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안-1화 (1/10)

광안 - 라혜

一章

소셋물

느닷없는 부름이었다. 생각시로 궁에 들어와 십여 년을 보내며 상전을 만족시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오늘 처음 상전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은우는 붉게 칠한 입술을 지그시 맞물렸다 떼어 냈다. 상궁마마님의 주의와 근심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잘 해낼 것이다. 그리할 것이다.

은우의 머릿속에 입궐한 첫해 치렀던 가혹한 행사가 떠올랐다. 그믐달의 술시(저녁 7시-9시)면, 겨울 해가 빠르게 넘어가 하늘과 땅이 캄캄해지는 시간이었다. 후원에 명을 받고 도열한 애기나인 중 은우는 두 번째로 나이가 어린 애기나인이었다. 누구도 제대로 설명해 준 적 없는 행사였다. 한겨울 매서운 바람에 등이 덜덜 떨렸다. 중전마마가 자리에 앉으시고 제조상궁과 감찰상궁의 명에 따라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둘러싸고 있던 항아님들이 애기나인에게 밀떡을 물리고 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입이 막혔다는 공포감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파들파들 흔들렸다. 울며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은 오로지 얼어붙은 발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상훼尙煊(종7품 내시직)의 지시에 따라 파파밧, 밤하늘을 가르며 솟아오르던 횃불들을 기억한다. 이미 눈물범벅이 된 애기나인들이 주춤주춤 열을 흐트러뜨리다가 상궁마마님들과 둘러선 항아님들에게 꾸지람을 듣고 도열을 바로 했다. 횃불을 든 내관들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횃불은 가로로 넓게 퍼지다가 곧추세우다가 기괴하게 일그러지기도 했다. 내관들이 사정없이 애기나인들의 얼굴 앞에다 대고 불을 열십자로 그었다. 훅 훅 바람 소리를 내며 위협적으로 불이 움직이자 얼굴이 타는 듯 뜨거웠다. 일렁거리는 불 뒤로 비치는 내관의 얼굴, 부릅뜬 눈, 그 뒤로 어른거리는 검은 나무들이 일시에 은우를 덮쳤다.

“쥐부리 글려!”

“쥐부리 지져!”

휘청거리는 애기나인 앞에서 횃불은 마치 입을 지져 버릴 듯이 열십자로 춤을 추었다. 꺄아악! 사방에서 울음 섞인 비명이 터졌다. 검은 그림자들이 도깨비불처럼 움직이는 횃불에 따라 어지러이 흔들렸다. 전각의 그림자가 크게 울렁였다. 감찰상궁이 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알려 하지 말고, 들으려 하지 말고, 말하려 하지 말지어다.”

그것이, 구중궁궐 궁녀의 일이다. 오늘 은우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원하였던 적이 없는 부름을 받았다. 연유를 알려 하지도, 물으려 하지도 않았다. 궁녀의 일이었다.

더운물을 함지박에 쏟아붓는 수사(무수리)가 무표정하였다. 함지박에 넣으려는 삼베 주머니를 보며 은우가 부탁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준비한 걸 넣겠어.”

“어머, 귀한 귤껍질을 넣은 향주머니인데? 왜, 음욕을 부추기는 향이라도 준비했어?”

목욕 시중을 들던 동궁전 세수간나인이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마주 보며 킥킥 웃더니 딱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그래 봤자 하룻밤이야.”

나인이 팥과 녹두 가루가 든 주머니에 거품을 일었다. 몸을 씻겨 주는 척 얼굴을 귀에 바싹 붙이고 소리를 낮추어 들릴 듯 말 듯 말하였다.

“끔찍하다더라.”

은우와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몹시, 아주 몹시.”

입가에 점이 찍힌 궁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동궁전으로 옮긴 지 고작 이틀째였으니까. 바가지로 더운물을 어깨에 끼얹어 주며 덧붙였다.

“엉금엉금 기어서 나온대. 침소 계단을 네발로 내려오지는 못할 테니, 등 넓고 기운 쓰는 비자(궁녀의 하녀)라도 대기시켜야 하지 않겠니?”

궁녀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키득키득 웃었다. 은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함지박에서 올라오는 뿌연 수증기가 얼굴을 덮었다. 궁녀 둘이 목욕 시중을 들다니, 처음 받는 호사다.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은우는 네 개의 손가락을 차례로 엄지손톱 위에 살며시 비볐다. 물에서는 은은하게 말리화 향이 올라왔다. 마음이 안정된다. 고작 한 번인데,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두 달 전, 지밀로 아끼던 은우를 중궁전에 내어 주며 대비는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 아무리 뒷방 늙은이라지만, 중궁의 이러한 처사를 차마 묵과할 수가 없구나. 곧 다시 부르마.”

손을 잡아 주던 대비에게 그저 머리를 조아리기만 했다. 중전마마는 4년 전, 열일곱의 나이로 계비에 오르셨다. 그 이듬해 봄, 중전은 회임을 하여 쉰다섯이 된 주상에게서 대군을 생산하셨다. 임금에게 유일한 대군아기씨였다. 조정과 궁궐의 권력은 빠르게 움직였다. 대비전 궁녀의 중궁전 차출은 명분 없는 이동은 아니었다. 내명부 수장인 중전이 대조전(중전궁)에 갑자기 질병으로 출궁하게 된 궁녀 몇 명 자리를 메울 수 있는 나인을 주십사 예를 갖추어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대조전에서 은우는 지밀이 아닌 생과방에서 잡일을 해야 했다. 동궁전 지밀로 다시 옮기라는 명은 뜻밖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파루와 함께 은우의 동궁전 첫 날이 시작되었다.

보령 스물여덟, 가까이에서 본 세자는 훨씬 더 장대하였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저하에게 잠의 기운이란 찾을 수 없었다. 머리 손질을 아직 하지 않았음에도 상투관과 첨만 없을 뿐 동궁은 한 올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은우에게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채 소셋물을 높이 받쳐 들고서 은우는, 흰 침의만 입은 세자 저하가 오히려 아청색 곤룡포와 익선관을 하고 있을 때보다 더 군관 같다고 생각하였다. 무예가 높은 분이라 하였다. 전란에 휘말렸을 당시, 보령 열다섯. 분조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군사를 거느리고 검을 잡았다 하였다.

혈검.

세자의 검을 그리 불렀다 했다. 민가를 수탈하던 왜군을 혈검이 수없이 도륙했다. 일국의 세자가 천한 오랑캐의 피로 손을 적시고 면부(얼굴)를 적시면 백성들은 두려움 섞인 환호를 내질렀다 했다. 의병을 모집하고 군을 이끌고 갑주를 입고 직접 말을 타고 활을 쏠 때, 동궁 나이 고작 열일곱이었다. 망설임 없는 잔혹함에 무장들조차 무릎이 떨렸다고……. 전란이 일어나기 전, 은우가 애기나인일 때 저하를 가까이에서 자주 뵌 적이 있다. 대비전에 들러 한 시진씩 서책을 낭독하던 소년은 세자도 원자도 아니었다. 얼굴이 희고 입술이 붉고 눈썹이 가지런하여 옹주자가보다 아름답다 여겼다. 서책을 넘기는 손가락이 길고 가늘어 섬섬옥수라는 말이 비로소 제대로 이해되었다. 목소리는 낭랑하여 대비는 가인의 노래를 듣기보다 좋다 하셨다.

오래전에 쓸쓸히 세상을 떠난 세 번째 후궁의 두 번째 아들. 군호는 광안光岸.

쇠락한 가문, 자손을 보지 못한 선대왕의 계비인 자애왕후는 처량한 제 신세를 한탄했다. 대비궁은 임금이 홀대함을 감추지 않아 늘 적적하고 쓸쓸했다. 그곳에 들러 잠시 즐거움을 주던 평범한 왕자였던 광안을 대비는 몹시 아꼈다. 세 돌이 되지 않아 생모를 잃은 광안을 가여운 마음으로 품어 주었다. 광안의 태도는 한결같이 바르고 미소는 따뜻했다. 그런 광안이 섬섬옥수 같던 손으로 혈검을 잡고, 용서 없고 자비 없이 잔혹하게 베고 또 베었…….

팟, 얼굴에 물이 튀었다. 은우는 놀라서 고개를 들다가 지엄하신 동궁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광안狂眼, 군호를 빗대어 미친 눈이라 불리는 눈이었다. 곧 깊이 고개를 숙였으나 소셋물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

낮은 냉소가 정수리에 꽂혔다. 무슨 실수를 한 걸까, 은우는 아직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본디 소셋물 담당 나인은 따로 있었다. 지난밤 무얼 잘못 먹었는지 여태까지 토사곽란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해 급히 차출된 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법도에 크게 벗어난 바는 없었는데…….

“너는, 벙어리더냐.”

사죄하지 않음을 꾸짖는 말이다.

“저하.”

일시에 상궁마마님과 시중을 들던 궁인과 내관 일체가 고개를 숙였다.

“어제 새로 배속 받은 아이라, 심려를 끼쳐 송구하옵니다.”

동궁전 지밀상궁이 머리를 조아렸다.

“벙어리냐 물었다.”

“세자 저하, 소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은우는 저를 향한 하문임을 깨닫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꿇으라 한 적 없다.”

상궁이 눈짓으로 하는 말을 깨닫고 은우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세자 저하의 시선이 소셋물 대야에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받쳐 들었다. 저하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시선을 낮추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느냐.”

“저하. 아무 생각도.”

목구멍에 밀떡이라도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잠이 덜 깨어 꿈을 꾸는 중이었나 보군.”

세자의 손이 은우의 머리 위로 높이 들렸다. 정수리에서 이마로 주르륵 물이 흘렀다.

“내 시중을 들려거든, 망상하지 말라.”

코를 타고 인중 위를 흘러 물이 입술에 맺혔지만, 은우는 꼼짝하지 않았다. 한 번 더 물이 머리에 흘러내려 귓바퀴를 타고 목을 적시고 적삼까지 적셨다. 세 번째 물줄기는 눈을 적셨다. 주르륵 눈물이 물과 함께 흘렀지만 은우는 입술조차 깨물지 않았다. 턱을 타고 내린 물이 가슴골을 적셔 소름이 돋았다.

“더 높이.”

나지막한 명에 대야를 받친 손에 힘을 더하였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죽을힘을 다해 소셋물을 높이 들었다. 종아리가 쥐가 난 듯 뻣뻣해지고 발가락까지 힘이 들어갔다.

“식었다.”

뒤에서 시위하고 있던 나인 하나가 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황동 대야에 더운 물을 더했다. 세자는 느리게 소세를 마쳤다. 물러가라는 하명이 없어 그런 후에도 한참 서 있었다. 지밀궁인들의 시중을 받아 곤룡포와 익선관 옥대까지 차례로 의대를 입은 후, 세자가 여태 소셋물을 받쳐 들고 있는 은우를 향해 말했다.

“이만 물러가도 좋다.”

*

동궁에서 기별이 온 건 술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갈이었다. 아무리 침소에서 괴팍하다 하나 일국의 국본이 내리는 승은이다. 동궁전 상궁과 나인들 전체가 술렁였다. 결코 두 번 취하는 법이 없다는 세자의 승은은 궁녀 생활 15년 만에 닥친 가장 큰 위기였다. 동궁전 내관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장소는 은우가 아침에 소셋물을 들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버텼던 침소다. 동궁의 침전은 성정각인데, 국본이 머무르기엔 작고 초라한 곳이라 궁녀들조차 그를 두고 수군거리곤 했다. 세자는 서책이 빼곡하게 꽂힌 서가 겸 집무실인 보춘정 뒤편으로 이어진 자그마한 별채의 온돌방을 침소로 사용하고 있다.

지나치게 뛰어난 세자, 엄연히 대군이 있음에도 서자이자 차자인 세자, 명의 책봉조차 아직 받지 못한 반쪽짜리 세자…….

임금의 노골적인 냉대 때문에 제대로 된 세자궁 침전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말이, 이곳으로 배속 받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은우는 주인 없는 침소에 들어서서 금침과 멀찍이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고개만 아래로 기울인 채 단정한 자세로 서서, 이곳 침전으로 늦은 시각에 들었다가 파루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광안을 떠올렸다. 은우는 상전을 모실 때면 언제나 상전의 마음을 읽으려 애를 썼다. 자애왕후는 스무 살의 나이로 예순을 바라보는 부왕의 계비가 되신 분이었다. 단 한 명의 자손도 없이, 다섯 해를 넘기지 못하고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는 대비가 된 쓸쓸한 마음을 이해하고자 했다.

고작 궁녀 주제에 하늘처럼 높은 상전을 감히 평가하고 가엾이 여기겠다는 무엄한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니었다. 처지를 읽지 못하면 마음을 읽지 못하고 마음을 읽지 못하면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광안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왕자였을 시절 혹은 혈검을 휘두르며 오랑캐의 피로 몸을 적실 때와 인정받지 못하는 세자로 핍박을 받는 지금 중 어느 쪽이 더 견디기…….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은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침소 문 앞을 지키는 상궁과 내관의 세자 저하 듭신다 고하는 소리가 뒤늦게 따랐다. 아마도 고하기 전, 손수 문을 열어젖히신 모양이었다.

“망상하지 말라 했거늘.”

은우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세자가 거침없이 익선관을 벗고 옥대를 풀어 내렸다. 의대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저하, 소인이…….”

은우는 손을 뻗으려다 멈칫하였다.

“합궁 전에 옷 하나 내 손으로 못 벗을 리가.”

차갑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말투였다. 다만 사실을 전하는 것처럼 들렸다. 야전과 노숙을 하며 전장을 누볐던 분이라 하였지. 은우는 숨을 삼키고는 양손을 이마에 붙였다.

“절 받으시옵소서. 세자 저하.”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자를 향해 깍듯하게 절을 올리고 은우는 손을 모으고 섰다. 툭 바닥에 떨어지는 곤룡포를 보며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불편해 왔다. 맞잡은 손이 저절로 꿈지럭거렸다.

“중궁전에서 보냈느냐.”

동궁전으로 배속을 바꿨으니 그리로 가라 한 사람은 중궁전 지밀상궁이었다. 은우는 공손히 답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저하.”

“이리도 뻣뻣이 서서 잠자리 수발을 들라 하시더냐.”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에 은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내 옷도 내가 손수 벗고, 네 옷도 내가 벗겨야 하느냐. 중궁전에서 왔으니 내가 네 수발을 해야 한다는 거로군.”

다가선 세자에게서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아, 아니옵니다.”

침착해야 해, 부디, 제발. 은우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옥색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이어 푸른색 겉치마를 벗었다. 속적삼 차림으로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단정하게 개어 정리하고 은우는 다시 손을 모으고 섰다. 금침을 밟고 선 세자는 곤룡포와 두루마기만 벗었을 뿐이다. 똑바로 서서 움직임 없이 은우를, 은우의 동작만을 응시했다. 적삼 저고리를 벗는 손이 바르르 떨렸다.

궁녀는 결코 국본 앞에서 입술에 혀를 내밀어 침을 적셔서는 아니 되며…….

지밀상궁의 엄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은우는 바싹 마른 입술을 맞물렸다 떼어 내며 숨을 골랐다. 속치마 위로 드러난 가슴이 아래위로 울렁였다.

“가까이.”

은우가 머뭇거리며 금침에 다가섰다.

“더.”

바닥에 붙은 듯한 발을 떼어 반보 움직였다. 숨결이 닿을 듯 지근한 거리였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라.”

명대로 금침에 무릎을 꿇은 은우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시선을 낮추고 숨을 작게 몰아쉬었다. 동궁이 바지 허리춤 끈을 풀었다.

“저하, 불을. 불을…… 제발.”

고개를 조아리고 은우가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로 말을 밀어내었다.

결코 국본의 신체를 보아서는 아니 되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저하, 법도가 그러하옵니다. 왕실 법도가…….”

푸후훗, 남자의 웃음소리가 벗은 등 위로 떨어졌다.

“합방 교육 말인가.”

“네, 저하.”

은우는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제발. 저하. 상궁마마님이 지키시고 계십니다. 어긴다면 저는 저는, 생각시부터 15년입니다. 15년 노력을 여기서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차마 입에서 나오지 못하고 뱅뱅 도는 말을 꾹꾹 삼켰다.

“신체를 보지 못한다는 법도는 지켜야지.”

“네, 그러하옵니다. 저하.”

이제 들어주시나 싶어 은우는 기쁘게 답하였다. 조심스레 일어서 불을 끄러 촛대를 향하던 은우의 뒤통수를 세자의 말이 잡았다.

“불을 끄라 명한 적 없다.”

“아.”

은우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세자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투명할 만큼 희고 깨끗한 피부, 가지런한 눈썹,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붉은 입술에 냉소가 걸렸다.

“네가 보지 않으면 될 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은우는 눈만 깜박였다.

“재밌구나.”

세자가 은우에게 다가와 상체를 숙였다. 턱을 들어 얼굴을 바싹 대고는 말했다.

“중전마마는 이런 천치를 내 침소로 밀어 넣고 뭘 하시자는 겐가.”

“저하, 일러 주시면, 뭐든 일러만 주시면…….”

눈물이 왈칵 솟을 것만 같았다.

“매듭을 풀어라.”

속치마의 매듭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을 꾹 참고서 은우는 손을 가슴 위로 가져갔다. 툭, 소리와 함께 속치마가 저항 없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꽁꽁 싸매었던 가슴이 갑작스레 외부 공기에 노출되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커다란 손이 덮듯이 가슴을 감쌌다. 마치 크기라도 재어 보는 듯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서책을 넘기던 광안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은우 제 손보다 더 하얗고 고운 손이었는데, 가슴에 닿는 손바닥은 거칠고 딱딱한 못이 배겨 있다. 까끌까끌한 손바닥이 쓰윽 가슴을 훑어 내렸다. 은우는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결코 소리 내지 말 것이며……. 신음하지 말 것이며…….

“천치 같은데, 가슴은 쓸 만하구나.”

“감, 감읍하옵니다.”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세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부끄러움에 얼굴도 몸도 발갛게 물들었다.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세자는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를 참느라 깨물고 있는 속입술이 얼얼했다. 웃음소리가 가물거렸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문지르는 손길에 혀를 깨물 뻔했다.

“눈을 뜨고.”

차마 남자 손에 짓이겨지는 제 가슴을 보지 못하여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엎드려라.”

주춤주춤 움직여 금침 위에 몸을 뉘었다.

“무릎을 세우고.”

불은 여전히 환히 밝힌 채였다.

“고개는 박아야, 나를 볼 수 없겠지.”

스르륵 바지가 금침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수치심과 두려움에 자꾸만 몸이 오그라들었다. 속옷을 벌리는 손길은 다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남녀상열지사를 모른다 해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전혀 동하지 않음을, 원하지 않는 교접을 하고 있음을.

대체 왜.

은우는 이해할 수 없지만 연유를 알려 하지 않았다. 입에는 여전히 밀떡이 물려 있고 도깨비 불 같은 횃불이 태울 듯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것만 같다. 손이 이번에는 둔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더 높이.”

기어이 치켜 올린 둔부를 환히 드러내게 만들자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이를 악물었다. 순간 아래로 느껴지는 감각에 파드득 몸을 떨었다. 내밀한 부위에 음경을 맞추고서 남자가 느리게 밀고 들어왔다. 은우는 이불을 힘껏 쥐었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비명이 터질 것만 같았다. 더듬더듬 이불을 쥔 주먹을 끌어내려 입을 막았다.

“중궁전에.”

허리가 꿈틀 저절로 뒤틀렸다. 맘에 차지 않는지 세자가 골반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사정없이 몸을 끌어당기자 우욱, 터져 나오는 비명이 입을 막고 있는 주먹을 때리고 삼켜졌다.

“오늘 밤을 소상히 전하거라.”

남자의 몸이 뒤로 물러났다. 은우는 헉, 헉 숨을 내쉬었다.

“답하라.”

가차 없이 밀고 들어오며 세자가 말했다.

“네, 저하.”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한 답을 할 수 있는 제 자신이 놀라웠다. 놀라웠던 건 은우 자신만은 아닌 듯하였다. 세자의 웃음소리가 다시 허공을 울렸다.

“네가 아직 여유롭나 보구나.”

세자가 허리를 움직였다. 꽉 채워 움직일 것 같지 않았지만 자연의 이치가 그런 것이 아니었나 보다. 채워진 것이 나갈 때면 찰싹 붙어 있던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가 이내 다시 받아들일 때는 새로운 살이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벗겨진 살점 위로 새로이 돋은 살점이 가차 없이 문질러졌다. 고통으로 머리끝이 주뼛 서는 기분이었다. 느리게 움직일 때마다 이불에 처박은 고개를 자꾸만 도리질 쳤다. 은우는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려 했다. 궁에 들어와 가장 좋았던 일, 천애 고아가 된 천덕꾸러기를 소중한 내 애기나인이라며 머릴 몇 번이고 빗겨 주고 또 빗겨 주던 상궁마마님의 손길, 우리 은우는 손도 재바르고 눈치도 빨라 얼마나 윗전 사랑을 많이 받을꼬. 궁녀 교육이 힘들어 눈이 붓도록 울던 밤이면 가만가만 안아 주던 품…….

어느 순간 흔들리던 몸이 멈추었다. 이제 끝난 건가 싶어 후우, 작게 안도의 숨이 나왔다. 후들거리는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 확 머리채가 잡혀 고개가 들렸다.

“무얼 생각하느냐.”

기침이 터져 나와 은우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한 팔로 위태로이 지탱하는 몸 위로 남자의 몸이 겹쳐졌다. 깊숙이 삽입한 채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톱으로 정점을 긁어내리자 찌릿한 통증과 동시에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열감으로 은우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결코 몸을 떨거나 흔들어서는 아니 된다. 팔금조를 어기는구나.”

“아, 아니옵니다. 저하.”

“그렇다면, 제대로 버텨라.”

“네, 저하.”

은우는 비칠거리며 손을 바닥에 짚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더했다. 다시 남자의 웃음이 맨 살갗으로 떨어졌다.

닷새 전이었다. 광안은 매일 문안을 여쭙고, 주상은 다섯 번에 한 번꼴로 문안을 허했다. 문안 이후 조수라의 시선(왕의 음식을 세자가 미리 검사하는 것)까지 마치고 광안은 희정당 주상의 침소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중전이 다정하게 물었다.

“세자, 본체 무탈하신지요.”

“주상전하와 중전마마의 은혜 덕분입니다.”

“전하, 우리 세자는 날이 갈수록 더욱 미색이 높아집니다. 어쩜 제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고와졌어요.”

광안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주상의 못마땅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주군의 상은 용을 품어야 하는 법이거늘…….”

중궁은 주상의 마음을 묶은 끈을 길게 빼어 들고 툭툭 강도를 달리하면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병으로 몸과 마음이 쇠한 주상은 중궁이 의도한 대로 불쾌감을 드러내고 진노하고 다시 수그러들고 했다. 중전이 다정함으로 포장한 공격을 가하였다.

“세상에, 이렇듯 귀하신 세자에게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소문이 돈다지요.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주상 전하. 국본을 욕되게 하는 법은 없습니다.”

임금은 무성의하게 명하였다.

“세자빈을 들여라.”

광안은 답하지 않았다. 열네 살에 맞이한 빈은 합궁 한 번 못해 보고 세상을 떠났다. 전란은 7년이었다. 광안이 스물셋이 되었을 때, 세자빈을 맞기 위한 가례도감의 설치를 논하였으나, 국상이 있었다. 주상의 정궁이자 광안군을 입적하여 거두었으며 정치적 후원이 되어 주었던 중전이 사망했다. 일 년이 지났을 때, 세자빈을 간택하자는 신하들의 말에 주상은, 중전을 먼저 들여야 한다고 서운함을 내비쳤다. 소북파 유태경의 여식, 광안보다 일곱 살이 어린 중전이 궐에 들어오면서 광안의 위치는 크게 흔들렸다. 두 해 전, 어린 왕후가 대군을 생산하면서 조정의 힘은 유태경의 소북파로 이동했고, ‘유당’이라는 정치 세력으로 변질되었다. 광안은 이후로 주상의 병환이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세자빈을 맞이하는 일을 미루었다. 지금의 중전, 유 씨는 조정 실권을 장악한 소북파의 수장이자 영상 유태경의 딸이며, 세자빈 역시 중궁의 입김대로 선정될 일이 자명하였다. 중전이 꿀을 먹인 달디 단 음성으로 자신의 부덕을 탓하였다.

“신첩이 부족하여 세자빈을 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 늘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그것이 어찌 중궁의 탓이란 말이오.”

주상의 못마땅한 눈길이 광안에게 꽂혔다. 중전이 입에 올리기도 몹시 망측스럽다는 듯이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미의 자리에 앉아 국본인 세자에게 흠 잡히는 말이 돌도록 내버려 둔다 손가락질받아 마땅합니다.”

“대체 무슨 말이 돌기에 이리 심려하시는 게요.”

중전이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전하, 길고 나긋하게 부르며 본론을 피하고는 뜸을 들였다. 기력이 약해진 주상이 어지러운 듯 머리를 짚으며 더 이상 캐묻지 않자, 어려운 결심이라도 내비치는 양 말했다.

“전하, 꾸미기 좋아하는 천한 자들 입에서 나오는 흉한 소리는 마음에 담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좌익위(세자 호위 업무를 담당하던 세자익위사 무관 정오품) 남휼도 아직 부인을 미취하였으니.”

광안이 중전의 말을 단호히 끊어냈다.

“중전 마마, 남휼은 내버려 두소서.”

열일곱에 최연소 무과 장원급제를 하여 전란 중 광안을 따랐으며 익위사 수장 자리에 오른 남휼은 광안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형제나 피붙이보다 가까운 붕우였고 중전에게는 제거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이었다. 중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쏘아보았다.

“세자. 대체 제가 좌익위에게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 아무 말도 주상 전하께 전하지 않았습니다.”

“좌익위 남휼이 저의 비역질 상대라 말씀드리고 싶습니까.”

수라 시중을 들던 상궁이 숨을 멈추었다. 일렬횡대로 꿇어 엎드려 있던 궁녀들이 바들바들 떨었다. 책상반 앞 풍로 위에 조치를 올려 데우던 수라 상궁이 챙강, 국자를 떨어뜨렸다.

“세자!”

주상이 진노하며 수저를 탁, 소리 내어 내렸다. 중전이 자신의 부덕함을 호소하며 주상의 진노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조수라는 엉망으로 끝났다.

그날 오후, 따로이 부름을 받고 대조전에 들어선 광안에게 중전이 제안했다.

“주상 전하의 진노를 감당하기 버겁습니다. 가례는 못 올리신다 하셔도 침소에 궁녀를 들이세요. 동궁전 궁녀들이 영 마음에 차지 않으시나 봅니다. 혹여 웃전에 있는 궁인이라도 봐 둔 아이가 있다면.”

“없습니다.”

“좋아요, 세자. 그럼 이 어미가 동궁전 나인들을 살피지요.”

쳐다보는 광안을 향해 해사하게 웃으며 스무 살을 갓 넘긴 중전이 말했다.

“어미의 마음을 부디 헤아려 주세요, 세자.”

어미의 마음이라.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꽂아 둔 지밀궁녀. 중전의 지령을 받고 기어들어 온 첩자. 원하는 대로 품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법도를 따지며 오로지 팔금조에 따라 침수 수발을 드는 저 궁녀는 천치인지 고수인지 판단을 유보했다. 아무리 몰아쳐도 여자는 신음성 한 번 지르지 않았다. 허리를 비틀다가도 용서하십시오 저하, 잘못을 고하고는 숨을 골랐다.

배워 온 것이라곤 오로지 해서는 안 된다는 금조뿐, 해야만 한다는 방중술은 기초도 들은 바가 없나.

잔뜩 힘을 주고 벌벌 떠는 것 외엔 하는 일이 없는데 여자의 내벽은 찰지게 달라붙었다. 자극은 직접적이고 강렬했다. 처음부터 다정한 배려를 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속도를 조절할 수가 없었다. 퇴하려 하면 더욱 꽉 물고서 놓지 않는 여인을 밀어 내듯 놓으면 머리부터 등줄기까지 서늘해졌다. 본능적으로 다시 교합을 가하면 여자는 파들파들 가엾게 떨었다. 드러난 등이 뽀얗게 빛났다.

매끄러울까 포근할까. 네 속처럼 찰질까.

떨리는 등을 쓸어 주지 않고 오로지 골반만 움켜쥐었다. 중궁이 꽂은 궁인과 한 번에 그칠 정사일 뿐이니……. 배려 없이 움직이자 여체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여자는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