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章
광안狂眼
다행히 번이 없는 날이었다. 붙은 듯한 눈꺼풀을 억지로 떼어 내며 은우는 다행이다, 다행이다, 비번이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불을 덮고 누운 채로 눈만 깜박이며 어젯밤을 찬찬하게 되새겼다. 승은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나 남자와의 첫 경험에서 오는 강렬한 기억을 곱씹는 바는 아니었다. 열락의 밤의 여운을 즐김은 더더욱 아니었다. 은우는 업무를 쉬는 비번인 날이면 습관적으로 지난날 했던 궁녀로서의 업무를 되돌아보곤 했다. 애기나인 때부터였다. 조막만한 손에 제대로 쥐어지지도 않는 붓을 들고 팔이 후들거릴 때까지 서른 장씩 언문 초성을 쓰면서도 그랬다. 글씨 모양이 엉망이라 종아리를 맞은 날에는 눈을 감으면서 글자를 허공에 써 보고, 눈을 뜨며 밤새 꿈에서 써 보았던 글자를 그려 보았다.
어제는 새벽부터 곱씹을 일이 많았던 날이다. 모시면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저를 저하는 호되게 꾸짖으셨다. 정수리에 뿌리던 물은 따뜻하였지만 은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차라리 매를 내리시고 크게 화를 내시는 편이 나았다. 우아한 목소리로 느리게 부드럽게 가하는 수치에, 그대로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참혹한 심정이 되었다. 침소에서도 들었던가, 장지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는 은우에게 세자가 말하였다.
망상하지 말라 했거늘.
찬바람을 안고 들어와 익선관을 벗으며, 옥대를 푸르며 세자는 줄곧 은우만을 쳐다보았다. 조아린 고개를 들어 볼 수 없었지만 서늘하다 못해 차가웠던 눈길을 몸이 알아챘다. 새벽에 물이 흘렀던 길을 따라, 정수리와 이마, 콧날, 입술과 목덜미 가슴골과 배꼽까지 단번에 훑어 내리는 시선에 몸을 떨었다.
천치라 하셨지.
맨 살갗에 떨어지는 웃음소리에 배 속까지 소름이 돋았다.
새벽처럼, 밤에도 은우는 부끄러웠고 비참했다. 소셋물 하나 제대로 수발하지 못하는 나인이, 침수를 제대로 했을 리가.
구중궁궐에 흐르는 소문은 찾는 이 없어 고요한 대비전 지밀까지 들어오곤 했다. 세자가 취하는 궁녀는 결코 세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세자의 기쁨이 될 수도 없으며 두 번 다시 세자의 부름을 받지 못한다고. 무엇보다 절망적인 사실은 세자의 씨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를 써도 결코 제 몸에 품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또한, 세자는 평소 성정처럼 잠자리에서조차 뜨거움이 없다는 말을 소리 낮춰 수군거리기도 했다.
은우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러니, 차갑고 아프고 수치스러웠던 지난밤이 특별하지는 않다. 어느 궁녀도 주지 못했다는 기쁨을 천치 은우가 드렸을 리 없고, 천하절색이라던 궁녀도 받지 못했던 예쁨을 주실 리가 없었다. 세자의 씨를 잉태하는 것은 처음부터 꿈꾸지 못하는 일이었으니.
그래도, 그래도…….
은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부끄러운 지난 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
등으로 따스함이 느껴졌다. 끈적하게 말라붙은 흔적 위로 한 번 더 쏟아지는 액체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어서도 좋다.”
두 번의 파정을 한 사내의 음성이 차분하여 안심을 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네, 저하. 답을 하는 제 목소리가 마치 물에 잠긴 듯 낯설었다. 몸을 찢는 듯한 통증 속에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깊은 곳이 뜨거워졌다. 몇 번이고 혀를 씹어 삼켜 낸 것은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어떤 소리가 나올까 두려워 삼키고 또 삼켜 낸 소리는 열에 들뜬 여인의 교태성이었다. 그러나 세자는, 조금도 데워지지 않았다. 은우는 급히 팔을 짚어 상체를 일으키다가 푹, 고꾸라졌다. 무릎을 꿇은 채로 엎드려 호흡을 골랐다. 툭, 등으로 떨어지는 차가운 느낌에 소스라치며 고개를 들었다.
“식었구나.”
더듬거리며 집어 보니 침전에 준비했던 물 적신 무명 수건이었다.
“기다려라. 더운 물을 새로 가져오라 이르겠다.”
“아, 아닙니다, 저하.”
은우는 정신이 번쩍 들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밀상궁이 이른 말이 떠올랐다.
먼저 용태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저하의 존체를 살펴라.
침소에 들어와 수건을 보며 몇 번이고 마음으로 익혔었다. 은우는 제 몸을 급히 수습하고 무릎으로 걸어 한쪽에 마련된 깨끗한 수건을 들었다. 준비된 대야에 담긴 물에 다시 적셨지만, 물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대로 저하의 몸에 수건을 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더운 물을 새로 대령하기를 여쭐 수도……. 은우는 비스듬히 돌아 앉아 상체를 숙이고 차가운 무명 수건을 제 심장으로 가져갔다. 맨 가슴에 닿는 젖은 수건이 목덜미까지 시리게 할 만큼 차가웠지만 은우의 체온을 앗아 간 수건은 따스해졌다. 옷을 입으라 명 받은 바가 없으니 은우는 비단 금침에 엎드릴 때와 같은 차림이지만, 세자는 처음 침소로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차림과 비슷한 자세로 곧게 몸을 편 채 시선만 낮추어 은우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저하.”
다시 무릎으로 걸어 고개를 숙인 채 무명 수건을 받쳐 들고 손을 올렸다. 다섯 개의 촛불 중 두 개만 꺼졌을 뿐이다. 세자는 답 없이 고의를 풀어 내렸다. 그사이 수건이 식었을까 은우는 한 번 더 가슴에 수건을 대었다가 떼었다. 제대로 보지 않은 채 느낌으로만 더듬어 닦아 내려 하였다.
“읏.”
세자가 나지막하게 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물이 식어, 수건이 차가워…….”
은우는 다시 수건을 제 품에 품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은 은우의 귓바퀴 위로 세자의 손가락이 닿았다.
“더운 물을 대령하지 못하게 한 까닭은, 나를 얼리고 싶어서였군.”
이미 식은 나를, 더 식히려 하느냐. 한 번도 데워지지 않은 나를 얼리고 싶었더냐.
세자의 본심이 무엇인지 어떤 함의를 품은 비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소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하.”
“죽을 것까지야.”
엎드린 은우에게 세자가 말하였다.
“재주껏 데워 보거라.”
웃음이 섞인 말투 같았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은우는 수건을 다시 품었다가 손에 받쳐 들고 호호 따뜻한 입김을 불었다. 호오, 호오, 입김을 부는 동안 어쩐지 눈물이 맺혔다. 다시 수건을 대었을 때, 세자의 긴 숨이 머리 위로 내렸다. 고개를 깊이 숙여 떨어지는 눈물을 숨겼다.
돌아서서 옷을 입는 동안 눈물은 한 번 더 흘러내렸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어 보였다. 내일 목을 베라 하지는 않는다 해도, 매질을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궁에서 내쫓기면 어떡하나. 손이 떨려 몇 번이고 놓쳤던 저고리 고름을 매는데, 세자가 명했다.
“돌아 보아라.”
금침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세자는 애초부터 풀지 않은 저고리 고름과 흐트러트리지 않은 머리칼 그대로였다. 황금빛 상투관과 첨까지 하고서 계셨구나. 은우는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치마는 부러 그렇게 입었나.”
뒤집어 입지 않은 치마를 살피어 하는 말이다. 승은을 입었다는 표식, 치마를 뒤집어 입지 않은 까닭을 물었다. 은우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내 승은을 없던 일로 하고 싶으냐.”
“저하, 어찌 그런 말씀을……. 그렇지 않사옵니다, 저하.”
세자가 어떤 연유에서든 한 번 취하고 버린 궁녀에 대해서는 때에 따라 처분이 달랐다. 특별상궁으로 봉해진 적도 있지만 아무런 직위 변화 없이 상궁이 쓰는 개인 방이 있는 처소로 옮기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결코 세자는 두 번 다시 그녀들을 찾지 않았으니 곧 궁녀의 이름조차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갔다. 상궁도 아니고 일반 궁녀도 아니고 동궁의 부름을 받는 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이가 되어, 병을 얻어 궁을 나간 궁녀도 있었고 아직도 궁궐 어딘가 외진 처소에 박혀 일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은우는 결코 궁에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소인이 제대로 수발을 들지 못하여서 저하의 심기만 어지럽혀 드린 것 같아…….”
갑자기 세자가 얼굴을 비스듬히 돌리고 웃기 시작했다.
“스스로 평가를 이미 내렸다?”
“네?”
“나의 만족을 네가 평하다니 민망하기 그지없다.”
“아, 아니옵니다. 저하, 죽여 주시옵…….”
은우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사죄하였다.
“고개를 들어라. 새벽부터 이 밤 내내 네 머리통만 보는 건 지겹구나.”
붉어진 얼굴을 들자 세자가 툭툭 바닥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가까이.”
금침 앞에 무릎을 대고 꿇어앉자 손을 한 번 더 두드렸다. 무릎걸음으로 한 보 더 다가갔다. 잠시 침묵하던 세자가 입을 열었다.
“만족했으니, 네게 무엇을 내릴까.”
“저, 저하.”
“상궁이 되길 원하는 자도 있었고, 처소를 원하는 자도 있었고, 노리개나 비단 옷이나 금은붙이를 원하는 자도 있었다. 그 모두를 달라 해도 좋다.”
은우는 얕게 숨을 내쉬었다. 상을 내리겠다는 세자는 무섭도록 냉랭했다.
“고개를 들라 또 명할까. 내 입에서 세 번 같은 명을 내리게 한 자는 내 눈앞에 살려 둔 적이 없다.”
은우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분세수를 한 것처럼 흰 피부에 여인처럼 자그마한 얼굴이었다. 예민한 콧날 아래 또렷한 인중이 그어졌고 그린 듯이 얇고 붉은 입술이 비스듬히 열렸다.
“내 마음을 원한다는 것은, 내쳤다. 다시 불러 주기만 하면 발가락부터 핥겠다는 것도 내쳤다. 또한 무엇이든 필요 없다는 것도 내쳤다. 과한 욕망이든 과한 욕망을 숨기는 거짓이든 마찬가지로 역겹다. 하지 말라.”
짙은 속눈썹 아래로 얼음 같은 안광이 목덜미에 비살처럼 꽂혔다.
“답하라. 네겐, 무엇을 내릴까.”
“그러하오면, 저하. 소인에게 소인에게…….”
*
비꺽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 위로 올렸던 팔을 내렸다.
“은우, 은우, 은우우우우! 뭐야, 아직도 잘 거야?”
미향이 이불을 걷고는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지난밤을 말해 줘야지. 응? 응?”
동갑내기 세답방 나인 미향과 한방을 쓴 지 다섯 해다. 미향의 손은 늘 거칠었다. 처음 봤을 때는 찬물에 의복을 빠느라 손등이 다 갈라져 있었다. 요즘도 불에 달군 다리미에 간혹 손을 데어 왔다. 궁녀 일 중 가장 험하고 힘들다는 세답방 나인은 같은 항아들 사이에서도 낮은 취급을 당했다. 비록 힘없는 대비전이긴 하지만 대비의 지밀로 들어가 새앙머리를 하고 아기항아님이라 불리며 궁 생활을 시작했던 은우와 지위에 차이가 있었다. 미향은 처음 자신을 보고서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고, 터진 상처에 기름을 발라 주던 은우를 보며 우아앙, 하고 울었다. 아기항아도 지밀이면 세답방 나인에게 말을 놓기 일쑤였다. 은우는 울어 버리는 미향에게 많이 아프냐며 상처를 호호 불어 주었다. 은우의 음성은 아씨처럼 곱고 아기처럼 천진했다.
‘나, 기왕이면 동갑내기 한방 친구면 좋겠다고 기도했거든. 좋아, 정말 좋아. 동무가 생겨 너무 좋아. 나 잘할게. 미향아. 잘 지내자. 응? 우리 측간도 같이 가고, 쉬는 날이면 같이 놀아. 오래오래, 오래 같이 잘 지내자. 열심히 잘해서 같이 상궁도 되고…….’
은우는 몸을 뒤척이다가 미향의 간지럼에 항복하고 까르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땠어? 어때? 어때? 세상에, 세자 저하 가까이에서 보니 어때? 기절할 것 같지 않았어? 너무너무 너무. 아아아, 난 그 빛나는 얼굴을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보면 숨이 콱 막혀 죽을 거야.”
은우가 가만히 쳐다보자 미향이 제 손으로 입을 탁탁 쳤다.
“해 보는 소리야. 내가 동궁전도 아닌데 세자 저하를 어떻게…….”
“나라고 뭐 다르겠니.”
“뭐야, 넌 예쁘잖아. 그러니 동궁전 지밀에도 뽑힌 거고. 그래서 결국 따당, 따다당.”
미향이 가야금 소리를 후렴처럼 넣더니 이불에 고개를 처박고 깔깔거렸다.
“어마, 내가 왜 다 얼굴이 타는 것 같니.”
이불 속에서 웅웅 미향의 음성이 울렸다.
“어때? 어땠어?”
“말 못해. 알잖아.”
미향이 입을 비쭉 내밀었다. 그럴 줄 알았다. 융통성 없는 강은우, 라고 애교스러운 비난을 하는 중이다. 은우는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밀한 부위에서 시작되는 통증 때문에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미향이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은우를 말리고서 재바르게 이불을 개켰다.
“내가 소셋물도 떠 왔어. 옷도 입혀 주고 머리도 빗겨 줄게.”
은우를 떠밀다시피 아랫목에 앉히고는 미향이 수선을 떨었다.
“무슨 일이래.”
“그냥.”
미향이 머리 빗질을 하다 말고 멈칫거렸다. 이내 흑흑 울음소리가 들렸다.
“미향아, 왜 그래.”
“아니, 아니. 이제 같은 방에서 자는 것도 마지막이잖아. 이제 은우야, 부를 수도 없으니까.”
“무슨 말이야. 그렇지 않아.”
은우가 돌아앉아 미향의 손을 잡았다.
“미향아, 그렇지 않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어떻게 그래?”
미향이 코를 훌쩍였다.
“너도 알잖아. 저하는 궁중 제일 천하절색이라던 궁녀도 두 번 찾지 않으셨어.”
월심이라는 궁녀였다. 다른 처소 나인들도 고개를 돌려 몇 번이고 훔쳐보던 미색이었다. 대전 지밀에서 동궁전 지밀로 옮기고 얼마 안 되어 승은을 입었다 했다. 월심은 진심으로 세자 저하에게 마음을 다했다. 특별상궁이 되어 반듯하고 좋은 처소를 받았고, 시비도 여럿을 받았다. 가채로 큰머리를 하고 떨잠을 꽂고 화려한 노리개를 한 월심은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일 년이 되지 않아, 월심은 시름시름 이름 모를 병을 앓으며 여위어 갔다. 한밤에 적삼 차림으로 궐내를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질병가로 나가 치료를 받는다는 말을 끝으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들 승은을 입으면 이런 처소에서는 더 이상…….”
“난 그럴 거야.”
놀라서 둥그렇게 뜬 미향의 눈에서 남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은우는 쓰윽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첫날 그랬잖아. 우리 오래오래 같이 친하게 한방 동무 하자고. 열심히 해서 같이 상궁마마님 되자고.”
하긴 은우는 여태껏 눈에 띄는 일이든 그렇지 않든 열심히 묵묵히 최선을 다해 일했다. 꾀를 부리는 일도 경거망동하는 일도 없었다. 늘 눈에 띄지 않게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소임을 다했다. 하지만, 세자의 승은을 입었는데……. 지금 그게 말이 되니, 하는 표정을 짓는 미향을 뒤로하고 은우가 일어섰다. 한쪽에 두었던 다회多繪 틀을 꺼냈다.
“오늘 너도 쉬는 날이잖아. 우리 다회치기나 할까.”
원통 모양 다회 틀에 조랑조랑 매달린 여덟 개의 톳에는 진홍빛으로 물들인 생사가 감아져 있었다. 여덟 가닥 생사를 다회틀 중앙에 꽂힌 침 위로 차례로 엇갈리게 꼬는 일을 하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졌다. 끈목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기도 했다. 둘은 정답게 머리를 맞대고 앉아 진홍빛 동다회를 꼬아 만들었다. 다회는 글자 뜻대로 많은 실이 그림을 이루는 것이었다. 다양하게 선을 합사하면 매듭을 만들 수 있는 끈목이 나왔다. 궁녀들이 근무가 없이 쉬는 날이면 흔히 하는 놀이 겸 소일거리였다.
진분홍 동다회로 나비매듭을 만들까, 꽃 매듭을 만들까, 아니면…….
*
이른 아침부터 중궁전이 소란했다. 중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모를 세웠다. 세자가 침소로 들인 나인이 하필이면 대비전 지밀이었던 아이라 했다. 조수라의 소란을 듣고서, 중궁전에 들른 대비가 한마디만 하지 않았어도 그 아이를 보낼 일은 없었다. 용색과 태도, 나이와 마음가짐을 골라 동궁전에 지밀로 보낼 궁녀를 고른다 말하자 간자를 심어 놓을 셈이냐는 식으로 돌려서 언짢은 내색을 하지만 않았더라도 중궁에게 충성하는 아이로만 골랐을 것이다. 대비에게 밀릴 수는 없어, 보란 듯이 은우를 뽑았다고 말했다. 퇴선간이든 생과방이든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넣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소셋물? 무어라?”
보료 팔걸이에 올린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중궁전 지밀상궁은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하필 그날 정옥이 토사곽란을 하는 바람에…….”
중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름이, 은우라 했지?”
“네, 그러하옵니다.”
“세자가, 그 아이와 침수를 든 후에 일어나지 못했다고?”
“네, 파루 소리 이후 자리에 계셨다 하옵니다. 문 밖에서 북을 두드렸는데도 깨지 못하시어, 결국 내관이 안으로 들었다 하옵니다.”
“하. 매일 밤 부엉이처럼 잠을 이루지 않던 세자가 아니더냐.”
“본체 미령함을 염려하여 어의가 들렀는데…….”
상궁이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의는 세자의 강녕함을 칭송하며 돌아갔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세자의 낯빛에 전에 볼 수 없던 활기와 불그레한 화색이 돌았다고 했다. 중전이 보료 팔걸이를 토독토독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은우, 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더라?”
“그다지 뛰어난 미색은 아니옵니다.”
주 상궁이 고르고 챙기고 키우고 겉과 안의 몸 전체를 오래 공들여 다듬었던 나인들 얼굴이 차례로 중전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 애들을 두고 은우를 골랐다?
“데려와라.”
중전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세자 취향 좀 봐야겠어.”
주 상궁의 마음속 물음에 답하듯이 덧붙였다.
“세자를 기쁘게 했다니, 어미가 상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주 상궁이 손짓에 따라 물러갔다. 홀로 앉아 중전은 생각에 빠졌다. 처음부터 간자 노릇을 할 아이가 아닌 마당에, 중궁전에 다니는 일을 숨길 필요가 없다. 세자가 맘에 들어 했다면 알아 두는 편이 낫다. 혹여 잘 구슬리면 중궁의 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중궁전에 들렀다는 소식이 귀에 들어가면 세자가 어떻게 반응할까.
“그 밤을 못 잊어 또 부르려나? 아님 성질 그대로 내치려나…….”
정신을 잃을 만큼 좋았나?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았으려나.
세상에. 광안이?
침소에서 검을 품고서야 쪽잠에 드는 광안이, 밀랍처럼 굳어서는 재수 없는 표정으로 늘 나를 깔아보는 그 광안이 은우라는 계집애가 허리를 움직이면 어떤 표정으로 무너졌을까.
어머, 재밌어라.
향유를 발라 반질반질한 손끝을 내려다보며 중전이 소리 내어 웃었다.
*
절을 올리고 다소곳이 앉은 아이는 시시해 보였다. 주 상궁의 눈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시시해 보이려 노력하는 아이였다. 궁녀복을 입혀 섞어 놓으면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아이.
늘 고개는 숙이고 있겠지. 피부를 가꾸거나 사향 주머니를 차고 다니거나 분을 개어 바르고 입술을 붉게 칠하거나 살풋살풋 눈을 뜨며 금상과 동궁의 시선을 맞추며 도발하는 일 따위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아이. 아니, 단 한 번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을 아이. 허리 아래가 흔들리지 않도록 걸음은 조신하고 똑바르며 언제나 제 몸보다 큼직한 궁녀복으로 몸을 가렸을 아이.
“은우라 그랬나. 고개를 들어 보게. 내 얼굴을 보고 싶네.”
“황공하옵니다, 중전마마.”
교태 없이 정직한 동작이 몸에 배어 고개를 드는 모습조차 담백했다. 광안 앞에서도 그랬으려나. 감춰진 허리는 가늘고 분칠 하나 하지 않은 피부는 뽀얗다. 세요설부細腰雪膚에 눈썹이 가지런하고 눈이 맑고 고우니, 미청목수眉淸目秀구나. 어쩌면 이번에는 광안이 제대로 빠졌겠는걸. 은우 너를 세자에게서 떼어 놓든가, 내 편으로 만들든가, 양단간에 결정해야겠구나. 어느 편이 더 가능성이 높을까 중전은 찬찬히 은우를 살폈다.
“지난밤에 세자를 모셨다고 들었다네.”
“아…….”
은우가 얼굴을 붉혔다.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제가 부족하여…….”
“그럴 리가.”
중전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상궁 교지를 내린다던가?”
“아닙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하여, 아무것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뺨은 더 붉어졌다.
“아무것도?”
“네, 그러하옵니다. 중전마마.”
아무 것에는 그날 밤에 아무것도 없었으며, 따라서 세자가 내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중전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아, 그렇군. 그래도 침소에 들었고 머물렀던 궁녀인데 이리 취급하면 되려나. 은우야, 그럼 내가 대신 선물을 내려도 될까?”
“아니옵니다, 중전마마. 말씀만으로도 황공하옵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여 그러니 뭐든, 말해 보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은우는 숨만 조용히 내쉬었다. 중전이 가만히 다과상을 은우 쪽으로 밀었다. 다정히 웃으며 물었다.
“입술이 말랐구나. 차로 목을 좀 축이고 이리 와서 밀과 맛을 좀 보지 않겠어?”
문득 다과상에 차려진 밀과에 눈이 닿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아침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해 굶었고 점심은 미향이 챙겨 준다고 했는데 중궁전에서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허둥지둥하다가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궁녀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물음에 쫓기듯이 제 처소로 들어와 숨어야 했다.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손수 손에 쥐여 주는 밀과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끈적하게 꿀이 발린 밀과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한입 깨물자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 번졌다. 와, 맛있어. 눈이 번쩍 떠질 만큼 입에 착착 붙는 맛이다. 중궁전 생과방에 있을 때 보조로 일하며 어깨너머 구경만 하고 차림을 거들기만 했지 맛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럼, 이걸로 선물하면 되겠구나.”
은우의 마음을 읽었는지, 중전이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중전의 지시에 따라, 중궁전 지밀상궁인 주 상궁이 비단보로 감싼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두 달간 중궁전에서 일했던 은우에게 혹독할 만큼 엄했던 분이어서 얼굴만 보아도 저절로 어깨가 떨렸다. 차마 속 내용이 무엇인지 묻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니 예를 갖추어 받지 않는다고 호통이 떨어졌다. 중궁이 웃으며 대신 답했다.
“마침 새로이 지은 옷 한 벌이 있길래. 내 보기엔 잘 맞을 것 같은데, 아니라면 침방에 수선을 시키면 되니까. 아닐세. 주 상궁, 옷은 지금 대어 보고 수선을 맡겨 이 아이 처소로 가져다주시게.”
그런 옷은 입을 일이 없다는 말은, 궐 밖 심부름이나 외출할 때라도 입으라는 중궁의 친절에 막혀 버렸다. 은우가 좋았던 건 입을 일이 없는 옷보다 주전부리 간식이었다. 중전은 생과방에 일러 다과상에서 맛봤던 밀과는 물론이고 콩정과까지 골고루 챙겨 옷과 함께 보내겠다 하였다. 미향이가 얼마나 좋아할까.
“아, 이건 지금 가져가고.”
중전은 소반에 붙은 서랍을 열어, 품에 쏙 들어갈 만큼 자그마한 비단 주머니를 따로 밀어 주었다.
“중국 사신단에게서 하사 받은 엿이야. 차조와 삼을 삶은 물에, 꿩고기와 꿀을 넣고 오랫동안 조린 것이라네. 입에 달기도 하지만 몸에 좋기도 하니, 내 몹시 아끼는 거라…….”
거절하려는 은우에게 그리하여 아주 조금, 두 개만 넣었다 하며 손이 부끄럽다 하였다. 은우는 머리를 숙이고 양 손으로 얄팍하고 작은 비단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내명부 수장이 되어 세자 승은을 입은 나인에게 생각시한테나 줄 당과나 줬다고 말이 돌까 두려워.”
중전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이건 혼자 조용히……. 혹여 세자가 승은을 내린 궁녀를 중궁이 불러 밤을 캐물었다고 말이 돌 수도 있고, 세자가 언짢아 할 수도 있을 터이니 눈을 피해 조용히 둘러 가시게.”
은우는 대조전 차비문을 지나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검은엿이었다. 두 개나 주시다니, 혼자 먹으라 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약속 받고 미향이와 하나씩 나눠 먹을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품에 넣은 비단 주머니가 혹여 떨어질까 한 번씩 확인하며 은우는 걸음을 재촉했다. 보는 눈이 적은 길을 택해 빙빙 둘러감이 아쉬울 뿐이었다.
*
서연을 마친 광안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하, 낮것상이 준비되었습니다.”
광안의 얼굴을 살피며 내관 강선이 아뢰었다. 강선은 세자가 어린 왕자군이었을 시절부터 곁을 지키던 내관이었다.
“물리거라.”
“저하.”
강선은 키도 자그마하고 몸집도 작은 편이었다. 광안이 강선의 키를 넘어선 것은 열세 살이 된 해부터였다. 늘 잘 먹고 잘 큰다고 생각했건만, 강선은 광안이 식사를 거르는 일을 보지 못했다. 기를 쓰고 매번 수라를 드시라 하였다.
“강선.”
“네, 저하.”
“그렇지. 잘하는구나.”
“네?”
“내가 하명하면 그리 답하면 된다.”
광안이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강선이 헐떡이며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따르지 말라, 하명하면 강선은 잠시 고개만 숙이는 척하다가 다시 쫓아올 테다. 귀찮다. 피곤하다. 새삼스러운 분노가, 해묵은 억울함이 장기를 헤집으며 거꾸로 솟아올라 목줄을 활활 태운다. 광안은 입을 꾹 다물고서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성정각 영현문을 빠져나오는 광안의 뒤를 좌익위 남휼이 그림자처럼 붙어 섰다. 바짝 다가서는 내관에게 눈짓을 하자, 내관들과 계방 익위사군들이 멀찍이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군사도 따르기 힘든 속도로 걸으며 세자는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남휼은 홀로 세자를 호위하였다.
서연은 본디, 세자의 교육을 위한 장치였으나 광안의 서연에서는 의례 불쾌한 긴장감 속에 세력 위시가 벌어졌다. 세자시강원의 당상관은 겸관으로 1품관인 사, 부, 이사는 삼정승이 겸직하였다. 중전의 아버지, 국구이며 영상인 유태경이 포함됨은 물론이며 유태경을 위시로 하는 유당파가 매회 서연을 장악했다. 세자를 미래의 성군으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이유로 세자시강원의 당상관과 당하관은 집요하게 광안의 사상을 검증하였다. 명에 대한 은혜, 명에 대한 사대, 완전무결한 유교 이념, 숭명주의를 고집하고 주입하였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광안의 답은 모조리 임금의 귀로 들어가고 조정의 신료들 사이에서 부풀려질 것이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의 명분이었다.
‘폐위건진廢僞建眞(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옹립하다).’
감히 광안 앞에서는 올리지 못하는 단어. 하지만 유태경의 사랑채에서 공공연히 떠드는 소리.
‘폐위건진.’
차자에 서자인 광안은 전란 중에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파천하는 임금의 안위를 위해 방패막이 세자가 되어야 했다. 칠장복도 제대로 못 입고서 초라하게 세자 즉위식을 임시로 치렀다. 이후로 전란 7년 동안 분조를 이끌며 작은왕 노릇을 했으나, 전란이 끝난 후 6년째, 아직도 명으로부터 책봉도 받지 못한 반쪽짜리였다. 유태경의 외손자이자 임금의 유일한 대군, 중전의 아들. 그들이 말하는 폐위건진은 명백히 한 사람을 겨냥하고 다른 한 사람을 추앙하였다. 하지만 좌익위 남휼에게 묻는다면, 가짜는 대군이며 진짜는 광안이다. 단지 정비의 자궁을 빌려 세상에 나왔다는 이유로 진짜가 될 수 있다면 그 세상이 가짜이다.
세자의 걸음이 후원 영화당에 멈추었다.
“쉬고 싶다.”
영화당 전각에 오르는 세자를 두고 남휼은 월대 아래에 섰다. 부용지 연못 주위로 막바지로 접어든 가을이 마지막을 불태우고 있었다. 권력의 아귀다툼이 끝이 없는 궐내에서 마치 결계가 쳐진 듯한 공간이다. 풀 냄새, 나무 냄새, 물 냄새가 바람을 따라 퍼져 든다. 네모난 부용지 중앙에 만든 둥근 섬 위에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다. 둥근 하늘에 네모진 땅을 상징한다 그랬지. 광안이 언젠가 그랬다.
하늘은 둥글고 무한한데, 그 아래 네모난 땅 위, 감옥 같은 삶을 살고 있구나.
휼은 아직 그 말을 내뱉던 쓸쓸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부용지의 하늘과 감옥을, 그럼에도 질기게 서 있는 푸른 소나무를 물끄러미 보며 광안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까. 광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들어 주변의 풍광을 담았다. 부용지를 둘러싼 붉은 단풍과 푸른 소나무의 대비가 눈이 시리다.
“휼아.”
한참을 홀로 서 있던 세자가 부용지에 눈을 붙박고서 혼잣말처럼 불렀다.
“네, 저하.”
휼아, 휼아. 어린 광안은 그를 늘 그렇게 불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말수가 적었던 광안은 다른 왕자군들과 달리 놀이보다 예학을 좋아했다. 성균관 박사들의 골칫거리가 되었던 다른 왕자군과 광안은 타고난 천성이 달랐다. 종학宗學에서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자 광안은 윤허를 얻어 스승의 집으로 예학을 익히러 다녔다. 가장 으뜸인 반찬을 말해 보라는 부왕의 질문에 광안은 홀로 ‘소금’이라 말하였다. 산해진미도 소금이 없으면 백 가지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총명한 답을 하여 얻은 윤허였다. 한성부 좌윤의 아들 남휼은 광안의 글동무였다. 광안은 활달한 남휼을 유달리 잘 따랐고 판윤 집에 드나들며 남휼과 같이 목검을 들고 검술을 익혔다.
“휼아.”
광안이 돌아다보며 다시 불렀다. 다음 말은 하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가까이. 남휼이 속으로 명을 떠올린다.
“가까이.”
손을 내미는 세자를 향해 남휼은 전각의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내 목이 아직 붙어 있나.”
세자가 손가락을 들어 목을 가리켰다.
“존체 무탈하오십니다.”
“그런 말투 치우고.”
세자가 휼을 향해 웃었다. 길고 예리한 눈이 접히고, 안광을 더 차갑게 만드는 짙은 속눈썹이 부드럽게 휘며 세자가 웃는다.
“멀쩡합니다.”
“내 목줄을, 놓지 않는구나. 뜯고 뜯고 또 뜯고. 신기한 일이지. 그래도 아직 붙어 있다니.”
세자가 손을 내밀었다.
“검을 다오.”
남휼은 양 검 중 하나를 빼어 세자에게 건네었다. 스르릉 칼집에서 환도가 몸을 떨며 나왔다. 햇빛을 반사하는 검이 은빛으로 번쩍였다. 곤룡포의 은빛 사조룡이 발톱을 세우듯이 광안은 간결한 동작으로 검을 휘두른다. 파공음과 함께 얼굴 앞에서 공간이 갈라졌다. 광안이 칼끝을 들어 남휼의 목을 겨누었다.
“내 눈을 보아라.”
“네, 저하.”
광안의 칼날은 매섭다. 덕을 숭상하는 군주로만 살기에 아까울 만큼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게다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검신, 남휼이 직접 가르친 검술이다.
“두려우냐.”
“그렇습니다.”
“내 눈이 두려우냐.”
검게 식은 눈, 검은 불이 불타오르는 눈을 보았다. 남휼은 광안의 광기를 알고 있다. 어둑신한 늪 같은 분노가 지피는 불길을.
“그렇지 않습니다. 검이 두려울 뿐입니다.”
“거짓.”
광안은 무표정보다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내가 난폭하게 미치기를 원한다. 원하는 대로 난폭하게 미쳐, 그들의 목을 베어 버릴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서연장을 피바다로 만들까. 내 영상의 목부터 치고,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들어 그들을 향해 던질 테다. 서안을 뒤집으며 도망가겠지. 엎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진 자를 밟으며 소리 지르겠지. 고명하신 유교학자들께서 오줌을 지리며 울며 살려 달라 벌벌 떨겠지. 넘어지는 그들의 등을 베고 손을 자르고 입을 베고 눈을 파고……. 어떠냐.”
휼은 답하지 않았다.
“휼아. 내가, 미쳐 가는 중이다.”
광안은 검을 내려 칼집에 꽂았다. 휼에게 돌려주지 않고서 검집을 움켜쥐었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손은 간신히 통제하는 분노로 떨리고 있다. 광안의 생각을 피비린내 나는 서연장에서 돌려야 한다.
“저하, 그들은 잠시 지우소서.”
“그러면, 지운 자리에 무엇을 채울까.”
남휼은 짐짓 다른 소리를 지껄였다.
“이를테면, 여자라든가.”
“여자라.”
광안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비쳤다.
“어젯밤 처소에 궁녀를 들이셨다는 이야기는 언제 해 주실까 기다렸습니다.”
광안이 목을 뒤로 젖히며 웃었다.
“천하절색이었나 봅니다. 세자 저하 눈에 들었다니.”
“전혀. 천치에 못생긴 아이다.”
그리 말하는 광안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새벽부터 신경을 잡아끄는 아이였다. 잠을 도통 이루지 못하여 머릿속은 불쾌한 안개가 잔뜩 낀 듯했다. 얼굴에 물이라도 끼얹으면 나으려나,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관자놀이를 바늘로 쿡쿡 쑤셔 대는 듯한 통증으로 이를 사리물었다. 새로운 얼굴이 소셋물을 받쳐 들고 있었다. 단정한 모양새와 다르게 잔머리칼이 이마로 보슬보슬했다. 이마 아래로 자그마한 콧날이 보였다. 콧날 아래 입술을 보려 광안은 물에 손을 넣으며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윗입술이 꼭 입을 벌리고 잠이 든 아기처럼 도톰하다. 조금 더 아래로 고개를 숙이자 하얀 목덜미가 보인다.
궁녀들이란, 아무리 상궁이 단속한다 해도 어떻게 하든 동정깃을 조금 더 아래로, 가슴과 저고리가 붙지 않도록, 그리하여 무심하게 눈길이 닿아도 잔뜩 내린 치마선 위로 봉긋한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모든 지밀이 그러했다. 이토록 꾹꾹 정직하게 속살을 가린 지밀나인은 처음 보았다. 흥미로워 다시 얼굴로 눈길을 주었다. 뺨은 포실하게 쪄 낸 쌀떡 같다. 속살을 가렸든 교태를 떨지 않든, 어차피 중전이 밤일을 위해 꽂은 궁녀이다.
깜찍하게도 눈을 내리깔고 있는 중이겠지…….
광안은 도톰한 입술을 벌려 우악스레 그 속을 손가락으로 휘젓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속눈썹으로 가린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지는 것이 보고 싶어 아랫도리가 저릿해졌다. 궁녀는 주위 나인이 흘끗거릴 만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광안의 시선을 인식하지 못한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이 밤에 벌어질 정사를 연습 중인가. 광안은 물을 튕겨 궁녀의 얼굴을 들게 했다. 꿈을 꾸다 깬 아이처럼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광안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가 광안을 담았다가 순식간에 아래로 떨어졌다. 손이 닿고 싶었던 곳, 함부로 굴고 싶었던 여자의 얼굴과 목덜미에, 눈길이 닿지 않던 저고리 안으로 물을 내렸다.
밤 치장을 하고서, 스스로 단정히 입었던 저고리를 풀고 속적삼을 벗어 뽀얀 속살을 드러내는 여자를 안았다. 몸 곳곳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나신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리도 어기기 싫다 하는 팔금조를 지켜 주며 곱게 곱게 안았건만 여자는 꼬챙이에 꿰인 어린 짐승처럼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상관없었다. 벌벌 떠는 몸이, 미치도록 좋았으니까.
침전을 나가기 전, 여자는 눈물을 떨구며 제대로 모시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고름을 뜯고 뽀얗고 통통한 가슴을 물어뜯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짓이기며 다시 범하고 싶었지만 어떤 욕구든 끝까지 배출한 적이 없다. 수백 개의 눈, 수백 개의 귀. 궐에서 입지를 마련하지 못한 서자 세자는 그러하다. 그리하여 광안의 약점이 될 그 여자는 다시 찾지 않을 생각이다. 여자의 생각만으로도 몸이 달아오른다. 밤에, 다른 아이를 불러야겠다.
“천치에 박색인데, 저하 맘에 드셨나 봅니다.”
휼이 다 안다는 듯이 싱긋이 웃었다. 아침부터 동궁전 소식이 날아들었다. 침전에 궁녀를 들인 일이 문제 될 리가 없다. 다만, 아침에 어의가 다녀갈 정도로 광안이 깊이 잠들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광안을 죽이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이 사방에 득실거렸다.
“중궁전이 보낸 궁녀입니까?”
“그렇지. 남휼 네 덕분이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남휼은 짐짓 딴청을 부렸다. 얼마 전 조수라의 소동을 모를 리 없다. 장안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에 성가신 참이었다. 무과에 장원급제하면 장가를 들겠다 하였다. 열일곱에 무과에 급제하였지만 연이어 전란이 터졌다. 어린 광안이 세자가 되었고 남휼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랐다. 그의 검이 되고 그의 방패가 되고 그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광안은 그의 벗이다. 광안이 빈을 맞이하고, 주상의 자리에 오른 후 광안의 검이자 방패인 남휼도 처를 맞이할 것이다.
“휼, 네가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모르느냐?”
“모릅니다.”
경쾌하게 웃으며 광안이 얼굴을 바짝 붙였다.
“네 너를 몹시 아끼지만,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아끼지만……. 아무래도 합을 맞추지는 못하겠다.”
남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꼴이 재밌다는 듯 광안이 크게 웃었다.
“내가 여인하고만 합을 맞출 수 있다는 걸 또 증명해야 했으니. 이제 휼과는 검으로 합을 맞출까.”
광안은 종종 답답한 날이면 남휼과 함께 말을 달려 서총대를 향하고, 그곳에서 활을 쏘고 검을 겨루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명백히 놀리는 의미로 하는 말이다.
“거, 합을 맞추신다는 말씀은 제발.”
남휼이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하는데, 달려온 익위사 무사 하나가 전각 아래에서 눈짓을 보냈다. 무사에게 귀를 내어 준 남휼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부용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광안에게 남휼이 물었다.
“그 궁녀, 은우라 했습니까.”
“이름은 모른다.”
“은웁니다.”
“그래서?”
“잠이 깊이 드셨다고 했지요. 무슨 향을 맡은 기억은 없으십니까.”
광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궁녀가 중궁전에서 지금, 무언가를 은밀히…….”
“미혼분이라도 써서 나를 흐리게 한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광안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고작 궁녀 하나였다. 중전이 노골적으로 동궁 지밀로 밀어 넣은 다섯 중 하나. 썼으니 버리면 그만일 아이에게, 새삼스럽지도 않을 보고 하나에 광안이 흔들렸다. 남휼은 좀 더 알아본 연후에 아뢰었어야 했나 순간적으로 후회를 하였다. 은우라는 궁녀를 진정 맘에 들어 하셨나.
“아직은 확인된 바 없습니다.”
남휼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하명을 기다렸다. 광안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허공 한 점에 맞추었다. 배신감이나 상처 따위의, 결코 기대할 바가 없는 궁인에게 받을 수 없는 감정이 파르르 타오르다 사라졌다. 남휼은 그런 세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분(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가루)에 대해 설명하라.”
“혼분은 여러 방법으로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늦은 가을빛을 등진 광안의 얼굴이 검게 그늘졌다.
‘제 한방 동무가 미향이라고 합니다. 저는 미향이와 같이 오래 한방 동무를 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궁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이대로 제 처소에서 궁녀 일을 하고 싶습니다.’
‘궁녀 일이 소원이더냐.’
‘네, 저하.’
‘궁녀 일이 계속 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냐.’
‘어딜 가든 이 큼 잘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이 정도 돈을 버는 일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또한, 소인은 꼭 상궁이 되고 싶습니다.’
광안은 허탈하게 웃었다.
‘내일이라도 상궁은 될 수 있다.’
여자는 진지하게 부정했다.
‘입상궁과 같은 취급 받는 특별상궁은 싫습니다. 저는 열심히 궁녀 일을 해서, 그리하여 제 나이 마흔이 되기 전에 상궁이 되고 싶습니다. 상궁이 되어 아기항아들에게 사랑도 주고 바른 가르침도 주고, 그리하여 본이 되는 상궁이 되고 싶습니다.’
여자가 물러가고 나서 홀로 침상에 누워, 광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피싯피싯 웃다가 결국 푸하하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금침 위에서는 발발 떨고 후처리도 못해 허둥거리던 여자는 궁녀 일을 입에 올리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고작 하룻밤 승은으로 제 인생 계획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항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세자의 승은이 성가신 궁녀였다. 유달리 금조를 챙기고 어설픈 몸으로 수발에 최선을 다하려던 모습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세자와의 정사는 상궁이 되기 위해 열심히 해야 하는 궁녀의 임무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저는 궁녀로 계속 살고 싶습니다.’
고작 하룻밤 승은이라 말하는 맹랑한 궁녀가, 결국 중전이 꽂은 살수였던가.
“강선을 불러 다오.”
휼이 손짓하자 계방 군사가 달려왔다. 군사가 말을 전하러 가기 전에, 강선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군의 마음을 읽는 내관이었다.
“강선, 어제 그 아이를 침전으로 들라 하라. 석수라를 물리는 시각이다. 지금 알려라.”
“네, 저하.”
남휼이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치 자객을 침전으로 끌어들이라는 소릴 들은 것처럼 흥분하였다.
“……혼분을 확인해야지. 다양한 쓰임도.”
광안이 몸을 돌려 부용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금색 가을볕이 얼굴을 은근하게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