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章
화락지다소花落知多少
세자의 서연장으로 은은한 햇살이 들이치고 있다. 햇빛이 만드는 길 위로 먼지가 한가로이 부유한다. 정면 중심에 광안이 앉아 햇빛의 길을, 부유하는 먼지를 바라보았다. 양쪽으로 늘어앉은 서연관들이 돌아가며 이마에 핏대를 붉혔다. 그들의 목소리가 답 없는 메아리처럼 빙빙 허공을 돌았다. 세자는 고개를 반쯤 옆으로 기울여 틀고서 비스듬히 시선을 내린 채 미동도 없다. 미미하게 치켜 올랐다 내리는 입술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잠이 들었나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누구에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철저하게 홀로 분리되어 있다. 의도적 무시라 분개할 수도 없다. 다만 한심하고 지루할 뿐이다라고 항변하는 태도였다.
아슬아슬한 경계.
광안은 그 줄 위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느슨한 권태과 아찔한 방만이 수려한 얼굴에 여과 없이 드러났다. 충성을 바칠 수 없는 모습이지만, 도리어 겁을 집어먹게 하는 위압감은 무게를 더했다. 광안이 손이라도 올릴라 치면, 목청을 높이던 서연관이 뚝 말을 멈추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검지로 느른하게 제 이마를 쓸었다가 내리는 동안, 침묵은 이어졌다. 팽팽한 기 싸움이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서연은 늘 그런 식이었다.
오늘 세자의 서연은 어전회의인 상참에서 다루었던 호남과 경상 지방의 세수에 대한 논의와, 무도함을 품고 있음이 의심되는 지방 민심에 대한 경계가 주제로 이어졌다. 대대로 역심과 민란을 경계하지 않은 왕이 없었다지만, 부왕은 유달리 지방의 민란에 예민하게 굴었다. 그 저변에는 천여 명의 목숨을 잃게 한 기축옥사가 있다.
왜란이 발발하기 삼 년 전 발생한 정여립의 난, 기축옥사는 아직도 부왕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건으로, 부왕에게 깊은 불안과 불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정여립은 본래 촉망받던 젊은 사림이었지만, 서인에서 동인파로 옮겨 가면서 불거진 잡음으로 조정에서 물러나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대동계’라는 이름하에 신분의 귀천 없이 사람들을 모았는데 명망 높은 지방 유림이나 유지부터 궁술에 자신이 있던 천민까지, 그 세력은 날로 확대되었다. 매달 활쏘기 시합으로 궁술을 연마하던 자들은 왜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정여립이 병권을 장악하려는 역심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들어오고, “목자(木子, 李)가 멸망하고 전읍(奠邑, 鄭)이 흥기할 것”이라는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여 민심을 선동한다는 고변이 이어졌다. 천여 명의 목숨을 앗은 기축옥사의 시작이었다. 동인 세력의 몰살, 억울한 죽음도 수없이 포함되었다.
금일 상참에서는 호남과 경상 지방의 공납과 세수가 줄어듦에 대한 보고에 더하여 그 돈을 빼돌려 은밀히 역심의 배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혹이 더해졌다. 전란 이후 유린당하던 국토를 구하기 위해 일어섰던 의병장 중 김덕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역모와 민란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맞았다. 부왕의 불안과 불신을 자극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자는 유태경이 이끄는 소북파 유당이었다. 광안의 지지 세력인 대북파의 잔존 세력이 남아 있는 경상 지역, 남명 조식을 따르는 유림들을 염두에 둔 공격이었다.
숨죽이고, 몸을 낮추고, 속을 드러내지 않으며 유당의 공격도 비웃음도 무던히 넘기던 광안에게 오늘의 서연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기축년에 있었던 정여립의 대동계를 끄집어내며 유당파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기축옥사와 대동계는 부왕과는 다른 의미로 광안의 상흔과 연결된 단어였다. 오늘따라 유달리 파르라니 질려 가는 광안의 안색을 살피는 강선의 얼굴이 초조했다. 지게문 밖에서 대기하는 남휼 역시 바싹 긴장한 상태였다. 하필 대동계라니. 남휼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영상 유태경은 성상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적민의 뿌리를 뽑고 도당의 무리를 근절시켜야 함에도 오히려 이를 묵과하고 부추기는 세력이 있음에 통탄을 금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유태경의 기나긴 설교가 이어지고 광안은 ‘지당하신 말씀이오.’라는 무력한 답을 쉽사리 뱉어 내지 못했다. 혀끝으로 밀어내려 했던 말이 혀끝에 맺혀 입천장에서 뱅뱅 돌기만 하였다.
“기축년 정여립의 무리가 품었던 극악무도한 역모는 초장에 그 싹을 도려 내지 못하여 긴 시간 국사를 어지럽혔고, 대동이니 천하공물이니 하는 말을 퍼트리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하였습니다. 하여 이번 경상우도의 움직임은…….”
유태경의 말을 끊으며 광안이 물었다.
“영상, 대동大同이 무엇이오? 천하공물天下公物은 또 무엇이오?”
광안의 뜻밖의 물음이었다. 흠칫했지만, 밀릴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영상은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답했다.
“감히 역심을 담은 말이지요.”
광안이 씁쓸히 웃었다.
“크게 한 가지, 혹은 다 같이 크게 모인다, 라는 대동이 어찌하여 역심이오. 또한, 천하공물은 맹자의 말씀이 아니오.”
서연관들이 일시에 광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얼굴마다 두려움과 경악이 떠올랐다.
‘천하공물, 천하는 모든 이의 것이다.’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하나, 맹자의 말씀을 인용하는 광안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광안은 그들 하나하나와 싸늘하게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백성들을 기쁘게 복종시키고 어려움을 벗어나게 하면 백성들이 죽음을 잊는다 하였다. 역易에서 나온 말이오. 아무리 사나운 적이라도 오르지 못하는 험한 산세, 천험天險이 있소. 기뻐 복종하는 백성이야말로 천험이오. 바로 그들이 지난 전란을 앞장서 버텨 내 왔음을 잊었는가!”
“저하, 지난 전란은 백성의 힘이 아니라 명의 구원이었습니다. 저하야말로 명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으시면 도리에 어긋나는 줄로 아룁니다.”
“영상!”
광안이 서안을 치며 일어섰다. 일시에 서연장은 얼어붙은 듯 침묵하였다. 광안의 검은 눈빛이 공간을 지배하였다. 서연장에서 광안은 늘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불면이 지속된 날이면 나른하게 처지는 몸을 반쯤 기울여 앉아서, 서연관들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고 시간을 죽였다. 무엇을 떠들든 어떤 말로 속을 헤집든 제대로 된 대꾸 한마디 하지 않고서 싸늘하게 식은 미소만 간간이 보일 따름이었다. 이토록 뜨거운 목소리로 서연장을 뒤흔든 적이 없었다. 광안이 치솟는 무언가를 애써 삼키려는 듯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영상 앞에 선 광안이 낮고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모양이 곧 이루어짐이라 하였다. 한 번 이루어진 모양은 변하기 어려우므로 무릇 군자는 그에 심력을 다하여야 한다 하였다. 어디에 나온 말이오?”
영상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다른 서연관들을 둘러보았다. 눈치를 보던 누군가가 뒤에서 말하였다.
“예기이옵니다.”
“그렇소.”
광안이 되물었다.
“하면, 정려무고貞厲無咎, 곧고 날카로운 마음을 지녀 허물이 없게 하라는 역에 나온 말도 기억하는가.”
“그러하옵니다.”
“그대들의 마음을 묻고 싶소. 한 번 모양이 정해진 마음이 곧고 날카로운가? 이미 비틀리게 이루어진 모양의 마음으로 민심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닌가! 전란 이후 신음하는 백성을 다독이고 그 사정을 헤아리는 보민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어찌하여 그릇된 마음으로만 들여다보는가!”
광안이 저절로 쥐어진 주먹을 풀지 못하고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곤룡포가 펄럭이고 은빛 사조룡이 마치 튀어 나오기라도 할 듯이 등 뒤에서 꿈틀거렸다. 돌아다보는 광안의 얼굴은 침착했다.
“방납의 폐해는 이미 수차례 상소와 차자로 올려진 바, 그 대안은 고민하고 있소?”
방납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공납을 중개인들이 대납해 주는 변형된 형태로, 지방 관아나 조정의 실력자들과 연결된 중개인들이 몇 배의 폭리를 취하면서 가난한 백성에게 몇 갑절의 부담과 시련을 주고 있었다.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방납의 폭리는 유태경과 중전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 유당파 실세 대신들과 관리들의 축재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바였다. 광안의 입에서 나오는 방납의 폐해라는 말에 유태경을 비롯한 유당파 대신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납과 세금에 허리가 꺾이는 백성의 고통을 먼저 살피라. 그들이 열복하게 만들면, 안으로는 무도한 민란의 싹을 말리고 밖으로는 적을 막는 천험이 될 것이다. 이는 그대들이 주장하는 사서삼경에서 말하는 바이며, 백성을 아끼는 부왕의 마음이오. 성심을 어지럽히지 마시오.”
광안이 자리에 앉으며 명했다.
“모두 물러가시오. 서연을 파하오.”
급하게 서책을 챙기는 소리가 어지러이 울렸다. 눈을 감은 광안이 가빠지는 호흡을 애써 가라앉혔다. 가슴이 불로 달궈지는 듯 고통스럽다.
‘세자. 이균의 아들, 세자.’
부왕의 예전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남자의 눈이 불화살처럼 심장에 박혀들었다. 검은 두루마기, 검은 갓,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려 오로지 눈만 보이는 사내였다. 시뻘건 숯이 광안의 몸을 지졌다. 고통으로 혼절하는 광안을 내려다보며 사내가 말했다.
‘이균의 아들로 태어난 네가 불쌍할까, 정여립의 아들로 태어난 내가 불쌍할까.’
여립……이라면 몇 해 전 벌어졌던 기축옥사의 정여립. 광안은 멀어지는 의식의 끝에 잔혹했던 국문을 떠올렸다.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전라의 사림을 몰살하다시피 한 피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내 형을 친국하였지, 네 아비가.’
턱을 비틀어 쥐며 사내가 말했다. 다시 가슴이 지져졌다. 피비린내와 살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였다. 주먹을 쥐어 살을 파고든 손톱 때문에 피가 흘렀다. 목이 쉬어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악, 거칠게 비명을 지르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사내가 비웃었다.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는 세자 따위.’
광안은 쓰러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정여립의 장자, 옥남이 친국을 견디다 못해 길삼봉이라는 자를 인정했고 길삼봉을 찾을 길 없던 네 아비는 덕망 높은 최영경을 끌어다 삼봉이라 부르며 멸문지화를 했다.’
‘하여, 나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죽이겠다가 목표더냐. 하긴 고작, 정여립의 자식이니…….’
촤악, 사내의 손에 얼굴이 돌아갔다. 몸은 어떻게 만들어도 얼굴만은 건드리지 않았었다. 광안의 터진 입술을 보며 사내가 움칫 손을 떨었다.
‘나는 광안이다. 부왕의 아들이지만, 부왕은 아니다.’
‘같은 자들.’
‘나는, 여기에 있다. 의병장의 역모를 의심하는 부왕을 달래며 이 지역으로 은밀히 왔다. 초라한 규모의 호위를 이끌고 변복으로 움직인 까닭이다. 부왕 역시, 나를 믿어 보내셨으니 함부로 휘둘려 역모죄를 추국하지 않음이 증명된 바 아니냐.’
파하핫, 남자의 두건이 입김에 날릴 만큼 커다란 비웃음이 터졌다.
‘부왕의 의심? 함부로 휘둘림이 없이, 그러하다. 스스로 의심하고 경계하고 스스로 제거하니.’
‘무슨 말이냐…….’
몸 전체가 열 기운으로 뜨거웠다. 기진하여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 사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젊은 신하들이 군국의 기무를 세자에게 넘기라 청하여 부왕이 심기가 어지러웠다. 뒤이어 지방 유생들이 전위를 하라는 상소를 올렸을 때, 부왕은 참담한 마음으로 선위를 하겠다 하였다. 이후로 광안은 몇 날 며칠을 끼니를 거르고 뜰 앞에 엎드려 명을 거두시라 사죄해야 했다. 전국을 돌며 쇠하였던 몸이 버틸 수 없어 자리에 일어서다 쓰러지고 걸음을 옮기기도 힘겨웠지만 세자는 뜰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짓찧었다. 선위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자의 석고대죄를 받아들이며 선위의 명을 거두기를 이미 수차례였다.
‘도적떼 무리가 정확하게 길목을 지키고 있었어. 물론, 세자임은 알 수가 없었다. 돈을 받고서 왜에게 넘기든, 나에게 넘기든 너는 그저 약간의 푼돈을 쥐어다 주는 포로였을 뿐이지. 내내 이상하지 않더냐?’
찬물을 수차례 맞고 눈을 뜨는 광안에게 사내가 종이 한 장을 들이 밀었다.
‘수결이 된 봉서다. 임금을 호종하던 무리 중 하나가 너보다 앞서 이곳 전라로 내려왔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광안은 불길한 예감을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아바마마가 그럴 리는, 그러실 리는…….
‘너는 부왕이 세자로 두기에 몹시 거슬리는 자식이었어. 물론, 내게 올 것이란 계산은 못했겠지만……. 왜에 포로로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신당하는 세자는 용도를 다했으니 폐하고, 명의 뒤에 숨어서, 아끼는 신성군을 새로이 세자로 앉힐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리 없다.’
광안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다녀오거라, 명하는 부왕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인빈의 소생 신성군을 향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다만, 한 번이라도 그 웃음을 가지고 싶었다. 어미의 품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애정과 관심이 인빈에게 넘어가고 신성군에게 쏟아질 때, 광안은 아비의 웃음을 너머다 보며 부모의 따스한 품을 상상했다. 분조를 이끌고 의주에서 다시 부왕을 뵈었을 때, 손을 잡아 주었다. 위로하는 한마디에 그간 겪었던 고통이 녹아 사라지고, 뜨거운 눈물이 가슴을 적셨다. 부왕을 위해 팔을 내놓으라면 팔을, 목을 내놓으라면 목을 내놓을 수도 있었다.
결국 부왕이, 버렸다. 그토록 애쓰고 노력했건만 부왕에게 자신은 쓰다 버리는 불쏘시개만 한 존재였던가. 항상 춥고 외로웠다. 하지만 걸음을 비뚤비뚤 걷던 어린 날부터 단 한 번도 사랑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인정해 달라 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왕자군으로 살았고 전란통에 위험을 무릅쓸 세자를 하라니 감읍하여 하였고, 분조를 이끌라니 이끌었고, 몸을 바치라니 바쳤다. 국본이기에 전란에 바스라진 국토와 백성을 끌어안았다. 성심이 결국 아비에게 버림받을 일이었다. 처음부터 쓰고 버릴 셈이었다. 조금 더 멍청하게 굴었더라면, 버리지 않았을까. 조금 더 사랑스럽게 굴었다면 아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신성군에게 보이는 그 웃음을 보여 주셨을까.
‘왕은 네가 하찮게 굴복하여 철저하게 망가지길 원한다. 재생 불능인 세자. 필요한 것은 폐하여도 좋을 명분.’
불에 덴 가슴에서 더 큰 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해일 같은 불길이 전신을 태우고 뇌수를 태우고 광안은 오로지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찬 눈알 두 개만 남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것만 같았다. 지나간 시절들이 짤막짤막 펼쳐지다 이내 불길에 휩싸였다. 발작을 일으키는 몸이 뒤틀렸다. 몸속에서 시커먼 괴물이 내장을 뚫고 튀어나와 광안의 몸을 다시 감았다. 불붙은 가슴에 다시 불을 쏘고, 고통으로 뒤트는 광안을 보며 기괴하게 웃는다. 눈이 뒤집히고 숨이 막힌다. 부릅뜬 눈에 잡힌 괴물의 얼굴은, 부왕이다. 귀를 찢는 비명이 제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제 버림받은 아들이니, 어찌할 텐가.’
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살아서 부왕을 도륙하고 싶었다. 피가 터진 눈으로 광안이 사내를 보았다. 실낱같은 이성을 붙잡고, 발작적으로 떨리는 몸을 붙잡으며 말했다.
‘죽여라. 부왕의 뜻이 그러하다면, 받겠다.’
사내의 눈이 벌겋게 타올랐다. 광안의 목을 움켜쥐었다.
‘네가 무슨, 조선의 희망이야!’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고통에 짓눌린 신음이 목구멍을 헤집었다. 이곳은, 서연장이다. 전란은 끝났고 그는 죽었다. 그의 아비 정여립처럼, 칼자루를 바닥에 꽂고 엎어져 검으로 제 목을 뚫어 죽었다.
‘세자, 모든 이를 아우르는 대동이 죄이던가. 서인으로부터 변절자라 손가락질받았지만, 십만양병을 하라 했던 율곡의 뜻을 받았다. 왜구를 대비해 천민에게도 활을 잡힌 일이 역모였던가. 결국 살아남은 대동계가 의병이 되었다.’
피를 울컥 울컥 쏟아 내며 사내가 말하였다. 그 말을 끝으로 입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저하, 저하!’
쓰러지는 광안을 안고 누군가가 불타오르는 산채를 빠르게 벗어났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휼, 휼……. 휼아.’
신음하는 광안을 안고 남휼이 말을 몰았다. 그 품에서 세자는 혼절하여 일주일을 앓았다. 관련자들은 도적떼부터 정여립 차남의 측근까지 모조리 죽었다. 정여립의 아들이 연관되었음은 오로지 남휼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여 그가 세자를 손에 넣게 되었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기억을 잃은 세자로부터 들을 수 없었다.
광안은 눈을 감고 신음을 삼키고, 뻐근하게 뛰어 대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십 년간 묻어 버린 상처는 불안과 의심, 억울함과 원망을 먹이 삼아 몸집을 불리며 결국 괴물이 되었다. 그 일을 입으로 꺼낸 것도, 아니 생생히 떠올린 것조차 십 년 만이다.
‘꼭, 꽃…… 같아요.’
여자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가슴의 통증이 줄어들었다. 천천히 일어나 서연장을 빠져나갔다. 근심으로 얼굴이 우그러진 휼을 보며 세자가 웃었다.
“못생겼다.”
“저하.”
“괜찮으니.”
“그래도…….”
“발작하지 않는다.”
광안이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휼이 그제야 우그러진 얼굴을 폈다.
“해가 기울면, 바람이나 쐬자.”
광안의 말을 알고 있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흑마를 몰고 서총대를 몇 번이고 돌았다. 내금위와 익위사 군사들의 훈련장에서 말을 몰면서 활을 쏘았다. 그러고도 꽉 막힌 울화가 풀리지 않는 밤이면 남휼과 한 사람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검을 부딪혔다.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광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춘정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걸음이 가벼워진다. 은우가 그곳에 있다. 세자의 서책을 관리하는 지밀의 일을 맡겼다. 생산을 못하는 몸이니 후궁의 교지는 빈을 맞이한 후에도 받을 수 없으며, 이대로 궁녀의 일을 하며 살다가 사십이 되기 전 상궁이 되어 개구리첩지를 머리에 올릴 것이라 하였다.
‘대체 그리도 상궁이 되고픈 이유가 무엇이냐. 아니, 너의 인생 최종 목표가 상궁이더냐.’
광안이 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은우가 머뭇거리다가 말하였다.
‘아뢰오기 민망하온데.’
‘무엇이냐.’
‘기왕이면 지밀상궁이 되고 싶습니다. 제조상궁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너무 무겁고 어렵고 힘든 자리입니다.’
‘굳이 지밀상궁이 되고픈 이유는 무엇이냐.’
‘그것이…….’
은우가 얼굴이 붉어졌다. 재차 독촉하자 겨우 말하였다.
‘어여머리에 떨잠이 아름다워서.’
‘무어라, 떨잠?’
‘…….’
곤혹스러워하는 은우의 얼굴이 떠오르자 광안의 입술이 벌어지며 웃음이 흘러나왔다. 세자를 따르던 남휼과 강선이 놀라서 서로 눈을 맞추었다.
보춘정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책을 꽂던 은우가 돌아다보았다. 살구꽃 같은 얼굴로 세상 걱정이라고는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하.”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으려는 은우에게 광안이 성큼 다가섰다. 팔을 벌려 반쯤 바닥에 닿는 몸을 일으키고 그대로 폭 끌어안았다. 이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진다. 환각에 짓눌리는 심장이 제대로 뛴다. 강선이 헛기침을 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코를 묻고 있자니, 꽃 향이 났다. 말리화라 그랬지…….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자 홍옥을 물린 은비녀가 만져졌다. 비녀를 꽂고 있는 은우가 맘에 들어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었다. 청색 치맛자락을 슬며시 잡으며 광안이 물었다.
“명주로 지은 것이냐.”
“네, 저하.”
은우가 활짝 웃었다.
퇴선간에서 데리고 왔던 그날 밤, 은우를 품고서 광안이 말했다.
‘비녀를 내리겠다.’
‘저하.’
‘다시는 누구에게도 밟히지 마라. 내 여인이다.’
‘네, 저하.’
‘어느 사내 눈에도 띄지 말라.’
‘저하, 소인 그럴 일은 죽어도 없습니다.’
바보처럼 입이 벌어지던 조인호의 표정이 떠오른다. 눈매가 저절로 찡그려지지만 광안은 내색하지 않았다.
‘제일 좋은 명주로 가장 아름답게 나인 옷을 지으라 하겠다.’
‘아니옵니다.’
‘노리개도, 장신구도, 가락지도, 금은붙이도 내리겠다. 밀과도 강정도, 검은 엿도 주마.’
중전의 얕은꾀에 넘어가 은우를 의심했었다. 아이처럼 당과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쥐여 준 알량한 검은 엿 따위, 수백 개라도 하사할 것이다. 은우가 웃음을 깨물었다.
‘만족하느냐.’
‘아니요, 저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은우가 광안의 땀에 젖은 이마를 가만히 눌렀다.
‘아주 가끔씩이라도 보여 주소서.’
‘매일 보게 하겠다.’
그럴 수는 없을 것이라는 듯 은우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안의 제안을 냉정하게 거절한 그날, 붙잡고 묻고 싶었다. 은우 너는 마지못해 부름을 받고 들어와 잠자리 수발을 들고, 죽기 싫어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약에 취한 나를 그저 받아야 하니 받은 것이냐 묻고 싶었다. 차라리 이용을 하겠다 매달리고 천하게 굴어라 하고 싶었다.
‘나는, 네가 매일매일 괘씸하였다. 몇 번이고 끌고 와 벌을 내리고 싶었지.’
‘송구하옵니다.’
‘거짓.’
‘아니옵니다.’
‘후궁도 싫다. 상궁도 싫다. 처소도 싫다. 내 여인이 되느니 차라리 궁 밖으로 내치라 하였느니.’
‘저하, 소인의 몸이…….’
‘듣기 싫다.’
입을 막고서, 뜨거운 입술 사이로 보드라운 살을 물고 놓기를 반복했다. 젖은 입술끼리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조금씩 안고 있는 몸이 뜨거워졌다.
‘저하, 소인 다른 금붙이는 필요 없습니다. 다만 비녀에…….’
‘응?’
‘은비녀에 붉은 홍옥을 물려 주옵소서.’
‘그러마.’
은우의 손가락이 광안의 붉게 젖은 입술을 더듬었다.
‘볼 때마다 저하의 입술을, 가진 듯할 것입니다.’
그 손가락을 깨물자 아, 은우가 아픔에 소리를 냈다.
‘흔들지 말라.’
‘흔들리실 줄 몰랐습니다.’
부드럽게 입속을 움직이는 손가락 때문에 이번에는 광안이 신음을 삼켰다.
원대로 홍옥 물린 은비녀를 내렸다. 은우를 세자의 서책 관리 지밀로 옮기면서 매일 보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또한 매일 비녀를 보는 대신 입술을 보게 하였다.
“밀과와 강정은, 그리고 검은 엿은 잘 받았느냐.”
“네, 저하. 처소 나인들에게도 주고, 동궁전 모든 궁녀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다들 얼마나 좋아하던지.”
“동궁전 모든 궁녀?”
광안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네, 저하.”
“설마 너를 괴롭힌 그 아이들도 포함된 말이냐.”
“아…….”
은우가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 넷은, 아니 그 외에도 따돌림에 동조하던 아이들이 아직도 동궁전에 붙어 있느냐. 아직 이 궐내에 있냐 말이다.”
“저하, 넷 중 한 명은 남았습니다. 큰상궁마마님이 정옥 나인과 최 나인은 궐 밖으로 보내었고, 다른 한 명은 중궁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돌아간 궁녀나 남아 있는 궁녀나 다른 동궁전 어떤 궁녀와도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없었던 듯 흐르길 바랍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
“이미 저하께서 꾸중하셨고, 마마님께서 합당한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이에게도 책임을 물으시려 하기에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제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 주십사, 저하께도 부탁드리옵니다. 서 상궁마마님께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대로 접어 주소서.”
광안이 은우의 손을 뿌리치고 큰 걸음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화를 삭이지 못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펄럭펄럭 울렸다. 은우가 옆으로 가만히 다가와 섰다.
“저하.”
“그들은 나를 능멸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얕은 시기심으로 저를 조금 괴롭혔을 뿐입니다.”
광안이 고개를 들어 은우를 바라보았다.
“벌이 가혹하여 지나치게 두려워하면 작은 죄를 지은 이도 그 죄를 덮으려 더 큰 거짓말을 합니다. 어릴 때부터 궁에서 그러한 일은 너무나 많이 봐 왔습니다. 흘려보낼 것은 흘려보내야 제가 다른 곳으로 떠밀리지 않고 빨리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광안의 손등 위에 손을 올리고서 은우가 나긋나긋 말하였다.
*
영상 유태경이 중궁전을 방문한 것은 서연장의 소동이 있고 하루가 지난 날이었다. 중전이 웃음을 띠고 아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영리한 아이였다. 갸름한 턱 선에 반달 같은 눈이 예쁜 소녀였던 시절에도 가끔 그 눈동자에 비치는 짙은 야망에 유태경은 아쉬운 한숨을 쉬기도 하였다. 부인이 까닭을 물으면 ‘아들로 태어났다면 크게 한자리를 할 터인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자가 방납을 말하였다지요?”
“그러하옵니다, 마마.”
“선전포고인가요?”
“그게,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찌하여 그런 것도 모르냐는 질책과 짜증스러움이 중전의 한숨에서 묻어났다. 영상이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할 때 주 상궁이 밖에서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대군마마 드시옵니다.”
“어서 들라 하세요.”
중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직 세 돌이 되지 않은 대군이 제법 야무진 걸음걸이로 들어섰다. 어마마마, 부르며 인사를 여쭙는 대군을 향해 중전이 팔을 벌렸다.
“대군, 이리 오세요. 어서.”
중전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대군을 향해 몸을 기울이자, 급히 달려오던 대군이 옷자락에 걸려 앞으로 그만 콰당 넘어지고 말았다.
“저런, 저런!”
영상이 펄쩍 뛰듯이 놀라며 대군에게로 다가갔다. 중전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는 대군을 안고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서둘러 들어온 보모상궁이 대군을 안아 다독였다.
“괜찮은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중전이 울상이 되어 보모상궁에게 물었다.
“마마, 심려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잘 살펴보거라. 조금이라도 대군에게 상처가 있다면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
영상이 독촉하자 보모상궁의 얼굴이 긴장으로 붉어졌다.
“어떤가? 괜찮은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중전을 향해 대군이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마마마.”
코를 훌쩍이면서도 체통을 지키려는 갸륵한 모습이었다. 중전과 영상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대군마마, 어쩜 이리도 영특하고 의젓하시옵니까. 그제는 상궁이 읽어 주는 동몽선습을 들으시고 따라 외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훌륭한 대군아기씨는 모두 처음 들어 본다며 감탄하였습니다.”
과장이 뻔하지만, 주 상궁과 보모상궁의 칭찬도 끝나지 않았다. 대군을 걸려 넘어지게 한 옷은 붉은빛 포였다. 얼핏 보면 자적용포처럼 보이나, 보에 사조룡을 수놓지는 않았다. 차마 세자가 입는 용포를 그대로 입히지는 못하였지만, 대군은 이미 영상과 중전의 마음에 차고 넘치는 세자였다. 타고난 용모나 품위까지 주군의 자질이 충분하였다. 아직은 어리지만 주상이 몇 년만 더 버틴다면 대군이 세자가 되어 다음 세대 용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영특한 대군마마님께 보양청에서 사부와 보양관을 내리신다면 분명히…….”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가!”
주 상궁이 중전의 호통에 입을 다물었다. 보양청과 사부, 보양관은 모두 어린 세자를 위해 두는 교육기관과 스승이었다. 일개 대군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아니었다. 주 상궁은 즉시 사죄하며 머리를 조아렸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상전의 복심을 읽는 상궁에 대해 중전의 신뢰는 커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중전이 주 상궁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아비를 바라보았다.
“방납을 서연에서 올렸다는 이야기는, 유당을 향해 조준하고 있음을 알리는 말입니다. 영상께서도 각별히 조심 또 조심하십시오. 물밑에서 상소를 획책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오로지, 낮이나 밤이나 주상 전하의 건강이 염려가 될 뿐입니다.”
“네. 뜻을 받들어 명심하겠습니다, 중전마마.”
유태경을 단속하고서 중전이 주 상궁을 향해 하명했다.
“오늘 저녁입니다. 내 신경 써서 모시는 분이니 준비에 실수가 없도록 하시게.”
주 상궁이 중전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중전 사가의 모친, 주 상궁, 중전 사이에 오가는 밀담이 있었다. 욕심이 많고 어리숙한 중전의 모친은 중전보다 더 성격이 급하고 불안이 큰 사람이었다. 부친의 음험함과 모친의 조급증이 언제나 중전의 욕망에 불을 당기고 풀무질을 더했다.
*
궁궐에 검은 어둠이 내리고도 한참이 지난 시각이었다. 궐을 방문한 중전의 모친 뒤로 상궁 두 명이 따랐다. 한 명은 주 상궁이었다. 주 상궁을 따르는 또 다른 상궁의 걸음은 편안했지만 평범하지 않았다. 꼭 바닥에 발이 붙지 않는 듯 가벼이 움직였다. 중간 중간 멈춰 서서 허리를 펴고서 마치 공기의 결을 만져 보듯이 손을 내밀기도 하였다.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는 눈매는 날카로웠다. 마침내 세 사람은 중전의 침전에 다다랐다. 침전 보료에 앉아 있던 중전이 반가이 인사를 건네었다.
“어머니,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중전의 옆에는 보모상궁이 깊이 잠에 빠져든 대군을 안고 있었다. 영상 부인이 보모상궁에게 다가갔다.
“우리 대군마마, 어쩜 이리도 잘생기셨을까. 어쩜 이리도 인물이 훤하실까?”
영상 부인은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살포시 손을 잡아 보기도 하며 대군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어머니.”
중전이 모친을 향해 웃었다.
“무슨 말이 필요 있겠습니까. 이리도 귀하신 대군마마이신데요. 주상 전하께오서 얼마나 귀애하실지 안 보아도 눈에 선합니다.”
“주상께오서 높이 들어 어르시고 품에 앉히시니, 감히 그 자리에 안기어 저하의 용안을 내려다보는 이는 대군뿐이지요.”
중전의 목소리에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동시에 가슴에는 안타까움과 질투심, 증오심이 뭉클뭉클 번져 나갔다. 광안만 없다면! 서자에 차자, 천한 어미를 둔 광안만 없다면……! 주 상궁이 중전의 눈치를 살피며 여태 뒤에 서 있던 상궁에게 눈짓하였다.
“이리로 오세요.”
중전의 말이 떨어지자 상궁은 특유의 걸음걸이로 사뿐사뿐 다가가 대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깊이 잠들었던 대군이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뒤챘다. 보모상궁이 나지막이 어르는 소리를 내며 토닥이자 상궁의 고름을 꼭 붙잡고 얼굴을 숨기듯 가슴팍에 붙였다. 주 상궁이 흠, 헛기침을 하는지라 보모상궁은 억지로 몸을 떼어 대군의 얼굴을 상궁 가까이로 보였다. 으아앙, 대군이 갑자기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쉿!”
중전이 검지를 입에 가져다대자 보모상궁이 당황하여 대군을 꼭 끌어안았다. 상궁의 시선에서 대군을 보호하려는 듯이 보모상궁이 등을 보이며 돌아앉아 대군을 어르기 시작했다.
길고 쭉 찢어진 눈매에 검은 눈동자가 유달리 작은 눈이었다. 대군아기씨를 들여다보려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모상궁은 심장 끄트머리부터 써늘한 기운을 느꼈다. 금세 등줄기와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기분이었다. 묘하게도 몸 전체 피가 말라붙듯이 버석버석해지면서도 동시에 축축한 냉기가 느껴졌다. 대군이 울음을 터뜨려 원망 섞인 마음으로 올려보다가 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였다. 보모상궁은 하마터면 대군아기씨를 손에서 놓칠 뻔하였다. 사지에 힘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등을 휘감고 팔을 휘감고 다리를 묶는 것만 같았다.
등을 보이고 돌아앉은 지금도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대군아기씨가 겨우 울음이 잦아들자, 주 상궁이 이만 대군마마를 모시고 돌아가라는 지시를 하였다. 아직도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팔다리에 힘을 주며 간신히 일어나서 도망치듯 침전을 빠져나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침전 밖에는 오늘따라 번을 서는 지밀나인이 한 명밖에 없었다.
“마마님, 오랜만입니다.”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고 누군지 기억했다. 동궁전에서 세자 저하의 승은을 입은 궁녀에게 고약을 떨다가 쫓겨난 나인이었다.
“정옥 나인?”
“네, 오늘 저녁부터 중궁전 지밀로 왔습니다. 중전마마께오서 몇 번이나 다시 들어오라 명하셨습니다.”
보모상궁은 제대로 인사를 다 마무리 짓지도 않고서 급히 걸음을 재촉하였다.
대군이 나간 후 중전이 흠, 흠, 목소리를 짐짓 가다듬고는 상궁을 향해 물었다.
“주상은 어떠신가, 요즘 무척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다네. 이대로라면 십 년은 거뜬하실 듯싶어.”
중전의 물음에 상궁은 고개를 숙인 채로 말하였다.
“오늘은 쇤네를 부르신 뜻 한 가지만 받고 왔습니다.”
중전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손을 까닥 움직이자, 주 상궁이 준비했던 종이를 펼쳤다. 중전에게서 우측 방향으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상궁이 앞에 놓인 종이 세 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두 장에는 사주 여덟 자가 각각 적혀 있고, 한 장은 세자의 초상화였다. 한참을 집중하여 보던 상궁이 다물린 입을 이윽고 열었다. 마치 선으로 이루어진 듯한 얇은 입술 사이로 후후훗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무엄하네. 어느 안전이라고.”
주 상궁이 엄히 꾸짖자, 휙 올려다보는 눈이 뱀의 것처럼 차갑게 빛났다.
“괜찮네, 말해 보시게.”
중전이 차분히 명하자, 상궁은 앞에 놓인 종이를 한 장씩 손끝으로 밀어 위로 올렸다. 첫 번째로 건드린 종이는 대군의 사주였다.
“성군이 될 사주이옵니다.”
중전은 입술을 깨물어 흥분을 감추었으나 영상 부인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엉덩이를 밀며 상궁 앞으로 다가갔다.
“분명하냐? 성군이 되실 분이냐.”
“아직 아기씨이지만 관상에도 용을 품고 있습니다.”
“세상에.”
중전을 돌아다보며 영상 부인이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제가 무어라 했습니까, 마마. 범상한 인물이 아니시라고. 이 어미가 강보에 싸인 대군아기씨를 보고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중전은 실룩이는 입술을 애써 끌어내리며 자못 지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성상의 피를 받고 정궁의 몸에서 난 유일한 대군이시니, 그 정도 사주는 품지 않으셨겠는가. 부득불한 경우에, 이 나라의 버팀이 되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강건한 세자가 계심을 잊지 마시게. 내 앞이라 하여 거짓으로 입 발린 소리를 해도 자네는 죄만 짓는 것일세.”
상궁이 고개를 가만히 쳐들고는 피익 겨울 산바람 같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한쪽으로만 기묘하게 올라간 입술 때문에 꼭 칼로 입 한쪽만 위로 쭉 그어 놓은 탈바가지 같은 얼굴이었다. 탈바가지에 박힌 번들거리는 뱀의 눈으로 중전을 쏘아보며 말했다.
“신이 하는 말에 입 발린 소리 따위는 없어.”
“감히…….”
무엄을 꾸짖던 주 상궁이 눈이 마주치자 주술에라도 묶인 듯 꼼짝도 못했다. 상궁으로 변복시켜 들여온 이는 하늘 아래 최고의 무녀라 불리던 적라의 신딸이었다. 전란 전 소격서가 폐지되지 않았을 때, 적라는 소격서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고서도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 국가의 기무가 은밀히 논의되었고 기우제와 같은 제를 올릴 때마다 적라가 등장하였다. 알록달록한 무녀의 옷을 입지도 않았다. 오로지 흰 소복만 입고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빛 무리를 끌고서 나비처럼 우아하게 움직였다. 적라가 나타나면, 일순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누구나 적라의 힘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적라는 그럼에도 권력의 핵심 아무와도 손을 잡지 않고 축재도 하지 않으며 일신을 돌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신의 말만 전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전란이 끝나 갈 무렵, 적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신딸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비밀처럼 떠돌았다. 흑주술을 쓰는 신딸을 통제하려 했지만 되레 강성해진 신딸에게 목숨을 잃고 신딸은 적라의 능력까지 모조리 흡수하였다 했다. 갑자기 받아들인 강한 힘과 큰 신 때문에 하반신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산골에 칩거했다는 신딸을 찾아낸 건 지난달이었다. 몸도 신력도 완전히 제 것으로 회복한 듯 신딸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기이한 걸음걸이로 마치 땅을 밟지 않고 움직이는 듯하였다.
“그럼, 대군아기씨가 정말 용상에 오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영상 부인이 흥분과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중전의 말씀을 못 들으셨습니까, 영상 부인?”
“네?”
“세자가 있다지 않습니까.”
적라의 신딸, 스스로 적라의 적을 따 적무라 이름 지었다는, 상궁복을 입은 여인이 차갑게 응수했다. 세자의 사주와 세자의 초상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용의 사주, 용의 얼굴, 주군의 상……. 성군은…….”
적무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깜박이고 다시 고개를 흔들고 또 흔들었다.
“이상하네, 모르겠어. 성군이 될지 혼군이 될지.”
적무가 손끝으로 초상화 속 광안의 눈을 두드렸다.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가느다랗게 찡그렸다.
“고작 종이에 그린 초상으로도 천한 손끝이 타들어 갑니다. 부인할 수 없는 용의 눈입니다. 천 년을 품은 용.”
“하, 하지만 방금 대군아기씨께오서…….”
영상 부인을 보며 딱하다는 듯 적무가 웃었다.
“세자는, 천민으로 태어나 천민으로 살았어도 왕이 될 얼굴,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대군 몇이 위에 더 있다 해도 모조리 잡아먹고 왕이 될 운명. 그러니, 천한 후궁 아래 보잘것없는 차자로 태어나 긴 세월 핍박을 받으면서도 아직 세자이지 않습니까. 이는 필시 세자를 감고 있는 용의 기운이 너무나 드세어…….”
중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적무가 품고 있는 말의 뜻을 제일 먼저 짐작한 자는 중전이었다. 어미로서의 본능이었다.
“네 감히 대군과 세자를 욕보이는구나!”
중전이 파르르 떨며 팔걸이를 내리쳤다.
“그 입을 찢고 혀를 뽑아도 시원치 않을 터.”
“중전 마마,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그제야 말의 뜻을 알아차린 영상 부인이 중전의 팔을 붙잡았다.
“당장 저 것을 끌어내라.”
주 상궁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적무에게 다가갔다. 꼼짝도 않고 있던 적무가 고개를 들고서, 두려움과 분노로 펄펄 뛰는 중전을 향해 말했다.
“주상을 물으셨지요. ……십 년이라 하셨습니까?”
적무가 혓바닥으로 얇은 입술을 핥아 올렸다. 길고 찢어진 눈 속에 사특한 기운이 번뜩였다.
“내일 희정당 침전 문턱을 넘지 못하십니다.”
“뭐, 뭐라!”
중전이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를 질러 댔다.
“주 상궁! 저 요망한 입에 재갈을 물려라. 당장 형틀에 매어라.”
지시만으로는 참을 수 없었는지, 중전이 주먹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씨근덕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적무의 얼굴을 힘차게 내리쳤다. 꺄악, 비명은 영상 부인과 주 상궁의 입에서만 나왔다. 적무는 휙 돌아간 얼굴을 바로 돌리고, 붉게 부풀어 오르는 뺨을 제 손바닥으로 쓰윽 쓸고는 사뿐하게 일어섰다.
“중전마마. 내일, 쇤네를 또 찾으실 겁니다. 매 값은 그때 받겠습니다.”
붙잡는 주 상궁을 적무가 살짝 뿌리쳤을 뿐인데 주 상궁은 바닥으로 벌러덩 넘어져 뒷머리를 찧었다. 영상 부인이 에고 에고, 혀 풀린 신음을 뱉고서 이마를 짚으며 스르륵 주저앉았다. 발을 굴리고 소리를 지르는 중전을 보며 주 상궁이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정옥 나인과 숨이 차도록 뛰어 쫓았지만, 적무는 흔적이 없었다.
*
밤을 꼬박 새운 중전의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몇 번이고 대전 나인을 불러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주상은 지난밤 편히 침수에 드셨고 아직 기침 전이라 하였다. 이른 아침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시는 일은 최근 들어 극히 드물었다. 어제 상참 어전회의에 참여하시어 강녕함을 보이신 일이 그리하여 더욱 기뻤었다. 평소처럼 조금 늦게까지 침수에 드실 뿐이다. 중전은 초조한 마음을 다잡고 다잡았다.
“중전 마마, 주상 전하께오서 기침하셨다 하옵니다.”
주 상궁이 홀가분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였다.
“지금 초조반을 받으십니다. 잠시 편전에 들르시어 영상대감과 독대를 하신다 하옵니다.”
중전은 가슴에 손을 올려 긴 한숨을 뿜어내었다.
“시간이 늦었다. 영상대감은 조금 더 기다시라 하고, 주상 전하께 수라를 준비하여 올리라 하라. 내 지금 대전으로 갈 터이니.”
대전으로 가는 동안 불길한 상상은 모조리 밟아 부수었다.
‘내 그년을 잡아 입을 찢고 혀를 잘라도 시원치 않겠다.’
저절로 이가 갈리고 손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희정당 차비문을 넘어 침소 앞에 도달할 무렵이었다. 대전에 심었던 나인 하나가 뛰다시피 다가왔다. 숨을 헐떡이며 주 상궁에게 귀엣말을 건네었다. 하얗게 질리는 주 상궁을 보며 중전은 무릎이 꺾이며 비틀거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에서 시작된 소름이 귓불까지 타고 올라와 온 얼굴에 소름이 끼쳤다.
“주 상궁……!”
가까스로 나인들의 팔을 움켜쥐고 허리를 편 중전 앞에 주 상궁은 맥없이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주상 전하께오서…….”
“전하…… 전하.”
중전이 넋이 빠져 중얼거렸다.
“침전 문턱을 넘으시다가 쓰러지셨다 하옵니다!”
주 상궁의 보고가 끝나기 전 중전이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풀썩 몸이 꺾이며 뒤로 넘어갔다.
잠시 혼절한 중전이 대조전 침전에서 정신을 차리고도 한참 후에야 주상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중전은 말리는 주 상궁을 뿌리치고 대전으로 다시 휘적휘적 걸어갔다.
‘주상 전하, 이리 가시면 저와 대군은 어찌하라고, 주상 전하. 부디, 부디…….’
겨울바람이 귓가를 얼릴 듯이 불어 대고 급한 걸음걸음마다 눈앞이 캄캄하게 아찔해 왔다. 흐트러진 몰골로 대전 침전 앞에 섰을 때, 대전 환관이 깊이 고개를 숙여 아뢰었다.
“중전 마마, 양평군 대감이 주상전하께 탕약을 올리고, 침의가 들어 혈을 통하는 침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무도 들이면 아니 된다 하십니다.”
“누가, 감히 누가 그런 명을 내린단 말이냐! 누가 중궁이 주상 전하를 뵈옵는 일을 막느냐.”
환관이 당황하며 다시 아뢰었다.
“수어의, 양평군 대감이 그리 여쭈었고 주상 전하께서도 그리하라 하셨사옵니다.”
“주상 전하께오서 말씀을 하시는가?”
“네, 그러하옵니다. 세자 저하도 드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세자?”
중전의 입술이 비틀렸다.
“세자는 절대 들이지 말라. 주상 전하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중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꿇어앉아 문가에서 시위하던 궁녀들과 상궁이 흠칫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세자, 세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
“희정당에 계시옵니다.”
“어디?”
중전의 눈이 휙휙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주상 전하의 병환을 근심하고 사죄하여, 몸소 용포를 벗고 불을 때지 않은 희정당 한편 냉방에 계시옵니다.”
“하!”
중전이 고개를 파득파득 저으며 대전을 나섰다. 주 상궁에게 지시했다.
“영상대감을 들라 하세요. 아니, 그 무녀를……! 아니, 대군을 봐야 합니다.”
대조전으로 향하는 중전의 걸음은 열에 들뜬 사람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
주상이 쓰러지고 이틀이 지난 후였다. 주상은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주상이 쓰러진 아침부터 찾았건만, 적무는 중전의 부름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영상의 집에서 돈 다발이 전해져도 마찬가지였다. 중전이 패물을 쏟아 넣은 명주 주머니를 보내고서야, 느릿하게 중궁전을 찾아들었다. 이미 초주검이 되어 있는 영상 부인을 보며 코웃음을 보냈다. 이틀을 굶다시피 한 중전은 간신히 허리를 곧추세우고 적무를 바라보았다.
“중전 마마, 인사드리옵니다.”
적무의 절을 받으며 중전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군이 용이라 했습니까.”
“그러하옵니다.”
“세자도 용이라 했습니까.”
적무가 답 없이 시선을 내렸다.
“적무 님, 답을 주십시오.”
“천 년을 담은 용이라 아뢰었습니다. 서툰 붓질로 그린 얼굴에 박힌 눈으로도 쇤네 손끝이 타들어 가고 심장이 녹습니다. 이번 겨울이, 세자가 품은 용의 기운이 일평생 중 가장 강성하더군요. 펄펄 살아 뛰놉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군은 어찌 됩니까. 광안이 품고 있는 용의 기운이 그토록 세다면, 우리 대군은…….”
입술이 떨려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키며 중전이 물었다.
“용 두 마리가 어찌 한 하늘을 품습니까.”
중전이 하아악, 비명 같은 숨을 내어 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리고 여린 용이 하늘을 넘겨야지요.”
써늘한 웃음이 적무의 얼굴에 걸렸다. 사색이 된 영상 부인이 적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신녀님, 신녀님, 세자 저하가 주상이 되시면…… 그래도 우리 대군아기씨 앞으로 강녕하시고. 무탈하시고…….”
옷자락을 쥔 손에 땀이 흥건히 배어 나왔다. 이마에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적무의 다문 입술에서 쯔쯔 혀 차는 소리가 울렸다. 달걀 같은 얼굴을 가만히 흔들었다.
“베지도 못할 용의 목. 수 년간 찔끔찔끔 용의 비늘만 깔짝대며 건드리고 있었으니. 성군의 상을 혼군의 상으로 흐리고, 본디 금빛이어야 할 용이 검게 타고 붉게 끓어올라…….”
적무가 말을 끊고는 고개를 저었다.
“또다시 매질을 당하기 전에 쇤네는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영상 부인의 손을 걷어 내고 몸을 펴는 적무를 이번에는 무릎걸음으로 기어 나온 중전이 붙잡았다.
“중전 마마.”
주 상궁이 황망한 사태에 역시 무릎을 꿇고 중전을 붙잡았다.
“살려 주시게. 내 아들, 대군을 살려 주시게.”
중전의 뺨이 눈물로 젖었다.
“하늘을 넘기면 되옵니다, 중전 마마.”
“말하지 않았는가. 이미 분노한 세자가 마음을 먹었다고.”
“시간을 버시지요. 용서를 구하고, 마음을 달래시고.”
중전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지난번 무과 전시에서는 세자가 검을 뽑았다 하였다. 조정의 요직을 유당파로 채운다 해도 여전히 전란에서 공을 세운 광안을 받드는 무리가 있다. 대북파가 그러하고 산림에 묻혀 있는 유생과 의병장들이 그러하다. 전시에서 기추를 시범 보이는 세자를 추앙하는 응원이 궐 밖까지 들렸다 하였다. 모든 군사와 하급 관리와 응시자 전원이 힘을 다해 세자에게 존경의 함성을 보냈다. 세자는 서연장에서 방납을 논하며 유당을 직접 겨누었다. 대놓고 조롱하던 미친 눈의 세자라는 말도 못 들은 척 넘기고, 폐위건진이라는 망극한 발언도 안 들리는 척 그 누구도 추궁하지 않았다.
이제야, 세자가 숨겨 온 발톱을 드러내는 것인가.
서연에서의 세자의 발언이 작은 파장을 일으켰고, 유당의 눈치만 보던 대북파가 술렁이며 결집하였다. 지금도 냉방에서 꼿꼿하게 앉아 주상의 병환을 사죄하며 책잡힐 거리는 하나도 만들지 않는 세자에게, 용상은 넘어갈 수밖에 없다. 대군의 나이 고작 세 살. 광안을 폐하고 중전에게 수렴청정을 권하는 영상의 말대로 하기에, 대군은 너무 어리고 광안은 치밀하고 강하다.
대군에게 입힌 자적용포를 보며 씁쓸히 웃던 광안이 떠오른다.
‘이리 오세요, 대군마마. 예쁜 옷을 입었군요.’
팔을 벌려 대군을 안아 올리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은우를 불러 검은엿을 주셨다고요.’
달포 전에 후원에서 스치며 말했다. 보내 준 은우는 맘에 드시냐 비웃자 선선히 웃으며 답했다.
‘이제 그럴 필요는 없으실 텐데요, 중전마마.’
광안의 느릿한 말투가, 부드럽고 힘 있는 목소리가 권태로이 하느작 하느작 움직이면서도 심을 잃지 않는 꼿꼿함이 싫었다. 젊고 강건하고 늘씬한 몸이, 사내다우면서도 색스러운 얼굴이, 매번 어떤 도발에도 동요 없이 벌레를 보듯 자신을 경멸하는 그 눈이 싫었다.
어미로도 여자로도 중전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그 눈. 차갑고 뜨겁고 두려운 그 눈.
그리하여 아끼는 궁녀까지 자근자근 밟았다. 천천히 조금씩 못쓰게 만들어 궐 밖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무던히도 있던 세자가 퇴선간까지 몸소 찾아가 용포로 천한 몸을 감싸 안았다 했다.
조찬 때 문후를 드리며 물끄러미 주상의 품에 안긴 대군을 바라보던 시선이 칼날처럼 배 속을 파고든다. 세자의 마음을 돌릴 시간, 시간이 얼마나……. 주상이 쓰러진 지금 얼마나.
“주상, 주상 전하는 어떠하신가.”
중전은 체통을 벗어던지고 소리를 지르듯 물었다.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하늘의 뜻을, 하늘의 말을.”
적무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번에는 일어나십니다.”
중전이 끅끅 소리 내며 울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허나, 봄을 맞지는 못하십니다.”
“뭐, 뭐라?”
중전이 적무를 잡았던 손을 놓고 손바닥을 땅에 짚어 쓰러지는 몸을 지탱하였다.
“허면, 어찌해야 합니까. 무슨 방책이 있을 것 아닌가?”
영상 부인이 다잡아 물으며 적무를 바라보았다.
“쇤네 힘으로는 용을 치지 못합니다. 하늘 신, 땅 신, 바다 신을 업어도 분노로 불타오르는 천 년 묵은 용을 어찌 막겠습니까.”
중전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서 머리에 붙은 떨잠과 뒤꽂이를 정신없이 뽑았다. 가락지까지 빼어 적무에게 쥐여 주며 애원하였다.
“무엇이든 하겠네. 내 피를 원한다면 피를 주고 손가락을 자르라면 손가락을 자르겠어. 아니, 목을 원한다면 내 목을 가지게.”
중전이 적무에게 이를 악물고 말하였다.
“대군을 살릴 수만 있다면, 내 무엇이든 할 테야.”
적무의 맨질맨질한 얼굴에 음산한 빛이 떠돌았다.
“쇤네의 명줄을 걸겠습니다.”
“고맙네.”
“다른 이의 명줄도 걸어야 합니다.”
“걸겠네. 내 목숨을 걸어 대군을 지키겠네.”
적무가 고개를 저었다.
“중전마마의 운명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럼?”
“용의 기운은 오직 용의 사주만이 대적할 수 있습니다.”
주 상궁과 영상 부인이 동시에 헉, 숨을 멈추었다. 중전만이 적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적무, 정확하게 말해 주게. 광안이 용상에 오르면, 대군은 어찌 되는가.”
“신의 음성을 빌리지 않고, 중전마마의 눈으로 판단하시기에 어떻습니까. 이 겨울, ‘가짜’라 불리며 모욕당하던 세자 저하가 용상에 오르시면 세자 저하를 추대하는 무리가 과연, ‘진짜’라 불리던 대군을 어찌하겠습니까.”
중전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영상 부인이 엎어지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혼이 빠진 모양새로 중전의 몸이 꺼덕꺼덕 흔들렸다.
“쇤네를 다시 찾으십시오, 중전 마마.”
적무가 사뿐사뿐 눈밭을 내려오는 여우처럼 소리 없이 움직여 중궁전을 나섰다. 주 상궁이 쫓았지만, 날아다니는 듯 걸음이 빨라 도저히 다시 잡을 수가 없었다.
“사, 사람이 아니야.”
주 상궁이 벌벌 떨며 공포로 얼어붙은 발을 움직여 침전으로 다시 들어갔다.
*
지창 너머 바람 소리가 들린다. 광안은 부신 눈을 가늘게 뜨며 지창으로 비쳐 드는 햇빛을 바라다보았다. 햇살은 좋으나 공기는 어제보다 더 차다. 불을 때지 않은 냉돌에서 올라오는 한기 때문에 발이 곱고 하반신에 감각이 둔하다. 자리에서 일어서 잠시 방을 거닐어 보았다. 정방형 작은 방에서는 몇 발짝 움직이기도 전에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며칠 전, 부왕은 침전 문을 나서다 쓰러졌다. 양평군 대감이 보고하길, 급작스러운 한기가 들어 그렇다 하였다. 침의를 시켜 막힌 혈을 뚫는 침을 놓고 몸을 데우는 탕제를 올렸는데, 그날 오후 기력을 회복했던 왕은 다음 날 다시 호흡이 가빠졌다. 쇠한 몸이 혈을 뚫는 강한 침을 견디기에 버거웠던 까닭이다. 다시 호흡을 잡는 탕제를 올리고 기력을 보하는 약을 더했다. 그러기를 사흘, 부왕은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광안의 문후는 중전이 막았다. 첫날 이후, 중전은 사흘 밤낮을 부왕 옆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 세 번, 문 앞에 서서 한참을 있다가 냉방으로 돌아오는 일이 광안의 일과였다. 그 사이사이 냉방에서 부왕이 쓰러지기 전에도 했었던 자잘한 국사를 돌보고 서책을 읽고 끝없이 소대를 요청하는 대신들을 만나 잠깐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남휼의 아버지인 전 한성판윤 남상경, 예조참판 조일문이 각각 소대를 청했다. 남휼은 부친과 같이 들어와 점잖은 모양새로 앉아 있었다. 어릴 때도 아버지 앞에 가기만 하면 유순한 양처럼 변하였다.
“조인호는 어떤가. 좌부위솔직은 잘 수행하는가.”
광안이 대비의 조카에 대해 남휼에게 먼저 물었다.
“잘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적극적입니다. 헌데…….”
휼의 미간에 한 줄 골이 패였다. 뭔가 미심쩍은 느낌이 있을 때 하는 버릇이다.
“걸리는 일이라도?”
“저는 의심이 많은 인간이라 너무 잘하려는 자도 경계하는 편입니다.”
“내 그건 알지.”
“야심가라고 해야 하는지, 그러기엔 다소 허술해 보이기도 하고. 또 허술함마저 계획하는 철저한 유형인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흠…….”
“잘 다루어 저하께 충성하게 만들면, 더없이 좋게 쓰일 것이다. 그것이 네 임무 아니냐.”
남상경 대감이 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말투였는데 휼은 큰 꾸지람이나 받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경솔했다. 하필 지금처럼 냉방에 유숙하는 세자께 근심을 얹을 이유가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남상경 대감은 인호에 대한 언급 외에 냉방에 들어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차가운 바닥을 손으로 몇 번이고 쓸어 보고 수척해진 광안의 얼굴을 눈으로 더듬듯 살필 뿐이었다. 어린 광안을 제 아들과 같이 앉히고 학문을 가르치고, 목검을 쥐여 주었던 분이다. 종종, 아니 자주 뵙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광안이 찾을수록 유당파의 견제가 높아질 테니, 물리고 뜯기지 않으려면 광안이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라를 드시고, 옥체를 돌보소서.”
남상경 대감의 눈빛이 애잔하여 광안은 되레 편안하게 웃어보였다. 수염의 반은 희어진 대감을 향해 말했다.
“대감께서도 부디 잘 드시고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 남휼 장군 혼례를 치르게 하고 손주에게 글도 검도 가르치셔야지요.”
남상경 대감이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붉어진 눈가를 모르는 척하며 광안은 다시 웃었다.
조일문 대감과의 독대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조정을 가르는 사림의 붕당은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고, 동인이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북인과 남인으로 갈리고 북인이 다시 광안을 지지하는 대북과 중전이 낳은 대군을 지지하는 소북, 유당파로 나뉜 형태였다. 조 대비와 조일문의 집안은 겉으로 보기에 뚜렷하게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본디 조 대비 일가의 뿌리는 남인이었지만, 외척을 견제하는 부왕의 의심 때문에 대비의 작은아버지 조가겸이 귀양지로 유배된 이후, 철저하게 몸을 낮추고 유당파나 부왕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꼬투리가 잡힐 만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비록 대북파는 아니지만, 광안은 조일문의 신중함을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었다. 소대에서 그는 예의 신중한 태도로 주상의 병후와 냉방에 유숙하는 광안의 건강에만 심려를 표할 뿐, 주상이 급히 승하하게 되면 왕위에 오를 광안에 대해 노골적으로 줄을 대려는 태도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대비나 차남 조인호에 대해서도 입을 떼지 않았다.
“익위사 일은 어떠합니까. 좌부위솔직은 만족할 만한 품계가 아닐 터인데.”
광안이 먼저 조인호에 대해 운을 띄웠다.
“저하, 아니옵니다. 부족한 아들 녀석입니다. 중책을 맡았으니 몸과 마음을 바쳐 제대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매번 이르고 있습니다.”
“아드님이 무예가 높아, 문과 급제자임을 알고 적이 놀랐습니다.”
“황공하옵니다, 저하.”
“익위사를 원해서 또 의외였습니다. 좌부위솔의 뜻입니까.”
조일문이 고개를 들어 광안을 바라보았다. 일문의 답은 간결했다.
“그러하옵니다.”
“좋소. 마음이 기쁘오.”
광안이 일문을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조인호가 광안을 동경하고 광안의 호위부대인 익위사로 들어오려 대비에게 부탁을 넣었으나, 일문은 그다지 원하지 않는 자리였다는 의미이다. 광안은 이만 물러가라는 뜻으로 서책을 펼쳤다.
“인호가 열다섯이 되었을 때, 주역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원리를 충과 효로 풀어 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광안이 서책을 넘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일문의 시선은 서안 위의 책에 머물렀다. 펼쳐진 책은 주역이었다.
“그때에도 지금도 부모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습니다. 부모의 뜻과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일이 곧 효이고 충임을 몸소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광안에게 무리하게 줄을 닿아 부탁을 넣은 일도 좌부위솔이라는 익위사 관직도 모두 조인호가 원했지만, 조일문이 원하였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예조참판 조일문, 웅크린 남인 세력, 조대비 일가 외척이 광안의 편에 서겠다는 말이다.
“좌부위솔의 무예와 학덕이 모두 참판대감의 가르침인 듯합니다. 훌륭한 자식은 무릇 훌륭한 부모에게서 나오는 법입니다.”
“저하, 망극하옵니다.”
고개를 숙이며 조일문이 예를 표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일문이 떠나고 곧이어 들어온 이는 병판 임지서였다. 조일문과 다르게 명백한 대북파이며 광안의지지 세력이었다. 강경하기로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을 전 공조참판 인홍의 뜻도 전하였다. 섣부른 움직임과 동요는 화를 부르는 법이다. 광안이 오랜 시간 답을 주지 않아 냉돌에서 입술이 파랗게 변하면서도 병판은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 거듭 말하였다. 또한 한직에서 혹은 산림으로 숨어들어 숨죽이며 웅크리고 있던 대북파의 결집을 이야기하였다.
“후우…….”
병판의 결연한 얼굴을 떠올리며 광안은 턱을 괴었다.
불과 세 달 전이었던가.
사간원에서 대군의 옷이 세자의 복색이라 경우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는 간언을 올리고, 대군의 생일에도 관리들을 이끌고 하례를 올린 영상의 행동을 비판한 이후였다. 주상의 분노는 광안에게로 곧장 쏟아졌다.
“명의 책봉도 받지 못한 네가 어찌 세자인가.”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간 광안에게 부왕은 세자의 지위를 부정하는 말을 함으로써 대군의 입지를 높이고, 광안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문 밖에서 꿇어앉아 호소하며 애가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몸을 찢어 버렸으면 하고 원할 만큼 오랜 세월 뭉쳐진 설움과 억울함이 전신을 휘돌며 점점 부풀어 올랐다. 익숙하게도 가슴 흉터에 통증이 시작되고 눈이 터질 듯이 뜨거워졌다. 검은 두건의 사내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네 아비가 너를 버렸다.’
‘왕은 네가 하찮게 굴복하여 철저하게 망가지길 원한다. 재생 불능인 세자. 필요한 것은 폐하여도 좋을 명분.’
메아리처럼 울리고 커지는 목소리가 귀를 찢고 입을 틀어막았다. 광안은 발작하지 않으려 바닥을 움켜쥐었다. 바닥을 함부로 긁어 대는 손톱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잔뜩 세우며 부풀어 오른 감정이 목구멍을 할퀴었다.
“물러가라. 세자도 아닌 너에게 문안을 받을 이유가 없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광안은 부왕을 부르며 피를 토했다. 몸을 떨며 입으로 피를 쏟는 광안을 내관들이 붙잡았다. 놓아라, 뿌리치고 또 뿌리치다가 광안은 눈을 감았다. 검은 두건 위로 번쩍이던 눈동자 두 개가 횃불처럼 타오르다 사라졌다.
자신을 부정하는 아버지, 세자의 지위를 망가뜨리고 싶은 부왕. 납치 사건 이후 얻은 광안의 내상의 핵에는 언제나 그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었다. 차마 확인하지 못하는 두려움이었다.
‘아바마마, 진정 저를 버리셨나이까. 진정 저를 망가뜨려 폐세자로 만들고 싶으셨습니까. 왜,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수십 번, 수백 번 입 밖으로 뱉지 못하는 절규로 몸이 절절 끓어올랐다. 뱉지 못하는 절규와 원망은 독이 되어 광안을 잠식하고 독에 젖은 화살 끝은 늘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 그것이 영상이든, 중전이든, 유당파의 머저리든 어쩌면 부왕이든.
오늘 아침 역시 부왕의 침전에서 문전박대당하면서, 광안은 삼 개월 전 피를 토하며 그곳에서 쓰러졌던 자신을 떠올렸다. 또한 이럴 때면 매번 찾아오던 가슴의 통증이 무뎌졌음을 느꼈다. 결코 확인 못할 끈질긴 의문이나 분노도 미지근하게 몸을 데우다 사라졌다.
‘흘려보낼 것은 흘려보내야 제가 다른 곳으로 떠밀리지 않고 빨리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가슴의 흉터를 꽃이라 어루만지던 여자는 광안 스스로 기억의 바닥으로 숨겨야 했던 심장의 상흔을 덤덤하게 매만졌다.
원망을 흘려보내라. 떠밀리지 말라.
광안은 문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책을 가져오라 일렀으니, 이제 곧 은우가 도착할 것이다. 책을 한 줄 읽고 다시 문을 쳐다보았다.
한 줄, 다시 한 번 더.
거짓말처럼,
“저하, 강 나인이옵니다.”
문 밖에서 은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들라.”
문이 열리고 가슴에 보자기를 안고서 은우가 들어섰다.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인사를 하고, 오라는 손짓을 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명주 보자기를 풀자 서책 서너 권과 납작하게 펼쳐 놓은 서책만 한 크기의 주머니가 나왔다.
“무엇이냐.”
쉬이 답을 못하고 은우는 광안의 눈치만 살피면서 서책을 서안 위로 올려 두었다. 광안이 서안 위 책을 펼치려 손을 올리다 말고 은우를 쳐다보았다. 서책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꾸짖는 눈빛을 읽으며 은우가 고개를 숙였다. 용도가 불분명한 주머니를 보자기째로 끌어 제 앞으로 두었다. 주머니 속에는 분명 뜨겁게 달군 옥돌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은우만이 아니었다. 강선도 서 상궁도 냉방의 한기를 조금이라도 몰아내려 누비옷이나 털가죽을 가져오고 자그마한 화로를 들여오기도 했다. 모두 광안에게 꾸지람을 듣고 방 안에 들이지도 못하고 돌아갔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하오나.”
은우가 광안을 슬쩍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제가 손이 곱아 그랬습니다. 먹을 갈아야 하는데, 옥돌로 곱은 손을 데우려 했습니다.”
“먹은 괜찮으니, 나가거라.”
“아니옵니다.”
은우는 광안 옆에 붙어 앉아 벼루에 연적을 기울여 물을 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광안과 은우 사이에 둔 옥돌에서 더운 기가 올라와 다리 한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광안이 먹을 갈고 있는 은우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꽃을 좋아한다고 했느냐.”
“네, 저하. 봄이면 궐에 피는 꽃을 보느라 매일매일이 행복하옵니다.”
“봄이라……. 성정각 자시문 앞에 홍매화가 보고 싶구나.”
“성정각으로 들어오는 길에 피어 있는 영춘화를 보면 마음이 다 환해집니다. 이제 봄이 오면 곧 필 테지요.”
“나는, 연무정 옆에 수양나무 벚꽃이 좋았다.”
은우가 먹을 잠시 내려놓으며 광안을 바라보았다. 광안이 대비전에 책을 읽으러 들르던 시절, 날이 좋은 봄날이면 대비와 천천히 걸어 연무정에 올라 시를 읽고 이따금 시 한 수를 짤막하게 적어 대비에게 건네기도 하였다. 글을 모르는 대비는 은우를 시켜 그 시를 몇 번이고 더 읽게 하고, 한글로 뜻을 풀어 적어 달라 하였다. 돌이켜 보면 은우가 대비전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은우가 가진 단아한 글체 외에도 어린 나이에 한자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일곱 살에 지밀로 들어간 은우는 다른 애기항아들처럼 궁서체뿐 아니라 소학과 내훈, 동몽선습을 익혀야 했다. 그들의 스승 노릇을 한 서사상궁은 글 솜씨와 한문 실력이 높아 대왕대비의 총애를 받던 분이었다. 대왕대비가 돌아가시고 퇴궐하는 대신 그 공을 인정받아 지밀나인들 글을 가르치는 일을 소일 삼아 하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어린 은우를 맘에 들어 하여 한방에 데리고 자면서, 손녀딸 돌보듯이 머리도 빗겨 주고 글도 가르치고 하였다. 늦은 밤까지 붙어 앉아 하나를 일러 주면 둘을 깨우친다며 서사상궁은 은우에게 아낌없이 애정을 쏟았다. 궐에서 은우가 아직도 잘 버틸 수 있는 건 은우 나이 열다섯, 서사상궁이 돌아가실 때까지 받았던 넉넉한 사랑과 격려, 과분한 믿음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은우는 그분처럼 살고 싶다 소망하게 되었다.
광안이 생각에 잠긴 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꽃을 바라보며, 연무정 아래 물줄기로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시를 읽을 때가 언제였는지 이번 생이기나 했었는지…… 까마득하구나.”
은우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고 먹을 갈았다. 어린 광안이 적어 주었던 시구가, 힘 있으며 아름답던 글자가 떠올랐다. 광안의 목소리는 낮지만 부드러운 울림이 있어 멀리서 들어도 또렷했다. 한 자, 한 자 그 음성을 떠올리며 읽고 한 구절 한 구절 광안의 해석을 기억하며 대비 앞에서 시를 외웠다.
“기억나느냐?”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연무정 옆에 수양나무처럼 드리운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들 말이다.”
“네, 저하.”
은우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광안이 붓을 들어 은우가 갈아 놓은 먹물에 붓을 적셨다. 글을 써 내리는 손이 얼어 획이 흔들렸다. 광안이 잠시 붓을 놓았다.
“저하, 손을 녹이십시오. 저하의 명필이 흐트러질까 저어되옵니다.”
“명필은, 주상전하시다.”
부왕의 글씨는 최고의 명필가 석봉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할 만큼 뛰어났다. 명나라 사신들이 부왕의 글씨 하나를 받는 게 소원이라 할 정도였다.
“저하의 글도 좋습니다. 저는 저하의 글씨가 정말 좋습니다. 그러니 얼린 손을 녹이시고 보여 주소서.”
은우가 옥돌 위로 올려 따뜻하게 데운 제 손으로 광안의 차가운 손을 감쌌다. 딱딱한 손바닥을 비비고, 손등을 문질렀다.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잠시만 옥돌에서 데우소서.”
광안이 고개를 저었다. 은우가 식은 제 손을 다시 옥돌에 대고 광안의 손을 쥐었다. 한 손씩 번갈아 쥐는 동안 광안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
처처문제조處處聞啼鳥
야래풍우성夜來風雨聲
화락지다소花落知多少
멈칫하는 은우의 손을 가만히 쥐며 광안이 물었다.
“누구 시인가.”
대비가 좋아했던 시였다. 광안이 적어 주었던 시. 한글로 해석한 시구를 기억하여 은우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마지막 구절이다.
‘화락지다소. 꽃은 얼마나 또 떨어졌을까.’
그 구절을 읊는 광안의 목소리가 쓸쓸하여 어린 은우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마음이 울렁거렸다.
“당나라 맹호연의 춘효 아니옵니까.”
광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밤에 비바람 소리가 들렸으니, 꽃은 얼마나 또 떨어졌을까.”
광안의 입술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시를 읊어 줄까. 아니면 한 수 적어 줄까.”
“아, 아니옵니다.”
“내가 읊어 주는 시가 싫은가.”
“그럴 리가요, 저하.”
은우가 당황하며 잡힌 손을 빼어내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는다.
낙화유의수류수落花有意隨流水
유수무정송락화流水無情送落花
“아…….”
광안의 입에서 나오는 문구에 은우의 입이 벌어진 채로 굳었다.
“무슨 뜻이냐.”
은우가 붉어진 뺨을 감추려 시선을 피하였다.
“모르옵니다.”
“꽃은 뜻이 있어 물을 따르는데, 물은 무정하게 꽃을 보내는구나. 맞느냐?”
광안의 얼굴에 웃음이 흘렀다. 길고 예민한 눈매가 부드러이 접히고 입술 끝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이리도 농을 하듯이 웃음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인가 싶어 은우의 눈이 커졌다.
“어릴 땐 귀엽더니.”
심장이 두두둑 뛰기 시작하고 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못생겨졌구나.”
광안이 은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입가에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전란이 일어난 해였다. 평화로웠던 마지막 봄…….
그날도 대비전을 방문했던 광안은 돌아가는 길에 연무정에 홀로 앉아 있었다. 흘깃 광안의 옆모습을 훔쳐보고서 은우는 연무정 아래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았다. 광안이 서책을 읽는 소리가 좋았다. 대비마마께 책을 읽어 주러 오실 때면 은우는 방문 앞에 붙어 앉아 귀를 기울였다. 차분하고 또렷한 음성이 나긋하게 한문을 읽고 뜻을 풀이하는 걸 듣고 있노라면 손가락부터 녹작녹작 녹아드는 것만 같아, 은우는 한 번씩 손을 바닥에 비벼 보곤 하였다.
연무정 주위로 갑자기 바람이 불자 나지막이 책을 읽던 목소리가 멈추었다. 은우도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고, 가지에서 떨어진 꽃 이파리가 그 바람에 휘날렸다. 떨어진 꽃들은 허공을 잠시 떠오르다 흙바닥에 뒹굴고 간간이 얕은 물 위로 떨어졌다. 후두둑 쏟아진 꽃을 보자, 일전에 광안이 대비마마께 필사해 드린 시구가 떠올랐다.
화락지다소……. 꽃은 또 얼마나 떨어졌을까.
연무정 아래에 앉은 채로 은우는 나뭇가지를 들어 흙바닥에 글자를 써 보았다.
꽃은, 또, 얼마나…….
제목이 춘효라 그랬지.
花(화), 落(락) 知(지), 多(다)
글자를 쓰던 나뭇가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연무정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야래풍우성, 화락지다소.”
광안의 음에 맞추어 少(소) 자를 완성시켰다. 광안군 나으리와 내가 같은 글을 떠올렸구나. 까닭 없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은우는 살짝 목을 빼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광안은 처음 봤을 때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은우도 다시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꽃들을 주워 써 놓은 글자를 따라 하나씩 늘어놓는 동안, 광안의 음성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낙화유의수류수, 유수무정송락화.”
낙화유의, 유수무정……. 슬픈 말이구나. 은우는 나뭇가지를 힘없이 붙잡고서 마음속으로 뜻을 천천히 되새겼다.
“꽃은 뜻이 있어 물을 따르건만…….”
광안의 해석이 뒤따랐다. 물 위에 팔랑팔랑 떨어진 꽃을 보며, 은우는 애절한 글귀에 온통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소리 없이 다가온 발걸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흐르는 물은 무정하게도, 꽃을 흘려보내네.”
코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광안이 은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도 못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우선 도망을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벌떡 일어서 달려가려는데 마음과는 달리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있어 쥐가 내린 다리 때문에 은우는 한 발짝 움직이다가 콰당 넘어졌다. 흙 묻은 치마를 털며 일어서려다가 다시 주저앉아 고개를 처박고 있는 은우에게 광안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넌 여기에서 무얼 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광안의 시선이 은우의 정수리로 꽂혔다.
“훔쳐보고, 훔쳐 듣고. 이제 맹랑한 거짓말까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더냐.”
차분한 음성이지만 은우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광안군 나으리.”
은우가 손을 앞으로 짚고 고개를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
“아니옵니다. 소인은 다만, 다만…….”
흙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만, 무엇이냐.”
“대비마마께오서.”
“고개를 들고 고하라.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은우가 고개를 들어 광안을 바라보았다. 빛을 등지고 선 왕자군은 키가 커서 목이 한참 뒤로 젖혀져야만 얼굴이 보였다. 들이치는 봄 햇살 때문에 은우는 눈이 부셨다. 답을 이어 하라는 듯 광안이 손짓하였다.
“대비마마께오서 소인에게 광안군 나으리가…… 주신 시를, 흑, 읽어…… 달라고도 하시고, ……한글로, 흐윽……, 풀어 달라고도 하시는데. 그래서 대비전 방 밖에서도 잘 들으라 하시고……. 흐으흑, 그래도 오늘 연무정에 가라 하시진 않았지만…….”
은우는 자꾸만 울음이 나와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으며 변명을 이어 갔다. 갑자기 광안의 얼굴이 쓰윽 가까이 다가왔다. 은우는 화들짝 놀라 뒤로 주춤 몸을 빼었다. 광안의 시선이 바닥에 머물렀다.
花落知多少.
반쯤 지워지고 꽃으로 가려진 글자들을 읽은 광안이 상체를 기울여 눈을 맞추었다.
“한자를 아느냐.”
“네, 나으리.”
“시가 좋으냐.”
“네……. 나으리가 읽어 주시는 시가 아름답습니다.”
갑자기 광안이 웃음을 터뜨려 은우는 뚜르르 눈물을 흘리다 말고 꿀꺽 침을 삼켰다.
“방금 읊은 선문도 좋으냐.”
“그런데 슬프옵니다.”
흐르는 물은 무정하게도 꽃을 잊고 버려두고 가는 것 아닙니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은우는 코만 훌쩍였다.
“물은 무정하게 흘러도, 꽃을 그리워하네.”
은우가 눈물을 닦고 광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 해석하면 어떠하냐.”
광안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얼굴에는 목소리만큼 다정한 웃음이 배어 있어 은우는 긴장이 탁 풀어졌다. 엉엉, 울음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광안군 나으리. 다시는 몰래 훔쳐 듣지 않겠습니다.”
광안군이 슬쩍 눈매를 찡그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당황스럽구나. 대체, 내가 뭘 했기에 이리도 놀라고 울고 사죄하는가.”
은우는 아직 울음이 그치지 않아 어깨를 들썩였다.
“그만 울어라.”
어깨를 툭, 한 번 짚어 주고는 광안이 먼저 연무정을 떠나갔다. 은우는 눈물을 닦아 내고 또렷한 눈으로 뒷모습을 오래오래 담았다. 광안군 나으리로 뵈었던 마지막이었다.
“저하.”
은우가 부르자 광안이 손을 저었다.
“농이었다. 못생겨지지 않았다.”
웃는 모습이 너무 좋아 가슴이 시리다. 심장에 얼음 조각이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만 같다. 방이 차가워서 그렇다고 은우는 생각한다. 그 웃음을 영원히 가질 수 없음을 결코 슬퍼하지 않으리라 맘을 다잡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벌려 말을 하는데 혀가 시리고 목구멍이 아팠다.
“물은 무정하게도 꽃을 흘려보낸다가 좋을 듯합니다.”
“무슨 말이냐.”
“물은 흘러가야 하는데 매해 피고 떨어져 두고 갈 수밖에 없는 꽃을 어찌 그리워하겠나이까.”
광안의 눈에 웃음이 사라졌다. 차갑게 묻는다.
“내가 물이더냐.”
은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하는 저하이십니다.”
“네가 물이 되고 싶구나.”
“물 위에 잠시 떨어지는 꽃이어도 좋습니다.”
물 위에 떨어질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저하.
은우가 광안의 손을 놓고 서안에 새로운 종이를 깔았다. 압으로 누르고 반반하게 펴서 글을 쓰기 좋게 준비하였다.
“열 살에도 스물셋에도 품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동궁전으로 온 후에, 감히 마음에 품어도 될까 잠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물이 흐르듯, 꽃이 피고 떨어지듯 두기로 했습니다. 충분합니다.”
“네가 지금 얄팍한 말로 내 마음을 떠 보겠다? 그리 얕은 수로 내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은우는 다소곳이 꿇어앉아 광안을 올려다보았다.
“저하의 마음은, 간절히 원하지만 주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광안이 후후, 비스듬히 바라보며 냉소를 떨어뜨렸다.
“처음부터 간절하지 않은 게지.”
“아니옵니다. 간절하여 두렵습니다. 간절함이 커져 제 몸을 채우고 제 머리를 채우고 제 마음을 짓누를까 두렵습니다. 전부를 주지 않으심을 원망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입 발린 소리. 믿지 않는다.”
“저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매달리고 원망하고 요구하고……. 너는 그 무엇도 하지 않으면서!”
“아니요.”
은우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주신 것이 전부라 생각합니다. 두 번 부르지 않으시는 분이 부르시고, 몇 번이나 내치려 했지만 붙여 두셨고, 좋은 옷을 주시고 좋아하는 음식을 내리시고, 저하를, 매일 보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미 마음을 받고 싶은 저하께 특별한 사람이고, 그것이 전부와 다름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바위에 부딪혀 튀어 오르고 방향을 바꿔 굽이쳐 흘러갈 물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간절한 마음이 독이 되어 스스로를 해치길 원치 않습니다.”
광안이 지그시 은우를 바라보았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다 치우고, 지금은 듣고 싶다.”
은우가 고요히 눈을 맞추었다.
“그러니, 요구해 보라.”
잠시 떨어진 꽃, 흘러가야 할 물.
주상이 되시고 중전을 맞으실 분, 곱고 현명한 정궁에게서 세자를 보시겠지. 꼭 닮은 멋진 대군아기씨에게 못 받은 사랑 넘치게 주며 멋진 아버지가, 여인의 지아비가, 그리고 조선의 왕이 되시겠지. 나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아무것도 아닌 이가 되어 잊히겠지.
은우가 맞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저하를, 주시옵소서.”
“또.”
“전부를 가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저하. 이미…… 가지셨습니다.”
광안은 답 없이 은우의 눈만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낮이든 밤이든 늘 은우의 반응을 몰아치듯 원하고,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두어 버리곤 했었다.
“은우.”
“네, 저하.”
“그 이름을 묻지 못한 걸 후회했다.”
무슨 말인가, 은우는 광안을 쳐다보았다.
“생각시가 귀여웠다.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쓴 글자도 흩뿌려 놓은 꽃도 앙증스러웠지.”
광안을 바라보는 은우는 눈이 시려 와 깜박였다.
“찾아볼까 했었다. 이름을 묻지 않았지만 찾을 수 있다 생각했었다. 전쟁이 터졌고, 가끔씩 그 생각시는 잘 피신해 있으려나 했다. 바닥에 써 놓았던 ‘花落知多少’, 그 글자를 떠올리면 오랫동안 혼자 웃음이 나곤 했다.”
은우는 고개를 숙였다.
“돌아온 궐에서는 왜 보이지 않았느냐.”
“제가 그리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행이었다.”
올려다보는 은우를 향해 광안이 덤덤히 말했다.
“윗전 나인을 탐하였을 것이니, 죄목이 늘었겠구나.”
“저하.”
은우가 결코 그러시진 않으셨을 거라는 말 대신 웃음으로 부정했다.
“사실이다. 어떻게 하든 널 가졌을 테니…….”
“동궁전에서 뵈었던 첫날, 저를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은우의 불만에 광안이 쓰윽 제 턱을 손등으로 쓸었다.
“흠……. 그렇군.”
광안의 답에 어쩐지 맥이 빠졌다. 은우를 보는 광안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