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안-8화 (8/10)

八章

살구나무 가지를 걸고서

열매를 떨구고, 잎을 버리고 뼈처럼 흰 몸만 드러내며 나무는 혹한을 견뎌 내고 있다. 한겨울이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냉랭한 겨울바람은 마른 가지를 기어이 흔들어 대고 또 흔들어 댄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하지만 중전은 금상의 명운이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위태로움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명필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글씨는 기력이라고는 하나도 품지 못하는 조악한 필체가 되었다. 주역을 통달하였다는 지력도 흐려져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었다. 상참은 거의 열지 못하였고, 한다 하여도 세자가 반드시 배석하여 내용을 따로 전달하고 금상의 의견을 유도하여 답을 주어야 했다. 실질적인 전섭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세자에게 전위하라는 상소가 올라올까 중전과 영상은 매일매일 마음을 졸일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대북파 수장 격이 전 공조참판 정인홍이 상소를 올렸다. 평소 성정답게 과격한 어조로 시작한 상소는 간흉들로 인해 종사가 위태로우니, 국본을 지키고 종사를 안정시키라 하였다. 영상 유태경이 지난날 세자에게 전위를 하겠다 명하신 전하의 비망기를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숨기며 행하지 않은 죄를 물어야 함을 역설했다. 나아가, 유태경의 흉함은 차마 입으로 다 말할 길이 없어 이 나라의 으뜸가는 간흉도 태경이고 전하의 으뜸가는 간흉도 태경이며 세자의 으뜸가는 간흉 역시 태경이라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인홍의 상소를 읽은 주상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침내 주상 전하가 비망기를 내렸을 그 뜻대로 세자에게 전위 혹은 전섭을 맡기는 일만이 흐트러지고 불안한 조정을 바로잡고 국사를 안정시키는 일이라 한 마지막 부분까지 읽고서 주상의 진노는 극에 달했다.

인홍의 상소를 계기로 조정이 들끓었다. 세자파와 대군파로 명백히 나뉜 조정 대신들의 기 싸움이 어전 회의까지 연결되었다. 이미 건강을 자신하지 못하는 주상, 또한 주상이 전섭과 전위를 직접 명하였다는 사실은 대북파에 힘을 실었다. 이합집산이 빠르게 이루어졌을 때, 당상관 이상의 조정대신들이 참석하는 조정 회의가 열렸다. 주상의 싸늘한 시선은, 광안에게 꽂혔다. 네가 감히 물 밑에서 주도한 일이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정인홍을 비롯하여 세자를 비호하던 병판까지 대북파 우두머리들이 맥없이 나가떨어지고 유배되었다. 그 와중에 대북파에 붙었다가 조정 회의 직전에 대군파로 옮겨 탄 자들의 이름이 크게 떠돌았다.

예조참판 조일문.

대비의 남동생,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아들 조인호는 익위사 좌부위솔직이었다. 처음부터 대북파가 아닌 자였다. 하지만 아들이 세자의 익위사인데,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는 점은 대북파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대북파 수장들이 줄줄이 유배를 가게 된 분풀이를 하듯이 조일문을 비롯한 몇몇 중립파를 배신자로 낙인찍으며 분위기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확실한 세자파, 핵심 대북파가 아닌 자들이 유당파로 결집하는 형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인홍의 상소 때문에 절벽으로 몰렸던 영상 유태경은 부활했고, 그가 추진하던 세자가 이끄는 대규모 강무 훈련 역시 탄력을 받았다.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던 병판이 제거되었고 예조참판 조일문 역시 국가 제례에 쓰이는 고기를 위해 이 겨울이 지나기 전, 강무를 시행함이 옳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비밀리에 거사를 위한 움직임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뜻을 도모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횡성 지방의 관리부터 거사에 동참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할 사람들은 거의 다 채워졌다. 적무의 지시에 따라 용의 기운을 서서히 누르기 위한 흑주술의 방책 역시 하나씩 실행되었다. 거사 당일 세자의 흑마가 먼저 발작할 것이다. 이어, 세자의 발작이 시작되고 세자는 낙마할 것이다. 야생 짐승을 자극하는 향이 세자 주위로 터뜨려지고 달려드는 호랑이와 멧돼지 등 야생 짐승에 혼비백산한 군졸들이 나가떨어지면, 세자는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적무가 요구했다.

‘활을 잘 쏘는 자가 필요합니다. 상처 입은 세자를 단 한 발로 명중시켜 그 자리에서 명줄을 끊어야 합니다.’

적무의 요구를 되씹으며 중전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끼워 맞춘 듯 한 사람이 필요했다. 주상의 유사시에, 국왕 책봉권을 쥐고 있는 사람. 남동생은 정인홍의 상소 건으로 대북파에 배신자로 몰려 버렸고, 아끼는 조카는 익위사에서 눈에 띄게 홀대받으며 전전긍긍 세자의 눈치만 보고 있다지.

중전이 보료에서 일어섰다.

“마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주 상궁이 비단을 덧댄 상자를 열어 보였다. 명나라 장인이 일 년에 너덧 개도 만들 수 없다는 정교한 세공을 더한 금합이 들어 있었다. 금합 속에는 색색가지 보석이 박힌 머리 장식에 가락지, 노리개가 들어 있다. 중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 상궁을 비롯한 지밀들을 뒤따르게 하고서 중전이 느리게 걸음을 움직였다. 미리 준비한 가마에 오르며 배싯 웃었다.

“대비전이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말이야. 어떻게 그리도 구석에 박혀 있을까.”

주 상궁이 호호호 간사스럽게 따라 웃었다.

*

전 공조참판 정인홍의 상소 이후, 세자와 부왕의 사이는 더없이 냉랭해졌다. 조정의 축이 기울어 힘이 세진 유당파가 세자를 옥죄고 있다. 부왕의 건강은 안정세로 접어들었는데, 광안은 이유 없는 발작이 반복되었다. 세자는 칼끝처럼 예민해진 신경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연장에서 서안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뛰쳐나오기도 했다.

영상대감이 광안에게 소대를 청하였다. 성정각은 긴장감으로 휩싸였다. 지게문 밖을 강선, 서 상궁과 같이 은우가 초조하게 지키고 있었다. 월대 아래에서는 좌익위 남휼과 네 명의 계방 군사가 시립하였다. 조용조용 낮게 울리는 세자의 음성은 잘 들리지 않았다. 시종일관 영상의 음성이 더 높고 컸다. 영상이 노기 띤 목소리로 오만함을 감추지 않으며 세자를 추궁하고 협박하였다. 강선과 서 상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은우 역시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속이 시커멓게 타 버릴 지경이었다.

“추국하면 드러날 일, 역심을 품은 도당을 비호하고 나아가 역모를 덮겠다는 말입니까!”

영상의 음성이 높아졌을 때 와장창 깨부수어지는 소리가 났다. 벼루와 연적이 날아 떨어지는 소리였다. 내관 강선과 서 상궁은 은우부터 찾았다.

“저하, 강 나인입니다.”

답은 없었지만 은우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깨어진 연적과 벼루, 먹물로 온통 더럽혀진 바닥에 영상은 벌벌 떨며 웅크리고 있고, 세자의 사인검은 영상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저하.”

은우가 광안에게로 달려갔다. 광안의 분노는 늘 검푸른 빛이었다. 너무 뜨거워 어두운 빛.

강선과 서 상궁, 내관들이 뒤이어 들어왔다. 광안의 기세에 눌려 차마 더 다가서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모두 물러가라!”

광안의 검이 시립한 내관들을 향했다.

“저하!”

일시에 엎드리는 내관들에게 명했다.

“물러가라. 두 번째 명이다.”

강선이 은우를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와 영상만을 남기고 내관들과 상궁이 물러갔다.

“저하.”

은우의 목소리가 울음으로 떨렸다.

“걱정 마라. 죽이지 않는다.”

광안이 검을 여전히 거두지 않고 답했다. 긴장이 풀어지는 영상의 구부러진 몸을 보며 잔혹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다. 그냥 죽여 버릴까. 뭐 어려운 일이겠느냐. 그렇지 않소, 영상? 발작만 일어나면 광증이 도져 미친 세자 아닌가. 호전적이고 광포하여 도저히 국본이 될 수 없는 세자 아니던가! 사람 하나 죽이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울까. 내 너 하나쯤 저승 동무 하지 못할까!”

영상은 경련처럼 몸을 떨며 입을 떼지 못하였다.

“그러니, 내 증오하기 마지않는 간흉, 영상 유태경. 국구 유태경! 너를 이 자리에서 베지 못할 리가!”

“저하, 제발.”

은우가 영상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검은 불길로 타오르는 세자, 광안…….

미친 눈이 아니라 빛이 들이치는 넓고 따스한 언덕이 되어야 할 분. 백성의 비빌 언덕이 되어 이 나라를 이끄실 분.

은우가 그 눈을 맞추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광안의 눈이 은우만을 좇았다. 몇 걸음 물러서 한쪽으로 비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은우가 바닥에 쏟아진 먹물에 붓을 찍었다. 구겨진 종이를 펴고 글자를 썼다.

화花 락落.

어린 시절 광안군 마마의 시를 듣고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쓰던 글자이다. 손이 떨려 멈춘 자리에 먹이 동그랗게 퍼졌다. 꼭 비바람에 찢어지고 떨어진 꽃잎처럼. 툭, 물방울이 떨어졌다. 눈물이 서서히 퍼지자 먹 얼룩이 번져 간다.

지知를 쓰다 붓을 멈추었다.

떨어진 꽃이…….

꽃花에 떨어진 눈물로 글자가 번졌다. 광안이 검을 거두었다.

“농이 과했소, 영상.”

광안이 손을 내밀었다. 광안의 손을 붙잡는 영상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겨우 일어섰지만 관복 아래 다리가 떨려 발을 떼지 못하였다.

“영상이 하신 농은 농으로 받아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유배 보낸 대북파의 역심을 운운하던 영상의 말을 농이라 폄하하며, 광안이 영상을 잡은 손에 힘을 더하였다.

“농담을 받았으니, 웃으시지요.”

광안이 붉은 입술을 벌리고 매혹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영상이 손을 잡은 채 으흐으흐 울음도 웃음도 아닌 소리를 내었다.

*

궐에 들어온 지도 한참이지만 세자의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계방(익위사) 소속이라 하더라도 세자가 곁에 두는 이는 오직 한 사람 남휼 장군뿐이었다. 정인홍 전 공조참판의 상소 이전에도 인호는 늘 거리를 두고 앞에서 길을 트거나 뒤에서 따르거나 섬돌 아래에서 시립하는 일을 했을 뿐, 감히 세자와 눈을 맞추고 독대를 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대북파 처단이 벌어진 이후 인호의 계방에서 위치는 몹시 난감해졌다. 일단, 가장 직선적인 반응은 노골적인 견제였다. 좌익위 남휼 장군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두터운 무관심은 분노 섞인 경계심을 가장하는 수단이었다. 일상적인 훈련을 하다가도 찰나에 무관심의 가면이 느슨해질 때가 있다. 얄팍해진 가면 너머로 좌익위 남휼 장군의 매서운 눈이 보였다.

조인호 너 따위, 배신자의 아들은 내가 먼저 베어 버리겠다.

남휼의 적개심과 분노가 차마 꺼내어 묻지 못하는 질문도 읽을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익위사로 왔느냐.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세자에게 접근했느냐.

익위사 군사들까지 인호를 보는 눈에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개중에서는 정반대로 인호에게 적극적으로 붙어 오는 인간들도 있었다. 익위사 상급직뿐 아니라 조정의 당하관, 연락을 끊고 살아가던 성균관 학정 시절 어울리던 이까지 인호를 찾아왔다. 조일문 대감의 사랑채는 날마다 손님으로 붐볐다. 권력의 향은 화려한 꽃향기이거나 혹은 썩은 생선 냄새이거나 숨길 수가 없는 법이다. 조정을 흔들던 굵직한 유당파 신료들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나자, 그 신료들에게 줄을 대고 싶은 기회주의자들이 사랑채에 문턱이 닳도록 찾아왔다.

대비는 파리해진 안색으로 인호에게 물었다.

‘대체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 게냐.’

중전이 찾아온 이후,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다 하였다.

인호는 대비전에서 나와 터덜터덜 걸었다. 금상이 배척하는 대비의 외척으로 살아가는 일은 외롭고 지지부진했다. 친척들이 차례로 유배를 가는 와중에 살아남은 조일문 대감은 오랜 세월을 살얼음판을 걷듯이 자중하였다. 누구의 파에 속하지도 않고, 조정이 격동에 휘말릴 때면 관직을 내놓고 숨을 죽이다 다시 눈에 띄지 않는 한직을 맡아 짧게 복귀하는 식이었다. 조일문의 가장 큰 움직임은 인호가 무과 시험에 응시하고, 급제를 하면서부터였다.

이대로는 못살겠다. 이렇게는 살지 않을 것이다.

인호는 그리 다짐하고 책상물림을 떨치고 일어서 활을 들었다. 이를 악물고 이루어 낸 급제였다. 한양 바닥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숨소리도 크게 못 내며 살아가느니 한양을 등지고 훌훌 떠나려 했다. 무관이 되어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매 순간 실감하는 국경을 지키고 싶었다. 과거장에서 광안을 본 순간 인호의 계획은 뿌리째 흔들렸다. 전란에서 입은 상흔 때문에 광기를 얻었다는 세자. 부왕의 홀대와 견제로 망가져 버렸다는 세자. 미친 눈의 세자라 불리는 광안은 인호의 가슴에 살처럼 박혀 심장을 소유했다. 송두리째 마음을 뺏겼다.

어느 줄을 잡을 것인가, 압력은 거세어진다.

심란한 마음으로 걷다 보니 궐내각사를 지나쳤다. 인호는 어정쩡한 위치에 우뚝 멈춰 섰다.

좌익위 남휼 장군을 독대할까, 세자를 독대하게 해 달라 청할까. 독대하여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할까.

아무것도 잡히지가 않았다. 계방 군사들과 번을 바꾸기 위해 대기 장소로 다시 발걸음을 돌리던 참이었다. 저만치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여인이 시선에 잡혔다. 녹색 누빔 곁막기, 푸른 치마를 입고 있는 나인이다. 머리 모양만 상궁처럼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지만 가르마 위에 놓이는 첩지는 없을 것이다. 첩지 없는 나인으로 세자를 모시는 궁녀, 강은우다. 수어의까지 나서서 진맥을 여러 차례 하였지만 수태를 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리하여 첩지도 상궁 직조차 받지 못한다고 수군거렸다. 세자가 서책 관리 담당이라는 일을 만들어 데려다 놓은 후, 궁녀는 매일매일 쉬는 날 없이 세자 곁을 그림자처럼 지켰다.

화사한 빛깔의 한복을 입고 옥빛 쓰개치마를 쓰고 ‘감사합니다, 나으리.’ 단정히 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대비전에서 은우 이야기를 했을 때 분노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던 세자도…….

세자의 여인이니, 못 본 척 피해 가야 하나. 인사를 여쭈어야 하나.

망설이던 인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머리보다 발이 빨랐다. 야트막한 돌담을 짚고 서서, 강 나인은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강 나인?”

올려다보는 은우의 얼굴이 창백했다.

“아, 나으리.”

힘겹게 숨을 뱉어 내면서도 은우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천성이 곱고, 넉넉한 사람이었다. 한겨울 혹한도 슬며시 누그러뜨릴 만큼 온화한 기운이 여인을 감싸고 있다.

그러니 세자가 이토록 끼고 있겠지.

“몸이 안 좋아 보입니다.”

은우가 가지고 있던 보자기를 받아 들며 인호가 말했다. 보자기는 보기보다 더 묵직했다.

“서책입니까?”

“네. 서고에서 받아 저하께 가져다 드리는 길입니다.”

은우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주십시오.”

“가는 길입니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세자 익위사이니 당연히 세자 저하의 보좌는 본인의 일이라는 명분까지 세워 서책을 건네지 않자, 몇 번 거절하던 은우가 망설이며 조그맣게 말했다.

“그럼, 조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많이 안 좋으십니까.”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또 멈춰 선 은우에게 물었다.

“조반이 체했나 봅니다.”

“지금이 몇 시인데, 조반이라니요. 이후로 계속 못 드신 겁니까.”

“걸으면 나아지겠지요.”

은우가 반듯하게 접은 작은 수건으로 이마에 솟은 진땀을 닦아 냈다. 아프다 소리를 듣고 불같이 화를 내던 세자가 어찌하여 이런 상태의 은우에게 서책 심부름을 시켰는지 인호의 눈썹이 슬며시 찡그려졌다.

“저하는 서연 중이십니다.”

은우가 인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오전에는 소대가 있었고, 오후 내내 서연장에 붙잡혀 계십니다.”

“오늘 뵙지는 못하셨습니까.”

“그러합니다.”

은우가 인호를 스치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인호는 천천히 그녀를 뒤따랐다. 토기가 솟을 때면 한 번씩 멈추어 서서 입을 막고는 호흡을 고르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 여인을 호위하며 걸었다.

동궁전 자시문 앞에 서서 여인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리는 시선은 매화나무에 머물렀다.

“저하께오서 매화를 좋아하십니다. 곧 봉오리가 맺히겠지요.”

매화일생한불매향梅花一生寒不賣香

매화는 가난하여도 일생 동안 향을 돈으로 바꾸지 않는 절개가 있다 했지.

‘이 여인이 군자의 절개를 빗대어 나를 떠보는 것인가.’

인호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강 나인은 다만 저하가 좋아하시는 나무일 뿐이라는 듯 아이 같은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다.

“고아한 기질이 뭇 꽃들의 소란스러움에 끼어들지 않네.”

은우의 눈이 똑바로 인호를 향하였다.

“이황 선생님의 호당매화湖堂梅花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그러시군요.”

“저하께 호당매화를 여쭈어 주십시오.”

조일문 대감이 속하였다고 치부하는 남인의 뿌리는 이황과 닿아 있다. 세자가 좋아하는 매화의 절개를 남인인 조인호 역시 지키고 싶다는 의미였다.

“네, 그러지요.”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인호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서책을 건네었다.

“살펴 가십시오.”

“고맙습니다, 좌부위솔 나으리.”

인호는 차비문 안으로 들어서는 여인의 뒷모습을 복잡한 심경으로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건네받은 서책 보따리를 안고서 은우는 상념에 잠겼다. 서책을 들어 주던 남자의 시선이 품고 있는 물음을 알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승은만 입은 궁녀, 강 나인. 세자빈의 간택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여전히 세자의 집무실과 침소를 오가는 나인 은우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엇비슷한 호기심과 비아냥을 지겨울 만큼 많이 받았다. 나도 궁금하다고, 묻고 싶다고, 확인하고 싶다고 문득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곤 했다. 낮이면 싹싹한 궁녀가 되어 상전의 심기를 살피고 불편함이 없게 하였다. 지필묵을 준비하고 먹을 갈고, 서책을 정리하고 필요한 서책을 찾아 펼치고 오늘처럼 떨어진 궐내 서고로 가서 찾아오기도 한다.

또한, 오로지 은우만이 세자의 성정을 달랠 수 있었다. 발작이 일어날 때도, 영상과의 소대처럼 분노를 제어하지 못할 때도……. 그리고, 바늘로 찔리는 듯한 통증을 호소하는 밤이면 은우는 제 처소에서 다시 세자의 침전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광안은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들어 은우를 게걸스레 탐하고 탐하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은우 역시 기진하여 깜박 잠에 빠졌다가 눈을 뜨곤 했다. 그런 밤이면 아침까지 다시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은우는 모로 누워 잠이 든 광안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월색이 스며 든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 위를 달빛처럼 무게감 없이 머물고 싶었다.

궁녀들의 입에서 입으로 세자빈은 세자가 직접 선택한 유당파 규수라는 소문이 조용히 전해졌다. 세자의 취향에도 꼭 맞는다 하였다. 파리할 만큼 흰 피부에 석류 같은 입술을 가진 미모는 이미 도성 내 소문이 자자했고, 숱이 풍성한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에 아담하고 나붓한 체형이라 대군의 생산에도 더없이 적합한 몸이라는 평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녀만 꽂은 나인을 붙여 두는 이유는, 세자의 불면이나 발작을 순화시키기 위함이라 쑥덕거렸다. 은우의 체질과 기가 세자의 예민함을 중화시켜 준다는 어의의 말이 추측에 신빙성을 더했다.

그래도 좋아. 상관없어.

은우의 눈물이 지창을 넘어 들어오는 휘영청한 달빛에 비쳐 희게 반짝였다.

서책을 싼 보자기를 안고서 보춘정에 들어서니, 광안이 서연장에서 돌아와 있었다.

“어제 찾으셨던 서책입니다.”

광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확인하였다. 은우는 조용히 한 발 물러서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무엇이 어떠하냔 말이냐.”

“서연에서……. 아니옵니다.”

불쾌한 내색으로 서책을 넘기는 광안을 보며 은우는 화제를 돌렸다.

“오는 길에 좌부위솔 조인호 나으리를 만났습니다.”

광안이 그제야 시선을 들어 은우를 보았다.

“조인호?”

“네, 저하.”

광안의 입술이 팽팽하게 다물려진다. 미간 주위의 눈썹머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자가 왜 너랑 말을 섞느냐.”

“저하.”

“왜 너와 말을 섞느냐고 물었다!”

“저하께 전해 달라 청하였습니다.”

은우는 식은땀이 배어나는 이마를 잠시 짚었다가 떼어 냈다.

“무엇을!”

“이황 선생의 호당매화를 여쭈어 달라 하였습니다.”

광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건방진.”

검은 안광에 이채가 돌았다. 은우가 저도 모르게 작고 긴 한숨을 쉬었다. 어지럽고 메슥거려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제가…….”

손으로 식은땀을 닦아 내고 은우가 광안을 바라보았다. 광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은우를 향해 걸어온다.

“제가 먼저 말했습니다. 성정각 자시문 앞에 매화나무를 보면서…….”

광안이 은우의 팔을 붙잡았다. 몸이 출렁이며 뒤로 휘어진다. 등을 받치는 팔은 강건하다. 마주하는 가슴은 넓고, 쳐다보는 눈은 날카로이 심장을 꿰뚫고, 벌어지는 입술은 향긋하다. 너무 좋아 이대로 몸이 꿀물처럼 녹아 버려 광안의 팔에 붙고, 눈에 붙고 입술에 달라붙어 사라지길……. 아니 영원히 남아 있길 원한다.

“매화나무를 보면서, 무어라 했나.”

광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저하께서 매화를 좋아하신다 말하였습니다.”

광안이 손을 들어 은우의 젖은 이마를 덮었다.

“어디가 아프냐.”

“아니요.”

“나는 거짓을 싫어한다. 아직도 모르느냐.”

“체기가 있습니다.”

“며칠 내내 푸석푸석해 보이더니 탈이 났구나.”

이마를 짚었던 손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처소로 돌아가 쉬어라. 의관을 보내마. 내일은.”

광안이 은우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래, 내일도 쉬어라.”

“내일은 오겠습니다.”

“필요 없다.”

광안이 몸을 돌려 서궤 앞에 앉았다. 인사를 올리는 은우를 향해 어서 가 보라 손짓만 하고서 쳐다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왈칵 가슴에서 신물이 솟아오른다.

의관이 지어 준 환약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더운물을 마시고 자리에 누웠다. 양평군 대감이 세자의 명이라 하며 조제해 주는 탕약도 은우는 하루도 빠짐없이 먹고 있다. 여태껏 고뿔도 잘 걸린 적이 없는데…….

강은우, 어쩌다가 평생 먹을 약을 두 계절에 다 먹는구나.

몸이 꺼져 들어가는 듯하여 깜박 잠이 들었다가 밖에서 나는 기척에 잠이 깨었다. 처소로 서 상궁이 들렀다. 따뜻한 타락죽을 받고서 어안이 벙벙했다. 광안의 야식이었다. 그대로 들고 처소까지 가라 명하였다고. 은우는 송구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는데, 서 상궁은 마치 후궁마마께 예를 갖추듯 상을 보고 죽을 권하였다. 한방 동무 미향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옆에서 어설프게 시중을 들었다.

“서 상궁마마님, 이러지 마십시오. 너무 민망하고 불편합니다.”

“어서 드시게, 강 나인. 그래야 쾌차하고, 또 세자 저하를 모셔야지 않겠는가.”

은우가 고개를 떨구었다. 상궁이 건네는 숟가락을 받고서 부지런히 죽을 뜨고 동치미 국물을 먹었다. 은우가 그릇을 비우자, 곁에 있던 나인이 다기에 차를 따라 공손히 내밀었다.

“따뜻한 매실차가 도움이 되네.”

은우가 찻잔을 받아 들었다.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서 상궁이 데려온 나인에게 눈짓을 했다. 나인이 다상을 한쪽으로 두고, 처소 문을 열었다. 비자 두 명이 큼지막한 이불채를 들고 서 있었다. 나인의 지시에 따라 방으로 들어와 은우의 이부자리를 걷고 새 요와 이불을 깔았다. 그 위에 베개까지 반듯하게 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나인 처소에 어울리지 않는 호사스러운 이불채였다. 자수나 금박은 없어도 명주에 도톰한 목화솜이 채워진 금침을 보며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너무 과하신…….”

“편히 자야 빨리 낫는다 하셨네.”

서 상궁이 나인과 비자를 데리고 처소를 나갔다. 은우는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는 풀썩 금침 위에 앉았다. 미향이 얼떨떨하게 다가와 비단 금침을 한 번 쓸어 보다가 손을 떼었다.

“같이 자자.”

“아니, 아니.”

미향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 같이.”

은우는 미향의 손을 끌어 금침 위에 앉혔다. 마다하던 미향이 “와아, 폭신폭신하다! 구름이야, 구름.” 신기한 듯 요를 눌러 보고 이불을 몇 번이고 살포시 들었다 놨다 했다. 약 덕분인지 타락죽이나 매실차 혹은 이불채 덕분인지 한결 상태가 나아졌다. 포근한 이불에 몸을 감싸니 광안의 품이 떠올랐다. 이런 이불을 나눠 덮고서 은우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이마에 스치던 보드라운 숨결과 온몸을 구속하는 탄탄한 남자의 몸이 어느샌가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눈을 감아도 떠도 너무도 선명히 느껴졌다.

이른 아침에 잠이 깨었지만, 미향이 방에 없었다. 번도 아니어 쉬는 날인데 어디로 벌써 나갔는지…….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면경을 끌어다 놓고 머리를 빗었다. 미미하게 체기가 남아 있지만 몸이 가뿐해졌다. 하루 더 쉬라 했지만 오늘 동궁전으로 가 봐야겠다 마음먹으며 천천히 머리를 땋아 내렸다. 거울 속의 여자는 조금 기운이 없어 보였다.

‘며칠 내내 푸석푸석해 보이더니 탈이 났구나.’

광안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푸석거리다니.

손을 들어 뺨을 쓸어 보니 거칠한 것 같기도 했다. 눈 주위도 거뭇하게 가라앉아 보인다. 어젯밤에도 그 말이 떠올라, 잠들기 전 미향에게 슬쩍 물어보았는데 미향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응, 요즘 들어 좀 거칠해 보이긴 했어.’

그리 보였을 만하다. 밥을 잘 못 먹고 얕은 잠을 잔 지가 열흘은 족히 넘었으니……. 거울 속 여자가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세자 저하는 언제 보아도 백옥처럼 서늘하고 매끄러운 피부인데…….

갑자기 덜컥 소리를 내며 문이 확 열렸다. 미향이었다. 은우가 괜스레 당황하며 면경을 덮었다. 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안다는 표정으로 미향이 들어섰다.

“은우야. 이거, 이거 봐라?”

미향의 손에는 자그마한 사기 그릇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막았던 입구를 여니, 새콤하고 톡 쏘는 유자향이 그윽했다.

“이게 무엇이야?”

“미안수야.”

물이라기엔 덩어리가 진 내용물을 푹 떠서 은우의 뺨에 올려놓았다.

“유자를 껍질을 벗겨 푹 삶았다가, 벗겨 놓은 껍질을 세 번을 씻고 헹궈 낸 뒤에 유자 삶은 거랑 같이 섞고 정종을 부어 한 달간 밀봉해 둔 거야. 내가 최 나인이 공을 들이는 걸 봤거든? 냉큼 얻어 왔지. 피부가 아기처럼 탱글탱글해지고 꿀을 바른 것처럼 촉촉해진다더라.”

미향이 숫제 은우를 눕혀 놓고 은우의 얼굴과 목덜미 전체에 양손으로 미안수를 척척 바르고 톡톡 두드리고 또 조물조물 주무르기도 하였다. 은우는 너무 간지러워 까르르 까르르 한참을 웃으며 목을 움츠렸다.

“세자 저하께 예쁨 더 더 많이 받아야지, 우리 은우.”

은우는 괜스레 서글퍼졌다.

“응, 얼마 안 남았네.”

은우의 말에 미향이 얼굴을 만지던 손동작을 멈추었다.

“알아. 다들 뭐라고 하는지.”

미향의 표정을 보니 미향 역시 그 소문을, 어쩌면 은우가 들은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소문을 들었구나, 싶었다. 모를 수가 없겠지. 애써 서로 모르는 척할 뿐.

“상관없어.”

은우가 생긋 웃었다.

“미향아. 저하 곁에 있을 수 있는 날이 며칠인지 세지 않기로 했어. 내가 왜 필요한지도 고민하지 않을래. 어떻게 하면 더 붙잡아 둘 수 있나 애쓰지 않으려 해.”

그냥, 다만……. 흐르는 물처럼 돌아오지 않는 시간 속에, 잠시 떨어진 꽃처럼 흠뻑 젖어 있고 싶어.

*

‘무이야.’

여자의 소복이 붉은 피로 젖어 갔다. 번져 가는 붉은 피를 보는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하였다.

‘무이야.’

머리를 땋아 주며 그렇게 불렀다.

‘네, 어머니.’

무이는 고운 목소리로 답하였다. 열 살도 되기 전이었다. 사내아이 복색을 하고서 시장통을 전전하며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던 여자아이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다 하여 무無, 무이였다.

‘이리 와.’

따뜻한 밥과 국을 먹여 주고 몸을 씻겨 준 여인은 마치 하늘에서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선녀 같았다.

‘지금부터 내 딸이 되어라.’

적라의 말에 꾀죄죄한 여자애가 감읍하여 절을 하였다. 십수 년이 지났지만 적라는 처음 만난 날처럼 곱고 아름다웠다. 무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꿀럭 꿀럭 피를 토하며, 적라가 손을 내밀었다. 멈칫거리며 피하는 무이를 향해 끈질기게 내민 손이 무이의 검지 끝을 스쳤다.

‘아악!’

무이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손끝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적라의 눈이 고요히 무이를 향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였다. 내가 모실 용상이다. 지켜 내야 성군이 되신다.’

퉷, 무이는 피가 섞인 침을 뱉어 냈다.

광안……!

이름을 짓이기듯 불렀다.

‘쓰다가 버려지는 무녀라니. 성군? 모셔야 할 용상? 그게 뭐라고! 조정은 유학에 빠진 자들로 가득 차 있어. 더러운 오물 보듯 배격하는데! 건수만 있으면 무녀를 탓하다가 제 명줄이 급하면 무녀를 찾아 매달리는 나약한 것들. 내가 모실 용상 따위는 없어. 나를 바쳐 지켜 낼 용상 따위는 없어! 누구든 내게 영광과 재물을 주면 그만이야.’

적라의 입 끝에 희미하게 미소가 배어 나왔다.

‘그러진 못할 거다.’

‘무슨 소리야!’

‘내가 이미 그 용상을 모셨으니, 네 힘으론 결코 나를 넘을 수 없다.’

‘죽어 가는 늙은이가 무슨 말을 못할까!’

적라가 흐릿한 눈을 떠 앞을 보았다. 꼿꼿하게 가부좌로 앉아 있지만, 맹독은 이미 핏줄을 타고 흘러 내부의 모든 연결망을 망가뜨리고 있다. 눈 역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무이야, 보이는구나. 너의 마지막이.’

적라가 양손을 합장하였다.

‘부디 그 운명을 피하거라.’

‘운명? 내 운명? 죽어 가는 주제에 운명?’

‘너는 결코 나를 넘을 수 없다.’

무이가 붉은 눈을 부릅뜨고 적라에게로 달려들었다. 합장한 손을 붙잡자 고통으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쪽은 무이였다.

손이 불타도, 온몸이 불타도 그리하여 이 자리에서 죽어 버려도 내, 적라 이 늙은이를 넘어서겠어.

자그마한 자적포를 움켜 쥔 적무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적라…….

내가 너를 넘어서는 것을 보여 줄게.

너의 용상을, 내가 넘어서는 걸 똑똑히 지켜봐.

자적포의 핏자국에 붙였던 침을 신중하게 빼내었다. 탁, 벽에 붙은 광안의 초상에 침이 박혔다.

*

“아…….”

서궤에 앉아 있던 광안이 머리를 감쌌다. 자그마한 소리였는데 언제 들었는지 은우가 재바르게 다가왔다.

“저하.”

광안은 이마를 괸 채로 다른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였다. 은우는 그 손을 붙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서궤에 머리가 닿을 듯 아래로 숙여 거꾸로 광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깊이 찡그리며 감은 눈이 보였다. 속 입술은 질끈 깨물려 있다. 이유 없는 통증이 간헐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은우는 광안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찡그린 눈이 가늘게 떠졌다. 꽉 깨물렸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은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름, 은우.

통증을 삼키는 입술이 안타까워 은우의 마음이 바짝바짝 마른다. 광안이 잠시 호흡을 골랐다.

“괜찮다.”

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폈다. 보춘정 서궤 앞에는 단을 높인 보료를 놓아두어 아래에 꿇어앉으면 광안을 기대게 할 수가 없었다. 은우는 보료 위로 올라가 광안의 옆에 몸을 붙였다.

“잠시 기대십시오.”

광안이 팔을 뻗어 은우의 어깨를 둘러 감싸고 은우의 머리에 비스듬히 얼굴을 기대었다. 광안의 뺨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배어 나오는 땀도 선뜻할 만큼 차가웠다. 은우는 마찬가지로 차갑게 식은 광안의 손을 문질렀다.

“이번에는 사흘 만입니다.”

“세고 있었느냐.”

“네.”

사흘 만인가……. 서서히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떠 보니 서궤에 못 보던 서책이 놓여 있었다. 광안의 눈길을 읽었는지 은우가 손을 뻗어 서책을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서가를 정리하다가 찾았습니다.”

은우가 겉표지를 넘기자 광안이 작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정직하고 반듯한 글체는 또렷또렷 한 획씩 그으며 이루어진 것이다. 때론 멋을 부려 흘려 쓰기도 했지만, 몸에 익지 않은 서체가 확실히 어설펐다.

“명필입니다.”

은우가 글자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콩깍지가 씌었군.”

“제가 좋아하던 시와 선문, 글귀들이 다 있습니다. 보물창고 아닙니까.”

은우의 목소리에 가벼운 흥분감이 묻어났다. 은우가 곁에 있을 때면 조정의 위태로운 움직임도 광안을 핍박하는 모함도 세자빈의 초간택도 모두 뻑뻑한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오직 달큰한 향기와 포근한 감촉, 부드러운 위로가 있을 뿐이다. 광안이 기울였던 고개를 들고 은우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은우가 슬쩍 긴장하며 광안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리 쳐다보는 게냐.”

“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아…….”

광안이 다시 발그레해진 은우의 뺨에 입술을 내렸다.

“음……. 그러니까, 저하. 오늘은 제가 아파 보이지 않습니까?”

광안이 은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혈색이 안 좋은 것도 같고. 다시 배앓이라도 하느냐.”

“아니, 아니옵니다.”

은우가 손을 저었다.

“그럼?”

광안이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수록 은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실은…… 며칠 전에 저하께오서 제 얼굴이 내내 푸석푸석하다 하셔서…….”

광안이 손을 들어 은우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그랬던가.”

“네, 저하.”

“그래서 걱정이 되었나.”

“아……. 그런 건 아니옵고.”

무어라 변명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좀 더 예쁘게 보이고 싶었습니다.”

광안이 갑자기 큰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은우가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려 입술을 맞물렸다 떼어 냈다.

“그럼 예쁘게 보이도록 노력해 보아라.”

급습하듯 농밀한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숨을 몰아쉬는 은우에게 붉어진 뺨을 툭툭 두드리며 광안이 말했다.

“밤을, 기대하마.”

밤……. 은우는 감정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면 광안에게 또 속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지고 초간택을 하고 있는데, 궁녀 하나를 동궁전에서 낮이고 밤이고 끼고 있다는 비난은 은우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옳지 않은 일이었다. 몇 번이고 세자의 부름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빠져나갔다. 광안은 머뭇거리는 은우에게 강제하지 않았다. 마치 거부당한 밤을 차곡차곡 쌓아 일시에 돌려받으려는 듯 은우를 몰아치고 또 몰아쳤다. 탈력감에 늘어진 몸에 가해지는 자극은 까무러칠 것 같은 고통과 극한의 절정을 동시에 불러왔다. 늘어진 몸을 안고서 은우의 눈물을 핥으며 광안이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강은우.’

‘……네, 저하.’

‘너를 어떻게 움켜쥐어야 할까.’

은우는 답할 기력이 없어 터진 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저는 어찌하면, 저하의 자락 하나라도 잡을 수 있습니까.

묻고 싶었다.

흐르는 물처럼 가시는 저하를 어떻게 잡아야 합니까.

원망하고 싶었다.

은우를 바라보는 광안의 눈이 뜨겁고도 차가웠다.

자연스레 그런 밤들이 떠오르자, 가슴은 시리고 귀 끝은 달아오른다. 광안이 예민해진 귓불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은우는 마음을 감추려 광안이 필사한 문집을 넘기기 시작했다.

진짜 멋진 글체인데. 은우는 눈을 슬쩍 비볐다. 콩깍지 아닌데…….

중간쯤 넘겼을 때, 책장을 넘기던 동작을 멈추었다. 서책 사이에 작은 봉투가 단단히 끼워져 있었다. 크기를 보아서 서찰이라기엔 너무 작고 얇았다. 손바닥 반도 안 되는 봉투를 들어 올리자 광안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엇이옵니까?”

“아주 오래전, 어느 여인이 준 것이다.”

은우가 휙 고개를 틀어 광안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광안이 피식 웃었다.

“연서는 아니다.”

“열어 보지도 않으신 것 같은데 어찌 아십니까.”

단단히 밀봉되어 있는 입구를 보며 은우가 물었다.

“연서를 줄 사람이 아니었거든. 나이로는 어머니 또래였나. 좀 더 많았나…….”

소격서가 폐지되기 전이었다. 티 한 점 없는 하얀 소복 차림에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쪽지고 있던 여인이 떠오른다. 걸음걸음 구름을 밟고 다니는 선녀같이, 혹은 학의 날갯짓같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는 여인이었다. 언제나 신에게 구원을 청하고 제물을 바치는 의식의 절정은 여인의 신무였다.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 나비같이 춤을 추던 여자는 소녀 같기도, 백 년을 살아 낸 노파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구나.”

새삼스럽다. 이리도 시간이 흘렀나.

하늘 아래 최고의 무녀라던 적라.

당신이 본 미래가 무엇인가.

세자도 무엇도 아니던 시절 적라는 광안에게 임금에게 올리는 사배를 하였다. 광안이 크게 놀라 꾸짖자 품고 왔던 작은 봉투를 꺼내어 광안에게 올렸다.

‘스물여덟에서 아홉을 맞는 겨울. 소인이 마마를 지키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그해 겨울이 되면, 몸에 품으십시오. 한결 가벼워지실 겁니다.’

봉투를 쥐고 앞뒤로 살피던 광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유 없는 발작, 간헐적으로 몸을 강타하는 통증. 지속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사지가 묶인 듯, 혹은 무엇엔가 온통 기력이 빨린 듯 몸을 쓸 수가 없었다. 통증이 반복될수록 지속 기간은 길어졌다.

적라……!

최고의 신녀였던 그녀가 광안을 지킨다 하였다. 전란이 끝나고 몇 해나 지난 시점에 무녀가 광안을 지킬 일이란 무엇인가, 한결 가벼워지게 만드는 부적이 대체 무얼 의미한단 말인가. 광안은 자신이 도달한 결론을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분명, 누군가로부터의 저주에 방패가 되는 일…….

“이걸 지녀야겠다.”

은우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 여인이 스물아홉이 되는 겨울을 지켜 주리라 했으니, 그 말을 믿어 보려 한다.”

농처럼 가벼이 말했지만 은우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한참을 꼼지락거리더니 치마 속에 달아 두었던 작은 주머니를 꺼내었다.

“우선 여기에 넣어 안쪽으로 달아 두십시오.”

주머니를 열어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말리화. 은우가 내용물을 비우고 주려는 듯 입구를 크게 벌렸다.

“그냥 다오.”

광안이 손을 내밀었다. 말린 말리화 사이에 적라의 부적을 넣었다. 은우가 하라는 대로 광안은 팔을 벌리고서 옷을 풀고, 속저고리 안으로 주머니를 매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마에 입을 한차례 맞추기도 하였다. 차례로 하나씩 옷을 바로 입혀 주고, 옷고름을 도로 매듭짓고 용포에 옥대를 매어 주며 은우는 점점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광안이 부러 싱긋이 웃으며 물었지만, 은우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무녀가 준 부적입니까?”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광안을 쳐다보았다.

“혹시 그 여인이, 적라입니까.”

광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적라는 이미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저하를……. 적라의 예언대로라면 올겨울, 몹쓸 사술로 저하를 해하려는 무리가 있단 말입니까.”

“글쎄다.”

광안이 손을 들어 은우의 눈물을 닦았다.

“그렇다 해도 하늘의 딸이라 불렸던 적라의 부적이 있으니……. 화살이라도 튕겨 나가지 않겠느냐.”

부적 한 장이 몸을 지키리라 믿지는 않는다. 장난처럼 웃는 광안을 보고서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있다면, 반드시 저하를 지켜 줄 것입니다.”

부디, 제발…….

은우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만들어 말하였지만, 광안을 그리고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광안은 떨리는 은우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흑주술을 부릴 자들이라면, 다른 계획 역시 꾸미고 있을 터. 광안의 목을 뚫을 검을, 심장을 맞힐 화살을, 품지 않은 역심을 조작하여 결국 도륙하겠지. 그러니, 그 사내의 여인이었던 너는 한없이 두렵겠지.

사주한 자가 누구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형체 없이 날아와 몸을 치고 가는 흑주술처럼, 뻔히 아는 적을 피할 수가 없다. 제 운명에 대해 광안은 오히려 덤덤했다. 언제부턴가 감정의 옹이가 삭고, 굳세게 움키고 있던 매듭이 풀어졌다. 날카롭게 솟아 오른 절벽 같던 마음이 무뎌졌다.

여태 애써 왔으니 나쁜 삶은 아니지 않은가.

억울함과 분노 속에서 살아가는 일도 죽어 가는 일도 지겨웠다. 광안이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은우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은우야.”

“네, 저하.”

“보춘정 월대에 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가 보시겠습니까.”

“그래.”

은우가 먼저 일어서 광안의 팔을 부축했다. 머리에서 시작한 통증이 차례로 몸을 잠식해 나갔던지라, 통증이 지나간 자리마다 아직 기가 제대로 돌지 않는다. 은우에게 팔을 맡기고 광안이 천천히 걸어 보춘정 지게문을 열었다.

“살 것 같다.”

광안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바람이 차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좋다.”

은우의 어깨를 감싸 기운이 돌아오지 않은 몸을 지탱하며 말하였다.

“말리화 향이 나는군.”

“아…….”

적라의 부적을 넣었던 향낭에서 나는 향이다.

“봄이면 살구꽃 향이 나겠지요.”

은우가 보춘정 월대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서 있는 나무를 쳐다보았다. 추위를 견디려 죽음을 가장하는 나무에 거짓말처럼 새순이 돋는 봄이 올 것이다.

“봄이면.”

광안이 가지만 남은 살구나무를 쳐다보았다.

봄이면, 붉은 봉오리가 툭 벌어져 하얗고 고운 꽃잎이 몸을 드러내겠지.

“그래, 봄이면 살구꽃을 꺾어 주마.”

은우가 살포시 웃었다.

“여름이면 살구를 따서 주마.”

은우가 광안의 가슴으로 머리를 기대었다. 광안이 말하는 봄, 여름…….

“가을이면 말린 살구 씨를 약으로 주마.”

그리고 가을…….

이 겨울을 흉한 일 없이 넘기고, 이른 봄이면 광안은 세자빈을 맞이하게 된다. 초간택에 뽑힌 규수들의 면면이 훌륭하다는 말은 자연스레 들려왔다. 이미 내정된 세자빈에 대해 찬사가 하나씩 더 더해졌다. 귀한 집에서 자란 귀한 아기씨…….

가슴에 누군가가 예리한 끌을 대어 쭉 그어 내리는 것만 같다. 골이 패인 자리에, 얼음 알갱이를 담은 겨울바람이 흘러간다. 시리고 시리다. 이를 사리물어도 시리고 아려 눈가가 붉어진다.

눈물 흘리지 않아. 슬퍼하지 않아. 욕심 부리지 않아.

살피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여 꾹꾹 울음을 삼켜 내었다.

“은우야.”

“네.”

광안이 은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살구나무 가지를 걸고 약속하마.”

살구나무로 시선을 옮긴 광안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광안의 머릿속에서 큰 그림이 빠르게 돌아갔다. 흑주술이든, 계략이든…….

*

서궤 위 촛불이 일렁였다. 남휼의 얼굴에 결연함이 서려 있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보고하는 남휼을 향해 광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휼이 잠시 침묵하며 흔들리는 불꽃을 응시했다. 불빛에 음영이 짙어져 고심이 더 깊어 보인다. 이윽고 일자로 다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예후가 좋지 않다 하시고 강무를 가지 않으심이 어떠십니까.”

“꽁무니를 빼고 도망을 가란 말이군.”

광안이 심드렁하게 답하였다.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그럼 네가 날 지킬 자신이 없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남휼이 정색을 하고 맹세하자 광안이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좋다, 든든하구나.”

여전히 농담처럼 선들선들 말하는 광안에게 무언가 더 말을 꺼내려다 남휼이 끄응, 앓는 소리만 내었다.

“강무는 부왕의 명이며 거부할 명분이 없다.”

“네…….”

“또한 거부는 폐위의 또 다른 빌미가 되겠지.”

광안이 툭툭 손가락으로 서궤를 두드렸다. 몸도 시선도 반쯤 틀어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또한 역모로 몰게 되면…….”

“저하!”

커다랗게 반발하는 남휼을 광안이 덤덤히 바라보았다.

“휼아, 네가 먼저 죽는다.”

“저하.”

“남상경 대감이 다칠 것이다. 유배 간 대북파 대신들이 끌려 와 고초를 겪고 죽어나겠지. 궐내 남은 자들과 산림에 숨은 자들까지 찾아내어 모조리 씨를 말리겠지. 피비린내, 살 타는 냄새, 비명이 뒤덮이면…….”

남휼이 이를 질끈 깨물었다. 광안은 일 년을 끌며 궐을 피로 물들였던 기축옥사를 기억한다. 그로 인해 자신이 입게 된 흉터도. 광안을 핍박한 부왕, 대군을 옹립하기 위해 부왕을 들쑤시는 간흉들. 한때는 복수하리라, 매일매일 다짐했다. 복종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베어 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은, 의심과 불안이 끌고 가는 처단이 가져올 피의 파멸을, 굴러가고 또 굴러가며 끝없이 피를 요구하는 수레바퀴가 만드는 흉터같은 자국을 안다.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보란 듯이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파멸의 바퀴를 멈추고 핏빛 자국을 지워 내리라.

“남휼.”

시선을 마주치며 광안이 말했다.

“그러니 네가 나를 지켜라.”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싫다.”

“네?”

“네 목숨은 반드시 네가 지켜라.”

광안이 긴 눈을 접으며 웃었다.

“불공평하다 불만인가. 네 목숨도 네가 지키고 내 목숨도 네가 지키고.”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하! 제가 좌익위 남휼입니다. 저하를 호위하는 익위사 수장입니다. 저하를 위해 검이 되고 방패가 되어야 하는!”

“또한!”

광안이 남휼의 말을 끊었다.

“좌익위 남휼은, 내 오랜 벗이기도 하지.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 휼. 그러니 털끝 하나 다치지 말라.”

“저하.”

남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크고 거친 손등으로 쓱쓱 눈을 비볐다.

“이리 울기까지 하니 민망하다.”

광안이 싱긋이 웃었다. 무안해진 남휼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피식 따라 웃었다.

“헌데, 저하.”

“응?”

“거, 솔직히 울컥해서 눈물이 핑 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영 그렇습니다. 가장 아끼는 사람이라니요. 제가 올여름 그 말씀을 들었으면 감읍하여 지금도 울겠지만은,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광안이 못 들은 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졸린다. 침수 들어야겠다.”

“가장 아끼는 이는 진정 저 남휼입니까?”

남휼이 답을 주지 않는 광안의 뒤를 따르며 궁시렁거렸다.

“얼추 반만이라도 아끼셔도…….”

광안이 휙 돌아보자 남휼이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반은 넘는다.”

남휼의 표정이 애매하였다. 이십 년 세월인데, 고작 두 계절 만난 여인과 비교해 반은 넘는 총애라니, 기뻐야 할지 서운해야 할지.

광안의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보춘정을 울렸다.

그 시각, 조일문 대감의 사랑채에서 은밀한 회동이 이루어졌다. 영상 유태경을 비롯하여 핵심 유당파 대신들이 모여들었다. 왼 뺨에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었다. 횡성 현감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영상 유태경이 내용을 확인하고 조일문 대감에게 넘겼다. 일문의 눈이 담담하게 서찰의 내용을 훑었다. 서찰은 차례로 다른 대신들에게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서찰을 받은 사람은 일문의 차남, 조인호였다.

대비의 국왕책봉권, 남인의 합세, 말 위에서 정확히 저격할 수 있는 솜씨가 좋은 궁수. 세자의 지근.

조일문 부자가 가진 것이었다. 여러 생을 산다 해도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였다.

“호랑이는 호랑이군. ‘호’가 아닌가.”

영상이 야비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럼 호랑이와 호랑이가 호랑이를 잡는 겁니까.”

좌상의 말에 다들 킬킬거리며 웃었다. 인호가 말없이 서찰을 들어 촛대로 가져갔다. 바람에 일렁이며 키가 작았던 불꽃이 파르륵 몸집을 불리며 종이에 옮겨 붙었다. 붉은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음에도 인호의 얼굴은 얼음처럼 매끄럽고 차가웠다. 서찰을 태우고 나자, 영상이 책자를 펼쳐 내밀었다. 조일문, 아비의 이름자 옆에 조인호, 제 이름을 적었다. 호랑이와 호랑이가 호랑이를……. 붓을 내리는 인호는 얼굴에 씁쓸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

쾌청한 날이었다. 하늘과 해만 보아서는 겨울이 지나간 듯 화창했다. 아직 공기가 차갑지만, 며칠 전 내렸던 눈이 다 녹아 버릴 만큼 날씨가 풀리기도 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해를 손부채를 하고 비스듬히 바라다보았다. 너무 반갑고 기뻐 부신 눈을 찡그리면서도 햇빛을 반겼다. 내일이면 광안이 춥고도 먼, 강원도 횡성으로 강무를 떠나야 했다. 조금이라도 덜 춥기를, 무탈히 다녀오시기를 매일매일 기도했다.

저 멀리 백탑이 햇빛을 받아 희게 반짝였다. 기와집 위로 높이 솟은 백탑을 바라보며 은우가 바지런히 움직였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백탑은 운종가 입구 종루 앞에 서 있다. 은우 뒤를 검붉은 빛 치마저고리를 입은 비자가 따랐다.

사람과 물건이 구름처럼 몰려든다는 운종가는 오늘도 시끌시끌한 활기가 넘쳤다. 양 길가로 길게 늘어선 기와집 시전 행랑을 따라 걸어갔다. 광안이 은우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좋은 종이를 골라 오거라.’

자신 없어 하는 은우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걸로 가져오라 말했다.

종이를 파는 지전에 들어서자 주인이 반가이 나왔다. 쓰개치마를 덮고 있지만, 은우는 궁녀복 차림이었다. 궐에서 나온 귀한 손님인 은우에게 무엇을 찾느냐 조심스레 물었다.

“종이를 좀 보고 싶습니다.”

말을 하고 보니 어리석게 느껴졌다. 죄다 종이만 파는 지전에 와서 종이를 보고 싶다니, 더군다나 이곳은 운종가에서도 내놓으라 하도록 유명한 지전이다.

“항아님, 종이는 어디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필사용으로 묶은 걸 보여 드릴까요, 아님 두루마리 백지를 드릴까요.”

은우가 무어라 답할지 망설이자 옆에 있던 시비가 편안하게 말을 건넸다.

“궐에 계시는 상전께 올릴 종이입니다.”

“아, 아. 아…….”

지전 주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잠시 앉으라 권하였다. 평소 같으면 괜찮다 마다했을 텐데, 은우는 조용히 행랑 마루에 걸터앉았다. 좀 걷고 움직였을 뿐인데도 숨이 가빠 얕게 어깻숨을 쉬어야 했다.

잠시 후 뒤편 창고에서 돌아온 주인이 종이 여러 개를 쭉 펼치며 늘어놓았다. 전라도 순창에서 만든 상화지, 강원도에서 온 설화지, 전라도 완주에서 온 완지, 중국산 한지까지 하나씩 설명을 더했다. 상화지는 광택이 있고 겉면이 매끄러우며 질기다 하였다. 하지만 무어라 해도 최고급은 강원도에서 만든, 눈처럼 흰 백지라서 설화라 이름 붙은 설화지라 하였다. 은우는 눈밭처럼 희고 고운 설화지를 매만져 보았다.

“이걸로 하지요.”

“뭐라 뭐라 해도 종이는 설화지가 최고지요. 잘 고르셨습니다. 제가 설화지 들어온 것 중에서 일부러 골라서 최상품을 가져왔습니다. 궐에서 쓰실 거라기에.”

“고맙습니다.”

주인이 두루마리를 챙기며 슬쩍 운을 뗐다. 근심스러운 어투였다.

“궐에서 나오셨다니 여쭙는데, 요즘 세자 저하께오선 건강하시지요?”

“네, 강녕하십니다.”

주인이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얼굴을 펴며 말했다.

“거 소문이란 게 다 헛소문이라니까.”

은우가 쳐다보자 주인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꼭 이상한 소문을 물어다 나르는 사람들이 있어 말이오. 하지만 그런 소문 따위 안 믿는 자가 훨씬 더 많으니…….”

무슨 소문인지 더 캐어물어야 하나,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끊고 돌아서야 하나 은우가 종이 두루마리를 받고서 망설이던 참이었다. 옆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툭 끼어들었다.

“광증 소문 말이오? 요즘 들어 자주 발작한다는?”

주인과 은우의 시선이 동시에 남자를 향했다. 은우의 입이 딱 벌어졌다. 마치 흉한 소문을 자기가 만들기라도 한 듯 주인도 당황한 내색이었다.

“아이고, 나으리. 무슨 그런 말씀을. 아닙니다. 그렇게까지야. 그냥 좀 몸이 안 좋으시다. 그래서 걱정이 많다. 그런 정도입죠.”

남자가 고개를 아래로 기울인지라, 커다란 갓 아래 자그마하고 흰 얼굴은 환히 다 드러나지 않았다. 유달리 붉은 입술이 호를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몹시 흥미롭다는 말투였다.

“누가 걱정이 많은가.”

“그야 당연히 우리 백성들 아니겠습니까.”

“어찌하여?”

“국본이신데 저하께서 건강하셔야 이 나라가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매끄러운 답을 하는 주인을 향해 사내가 비웃었다.

“국본이 국본다워야 국본이지.”

“뭐요?”

갑자기 주인이 왈칵 소리를 높였다.

“듣다 듣다 별 소리를 다 듣겠네! 뭐 이런 곱상하게 생긴 기생오라비 같은 양반이, 어? 뭐? 경을 치게 해도 유분수지. 무슨 소릴 지껄이는 게요?”

흥분하여 금방이라도 덤벼들 기세인 주인을 향해 은우가 손을 저었다.

“진정하세요.”

“아, 궐에서 나온 나인이 있어 눈치를 보시는 걸 잊었소.”

사내가 빈정거리며 고개를 까닥 오만하게 숙였다.

“아니, 내가 지금 궐에서 나온 항아님 때문에 이런단 말입니까. 이 항아님이 어디 중궁전 소속인지 대전 소속인지 알 게 뭐라고. 상을 받을지 벌을 받을지.”

“대체 왜 이리 흥분하시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지전 주인은 팔을 쫙 펼치며 말했다.

“운종가 사람 다 붙잡고 물어보시오. 지난 전란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지. 텅 비어 불타오르는 궐을 보면서 부모 잃은 자식처럼 발 뻗고 통곡하는 백성들한테 누가 살아도 좋다 길을 보여 줬는지 말이오.”

남자의 눈이 슬며시 찡그려졌다.

“옛일이오.”

“아니오! 나는 열 왕자 나으리 합친 것보다 저하 한 분이 더 훌륭하오. 암, 그렇다마다요.”

시전 주인을 보는 남자의 눈가가 설핏 붉어졌다.

“그렇군. 아직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남자가 돌아섰다. 남자의 옅은 은빛 답호가 바람에 날렸다. 은우가 남자의 뒤를 따랐다. 운종가를 지나는 자들이 한 번씩 모두 쳐다볼 만큼 아름다운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소리를 지르며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 무리가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은우가 아이를 피하려다 휘청거렸다. 남자가 손을 뻗어 은우의 팔을 잡았다.

“이런, 곤란하네.”

남자의 눈이 궁녀복 치맛자락에 닿아 있다.

“저하…….”

쉿, 남자가 검지를 들어 제 입을 가린다. 남자의 뒤에는 역시 평복을 입은 좌익위 남휼과 익위사 군사 둘이 보였다.

“어인 일이십니까.”

“날씨가 좋아서 내 너랑 놀아 보려 따라 나왔다.”

은우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광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차림으론 안 되겠다.”

앞장서서 걷는 광안을 따라 은우도 움직였다.

광안이 자리 잡은 곳은 비단을 파는 선전이었다. 은우가 고른 종이는 비자를 시켜 먼저 들려 보내고 광안은 선전 문 앞 퇴청에 앉았다. 청빛, 홍빛, 옥빛, 색색이 고운 비단 사이에 앉아 있던 여자 주인이 남휼을 보더니 알은체를 하면서 나섰다. 주인은 기품 있는 한복 차림새나 머리 모양까지 상인보다는 꼭 양반가 안방마님 같은 모습이었다.

“전에 부탁드렸던 것을 찾으러 왔소. 잘 준비되었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주인이 단정히 허리를 굽혔다. 돌아앉은 선비는 얼굴을 보이지 않아 눈치만 흘끗 보았다. 선비가 입은 은빛 답호도 그렇지만 속에 입은 연분홍빛 중치막은 마감한 바느질 솜씨나 소재가 일품이었다. 제가 가진 물건에 최고의 자부심이 있었지만, 부탁한 물건이 저 옷보다 좋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주인이 안에서 긴장된 모습으로 상자를 들고 나오자, 남휼이 물건을 받을 사람은 저분이라는 듯 은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아, 그러셨군요.”

수선을 떨며 여자 주인이 은우의 손을 끌었다.

“이리로 오십시오. 입어 보셔야죠.”

은우는 답을 구하려 광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광안은 마치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처럼 능청스레 시전을 오가는 행인들만 응시하고 있었다. 최대한 궁녀 옷이 많이 보이지 않도록 쓰개치마로 줄곧 가리고서 안쪽으로 마련된 방에 들어섰다. 주인은 굳이 은우의 신분을 확인하려 살피는 눈치는 없었다. 편히 입어 보시라 하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은우는 홀로 앉아 상자를 열고, 내용을 감싼 고운 색 한지를 양쪽으로 벌려 펼쳤다. 그 사이로 보이는 옷을 보고서 순간 탁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광안이 속에 입었던 중치막과 같은 빛깔 연분홍색 당의에 조금 더 짙은 분홍빛 명주로 지은 폭이 넓은 치마였다. 금사로 작은 꽃무늬를 은은하게 박아 놓아 빛에 비추어 볼 때마다 햇빛을 갈아 가루로 뿌려 놓은 듯 반짝였다. 마치, 꼭 세자빈이 입을 법한 당의였다. 은우는 손바닥을 펴 조심스레 아랫배를 쓸었다. 아직은 납작하다.

차마 저하께, 말을 할 수도 없는데.

‘나의 장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정궁의 배를 빌려 나와야 한다. 나는 반드시 적자이면서 장자인 내 아들을 세자로 세울 터이니. 아니, 내 씨를 받은 서자 따위는 없을수록 좋다.’

광안의 말이 생생하다. 한 치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을 매정한 얼굴도.

지금도 궐에서는 재간택까지 올라온 규수들을 살피고 있는데…….

은우는 자꾸 입술을 깨물었다.

‘성격도 급하십니다. 조금만 기다렸다 오시지. 어찌하여, 빈궁마노라 배를 빌려 오시지 않고 제게 오셨습니까. 이 못난 어미를 부디 용서를…….’

은우의 눈물이 분홍빛 명주 치마에 동그란 점을 만들었다. 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숨을 크게 내어 쉬고 손바닥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입 끝을 올리며 억지로 미소를 만들었다.

기쁘게 입어야지. 벅찬 마음으로 입고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아비와 지어미처럼 걸어 보아야지. 아기씨께 이리도 사랑받았다. 그리하여 품게 되었다 알려 드려야지. 비록 아바마마가 너를 보지 않으신다 해도 지금을 잊지 말라고.

아니, 아니. 은우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뺨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 턱으로 맺힌다.

아니, 은우야. 네가 잊지 마. 다시 찾지 않으신다 해도 아이를 보지 않는다 하셔도, 은우 네가 잊지 마. 이 마음을, 저하의 마음을…….

은우가 방에서 나오자 주인이 차마 부끄러워 들을 수도 없을 만큼 찬사를 퍼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행인만 바라다보고 있던 남자는 마치 상관없는 일행인 듯 흘긋 시선을 두었다가 일어섰다. 시전을 먼저 나서는 광안의 뒷모습을 보며 남휼이 주인에게 대신 말하였다.

“옷을 맡긴 분이 분명히 흡족해하실 겁니다.”

“네, 네. 최고의 명주에 최고의 실력자가 지은 옷입니다. 지금 세자빈 간택 때 입을 옷을 짓느라 다들 소동인 건 아시지요. 그 규수들 옷을 마다하고 지었답니다. 곱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래도 나으리, 이리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인의 말만 들어서는 은우에게 옷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을 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운종가 최고 선전의 상인답게 말법은 노련하였다. 정확한 언급을 피하며 주인이 깊이 고개 숙여 인사만 여러 차례 하였다.

광안이 앞서 걷고 은우가 뒤를 따르고 그 뒤를 남휼과 익위사 군사들이 따랐다. 시전행랑을 따라 길게 뻗은 운종가 길은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난전도 곳곳에 벌여 있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엎어져 우는 아이, 컹컹 짓는 개까지 복잡한 길이라 일행은 일렬로 서다시피 하였다. 옷을 받았던 선전이 있던 건물(방:房)을 지나치고 이어 다음 건물을 지나쳤다. 광안이 멈춰 서서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는 은우를 향해 길게 입술을 늘이며 웃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내민 손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예쁘다.”

쓰개치마 아래로 은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옷이 너무 과하여…….”

“다음에 더 과한 옷으로 주마.”

“저하, 충분하옵니다.”

광안이 후후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리 광안이 변복을 했다 하나 두 사람 모두 가마 없이 시장을 걸어 다니기엔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 손님을 끌려 요란스레 떠들던 상인들도 그들이 지나가면 슬쩍 목소리를 낮추고 눈치를 보았다. 들개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를 붙잡으려 아낙이 크게 이름을 부르며 쫓아가다가도 걸음을 멈추었다. 어엇, 말릴 사이도 없이 정신없이 뛰던 아이가 광안과 부딪혀 바닥에 엎어졌다. 넘어진 아이가 으애액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남휼이 급히 광안 옆으로 붙어 섰다. 광안은 손을 들어 다가오는 익위사군에게 신호를 보냈다. 은우에게도 조용히 말했다.

“괜찮다.”

무릎을 구부리고서 여전히 엎어진 채로 있는 아이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콧물과 흙먼지가 범벅된 얼굴로 사내아이는 엉엉 울었다.

“사내자식이 울면 쓰나. 그리도 아프냐.”

광안의 입은 꾸짖는 말을 하는데 눈은 웃고 있었다.

“엿이, 엿이…….”

앞으로 다가온 아낙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차마 얼어붙은 다리로 나서지 못해 우물쭈물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으리, 부디 용서를…….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늦둥이라 천지 분간을 못하여…….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광안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져 조각나고 흙투성이가 되어버린 엿가락에 있었다. 광안이 아이를 보며 물었다.

“아픈 건 아니고, 그럼 엿 때문에 우느냐.”

“네. 나으리.”

아이가 코를 훌쩍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엿장수에게 엿을 사 달라 조르던 아이가 하나를 집어 들고 냅다 튀었고, 엄마가 값을 치르고 붙잡으러 쫓아오던 중이었다.

“아이고, 저 철딱서니 없는 자식! 내가 못살아, 못살아!”

아낙이 아이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풀썩 풀썩 먼지가 날리는데도 광안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삼돌이입니다.”

“셋째구나.”

“네. 나으리.”

광안이 허리춤 주머니에서 엽전 세 닢을 꺼내어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엿을 사서 형제랑 나눠 먹어라.”

아이고, 아이고. 아낙이 아이보다 더 크게 소리 내며 고개를 숙여 절을 하였다. 은우가 광안 옆으로 붙어서 물끄러미 광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잔잔히 웃음을 띤 얼굴이 사무치게 좋았다.

저하는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시겠구나.

저도 모르게 턱이 실룩였다.

응? 묻듯이 쳐다보는 시선을 향해 은우는 표정을 지우고 방그레 웃었다.

“너도 엿을 사 주련?”

“아닙니다, 저하.”

은우가 손을 젓는데도 광안은 은우를 데리고 가서 결국 엿을 사다 안겼다. 안 그래도 갑자기 입맛이 돌아 음식에 눈이 가고 입에 침이 괴었다. 광안은 색색가지 떡을 사 주고, 유과도 사 주었다. 자그마한 공예품이라도 들여다보려 하면 어느새 손에 쥐여 주었다. 이러다가 시선이 닿는 것마다 안겨 줄 기세였다. 은우는 자꾸 웃음이 나서, 마음이 벅차서 광안이 주는 모든 것을 다 감사히 받았다. 광안이 마지막으로 건네 준 것은 시전 행랑 뒤편으로 있는 장신구를 파는 보석상에서였다. 남휼이 주인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자, 안쪽 방으로 들어갔던 주인이 자그마한 은합을 들고 나왔다. 내용물은 광안만 확인했다. 다시 상자에 넣고 곱게 보자기로 싼 은합을 은우에게 건네었다.

“무엇이옵니까.”

“돌아가서 열어 보아라.”

은우가 호기심을 꾹 누르고 상자를 조심스레 가슴에 끌어안았다. 광안이 바싹 붙어 오더니 귀에 입을 붙이고 말하였다.

“밤에, 보여 다오.”

귓불에 닿는 숨결에 은우의 볼이 빨개졌다.

*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뻔뻔하고도 무례했다. 이렇듯, 법도에 없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되었다. 하지만 은우는 묵묵히 앉아 꾸며 주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동궁전 세자의 침소, 안쪽 온돌방 깊은 곳에서 오로지 서 상궁과 한방 동무인 미향만 들이고서 은우의 몸단장이 시작되었다. 동궁전 침소까지 올 때 입었던 궁녀복을 벗기고, 낮에 광안이 주었던 분홍색 당의를 입혔다. 은우의 머리에 매화꽃을 닮은 첩지를 고정하고서, 솜을 채우고 검은 공단 여덟 개를 이어 붙여 만든 어염족두리를 정수리에 올렸다. 뒤이어 큰머리가 올려졌다. 거울 속 제 모습이 생경하다. 큰머리뿐 아니라 화장한 얼굴이 낯설어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진주 분을 바르고 색분을 뺨과 광대에 더하여 얼굴은 뽀얗고도 발그스름했다. 홍화 꽃잎을 말리고 태워 물에 재워 세 번이나 베수건으로 걸러 내어 받은 즙이라 세번홍이라 불리는 연지로 입술을 붉게 칠했다. 서 상궁이 은합을 옆으로 당겨 왔다. 광안이 낮에 준 은합 속에서 백옥 떨잠을 꺼내었다. 큰머리 양쪽으로 옥 떨잠이 꽂혔다.

“와아!”

은우를 바라보던 미향의 입에서 환성이 터졌다.

“아름답습니다.”

서 상궁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칠보와 진주, 청강석과 산호가 화려한 꽃처럼 백옥 떨잠 위에 가득 피었다. 금 용수철로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 달려 있는 새들과 나비는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차랑 차랑 작고도 신비스러운 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떨잠의 위치를 잡아 주고서, 서 상궁이 말없이 인사를 건네고 물러갔다. 잠시 은우만 남겨두고 나갔던 미향이 주안상을 들고 들어왔다. 미향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우가 내민 손을 꽉 붙잡아 주고서 예쁘다, 너무 예뻐. 중얼거리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섰다.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은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이 다가왔지만, 눈을 바라보기가 민망하여 시선을 아래로 낮추었다. 아청색 곤룡포만 눈에 들어왔다.

“앉아라.”

남자의 옷자락이 부딪히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처음 해 본 큰머리가 어색하여 은우는 조심스레 앉았다.

“선물은 맘에 드느냐.”

은우가 고개를 다 들지 못하고 그러하옵니다. 답하였다. 광안이 낮게 웃었다.

“머리가 무거워 들지 못하나.”

“조금…….”

은우가 솔직하게 답하였다.

“평생 이룰 인생의 목표라더니.”

광안의 말에 이번에는 고개가 번쩍 들렸다. 대체 왜 상궁이 그토록 되고 싶으냐, 가장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묻는 광안에게 말했었다. 지밀상궁이 되고 싶다고. 이유를 묻는 광안에게 거짓을 섞지 못하고 어여머리를 하고 떨잠을 꽂아보고 싶다 어리숙하게 답했었다. 그런, 어설픈 답도 기억하십니까. 은우는 왈칵 솟는 감정을 누르느라 다시 시선을 낮추었다.

“은우야.”

너무 다정히 불러 눈을 들지 못했다. 홀로 삭혀야 할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술 한잔 주겠느냐.”

손이 떨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서 광안의 손에 들린 잔에 술을 채웠다. 입술에 잔을 대었다 떼고는 은우에게 건네었다.

“향이 좋다.”

“저하.”

은우가 잔을 받으며 후두둑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러고 보니, 서 상궁이 바꿔 놓고 간 촛대가 붉었다. 다른 등촉은 모두 끄고, 단 하나만 밝힌 화촉이었다. 광안이 내리는 술은 합환주. 향긋한 솔향에 마음이 흠뻑 취한다.

“……선물이 더 있는데.”

은우가 고개를 들며 미소 지었다.

“평생 받을 선물을 오늘 다 받습니다, 저하.”

“이번 건 초라한 선물이다.”

광안이 서책 하나를 내밀었다. 은우도 아는 서책이다. 두 손으로 받아 들고서 은우가 웃었다. 광안이 어린 시절 필사한 시와 선문집이었다.

“가장 귀합니다. 억만금을 주어도 바꾸지 못합니다.”

“졸필을 명필이라 해 주는 유일한 사람에게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은우가 서책을 펼쳤다. 얼굴이 희고 키가 큰, 목소리가 깊고 아름답던 광안군 왕자가 떠올랐다. 처음 멀리서 보았을 때, 은우는 여덟 살이었다. 삼 년 가까이 문 밖에서 시를 읊는 목소리를 들었다. 왕자군을 기다리던 마음이 다만, 들려주는 시가 좋아 그런 줄 알았다. 조심스레 뒤를 따라 연무정에 숨어 있으며 콩닥콩닥 방망이질 치던 가슴이, 몰래 듣는 시구 때문인 줄 알았다. 가슴이 울렁이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마음은 슬픈 선문을 탓하였다. 모두 아니었다. 그 모두가, 광안, 이 남자를 향한 마음이었다.

서책 중간, 은우가 제일 좋아하던 춘효가 적힌 장에 봉투가 끼워져 있었다. 은우가 고개를 들어 광안을 쳐다보았다.

“그것 또한 주는 것이다.”

“무엇이옵니까.”

“혹여 나에게 연서를 기대하나.”

은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거 주실 분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봉투를 열어 보니 설화지였다. 은우가 낮에 골라 왔던 종이인 듯했다. 어린 시절 글씨체가 부끄럽다 하시더니 몇 자 새로 적어주셨나 보다. 여러 차례 접혀 있는 종이를 펼치는 동안 은우는 자꾸 웃음이 났다. 무슨 시구를 주셨으려나. 하지만, 다 펼쳐진 설화지에는 굵은 붓으로 힘차게 써 내린 커다란 글씨 한 자밖에 없었다. 마치 설산을 차오르고 날아가는 검은 용처럼 역동적인 글씨였다.

“아…….”

은우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었다.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거리는 강인한 붓질에 광안의 기운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손을 들어 제 얼굴이 두 개는 들어가고 남을 크기의 글자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읽어 보아라.”

“처음 보는 글자이옵니다.”

은우가 이마를 찡그렸다. 처음 보는 글자이지만 음변을 추측하면 읽을 수 있는 한자였다.

“……현?”

“그렇다.”

은우가 의문을 가지고 광안을 바라보았다.

“다시 읽어 보겠느냐.”

“현.”

“좋구나.”

“혹시, 저하.”

은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소인이…… 감히 저하의 휘를…….”

“어릴 때 지은 음에 세자가 된 후, 벽자僻字로 바꾸어 주신 내 이름이다.”

기어이 은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일전에 그랬지. 내 전부를 달라 하였나.”

“저하.”

“매일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바라다보는 여인에게, 매일매일 맹세하듯이 주고 또 주었다. 이제 나를 온전히 받아라.”

은우의 눈물이 툭툭 방울지며 뺨을 타고 흘렀다. 광안이 가까이 다가와 부드러이 안고 젖은 눈에 입을 맞추었다. 떨잠을 하나씩 뽑고, 큰머리를 내려 주며 미소 지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하나씩 아름다운 장식과 옷가지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서 남자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울 테지. 결코 잊지 못하겠지.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화촉의 불을 끄고 벗은 등을 따스하게 감싸며 금침에 뉘었다. 미풍처럼 간질이고, 감로주처럼 취하게 하였다. 자잘한 물결이 발끝부터 넘실넘실 차올랐다. 까다로운 도자기를 다루는 도공처럼, 은우의 몸을 빚고 마음을 실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한없이 깊어지면, 막막한 슬픔과 닿아 있음을 깨닫는다. 전부를 가지고 싶은 맹렬한 욕망이 가지를 뻗어 남자의 몸을 휘감고 안타깝게 조여들었다. 은우는 힘을 다해 끈질긴 욕망을 끊어 내려 하였다. 마침내 깊이 남자를 품었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은우야.”

남자의 부름에 눈을 감았다.

“불러 다오.”

고개를 젓는 은우를 몇 번이고 부드러이 설득한다. 미풍처럼 닿는 숨결이, 서두름이 없는 손길이, 닿아 있는 맨 살갗이, 깊이 박혀 요동치는 뜨거움이, 결국 은우를 굴복시킨다. 더 이상 물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열기가 가득 들어찬 입술을 겨우 떼어 입 모양으로만 불러 본다.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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