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章
연서戀書
주상이 입을 닫고 누운 지 사흘째, 유태경은 결국 주상의 고명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유교遺敎도 없었다. 임금이 훙하였다. 내시가 임금의 평상복 저고리를 들고 궐 지붕 위를 올랐다. 용마루를 밟고 서서 저고리를 흔들며 “상위복上位復” 크게 세 번 외치었다. 조선의 주상이 승하하였다. 신료들이 몰려들어 관을 벗고 머리를 풀고 곡을 시작하였다. 곡을 하며 후계가 없이 승하한 사례를 머릿속으로 찾았다. 다음 번 용상의 주인이, 그들의 운명을 쥐고 있다.
*
산사의 새벽은 고요하다. 사르륵 사르륵 여인이 움직일 때마다 서리를 품은 풀들이 치맛자락을 물들인다. 관음전에 들어선 여인이 깊이 머리를 숙여 절을 한다. 합장하여 내린 손을 바닥에 닿은 이마 옆에 벌려 양손 바닥을 하늘로 향하였다.
부디.
여자의 바싹 마른 입술이 달싹인다.
살려 주소서.
다시 일어서 합장을 하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댄다.
부디, 살려만 주소서.
여인이 학의 날개처럼 팔을 올리고 합장을 하고 다시 절을 한다.
제발, 관세음보살님.
주지 스님이 어느새 조용히 들어 정좌하고 목탁을 두드릴 뿐, 여인의 애타는 기도를 막지 못하였다.
날개가 찢긴 학의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제 털을 뽑아 베를 짜는 학처럼 여인이 생명을 쪼개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일어서는 무릎이 흔들렸다. 좌복이 눈물로 얼룩진다. 얇은 지게문을 뚫고 겨울 산바람이 들어치는 법당은 냉골처럼 차가웠지만, 뼛속을 뚫는 추위에도 여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든다. 단단하게 굳는 아랫배를 가만히 쓸어 주며, 여인은 다시 몸을 굽힌다.
아이의 아비를 살려 주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시 보지 못하여도 좋습니다.
미천한 소인을 모두 지웠다 해도,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살려만, 살려만 주소서.
땀과 눈물이 섞여 뺨을 적시고 목덜미를 적셨다. 미향이 기진한 은우를 데려 나갈 때까지, 은우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좌익위 남휼이 산사를 찾아온 건 머리 위에 높이 떠 있던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오후 나절이었다. 산사의 작은 방에 마주 앉아, 남휼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은우는, 궐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산사에 몸을 숨긴 뒤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것만 같다. 강무에서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고 하였다. 들짐승에게 물어뜯기고 활에 맞은 광안이 미쳐 날뛰는 흑마에 몸을 싣고 사라졌다 하였다.
광안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채로 일곱 밤을 지냈다.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부왕이 승하하신 지는 사흘이다. 부왕은 광안의 실종을 듣지 못한 채 입을 닫았고, 잠시만이라도 정신이 돌아와 유지를 남기시라는 중전의 애끓는 읍소를 듣지 못한 채로 훙하셨다. 생사를 알 수 없는 광안을 대신하여 대군이 용상에 올라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었지만, 옥새와 국왕 책봉권을 쥔 대비가 목숨을 걸고 버티고 있다. 날마다 대비전에 대신과 관료들이 찾아와 뵙기를 청하고 뜨락에 엎드렸다. 대비는 문을 걸어 잠그고서 누구의 알현도 허하지 않았다. 광안의 시신을 확인하기 전에는 결코 대군을 국왕으로 승인할 수 없음을 천명했다. 광안을 쫓아 달려간 좌부위솔 조인호 역시 행방이 묘연하였다. 횡성 일대와 강원도 전체를 수천의 군사와 병졸들이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다 하였다. 시체를 찾기 위함이었다.
“남기신 서찰이 있습니다.”
잔뜩 가라앉은 음성으로 남휼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물음 대신 조용히 바라보는 여인에게 설명을 더했다.
“산사로 모시고 오던 밤에, 사람을 보내어 상황을 알려 드렸습니다. 그때 받아 온 서찰입니다.”
왜, 이제야…….
은우의 입술이 열리다가 소리를 내지 못하고 닫힌다.
이제야, 건네라고 하신 서찰이겠지. 혹여 잘못되어 돌아가지 못하면, 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은우는 이를 악물어 눈물을 삼켰다.
“열지 않겠습니다. 저하는…… 반드시 돌아오십니다.”
서찰을 받아 양손에 쥐고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읽어 보시길, 바라셨을 겁니다.”
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저하는…… 그렇습니다.”
휼이 떠나고 은우는 한참 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편지를 쥔 채,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림자처럼 지키는 사내가 있다.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는 남자를 불렀다.
“창복이. 잠시만, 와 보게.”
처음엔 말을 못하는 줄 알았다. 남휼과 나누는 대화를 듣고서야 몸은 가볍고 검은 빠르고 입은 무거운, 그리하여 광안의 신뢰를 받은 자임을 알았다. 바닥으로만 시선을 두고 있어 사내의 삿갓만 보며 은우가 물었다.
“그날, 자네가 뵈었는가.”
“네.”
“아무 말이나 해 주게.”
“한밤이었는데 침수에 들지 못하시고, 내내 전갈을 기다리고 계셨던 듯했습니다. 좌익위 나으리의 서찰을 보시고 근심하셨습니다. 꼭 전달해 달라 봉투를 건네셨습니다.”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 줘서 고맙네.”
힘없이 방으로 돌아 들어가는 은우를 창복이 머뭇거리며 불렀다.
“그 밤에 쓰셨습니다. 몇 장이나 바닥에 구겨진 종이가 있었습니다. 서찰을 들고 나가는 저를 부르시어 돌아다보니 웃으셨습니다.”
은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창복아. 연서가 있으니, 잘 전달하여야 한다.”
은우가 속입술이 나달거리도록 꽉 깨물었다.
눈물을 보이면 안 돼. 나도, 웃으며…….
은우가 입 끝을 올리며 미소 지었다.
“깨끗하게, 소중히 가져와 줘서 고맙네.”
문을 닫고 기대어 서서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 못했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은우는 서안 위에 서찰을 반듯하게 올렸다. 이마에 손을 붙이고 절을 올렸다. 눈을 감고 절을 올리는 동안 서안 앞에 광안이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앉아 권태로이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네 지금 무얼 하는 게냐.’
비웃음을 담은 음성으로 은우를 부르고, 붉디붉은 입술을 비스듬히 열어 웃을 것만 같다. 은우는 무릎걸음으로 걸어 서안 앞으로 갔다.
저하…….
봉투를 열어 반듯하게 접은 종이를 펼쳤다.
은우.
제 이름이 적혀 있다. 본 적 없는 광안의 언문이다.
은우.
한 번 더 적혀 있다. 흐려지는 눈으로 이름을 읽는다. 광안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쓰고 보니, 더 예쁜 이름이구나. 은우.
목구멍에서 타는 듯한 뜨거움이 치솟는다.
더 많이 불러 줄 것을.
더 많이 안아 줄 것을.
모진 말로 울리지 말 것을.
은우의 목에서 울음이 터진다.
충분히 아낀다 하였건만, 결국 지키지 못하였다.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없어 괘씸했고
아이를 품고 홀로 삭였을 마음이 괘씸하고 또 괘씸하다.
울음이 맺힌 채로 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울지 마라, 은우.
그 글에 다시 울음이 터진다.
건강한 아이를 낳아 씩씩하게 키워 다오.
운종가에서 했던 농이 마음에 걸려 이리 서찰을 보내니, 꼭 지켜 다오.
이름을 결코 복길이라 부르면 아니 된다.
은우의 입술이 웃음과 울음이 뒤섞여 실룩였다.
운종가에 갔던 날, 엿 때문에 울던 아이의 이름이 삼돌이였다.
‘삼돌이, 삼돌이. 귀여운 이름 아니더냐. 사이좋은 형이 둘 더 있다. 나는 셋째 아들이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이름.’
광안의 웃음 섞인 말을 듣고 은우가 물었다.
‘평범한 분이셨다면 아이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 주셨을까요.’
광안이 빤히 쳐다보자, 은우는 저도 모르게 뱉은 소망에 얼굴이 붉어졌다. 필부필부匹夫匹婦로 만났다면, 아이를 반겨 주셨을까. 이름자를 지어 주셨을까. 헛된 소망으로 정신줄을 놓았나 스스로를 꾸짖었다. 은우는 속마음을 감추느라 엉뚱한 이야기들을 산만하게 덧붙였다. 광안이 간단하게 자르며 답하였다.
‘복길이.’
‘네?’
‘전란 통에 민가에서 유숙을 하였다. 다 큰 사내 녀석인데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며 아비가 아들을 꾸지람 하더구나. 어이구, 복길이. 저 멍청한 놈. 그러다 귀한 찬거리라도 건네면, 고이고이 두었다가 어이구, 우리 복길이. 잘 먹는구나. 나는 영 비려서 못 먹겠다 하며 밥그릇에 다 올려 주더구나. 그러면 복길이가 또 아부지 드시라며 옮기고 어미의 밥그릇으로 동생 밥그릇으로 찬이 수도 없이 날아 다녔다. 그러다 또 다음 날이면 아이구, 복길이 저놈 때매 못살아. 덜떨어진 자식, 어디 가서 빌어먹지나 않을는지! 목청 높여 소리를 지르더구나.’
광안이 파안대소를 하며 말하였다. 웃음 끝에 쓸쓸한 눈빛이었다.
‘그리 살아 보고 싶었다. 어이구, 복길이. 저 멍청한 놈. 그런 꾸중으로 부족함이 메워질 부자 관계가 되어 보고 싶었다.’
광안의 소망에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결국 그런 아들로도, 그런 아비로도, 그런 부자 사이가 되어 보지 못하고 광안은 떠났다.
아이의 이름을 ‘희’라 짓는다.
여자아이면 ‘은’ 한 자를 더 붙여 예쁘게 불러 다오.
사내아이면 한 자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아비가 지극히 기뻐했다 전해 다오. 그리하여 ‘희’라 불렀다고.
은우가 가슴에 양손을 모으고 통곡한다.
은우.
울지 마라.
꽃을 바닥에 흩어 놓은 생각시가 울 때 그랬듯,
네가 울면 내가 당황스럽다.
나는 다행이다.
네가 내 아이의 어미가 되어 주어, 다행이다.
강은우.
내 여인이어 고마웠다.
―이현
흐려진 눈에 글이 보이지 않는다. 손끝으로 이름을 더듬다 은우는 바닥에 양손을 짚고 엎드렸다. 울음으로 바닥이 떨리고 눈물로 바닥이 흥건히 젖어 든다.
저하, 용서하소서.
오늘만, 울겠습니다. 오늘만.
*
조급증이 돋은 중전이 초조하게 방을 오갔다.
“적무는, 뭐라 하느냐.”
주 상궁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어 쉬고 답했다. 벌써 세 번째 같은 답을 하고 있다. 중전이 궐로 데려오라 했지만, 적무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심력을 쏟아 일을 하여 그렇다 했지만, 그렇게 넘기기엔 심각할 만큼 몸을 가누지 못했다. 쿨럭거리는 기침에 피가 배어 나왔다. 대군을 묻자, 적무는 답을 주지 않았다.
보모상궁이 낯빛이 파래서 달려왔었다. 대군이 오늘 역시 한 수저도 음식을 삼키지 못한다 하였다. 내의관들도 고개를 저었다. 탕제만 한 숟갈씩 넘기지만 그나마 모조리 토하며 작은 몸이 더 작아졌다고 울먹였다. 어린 나이에 주상을 잃은 슬픔 때문에 곡기를 끊은 것이라며 중전은 미래의 성군이 되실 인물이라는 명분으로 대군을 포장하기에 바빴다. 과히 음식을 권하지 말라는 언질도 하였다.
“대비. 그 늙은이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중전이 이를 바드득 소리가 나도록 갈았다.
“조일문 대감은 연락이 없느냐!”
역시나 다섯 번째 같은 답이다. 오전에 들른 영상대감께도 열 번은 더 물었던 질문이었다.
“대감께서는 국상 중이라 궐에 사사로이 들어와 대비를 뵙는 일은 조심스러워 칩거함이 옳다 하였고, 더군다나 익위사로 있던 차남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바 쉽게 움직일 수 없다 합니다.”
“이것들이!”
중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군이 용상에 오르기만 하면, 공을 내세우며 득달같이 달려올 조일문 부자를 보란 듯 내치겠어. 대비 하나 설득하지 못한 머저리들이!”
“중전 마마, 음성이…….”
주 상궁이 소리를 죽여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아직 국상 중이고 세자의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다. 주 상궁과 나인들이 동궁전에 저주술을 행하는 장면을 봤다던 강 나인이 행방이 묘연했다. 강 나인을 데리고 가던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사라진 이는 정옥을 비롯해 중전 측 궁녀 둘과 장정 넷이었다. 강 나인과 처소를 같이 쓰던 미향도 사라졌다. 뒤이어 강무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국상이 이어지자 화젯거리도 안 되었지만, 분명 누군가가 이들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다. 중전은 마치 모든 일이 끝나 세상이 바뀐 듯 함부로 행동하고 거리낌 없이 떠들지만, 세자가 살아 돌아오는 순간 명백한 증인과 증좌가 있는 역모였다.
국본의 살해와 저주.
능지처참을 열 번을 당해도 모자란 역모.
주 상궁은 피를 토하던 적무가 떠오르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일전에 적무가 분명 그리 말했었다. 용에게 흑주술을 걸다 그 용이 살아 돌아오면 제 몸을 치게 될 거라고. 그러면 살아남을 수 없다 하였다. 거기엔 흑주술에 이용한 대군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었다.
‘혹여 잘못되면 내 너의 혀부터 자르고 사지를 찢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쇤네는 이미 죽었을 겝니다. 미천한 몸뚱이가 용을 치려다 되튕겨 온 흑주술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대군은! 우리 대군은!’
분명 대조전 침전 밖에서 들었던 내용이다. 주 상궁은 생생히 기억하는 말을 중전은 까맣게 잊은 듯 굴었다. 잡힐 듯 펼쳐지는 황금빛 권력에 눈이 멀어, 죽어 가는 자식을 알아채지 못하는 건 아닐까. 주 상궁은 더럭 겁이 났다.
만에 하나, 세자가 아직 살아 있다면……!
*
상복 차림의 대관들이 대비전 뜨락에 엎드려 있다. 삼정승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였다. 평소 논어와 예기를 논하던 영상은 꽁지에 불붙은 개처럼 안달복달하였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갑시다. 부수든, 열든 얼굴을 보고 대화해야 할 것 아닙니까.”
“대비마마의 침전입니다.”
“수라를 들일 때 따라 들어가서…….”
“하루만 더 기다립시다.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영상이 목에 굵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늙은이 치마폭을 들춰서라도 옥새를 뺏고, 국왕 책봉을 마무리 지어야지요! 용상이 비어 있습니다! 진정 이리 나오신다면…….”
야비한 눈빛에 우상과 좌상이 흠칫거렸다.
“허면, 석수라를 들일 때.”
우물쭈물 말하는 우상을 향해 영상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뭐…….”
영상이 석수라까지 얼마나 남았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황급히 내관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숨이 넘어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지, 지금. 지금. 조, 조…….”
“무엇이냐! 똑바로 고하여라.”
영상의 호통에 다시 말을 이었다.
“조, 조인호 좌부위솔이.”
“뭐? 조인호가!”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관을 향하였다.
“궐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소, 손에는. 황금빛 흉배. 피 묻은 사조룡 흉배가…….”
영상이 크게 웃으며 손을 맞부딪쳤다.
“드디어, 조인호가 해냈소!”
영상의 박수 소리에, 대신들이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몇몇은 세자에 대한 예가 아니라 지적하고, 대비전에 대한 무엄함을 비난하는 소리를 높였다. 영상의 비웃음이 잇달았다.
“용상이 비어 있습니다. 이대로는 종묘사직의 명운이 위태롭습니다. 이 어찌 기뻐할 일이 아니란 말이오.”
영상은 하나하나 직위와 이름을 부르며 기쁨에 동조하지 않는 자에 대한 치졸한 위협을 가하였다. 곡을 해야 할지 박수를 쳐야 할지 망설이는 대신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는 뜨락으로 조인호의 말이 들어섰다. 열흘 가까이 산을 헤맨 자치고 너무나 멀끔한 모양새로 인호가 말에서 내렸다.
‘손, 인호의 손에 흉배가 있다 하였는데!’
모두 한마음으로 조인호의 손만 살폈다. 무얼 확인하고 싶은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얼굴에는 안도감인지 과시인지 그저 비웃음인지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웃음이 스쳤다. 보란 듯 들어 보이는 황금사조룡이 수놓아진 흉배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인호의 다른 손에 검이 들려 있음을 알아챈 무관이 물었다.
“혈검이오? 세자 저하의 혈검이오?”
다급한 물음에 인호가 짤막하게 답했다.
“그렇소. 혈검과 흉배는 세자 저하의 것이오.”
몰려드는 대신들을 향해 인호가 검을 치켜들었다.
“먼저 대비마마를 뵙겠습니다.”
인호의 앞으로 길이 열렸다. 상복 사이를 뚫고서 인호가 대비의 방 앞으로 섰다.
“아뢰어라.”
상궁이 “대비마마, 조인호 좌부위솔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하였다.
“들라 하라.”
대비의 음성이 갈라졌다. 방으로 들어간 인호와 대비의 대화는 밖에서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대비의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문을 닫고 나오는 인호가 대신들을 향해 말하였다.
“내일 대비마마께오서 편전에서 임시 상참을 열어 국왕 책봉권을 행하신다 하옵니다. 오늘은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 하시니, 다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말을 타고 사라지는 인호를 그 누구도 붙잡을 수 없었다.
내일 상참! 상참 조례!
내일 태양이 떠오르면, 이제 제 세상이 열린다. 영상의 입이 귀에 걸렸다. 경박스레 뛰는 걸음으로 중궁전으로 향했다.
*
이지러지는 달이 손톱처럼 작아져 산사를 내려다본다.
울지 않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은우는 달을 보며 속삭였다. 결코 단 한순간도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일이 없도록 오로지 광안만을 넘치게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은 소셋물이었다. 소셋물을 정수리에 쏟아 내리던 그 새벽, 차마 스스로에게 인정하지 못했다. 열 살부터 품은 마음이었다. 감히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이라 두려웠다.
방금 침수에서 깬 광안의 그림자만으로도 소셋물을 받쳐 든 손끝이 떨렸다. 흰 야장의만 입고서 걸어오는 남자를 눈에 담고서 심장이 멈추었다. 코끝에 끼쳐 드는 사내의 향에 정신이 아득했다. 고개를 숙이자 물에 비치는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목이 졸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다른 생각을 하였다. 소셋물을 정수리로 퍼부으며, 저하는 모질게 꾸짖었다.
‘내 시중을 들려거든, 망상하지 말라.’
달을 바라보는 은우의 눈에는 보석처럼 눈물이 맺히고, 입술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침전에 들어가 모시게 되었던 첫밤도 그리 말씀하셨다. 불쑥 방으로 들어와 꾸짖으셨지.
망상하지…….
“망상하지 말라 했거늘.”
바로 옆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은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저런.”
평범한 답호 차림에 갓을 쓴, 키가 큰 사내가 어깨를 감싼다. 반사적으로 은우의 손이 가린 아랫배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놀라면 아니 된다 하였는데.”
“저하……!”
“그래.”
“제가 꾸, 꿈을 꾸는 것이옵니까?”
“글쎄.”
은우가 손을 들어 광안의 얼굴을 만졌다.
“진정 세자 저하가 맞습니까.”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세자가 아니면 또 어떠냐.”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아니면 어떻습니까.”
한 번도 마음대로 손을 뻗어 충분히 만진 적이 없었다. 얼마나, 후회했는지 얼마나 그리웠는지. 은우는 양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감쌌다. 홍옥처럼 붉고 뜨거운 입술을 만지고 날카로이 솟은 콧날을 쓸었다. 짙고 고른 눈썹을 엄지로 더듬고, 가장 그리웠던 눈을, 뜨겁고도 차가운 검은 불꽃을 제 손으로 덮었다.
“꿈이라면, 제발 조금만 더 머물러 주십시오.”
남자의 팔이 은우의 등을 감싸고 힘차게 끌어안았다.
“빨리 온다는 약속은 못 지켰지만.”
남자의 입술이 이마에 닿고, 눈물로 젖은 눈두덩에 닿았다.
“아주 무탈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은우가 아이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엉엉 울었다.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내가 멀쩡해 보이지 않느냐.”
“어떻게 된 일, 어찌 이렇게…….”
원망과 기쁨과 궁금증이 뒤섞여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도 몰랐다. 다만, 포근한 품이 너무 좋아, 든든하게 감싸는 팔이 안온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좋았다. 그런데도 한 번 터진 울음은 참으려 할수록 높아지기만 했다.
“쉬이…….”
등을 토닥이며 남자가 오랫동안 은우를 달래었다. 눈물이 범벅된 뺨을 닦아 주고 그 위에 입을 맞추고, 가만히 손을 내려 여인의 배 위에 올렸다.
“괘씸하여, 벌을 내리려 했는데.”
“저하, 죄송합니다.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리도 매정히 입을 다물 수 있느냐.”
“저는, 저하께서…….”
“내가 싫어할 줄 알았다?”
“네, 저하.”
광안이 손을 들어 이마 아래로 내려온 잔머리를 엄지로 살살 만졌다.
“이리 예쁜 이마를 가진 아이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저하. 저는, 저는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아무것도 아닌 적이 없었다.”
광안이 눈을 맞추었다.
“나를 살게 하고, 나를 웃게 하고 나를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건져 주었는데, 어찌 네가 아무것도 아니더냐.”
“하지만, 장자는 빈궁마노라에게서…….”
“아하.”
광안이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가 빈궁은 아니다. 그리될 수는 없지.”
은우의 심장이 쿡 쑤셔지는 듯 아프다. 이러면 안 돼, 부디 목숨만 구해 달라 그리 빌었는데. 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죽은 세자라 하여 재간택이 무산되었다. 삼간택까지 올랐으면 평생 수절을 하며 처녀귀신으로 죽어야 할 팔자였지만, 다행히 재간택만이어서, 억울하게 수절을 강요당할 규수는 없었다. 그들 중 다시 간택을 하시려나. 은우의 이마를 세자의 검지가 톡톡 두드렸다.
“또, 망상을.”
“아.”
은우가 얼굴을 붉혔다.
“빈궁마노라가 되지 못한다니 억울하지 않느냐.”
“아니옵니다.”
“그럼 네게 무엇을 줄까.”
“무엇이든 주시옵소서.”
광안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무엇이든 받지 않겠다던 강 나인 맞느냐?”
은우가 따라 웃었다.
“이제는 저하의 아기가 있습니다. 조금은 더 나은 어미가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저하가 주시는 모든 것을 받고, 낮든 높든 궁녀 그대로이든 매일매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할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게 매일을 살아가려 합니다.”
“무엇이든 받겠다?”
광안이 확인을 하듯 되물었다.
“네, 저하.”
은우의 손을 들더니 아이들처럼 손가락을 걸며 광안이 다시 물었다.
“나의 무엇이든, 네가 되어 주겠느냐.”
“그럼요.”
은우는 잔잔한 마음으로 답했다. 가까스로 시해의 위기를 모면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 돌아온 세자에게 앞으로 헤쳐 나갈 일이 많을 것이다. 세자의 빈약한 정치 세력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여인이 필요하겠지. 정궁이든 후궁이든 그리해야 더 이상 생명을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억울하게 몰리고, 저주살을 맞으며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부디 울이 되는 여인들을 비로 맞으소서. 은우는 다만, 그대로 서책 정리를 하는 궁녀로 일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매일 볼 수 있으니. 은우의 마음을 읽었는지 아닌지 광안은 무덤덤하게 말하였다.
“그러면.”
“네, 저하.”
“네가 내 중전을 해 줘야겠다.”
“저하!”
은우가 발딱 툇마루에서 일어섰다. 광안이 웃으며 어깨를 감싸 다시 품으로 끌어 앉혔다.
“분명 손가락을 걸고 약조하였다.”
“저하.”
“아니 되옵니다, 라는 말은 듣지 않겠다.”
“저하!”
은우가 도리질을 쳤다. 광안은 작은 턱을 잡아 고개를 젓지 못하게 하고,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라는 고약한 소리를 하는 입술을 막았다.
“사찰이라 참으려 했는데, 방금 부처님께 허락을 구했다.”
뻔뻔히 말하며 입술을 삼켰다. 혀를 감아 더 이상의 불만은 허하지 않았다.
*
드높은 단 위에 붉은 주단이 깔려 있다. 그 위로 황금빛 용상이 주인 없이 비어 있었다. 곧 그 자리에 앉게 될 자신의 손주, 대군을 상상하며 영상의 입이 벙싯벙싯 벌어졌다. 상참 회의에 참석한 여러 관리들은 영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기 바빴다. 침통한 심정을 오로지 침묵으로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당상관들은 조용히 뒷전으로 물러가 자리를 지켰다.
“대비 마마께오서 오실 시간이 지났는데, 어찌 아직 듭신다 소리가 없을까요.”
영상이 너그러이 웃었다.
“그리 고집을 부리셨는데, 막상 얼굴을 대하기 쉬우시겠습니까. 우리가 기다려야지요.”
웃음이 편전을 휘돌았다. 그 웃음이 잦아들기 전, 드디어 대비가 편전으로 들어섰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으로 대비는 대신들의 절을 받으며 단 위에 섰다. 교지는 짤막하고 간결했다.
“선왕이 훙어한 지 닷새요. 오늘 즉위식을 거행하면 문제가 있겠소?”
“아니옵니다. 국사는 잠시도 비워서는 아니 되는 일, 이미 충분한 시일이 지났습니다.”
영상이 소리를 높였다.
“그러하옵니다.”
다들 우렁차게 호응하였다. 머리를 조아린 대신들 위로 대비의 긴 숨이 흘렀다.
“진정 모두 한뜻이오?”
“그러하옵니다.”
한목소리로 동의하는 답이 편전을 울렸다.
“대신들의 뜻이 그러하오. 여망을 받들어 즉위하시오.”
대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대신들이 슬며시 눈치를 보며 좌우를 살폈다.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였다.
“모두 한뜻이오?”
깊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이다. 일제히 대신들의 고개가 들렸다. 용상 앞에 선 남자가 그들을 싸늘히 내려다보고 있다. 히이익, 영상이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보, 보위에 오르소서.”
누군가가 재빠르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보위에 오르소서.
오르소서.
여망을 받드소서.
광안이 삼베로 지은 곤룡포를 펼치며 용상에 앉았다.
“천세, 천세, 천천세!”
대신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치면서 양팔을 뻗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편전이 흔들릴 만큼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광안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광안이 손을 들자 군장을 갖춘 내금위군들이 편전으로 일시에 들어섰다. 남휼과 조인호가 그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중심에 섰다.
“지난 강무에서 세자 저하를 향한 시해와 역모가 행해졌다.”
남휼의 선언에 대신 일부가 주춤주춤 일어서 몸을 빼었다. 그들을 향해 내금위군의 창살이 겨누어졌다.
“궐내와 궐 밖에서 역심을 품은 도당들이 차마 입으로 옮길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역모를 꾀하였던 바, 그 모든 증좌가 좌부위솔이 가져온 명부록에 있으며 또한 직접 사술을 행하는 것을 본 증인과, 이미 자복한 공모자들이 있다. 세자저하의 명을 받들어 주모자 유태경 이하 역모자들을 체포한다.”
남휼의 말이 끝나자, 내금위장이 일일이 대신의 이름을 호명하며 체포를 명하였다. 아수라장이 된 편전에서 유태경을 비롯한 대신 여섯이 포승줄에 묶였다. 같은 시각, 눈치를 채고 지난밤에 짐을 꾸려 도망을 나간 주 상궁을 제외하고 감찰상궁 및 흑주술에 가담했던 나인 다섯이 금부로 끌려갔다.
*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온 사당은 걸쇠가 풀려 있었다. 주 상궁은 초라한 보따리를 가슴에 끌어안고서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보시오, 적무. 안에 계신가.”
어둑신한 공간에 햇빛이 들이쳤다. 붉은 천이 난삽하게 걸려 있는 음침한 사당이 환히 드러났다. 주 상궁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보따리를 툭 떨어뜨렸다. 종이를 덮고 쓰러진 여인 위로 바람이 불었다. 팔락팔락 종이가 날렸다. 검붉은 피로 적셔진 종이에는 아름다운 여자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주 상궁은 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적라……!”
피를 토하며, 눈을 뒤집고 죽은 여인의 처참한 몰골이 믿을 수가 없어 주 상궁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즉위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역모를 밝히는 일 역시 물속을 비춰 보듯이 환히 드러나 형문도 압슬도 낙형도 필요 없었다. 조인호와 조일문 대감이 보유하고 있던 이름이 적힌 명부, 세세한 강무 계획은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호랑이가 호랑이를 잡는다 하였습니다. 세자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 둘 궁술을 가진 자로 제가 선택되었습니다.”
조인호의 증언에 조정이 뒤집혔다. 한 번도 세자의 사람이 아닌 적이 없었다는 인호는, 세자와 은밀히 논의하여 사조룡 흉배 상단을 정확히 활로 맞히기로 하였다고 말했다. 흉배 속에 미리 준비되었던 피가 터지게 하여 세자를 다른 살수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몸을 대피시킨 후 역모의 상황을 수습하여 궐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하였다. 다만, 독화살에 스친 세자를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해 도성으로 오는 일자가 늦춰졌다고 밝혔다. 조일문 대감의 최측근이었던 남인 일파 역시 차례로 약속이나 한 듯 증언을 거듭했다. 강무가 시작되기 전, 광안에게 미리 고변했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스스로 판 구덩이에 모조리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을 광안은 고요히 지켜보았다. 추국장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광안이 친국을 한 사안은 달리 있었다. 궐내의 흑주술이었다. 그 밤 사라졌던 나인 둘과 장정 넷은 모두 남휼의 지시하에 붙잡혀 있었다. 이미 모든 고변이 이루어졌고, 증좌는 넘치게 많았다. 적무의 사당에서 끌려온 주 상궁은 적극적으로 모든 증거를 넘기며 오로지 한 사람만을 가리켰다. 광안은 주 상궁의 열기 띤 고변에 권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만하라 손을 들고, 오로지 하나만 확인하였다.
“강 나인에게 위해를 가한 자가 누구냐.”
우물쭈물하는 상궁 둘과 나인 일곱에게 벌겋게 달군 인두가 내려졌다.
“중전마마, 아니 대비마마이시옵니다.”
비명 속에 끝없이 고변이 이어졌다. 넘치는 말을 모두 듣고서 광안은 다시 한 번 더 고하라 명하였다. 그들이 더 토해 낼 말이 없을 때까지 매일 불러내어, 매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하라 명한다 하였다.
대비마마이옵니다.
대군을 용상에 앉히고자 하였습니다.
적무를 불러 궐내에서 사술을 행했습니다. 능묘를 파헤치고 소나무 숲에서 흰 개를 죽였습니다. 동궁전 저주를 위해, 매화나무에 쥐의 사체를 걸고, 고양이 사체를 섬돌과 석주 아래 묻었습니다.
동궁 저하의 발작을 일으키려 대군의 피를 빼어 흑주술에 사용했습니다.
대비마마가 강 나인이 용종을 품은 것을 알고 살해를 사주했습니다.
대비마마이옵니다.
모두 대비마마이옵니다.
돌림노래처럼 대비의 죄상이 궐을 돌고 또 돌았다.
*
대군의 맥을 짚던 양평군이 방을 나서며 고개를 저었다. 피골이 상접한 대군을 안고서 대비가 숟가락으로 입을 벌렸다.
“대군, 탕제를 드세요. 대군!”
친정은 이미 처참하게 가루가 되었다. 비리와 축재의 상징이었던 유태경의 집은 성난 백성들이 문을 부수고 몰려 들어가 훼손되고 약탈당했다. 유태경은 유배길에 올랐고, 어미를 비롯한 가족은 모두 관노가 되었다. 대비 역시 곡기를 끊은 지 며칠이 지났는지 몰랐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대군을 살려야 했다. 통한의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제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를 파리해진 대군의 입 속으로 흘려 넣었다.
“대군.”
희미하게 눈을 뜬 아가가 못난 어미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대군!”
애간장이 끊어지는 절규를 하였다.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내가 어리석었어요, 대군.”
아가는 엄마의 품속에서 고개를 한 번 저었다. 툭, 팔이 나뭇가지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군, 대군, 대군! 대군!”
미친 듯이 부르며 대비가 대군의 뺨을 두드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대군, 이럴 수는 없습니다.”
가슴에 껴안고 엉덩이로 바닥을 찧으며 대비가 비명을 질렀다. 달려 들어온 상궁과 내의관들이 중전의 품에서 대군을 떼어 냈다. 소리를 지르며 중전이 대군의 시체로 달려들었다. 소란 속에 옷이 뜯기고, 머리가 산발이 되었다.
기절한 대비는 제 침소에서 눈을 떴다. 기이한 밤이었다. 바람이 따스했다. 열린 창도 없는데, 복사꽃이 방에 가득한 듯 향기가 넘쳤다. 대군을 임신했을 때, 커다랗고 탐스러운 복숭아를 땄었다.
눈앞에 똑같은 복숭아나무 가지가 뻗어났다.
희고 큰 복숭아.
대비는 손을 내밀었다.
잡히지 않아 속치마 자락을 부욱 찢어 줄을 만들었다. 복숭아나무 위로 올라야겠다. 길게 매듭지은 천이 가지에 걸렸다.
올라가서, 복숭아를 다시 따야지. 그래서 우리 대군을 다시 맞아야지.
그러다 생각해 보니, 방에서 복숭아를 딸 수는 없었다. 방문은 지키는 이가 있어 나갈 수가 없다.
창만 있으면, 내 이 밤 복숭아나무를 향해 날아갈 텐데.
대비가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거짓말처럼 달처럼 둥근 흰 창이 보였다.
창틀이 너무 높고 작아.
키득키득 웃으며 대비는 보료 팔걸이 위에 베개를 포개어 계단 삼아 창을 향해 올라갔다. 얼굴만 창틀 밖으로 내밀었다. 봄바람이 불고, 복숭아 향이 날렸다. 발을 바싹 들자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날아가는구나.
아득한 기분이었다. 귓속이 먹먹했다.
대군이 태어날 때 힘차게 울었지.
대군의 울음소리가 먹먹한 귓속으로 잘게 잘게 메아리쳤다.
*
“전하, 살구꽃입니다.”
만개하여 흐드러진 살구꽃을 보며 은우가 아이처럼 들떴다. 성정각까지 천천히 산책을 하던 길이었다. 기억하시나요, 묻는 대신 은우는 살구꽃이 참 예쁩니다, 꽃처럼 다정히 웃으며 말하였다. 광안이 그렇군, 심심하게 답하였다.
‘금상의 자리는, 그런 법이다. 날이 좋아도, 날이 흐려도, 꽃이 피어도 꽃이 져도 모두 주상의 탓 아니냐. 광안이 챙기지 못하여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라. 대신 뭐든 내게 말하렴.’
대왕대비마마가 은우의 손을 잡고서 그제도 말씀하셨다. 은우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힘든 게로구나.”
“괜찮습니다.”
“매번 괜찮다 소리. 내가 힘들다. 좀 쉬어야겠어.”
강선이 흠흠 헛기침을 하였다. 광안의 말법이 중전에게 하는 예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못 말리겠다는 듯 광안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싫으냐?”
은우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더 좋사옵니다.”
“그렇다 하지 않았느냐.”
광안이 강선에게 큰 소리로 말하고는, 성정각 월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은우의 걸음이 광안을 쫓지 못한다. 봄바람에 붉은 용포가 나부꼈다. 큰 걸음으로 누대 위에 서더니 광안이 긴 팔을 뻗어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은우는 가지 사이로 들이치는 봄 햇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광안의 손에 소복이 흰 꽃이 꺾여 있다.
“이리로.”
광안이 팔을 벌렸다. 중전복을 입어 거추장스러운 차림이지만, 은우는 폭이 넓은 치마를 양손으로 잡아 들고 계단을 조심스레 올랐다. 상궁들이 급히 양쪽으로 시위하였다. 혹여나 배부른 중전이 넘어질까, 마음을 졸이는 중이었다.
“괜찮네. 이 정도는.”
“괜찮다는 중전마마의 말씀을 믿지 마시게.”
공을 인정받아 특별상궁이 된 미향이 궁인들을 향해 말하였다. 은우가 까르르 웃었다. 광안을 향해 두 계단 더 올라갔다.
“이리로, 가까이.”
광안이 내민 손을 잡으며 누대 위로 올라섰다. 백옥 떨잠 옆으로 흰 살구꽃이 꽂혔다.
“예쁘다.”
광안의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여름이면.”
은우가 말했다.
“살구를 따서 주마.”
광안이 답하며 은우의 이마를 매만졌다. 손은 사랑스러운 잔머리를 어루만지고 볼록한 이마를 스치어, 동그란 콧날을 지나 아이처럼 도톰한 윗입술을 쓰다듬었다.
-終-
뉴토 [T] 공금
[외전]
一章
열흘이다. 열흘째 궁으로 부르지 않으셨다.
은우는 손을 꼽아 보았다. 산사에서 얼굴을 뵙고, 사흘 후 거처를 남상경 대감 사저로 옮기라는 전갈을 받고도 또 이레가 지났다. 내일은 궁으로 들어오라 하시겠지, 내일은 또 내일은, 이렇게 하루하루 기다리며 하루가 지났다. 금상에 오르신 모습을 볼 수 있겠다며 들떠 하던 미향도 은우의 눈치를 살피며 더 이상 궐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남상경 대감과 부인은 홀몸이 아닌 은우를 역시나 홀몸이 아닌 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아끼고 보살펴 주었지만 은우는 내내 궐의 부름만 기다렸다.
남휼 장군은 내내 주상의 곁을 지키는지라 집에 거의 들어오지 못했다. 광안을 시해하려던 무리가 혹여 다시 음흉한 간계를 꾸밀까 잠시라도 경계를 늦출 수 없다 하였다. 오늘이나 내일쯤은 잠시 들른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은우의 신경이 온통 문밖으로만 쏠렸다. 남휼이 가져올 궐의 소식, 아니 주상의 말씀이 간절했다.
“아씨, 남휼 나으리 오셨습니다.”
별당 문밖에서 행랑아범이 고하는 목소리에 은우는 급히 일어섰다. 밤에 잠시 들러 가솔이 깨기 전 이른 새벽에 다시 입궐했던 저번과 다르게 오늘은 낮 시간에 집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는지 순간 아랫배가 뭉치는 느낌이 선명했다. 아, 작게 소리를 내며 은우가 배를 감싸며 몸을 구부렸다. 미향이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도로 자리에 앉혔다.
“아씨, 괜찮으세요?”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놀랐나 봐. 괜찮아. 어서 문을……, 미향아.”
미향이 문을 여는 동안 은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휼은 궐에서 막 돌아온 참인지 내금위장 군복 차림이었다.
남휼은 은우를 향해 고개를 숙이려다 멈추었다. 대감 내외와 남휼을 제외하고는 이 집안 내 사람들 모두 은우는 남상경 대감의 조카뻘 되는 먼 친척이고 따라서 남휼의 친척 누이동생으로 알고 있다.
“들어오세요. 오라버니.”
은우가 광안의 소식에 갈증 나는 마음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말하였다.
미향을 포함해 주위를 모두 물리고서 별당 방 안에 남휼과 은우가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남휼이 다시 일어서더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깍듯한 공대도 익숙해질 법한데 들을 때마다 은우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묻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핏발 선 눈이나 거칠해진 얼굴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휼 장군이 몸이 상했다면 광안 역시 무리하고 있을 터, 보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었다.
“나으리. 전하께오선…….”
은우는 남휼을 부르고는 묻지 못하는 물음을 삼켰다.
“아니,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안방마님께서 내내 나으리 걱정이셨습니다. 제대로 먹고 잠은 자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별일 없이 무탈하게 잘 있는지, 대감마님께 소식을 전해 달라 몇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허허, 어머님도 참.”
남휼이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어머님이 정이 많으셔서 자식 일에 안달복달 그러십니다. 아버님께서 못마땅해하셨겠습니다.”
“네, 아들 소식을 들으러 입궐함이 아니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남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궐은 차차 안정이 되어 갑니다. 죄인들을 심문하여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항아님에 대한 위해도 치죄하였습니다.”
“네, 저도 간간이 풍문으로 전해 듣습니다.”
남휼 대감댁 가장 안쪽에 위치한 별당에 꼭꼭 몸을 숨기듯 머무르고 있다 하여도 광안의 세상이 되고 조정이 뒤집힌 이야기는 도성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남상경 대감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오는 이들이 이른 아침부터 대문 밖으로 족히 수십 명은 줄을 섰다. 누구도 지금은 만날 시기가 아니라는 대감의 거절을 문지기가 매번 전하느라 곤욕이라는 이야기도 집안의 시비들의 입을 통해 미향이 전달하였다.
오직, 은우가 듣고 싶은 단 한 사람 광안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었다. 남휼을 보니 억누르며 참아 왔던 그리움이 불쑥 불쑥 솟아올라 가슴을 헤집었다. 한마디 전갈도 없는 무심함에 마음이 저렸다. 서궤 모서리에만 시선을 두고 그리움도, 서운함도 삼켜 내려 애썼다.
“전하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은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옥체는, 강녕하신지요.”
“네.”
“강무 이후로 몸이 많이 수척해지셨던데……. 침수는 잘 드시는지, 수라는 거르지 않으시는지,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은 없는지.”
남휼이 안타까움을 담고서 은우를 바라보았다. 묻지 못하는 물음을 알고 있으니 그리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마치 오라비 같은 눈이었다. 은우는 몇 번이고 다짐하며 다물었던 입을 열고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설움을 봇물처럼 터뜨렸다.
“전하는, 전하는……. 어찌하여 저를 들이지 않으시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궁금하고. 어떻게 이리도 매정하게 저를…….”
은우는 터져 나오는 말에 섞이는 울음을 참으려 입을 가렸다. 아무리 이해심이 넓은 사람이라 하여도 광안을 지근에서 모시는 내금위장이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강녕하시다니 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면 제가 아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또, 무슨 말이든 전하여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은우가 눈물을 삼키고 조용히 웃었다.
피로감 때문인지 좀 쉰 목소리로 남휼이 은우에게 말했다.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네?”
“많이 수척해졌던데, 잠은 잘 자는지, 밥은 잘 먹는지, 마음 불편한 일은 없는지 물으십니다.”
“아.”
은우는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불안하고 애타는 마음을 보인 일을 후회하였다. 분명 주상 전하는 맹수에게 공격받고 독화살을 맞고 앓았다는 사실조차 쉬쉬하실 테다. 말끔하게 건강을 찾은 듯 용상에 앉아 잘 벼른 칼날처럼 꼿꼿하게 버티고서 주상의 몸과 마음을 가늠해 볼 조정의 무리들을 상대하시겠지. 그런 주상을 밤낮으로 지켜 낼 남휼에게 제 불안을 전해 달라 시위할 수는 없었다.
벙긋거리다 마는 은우의 입술을 읽었는지 남휼이 설명을 더하였다.
“전하께오선 그래도 잘 버티고 계십니다. 상처는 많이 회복되었고, 양평군 수어의가 극진히 예후를 돌보고 있고 저 역시 미진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네, 다행입니다. 다 잘되었습니다. 진정 감사합니다.”
남휼이 은우의 표정을 살피며 머뭇머뭇 말을 덧붙였다.
“항아님께……, 이곳에서 무엇이든 입에 당기는 게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맘껏 해 달라 하여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아무 근심 없이 마음 편히 잘 지내라고, 그리하면 곧 볼 수 있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은우는 잔잔한 웃음을 띠우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무래도 나으리가 더하신 말씀 같습니다.”
남휼이 으흠,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그런 말 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으리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만 분명 그런 마음입니다. 제가, 전하를 열 살도 안 되어서부터 봐 왔습니다. 분명 전하의 마음이 그러하시니 제 말이 거짓은 아닙니다.”
우렁우렁 높아지는 목소리에 은우가 약간 소리 내어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부디 제 말씀도 전해 주십시오. 잘 먹고, 잘 자고, 대감마님과 안방마님의 정성스런 대접을 받고, 착하고 어여쁜 영서 아가씨가 말벗이 되어 하루하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이 지낸다고.”
안심시키려 하는 거짓말만은 아니었다. 모두 정이 깊고 성품이 온후하여 좋으신 분들이었다. 다만, 마음이 닳도록 그를 기다리느라 시간이 더디 갈 뿐이었다.
은우는 제 마음을 다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저는 복중 아기씨와 건강히 잘 있다고. 그러니 아무 염려 마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남휼이 가만히 은우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남휼이 나간 후, 미향이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는 발걸음이 몹시 급했다.
“입궐 소식이지요?”
미향은 산사에 머무른 이후, 아무리 은우가 마다해도 꼬박 꼬박 말을 높인다. 은우가 못내 서운해하면 손을 꼭 쥐고는 “마음은 똑같아. 영원히 우리는 동무니까. 그래도 주상 전하의 아기씨까지 품은 분을 그리 하대하면 나 끌려가서 벌 받아. 알잖아, 너도 내 입장이라면 분명 그랬을 거잖아.”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달랬다.
은우는 미향을 보며 잔잔히 웃었다. 미향이 앞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들뜬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오늘은 좀 있으면 해가 기울 테니 내일입니까, 뭘 준비하면 될까요. 가마는 궐 앞까지는 타고 가도 되겠지요. 많이 걸으시는 건 힘들어 아니 됩니다. 어지럼증이 좀 가라앉아야 할 텐데……. 이리 부실하게 드시니.”
은우는 미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미향이 내민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은우의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 경혈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어째 얼굴이 이리도……. 속이 또 안 좋으세요?”
“아냐, 견딜 만해.”
“궐에 가서 주상 전하 한 번만 뵈 오면 다 나으실 겁니다. 복중 아기씨가 주상 전하가 그리워 밥도 싫다, 잠도 싫다 그러시는 겁니다. 제가 얼른 나가서 미리 채비를 다 해 놓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미향아.”
“네, 네.”
“궐에 가지 않아.”
“네?”
“부르심이 없었어.”
“아니, 왜.”
“글쎄다.”
은우가 덤덤히 답하였다. 그 모습이 더 딱해서 미향이 손을 토닥거렸다.
소문이 돌고 있다. 세자빈이 없이 왕위에 오른 경우가 없다고 조정 대신들이 매일 같이 주상께 아뢰고, 궐내 제일 어른인 대왕대비를 찾아 국모의 자리를 비운 채로 이리 시간을 흘려보내선 아니 된다 목소리를 높인다 하였다. 국상 중인 지금이라도 중전 마마를 하루빨리 간택하라 재촉한다 했다. 어느 파이건 상관없이 중단시켰던 세자빈 간택을 중전 간택으로 바꾸어 즉시 거행해야 한다고, 그 일만큼은 한목소리를 낸다 하였다.
장안은 재간택 후보에 뽑혔던 모든 규수들이 국상 중임에도 쉬쉬하며 새로운 노리개를 맞추고 옷을 맞추느라 수선이었다. 이미 세자빈으로 내정되었던 유당파 여식이 후보에서 제외된 만큼, 누가 세자빈 아니, 중전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상황이 이런데, 은우를 어떻든 궐로 하루바삐 불러 곁에 두시고 후궁 첩지라도 내리셔야 하지 않나, 미향은 주상 전하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기씨를 품은 걸 아시고 기뻐하셨다는데, 혹여 마음이 달라지신 겐가. 아니라면 만에 하나, 혹시 정궁이 아닌 후궁에게서 장자는 결코 보지 않으려 은우를 부르지 않으시는 건가.
미향이 소일거리 삼아 집안일을 거들려 하면 은우가 대감마님의 조카뻘 되는 친척이고 미향은 은우의 몸종인 줄로만 아는 하인들이 궐 소식이나 중전 간택에 관한 소문을 재밋거리로 떠들곤 했다. 오히려 미향이 잠을 못 이루며 밤새 뒤척거리고 입맛이 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은우는 오죽할까…….
“나 답답해. 문 조금만 열어 줄래?”
“으, 응. 아니. 네네.”
미향이 발딱 일어나 장지문을 활짝 열었다. 은우는 미향이 돌아선 사이에 터지려는 눈물주머니를 진정시키려 양 손바닥으로 눈을 한 번 꾹 눌렀다.
별당 뒤 공간은 외부인은 물론 집안 사람도 잘 드나들지 않아 늘 조용했다. 방문을 활짝 열자 좁은 툇마루 너머로 자그마한 정원이 보였다. 풀은 시들고 잎이 떨어진 메마른 나무가 전부지만, 봄이면 작은 꽃이 피고 새순이 돋아 소박한 정취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단단한 매화나무 가지 끝을 매만지듯 살펴보았다. 광안이 좋아하던 궐 안의 홍매화가 떠오르고, 성정각 살구나무가 뒤이어 떠올랐다. 봄이면, 살구꽃을 따 주마 약조하셨는데……. 가슴이 쓰라리다. 그 봄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까.
은우는 시선을 멀리 던져 나뭇가지 위 희뿌연 겨울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게 숨을 들이켜자 갑자기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 잔기침이 터졌다. 실은 그제 밤부터 으슬으슬 몸에 한기가 들었지만 살뜰히 살피는 대감 내외께 심려를 끼치기 싫어 애써 숨기는 중이었다.
“이런, 이 일을 어쩌나.”
미향이 화들짝 놀라며 문을 닫았다.
“괜찮아.”
“고뿔이라도 걸리시면 큰일입니다.”
미향이 은우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다른 한 손은 제 이마에 올리고선 입을 볼록하게 모으고 눈썹을 찌푸렸다.
“열이 있는 것 같아요. 얼른 제가 안방마님께 여쭙고 약제라도…….”
은우가 일어서려는 미향의 손을 잡아 도로 자리에 앉혔다.
“아니야. 걱정 끼쳐 드리기 싫어. 아프지도 않아. 이건 그냥 오늘 밤 푹 자면 다 괜찮아져.”
미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장에서 도톰한 처네(천의)를 꺼내어 은우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잠시만 기다리셔요, 따뜻한 차를 가져올게요.”
미향은 급히 문밖으로 나갔다. 찬모에게 부탁하여 꿀차를 가져올 요량이었지만 일부러 빙빙 두르며 사랑채로 가는 통로 근처를 오갔다. 마침 눈에 띈 행랑아범을 붙잡고 말을 늘어놓았다.
“혹시 고뿔에 좋은 탕제를 지어 둔 게 있을까요?”
연유를 묻는 행랑아범에게 글쎄 별당 아씨가 괜찮다고 하시는데 열이 오르고 기침이 심한 게 그냥 두고 있기는 안심이 안 된다며 수선을 떨었다.
“저런, 저런. 홀몸도 아니신데 큰일이지. 그런데, 약제는 내 소관이 아니라 마님께 여쭈어봐야 하는데 지금 바로 안채로 가 보겠소.”
안채로 가려는 행랑아범에게 미향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마님께 심려를 끼치기 싫으시다고 한사코 마다하시니, 혹시 내금위 나으리께 조심스레 여쭤보면 어떨까요?”
행랑아범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급한 걸음으로 사랑채 안으로 들어섰다.
미향이 생긋 웃고는 부엌으로 총총 걸어갔다. 뜨거운 꿀차를 준비하며 남휼의 부름을 기다렸다.
*
보름달이 떠오른 한밤이었다. 환한 달빛을 품은 마당에 그림자 두 개가 길게 드리워졌다. 별당 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二章
조용하지만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남자는 내별당채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앞을 지키던 창복이 금세라도 빼어 들 듯이 쥐고 있던 칼자루를 놓고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앞서 걸어오던 남자가 멈춰 서서 절을 올리는 창복을 내려다보았다. 검지를 들어 입술 위에 놓고 쉿,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하였다. 검은 갓을 쓰고 속에 털을 덧댄 짙은 색 철릭을 입은 남자는 검을 지니고 있었지만 직위를 나타내지 않은 변복을 하였다. 한 발 뒤처져 따르는 남휼 내금위장도 역시 비슷한 차림새였다.
창복과 남휼을 밖에 세워 두고 남자는 조심스레 마루에 올라 방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기 전 하아, 남자가 조용히 내어 쉬는 숨이 검은 겨울 밤공기에 희게 퍼졌다.
장신인 남자는 고개를 많이 숙이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발에 닿는 방바닥이 뜨끈하여 마음이 놓인다. 색색 여인의 잠든 숨소리가 고와서 다시 마음이 놓인다. 코로 들이켜는 숨에 지독히 그리웠던 향이 묻어나 잠시 멈춰서 몇 번이고 깊은 호흡을 거듭한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에 혹여 잠이 깰까 남자는 가만가만 움직여 여인의 머리맡에 앉았다. 달빛만이 희미하게 비추는 어둠 속에서도 남자의 눈에는 여인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는 듯하다. 남자의 손이 여인의 얼굴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닿지 않은 채로 동그란 이마와 감은 눈 아래 부드러운 속눈썹을, 몽실몽실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을 그리듯이 매만졌다. 여인의 마음을 알고 있다. 애타게 부름을 기다린다는 것을……. 마음을 끓이다가 앓기까지 하나 싶어 속이 아렸다.
행여 몸이 탈이 나진 않았나, 얼굴이 많이 상하지는 않았나 걱정이 되어 남휼을 보냈더니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렀다가 저녁 무렵 다시 궐로 돌아온 남휼이 은우가 아프다고 고하였다. 약한 고뿔이라 하였지만, 광안은 내내 안절부절못하였다.
남휼의 보고를 받자마자 양평군 대감을 불러 급히 약제를 지어 가라 명하였다. 은밀히 다녀온 양평군이 복중 태아나 은우가 건강하다 하였지만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당장 은우를 궐로 불러들이라 명하여 곁에 두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고 억눌러야 했다. 아직 은우의 회임을 조정 대신들은 알지 못한다. 은우가 어디에 머무르는지도 모른다. 대비가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로 큰 상해를 입은 후 실종 상태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광안의 아이를 가진 은우가 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조정이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이다. 은우는 그저 서책을 관리하는 나인으로도 충분하다, 전하 곁에만 있게 해 달라 고집을 부릴 터……. 광안은 고개를 저었다. 은우는 결코 궁인으로 궐문을 들어서서는 아니 된다.
광안은 잠이 든 은우의 이마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이제 열이 거진 다 잡혔는지 잔잔히 땀이 배어난 이마에는 열감이 미미하게 느껴졌다. 양평군이 보고하길, 계속 긴장을 풀지 못한 상태로 있어 기력이 처지니 잠을 편히 잘 수 있도록 침을 쓰고 약을 썼다고 하였다.
‘대감, 명의는 명의일세. 업어 가도 모르겠구나, 강은우.’
처방 덕분인지 깊이 잠든 은우를 내려다보며 광안이 미소 지었다. 한 번만 그 뺨에 얼굴을 대보고 싶은 욕심을 억누르며 광안은 천천히 일어섰다.
으으응, 은우가 약한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며 얕게 앓는 소리를 냈다.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광안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은우의 배 위에 올렸다. 손바닥 아래로 크지는 않지만 제법 팽팽히 부푼 배가 느껴진다. 절로 웃음이 지어져 입이 벙싯 벌어진다. 조금만 더 느끼고 싶어 가만히 상체를 아래로 기울였다. 은우의 숨결이 코끝에 와닿았다. 살며시 벌어진 입술이 보인다. 한 번만……. 잠시만……. 망설이며 멀어지지 못하던 입술이 벌어진 은우의 입술에 맞닿았다. 은우는 살풋 눈을 뜨다 다시 잠이 들었다.
*
“일어났어요?”
영서 아씨다. 이른 아침부터 별당 안채 문 앞에서 저리도 거리낌 없이 친근하게 은우를 찾을 이는 남상경 대감의 막내 따님밖에는 없다. 은우는 머리를 빗다 말고 면경을 밀어 두고는 일어섰다.
“네, 들어와요.”
은우가 문을 열자 영서는 냉큼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서 마루로 올라섰다.
“으아, 추워 추워. 내당서 예 별당까지 오는데도 왜 이리 추운지.”
“이리로 앉아요. 여기가 제일 따뜻해요.”
은우는 아랫목으로 영서의 손을 끌었다.
“아니, 아니. 거긴 언니 자리이고, 난 여기.”
보료를 마다하고 영서가 비스듬히 옆자리로 둔 방석을 끌어다가 앉았다.
“어때요? 어제 고뿔 있다고 의원도 다녀갔다는데, 괜찮아요?”
주상이 직접 보낸 어의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영서는 그저 동네 의원이 다녀갔다고 생각하고선 가벼이 물었다.
“네, 한결 나아졌어요.”
“다행이다. 다행!”
영서가 짝 양손을 맞부딪치며 기뻐했다.
영서는 은우가 누구인지 일러 주는 대로만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조카뻘 되는 먼 일가친척인 은우가 친정 부모를 일찍 잃은지라 임신 중에 약해진 몸을 요양할 겸 이 집에 잠시 머무른다고 철썩 같이 믿었다. 영서는 안 그래도 심심한데 잘되었다며 은우 옆에 붙어 종알종알 수다를 떨고 배냇저고리를 같이 만들자며 바느질감을 들고 오곤 했다. 영서 위로 은우 또래 언니가 있었지만 어렸을 적에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였다. 무뚝뚝하고 나이 차이 나는 오라버니만 있어, 영서는 내내 어릴 적부터 외로웠다며 푸념이었다.
“이제 그럼 기침도, 열도 없는 거죠?”
“그럼요, 안 그래도 대감마님과 안방마님께 아침 인사 여쭈러 가려던 길이에요.”
“아니, 아니. 가지 않아도 되어요. 인사 오지 말라고 그 말씀 전하라 하셨어요. 오늘 조반도 별당으로 들여가라고 지시하셨어요. 언니 날도 추운데 왔다 갔다 고뿔 심해진다고…….”
“정말 괜찮은데…….”
매일 아침 인사는 굳이 안 해도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은우는 빠짐없이 문안을 드리고 안채에서 영서와 같이 조반을 먹었다. 이것저것 살갑게 챙겨 주시는 마님 덕분에 은우는 깔깔한 입 속으로 한 숟갈이라도 밥을 뜨고, 삼키기가 무섭게 밥그릇에 또 올려 주는 고기찬을 마다 못해 한 숟갈 더 먹곤 하였다.
“어여 말끔히 나아야죠. 홀몸도 아닌데, 게다가 서방님도 곁에 없는데 아프면 너무 서럽잖아요.”
은우가 조용히 웃었다.
영서의 서방님은 열흘에 두세 번 처가에 들러 하룻밤씩 머무르다 갔다. 영서는 은우의 서방님이 도통 들르지 못하는 이유가 멀리 지방에서 근무하는 관리이기 때문인 줄로만 알고 있다.
“그러게요. 서방님 뵙고 싶네요.”
“그쵸? 그래도 가뜩이나 입덧에 어지럼증도 있는데 시댁보다는 친정이 편하니 푹 쉬고 건강해져서 가세요. 할 수 없죠, 뭐. 서방님은 꿈에서 자주 나오시라고 하는 수밖에.”
영서가 까르륵 웃으며 말했다.
은우는 문득 제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다가 내렸다.
“그래서 그런가……. 어제 꿈에 나오셨어요.”
“어머, 정말? 정말? 뭐라고 하세요? 잘 있냐, 건강하냐 묻고 꼭 안아 주시던가요?”
영서의 수다에 은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마나, 진짠가 봐요. 꼭 안아 주셨구나!”
“아니, 그냥……. 얼굴이 가까이에서 보였어요. 아침에 깨고도 너무 생생하여 잠시 얼떨떨했어요.”
은우는 눈을 살풋 감았다. 부드럽게 배를 감싸던 손길이 떠올랐다. 첫 입맞춤처럼 머뭇거리며 닿던 입술도…….
*
새벽빛으로 하늘이 어슴푸레 열리기도 전에 궐의 하루가 열린다. 궁녀들이 소속된 일터를 향해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수라간 아궁이의 굴뚝에서 오르는 흰 연기가 짙고 차가운 하늘로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주상께 올릴 초조반을 비롯하여 조수라에 올릴 찬을 준비하는 수라간의 궁녀들의 손이 재바르게 움직였다.
세답방에서 베로 지은 용포를 엄중한 손길로 다림질하는 궁인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숨을 지그시 멈추고 주상을 보듯 예를 갖추며 용포를 손질하였다. 같은 하늘, 같은 궐이지만 그 모든 일의 중심은 새로운 주군이다. 입이 있되 말하지 말 것을 명받은 궁녀들은 궐을, 아니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역모와 저주에 대해 속삭이지 않는다. 궐 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이 반복되었다.
광안이 용상에 오르고 광안의 시해를 도모하던 유당파 일부가 처형되었다. 뒤이어 무녀를 끼고 벌인 왕세자 저주 사건과 강 나인 살해 시도에 대해 관련자들을 형문하였다. 증좌와 고변은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군을 국왕의 자리에 올리기 위하여 선대왕의 후비, 대군의 친모가 꾸민 역모였다. 당장 대군과 대비를 폐서인하고 죄를 철저히 물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요구에도 광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광기로 피바람을 일으키리라 예상했던 군주의 신중함에 조정은 조용히 술렁이기만 했다.
급격히 쇠약해진 대군의 숨이 끊어지던 밤, 대비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었다. 대비가 적무와 같이 꾸민 저주살이 하늘의 분노를 사서 되려 두 모자를 해한 것이라는 풍문으로 도성 안팎이 시끄러웠다. 죄인으로 상을 치를 것인지, 국상을 치를 것인지 한차례 격론이 있었다. 예를 논하며 대신들이 장례 의식을 놓고 골몰하는 동안, 광안은 도리와 예법에 따르라는 명 외에 뜻을 밝히지 않았다. 갑론을박 끝에 죄인의 신분으로 대비와 대군의 짧은 장례를 치른 후, 궐내 소란은 가라앉고 혼란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
편전은 텅 비어 있었다. 남상경 대감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위로 젖혀 올렸다. 천장이 높고 바닥은 넓어 툭 트인 공간이지만, 편전에는 언제나 밀도 높은 공기가 호수처럼 가득 들어차 있는 것만 같았다. 어좌 위의 주상도, 아래에 있는 신료들도 어깨를 짓누르는 육중한 무게를 견디어야 하는 이곳에 주상의 부름을 받고 들어섰다. 남 대감은 단상 위의 어좌를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들어 어좌에 우묵하게 고여 있었다.
“오시었소.”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보니 주상이었다. 따르는 내관 한 명 없이 혼자 편전에 들어서고 있었다.
“신 남상경 부름을 받들어 전하를 뵈옵니다.”
절을 올리자, 광안이 다정하게 물었다.
“잘 지내셨소, 건강은 어떠하시오.”
광안의 안색은 아직 혈기 없이 파리했다. 평소에도 눈처럼 흰 피부라 다른 이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남 대감은 거리를 두고서도 단박에 광안의 건강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휼이 거진 다 회복되시었다 했지만, 간헐적으로 열에 시달린다고 하였다. 약해졌던 옥체에 가해진 충격이 너무 컸던 까닭이다. 아물던 상처가 다시 덧나고, 완전히 해독되지 않은 독성 때문에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였다.
“늙은이는 지나치게 건강합니다. 전하.”
“좋소. 기쁘오.”
광안이 편안히 웃었다. 건강을 염려하는 남 대감의 물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웃음에 더해 농을 섞어 안심을 시키려 하였다.
“나는 멀쩡하고 건강하오. 황소도 아니, 호랑이도 맨손으로 잡을 정도요.”
호랑이를 입에 올리며 광안은 허허 여유로이 웃었다.
三章
“전하.”
남상경 대감은 어좌에 앉은 광안의 모습에 새삼스레 가슴이 떨렸다. 광안이 무사히 돌아와 더없이 기뻤지만, 즉위한 이후 내내 조마조마 했었다. 수년간 끈질기게 광안을 핍박하고 결국 강무에서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모의를 한 작당에 대한 처벌의 범위가 못내 마음을 졸이게 하였다. 영상을 비롯한 주모자에 대한 처단은 당연했지만, 조금이라도 연루가 의심이 되는 모든 이를 광안이 도륙해 버릴지도 몰랐다. 복권된 대북파의 기세로는 피비린내로 궐이 오랫동안 뒤덮이겠구나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광안은 외려 유당파 대신들에 대해 온정을 베풀었다. 대역 죄인으로 모든 지위를 박탈당한 대비와 대군에 대해서도 최대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고 묘를 조성하도록 배려하였다.
이리도 번듯한 성군이 되실 분인데……. 성정이 고운 분인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보십니까. 대감.”
남 대감은 치받는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 채로 주군 앞에 앉아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송구하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죄하였다.
“아니에요. 익숙합니다. 요즘 들어 나를 보는 이들이 대체로 두 가지 표정을 짓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내가 무슨 흑심을 숨기고 있는지 두려움과 의심으로 굳은 표정이거나…….”
광안이 조금 웃었다.
“수년간 방황하던 탕아가 장원급제를 하고 금의환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스승의 표정이거나……. 대감처럼 말입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제가 감히 어찌 주상 전하께 그런 망극한 마음을 품을 수가 있겠습니까.”
“헌데, 대감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대감은 제 스승이셨습니다. 지금도 존경하는 스승이십니다.”
“전하, 망극하옵니다.”
광안의 시선이 편전의 허공을 고요히 가로질러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늙은 대신에게 내려앉았다.
“어린 시절이 가끔 떠오릅니다. 대감의 가르침을 받으러 집을 드나들던 보잘 것 없었던 왕자군을 기억하십니까.”
장대한 기골에 너른 품을 가졌던 남상경 대감은 검을 쥘 때는 매서웠고 서책 앞에서는 단정했다. 선뜻 다가서지 못해 머뭇거리는 광안에게는 더없이 자애로운 눈빛을 보냈다.
“남휼을 더러 부러워했습니다.”
남 대감은 어린 시절 광안의 눈빛이 생생히 떠올라 마음이 저렸다. 엎드린 채로 주름진 양손을 맞잡아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대감은 제 눈을 읽고, 제 속내를 읽고, 늘 아비 같은 마음으로 믿어 주셨습니다. 혹여 제게 누가 될까 조정에서 물러나신 지도 올해로 몇 년이십니까.”
“전하, 소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광안의 말에 망극하게도 눈물이 터졌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둥글게 퍼졌다.
“보십시오. 대감. 이제…… 보잘 것 없던 왕자군이었던 제가 주상이 되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주상이 되어 내린 정승 자리조차 거부하시니 못내 서운합니다, 대감.”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오나 소신은…….”
“알아요.”
광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금위장이 제 곁에 있으니 대감까지 요직을 차지하여 권세를 만들지 않겠다는 뜻임을 압니다. 하오니, 다른 부탁을 들어주시오. 대감.”
남 대감이 광안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주상의 단호한 얼굴을 보며 이번 제안은 결코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요구를 밝히는 광안은 오랜 시간 준비한 말을 선언하듯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대감을 국구로 모시고 싶습니다.”
“전하?”
남 대감은 뜻을 알 수가 없어 잠시 눈을 껌벅였다.
“제 여식은 이미 출가하여…….”
남 대감은 우물쭈물 말을 잇다 멈추었다. 눈이 마주치자 광안이 빙그레 웃었다.
“전하. 혹시, 그분을…….”
“데리고 계셔 보니 어떠합니까. 여식으로 삼기에 그리 밉상은 아닐 텐데.”
광안의 여인, 강 나인을 칭함이었다. 강 나인을 양녀로 삼아 달라, 그리하여 중전으로 책봉하게 해 달라 광안의 복심을 읽으며 남 대감은 유순하고 단정한 은우의 웃음을 떠올렸다. 국모가 되어도 충분할 인품을 갖춘 여인이지만, 그러기엔 넘어야 할 난관이 너무 많았다. 광안의 자질을 의심하는 당파들에게 다시 물어뜯길 빌미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은우, 어여쁘고 착한 아이입니다. 정이 많고 심지가 굳으니 효심도 깊겠지요.”
“전하, 저희 집안에 과분한 분입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부디 대감이 받아 주십시오. 내가 간절히 부탁하오.”
남 대감이 고개를 숙인 채 답을 주지 않자 광안이 자리에서 내려왔다. 손을 뻗어 바닥을 짚고 있는 대감의 손등을 감쌌다.
남 대감은 몸 둘 바를 모르며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전하.”
“저를 좀 봐 주세요.”
남상경 대감은 한 손을 주상에게 잡힌 채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눈높이를 맞추며 주상이 간청했다.
“제가 처음으로 정을 준 여인입니다. 아니, 무척 연모하는 여인입니다. 그 여인을 배필로 맞고 싶습니다. 대감, 장차 태어날 첫 아이에게 내가 겪었던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디 나를 도와주세요.”
오래 전, 글을 배우고 검을 배우던 어린 광안도 하지 않았을 고집을 주상이 되어서 부리고 있다. 광안은 남상경 앞에 아이처럼 앉아 아이처럼 떼를 썼다. 남 대감이 거절의 말을 하기 전에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그러느냐는 책망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 여인이 곁에 없으면 한시도 못 견디겠습니다. 요즘도 매일 밤 대감 집 월담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듭니다.”
광안의 투정에 대감이 눈가에 굵은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전하. 하오시면, 하루 바삐 후궁으로 책봉하시어 곁에 두소서.”
“여인은 한 명으로 족합니다. 제게는 정궁만 있을 뿐, 후궁은 없습니다.”
광안이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저를 좀 봐 주세요. 대감.”
“주상 전하.”
남 대감은 이제는 늙고 거칠해진 제 손을 꼭 잡고서 초조한 내색을 숨기지 못하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려우시겠지만 그 아이를 남 대감이 받아 주셔야 합니다. 내 평생 고마워하며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주군의 깊고 검은 눈, 미친 눈이라 불리는 그 눈을 볼 때마다 선명히 기억해 내던 장면을 남 대감은 습관처럼 다시 떠올렸다. 왕자군 시절, 어린 광안이 처음 남상경 대감의 사저에 오던 날의 기억이다. 사랑채에서 기다리던 대감에게 스승에 대한 예를 갖추며 절을 올리던 모습이 어제처럼 눈에 선하다. 심성이 곱고 머리가 영특하여 어여쁜 아이였다. 누구든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고 마음이 기울어지게 하는 아이는 스스로의 광채를 감추기를 강요받아 온 것처럼 숨소리조차 크게 뱉는 법이 없었다. 한 번씩 물끄러미 바라다볼 뿐, 무엇을 요구하는 일도 없었다. 당연하게 베푸는 작은 호의에도 크게 감사해했다.
국구의 자리를 주겠다는 주상은 차갑고 영민하다. 마주하는 검은 눈은 끝을 읽을 수가 없다. 많은 이들에게는 오직 두려움의 대상이건만, 남상경 대감은 그 눈에서 늘 어리고 어여뻤던, 목마른 여윈 식물처럼 정이 그리웠던 아이를 본다.
“전하. 소신에게 해가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황공한 말씀입니다. 하오나 국모의 자리를…….”
“제발, 대감……!”
남 대감은 남은 말을 목 뒤로 밀어 넣었다. 그리도 원한다는데, 주상의 자리에 올라 오로지 평생 여인은 하나뿐이라는데. 법도와 도리에 좀 어긋나면 어떠한가. 따지고 보면 죄를 짓는 일이 아니다. 또한 누군가를 아프게 하거나 욕되게 하는 일도 아니었다.
*
고요한 그믐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새어들어 온 차가운 밤공기에 반짝 눈이 떠졌다. 문가에 버티고 선 인영을 보고 여인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쉿.”
남자가 몸을 낮추고 가까이 다가왔다. 놀라 벌어진 은우의 입에서 울음처럼 한숨이 나왔다.
“내가 보이느냐.”
“아니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은우는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더듬었다. 차오르는 감정으로 목이 꽉 막혀 어인 일이십니까, 라는 물음도 나오지 않았다. 얼어붙은 겨울밤을 가르고서 아무도 모르게 그가 은우에게 왔다는 사실만 중요했다. 팔을 뻗어 목을 끌어안았다.
“잠시만, 찬 기운이 옮아가면 해롭다.”
남자는 은우의 팔을 풀고 이부자리에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믐밤이라 애를 써 봐도 얼굴은 희미하게 윤곽만 느껴질 뿐이었다. 등잔불을 밝히고 싶지만, 별당에서 비치는 남녀의 그림자를 외부에 알려선 아니 될 일이었다.
은우는 손을 다시 뻗었다. 그 손만 잡고서 광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조심했는데, 내가 잠을 깨웠구나.”
은우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오면, 깨우지 않고 가시려 했습니까.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않으려 하셨습니까.
“먹는 것도, 자는 일도 시원찮다 들었다. 그리하면 아니 된다.”
천치도 아닌데, 어찌 편안히 먹고 자고 그런 일이 가능할 수가…….
은우는 억장이 막혔다. 잡힌 손을 빼어 내고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앉았다. 주상 전하의 뜻이라며, 남상경 대감이 은우를 은밀히 양녀로 맞이하겠다고 하였을 때도 은우는 광안으로부터 대감의 말씀을 따르라는 서찰 한 통을 받았을 뿐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월담을 했지.”
“네?”
광안의 대화법을 알고 있다. 답을 하기 곤란할 때면 슬쩍 농으로 받아치며 상대를 당황시켰다. 조정의 누구도 광안의 말을 당할 수가 없었다. 민첩하지 못하고 둔하다는 은우가 어찌 이길 수가 있으랴.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긴 싫었다.
은우는 어둠 속에서 원망 섞인 눈길을 보냈다.
“어인 일로……. 이 밤에 월담을 하십니까.”
“집 주인의 허락을 받았다. 얼마든 월담을 하라더군.”
“전하. 허락을 받고 월담을 하시는 이유를 여쭈옵니다.”
“모르느냐.”
“모르옵니다.”
토라진 목소리를 알아챘는지 슬며시 손이 뻗어 와 뺨을 스쳤다. 그 사이에 온돌 바닥에 손을 묻어 내내 데운 듯 닿은 자리마다 따뜻한 온기가 번졌다.
“남상경 대감의 별당에…….”
광안은 은우의 얼굴 모양을 가늠하듯이 천천히 손가락이 이마를, 이어 콧날을 쓸었다. 입술에 닿았을 때 저절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숨겨둔 여식이 눈부신 미모라기에.”
그 정도 농으로 무마하고 넘기길 원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은우는 광안을 거부하듯이 벌어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입술을 배회하던 손이 멈추었다. 은우는 조금 얼굴을 뒤로 빼내었다. 원망과 서운함을 꾹꾹 눌러 담아 말하였다.
“전하, 저더러 대감의 여식이 되라 하신 명 역시 연유를 알 수 없습니다.”
“연유라…….”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너울처럼 천천히 떨어졌다.
“차차 이야기해 주마.”
광안이 조금 더 다가왔다. 손을 뻗어 아이를 다루듯 은우의 머리를 두 번 크게 쓸어 주었다. 등을 다독다독 두드리며 말했다.
“다시 눈을 붙이거라. 네게 전할 말은 서찰로 두고 가겠다.”
가다니, 다시 이렇게 가시다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은우는 왈칵 눈물이 솟았다.
이리도 훌쩍 가실 거라면 굳이 손을 빌어 전해도 될 서찰을 품고 이 밤에 왜 오셨단 말입니까.
“잘 먹고, 잘 자고, 아프지 말고.”
은우는 답을 하지 않았다. 하아, 내려 쉬는 입김이 은우의 귓불을 스쳤다.
“은우, 이제 딸이 되었으니 대감 내외께 예쁨도 많이 받고 잘 지내고 있거라.”
담담히 말하는 입술이 미워 은우는 그 입술을 막고 싶었다. 와락 몸을 붙이고, 어깨를 끌어안고, 무작정 입을 내밀어 턱을 더듬고 뺨을 더듬었다. 밀어내려는 광안의 목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을 쳤다.
四章
“싫습니다.”
“잠시, 잠시만.”
광안이 은우를 부드러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은우는 고개를 계속 저었다. 싫습니다. 가지 마소서. 억지를 부렸다.
“은우, 이리 하면 내가 도저히…….”
“……전하.”
은우가 품에 얼굴을 묻고서 가느다랗게 불렀다.
“기어이 가셔야 한다면, 그러하면…….”
서러움으로 젖은 음성이었다.
“입술……. 전하 입술 한 번만 가지게 해 주소서…….”
꿈쩍도 않던 남자가 갑자기 호흡이 커졌다. 거추장스런 갓을 벗어던지고 타래 머리를 더듬어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남자가 얼굴을 기울였다. 서투르던 은우와 다르게 정확히 포개어진 입술은 차갑고도 뜨거웠다.
행여 다시 밀쳐 낼까 은우는 광안의 목을 감고 입술을 깊게 빨아들였다. 아아, 남자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신음까지 모조리 삼키고 싶어 은우는 입을 더 크게 벌렸다.
은우…….
속저고리 고름을 더듬던 손이 멈추었다. 한숨을 삼키며 광안은 은우의 목덜미에 코끝을 묻었다.
“왜 궐로 불러 주지 않으십니까.”
부드러운 살 내음만 맡으며 남자는 답을 주지 않았다.
“나인도 좋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새삼스럽습니다. 전하를 가까이서 뵐 수만 있으면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설마, 그 언약을 지키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시지는 않겠지요. 아무리 제가 대감댁 양녀로 입적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법도는 없습니다. 전하.”
광안이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떨어진 자리가 서늘하여 은우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하여, 너는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겠다?”
“저는 곧바로 잊었습니다.”
“뭐라?”
은우는 높아진 광안의 음성이 못내 신경이 쓰였다. 열기가 가라앉자 이곳이 남상경 대감댁 별당임이 인식되었다.
“진정 기억나지 않느냐?”
“잊었습니다.”
“잊었다고…….”
하아, 남자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짙은 어둠과 침묵 속에 은우는 몸이 까마득한 심연 아래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광안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은우가 중전이 될 길이 없었다. 있을 리가 없다. 주상이 된 광안이 내리는 첩지를 받고 승은 후궁이 된다 해도 가장 낮은 품계가 고작이었다. 왕자 아기씨를 생산한다 하더라도 은우는 서열이 낮은 후궁 중 하나가 되어 물러서 있어야 했다. 지금 조정은 중궁 책봉에 대한 논의로 들끓고 있을 테다. 기름을 끼얹을 수 없다. 그리하여 광안을 다시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다. 광안은 흠 없는 주상이 되어야 했다. 누구도 물고 늘어질 빌미를 주어선 아니 되었다.
“……은우.”
가라앉은 광안의 목소리가 애틋하여 은우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리로.”
어둠이 눈을 가렸다 한들 은우는 알 수 있었다. 광안은 팔을 벌려 품을 내어 주려 한다. 다음 말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가까이.”
은우가 단단한 품에 몸을 내맡겼다. 한참 동안 그대로 품고만 있던 광안이 느리게 말했다.
“야속하구나…….”
남자의 따뜻한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괜찮다. 약속은 나 홀로 지킬 테니, 은우 너는 기억만 해라.”
갑자기 울음이 터져 은우는 광안의 옷깃을 눈물로 적셨다.
*
상참 어전 회의에 모여든 당상관 이상의 대신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홀대받던 세자 시절부터 충실하게 광안을 지지하던 대북파 대신들 중 일부는 전무후무한 역모와 시해를 획책한 유당파에 대한 처벌이 가벼웠음을 불만 삼았다.
“전하, 유사 이래 이토록 천인공노할 역모는 없었습니다. 아직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어떤 망극한 계략을 다시 꾸미고 있을지 모를 잔당을 무리를 색출하여 한 치의 의혹도 남기지 않고, 역모의 뿌리를 완전히 도려내야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대북파 대신들은 울분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다. 견고하고 냉정한 칼바람을 일으키기를 호소하였다. 하지만, 대북파를 제외한 대신들 중 남인이든 서인이든 누구도 ‘잔당’으로 몰리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주상 전하, 이미 역모의 수괴를 처벌하였고 모든 죄상이 낱낱이 밝혀졌습니다. 실체가 없는 잔당을 운운하며 조정을 불안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주상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시지 마시옵소서.”
비난을 받은 대북파의 언성은 더욱 높아졌다. 해묵은 감정의 골이 쉬이 달래지지 않았다. 때마다 반복되는 언쟁을 광안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다만 슬며시 눈썹을 찌푸리거나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짚었다 떼는 행위만으로도 대신들은 말을 멈추고 주상의 눈치를 살폈다. 누구도 광안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불안해했다. 뜨거운 분노보다 차가운 침묵이 외려 더욱 두려웠다. 그러한 두려움을 공유하였기에 양측은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곤 했다.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중전 간택을 서둘러야 한다는 간언을 양측 모두 번갈아 가며 올렸다.
내내 묵묵부답이던 광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렇소. 국모의 자리를 비운 채 보위에 오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소. 과인의 나이가 이미 과년한 지 오래인데 종사의 대계를 이루지 못하는 불충을 걱정하는 신들의 뜻을 충분히 아오.”
대신들은 고개를 번쩍 들어 결심을 굳힌 듯한 주상의 얼굴을 살피고 급히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좋소. 그간 국상 중의 혼례에 대해 망극한 심정으로 고민을 거듭해 왔으나, 선례를 들어 중전을 맞이하는 일을 가장 우선해야 한다는 경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겠소.”
제 집안의 여식을 재간택 후보로 밀어 넣었던 대신들 몇몇이 숨을 죽이고 광안의 입만 바라보았다. 절차에 대해 더 이상 언급이 없자 애가 바짝바짝 탔다. 광안이 왕위를 받은 이후, 삼간택 후보로 뽑히기 위해 눈치를 보고, 정보를 끌어모으고,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줄을 대느라 총력을 기울여 왔다.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하오면, 중단시켰던 간택 절차를 다시 재개하옴이 옳을 줄로 아룁니다.”
“주상 전하, 아니옵니다. 지난번 재간택은 세자빈 간택이었습니다. 중전 간택은 새로이 간택령을 내려 시행함이 옳다고 믿사옵니다.”
간택에 대한 논박은 재간택 후보에 오른 집안과 그렇지 못한 집안으로 나뉘었다. 살벌한 신경전이 오갔다.
광안이 논쟁을 멈추라는 듯 손을 들었다. 잠시간의 침묵 동안 광안은 목청을 높였던 대신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천천히 눈 맞춤을 했다. 누가 외척 권력을 탐하는지 눈과 머리에 새겨 두겠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대신들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경들의 뜻은 충분히 알겠소. 허나.”
광안이 느릿하게 선언했다.
“이미 중전으로 책봉할 여인이 있소.”
일시에 고개를 든 대신들이 광안의 말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둘러보았다.
“형식은 경들의 뜻을 따르겠소. 굳이 간택을 하라 하면 그 여인을 중전 간택 후보에 올릴 것이고, 후궁 교지를 내린 후 중전으로 책봉을 해야 한다면 그리하겠소. 과인은 중전을 법도에 어긋남이 없이 맞이하고 싶으니, 경들이 법도를 알려 주시오.”
대신들은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 못했다. 대체 어느 여인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조차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설마, 설마…… 하는 시선들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어지러이 부딪혔다. 수태를 하지 못한다는 그 궁인인가. 그럴 리가.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다던 궁인이 모처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는 추측이 사실이었나. 그렇다 한들 수태를 하지 못하는 여인이 중전이라니.
느닷없는 선언에 어리둥절해하는 대신들을 남겨 두고서 광안이 일어섰다.
“또한 일러두는데, 필히 명심하시오. 나는 오직 정궁 한 명만 배필로 삼겠소. 승은 후궁이든 간택 후궁이든 차후로 후궁은 두지 않을 것이오. 그리하여 나에게 결코 왕자군은 없습니다.”
술렁이던 대신들이 일순 동작을 멈추고 광안을 올려다보았다.
후궁, 정궁, 왕자군…….
모두 광안의 무거운 울분과 연결된 단어들이었다. 단호히 선언하는 동안 광안의 검은 눈 속에 파르라니 불꽃이 지펴졌다. 서늘하게 굳은 광안의 얼굴을 보며 제 딸을 간택 후보로 넣었던 대신들이 몸을 떨었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단 하나 필히 명심하라는 주상의 뜻을 거역할 시 ‘잔당’의 무리로 지목될 수도 있다는 공포로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수태도 못 하는 궁인이 어이 국모에 오른단 말입니까!”
“왕실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져도 유분수지 중인 출신 궁인이 국모라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상참을 나서면서부터 눈치를 살피던 유당파 출신 대신들 몇몇이 광안의 급작스런 통보로 호들갑을 떨었다. 이번 중전 건은 세력을 규합하여 주상에게 신권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상황을 파악할수록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이없는 중전 책봉을 막겠다던 자들의 명분이 하나씩 사라졌다.
부모 없는 중인 출신이라는 신분은 어느새 주상이 총애하고 당파와 상관없이 두루 존경받는 남상경 대감의 여식으로 되어 있었다. 더구나 수태를 할 수 없다던 궁인은 이미 복중에 주상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궐 안에 돌았던 풍문이 사실이었다. 대비의 치죄를 하던 중 용종을 품었다 의심하여 살해를 시도했다는 고변은 수태도 못 하는 나인을 놓고서 억지로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결코 왕자군을 두지 않겠다는 주상의 뜻이 한층 더 명확해졌다.
또한 그제야 비로소 역모에 대한 온정적인 처리와 대신들 개개인의 약점을 쥐고서도 관용을 베풀어 준 광안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너의 숨통을 쥐었으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다오.’
광안이 필히 명심하라던 오직 한마디를 감히 거역하고 책봉을 막을 명분은 절차와 법도였다. 그 또한 광안의 명에서 막혔다. 법도에 따르겠으니 법도를 알려 달라는 말은 그 여인을 중전으로 책봉할 수 있는 법도를 만들라는 뜻이었다. 국혼에 관한 절차를 관장하는 예조 역시 광안의 숨은 공신 조일문 예조참판이 장악하였다. 더군다나 궁궐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가 익히 예뻐하던 궁녀라 하였다. 대왕대비가 나인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중전 책봉을 지지한다는 입장은 남아 있는 유당파의 핵심에서 먼저 정립했다. 반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지만 이후로는 학덕 높은 유학자임을 내세우는 대신들이 경쟁을 하듯 앞다투어 나인이 중전이 될 수 있는 법도와 근거를 하나씩 마련해 주상에게 고하였다. 중국 황실의 사례와 예기를 비롯하여 사서삼경이 골고루 언급되었다.
광안은 그들이 머리를 쥐어짜 맞춰 낸 법도를 고할 때마다 빙그레 웃었다. 차갑고도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
하늘이 맑았다. 가마에 올라 은우는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은우 나이 일곱에 입궐하였다. 궐문 앞에서 불던 차가운 바람을 기억한다. 도열하여 서 있는 아이들 중 은우는 가장 여위고 키가 작았다. 찬바람에 귀가 떨어질 듯 아팠는데 울면 아니 된다는 당부가 떠올랐다. 혹여 상궁마마님의 눈에 나서 궐에 들어가지도 못 하고 쫓겨나면 어떡하나 두려움에 몇 번이고 이를 악물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기만 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서 가장 어린 시절을 떠올려도 은우는 천애고아에 천덕꾸러기였다. 기억 속 은우는 언제나 친척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었다. 매 끼니 밥은 조금만 먹고 잘 때는 잔뜩 웅크려 몸치를 더 작게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식량 축을 덜 내고, 비좁은 방에 공간을 덜 차지하고……, 눈칫밥으로 키운 눈치로 어떻든 꾸지람을 덜 받으려 애를 썼다.
큰 궐에 가면 옷을 주고 밥을 준다고 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말에 가겠노라 답했지만 은우는 까마득히 높고 커다란 문 앞에서 그만 주저앉고만 싶었다. 두려움으로 숨이 막히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입술을 깨물어 터지는 울음을 애써 참았다. 팔목에 붉은 점처럼 맺히던 앵무새의 선혈이 떠오른다.
‘쥐부리 글러!’
귀를 찢을 듯 큰 목소리와 얼굴 앞에서 휙휙 바람소리를 내며 열 십 자로 너울거리던 횃불도…….
호위들과 궁인들이 길을 트고 호종이 따르는 빈의 가례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길가에 모여들었다. 가마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여머리에 꽂은 백옥 떨잠이 차르릉 흔들린다. 광안이 선물로 주었던 장신구이다. 몰래 동궁에 숨어 옷을 갈아입고 큰머리를 하고, 떨잠을 꽂았던 밤이 떠오른다. 하룻밤의 후궁이 되어 잔을 나눠 마시던 날 은우는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소매 폭이 넓은 자줏빛 원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마 안으로 뭉근하게 비쳐드는 햇빛을 받아 금박으로 찍은 문양이 은은히 빛을 발했다.
五章
가마가 궐에 당도하자 가례청 당상관을 비롯하여 육조의 참판이 가마를 수종하였다. 국상 중이어서 간소하게 진행되는 빈의 가례식이 시작되었다. 원삼 차림을 한 은우가 궁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가마에서 내려섰다. 얇디얇은 붉은 면포가 바람에 아른거리며 흔들렸다. 조심스럽게 은우는 한 발 한 발 상궁의 인도를 받으며 걸어 나가 합문 앞에 도달하였다. 붉은 면포를 머리 위로 걷어 내자, 저만치에 강사포를 입고 원유관을 쓴 광안이 보였다. 겨울이건만, 궐에 부는 바람이 차지 않게 느껴졌다. 가슴 한복판에 불을 지핀 듯 온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은우는 시선을 살며시 아래로 내렸다.
규를 든 주상이 큰 걸음으로 빈에게로 다가서자 주변에서 허흡, 하며 당황스런 숨을 삼켰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상관없다는 듯이 빈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주상은 잠시 지켜보기만 하였다. 천천히 떠구지머리부터 소매 폭에 가려진 손과 이제 좀 더 부풀었을 배와 아름다운 수가 놓아진 비단신에 감춰져 있는 발까지 보았다. 주상이 만족스럽게 입가를 올렸다. 굳어 있던 얼굴이 부드러이 펴지며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홉 개의 양으로 이은 흑색 비단에 양마다 열여덟 개의 옥이 일렬로 박혀 있는 원유관을 쓴 주상의 얼굴은 더욱 희어 보였다. 감히 절색이라 할 만큼 화려한 생김새이다. 그 얼굴에 누구나 한 번 보기만 하면 마음 저편 끝까지 뒤흔들어 버린다는 미소를 띠고서 오직 은우만 바라보며 광안이 말했다.
“예쁘다.”
으흠으흠, 점잖은 참판들이 민망함을 참지 못하여 내는 헛기침 소리들이 낮게 울렸다. 빈의 얼굴이 붉은 면포보다 더 붉어졌다. 은우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주상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빈, 나를 좀 보아다오.”
“전……하.”
은우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부를 뿐 얼굴을 들지 못한다. 강선이 다가와 주상 전하에게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위치를 알리지 못해 주저주저 눈치만 살폈다. 움직이지 않는 광안을 향해 은우가 살포시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은우의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겹겹이 입은 가례복이 심장 박동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거세게 뛰었다. 광안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귀 끝까지 붉어진 은우가 입을 열었다.
“절을, 받으셔야지요.”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광안이 강선이 이끄는 위치로 돌아갔다. 강사포를 펄럭이며 빠르게 움직였다. 성가신 절차를 지키느라 한시라도 지체하기 싫다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빈의 가례식을 위해 흑단령을 차려 입고서 늘어선 참판들을 비롯하여 도열한 신하들과 궁인들이 몹시 당황스러워 서로 흘긋거리며 눈치를 보기 바빴다.
조정 대신들이 앞다투어 경쟁하듯 제시했던 법도는, 은우를 먼저 간택 후궁으로 맞이하고 이후 중궁으로 책봉하는 절차를 치르는 것이었다. 중전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시, 품계가 높은 후궁을 중전으로 책봉했던 선대왕의 몇몇 사례가 제안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대신들의 속내는 달리 있었다. 일단 후궁으로 들인 후 시간을 끌다가 주상의 마음이 식으면 새로이 중궁 간택을 논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낮은 가능성에 희망을 품고 있던 이들은 광안의 파격적인 행동을 보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누군가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들으셨는지요, 주상께서 중전 책봉식에 쓰일 대례복인 적의가 언제 다 지어지냐 매일 확인하신다 합니다.”
“소문에 상의원이 초주검이 될 정도로 밤낮 가리지 않고 옷을 짓는데 사력을 다한다지요. 중궁이 입을 적의만 완성되면 책봉식을 거행하시려나 보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는데 진정 그러실 작정인가 봅니다.”
제 당파의 여식으로 중전을 올리려던 미미한 희망들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허탈한 한숨은 행여 주상의 귀에 잡힐까 소리를 억누른 까닭에 입김으로만 뿜어졌다가 힘없이 흩어질 뿐이었다.
은우가 사배의 예를 올리기 위해 네 번 절을 하는 동안에도 주상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절을 올리고 일어서며 은우의 숨소리가 조금 가빠지자 주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회임한 빈을 위해 당장이라도 예를 멈출 기세였다. 강선이 붙어 서서 광안에게 반드시 이 절차만은 진행해야 한다는 무언의 호소를 거듭했다.
국상 중에 거행하는 가례식이었다. 광안이 약식으로라도 진행되는 후궁 가례를 치르는 이유는 명확했다. 은우는 신분의 한계나 얕잡아 보일 빌미가 있는 승은 후궁이 아니라 절차를 거친 간택 후궁이며, 곧 공석인 중궁의 자리에 책봉될 빈이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것 하나를 위해 주상은 적개심을 누르고, 분노를 가라앉히고, 파렴치하게 얼굴을 바꾼 자들을 인내하고, 자비를 베풀고, 때로는 구역질을 참았다. 정작 원하는 바대로 판을 끌고 왔지만, 광안은 지루한 절차와 예법에 매일매일 입이 바싹 말랐다. 감질나게 가리고 있던 얇고 붉은 면포가 걷어지고, 은우의 얼굴을 보았을 때부터 기어이 버티던 이성이 우지끈 무너졌다.
잔을 나누고 찬을 나누는 동뢰연의 순서를 모두 다 건너뛰고, 둘러싸고 있는 참판들과 궁인 전부를 멀리 멀리 물리고 싶었다. 찬안饌案을 들고 들어간 상식尙食이 광안의 표정을 살필 때마다 점점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 술잔을 나눠 마시는 합근례에서조차 광안은 잔을 채우기가 무섭게 들어 올려 술잔을 입에 대고 내림에 있어 조금도 지체함이 없었다.
모든 절차가 빠르게 끝나고 마침내, 신방에 둘만 남게 되었다. 광안이 서슴없이 다가와 은우를 꽉 껴안았다. 아직 큰머리를 내리지 못하여 은우가 어색한 모양으로 품에 안겼다.
“무거우냐?”
광안이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느냐. 곧 있을 중궁책봉식에는 더 크고 무거운 가채를 할 터인데…….”
광안이 머리 장식을 내려 주며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은우를 살폈다.
“몸이 무거워 더 힘에 부치는 게로구나. 하면, 중궁책봉식에는 대수머리 장식을 어이할까.”
은우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길이 새끼 새 다루듯 부드럽다. 은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니옵니다. 무거워 그러지 않습니다.”
“응?”
“다만 전하의 용안을 올려다보기가 부끄러워서…….”
광안이 가소롭다는 듯 크게 웃었다.
“너와 내가 보낸 밤이 몇인데 새삼스레 무슨.”
광안의 놀림에 은우는 더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그런 게 아니오라, 너무…… 뵙고 싶었는데, 매일매일 밤마다 너무 상상만 했더니…….”
“밤마다 상상이라, 그랬더니?”
“아, 아니옵고 밤에 꿈에서 뵈었는데 지금도 꿈인가 싶고……, 그런데 또 느껴지니까 꿈은 아닌가 싶고…….”
광안이 짧게 웃었다. 광안의 얼굴에 불그레한 홍조가 올랐지만, 은우는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알 수가 없었다. 광안이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으로 은우의 자그마한 턱을 감쌌다. 약간만 들어 올리며 물었다.
“무엇이 느껴지는데.”
열기 어린 눈을 보며 은우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이렇게 가까이 계신다 싶으니 심,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은우는 횡설수설 나오는 말을 수습하려 말을 더할 때마다 실수를 하나씩 더 더하는 것만 같아 당황스러워졌다.
꾹 다무는 입술에 광안이 참지 못하고 입술을 포개었다.
“긴장하지 마라. 나도 떨리니…….”
전혀 떨리지 않는 얼굴로 광안이 말했다.
“전하, 놀리지 마옵소서.”
“거짓이 아니다.”
광안이 원유관과 강사포를 벗으며 나지막하게 불만스러워했다.
“네 옷과 내 옷을 다 벗으려면 하루해가 다 지나겠다. 뭘 이리도 겹겹이 입혔나.”
은우가 의복 시중을 들려 하자 광안이 손을 붙잡았다.
“동뢰연 후 합방에 옷 하나 제 손으로 못 벗을 리가.”
광안이 은우의 원삼을 풀어 내리며 말했다.
“내 옷도 내가 벗고 네 옷도 내가 하마.”
‘함께 지낸 밤이 몇인데’ 하며 광안이 놀렸지만 은우는 어쩐지 너무 부끄러워 굳은 둣 앉아 있었다. 마치 새신랑 얼굴을 처음 보는 새색시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의대를 벗으려 광안이 일어서자 은우가 따라서 몸을 일으키다가 휘청거렸다. 광안이 급히 은우를 잡아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은우는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비틀거린 듯하여 다만 부끄럽기만 했는데 광안은 몹시 놀란 기색이었다.
“어지러우냐. 혹여 어디가 안 좋은가.”
“아닙니다. 전하. 괜찮습니다.”
“하면, 어찌하여 서지도 못 하는가.”
“명복 차림이 버거워 그렇습니다.”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고 가느스름하게 뜬 눈이 은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었다. 수도 없이 입은 속바지와 속치마에 풍성한 넓은 치맛자락이 불편해서만은 아니었다. 빳빳하게 길이 들지 않은 꽉 맞는 버선 때문에 발의 감각이 둔해진 지 오래였다.
광안이 눈을 찡그린 채 은우를 금침 위로 조심스레 앉혔다. 그러더니 은우의 발치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전하?”
“발을 다오.”
제 발을 향해 내민 광안의 손을 보고 은우가 기겁을 하였다.
“다오.”
“전하! 아니옵니다. 소인이…….”
“빈궁은 소인이 아니다. 스스로를 그리 칭하지 말라.”
침착하고 단호한 말이었다. 은우는 광안의 눈에서 질책과 독려를 동시에 읽었다. 은우가 몇 번 마른침을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신첩이…….”
입에 붙지 않는 호칭을 올리며 치마 안으로 발을 깊이 감추었지만, 광안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서슴없이 치맛자락을 걷었다. 빳빳한 버선을 쥐며 낮게 혀를 찼다. 길이 들지 않은 버선은 발에 꽉 맞았다. 회임을 한 이후로 가뜩이나 발이 자주 부었다. 가례복 아래 신는 버선은 분명 신경 써서 만들었겠지만 그 사이에 발이 더 붓고, 오늘 긴장하고 오래 서 있었던 탓에 조금 더 상태가 좋지 못했다. 광안이 버선목에 몇 겹으로 감긴 비단 끈을 풀어내고 버선을 한 짝씩 차례로 벗겨 냈다. 은우는 이제 좀 살 성싶어 하아, 숨을 내쉬었다.
발을 쳐다보던 광안은 다시 눈을 찡그렸다. 흰 발등과 발가락에 발갛게 버선 자국이 남아 있었다. 광안은 부은 발을 손바닥에 올렸다. 은우가 놀라며 빼려 했지만 양손으로 꽉 잡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전하…….”
“아팠겠구나.”
광안은 은우의 발등을 한 번 쓸어 주고서, 양손으로 꾹꾹 주물렀다. 은우가 아무리 손을 내젓고 그러지 마시라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발을 내맡기고서 은우는 제 발을 주무르는 주상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슬며시 눈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이제 좀 괜찮으냐.”
은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을 하였다.
“네, 전하.”
“그럼, 일어서 보아라.”
발은 편해졌지만 거추장스런 차림 때문에 은우는 맘처럼 쉽게 서지지가 않았다.
“저런.”
광안이 웃으며 은우의 양어깨를 잡았다. 아이를 다루듯 가볍게 일으키고는 말했다.
“앉은 채로는 밤을 새도 다 못 벗기겠다.”
은우의 귓가가 붉어졌다. 붉어진 귓가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시작했던 손길은 하나씩 옷이 떨어질 때마다 점점 더 빨라졌다.
六章
속살이 뽀얗게 비치는 적삼만 남겨 놓고서 광안이 하아, 낮게 한숨을 쉬었다. 펼쳐 둔 금침 위에 은우를 먼저 눕히고 비슷한 차림으로 광안이 나란히 누웠다. 팔을 벌려 은우를 폭 끌어안고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추운 날, 예를 치르느라 고생했다.”
은우는 품속에서 길게 숨을 내쉬고 또 들이켰다. 톡톡 아이를 재우듯이 광안이 은우의 등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은우은 광안의 얇은 저고리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강무 이후 한 번도 같이 밤을 보낸 적이 없다. 아니,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도 없었다. 그리운 품에서 그리웠던 냄새를 흠뻑 마시고 다시는 만질 수 없을 줄 알았던 몸을 쓰다듬었다. 눈으로 손끝으로 더듬어 가던 은우가 흠칫 놀라며 가슴 위를 배회하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전하……!”
벌어진 저고리 사이로 목덜미와 가슴이 이어지는 곳에 새로운 상처가 보였다. 길고 깊게 패이고 긁힌 자국뿐 아니라 살점이 함부로 뭉텅 찢긴 흔적도 선명했다. 짐승에게 물리고 할퀴어진, 강무에서 입은 상처이다.
은우가 비명을 삼키며 저고리를 어깨 아래로 내리자 팔에는 화살이 만든 상처가 아직도 입을 벌린 듯이 붉게 번들거렸다. 맹독을 묻힌 화살이었다. 긴 시간 저주살에 시달리고, 강력한 독성에 중독된 옥체가 쉬이 완쾌되지 않아 양평군 대감이 은밀히 침전을 오가며 사력을 다하였다고 들었다. 홀로 아프고 홀로 견디고 삭혔을 상처는 짐작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은우가 속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손가락으로 붉은 상흔을 길게 쓸었다. 주상은, 몸의 상태를 감추고 이 상처를 덮고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용상에 앉아 자신을 향해 저주살을 날리고, 살점을 찢고, 독을 핏줄로 흘려보내어 처참하게 해하려 한 자들과 눈을 맞추었겠지.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이제 괜찮으시옵니까, 위로도 질문도 혀끝에서 눌어붙어 밀어내어지지 않았다.
은우의 마음을 읽은 듯 광안이 말했다.
“다 나았다.”
으흑, 은우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벌리자 뜨거운 울음이 터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런 짓을 할 수가.”
감히 주상의 몸에 이러한 상처를 만든 이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상처를 손으로 더듬어 훑으며 은우가 어깨를 들썩였다.
“괜찮다. 아프지 않다.”
덤덤히 뱉는 말에 마음이 얇게 저며지는 듯 아파 은우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처벌을 받은 자들만이 이런 흉계를 꾸몄을까요. 이번에는 숨었지만 망극한 생각을 했을 이들을……. 아무도 다시는 이럴 수 없도록, 불경한 생각조차 못 하도록!”
남휼이 전하는 몇 마디 말로 광안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감히 국본을 핍박하고 박해하며 그도 모자라 참혹하게 시해하려 했던 무리들에게 광안은 직접적으로 드러난 주모자들만 처벌하는 선에서 최대한 자비를 베풀었다. 유당파의 잔당과 뒤에서 동조했던 그 외의 정승과 문무관들을 옭아맬 약점을 쥐고서 은우를 중궁으로 맞이하려는 계산 역시 그 배경에 있었다. 중전 자리를 주겠다 약조를 지키시겠다고 그런 자들과 협상하는 광안 때문에 은우는 마음이 끊어질 듯 아팠다.
“그 누구도 다시는 감히 전하께 불경스럽게 굴지 못하도록 합당한 벌을…….”
분노로 떨리는 은우의 입술에 광안이 검지를 올렸다.
“죄를 가혹하게 물으면 더 큰 죄를 은밀히 꾸미는 법. 네가 알려 준 말이다. 잊었느냐.”
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공포심이 공포를 낳고, 두려움은 더 큰 두려움으로만 잠재울 수 있지. 나는 이제 두려울 일이 없다. 그러니 공포가 빚어내는 피의 고리는 내가 끊으면 그만이다.”
죄인들과 평소 어울리고 동조했던 이들을 취조하고 처벌하기 시작한다면 유당파라 불리던 신하들 외에도 대북파를 제외한 모든 문무백관과 유생들까지 도륙하고 씨를 말려야 했다. 광안은 그런 군주도, 그런 아비도 되고 싶지 않았다.
“전하.”
은우의 눈물이, 안타까운 손길이, 애틋한 입술이 한참 동안 광안의 상처에서 떠나지 못했다. 곳곳마다 더운 숨결을 흩뿌리고, 부드럽고 촉촉한 혓바닥이 상처를 정성스레 핥았다. 으음, 광안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찡그려진 미간을 보며 은우가 화들짝 놀랐다.
“혹여 아프시옵니까.”
“……몹시.”
“전하?”
“도저히 못 견딜 만큼 아프다.”
“전하, 상처가 다시 덧나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의원을, 불러야 합니다.”
놀라며 몸을 일으키는 은우를 광안이 붙잡았다. 마주 보고 앉아 광안이 은우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은우를 향해 피식 웃었다.
“은우 넌, 여전히 좋은 궁녀는 못 되겠다. 어디 상처만으로 아프더냐.”
그제야 은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붉어지는 은우의 뺨을 붙잡고 광안이 깊게 입을 맞추었다. 상체를 붙이고 끌어안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속저고리가 열리고 치마끈이 풀렸다. 임신으로 팽팽해진 젖가슴이 노출되자 선단이 아릴 만큼 곤두섰다. 부드러이 쥐는 손길에도 자지러질 만큼 아파 은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절로 물러서는 몸을 한 팔로 받쳐 안고서 광안의 다른 손은 가슴 위를 떠나지 못했다. 뜨거운 눈길 역시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참은 욕망 때문에 광안은 온몸이 욱신욱신 아릴 지경이었다. 손가락 사이를 풍만해진 가슴이 비어져 나왔다. 농익은 작은 열매처럼 매달린 유두에 손끝이 스치자 은우가 참지 못하고 으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아프냐.”
손끝으로만 부드러이 쓰다듬으며 광안이 놀리듯 물었다.
아, 아아……. 손을 슬며시 아래위로 놀릴 때 마다 은우가 몸을 비틀었다. 임신한 까닭인지, 오랜만의 손길을 받아 그러한지 지나치게 예민해져 모든 촉각이 통각처럼 느껴졌다.
“너도 아프구나.”
멈추지 않으며 광안이 말했다. 은우는 어느새 등을 광안의 너른 가슴에 붙이고 반쯤 눕듯이 기대어 있었다. 양 가슴 위에 하나씩 올려진 손은 선단을 피해 부드럽게 전체를 감쌌다가 놓길 반복할 뿐인데도 허리가 절로 들썩였다. 더, 더……. 고개를 반쯤 틀어 올리고 광안의 얼굴을 애원하듯이 바라보았지만 결코 닿지 않는 손길에 애가 탔다.
전하……. 제발.
은우가 울듯이 속삭였다. 광안의 긴 숨이 은우의 귓가를 간질였다.
전하…….
터질듯이 딱딱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슬며시 문지르자 은우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서 진저리를 쳤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여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광안은 움찔거리는 은우를 제 오른팔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눕게 하였다. 가슴을 완전히 드러내고 색색 숨을 몰아쉬는 은우가 더없이 사랑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잠시 눈을 맞추던 광안이 어루만지던 가슴을 부드러운 입술로 덮고 까슬한 혓바닥으로 딱딱해진 열매를 말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눈에 번쩍 불꽃이 튀는 느낌이었다. 은우가 참지 못해 으흑 비명을 삼키며 광안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가 입술을 떼고서 후우 입김을 불자 은우의 입에서 진득한 교태성이 흘렀다.
광안이 기울인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하자, 은우는 비음 섞인 소리를 내며 광안의 목을 바싹 끌어안았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휘고서 들어 올리는 가슴 끝이 다물린 광안의 입술을 스쳤다. 광안이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해갈되지 않은 아쉬움으로 은우는 광안을 원망스레 올려다보았다.
“쉬…….”
광안은 은우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고는 엄지로 열감이 어린 입술을 문질렀다. 은우를 다시 제 가슴에 기대게 하자 은우가 고개를 틀어 작고 귀여운 혓바닥으로 광안의 목덜미를 할짝거렸다.
“이제 그만, 아니 된다.”
광안이 은우를 달래며 이불을 끌어올려 드러난 가슴을 완전히 가렸다. 은우는 광안의 가슴에 등을 포개고서 눈을 감았다.
“맘껏 비틀고, 빨고, 깨물고 싶지만.”
그렇게 말하는 광안의 목소리도 욕정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광안이 말을 멈추고서 손을 내려 은우의 배를 감쌌다. 이젠 확연히 불러진 배에 손바닥을 붙이고서 낮게 중얼거렸다.
“참으려 했는데…….”
“참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은우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면서 말하였다.
“가례 전, 교육하러 온 상궁이 일러 주었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광안이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표정을 보니 또 짓궂게 은우를 놀릴 작정이었다. 은우는 깊게 숨을 내어 쉬고 말하였다.
“회임 중에도 전하를 모시는…….”
“이를테면?”
광안이 아직은 침착한 어조로 되물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가…….”
은우가 광안의 목덜미에 자잘히 입을 맞추며 움직였다. 오래되거나 새로이 생긴 상처들에 입을 맞추고 가슴에 번진 붉은 꽃을 핥았다. 솟아오른 꽃술을 입으로 머금고 꿀을 핥듯이 혀로 굴리고 삼켰다.
은우…….
광안의 목소리가 뻑뻑하다.
아…….
짧게 뱉는 신음성이 좋아 은우는 입술을 더 아래로 내렸다. 덮어 둔 이불 아래에서 은우는 몸을 반쯤 가리던 치마와 속곳을 벗어 내렸다. 벗은 몸은 이불로 가리고서 광안의 속저고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속고의 끈을 풀어 내렸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지만, 은우는 광안이 이미 정염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맞추며 은우가 무릎을 세워 키를 높이고 애욕으로 뜨거워진 광안의 입술에 입을 비스듬히 맞추었다. 아슬아슬 은우의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툭 떨어졌다. 동그랗게 부푼 가슴이 은우가 움직일 때마다 탄력 있게 출렁였다.
은우는 주먹을 쥐고 있는 광안의 손을 살며시 감쌌다. 제 배 위로 그리고 더 아래로 은밀하게 벌어진 곳까지 손을 이끌었다. 손을 내어 주고 눈을 맞추고서 광안은 잠시 그대로였다. 은우는 긴장으로 입이 말랐다. 뜨거워진 입술을 혀를 내밀어 축이자 광안의 손가락이 틈을 길게 훑어 올렸다. 아,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엄지손가락은 도톰하게 맞물린 살을 벌리고 숨어 있던 작은 구슬을 찾아 꾹 눌렀다. 힘을 빼며 떼어 내나 싶더니 그대로 한 번 빙글 누른 채로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은우는 몸이 떨렸다.
광안은 벌어진 은우의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옮겼다. 주무르듯이 꾹꾹 안쪽 살을 쥐었다. 흰 속살에 붉은 자국이 꽃잎처럼 새겨졌다. 마치 이만 포기하고 얌전히 앉으라는 뜻을 전하는 것만 같았다. 은우는 우욱 소리를 삼키며 버티었다. 광안이 바닥에 대고 있는 무릎에서부터 위쪽으로 허벅지 속살을 손바닥 전체로 훑어 올렸다. 뜨겁게 젖은 몸을 모르는 척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며 광안은 은우를 바라보았다. 은우는 여전히 고집스레 다문 광안의 입술을, 지독한 의지를 지닌 눈동자를 보았다. 은우는 다리를 오므리고 낮추어 앉아 광안의 손을 가두었다. 그러고선 상체를 기울여 광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었다. 뜨거운 밀부에 닿은 손이 움직이자 등줄기로 짜르르 뜨거움이 타고 올랐다. 주먹을 쥐어 불거진 관절이 닿는 자리가 절로 움찔거렸다. 빠져나가려는 광안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하아, 그대로…….”
보드랍고 가느다란 은우의 손가락이 속고의를 파고들었다. 광안의 신체 끝에 맺힌 이슬을 문질렀다. 손 전체로 감싸 쥐고 가장 부드러운 윗부분을 쓰다듬자 광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은우가 손을 움직이면, 광안도 마찬가지로 움직였다. 은우가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광안의 어깨에 기대었다. 이미 젖은 몸이 점점 더 조금씩 녹아 꿀처럼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은우는 신음성을 짓씹으며 움직임을 늦추지 않았다.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광안의 벌어진 입술이 붉디붉었다. 은우의 입술이 닿자 광안은 굶주린 사람처럼 급히 빨아들였다. 좀처럼 잡히지 않던 은우의 혀를 물었다 싶었을 때 은우가 얼굴을 뒤로 젖혔다. 손과 입술이 동시에, 아무런 예고 없이 광안의 몸에서 떨어졌다. 아, 광안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누워……주세요, 전하.”
은우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배운 것을, 알려 드릴게요.”
부부의 첫 밤이었다.
七章
겨울 해가 느리게 떠올라 긴 겨울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차가운 기온 때문에 입을 열 때마다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동궁 침소를 나서면서 이미 손과 발의 체온이 빠르게 식었다. 길게 이어진 마룻바닥은 밤새 추위에 얼어 감각이 둔해진 발에도 차갑기만 하다. 희는 움츠러드는 어깨를 곧게 펴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오늘은 대전으로 가셔야 합니다.”
동궁 지밀상궁이 대전 내관의 전갈을 받고서 세자에게 고하였다.
희는 잠시 의아스런 눈빛으로 상궁을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감추었다.
“알았다. 대전으로 가자. 서둘러라.”
궐의 하루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이르게 시작하고, 주상과 세자의 꽉 짜여진 일상은 단 하루도 어김이 없이 진행되어야 했다. 그 누구도 호되게 질책하고 채근하는 사람이 없건만, 세자는 책봉을 받고서 한시도 편안하게 흐트러져 본 적이 없었던 것만 같다.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가는 세자의 걸음에 긴장감이 묻어났다. 세자가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 십 수 명의 내관과 궁녀가 열을 맞춰 이동했다. 새벽 여명이 세자의 얼굴에 드리웠다. 주상 전하의 수려한 외모를 거울처럼 닮은 세자는 어린 나이가 무색하게 의젓하고 또 몹시 아름다웠다. 세자가 대전 내관이 안내하는 대로 침소 앞에 멈춰 서자 내관이 고하고, 이어 문밖으로 전하의 음성이 들렸다.
“들라 하라.”
세자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열린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상은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의관을 갖추고 앉아 세자를 맞았다. 절을 올리고 문안 인사를 드리고 세자는 묻듯이 광안을 올려다보았다. 거의 매일 아침을 중궁전 침소에서 문안을 받았는데 오늘은 대전에서 홀로 문안을 받는 이유가 궁금하였다.
“중전은 고뿔이 쉬이 낫지 않는구나. 좀 더 쉬도록 했다. 세자 문안을 반가워했겠지만 오늘은 잠이 더 고플 듯하여 내 이리로 일찍 건너왔다.”
희는 고개를 숙이고 주상의 말을 새기려 하였다. 어마마마께는 아직 침수에 계시니 문안을 늦게 드리라는 말씀이다. 새벽마다 찾아 올리는 문안이 고뿔을 앓는 어마마마께는 힘든 일인가, 편찮으실수록 더 가까이에서 효를 다하라 배웠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 일이 옳을까, 짧은 시간 동안에도 머릿속 생각이 빠르게 움직였다.
타고나길 예민한 성정 탓도 있지만 아바마마의 말씀은 무엇이든 여러 번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언제쯤 우리 세자와 격구를 할 수 있을까, 웃음 섞인 부드러운 하문에도 희는 마음이 저려 왔다. 아직 희에게 말은 너무 무섭고 익숙하지 않았다. 아바마마는 보령 10세가 좀 넘어서는 말도 활도 놀랄 만큼 훌륭히 다루었다 들었는데 희는 그 나이가 되어서도 말안장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일이 고작이지 않을까 두려웠다.
“세자.”
주상의 부름에 희는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네, 아바마마.”
“매일 새벽에 문안을 오지 않아도 좋다. 잠을 더 자도록 하여라. 내 듣자하니 늦은 시간까지 책을 본다던데 잠이 부족하지 않느냐.”
“아니옵니다. 문안은 효를 행함에 기본이라 배웠사옵니다.”
“배운 걸 그리 곧이곧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전하?”
올려다보는 눈을 보며 광안이 웃음 지었다.
“배워서 새긴 후, 배움을 활용하고 적용하는 것은 네 몫이다.”
희가 광안의 말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고하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상궁이 들여온 초조반은 묽은 죽이었다. 내어 주는 수저로 희가 먼저 맛을 보는 시선을 행하고 주상에게 죽을 올렸다. 죽 그릇을 사이에 두고 가만히 세자를 바라보던 광안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세자는 본디 흰 피부이지만 오늘은 유달리 혈색이 없었다. 눈가는 불그스름한 피곤이 짙게 남아 있었다. 폭신하게 남아 있던 젖살이 요즘 들어 부쩍 줄어들면서 이젠 턱선이 예민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세자, 요즘 수라를 잘 들지 않느냐?”
“아, 아니옵니다.”
“분명 내가 며칠 전에도 같은 질문을 하였다. 기억하느냐.”
“네, 전하.”
“그 질문 이후에, 수라를 더 골고루 많이 잘 먹고 있느냐 묻는 것이다.”
엄정한 물음에 목이 꽉 메여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답을 하지 못해 희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짚은 손가락을 오므렸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이리 문안을 오고 한밤이 깊도록 서책을 붙들고 있으며 제대로 먹지도 않다니. 그리하면 어찌 세자가 제대로 건강히 자랄 수 있겠는가. 대체, 동궁전 내관은 무엇을 하는 이들이냐! 국본의 건강을 돌보지 않느냐!”
날카로운 꾸중에 동궁 내관과 지밀상궁이 무릎을 꿇었다.
“너희는 세자를 보필하는 직분을 잊었느냐. 앞으로 세자가 눈을 떠서 밤에 잠이 드는 순간까지 먹는 모든 것을 나에게 직접 보고하라. 또한 당분간 세자의 새벽 문안은 받지 않는다. 조수라에 공주와 대군과 함께 인사를 올리는 것으로 족하다.”
내관과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께 사죄를 올렸다.
“내 이번에는 반드시 책임을 물을 터이니, 명심하라.”
서늘한 주상의 명에 다들 움찔 몸을 떨었다. 세자의 꽉 다문 입술 아래로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바마마,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아뢰어야 하는지, 이대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야 하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럴 때 어마마마가 곁에 계셨다면 차분하게 일러 주셨을 텐데……. 결국 희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수저가 죽 그릇에 몇 번 닿지도 않았는데, 아바마마는 초조반을 물렸다.
“세자, 이만 물러가라.”
평소와 다름없는 마무리인데, 말씀이 너무 차갑게만 느껴졌다.
새벽 문안을 받지 않고 매일 먹는 것을 보고하여 올리라 명하신 지 사흘이 지났다. 주상의 조수라는 이른 아침 행하는 어전 회의인 상참 조례 이후에 올린다. 조수라 문안을 위해 바삐 움직이던 희에게 내관이 귀띔하였다. 금일 상참 조례에서 주상 전하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셨다는 내용이었다. 북방, 재정, 명, 후금. 어린 희로서는 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지만 익히 들어 몇 가지의 단어로만 그 분위기가 짐작되고도 남았다.
대전 앞에 서자 긴장으로 가늘어진 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절을 올린 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희에게 조용한 명이 떨어졌다.
“세자,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아라.”
희가 얼굴을 들자 주상이 툭툭 앞쪽 바닥을 두드렸다.
“가까이 오라.”
희는 주상의 옆에 있는 중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온화하게 웃으며 중전이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세자.”
희가 조심스레 다가가자, 중전이 먼저 몸을 앞으로 내밀어 손을 잡았다.
“세자, 오는 길에 추웠나요? 손이 차갑습니다.”
“아니옵니다.”
손을 잡아 부드럽게 문질러 주며 중전이 눈을 맞추었다. 어마마마의 웃는 눈을 보니 세자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세자 얼굴이 좋습니다. 뽀얗게 피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그 정도는.”
끊어 말하는 주상을 향해 중전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주상의 눈길은 소매 단 아래로 나온 세자의 가느다란 손목에 머물렀다.
“수라는 전보다는 많이 든다고 하더구나.”
“네, 전하.”
“헌데, 충분치 않다. 양평군 대감 의견도 그러하다. 좀 더 들어야 한다.”
주상은 동궁 내관을 향해 무심한 목소리로 명했다.
“세자에게 올리는 당과를 끊어라. 단 걸 먹으면 식욕이 더 돋지 않는다 들었다.”
희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크게 꾸중을 듣는 것만 같았다. 분부대로 하겠다는 말은 목에서 자꾸 걸려 우물거리게 되었다. 다시 명확히 말하려 하는데, 밖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주와 대군이었다. 어서 들라 하라, 명하는 주상의 음성에 희 때와는 다르게 웃음이 도는 것 같아 슬며시 용안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희는 움칫 굳어 버렸다. 아바마마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 희를 향한 건지 달리다시피 들어오는 공주와 대군을 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바마마아아.”
이제 다섯 살이 된 대군은 공주보다 먼저 도달하기로 내기라도 한 듯 거침없이 주상 앞으로 내달려 왔다. 일곱 살이 된 공주는 새침한 얼굴로 주상과 중전 앞에 딱 멈추어 서더니 대군이 보란 듯 절을 올렸다. 주상 전하와 중전 마마를 고루 닮아 어여쁘다 칭찬이 끊이지 않는 공주는 절을 올리는 자태까지 단아하고 예뻤다.
“그래, 화명 공주가 옳구나. 절을 먼저 올려야지.”
중전 마마의 말씀에 대군이 거의 주상의 무르팍까지 갔다가 아차차, 하고는 공주가 서 있는 위치까지 되돌아갔다.
“아바마마, 소자 절 받으시옵소서.”
낭랑한 목소리로 아뢰고 손을 이마에 붙이는 모습이 희의 눈에도 몹시 귀여웠다. 대군은 희와 생김새도,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다. 희가 마르고 가파른 인상이라면, 대군은 눈, 코, 입, 귀까지 모두 동글동글하고 전신에 포동하게 살이 오른 타입이었다. 얼렁뚱땅 절을 올리고는 대군은 바쁜 걸음으로 다가가 팔을 벌린 주상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공주도 질세라 다가가 대군과 양쪽 다리를 하나씩 차지하고는 주상의 목을 끌어안았다. 대군과 공주를 양팔에 안고 환하게 웃는 주상의 얼굴이 태양처럼 눈부셨다.
중전이 조금 더 곁으로 다가와 세자의 등을 가만히 다독여 주었다.
“대군과 공주가 아직 철이 없지요. 의젓한 세자와 다르게…….”
“아닙니다. 어마마마. 주상 전하께오서 저리도 기뻐하시는데요.”
중전이 눈을 맞추며 어깨를 살며시 쓸었다. 달아오른 세자의 뺨까지 닿지 못하는 손이 조용히 물러났다. 아직 어리다 해도 지켜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세자를 함부로 만지고 쓰다듬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누르고 중전은 손을 고요히 치맛자락 위에 두었다.
“대군, 어제는 무얼 했느냐.”
주상이 무릎에 앉은 어린 대군에게 물었다.
“동몽선습을 읽었습니다.”
“네가?”
대군은 글공부 시간에도 아기처럼 어리광을 부려 열 번에 대여섯 번은 노는 식이었다. 주상이 의외라는 듯 반문하자 대군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잘 들어 익히려 했습니다. 천자문도 배웠습니다, 전하.”
“기쁘다. 기특하구나.”
“그런데 저는 공부보다는 무예가 좋습니다.”
오호, 주상의 눈썹이 슬쩍 올랐다가 떨어졌다.
“제가 글공부보다 무예에 재능이 있습니다.”
“네가 무슨 무예를 익혔느냐?”
대군이 얼굴에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투호를 잘합니다. 어제 스무 개를 던졌는데 열다섯 개가 들어갔습니다.”
“그래, 투호를 잘하니 활도 잘 쏘겠구나. 어서 자라 활을 배워라. 나와 같이 겨루기를 해도 좋겠다.”
주상이 웃으며 말하자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투호놀이에 무예의 자부심을 잔뜩 부풀린 대군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저는 계속 투호만 하면 아니 될까요. 아바마마는 활을 쏘시고 저는 투호를 던지고……. 아니라면 제가 어찌 아바마마와 겨루겠습니까.”
대군의 어처구니없는 말대답에 희는 긴장으로 몸이 굳었는데 주상은 파안대소를 하였다. 이목구비를 흐트러뜨리며 크게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보면 얼마 전 대사례에서 활을 들었던 주상 전하가 쉽사리 연상되지 않았다. 주상이 시위에 살을 먹일 때면 일제히 숨을 멈추었다. 수백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단 한 번 흔들림이 없었다. 바람을 가르고 곧바로 날아가 어김없이 명중하던 화살과 아바마마를 번갈아 보며 희는 아직 제대로 시위를 당기지도 못 하는 제 팔을 슬며시 만지작거렸다. 언제쯤 제대로 된 주군의 모습 비슷한 형태를 갖출 수 있을까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아바마마는 고작 열다섯에 적을 맞아 말을 타고 활을 잡고 검을 휘두르셨다고 했다. 희망을 잃은 백성들의 불빛이 되어 길을 비춰 주었다 하였다. 백성들에게 여전히 회자되는 주상의 용맹함은 어려서부터 간간히 들어 왔다. 열다섯. 희는 그 나이가 되어도 허수아비 하나 제대로 벨 수 있을까 싶었다.
희는 생각에 잠겨 주상의 시선이 제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표정 너머 속에 묻은 여러 감정과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읽어 내리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주상은 차례를 기다리는 공주에게 눈길을 주었다.
“공주는 얼굴이 다시 예뻐졌구나.”
주상의 말씀에 세자도 고개를 들어 화명 공주 얼굴을 살펴보았다. 붓기는 가라앉고 토끼처럼 빨개졌던 눈도 맑게 돌아왔다. 여태 새침한 표정으로 바라다보고 있는 공주를 향해 광안이 부드러이 물었다.
“화명 공주는 이제 걱정을 덜었느냐.”
“네, 아바마마께서 약조해 주셨지 않습니까.”
배시시 웃는 얼굴에 주상의 마음을 녹이는 애교가 숨어 있었다.
八章
그제였다. 공주가 먹는 것도 물리고 꼬박 하루 종일 울기만 하여 얼굴이 온통 붉어지고 엉망으로 부었다는 말을 듣고 주상이 친히 공주가 머무는 궁까지 찾아갔다. 울었던 이유는 적이 어이가 없었다. 공주는 궐 나들이를 온 주상의 이복 누이 서정 옹주에게서 부마는 영광스런 자리가 아니라 다들 싫어하고, 간택 단자에 올리는 이들도 시원찮아 결국 공주라 해도 궐 밖을 나가면 쓸쓸하고 외롭기만 하다는 푸념을 들었다고 하였다. 서정 옹주에게 주상의 진노가 전해진 것은 물론이지만, 이후 공주의 울음이 그치지 않은 점이 더 문제였다.
“저는……. 흐흑, 아바마마처럼……. 수려한 외모에, 흐흑……. 무예와 학식이 높은 사내다운 남자와 혼인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남자는 나라의 재목이라……, 흑, 부마로 삼지 않는다고 하니, 어어엉, 이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닙니까. 어엉. 소녀는 공주로, 태어난 죄……밖에 흐흑, 없는데. 아바마마처럼 훌륭한…… 부마는, 흐흑……. 꿈도 꾸지 말라고.”
아바마마처럼, 이라는 말에 주상은 차가운 얼음처럼 굳었던 용안을 풀고 역시나 크게 웃으셨다.
“아바마마처럼, 꼭이요. 꼭. 그런 남자를 찾고 있었단 말입니다. 눈여겨본 이도 몇 있단 말입니다.”
공주의 떼는 그치지 않아 결국 주상 전하가 손을 걸고 약조를 한 후에야 눈물을 멈추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와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세자를 향해서도 공주는 보기만 해도 시리도록 충혈되고 부은 눈을 하고선 말하였다.
“오라버니, 세자 오라버니도 약조해 주시는 거죠?”
아무리 철없는 요구라 해도 예쁜 누이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에 마음이 아파 희는 그저 크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주상 전하가 아니 계셨다면, 혹여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희가 대신 약조를 해 주고, 손을 잡아 주고, 등을 쓸어 주었을 테다.
아바마마의 무릎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 두 동생을 보는 희의 입가에도 웃음이 맴돌았다.
*
톡톡톡 검지가 서안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튼 채로 주상은 생각에 잠겨 있다. 하아, 자그마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을 걸 적당한 기회를 보던 남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심려를 끼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뻔히 아는 물음이었다. 좀 전에 내관이 동궁에 대해 보고한 바 있다. 여전히 광안의 성에 차지 않는 양이었다.
“양평군 들라 하라.”
광안이 조금 찌푸려진 눈을 감았다.
마치 명을 내릴 줄 알았다는 듯이 양평군은 지체 없이 대전에 들었다. 채 인사를 마치기 전에 광안이 하문했다.
“동궁에게 양기와 입맛을 돋우는 약제를 씀이 어떠하오?”
성마른 물음에 양평군이 웃음을 띠고 답하였다.
“세자 저하의 건강은 심려치 마시옵소서. 다만 체질적으로 적은 양만 섭취하실 뿐입니다.”
“하여, 그걸 먹고서 새벽부터 밤까지 버틸 수가 있냔 말이다. 세자는 새벽 문안을 금했는데도 파루 소리에 일어나 한밤까지 무슨 글공부를 그리 한단 말인지!”
“예학을 익히고 배우는 데 심혈을 기울이심은 미래에 성군이 되실 훌륭한 덕목입니다.”
“지금은 아이이지 않는가. 뛰어 놀아야 할 나이이다.”
흐흡, 곁에 있던 남휼이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세자의 나이에, 세자도 아닌 왕자군이었던 광안 역시 홀로 글공부에 매진했다. 뛰어 놀아야 했던 나이에 뛰어 노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아이답지 않게 늘 경직되어 있으니 내 답답하기 그지없다. 희는 세자 이전에 아이일 뿐이다. 성군이 갖출 육례는 차차 나이가 차서 가르치면 그만이지 않는가. 나는 세자가 부지런히 먹고, 움직이고, 웃고, 매일매일 즐겁게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내가 너무 빨리 세자로 책봉했는가, 후회가 깊다. 성균관 입학도 그리하여 늦추고 있는데 왜 글공부에는 더 매달리는지 연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어.”
“글공부에 재미를 붙이셨나 봅니다. 그래도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좋지는 않지요.”
양평군의 말에 남휼이 넌지시 말을 붙였다.
“세자 저하께 무예를 익히도록 하면 좋을 듯합니다.”
광안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바깥 공기를 쐬라고 활을 잡게 하였더니 여린 팔로 얼마나 애를 썼는지 입이 다 터지고 하루를 꼬박 앓았다. 말을 타라 하면 몸살을 호되게 할 때까지 멈추지 않으니 매사에 요령 없고 미련하게 제 몸을 혹사시킴이 아니냐. 이 어찌……, 한 배에서 났는데 이렇게도 다르니.”
광안의 한숨이 길어졌다.
“대군처럼 제 편할 대로 쉽게 지내는 일을 반만큼이라도 할 수 없단 말이냐. 무슨 고집이 이리도 세고 생각이 많아. 게다가 마음은 여리고 물러 터져서 어찌 상처받지 않고 이 길을 헤쳐 갈지.”
남휼이 저도 모르게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어린 광안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제 편할 대로 쉽게 지내는 일을 조금이라도 할 수 없단 말이냐. 무슨 고집이 이리도 세고 생각이 많아. 마음은 여리고 물러 터져서…….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 광안의 모습에 남휼은 새삼스레 마음이 쓰라렸다. 세자로 책봉되고 험한 길을 헤치며 분조를 이끌던 어린 광안은 지금처럼 장대하지 않았다. 나이보다 앳된 얼굴에 여린 몸이었다. 수없이 잡혔다 터지는 물집의 흔적처럼, 고통을 겪으며 자라나는 굳은살처럼 느리게 여물어 갔다. 그 시간 동안 광안은 제 자신을 혹사시켜 가며 버티고 버텨 냈다. 그리하여 남휼에게 광안은 늘 비단처럼 섬세한 마음을 가진 애틋한 주군이었다.
남휼은 전란이 한참이던 어느 날의 광안을 떠올렸다. 분조를 이끌고 황해로 평양으로 고군분투하며 지방의 수령을 살피고, 군관을 독려하고, 몸소 칼을 쥐고, 백성을 위무하던 광안에게서 백성들은 조선의 명운을 보았고, 그런 광안에게 명의 칭송이 더해졌다. 백성에게도, 명에게도 면이 서지 않던 임금은 선위를 하겠다는 강수를 두었다. 가을이 들 무렵이었다. 광안은 매일 새벽 임금의 처소 앞에서 선위를 거두어 달라 호소하였다. 곤룡포를 벗고, 머리를 풀고, 죄인의 몸이 되어 차가운 돌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선위를 거두어 달라 눈물로 호소했다. 고작 열여섯의 세자는 비참하게 버려져 가혹하게 유린당하던 백성을 위해 손에 피를 묻혔고, 못난 아비의 경계심에 무릎이 닳도록 돌바닥에 꿇어야 했다.
이미 전란으로 상한 몸이었다. 목이 터져라 잘못을 고하는 광안을 임금은 모질게 내버려 두었다. 닷새를 내리 굶은 후였다. 광안은 수라를 젓수시라 읍소하는 상궁을 물리쳤다.
남휼이 명을 어기고 동궁 처소에 훌쩍 큰 걸음으로 들어섰다. 휘청거리며 일어서는 광안을 붙잡았다.
“아바마마께 가야 한다.”
광안은 조용히 휼의 손을 떼어 냈다. 목에 생긴 담종으로 목소리는 갈라지고 찢어졌다. 휼의 한 손으로도 광안의 의지를 반하여 자리에 앉힐 수 있을 만큼, 광안은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눈빛만은 더 깊어, 휼보다 두 살 어린 소년의 눈이라 믿을 수 없었다.
“휼, 명이다. 나를, 놓아라.”
“이러다 죽습니다.”
휼의 무람한 말에 상궁이 파랗게 질렸고 내관과 궁녀는 머리를 떨구었다.
“조금만, 조금만 드시고.”
휼은 막무가내로 광안을 앉히고 무너지는 몸을 팔로 떠받으며 수저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식은 죽은 입으로 넘어가는 듯하다 기침과 함께 모두 밖으로 쏟아졌다. 휼은 더 크게 죽을 퍼서 입으로 밀었다. 다시 모조리 쏟아지고 또 밀어 넣고. 어느새 남휼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만. 그만하라.”
거칠게 갈라지고 해진 목소리가 만신창이 된 광안의 마음 같아, 주르륵 눈물이 휼의 눈가를 타고 흘렀다.
“휼아, 더 이상은…….”
“못 먹으면, 못 갑니다.”
“그러니, 내가 먹어 주었다.”
광안이 손을 힘겹게 들어 내관 강선을 불렀다.
“나를, 일으켜라.”
강선이 바닥에 머리를 짓찧으며 통곡했다.
“저하. 저하. 부디 통촉하여…….”
그 전에도, 그날도, 그 후에도 남휼에게 주군은 광안뿐이었다.
양평군이 물러간 후 여전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광안에게 남휼이 툭 아무렇지도 않게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꼭 닮으셨습니다.”
광안이 눈을 뜨고 남휼을 바라다보았다.
“용안을 그대로 닮은 건 다 아는 일이고, 입 짧은 것도, 마음이 여린 것도, 애쓰고 스스로를 혹사하는 것도 다 그대로입니다.”
광안이 못마땅한 듯 입매를 싸늘히 올리며 웃었다.
“그럴 이유가 세자에게 있단 말이냐?”
내가 부왕과 같은 사람이냐는 물음이었다. 휼이 고개를 저었다.
“주상 전하를 깊이 받들어 그렇습니다.”
“내가 강요하더냐.”
남휼이 허허 웃었다.
“전하께오선 세자 저하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시지요.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허면, 왜.”
“주상 전하처럼 훌륭한 성군이 되려고, 아니 사랑하는 아바마마를 닮고 싶어 그러는 겁니다. 그 마음이 곧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지요. 잘해 보이고 싶고, 잘하고 싶고 그리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고, 그래서 밤잠을 줄이며 회강에서 훌륭한 성적으로 증명하고 싶고, 활도 말도 무예도 출중하다 인정받고 싶겠지요.”
“회강에서 늘 받아오는 ‘통通’ ‘통通’ ‘통通’ 그 성적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이냐. 혹여 세자의 마음에 부담이 될까 내 한 번도 크게 기뻐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무예라니, 세자는 아직 몸이 약하고 어리다.”
남휼의 말을 끊는 광안에게서 희미하게 짜증과 화가 묻어났다.
“부모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없는 나이이지 않습니까. 크게 기뻐하지 않으시니 더 노력하시겠지요. 모르긴 하되, 성균관 입학을 늦추신 것도 맘에 차지 않으셔서 그러하신가 근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이없는 소리. 영상이 아뢰길, 세자가 올 봄 성균관 입학례를 치른다면 소학을 이미 마치고 대학을 배우니 소학 강의 한 구절을 듣는 관례와는 다르게 속수례 후 대학으로 강의를 받아야 한다더구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지만 이미 광안은 답을 알고 있음을 남휼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웃으며 덧붙였다.
“한 가지 전하와 다르신 점도 있지요.”
“응?”
광안이 고민을 잠시 거두고 남휼을 바라보았다.
“당과를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전하께오선 예전에도 일체 즐기지 않으셨지요. 당과는 중전 마마를 닮으신 듯합니다. 세자 저하를 수태하셨을 때, 저희 사가에서 밀과나 강정을 만들어 올리곤 했습니다. 다른 건 못 드셔도 약식이나 당과는 그릇을 비우고 내어 주셨답니다.”
광안이 어느새 긴 눈을 접고 나긋하게 웃었다.
“그렇군, 중전을 닮았구나. 뱃속에 있을 때도 그리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로군.”
“그리고, 세자 저하께오선 경대같은 또래 사내아이를 보면 잘 뛰어 놀기도 하십니다.”
“세자가 남휼 내금위장 아들 경대를 좋아하지.”
광안이 즉위한 후 남휼은 쏟아지는 사주단자를 시큰둥하게 대하였다. 중전책봉식을 앞두고 광안이 남휼과 함께 운종가에 내금위 군사 복장으로 잠행을 나간 오후였다. 중전만이 꽂을 수 있는 나비 떨잠은 광안이 직접 들어갈 보석과 세공까지 까다롭게 주문하였다. 두 번째 다시 제작을 시킨 후 완성된 물건을 확인하러 장인에게 들르는 길이었다. 내금위장 남휼 앞에 툭 노리개가 떨어졌다. 노리개를 들고서 두리번거리던 남휼 곁을 스치며 멀어지는 여인이 보였다.
‘어, 이거…….’
돌아다본 여인이 쓰개치마를 반쯤 내리고서 남휼 손에 쥔 노리개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휼이 인상을 우그리자 얼굴이 붉어져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몸종도 있건만 받으러 올 생각이 없는 듯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내려왔던 쓰개치마를 머리에 두르고는 여인이 다시 몸을 돌렸다. 팔락 꽃처럼 붉은 치맛자락이 퍼졌다. 일부러 떨어뜨린 것이 분명한 노리개를 들고서 남휼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한 표정이었다.
‘쟤가 그…… 꼬맹이였던 걔인가. 그, 그게 제 기억으로는 말입니다. 병판 셋째 딸인데.’
얼더듬는 남휼은 더 멍해 보였다.
멍청한 내금위장.
내금위 군사 복장을 한 광안이 짧게 웃고는 손짓하여 몸종을 불렀다. 병판 딸이라면 기개가 아비를 닮았나. 어느 집 여식이든 용감해서 남휼과 잘 어울릴 듯싶었다.
광안이 노리개를 들고서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던 남휼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경대가 세자보다 한 살 어리나 덩치는 더 크지 않던가.”
“전하, 아닙니다 퉁퉁해서 그렇지 키는 저하가 훨씬 크시지요.”
경대는 남휼을 닮아 몸이 크고 어미를 닮아 야무지게 생긴 미남이었다. 사사로이 세자의 외사촌이기도 하고 세자의 배동으로 어릴 때부터 궐에 자주 드나들어 세자와 허물없이 지내었다.
“제 아들 녀석이 철이 없어 세자 저하만 보면 그리도 좋다고 망아지처럼 펄쩍거리니, 세자 저하도 즐거워하십니다. 그리고 요즘도 저를 보면 아이처럼 급히 뛰어오기도 하고 크게 웃기도 합니다. 경대와 같이 팔에 매달리기도 하고요. 이것저것 가르쳐 달라 떼를 쓰기도 합니다. 건강히 그 나이에 맞게 잘 성장하고 계십니다.”
광안의 얼굴에 설핏 비치다 사라지는 질투심을 읽으며 남휼이 짓궂게 웃었다.
동궁전 뜨락이 밤기운에 잠기었다. 고요한 밤이지만 동궁 침소는 여전히 궁인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 세자는 주상의 다른 일정 때문에 저녁 문안을 중궁전과 대왕대비전에만 올렸다.
침전으로 돌아와 쉬지 않고 바로 시강관들을 다시 불렀다. 시강관이 강의를 마치고 나간 후에도 세자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책을 읽었다. 상궁과 내관이 번갈아 들며 금침을 펴고, 곤룡포를 벗게 하였다. 침수에 드셔야 한다는 말을 고집스레 물리자, 눈치만 보던 상궁이 못내 걱정스런 얼굴로 침소를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흠흠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 올려다보니 동궁전을 주관하는 홍 내관이었다.
“저어하.”
길게 빼어 부르는 목소리 끝이 바르르 떨렸다.
세자는 내관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루 내내, 매일 같이 듣는 호소이다. 조금 더 드시옵소서. 아니 되옵니다. 수랏상을 물리지 못하옵니다. 아무리 아뢰어도 결국 세자의 의지대로 진행될 터인데 매번 꺾지 않는 고집이 가상하였다.
“저어어하아.”
빼어 내는 목청이 더 길어지는 것을 보니 책으로 도로 향하는 시선을 붙잡겠다는 의지가 결연했다.
“저하를 보필하지 못하는 죄인에게 차라리 벌을 내리소서어어.”
오늘 내관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모양이었다. 옆에 버티고 서서 고개를 숙이고서 목에 굵은 핏대가 서도록 벌을 내리라 아우성이었다. 귀가 쩡쩡 울려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세자가 턱을 괴고는 비스듬히 내관을 올려다보았다. 피로감을 담은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저어하.”
부름에 세자가 짤막히 답했다.
“듣고 있다.”
“하오면, 저하.”
“독촉하지 말라. 생각 중이다.”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세자를 보필하지 못하는 죄인에게 내릴 벌.”
비스듬히 올린 눈길은 아이답지 않은 위엄이 있었다. 순간 내관의 입이 얼어붙은 듯 꾹 다물렸다.
“내일부터 내가 한 수저도 들지 않는다면, 내관은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주상 전하께 거짓으로 보고를 올리는 죄를 범할지, 그대로 보고하여 벌을 받을지, 혹은 나를 붙잡아 입이라도 벌리게 하고 음식을 밀어 넣을지……. 지금 기세라면 그리 할 법도 한데.”
내관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저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소인의 충심을 살피시어…….”
“충심을 시험하게 하지 말라.”
“하오면…….”
“내 이 서책만 읽고 침수에 들 것이다. 이미 두 차례나 말했다.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말아다오. 난 소음이 싫다.”
내관은 입을 쑥 밀어 넣고는 뒷걸음질 쳐 방을 나갔다. 숨소리도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았다.
九章
책장 넘기는 소리만 평화로운 정적을 한 번씩 흐트러뜨렸다. 한참을 몰두하여 글귀를 익히던 희는 잠시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불빛을 받은 천장이 둥그런 파문처럼 흔들렸다. 눈을 깜박이고 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서궤 위에 올린 서책을 만지작거렸다. 거듭 읽어 길이든 책은 손이 닿는 부위가 부드럽게 닳아 있었다. 아바마마의 걱정을 듣고 세자가 먹는 모든 음식을 동궁 내관들이 대전으로 보고 한 지 열이틀이고 세자에게 당과를 끊게 하신 지는 아흐레가 지났다. 수업 전에 한두 개씩 먹던 검은콩 강정도, 조청 두 숟가락도 일체 세자에게 올리지 못했다.
세자는 책장을 쥔 손을 관찰하듯이 살폈다. 등잔불빛 아래 음영이 진 손은 뼈마디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손을 들어 볼을 만져 보았다. 조금 살이 붙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열심히 먹었건만…….
억울함에 입술이 실룩인다. 하아, 세자가 터트리듯 숨을 내쉬었다. 내주에 있을 회강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눈을 감고 외웠던 부분을 다시 되뇌었다. 고개를 흔들어 졸음을 쫓고 막혔던 부분을 훑고서 또 눈을 감았다. 몇 번이고 암기를 반복하던 희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시만 눈을 붙여야지. 상체를 기울여 뺨을 서책에 대고 희는 꿀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쉿.
조용한 한 음절이었지만 일렁이는 분위기를 일순 정제시켰다. 손짓으로 뜻하는 명을 읽고서 강선이 동궁 내관에게 귀엣말을 했다. 한밤, 갑작스런 주상의 방문으로 긴장했던 동궁전 궁인들이 조용히 침소 밖으로 물러 나갔다.
광안은 서궤 맞은편에 앉아, 아기처럼 입을 벌리고 잠이 든 세자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혈색이 없을 만큼 흰 피부, 붉은 입술과 날카로운 콧날, 짙고 고른 눈썹과 긴 눈시울. 흑색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쓰고 있던 세자보다, 침의 차림에 무방비하게 잠이 든 세자가 어린 시절 본인을 꼭 빼닮은 것만 같았다.
서안 위로 세자의 구부러진 등이 시려 보였다. 광안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곤룡포를 벗었다. 꿈이라도 꾸는지 한 번씩 몸을 떨며 잠이 든 세자에게 조심조심 곤룡포를 덮어 주고 등을 다독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그대로였다. 행여 목이 아프지 않을까, 광안은 세자의 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귓등에 손가락이 닿자, 으음 세자가 아기 같은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고개를 들고 눈을 몇 번 깜박이는 동안, 세자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마침내 동그랗게 뜨고는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손을 짚고 머리를 숙였다.
“아바마마.”
광안이 손을 뻗어 숙인 등을 한 번 두드리고 목을 쓰다듬었다.
“그리 불편하게 잠이 들면 다음날 목이 굳어 아프지 않느냐.”
“자주 그러는 건 아니옵고, 오늘도 잠시만 눈을 붙인다 하였는데…….”
세자는 제 등에 덮여 있는 적색 곤룡포를 보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손끝으로 의복을 잡았다 놓기만 하였다. 아바마마의 의대를 덮고 있을 수도, 내릴 수도 없었다.
“추워 보이길래.”
“아니옵니다.”
“세자.”
부름에 잇따를 하명을 기다리며 세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 말씀이 없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바마마의 웃는 눈이 보였다.
“이리 오련?”
벌린 팔을 보며 세자는 눈을 비볐다.
“이리로, 가까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자 아바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와 보라는 듯 팔을 더 벌렸다. 툭 용포가 바닥으로 흘러 떨어졌지만 세자는 알아채지 못했다. 무릎이 닿도록 다가가자 주상은 세자의 몸을 어이없을 만큼 가벼이 들어 안았다. 다리 위에 앉히고 꼭 끌어안자 얼굴이 품에 묻혔다. 놀라움은 잠시, 코로 뺨으로 들어오는 아바마마의 온기에 세자는 금세 편안해졌다.
“어디 보자, 뺨이 얼마나 통통해졌나.”
광안이 손을 들어 가슴팍에 반쯤 묻힌 세자의 얼굴을 만졌다.
“열심히 분부대로 먹고 있습니다.”
“그래, 살이 좀 오른 것도 같고.”
그렇게 말하면서 광안은 소맷부리 속에 손을 넣어 세자 팔목을 굵기를 재어 보듯 잡았다 놓았다.
“팔도 씩씩해졌고.”
세자는 정말 그런가 싶어 후욱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세자.”
“네, 아바마마.”
뺨을 쓸어 주며 주상이 말했다.
“수라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으로 지어진다. 알고 있느냐?”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몰라 세자는 주상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나하나, 백성의 땀과 노력으로 지어진다. 골고루 모양을 살피고 저를 움직여 맛을 보며 곳곳마다 품고 있는 지방의 민심을 읽는 일이 주상이 할 일이다. 음식을 맛보면 진상한 지역의 상황을 알 수 있고 관심을 두어 물을 수 있다. 주상은 먹는 일에도 쉼이 없다. 또한, 세자는 골고루 먹어 건강한 몸을 키워야 한다. 국본은 아파서도, 휘청거려서도 아니 된다.”
“네, 전하.”
세자가 얼굴이 붉어져서 답을 하였다.
광안은 부드럽게 등을 다독였다.
“지금은 그저 잘 먹고 잘 자기만 해도 네 일은 충분하다. 물론, 세자가 고강에서 훌륭한 성적을 받고, 예학도 무예도 게을리하지 않고 반듯한 몸가짐을 보여 아비는 몹시 자랑스럽다. 얼마나 자랑스러우냐면 매번 대소 신료들을 모아 놓고 크게 떠벌리고 싶은 마음이다.”
올려다보는 세자의 눈이 많은 물음을 담고 있어 광안은 빙그레 웃었다.
“너는 나를 꼭 닮았지. 입이 짧은 것도, 잘하려 기를 쓰는 것도. 그래서 가끔 마음이 과하게 쓰였다. 세자, 빨리 크려 하지 마라. 세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세자의 아비가 충분히 길게 오래 기다려 주마.”
세자는 더운 울음덩어리로 목이 메었다. 답을 해야 하는데 입을 벌렸다 다물기만 하였다. 충분히 오래 기다려 준다는 든든한 아비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참는 일이 고작이었다. 답하지 않아도 좋다는 듯이, 어쩌면 울어도 괜찮다는 듯이 주상은 등을 두드려 주기만 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느린 숨 사이 흐리게 묻어나는 음성이 숨결 같은 단어를 만들었다.
내 아들, 희야…….
사가에서나 쓸 법한 말이었다. 희는 아바마마의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 상상으로 만들어 낸 소리가 들리나 보다 눈을 꼭 감았다. 한참 동안 주상은 희의 목덜미를 쓸어 주고 발그레해진 귓등을 쓰다듬었다.
“잠이 들었느냐, 세자.”
“아니, 아니옵니다.”
세자가 고개를 반짝 들자 눈이 마주쳤다. 주상이 웃으며 약간은 살이 붙은 세자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열심히 잘 먹었으니, 상을 줘야지.”
광안이 한 손을 뻗어 서궤 위에 두었던 제법 큰 비단 주머니를 건네었다.
“열어 보아라.”
주머니를 벌리던 세자의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광안의 팔을 움켜쥐며 확인하였다.
“정말 제게 주시는 것이옵니까? 다 먹어도 되옵니까?”
주머니 속에서는 며칠 내내 아른거리던 밀과와 콩 강정과 엿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그럼.”
세자는 광안의 품에 안긴 채로 밀과를 꺼내어 입에 넣었다. 손에 붙은 끈적한 꿀을 살짝 핥아 먹으며 광안의 얼굴을 살폈다.
“수라를 잘 먹으면 더 주겠다.”
“고맙습니다.”
아이처럼 인사하며 세자가 광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광안은 허허 웃으며 뺨을 부비는 아들을 깊이 품었다.
“당과 하나에 기뻐하는 건 중전을 꼭 닮았구나.”
잠시 가만히 있던 세자가 품속에서 멈칫하더니 몸을 떼고는 슬쩍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광안의 품속에 비단 주머니가 하나 더 숨겨져 있었다. 붉은 주단에 금사로 화려한 꽃이 수놓아진 주머니였다. 세자의 시선 끝을 알아채고는 광안이 흐흠 헛기침을 하였다. 세자가 광안을 올려다보며 작게 물었다.
“어마마마께 가시던 길이었습니까?”
광안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
세자가 무릎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밤이 깊었는데 어마마마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너무 오래 동궁에 머무르셔서…….”
그러면서도 세자의 눈은 불룩한 비단주머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광안이 비단주머니를 내려 세자 앞에 벌려 주었다.
“세자가 가져도 된다.”
“아, 아니옵니다.”
세자가 황급히 고개를 젓고는 물러섰다.
광안이 웃으며 서책 위로 주머니를 뒤집었다. 색색 고운 한지에 싸여 우두둑 떨어지는 당과들에 세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검은엿 하나만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고는 광안이 싱긋이 웃었다.
“중전에겐 하나만 있으면 족하지 싶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는 세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당부했다.
“이 밤에 다 먹으면 탈이 나서 아니 된다. 아껴 먹어라.”
“네, 네. 아바마마.”
발그레해진 세자의 볼이 어쩐지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더 포근하게 살이 올라 보였다.
중전의 침전으로 향하는 광안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은우가 잠이 들었을까. 깨어 있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잠이 들었다면, 깨워야 하나. 아니, 순하게 잠든 얼굴을 보면 차마 깨우지 못할 터.
침소 앞에 도달하자, 겨울바람으로도 식히지 못한 열기가 단전 아래로 모여 뭉근하게 몸을 데웠다. 강선이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고하였다.
“주상 전하아 듭시오오.”
강선은 해가 갈수록 눈치가 더 빨라진다. 광안의 숨소리만으로도 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겼나 싶을 정도였다. 일부러 크게 고하는 소리를 낮추라 손으로 지시하며, 광안은 열리는 문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강선의 노력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색색 숨소리를 내며 은우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광안은 금침 위에 앉아 은우의 감은 눈과 작게 벌린 입술을 보았다. 광안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마를 매만지고, 코를 쓰다듬고, 입술을 만졌다. 으응……. 은우가 몸을 뒤척였다. 분명 들른다는 전갈을 했을 텐데 이렇게 쿨쿨 잠이 들어 버리다니. 은우는 예전부터 대체로 무던하고 때로는 무심하다 싶을 만큼 둔한 면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세자는 나를 닮아 예민하고 매사 태평한 대군이 은우를 닮았구나.’
처소에서는 은은하게 은우의 향이 감돌았다. 광안은 익선관을 벗어 놓으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온기와 향기가 콧속을 파고들어 폐부를 적셨다. 비로소 왕으로 보내는 길고 고단한 하루의 긴장감이 풀어졌다.
입을 맞춰 잠을 깨울까…….
광안은 도톰한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서 사뭇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머뭇머뭇 손가락만 떼었다 붙였다 하는데 갑자기 장지문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전하아. 내관 강선 잠시 들겠사옵니다아아.”
광안이 흠칫 놀라 손을 무릎 위로 올리는 순간, 은우가 반짝 눈을 떴다. 광안을 보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아아.”
은우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눈을 깜박였다.
“제가 혹시 잠이 들었습니까?”
그럼 뭘 하였단 말이냐. 어이없는 질문에 광안이 답을 하기 전, 문밖에서 강선이 목에 힘을 주며 재차 물었다.
“전하아, 지금 들어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
광안이 짤막히 답했다.
“예이. 그럼 소인들은 그만 모두 다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문이라도 벌컥 열고 들어올 듯이 굴던 강선은 용무조차 말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화급한 용무란, 은우를 깨우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광안은 나이 든 내관의 배려에 웃음이 터져 버렸다. 또한 그렇게 배려를 받았으면, 제대로 밤을 보내야 할 일이다. 광안이 웃음기를 거두고 은우를 쳐다보았다.
“중전은 내가 들른다는 전갈을 받지 못했소?”
10년이 되도록 고집하는 말투는 신료들 앞에서만 달라졌다. 둘만 있는 밤에 은밀히 속삭이는 경어가 낯설었다. 은우가 대번 광안의 눈치를 살폈다.
“받았사옵니다. 헌데…….”
“헌데, 나보다 잠이 더 고팠군.”
광안이 용포를 털며 일어섰다. 은우가 급히 이불을 떨치고 따라 섰다.
“전하. 잘못하였습니다. 분명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저도 모르게 앉아서 조금 졸았나 봅니다. 분명……, 앉아서 졸았는데…… 이 상궁이 들어 자리에 눕힌 모양입니다.”
은우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금침 아래로 다소곳이 내려섰다. 곤란한 듯이 손을 모으고서 시선을 아래로 낮추고 서 있는 모습을 보자니, 어스름한 새벽 소세 물을 들고 서 있던 첫날이 떠올랐다. 동그란 이마, 가지런한 눈썹, 도톰한 입술. 악이나 독기란 한 올 찾을 수 없는 순하고 부드러운 이목구비였다. 눈을 맞추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입술을 벌리게 하여 맛을 보고 싶은, 부드럽게 혹은 난폭하게 가지고 싶은 욕망이 치솟아 적잖이 당황했었다. 끝끝내 광안의 눈빛을 무시하고서 고개 한 번 들지 않던 나인이 이제는 시선을 읽고 눈을 맞추며 생긋 웃어 주었다.
“잘못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소서.”
마음을 녹이는 달짝지근한 미소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미소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어 가슴 밑바닥부터 저릿저릿하게 욕망이 지펴진다.
“이리 늦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피식 올라가는 입가를 누르며 광안이 말했다.
“왜 늦었냐는 비난이로군.”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요. 다만 늦은 시간까지 침수에 들지 않으셔서 걱정을…….”
은우의 말을 끊으며 광안이 불쑥 고개를 숙여 입술을 가까이 붙였다. 뒷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선 닿을 듯이 아슬아슬 입술을 약간만 띄워 놓고서 말했다.
“세상모르고 잠만 자더니.”
기다란 광안의 검지가 은우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톡톡 연지를 찍듯이 두드렸다. 입술이 연지를 바른 듯 조금 더 붉어졌다.
“기다렸습니다. 많이…….”
검지가 입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치열 아래를 지나 은우의 볼 안쪽 여린 살을 아프지 않게 긁었다.
“진정 기다렸느냐, 많이?”
벌어진 이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며 물었다. 은우는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다면, 미리 잠을 자 두어 밤을 지샐 작정이었구나.”
어이없는 말씀이었다. 은우는 주상의 억지에 고개만 저었다. 아니옵니다, 라는 말을 하려 하면 주상의 손가락을 깨무는 꼴이었다.
은우의 커다래진 눈을 보며 이번에는 느리게 입 속을 가로질러 반대편 안쪽 살까지 남김없이 훑어 내리고서야 광안은 젖은 손가락을 빼어 냈다.
“기대해도 좋다.”
젖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거칠게 문지르며 속삭였다.
“겨울밤은 길 테니…….”
광안이 뱉는 그 말에 은우의 귓등이 붉어졌다.
十章
붉어진 귓바퀴를 따라 광안의 입술이 움직였다. 문질러지고 깨물릴 때마다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소름 위로 입술이 미끄러졌다. 저고리를 밀어젖혀 드러난 나붓한 어깨를 강하게 빨아들이자 은우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졌다. 치마 끈 위로 뽀얗게 솟은 속살에 입을 꾹 맞춘 뒤 광안이 고개를 들었다.
“은우.”
이름을 부르며 광안이 팔을 벌렸다. 은우가 용포 아래 겹겹이 입은 옷을 하나씩 벗겨 내렸다. 속저고리를 풀다가 끈에 매달린 비단 주머니를 발견하고서 은우가 물었다.
“무엇이옵니까?”
금사로 수가 놓아진 주머니는 마찬가지로 금사가 섞인 제법 긴 끈으로 꿰어져 있었다.
“선물.”
광안이 은우의 가느다란 팔목에 주머니를 걸어 주었다.
“선물이요?”
무언가 열어 보려는 은우의 양손이 광안에게 잡히나 싶더니 머리 위로 쭉 높이 올려져 버렸다. 광안은 은우의 손을 뒷머리에 붙이게 하고는 치마끈 매듭을 풀어 내렸다. 가슴이 드러나자 은우가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 가리었다. 수천 밤을 같이 보내고도, 아이를 셋이나 낳고도 은우는 광안 앞에서 어릿한 수줍음이 있다. 데루룩 굴리는 눈동자를 보니 환히 밝힌 촛불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가슴을 가리고서 은우는 흔들리는 촛불만 쳐다보았다. 깜박이는 눈동자가 순하고 긴장으로 굳어지는 몸이 안쓰러워 매번 광안이 반쯤 져 주고 들어갔다. 그렇게 시작하면 내내 은우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끝까지 몰아붙이지도 못했다.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동궁전을 나서면서부터 욕정으로 몸이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광안은 들어줄 리가 없으니 포기하라는 말 대신 양 팔목을 한꺼번에 잡아 머리 뒤로 올렸다. 은우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한쪽으로만 잡아당겨져 길어진 주머니의 줄이 팔에서 미끄러져 어깨까지 내려왔다. 광안이 허공에서 달랑거리는 주머니를 잡아 은우의 맨가슴 위로 끌어왔다. 주머니에 놓은 금사의 수가 은우의 가슴을 스쳤다. 갑작스런 자극에 아아, 은우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몸이 절로 구부려지고 손이 아린 가슴 끝을 가렸다. 광안은 은우 앞에 똑바로 서서 은우가 벗기다가 남겨 둔 옷가지를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은우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 가슴을 가리고 있는 손을 떼어 옆으로 얌전히 붙이며 광안이 명했다.
“손은 내리고, 눈은 들어.”
광안의 손가락이 어깨에 걸려 있는 주머니의 줄을 주르륵 훑어 내리자 절로 은우의 가슴이 들썩였다.
“눈.”
착하게 들어 올리는 눈이 광안의 벗은 상체를 담았다. 흉터들 사이로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음영이 잔잔히 고여 들었다. 속고의마저 훌훌 벗어 내리자 은우의 눈이 흠칫 커졌다. 은우의 시선을 받은 아래는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팽창하였다. 절로 얼굴이 붉어지고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둘은 욕망 서린 눈길만으로 서로를 한껏 탐하였다. 앵두빛 젖꼭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광안이 주머니를 벌렸다.
“선물을 확인 해야지.”
손을 주머니 속으로 이끌어 가 은우가 딱딱하고 납작한 검은 엿을 집는 순간 광안은 앵두를 입 속으로 삼켰다. 혓바닥으로 굴리며 다른 쪽을 주머니의 줄과 함께 집어 올려 둥글게 굴리고 문질렀다.
은우가 숨을 삼키며 광안의 어깨를 짚었다. 까슬한 주머니의 줄이 여린 살을 아프게 자극했다. 반대편의 뜨겁고 촉촉한 감각과 대비되어 느끼는 감각이 통각인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어 어지러웠다.
광안이 입을 떼고는 엿을 움키고 있는 은우의 손을 덮어 쥐었다. 가까이 들어 올려 은우가 쥐고 있는 엿을 입 안에 넣었다. 딱딱한 겉면이 혀를 누르고 단 침이 괴었다. 쪽쪽 빨아들일 때마다 은우의 손에 젖은 입술이 닿았다.
은우가 손이 잡힌 채 광안을 올려다보았다. 엿을 빨며 제 손에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이 색스러워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입을 맞추고 싶어 발뒤꿈치를 가만히 들어 올렸다. 엿을 뱉어 놓으며 광안이 매끄러이 웃었다. 반짝거리는 입술을 주는 대신 주머니의 금사줄을 팽팽하게 당겨 솟아오른 정점을 사정없이 건드렸다. 으으응,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끝이 쓸릴 때마다 몸이 절로 뒤틀렸다. 피하려는 은우를 향해 광안이 얼굴을 내리나 싶더니 갑작스레 줄과 한꺼번에 가슴이 삼켜졌다. 까슬한 줄이 유두를 감은 채로 혀로 굴려지고 빨렸다. 은우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광안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광안이 입을 떼자, 참았던 신음성이 터졌다.
으흑…….
충분하지 않았다. 조금 더 함부로 쥐어 주고 입 속으로 넣어 세차게 삼켜 주길 원했다. 광안은 욕망이 어른거리는 은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발갛게 달아오르고 침으로 번들거리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뾰족하게 세운 혓바닥이 고개를 든 젖꼭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닿을 때마다 갈증이 더 커져 은우는 아항, 아항, 목을 울렸다. 떨어지는 혓바닥을 잡으려 은우가 광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더 강하게 흡입하여 깨물어 주었으면 하는 갈증에 목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무릎이 휘청 꺾였다. 고작 가슴 끝 몇 번 스치고 빨렸을 뿐인데 서 있는 일조차 힘들어진 지 오래였다. 이미 건드리지도 않은 비부가 뜨겁게 젖어 갔다. 당장 깊은 곳으로 범해지길 원하였다. 말끔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주상이 원망스러웠다.
“오늘 밤은, 실컷 투정만 부려라.”
광안이 비스듬히 웃었다. 은우의 손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한 엿을 빼어 냈다. 가슴이 희롱당하는 동안 줄곧 힘주어 움켜쥐고 있었다. 광안이 혀를 내밀어 녹은 엿물로 끈끈해진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핥기 시작했다. 은우가 으으응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앉으려 하자, 허리를 둘러 안아 그러지 못하게 하였다. 은우의 벌어진 입술에 겉면이 다 녹아 버린 엿을 밀어 넣었다.
“꽉 물고 있어라.”
광안은 마지막 남은 은우의 속곳을 떨어뜨리며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오목하게 다물린 살을 벌리며 도도록 올라온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문질렀다. 아으응, 엿을 물어 닫힌 입술로 불분명한 소리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자, 은우가 엿을 문 채로 도리질을 쳤다. 다리를 오므리려 안간힘을 다했다. 광안은 은우를 안은 채로 바닥에 앉았다. 다리를 넓게 벌리게 하여 은우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온통 미끈거리는 속으로 찔러 들어갔던 손가락이 가장 예민한 부위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몸서리쳐지는 감각에 은우가 허리를 뒤로 젖히자 이미 빨갛게 혹사당한 젖꼭지가 금사와 같이 세차게 빨려 들어갔다.
아앙. 엿으로 입이 막힌 은우가 아이처럼 우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들썩였다. 태연한 척하지만 광안 역시 후드득 몸이 떨렸다. 배출하지 못한 정염 때문에 하단에서 시작한 통각이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은우의 입가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다디단 침을 모조리 핥아 먹었다. 제 모습이 얼마나 색정적인지 알 길이 없는 은우가 눈물 맺힌 눈으로 호소했다.
광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아래를 괴롭히던 손가락을 깊이 움직이자 왈칵 더운 물이 흘렀다. 으윽, 눈물을 흘리는 건 은우인데 신음은 광안의 입에서 터졌다. 광안이 엿물이 흐르는 은우의 입술을 핥고 눈물 자국을 따라 혀를 거꾸로 움직였다. 부어오른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뽑아 올리고 비틀 때마다 은우의 불분명한 소리가 높아졌다. 광안의 입술이 은우의 침으로 흠뻑 젖었다. 아래에 있는 손도 마찬가지였다. 아래에서 나는 색스러운 소리 때문에 은우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눈초리에 눈물이 다시 아스라이 맺혔다. 결코 충족되지 않을 자극이 아슬아슬 은우를 절정의 문턱까지 치솟게 했다가 떨어뜨리길 반복했다. 은우는 결국 울음이 터졌다. 아으앙, 당과를 물고 있으면서 당과를 빼앗긴 아이처럼 투정 섞인 울음이었다. 광안이 은우가 물고 있는 엿을 들어냈다.
“그, 그만. 전하, 저는 이제는…….”
광안은 반쯤 녹은 엿을 목덜미에 대고 긁어내리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 줄까.”
가슴골을 따라 움직이자 흰 피부에 붉고 끈적한 자국이 고스란히 남았다. 광안이 몸에 그림을 그리듯 움직일 때마다 붉은 자국을 따라 혀를 놀릴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모든 피부가 수축하고 돌기가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은우가 더운 숨을 몰아쉬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한 번의 자극으로 광안이 우욱 잇새로 소리를 밀어내며 몸을 뒤틀었다. 은우가 신음이 터지는 입술 위로 입술을 포개었다. 광안의 입술이 뜨거웠다. 달콤하고 끈끈한 입술이 맞물리고 동시에 두 몸이 꽉 맞물렸다. 아무리 빨아도 달콤함이 줄어들지 않았다. 은, 우……. 광안이 욕망으로 호흡을 흩트리며 애타게 불렀다. 툭 몸을 쳐올리자 은우가 자지러질 듯한 소리를 내었다. 목을 뒤로 젖히고 밭은 호흡을 내뱉었다.
“제발.”
광안은 녹아내린 설탕물로 끈적해진 손을 들어 양 가슴을 한꺼번에 쥐었다. 이 밤 동안 물리고 빨렸으나 힘껏 만져 준 건 처음이었다. 뽀얗게 부푼 가슴이 제 손아래에서 한껏 이지러졌다. 붉은 손자국이 남도록 쥐었다 놓았다 할 때마다 은우가 움찔거리며 움직였다. 끝없이 비음을 터뜨리며 조여드는 은우가 너무 좋아 이가 저절로 악물렸다.
“은우.”
“네……, 전하.”
답하는 입술이 예뻐 집어삼킬 듯이 깨물었다. 엿물이 남아 있는 혀가 얽혔다. 삼키고 빨고 핥고 아무리 먹어도 충족되지 않았다. 은우가 다시 으으응, 앓는 소리를 냈다.
“듣기 좋구나.”
광안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은우가 목을 끌어안았다. 예민하게 부어오른 가슴 끝이 턱에 쓸렸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리는 가슴을 광안이 세게 빨아들였다. 이 사이에 넣고 물었다가 놓자 머리끝까지 뻗치는 찌릿한 통증으로 은우는 비명을 내질렀다. 광안은 빨갛게 달아오른 유두를 혀로 크게 훑으며 아랫도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셀 수 없이 꽂히는 뜨거운 자극에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자지러지는 소리가 입 속을 가득 메웠다.
은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엉거주춤 들어 올렸다. 허리 양쪽이 꽉 잡혔다.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광안 역시 고개를 저었다. 힘에 밀려 몸이 툭 아래로 떨어져다. 아아. 숨이 막혀 비명도 삼켜졌다. 지금까지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광안은 빠듯하게 더 깊이 파고들었다. 이미 기진한 몸은 쿡쿡 쳐올리는 대로 엉망으로 흔들렸다. 눈앞에서 하얀 불빛이 깜박였다. 뱃속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밀고 올라왔다. 가슴을 샅샅이 헤쳐 뜨거운 불길로 심장까지 녹여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은우는 흐릿해진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이 태양을 마주 보는 듯 시리다. 예나 지금이나 궐은 언제나 각자의 욕망으로 일렁인다. 욕망은 권력의 정점으로 향하는 법이다. 파루 소리를 들으며 남자가 기침하는 순간부터 욕망덩어리들이 맹렬하게 달려든다. 각자의 욕망을 매번 어루만지고 굴리고, 어르고, 이용하고, 때론 쳐내면서 남자는 태연한 얼굴을 가장한다. 냉혹한 성정이 비치는 검은 눈은 단번에 어떤 심장이든 움켜쥐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제압하여 두려움에 떨게 하거나, 소유하여 평생을 떨림으로 살게 하거나. 광안은 그런 주군이었다.
갑자기 까닭 없이 심장이 시큰거렸다.
“전하…….”
손을 내밀어 광안의 심장 위로 올렸다. 툭툭 빠르고 세차게 뛰는 박동이 좋아 발가락부터 자르르 열기가 다시 끓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열망하는 남자, 그 모든 이의 심장을 쥐고서 자유로이 흔드는 남자에게 물었다.
“이 심장은, 제 것입니까.”
광안의 입술이 길게 벌어졌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만들고서 답했다.
“그래, 온전히 은우 네 것이다.”
나를 온전히 받아 낼 사람은 오직 너뿐이라는 듯 남자는 굳센 팔로 꽉 끌어안고는 무너지는 몸을 바닥에 뉘었다. 이미 한계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은우의 입에서 애원인지 투정인지 모를 소리가 자꾸만 새어 나왔다. 아아아.
아흑, 전하……. 더는, 더 이상은…….
부르지도 못해 손으로 어깨를 움키고 벌어진 입으로 넣어 주는 손가락을 소리가 나도록 빨고 지근지근 깨물었다. 낱낱이 흩어지고 깨어지기를 반복했다. 끝을 모르고 치솟던 버거운 절정이 큰 파도처럼 몸을 덮치고, 따뜻해지고, 그리고 허전해졌다. 갑자기 벅차오르는 감정에 은우는 울음을 터트렸다.
전하,
전하…….
“이런, 한 번 더 안을까.”
은우가 도리질을 쳤다. 죽을 것 같아. 차마 할 수 없는 말 대신 얼굴을 가슴팍에 붙이고서 고개를 저었다. 광안이 은우를 품으며 낮게 웃었다. 입을 다정히 맞춰 주고,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등줄기를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여운으로 떨리는 몸이 부드러운 손길에 점차 가라앉았다.
광안이 거칠해진 목소리로 늦어진 연유를 설명하였다.
“……세자에게 다녀왔다. 서안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길래 깨기를 기다리느라 늦어졌다.”
은우가 붉어진 눈으로 광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자가…… 몹시, 기뻐했겠습니다.”
말하는 목소리가 잔뜩 갈라지고 가라앉아, 은우는 몇 번이나 침을 삼켰다. 광안이 은우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자가 기뻐했다. 너를 닮아 그리도 좋아하는 당과를 상으로 잔뜩 줬으니…….”
은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광안이 은우와 눈을 맞추었다.
“은우.”
“네, 전하.”
광안이 은우의 손을 들어 제 심장 위에 올렸다. 꽃 같은 흉터 아래로 심장이 툭툭 뛰어올랐다.
“네 것이다.”
극한까지 밀어붙여 정신이 나갔었다. 감히 주상에게 하여서는 안 될 말이었다. 은우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전하, 저는, 신첩은…….”
은우를 바라다보는 눈이 봄 햇살처럼 따사로웠다.
“이 심장이 멈추는 순간까지, 네 것이다.”
은우의 커다란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입술이 젖은 속눈썹을 쓸고 동그란 콧날을 따라 내려갔다. 달콤함이 남아 있는 두 입술이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