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章
덫
세자의 강무 행렬이 길을 떠난 지 한나절이 지났다. 맑은 날이었지만, 강원도로 가까이 갈수록 바람은 조금씩 매서워졌다. 신호에 따라 행렬이 멈추었다.
“잠시 쉬었다가 가자.”
광안이 흑마에서 내려왔다. 푸르르, 흑마가 몸을 떨며 콧김을 내뿜었다. 광안이 손을 뻗어 눈 사이를 길게 쓸어 주었다. 금세 강아지처럼 순해지는 흑마의 고삐를 잡아 말을 관리하는 세마직 군사에게 넘겼다. 흑마를 비롯하여 다른 말들이 개울가로 가서 물을 먹는 동안 광안은 잠시 일행에서 벗어났다. 삼정승 중 영상을 제외한 두 명이 바짝 따라붙어 있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산 공기를 깊게 들이켰다. 아침에 인사를 건네던 은우의 얼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표정이 느슨해진다. 은우는 밤을 침전에서 보내고 아침까지 같이 있었다.
잠이 깼지만 좀 더 포근함을 느끼고 싶어, 광안은 눈을 뜨지 않았다. 소리도 나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은우는 머리를 짚었다. 어지럼증이 있는 사람처럼 조심스레 움직이더니 의복을 갈아입으면서 몇 번이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금침에 누운 채로 비스듬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어디가 아픈가.’
광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더니 은우는 이내 봄꽃처럼 환히 웃었다.
‘속이 불편하구나.’
‘아니요, 저하. 언제 기침하셨습니까.’
‘지금.’
은우가 금침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비 같던 옷을 벗고, 궁녀복 차림이었다. 소셋물을 받쳐 드는 모습을 보고 광안은 잠기운이 묻은 음성으로 웃었다. 첫날이 떠올랐다.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광안의 시선을 한순간도 알아차리지 못하던 괘씸한 궁녀…….
‘오늘 아침은, 제가 시중들겠습니다.’
‘그래.’
광안이 세수와 양치를 마치자, 은우가 무명 수건으로 얼굴을 눌러 주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달고 따스한 웃음에 광안의 긴장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의대를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은우가 고개를 숙이더니 침의를 벗겼다. 훈련된 궁녀처럼 줄곧 벗은 몸을 바라보지 않았다. 광안은 내내 은우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시선이 느껴지는지, 병색이 있는 사람처럼 창백하다 싶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저하…….
은우의 부름에 팔을 벌리자, 차례로 하나씩 준비되어 있던 옷을 입혀 주었다. 소매에 팔을 넣고, 고름을 맬 때마다 은우는 기도하듯이 눈을 감았다. 진분홍 동다회가 달려 있는 주머니를 속저고리 고름 사이에 넣어 고정시켰다. 말리화와 적라의 부적이 들어 있는 주머니이다. 은우가 고개를 숙여 주머니에 입을 맞추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서 광안을 바라보았다.
‘무탈히 다녀오세요.’
융복을 매만지며, 덧입은 가죽 답호를 단단히 고정하면서도 은우는 무탈히, 편안하게, 강녕하시라, 잘 다녀오시라 몇 번이고 말하였다.
‘빨리 오마.’
‘네.’
은우가 미간을 얕게 찌푸리더니 손으로 또 입을 막았다. 고개를 급히 돌렸지만, 분명 미미한 구역질이었다.
‘속이 단단히 탈이 났구나.’
‘아침에만 그렇습니다.’
어깨에 기대게 하고서 은우의 등을 쓸어 주었다. 한참을 고개를 묻고 있던 은우가 시선을 천천히 들고서 광안을 올려다보았다.
‘저하…….’
‘응?’
‘혹시…….’
‘응.’
‘아니옵니다.’
은우가 불안한 표정을 지우며 연한 봄바람처럼 미소 지었다.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 광안을 쳐다보던 은우의 얼굴이 내내 목에 걸려 있다.
무얼 놓쳤나…….
어쩌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며 광안은 은우를 대비전에 부탁했다. 혹여 자리를 비운 동안 동궁전에서 힘들게 되면 대비전으로 데려가 달라 간청하였다. 지난번 동궁전 나인들의 괴롭힘을 빗대었지만, 숨겨 둔 뜻은 혹여 영원히 동궁전으로 돌아오지 못할 경우였다. 궐에서 내보내지 말고, 대비전에서 받아 주길 간청함이었다.
강은우, 대비전에서 열심히 궁녀 일을 하여 상궁이 되어라.
그리하여 개구리첩지도 올리고……. 어여머리를 하고.
잊은 듯 살다가,
어느 맑고 좋은 날 큰 행사가 있으면 백옥 떨잠 한번 그 머리에 달아 달라고.
가슴이 시큰거린다. 눈을 감으니, 지난밤 은우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오색구름으로 휘감은 선녀가 그리 고울까. 우리 은우, 가장 아름답고 품위 있는 지밀상궁이 되겠구나.
지금은 뭘 하고 있으려나.
광안은 한양을 향해, 저물어 가는 하늘로 시선을 멀리 던졌다.
속은 가라앉아 밥은 잘 먹었는지, 새삼 걱정스럽다. 잘 먹고 잘 쉰다 하면서도 핏기 없이 해쓱하던 낯빛도……. 주상의 병세를 살피는 양평군을 보낼 수가 없어, 내의관을 보내었지만 은우가 극구 거부하였다. 치료를 받으라 강요하지도 못했다.
후우……. 길게 한숨을 쉬자, 남휼이 말을 건네었다. 내내 얼굴을 살핀 모양이었다.
“저하. 모두 다 잘 진행될 터이니 부디 심려 놓으소서.”
“휼.”
격식을 차린 말에 격의 없이 이름을 불렀다. 남휼이 긴장을 풀며 편안히 웃었다.
“너를 강무에 보내며 남상경 대감께서도 걱정이 많으실 텐데, 인사도 못 여쭈었다.”
남휼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대감은 담대함이 저의 열 배는 되는 분이라, 그런 걱정 따위는 일절 없으십니다.”
“하긴.”
어린 시절부터 늘 덤덤하고 무뚝뚝한 얼굴로 휼을 바라다보던 남상경 대감을 떠올리며 광안의 얼굴에 잔잔히 미소가 떠올랐다.
“게다가 며칠 전에, 출가한 여동생이 집으로 왔습니다. 영서 말입니다. 입덧이 심하여 사돈 어르신께서 친정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영서는 남상경 대감이 금이야 옥이야 귀여워하던 늦둥이 여식이다. 남휼이 어이휴, 혼잣말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엄살이 어떻게나 심한지, 입덧 좀 한다고 아침마다 구역질을 해 대고, 밥은 냄새가 나서 못 먹는다 하면서 아기처럼 온통 단 과일과 당과만 입에 물고 다니고, 어지러워 걸음도 못 걷는다고 드러눕고 시도 때도 없이 졸다가도 밤에는 잠을 못 잔다 어쩐다, 하도 눈물로 호소하니 인품 훌륭하신 사돈어른들께서 아예 출산까지 친정에서 맘 편히 지내어라 하셨답니다. 제가 보기엔 똑같은데 어머니나 아버지께서는 영서가 얼굴에 핏기가 하나 없네, 해쓱하니 볼이 패인 게 쓰러질 것 같네 근심이 지나치시지요.”
남휼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껄껄 웃었지만, 광안은 눈썹을 찡그린 채로 답을 하지 못했다. 오로지 한 가지만 알아내려 집중하며 흩어진 장면들을 재빠르게 조합하였다.
설마, 광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는 의심을 본인이 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니, 내게 말하지 않을 리 없다.
아니! 은우는 알고서도 말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잠자리에서 은우는 광안의 손길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곤 했다.
저하, 조금만 부드럽게.
조금만. 천천히.
부디.
어젯밤 은우의 말이 머리를 후려치듯 떠올랐다.
예쁘다, 속삭이며 양 가슴에 입을 맞추자 은우가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게 말했다.
‘다른, 곳은요…….’
머뭇거리는 말투가 사랑스러워 광안이 웃었다.
‘어디를 예뻐해 줄까.’
‘아……. 아니, 그런…….’
‘어디, 여기? 아니면 이곳인가?’
입을 맞추며 아래로 내려가자, 마치 무언가를 보호하듯 가리고 있던 손을 열었다. 광안은 배꼽 아래로 도도록한 배에 입을 맞추었다. 은우의 손가락이 광안의 뒷머리를 간질이고, 귓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광안은 배에 입술을 댄 채로 웃음이 다시 터졌다. 은우가 간지러운 듯 몸을 비꼬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자꾸만 배에 입을 맞추고 입김을 불고, 또 웃었다.
너는, 얼굴이랑 팔다리에만 살이 내렸구나.
광안이 놀리듯 말하자 은우가 시선을 피하였다.
“내가, 천치였다.”
광안이 주먹을 움켜쥐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대체 왜, 말을 하지 않았나! 화가 발칵 솟았지만 은우의 애잔한 눈이 광안의 이기적인 원망을 틀어막았다. 슬픔의 그림자는 어른어른 엷은 너울처럼 얼굴 위를 비추다가 이내 해사한 웃음 한 번으로 환히 걷히곤 했다. 세자빈 책봉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니었다. 결코 서자는 보지 않겠다. 장자는 정궁에게서 보겠다. 그래서 네가 더 마음에 든다는 광안의 매정한 말이 은우의 입을 닫게 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은우의 임신을, 누가 더 알까. 철저히 숨겼다 해도 유의 깊게 바라보면 알 수 있는 명백한 증상들이었다. 수십 년 궐에서 처세와 눈치로 살아남은 대조전 주 상궁의 눈에 띄지는 않았을까.
아…….
광안은 스스로에게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은우가 임신했다면, 광안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은우의 목숨을 원할 것이다. 내명부 수장은 중전이다. 세자가 없는 동궁전에서 일개 나인, 은우를 어떤 핑계로든 끌고 갈 수도 벌을 내릴 수도 있다.
“휼!”
광안이 남휼의 팔을 붙잡았다.
“가라. 지금 당장 궐로 돌아가.”
“저하!”
“은우를, 네가 지켜라.”
“하오나, 저하. 제가 강무에 가지 않으면.”
“명이다.”
남휼이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강무는 광안을 잡기 위한 덫이었다. 남휼의 검 없이는 광안의 목숨이 위험했다.
“저하, 죄송합니다. 명이라 하셔도 저는…….”
“내 아이를 가졌다.”
남휼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부리부리한 눈에 복잡한 심정이 스쳤다. 광안이 남휼의 손등을 덮어 쥐었다.
“그러니, 부탁이다. 제발 은우를 지켜 다오.”
*
뒤척이다 잠시 눈을 붙였나 싶었다. 은우는 기이한 소리에 잠을 깼다. 벌써 세 번째다. 닷새 간격으로 이런 소리를 들었다. 미향이 잠을 설칠까 봐 누운 채로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 다시 길게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끼익끼익 날카롭고 높은 소리가 이어졌다. 손으로 내는 호각 소리 같기도 하고 날카로운 쇠붙이가 서로 맞부딪혀 긁히는 소음 같기도 했다. 그러기엔 거리감이 너무 멀게 느껴져 도무지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 번 더, 선명히 들리는 소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불쾌했다.
“은우? 자니?”
미향이 나지막하게 불렀다.
“아, 아냐.”
“그래, 너도 깼구나.”
눈을 비비며 미향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미향아, 좀 전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그게 말야, 나 실은 무서워서 잠을 못 잤어.”
“응?”
“세답방에 같이 일하는 김 나인이 너무 끔찍한 말을 하잖아.”
“무슨?”
“여기 궁녀 처소 뒤쪽으로 한참 가면 북문으로 이어지는 샛길 알지?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여름이면 시원하다고 가끔 가곤 했잖아. 거기 소나무 숲에……. 김 나인이 새벽에 갔더니.”
미향이 후욱 숨을 내어 쉬며 제 심장 위로 손을 얹었다. 목소리를 지나치게 낮추어 거칠거칠한 발음으로 숨죽이며 말하였다.
“피가……. 목이 잘린 개 사체를 분명히 봤다고.”
은우가 숨을 멈추었다.
“김 나인이 그 새벽에 소나무 숲에 간 이유를 절대 말할 수 없대. 그래서 보고할 수 없었대. 다음 날 낮에 갔더니 핏자국도 사체도 없었다는 거야. 정말 귀신이 돌아다니는 걸까?”
다시 소리가 가늘고 길게 울리다가 이내 그쳤다. 재갈을 물린 짐승의 신음이었다. 은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만약, 세자 저하를 향한 저주술을 누군가가 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소나무 숲만이 아닐 테다. 분명 동궁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인 사체를 동궁 침전 근처에 묻을 수도 있다. 아니면 더 끔찍한 저주를 담은 무언가를……! 벌떡 일어서 떨리는 손으로 옷을 차려입었다. 미향이 붙잡아도 소용없었다.
“미향아, 나 가 봐야겠어.”
“어디? 소나무 숲? 안 돼!”
“아니, 아니야. 동궁전에만 가 볼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문을 열고 나가는 은우 뒤를 미향이 쫓았다. 미향이 챙겨 온 등불로 길을 밝혔다. 보름달이 환한 밤이어서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달빛이 스미는 궁궐의 밤 속으로 뽀얗게 입김이 흩어졌다. 은우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숨을 색색 몰아쉬며 동궁전을 향하였다. 성정각으로 들어가는 자시문 앞이었다. 히익, 미향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저, 저거.”
매화나무 가지에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은우가 미향의 손을 꽉 쥐었다. 광안이 좋아하는 매화나무 가지에, 팔뚝 반만 한 크기의 시커먼 물체가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모두 다섯. 검은 쥐의 사체였다. 은우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오히려 정신은 더 맑아졌다.
“도, 돌아가자, 은우야.”
미향이 말을 더듬었다.
“난, 가야겠어. 미향아, 넌 어서 가서 서 상궁마마님을 모시고 와. 감찰상궁님이든, 누구든 좋아.”
은우는 미향을 뿌리치고 자시문을 넘어갔다. 평소에는 번을 서고 있을 익위사군들이 없었다. 모두 강무에 동행한 까닭이다. 비어 있다시피 한 동궁전은 불어오는 바람 소리, 나뭇가지가 그 바람에 흔들리며 우는 울음소리로 이잉이잉 메아리쳤다. 둥글게 궤적을 그리며 성정각을 휘감는 음산한 바람소리가 은우의 사각거리는 옷자락 소리에 흐트러졌다. 그 무엇이 덤빈다 해도 감히 깨뜨릴 수 없는 단호한 마음으로, 단단한 걸음을 움직였다. 작은 발이 치맛자락 앞으로 나올 때마다 은우는 이를 악물었다.
저주살이 꽂힐 때면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찡그리던 광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때로는 가슴에 격통을 느끼고, 때로는 도끼로 머리를 찍는 듯이 아프다 하였다. 수천 개의 바늘에 뇌가 찔리고 또 찔리는 느낌이라고도 했다. 은우의 발길이 멈춘 곳은 침전이었다. 은우는 고개를 높이 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밤하늘 위로 흐리게 번지는 입김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마치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하다. 휘영청 뜨락을 비추는 달이 그림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갑자기 눈시울이 아파 왔다.
저하…….
모퉁이를 향해 숨을 죽이고 걸었다. 침전 건물 뒤로 그림자가 늘어졌다가 사라졌다. 조도가 낮은 불빛이 어른거렸다. 탁탁 무언가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뒤이어 들리는 소리는 쓰윽쓰윽 바닥을 갈아 대는 것 같기도 했다. 낮게 죽여 쉬는 숨소리, 다다닥 급히 움직이는 발소리, 바람에 펄럭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들렸다. 셋인가……? 누군지 확인해야 했다. 적어도 저주물을 묻은 장소라도 정확히 봐야 한다. 기둥 뒤에 몸을 가리고 은우는 고개를 내밀었다. 섬돌 아래 상궁복 하나, 궁녀복 둘. 궁녀 둘이 흙을 고르다 말고 잠시 허리를 폈다. 등촉불에 얼굴이 드러났다.
“서둘러라.”
상궁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은우는 몸을 돌려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장소를 알았으니, 그들이 떠난 후 즉시 파헤쳐 저주물을 꺼내고 증좌를 얻으면 된다. 등촉불에 드러나던 얼굴들은 모두 은우가 아는 이들이었다. 적라의 부적을 발견하고 그녀의 예언을 들었을 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은우는 손을 들어 다른 팔을 문질렀다. 끝없이 소름이 돋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며 성정각을 빠져나가는 길이었다.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어디로 숨어야 할까. 은우가 주춤거리며 돌아서는데 인영이 속도를 올리며 빠르게 뛰어왔다.
“은우!”
맥이 풀리는 몸을 껴잡은 사람은 미향이다. 뒤따라온 사람들은 감찰상궁과 나인 둘이었다. 감찰상궁을 보자 두려움에 얼어붙었던 몸에 온기가 돌았다. 궁녀의 규율을 잡고 처벌을 내리는 일까지 책임지는 감찰상궁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말수가 적고 근엄한 사람이어서 평소에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일조차 없었다. 각이 진 하관이나 꾹 다물린 입술이 자아내는 삼엄한 분위기 때문에 누구도 쉬이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그런 만큼 신뢰가 가기도 했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형인 감찰상궁은 늘 상체를 숙여도 당당한 자세였다. 미향이 반가운 기색으로 말했다.
“서 상궁마마님 처소로 가던 길에, 감찰상궁마마님을 만났어.”
“귈내에 흉흉한 소문이 돌아 은밀히 시찰하던 중이었다.”
감찰상궁이 손을 들어 소리를 낮추게 하더니 은우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보았느냐?”
은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확인하였느냐. 무엇이더냐.”
“아직 내용물은.”
감찰상궁이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묻은 장소는 보았습니다.”
“사람이 더 필요하다. 미향이 너는 어서 동궁전 서 상궁에게 알려라. 또한 내관 강선이 즉시 와야 한다. 아직은 은밀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어서, 시간을 지체하지 말거라.”
“네, 상궁마마님.”
미향이 넙죽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혹시 모르니 이 나인이 같이 가거라.”
왼쪽에 서 있던 나인이 조용히 답하고 미향의 곁에 붙어 섰다. 둘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상궁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혀를 나지막하게 찼다.
“텅 비었구나. 이리 아무도 없어서야…….”
은우가 고개를 돌려 상궁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상궁이 희미하게 웃었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모르지 않겠느냐.”
상궁의 긴 눈매 속에 검은 눈동자가 비정하게 번뜩였다.
“아.”
은우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상궁은 느리게 한 걸음씩 은우를 향해 다가올 뿐, 더 이상 말도 웃음도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와 상궁이 데리고 온 나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등촉이 상궁의 손에 건네졌다. 은우의 얼굴을 델 듯이 등촉 불을 가까이 가지고 왔다. 은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쥐부리글려, 소리가 윙윙 울리는 것만 같았다. 공포로 목이 졸렸다. 상궁의 얼굴이 아득해졌다가 코앞으로 다시 다가왔다. 상궁이 등촉을 머리 위로 높이 올렸다. 신호나 된 듯이 파파박, 여러 명의 발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궁인의 소리가 아니었다. 훈련된 남자들의 발소리. 은우가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누군가의 억센 팔로 몸이 구속되고 입이 막혔다. 발버둥치는 은우 가까이 상궁이 다가왔다. 손에 들린 무명 수건이 얼굴을 덮었다. 퍽, 목덜미를 내려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암전이었다.
“데려가라.”
상궁이 무표정하게 지시했다.
덜컹 몸이 흔들렸다. 머리를 어딘가에 퉁 찧으며 정신이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가려져 있다. 팔을 움직이려 하자 어깨가 뻐근했다. 뒤로 돌려 손목을 묶은 밧줄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신체 감각에 의존하여 천천히 일어서려 하다 머리를 툭 부딪쳤다. 가마 속인가. 은우는 다시 조심스레 앉아 숨을 죽였다.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 바닥에 내려져 있는 상태 같았다. 머리로 문을 밀어 나가 볼까 애를 쓰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짤막한 비명이 연이어 들렸다.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휙휙 날카로운 검이 바람소리를 내고 비명 소리와 함께 통나무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심장이 조여들고 식은땀이 흐른다. 은우는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덜컥 가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은우야. 은우야!”
어헝, 어헝. 숫제 우는 소리를 내며 붙잡는 이는 미향이다.
“괜찮아?”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풀자, 비쳐 드는 횃불 때문에 눈이 부셨다. 입을 묶은 재갈을 내리고 미향이 다시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어떻게 된 일이야. 미향이 너는 괜찮아?”
“나야, 까딱없어.”
엉망인 꼴로 따지면 미향이 훨씬 더 심했다. 머리는 온통 흐트러지고 흙바닥에서 뒹굴었는지 옷도 더럽혀 있었다. 가마 문 너머로 살피니 궐내가 아니었다. 어둑한 산길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가마 문 밖에서 몸을 구부리고 들여다보는 이를 확인하고 은우가 놀라움에 입이 벌어졌다.
“좌익위 나으리, 어찌하여 여기에.”
“설명은 잠시 후에 드리겠습니다.”
남휼이 미향에게 나오라 손짓하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남휼이 은우의 양손 사이로 묶인 매듭을 끊어내었다.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좌익위 나으리.”
가마 문을 닫기 전 은우가 불렀다.
“미향이도 같이 가겠습니다.”
남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가 미향에게 들어오라 손짓하였다. 가마에 두 여인을 태우고 남휼은 말에 올랐다. 가마꾼은 모두 남상경 대감집의 노비이자, 검을 쓰는 장수들이었다. 남휼의 손짓에 따라 장정들이 걸음을 재촉하였다.
“사내 넷이었어. 둘은 검을 쓰는 자들. 가마에 같이 있었던 궁녀 하나. 궐 밖 어디론가 널 데려가려 했나 봐.”
둘은 가마에 앞뒤로 나란히 앉아 있어 미향이 고개를 뒤로 돌리고는 속삭였다.
“감찰상궁이 같이 보낸 나인은 침을 쓰는 아이였어.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여 배가 아파 측간에 간다고 하고 떠봤거든. 따돌리고 처소를 향해 도망을 가다가 엎어지고, 머리끄덩이를 붙잡혔지. 엎치락뒤치락했는데, 침을 날리려 대롱을 입에 대는 걸 보고 냅다 얼굴을 걷어차 버렸어. 뒤로 넘어졌는데 죽었나 싶게 꼼짝을 안 하잖아.”
미향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게 말야, 내가 발길질이 좀 되잖아?”
음성이 밝아 은우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나왔다.
“그 뒤론 미친 듯이 뛰어가다가 우리 처소 근처로 오시던 좌익위 나으리를 만나고 울고 불며 너부터 구해 달라고 난리를 쳤어. 내가 걷어차 버린 나인이 죽은 게 아니라 기절한 거였더라고. 행방을 알아내고 궐 밖으로 가마 하나가 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바로 뒤쫓았는데 아우, 난 아직도 심장이 내 거 같지 않아.”
“왜, 감찰상궁님이…….”
은우는 속입술을 깨물었다. 미향이 손을 뒤로 둘러 제 어깨를 툭툭 쳤다.
“좀 기대어서 자.”
“아니야.”
“얼른. 나도 잘래.”
미향이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손을 포개고는 몸을 앞으로 숙여 제 이마를 기댔다.
“은우야, 지금은 아무 생각 하지 말자. 우리 어떻든 이제 살았잖아.”
미향의 등에 얼굴을 묻고 은우는 배를 감싸 안았다.
눈이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지연되는 일 없이 강무 행렬이 횡성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지방 관리들이 마중을 나와 수행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횡성 현감, 제천 현감, 철원 도호부사, 도절제사까지 모두 참석하여 준비 사항을 차례로 보고했다. 대규모 강무를 오랜만에 치르는지라 긴장감이 흘렀다. 그나마 강무 전날 지내던 마제禡祭(군법의 신인 치우신蚩尤神에게 지내던 제사)를 폐하였기에 준비가 간소해져 다행이었다. 세자와 호위군을 제외한 일행은 사기소沙器所(사기를 만드는 궁궐 직영 공장)에서 행장을 풀고 밤을 보냈다.
밤이 깊었지만, 광안은 몇 번이고 뒤척이다 결국 억지로 붙였던 눈을 떴다. 이부자리에 누웠어도 언제든지 뽑아 들 수 있도록 손끝은 칼자루 위에 놓여 있다. 남휼이 도성으로 돌아간 지 이틀이다. 그에게서 아직 소식이 없다. 쉬지 않고 도성으로 갔다면 오늘 새벽이면 궐에 당도했을 테고,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보낸다면 이르면 내일 아침이나 횡성에 도착할 수 있다. 머리로는 몇 번이나 거리와 말의 속력을 계산하고,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세찬 파도 위에 띄운 목판갑 끄트머리에 위태로이 올라선 것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흔들리고, 속이 뒤집혔다. 폭우 속에 맥없이 비걱비걱 갑판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은우가 괜찮다는 답신이 있어야, 비바람 앞에 가랑잎처럼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바로잡힐 것이다. 광안은 습관처럼 은우의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진분홍 동다회 매듭이 달려 있는 명주 주머니를 이마 위에 올려 둔다. 자글자글 불안이 끓어올라 예민해져 있던 미간이 슬며시 펴진다. 은우가 주머니를 달아 주며 속삭였다.
‘그날 꼬아 만든 동다회 줄입니다.’
‘응?’
‘처음 밤을 주셨던 다음 날…….’
오호, 하는 표정으로 줄을 살피자 얼굴이 분홍빛으로 옅게 물들었다.
‘그 밤을 생각하며 만든 줄이군.’
은우의 뺨이 동다회 매듭만큼 더 짙어졌다.
광안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서궤 앞에 앉았다. 은우의 주머니를 옆에 두고서, 먹을 갈기 시작했다. 벼루에 먹이 갈리는 소리가 침묵 속으로 스며들고, 천천히 묵향이 번졌다.
종이를 반듯하게 펴고, 압으로 눌렀다.
은우.
이름자를 쓰고 광안이 홀로 미소 지었다.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에서부터 온몸으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기쁨이 빛처럼 일시에 뻗어 나갔다. 동시에 그 아이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슬픔이, 아이를 가진 여인을 홀로 남겨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환희의 빛을 날카로운 살로 바꾸어 전신을 헤집었다.
저하……. 무탈히, 강녕하게……. 부디.
하나씩 옷을 입혀 주며 마치 신비로운 주문이라도 외듯이 끝없이 속삭였다. 은우의 감은 눈이, 차마 크게 말하지도 못하는 기도가 가슴을 적신다.
먹이 마르길 기다렸다가 두 개의 서찰을 반듯하게 접었다. 광안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문 밖에서 들리는 미미한 소음은 분명 발소리다. 움직임을 들키지 않도록 훈련된 자의 걸음이 귀에 잡혔다. 광안은 아래로 슬며시 손을 내려 칼집을 벗겨 놓은 검의 위치를 확인했다. 접은 서찰을 태연하게 봉투에 차례로 넣고 밀봉하였다. 이제 그자는 광안의 문 앞이다. 툭툭, 문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가 난다. 광안이 용수철처럼 몸을 펴며 칼을 위로 쳐드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저하.”
짙은 색 철릭 차림의 사내이다. 칼날을 보고도 당황스러운 내색이 없이 삿갓을 침착히 벗고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광안이 아는 얼굴이었다. 남상경 대감집의 노비이지만 빼어난 검술을 지닌 자, 이름은 창복, 남휼이 데리고 다니는 무사였다. 전란에도 동행했고 광안의 잠행에 뒤를 지키는 검객이기도 하였다. 광안이 금상에 오르면, 내금위에 꼭 자리를 주마 약조를 할 만큼 두터운 신뢰를 받는 자였다. 옷이 밤이슬에 젖어 있었다. 하루 내내 말을 달려온 모양이었다. 품에서 꺼내는 서찰을 펼쳐 글을 읽어 내리는 동안 광안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이곳에서 누가 너를 보았느냐.”
“없습니다. 침소를 지키던 익위사군과 군졸들을 따돌렸습니다.”
지붕을 타고 내려왔겠지. 광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교지 한 통을 쓰고 수결하여 봉하였다. 사내에게 건넨 건 미리 써 두었던 두 개를 포함하여 모두 세 개의 서찰이었다.
“좌익위에게 전하여라.”
“예, 저하.”
창복이 품 깊숙이 서찰을 넣고서 돌아섰다.
“창복아.”
광안의 부름에 창복이 돌아다보았다. 한마디 말을 덧붙이며 광안은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창복이 한 번 더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침소를 빠져나갔다.
해는 떴지만, 북풍이 매섭게 불었다. 화살의 방향을 뒤틀어 댈 만큼 강한 바람이 불었다가 그치기를 반복하였다. 행렬이 병조에서 정비한 사냥터에 도착한 이후에도 산바람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저하. 바람이 잦아들면 시작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병마절도사 경학이 고하였다.
“그런 말씀은 마시오. 저하께오선 평소 늘, 맑고 바람 없는 날에만 전쟁이 있더냐며 궂은날 훈련을 강조하셨습니다.”
좌상이 반대의 의견을 비쳤다. 논쟁을 자르며 광안이 짧게 답했다.
“좌상의 말이 옳다. 강무를 시작하라.”
광안의 지시에 따라 차례로 군장들이 지휘를 내렸다. 산 하나를 에워싸야 하는 몰이꾼만 삼천에 달했다. 강원뿐 아니라 경기와 충청, 경상 전라 지역에서 올라와 강무 행군에 합류한 군사들이 각각의 지휘관의 명에 따라 도열을 재정비했다. 도열해 있던 군사들 중, 제일 선두에 서서 나가는 이는 북을 든 군사들이었다.
둥둥둥.
커다란 북소리가 산을 흔들고 하늘을 찔렀다. 북소리에 따라 군사들의 사기가 솟아오른다. 도열한 군사들 사이로 흑마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느리게 대열을 가로지르는 흑마의 움직임에 시선을 뺏겼다. 흑마 위에 검은 융복을 입은 무장이 있다. 남자의 검은 상투관 중앙에 금빛 사조룡이 박혀 있다. 대열은 일시에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았다. 북소리가 높아졌다.
“와, 와, 와!”
함성은 점점 더 거세어졌다. 흉배에 새겨진 황금빛 사조룡이 찬란한 태양빛을 받아 번쩍였다. 군사들은 홀린 듯이 흑마 위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겨울바람이 어울리는 주군이었다. 얼음으로 뒤덮인 겨울 산처럼 단단하고 험준하여 절로 고개를 수그리게 만들었다. 부신 눈을 가늘게 뜨며 풍문으로만 떠돌던 세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하는 자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세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이는 그를 죽도록 좋아하게 되거나 죽도록 증오하게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떠올리기도 했다. 광기에 홀리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모든 이의 집중된 관심과 시선이 공기의 밀도를 높이는 것만 같다. 남자의 주변으로만 이질적인 기층으로 경계가 둘러쳐진 듯했다. 오로지 햇빛만이 거침없이 경계를 뚫고 들어가 남자의 가슴에서 금빛 용이 여의주를 움켜쥐고 승천하려는 듯 꿈틀거렸다. 북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환호성 소리는 더욱 커졌다.
와, 와!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볼을 얼릴 듯 차가웠지만, 그들은 부신 눈을 비비고 뜨거워지는 가슴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가슴속을 온통 데워 버릴 듯이 차오르는 뜨거운 열기를 감당하지 못해 팔을 높이 들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제 함성이 다른 이의 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목청을 더 높였다. 흑마가 가는 길을 따라, 거대한 해일처럼 함성이 일어났다. 북소리가 뜨거운 해일에 산산이 부서졌다. 흑마가 대열의 중앙 제일 앞에서 멈춰 섰다. 세자가 팔을 뻗자 함성이 멈추었다. 공기의 흐름까지 검으로 베어 낸 듯 일시에 침묵이 찾아왔다.
세자의 팔 위로 검푸른 매가 앉았다. 말로만 듣던 세자의 흑마, 세자의 청매이다. 다른 매보다 한 배 반은 커 보이는 몸집에 단단하고 매서운 부리를 가지고 있는 영민한 군용 매였다. 신호에 따라 매가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대열 위를 빙글 크게 원을 그리던 매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세차가 날아오르자 깃발이 올랐다. 기병들이 말을 몰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였다.
와아아.
전진하는 기세가 맹렬했다. 세자의 흑마가 대열의 상단에서 속도를 높였다. 몰이꾼이 움직이고 사슴 떼가 그들을 향해 내려왔다. 검은빛 융복이 펄럭였다. 모두 열한 마리였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는 흑마 위에서 열한 개의 화살이 차례로 날았다. 황금빛 깃털이 바람을 가르며 정직한 직선으로, 때로는 계산된 곡선으로 날았다. 화살이 꽂힐 때마다 붉은 피가 깃털을 적셨다. 모두 열하나. 화살의 방향은 정확하게 왼쪽 어깨나 넓적다리를 관통하고 있다. 일제히 환호성이 터진다.
병에 시달린다던 세자는 역시 군신이라는 전설을 확인시켰다. 세자의 사냥이 끝나자 여러 방향에서 사슴 떼가 쏟아져 내려왔다. 사슴 떼를 몰아오는 것은 사냥개들이었다. 지위가 높은 군관과 장수들이 활을 먼저 쏘고, 군장들의 지휘에 따라 기병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화살이 동시에 활시위를 떠나 목표물을 향해 날았다. 바람이 거세어져 대다수의 화살은 빗나갔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슴을 쫓아 대열이 흐트러졌다.
광안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지휘관들의 마음이 바빠졌다. 호각을 불고 한 방향으로 사슴을 몰려했지만 별반 효과가 없었다. 예상보다 긴 시간 동안 사슴 떼 사냥에 시간을 보냈다.
뒤이어 스라소니와 멧돼지가 언덕 위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광안의 청매가 선두에 서서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날개를 펼쳤다. 위협적으로 하강하는 속도에 들짐승들이 뛰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훈련된 군용매들이 조도 낮은 비행을 하며 산짐승들을 몰아갔다. 광안의 흑마가 다시 선두에 섰다. 이번에는 장수와 군사들 모두 동시에 활시위를 당겼다.
산바람이 불어 장수들의 군복이 세차게 휘날렸다. 흙먼지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였을까. 화살 한 대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았다. 당당히 날개를 펼치고 산짐승을 몰아 광안에게로 오던 청매의 날갯짓이 멈췄다.
아!
허공에서 바닥으로 검은 바위처럼 떨어지는 청매를 향해 광안이 달려갔다. 호위병들이 뒤를 쫓았다. 스라소니와 멧돼지를 향해 활을 날리며 광안은 중앙을 파고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는 분간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일대를 쓸어버리는 듯 포효하는 울음이 누군가의 비명 같은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게 하였다. 대열을 향해 내려오는 거대한 몸집은 일시에 군열을 낱낱이 흩었다.
하나, 둘, 셋.
호랑이가 셋이나! 무언가 잘못되었다. 지휘관들이 당황하고 군졸들이 우왕좌왕하였다.
단번에 두개골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 단단하고 큰 턱, 사지를 뜯어 버릴 날카로운 이,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피부를 걸레 조각으로 만들 수 있는 굵은 앞발과 날카로운 발톱.
범은, 누구에게나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 순간이었다. 중앙에서 범을 향해 금빛 깃털이 달린 화살이 날았다. 화살은 정수리에 꽂혔다. 범이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했다. 맹렬히 달려드는 범을 향해 일제히 화살이 날았다.
전란 전부터 소규모 타위나 했었지 대규모 강무는 없었다. 애초부터 무리한 훈련이었다. 사슴 떼부터 흐트러지던 군열은 스라소니와 멧돼지를 향해 진이 무너진 채 각개전투를 벌였고, 범의 등장은 강무 훈련을 오합지졸들의 산만함으로 몰고 갔다. 혼란 속에 세자가 가슴을 움켜쥐며 앞으로 몸을 숙이는 모습을 확인하는 이가 없었다. 남휼이 없는 지금 세자의 원인 모를 격통, 세간에서 발작이라 불리는 통증이 시작됨을 알아차리는 눈이 없었다. 또한 날아드는 화살 끝에 혼분 주머니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만큼 침착하게 대응을 하는 자가 없었다.
세자 주위로 터트려지는 혼분에 흑마가 발작하였다. 앞발을 높이 쳐들고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는 흑마 주위로 짐승들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마치 귀신에게 목덜미라도 잡힌 것처럼 멧돼지가 네발을 굴리고, 스라소니가 앙칼지게 달려들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짐승을 몰이하던 사냥개들의 눈이 뒤집혔다. 이를 드러내며 사람이든 짐승이든 닥치는 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세자를 호위하던 군졸들이 활을 쏘고 검을 빼어 들었지만 이미 겁을 집어먹은 말들이 엉망으로 날뛰어 댔다.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내며 흑마가 세차게 요동치자 저주살을 맞은 광안의 몸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멀어지는 흑마의 뒷모습을 담는 광안의 눈에 절망이 스쳤다. 순간 날쌔게 달려드는 스라소니에게 어깨가 물렸다. 누군가의 화살이 스라소니의 목을 뚫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광안은 어질거리는 머리를 추스르며 벌떡 일어서다가 비명을 삼켰다. 발목의 통증을 숨기면서 활을 잡았지만, 시위를 당길 수 없었다. 들짐승과 사냥개들이 마치 무언가에 단체로 사로잡힌 듯, 오직 광안에게로 몰려들었다. 광안은 제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이미 짐승을 미치게 하는 혼분을 온톤 뒤집어썼을 테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든 얼굴에 시린 겨울바람이 칼처럼 꽂혔다. 사지가 제 몸 같지 않다. 어깨에서 뜨뜻한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결국 활을 놓고 검을 빼어 들었다. 혈검이라 불리던, 광안의 검. 전란을 같이했던 세자의 검이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달려드는 멧돼지의 목에서 붉은 피가 튀었다. 피 냄새는 배고픈 겨울을 근근이 버텨 온 산짐승을 미치게 만든다. 스라소니 두 마리를 베어 내고 곧이어 사냥개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짐승들이 주춤거리며 꼬리를 내렸다. 슬금슬금 뒤로 빠지는 까닭은 그들을 향한 군사들의 검이나 화살 때문이 아니었다. 광안을 향해 멀리서 범이 달려온다. 몸으로 지켜 내는 병사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진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혼분에 발광하는 야생 짐승들과 사냥개 때문에 낙마하여 쓰러진 병사들, 짐승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거나 줄행랑을 친 기병이 절반 이상이었다.
검을 세우고서 광안은 범을 마주하였다. 범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벌어진 입술이 위로 치켜 올라가고 얼굴이 찡그려질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화살들이 범을 향해 쏟아졌다.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지만, 범을 포박할 그물이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광안은 이를 악문다. 화살이 꽂힌 범도 피 흘리는 광안도 거리를 좁히지 않으며 대치했다. 광기가 도는 세자의 검은 눈과 번뜩이는 범의 안광이 부딪혔다. 광안의 피 묻은 검이 햇빛을 반사했다. 범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 한 대가 광안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났다.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말발굽 소리, 말울음 소리만 사냥터를 뒤덮었다. 화살이 휙휙 그 사이를 가르며 곧바로 날아왔다. 화살 한 대가 광안의 팔을 스치며 떨어진다. 찢어진 융복으로 피가 배어난다.
그들의 표적은, 범이 아니었다. 날아드는 화살이 광안의 검을 맞고 튕겨 나갔다. 광안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눈앞이 흐릿했다. 스친 화살 끝에 독이 묻어있었나. 광안은 무너지는 몸을 다잡고서 이를 악물고 화살을 쳐 내고 여전히 십수 대의 살을 맞고도 으르렁거리는 범을 맞서야 했다. 발작적 통증이 다시 시작되자, 손가락 하나 꼼짝을 할 수가 없다. 끝이구나, 생각하며 광안은 시선을 하늘로 들었다. 순간, 누군가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범의 머리에 정확히 꽂혔다. 포효하며 돌아보는 범의 미간을 맞히고 뒤이어 눈알을 꿰뚫었다. 범은 방향성을 잃고 날뛰었다. 경이로운 궁술이었다. 광안은 화살의 주인공을 알아챘다. 시선 끝에 시위를 먹인 조인호가 보였다. 광안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인호는 살을 놓지 못했다. 살벌한 긴장감이 두 남자의 몸을 뱀처럼 파고들어 휘감았다. 활활 타오르는 감정이었다.
배신과 믿음. 배덕과 충성.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를 질끈 깨물고서 인호가 살을 날렸다. 피슈웅, 화살이 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날아와, 이번에는 사조룡 흉배 너머, 광안의 가슴에 꽂혔다. 광안이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금빛 용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광안을 향하던 화살이 일시에 멈추었다. 인호의 말이 광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 공간을 뚫어 드는 세찬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풍성한 갈기를 휘날리며, 강인한 네 다리로 전속력을 다해 달려오는 흑마였다. 광안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비쳤다. 흑마는 발작 속에서도 죽어 가는 주인을 찾아왔다. 제 등에 피 흘리는 광안을 태우고서 달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끝까지 달려가 그 자리에 주인의 무덤을 만들겠다는 듯, 흑마는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군사들이 뒤늦게 흑마를 쫓았지만, 광기에 사로잡힌 흑마를 따라잡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가장 앞서 달리는 이는 좌부위솔 조인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