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章
상처
오랜만에 들르는 대비전이었다. 더위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바삐 거닐던 뜨락은 바뀐 계절을 구석구석 품으며 변화하였다. 차가운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치맛자락을 날렸다. 초록빛이 무성하던 감나무가 잎을 떨구고 농익은 단감 몇 개만 매달고 있다. 잠시 눈을 들어 주홍빛이 선명한 주먹만 한 감을 쳐다보다가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대비마마, 은우이옵니다.”
지밀상궁이 아뢰자 안에서 대비의 음성이 들렸다.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가 인사를 올리자, 대비가 손을 잡을 듯이 반가운 기색으로 이리 다가오라 말하였다.
“은우야, 잘 지냈지?”
대비마마는 일곱 살, 입궐한 그해부터 은우를 유달리 귀여워하셨다. 은우가 가진 단정하고 우아한 궁서체나 약간의 글 솜씨, 한자를 깨우치고 책을 좋아하는 얼마 되지 않는 학문적 소양을 높게 평가하였다. 또한 매사 덤덤하여 살랑거리는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은우의 무뚝뚝함까지 예뻐하셨다.
‘내, 너만 보고 있으면 체한 듯이 꽉 막혀 있던 마음이 다 편안해지는구나.’
다른 대비전 상궁마마님들에게는 주로 아둔하다거나 눈치가 없다거나 말을 사근사근 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꾸지람을 받는 터라 은우는 늘 대비마마의 말씀이 고마우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었다. 다만 은우를 곁에 두고 사가에서 보내오는 서안을 읽게 하거나 대신 서찰을 쓰게 하는 일을 주로 맡기셨기에 매사 어떤 일을 겪거나 들어도 무덤덤하여 딱히 요란스레 관심을 가지지 않는 면이 편하신가 추측할 뿐이었다.
실제로 은우는 굳이 상전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 애를 쓰거나 비위를 맞추려는 악착스러운 면도 없고 궐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수만 가지 소문이나 사건들에 궁금증이 화르륵 돋는 경우도 없었다. 그러니 돌고 도는 많은 말을 세세히 기억하지 못했고 또 옮길 일도 없었다. 그저 본인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면 딱히 관심을 둘 것도, 애가 탈 일도 없었다. 전란을 겪고 궁의 절반이 타 버렸을 때도 살아남아 덤덤히 잎을 올리고 열매를 맺는 감나무나, 밟히고 죽었다가 다시 피어나는 뜨락의 흔한 풀꽃처럼, 마치 궐 귀퉁이에 있는 자그마한 풍경의 일부처럼 살아갈 뿐이었다.
오늘 은우를 대비가 부른 이유는 사가에 전할 서찰을 쓰게 하고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대비전 소속 나인이 아니라 은우의 소임도 아니었지만, 대비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동궁이 알게 되어도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쉬는 날을 택해 전에 모시던 대비마마에게 와서 간단한 부탁을 들어 드리는 일은 동궁전을 책임지는 상궁 역시 쾌히 허락한 바였다. 자그마한 서안 앞에 앉아 먹을 갈고 있는 은우를 보며 대비는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원래도 대비는 적적함을 달래려 은우 앞에서는 수다해지곤 했다. 어떤 말을 해도 큰 반응이 없고, 길게 답도 해 주지 않는 은우에게 조근조근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한참을 다른 이야기를 하던 대비가 마침내 묻고 싶었던 화제를 입에 올렸다.
“은우야.”
“네, 대비마마.”
“헌데, 세자가 벌써 여러 차례 승은을 내렸다는데 네 어찌 그대로더냐.”
“아, 대비마마. 그건…….”
대비가 손을 저었다.
“이미 문 상궁에게 들어 알고 있어. 세자가 네 입을 봉했다고 하더구나. 누구에게도 세자에 관련하여서는 입 벙긋을 하지 않는다 들었구나. 왜, 세자가 무엇이든 네 입에서 발설되면 너를 궁에서 내쫓기라도 하겠다 하는 게야?”
은우는 고개를 들어 대비를 바라보았다. 자주 웃어 고운 주름이 잡힌 눈가와 얇은 피부가 덮고 있는 자그마한 이마를 보았다. 대비는 천상 고운 여인의 얼굴이었다. 성품 또한 고와서 인정에 잘 휘둘리고 독한 구석이 없었다. 이렇게 깊숙한 대비전에서 쓸쓸하고 초라한 여생을 보내는 처지는 그러한 성품이 원인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비마마.”
“중전이 수를 쓰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대비마마.”
은우가 펄쩍 뛸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이리도 너를 내버려 두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냐. 세자가 세 번이나 부른 궁녀를 아직도 퇴선간에서 설거지나 하고 있게 만들 수는 없지.”
“대비마마, 아직 빈궁마노라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세자 올해 나이가 몇이더냐. 무엇이 흠이 될 일이 있다고. 내 안 그래도 그 일을 물으려 중궁에게 가려던 참이었어.”
“마마,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은우에게 대비가 찬찬한 어조로 물었다.
“혹여, 은우 네가 원하였느냐.”
“네, 대비마마. 소인의 몸이…….”
은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대비가 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말했다.
“이리 온.”
마치 일곱 살 생각시 은우를 부르듯 팔을 벌렸다.
“마마.”
은우는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은우의 손을 잡고서 눈을 맞추며 대비가 말했다.
“아무리 몸이 그렇다 해도, 광안이 제가 품었던 여인에게 이리 박하게 굴 줄 몰랐다. 승은을 내리고 이렇게 버려두면 네 궁녀들 사이에서 힘들지 않느냐?”
은우는 표정을 감추며 시선을 낮추었다. 성정각 보춘정에서 세자에게 당돌한 말을 한 후, 열흘도 넘게 지났다. 광안은 이제 두 번 다시 은우를 찾지 않을 테다. 세자로부터 무슨 명이라도 있을까, 이틀간 은우의 눈치를 살피던 동궁전 궁녀들도 그 점을 알아챘다. 은우는 애초부터 동궁전에 굴러들어 온 돌이었다. 가뜩이나 미운 털이 박혔는데 단번에 세자의 승은을 입었다. 이례적으로 두 번이나 더 불려 가서 모든 궁녀들의 질투심에 불을 질렀고 화제의 중심에 섰다.
승은을 입고 내쳐진 은우가 부당한 냉대와 따돌림을 받는 일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비록 승은상궁으로 봉해졌다 해도 세자의 관심이 사라진 이후에는 마찬가지 취급이었을 테다. 차라리 특별상궁이 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며칠 그러다가 말거니 했었다. 하지만 궐내에서 가장 세력이 큰 중궁전 직속 나인이었다가, 동궁전 지밀로 옮긴 궁녀들이 은우를 괴롭히는 일에 앞장서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지밀상궁의 눈을 피해 일부러 가장 험하고 어려운 일을 시키는 건 물론 밀어 넘어뜨리고, 은우의 밥을 바닥에 엎고, 다 해 놓은 설거지에 흙을 뿌렸다. 실수인 척 화로를 밀고 숯불을 떨어뜨리는 통에 팔목이 데였다. 물에 자꾸 닿게 되는 부위라 상처에서는 여전히 진물이 흐르고 있다. 넘어지고 밟혀서 무릎이 까지고 멍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으로 기대고 싶은 웃어른이라 해도 그런 말은, 대비에게 꺼내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또한 광안에 대해서도 변명해야 했다. 사실이니까…….
“대비마마, 제가 감히 저하가 베푸시겠다는 명을 거두어 달라 청하였습니다.”
대비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은우는 고개를 떨구었다.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는 청을 읽었는지, 대비가 가만히 잡은 손을 두어 번 다독여 주기만 하였다.
발작이 지나고 다음 날 오후였다. 광안의 부름에 은우는 성정각 보춘정으로 향하였다. 책들이 빼곡하여 꼭 서가와 같은 집무실에 앉아, 광안이 말했다.
“방금 어의가 다녀갔다.”
이유는 짐작할 수 없지만 불쾌함이 짙은 목소리였다. 눈매나 눈썹이나 굳게 일자로 다물린 입술까지 광안은 몹시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광안이 강선에게 손을 내밀어 상소 두루마리를 받아 펼쳤다. 둥글게 말렸던 종이가 펼쳐지며 만드는 소리가 차륵 차르륵 자그마하게 울렸다. 부왕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승정원에서 일차적으로 부왕에게 보고한 상소와 차자의 실무적인 처리는 세자의 몫이었다. 광안은 은우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서 물었다.
“지난번 탕제는 다 먹었느냐.”
“아직 남았습니다.”
“다시 내리라 할 것이다.”
“아니옵니다. 이제, 충분히 몸을 회복하였고 너무 과분합니다. 실은 저번 탕제로도 동궁전 상궁마마님과 궁녀들에게 어찌 보일까 몸 둘 바 몰라…….”
광안이 몹시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냉한 몸이 싫어 데우려 하는 것이다.”
“저하?”
“어의가 그러기를 네가 대비전에서 일할 때 맥을 짚어 준 적이 있다고 하던데?”
“그러하옵니다, 저하.”
“수태하지 못하는 몸이 사실이라더군. 몸이 냉하여 달거리조차 제대로 못하니 아무리 탕제를 먹어도 아니 될 것이라고.”
“네, 저하.”
은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다시는 부를 일이 없다는 말씀을 굳이 불러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설움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래서 맘에 들었다.”
“저하?”
“나의 장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정궁의 배를 빌려 나와야 한다. 나는 반드시 적자이면서 장자인 내 아들을 세자로 세울 터이니. 아니, 내 씨를 받은 서자 따위는 없을수록 좋다.”
깨물고 있는 은우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탐내어 본 적이 없는 미래에 대해 냉혹하게 죄를 묻고 있다. 그리하여, 여자구실도 못하는 소인은 다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궁궐에 집기처럼 제자리를 지키며, 눈에 띄지 않고 일하며 살고 싶다 하였지 않습니까. 말하지 못하는 원망을 꾸역꾸역 삼켰다.
“강씨라 했나.”
“네, 저하.”
“강 나인, 여전히 아무것도 원하지 않느냐.”
“그러하옵니다.”
광안의 입술이 뒤틀렸다.
“앞으로 나는 너를 자주 부를 것이다.”
“저하.”
놀라 고개를 드는 은우에게 광안이 냉소를 머금었다.
“너도 알 터인데? 하루도 지나지 않은 밤을 기억 못할 리는 없고.”
내내 목석처럼 서서 광안의 곁을 시위하고 있던 내관 강선이 민망한 듯 몸의 방향을 반쯤 틀어 섰다.
“저는…….”
은우는 억지로 차분한 음성을 만들었다.
“저하께오선 여태 두 번 찾는 이가 없으셨고, 지난밤은 저하가 부르시지 않았고 또한 병중이시라…….”
“그래, 강선이 불렀다더군. 내가 발작으로 정신이 혼미한 사이에……. 그래서 너는 지난밤 나와 나눈 그 열락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옆에 서 있던 내관 강선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광안이 무표정하게 붓을 들어 종이에 글을 적어 내렸다. 한 장을 강선에게 넘기며 명하였다.
“도승지를 들라 하라. 경상 지방 유생이 올린 상소에 대해 확인할 바가 있다.”
강선이 명을 받들어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광안이 은우를 보지 않고 또 다른 상소문을 펼치며 물었다.
“입상궁 취급 받는 승은상궁이 싫다고 말하면 첩지라도 내려 줄까 싶어 머리를 쓰는 것이라면 좋다. 응해 주마. 아둔한 자보다 영리한 자를 좋아하니……. 그래, 너에게 무엇을 내릴까. 종오품 소원? 종사품 승휘?”
“저하, 첩지라니요. 빈궁마노라도 계시지 않습니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결코 아니 되옵니다.”
“가까이.”
광안이 붓을 내리고 은우를 불렀다. 옆으로 다가가자 은우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반쯤 열린 지창으로 햇빛이 환히 쏟아지고 있었다. 이 곳은 세자가 공식적으로 부왕의 일을 대신하는 집무실인 작은 편전이나 다름없어 한 겹 종이문 밖에는 상궁과 나인이 대기하고 있으며 언제 강선이나 다른 궁인들이 들어올지 몰랐다. 은우가 상체를 뒤로 빼는 순간 입술이 닿았다. 순식간에 밀고 들어온 뭉툭하고 힘찬 혀로 은우의 입술이 열리고 그 안이 뜨겁게 휘저어졌다. 깊이 빨아들이던 은우의 혀를 놓아주며 광안이 말했다.
“해가 환히 떠 있고, 나는 업무를 보는데.”
여전히 턱은 잡고서 말하였다.
“네 입술이 먹고 싶으니 말이다.”
당혹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해야 하는데, 은우의 마음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아픔이 차올랐다. 떨리는 턱을 엄지로 문지르며 광안이 말했다.
“미친 눈이라 불리는데, 미친 짓 하나 더 보탠다고 허물일까. 네 야망으론 고작 승휘로는 만족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종삼품 양원? 아니면 그 위를 원하느냐.”
양원 이상이라면 세자빈 바로 아래인 종이품 양제밖에 없다. 세자빈도 없는 동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알고서 비웃는 광안을 향해 은우가 물었다.
“그러하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주제를 모르니 내쳐야지.”
광안이 말을 채 마치기 전에 다시 말캉한 입술을 빨았다. 혀를 휘감고 무언가 항의하려는 은우의 말을 삼켰다. 한 팔로 허리를 끌어안고서 꼼짝하지 못하게 몸을 붙이고는 핥고 물고 삼켰다. 아랫입술을 혀로 훑으며, 광안이 호흡이 가빠지는 은우를 열기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뜻대로 하소서.”
은우는 느슨해지는 광안의 품을 벗어나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빈궁마노라를 맞이하시면 무엇이든 받겠나이다. 하오나, 빈궁마노라가 계시지 않는 동궁에서는…….”
은우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처럼 하십시오.”
광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 때건 찾으시고, 질리도록 취하십시오. 고아가 되어 궁에 들어온 일곱 살부터 매 맞고 벌서며 궁녀의 일을 배웠습니다. 꿈에서도 외우고 익힌 궁중 법도와 궁녀의 일입니다. 수태도 못하는 몸입니다. 내일이라도 사그라들 연기 같은 관심을 잡겠다고, 평생을 일없이 무력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저하, 소인을 궁 밖으로 내치소서.”
우지끈, 서안을 내려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광안이 담은 분노 때문에 상소문 두루마리가 바닥으로 두두둑 떨어졌다.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말라.”
*
출입패를 들고 궐 밖을 나간 은우의 마음이 바빴다. 보통은 서찰상궁을 시켜 서안을 전달시키는데, 그날은 대비가 꼭 은우가 은밀히 직접 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비의 남동생 예조참판 조일문 대감의 집을 향해 걸음을 재게 움직였다. 제 몸을 감싸고 팔락거리는 분홍빛 치맛자락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기분이 울렁였다. 옷은 일전에 처음 세자를 모셨던 다음 날, 중전이 내린 당의였다. 외출할 때나 입으라 하였지만, 궁에서는 물론 외출할 때조차 너무 과한 복색은 법도에 어긋나 입을 일이 없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벽장 속에 넣어 둔 은우의 외출복이 잔뜩 더럽혀 있지만 않았어도…….
은우가 대비전에 다녀온 사이 벽장이 온통 헤집어져 있었다. 외출복은 물론이고 은우의 몇 안 되는 장신구나 만들어 둔 매듭이 다 망가져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유치한 괴롭힘이었다.
‘이를 어쩌니, 은우야. 내가 잘 지킨다고 했는데. 언제 들어와서 이렇게 다 엉망으로 했다니.’
미향이 울먹였다. 은우는 할 수 없이 벽장 제일 위쪽 중궁전에서 하사받은 상자를 열었다. 보자기째로 풀지 않았던 옷이었다. 차마 중궁전에서 내린 옷만은 건드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눈부시게 고운 당의를 펼치고 은우는 잠시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 그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은우는 마치 깊고 넓은 강에 빠져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떠밀려 내려간 듯 아득해졌다.
오늘따라 겨울바람이 강하였다. 바람에 닿는 얼굴이 따끔따끔 아리고 찬 공기를 들이마시는 코와 목이 얼얼하였다. 바람을 맞으며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쓰개치마가 요란하게 펄럭이고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은우는 입을 가리고 콜록콜록 잔기침을 뱉었다. 내내 찬물에 손을 넣고 끝없이 설거지를 하다 보니 고뿔이라도 걸린 듯싶었다. 잠시 쓰개치마를 어깨에 걸치고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닦으려던 순간 갑자기 훅 불어오는 바람에 치마가 스르륵 날아갔다. 맞불어오는 바람을 안고서 옥빛 폭 넓은 치마가 저 멀리 바닥으로 날리고 있었다.
“아.”
은우가 급히 치마를 향해 다가갔다. 물결처럼 펄럭이던 치마를 잡은 사람은 은우가 아니었다. 치마를 들고서 걸어오는 남자를 은우는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바람은 여전히 세게 불어 남자의 연한 하늘빛 도포 자락과 도포를 묶은 녹색 동다회 끈이 바람에 나부꼈다. 가까이 다가선 남자가 은우와 눈을 맞추었다. 당당한 걸음걸이도 그렇거니와 벌어진 어깨나 큰 몸집은 무인처럼 건장했고, 갓 아래로 보이는 얼굴 역시 사내답게 굵고 짙은 생김새였다. 은우는 시선을 낮추어 남자의 검은 당혜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몹시 고약하게 부는군요.”
분홍색 고운 명주 치마에 봄처럼 환한 병아리 빛 당의를 입은 은우를 향해 남자가 깍듯하게 예를 표하며 인사하였다. 차림으로 보아 어느 양가집 규수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고맙습니다, 나으리.”
은우가 조심히 양손을 내밀었다. 치마를 건네받아 머리에 쓰려 손을 올리려 할 때,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바싹 말라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이 휘휘 동그라미를 그리며 두 사람 사이를 돌았다. 은우의 당의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치마를 쓰느라 올린 손 때문에 소맷자락이 조금 내려갔다. 바람에 팔락이며 소맷자락이 데인 상처를 쓸어 은우는 저도 모르게 앗, 작은 소리를 질렀다.
“상처가…….”
남자의 짙은 눈썹이 찡그려졌다. 숯불에 덴 자리에 감았던 천이 자꾸 물에 젖어 풀어 두었는데 오늘 급히 옷을 갈아입고 나오느라 다시 감지 못하였다. 드러난 상처가 꽤 보기 흉한 모습이었다.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은우는 급히 치마를 쓰고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걷는데 치마를 주워 주었던 남자가 계속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은우는 흘끔 뒤를 돌아다보고 치마를 밭게 쥐었다. 긴장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조 대감 집 문이 멀리 눈앞에 들어왔다. 기침이 간간이 터져 나오고, 숨은 점점 가빠졌다. 궁녀들의 괴롭힘에 넘어지고 밟히고 까져서 상처 입은 무릎이나 발 때문에 조금씩 절룩이면서도 은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보시오.”
소스라치게 놀라며 은우가 고개를 돌렸다. 바싹 붙어선 남자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혹시 저 집에 볼일이 있으신 게요?”
“네?”
남자의 손가락 끝이 은우의 목적지인 솟을대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일문 대감 집 말이오.”
치마로 입까지 가리고 눈만 빠끔히 내놓고는 은우는 공포를 담고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겨울 해는 짧아 벌써 빠르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조인호라고 하오. 예조참판 조일문 대감이 부친 되시오.”
“아. 아…….”
은우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포옥 내쉬었다.
“어쩜 그리도 걸음이 빠르신지. 내 앞질러 가서 뒤를 밟지 않음을 보이려 했건만, 기회를 주지 않으시더군요.”
은우가 민망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인호가 시원하게 웃으며 물었다.
“저희 집엔 무슨 일로 오시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강씨 나인 은우라 하옵니다. 대비전에서 전하시는 서찰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란히 걷던 인호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나인이면, 대비전 항아님이십니까.”
인호의 눈에 짤막하게 실망의 빛이 스쳤다.
“지금은 아니지만, 대비마마를 지근에서 모셨습니다.”
“그러시군요.”
남자가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헌데, 팔의 상처는 어쩌다 그리되었소.”
“아, 일하다가 조금…….”
남자가 묻듯이 눈썹을 올리고서 은우를 바라보았다. 첫인상보다 더 날카롭고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어떤 경우건 상황을 장악해야 마음이 흡족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눈앞의 남자가 그러했다. 은우는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음식을 덥히는 숯에 데었습니다.”
은우가 연이어 터지는 기침 때문에 입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기침도 그렇고, 걸음도 불편해 보이던데……. 대비마마께서 하필 오늘 심부름을 시키셨나 봅니다.”
무어라 설명해야 하는지 은우가 망설이는 사이, 집 앞까지 도착하였다. 조 대감집 청지기가 인호를 발견하고서 뛰어 나왔다. 은우를 바라보자, 인호가 은우의 용건을 대신 설명하였다.
조 대감은 자리를 비운 터라, 은우는 안방마님에게 대신 서찰을 전달하였다. 용무를 마치고 물러가려는 은우를 인호가 붙잡았다.
“어머니, 항아님이 좀 다친 듯한데 집에 약재가 있습니까.”
괜찮다 아니다 하는 거절은 수선을 더할 뿐이었다. 대비마마가 특별히 보낸 궁녀가 혹여 서운한 맘을 가지게 하지 않으려, 마님은 은우의 상처를 치료하겠다 극구 고집하였다. 할 수 없이 은우는 마님이 불러 준 덕산댁에게 팔을 내밀고서, 말린 동백꽃 가루를 동백씨 기름에 개어 만든 약재를 발랐다. 보드랍고 얇은 무명천으로 동동 동여매기까지 하고서 방문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인호가 눈인사를 하였다.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은우가 고개만 숙이고 답을 하지 않자, 인호는 하인 둘에게 길이 어두우니 은우를 궐까지 바래다주라는 명을 하였다. 은우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내 고집으로 더 늦어졌는데, 어둑한 길을 홀로 보내었다가 근심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소. 내가 직접 궐까지 바래다주면 강 나인도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인호가 고집스러운 말투로 되물었다. 한 번 더 거절하면 마찬가지로 수선이 더해질 터라, 은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나으리.”
“그럼 또 뵙죠.”
무슨 뜻인지 몰라 은우의 눈이 슬쩍 찌푸려졌다.
*
대비가 머무는 자정전은 궁궐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전각이었다. 부왕이 궐을 버리고 피접을 갔을 때, 분노한 민심은 궐에 불을 놓았다. 본궁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최초에 이궁으로 마련되었으나 경치가 아름다워 선대왕부터 주로 이용하던 이곳 궁 역시 반 이상 불타 버렸다. 새로이 건물을 올리고 정궁에서 일부 건물을 옮겨다 놓으며 모양을 갖추는 중이었다. 옛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대비의 자정전은 마치 궐내에 대비의 위상을 은유하기라도 하는 듯이 궐 북서쪽으로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임금의 편전이나 세자가 머무는 성정각과도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권력 다툼과도 거리가 멀었다.
예전부터 광안은 자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고요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후원을 지나 폭이 좁은 야트막한 경사 길을 오르는 동안 사시사철 들리는 새소리를 즐겼으며, 길 양쪽 가로 나지막이 피어 있는 꽃들을 사랑했고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갖가지 나무들이 뿜어내는 은은한 향을 좋아했다.
광안은 늘 외로운 아이였다. 성정이 거친 형이나 인빈이 버티고 있는 배 다른 왕자군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부모의 정은 거의 모르고 자랐다. 광안이 태어나고 두 해가 되지 못하여 생모 김빈이 졸하였다. 몇 해 전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난 중전이 광안에게 법적 어머니였지만, 왕자군인 시절 광안은 중전보다는 대비, 자애왕후를 더 따랐다.
그 누구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아 따분할 만큼 평온했던 왕자군 시절에 광안은 조정의 관심에서 벗어난 자정전을 종종 찾았다. 느지막이 쉬며 걸으며 대비전을 향하는 동안 마음이 가벼워졌다. 대비는 거짓이나 술수를 부리기에는 마음이 소박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광안군의 유일한 말벗이나 다름없어, 광안은 시간을 내어 적적한 대비 곁에 앉아 서책을 펼쳐 시를 읽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날이 좋으면 나란히 걸어 후원의 뒤편 자그마한 연못에 세워진 연무정에 올랐다. 대비가 없이도 광안은 홀로 소담한 연무정에 앉아 서책을 읽고 시를 읊었다. 지나고 보니, 하릴없이 흘러가 덧없이 사라진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오랜만에 찾는 자정전이었다. 새소리를 듣고 떨어진 낙엽을 밟고, 꽃이 진 자리를 눈에 담으며, 겨울의 차가운 날씨에도 푸르른 소나무를 올려다보며 길을 밟아 나갔다. 달고 찬 바람을 깊게 들이마시어 몸을 씻어 내었다. 조금은, 왕자군 시절처럼 머리가 맑아지려나. 광안은 멈추어 서서 희푸른 하늘을 눈에 담았다.
자정전에 도착하자, 대비는 눈물을 글썽이며 광안을 반겨 맞았다.
“자주 문후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주상이 문후를 받지 않는데요. 어찌 이 할미에게 오겠습니까.”
아무리 권력에 둔감한 뒷방 대비 신세라 하더라도 궐에서 광안의 위치나 위태로이 오가는 이야기는 들었을 터였다. 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를 명에 보내었다는 이야기도. 어쩌면 수차례 책봉이 거부당한 세자를 위해 보내는 형식적인 주청이었으며, 아마도 명은 다시 책봉을 거부할 것이라는 추측도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대비의 자그마한 눈에 애틋한 동정심이 서려 있었다. 넘치는 정으로 광안을 과하게 불쌍히 여기고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그 점이 광안을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고려할 만큼 영민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자.”
“네, 대비마마.”
“몸은 괜찮지요?”
“건강합니다. 대비마마도 강녕하시지요.”
“나야 늘 잘 지냅니다.”
미적미적 차를 권하고 다식을 들라 하며 하고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 대비가 겨우 입을 열었다.
“강 나인, 은우 말입니다. 어제 불러 내가 심부름 하나 시켰어요. 원래 내 서찰을 은우가 썼습니다. 어제 서찰 하나 쓰고 예조참판 대감집에 전달하라 하였습니다.”
“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하며 광안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세자가 다 뜻이 있어 그러겠지만, 늙은이 나이를 먹으니 근심만 늘어서요. 잔소리 한 번만 할게요. 그리 두면 그 아이가 궁에서 버티지를 못합니다. 여인들만 모여 있는 곳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또 사내들의 다툼보다 더 잔인하기도 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찻잔을 달칵 내려놓으며 광안이 얼굴을 굳혔다. 은우는, 편하게 있고 싶다고 관심을 거두어 달라 제발 내버려 달라, 승은상궁을 내리느니 차라리 궐 밖으로 내치라 요구하였다. 매일 밤, 아니 하루에도 수차례 제 앞으로 끌고 오라 명을 내리고 싶었다. 몇 번은 강선을 불러 데려오라 하고는 이내 그 명을 거두기도 했다. 원망만 담은 눈으로 광안을 올려다보며 지금처럼 제멋대로 취하고, 차라리 내치라던 여자를 떠올리면 가슴 뒤편이 긁힌 듯이 아렸다.
“그 아이가 무슨 일을 당하기라도 한다던가요.”
“아니, 아니에요. 혹여나 해서 말입니다.”
대비는 당황해하며, 문가를 흘끗거렸다.
“제게, 소개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셨지요.”
광안이 대비전에 온 본론을 먼저 꺼내었다.
“그래요, 세자. 곧 올 때가 되었는데……. 조일문 대감 차남입니다.”
“아, 예조참판 차남이라면 두 해 전에 문과 급제를 하여 성균관 학정을 제수받았다는.”
“맞아요, 세자. 기억해 주는군요.”
대비가 아이처럼 웃으며 반가워했다.
“대비마마 조카 되지 않습니까. 이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하여……. 신경 쓰지는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세자, 충분히 고마워요. 고마워요. 실은, 그 아이가 말입니다, 이번에 무과 별시에 응시했습니다. 본디 집안에 무관이 계시긴 하여 혈통은 있었지만, 문반에 올랐던 아이가 이번에는 무과에 급제하여 홍패를 받았습니다. 대감에게도 알리지 않고 치른 시험이었다고 해서 나도 뒤늦게 알았어요.”
이번 별시라면, 얼마 전 치른 전시에 광안이 배석하였다. 광안은 응시자들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눈에 띄는 응시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기추에서 유일하게 다섯 발의 명중을 한 사람이었다. 궁술이 독보적이어서 철전을 제외하고 편전, 목전에서 최고점을 받은 이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아마 조…….
활을 잡던 팔이나 말을 타던 모양새, 반듯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던 모습은 기억나는데 얼굴이 흐릿했다.
광안이 생각에 잠긴 사이 문이 열리고 사내가 들어섰다. 절을 올리고 고개를 들자, 얼굴이 보였다. 흐릿하던 이목구비가 선명히 겹쳐졌다. 남자다운 굵은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이었다. 큰 키나 활달한 성정이나 문반보다는 역시 무반이 어울리는 모습이다. 성균관 학정을 하며 꼬장꼬장한 대신들의 비위를 맞추기엔 답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세자 저하, 조인호라 하옵니다.”
“그날 전시에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훌륭한 무예였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그날, 소신 저하의 무예를 직접 볼 수 있어 더없이 영광이었습니다.”
아부라고 폄하해 버릴 내용이었지만 무인으로 보내는 찬사와 공경이 느껴져, 광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대비가 광안의 표정을 살피며 다소 빠른 어조로 말을 하였다.
“세자, 인호의 무예를 기억해 준다니 다행입니다. 실은 말입니다, 인호가 세자를 위해 계방 작은 자리라도 맡고 싶어 합니다.”
“계방이라면, 익위사 말인가?”
광안은 의아스러운 눈을 떴다. 세자의 호위군 익위사는 내금위와는 규모와 직책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위치가 불안한 세자의 호위군이라니. 광안이 쉬이 답을 주지 않자 조인호는 오래전부터 세자와 남휼 장군을 무인으로 존경해 왔다는 마음을 고백하였다. 정8품에 해당하는 좌시직 자리라도 기꺼이 받겠다고 하였다. 조인호의 목소리는 의심이 많은 광안을 설득할 만큼 단단히 눌러 담은 열정과 신념을 품고 있었다. 광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네 마음과 정성이 고맙구나. 내 자리를 알아보마.”
광안의 답에 인호는 이마가 바닥에 쿵쿵 닿도록 절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저런, 저런. 그리도 좋더냐.”
대비가 나지막이 소리를 내며 웃자, 인호가 고개를 들며 헤벌쭉 입을 벌리고 웃었다. 바싹 긴장하여 있을 때는 우락부락한 느낌이 없지 않았는데, 저리 웃으니 꼭 천지분간을 못하는 사내 녀석 같아 광안도 기분 좋게 웃었다. 분위기가 금세 부드러워지자 대비와 인호 사이에 소소한 잡담이 오갔다.
“어제 서안을 확인하고 밤새 잠도 못 잤습니다, 대비마마.”
조 대감 집으로 어제 급히 전달한 서안이 세자에게 부탁을 해 보겠다는 대비의 답이었노라 하였다. 아무래도 자리를 부탁하는 일은 어려워 망설이고 망설이다 내일 급히 궁으로 들어오라 전갈을 보냈다 하였다.
“저런, 그랬더냐.”
“떨리고 긴장이 되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대비가 미안한 듯이 웃었다.
“빨리 줬으면 좋았으련만, 나도 어떻게나 고민을 하고 또 했는지, 어제가 되어서야 급히 내가 제일 믿는 궁인 아이를 불러 서찰을 쓰고 조용히 전달하라 하지 않았겠니.”
“아, 강 나인이 그래서 무리하면서 심부름을 왔군요.”
“응? 무슨 말이야?”
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광안 역시 웃음이 가신 얼굴로 인호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조인호는 조심성 없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길에서 먼저 만났습니다. 쓰개치마가 날리기에 주워 줬는데, 집으로 서찰을 가지고 오는 중이라더군요. 강 나인이 어딜 다쳤는지 걸음도 불편하고 기침도 하고…….”
“저런, 나는 전혀 몰랐는데. 심하던가?”
“아니,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걸음이 불편해 보이는 그런 정도였고 기침은 고뿔이라 하더군요.”
“어쩌누, 내가 고뿔이 든 걸 알지도 못하고 보내었구나.”
대비가 광안을 향해 변명을 하려 안절부절못하는데, 내관 강선이 잠시 여쭙고 들어와 광안의 귀에 속삭였다. 다음 일정이 지체된다는 독촉이었다. 승정원이니 홍문관이니 서연관들이니 일정은 귓속을 윙윙 돌 뿐, 어찌하올까요 묻는 강선에게 광안은 제대로 답을 주지 못하였다.
은우가, 아프다.
무슨 일인지, 어떤 상태인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일단 강선을 보내 조용히 상태를 알아보고, 의관을 보내라…….
머릿속 생각이 뚝, 끊어졌다. 인호가 지껄이는 소리 때문이었다.
“대비마마, 너무 심려 마소서. 안 그래도 어머니께서 대비마마가 친히 보내신 궁인이라 하여 급해 보이는 상처에는 치료도 해서 보냈습니다.”
“무엇이라. 상처? 치료?”
광안이 매섭게 되물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인호가 답하였다.
“저, 저하. 그 서찰을 전한 나인이…….”
“은우가, 몸에 치료를 해야 할 만큼 심한 상처가 있어? 어디에? 무슨 상처가!”
세자 입에서 나오는 나인의 이름에 인호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갑자기 커다란 몸을 수그렸다.
“저하, 그것이 제가 보려 한 것이 아니라.”
광안의 눈이 번득였다. 대비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인호의 답을 독촉하였다.
“저하께 제대로 고하거라. 어서.”
“……팔목 안쪽에 상처가 있어 아파했는데, 물어보니 음식을 덥히는 숯에 데였다 했습니다. 하여, 집에서 사람을 시켜 치료를……. 그것뿐이옵니다.”
광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강선! 은우를 오라 하라. 당장! 내 지금 성정각으로 갈 터이니.”
펄럭이는 곤룡포 자락의 끝만 지켜보며 조인호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감추며 머리를 조아렸다.
문이 닫히고 잠시 후, 대비의 입에서 긴 숨이 나왔다. 일을 그르친 건가 눈을 꿈벅이는 조카에게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다. 네 이 일로 세자의 노여움을 받진 않을 터이니. 허나, 세자의 여인이다. 앞으로 조심 또 조심하여야 한다.”
인호는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아 굳어진 몸으로 여부가 있겠냐 머리를 숙였다. 어쩐지 너무 예쁘고 단정하였다. 보내온 서안의 서체마저 모습처럼 아름다워 궐의 지밀궁녀면 다 이토록 고운가 잠시 생각하긴 했었다. 대비가 부드럽게 인호에게 말하였다.
“어여쁘고 착한 아이이니, 그날 일을 감사히 여긴다고 전할 것이다. 그리하면 세자가 너를 탓할 리가 없다.”
대비는 평정을 무너뜨린 광안을 떠올렸다. 광안이 속마음을 이토록 선명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서책을 읽어 주러 드나들던 왕자군 시절 광안은 신중하고 조심성이 많아 그러했고, 광포해진 광안은 적이 물어뜯을 제 약점을 숨기는 일에 골몰해서였다.
강은우. 그 아이가 광안의 심장을 쥐었구나.
대비의 입술에 야트막한 미소가 스쳤다.
‘중전. 네가 네 꾀에 넘어갔어.’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웃음이 터졌다. 중전의 낭패스러운 얼굴을 상상하자, 웃음이 더욱 커졌다. 목이 뒤로 젖혀지고 서안을 두드리며 대비는 쉽사리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
성정각 보춘정 안에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울렸다. 서책을 넘기는 손가락이 뻣뻣하였다. 강선이 쫓아오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걸어 성정각에 도착했다. 하급 내시는 뛰어가서 은우에게 광안의 명을 전하였을 것이다. 일각은 지난 듯한데 아직 은우는 들지 않았다. 광안의 손이 탁 서책 위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곤룡포를 젖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하, 지금 든다 하옵니다.”
강선이 광안의 조급증을 주저앉히려 두 번째 말하고 있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었는지 밖에서 은우가 왔음을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라 하라.”
성급한 답에 느린 걸음으로 응대하며 은우가 걸어 들어왔다. 얼굴을 보자 가슴속에 굵고 단단한 덩어리가 치받는다. 내내 저 얼굴이 보고 싶었다. 깊은 곳에 부스럼처럼, 손에 닿지 않는 가려움을 삭히려 낮에도 훌쩍 말을 몰아 춘당대를 지나 서총대를 빠른 속도로 돌았다. 밤마다 땀에 흠뻑 젖도록 남휼과 검을 맞부딪치고 손 하나 까닥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잠이 들었다. 다만 치미는 울화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들어서는 얼굴을 보고 알았다. 저 얼굴이 보고 싶었다. 얼굴에 머물던 시선을 내려 이제 광안은 치마폭에 가려진 느릿한 움직임만 뚫어져라 보았다.
“강선, 물러가라.”
은우가 앞으로 다가오기 전에 명했다. 주위를 물린 후, 다소곳이 곡좌하는 은우에게 광안이 물었다.
“그간 잘 지냈느냐.”
“네, 저하.”
“불편한 곳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저하.”
기침을 꿀꺽 삼키며 은우가 답했다. 일부러 낮고 작게 내는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일어서라.”
은우가 멈칫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문가로 갔다가, 내 앞까지 걸어오라.”
의문스러운 표정은 잠시였다. 은우는 평상시처럼 차분한 동작으로 명을 따랐다. 느릿한 걸음으로 움직이는 은우에게서 광안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걸음이 불편하고…….
인호의 목소리가 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까이 오라.”
보료 앞에 선 은우를 올려다보았다. 말간 얼굴이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것도 보일 마음이 없다.
“치마를 걷어라.”
“저하, 어인 일로…….”
은우가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걷을까!”
고개를 숙이고 은우가 청색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흰 버선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
치맛자락을 쥔 주먹이 하얗다. 바들바들 떨며 치마를 한 치 더 올린다. 종아리에 함부로 긁힌 자국이, 푸른 멍 자국이 보였다.
“더.”
“저하!”
“더, 더, 더!”
천천히 드러나는 무릎이 자줏빛이었다. 깨어진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배어 나와 속바지에 핏자국이 있었다.
“이 상처가 무엇이냐.”
“넘어졌습니다.”
광안이 벌떡 일어서 은우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저하.”
은우가 얼굴을 찡그렸다. 으스러지도록 쥐고 있는 어깨가 아파서이다.
그래, 아픔을 아는 인간이!
광안은 그대로 은우를 잡아 보료에 주저앉혔다. 막무가내로 치마를 걷고 버선을 벗겨 냈다. 은우의 부드러운 발을 기억하고 있다. 생각시로 들어와 깊고 한적한 대비전에서 예쁨을 받으며 붓을 쥐던 지밀이었다. 험한 일이라고는 중궁전 생과방으로 옮겨 두 달이 전부인 궁인의 발은 아이의 것처럼 뽀얬다. 이토록 붓고 핏줄이 터져 퍼렇게 멍들고 찢어지고…… 발톱이 피멍으로 새카매진 발이 아니었다. 심장이 얼음처럼 식었다.
“무슨 상처냐.”
묻는 목소리는 차갑다. 은우는 발목을 잡힌 채 부신 듯 깜박이며 광안의 눈만 바라보았다.
“넘어졌느냐.”
“저하.”
광안이 은우의 팔목을 낚아채듯 쥐었다.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리자 작게 비명을 질렀다.
치료를 했어? 뭘!
광안은 벌겋게 입을 벌린 상처를 보며 혀를 짓씹었다.
“실수로 화상을 입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 물에 젖기에, 감쌌던 천을 풀었습니다.”
“숯에…… 데었나. 누가…… 숯으로 너를!”
은우가 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우욱, 광안이 제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몰아쉬었다.
“저하?”
호흡을 참느라 광안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간헐적으로 새어 나왔다. 무섭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숨기려는 듯 광안이 몸을 틀었다. 은우는 광안이 뿌리치는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광안의 가슴에 끔찍하게 남아 있던 화상이 기억났다. 흉터를 쥐어뜯으며 고통에 몸을 비틀던 그날 밤의 광안이 떠오르자 심장이 철렁 배 속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저하, 저하.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은우는 차가워진 광안의 손을 문지르며 억지로 환히 웃었다. 맥을 짚듯이 손목의 여린 살을 짚어 나갔다. 엄지로 살살 문질러 주고, 툭툭 뛰어오르는 맥에 손가락을 가만히 두었다. 광안의 호흡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음식을 하다 보면 데는 일은 흔합니다. 수방에서는 바늘에 찔리기가 다반사고, 제 한방 나인, 미향이는 다림질하다가 손등을 데어 옵니다.”
광안이 얼굴을 돌려 은우를 바라보았다. 파르스름한 안색을 보며, 은우가 다시 환히 웃었다. 들먹이던 광안의 가슴이 점차 가라앉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제 다 나아 별로 아프지도 않습니다.”
“의관을 부르겠다.”
“네, 저하.”
은우는 방긋 웃었다.
“저하, 그러면 석수라 일을 마친 후에 치료받겠습니다. 지금 한창 준비 중입니다. 퇴선간에 있어야 할 제가 자리를 비워 일손이 달릴 겁니다.”
“수라는 필요 없다.”
“저하. 저하가 드시지 않으시면 동궁전 궁인들이 모두 저녁을 굶습니다.”
“내가 왜! 그들의 저녁까지 걱정해야 하는데!”
“제가, 배가 고파 그럽니다.”
은우가 손을 들어 고집을 부리는 광안을 달래듯, 흑용포 소맷부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지금은 약보다 밥이 고픕니다, 저하.”
퇴선간은 막바지 수라 준비로 분주했다. 은우는 조치를 데우는 화로 앞에서 열심히 부채질을 하였다. 아무리 골똘하게 생각해 봐도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때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휘말리기도 한다. 맞힐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고민과 닥쳐올 일에 대해 근심은 금세 눈덩이처럼 커져 제 몸을 짓누를 뿐이다. 그럴 때면, 은우는 당장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려 했다. 광안의 얼굴을, 광안의 말을, 떨리던 손을, 파르스름하게 질리던 안색을, 의관을 부르겠다 화를 내던 음성을 지웠다. 조치를 데우고 석수라 상을 올리는 일에 집중하였다. 침을 삼키기도 힘들도록 목이 홧홧하게 아프고 등에 으슬으슬 한기가 들어 자꾸만 몸이 처졌지만 억지로 어깨를 추슬러 올리며 바지런히 움직였다.
퇴선간으로 물려진 수랏상을 보며 은우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흔적을 찾아야 할 만큼 수라를 거의 드시지 않으셨다. 물린 수랏상을 챙기는 나인들이 와아, 기분 좋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늘 찬이 맛있어 보였는데. 입맛이 없으셨나 봐. 육전 하나는 내 입에 들어오겠지? 응?”
퇴선간으로 물린 수라는 나이가 많은 상궁 순서대로 상을 받았다. 귀한 찬은 조금씩 남겨 주시는지라 차례를 기다리는 나인들은 꿀꺽 군침을 삼켰다. 상궁마마님들이 퇴선간을 나가고 나인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으려 할 때였다. 정옥이 밥 한 그릇과 국그릇을 작은 소반에 탁, 소리가 나도록 두었다. 중궁전 지밀에서 온 나인, 소셋물을 담당하는 나인이다. 은우가 제 자리를 뺏어 행운을 가로챘다는 이유로 모질게도 괴롭히고 있다.
“은우 넌 저리로 가서 먹어. 자리가 비좁아서 말야.”
둘러앉아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등 뒤에 가시처럼 꽂혔다. 어전이 입에 감기네, 우설찜이 녹아 없어지네 들으라는 듯 떠드는 소리에 입에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며칠 동안 잘 먹지도 못하고 고되게 일을 했더니 입은 모래라도 뿌려 놓은 듯 깔깔했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은우가 밥을 크게 퍼서 입에 한 술 넣고 꾹꾹 씹던 참이었다. 갑자기 등 뒤로 확 찬물이 떨어졌다. 밥그릇에도 국그릇에도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어머, 미안. 손이 미끄러졌네.”
먹은 그릇을 담가 두었던 구정물을 퍼붓고서 정옥이 생긋이 웃었다.
“정옥 항아님.”
은우가 정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왜, 강 항아님?”
“밥에 구정물을 붓는 건 너무 심하지 않아? 애써 지은 수라야.”
“그래서?”
“정도껏 하라고.”
정옥의 뒤로 중궁전에서 같이 왔던 나인 셋이 더 붙어 섰다.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서 깔깔 웃었다.
“이제 그만들 하세요. 그런다고 달라질 것 없으니.”
“뭐 어째?”
가장 나이가 많은 나인이 은우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네가 감히 누굴 가르쳐?”
본래 동궁전 배속이던 퇴선간 나인들이 주춤주춤 다가서다 기세에 눌려 멈춰 섰다. 머리채를 흔들던 나인이 은우를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비렁뱅이 중인 고아 나부랭이가.”
바닥을 짚은 은우의 손을 밟아 비비며 정옥이 이를 갈았다.
“얜 왜 비명도 안 지르니, 재수 없게.”
은우가 이를 악물었다.
“네가 밤에도 이러니 세자 저하도 한 번 더 신기해서 불렀나 보다. 응? 왜, 그날 밤 있잖니, 얘 기절했다는 날. 그날도 입 꾹 다물고 있었을래나?”
은우가 고개를 들었다.
“감히, 네 천한 입에 저하를 욕되이 올리지 마.”
와장창 소리를 내며 은우가 먹던 밥과 국이 소반째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중궁전 출신 나인들 넷이 달려드는 걸 보며 흰수라 새옹을 맡은 퇴선간 나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아무래도 정도를 지나쳤다. 지밀상궁이든 감찰상궁이든 모시고 올 생각이었다.
언제 문이 이렇게 반쯤 열려 있었나, 갸웃하며 퇴선간 문을 나서자마자 나인은 우뚝 멈춰 섰다. 헉, 소리조차 못 지르고 굳어 버린 나인을 스치며 남자가 움직였다. 죄다, 헛소리였다. 세자 저하를 가까이서 본 궁녀들이 키가 팔 척에 쭉 뻗은 팔다리에 피부가 백설 같고 눈이 검은빛 밤바다 같고, 입술이 홍화 같아 용포를 벗어도 눈에 띄는 미남자라 하였지만 죄다 쓸데없는 설명이었다. 세자는 심장이 얼어붙도록 냉혹한 눈빛에, 발끝까지 저리게 할 만큼 색스럽게 아름다웠다.
“으흠, 으흠. 다들 뭐 하는 게냐.”
내관 강선의 기척에 퇴선간에는 시간을 절단한 듯한 정적이 흘렀다. 공간을 가로지르며 용포 자락을 거칠게 풀어 헤치는 소리만 울렸다. 퇴선간 구석에서 소리는 멈추었다. 은우는 구정물을 뒤집어쓰고서 반쯤 엎어진 채, 여전히 손을 바닥에 짚고 있었다. 초라한 어깨를 은빛 자수가 찬란한 아청색 용포가 툭, 덮었다.
“저하.”
“저, 저하.”
“주, 죽여 주시옵소서, 저하.”
“죽여 주시옵소서어.”
갑자기 나인들의 비명 같은 부름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세자는 소란 속에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산발된 머리를 다섯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용포가 덮인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눈과 코가 붉어져 있었다. 광안이 고개를 기울여 은우와 눈을 맞추었다. 일렁이는 광기에 은우의 눈이 공포감으로 흔들렸다.
“누구를 죽일까.”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참고 있던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다들 죽여 달라 소원하니, 내가 여기서 누굴 죽이면 되겠느냐.”
낮아서 더 무서운 목소리였다.
“저하.”
“은우야, 네가 골라라.”
“제발, 저하.”
은우가 밟히고 찢어진 손을 들어 광안의 두루마기 끝을 잡았다.
“모두 저하를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검은 불꽃이 튀는 눈빛이 두려워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은우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엉망이 된 손으로 두루마기 소매 끝을 파고들었다. 광안의 손등을 덮으며 조심스레 위를 더듬었다. 팔목 안쪽을 어루만지자, 광안이 눈을 감았다. 입으로 뜨거운 숨을 길게 세 번 쉬어 냈다.
“저하, 석수라를 드셨으니, 소인 내의원에 가겠습니다…….”
은우가 관심을 돌리기 위해 광안에게 의관에게 가야 한다는 말을 꺼내었다. 억지로 끌어 올리는 입매를 보며 광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관을 향해 지시했다.
“내 침전으로 양평군을 불러라.”
쳐다보는 은우에게 용포를 단단히 여미어 주며 짤막하게 하명했다.
“가서 기다려라.”
은우가 퇴선간을 빠져나가자 공포에 질렸던 나인들이 다시 죽여 달라, 아니 살려 달라 애원하기 시작했다. 강선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광안을 살폈다.
“쌀 낱 하나하나에도 농부들의 신고辛苦가 들어 있어 가만히 앉아 먹는 일도 만족스러운데, 감히 쌀 낱 하나라도 함부로 없애서는 아니 될 일이다.”
광안의 차분한 어조에 나인들이 고개를 바닥에서 들었다. 평소 검면함을 강조하는 임금이 강조하는 바였다.
“알듯이, 주상 전하의 말씀이시다.”
“네, 저하.”
“바닥에 떨어진 쌀 낱 하나, 배춧잎 조각 하나 버릴 수는 없는 법.”
광안이 은우를 에워쌌던 궁녀 넷을 향해 말했다.
“모조리, 핥아 먹어라.”
전갈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와 일렬로 시위한 큰머리상궁 들을 향해 광안이 돌아섰다. 동궁전 지밀상궁과 퇴선간상궁, 그리고 궐내 감찰상궁, 제조상궁까지 천천히 차례로 바라보았다.
“내 말에 그릇됨이 있는가.”
“아니옵니다, 저하.”
상궁들이 머릴 숙였다. 눈치를 보던 나인이 하나 둘, 고개를 처박고 구정물과 흙 범벅이 된 밥을 개처럼 핥아 먹기 시작했다.
“주상 전하의 명을 어기고 고개를 쳐드는 궁인은, 뜻대로 처리하시오. 제대로 못할 시, 책임은 상궁들에게 묻겠으니.”
광안이 바람을 일으키며 퇴선간을 나갔다. 울음소리와 구역질하는 소리, 상궁의 꾸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강선이 잰걸음으로 쫓아왔다.
“저하 잘하셨습니다. 잘 참으셨습니다. 저하, 저하.”
강선이 울먹이는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렸다.
*
“저하. 아직…….”
강선이 곤란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던 광안은 월대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나가 누마루에 섰다. 예정대로라면 누각 집무실에서 야대를 청하는 대신들을 만나야 했다. 밤에 부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야대는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강습 시간이지만 세자가 장성함에 따라 성격이 달라짐이 일반적이었다. 공식적으로 대리기무代理機務를 하지 않지만, 쇠약해진 부왕 대신 상당 부분 정무를 맡고 있는 광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권력에 관한 은밀한 대화나 정국에 대한 논의, 나라 안팎으로 벌어지는 사건과 상황들에 대한 보고가 이루어졌다.
광안은 오늘 야대를 청한 대신들을 모두 물리고 저녁 시간 내내 홀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기다림에 지쳐 이제는 초조하게 누마루를 오가고 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려 고개를 들자, 튼튼한 가지를 누각 위로 뻗어 낸 살구나무가 보였다. 보춘정이라 불리는 성정각의 누각에 봄을 알리는 나무였다. 봄이면 하얀 꽃이 소복소복 피어나고 꽃이 떨어진 자리에 앙증맞은 열매를 맺던 나무가 잎도 눈도 열매도 없이 정직하고 단순하게 제 몸을 드러내고 있다. 찬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 광안의 뺨을 스쳤다. 용포와 익선관을 벗고 야장의 차림으로 있던 광안은 나무처럼 팔을 길게 뻗어 밖으로 내밀었다. 꽃이 있어 눈이 즐겁고 열매를 맺어 입이 즐거웠으나 모든 것을 발라내고서 맨몸으로 겨울을 맞는 살구나무는 가슴을 곧게 파고들었다.
“저하, 양평군 대감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드디어 강선이 아뢰었다. 광안은 큰 걸음으로 누각을 지나 침전으로 향하였다.
누워 있는 은우 옆에 앉아 맥을 짚던 양평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있으라 손짓하며 광안은 은우 앞으로 앉았다. 차가운 구정물에 엉망으로 젖었던 은우는 퇴선간을 나서면서 이미 오한과 탈진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어혈을 풀어 주는 약초를 찧어 넣은 더운 물에 몸을 담근 후, 어의가 올린 탕약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하였다. 기침과 열은 잡힌 상태였다.
“상처는 어떠한가.”
“침의가 들어, 부어오른 곳은 침을 놓았고 탕약에 울혈을 가라앉히는 약재를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몸을 이완시키는 작용을 하는지라 깊이 수면에 들었습니다. 피부에 올라온 멍은 제비꽃을 진하게 달인 물을 수시로 발라 주면 빨리 회복될 것입니다.”
“……화상은.”
어의가 광안의 안색을 살폈다. 화상은 광안의 고통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단어이다. 숨기고 싶은 고통으로 가늘어지는 눈을 보면서 무던하게 답하였다.
“환부 주변에 침을 놓았고 탕제로도 지어 올렸으며…….”
“흉터가 남겠느냐.”
“우선 지유와 황백피 가루를 꿀에 개어 발랐습니다. 하루 수차례 환부를 살피어…….”
“흉터가 남느냐 물었다.”
“저하. 다행히 상처가 크지 않습니다.”
“흉터 남지 않게, ……양평군 대감!”
“소신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양평군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물러가는 양평군을 광안이 다시 불렀다.
“양평군 대감.”
“네, 저하.”
광안이 양평군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고맙소.”
“내일 다시 들르겠습니다.”
여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는 광안의 옆모습을 눈에 담고는 양평군이 침전을 빠져나갔다. 간간이 기침을 하며 몸을 뒤척이면서도 은우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광안은 자리에 앉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반 시진쯤 지난 후 의녀들이 들어왔다. 땀을 닦아 내는 수건을 갈고, 대야에 물을 바꾸었다. 금침 옆에 다가오더니 작은 그릇과 붓을 들고는 머뭇거렸다. 광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치마를 걷어 내고 무릎과 종아리, 발등에 제비꽃 물을 발랐다. 붕대를 동여맨 팔목에 머무르는 광안의 시선을 읽었는지 의녀가 조심스레 아뢰었다.
“화상을 입은 팔목은 세 시진마다 한 번씩 환부를 살피라 하였습니다. 침수 드셔야 하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양평군 나으리께서 오늘 밤 소인이 침전 밖을 지키라 하였습니다. 혹여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전갈을 달라고도 하였습니다.”
“알았다. 약재는 두고 가라.”
의녀들이 강선의 의견을 살피듯 눈짓을 하고 약재 그릇을 나란히 대야 옆에 두고는 방을 나갔다.
“저하, 이제 침수 드십시오. 금침을 준비했습니다.”
서 상궁이 조심스레 광안에게 아뢰었다. 지금 은우가 누워 있는 방은 평소 광안이 사용하던 방이 아니라 자그마한 마루를 두고 건너편에 있는 방이었다. 비어 있는 방이지만, 만약 세자빈을 들인다면 빈이 사용할 침전이었다. 잠이 든 은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서 상궁과 강선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한 모양이었다. 궁녀를 세자의 금침에 먼저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궁녀 침소로 보내면 광안의 불호령이 떨어질 터이니 고민 끝에 건너편 온돌방으로 눕힌 모양이었다.
광안은 퇴선간 이후, 내내 서 상궁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동궁전 궁인을 통솔하는 서 상궁이 눈에 보일 정도로 손을 발발 떨었다. 동궁전 소속 지밀나인들이 감히 세자의 승은을 입은 궁녀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상처를 입혔으며 세자를 능멸하는 말을 하였다. 더군다나 세자와 각을 세우는 중궁전에서 보낸 나인들이었다. 당장이라도 서 상궁에게 불미한 사건의 책임을 물어 벌을 내린다 하여도 전혀 이상할 일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아뢰지 못하고 떨고 있는 서 상궁 대신에 흠흠, 헛기침을 하며 강선이 아뢰었다.
“저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침수를…….”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광안을 보며 강선과 서 상궁이 다시 고민에 빠졌다. 결국 소리를 죽여 가며 광안의 금침을 나란히 펴 놓고서 둘은 침전 밖으로 나갔다.
광안은 무명 수건을 들어 은우의 이마에 맺히는 땀을 한 번 더 닦았다. 어설픈 손길인데 은우는 색색 숨소리도 고르게 내며 잠에서 깨지 않았다. 편안한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광안이 나란히 은우 옆으로 누웠다. 팔을 괴어 받치고 고개를 비스듬히 세워 은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든 눈이 애틋하고 예뻐 손끝으로 속눈썹을 쓰다듬었다. 볼록하게 위로 솟아 아이 같은 윗입술을 검지로 슬며시 두드려 보고 순한 코끝을 살며시 스쳤다.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어찌, 이리도 순하게 생겨서…….’
고집은 황소로구나.
광안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지난 보름간 내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익숙한 불면이었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이 차갑고 쓸쓸했던 건 처음이었다. 상처가 남은 자그마한 손을 쥐어 가만히 입에 올렸다. 이 아이의 향이, 체온이, 그리고 포근함이 그리웠다. 어느새 광안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뒤척이며 팔을 뻗었다. 포근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 광안은 번쩍 눈을 떴다. 강선을 불러 찾으라 해야겠다. 머리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데, 바스락 소리가 났다.
“저하.”
바닥에 앉아 있던 은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더 주무십시오.”
“너는, 어찌하여 거기에 있느냐.”
“눈을 뜨니 저하의 금침 위에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황공하고 송구스러워…….”
“그래서? 또 가려 했느냐.”
은우는 저번에도 잠이 든 광안을 내버려 두고 혼자 제 처소로 사라져 버렸다. 홀로 눈을 뜨는 기분이 가히 좋지 않았다.
“……그래야 하는데, 못 갔습니다.”
“왜.”
은우는 답을 하지 않고 광안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다리가 아직 많이 아파 움직일 수 없는 거냐, 처소로 돌아가면 또 너를 괴롭힐 자들이 있느냐, 열이 다시 오른 것이냐, 기운이 없어 걷지를 못하겠느냐, 여러 가지 질문이 어지러이 스쳤다. 어둠 속에서 은우의 얼굴이 해쓱하였다. 하긴, 그렇게 아팠는데…….
“걸을 기운도 없느냐. 지금 약을 들이라 해야겠다.”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저하. 다 나았습니다.”
“가까이.”
광안이 손을 뻗었다. 은우가 조금 가까이 다가왔다.
“더.”
광안이 금침 위를 툭툭 두드렸다. 앞으로 살포시 앉는 은우의 안색을 살피고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미미하지만 열감이 느껴졌다.
“밖에 의녀가 있다. 멍이 든 상처에 약도 바르고.”
은우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걸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응?”
“저하 얼굴, 조금만…….”
은우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떼어 냈다.
“조금만 더 보고 가려 했습니다.”
이마를 짚었던 광안의 손이 미끄러지며 뺨을 쓰다듬었다.
“다시는 가까이에서 못 뵐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입술에 대고 엄지를 문질렀다. 은우는 열 기운에 까슬해진 입술을 떨며 말을 이었다.
“못 뵙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보고 싶고, 보고 싶어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꾸짖을 때마다 더 보고 싶고. 저하가 매일매일…… 눈을 뜨나 감으나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도, 안 되는 줄 아는데도.”
“왜.”
은우의 눈에 원망이 스쳤다. 턱을 붙잡아, 비트는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를 보고 싶어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오면.”
은우의 눈이 물기에 젖어 반짝였다.
“소인이 감히 저하를 보고 싶어 해도 되옵니까.”
“아니 될 말.”
냉정한 답에 딱딱하게 굳어 버린 턱을 끌었다. 착하게도 순순히 이끌려 오는 얼굴에 얼굴을 기울이고, 까슬한 입술에 입을 맞대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속살에 혀를 미끄러뜨려 넣고 몇 번이고 보드라운 혀를 말아 올렸다.
“주제넘은 말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하.”
광안이 양손으로 얼굴을 폭 감쌌다.
“나를, 매일 보아라.”
“저하.”
커지는 눈을 보며 고름을 풀었다. 드러나는 어깨에 입을 맞추고, 목덜미를 핥았다. 움츠리는 몸을 잡고서 치마를 풀고, 부끄러움으로 자꾸만 숨기는 가슴을 드러내어 코를 묻었다. 여자의 살내음이 가득 들어왔다. 앓고 있는데……. 오늘은 결코 건드리지도 않으려 했는데.
“네가 나를 도발하였다.”
상처 난 손을 들어 입을 맞추고, 피멍이 든 양 무릎을 세워 올려 입술을 차례로 눌렀다. 무릎에서 시작한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은우가 다리를 자꾸만 오므렸다.
“저하. 저하.”
몇 번이고 머리를 잡는 손이 성가셔 양손으로 꾹 누르고 혓바닥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핥아 올리자 자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 되옵니다, 저하.”
숫제 울먹이는 소리였다. 입을 맞출 때마다 혀를 움직일 때마다 아니 되옵니다, 아니. 아니. 끝없이 반복하는 소리가 얄미워 갈라진 틈을 헤집었다. 딱딱하고 자그마한 구슬에 혀끝이 닿자 바늘에라도 찔린 것처럼 몸을 파드득 떨었다.
“좋아하는구나.”
“아니, 아니…….”
여자는 다리를 오므리고 고개를 흔들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양손으로 다리를 더 넓게 벌리고 안쪽을 깊이 찌르다가 다시 돌기를 훑어 올렸다. 앓는 소리를 내며 여자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가장 부끄러운 곳을 훤히 드러내고 예쁜 얼굴을 가린 모습이 귀여워 광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하는구나.”
이번에는 아무 답이 없이 숨만 몰아쉬고 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혀를 빠르게 또 느리게 굴리자 울음처럼 말했다. 좋아요. 그러니…….
제발.
흠뻑 젖은 속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음경이 파고들었다. 은우가 손을 들어 광안의 저고리를 풀어 헤쳤다. 광안이 반쯤 풀린 저고리를 벗어 던지자, 이번에는 속적삼을 파고들었다. 어깨 아래로 끌어내리고 그마저 벗게 만들었다. 벗은 상체 위를 은우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림을 그리 듯이 움직였다. 아래로는 빠듯하게 광안을 받아 내면서 자꾸만 가슴을 어루만지고 고개를 들어 흉터에 입을 맞추었다. 뾰족한 돌기를 손가락으로 문지를 때마다 광안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은우의 숨소리도 빨라졌다. 으으응, 참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교성을 지르며 은우가 말했다.
“여기, 흉터.”
손바닥으로 쓸고 혀로 핥자 광안의 얼굴이 불편함으로 찡그려졌다. 손을 잡아 떼어 내려는데 은우는 당과를 물고 있는 아이처럼 계속 흉터에 달라붙었다. 광안이 저절로 사려 물게 되는 이를 꾹 다물고서 쿡, 깊이 몸을 쳐올렸다. 은우가 아아, 몸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은우를 경련하듯이 떨게 만드는 지점을 알고 있다. 슬쩍 물러났다가 다시 한 번 건드리자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비틀었다. 무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듯이 광안의 등을 꽉 껴안고 가슴을 아이처럼 빨아들이자 광안은 순간 눈앞이 하얗게 탈색되는 것만 같았다. 광안은 은우의 손을 잡아 떼어 냈다.
“으응, 꼭…… 꽃 같아요.”
흉터에 입을 맞추며 은우가 말했다.
“예쁜 수술이 있는 꽃요.”
은우가 꽃 수술을 다시 빨아들이자,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소름이 돋아 올랐다. 광안의 다문 입술 사이로 으으 격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런 제어도 하지 못한 채 허리를 격렬하게 움직였다. 은우가 흔들리며, 숨을 몰아쉬며, 울듯이 소리를 내며 광안의 흉터를 더듬었다. 점멸하던 하얀 불빛이 일시에 팟 하고 터져 버렸다. 여전히 몸을 묻고 있는 광안에게 은우가 하아, 하아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이상하게도, 여기가…… 계속, 생각났어요.”
손바닥은 둥글게, 꽃을 덮고 수술을 문질렀다.
“저는, 꽃을 좋아해요.”
땀이 밴 이마를 맞대고서 은우가 고백하듯 속삭였다. 열기가 남은 맨 몸이 맞닿았다. 광안의 감은 눈이 가늘게 떨렸다. 은우가 꽃잎의 결을 다루듯이 부드럽게 흉터를 쓰다듬었다.
“왜, 아프십니까.”
광안이 눈을 감고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엇이 아프게 합니까.”
무엇도 아프게 하지 못할 여린 혀를 내밀어 흉을 핥았다. 타액이 말라 가슬가슬해지는 혓바닥으로 수술까지 한 번에 길게 훑어 내리자 광안은 다시 몸을 떨었다.
“무얼 담고 계십니까.”
“아무, 것도.”
은우가 도톰한 입술을 가슴에 붙이고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입술을 밀며 툭툭 뛰어올랐다.
“제가 먹어 버리면 아니 됩니까.”
“무얼.”
“독……. 품고 계신 독…….”
발작하여 쓰러진 날, 찢어진 그림 조각처럼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간헐적인 신음과 함께 섞여 나왔다.
‘무엇이 두려워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우는 입을 맞추고 뺨을 비비고 허공을 헤집는 손을 붙잡았다.
‘그러실 리가, 아바바마가 나에게 그러실 리가.’
광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은우가 입술을 벌려 광안의 가슴을 감물었다. 저하, 부디 아프지 마소서. 광안의 가슴에 쌓인 원망과 두려움의 독이 은우에게 옮아 오는지,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눈을 가늘게 떴다.
“깨웠구나.”
광안의 음성을 들으며 은우가 손을 뻗었다. 느낌으로 더듬어 가슴 위 붉은 자국을 쓰다듬었다.
“여쭈어도 되옵니까.”
목소리는 잠에 취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서 은우가 물었다.
“상처를…….”
광안의 기름한 손가락이 은우의 머릿결을 파고들었다. 나긋한 손길에 졸음이 쏟아진다. 은우가 억지로 눈을 떴다.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광안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꿈이다.”
은우가 눈을 감고서 입 끝을 올렸다.
“깨지 말기를…….”
광안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능라처럼 부드러운 머리채가 흘렀다. 살살 손끝으로 동그란 두상을 긁듯이 만져 주자, 가르릉 소리를 내는 고양이처럼 숨을 색색 내어 쉬었다. 입술은 벌린 채로 여전히 가슴에 붙어 있다. 약기운 때문인지 은우는 꽃 같다는 흉터를 핥다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전란 중,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
“……네.”
잠결 속에서 은우가 답한다.
“도적 떼에 납치되어, 다른 자에게 넘겨졌다.”
은우는 숨소리만 낼 뿐 답이 없었다.
“조선 왕가를 증오하는 자였다. 부왕의 아들인 나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던, 여립의 숨겨진 아들이었다.”
손을 천천히 들자, 매끄러운 머리칼이 주르륵, 광안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은우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다.
“고문당하다 혼절하고 다시 깨길 반복했다. 혀를 깨물어 죽고 싶었다. 매 순간 차라리 죽이기를, 소원했지. ……죽일 마음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납치된 까닭이 나를 폐위시키고 싶었던 부왕의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립의 아들이 아니라 왜의 장군에게 포로로 넘기고 싶어 했다고.”
가슴으로 따뜻한 물이 옮아왔다. 물은 짓이겨진 흉터를 적시고 심장을 적셨다. 눈을 뜨지 않고서, 서러운 꿈이라도 꾸는 듯 은우가 흐느꼈다.
“……모조리 죽었다. 고문당하던 나도 죽었다고 생각했다. 덮으면 사라질 일이라 믿었다. 나는, 무력하고 서툰 열여덟이었다. 너무, 어리석었다.”
광안의 음성이 물에 잠겼다. 상처를 더듬는 입술 위로 은우의 뜨거운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