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안-7화 (7/10)

七章

검은 주술

촛불이 일렁였다. 늦은 시각이지만 대조전에는 영상 유태경과 영상 부인이 들어 한 시진째 머무르고 있다. 한 시진 내내 영상 부인은 눈물을 찍거나 한숨을 쉬었다. 중전과 영상 간에도 대화 소리보다는 침묵과 한숨이 몇 배로 길었다. 주상이 쓰러진 이후 분위기가 급변하였다. 고작 세 살인 대군이 보위를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이 주상의 마음을 돌린 듯했다. 중전이 믿고 있던 든든한 둑에 굵은 금이 가고 틈이 벌어졌다. 언제 쾅 하고 터져 중전이 쌓았던 모든 것을 일시에 쓸어 가 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호흡이 가빠진 첫날, 주상은 영상을 불렀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니,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유태경이 강력하게 뜻을 거두기를 요청하자 섭정을 맡기겠노라 다시 명하였다.

‘절대로, 결코 그 비망기를 알려서는 안 됩니다.’

중전은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유태경 역시 중전의 의견에 동의하였지만 부인에게서 중전이 그토록 공포심에 떠는 이유가 적무의 예언 때문이라는 사실을 들은 것은 그 이후였다. 영상 유태경은 처음부터 주상의 숨겨진 뜻을 받들어 세자를 견제했고, 대군이 주상의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부지런히 밑밥을 깔았다. 물론, 제 개인적 영달을 위해서도 대군이 반드시 용상에 오르고 중전이 수렴청정을 해야 한다는 야심을 키워 오던 바, 세자를 거꾸러뜨리고 대군을 앉히는 결심이 달라질 까닭은 없었다.

“중론을 모아 폐위시키면 됩니다. 세자는 발작의 병이 있고, 그럴 때면 이성을 잃고 광포해지니 이에 불효와 패륜의 죄만 더하면 충분히 폐위시킬 수 있습니다, 중전 마마.”

“어떻게요? 지금도 냉방에서 유숙하는 세자를 무슨 수로 불효와 불충을 묻습니까!”

영상이 중전을 달래듯이 말하였다.

“명에 은밀히 사람을 심어 책봉 건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책봉이 어려울 듯합니다. 명에서 책봉을 거부하는 칙서를 가지고 사신관이 도달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세자를 자극하면 분명 책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면, 조정의 중론을 모으고 그간 세자의 허물을 모아 상소를 올리고 지난번 전시에서 검을 뽑아 든 죄를 물으면 용상을 능멸하고 나아가 역심을 품었다 하지 못할 연유가 있겠습니까.”

중전이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영상을 바라보았다.

“말처럼 그리 쉽게 되겠습니까.”

“과히 심려치 마시옵소서.”

한숨만 쉬던 영상 부인이 수선스레 말을 더했다.

“그럼요, 암요, 중전마마. 걱정을 놓으세요. 책봉 거부가 되면 다 순조로이 진행될 겁니다.”

중전이 고개를 저었다. 귀엣말을 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요, 세자가 궐에 버티고 있는 한 어렵습니다. 폐위를 위해 중지를 모으고 행동에 옮기려면, 더군다나 역심의 증좌를 들이대려면 어떻든 세자를 궁 밖으로 보내야 하는데…….”

“역시, 중전마마이시옵니다.”

영상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중전을 치켜세웠다.

“과연, 당장 수렴청정을 하시어도 국사를 돌보심에 부족함이 없으시옵니다. 궐내에 있는 세자를 적절한 핑계를 만들어 밖으로 내보내야죠.”

“어떻게요.”

“모두 다…… 수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감. 이미 세자를 궐 밖으로 내보낼 묘안이 있습니까?”

영상 부인의 소리가 높아지자, 중전이 눈을 부릅뜨며 검지를 제 입에 가져다 대었다.

“소리가 높아요, 어머니.”

유태경이 흐음 헛기침을 하더니 중전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강무가 있습니다.”

“강무요?”

“네, 중전마마. 군사 훈련을 겸해 사냥을 하는 강무 말씀입니다. 주상 전하께서 건강이 좋으실 때는 직접 경기도 부근으로 나가서 강무를 하신 적도 있지요.”

“세자를 경기도 지역 강무를 보내자는 말씀입니까.”

유태경이 고개를 저었다. 낮은 목소리에는 흥분이 배어났다.

“이번에는 동네 산 중턱에 몇십 명 끌고 가서 금표를 세우고 노루나 몰아 대는 타위나 형식적인 강무가 아닙니다. 규모가 다르게 진행해야지요. 북방의 오랑캐를 대비하고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열을 재정비한다는 명분을 세울 것입니다. 무관이나 군인의 훈련이라 하면 광안이 얼마나 앞장서 왔습니까. 강원도 횡성 지방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럼 강원도 횡성으로 강무를 간 세자가 역심을 품고 관리들을 만나고 군사를 선동했다고 몰아가실 계획입니까. 부족합니다. 그렇게 해서 폐위될 세자였다면 벌써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그마한 증좌만 만들면 됩니다. 횡성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심의 증좌는 나옵니다. 게다가.”

유태경의 얼굴에 음산한 웃음이 스쳤다.

“횡성은 호랑이가 나오는 곳이지요.”

“무슨 뜻입니까.”

유태경이 몸을 낮추고 손으로 길을 만들어 중전에게 속삭였다.

“역심으로 몰아가려면 광안을 싸고도는 대북을 처리해야하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한데, 구심점을 잃게 만든다면 그 자들이야 시일을 두고 차차 정리해도 될 일……. 중전 마마, 호랑이는 흔적을 남기는 짐승이 아니지 않습니까.”

영상 부인이 경악으로 벌어지는 입을 가렸다.

“대감!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세자가 왕이 된다고 설마하니, 우리 집안을 도륙 내겠습니까. 하지만 이 일은 그르치게 되면……!”

“어머니!”

중전이 보료 팔걸이를 탁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적무의 말을 잊으셨습니까. 내 아들, 우리 대군의 운명을 잊으셨단 말입니까!”

중전의 매서운 눈길 때문에 부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만들 들어가서 쉬십시오. 밤이 깊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영상을 향해 중전이 덧붙였다.

“조만간 무엇이 좋을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직도 허연 얼굴색을 하고 있는 부인을 향해 지시했다.

“적무를 만나 의논해야겠습니다.”

파르라니 독이 오른 딸의 얼굴을 보며 영상 부인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쳐 문으로 나갔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기별을 받은 중전이 희정당으로 향하였다. 며칠 내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눈알이 따끔거리고 머릿속은 이물질일 낀 듯 뻑뻑했다. 숨이 차고 어지럼증이 돋았지만 주상이 쓰러진 이후 가장 가뿐한 마음이었다. 숨을 고르고, 희정당 침전으로 들어서며 중전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눈물부터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전하. 주상 전하.”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문가에 앉아 몸을 떨며 울었다. 중전의 머리에서 떨잠 장식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중전, 이리 가까이 오시오.”

명료한 목소리를 들은 지 얼마 만인가. 오늘 새벽부터 호흡이 안정되고 기력을 찾았다는 전갈을 들을 때에도 꿈인가 생시인가 실감나지 않았다.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중전이 상궁들의 부축을 받고 몸을 일으켰다. 다소곳이 고개를 드는 순간, 중전의 입이 저절로 얕게 벌어졌다. 주상 옆에 붙어 있던 광안이 단정히 예를 표하였다.

“중전마마, 드시었사옵니까.”

“앉아라.”

광안을 바라다보는 주상의 눈매는 오래 앓은 범상한 노인네처럼 맥이 풀려 있었다.

“네, 아바마마.”

중전의 입술이 비틀리며 일그러졌다. 아바마마. 광안이 웬만해서는 부르지 않는 호칭이다. 늘 광안에게 주상은 주상전하였다. 중전에게 보란 듯이 시탕(주상에게 올리기 전 세자가 탕제를 먼저 먹어 독이 없음을 확인하는 일)하는 광안을 노려보았다. 얼굴은 더 희어지고, 턱 선은 예민하고 가팔랐다. 주상이 앓는 동안 끼니도 제대로 안 챙기고 잠도 불편하게 잔 탓이겠지. 하나, 광안에게서는 이유 모를 생기가 돌았다. 주상의 기력이 쇠함이 즐거워서? 아니, 중전은 고개를 저었다. 즐거운 기분에서 비롯된 분위기가 아니다. 화사한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광안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기운. 봄맞이를 하는 꽃이나 연록빛 새순 같은 싱싱한 활력이 넘쳤다.

‘천 년을 담은 용이라 아뢰었습니다. ……이번 겨울이, 세자가 품은 용의 기운이 일평생 중 가장 강성하더군요. 펄펄 살아 뛰놉니다.’

적무의 말이 귓가를 뱅뱅 돌았다. 세자가 들고 있는 탕약을 조금씩 마시다가 주상은 한 번씩 눈을 맞추며 쉬었다.

“아바마마, 힘드시옵니까.”

세자의 물음에 주상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안이 팔을 뻗어 주상의 등을 둘러 받쳤다.

“소자에게 기대십시오.”

눈치를 보던 제조상궁이 다가가 탕약을 들었다. 중전이 상궁을 밀어내고 탕약을 받아 내밀었다. 광안이 중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서 조금씩 숟가락으로 약을 퍼 올려 주상의 입으로 흘려 넣었다.

“천천히, 천천히 드십시오.”

중전은 차마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지 못해 탕제 그릇만 꽉 움켜쥐었다. 느리게 한 숟갈씩 탕제를 먹는 동안 주상이 광안에게 물었다.

“아직도 냉방에서 유숙하느냐.”

“네, 아바마마 가까이 있었습니다.”

“불을 때라 일렀는데.”

“제가 그러지 못하게 했습니다.”

왕이 가래 기침을 쿨럭거리기 시작했다. 상선 내관이 다가가는데도 세자는 그에게서 수건만 받아 들고 물러나라 손짓했다. 중전은 눈을 힘주어 깜박였다. 잠을 이루지 못해 그런 것인지 광안의 모습이 어릿어릿하게 흔들렸다. 광안은 피가 섞인 가래를 받아 내고, 얼이 빠진 중전의 손에서 더운물을 적신 수건을 가져가 주상의 입을 닦아 주었다.

“야위었다.”

“아니옵니다.”

“영상에게 비망기를 전하였는데……. 내가 전위를 한다 하였다. 아니 되면 섭정을 하게 한다고 명했다. 간곡히 거두어 달라 청하여서…….”

광안이 눈을 살풋 찡그렸다. 코앞에 있는 중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중전이 흐읍 급히 숨을 들이쉬다가 쿡 목이 막힌 채로 광안의 시선을 받았다. 검은 불이 타오르는 눈으로 중전을 보며 광안이 말하였다.

“듣지 못했습니다. 듣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받들 수 없는 명입니다. 아바마마, 거두어 주십시오.”

주상의 얼굴에 느른한 웃음이 퍼졌다.

“하긴, 내가 이리 회복했으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소자는 아직 부족하고 부족할 따름입니다.”

광안이 다시 숟가락으로 탕제를 떠올렸다.

“조금만 더 드시옵소서.”

주상에게 약을 흘려 넣는 광안의 얼굴에는 분노도 적개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주상이 탕제를 거의 비워 갈 즈음, 밖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상 전하, 대군마마 문후 왔사옵니다.”

주상이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어서 들라 하게.”

문이 열리자 대군이 타닥타닥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주상이 몸을 바로 펴며 앉았다. 광안이 주상을 부축했던 팔을 내리고 걸어오는 대군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전하, 대군이 내내 주상 전하의 건강을 염려하고 또 염려했습니다. 몇 번이고 뵙고 싶다 눈물로 호소하였습니다.”

중전이 목소리를 떨며 주상 옆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대군, 이리 오시오.”

대군이 팔을 벌린 주상을 향해 급히 다가가다가 툭 광안의 다리에 걸려 비틀거렸다. 광안이 손을 빠르게 뻗어 엎어지지는 않았지만, 대군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대군!”

중전이 신경질적인 손길로 대군을 끌어안아 품으로 당겼다.

“어디,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대군.”

너무 놀란 기색으로 호들갑스럽게 말하자, 대군은 지레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렸다.

“왜, 왜 어디가 아픈가요? 대군?”

중전이 팔을 꽉 붙잡자, 대군은 우아앙 소리를 내더니 숫제 코를 훌쩍이며 울었다. 광안이 조금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발이 제 다리에 닿았을 뿐입니다. 괜찮습니다, 중전마마.”

괜찮다는 말에 대군이 광안을 흘깃 쳐다보고는, 울음을 뚝 그쳤다. 울음을 그친 얼굴은 안도감보다는 위압감에 짓눌린 공포감이 더 컸다. 그래, 그랬지. 대군은 늘 광안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했지. 기가 눌린 대군을 보며 중전은 목이 꽉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움칫거리는 대군에게 주상이 다시 팔을 벌렸다.

“그래, 괜찮다. 대군. 이리 와 보렴.”

주상 곁에 바싹 붙어 앉아 품에 얼굴을 숨기듯 꼭 붙이자, 주상은 두어 번 대군의 등을 쓰다듬었다. 대군의 자적포, 등에 붙은 금빛 수를 놓은 배에 광안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세자는, 빈을 맞이하라.”

광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천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죽기 전에 빈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느냐.”

“전하, 전하의 강녕하심이 먼저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우선 쾌차하시옵고…….”

중전이 슬쩍 거들었지만 주상의 의지는 단호했다.

“예판을 불러라. 당장 가례도감 설치를 명하겠다. 중전, 중전 또한 빈을 맞이하는 일을 제일 우선에 두시오.”

“전하. 하오나 소자 아직…….”

광안의 말을 끊으며 주상이 역정을 내었다.

“혹여, 지금 데리고 있다는 그 수태도 못한다는 나인 때문인가!”

광안이 답 없이 시선을 내렸다. 굳게 다물린 입술을 보며 주상이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네 나이가 몇인데, 빈이 없이 보위에 오르겠느냐.”

중전이 입을 딱 벌린 채로 낯빛이 퍼렇게 질렸다. 광안이 몸을 깊이 숙였다.

“전하, 보위라니요. 소자 망극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종사의 대계를 위한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세자는, 세자빈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말도 말라.”

한참을 눈치만 보고 있던 어린 대군이 고개를 빠끔히 들고는 주상을 바라보았다.

“대군, 우리 대군도 어서 커서 어어쁜 부인을 맞아야지.”

주상이 크게 웃었지만 광안도 중전도 대군까지 그 누구도 따라 웃지 못했다.

대전에서 나와 무슨 정신으로 움직이는지도 몰랐다.

보위라니. 보위라니요!

중전은 잠시 멈추어 서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황량하고 삭막한 궐이다. 이이잉 소리를 내며 바람이 일었다. 기와 위 용마루에 내려앉은 겨울 하늘이 답답하고 매정한 겨울바람에 손이 시리다. 전위와 섭정을 명하는 비망기의 존재를 확인하며 중전을 바라보던 광안의 검은 눈이 떠오른다. 주상이 떠나면, 이 궐에서 광안의 핍박을 받으며 목숨만 겨우 부지할 수 있을까. 한시가 급하다. 영상을 만나야 한다. 중전은 손부채를 만들어 이마에 대고, 늦게 떠오르는 겨울 해를 바라다보았다. 이제야 흐린 하늘이 귀퉁이부터 환히 밝아지기 시작하는 이른 시간이었다.

중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지필묵을 대령하라 하였다. 바들거리는 오른 팔목을 다른 손으로 붙잡고 겨우 글을 써 내려갔다. 짤막한 한 줄 이었다.

‘배고픈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어야 합니다.’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고 궁녀에게 건넸다.

“영상대감께 전하여라.”

중전의 목소리는 긴장 때문에 거칠거칠하였다.

“네, 중전마마.”

“정옥아. 네 은밀히 다녀와야한다. 그리고 영상 부인께 내 지난밤 이른 일은 어찌 되었나 여쭈어라.”

정옥이 배시시 웃었다.

“여부가 있겠나이까.”

*

정오가 훨씬 넘은 시간,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영상의 낯빛이 몹시 어두웠다. 중전은 입을 누군가가 틀어막은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뒤따라 들어서던 영상 부인이 중전 곁으로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서찰은 그리 보내었으나 영상이 상황을 타개할 좋은 묘안을 마련해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던 중이었다.

“중전 마마.”

“영상대감, 말씀해 주세요. 또 더 나쁜 일이 있습니까.”

“명에서 은밀히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설마, 책봉이.”

영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의 후계 문제가 마무리가 되어서, 더 이상 세자 책봉 거부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아직 공식적인 결정은 미루고 있으나, 아무래도…….”

“그럼 결국, 역심을 품었다고 몰아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남은 건…….”

어휴우, 영상 부인의 한숨이 깊어졌다.

“강무 일정을 잡겠습니다.”

영상이 결연히 답했다. 문 밖을 빠져나가는 영상대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중전이 허물어질 것만 같은 등을 꼿꼿이 폈다. 바쁘고 불안한 걸음으로 나가느라 영상의 어깨가 좌우로 흔들렸다. 흔들림은 크기를 더해 중전의 마음을 헤집었다. 지금부터 영상은 이리저리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조정대신들과 은밀한 논의를 시작할 것이다. 주상의 건강이 위태로운 지금, 세자를 밀어내고 대군을 올리겠다는 영상의 뜻에 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 있을까. 자칫하면 역모의 죄로 몰려 영상과 중전의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지 모를 일이다. 주상을 껴안듯 떠받치고 탕제를 올리는 광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 광안은 유달리 활력이 넘쳐 보였다. 용의 기운을 타고나, 그 용의 기운이 가장 강한 겨울을 맞이한 세자. 결국 세자의 강한 운대의 흐름 때문에 주상의 건강이 급격히 쇠하고, 명조차 여태 수 년간 트집 잡던 세자 책봉을 허하게 되는 것일까.

“중전마마. 자리에 좀 누워 쉬세요. 안색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영상 부인이 중전을 다독였다.

“어머니, 광안이 용상에 오르면 우리 대군은 어찌 될까요.”

영상 부인은 답을 하지 못하고 에고 에고 한탄만 길게 하였다.

“적무는 무어라 합니까.”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이대로 일을 도모하다가는 오히려 용의 기운에 모두가 다칠 것이라며…… 중전마마! 혹여라도 잘못되면 영상도 우리도, 우리 집안 전체가 멸문지화를 당합니다.”

부인이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입을 막고 울기 시작했다. 중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끝 모를 불안이 마음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대체 적무는 언제 온답니까.”

“마마의 결심이 서면……. 그리 말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웃더이다. 오늘 밤이면 뵙겠노라고. 신申시경에 선물은 미리 드리겠다 하였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눈물을 찍어 내고 부인이 바싹 다가앉았다. 중전의 양손을 부여잡고 사정하였다.

“차라리 세자를 달래심이 어떠합니까. 이제라도 세자 저하의 뜻을 존중하고 중전마마가 나서서 후계로 세자께서 용상에 오르심을 인정하면.”

“세자가 아무리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해도 우리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세자가 보위에 오르는 순간 이를 갈고 있던 대북파가 끈질기게 유당파를 핍박하고 우리를 공격할 겁니다. 누군가가 대군을 금상으로 올리기 위해 역모를 꾀한다는 밀고라도 들어가면!”

중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우리 대군은……!”

“중전 마마, 오늘이라도 세자를 만나 보러 가십시오. 가례도감 설치 이야기도 꺼내시고, 세자빈 이야기도 넌지시 하며 마음을 돌려 보십시오.”

중전이 울먹이는 영상 부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무어라 먼저 말을 꺼내야 하나, 중전은 긴장으로 뻣뻣해진 입술 주변을 양 검지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어머니 말대로 세자빈 간택 이야기를 꺼내어 볼까. 주상이 세자빈을 맞으라 명을 내렸을 때 굳어 버린 광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위,

종사의 대계.

금상으로부터 나온 파격적인 말에도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원체 속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도무지 세자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금박 봉황 무늬가 찍힌 스란치마 아래로 운혜가 드러났다 사라진다. 세자가 집무와 소대를 할 때 사용하는 성정각 보춘정, 작은 편전이라 불리는 그곳으로 향하는 걸음걸음 중전의 고민과 갈등, 근심이 실렸다.

심호흡을 하고 보춘정 내실에 들어섰지만, 정작 중전을 맞이하는 세자의 태도는 덤덤했다.

“이곳까지 어인 걸음이십니까, 중전 마마.”

“앉으세요, 세자.”

서궤 앞에서 일어서는 세자에게 중전은 손짓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아침에 금상께서 명하신 세자빈 간택 이야기를 하러 왔어요.”

“아.”

광안의 눈썹이 노골적으로 찡그려졌다. 입에서 나오는 못마땅한 감탄사를 듣고서 중전이 흠칫 숨을 골랐다.

“세자가 세자빈을 들이는 일을 내내 미뤄 왔던 바는 알아요. 하지만, 주상의 명입니다. 오늘 아침, 기력을 회복하시자 처음 내린 명이십니다. 보위에 오르시기 전에 세자빈은 꼭 맞이하라고 명하시지 않습니까. 세자가 빈을 간택하는 일을 꺼려 함이 혹여, 제가 간택에 영향을 미칠까 그러는 거라면…….”

세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만, 중전마마.”

세자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중전의 시선이 옮겨 갔다.

“죄송합니다, 중전마마. 서가의 안쪽 높은 곳 책을 정리하느라, 미처 나가지 못했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여쭈는 궁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 나인, 오랜만이에요.”

중전은 화사하게 웃었다.

“이만 물러가라.”

세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하였다.

세자의 가례 소식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겠지.

고개를 숙이는 은우를 중전이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정궁에게 밀려나야 하는 궁녀의 얼굴은 덤덤한데 빈을 맞이해야 하는 세자는 어느 한구석이라도 도려낸 것처럼 아픈 표정이다.

‘결국, 광안 네가 온통 마음을 주었구나.’

중전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떠돌다 사라졌다. 조용히 문 밖으로 물러가는 강 나인의 뒤통수에 단아한 은비녀가 꽂혀 있었다. 중전의 시선이 광안에게 향하였다. 비녀만 꽂은 궁녀에 대한 처분을 탓하는 어조로 말하였다.

“강 나인에게 첩지를 내리시지요. 빈을 맞이하기 전이면 또 어떻습니까. 큰 허물이 아닙니다.”

은우에 대한 중전의 관심을 끊어 내 듯이 광안이 시선을 사선으로 느른하게 내리고 으흠, 낮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중전이 못을 박듯이 말했다.

“예조에 명하셨으니 가례도감은 설치될 겁니다.”

“하여,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합니까.”

“세자빈은 최대한 세자의 뜻을 따라 간택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최대한, 소자의 뜻?”

되묻는 광안이 금세라도 실소를 터뜨릴 듯 입 끝을 말아 올렸다.

“소자는 중전마마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세자?”

“세자가 원하는 빈을 간택하였다, 그런 명분이 필요하십니까? 대체 이제 와 그런 명분 따위가 왜 필요하십니까. 빈은 대대로 세자와 세손이 의지대로 고른 적이 있었던가요.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또, 어떤 가문의 규수를 제가 원해야합니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

중전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흔들리는 중전은 낯설었다. 광안은 오늘 이른 아침, 주상의 보위 언급이 그 원인이라 생각하였다. 질문을 바꾸어야 했나.

‘이제 와 그런 화해가 왜 필요하십니까.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을 꾸미어 어떤 곤경에 내가 처하게 되는 겁니까.’

중전은 느닷없이 보춘정에 들이밀고 와서 은우에게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세자빈 간택 소식을 전하게 만들었다. 광안은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은우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떨리는 손끝을 알아챌 수 있었다. 광안과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꾹꾹 삼키느라 얕게 오르내리던 목울대가 선명하다.

오늘 아침 냉방에서 돌아오자, 은우는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했다.

‘주상전하의 성후가 회복되어 다행입니다. 따뜻한 방에서 몸을 녹이실 수 있어 다행입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하며 웃는 얼굴을 보니, 가슴이 쿡쿡 저려 왔다. 가만히 안아 주며 머리에 꽂은 은비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비녀를 원하며 홍옥을 물린 은비녀를 매일 꽂으면 매일 저하의 입술을 가진 듯할 것이라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교합의 여운이 가시지 않고 주위를 뭉근히 감싸고 있어, 여자가 하는 말은 등줄기를 관통하는 찌릿한 자극일 뿐이었다. 그 말을 뱉은 입술을 물고 핥고 삼키며 터질 듯 말 듯 차오른 욕망의 정점을 향해 본능적으로 움직이기만 하였다. 하얀 살결에 홍옥 같은 자국을 점점이 남기자, 붉은 탄성이 쉼 없이 뿜어 나왔다. 고작 홍옥 물린 은비녀만 원한다던 은우가, 마치 마지막 한 꺼풀 옷자락을 벗지 않는 여인처럼 애간장을 닳게 했다. 홍옥 물린 은비녀만 원한다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정작 품어 내지를 못했다.

‘은우야.’

‘네, 저하.’

차마 세자빈 간택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머리만 쓰다듬었다.

광안은 차갑게 웃으며 중전에게 되물었다.

“제가 원하는 빈이라는 명분을 드리겠습니다. 재간택에서 뽑힌 세 명의 규수들을 보면 중전마마가 원하는 빈이 누군지 명확해지겠지요. 저는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세자빈일 뿐이니까요.”

“세자,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세자의 빈일 뿐이지, 나의 여인도 나의 부인도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세자빈에게 주어지는 권세는 없을 겁니다. 그것만은 약조드립니다.”

중전이 속입술을 깨물었다. 유당파의 여식을 올려라. 철저하게 밟아 주고 무시하겠다. 나아가, 외척이라는 이유로 중전의 집안을 부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함부로 수를 쓰지 말라.

광안의 경고로 뒷목덜미가 써늘하게 식어 갔다. 중전의 결심 또한 단단한 얼음덩어리처럼 굳어 갔다. 어설픈 화해는 매정하게 거절당했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미 도달해 있음이 자명해졌다. 두 마리 용이 한 하늘을 이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종내에 누군가는 파멸로 치닫겠지.

대군이 역모의 죄를 쓰고 처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이 상상되자 중전의 마음이 맹렬한 분노심으로 불타올랐다. 순간이었다. 갑자기 광안이 가슴을 움켜쥐며 서궤 앞으로 몸을 숙였다.

“세자?”

이를 악물었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낮고 거친 신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세자, 무슨 일입니까.”

광안은 주먹을 움켜쥐고 통증을 견디는 일이 고작인 듯 입을 벌리지 못하였다. 중전과 광안 앞으로 다기가 놓여 있었다. 대화를 나누며 광안이 차를 반 이상 비웠다. 중전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설마, 누군가가 독을 먹였다고 나를 의심을 하지는……!

중전은 새된 목소리로 문가를 향해 외쳤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저하, 세자 저하?”

강선이 제일 먼저, 뒤를 이어 서 상궁이 달려왔다. 저하, 저하 소리를 높이고 양평군 대감을 부르라, 한바탕 수선이 벌어지는 동안 광안이 아끼는 궁녀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다가와 법도상 제 자리는 여기가 최선이라는 듯 멀찍이 서 있기만 하였다. 고개를 든 광안이 눈을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은…….”

이름을 다 부르지도 못하였지만, 손짓에 따라 궁녀가 움직였다. 고통으로 웅크린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삽시간에 진땀으로 범벅이 된 남자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고 느리게 매만졌다.

“저하, 소인이 보이시옵니까.”

천하의 광안이, 마치 아이처럼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뜨던 눈을 힘없이 감고서 미천한 궁녀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궁녀는 자연스럽게 광안이 내맡긴 손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등을 가만히 쓸었다. 한 번씩 쓸어내릴 때마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자그마하게 움직였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고, 오직 광안만이 들을 수 있는 위로인가.

중전은 고개를 빼어 궁녀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광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은……우.”

“네, 은우이옵니다.”

“내가, 갑자기 왜…….”

세자의 시선이 느리게 주위를 훑었다. 중전을 비롯하여 서 상궁과 강선 내관은 느닷없이 시작한 광안의 발작에 혼이 나간 모양새였다. 궁녀는 차분하게 그들을 향해 말하였다.

“지난 며칠, 방이 너무 차가웠습니다. 주상 전하의 성후가 심려되어 잠도 이루지 못하고 수라를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습니다. 아침부터 서책을 넘기는 손이 떨리시고, 식은땀을 흘리시어 불안불안했습니다. 아무리 밀린 일이 많다 하셔도 이리 급하게 보춘정으로 오시면 아니 되었습니다.”

궁녀의 말은 모두를 빠르게 설득시켰다. 강선이 쉬셔야 했다고 거들고 예후가 안 그래도 근심스러웠다며 서 상궁이 나섰고, 중전조차 그러한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보춘정에 들 때 세자는 강녕해 보였는데. 아침에 보였던 싱그러운 활기도 그대로였는데…….

은우 품에서 세자의 호흡이 서서히 편안해졌다. 가슴의 통증도 줄어든 듯 기대었던 몸을 바로 폈다.

“침전에 드시지요.”

은우가 세자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한 팔은 강선에게, 다른 팔로는 은우의 어깨를 짚으며 세자가 일어섰다.

“세자, 어서 쉬고 몸을 회복하세요.”

중전이 어색하게 일어서며 인사를 건네었다.

“살펴…… 가십시오, 중전, 마마.”

이마에 푸른 핏줄이 불거지고 진땀은 계속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광안은 한결 나아진 상태로 침전을 향하였다.

*

긴 하루가 소리 없이 접혀지는 시간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대조전으로 안개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는 여인은 상궁복 차림이었다. 벗겨 놓은 달걀처럼 매끈한 얼굴에 길고 찢어진 눈매는 몇 차례 보았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중전은 목덜미부터 팔까지 갑자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영상 부인이나 상궁 없이 적무를 독대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잠시 팽팽한 침묵 속에 시간이 흘렀다. 긴장을 감추며 중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늦었네.”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쇤네 몸을 좀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적무가 잠긴 목소리로 답하였다.

“그간 병이라도 앓았단 말이냐.”

불빛 아래 찬찬히 살펴보니, 저번에는 맨드르르 미끈거릴 만큼 윤이 흐르던 피부가 거칠해지고 눈가가 거뭇하였다.

“오늘, 신시. 선물을 드렸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가?”

“확인해 보실 것이 있습니다.”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서 스르륵 뱀이 움직이듯 순식간에 중전 가까이로 다가왔다.

“무엇이냐.”

적무가 싸늘한 웃음을 짓더니, 품에 숨겨 왔던 것을 꺼내어 서안 위에 늘어놓았다. 접혀 있는 종이 한 장, 마찬가지로 접힌 명주 조각 한 장이었다.

“열어 보십시오.”

중전이 떨리는 손으로 명주 천 조각을 펼쳤다. 검붉은 선혈이 흩뿌려져 있었다.

“이건 피가 아니냐.”

적무는 찢어진 눈으로 흰자위를 드러내며 답했다. 유달리 작은 동공이 위로 치켜 올라가 모습이 기괴하고 음산하였다.

“돼지 피일 뿐입니다.”

접은 종이를 향하다 말고 중전은 몇 번이고 허공에서 주먹을 도로 쥐어 무릎 위로 가져왔다. 적무가 후우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었다. 서안 위로 뻗어 오는 적무의 손가락이 마치 멍이라도 든 것처럼 푸르죽죽하였다. 결심을 다지는 듯 적무의 손이 접은 종이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호흡 역시 잠시 멈추었다. 눈을 감았다 뜨며 적무가 종이를 펼쳤다.

아악. 중전이 경악스러운 비명을 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적무가 갑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무언가를 토해 내듯 기침하기 시작했다. 입가로 검은빛에 가까운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돼지 피가 흩뿌려진 명주 천을 움켜쥐고 적무가 입가를 문질렀다. 쌕쌕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적무가 세 번 더 가슴을 탁탁탁 두드렸다.

“세자인가.”

중전이 펼쳐진 종이에 난도질된 얼굴을 보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오늘, 신시였나.”

중전이 보춘정을 찾았던 시각이다. 적무가 신시에 보낸다는 선물을 그 방문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적무는 중전이 적무의 제안을 밀쳐 두고, 세자와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신시에 보춘정을 찾으리라는 것까지 정확히 알아맞힌 셈이다. 별안간 발작 증세를 보이며 가슴을 움켜쥐던 세자가, 적무의 저주 때문이었다.

“세자가 잠시 통증을 느꼈을 겁니다. 몸 전체에서 기력이 빠져나가 꼼짝할 수도 없었겠지요.”

“그러네. 허나, 잠시였어.”

“얼마쯤이었습니까.”

“일각도 아니었어.”

적무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제가 피를 토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한 시진을 죽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세자의 통증이 배는 더 지속되었어야 합니다. 증상이 있었을 때 약재나 침을 썼습니까?”

중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특별한 건 전혀.”

중전이 고개를 젓다 말고 적무을 쳐다보았다.

“여인. 광안이 사랑하는 여자.”

“여자?”

“한낱 궁녀야. 신기하게도 걔가 손을 잡아 주고 다독여 주니 광안이 정신을 차렸어.”

적무의 입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한밤 높이 이는 겨울바람 소리 같기도 한 기괴한 웃음소리가 침전을 휘감았다. 귓구멍에 가느다란 뱀의 혓바닥이 쑤욱 들어와 몸속을 파고드는 느낌에 중전은 어깨를 움츠렸다.

“광안을 짚다 보면 자꾸만 변수가 생기더니, 여인 때문이군요.”

“그 아이를 떼 놓아야 하는가? 수태을 하지 못하는 몸이라 첩지도 못 받은 나인인데.”

적무의 눈동자가 휘휘 돌아갔다. 흰자위만 보이게 하여 벽 너머 공간 한구석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광안은 본디 애정에 갈급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요. 불신과 불안증이 용의 기운을 잠식하고 때로는 독기로 끓어올라 되레 제 몸을 제가 치는 형상이었는데, 올겨울 천운이 닿았습니다. 여인을 짚어 가면 코끝에 향이 맴돌아요.”

적무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달달한 미소가 퍼졌다.

“달콤한 꽃 향에 달큰하고 시원한 봄바람입니다. 불안을 잠재우고 독기를 가라앉히는 여인이라니.”

적무가 갑자기 미간을 찡그렸다.

“수태를 못하는 몸이라 했습니까?”

“그러네.”

“희한하네요. 용종이 이토록 선명히 보이는데.”

“용종? 그 나인이 수태라도 했단 말이냐.”

“아직은 모르옵니다. 허나, 용이 새끼 용까지 얻게 된다면, 이를 어찌 막겠습니까.”

중전의 낯빛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강무 일정이 곧 잡힐 것이네. 거사를 도모할 날을 뽑아 주시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미리미리 손을 써 기운을 쇠하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 역시 해야 하지요.”

“몇 겹의 장치를 하고 또 하고, 여러 겹 덫을 놓을 것이네. 야생 짐승을 자극시키는 혼분을 구할 수 있네. 광안의 흑마를 서서히 발작시켜 무력하게 만들 것이야. 또한 궁술이 좋은 자를 배치할 걸세.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누구도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용을 벨 수 없습니다.”

“자네가 힘을 써 주면 되지 않는가.”

적무가 서안에 펼친 광안의 초상을 집어 들어 중전의 얼굴 앞에서 팔락 흔들었다. 갑자기 목이 졸려 와 중전이 켁켁 고통스러운 기침을 밭아 냈다.

“흑주술은 반드시 행하는 자의 몸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해하려는 자의 기운이 셀수록 그 강도가 커집니다. 아까는 이 기운을 쇤네가 모조리 받았습니다.”

적무가 음산하게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신을 부르는 주문을 외웠다. 마치 목소리가 죄다 빼앗긴 사람처럼 중전은 꼼짝도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촛불에 불이 옮아가자, 서서히 초상화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꾸불꾸불 몸체를 키웠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허공을 뱅글뱅글 돌아 올라가는 모습이 흡사 이무기의 형상이었다. 적무가 양손을 높이 모으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짤막한 글귀를 내뱉고서 양손을 촥 펼쳐 냈다. 일시에 검은 연기가 사라지자, 중전은 그제야 깊이 숨을 들이켰다.

“용의 힘을 주시면 제 신력과 목숨을 더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거사를 도모하다 실패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아아, 중전의 입에서 울분 섞인 한숨이 나왔다.

“주상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용단을 내리십시오.”

적무가 일어서서 가느다란 뱀의 눈을 하고서 중전을 내려다보았다. 중전은 서안에 함부로 펼쳐진 명주 천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돼지 피와 적무의 피가 검붉은 얼룩이 되어 꾸덕꾸덕 말라 있었다.

*

유기그릇을 양손으로 감싸 들었다. 다갈빛 탕약이 유기 안에서 낮게 출렁였다.

“온기가 적당합니다, 저하.”

“멀쩡하다.”

“그래도 드시옵소서.”

광안이 고집을 부리지만, 은우는 물러서지 않고 탕약 그릇을 받쳐 들고서 권하였다. 강선, 서 상궁을 비롯한 모든 내관과 지밀궁인들이 광안에게 약재를 올리는 일에 실패하자 은우를 밀어 넣고서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아무렇지도 않다. 보이지 않느냐.”

“소인이 보아 어찌 아옵니까. 양평군 대감 말씀을 따라야지요.”

광안이 탁, 보료 팔걸이를 내리쳤다.

“발작이 아니었다.”

늦은 오후에 있었던 소동으로 동궁전이 잠시 분주하였다. 소리를 낮춘 발걸음들이 바삐 오갔다. 수어의 양평군 대감이 광안의 맥을 짚었고 한기를 빼는 게 좋겠다 하여 삼과 약초를 끓여 넣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였다. 의녀들이 뒤이어 탕제를 올렸다. 이번에는 발작을 가라앉히는 약이 아니라 다만 상한 옥체를 보하는 약재라 하였다.

“아옵니다. 양평군 대감께서 기력을 보하는 약재라 하였으니 드시옵소서.”

“그러는 너는 탕제를 거부하지 않느냐.”

“내리신 탕제는 부지런히 다 먹었습니다. 몸에 상처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만 치유하는 약이 아니다. 다시 내릴 테니 먹어라.”

양평군이 광안의 맥을 짚으러 왔을 때 이미 한차례 지나간 이야기였다. 은우는 이제는 더 이상 약을 먹을 이유가 없다고 버텼다. 이번에는 내리신다 하여도 입으로 넣지 않겠다고도 말하였다. 속이 부대끼고 열이 올라 잠을 잘 수가 없다, 소화가 되지 않는다, 두통이 인다는 핑계를 댈 때마다 광안이 못마땅하게 양평군을 바라보며 부담을 가중시켰다. 결국 약재가 곱절로 불어나 버리고 말았다.

“드십시오, 저하.”

유기그릇을 가까이 가져가자 광안이 입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비틀었다.

“저하!”

“약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제가 묻고 싶은 말씀입니다, 저하.”

“너의 약조를 듣기 위해서다.”

“저하.”

“양평군이 제조한 약을 들란 말이다!”

은우가 받치던 약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탕약 시중은 서 상궁마마님께 받으십시오. 밤이 깊었습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일어서는 은우의 팔목을 광안이 거세게 잡았다.

“강은우.”

힘에 밀려 푹 도로 주저앉으며 은우가 광안을 올려다보았다.

“이리도 시건방을 떠는 이유는, 세자빈 간택령 때문이야?”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좋다. 단지 약 때문이라면.”

광안이 은우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고 다른 손으로 유기그릇을 집어 올렸다. 단숨에 꿀꺽꿀꺽 삼키고는 그릇을 소리가 나도록 내팽개쳤다. 팽그르르 방바닥에서 돌아가는 약사발을 보면서 은우가 하아,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약이 아니었다. 세자빈 간택령으로 불편해진 마음을 약에 빗대어 둘 다 고집을 부렸다. 은우는 내내 덤덤한 태도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광안을 대하고 살피는 은우에게 되레 광안이 서운하고 애가 타고 분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은우의 턱을 붙잡아 올려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자빈 때문인가.”

“아닙니다.”

은우가 조용히 붙잡은 손을 풀게 만들고 바닥에 나뒹굴어진 유색 탕기를 집어 들었다.

“약을 드셨으니, 소인 이만…….”

“내 오늘 너와 자야겠다.”

은우가 자리에 서서 광안을 쳐다보았다. 눈에 원망과 설움이 비치나 싶더니 이내 잠잠히 가라앉았다.

“네, 저하. 그럼 준비를…….”

광안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벌어지나 싶더니 팔을 뻗어 은우의 다리를 확 채어 당겼다. 아, 균형을 잃고 은우가 털썩 주저앉았다. 어깨를 둘러 꽉 끌어당겨 안고는 광안이 큰 목소리로 명하였다.

“밖에 누구 없느냐.”

달려 들어온 서 상궁이 안겨 있는 은우를 못 본 척 고개를 숙였다.

“서 상궁, 침수 준비를 하라.”

은우가 품에서 바르작거리며 벗어나려 하였지만 광안은 꿈쩍도 않았다. 서 상궁이 옆에 있던 지밀나인에게 눈짓을 하였다. 화로에 올려 두었던 주전자를 들고 들어선 나인이 비단 금침 옆에 준비 되어 있던 유기 대야에 뜨거운 물을 더하였다.

“저하, 금침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 무엇이 필요하냐.”

“혹시 더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들었느냐.”

광안이 여전히 제 품에 꽉 끌어안고 있는 은우를 향해 말했다.

“서 상궁이 준비가 더 필요 없다는군.”

“……저하.”

은우가 부끄러움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이제 다들 물러가라.”

광안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은우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서 상궁과 나인이 발소리도 없이 방을 나가고 조용히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은우는 그제야 감았던 눈을 뜨고 광안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광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양팔 아래가 잡혀 은우의 몸도 일으켜졌다. 똑바로 서기도 전에 입술을 벌리며 뜨거운 혀가 들어왔다. 은우는 주춤주춤 뒤로 밀리면서 걸어갔다. 광안은 뾰족하게 세운 혀로 혓바닥 아래를 긁어내듯 헤집고 치열 옆 보드라운 살갗을 빨아들였다. 입천장을 훑어 내려 입을 더 크게 벌리게 하면서도 갈 곳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은우의 혀를 건드리지 않았다. 으응, 은우의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은우가 가빠진 숨을 들이쉬었다. 순간 혀가 통째로 삼켜지는 듯 광안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은우를 들어 올려 높이를 맞추고서 광안은 걸음을 옮겼다. 은우가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여전히 혓바닥을 놔주지 않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숨이 가빠 눈앞이 붉게 변하였다 싶을 때 발이 닿고, 입으로는 갑자기 공기가 들어왔다. 하악, 숨을 내쉬는 동안 은우의 옷이 빠르게 벗겨졌다.

적삼 윗도리를 벗기자 뽀얀 가슴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광안은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부끄러움에 비트는 몸이 예뻐 다시 깊이 입을 맞추었다. 속치마 매듭을 푸는 손이 성급하게 움직였다. 풀리기는커녕 도리어 꽉 묶어진 매듭 양쪽을 잡고는 힘을 주어 끊어 버렸다. 드디어 양 가슴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마음껏 움켜쥐었다. 아아. 은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시하고 계속 이지러지도록 힘을 더했다.

“저하.”

광안은 제 손 위를 덮는 은우의 손을 야장의 저고리 위에 올렸다.

“은우 네가 벗겨 봐.”

은우가 고름을 풀기도 전에 다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광안의 커다란 손안에서 가슴은 엉망으로 이지러지고 손가락 사이로 분홍빛 살덩이가 비어져 나온다. 손가락 사이에 꽉 끼우자 은우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광안의 저고리를 주름이 잡히도록 쥐었다. 팽팽하게 비어져 나온 몽우리를 혀끝을 세워 맛을 보자 은우는 광안의 옷자락을 꽉 쥐고서 속절없이 몸을 떨었다. 광안이 입을 가슴에서 귀로 옮겨 갔다. 예쁜 귓바퀴를 혀가 휘돌았다.

“빨리.”

은우는 신음을 삼키며 광안의 저고리를 내리고 적삼을 열었다. 그제야 가슴에서 손을 떼어 팔목에 걸리는 상의를 한꺼번에 벗어 냈다. 빨갛게 손자국을 남겨 놓은 가슴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광안이 동그란 가슴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훑어 내리자 은우가 어깨를 움츠린다. 날씬하고 포근한 배와 앙증맞은 배꼽을 지난 손이 은우의 가느다란 손을 붙잡았다.

내내 맘껏 물고 싶었던 가슴에 입을 내리자 은우가 도망가듯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양 손목을 잡아 벽에 고정시켰다. 숨을 멈추며 바라보는 여인이 사나운 욕망을 부채질한다. 담담하던 얼굴이 어떻게 달아오르는지를 안다. 단정한 답 대신 교태로운 신음을 흘릴 때 찡그려지는 미간과, 열기와 물기에 촉촉이 젖은 눈을 안다. 발갛게 솟아오른 정점을 빨아들이자 여자는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부풀어 오른 유두를 이로 긁어내리면 못 견뎌 하겠지. 생각만으로도 몸속 깊은 곳이 간질거린다. 결국 가장 예민한 곳임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긁어내린다. 하아악, 쾌락의 절정은 고통과 맞닿아 있고 절정 가까이에서 좀체 올라오지 않는 감각은 고통의 극한이다. 은우가 입을 크게 벌리고 목을 뒤로 젖혔다.

“저하, 이제 그…… 그만.”

광안이 입술을 떼자 은우가 눈을 찡그리며 겨우 떴다. 후우 입김에도 아릴 만큼 혹사당한 가슴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나 좋을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아무리 만지고 핥고 맛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저하, 으음.”

부드러운 입김에 은우가 얼굴이 붉어져 광안을 바라보았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눈동자에 담겨 있다. 물고 빨려 부풀어 오른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색색 내어 쉬며, 남자를 향해 열기 젖은 본능을 뿜어내는 이 여자를 광안 외에 누구라도 본다면 맹세코 눈을 뽑아내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광안이 은우의 벌어진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은우가 입을 다물어 손가락 끝을 머금었다.

“내가 혼인한다는데!”

다물린 입술 아래로 턱이 자잘하게 떨렸다. 광안이 손가락을 빼어 귓등을 쓸어 넘기고 비녀를 빼내었다.

“고작 비녀 하나면 충분해?”

“충분하지…… 않습니다.”

은우가 손을 뻗어 광안의 입술을 더듬었다.

“저한테만, 다그치는 입술.”

가느다란 손가락이 짙고 고른 검은 눈썹을 따라 움직였다. 눈두덩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저만 볼 수 있는 뜨겁고도 솔직한 눈동자입니다.”

손가락은 목덜미를 따라 흐른 후, 가슴의 흉터를 부드러이 배회하였다.

“저만 아는 꽃.”

심장이 투둑투둑 뛰어오르고 가슴이 터질 듯 뻐근하였다.

“그러니, 충분하다고 설득합니다.”

광안이 이를 꽉 다물었다. 은우의 무릎 뒤쪽으로 팔을 걸어 벽을 짚었다. 다른 한쪽 발끝으로만 겨우 버티면서 은우가 광안의 목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완전히 들어 올려 눈높이를 맞추었다.

“눈동자도, 입술도 잘 보아라.”

광안이 은우에게로 단번에 들어갔다. 은우의 손가락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틈 없이 꽉 맞물린 자리에서 열꽃이 피어났다. 허리를 움직이자 입술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마찰이 더해질 때마다 몸이 녹아 없어질 것만 같다.

오직…… 너만이 아는 뜨거움.

*

희끄무레한 월대를 지나, 밤이 짙게 깔린 뜨락에 내려서자, 바람이 치마를 펄럭펄럭 날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수령이 백 년도 훨씬 넘었다는 상수리나무가 시커멓게 버티고 서 있었다. 덩그렇게 떠오른 보름달이 검은 나뭇가지 사이로 휘영청 빛났다. 이 뜨락에서 보름달을 처음 본 것도 아니건만 달빛이 꼭 안개처럼 축축이 뜨락을 적시는 느낌이었다. 목덜미에도 발목에도 으스스한 습기가 드리워졌다. 물에 젖은 달빛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목을 조르고, 하룻밤 사이에 함부로 자라는 잡초처럼 발목을 칭칭 감았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신발창에 납이라도 붙여 놓은 듯 무거워 진땀이 비질비질 흘렀다. 이 시간쯤이면 적어도 여덟은 주위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암만 둘러보아도 지게문 밖에서 인사를 하던 정옥 나인 외에는 누구도 찾을 수 없다. 하긴 누가 있다 해도 눈을 피해야 했으니 다행이다.

“으애앵.”

아이의 울음소리가 검은 뜨락에 길게 퍼졌다.

“마마, 대군마마. 조금만 참으시옵소서.”

보모상궁은 내민 대군의 손을 잡아 다시 깊숙이 안으로 넣었다. 감아 놓은 무명천 위로 피가 배어 나와 있다. 대군은 몸이 축 처져 다시 잠이 들었다. 이 시간에 아이가 잠을 자는 일이야 당연하지만, 어쩐지 대군은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어쩌다가, 귀한 몸에 이런 상처를 내셨을꼬.’

겨울 한기가 초록빛 누비 당의를 뚫고 들어와 금세 보모상궁의 몸이 차갑게 식었다. 몸체가 작은 아이는 더욱 추위를 느낄 것이다. 보모상궁은 울음을 그치지 않는 대군을 꼭 껴안았다. 중전으로부터 갑자기 대군이 보고 싶으니 데리고 오라는 명을 받은 건 반 시진 전이었다. 새근새근 잠이 든 대군을 옆에 누이고, 잠시 둘이 있고 싶다 하여 밖으로 나갔더랬다. 문 앞을 지키던 주 상궁이 날이 차니 대군마마 겉옷을 하나 더 가지고 오라 명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부지런히 누비 두루마기를 챙겨 왔더니 방에서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마, 마마. 무슨 일이옵니까.”

보모상궁을 막고서 주 상궁이 홀로 중전의 침전으로 들어갔다. 울음소리는 내내 그치지 않았다. 대군마마가 태어났을 때부터 젖을 물려 키웠지만, 마치 무언가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스런 울음소리는 처음이었다. 결코 날카롭고 예민한 쇳소리를 내며 우시는 분이 아니었다. 울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보모상궁의 심장이 칼끝에 긁히는 듯 아렸다. 들라는 명이 없어 몇 번이나 마마, 문 밖에서 불러만 보았다. 에고 에고, 발만 동동동동 굴렀다. 한참 후,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주 상궁이 그제야 문을 열고 들어오라 하였다. 중전마마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보모상궁은 대군 앞에 서서 헉, 비명을 삼키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무릎을 털썩 바닥에 대고 주저앉아 대군마마를 향해 팔을 벌렸다. 축 늘어진 몸으로 대군은 눈을 떠 상궁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핏기라고는 하나 없이 창백했다. 울음소리가 잦아졌던 이유는 소리를 낼 기력이 없어서였다. 본래 태어나기를 약하게 태어난 분이라 또래 사내아이들에 비해 몸체도 작고 입도 짧았다. 도자기처럼 조심조심 정성을 들이고 또 들이며 한 숟갈씩 몸에 좋다는 것만 골라 드려도 고뿔 한 번에 포동한 볼 살이 쑥 내려갈 만큼 저장해 놓는 영양이 부족했다.

“대군마마, 마마.”

보모상궁이 중전 품에 있는 대군을 받아 들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마!”

대군의 손에 흰 붕대가 둘둘 말려 있었다. 입혀 온 자적포도 없이 하얀 저고리 바지 차림으로 대군은 눈을 떠 상궁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너무 소란 떨지는 말게나.”

중전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유달리 끝이 뾰족한 뒤꽂이를 가지고 놀다가 손이 찔렸어. 대군이 많이 놀랐다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칼에 찔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 피가……. 상궁은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감히 중전의 말에 의심을 하는 것이냐 하는 주 상궁의 삼엄한 눈초리 때문이었다.

“이 일은 묻어 두게. 약재를 발랐으니 상처는 금세 아물 것이네.”

주 상궁이 따라 나와 대군의 상처에 바를 약재를 건네주었다. 미심쩍은 내색을 거두지 못하는 상궁에게 한 번 더 입단속을 시켰다.

“행여 대군마마의 상처가 문제가 되면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보모상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 죄를 물어 매를 맞고 궐 밖으로 쫓겨 나갈 사람은 보모상궁이라는 뜻이다.

“명심 또 명심하게.”

“주 상궁마마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날이 많이 차갑습니다. 며칠 대군마마를 침전에서 쉬게 하면서 제가 낮이고 밤이고 꼭 붙어 있겠습니다.”

다른 이의 눈에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확답을 듣고서 주 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마마께서 보모상궁에 대해 믿음이 크시네. 대군을 잘 돌보아 주어 늘 고맙다고도 하신다네.”

주 상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모상궁의 마음을 달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병풍 뒤에서, 조용히 인영이 빠져나왔다. 그림자처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여인이었다. 중전이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인은 거침없이 중전의 보료로 올라섰다. 서안 아래에 두었던 명주 천을 펼치자, 손 두어 마디 길이로 잘린 머리칼과, 스무 개의 자그마한 손톱 발톱 조각이 있었다. 명주 천을 단단히 접어 주머니에 넣고서, 여자가 손을 벌렸다. 얼이 반쯤 빠진 중전이 한쪽으로 치워 두었던 옷자락을 집어 여자에게 건넸다. 옷을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장면이 떠올라 중전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약에 취한 아이를 중전이 붙잡았다. 예리한 단도가 손가락을 그어 내렸다. 대군이 깨어 울고 버둥거리기 시작했지만 중전은 눈을 가리고 말했다.

‘대군, 뒤꽂이를 가지고 놀더니…… 손이 찔렸구나. 이제 금방 괜찮아질 것이니, 조금만, 조금만…….’

그 조금이 조금이 아니었다. 자그마한 손가락에서 피를 짜낼 때마다 대군은 자지러지게 울었다. 중전의 애간장이 녹아내리고 목에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만, 이제 그만!’

못 견디고 중전이 비명을 질러 댔다. 여자는 그때에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맨질거리는 얼굴에서 사람의 체온이란 느낄 수 없었다. 붉은 피가 황금빛 흉배에 점점이 튀어 있는 자적포를 접는 지금도, 그러하였다.

“용의 기운을 얻었으니, 이제 거사만 치르면 됩니다.”

여자의 말에 중전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혹여 잘못되면 내 너의 혀부터 자르고 사지를 찢을 것이다.”

여자가 칼로 죽 그어 낸 듯이 입 끝을 올리고 웃었다.

“그러기 전에 쇤네는 이미 죽었을 겝니다. 미천한 몸뚱이가 용을 치려다 되튕겨 온 흑주술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대군은! 우리 대군은!”

중전의 물음에 여인은 비릿한 웃음만 남기고서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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