 작은 소리를 들은 에스텔라는 고개를 빼꼼 빼어 누가 들어왔나 확인했다. 들어온 이는 없었다.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갔다. 그의 얼굴표정은 좀체 어떤 기분인지, 어떤 감정인지 읽기조차 어려웠다.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이자크였다.
*
에스텔라는 루시와 루스가 자신이 낳은 아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이 과거 7년 전으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고 말하던 여자 아니던가. 자신이 열아홉 살짜리라고 주장하는 여자는 자신에게 네 살짜리의 쌍둥이 자식이 있다는 걸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자크는 그래서 에스텔라가 두 아이를 남의 애 보듯 귀여워만 한다는 걸 이해해주기로 했다.
만일 그 과거에서 올라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지.
이자크는 에스텔라를 믿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단 말인가. 과거 메시앙 왕국의 초대 왕이 흑마법을 했다는 소리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화 속 이야기. 잠자기 전 루시와 루스에게 들려주는 구전 이야기 같은 축에 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메시앙 왕국에서 모든 마법서와 주술서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금서로 정해 불태워졌다. 더군다나 그 어떤 흑마법서에도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마법은 없을뿐더러, 에스텔라가 그런 마법을 쓸 수 있을 리도 없다.
그래서 이자크는 자신은 과거에서 온 에스텔라이며,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던 열아홉 살 적의 에스텔라이니 이혼 같은 건 못 해주겠단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음대로 수사 종료를 한 뒤 마음대로 여동생을 몰래 외국으로 보내버린 걸로도 모자라, 마음대로 애인들을 만나고, 마음대로 이혼을 요구하더니. 이제는 마음대로 다시 사랑한다 고백하는.
그저 제멋대로인 공주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거구나. 그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며칠 전 메시앙 왕궁에 가 병상에 누워있던 벤자민 전 국왕을 보고 충격받은 그 얼굴과, 애써 눈물을 삼키려는 커다란 눈망울을 보고 아주 잠깐, 정말로 그런 걸까 싶었다.
정말로 그녀는 과거에서 온 걸까.
그렇다면 현재에 있어야 할 에스텔라는 어디로 사라진 건가.
정말로 이번에는 바뀔 수 있는 건가.
이번에는 정말로 그녀를 믿고 기다릴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이자크는 오늘도 루시와 루스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제 시야보다 한참 내려가야 보이는 동그란 두상 두 개. 아이들은 이자크의 앞에서 인형극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아이들은 네 살이 되었다. 그동안 이 아이들은 저택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 에스텔라는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갓난쟁이였을 때야 나갈 일이 없다지만, 그녀는 아예 다른 이들에게 제 자식을 보여주는 것도 싫어했다.
아이들이 걸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그것이 더 심해졌다.
위험하니 절대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말라고. 새로 들어온 하녀가 뭣도 모른 채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동산으로 놀이를 나갔고, 그날 그 하녀는 에스텔라에게 매질을 당했다. 그 후 그 하녀는 종적이 묘연해졌다. 하녀들 사이에서는 공주님이 점점 무서워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의 에스텔라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아이들 문제로 싸웠다.
이혼 문제는 차치하고 왜 아이들까지 속박하려 드냐고, 이자크가 그렇게 말했고 에스텔라는 내 아이 안전은 내가 결정한다며 대화 자체를 하지 않으려 했다.
어찌 누구 하나만의 아이란 말인가. 열 달 동안 힘들게 품은 것도 그녀고 배 아파 낳은 것도 그녀이긴 하다. 그래서 에스텔라가 아이들에게 집착하려 하고 결정권을 가지려는 것도 이해는 하는데, 평소에는 그렇게 관심도 없었으면서 이제는 왜?
“압빠. 요즘 엄마 좋지.”
인형을 가지고 놀던 루시가 갑자기 이자크에게 물었다.
“응?”
“나는 요즘 엄마 좋은데. 봐, 루스도 고개 끄덕이잖아.”
루스가 뒤통수를 긁으며 헤헤 웃는다.
“루스야 뭐든 루시가 좋다 하면 따라 하잖니.”
이자크가 싱긋 웃으며 말하곤 두 아이들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루시는 아빠가 헤집어 놓은 리본을 고쳐 매달며 말했다.
“아니야! 이번엔 루뜨가 먼저 말해써! 그치, 루스?”
루시가 억울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세히 물어보니, 방금 전 이자크가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두 아이는 에스텔라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어쩌다 엄마 이야기를 한 건데, 하고 묻자 루시가 아주 당돌하게 우리 엄만데 갑자기 이야기할 수도 있찌! 하며 말했다.
아무튼, 상황은 이랬다.
잘 가지고 놀던 인형이 망가졌다. 루스가 아끼던 레이디 인형이었는데 머리통이 똑 하고 떨어져 나갔다. 루스가 울상을 짓자 루시가 얼른 인형을 가져다가 다시 떨어진 목을 붙이려 했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에이, 안 되겠다. 이거 이제 버려야 돼.”
루시의 말에 루스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오동통한 볼살은 아래로 쭉 쳐졌고 자그마한 입술이 우물우물거리며 입꼬리가 축 내려갔다.
“아끼는 건데….”
“새로 사달라고 해.”
루스가 그 인형을 좋아하는 데에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 에스텔라를 닮은 백금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가진 인형이었다. 엄마를 닮은 인형이라 아끼는 건데. 네 살짜리의 속 깊은 생각을 같은 쌍둥이인 루시는 알아채지 못했다.
이제는 이 인형을 가지고 놀 수 없다는 생각에 어쩐지 슬퍼져 루스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보고 싶어….”
“너 애기냐?”
“아니. 근데 엄마는 보고 싶어… 엄마 좋아. 엄마 이제 안 무서워서 좋단 말이야.”
“나돈데. 나도 엄마 좋아.”
“그치. 루시. 엄마 이제 안 무섭지.”
“웅. 엄마 이제 안 무서워. 좋아! 히히”
“히히히… 나두! 그럼 아빠는? 아빠도 엄마 이제 안 무서워할까?”
“몰라. 물어보까?”
“구래!”
해서, 이렇게 작은 밤톨들이 이자크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었다.
루시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압빠도 이제 마망 좋아하냐구!”
두 아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이자크는 끙, 골머리를 앓으며 루스와 루시를 번갈아 쳐다봤다. 여기서 글쎄, 아빠는 엄마를 아직은 믿을 수가 없구나. 그보다 우리 이민 문제가 더 급하지 않을까 꼬맹이들아, 하며 말했다간 아이들의 동심을 박살 내는 걸로도 모자라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루스는 분명 큰 소리로 엉엉 울어댈 거다. 루시 역시 마찬가지로 우린 좋은데 왜 압빠는 싫은데? 하며 꼬치꼬치 캐물을 게 분명하다.
아이들은 순수하면서도 잔인하다. 명색의 이자크 몬 디에스가 이렇게 당황하는 건 에스텔라 이후로 또 오랜만일 거다.
“음… 글쎄, 아빠는-”
그렇다고 아빠도 엄마 좋단다, 하며 웃기에는 또 내면의 양심이 찔리지 않나.
최대한 답을 질질 끌며 어떻게 해야 모호한 답을 충격받지 않게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그의 기사가 다가와 작게 말했다.
“이자크 님, 일전에 시키셨던-”
그렇게 말하던 기사는 여기서 말할 것이 못 된다는 듯 아이들을 힐끔 쳐다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루스, 루시. 유모를 불러줄 테니까 놀고 있으렴. 금방 돌아올 테니까.”
“네에-!”
아이들을 방에 둔 뒤 이자크는 기사와 함께 저택 뒤쪽 숲에 있는 별채로 향했다. 커다란 전 변경백의 저택에서 별채는 거의 쓰이지 않는 유령 별장이나 다름없었다.
이자크의 어린 시절, 그의 부모님은 곧잘 이자크와 엘레나를 데리고 숲속 별장을 향했다. 성같이 넓은 곳과는 달리 아담한 이층 목조 별장은 마치 아이들만을 위한 아지트 같았다. 이자크는 그 추억의 장소를 이제 이런 용도로 쓰고 있다.
“이자입니다. 이자가 7년 전에 수입 약물 암거래하던 주요 인물이라고 합니다. 주로 불법 약물 위주고요. 범죄자들에게 많이 팔았다고 합니다.”
“범죄자?”
“예. 다른 독극물들과는 다르게 먹어도 티가 안 나고, 맛도 향도 없고, 은으로도 검출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바로 해외로 도주해서 놓쳤었는데, 이번에 다시 일을 시작한 건지… 덜미가 잡혔습니다.”
여기저기 멍이 들고 피를 흘리는 이 남자는, 7년 전 전 변경백이 사용했을 거라 추정되는 독극물을 메시앙에 밀수입한 업자였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곧장 해외로 도주했던 건지 백방으로 찾아다녀도 머리 한 올 찾지 못했던 놈이, 드디어 잡혔다.
그를 내려다보던 이자크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밀수꾼은 아직 정신을 덜 차린 것인지 도리어 큰소리 쳤다.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전 진짜 그 일이랑 관련 없다니까요!”
뻔뻔한 태도에 수행기사가 윽박질렀다.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네 놈이 들여온 약물인 거 모를 줄 알았느냐! 어느 안전이라고 이놈이 거짓을!”
“진, 진짜 모른다고요, 난 죽어도 몰라요! 죽어도! 죽어도 모른단 말입니다! 차라리 날 죽이시오!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결백하다니까! 죽이라니까!”
창백하게 질린 남자는 절박하게 말했다. 이놈이 어딜 목소리를 높여! 하며 수행기사가 주먹을 들자 이자크가 그의 팔을 내려놓으며 뒤로 물러나게 했다. 이자크는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제 앞의 남자를 보더니 이내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가만히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던 이자크가 작게 물었다.
“가족?”
“…예?”
“가족이 잡혀있는 건가.”
그의 말에 밀수꾼은 입을 다물었다. 발악을 하던 입은 합죽이가 되었고 어느새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이자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다 알고 잡아 온 사람에게 나는 모른다, 차라리 죽여라. 죽여달라. 그렇게 애원하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애절하게 말하는 저 모습은 마치 자신만 죽으면 모든 일을 끝낼 수 있다 믿는 바보 같은 이의 것이었다.
“자네만 입 다물면 된다고 누가 그러던가.”
“….”
사내의 동공이 크게 떨렸다.
“가족이 잡혀있는 거라면 그렇다고 말하게.”
“…….”
“내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와줄 테니. 물론 자네의 협조라는 전제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