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로베르트와 라모나가 바네사를 찾아갔던 날.
바네사는 로베르트를 바라볼 때와는 달리 적대적인 눈빛으로 라모나를 노려보았다.
라모나는 담백한 어조로 대화를 시작했다.
<의외였어요. 황녀 전하가 저지르셨다기에는 너무 비열한 일이었으니까요.>
<네가 지난 생에 저지른 일들에 비할까.>
<물론 제가 잘했다고는 못 하겠지만.>
라모나가 한숨을 삼켰다.
<적어도 요하네스가 했던 일을 그대로 따라 한 황녀 전하께 저를 판단할 권리는 없는 듯하군요.>
그녀는 냉정하게 바네사를 비난했다.
<로베르트는 황녀 전하를 도우려 했어요. 애초에 그에게 부모 일을 들먹이며 황위 싸움에 끼어들게 만든 게 당신의 생각 아니었나요?>
<……선택은 공작의 몫이었지.>
<메닝엔의 도움 없이 3황자 전하가 그 정도 입지를 다질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바네사가 오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결국 공작에게도 이득이 되니까 그런 선택을 한 것이겠지.>
까드득.
그녀는 이를 갈며 짓이기듯 말했다.
<마찬가지야. 내게도 이득이 되는 선택이었을 뿐이네. 어차피 1년 후면 죽을 공작을 미리 처리하는 것이 어찌하여 문제지?>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짓던 바네사의 눈에 감출 수 없는 분노가 타올랐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후로 매일매일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았어. 살려 달라 소리치는 오라버니와 눈조차 감지 못한 어머니의 시체가 매일 꿈에 나타났지.>
하얗게 질려 버린 얼굴로 바네사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회귀하자마자 남자 하나 잡아 그 뒤에 숨으려던 자네가 뭘 안단 말인가!>
바네사의 외침에 라모나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갑게 굳었다.
‘이 사람은 로베르트에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라모나는 다시 요하네스의 정부가 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던 바네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또한 라모나를 흔들기 위해서 한 말이었으리라. 모든 일이 요하네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결국 고작 그런 사람일 뿐이었어.’
이래서야 바네사 황녀가 요하네스와 다를 바가 무엇이지. 그제야 라모나는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좋네요.>
<……뭐?>
<먼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죄책감을 덜 수 있겠어요.>
<네년이 지금 뭐라고…….>
<황녀.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라모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살얼음이 뚝뚝 떨어졌다.
<왜 크레모라 백작 부인과 3황자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요하네스뿐이라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무엄하다!>
<오만한 것도 모자라 멍청하기까지 해.>
라모나는 전에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악의 선택이야. 알폰조 전하의 눈에 그런 당신이 안 위험해 보일 것 같아? 과거를 알고 있는 것도 모자라 요하네스의 악행을 따라한 당신이?>
<그, 그건…….>
<무엇보다.>
라모나가 무릎을 굽혀 바네사와 똑똑히 눈을 맞췄다.
<이제 내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선언과도 같은 라모나의 말에 바네사의 눈이 커졌다.
탁.
라모나는 바네사의 손이 닿지 않을 곳에 단도를 내려놓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제안하지.>
그런 그녀의 눈이 시리도록 차갑게 빛났다.
<황궁에 가서 폐하께 풀려난 것처럼 말씀드려. 그리고 그쪽 손으로 직접 요하네스를 죽여.>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바네사는 경악했다.
<……뭐?>
<요하네스가 갇혀 있는 위치는 알려 주도록 하지. 물론 그 일을 해내고 나면 황녀의 공화국 망명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바네사는 그제야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처리하고 공화국으로 망명하려던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공화국으로 망명하는 것은 황녀 혼자일 거야.>
<무, 무슨 소리지?>
<내 제안을 거절하고 다 같이 죽을 건지, 아니면 크레모라 백작 부인과 3황자 전하에게 지금의 삶을 유지하게 해 줄 건지.>
라모나는 바네사의 손에 피를 묻히기로 결정했다.
<선택해, 지금 당장.>
로베르트의 이름을 이 이상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 *
바네사가 요하네스를 살해한 것 같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베르트가 떠올린 것은 당연히도.
‘……라모나.’
자신의 약혼녀였다.
“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가 연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알폰조는 태연한 얼굴로 로베르트의 속을 긁었다.
“예측 가능한 일이었지. 라모나라면.”
“내 약혼녀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게, 황자.”
“공작, 자네는 아직 라모나의 진정한 면모를 모르네.”
“저 새끼는 넘어진다.”
로베르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꽈당.
알폰조가 앉아 있던 의자의 다리가 부러졌다. 놀랍게도 상아로 만든 의자였다.
‘상아가…….’
부러질 수 있는 거였나?
바닥에 쭉 뻗은 알폰조가 천장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마라도 낀 건지…….”
재앙 같은 주둥이의 소유자 메닝엔 공작이 불러온 재앙에 알폰조가 좌절하던 그때였다.
똑똑.
“황자 전하. 이제 그만 출발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슈타이덴 백작저의 집사가 그들을 재촉하러 왔다.
* * *
요하네스의 장례식은 빠르게 치러졌다.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된 바네사의 장례식도 함께였다.
‘엄한 시신을 바네사 황녀로 둔갑시킨 모양이로군.’
황실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오르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황제가 꾸민 그림이 틀림없다.
꼭 요하네스와 같은 황제의 수법에 로베르트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렇다면 황제는 지금 바네사 황녀를 추적중일 것이다. 혹은 이미 죽였거나.
‘이로써 베르나딘은 완전히 아웃되었군.’
로베르트는 가볍게 혀를 찼다.
장례식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황후는 시뻘건 눈으로 크레모라 백작 부인을 내내 노려보았고,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텅 빈 바네사 황녀의 관을 끌어안고 펑펑 울다 실신했다.
물론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크레모라 백작 부인뿐만이 아니었다.
“흑, 흡.”
미카엘라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그때였다.
“미카엘라.”
걱정 가득한 얼굴의 라모나가 조심스레 미카엘라의 등을 토닥였다.
라모나의 목소리가 들리자 미카엘라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네가 감히 무슨 낯짝으로 날 찾아와?”
“……괜찮아?”
라모나의 동정 어린 시선에 미카엘라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날 보고 고소해하러 왔구나.”
“미카엘라, 네가 많이 힘든 상황이라는 걸 이해해.”
“닥쳐!”
욱한 미카엘라가 소리쳤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그녀를 돌아보자 미카엘라는 발작하듯 눈물을 터뜨렸다.
“라모나, 네가, 네가 어떻게 나를 이렇게 조롱할 수가 있어. 흑!”
그녀는 얼굴을 감싸 쥐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나 평소라면 아기 새처럼 쪼르르 달려와 그녀를 위로할 그녀의 시녀들은 이제 없었다.
벤트하임의 사정도 사정이었지만 무엇보다.
‘이제 레이디 벤트하임이 황태자비가 될 일은 없으니까.’
미카엘라의 쓸모가 없어진 탓이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쩜, 자신을 위로해 주는 사람에게 저렇게 천박한 말로 응대할 수 있죠?”
“그러고 보니 레이디 벤트하임이 페브룩 영식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서요?”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친구의 약혼자를.”
당황한 미카엘라가 혼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그때. 라모나가 다시 한번 미카엘라의 등을 토닥였다.
“어쩌면 좋아. 페브룩 영식의 일로 내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구나. 가엾은 미카엘라.”
라모나가 요아힘의 일을 입에 담자 미카엘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헛소문 일……!”
“괜찮아. 난 정말 널 용서할 수 있어.”
딱 잘라서 미카엘라의 말문을 막은 라모나의 얼굴에 유독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린 친구잖아, 그렇지?”
* * *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로베르트는 격려의 의미로 라모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제대로 갚아 줬군요.”
“그런가요.”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좀 찝찝해 보이는 얼굴입니다만.”
“음.”
라모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미카엘라의 추락을 바라보는 게 생각처럼 후련하거나 즐거운 일은 아니었거든요.”
“이런, 나의 천사는 착하기도 하지. 역시 당신의 등에는 아직 날개가…….”
“입.”
“네.”
사나운 눈빛으로 로베르트의 입을 제압한 라모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제고 저도 다시 그런 신세가 될 수 있는 거니까요. 뭐.”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 손 하나 안 대고 해결된 건 좋더라고요. 악역은 안 맡을 수 있었잖아요.”
흠. 로베르트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그가 몸을 숙여 라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거 압니까, 내 사랑?”
“뭐를요?”
“당신은 이미 온 사교계가 아는 악녀…….”
이게 진짜. 라모나가 눈을 크게 뜨자 로베르트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당신이 그렇게 속물적인 속내를 내비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짜릿한지 말입니다.”
진짜 얘는 보통 변태가 아니라니까. 라모나는 감탄했다.
로베르트는 장난스레 라모나의 뺨을 콕 찔렀다.
“분명 제 욕을 하고 있는 얼굴이군요.”
어떻게 알았지. 라모나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뭐, 그것도 좋습니다.”
로베르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라모나를 향해 곱게 눈을 휘었다. 퍽 야릇한 미소였기에 라모나는 아주 잠깐 숨 쉬는 법을 잊고 말았다.
숨과 함께 잠시 멈춰 버린 그녀의 머리를 다시 돌아가게 만든 것은 바네사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바네사 황녀는 어떻게 된 겁니까.”
라모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사죄했다.
“그건…… 죄송해요.”
“사과를 받고자 꺼낸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바네사 황녀를 그냥 풀어 준 것보다야 이쪽이 저도 백번 마음 편하긴 해서.”
“그게 아니라요.”
그럼 무슨 소리지?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모나는 세상 둘도 없는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당신이 요하네스에게 복수할 기회를 제가 앗아 갔잖아요.”
와우. 이번에는 로베르트가 감탄했다. 그는 중얼거렸다.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나를 감당할 수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