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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47화 (148/151)

#147화

끼이익.

녹슨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대대로 메닝엔의 죄인들을 가두어 두는 감옥의 문이었다.

로베르트는 차가운 얼굴로 그곳에 들어섰다.

벌써 며칠간이나 암흑 속에 갇혀 있던 바네사가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찡그렸다.

가느다란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며, 지저분해진 드레스가 그녀의 변한 처지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바네사의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황족 특유의 오만함을 잃지 않은 그녀가 턱을 치켜들고 로베르트를 향해 말했다.

“어리석은 짓을 했군, 공작.”

이쯤 되면 누가 죄인인지 모르겠군. 로베르트가 헛웃음을 삼켰다.

“누가 할 소리를.”

“폐하께서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로 황태자 전하를 폐위한다 한들. 황후의 세력들이 그를 가만히 둘 리 없네.”

“글쎄, 황녀가 그걸 걱정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로베르트의 얼굴에 적나라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어차피 곧 죽을 사람 아닌가.”

“죽이게.”

바네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차라리 그쪽이 원하던 바야.”

오히려 홀가분해 보이는 바네사의 모습에 로베르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때였다.

“로베르트.”

어느새 도착한 라모나가 그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라모나가 나타나자 바네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로베르트를 대할 때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 적대감이 물씬 묻어났다.

라모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로베르트에게 말했다.

“잠시 황녀 전하와 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로베르트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라모나에게 눈짓했으나, 라모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 알겠습니다.”

결국 로베르트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 * *

덜컹.

메닝엔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라모나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괸 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로베르트가 힐끔 라모나의 얼굴을 살폈다.

한참 보랏빛으로 멍이 올라온 얼굴이 안쓰러웠다.

‘쯧.’

속상한 마음에 로베르트가 속으로 혀를 찼다.

기절한 바네사를 발견했을 때, 그리고.

<벤트하임의 시녀에게 자네도 이용당한 거라고. 로베르트 메닝엔.>

모든 일이 라모나가 꾸민 것처럼 만들어진 증거를 베르나딘이 들고 왔을 때.

로베르트는 패닉에 빠졌었다.

모든 증거가 너무 명확했다.

생각해 보면 사실 라모나가 그에게 접근한 사실부터가 이상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는 자신에게 과거를 숨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로베르트는 황실 무도회의 밤을 떠올렸다.

<꿈을 꿨어요.>

라모나가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꺼내 놓은 이야기를.

그래, 그런 그녀가 자신을 속였을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하나둘 이상한 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바네사 황녀 또한 회귀자라 했던가.>

그제야 그는 바네사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아무튼 지금은 일이 잘 풀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바네사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네사 황녀를 놓아주는 건 어떨까 싶어요.>

도대체 그의 약혼녀는 무슨 생각인 걸까.

‘후.’

조금 전 바네사를 만나고 온 라모나의 말을 떠올린 로베르트가 한숨을 삼켰다.

‘뭐, 이유가 있겠지.’

그녀가 꾸미는 일이라면 믿을 수 있다. 로베르트는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덜컹.

돌부리에 걸린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중심을 잃은 라모나가 비틀거리는 사이 로베르트가 넘어지는 척하며 잽싸게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쿵.

그의 엉덩이가 크게 들썩였다.

“이런.”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차가 너무 흔들리는군요.”

“그런가요?”

라모나는 태연한 말과는 달리 ‘웃기시네.’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들켰나? 잠시 고민하던 로베르트가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너무 가벼운가 봅니다.”

“……네?”

“흠.”

그가 생각에 잠긴 척 턱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당신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말라가다 보니 그만 깃털처럼 가벼워진 건 아닐까요?”

입을 쩍 벌리고 그를 바라보던 라모나가 다시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말을 말자.”

그건 싫은데. 로베르트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웬일로 그가 아무 말이 없자 라모나가 오히려 그를 돌아보았다.

“왜 입을 그러고 계세요?”

“속상해서 그렇습니다.”

“음.”

라모나는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쪽.

“……라모나?”

로베르트에게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됐죠?”

놀란 로베르트는 입을 틀어막고 감격했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주둥이를 털면…….’

입을 맞춰 주는 거구나!

라모나가 알면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 만한 생각이었다.

* * *

그 시각 레헨트.

“와,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닌가.”

몰튼 남작이 사망하며 레헨트의 영주 대리 자리가 비었다. 급한 대로 로베르트는 로지나에게 그 자리를 맡겼다.

물론 어디까지나 임시였다. 적어도 로지나는 그러기를 바랐다.

털썩.

‘집에 가고 싶다.’

로지나가 퀭한 얼굴로 책상에 앉았다.

항상 탐스럽게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은 하나로 질끈 묶은 상태였다.

다행히 전염병은 얼추 잡혔다. 하지만 각성제를 만들어 팔던 일당들의 뒤처리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그냥 다 죽이자고 하면 안 되나?’

될 리가 없지.

속이 타는 기분에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로지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윽.”

여기는 왜 물에도 꼭 레몬을 띄우냐. 그냥 찬물 주면 안 되는 건가?

‘아, 맞다.’

공화국으로 가는 배도 준비해야 하는데. 젠장. 로지나가 울상을 짓던 그때였다.

똑똑.

“……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로지나의 귓가에 들렸다.

신이시여. 역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로지나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감격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

“와우, 에드윈. 내가 너 언제 오나 했다.”

“오라버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사고나 치고 다닌 주제에 대접을 기대했어? 진짜 웃기네.”

로지나가 코웃음을 치자 에드윈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로베르트를 죽이려 든 게 요하네스가 아닌 바네사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에드윈은 그 자리에서 졸도할 뻔했다.

그렇다면 정보를 흘리고 다닌 게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말이었으니까.

맙소사. 도저히 로베르트의 얼굴을 볼 낯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에드윈에게 로베르트는 말했다.

<잘못을 했으면 가서 굴러.>

<……예?>

<가서 로지나나 도우라고. 안 그러면…….>

로베르트는 살벌한 얼굴로 목에 손을 그었다.

<이해했나?>

그럼요. 그걸 이해 못 하면 제가 사람인가요.

얼른 고개를 끄덕인 에드윈은 그 즉시 짐을 싸 레헨트로 내려왔다.

‘후.’

그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울해진 에드윈이 한숨을 삼켰다.

‘그나저나 로지나를 도우라는 건…….’

설마 내가 로지나에게 밀려났다는 뜻인가? 충격에 빠진 에드윈에게 로지나는 서류를 집어 던졌다.

퍽!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야!”

“가서 각성제 만든 놈들 잔당은 없나 조사나 하고 와.”

욱한 에드윈이 항변하려던 찰나였다.

“벤인가 빈인가 하는 놈도 데려가. 또 쓸데없이 입 놀려서 정보 흘리면 죽는다.”

“…….”

젠장. 아픈 곳을 찔린 에드윈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힘없이 어깨를 떨군 채 로지나의 집무실을 나섰다.

* * *

늦은 밤. 아이젠부르크 자작저, 라모나의 침실.

“하읏.”

얕은 신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새하얀 손가락이 본능처럼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아파.”

라모나가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울먹이듯 중얼거렸다.

“진짜 너무 아파.”

그러나 티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아가씨.”

“이 약 너무 쓰라려.”

“원래 아파야 빨리 나아요.”

“그래도 덜 아픈 방법이…….”

“아가씨.”

“응?”

“묘하게 요즘 공작 각하를 닮아 가시는 거 아세요?”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충격을 받은 라모나가 티아를 바라보자 티아가 짓궂게 웃었다.

“이제야 절 좀 똑바로 보시네요.”

“…….”

“왜 계속 제 눈을 피하셨어요? 네?”

“그야…….”

미안해서 그렇지. 라모나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 씹었다.

티아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저도 그 정도는 알거든요? 설마 거기서 아가씨가 저를 선택했다고 그 부엌칼로 다져서 완자를 만들어도 모자랄 놈이 정말 저를 살려 줬겠어요?”

라모나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완자?’

첫 번째로 티아의 엄청난 욕 실력에 놀랐고, 두 번째는 그 아찔한 순간에 티아가 거기까지 헤아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티아…….”

“어차피 아가씨의 마음에는 제가 1순위인 걸 잘 아는걸요. 유일한! 하나뿐인! 제가요.”

티아는 으쓱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이내 라모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가씨.”

“고마워.”

“아이참! 그런 말씀 마시라니까요.”

“그래도…….”

“정 그러시면요.”

낮아진 티아의 목소리에 라모나가 귀를 쫑긋 세웠다.

“말만 해, 티아.”

“차기 메닝엔 공작저 시녀장 자리. 아시죠?”

티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라모나는 깨달았다.

우리 티아. 대인배였구나. 대를 위해 소를…… 음……. 그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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