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안-4화 (4/10)

四章

발작

화로에 참숯이 발갛게 타올랐다. 부채질을 하며 온도 조절을 하는 나인 둘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화로 위 새옹(곱돌솥) 뚜껑이 끓어오르는 수증기에 맞춰 타닥타닥 들썩였다. 나인이 부채질을 멈추고 여전히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눈으로 새옹과 숯불을 번갈아 살핀다. 흰수라를 짓는 새옹의 불 조절을 책임진 이가 퇴선간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된 나인이다. 허리를 굽힌 나인 뒤로 퇴선간 상궁이 섰다. 역시 예리한 눈매로 불을 살피고 새옹 뚜껑의 움직임을 살핀다.

“조금만 더 불을 올리거라.”

“네, 마마님.”

가장 중요한 흰수라를 담당한 나인의 부채질이 조심스럽다. 팥수라가 지어지는 다른 새옹은 상궁의 지시에 따라 부채질을 멈춘다. 상궁은 이어 안소주방에서 들여온 국과 조치를 데우는 불을 살폈다. 미역국과 곰탕에서 자그마한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늘 조수라의 조치는 맑은 젓국이었다. 세자는 토장 조치보다는 맑은 젓국 조치를 즐기고, 곰탕을 좋아하며 다른 상전들과 다르게 흰수라보다는 팥수라을 조금 더 선호했다. 퇴선간은 궐의 중간 부엌으로, 동궁전에는 침전 동쪽 전각 한구석에 배치되어 있다. 수라는 직접 퇴선간에서 지었다. 그 외에도 소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점검하고, 국이나 조치같이 따끈하게 올려야 하는 음식들을 데우는 일을 주로 했다. 물론, 퇴선의 뜻대로 물려진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일도 주요 업무이다.

본디 동궁전에 배속되며 은우가 맡은 업무는 퇴선간이었다. 그날만이었다. 하필 그날만……. 마지막 순간까지 소셋물 시중을 들 수 있다 몇 번이고 장담했던 나인 정옥은 토악질로 온통 옷을 더럽히고는 엉엉 울었다. 새벽 번을 서거나 새벽 시중을 들어야 하는 지밀 외에, 하필 그 새벽에 깨어 옷차림을 갖추고 있었던 이가 은우밖에 없었다.

꼬리가 기다란 새가 놀랄 만큼 크고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펴고 금빛 가루를 날리며 은우의 이마를 쪼았다. 생생한 통증으로 잠이 깨었다. 은우는 잠을 다시 청하며 몇 번 뒤척이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잠시 근처 뜨락이나 거닐까 하였다. 처소 문을 열고 나오는데, 지밀상궁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하게 은우를 끌었다.

빠르게 걸으며 소셋물을 어떻게 들고 서 있어야 하는지 상궁으로부터 설명 들었다.

‘대비전 지밀을 오래했다 들었다. 이름이 은우? 은우 맞지?’

‘네. 마마님.’

‘은우야, 잘할 수 있지?’

‘네, 상궁마마님.’

대비전에서 소셋물은 해 본 적이 없지만 지밀이 갖추어야할 몸가짐과 법도는 아는 터라, 실수 없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 새벽에 머리에 물세례를 맞으며 꾸지람을 들었어도 상궁마마님이 심하게 야단치지도 않으셨고, 다음 날부터 퇴선간에만 있을 터이니 조용히 덮을 만한 실수라 생각했다. 저하의 부름이 있기 전까지는…….

끓기 시작하는 맑은 젓국을 보며 은우는 부채질을 늦춘다. 세자 저하는 수라에 올린 모든 음식을 조금씩 다 드신다. 편식하지 않으며 과식하지도 않는 습관이 비워진 수라상을 보면 쉽게 짐작이 간다. 팥수라를 입에 넣고, 곰국을 떠먹고 민어전을 씹을 세자를 떠올린다.

자신이 데우는 이 조치도 한 술 뜨시겠지.

부채질을 하면서도 내내 저하의 입술만 떠오른다. 그토록 모질게 대하셨는데, 꿈결처럼 닿았던 입술이 마음에서 떠나지가 않는다. 은우는 제 입술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정말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열흘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꿈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새벽빛이 푸르게 장지문을 비칠 때 눈을 떴다. 망극하게도 금침에서 잠이 들다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벌떡 일어서다가 다리가 꺾였다. 입을 막아 비명은 삼켰지만, 제법 큰 소리가 났는데도 저하는 미동도 없었다. 은우는 기어가다시피 움직여 정신없이 옷을 껴입었다. 서안에 펼쳐진 푸른색 치마를 입으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내밀한 다른 곳도 불로 지져 대는 듯 화끈거렸다. 침전 주위에는 번을 서는 나인도, 상궁도 내관도 없었다. 한 걸음씩 조심스레 벽을 짚으며 움직였다. 섬돌 아래에 있는 혜를 신고 내려서니 차가운 새벽바람이 뜨거워졌던 배 속을 파고들었다. 푸르스름한 하늘에 떠 있는 샛별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입에서 흰 김이 나와 안개처럼 흐리게 번졌다.

추워. 춥구나.

열병이나 걸린 것처럼 몸이 후들거렸다. 힘겹게 발을 뗄 때마다 제 처지가 환기되었다. 살려 주겠다 하셨지만 오늘 오전 상궁마마님이 무슨 말을 전해 올지 모를 일이었다. 감찰상궁의 엄한 얼굴이 떠오르자 심장이 옥죄는 것만 같았다. 솟아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은우는 자세를 곧게 펴려 안간힘을 다했다. 느리게 걷는 나인을 향해 숙위 군사가 앞으로 다가왔다. 동궁전 숙번을 서며 성정각 주위를 도는 순찰조였다. 침소에 들었던 나인 은우라 밝히고 걸음을 옮겼는데, 눈앞에 영현문을 담은 이후로 기억이 없다. 작은 소란이 있었을 터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은우는 한낮이 되어서야 제 처소에서 깨어났다. 내의원에서 의관이 다녀갔다 하였고, 탕약도 내려왔다 했다. 몸을 치유하라며, 닷새 특별한 휴가를 주라 명을 내리셨다고. 이대로 내쫓기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상궁마마님에게서 그런 기색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닷새, 일반 궁녀라면 평생 한 번 받을까 말까 한 특별한 휴가. 그뿐이었다. 반기는 부모가 계시는 사가도 없지만 은우는 출입패를 받아 궐을 나갔다. 영세한 포목전을 하는 숙부집을 찾아 잠시 몸을 누인 후에, 은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세책방貰冊房(조선시대 책을 빌려 주던 집) 주인이 떠맡긴 언문 소설책을 필사했다. 은우가 쉬는 날이면 처소에서 조금씩 필사한 책을 비자(하인)를 통해 작은어머니에게 넘기곤 했는데, 은우의 글씨체가 단정하고 읽기에 좋아 세책방 주인이 자주 부탁을 넣었다. 이번에는 장안에 웃돈을 놓고 노리개와 패물을 얹어 주어도 못 빌려 줄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아녀자들을 위한 언문 소설이었다. 은우는 하루 종일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붓만 쥐었다. 대비마마가 아끼시던 은우의 아름다운 궁서체로 사랑에 애달프고 사랑에 웃는 연인들이 한 장 한 장 더해졌다. 까닭 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했지만 은우는 붓을 멈추지 않았다. 필사한 서책들을 받아 들고 세책방 주인이 넉넉히 값을 치러 주었다. 작은어머니께 고스란히 필사비를 내밀자 그제야 얼굴이 박꽃처럼 피었다.

돌아온 궐에서 다시 열흘.

세자는 은우를 찾지 않았고, 아무런 교지도 내리지 않았다. 또한,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를 품고 침전에 들었다는 의심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조사나 조치는 없었다. 은우는 여전히 동궁전 침전 전각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퇴선간 나인 중 하나였다. 다만 은우가 세자의 부름을 두 번이나 받았으며, 두 번째 날 세자가 주위를 모두 물렸고 은우는 새벽녘이나 되어 쓰러진 채로 처소에 들어왔다는 소문은 동궁전을 발칵 뒤집었다. 두 사람 외에 누구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날 밤에 대한 소문은 조금씩 과장을 더하며 궁을 한 바퀴 휘감았다. 갖가지 망측한 표현으로 밤이 왜곡되었지만, 세자가 독살에 대한 의심을 품었다는 말은 없었다. 궐로 돌아온 은우를 향한 말이나 시선은 견딜 만했다. 묵묵부답으로 설거지를 하고 불을 때는 은우에게 더 이상 누구도 그날 밤을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꼬박 열흘이다. 세자는 은우를 부르지 않는다.

‘질리도록 취하려면, 살려 둬야겠구나.’

은우는 제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고서 후우 바람을 불어 보았다. 꿈이었구나. 그 밤이, 그 입술이.

꿈 정도야 내 것이라 품으면 어떠랴…….

*

냉수로 입을 헹군 광안이 조수라를 물리라 명했다. 내관 강선은 조금 더 드시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많이 들지 않았는가?”

광안이 쳐다보며 묻자 수라상궁이 머리를 조아렸다. 수라상궁을 한 지 몇 해인데,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움칫 놀라는 모양새가 익숙하다 못해 자연스럽다.

“조금 더 드시옵소서.”

답은 작아 들리지 않는다.

“저하. 맑은 조치만 비우셨습니다. 육찬을 조금 더 드시옵소서.”

강선이 다시 말하자 수라상궁이 저를 들어 갈비찜 살을 발라 올렸다.

“저하, 찜이 부드럽사옵니다.”

“강선, 네가 나를 비육하여 돼지로 만들 생각이구나.”

강선은 물러서지 않았다.

“금명 들어 존체 미령하시옵니다. 더구나 오늘 특별시로 치르는 전시(무과 삼차시험)에 배석하셔야 하옵니다.”

광안은 가팔라진 턱 선을 손등으로 쓸고는 쇠고기 찜을 들었다. 강선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서 민어전도 하나 더 먹었다.

“전시에 배석하시려면…….”

강선의 길고 긴 잔소리를 자르려 찜을 한 번 더 먹고는 손을 들었다.

여드레 전, 남휼이 시키지도 않은 보고를 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은우는 본디 배속이었던 퇴선간 나인으로 일한다 하였다. 소문의 주인공이라 주위 시선도 힘들 테고 은근한 따돌림을 겪는 눈치이니 따로이 처소라도 마련해 주고 퇴선간 일을 쉬게 해야 하지 않느냐 하였다. 승은을 입은 궁녀를 그리 버려두시면 아니 된다는 말도 더했다. 이미 지밀상궁에게 들었던 말이다. 지밀상궁에게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지만, 남휼에게는 답을 하였다.

‘살아남아 하고자 했던 일이, 퇴선간 일이었다.’

남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광안 역시 이해되지 않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리하여, 대체 퇴선간에서 그 아이가 하는 일이 무어라더냐.’

‘퇴선간 일이 주로 퇴선이니, 수라 그릇을 설거지하고, 또 강 나인이 특별히 맡은 일은 수라상에 올리기 전에 소주방에서 가져온 조치를 데운다 합니다. 일은, 묵묵히 잘한다고 합니다.’

설거지를 하고 조치를 데우는 일은 묵묵히 잘, 그날 밤의 일은 마치 없었다는 듯이…….

남휼의 답을 듣고서 광안은 허탈하게 웃었다.

깊은 잠에 빠져 아침이 밝아서야 침수에서 깨어난 광안 옆에는 강선이 서 있고, 의관이 맥을 짚고 있었다. 속적삼을 움켜쥐고 잠들었던 여인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육신에는 정사의 흔적이 깊이 남아 여열처럼 뭉근하게 몸을 데웠다. 강선에게 여자를 챙겨 보라 일렀더니 영현문을 나가지 못하고 혼절하였다는 말을 전했다. 여태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살려 주십시오, 저하.’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어른거렸다.

‘저어하지 마소서.’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에게 깊이 몸을 묻은 채로 파정을 하였음을 깨닫고 광안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몸을 빼내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저하.’

아직도 몸을 떨며,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은 광안의 옷자락 하나 잡지 못하고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어하지 마소서.’

광안은 열기 섞인 거친 숨을 쉬며 여자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소인은, 씨를 받지 못하는 몸입니다.’

빤히 내려다보는 광안에게 설명하였다.

‘몸이 그렇다 하옵니다. 너무 냉하여 여인이 달마다 치르는 일도 드물어……. 거짓이 아니옵니다. 내의원 의관에게 확인하여 보시면…….’

긴 밤을 보내고, 늦은 아침이 되어 차비를 하고서 업무를 시작하기 전 휼을 불렀다. 지난밤 앞을 보지 못하는 채로, 젖을 찾는 아이처럼 광안의 입술을 물며 칭얼거리던 여인이 떠오르자 가슴 뒤편이 달아올랐다. 경계를 풀지 마라 주저하며 아뢰는 휼에게 말했다.

‘조사할 필요도 은밀히 알아볼 필요도 없다.’

‘하오나…….’

‘지키는 눈과 귀가 없던 침전에서 내가 멀쩡히 살아 아침을 맞았다.’

‘저하.’

광안은 휼 앞에 자그마한 명주 주머니를 밀었다. 꽃 모양 끈목 매듭이 달린 주머니를 보며 휼이 눈썹을 찡그렸다. 서둘러 열어 보니 말린 꽃 이파리들이 들어 있었다.

‘향낭입니까?’

코를 가져다 대는 휼에게 말했다.

‘지밀상궁이, 말리화라더군.’

광안이 손을 내밀었다. 휼에게서 돌려받은 자그마한 명주 주머니를 살며시 쥐었다.

‘이 향이 나를 잠들게 했던 모양이다.’

남휼과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말했다.

‘물론 향이 전부는 아니다. 여인도 있었지. 음양의 이치가 아니더냐.’

‘저하.’

휼이 머리를 숙였다. 세자가 마음에 품은 궁녀를 의심한 죄를 물으라 하겠지. 그러면서 경계를 푸시면 아니된다, 고하겠지. 광안은 씁쓸히 웃었다.

‘맞다. 확인은 내가 할 필요가 없었다. 너를 시켜 조사하고 처리했으면 되었을 일을.’

‘혹시 마음에, 담으셨습니까.’

‘아니.’

광안이 입매를 단단하게 굳혔다.

‘괘씸했지.’

마음에 담았으니 괘씸했고 그러니 상처받은 양 굴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 들이지 않겠다. 내버려 두라.’

전란 이후, 군력을 보충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치르는 별시였다. 초시를 생략하고 복시에서 선발된 스물여덟의 장정들이 치르는 전시는 춘당대에서 열렸다. 스물여덟이 장차 조선을 수호할 무관이 될 것이다. 용문석을 깔아 놓은 세 개의 단이 놓인 악차幄次(거둥 때 막을 둘러치고 왕이 쉬던 곳)에 아청색 융복(군사 업무복)을 입은 광안이 서서 전시 준비를 지켜보고 있다. 병조판서와 영상, 좌상, 우상이 차례로 춘당대에 도착하였지만 세자에 대한 예를 제대로 갖춘 이는 대북파 출신 병판 임지서뿐이었다. 대북파는 전란 시 광안과 같이 의병장 활동을 했던 세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대북은 아니되 유태경이 이끄는 유당파에 속하지도 않은 우상이 영상의 눈치를 살피며 광안의 안색에 대한 염려를 비추었다. 광안이 심상하게 답하였다.

“무탈합니다. 평안하시지요, 우상 대감.”

“저야 늘…….”

우상의 말이 바람 소리에 묻혔다. 악차를 둘러친 차일과 휘장이 바람에 크게 펄럭였다. 홍살문 너머 화살을 피하려 둘러친 핍乏도 물결처럼 흔들렸다. 오늘 전시에 임하는 응시자들은 바람의 방향과 세기까지 고려해야만 화살을 과녁에 맞힐 수 있을 것이다. 과녁을 확인하고 명중 여부를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하는 획자獲者들이 핍 뒤에서 깃발을 들고서 바쁜 걸음으로 제자리를 찾아 섰다.

시험이 시작되어야 할 시간을 조금 넘겨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친림親臨한 임금은 차도가 지난한 병치레로 거동하기 불편하여 가마를 타고 춘당대에 도착하였다. 먼저 와 서 있던 광안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였으나 임금은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세자를 없는 사람처럼 외면하면서도, 그 앞에서 불안정한 걸음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천천히 움직였다. 왕이 어좌에 몸을 기대어 앉자 응시자의 국궁배례로 전시가 시작되었다.

화살의 무게와 길이를 칭전관과 척량관에게 검시를 받은 응시자들의 차례로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유엽전柳葉錢의 활을 쏘았다. 화살이 과녁에 꽂힐 때마다 핍자의 기가 높이 올랐다. 붉은 기 대신 실패했다는 의미로 흰 기가 올라갈 때마다 광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바람 때문에 응시자들이 긴장하여 호흡을 놓치는 까닭이다. 활을 끝까지 끌어당긴 만작 상태에서 앞 손은 태산을 밀어내듯이 버티어야 하는데, 마음이 흔들리니 기운이 흔들리고 그러니 힘이 깨어져 화살 끝이 여우 꼬리처럼 살랑대는 것이다. 그렇게 당겨진 화살이 제대로 날아갈 리가 없다.

광안의 마음을 읽은 듯 옆에 선 휼이 귀엣말을 하였다.

“지난번 별시에서 인재가 많이 등용되어 그렇습니다. 바람이 원, 웬만해야 할 텐데.”

“전투는 맑고 잔잔한 날에만 한다더냐.”

세자의 읊조림을 영상 유태경이 낚아채어 에둘러 비난했다. 전란을 겪으며 군력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이 시행하는 무과 과목은 광안이 추진한 바였다.

“무과 과목을 변경하니 몸에 익힐 틈이 없었던 게죠. 격구와 창술을 폐하고 유엽전과 기추라니……. 장수는 예로부터 힘과 지략을 갖추라 했는데 이러다 철전도 창도 머리도 못 쓰는 무관만 등용되겠습니다.”

장거리를 날리는 힘이 중시되는 철전과 창술은 근거리에서 왜구와 맞붙을 때 유효하지 않은 기술이었다. 또한 빠르게 이동하며 적을 공격하기 위해 달리는 말에서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히는 기추騎芻를 무과 과목으로 추가했지만 응시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기도 했다. 우려대로 궁술 시험 이후 이어진 기추에서 낙마자가 속출했다. 기력이 쇠한 임금은 어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반쯤 졸다가 낙마를 할 때마다 눈을 번쩍 떴다. 혀를 차고 용안을 찡그려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고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다섯이 낙마하였고 목표물 다섯 개 중 세 개 이상을 맞힌 자는 여섯뿐이었다.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기추를 마친 후, 스물여덟의 응시자를 갑, 을, 병으로 등수를 나누어 왕이 장원급제자를 확인하는 절차가 끝났다. 결과를 발표하기 전, 응시자를 독려하는 윤음을 내리던 중이었다.

“본 별시를 실시한 까닭은 산림에 있는 지략과 무예에 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전란 이후 흐트러진 군 기강을 바로 세우고 전투 의식을 고취하며 부족한 부방군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허나, 본 전시에서 그대들이 보여 준 실력은 인재를 발굴하였다는 흡족함과 기쁨을 쾌히 누리기엔 부족하다. 배석한 세자는 그대들이 알 듯이 전란에서 분조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군을 이끌어 친히 왜적과 맞섰기에 세자이면서 이 나라의 무관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국왕과 사신들이 활을 쏘아 그 실력을 증명하는 대사례 행사가 자주 있었음이다. 그러니, 부족함을 일깨우는 바 세자가 몸소 그대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일을 명하노라.”

응시자 전원이 일제히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였다.

“시범을 보일 과목은 무엇이 좋겠느냐.”

임금이 광안을 바라보았다. 악차에 친림한 이후, 처음으로 준 시선이었다.

“편전이 어떨까 합니다. 편전은 명나라에도 알릴 수 없는 조선 최고의 비밀 병기이며…….”

남휼의 말을 임금이 손을 들어 잘랐다.

“편전은 응시자들이 과히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둔 과목이다.”

“기추가 어떻습니까, 전하. 소신 유태경은 세자께오서 친히 과목에 편입시키고 중요성을 강조해 온 기추를 직접 시범하여 본이 됨이 마땅하다 사료되옵니다.”

영상이 나서자 앵무새처럼 좌상이, 우상이 이어 그러하옵니다, 소리를 높였다. 병판 임지서가 반대의 뜻을 비쳤다.

“전하, 일리가 있는 추천이오나 기추는 오랜 시간 매일 훈련하여 익혔을 때만 시행할 수 있는 마상 무예이옵니다. 세자 저하의 무예가 드높음을 소신 익히 알고 있지만, 저하는 이제 전란이 끝난 후 오직 성군이 펼쳐야 하는 덕치를 배우고 익히기 위해 매진하였습니다. 무과 전시에 오른 응시자들도 낙마하였습니다. 세자가 전시 응시자들에게 몸소 시범을 보인다면 기추 외에 궁술을 시범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덕치를 행하는 군주라…….”

임금의 입술이 실룩였다.

“세자시강원 서연관들의 말과는 차이가 있소만.”

삼정승이 눈치를 보다가 임금이 먼저 터뜨린 비웃음에 박자를 맞추어 웃어 댔다.

“세자, 네가 그토록 원했던 무과 과목이 아니더냐. 진정 기추가 두렵고 어렵다면 내 상황 설명을 하여 명을 물리고 응시자들의 성적을 발표하겠다.”

명백히 망신을 주려는 의도였다. 남휼이 세자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의도에 말리면 안 된다, 몸이 아프니 다음 기회로 미루어 달라 청하라고 무언의 눈빛을 보내었다. 정기적으로 춘당대에서 활을 쏘고, 남휼과 사흘에 한 번꼴로 동궁전 뜨락에서 검을 잡고 말을 몰기는 하지만, 기추는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전하, 명을 받들어 소자 기추를 시범 보이겠습니다.”

병판과 남휼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터졌다. 병환으로 흐려진 임금의 눈에 용렬한 시기심이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광안의 눈이 타오르는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남휼, 내 말과 활을 가져오라.”

남휼은 이를 질끈 깨물고 명을 받들었다. 오늘 좋은 볼거리가 생기겠다는 유태경의 말에 정승들이 껄껄거렸다. 임금 역시 웃음을 더했다. 신임 무관으로 임명될 스물여덟 앞에서, 광안이 낙마하여 뼈가 부러지고 끔찍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흙먼지 속에 구르는 모습을 이미 보고 있는 듯이 통쾌해하였다. 불덩이 같은 분노가 광안의 핏줄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폭약처럼 터져서는 아니 되었다.

곧이어 시험장에 들어서는 검은 갈기의 준마를 보며 응시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광안의 흑마였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충만한 햇빛을 받아 윤이 흐르는 갈기와 몸체는 그림으로도 담을 수 없는 명장면이었다. 흑마가 길고 곧은 다리로 시험장을 느리게 들어서자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힘과 영민함,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는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명마임에 분명했지만 광기 어린 말이라 함부로 그 등에 오를 수 없으며 오직 광기로 말의 기운을 누를 수 있는 광안만 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반질반질 손때가 묻은 물소 뿔 각지를 엄지에 끼고, 광안이 동개활을 들었다. 손을 들어 흑마의 콧등을 한 번 쓸어 주고 광안은 날렵하게 말의 등에 올라탔다. 타닥 배를 힘차게 차올리자, 말이 크게 울고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잦았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첫 번째 추인(짚으로 만든 인형)을 향해 흑마는 빠르게 내달렸다. 나는 듯이 달리는 명마의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로 광안의 활시위가 당겨졌다.

“어엇!”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그런 빠른 속도로는 기수가 활을 쏘는 순간 균형을 잃고 떨어질 수밖에 없다. 모두 숨을 죽였을 때 화살이 정확히 추인의 목을 꿰뚫었다. 동시에 말안장이 기울어지며 광안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십 명이 동시에 내지르는 비명에 흑마가 앞발을 높이 들었다. 영상 유태경이 박수라도 칠 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쁨으로 벌어진 입이 그대로 얼어 버렸다. 거짓말처럼 다시 말 안장 위로 광안의 몸이 떠올랐다.

와아!

응시자들의 입에서, 시험관들의 입에서도 탄성이 터졌다. 기립한 군병도 환호성을 질렀다. 흑마는 속도를 더 높였다. 말이 달리는 방향과 반대로 몸을 완전히 틀어 활을 당기는 배사背射로 두 번째 추인의 가슴이 뚫리고 순식간에 세 번째 추인의 얼굴이 뚫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의 두 눈으로 조선의 세자를 보고 있을 뿐이다. 그 눈으로, 고작 열다섯의 나이로 분조를 이끌었고 열여덟의 나이로 군을 지휘했다는 세자를 보았다. 세자의 은빛 갑주가 흑마 위에서 번쩍이면,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하였다. 어린 군신軍神이라 추앙받던 세자가 나는 듯이 가벼이 말을 내달리며 활을 쏘면 열 개의 화살로 열 명의 왜적이 쓰러졌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전설이라 치부했었다. 이제 그들의 눈앞에 있는 세자는, 살아 숨 쉬는 경외였다. 흑마의 말발굽 소리만 시험장을 가득 메웠다. 네 번째 화살이 아슬아슬 이마에 꽂혔다.

다섯 번째.

광안은 숨을 멈추었다.

활은, 마음으로 당긴다. 그 순간만큼은 집착도 아집도 사라졌다.

전추태산前推泰山 _ 태산처럼 버티어 밀고

후악호미後握虎尾 _ 호랑이 꼬리를 당기듯 쏘아라

넓고 큰 깃털이 달린 동개살이 시위를 떠났다. 불어오는 바람을 타며 정확히 추인의 목을 뚫었다.

와아아! 와아아! 와아!

거대한 함성으로 시험장이 들끓었다. 후우, 광안의 입에서 그제야 막혔던 숨이 토해졌다. 병판의 입에서도 안도의 숨이 나왔다. 남휼이 기쁨으로 주먹을 쥐었다. 흑마를 이끌고 천천히 광안이 악차 앞으로 다가왔다. 임금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임금은 입을 우물거렸다. 잘하였다. 한마디면 족하였다. 유태경이 어좌에 바싹 붙어 귀엣말을 속삭였다. 왕이 드디어 광안에게 말하였다.

“세자, 네 무예에 높은 자질이 있음을 알겠다. 그러나 예의와 겸양을 알아야 인재가 따르고, 옛 성현의 말씀을 따라야 정치를 도울 수 있다. 이 말은 선대왕이신 태종께서 양녕에게 주신 말이다. 겸양을 갖추고 예와 덕을 닦음에 게을리하지 말라.”

양녕은 폐세자가 되었던 태종의 첫째 아들이었다. 양녕을 폐한 후, 셋째 충녕대군이 세자에 오르고, 이후 가장 훌륭한 군왕인 세종대왕이 되셨다. 광안이 꿇었던 몸을 일으켰다. 악차에 오르는 걸음이 위태로이 흔들렸다. 걸음은 광안의 마음이었다. 아비를 향한 원망과, 분노와 절망이었다.

“연산군이 어려서부터 활과 말을 좋아했다지요.”

방만하게 웃으며 유태경이 덧붙였다.

타락한 폭군이어 폐위되었던 최악의 왕. 연산!

광안이 야생 짐승처럼 튀어 올라 남휼의 검을 빼어 들었다. 우웅 검이 검집에서 나오며 우는 소리에 다들 숨을 멈추었다. 내금위장이 주상 앞으로 섰고, 홍살문 위로 배치된 궁수가 일제히 활을 들었다. 남휼에게서 뽑은 검은 우검이었다. 예리한 파공음을 울리며 광안의 검이 움직였다. 검은 유태경을 향하고 있었다. 예상했다는 듯이 좌검을 뽑으며 휼이 먼저 광안의 검을 막아섰다. 채채챙,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금위장과 호위 군사들의 검이 주상을 둘러쌌다.

“저하!”

남휼의 부름에 광안이 이를 악물었다. 비틀린 입술이 붉게 타오르고 짐승의 살기를 품은 눈이 번뜩였다. 휼이 부딪힌 검을 버티고서 제발, 제발, 광안에게 호소했다. 광안의 어깨 너머 시야에 잡히는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남휼은 심장에 피가 마른다. 광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목을 비틀어 검의 방향을 바꾸면, 그리하여 남휼을 밀어내고 그대로 영상의 목을 베어 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남휼이 짐짓 미소를 만들었다.

“조수라에 맑은 조치를 한 그릇 다 비우셨다더니.”

뜻밖의 남휼의 말에 광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지난 보름간 내내 마음에서 비워 내지 못한 은우를 말함이다. 틈을 놓치지 않고 남휼의 검이 미세하게 날을 바꾸며 광안의 검을 밀어냈다.

“그래서 그런가, 저하. 힘이 넘치십니다.”

갑자기 광안의 입에서 짧게 웃음이 터졌다. 팽팽한 힘의 대치가 깨어졌다. 남휼이 먼저 검을 내렸다.

“말리화 차를 준비하라 했습니다.”

여전히 검을 쥔 광안을 설득하였다.

“저하, 검술 시범은 말리화 차를 드신 후 하십시오.”

광안이 정신이 돌아온 듯 검을 쥔 손을 툭 떨어뜨렸다. 무너지듯 휘청거렸다. 남휼이 검을 받아 검집에 넣고 부축하며 붙어 섰다.

“전하, 세자께오서 실은 금일 몸 상태가 좋지 못함에 무리하게 마상 무예를 하여 기력이 소진하였습니다.”

“지금 검, 검을 빼 들었지 않습니까! 검이라니요. 용상을 능멸하는 행위입니다, 전하!”

시체처럼 질려 있던 유태경이 감히 주상 앞에서 검을 뽑아 들 수 있냐고 소리를 질렀다.

“오늘 마상 무예를 하지 않으셨으면 저와 검술을 시범 보이기로 하셨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평소 무인이라면 검술에 능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까. 지난 전란에서 우리 측 군사들이 무참히 밀렸던 이유는 근접 거리에서 맞붙은 왜적을 상대하기에 검이나 맨손 무예와 같은 단병접전 훈련이 부족하였던 터, 늘 검술을 강조하셨지요.”

내금위장이 시선을 광안에게서 떼지 않고서 주상 뒤로 물러섰다. 신호를 보내자, 궁수들의 활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남휼의 설명에 진정으로 설득이 되었든 아니든 무과 급제자를 발표해야 하는 시점에서 세자의 허물을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었다. 세자를 데리고 물러가겠다는 남휼의 청을 허하며 임금은 공포로 파랗게 질린 입술을 떨었다.

*

동궁전 세자의 침전에 다급한 발걸음이 다가오고 멀어지곤 했다. 바삐 움직이는 의관들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발작이다. 모두가 쉬쉬하지만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세자의 발작이 반년 만에 시작되었다. 온몸의 피가 끓는 듯이 뜨거워져 세자의 호흡이 거칠었다. 으으, 으으으. 입에서는 끝없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프다. 아프다.

세자는 제 손톱을 세워 적삼을 찢고 피부를 할퀴었다. 어깨, 왼 가슴 위, 심장 부근, 등과 이어지는 옆구리에는 자상과 총상이 남긴 흉터가 흉측하게 남아 있었다. 가슴 위 흉터의 살점을 뜯고 할퀴며 세자가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더 깊은 상처를 막기 위해, 피와 살점이 묻은 손끝을 붕대로 감던 상궁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관 몇이 붙어 잡아도 광기 도는 세자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맥을 짚던 의관이 나가떨어지고 탕약을 들고 선 나인이 움찔거렸다. 남휼이 금침 위로 올라와 세자의 어깨 뒤를 잡고 안아 일으켰다. 이미 세 번째 탕약 그릇이 나뒹굴어졌다.

“저하! 저하.”

광안이 남휼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부신 듯 실눈처럼 눈을 떠 휼을 쳐다보았다. 남휼이 눈짓하자 상궁이 수저를 들고 입술로 탕약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몸을 뒤트는 세자를 남휼이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감았던 세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검은 늪이다. 세상을 저주하는 검은 불이다. 폭이 좁고 더러운 늪을 허우적거리다가 종내에 미쳐 버린 이무기가 투둑 투둑 검은 핏덩어리를 입에서 쏟아 내며 제 꼬리를 물어뜯는 것만 같았다.

“휼아. 어디냐, 내가 지금…….”

“이제 좀 주무십시오.”

세자의 거친 호흡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남휼이 서 상궁에게 작게 말했다.

“들라 하세요.”

서 상궁이 손짓하자, 장지문이 열렸다. 은우였다. 세자의 모습을 희미하게 담으며, 은우의 턱이 바르르 떨렸다. 서 상궁도 남휼 장군도 누구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예를 갖추지 못하며 은우는 오직 한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낮에 있었던 마상 무예와 세자에게 가해진 모욕을 들었다. 검을 빼어 든 세자의 눈에 비치던 광기도 들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조마조마하고 까닭 없이 슬퍼, 손톱을 물어뜯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그리고 가슴을 쳤다. 몇몇은 세자의 광기를 두려워했지만 동궁전 나인들은 대부분 모시는 상전의 편이니 일단은 같은 마음으로 분개하였다.

두 번의 밤을 보내고도, 몸을 섞고도 몰랐던 세자의 몸에 너덜너덜하게 새겨진 흉터를 보면서 은우는 손을 떨었다. 발작을 일으킨 세자는 이유 없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워하고,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자해를 한다 했다. 잠시 혼절하였다 일어나면, 꼭 여인을 안는다 하였다. 예전부터 궐 내에 돌던 말이었다. 그럴 때 안았던 여인을 세자는 아예 기억하지 못한다고도 하였다. 남휼이 세자를 똑바로 뉘었다.

“반 시진 후, 길면 한 시진. 깨어나십니다.”

공대를 하는 남휼에게 놀라 은우가 고개를 저었다.

“좌익위 나으리, 저에게 왜…….”

“혹여 발작이 다시 시작되면, 기별 주십시오.”

은우에게 가벼이 인사하며 남휼이 물러갔다. 다른 이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적막 속에 은우는 무릎을 꿇고 앉아 세자를 지켰다. 무명 수건을 물에 적셔 이마를 닦고 뺨을 닦았다. 깊이 할퀴어 살점이 떨어져 나간 흉터에 배어난 피를 닦을 때면 광안이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떨었다.

“아프다. 아프다.”

허공을 휘젓는 손을 은우가 감싸 쥐었다.

“너무, 두렵다. 싫다. 아, 파.”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움찔움찔 경련처럼 몸을 비틀며 세자가 작게 호소했다.

“아파.”

벌어진 붉은 입술에 은우가 가만히 입술을 대었다. 너무 뜨거워 소름이 돋았다. 은우의 서늘하고 도톰한 입술을 급히 빨아들이며 세자가 와락 여체를 껴안았다. 꼭 끌어안고서 은우의 입술을 모조리 삼킬 듯이, 뜨거움으로 녹아 없애겠다는 듯이 흡입하였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연약한 살을 입속에 가득 넣었다. 고름을 푸는 손길이 다급해 한쪽이 툭, 떨어졌다.

“저하.”

은우를 바라보는 광안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발작이 시작되면 양귀비(앵속)를 달인 탕제를 올린다 들었다. 그러지 않고선 세자의 광적인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세자는 일어서려는 은우를 붙잡아 억지로 다시 앉혔다. 봉긋한 윗가슴에 코를 묻었다. 닿는 대로 매듭을 풀고 뜯으며, 드러나는 살마다 빨고 삼키는 세자 때문에 은우는 애써 숨을 골랐다. 치마를 채 벗기도 전에 다급한 손길이 속살을 찾아 파고들었다. 금세 은우의 몸도 뜨거워졌다. 갑자기 세자가 고통 젖은 신음을 내뱉더니 제 가슴의 흉터를 쥐어뜯으며 몸을 둥글게 구부렸다. 우욱, 욱. 비명이 입에서 반복적으로 새어 나왔다.

“저하, 저하!”

은우가 팔을 벌려 광안을 껴안았다. 이를 악물고서 광안이 몸을 떨었다.

“괴로워, 미치겠다.”

광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은우가 팔을 받쳐 광안을 제 다리 위에 비스듬히 눕혔다. 부들거리는 광안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을 흉터 위로 올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광안이 열에 들뜬 몸을 뒤틀었다.

“여기이옵니까.”

목을 뒤로 젖히며 광안이 입을 크게 벌렸다. 아, 아. 은우의 손이 어깨의 총상을 더듬고, 옆구리의 자상을 만졌다. 심장 위 가장 큰 자국은 살이 터지고 헤어지고 다시 찢어진 상처 같아, 무엇으로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광안이 오늘 또 할퀴어 피가 배어 나온 흉터에 손을 올렸다. 어억, 비명을 지르며 광안이 눈을 떴다.

“부, 불이 ……뜨거워.”

허리를 뒤트는 광안을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다 나은 상처입니다.”

흉터에 입을 맞추며, 어린 짐승을 어미가 핥듯이 은우가 상처를 핥았다. 불에 지져지고, 찔리고 뜯긴 상처였다. 은우는 다시 흉터에 입을 맞추고 지워지지 않는 고통을 핥았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다 나으셨습니다.”

광안이 거짓말처럼 몸을 편안하게 폈다. 눈을 스르륵 감았다. 은우가 더듬더듬 손을 뻗어 속치마에 달고 왔던 향낭을 끌어 왔다. 광안의 이마 위에 올려 두고 귓불을 검지로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한참을 그러기를, 광안의 숨소리가 점점 평온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광안을 지켜보던 은우도 밀려드는 졸음으로 잠시 눈을 붙였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꾸벅,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놀라 눈을 떠 보니 광안이 다리 위에 몸을 누인 채로 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짚어 보니 열은 조금 잡힌 상태였다.

“깨셨습니까.”

잔잔하게 솟아오른 식은땀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네가 왜.”

“발작이 있었습니다.”

광안이 여전히 고통스러운 듯 눈을 찡그렸다.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은우가 아래에 떨어져 있던 향낭을 집어 올렸다.

“말리화 향입니다.”

광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증을 잊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줍니다.”

코끝 위에서 주머니를 살짝 쥐었다가 폈다. 향이 툭 터지듯 번졌다. 가슴에 난 흉터 위로 향낭을 올렸다. 부드럽게 상처를 매만지자, 세자가 다시 이를 악물었다.

“열이 아직도 다 내리지 않았습니다. 통증도, 심하시옵니까.”

은우가 상처에 손바닥을 대고 체온을 재어 보듯 이마에 입을 살짝 올렸다. 순식간에 광안이 몸을 일으켰다. 놀라는 은우를 밀어 눕히고는 팔을 짚고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피가 통하지 않았던 다리는 감각이 없었다. 은우는 다리가 저려 얼굴을 찡그렸다.

“너는 아무래도 훌륭한 궁녀가 되긴 글렀구나.”

세자가 덥석 가슴을 물었다. 속적삼은 겨우 걸쳤다 해도 훤히 가슴을 드러내 놓고 있었는데, 고통스러워하는 광안을 보느라 인식하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어깨가 붙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 으응, 으응, 은우의 입술에서 소리가 새어 나가자 광안이 그제야 가슴에서 입을 떼어 내었다.

“생각했느냐.”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내 입술.”

은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닷새, 그리고 열흘입니다.”

광안은 무표정하게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유두를 엄지로 문지를 뿐이었다. 손가락이 토독토독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은우의 가슴이 들썩였다.

“찾지…… 않으셨습니다.”

“찾을 이유가 없었지.”

냉정한 답에 은우의 입술이 다물렸다. 광안은 자극이 멈춰지지 않을 만큼만 감질나게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였다.

“기다렸느냐.”

은우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꾹 다물었던 입술을 열어 말했다

“매일……. 또 매일, 매일.”

갑자기 광안의 손길이 급해졌다. 반쯤 걸쳐진 치마를 걷고, 속바지를 끌어내렸다. 은우가 읏,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다리가…… 저려서. 죄송합니다, 저하.”

광안의 입술에 보일락 말락 미소가 스쳤다. 혀를 내밀어 코끝을 핥자, 은우가 눈을 크게 떴다.

“이제 다리는 곧 나아질 터이니.”

광안이 은우의 입술을 덮치고, 몸을 포개어 왔다. 단번에 깊이 들어와, 은우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반쪽으로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몸을 묻은 채로, 광안이 입술을 가까이 가져왔다. 얄팍한 틈을 두고는 후우, 입김을 내뿜었다. 입에서 달큰한 꽃향이 났다. 차마 먼저 입술을 붙일 수가 없어 은우는 입을 조심스레 벌렸지만, 광안은 그대로 멈추고서 입 맞춰 주지 않았다. 은우의 손을 잡아, 제 가슴 위로 끌고 갔다. 은우는 손을 펴고, 끔찍한 흉터를 쓰다듬었다. 남자의 호흡이 빨라졌다. 흉터가 아닌, 몸에 붙은 도도록한 부위를 손가락이 스치자 광안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렀다. 동시에 광안이 은우의 입술을 깨물었다. 은우도 광안의 것을 꽉 물었다. 광안이 으윽, 거친 숨을 쉬었다. 좀 전과는 다른, 열락에 잠긴 신음성이었다. 은우는 오늘 밤, 광기와 약에 취한 광안이 거칠게 굴 것임을 안다.

상관없어. 상관없어. 몸이 쪼개어져도 좋아.

*

광안의 안색을 살피고 맥을 짚던 의관이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난밤 발작의 소란에 동궁을 오가던 의관은 아니었다. 본디 무인 집안의 서얼 출신으로, 전란이 시작되고 임금의 피접을 따라 움직이며 내의관으로 일해 온 지 벌써 십수 년이 되었다. 전란 이후 공신의 자격으로 양반이 되었고 이후로 임금과 광안의 총애를 동시에 놓치지 않는 몇 안 되는 신료이자 내의원 최고 어의가 되었다. 어의는 충직하고 사려 깊은 눈매로 광안을 찬찬히 담았다.

“세자 저하, 편히 주무셨다 들었습니다.”

“양평군 대감 덕분입니다.”

어의가 하사받은 읍호로 공대하여 부르며 광안이 감사를 표했다. 양평군, 수어의는 광안의 발작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결코 그의 입을 통해 광안의 상태가 새어 나가는 법이 없었다.

“반년 만입니다. 그동안 잘 조절하셨는데 낮에 있었던 무과 전시에서 무리하셨나 봅니다.”

“오랜만에 말을 타고 활을 쏘려니 긴장했습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이 버겁지 않았다. 끝끝내 광안을 밀어내는 부왕의 잔인함이 상처를 헤집었을 뿐이다. 찬찬히 살피는 눈을 피하며 광안이 화제를 돌렸다.

“양평군 대감, 혹시 말리화 향이 증상에 도움이 되오?”

“말리화라면 명에서 여인들을 위해 들여오는 꽃이 아닌지요.”

양평군이 세자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명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는 있습니다만, 품고 온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가타부타 답 없이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광안에게 어의는 묻지 않은 답을 더했다.

“몸에 냉한 기운을 몰아내는 탕제는 몇 첩만으로도 효과를 얻기도 합니다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큽니다. 반년 길게는 이삼 년, 꾸준히 복용하면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예전에 그 궁인이 대비전에 있을 때 대비마마 환후를 돌보러 갔다가 마마의 명으로 맥을 짚어 봐 준 적이 있습니다.”

광안의 눈매가 잠시 가늘어졌다. 검고 깊은 눈빛을 읽을 길이 없어, 무언가를 덧붙이려던 어의가 입을 다물었다. 세자는 늘 창백하도록 흰 피부였다. 그에 비해 눈썹과 눈은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검은빛이었고 입술은 홍화 가루를 바른 듯 붉었다. 지나칠 만큼 화려한 생김새는 품고 있는 서늘한 기운과 피곤함, 권태로움이 뒤섞여 이질적이었고 상대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영민한 눈매에 반듯한 이마와 높은 콧날, 주군의 상이었지만 온화함이 없는 얼굴이었다. 여유로움을 품지 못하는 육체였다. 불면증과 불안증, 전란 동안 겪었던 정신적 육체적인 상흔, 부왕과 정치 세력에서 휘둘리는 위치에서 오는 오래된 울화가 타고난 강건함을 깎아내리고 그릇의 크기를 침식시키고 있었다. 불면은 정신을 흔들어, 마음 깊이 흐르는 분노라는 감정에 불길을 더하는 형상이었다. 세자는 뙤약볕 가뭄에 말라 가는 나무처럼 안타깝고 위태로워 보였다.

보름 전 침수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세자를 살피러 갔을 때 어의는 고개를 갸웃했다. 상태에는 분명히 작지만 큰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는 마음이 만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말리화는, 저하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주 가까이 두소서.”

말리화가 아니었다. 말리화를 품고 왔던 여인에 대한 말을 돌려 전하였다.

“양평군 대감, 의서를 찬집하는 일은 얼마나 진행이 되었는지요.”

한낱 궁인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 광안은 어의가 10년이 넘게 집필에 공을 들이는 의서의 진척 정도에 대해서만 물었다.

“아직 절반도 못한 듯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양평군은 머리를 조아렸다.

“전란 이후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병이 있어도 스스로를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나 의법을 정리하여 그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하.”

“치유되지 않는 병처럼 답답한 노릇이 없습니다.”

비스듬히 시선을 틀어 허공을 응시하는 광안에게서 씁쓸한 자조가 느껴졌다.

“저하. 저하의 병은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옵니다. 원인은 저하만이 정확히 찾을 수 있고 그러한 이후여야 무슨 방도든, 약재든 처방이 유효합니다.”

광안의 발작은 전란에서 얻은 깊은 정신적 상흔이 원인이었다. 사흘간의 실종 이후였다. 남휼과 국왕 외 몇몇만 알고 있는 사건은 철저하게 밀봉되어 있다.

전란이 발발하자 예상과 달리, 일본군은 거침없는 공세로 한반도를 쓸고 올라왔다. 임금은 평양을 사수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의주로 파천을 하면서 광안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다.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이동하며 왜적에게 짓밟힌 국토를 어린 세자가 횡단하였다. 함경으로 보내진 그의 형 임안군이 민심을 다독이라는 명을 받고 오히려 행패를 일삼다가 왜군에게 포로로 넘겨지는 수모를 겪는 동안, 어린 광안은 평안과 황해, 강원의 여러 고을을 이동하는 고행을 택했다. 쓰러져 가는 민가에 몸을 누이거나 찬이슬을 맞고 노숙을 하면서 참혹한 백성들의 삶과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였다. 험한 행군을 하는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진창을 뒹굴고 십 보 전진하면 아홉 번을 넘어지는 어려운 길을 헤쳐 나갔다. 세자의 행군이 알려지자 울분에 찬 백성들이 몰려들어 위협적으로 에워싸기도 했다. 민심을 버린 조정과 국왕에 대한 원망이었다.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배신으로 순수한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에게 세자 호위군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졌다.

‘그만두시오! 제발, 제발 그만두시오.’

말에서 내린 어린 세자가 무릎을 굽혔다. 이마가 터져 피를 흘리며 바닥을 구르는 백성을 양팔로 안아 일으켰다. 눈을 마주치며 호소했다.

‘미안하오. 하지만 조선의 세자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대들을 버리지 않을 터이니.’

백성들이 바닥에 엎드리며 통곡하였다. 광안은, 백성들의 절규에서 왕조에 대한 질긴 믿음과, 구원을 갈구하는 순박한 마음을 읽었다. 그들에게는 무너진 하늘도 여전히 하늘이었다. 백성의 마음이 광안을 일으켰다. 두려움을 떨치며 후들거리는 무릎에 힘을 더했다. 광안은 여린 어깨로 무너진 하늘을 떠받들어야 했다. 소년의 티를 겨우 벗은 광안이 도탄에 빠진 민생에 새로운 태양이어야만 했다. 이미 경지에 이르렀던 궁술 외에 남휼에게서 직접 사사한 검술에 명마가 더해지며 광안은 점차 군부를 이끄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평양이 함락된 후 희망을 잃었던 사람들이 세자를 보며 환호하였다. 황해와 전라를 돌며 의병을 모으고 직접 왜적과 맞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때론 세자의 신분을 상징적으로 내세웠고, 때로는 세자임을 철저히 감추는 위장술을 해야 하기도 했다.

민심은 점차 광안을 국왕으로 떠받들었고 유생들은 부왕 진조에게 전위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광안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 부왕을 제거하려는 역심을 품은 자들이 처형되기도 했다. 부왕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고 광안을 길들이기 위하여 선위를 하겠다고 소동을 벌였고 광안은 그럴 때마다 망극한 명을 거두시라 무릎을 꿇고 몇 날 며칠을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어린 광안은 부왕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며 버림받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다. 부왕에게는 비록 망나니이긴 하나 장자 임안군이 있었고, 부왕이 아끼는 신성군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왕자 셋이 더 있었다.

왜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하여 전투가 벌어지던 전라도 지역에서였다. 광안의 실종은 산발적인 접전이 이어지던 중, 광안이 포함된 소규모 행렬이 급습당하며 일어났다. 혼란 속에 떼를 지어 도적질을 하던 산적 패거리가 변복을 한 광안이 세자임을 알지 못하고 납치한 사건이었다. 사흘 만에 돌아온 광안은 쓰러져 일주일 동안 열병을 앓았고 깨어난 후, 사흘간의 기억을 잃었다 하였다. 관군에 의해 산적 떼는 모조리 몰살당했다. 부왕, 남휼 및 어의를 비롯한 몇몇이 아는 사건의 전말이었다.

어의 양평군이 결심이라도 한 듯이 광안의 병에 대하여 치우침이 없는 소견을 말하였다.

“소신이 올리는 탕제는 다만 일시적으로 그 증상을 가라앉힐 뿐입니다. 임시방편이지요. 발작은 잃은 기억이 남긴 울화 때문입니다. 기억을 못하신다 하여도 심중에 깊이 남아 있을 뿐, 오히려 떠올리지 못하기에 침잠된 울화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못합니다. 기억을 되살릴 실마리가 있다면 반드시 붙잡아 되살리소서. 속에 맺힌 울화의 원인을 찾고 외부로 끌어내야 골육에 맺혀 있는 응어리를 녹일 수 있습니다.”

광안의 답은 차갑고 간결했다.

“노력하지요.”

“황공하오나.”

수어의가 단호히 말을 덧붙였다.

“혹여, 부러 기억을 덮으신 건 아닌지 근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광안이 짐짓 크게 웃었다. 듣기에도 보기에도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웃음 뒤에 불쾌함과 못마땅함이 서려 있었다. 거짓말처럼 웃음을 씻어 내고 냉혹한 얼굴이 되어 광안은 어의를 향해 물었다.

“그럴 리가요. 대체 내가, 왜 말입니까.”

검고 깊은 눈빛은 감추어진 의도를 칼끝처럼 헤집었다. 다른 이라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겠지만, 어의는 물러서지 않는다.

“세자 저하께서는 그 사건을 겪으실 때, 성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막 소년을 벗어날까 말까 어린 나이에 과하게 무거운 책무였고 그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화살이 박힌 짐승처럼 광안이 날카로운 이를 세웠다. 밖으로 보일 듯 말 듯 삐주름히 나온 화살 끝을 붙잡은 어의가 기를 쓰고 놓지 않았다.

“그날 이후, 소신이 직접 제일 먼저 저하를 살폈습니다.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으신 저하의 몸은, 누구보다 소신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입을 다무시오.”

“지금도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늘 통증을 느끼시는 그곳.”

찻상 위의 찻잔이 양평군의 이마를 맞고 떨어졌다. 양평군은 미동도 없다.

“그 정도의 고문을 견디지 못할 분이 아님을 알기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광안이 검을 움켜쥐었다.

“더한 상처도 더한 고통도 견디셨던 분임을 알기에……. 기억을 덮어야 할 연유를 짐작할 길이 없습…….”

“그 입, 닥쳐라.”

올려다보는 양평군의 눈가가 자잘하게 떨렸다. 검은 불빛으로 타오르는 광기, 미친 눈이라 부르는 눈이다. 누구보다 총명하고 인품이 어질고 학문이 높아 세자로 추대받았던 왕자였다. 현명하고 겸손하였다. 맑은 성정이 고스란히 물처럼 비치는 눈이었다. 그 눈을 알기에 어의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저하.”

광안의 부들거리는 손이 끝내 검을 뽑지는 않았다.

“양평군 대감, 내 용상의 자리에 앉으면 당신부터 처단하겠어. 그러니 그대는 부왕이 오래 버티도록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시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