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상에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것만큼 잔인한 짓은 없다.
어쩌면, 혹시나, 하는 그런 마음들은 사람을 순식간에 하늘 꼭대기로 올렸다가 저 땅속 깊은 곳으로 처박는다.
그런 마음 중 가장 타격이 심한 것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서도 하나 꼽자면, 외사랑이겠지.
“어엉, 엉엉엉 흐어어엉…!”
“공, 공주님… 제발 울지 마셔요… 네?”
여기 베개를 쥐어뜯듯 잡아당기며 얼굴을 파묻고 우는 그녀는 에스텔라 데 리에프 메시앙. 국왕의 유일한 자식이자 메시앙 왕국의 유일한 공주.
왕비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게 애쓴 왕의 극진한 애정과 백성들의 사랑 덕에 철이 없을 수밖에 없는 공주.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은 손에 넣었고, 천하가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모든 걸 다 가진 그녀가 무엇이 그리 서러워 이리도 울고 있는가.
에스텔라가 이렇게 곡소리를 내는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오늘로 그녀의 5년간 불타는 짝사랑이 끝이 나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대방의 결혼으로 인해.
13살, 학술원 연회에서 처음 만난 변경백의 후계자 이자크 몬 디에스. 수려한 외모와 길쭉한 키, 안기고 싶은 넓은 어깨와 다정한 목소리까지. 이자크는 만인의 이상형이었다.
그를 처음 본 날, 에스텔라는 정말로 운명적인 뭔가를 느꼈다고 시녀들에게 말했다.
“이자크를 본 순간 맑은 하늘에 벼락이 내려와 내 정수리를 통과했다니까?”
“에이, 공주님. 너무 나가셨다.”
“아이, 진짜라니까! 진짜래도!”
이자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스펠라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뛰다 못해 입으로 나올 거 같았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얼핏 장미향이 났던 것 같기도 하고.
등줄기부터 오싹하게 뭔가가 훑고 지나간 느낌에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13살의 그날부터 에스텔라는 이자크를 열렬히 짝사랑하게 된다. 어린애의 가벼운 사랑이라고 치부하기엔 에스텔라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스스로도 그 마음이 무거워 어쩌질 못했다.
그가 간다는 연회마다 꼭 참석하고, 학술원에 다니는 그를 보러 관심도 없던 과목을 듣고,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는 등. 부끄러움을 곧잘 타는 어린 나이의 그녀가 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을 다 했다. 어쩌다 이자크와 대화를 하게 되면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공주는 항상 그와의 미래를 상상했더랬다. 토끼 같은 아이들, 행복한 부부! 로맨틱한 결혼생활!
짝사랑을 시작한 지 1년, 에스텔라가 국왕 벤자민을 찾아가 한 말은 새해 인사도 아닌 결혼 허락이었다.
“아버지! 저 변경백의 후계자와 결혼하고 싶어요.”
사랑하는 딸이 이렇게 애타게 말하는데, 안 들어주고 배기겠어? 하는 심정으로 에스텔라는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저 완전히 사랑에 빠졌어요. 네?”
“…에스텔라야, 설마 이자크를 말하는 것이냐.”
“당연하죠! 그 말고 또 누가 있나요?”
국왕 벤자민은 곤란한 듯 끙, 소리를 내며 제 수염을 쓸어내렸다. 이 녀석이 제 엄마를 닮아 보는 눈은 높아가지고, 하며 중얼거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우리 에스텔라.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구나.”
“왜요? 네? 왜요?!”
“그는 이미 버트랜드 대공의 장녀와 약혼을 치렀어.”
콰과광! 에스텔라는 천둥이 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날씨는 여전히 맑다 못해 화창했다. 그제야 그 천둥소리가 자신에게만 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실연의 충격이라는 건가.
15살. 에스텔라는 짝사랑 상대가 사촌 언니의 약혼자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앓아눕고 만다.
하나뿐인 딸이 앓아눕자 국왕 벤자민은 온갖 의사들을 불러다 진찰을 시켰지만 오는 대답은 하나같았다. 마음의 병이란다. 그 많고 많은 병 중에 하필 상사병이라니. 시름시름 말라가는 꽃처럼 에스텔라는 병들어갔다.
에스텔라는 유일한 자식인 만큼 국왕 벤자민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사랑하던 왕비와의 사이에서 난 유일한 자식 아니던가. 사별한 왕비를 똑닮은 에스텔라. 국왕은 제 딸에게 약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국왕은 버트랜드 대공을 불러들인다.
“버트랜드,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하하, 버트랜드. 잘 지냈는가. 말 편히 하게나.”
“형님께서 오랜만에 불러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아, 그것이 말이지. 알다시피 우리 에스텔라가 지금 앓아누웠지 않느냐.”
“예. 소식 들었습니다. 공주님께서 원인 모를 병에 걸리셨다고, 혹, 이국의 약재라도 제가 찾아볼까요?”
국왕은 그럴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어디 말하기 창피하여 원인 모를 병이라 둘러댄 것일 뿐, 사실 에스텔라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내 자네한테 부끄러운 부탁 하나만 하고 싶네.”
“무엇인데요?”
“사실, 에스텔라가… 이자크를 너무 좋아하네. 그런데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상사병에 걸린 거야.”
“아이구….”
“내, 약혼을 무르라는 파렴치한 말은 하지 않겠네. 다만 결혼식은 몇 년 만이라도 미뤄줄 수 있겠는가? 그사이 내 우리 에스텔라를 잘 달래 다른 남자라도 소개시켜줄 테니까.”
“아이고, 걱정 마십시오, 형님. 원래 결혼식도 둘 다 성인식을 치른 이후에 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보다 공주님께서 편찮으신 게 더 걱정입니다.”
“고맙네.”
국왕은 미안한 얼굴로 부탁했다. 버트랜드 대공은 전혀 미안해하지 말라며, 그리하겠다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방에 콕 박혀 침대에서의 생활만 하던 에스텔라. 그녀를 찾아간 국왕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에스텔라야. 좋은 소식이 있단다.”
“뭔데요….”
“이자크의 결혼식이 미뤄졌다는구나.”
“…정말요? 왜요?”
병든 닭처럼 골골대던 에스텔라의 눈이 반짝였다. 국왕은 거짓말 조금 더 보태 말을 이었다.
“글쎄. 불화가 이유일 수도 있겠지.”
“그럼, 두 사람의 관계가 약혼에서 그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겠지.”
“와!”
15살의 에스텔라는 그렇게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헛된 희망이라는 건 유감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그날 이후부터 평소의 에스텔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가 16살이 되던 해, 이자크는 전쟁터로 출정한다. 에스텔라는 그때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에스텔라는 매일 밤 정수를 떠다가 온갖 신들에게 기도를 올렸다. 정작 약혼녀인 릴리 버트랜드는 한가롭게 쇼핑하며 연회를 즐기는데 말이다.
에스텔라가 18살이 되었을 때, 변경백의 후계자답게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이자크의 모습에 에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연회에서 그에게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한 축하의 말을 건넸고, 이자크는 감사하다며 에스텔라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정작 약혼녀인 릴리는 다른 영식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술을 마셨고 이자크는 그런 릴리를 잠깐 쳐다보더니 다시 에스텔라와 대화를 이어갔다.
어쩌면 불화설이 진실인 걸까. 성인식을 치르고도 결혼하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에스텔라의 희망이 불처럼 타올랐다.
“그렇게 희망을 가졌는데, 결국 릴리 언니랑 결혼이라니이!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였어?! 흐엉어어엉! 말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하지만 이자크는 야속하게도,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그해에 릴리 버트랜드에게 청혼을 했다. 릴리 버트랜드는 당연히 청혼을 받아들였고, 내일이 바로 그 결혼식이다.
그리고 결국 내일은 오고 말았다.
결혼식이 열리는 곳은 변경백의 거대한 성이었다.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부부의 서약을 읊는다. 이자크는 다정한 얼굴로 릴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에스텔라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결혼식장에 가면 펑펑 눈물을 흘리며 온갖 추태를 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한 느낌이다.
하지만 너무 울어서 탈수라도 온 걸까. 에스텔라는 머리가 지끈대는 것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윽… 토할 거 같아. 빈속이라 그런가…?’
구역질이 올라오는 통에 에스텔라는 슬며시 자리에서 내려와 식장을 벗어났다. 식이 끝날 때까지 저택의 주변을 맴돌던 에스텔라는 성 옆에 있는 거대한 연못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스텔라는 가만히 조약돌을 집어 호수에 던지며 시간을 보냈다. 악단의 연주가 시작된 것을 보니 식이 끝나가는 것 같다. 에스텔라는 미소 지으며 축하의 말을 보내는 연습을 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텔라, 시간을 되돌려!]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깜짝 놀란 에스텔라가 주변을 두리번댔지만, 사람은 없었다. 그때 연못 안에서 퐁, 하며 공기 방울이 올라왔다.
“뭐지?”
다시 퐁, 퐁, 하더니 이내 누군가 안에 있는 것인지 첨벙대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 많은 에스텔라는 자신도 모르게 연못 근처로 몸을 기울였다. 물 안에서 뭔가가 보인다. 얼핏 사람의 인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어, 어어?!”
그와 동시에 무게 중심을 잃은 그녀가 비틀거리다가 안으로 빠졌다.
풍덩!
에스텔라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애초에 수영 따위 배울 일도 없었다. 왜 아까 따라오려던 호위기사를 물렸을까. 허우적대며 사람 살려! 소리를 쳤지만 아마 그녀의 외침은 악단의 음악 소리에 가려질 것이 분명했다.
‘아, 짝사랑 상대의 결혼식장에서 죽다니. 이 무슨….’
개죽음이란 말인가. 에스텔라는 그렇게 차가운 물 밑으로 점점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
“헉!”
에스텔라는 눈을 번쩍 뜨며 숨을 들이마셨다. 막혔던 숨이 탁 트인다.
살았나? 눈을 뜨자마자 에스텔라가 생각한 것은, 나 살아있나? 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공주님!”
“유모?”
유모가 변경백의 성에 올 리는 없을 터. 설마 왕궁으로 실려 온 걸까. 자신을 연못에서 건져낸 이는 누구인가. 에스텔라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유모를 쳐다봤다. 유모는 에스텔라의 손을 잡고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세상에, 이 유모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아이고오! 어찌 연못에 뛰어드신답니까!”
“뭐? 자살하려 한 거 아니야…. 음? 유모, 잠깐 나 좀 봐.”
에스텔라는 눈물을 닦아내던 유모의 얼굴을 붙들었다. 뭔가 이상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왜 이렇게 폭삭 늙었어?”
적어도 한 10년은 늙어진 것 같은데? 주름은 더 깊어졌고, 목소리도 더 할머니 같아졌어. 라는 에스텔라의 말에 유모가 발끈하며 말했다.
“예? 에잇, 공주님께서 하도 속을 썩이시니까요!”
그렇다 쳐도 이렇게 며칠 만에 폭삭 늙는단 말인가. 에스텔라는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기 시작한 유모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시감에 에스텔라는 주변을 둘러봤다.
자세히 보니 여긴 그녀의 방이 아니었다. 화려한 벽지나 레이스 줄줄 달린 캐노피가 아닌, 보기만 해도 칙칙한 팥죽 색의 단색 벽지로 이뤄진 최소한의 가구만 남아있는, 정말로 단조로운 방이었다.
“여기 어디야? 왕궁에 이런 방이 있었니?”
“예?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여기는….”
유모가 말을 하려던 찰나,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다다 발소리가 들렸다. 침대 매트리스 위로 빼꼼 보이는 작은 머리통 두 개. 저게 뭔가 싶어 에스텔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작은 꼬맹이 둘이 꼬물대며 침대 위에 올라오더니 그녀의 품으로 돌진했다.
“억!”
그녀에게 달려든 두 꼬맹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마망!”
“마망?”
에스텔라가 제 귀를 의심하며 꼬맹이들의 말을 반복했다. 어눌한 혀와 조그마한 입술로 오물쪼물 말하는 이 꼬맹이들은 에스텔라의 품속에 제 얼굴을 비비적대며 말했다.
“마망! 이제 아야 안 해, 응?”
“얘, 얘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마망이라는-“
꼬물꼬물 제 몸을 마치 등산이라도 해댈 기세로 올라오는 어린 것들의 모습에 에스텔라는 기겁했다. 아니, 뉘 집 자식이길래 이렇게 외간 여자의 몸에 올라타?
분명 버르장머리 없고 장난기 많기로 소문난 뒤르엔 백작 가문의 애들이겠지! 이것들이 감히 공주님도 못알아보다니. 하며 얼른 아이들을 떼어내며 얼굴을 확인했다.
“…뒤르엔 애들이 아니잖아? 너희 누구니?”
“마망?”
하지만 자신이 아는 그 천덕꾸러기들이 아니었다.
뉘 집 자식들이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잘생겼나.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볼때기를 저도 모르게 주물럭대던 에스텔라가 얼른 정신을 차리며 꼬맹이들에게 엄한 척 한소리 했다.
“나 너희 엄마 아니야. 마망은 무슨. 결혼도 안 한 공주에게 예의도 없지! 얼른 너희 엄마한테 가.”
“웅…? 마망…?”
이제 한 네다섯 살 된 듯한 애들은 에스텔라의 고성에 놀란 건지 커다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더니 이내 입술을 삐죽대며 후에엥,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공주님, 왜 그러셔요! 네?”
옆에 있던 유모는 방관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그러냐며 한소리 한다. 에스텔라는 억울함에 다시 한번 제 품으로 기어들어 오는 꼬맹이들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뭔가 낯이 익다. 묘하게 자신을 닮은 듯도 하고, 또 묘하게….
‘어디서 이 얼굴 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
어디선가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제 자식도 꼴 보기 싫다는 겁니까? 루스, 루시. 아빠한테 이리 오렴.”
한껏 빈정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목소리만큼이나 날 선 시선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양팔을 벌리며 아빠에게 오라고 하는 말에, 아이들은 에스텔라의 품을 벗어나더니 그의 품으로 가 안겼다. 에스텔라는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부인. 마치 못 볼 사람이라도 본 표정입니다.”
아이들의 아빠라고 하더니 이제는 자신에게 부인이라고 말하는 남자는,
“…이자크?”
에스텔라가 열렬히 짝사랑했던, 그럼에도 릴리 버트랜드와 결혼식을 올렸던, 그 이자크 몬 디에스였다.
에스텔라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얼른 머리를 굴렸다.
폭삭 늙어버린 유모, 처음 보는 장소, 마망이라 부르며 안겨 오는 두 꼬맹이, 아빠, 제 자식, 부인 등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이자크.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왜 당신이 여기에, 아니, 여긴 대체 어디….”
혼란스러워하는 에스텔라를 보며 이자크가 이상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빛은 마치 이 여자가 미쳤나, 왜 이래?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여기 어디예요?! 왜, 왜 당신이 나보고 부인이라고, 아니. 릴리 언니는 어쩌고?!”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아 에스텔라가 말을 버벅댔다.
분명 릴리 언니랑 결혼하는 것을 두 눈 똑똑히 새기고 왔다. 그런데 왜 나보고 부인이래? 이 꼬맹이들은 뭐고? 왜 얘들보고 아빠라고 하는 건데? 에스텔라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이자크를 쳐다봤다.
그러나 이자크는 예전의 그 다정한 눈웃음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하게 에스텔라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유모에게 말했다.
“의사를 다시 불러오거라. 부인의 상태가 매우 이상하니. 아무래도 연못에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것 같군.”
에스텔라는 연못에 빠져 허우적대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다급한 나머지 이자크에게 삿대질까지 해가며 에스텔라가 말했다.
“그래, 그 연못! 그 연못! 내가 당신 결혼식 때 빠졌는데-! …잠깐만. 이거 지금 질 나쁜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요? 릴리 언니? 언니가 장난치는 거지?”
평소 장난기 많던 릴리 버트랜드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릴리 언니는 곧잘 어린 에스텔라에게 장난치고 그녀를 속이길 좋아했으니까.
“이거 장난이죠? 재미없어요.”
에스텔라의 말에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던 이자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유모. 빨리 가서 의사 불러와.”
“예, 예!”
유모 역시 얼굴이 파랗게 질려 후다닥 방을 나갔다.
이자크 품에 있던 어린아이들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아빠에게 물었다.
“파파, 마망 머리 아야해?”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에스텔라는 환자 취급에 어이가 없어 따지려다가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이자크를 쳐다봤다.
오, 맙소사. 완전히 빼다 박았잖아. 두 아이의 머리칼은 에스텔라의 빛나는 백금발과 똑같았다.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며 에스텔라를 쳐다보는 여자아이는 누가 봐도 에스텔라를 닮아 고양이 같은 눈매와 비슷한 위치에 점까지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남자애는 누가 봐도 이자크의 축소판처럼 진한 이목구비를 가진 채 울먹이는 눈동자로 이자크에게 안겨있었다.
‘누가 봐도 나랑 이자크의 자식 같은데.’
에스텔라는 멍하니 셋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는 이자크와 뜨겁고 야한 밤을 보낸 기억이 없다. 한참을 멍하니 고민하던 에스텔라는 불쑥 협탁 옆에 놓인 거울을 들어 올렸다.
“세상에.”
19살의 에스텔라는 온데간데없고 잔뜩 성숙한 여인만이 눈앞에 있다. 매일 밤 거울 앞에 서서 20대가 되면 이런 모습일 거야, 생각하던 것과 딱 맞아떨어졌다.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에스텔라가 제 얼굴과 머리칼은 물론 몸 이곳저곳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던 이자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에스텔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이자크에게 물었다.
“지금이 몇 년도죠?”
“…오르고력 650년입니다만.”
“이런 미친, 신이시여. 맙소사,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돼!”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입에서는 온갖 현실 부정하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오르고력 650년? 에스텔라의 마지막 기억은 오르고력 643년 5월 17일에 열린 이자크와 릴리의 결혼식이다. 날짜까지 똑똑히 기억한다. 5월의 신부라고, 어쩜 그렇게 자신의 환상을 모두 다 재현하냐고 침대에서 펑펑 울지 않았나.
7년이다. 무려 7년 뒤의 미래에 도착한 거다.
에스텔라가 별다른 말 없이 ‘세상에, 신이시여.’만을 반복하자 이자크의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이 점점 더 짙어졌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모가 주치의를 데리고 돌아왔다.
*
주치의는 에스텔라에게 이것저것 질문했다. 그러더니 두꺼운 안경을 치켜올리며 소견을 말했다.
“기억상실입니다. 19살 이전의 일들은 기억하시는데 그 이후의 일들은 하나도 기억 못 하시는 것을 보면 부분 기억상실 같습니다.”
유모의 입이 떡 벌어졌고, 에스텔라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이자크는 예상했다는 듯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연못에 빠지셨을 때 정신적 충격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그 외의 다른 외상은 없는 듯하지만 아마 종종 두통과 함께 사라졌던 기억들이 조각조각 떠오르실 겁니다. 일단, 지금은 혼란스러우실 테니 안정제를 드리죠.”
주치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에스텔라에게는 별것 아닌 게 아니었다. 기억상실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무려 7년간의 기억이 이렇게 까맣게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에스텔라는 충격받은 얼굴로 이자크를 쳐다봤다.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내려다보다 시선을 돌리며 주치의에게 물었다.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영영 안 돌아오면 뭐… 영원히 기억 못 하시는 거겠죠. 생명에는 일단 지장이 없는 데다 몇 년이 걸려도 대개 돌아오니 너무 심려 마시지요, 이자크 님. 공주님께서도 무리하게 기억하려 하시지 마시고, 마음 편히 가지세요.”
주치의는 그렇게 말하며 유모와 함께 방을 나갔다.
방에는 에스텔라와 이자크, 그리고 그의 품에 안긴 두 아이만이 있었다. 에스텔라가 복잡한 표정으로 이자크와 아이들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그러니까, 저 아이들이 당신과 나 사이에서 난 아이들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쌍둥이를요?”
“네.”
“그럼 여기는-”
“제 성입니다.”
“변경백의 성? …그럼 우린 결혼한 거겠군요.”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와우.”
에스텔라는 아주 짧고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자크와 결혼을 하고, 쌍둥이까지 낳은 거지? 7년 후의 나, 무지 끝내주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얼굴에 미묘하게 홍조가 뜨기 시작했다.
7년 후의 이자크는 7년 전의 이자크보다 더 잘생기고 체격이 커지고 근육도 붙고 성숙해져 퇴폐미까지 좔좔 흐른다. 위태로우면서도 듬직해 보이는, 완벽한 자신의 이상형이 된 이자크가 남편이라니!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상황인가. 7년간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보다, 지금 당장은 그토록 사랑하던 이자크와의 결혼을 이뤄냈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신기했다.
“와우?”
이자크는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감탄사가 나오냐는 듯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아니, 전혀 예상 못 했던 일들이라서요. 호호. 세상에 제가 이자크랑 결혼을 하다니. 완전 땡 잡았, 아, 아니. 호호호….”
에스텔라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속으로는 쾌재를 몇 번이고 불렀다. 이자크와 결혼이라니! 이자크와 결혼해서 쌍둥이라니!
당장이라도 침대 위에서 환희의 춤을 추고 싶었던 에스텔라는, 생각 외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이자크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정말로 기억 잃은 것 맞습니까?”
“네?”
“정말로 기억 잃은 거 맞냐고요.”
이자크의 낮은 목소리에 쌍둥이 아이들은 우웅, 하며 몸을 버둥댔다. 이자크는 아이들을 내려준 뒤 작은 손들을 꼭 쥔 채로 물었다.
“일부러 연극이라도 하는 건 아니고요? 날 놀리려고 하는.”
“그게 무슨 소리죠?”
에스텔라는 당황했다. 이상하다. 그녀가 아는 이자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조곤조곤 다정하게 말하던 이 아니었나.
하지만 지금의 이자크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부터 냉정하기 그지없다. 에스텔라는 뭔가 이상함을 느껴 다시 한번 물었다. 저 원망의 눈빛은 또 뭐지? 마치 원수를 대하는 듯한 그의 눈빛은 뭐냔 말이다.
그러자 이자크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냉소적인 미소였다. 한껏 비꼬는 듯한 그런 미소.
“그대는 이런 식으로 사람 갖고 노는 거 잘하잖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차갑게 굴던 사람이,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 나와의 결혼이 땡잡은 일이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에스텔라는 어쩐지 기가 죽어 그의 눈치를 가만히 살폈다. 열아홉 살의 에스텔라에겐 지금의 이자크는 너무 낯설었다. 이게 지금 그렇게 화를 낼 만한 상황인가?
“…의사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제가 왜 사람을 갖고 논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아무래도 저한테 뭔가 화가 난 듯싶은데, 부부 싸움이야 칼로 물 베기라고, 서로 맞춰주면서 사는 거죠. 제가 차갑게 굴다뇨? 전 지금도 이자크 보니까 심장이 엄청 쿵쾅대는데.”
에스텔라가 슬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열아홉 에스텔라. 이자크에 대한 사랑이 최고 정점이던 때. 이미 상대방은 다른 여자와 결혼까지 했는데도 야속한 마음은 그에 대한 사랑을 삭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타올랐다.
첫사랑. 덜 여물었을 시기의 아련한 사랑. 이성에 대해 눈을 떴을 때부터 에스텔라는 오로지 그밖에 보지 않았었다.
그런 남자가 지금 남편이라는데, 세상 어떤 여자가 기쁘지 않을까.
하지만 이자크는 그런 에스텔라를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우린 지금 이혼 숙려 기간입니다.”
“…에…?”
에스텔라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에서는 그의 말을 정리하기 위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엄마와 아빠의 기류가 이상하다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쌍둥이들이 이자크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힝, 울기 시작했다. 이자크는 다시 아이들을 안아 든 뒤 말했다.
“일단은 쉬십시오. 무슨 일 때문에 연못에 빠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혼 숙려 기간이 끝나면 애들 데리고 눈앞에서 사라질 테니 너무 노엽게 여기지 마시고요.”
“…어, 어어….”
당황스러워 말도 안 나오던 찰나, 이자크가 문을 나서며 결정타를 보냈다.
“참,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연못의 수심은 허벅지쯤도 안 된다는 거.”
심지어 연못 아래에는 고운 모래뿐이죠. 한껏 비웃으며 나가는 그의 얼굴에 에스텔라의 귀에서는 쩌저적, 하고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돌처럼 굳은 에스텔라는 한동안 그가 나간 자리만 바라봤다.
*
에스텔라는 조금 전 폭풍처럼 휘몰아친 모든 상황에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짝사랑과 은혜로운 결혼생활은 개뿔, 이혼 숙려 기간이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이게 뭔… 무슨, 황당한…!”
아무리 이자크를 열렬히 사랑한다지만, 에스텔라는 그의 설명 없는 이런 무례한 행동들도 그냥 넘어가 줄 만큼 유한 성격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지금 한 나라의 공주에게 이 무슨 무례한 언행인가! 하며 모든 일을 따져 들어야 하는데,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긴 처음이네.”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겠다. 에스텔라가 얼른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자신의 양 뺨을 쫙, 내리쳤다. 정신 차리자는 의미였다.
에스텔라는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선가 자신은 기억을 잃었고, 하필 19살 기억 이후의 일들은 모두 잊은 상태. 사라진 7년의 세월 동안 이자크와 결혼하고, 같이 밤도 보냈으니 쌍둥이를 낳았을 테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가 다정한 이자크는 사라졌고 마치 원수 보듯이 자신을 대하며, 심지어는 이혼 신청까지 하여 숙려 기간 중이라는 것.
“큰일이네.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는데.”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기억하려 해도, 19살 이자크와 릴리 버트랜드와의 결혼식 말고는 그 이후의 기억이 없다. 반면에 이전의 기억들은 아주 생생하다. 7년 전의 기억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하다.
전날 아버지와 했던 대화들, 버트랜드 대공의 위로, 시녀들이 소개해주던 영식들과 다른 나라의 왕자들. 기억상실보다는 오히려 19살의 에스텔라가 시간을 건너뛰었다는 게 더 그럴싸할 정도로 과거의 기억들은 생생했다.
“잠깐, 그럼 릴리 언니와의 결혼은 어떻게 된 거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자크를 불러 어쩌다 결혼을 한 거고 왜 이혼 신청을 한 건지 묻고 싶었지만,
‘나도 눈치라는 게 있지. 누가 봐도 원망하는 눈빛으로 날 보는데….’
차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이자크는 매몰찼다.
“하, 진짜 이게 무슨 일이야.”
결혼생활을 만끽해보기도 전에 이혼 숙려 기간이라니. 이건 너무 억울한 거 아닌가.
하다못해 쌍둥이들이 태어난 그 경위마저 기억하지 못한다고!
에스텔라는 유모를 불렀다.
유모는 이미 문밖에서 이자크와 에스텔라의 단절된 대화를 들은 것인지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문을 열면서부터 제 눈치를 보는 유모에게 에스텔라가 물었다.
“우선… 내가 어쩌다 기절을 했다고?”
“공주님께서 연못에 뛰어들으셨답니다. 그걸 본 시종이 얼른 뛰어가 건져내긴 했는데, 기절하신 후였다고….”
에스텔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이자크의 결혼식에서 물에 빠진 게 마지막 기억이긴 했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전혀 달랐다. 결혼식 악단 소리에 비명은 묻히고, 막혀오는 숨에 북받치는 서러움… 그러다 문득 생각난 어떤 목소리.
[에스텔라, 시간을 되돌려!]
에스텔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주님? 갑자기 움직이시다 다쳐요!”
“아무래도 그 연못을 한번 가봐야겠다.”
파자마를 입은 상태로 넓은 변경백의 저택을 다니니 지나가던 시종들이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에스텔라에게는 제 옷차림을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뒤에서는 유모가 숄이라도 걸치라며 쫓아왔지만, 에스텔라의 다리가 더 빨리 연못에 도착했다. 에스텔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공주님! 왜 이러세요, 정말! 얼른 나오세요!”
“…이자크의 말이 맞았어. 정말 허벅지쯤도 안 오잖아?”
그녀가 기절한 사이 연못을 메꾸지 않은 이상 에스텔라가 이곳에 빠져 허우적대는 건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연못을 나오자마자 유모는 얼른 에스텔라에게 숄을 걸쳐줬다.
“갑자기 뭘 확인하시는 거예요, 네?”
“나도 내가 뭘 확인하려는지 모르겠어.”
입 밖에 내봤자 아무도 안 믿을 것 아닌가.
에스텔라는 곧장 이자크를 찾아갔다.
이 커다란 저택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시종들을 붙잡고 물어물어 가야 했다.
“부군께서는 지금쯤 아가씨와 도련님과 함께 계실 텐데요?”
“그러니까 거기가 어딘데?”
“예…?”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시종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자 에스텔라의 뒤에 있던 유모가 얼른 끼어들며 말했다.
“이자크 님께서는 온실에서 계시겠죠? 공주님.”
“온실? 그럼 온실로 가자, 유모!”
에스텔라는 유모에게 앞장서라는 듯 검지를 들며 비장하게 말했다.
온실로 가는 길에, 에스텔라는 유모에게 은밀한 질문을 했다.
“저기, 유모. 유모도 들었다시피 나 지금 19살 이후의 기억이 싹 사라졌잖아, 그치?”
“예… 예, 그렇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방 기억이 돌아올 거예요!”
“아니, 돌아오고 나발이고,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어.”
“네? 뭔데요?”
“유모. 아까 그 쌍둥이들 진짜 내가 낳은 거야? 나 정말로 이자크와 결혼한 거고?”
“아… 음… 네, 그럼요!”
“그런데 이혼 숙려 기간은 뭐야, 응?”
곤란한 질문에 유모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주님, 이 유모는 부부 사이에 간섭할 권리가 없답니다. 궁금하시면 직접 이자크 님께 물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직접 물어보라니, 유모. 아까 나 보던 눈빛 못 봤어?”
완전히 잡아먹을 기세잖아.
물론 그 잡아먹을 기세라는 건 야한 뜻으로서가 아닌, 진짜 잡아 죽일 기세라는 뜻이었다.
에스텔라의 말에 유모가 얼른 에스텔라와 마주치던 시선을 돌렸다. 모른 척하기는! 에스텔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하! 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나도 눈치라는 게 있지… 그런 눈으로 날 보는데 어떻게 다시 물어봐… 하아….”
그렇게 한탄을 했지만, 에스텔라는 유모에게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부부 관련된 질문을 해댈 때마다 유모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모를 리가 없지 않나! 에스텔라가 갓난쟁이 때부터 키워왔으면서, 게다가 결혼 후에는 그 자식들까지 맡아 키우는 유모가 아무것도 모를 리 없지.
하지만 유모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공주님, 그 문제는 공주님께서 이자크 님께 직접 물어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냥 도와주면 안 돼?”
“안 돼요.”
그러는 사이 에스텔라는 어느새 온실에 도착했다.
유모는 조심스레 온실 문을 두드렸다.
“이자크 님, 공주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들어오시라 해.”
이자크의 말에 에스텔라가 안으로 들어갔다. 유모는 문을 닫으며 말했다.
“아무쪼록 편안한 대화 해보세요, 공주님.”
“…가능한 거야, 그거?”
유모는 힘내라며 양손의 주먹을 불끈 쥐곤 들어 올렸다. 에스텔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따라 주먹을 쥐어 올렸다.
녹음 가득한 온실 안으로 더 들어가니 쌍둥이들과 돗자리를 펴고 놀아주고 있는 이자크를 발견했다. 포동포동한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한답시고 건네는 것들을 맛있게 받아먹는 척하던 이자크는 에스텔라를 보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혼란스러우실 텐데, 더 쉬지 않으시고요.”
그 말은 얌전히 누워나 있을 것이지 왜 나다니고 난리야, 라는 말처럼 들렸다. 에스텔라는 억울한 마음에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혼란스러우니 더더욱 쉴 수 없죠.”
“근심하셔봤자 당장 기억이 돌아오지는 않을 겁니다.”
“돌아오지 않아도 사라진 기억은 알아야죠.”
이자크는 묘한 눈으로 에스텔라를 바라봤다. 슬퍼 보이고 실망한 눈이다.
“조금 전에 내가 빠졌다는 연못을 갔다 왔어요. 확실히 얕더군요. 혹시 전부터도 그 깊이였나요? 그러니까… 10년 전쯤에도?”
“그렇습니다만.”
“메꾼 적이 없다는 말이죠? 그럼 하나 더 물어볼게요. 이자크, 당신 원래 제 사촌 언니인 릴리 버트랜드와 결혼하지 않았었나요? 마지막 기억은 분명 당신이 릴리 언니와 결혼하던 거였는데….”
“…마지막 기억이 그거라고요?”
“네.”
“하.”
“…하?”
왜 또 불안하게 작게 탄식하는 소리를 내는 건가. 에스텔라는 또 자신이 어떤 지뢰를 밟았는지 몰라 가만히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자크의 표정이 엄청나게 안 좋아진다. 아무래도 큰 지뢰를 밟은 것 같아 에스텔라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이자크, 당신이 믿을 것 같진 않지만 말할게요. 일단 당신은 내 남편이고, 가장 가까운 사이니까. 오해부터 풀어야겠어요.”
“…뭘 말입니까.”
“놀라지 말고 들어요.”
에스텔라가 잔뜩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전 미래로 시간을 건너뛴 거 같아요.”
“….”
“그러니까,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을 뛰어넘어 온 거죠.”
“….”
이자크의 표정은 예상했던 대로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에스텔라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알아요, 미친 소리라는 거 알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기억상실이 아닌 것 같단 말이죠. 바위 하나 없는 연못에서 넘어졌다? 백번 양보해서 그게 가능하다고 쳐요. 그런데 제가 당신과 언니의 결혼식 때도 연못에 빠졌었다면 믿겠어요? 그때 연못에서 분명 시간을 되돌리라는 소리를 들었단 말이에요.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에스텔라는 쉬지 않고 말했다.
마지막 말까지 뱉어냈을 땐 숨이 차 헉헉댈 정도였다. 가만히 숨을 고르며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반응을 기대했다. 이 정도로 진지하게 말하는데 믿지 않고 배기겠어?
자신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신뢰가 있다면, 분명 믿어줄 정도로 에스텔라는 간곡하게 말했다.
“…무리한 것 같네요. 밖에 누구 없느냐, 가서 공주님을 모시거라.”
“아, 진짜! 왜 믿지 못해요, 왜! 그렇게 신뢰가 없어요?! 부부면 좀 믿어줘야지!”
에스텔라는 결국 빽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진짜라니까! 진짜라고요!”
답답한 마음에 에스텔라가 연신 진짜라니까! 하며 연거푸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 드레스 자락을 두어 번 잡아당기는 약한 힘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언제 걸어온 건지 작은 여자애가 에스텔라에게 흙이 가득 든 소서 잔을 건넸다.
“마망, 이거 마망 거야. 이거 이케, 이러케.”
짤막한 새끼손가락을 들며 우아하게 찻잔을 드는 척한다. 에스텔라는 얼떨결에 소서 잔을 받아들었다.
“마시라구?”
“웅!”
“이거?”
“웅! 마망 마시라구 루시가 만든 거야.”
에스텔라는 아이의 행동을 따라 우아하게 찻잔을 마시는 척했다. 그리곤 찻잔을 내려놓으며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마시라는 듯 소서 잔을 에스텔라의 입가로 민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흙차를 먹을 거 같아 에스텔라가 얼른 기지를 발휘했다.
“설탕을 더 타와야지. 가서 설탕 더 타와.”
“설탕! 웅!”
아이가 다시 온실 뒤편으로 간다. 어린 남자애 역시 제 누이인지 여동생인지 모를 애와 함께 차를 만들자며 신이 나서 따라갔다.
아이들이 사라지니 에스텔라와 이자크는 어색한 분위기에 내동댕이쳐졌다.
“…어, 그러니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에스텔라는 괜히 제 머리칼을 배배 꼬며 중얼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답답함을 넘어 화가 나기까지 했던 감정이, 꼬맹이의 난입으로 인해 공기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건 이자크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믿지도 않고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이던 그가 말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죠.”
“앉을 데가 어디 있는데요?”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제 옆 바닥을 툭툭 쳤다.
“바닥에 앉으라고요?”
“위에 돗자리도 있습니다.”
“전 궁궐에서도 바닥에 앉아 본 적이 없어요.”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황당하다는 듯 웃는다. 그러더니 이내 제 외투를 벗어 돗자리 위에 깔아주며 말했다.
“이 정도도 안 되겠습니까?”
“…아뇨.”
에스텔라는 냉큼 그 위에 앉았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에스텔라는 속으로 어떤 부부가 이렇게 어색할까 싶어 슬그머니 이자크를 바라봤다.
‘미래의 나는 어떻게 이자크랑 결혼한 거지? 릴리 언니랑 했던 결혼식은? 아니, 애초에 나랑 사랑해서 결혼한 건 맞나?’
사실 아직도 에스텔라는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 무려 5년 동안 짝사랑하지 않았나. 싫증이 금방 나던 공주였다. 세상 가지고 싶은 것들은 말만 하면 다들 대령했고, 에스텔라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곤 없었다.
영식들은 에스텔라의 눈에 들고 싶어 매일 구혼을 해왔지만, 아무리 잘생긴 이국의 왕자들이 온다 한들 이자크만큼 에스텔라를 빠지게 한 이는 없었다.
그야말로 한 방향의 사랑. 에스텔라는 온 세상의 사랑이 자신에게 집중되길 바랐으면 바랐지, 그렇게 한 사람만 사랑하다 상사병에 걸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이자크를 사랑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이렇게나 행복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가 릴리 버트랜드와 결혼을 했을 땐 펑펑 울며 아버지는 물론 궁궐의 모든 이들을 쩔쩔매게 했지만, 그렇게 울어 퉁퉁 부은 눈과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도 이자크의 행복을 빌었다.
누군가의 행복을 빌다니!
철없기만 했던 공주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일어났으니, 이자크는 에스텔라에게 있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이자크랑 결혼을 했어. 애도 둘이나 있는데… 이혼이라고? 아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야?’
뭐부터 물어야 할지 순서를 정하고 있는 와중에 이자크가 먼저 물었다.
“그래서,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을 뛰어넘었다는 소리입니까.”
“네? 아, 그렇죠!”
“그럼 스물여섯 살 그대의 속은 열아홉이다?”
“그렇죠.”
“기억을 잃은 게 아니고?”
“네, 맞아요! 내가 그날 당신이 릴리 언니와 결혼하던 날 연못에서 누가 날 불렀어요. 시간을 되돌리라면서. 이상하게 느껴져서 그 안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어지러워지면서 물에 빠졌고, 엄청 깊이 아래로 내려갔어요. 그런데 눈을 떠보니, 맙소사! 7년 후네? 이렇게 된 거죠.”
이자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요? 왜요, 내가 또 미친 소리 한다고 하려는 거죠.”
“…아뇨. 생각해보니 행동이나 말투가 확실히 전과 아주 다르네요. 열아홉 살의 에스텔라 같습니다. 연기를 매우 잘하시거나, 아니면 진짜로 시간 여행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거겠죠.”
“연기 아니라니까 그러네, 원래 이렇게 사람 말 못 믿어요?”
“잘 믿었는데, 누구 덕분에 못 믿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찔리라고 하는 말인 듯 자신을 보며 하는 말에 에스텔라는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불라며 이자크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저 멀리서 뭔갈 잔뜩 들고 오는 두 꼬맹이의 모습에 더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에스텔라는 시간이야 많으니까, 하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아이들이 들고 온 것들을 쳐다봤다.
“엄마, 이거! 이거 먹어! 아빠두 먹어!”
“이거 맛있는 거다? 이거 마카롱이야!”
그러면서 에스텔라에게 흙에 물을 묻혀 반죽하고 그 위에 녹색 잎 두 개를 붙인 걸 대령했다. 평소 마카롱을 즐겨 먹던 에스텔라는 황당한 선물에 어쩔 줄 몰라 하다 이자크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아이들은 빨리 먹어보라며 자꾸만 건넨다.
안 먹으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에스텔라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입을 열어 먹는 척한다. 잘라낸 흙 마카롱을 건네며 에스텔라가 말했다.
“맛있네. 맛있으니까 가서 몇 개 더 만들어와.”
“맛있어? 진짜 맛있어?!”
“응. 맛있어.”
꺄르륵 웃으며 두 꼬맹이가 서로의 손을 붙잡고 다시 온실 구석으로 향한다. 흙을 잔뜩 푸고 물을 묻혀 제법 그럴싸하게 만든다. 작은 그릇과 소서 잔에 흙탕물을 넣어 커피처럼 고아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플레이팅까지 하는 건지, 그릇 여기저기 허브들을 따다가 흙 반죽 위에 조심스레 올려준다. 저들끼리 잔뜩 신난 모습이다.
“애들이 되게 밝네요. 날 닮아서 그런가….”
“오늘 당신이 여기에 와 있어서 더 신났나 봅니다.”
“예?”
“평소엔 오지 않았으니까.”
“…제가요?”
“네.”
이자크는 짧은 대답과 함께 잠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슬픈 눈이다. 왜 내가 안 왔죠, 하며 물어봐야 하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뭔지 몰라도 자신이 엄청나게 잘못해 온 것 같은 기분.
괜히 그의 시선을 피해 가만히 손톱을 틱틱 튕겼다. 아마 아이들이 또 음식을 만들어왔답시고 끼어들지 않았다면 어색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것이다.
이자크는 아이들의 요리에 익숙한 듯 잔뜩 유한 미소를 지으며 흙탕물 차를 홀짝대고 흙 마카롱과 빵을 먹는 척도 했다. 아이들은 신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꺅꺅대더니 이내 이자크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작은 아이 둘이 이자크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한참을 놀다 남자애가 에스텔라에게 손을 뻗었다.
“마망!”
그러자 여자애도 에스텔라에게 안기고 싶은 듯 양손을 그녀에게로 뻗었다. 에스텔라는 당황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어….”
어색하게 손을 벌리며 아이 둘을 안아 들었다.
분명 내 자식 맞을 텐데.
맞을 텐데….
당혹스러워하는 에스텔라의 기운을 누구보다 빨리 눈치챈 건지 아이들은 불편한 듯 다시 꾸물대며 에스텔라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자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다시 아이들을 들어 안으며 말했다.
“루스, 루시. 엄마 힘들게 하지 않기로 했지?”
“웅….”
풀 죽어서 말하는 아이들을 보니 괜히 죄책감이 생긴다.
“…그게, 아무래도 기억이 없다 보니까… 남인 것 같은 기분이 아예 안 들 수는 없네요.”
그래, 그것도 이 중에서 혼자만 남인 것 같은 기분이다.
이자크의 품에 안긴 두 아이는 문득 낯설다는 눈빛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이자크 역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표정으로 에스텔라를 쳐다봤다.
이방인이 된 기분.
에스텔라는 얼른 아이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얘가 루스고, 얘가 루시죠? 루스 몬 디에고고 루시 몬 디에고인가요?”
울상인 눈은 루스, 남자애.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은 루시, 여자애. 에스텔라는 아이들과의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물었다.
이자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루스텔 데 메시앙, 루시아 데 메시앙입니다.”
“어머, 제 성을 따랐네요.”
에스텔라가 기쁜 듯 말했다.
“디에스 성을 물려받아도 잘 어울렸을 텐데.”
그 말에 이자크는 웃지 않았다. 에스텔라는 제가 또 뭔가를 실수했구나 싶어 얼른 말을 돌렸다. 이거 원, 대화 한마디 한마디가 고성에 숨긴 함정 피하는 듯한 기분이라니. 에스텔라는 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걸 슬쩍 훔쳤다.
“이, 이름은 누가 지었어요?”
“제가요.”
“잘 지었네요.”
에스텔라는 생긋 웃으며 아이들의 볼을 쓰다듬었다. 토실토실하고 보들보들한 살결에 저도 모르게 반죽 주무르듯 주무르고 말았다. 아이들은 그런 에스텔라가 싫은지 잉, 하며 이자크의 품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까 신나서 안겨들 땐 언제고. 괜히 서운한 마음에 에스텔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치웠다.
“저기, 이자크. 저 정말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요. 기억상실이 아닌 과거에서 미래로 온 거라고.”
“….”
“아마 지금까지 당신이 나한테 보여준 행동이나, 애들이 절 낯설어하고 또 과하게 반긴다는 건 미래의 내가 뭔갈 잘못해왔다는 거겠죠?”
“….”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과거의 제가 미래로 온 거라고 생각해요.”
“에스텔라-“
“왜, 왜냐면 열아홉 살의 저는 이자크를 엄청 사랑하니까요!”
“….”
“그러니까, 이혼은 없던 거로 치면 안 될까요?… 하하.”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의 표정이 착잡해진다. 또 뭐, 왜, 또 뭐가 문제인데. 에스텔라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에스텔라. 이혼은… 당신 쪽에서 하자고 한 겁니다.”
“…예?”
“당신이 먼저 이혼소송을 한 거예요.”
침묵이 흘렀다.
누가, 이혼을, 원했다고?
에스텔라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내가 이혼을 하자고 했다고?
에스텔라가 물었다.
“왜, 왜요?”
“그건 제가 알 길이 없죠. 양육권도 다 나한테 넘기려 했던 걸 보면 당신은 그저 가족이라는 것이 짐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이자크는 아이들을 내려놓고 손을 잡으며 온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당신이 미래로 온 거라고요.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만일 지금 당신이 날 사랑한다 해도 어차피 미래의 당신은 날 떠나려 할 테니까.”
그리고 문밖을 나서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받았던 상처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저도 많이 지쳤습니다.”
온실 문이 닫혔다. 온실에 남겨진 에스텔라는 한참 동안 이자크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상처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많이 지쳤다고. 그렇게 말하는 이자크의 눈은 에스텔라와 미래를 꾸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 도대체 뭔 짓을 해왔길래 이러는 거야?”
에스텔라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런건 본 적 있다. 예전에, 한 열 여섯쯤에, 시녀 하나가 바깥에서 인기 있다는 로맨스 소설을 하나 들고왔었지. 매몰찬 남편이 나중에 제 마음을 깨닫고 후회하며 아내에게 매달리는 소설이었는데, 그때 시녀들이 뭐라했더라.
후회하는 남자 주인공, 속칭 후회남주라 하지 않던가.
지금 딱 에스텔라의 꼴이 후회남주였다.
*
“파파?”
“파파, 울어?”
작은 아이들이 이자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자크는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다란 다리로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니, 다리가 짧은 아이들이 버거운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넘어진 루스가 와앙 울음을 터뜨린다.
이자크는 얼른 루스를 일으켜 세운 뒤 안아 들고는 둥가둥가 몸을 흔들어주며 애를 달랬다.
“미안, 아빠가 너무 빠르게 걸었지? 어디 보자. 피는 안 나네.”
밑에서는 루시가 이자크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파파, 울어? 응? 왜 울어?”
“루시. 아빠 안 울어. 왜 그렇게 생각했어?”
“응, 왜냐하면- 아빠- 여기가, 이렇게! 이렇게! 쭈글거려서.”
루시는 그렇게 말하며 제 미간을 두 손가락으로 찌푸리며 말했다. 이자크는 푸흐 웃음을 터트리곤 엄지손가락으로 루시의 미간을 문질러줬다.
“아빠가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어?”
“응!”
“미안. 안 그럴게.”
이자크는 루시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한동안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뭔가를 곱씹고 있는 듯 한참 동안 초점을 잃고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스텔라. 불과 어제만 해도 자신의 존재를 있다고 취급도 안 하던 사람이다.
어쩌다 결혼을 했고 어쩌다 자식까지 낳았으나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고 그저 보여주기 위한 부부였다. 어쩌면 자신은 포로가 된 걸지도 모른다 생각했을 정도로, 에스텔라와의 부부 사이는 냉랭했다.
항상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보던 에스텔라의 은색 눈동자는 얼음보다 차갑고, 고드름처럼 뾰족했다. 아이들에게도 그 눈빛은 같았다. 외면하는 듯한 눈동자. 잠깐 관심을 가지다가도 제 할 일 하기 바빠 애들은 항상 유모가 돌보거나 자신이 돌봤다.
아이들이 생기면 부부 사이가 좋아질 거로 생각한 건 자신의 착각이었던 걸까.
루스와 루시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어색해하고, 가끔 자신들과 놀아주면 과할 정도로 기뻐한다. 부족한 어머니의 사랑을 이자크가 대신 채워주려 했으나, 역시 부족하긴 했던 걸까.
‘에스텔라는 항상 바빴으니까 이해는 해. 하지만-’
바쁜 거와는 별개로 그녀는 애초에 가정에 관심이 없던 거다.
둘 사이의 문제는 그것 말고도 매우 많았다. 넘칠 듯이 생겨나는 불화에 부부 동반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은 지 오래다.
도무지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는 부부 사이에 먼저 항복한 것은 다름 아닌 에스텔라. 심지어 이혼 서류를 내민 것이 일주일 전이다.
그때 에스텔라가 뭐라 말했더라.
‘이자크. 당신이랑 더는 못 살 거 같아. 해외로 이민 가요. 아이들 데리고 모두. 돈은 부족하지 않게 줄 테니까. 외국에 이미 집도 알아봤고, 시종들도 모두 준비해뒀어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혼하자는 말이에요.’
에스텔라는 모든 걸 준비한 뒤 이자크에게 통보만 했다.
‘다른 남자가… 있는 겁니까?’
그의 말에 에스텔라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죄책감이나 미안함의 기색은 하나 없이 귀찮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랬던 사람인데, 그랬던 사람이.
오늘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자신은 과거에서 온 것 같다고.
실수를 만회하러 온 것 같다고.
아직 널 사랑한다고.
그런 말을 듣고도 기쁘지 않았다. 기쁠 리가 있나. 이자크는 그동안 에스텔라와의 결혼생활을 모두 정리했다. 강제적으로 부여되는 이혼 숙려 기간이 끝나면 곧장 해외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어이가 없을 뿐이다.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직접 나와 대면했어야지. 아니… 애초에 날 만난 것부터를 실수라 생각하던 사람이야.’
기대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실낱같은 기대 하나만으로 몇 년의 시간을 질질 끈 건가. 아주 간간이, 정말로 간간이 보여주는 에스텔라의 예전 모습을 놓지 못해 자신 혼자서만 상처 받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나.
열아홉 살, 에스텔라가 그에게 청혼했을 때의 말은 더 이상 지켜지지 못하는 말인 거다. 그저 산화된, 오래된 말.
‘이자크. 어떠한 순간에도 날 믿어주고 기다려줄 수 있나요? 꼭 그래 줘야 해요. 왜냐면 전 이자크를 무척 사랑하니까요.’
여자한테 청혼받기는 또 처음인지라, 이자크는 그렇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라는 그런 그에게 수줍게 웃으며 반지를 끼워줬다.
부모님은 모두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억울하게 돌아가시고, 여동생은 이국으로 가버렸다. 메시앙 왕국에서 그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줄 이는 에스텔라뿐일 거로 생각했지만 그 착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결혼을 하고 일 년 동안은 행복했다. 평화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텔라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었다. 행복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이자크는 아내가 꽁꽁 숨기고 있던 비밀을 알아내고 말았다.
그 비밀은, 그에게 있어 배신과도 같았다.
에스텔라는 이자크의 부모님이 억울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수사를 종결시켜 사건을 덮었다. 자신의 여동생을 이국으로 보낸 것도 에스텔라였다. 자신에게 달콤한 청혼을 했던, 그 사랑스러운 아내가.
“파파? 파파!”
루스가 이자크의 얼굴을 찰싹 때리며 상념에 잠긴 그를 도로 현실로 끄집어냈다. 이자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곤 만지작대던 결혼반지에서 손을 뗐다.
“…아프잖니, 루스. 누가 아빠 얼굴을 그렇게 때려. 응? 혼나야겠어.”
이자크는 그렇게 말하며 루스의 코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루스는 그제야 평소의 아빠로 돌아온 것이 좋았는지 꺄르륵 웃기 시작했다. 이자크는 자신도 안아달라 칭얼대는 루시까지 안아 든 뒤 아이들의 방으로 향했다.
커다란 침대에 아이들을 눕혀줬다. 낮잠을 잘 시간이다. 이자크는 아이들의 신발까지 손수 벗겨준 뒤 이불을 덮어줬다.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는데 루스가 말했다.
“파파, 더 놀고 싶어요.”
“낮잠 자고 난 뒤에 놀자. 지금 잠 요정이 만나러 오고 싶대.”
“힝… 마망이랑 놀아서 좋았는데….”
“엄마랑 놀아서 좋았어?”
루스는 아쉬운 건지 울먹이며 이불을 꼭 잡았다. 그러자 루시가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응! 엄마가 마카롱 좋아해! 루스, 우리 또 만들어줄까?”
“좋아!”
이자크는 당장이라도 흙을 빚을 기세로 말하는 아이들의 배를 작게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그래. 자고 일어나서 만들어주자. 엄마도 많이 배부를 거야.”
“앗, 그러네!”
“그럼 소화되는 약도 만들어주면 되지!”
신나서 말하는 아이들은 이자크가 몇 번 배를 문질러주자 이내 동그란 눈들을 끔뻑이더니 잠이 들고 말았다. 쌍둥이답게 똑같이 한껏 만세를 한 채 잠이 든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이자크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이들을 재운 이자크가 작게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방을 나왔다. 문 닫는 소리에 혹여나 깰까 조심히 문을 닫고 뒤를 도니,
에스텔라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서 있다.
“전 이혼 못 해요! 안 해요! 내가 어떻게… 읍읍!”
큰소리로 포부를 외치듯 말하는 에스텔라의 입이 커다란 이자크의 손에 틀어막혔다. 에스텔라는 코까지 막아버린 이자크의 손에 숨이 막힌 듯 읍! 하며 그의 손을 떼려 안간힘 썼다.
“애들 깨면 어쩌려고 이럽니까.”
이자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에스텔라가 숨이 막힌다는 듯 한껏 과장되게 그의 손을 탁탁 치자 이자크는 얼른 손을 뗐다.
“자는 줄 몰랐어요. 아무튼, 전 이혼 못 해요.”
“뭐라고요?”
“내가 잘못한 것 있으면 다 고치면 되잖아요?”
“허.”
이자크의 입에서 허탈한 소리가 나왔다. 어떻게든 그의 속을 뒤집어 놓겠다는 에스텔라의 굳은 의지가 보일 정도였다.
“당신이 고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고요. 내가 지친단 말입니다.”
지지 않고 받아치는 단호한 그의 말에 에스텔라의 몸이 움찔댔다.
“그, 그럼 이자크를 지치지 않도록 하면 되잖아요? 이자크가 나한테서 받은 상처들 모조리 잊을 정도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면 되잖아요.”
에스텔라의 말에 이자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벽에다가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군요. 열아홉 살짜리의 철없음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과거에서 미래로 왔다는 거 믿어줄게요.”
“….”
“난 분명히 말했어요. 감정 다 정리했고요.”
“…기회라도 좀 줘요.”
에스텔라의 눈이 촉촉해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이 아이들을 놓칠 순 없었다. 예전의 에스텔라가 뭘 얼마나 잘못했는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일단 빌어본다.
“말했잖아요. 5년 동안 이자크 당신을 짝사랑했어요. 그런데 난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당신한테 상처를 줬대요. 당신을 사랑하는 지금 이 마음은 변함없는데. 그럼 내가 뭘 해야겠어요? 당연히 당신을 붙잡고 늘어질 수밖에요.”
“….”
“기회 좀 줘요. 이혼 숙려 기간 동안만이라도.”
에스텔라가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촉촉한 눈동자로 올려다본다. 필살기까지 이용했는데, 제발! 에스텔라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이자크는 그럴 생각 없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에스텔라를 내려다봤다.
“참 신기하단 말이죠. 어저께만 해도 날 보던 눈빛이 그렇게 차가웠던 여자가. 이제는 기회까지 달라고 이러네.”
허탈하고, 어이없고, 화가 나고,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에 이자크가 비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기회, 드리죠.”
그의 말에 에스텔라의 얼굴이 활짝 핀다.
“그동안 내가 다친 만큼 당신도 다칠 수 있으면 좋겠네요.”
“….”
이자크는 그렇게 말한 뒤 에스텔라를 지나쳐 갔다.
그의 표정이 얼마나 차갑고 무서웠는지 에스텔라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고 말았다. 마치 자신에게 복수라도 하겠다는 눈빛. 에스텔라는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만 이내 팔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뭐, 일단 기회는 얻었으니까.”
에스텔라는 자신 있다. 물론, 아까 이자크의 반응은 조금 두려웠지만 그래도 충분히 자신 있었다. 에스텔라 데 리에프 메시앙. 사랑스러움으로는 왕국 제일.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랑받는 공주.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 눈치 빠르고 말 잘하고 예의 바르며 영특한 공주. 그녀는 사랑스러운 외모로 생긋 웃어주기만 해도 모두의 마음을 녹이는 그런, 왕국 제일의 인기쟁이였다.
‘미래의 과거의 내가 잘못했다고 한들, 지금부터 잘하면 가능해. 내가 누군데. 에스텔라 데 리에프 메시앙란 말이지.’
물론 자신이 뭘 얼마나 잘못했는지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애물이긴 하다.
‘내가 그동안 뭘 잘못했는지 하나하나 다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에스텔라는 절대로 이자크는 물론 귀여운 쌍둥이들까지 놓칠 수 없다. 이것은 신이 주신 기회인 거다. 이자크와 행복한 결혼생활로 이어가라는,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으라는!
후회 남주도 결국 아내의 사랑을 되찾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
그날 이후부터 에스텔라는 이자크에게 과거를 만회하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열렬히 그를 짝사랑하던 시절, 속속들이 알고 있던 그의 취향대로 옷과 신발, 액세서리 등을 선물했다. 그뿐일까. 무역선에 관심 많은 그를 위해 배까지 한 척 사주는 통 큰 선물을 했다.
결과는, 정확히 두 주일 만에 포기.
“와… 어쩜 이렇게 사람이 차가워? 어쩜 이래? 벽이나 다름없어. 벽에다가 사랑 고백하는 기분이야.”
에스텔라가 충격받은 듯 소파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유모가 한마디 했다.
“공주님. 물질로 사람 마음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뭐? 그럼 뭘 어째야 해? 나랑 대화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이런 성의라도 안 보이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인간이 그렇게 독할 수가 없어. 어쩜. 이자크는 내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을 거야. 침은 무슨, 가래까지 뱉겠다!”
“…공주님, 제발 언행에 체통을… 열아홉 시절로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억이 사라졌다지만 기본적인 행동은 평소처럼 하셔야죠….”
“내가 평소엔 어쨌는데?”
“항상 정갈하시고 깔끔하시고 냉정하시면서 교양있으셨죠. 침이니 가래니 그런 단어 선택은 애초에 그만두셨잖아요.”
“내가 그렇게 어른스럽게 굴었단 말이야?”
“…어른 맞으세요, 공주님. 두 아이의 어머니까지 되신 분이 이렇게 소파에 늘어져 계시거나, 단정치 못한 단어를 구사하시면 교육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유모는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잔소리가 한결같이 많았다. 에스텔라는 오늘도 어김없이 잔소리를 시작하는 유모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데, 유모. 나 원래 이런 성격이었잖아.”
“나이를 드시면서 철이 드신 거죠.”
“그런데 내가 막 냉정하게 굴고, 엄청나게 얌전떠는 성격은 아니었잖아.”
“결혼하시면서부터 마음가짐이 달라지셨죠.”
“어떻게?”
에스텔라가 집요하게 묻자 유모도 그제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유모는 한참 시간을 거슬러 에스텔라의 철없던 과거와 최근 몇 년의 행동들을 비교해봤다.
“확실히, 많이 변하시긴 했네요. 이 유모는 드디어 공주님께서 철이 드셨다 싶어 좋았습니다.”
“유모. 내가 이자크한테 몹쓸 짓을 많이 했다던데. 내가 성격이 변한 것도 그거 때문이야?”
“어우, 부부 문제는 저한테 물어보지 마셔요.”
“왜에-“
에스텔라가 말꼬리를 늘리며 유모에게 빨리 생각해보라는 듯 채근했다.
“어유, 감히 제가 어찌 공주님과 이자크 님의 부부 문제에 간섭합니까. 전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그러니까, 지켜본 걸 말해달래도? 내가 과거에 이자크에게 어떻게 굴었는지 알아야 반성을 하든 마침표를 찍든 할 거 아니야.”
유모는 진심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자크 외에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유모밖에 더 있을까. 에스텔라는 미안하지만 계속해서 유모를 채근했다.
결국 유모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서는… 잘못하셔도 한참 잘못하셨죠….”
그렇게 말하며 제 눈치를 보는 유모의 모습에, 에스텔라는 옳지, 옳지, 더 말해! 하며 부추기기까지 한다.
“엄청 못된 짓 많이 하셨죠….”
“구체적으로는?”
“어후, 제가 말하기에도 뭐할 정도로요….”
“그걸 말해줘야 내가 반성하지.”
에스텔라의 말에 유모의 입에서는 에스텔라의 만행이 폭포처럼 쏟아져나왔다.
“…매일 다른 남자들을 저택에 데려오셨고요… 방에 들어가선 한참 동안 안 나오셨고요… 시종들도 다 물리시고 이자크 님도 못 오게 하셨죠. 물론, 직접적인 외도 현장은 아무도 못 봤지만 정황상으로는….”
“….”
총체적난국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