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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50화 (151/151)

#150화

요하네스의 장례식이 끝나고, 황제는 다시 한번 로베르트와 은밀히 독대했다.

용건은 뻔했다.

“약속을 지키게, 공작.”

마리안느가 남긴 증거를 없애 달라는 것이었다.

황제는 나아가 더한 것도 요구했다.

“그 빌어먹을 로켓도 함께 파괴하도록 하지.”

문제의 로켓이 알폰조와 로베르트의 의사소통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황제가 메닝엔의 소관 하에 있던 바네사가 요하네스를 살해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았기에, 로베르트는 황제의 요구에 응했다.

로베르트는 칼로에에 위치한 공작저의 창고를 다시 방문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느낀 창고에 흐르는 기이한 공기는 그대로였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왜 뷔나우에 있어야 하는 어머니의 로켓이 이곳에 있는 것이지.’

마치 무언가가 그녀의 로켓을 불러오기라도 한 것처럼. 알 듯 말 듯한 실마리에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수도로 복귀했을 때, 황제는 신의 흔적을 연구하던 고고학자들을 수소문해 둔 상태였다.

로켓을 관찰한 학자들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외, 외람되오나 폐하…….”

“무슨 일이지.”

“이것은 시간의 신이 남긴 성물입니다.”

신의 성물이라는 말에 로베르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마리안느의 로켓이 신의 성물인 것과 메닝엔 공작가의 가보이던 신의 성물이 사라진 것은 과연 우연일까?

황제는 혀를 끌끌 찼다.

“쯧. 상관없다. 마저 파괴하도록.”

학자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고, 이 귀한 것을.”

“이건 역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물건인데…….”

직업 정신이 투철했던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황제의 말을 거역하려 했으나.

“폐하. 저를 이곳에서 죽이신다 하더라도 저는 신의 성물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약속했던 대학 설립은 없던 일로 하겠네.”

“……!”

황제의 협박에 결국 로켓의 파괴를 진행했다.

복잡한 의식을 거쳐 비로소 로켓은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응?’

로베르트의 손목에서 푸른빛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어딘가에 연결된 선 모양이 아닌, 타오르는 불꽃 같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로베르트가 알아차리기도 전, 불꽃은 허공 사이로 마치 재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파스스 흩어졌다.

신의 성물, 로켓, 푸른 빛. 그의 머릿속에 여러 단어가 빠르게 지나갈 때였다.

<드디어 약속이 전부 마무리되었군.>

아주 낮고, 부드러운. 그러나 영혼을 뒤흔들 만한 힘을 가진 목소리가 로베르트의 머리를 울렸다.

당황한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설마 시간의 신?’

약속이 마무리되었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던 로베르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마리안느.

자신의 어머니였다.

* * *

메닝엔 공작저, 라모나의 침실.

“괜찮아요?”

“…….”

“로베르트?”

“…….”

심상치 않군. 라모나와 댄버스 부인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음, 참 키스하고 싶은 날씨네요.”

“그거 좋군요.”

와, 이건 들었냐? 라모나는 감탄했다.

로베르트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댄버스 부인은 말없이 자리를 떴다.

로베르트는 황제를 만나고 돌아온 이후로 넋이 나간 듯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그래, 심경이 복잡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라모나는 그가 충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

왜 멀쩡한 자기 집무실을 놔두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하지만 그런 상태가 3시간, 5시간을 넘어 무려 7시간이 되자.

<레이디, 더는 안 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바야.>

시녀장 댄버스 부인과 라모나는 로베르트를 이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꾸가 없더니 그런 특정 단어에 반응할 건 또 뭐람.

‘정말 귀신같다니까.’

뭐, 나쁘지는 않았다.

그의 잘나고 번지르르한 주둥이는 재앙을 불러오는 것 이외에도 특기가 있었으니까.

그가 앉은 소파 모서리에 라모나는 턱을 괴며 기댔다.

“좀 괜찮아요?”

“사실 아닙니다만. 저의 여신이 입맞춤으로 저를 구원해 준다면 충분히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피식 웃은 라모나가 일어나 로베르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짧은 입맞춤에 로베르트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좀 덜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안 괜찮은 이유는 뭔데요?”

“음.”

그녀의 질문에 로베르트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쩌면 제가 어머니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호?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라모나는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았다.

“솔직히 저를 방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게만 목을 매다는 사람이라고 판단했었죠.”

로베르트는 심란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미 벌어진 일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만. 뭐랄까…….”

“마음은 한결 편해졌겠네요.”

“……예.”

신데렐라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신데렐라의 자식으로 사는 것도 만만치 않게 어려운 일이었겠지.

생각해 보면 그는 동정심이라는 말에 유독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마리안느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것이 그에게는 마음의 짐을 덜어 내는 일이 되리라.

옅은 미소를 지은 라모나가 로베르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줄 알았어요.”

“음, 제가 말입니까?”

아 맞다. 상대는 자존감 덩어리였지. 요즘 상황이 좀 안쓰러워서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그러게요, 괜한 걱정을 했네.”

그 덕에 회복이 빠르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라모나가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로베르트가 힐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안 괜찮은 것 같기는 합니다.”

속 보이는 말이었다. 하지만 라모나는 모른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살며시 로베르트의 목을 끌어안은 그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면 또 제가.”

속삭이는 라모나의 입술이 로베르트의 입술 위를 스쳤다.

“괜찮게 만들어 보고 싶잖아요.”

이윽고 그녀가 로베르트에게 입을 맞췄다.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입맞춤은 아니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고, 뜨거운 숨이 오가고. 그러다 보면 말캉하다 못해 머리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드는 입맞춤이었다.

아직 해가 쨍쨍하건만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막을 수 없을 만큼 팽팽해졌다.

흥분감에 미간을 찌푸린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라모나, 나는 정말이지.”

“쉿.”

“그 입 좀 다물어 봐요.”

라모나의 입가에 옅은 호선이 떠올랐다.

툭.

새하얀 손가락이 로베르트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나갔다.

그녀는 장난스레 로베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래도 당신은 이럴 때면 입을 다무는 편이 조금 더 야하거든요.”

“흡.”

귓가를 간질거리는 라모나의 목소리에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의 손이 라모나의 다리 사이를 타고 오르던 찰나였다.

벌컥.

“아가씨! 레이먼 도련님……. 꺄아아아! 볼일 마저 보세요!”

레이먼이 공작저를 방문했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노크를 잊은 티아가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문밖에서 티아의 자책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가씨의 뜨거운 밤을 내가 방해했어! 어쩜 좋아!”

티아, 제발 그러지 말아 줘.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로베르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그가 어린 여우라도 된 양 라모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라모나.”

“예?”

“역시 결혼식은 레헨트가 좋겠습니다.”

당황한 라모나가 되물었다.

“결혼식이요?”

“이런.”

로베르트가 라모나를 향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 보시죠, 라모나.”

“왠지 그거 해 볼 필요 없는 생각인 것 같네요.”

“당신 말고 세상에 저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해.

“게다가 당신이 저 말고 다른 사람이 눈에 찰 리 없습니다. 이만한 얼굴 이만한 몸이 흔한 건 아닐 텐데요?”

젠장. 이것도 맞는 말이긴 해.

저 얼굴의 정말 대단한 점은 무슨 소리를 해도 다 그럴듯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왜 나는 얼굴을 봐서…….’

사실 몸도 보긴 하는데.

‘결혼이라.’

당연한 수순이기는 한데 내 일이라 생각하니 당황스럽네.

라모나가 곤란한 얼굴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로베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로에게 유일한 두 사람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으음, 아직 해결할 일들이 좀 남아서요. 레헨트에 가서 로지나와 이야기도 해 봐야 하고, 벤도 좀 만나 봐야 하고…….”

라모나의 망설임을 이해한 로베르트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라모나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그녀에게 머리카락을 맡겼다.

“라모나.”

“네?”

“나는 당신이 봐 왔던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를 겁니다. 당신이 내게 그랬듯이요.”

속내를 들킨 기분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살짝 몸을 뒤척인 로베르트가 말했다.

“그러니 나를 믿어 줘요. 물론 당신이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말입니다.”

“……네.”

이건 프러포즈일까, 아닐까.

귀가 뜨겁게 달아오른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머리카락만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기는 검은 머리카락을 느끼며, 라모나는 이 정도면 제법 평온한 하루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회귀 이후에 간절히 바라던 평온한 하루 말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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