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어디 그뿐인가요, 아가씨와 도련님을 봐도 본체만체하고… 잘 놀아주지도 않으시고. 집에 계신 날보다 밖에 나가시는 날이 더 많았어요. 물론 그것도 다 사업을 하시느라 바쁘신 것도 있었지만, 그냥 전반적으로 가정에 소홀하셨어요.”
“….”
“이자크 님께 심한 말들도 많이 하셨고요. 뭐… 관심 끄라거나 당신은 상관없다, 이런 말들.”
“….”
“그리고-”
“그, 그만.”
“예? 다 말하라면서요.”
“아, 아니야.”
에스텔라가 다급하게 유모의 입을 막았다. 한참을 더 떠들 수 있다는 듯 고개를 갸웃대는 유모에 에스텔라는 머리가 아파졌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예.”
“대체 왜?”
유모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에스텔라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금발을 쥐어뜯듯 잡아당겼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내가? 내가?!
대체 왜?!
물음표가 난무한 질문들이었다.
“내가 외도를 했다고?”
“확실한 건 아니고 그냥 정황상-”
“내가 이자크를 내버려 두고 외도를?! 내가? 그 잘생긴 이자크를 두고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단 말이야?! 그것도 모자라 내가 그런 말도 했다고?”
에스텔라의 눈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내가 그 귀여운 애들한테 관심도 없었다고? 그렇게 볼이 포동포동하고 부들부들하고 쪼그맣고 귀여운 애들한테?”
“….”
유모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복에 겨워 미친 게 분명해.”
유모는 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지 재차 물어봤다.
“내가 그렇게까지 쓰레기였다고?”
“어우, 말도 마셔요. 얼마나 쓰- 헙….”
에스텔라의 질문에 얼씨구나 맞장구치려던 유모가 얼른 입을 막고 에스텔라의 눈치를 봤다.
“유모도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근데 왜 나 안 말렸어.”
“그거야… 제가 말을 해봤지만, 공주님께서 알아서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유모는 다른 이유가 있었으나 그 이유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전할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이자크 님께서 그 일에 대한 건 말씀하시지 않은 건가?’
이자크가 모든 문제의 원흉이 되는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공주님께 아직 마음이 있으신 건가? 그걸 숨기면 관계가 나아질 수도 있긴 하니까. 물론, 공주님께서 어디까지나 과거를 기억 못 하신다는 전제하에서지만….’
유모는 자신이 감히 끼어들 생각은 없다고 판단했고, 해서 에스텔라가 물어보는 것에만 대답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답을 내렸다.
“…내가 그랬단 말이야? 세상에. 오, 세상에 이런 미친 인간이 다 있었다니.”
에스텔라는 자책하듯 제 머리카락을 쭉쭉 늘려 잡아당겼다. 유모는 그러다가 머리카락 빠진다며 에스텔라의 손을 저지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지 못하게 하니 이제는 제 뺨을 때릴 기세였다. 유모가 얼른 에스텔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공주님, 자학하지 마시고, 이제부터라도 진심으로 다가가세요.”
“응…? 난 지금도 진심이야.”
“선물 공세 백날 해봤자, 돌아선 부군의 마음 못 잡습니다. 이자크 님께 진심을 전하셔야죠. 말이든, 편지든.”
“그런 게 통할까? 나 외도까지 했다면서.”
“그거야 과거의 공주님만 아실 일이죠.”
“그럼 그 상대 남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진실을 불게 하자.”
“이자크 님 앞에서요?”
“아니, 일단 내 앞에서만.”
“외도가 맞으면요.”
“…그럼 난 진짜 쓰레기에 짐승만도 못한 인간인 거지.”
에스텔라의 동공이 심히 흔들렸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이자크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건만, 아니다. 자신의 만행이 생각보다 더 쓰레기였던 거다.
이로써 에스텔라는 미래이자 과거의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에스텔라는 내심 그 남자들과 자신이 진짜 외도라도 저질렀을까 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일 외도가 맞는다면,
“나 진짜 죽을죄를 진 건데.”
좌절에 빠진 에스텔라가 결국 소파에 얼굴을 묻고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아, 나 진짜 어떡해. 이대로 이자크를 떠나보낼 수는 없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한 짓들이 다 사실이라면 보내줘야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악!”
“공주님. 그래도 여태까지 사신 걸 보면 이자크 님이 공주님께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겁니다. 이자크 님은 계속 공주님을 기다리셨던 거죠. 이제는 그 마음에 보답하시면 되는 거예요. 너무 자책 마세요. 다른 가문 부부들이라고 뭐 다 화목하나요. 다들 문제 안고 살아요.”
“…그래도 나처럼 이혼 통보해놓고서 못 해주겠다고 생떼 부리는 일은 없잖아.”
“생떼라니요, 공주님. 제발 체통을.”
“지금 체통을 지킬 때가 아니야… 유모. 내가 먼저 이혼하자고 했다잖아. 완전히 나한테 질린 얼굴이야. 나 같아도 그럴 거야. 솔직히 말해봐. 개차반으로 굴던 남편이 유모한테 이혼 통보를 했어. 근데 며칠 뒤에 이혼하지 말자고 그래 봐. 어떨 거 같아?”
“어유, 저 같으면 가랑이 사이를 찢어놓죠. 다시는 남자 구실 못 하게!”
“….”
지긋이 자신을 쳐다보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유모가 아차 싶어 얼른 딴청을 피웠다.
“아, 루스 도련님이 우시는 것 같은데. 도련님- 이 유모가 갈게요-”
“울음소리 안 들려.”
“저, 저는 그럼 이만….”
“유모!”
“아 참, 그럼 체스 가문 부부를 만나보시는 건 어떠세요?”
“말 돌리기 있기야?”
“체스 가문 부부가 이혼 숙려 기간 끝나고 기적적으로 재결합했거든요!”
“…그래?”
에스텔라가 관심을 보이자 유모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체스 백작 가문 부부가… 그, 남편이 진짜 개차반이었데요.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이 바뀌었다더라고요. 체스 부인이랑 먼저 대화를 해보심이 어떠세요? 어떤 이유로 용서를 해주셨는지.”
“체스 백작이 나만큼이나 개차반이었을까?”
“그럼요. 개차반도 그런 개차반이 없었대요!”
유모 딴에는 힘내라고 하는 말 같은데, 어째 에스텔라에게는 너도 그만큼 개차반이다, 하는 말처럼 들렸다. 에스텔라는 조금 시무룩해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체스 가문 부부를 만나야겠어.
“참, 그리고 공주님. 오늘부터 다시 합방을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응? 합…방?”
에스텔라의 동공이 다시 심하게 흔들렸다. 생각해보니 에스텔라는 그동안 혼자 방을 썼다. 열아홉 살의 순수한 에스텔라는 부부가 동침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도 지금 자신이 그 상황에 놓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네. 공주님이 방을 나가신 거니까, 몸만 오시면 될 거예요.”
“합방이라… 합방… 그래. 합방 좋다. 몸부터 가까워져야지. 그치?”
“이자크 님께서 손끝 하나 못 대게 하실 것 같은데요.”
유모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일침을 놨다.
“유모도 참, 누가 그런 쪽으로 생각한대? 그냥 한 침대를 쓰다 보면 보기 싫어도 얼굴을 맞댈 거 아니야? 자연스레 대화도 오고 갈 수 있고. 그래. 오늘 내 방의 짐들을 죄다 옮기자.”
“이자크 님께는 상의 안 하시고요?”
“말하지 뭐.”
설마 절대 안 된다고 하겠어? 에스텔라는 태평히 생각했다.
“싫습니다만.”
“…왜요?”
“방을 나간 건 부인 마음대로지만, 다시 받아들일지 말지는 제 마음이죠. 저한테 말도 없이 방을 분리했으면서, 또 말도 없이 들어올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생각보다 이자크는 강적이었다. 에스텔라는 넋이 나간 얼굴을 얼른 갈무리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자크 당신은 내가 뭘 말하려 하면 항상 벽을 치잖아요.”
“침대 위라고 다를까요.”
“이건 기회를 주는 게 아니죠.”
“그럼, 제가 부인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야 합니까?”
“누가 언제 다 해달랬나요. 그냥… 보통의 부부들처럼 살자는 건데….”
따지고 싶었지만, 이자크의 의견이 더 중요하긴 했다. 에스텔라는 시무룩해져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보더니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하시죠.”
무슨 꿍꿍이라도 세운 걸까. 갑자기 이자크가 마음을 틀어 에스텔라의 합방을 허락했다. 에스텔라는 살짝 불안했으나, 얼른 미끼를 덥석 물었다.
에스텔라는 시종들을 시켜 제 방의 물건들을 부부 방으로 모두 옮겼다. 3년 만의 합방에 시종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에스텔라와 이자크의 눈치를 봤다. 그렇게 냉랭하던 두 분이 드디어 재결합한 것인가, 싶었으나. 차가운 이자크의 표정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에스텔라의 방에는 짐이 꽤 많았다. 정체 모를 문서 박스들과 액세서리 함들. 에스텔라는 그것들을 봐도 뭔지 몰라 대충 뒤적거렸다.
“이건 또 뭐야?”
액세서리 함을 여니 온갖 반지들이 실에 꿰어져 있다. 한두 개도, 몇십 개도 아닌 몇백 개는 되어 보이는 반지들은 영롱한 보석들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평소 장신구를 모으는 것이 취미이긴 했어도, 이렇게 병적으로 모았던가. 에스텔라는 실에 꿰여 기다란 뱀처럼 늘어진 반지꾸러미를 함에서 들어 올렸다.
“뭐야, 뭐가 이렇게 많아?”
그러던 찰나, 이자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눈이 마주친 에스텔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반지꾸러미를 얼른 집어넣다가 괜히 물었다.
“무, 무슨 반지가 이렇게 많담… 원래 사치하는 편은 아닌데-”
“걱정 마시고 계속 추억하세요.”
“네? 뭘요?”
“그 반지들이요.”
이자크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부인의 애인들이 선물로 준 것들이잖습니까.”
“…예?”
“아, 기억 안 나시죠?”
“….”
“그거. 부인의 애인들이 선물로 가져온 것들을 모아둔 함입니다. 반지에 집착하시더라고요.”
에스텔라는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넘쳐나는 반지꾸러미들을 함에 넣은 거로도 모자라 아예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아, 하하. 이, 이제는 반지 따위 관심도 없어요. 그깟 반지가 뭐라고.”
어떻게든 이자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에스텔라가 딱하기도 했는지, 이자크는 더 이상 비꼬거나 비난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에스텔라의 손가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에스텔라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는 없었다.
이자크는 마저 문을 닫고 들어온 뒤 목을 조이고 있던 러플들을 풀어헤쳤다.
에스텔라는 어색하게 침대에 앉아 이자크의 눈치를 봤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건가. 왜 하필 물어도 반지에 대해 물어서는. 그렇게 자책을 하고 있던 찰나.
휙, 하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
에스텔라의 몸 위에 그림자가 졌다. 이자크의 얼굴이 보였다.
“뭐, 뭐… 뭣. 뭐…하시는….”
당황한 에스텔라가 잔뜩 말을 버벅댔다. 이자크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보통의 부부 사이로 돌아가자면서요.”
“그랬죠?!”
“그럼 이거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이자크는 그렇게 말한 뒤 자신의 셔츠 리본들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가슴 부근을 묶고 있던 리본이 스르륵 풀리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아악! 안 돼요! 안 돼!”
에스텔라는 얼른 눈을 감고선 제 양손으로 그의 벌어진 앞섶을 가려주며 소리 질렀다. 이자크는 당황스러운 듯 에스텔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옷 벗은 건 난데.”
“아악! 빨리 가려요, 얼른!”
가슴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한껏 옆으로 돌렸으나, 야속하게도 에스텔라의 눈은 저절로 떠져 힐끔힐끔 이자크의 가슴을 쳐다봤다.
“자꾸 보는데.”
“안 봤어요!”
이자크는 가만히 에스텔라에게 손을 뻗었다. 에스텔라가 얼른 눈을 돌리며 소리쳤다.
“우리 이러면 안 돼요!”
“아직 손 안 댔습니다.”
“나 아직 열아홉 살이에요!”
“부인이 열아홉 살 끝자락에 저와 결혼했지요. 첫날밤도 보냈는데.”
“그, 그래도 지금은 안 돼요! 나 아직 마음의 준비는 안 되어 있다고요!”
에스텔라가 그의 가슴팍을 밀치며 일어났다. 그리곤 파자마만 입고 있던 제 몸 위에 얼른 두꺼운 담요를 칭칭 말았다.
“쌍둥이는 뭐 하늘에서 내려왔답니까?”
이자크가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내 기억은 아직 이자크가 릴리 언니와 결혼했던 그 자리라고요. 세상에, 제 기억상 전 아직 이자크와 손도 안 잡았거든요? 그런데 어찌! 사람이 밟아야 할 단계가 있거늘!”
“그럼 합방은 왜 한 건데요?”
“순수하게 잠만 같이 자려고요.”
이자크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그렇다면 그리 말씀하셨어야죠.”
“대화하자고 했잖아요.”
“몸의 대화인 줄 알았네요.”
에스텔라가 기겁했다. 몸의 대화라니. 에스텔라는 국왕인 아버지 빼고는 남자와 손을 잡아본 적도, 하다못해 볼에 뽀뽀를 해본 적도 없다.
그런 그녀에게 조금 전의 일은 천천히 걸음마를 떼는 아이가 갑자기 승마를 시작한 것과 같달까. 에스텔라는 아직도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제가 당황하는 게 재밌으신가요?”
“네. 재밌습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이자크의 모습에 에스텔라가 또 당황했다.
“맨날 냉랭하게 굴던 사람이 나만 봐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모습이 재밌습니다. 제가 대화를 시도할 땐 칼 같이 잘라내던 사람이 먼저 대화를 하자고 하니 통쾌하기도 합니다.”
“지금 엄청 유치하신 거, 아시죠?”
“유치한 거 아는데, 재밌네요. 지금 이 상황.”
에스텔라에게 기회를 준 것은, 사실 자신이 그동안 당한 것을 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이자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치해지자고 생각했다. 그동안 제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은 여자가 제 발로 매달리는데 어찌 그냥 떠나고 배기나. 이자크는 어쩐지 씁쓸해지는 마음을 숨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재밌게 해주세요.”
“그럼 이혼 물려주시게요?”
“껍데기만으로도 만족하신다면.”
에스텔라에게 지쳐있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껍데기를 가지는 게 제일 중요하죠. 마음이야 어느 날 알 수 없게 돌아오는 것이니까. 두고 보자고요. 언젠가 이자크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게 해줄 테니까.”
에스텔라의 당찬 말에 이자크는 약 올리듯이 주먹을 쥐어 들어 올렸다. 영혼 없는 얼굴로 힘을 북돋아주겠다는 듯.
“열심히 해보세요.”
그리고는 다시 정색하는 얼굴로 이불을 덮곤 에스텔라를 등진 채로 누웠다.
에스텔라는 한참 동안 그의 등을 쳐다봤다. 혹여나 또 그런 장난을 칠까 싶어 담요로 제 몸을 두른 뒤 다른 담요 하나를 잠든 그의 벌어진 앞섶 위에 올려 뒀다.
그리곤 가만히 정자세로 그 옆에 누웠다.
콩닥, 콩닥, 콩닥.
심장 소리가 방 전체에 울리는 기분이다. 에스텔라는 슬쩍 옆을 돌아봤다. 이자크는 여전히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자고 있다.
남자랑 같은 침대를 써서 그런가. 아니면 그 옆의 남자가 이자크라서 더 이러는 건가.
에스텔라는 가만히 손을 들어 제 심장 부근에 올렸다. 움직임이 빠르다.
‘이렇게 옆에만 있어도 심장이 뛰는데.’
어쩌다가 우리 사이는 이렇게 된 걸까. 어쩌다가 나는… 이자크에게 깊은 상처를 준 걸까. 에스텔라는 밤늦게까지 생각했다. 그런다고 없던 기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창문 넘어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밤늦게까지 잡념 때문에 잠이 들지 못했던지라, 에스텔라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햇빛을 피해 고개를 돌리다가 슬쩍 눈을 떴다.
“…와.”
눈 앞에 펼쳐진 이자크라는 절경에 에스텔라가 본능적으로 제 입을 막았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이자크를 감상했다. 항상 그녀만 보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무표정을 짓는 그인지라. 이렇게 무방비한 얼굴은 처음이다. 순수하게 잠든 그의 얼굴에 햇볕이 내리쬐니, 마치 천사가 강림한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을 두고….’
어젯밤 내내 했던 생각이 또 떠오른다.
에스텔라는 그런 자책일랑 잠시 접어두고, 잘생긴 내 남자, 내 남편의 얼굴을 감상하기로 했다. 짙은 검정 눈썹, 쭉 뻗은 콧대, 오뚝한 콧날, 기다란 속눈썹, 적당히 도톰한 입술, 그 사이를 지나 힐끗 보이는 근육질의 단단한 가슴….
“어후.”
에스텔라는 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얼른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도 다시 슬쩍 남편의 얼굴을 훔쳐본다.
“잘생겼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건지 곧게 펴져 있던 그의 미간이 슬금슬금 찌푸려지기 시작한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도 하다가 고개도 움찔대는 걸 보면 악몽이 틀림없다.
에스텔라는 어느새 잔뜩 주름진 그의 미간에 검지를 대고 살살 문질렀다. 그러자 낯선 손길에 이자크가 눈을 떴다.
“뭡니까?”
세상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자크가 물었다. 에스텔라는 에이, 하며 아쉬운 듯 손을 치웠다.
“악몽 꾸는 것 같길래요. 그렇게 인상 쓰다간 할아버지 되기도 전에 미간만 주름이 자글자글할 거예요.”
에스텔라가 제 미간을 톡톡 치며 말했다. 이자크는 제 미간을 만지작대며 물었다.
“제가 인상을 찌푸리고 잡니까?”
“네. 엄청요. 악몽 꾼 것 같은데. 괜찮아요?”
“네.”
“무슨 꿈을 꾸길래 그렇게 뒤척이는지….”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몸을 일으키곤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혹여나 안 좋은 소리를 들을까 싶어 얼른 저를 대변했다.
“아니, 걱정이 되니까 하는 말이에요. 걱정도 못 하나.”
툴툴대는 에스텔라의 모습에 이자크는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면 좋았을 것을.
만일 그녀의 말대로 에스텔라가 과거에서 왔다면, 그것도 릴리 버트랜드와 결혼식을 올리던 도중에 이곳으로 오게 된 거라면, 아직 에스텔라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에스텔라가 이자크를 속인 것은 이자크의 부모님이 처형된 이후였으니까.
무슨 악몽을 꿨길래 그리 뒤척이냐고? 부모님이 처형당하던 날의 꿈을 꿨다. 그러나 이자크는 차마 지금의 에스텔라에게 왜 내 부모님의 죽음을 방관했느냐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스텔라는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길. 그것이 아마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가장 안전한 결말이 될 것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이자크는 아예 메시앙을 떠날 생각이다. 그는 메시앙에 대한 모든 기억에 지쳤다. 자신을 파파라고 부르며 사랑스럽게 안기는 두 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걸 포기할 생각이다.
가문의 복수고 뭐고, 더 이상 이자크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마침 시종이 새 옷과 세숫물을 들고 올라왔다. 이자크는 빠르게 세수를 하고 옷을 입은 뒤, 방을 나섰다.
“같이 좀 가지. 진짜.”
에스텔라는 먼저 가버린 이자크의 빈자리를 보며 툴툴댔다. 뒤이어 들어온 유모가 에스텔라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줬다.
“공주님,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
“네, 체스 백작 부인이 만남에 응해주셨습니다. 여기요.”
체스 부인에게서 온 답신을 건네며 유모가 들뜬 듯 말했다. 에스텔라가 얼른 편지를 뜯어 읽기 시작했다.
먼저 만남을 제의해주셔서 영광입니다, 메시앙 공주 전하.
부부 문제로 조언을 얻고 싶으시다니, 메시앙의 백성인 제가 메시앙의 빛인 공주 전하의 근심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뿐입니다.
부디, 부담 갖지 마시고 제게 근심을 나눠 주시지요.
공주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일, 8월 7일 자정에 로도니아 살롱에서 남편과 함께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하시길.
메시앙의 빛, 에스텔라 데 리에프 메시앙 전하께.
“다행이네. 답신을 보낼 테니 종이를 가져오겠어?”
“네!”
에스텔라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체스 부인과의 만남을 기대했다.
그리고 체스 부인과의 만남 당일이 되었다.
에스텔라는 아침 일찍부터 로도니아 살롱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투왈렛 룸에서 준비를 끝내고 나온 에스텔라를 보며 이자크가 물었다.
“어디 외출이라도 하십니까?”
“아… 잠시 누굴 좀 만나려고요.”
차마 개차반인 남편을 용서해준 대단한 부인과, 개차반이었다가 개과천선한 남편을 찾아가 어떻게 사이가 다시 좋아졌는지 물어보러 간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 그렇군요.”
관심 없는 듯 이자크가 괜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에스텔라가 농담하듯 덧붙였다. 물론, 과거의 자신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듯하여.
“남자 만나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걱정은 무슨.”
이자크는 그렇게 말하곤 아이들과 함께 뒷산으로 나갔다. 목소리는 태연한 듯했으나 나름대로 에스텔라의 외출에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에스텔라는 체스 백작 부부를 만나 필요한 대답을 듣고 얼른 저택에 돌아오자고 다짐했다.
로도니아 살롱은 에스텔라가 자주 가던 살롱이었다. 7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마당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7년 동안 로도니아 살롱은 주인이 몇 번이고 바뀐 것인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주인의 초상화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살롱의 현 주인인 마담 델라 랭은 에스텔라를 아주 친히 반겼다.
“아! 공주님! 이번에는 왜 이리 오랜만에 오셨나요! 찬찬히 돌아보고 나가셔요! 누구를 만나시나요?”
마담 랭은 메시앙 왕국의 이웃 나라인 에테리아에서 온 것인지, 에테리아인의 생김새와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의 에스텔라와 친한지 그녀가 마차에서 내린 이후부터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살롱 안으로 들어가며 마담 랭이 은밀하게 말했다.
“공주님, 저번에 만났던 이들이 다시 만남을 청합니다.”
“만났던 이들?”
“네. 공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그 사내들이 보석을 들고 왔어요.”
“보석…?”
“예! 보석이요! 커다란 붉은 루비요! 공주님이 원하신 대로 반지나 목걸이들로 만들어오겠대요!”
랭 마담은 신나서 말했고, 에스텔라는 하얗게 질렸다. 어젯밤 이자크가 한 말이 있지 않나. 애인들이 준 반지들. 추억거리. 실망한 이자크의 얼굴. 그러다가 이혼서류에 도장 쾅!
“…아, 안 돼!”
에스텔라가 기함했다.
순식간에 미래가 그려졌다. 쌍둥이들과 떠나는 이자크의 차가운 뒷모습. 그런 그에게 매달리지만 매몰차게 차이고 마는 자신. 에스텔라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니, 뭐가요?”
델라 랭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에스텔라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고민하다 나지막이 물었다.
“그들이 날 많이 좋아하나요?”
“예? 어… 음… 네. 좋아하시죠?”
그녀의 말에 에스텔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맙소사, 안 돼.
“마음은 감사하지만 거절한다고 전해주세요. 보석일랑 받지 말고.”
“예? 하지만-”
“전, 이제부터는 한 남자에게만 정착하기로 했어요. 그동안의 행동들을 만회하기 위해 애쓸 거에요.”
열아홉 순정이다. 에스텔라가 간곡한 눈으로 델라 랭에게 말했다. 하지만 마담은 에스텔라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착? 한 남자? 만회? 보석상인들이 공주님을 좋아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는 듯싶다, 오늘따라 유난히 에스텔라가 낯설어 마담 역시 일단은 그러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체스 백작 부인이 와 있나요? 만나기로 했는데.”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공주님.”
마담은 살롱 한쪽으로 에스텔라를 안내했다.
“백작 부인,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체스 백작 부인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며 인사했다. 같이 온 것인지 백작 역시 에스텔라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마담 랭은 자리를 뜨는 척하며 찬찬히 에스텔라를 관찰했다.
‘무슨 일이 생기신 건가…?’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는 듯한 얼굴에 랭 마담은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말투. 마치 이제 갓 성인이 된 것처럼 잔뜩 궁금한 것투성이인 얼굴.
‘평소의 공주님과 다른데. 이것도 계획의 일부이신가?’
무엇이 되었든, 일단은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델라 랭은 공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자였으니까.
*
에스텔라는 기분 좋은 얼굴로 귀가했다.
이자크는 희미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에스텔라를 보며 무슨 일을, 누구와 하고 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누굴 만났길래 저리 기분 좋아 보이지? 하지만 굳이 질문할 생각은 없다. 에스텔라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을 싫어했으니까.
해서 그는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지금 두 사람은 티타임을 함께 하고 있다.
에스텔라가 간곡히 청해서 얻은 규칙이다. 며칠 전 에스텔라는 이자크에게 꽤나 당돌한 협상을 제안했다. 하루에 세 번씩 꼭 티타임은 함께 하기. 이자크는 의외로 쉽게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하루 세 번 아침, 점심, 저녁은 꼭 함께 티타임을 가지지만 이자크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대화거리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족족 제가 벌려놓은 만행들과 관련된 내용만 이자크가 말하는 통에, 에스텔라는 이제 뭘 질문하기도 무서워졌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누굴 만난 건지 궁금하지 않나?’
에스텔라가 슬쩍 이자크를 쳐다봤다.
이자크는 태연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진짜 안 궁금한 거야? 나 지금 되게 웃는 얼굴인데? 보통 이러면 누굴 만나고 왔느냐 든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든지… 그런 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에스텔라는 자신에게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이자크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크는 아닌 척 그런 에스텔라를 살펴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 좋아 보이던 얼굴에 슬금슬금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했다.
‘누굴 만나고 왔길래….’
저리도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인가. 이자크는 물어볼까 싶다가도,
‘아니. 싫어했었으니까.’
과거 에스텔라를 떠올리며 다시 찻잔을 내려놨다.
그런 아빠의 마음을 잘 안 것인지, 쌍둥이들이 유모의 손을 잡고 등장했다. 아이들은 에스텔라를 보자마자 유모의 손을 놓곤 얼른 에스텔라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곤 에스텔라의 다리를 꼭 껴안고 무르팍에 귀여운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마망, 어디 갔다 왔어-”
“놀자, 응? 놀자아!”
에스텔라는 쌍둥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며 체스 백작 부부와의 담화를 상기했다.
로도니아 살롱에서 만난 체스 백작 부부는 첫 만남부터 굉장히 흥미로운 부부였다.
분명 유모와 다른 시종들의 말에 의하면 체스 부부는 이혼 위기 사례 중에 최악의 사례였다고들 하지 않았나. 체스 부인은 아예 짐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집을 박차고 나와 친정에 돌아갔다고 하던데.
그런데 지금 눈앞의 부부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눈에서 꿀이 떨어지다 못해 양봉 작업이 한창이었다. 에스텔라는 멋쩍은 기침을 몇 번 한 뒤 체스 부인에게 물었다.
“사실, 편지에 쓰여있듯이, 체스 부부의 재결합에 제가 관심이 지대합니다. 이혼 위기까지 가셨다고 들었는데 지금 두 분을 보면 그런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아 보이세요.”
에스텔라의 말에 체스 부인이 생긋 웃으며 남편을 바라봤다. 백작은 그런 부인이 사랑스러운 듯 따라 미소 지으며 손을 더 꽉 맞잡았다. 에스텔라는 맞잡은 그들의 손을 부러운 듯 쳐다봤다.
이자크도 저렇게 제 손을 잡아줬으면.
그렇게 하려고 지금 이 자리에 나온 것이지만, 에스텔라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백작 부부가 제 표정을 보기 전에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체스 부인이 입을 열었다.
“공주님이 들으신 소문이 맞아요. 저희는 정말로 이혼 위기에 놓여 있었죠. 하지만… 남편이 제 마음을 돌려놓았어요. 전 절대 이 사람과 사이가 좋아질 거로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성질 급한 에스텔라가 얼른 물었다.
“어떻게 했길래 백작은 용서를 받았고, 부인은 용서를 한 건가요?”
“전 매일 용서를 빌었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백작은 그때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체스 부인이 픽 웃으며 말했다.
“용서할 생각은 없었어요. 아이들에게만 다정한 남편을 바라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워낙에 아이들이 아빠를 찾았고, 아마 근 일 년 동안 쉬지 않고 찾아오는 것에 마음이 동했나 봐요.”
부부는 그렇게 자신들이 어쩌다 사이가 나빠졌고, 그 도화선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 찬찬히 말해줬다. 에스텔라는 세세하게 말해주는 부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본의 아니게 너무 사적인 이야기들을 물은 것 같아 죄송해요.”
“아뇨. 전 괜찮아요. 공주님께서 부군과 다시 사이가 좋아지셨으면 하는 마음이 제일 큽니다.”
부인의 말에 옳다구나 맞장구를 치며 백작이 말했다.
“예. 저희는 공주님의 결혼식 때도 응원했었던걸요.”
“응원이요?”
“아무래도 말이 많았을 테니까요. 부군께서-”
말을 하려던 백작의 허벅지를 체스 부인이 꽉 꼬집었다. 백작은 숨을 들이쉬면서 이를 악물곤 얼른 말을 돌렸다.
“아무튼, 부군과 꼭 다시 사이가 좋아지셨으면 합니다.”
“맞아요, 공주님. 요즘엔 이혼 판결이 난 뒤에는 번복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재결합하려면 절차가 더 까다로워진대요. 공주님이 가장 잘 아시겠지만, 세금도 또 따로 내야 하고요. 원칙적으로 무조건 3년 동안은 절대 만나지도 못하게 한대요.”
“세금이요?”
“재결합 세금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에스텔라는 들어보지 못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마 신중히 이혼을 생각하라는 의미에서 만든 것 같아요. 저희는 이혼 판결 나기 직전에 마음을 바꾼 거라….”
“새로 법이 개정된 건가요?”
“예. 국왕 전하께서….”
“아버지가 그런 법을 개정하실 줄은 몰랐네요.”
아무리 그래도 제 딸한테도 그렇게 단호하게 구실까. 벤자민 국왕은 모두에게 선망의 왕이었지만 에스텔라에게만큼은 그저 팔불출 아버지였다.
“예?”
백작 부부는 의아한 눈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부인이 먼저 남편에게 눈짓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눈빛을 주고받은 부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체스 백작 부부의 사랑과 전쟁에 대한 일대기를 들은 에스텔라.
체스 부인은 헤어지기 전, 남편을 먼저 내보낸 뒤 에스텔라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공주님. 결혼은 참고 사는 거라고들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야 하고, 무엇보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일 한쪽이 너무 잘못한 게 크면요?”
“용서를 구하면 되는 거죠. 전 원래 남편이 육 개월 동안 찾아왔을 때도 코웃음 쳤어요. 그게 얼마나 가겠느냐고. 유예기간은 연장이 되는 것 아시죠?”
“연장도 가능해요?”
체스 부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숙려 기간이 끝나기 2개월 전에는 연장이 가능해요. 그 이후부터는 연장이 되지 않고 곧장 판결로 넘어가요. 많은 부부가 고민만 하다 결국엔 이혼하는 경우가 많아요. 전 연장을 두 번이나 했어요.”
“두 번이나요?”
“제가 신청하면서도 반신반의했지만, 지금은 잘한 것 같아요. 결혼은 신중히, 하지만 이혼은 더 신중히. 아이들이 있다면 더더더욱 신중히.”
아이들이라는 말에 에스텔라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부인은 아이들 때문에 이혼을 재고한 것도 있나요?”
“있었지만 그게 결코 주가 되지는 않았어요. 부모가 행복하지 않은 집안은 아이들도 결국엔 불행해지니까요. 한부모 가정이어도 전 아이들을 혼자 잘 키울 자신이 있었거든요. 제가 남편을 다시 받아 준 이유는 단 하나예요. 이번엔 진심이라는 걸 보여줘서.”
그게 제일 어려운 답이었다.
그놈의 진심이라는 걸 대체 어떻게 보여주라는 건지.
“이자크는 제가 뭘 해도 거짓으로 보고 있는걸요.”
“저도 그랬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심을 보여주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믿고 싶어지더라고요.”
에스텔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까? 이자크가 어느 순간 자신을 믿어주는 순간이?
시무룩해진 에스텔라의 표정을 살펴보던 체스 부인이 물었다. 에스텔라와 이자크 슬하에는 이란성쌍둥이가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아이들과는 친하시나요?”
“잘 모르겠어요.”
“아이들과 먼저 친해지세요. 아이들은 순수하고 솔직해서 공주님이 진심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잖아요. 아이들의 감정은 부모한테도 전달되니까요.”
그것도 문제였다. 에스텔라는 쌍둥이들이 제 자식이라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열 달 동안 고생해가며 품은 기억도, 배 아파 낳은 기억도, 심지어는 만들어진 경위조차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제 자식이라는 실감이 영 나지 않을 수밖에.
마치 귀여운 남의 자식을 보는 듯한 기분이라고 할까.
에스텔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이들이 두 분의 큐피드가 될지 어떻게 알아요?”
“아이들과 친해지기 어려울 거 같아요.”
“사랑을 주면 배로 돌려주는 게 아이들이죠. 사람 대하듯 똑같이 대하면 돼요. 존중과 예의, 사랑을 담아서요.”
체스 부인이 꼭 잡은 손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에스텔라는 어쩐지 체스 부인이 친언니 같은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물었다.
“종종 연락드려도 될까요. 부인과 대화를 하니 심란했던 마음이 차분해져요.”
“그럼요. 저야 환영이죠.”
체스 부인과의 대화는 에스텔라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제 문제는, 과연 체스 백작처럼 자신이 돌아선 이자크의 마음을 다시 되돌릴 수 있냐는 것이다.
조금 시무룩해지려던 찰나 에스텔라가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제 양손으로 뺨을 찰지게 짜악! 갖다 붙였다.
“기죽지말자, 내가 누구냐. 나 메시앙의 공주 에스텔라야.”
“마망!”
아이들의 부름에 에스텔라는 회상을 마쳤다. 눈앞에는 작고 오동통한 두 아이가 에스텔라의 무릎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루시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마망 놀자! 응? 놀자아!”
“마망… 놀자아-”
루시 옆에서 손을 잡고 있던 루스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루시의 말을 따라 했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아이들을 쳐다봤다.
“놀고 싶어?”
“응! 루시, 마망이랑, 루스랑, 파파랑 소꿉놀이하고 싶어! 분명 재밌을 거야! 루시가 루스랑 맛있는 거 막 만들어줄게!”
“루스도, 마망이랑, 루시랑… 파파랑 소꿉놀이할래… 마망이 좋아하는 거 만들어 줄 거야.”
작은 입술로, 얼마 알지 못하는 단어들을 동원해서, 눈을 한창 반짝이며 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럼 소꿉놀이하러 갈까?”
에스텔라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응! 좋아! 좋아!”
아이들이 신나는지 동동 뛰며 대답했다.
“그럼 가자.”
“꺄아!”
루시는 아무래도 에스텔라를 닮은 것 같다. 잔뜩 신나서 루스의 손을 잡고 짧은 다리로 와다다 방안을 헤집기 시작하는 모습이, 어린 시절의 자신과 똑 닮았다. 루스는 루시에게 휘둘리면서도 손을 꽉 잡고 놓지는 않는다.
에스텔라는 쌍둥이들과 함께 온실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파도! 응?”
루시가 이자크에게 달려가서 바짓단을 흔든다. 그러자 루스도 얼른 루시를 따라 말꼬리를 잔뜩 늘리며 바짓단에 매달린다.
“파파, 파파도 같이. 같이이-”
이자크는 아이들과 에스텔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에스텔라는 기회다 싶어 얼른 아이들의 말에 맞장구쳤다.
“같이 가요. 이자크.”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가만히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사람 모두 온실로 향했다. 온실은 쌍둥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소꿉놀이.
“루시가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 파파가 아가 해.”
“너무 큰 아가 아닐까, 루시?”
“으응, 아니야. 파파 아가야.”
루시의 말에 이자크는 떨떠름한 얼굴로 루시 옆에 누웠다. 아가는 항상 누워있어야 한다나. 루시의 말대로 해주지 않으면 분명 목청껏 울어댈 테니, 이자크는 하는 수 없이 커다란 아가가 되었다.
“마망은, 음… 마망은 유모 해!”
“그럼 루시는 누군데?”
에스텔라의 질문에 루시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돌리더니 명쾌하게 말했다.
“나는 마망! 루스는 파파!”
그러자 루스는 익숙하게 이자크의 옆으로 가 꼬막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장, 자장-”
루시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척하더니 에스텔라를 불렀다.
“유모!”
“네, 마님.”
“나 오늘 일하고 왔지, 힘들어.”
그러면서 꼬맹이답지 않게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제 손으로 어깨를 콩콩 두들긴다. 에스텔라가 얼른 작은 어깨를 주물러주며 말했다.
“마님, 많이 힘드세요?”
아직 에스텔라는 그저 어른 흉내 내는 아이들이 귀여울 뿐이다.
“여보!”
루스가 루시를 보자마자 안기기 위해 달려간다. 루시는 그런 루스를 쳐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귀찮아!”
“여보! 아가는요!”
“나 힘들다고 해찌!”
그러면서 쌩하니 이자크를 지나쳐 간다. 이자크가 가만히 누워있자 루시가 아이참! 하며 달려온다.
“파파! 아가니까 울어야지! 응애하고 울어야지!”
그러면서 일어나려는 이자크의 몸을 꾹꾹 누른다.
에스텔라는 이제 귀엽다고 웃을 수만은 없었다. 아이들이 흉내 내는 마망과 파파가 자신과 이자크라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에이, 파파가 응애하고 울어야지! 내가 또 말하잖아!”
“…루시. 우리 저기 가서 마카롱 만들까?”
어쩐지 말을 돌려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에스텔라가 얼른 루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응!”
“루, 루스도 만들래….”
“그래. 루스도 같이 가자.”
에스텔라는 두 아이를 데리고 잠시 이자크와 떨어진 온실 구석으로 갔다. 흙 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구석에는 흙이 잔뜩 쌓여있었다. 익숙하게 고사리손으로 물까지 묻히며 흙을 반죽하는 쌍둥이들에게 에스텔라가 슬며시 물었다.
“루시. 아까 뭐라고 말하려고 했었어? 아가가 울면, 마망인 루시는 뭐라고 하려고 했었어?”
“유모! 애기 좀 달래! 난 일하느라 바빠!”
“…마망이 그렇게 말해?”
“응!”
에스텔라는 입이 마르는 듯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쓸었다. 목도 막히고, 어쩐지 가슴도 콱 막힌 기분이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순진하게 자신의 만행을 알려주는 아이들에게 에스텔라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마망? 마망 우러?”
“…미안. 얘들아.”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니 루시가 얼른 고개 숙인 에스텔라의 얼굴을 보려 허리를 숙인다. 고개를 들이미는 루시의 모습에 루스도 얼른 따라서 한다.
“마망…? 마망… 울지 마….”
“안 울어.”
울진 않지만 슬퍼졌다.
에스텔라는 본인이 생각해도 구김살이 없던 성격이었다. 많은 사랑을 받아왔고, 그만큼 빛났다. 사랑만 받으니 철이 없긴 했어도 어두운 그늘은 없었던 공주였다.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철없고 사랑스러운 공주. 그게 자신이었다.
이자크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철없는 공주의 철없는 첫사랑이라지만 여전히 마음은 변치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했던 그와의 결혼생활에 어째서 이렇게 많은 실수가 존재하는가.
‘…아빠 보고 싶어.’
메시앙의 국왕이자 에스텔라의 팔불출인 벤자민 데 메시앙은 알고 있을까? 미래의 제 딸이 이렇게나 형편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걸.
에스텔라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다정했고, 정신적으로도 큰 버팀목이 되었던 아버지. 이렇게 힘들 때만 아버지가 생각나는 걸 보면 아직 철이 덜 들었나 보다.
“뭘 그렇게 오랫동안 만드는 거니, 루시.”
한참이 지나도록 흙밭에서 돌아오지 않는 셋을 데리러 이자크가 다가왔다.
에스텔라는 이자크를 볼 수 없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자크는 아이들의 소꿉놀이를 보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분명 내가 엄청 밉고, 매우 상처받았을 거야. 이자크는 곧잘 아이들과 놀았던 것 같으니까. 에스텔라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목 빠지겠습니다.”
이자크가 푹 숙어진 에스텔라의 고개를 슬쩍 올려주며 말했다.
“얼른 이거 먹어야죠.”
그러면서 쌍둥이들이 열심히 빚은 흙 음식들을 건네준다. 아이들의 눈은 반짝반짝. 또 얼마나 맛있게 먹어줄까 잔뜩 기대하는 듯하다.
에스텔라는 겨우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맛있게 음식을 먹는 척했다. 이자크는 에스텔라가 와, 맛있다! 진짜 맛있어! 등 웃으면서 반응하자 그제야 자신도 맛있게 먹는 연기를 했다.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시선이 아까부터 계속 쌍둥이가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밤, 에스텔라는 파자마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 앉아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쓰던 에스텔라는, 방 안으로 들어온 이자크의 모습에 살짝 어색해진 듯 열심히 휘갈기던 깃털 펜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옆에 서 있던 시종에게 편지를 다 쓴 뒤 에스텔라가 말했다.
“최대한 빨리 아버지한테 전하도록.”
시종은 에스텔라의 눈치를 보더니 예, 하며 얼른 편지를 받아들곤 나갔다. 그 꼴을 보던 이자크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방금 그 편지를 장인께 보내라고요?”
“예. 아버지를 좀 만나고 싶어서요. 이혼법 개정한 거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아.”
이자크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에스텔라는 그의 반응이 이상해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이자크는 말하길 꺼리는 듯 어색하게 손을 들어 제 눈썹뼈를 만지작댔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중얼거리던 이자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요?”
“…에스텔라.”
이자크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낮은 중저음이 자신의 목소리를 부르는 것이 달콤하기는커녕 어딘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자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선대 국왕께서는 지금 빈사 상태이십니다.”
“…네? 선대 국왕이라뇨?”
“장인이신 벤자민 국왕은 현재 빈사 상태이십니다. 의식이 없어요. 육체만 살아있을 뿐.”
에스텔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빡였다. 그저 아주 천천히 이자크가 한 말을 따라 했다.
“빈사… 상태라고요? 육체만 살아있을 뿐이라고요? 그럼 현재 국왕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건가요?”
“예.”
“그럼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에스텔라는 당연히 아버지가 살아있을 줄 알았다. 당연히 정정하실 줄 알았다. 에스텔라는 메시앙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어렸을 적부터 차기 왕의 훈련을 받아왔다. 역사 정치 경제 학문 무엇하나 빠지지 않게.
벤자민 국왕은 ‘다음 왕은 너란다, 에스텔라.’라고 말하며 종종 그녀에게 자신의 왕관을 씌워주었고 자신의 기다란 왕홀을 쥐여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다음 왕은 무조건 자신이 되는 거다. 자신이 아직 공주의 신분이며, 왕궁이 아닌 곳에서 가정을 꾸렸다는 것은 에스텔라에게 있어 ‘아버지는 아직 매우 정정하심’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가 빈사 상태에 빠져 계시는데 자신이 왕위를 잇지 않고 이곳에 있단 말인가.
에스텔라의 물음에 이자크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에스텔라가 다시 한번 물었다.
“네? 어서 말해주세요.”
이자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스텔라는 답답함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현재 국왕은요?”
“리베르지 버트랜드입니다.”
“대부님이요? 그럼, 아버지는… 그러니까….”
“왕궁에서 치료 중이실 겁니다. 의식은 없으시지만.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까요.”
에스텔라는 얼른 시종을 불렀다.
“내일 아침 왕궁에 가야겠어.”
잔뜩 불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에스텔라가 말했다. 갑작스러웠으나 시종은 받들겠다며 얼른 방을 나섰다.
“…이자크. 왜 제가 여기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나요? 전 왕국의 후계자예요. 왜 제가 아닌 대부님이….”
“확신이 안 섭니다.”
“무슨 확신이요?”
“당신이 내 말을 믿어줄지에 대한.”
이자크는 그렇게 말하곤 한참 동안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뒤 이자크가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공주에게 몸 팔아 목숨을 구걸한 반역자라고 부릅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에스텔라가 당황스러운 듯 그를 올려다봤다.
“내 부모님은 선왕을 독살하려다 실패했다는 죄목으로 참수당했고, 여동생은 이국으로 보내졌으며 오직 나만 당신과 결혼하여 목숨을 연명하고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
“내 부모님은 무고해. 하지만 모든 정황이 내 부모님을 가리키고 있어요. 선왕은 빈사 상태고 언제 깨어날지 몰라. 누가 진범인지 아무도 모르고요.”
“….”
“어차피 내일 왕궁에 가면 모든 걸 듣게 되겠죠.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그 주제를 꺼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그럼 더더욱 말했어야죠. 기회야 언제든지 있었을 텐데요.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있었어요.”
에스텔라의 말끝이 떨려왔다. 그런 중대한 이야기는 어느 때든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봐요 에스텔라, 당신이 지금 나한테 들이댈 때가 아니에요. 당신 아버지는 빈사 상태고, 왕위는 당신의 대부님이 이었습니다. 그렇게라도 말할 수 있는 것 아니던가.
그녀의 말에 이자크의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겨우 입술을 뗐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매몰찬 말들이었다.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면 나 역시도 계속 모른 척할 수 있으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혼 같은 거 하지 않고 그냥 살 수 있겠지. 그게 당신한테도 좋은 거 아닌-”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자크의 뺨이 옆으로 돌아갔다.
에스텔라의 손이 빨갛게 부어 부들거린다. 손바닥이 아픈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
“내가 원하는 대로 이혼 같은 거 말고, 내 아버지의 죽음도 그대로 묻을 생각이었다, 그거예요?”
에스텔라의 목소리가 심히 떨렸다. 이자크는 몇 번이고 에스텔라에게 말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제 아버지는 다 죽어가는데, 딸이라고 하나 있는 건 이혼 당하기 싫다고 남편한테 알랑대기나 하는 꼴이!”
“….”
“내가 당신을 믿을지 확신이 안 서서 그랬다고요? 내가 오늘 묻지 않았더라면 대체 언제쯤 말하려 했던 거죠? 당신 부모님, 내 아버지, 반란, 처형-….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하지 않아요.”
“당신을 농락하려 말을 안 꺼냈던 게 아닙니다. 조금 전의 말은, 실수였습니다. 미안해요.”
“….”
“어쩌면 돌이킬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말 안 했습니다. 당신은 과거의… 내가 알던 당신이랑 다르니까. 이번엔 진짜로 당신이 했던 말을 지킬 수 있다-”
“….”
말을 하던 이자크는 잠시 숨을 들이쉬곤 동요하는 눈빛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보더니 이내 방을 나가버렸다.
에스텔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복잡한 관계들이 얽혀있었다.
‘그래서 아까 그 체스 백작 부부가…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저들끼리 눈치를 봤던 거였어. 그래서. 난 왜 이렇게 철이 없을까! 왜 진즉에 아버지의 안전부터 확인할 생각을 안 하고…!’
바보 같은 에스텔라! 멍청한 것! 철없고 불효막심한 것! 에스텔라는 자책하기 시작했다. 기다란 제 금발을 마구 헤집으며 잡아당겼다. 그러다 아린 손을 폈다. 손은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분명 맞은 이자크도 아팠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그와 자신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아까 이자크는 무슨 말을 하려다 간 걸까. 내가 했던 말을 지킬 수 있다고?
전 변경백이 정말 억울하게 반란의 음모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건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와 결혼했다는 건, 내가 그를 많이 사랑했다는 것 아닌가?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 아니, 애초에-’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인 건가?
에스텔라는 달이 한가운데 떴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들 수 없었다.
이자크는 그날 밤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었다.
에스텔라는 아침 식사도 거르고 왕궁에 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혹여나 쌍둥이들이 저들도 따라가고 싶다며 울까 봐 아침 일찍부터 준비했다.
“공주님, 괜찮으시겠어요?”
“…아버지 아직 살아계신 거잖아. 의식만 없으실 뿐. 딸 된 도리로서 찾아가야지. 그리고 대부님을 만나서 후계권에 대해서도 모두 알아야겠어.”
“…많이 충격받으실까 봐 좀 적응되시면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공주님. 이리 갑작스럽게 아시게 될 줄 알았으면… 죄송합니다.”
“유모 탓 아니야. 내가 다른 이의 탓을 한다고 하여 아버지가 눈을 뜨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자크 탓도 아니었다.
에스텔라는 밤 내내 돌아오지 않은 이자크를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그가 말하지 않은 건 어쩌면 자신을 배려한 걸 수도 있었을 테지. 그날 아버지의 안위조차 물어볼 생각을 못 한 자신이 너무 한심해져 괜히 이자크를 원망한 것도 있었다.
“쌍둥이들 깨기 전에 먼저 출발하는 게 좋겠지. 아니, 내가 없어도 되려나. 그리 좋은 엄마는 아니었던지라.”
에스텔라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자크는? 어젯밤 다른 방에서 잔 것 같은데.”
“별채의 방에서 주무셨다고 합니다.”
얼굴이 많이 붓지는 않았을까. 에스텔라는 너무 세게 뺨을 때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처지를 생각해보지도 않고 한 행동이다. 에스텔라는 후회했다.
‘좋아한다고 말만 그렇게 해놓고, 결국은 그의 말을 들어보려 하지도 않았어.’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숨기려 했다는 것에 화를 낸 건 후회하지 않았다. 그와의 문제는 단순히 외도나 권태기, 성격 차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주 근본적인 문제부터 꼬여있었던 관계였다.
“내가 화를 냈던 건 당연한 거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됐어.”
에스텔라가 중얼거렸다.
준비를 끝낸 에스텔라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양산으로 천장을 콩콩 치며 출발 신호를 보내려던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이자크?”
양복을 입은 이자크가 말없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같이 가죠.”
“왜요?”
“…그냥요.”
그의 입에서 꽤나 실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자크는 그렇게 말하더니 에스텔라의 맞은편에 앉고는 지팡이로 다시 천장을 툭툭 쳤다. 마부가 이랴, 하자 말들이 투레질하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동행이었다. 에스텔라는 어째서 이자크가 따라온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다시 한번 물었다.
“왜 따라온 거예요?”
“그냥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냥이라는 건 이유가 아니죠.”
“혹시나 해서.”
“네?”
에스텔라의 추궁에 결국 이자크는 고개를 창가로 홱 돌리며 진짜 이유를 실토했다.
“그냥, 걱정되어서요.”
“….”
“오해는 마세요. 내 아내 되는 사람이 왕궁에서 기절했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니까.”
그의 말에 에스텔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해하든 말든, 지금 이자크는 자신의 귀 끝이 새빨갛다는 건 알고 있을까? 분명 그 역시 어젯밤 일이 신경 쓰여서 이러는 것일 거다.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발갛게 부은 이자크의 왼뺨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미안해요.”
에스텔라가 먼저 사과했다.
“손이 먼저 나갈 줄 몰랐어요.”
괜히 제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에스텔라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어제 그리 잘한 것은 없었으니까.”
“얼음찜질은 했어요?”
“아뇨.”
“했어야죠. 잘생긴 얼굴이 부어서는….”
에스텔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자크의 부은 왼뺨에 잠시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볼에 닿기 전 혹시나 그가 불쾌해할까 싶어 얼른 손을 거두려 하자, 오히려 이자크가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 제 부은 뺨에 가져다 댔다.
당황한 에스텔라가 어, 어…. 하면서 손을 빼려 하자, 이자크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줘 빼지 못하게 했다.
이자크의 금안이 에스텔라를 물들인다. 그의 집요한 시선에 에스텔라는 어쩔 줄 모르다 결국 양 볼을 붉히고 말았다.
어른의 여유로움이란! 에스텔라는 이런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 안 변하는 이자크가 대단하기도, 야속하기도 했다. 이 사람은 그저 당황하는 자신의 모습이 꼴사나워 웃긴 것이다.
이자크가 픽 웃으며 말했다.
“손이 차갑네요. 에스텔라.”
“원래 좀… 손발이 차요.”
“알고 있었습니다. 루시는 당신을 닮았거든요.”
에스텔라는 그와 한참 동안 눈을 마주쳤다.
“이자크. 어제 당신이 했던 말들이 모두 사실인가요?”
“예.”
“당신의 부모님은 내 아버지를 독살하려던 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는 거, 확실한가요? 이자크의 여동생이라면, 엘리나 맞죠?”
“맞습니다.”
“예전의 나는 당신을 믿지 않았었나요? 그래서 사이가 틀어진 건가요? 아니면 제가 당신이 말한 것처럼 살려주는 대가로 결혼한 건가요?”
“아뇨.”
이자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한참 동안 상념에 잠긴 것 같았다. 에스텔라는 그가 말을 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진 않았습니다.”
그가 드디어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릴리 버트랜드와 결혼하지 않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 거냐. 그건 바로 릴리 버트랜드와 결혼한 지 이 주일이 될 때쯤 디에스 가문의 모든 이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죄목은 국왕의 독살 시도, 역모, 반란, 탈세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했다.
왕이 쓰러지던 날, 디에스 변경백은 국왕과 국경선 문제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단둘이서. 단둘이서라는 것은 디에스 변경백이 모든 죄목을 뒤집어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집무실을 드나들던 시종들도 어찌 된 일인지 그 시각엔 모두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다들 하나같이 ‘변경백께서 극비 사항이니 모두 물리시라고 하였습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변경백의 시종 옷에서 정체 모를 약병이 발견되었고, 그날따라 국왕과 변경백의 언쟁이 있었다. 게다가 변경백과 자리를 주선했던 그의 가장 친한 친우 버트랜드 대공은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다. 그 누구도 변경백의 무고를 입증해줄 만한 이는 없었다.
모든 정황이 변경백을 가리켰다. 재판이 열려 유죄가 선고되고 처형이 되기까지 딱 사흘이 걸렸다. 변경백의 반역, 국왕의 상태 위독 등의 문구들이 적힌 벽보가 건물마다 빼곡히 붙었다.
이자크는 곧장 항소를 준비했고,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도 않은 채 수사 종결을 통보받은 것에 대해 항의했다. 하지만 묵살당했다.
“릴리 버트랜드 양과는 곧바로 이혼했습니다. 당연한 결과였죠. 버트랜드 대공 역시 몇 번이고 수사를 도우려 했으나 이상하게 사법부에서는 일을 급히 마무리 지었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버트랜드 대공 역시 도움을 청하는 것에 난색을 보였다.
당연한 일일 거다. 지금 변경백 가문과 친분 있던 모든 가문이 몸을 사리는 판국에 누가 나서서 도와줄까. 그렇게 디에스 가문은 몰락해가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나타난 게 당신입니다. 에스텔라.”
에스텔라는 자신의 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다는 가문의 장남에게 먼저 만남을 제안했다. 열아홉 살의 에스텔라는 자신 역시 변경백 사건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으며, 자신과 함께 재수사를 해보자고.
당시 메시앙에서는 반역을 저지른 가문의 모든 이들을 처형하는 것이 법이었다.
변경백이 처형당한 뒤, 이자크 역시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 에스텔라는 그에게 자신과 결혼하여 성을 바꾸라고 제안했다.
‘가문의 성을 버리고 내 성을 따르세요. 난 공주고 내게 사법 권한도 적잖이 있으니 당신과 엘리나는 지킬 수 있을 거예요.’
몰락당한 가문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바로 자신의 성을 버리고 배우자의 권력에 기대는 것이었다.
에스텔라는 유일한 후계자이자 공주로서 권한이 높았다. 그렇게 이자크는 자신의 성을 버렸다. 가문의 성 따위 생명보다 중요할까.
이후 그는 에스텔라와 함께 부모님의 무고함을 밝혀내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다. 정확히는, 시작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당신이 수사를 종결시켰더라고요.”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의 눈이 커졌다.
“수사는 종결되었고, 부모님은 그렇게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수사를 종결시켰다고요?”
“저한테 말도 없이.”
“….”
“그리고 엘리나는 외국으로 보내졌습니다. 엘리나는 아버지의 무고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애였거든요. 어디로 보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결국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모든 걸 알았을 때가, 당신이 루스와 루시를 가졌을 때입니다. 그 이후부터 사이가 틀어졌죠.”
“…저는.”
“지금 당신은 열아홉의 에스텔라라니까 원망하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세요.”
이자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에스텔라는 더 이상의 할 말을 잃어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도 역시 사과하고 싶어요. 저, 이번에는 절대로 당신을 속이거나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에스텔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걸 어찌 믿어주겠어, 하며 자책했다. 아마 이자크는 분명 코웃음 치거나, 질린다는 듯 반응도 보이지 않겠지….
“이번에는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의 말에 에스텔라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이자크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