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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48화 (149/151)

#148화

메닝엔 공작저. 클레멘스는 굳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차게 굳은 것은 유디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탁.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거의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그녀가 짐 가방을 닫았다. 뒤에서 유디트를 돕던 시녀장 댄버스 부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님…….”

“자네의 마님은 이제 내가 아닐세.”

짐 가방을 바라보는 유디트의 얼굴에 회한이 서렸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사람일 뿐이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댄버스 부인.”

세월의 깊은 흔적이 유디트의 이마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나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일세.”

마리안느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 리 없는 댄버스 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노련한 시녀장답게 무슨 일이 있겠거니 짐작한 댄버스 부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유디트는 창문 너머로 마차가 공작저에 들어서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로베르트를 볼 면목이 없군.”

에이드런의 사형 소식에 유디트는 실신했었다.

그리고 유디트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 그녀를 기다리던 것은 아들을 잃는 것보다 더 끔찍한 진실이었다.

클레멘스가 그녀에게 털어놓은 지난날의 진실은 믿기 어려울 만큼 수치스러운 이야기였다.

‘어찌 그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참담한 기분에 그녀가 눈을 감았다.

‘단단히 엉켜 버린 실은 끊어 내는 것밖에 답이 없는 법이지.’

에이드런이 저지른 일을 떠올린 유디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똑똑.

“할아버님, 할머님.”

굳은 목소리의 로베르트가 그들을 찾아왔다.

* * *

메닝엔 공작저의 응접실에 홍차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씁쓸하고 달콤한 향이었다.

초콜릿 혹은 위스키. 로베르트가 찬찬히 향을 음미하는 사이 유디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메닝엔의 일원으로서 네게 사죄하고 싶구나.”

“할머님.”

“죽어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어.”

유디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미안하다, 로베르트.”

“……할머님께서 알고서 하신 것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과 달리 그녀의 눈빛은 로베르트가 지금껏 본 그 누구보다 단단했다.

“메닝엔의 어른으로서 그 사실을 몰랐던 것 또한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니.”

허리를 꼿꼿이 편 유디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로베르트는 차마 그런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무거운 사죄가 끝나고, 유디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실을 듣고, 내가 그 아이에 대해 여태껏 오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유디트가 마리안느의 이야기를 꺼내자 로베르트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따뜻한 홍차로 마른 입술을 축인 유디트가 말을 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좁게 만드는 것. 그게 그 아이가 너를 지키는 방식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

유디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지키는 방식이라. 로베르트는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달콤한 향과 달리 쌉쌀하고 싸한 끝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고요 속에 찻잔이 비워져 갈 때쯤 유디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너와 함께 나누는 마지막 티타임이겠구나.”

쌉쌀하고, 또 싸한 마무리였다.

* * *

클레멘스와 유디트는 메닝엔 공작저를 떠났다.

클레멘스는 로베르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드디어 로베르트를 진정한 공작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로베르트에게 마리안느의 일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지점이었다.

“후.”

클레멘스와 유디트가 떠나고,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유디트와의 대화 때문일까. 마리안느의 생각이 온통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알폰조는 그에게 물었었다.

<그대는 사랑을 믿나?>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알폰조가 다시 한번 묻자.

<그대는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지?>

그제야 로베르트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대는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지?

로베르트는 알폰조의 계획대로 움직였을 때 자신이 포기해야 할 것을 떠올려 보았다.

에이드런으로 인해 실추될 메닝엔의 명예, 용서하지도 단죄하지도 못한 채 흘려보내야 할 클레멘스를 향한 증오. 그리고.

끝끝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할 마리안느의 진심.

그 모든 상황이 가리키는 바가 명료했다.

로베르트 메닝엔은 이제 영영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잃어버리게 되리라는 뜻이었다.

로베르트는 되물었다.

<내게 그것을 묻는 이유가 뭐지, 황자?>

잠시 망설이던 알폰조는 대답했다.

<나는 그녀가 살아남기를 바라네.>

그보다 더 로베르트의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 있었을까.

‘그 근육 바보가 그런 말을 다 할 줄이야.’

그날을 떠올린 로베르트가 헛웃음을 삼킬 때였다.

“각하!”

집사, 브리튼이 심각한 얼굴로 로베르트에게 다가왔다.

로베르트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을 눈치챘다.

“무슨 일이지.”

곤란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핀 브리튼이 로베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황태자 요하네스가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뭐?”

예상치 못한 소식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범인은?”

“바네사 황녀로 추정되는 상황입니다.”

바네사 황녀가? 충격적인 일의 전개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내 벼락같은 깨달음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 *

황태자 시해 사건으로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

요양을 떠날 것이라며 황제를 알현한 바네사 황녀는 3황자 베르나딘에게도 인사를 한다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3황자 궁으로 가는 사이 바네사 황녀의 행방은 묘연해졌고, 급기야 황궁의 사용인들이 그녀를 찾아다니기에 이르렀다.

바네사 황녀를 찾아다니던 황궁의 사용인들이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칼에 찔린 요하네스의 시신이었다.

여러모로 이상한 사건이었다.

일단 황태자궁에 흘린 요하네스의 피가 얼마 되지 않았고, 발견된 요하네스의 시신은 마치 어딘가에 갇혀 있었던 양 파리했다.

무엇보다 바네사 황녀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런저런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았다.

분노한 황제는 이 이상 황태자의 죽음을 함부로 입에 담는 이가 있다면 엄벌하겠다며 선언했지만, 그 정도로 수습될 사건이 아니었다.

황후는 일의 배후로 베르나딘을 지목하며 당장 베르나딘의 목을 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반면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실종된 바네사를 찾아 달라며 울부짖다 실신하기에 이르렀다.

어수선한 시국이었다.

다만 몇몇 사람들은 놀라우리만큼 차분하게 이 일을 받아들였다. 멜리사 바텐베르크 또한 그 중 하나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 * *

“라모나가 꾸민 일이죠?”

멜리사의 질문에 라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멜리사.”

“흐음, 우리 사이에 모른 척은 안 어울리지 않나?”

멜리사는 각설탕을 하나 꺼내 들어 찻잔에 넣었다.

“하나 줄까요?”

“사양할게요.”

라모나의 재빠른 거절에 이번에는 멜리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맛있는데.”

“많이 들어요.”

홀짝.

차를 한 모금 음미한 멜리사가 한결 여유로운 태도로 라모나에게 물었다.

“정말 어찌 된 일인지 말 안 해 줄 거예요?”

“……약속했잖아요.”

라모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2황자 전하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돕겠다고.”

라모나의 대답에 멜리사의 눈이 커졌다. 이내 그녀가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와우, 이건 정말 예상치도 못한 방법인데.”

확실히 이보다 더 알폰조를 유력한 황태자 후보로 만들 수 있는 사건은 없다.

목숨을 잃은 요하네스는 자동으로 황위 경쟁에서 탈락했고, 베르나딘은 요하네스를 지지하던 세력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바네사 황녀가 발견되어야 일이 확실해지기는 하겠다만…….’

아무래도 앞으로 레오벤 제국에서 그녀를 목격한 이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다.

‘설마…… 황녀도 죽였나?’

그럼 시신은 어떻게 처리한 거지? 멜리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궁금해서 미쳐 버릴 것 같은데. 멜리사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던 때였다.

“그나저나, 미카엘라의 소문이 온 수도에 파다하더라고요.”

아, 그 영악한 벤트하임? 미카엘라의 이야기에 떡밥을 문 멜리사의 눈빛이 변했다.

“요아힘 페브룩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모양이에요. 둘이 밤늦게 만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어머.”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멜리사의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정신인지 모르겠어요. 친구의 약혼자였던 사람을 말이죠.”

친구의 약혼자라는 말에 라모나의 손이 잠깐 움찔했다. 이내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돌아갈 줄이야.”

“예?”

“아니 그냥.”

잠시 말을 고르던 라모나가 고개를 으쓱했다.

“솔직히 조금…… 뭐랄까, 속이 시원하기도 해서요.”

오, 난 참 라모나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더라. 멜리사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동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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