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최대한 담담하고 싶었지만, 회귀 전의 삶에 대해 털어놓는 일은 쉽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라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혹은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서.
라모나는 말하는 중간 틈틈이 입을 꾹 다물고 숨을 골라야만 했다.
로베르트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긴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마치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래서 당신을 찾아간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 말고는 요하네스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거든요. 레이디 슈타이덴이 가지고 있는 편지의 존재를 알린다면, 당신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드디어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찾아온 시점까지 이야기가 이어지자, 로베르트의 입가에 특유의 예쁜 미소가 번졌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꿀꺽 침을 삼킨 라모나가 마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당신은 1년 후면 죽을 테…….”
라모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그거 아닙니까.”
로베르트가 감정을 추스르느라 빨갛게 달아오른 라모나의 코를 검지로 톡 쳤다.
“당신의 눈에는 제가 제국에서 제일 잘난 남자라 저를 찾아왔다는 거.”
순간 말문이 막힌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한참 입술을 뻥긋거리던 그녀가 내뱉을 수 있었던 건.
“……와.”
고작 외마디 감탄사였다.
역시 로베르트 메닝엔, 역시 메닝엔의 공주님. 죽다 살아나도 그는 참 한결같았다.
“아닙니까? 아무리 들어도 그 이야기 같은데?”
라모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가장 로베르트다운 반응이기도 했다.
“풋.”
결국 라모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함께 웃던 로베르트가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이 예쁜 얼굴을.”
그가 라모나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제국의 보물을 감히.”
공작가의 주치의가 심혈을 기울여 발라 둔 연고가 라모나의 뺨 위에서 반질거렸다.
로베르트는 라모나의 멍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한껏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시대에 현신한 미의 여신을 어찌 이렇게…….”
라모나는 또다시 감탄했다.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공포의 주둥이라 불리는 건가.’
신기한 일이었다.
요하네스 앞에서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로베르트의 가공할 주둥이 앞에서는 약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신이시여, 아니. 이제 푸른빛이시여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마를 짚은 라모나가 말했다.
“……죄송한데 거기까지만 해 주실래요?”
물론 거기까지만 한다면 로베르트 메닝엔이 아니었다.
“가암히. 이 세상 어디를 뒤져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는! 이 아름다운 얼굴을!”
안 죄송해. 죄송하다는 취소야! 취소라고!
“르브르트 므능은.”
이를 악문 라모나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로베르트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가 슬그머니 라모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라모나.”
“미의 현신 아니에요.”
“맞는데.”
“아니라니까.”
“뭐 그렇다 치고.”
어쩐 일로 순순히 져 준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의 말에 라모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순간 목이 턱 하고 막혔다. 어떻게 이 이야기를 듣고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녀가 그와 같은 일을 겪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로베르트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 당신이 저 대신 그 근육 바보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군요. 물론 당신은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만.”
로베르트는 과장스럽게 박수를 쳤다.
“로베르트 메닝엔이라니.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아주 칭찬하는 바입니다.”
기가 막혀.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로베르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특유의 잘생긴 미소를 지었다.
“혹시 감동이면.”
그가 자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입이라도 한번 맞춰 주시죠.”
로베르트를 빤히 바라보던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이래서 당신이 좋아요.”
훅 들어온 진심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라모나?”
“어떻게 내가 당신을 안 좋아할 수 있겠어요.”
“…….”
“당신을 좋아하는 만큼, 아니 사랑하는 만큼. 너무 미안해요. 내가 당신에게 숨겼던 일들이 너무 크게 느껴져요. 그런데 그걸 다 덮어 주려는 당신을 보면 도무지…….”
격한 감동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끼며 라모나가 숨을 들이마셨다.
로베르트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라모나.”
눈물을 참느라 턱이 시큰해진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는 그녀를 끌어안고는 말했다.
“솔직히 다 말해 주어 고맙습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그가 속삭였다.
“내게 깊게 빠진 것도 이해합니다.”
“……예?”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간 라모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잘생긴 로베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사실 진작 그랬어야 하는 일이긴 한데……. 안 그렇습니까?”
정말 완벽하게 로베르트 메닝엔다운 위로였다.
‘위로…… 맞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라모나에게 로베르트가 싱긋 웃어 보였다.
정말이지. 지독하리만큼 예쁜 미소였다.
* * *
황궁의 지하 감옥.
“왔군.”
로베르트를 기다리고 있던 황제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준비는 되었나, 공작?”
황제는 바네사를 내어 준 대가로 로베르트에게 문제의 서신을 불태울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
에이드런과 요하네스에게 제대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 클레멘스의 기만을 덮어 주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마리안느의 이름을 여전히 오명 속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
어머니.
잠시 생각에 잠긴 눈으로 서신을 바라보던 로베르트가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폐하. 아직 한 가지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만.”
“끄응.”
황제는 곤란한 듯 신음을 흘렸다.
“공작도 알지 않는가. 모든 일에는 합당한 명분이 필요하네.”
황실에도 누가 되지 않고, 요하네스 하나만을 깔끔히 쳐 낼 명분을 찾는 중이라는 말이었다.
로베르트가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레이디 슈타이덴의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황제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알폰조를 너무 밀어주는 모양새가 되어서 그런 모양이군.’
황제는 아직도 남은 아들들을 저울질할 작정인 듯했다. 로베르트가 헛웃음을 쳤다.
“약속을 모두 지키시기 전까지는 태울 수 없습니다.”
“내 제국을 걸고 약속하겠네, 공작.”
“제게 제국이 별로 필요하지는 않은지라.”
로베르트의 단호한 거절에 황제가 또다시 신음을 흘렸다.
이번에는 황제를 떠보려는 수작이 아니었다. 로베르트는 정말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뚜벅뚜벅.
로베르트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바네사를 이미 내어 준 황제로서는 속수무책으로 속만 끓일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쿡.”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지하 감옥에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로베르트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자리에 멈춰 선 그가 빙글 뒤를 돌았다.
“기쁜 소식이로군. 찬란한 제국의 전 황태자 전하께서 이리 건강하신 듯하니.”
로베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파티라도 열어 드려야 하나?”
불손한 말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요하네스는 황제를 향해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잠시 공작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폐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여기가 황태자궁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황제가 엄하게 그를 꾸짖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저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만.”
로베르트가 무척이나 잘나고, 또 재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패배자와 대화를 나누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지라.”
철커덩!
패배자라는 말에 욱한 요하네스가 철창을 세게 잡았다.
“고작 자작 영애에게 속고 이용이나 당한 공작에게서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공작 자네는 라모나를 몰라. 그녀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안다면…….”
“흐음,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인데. 이상하리만큼 익숙하단 말이지.”
로베르트는 감옥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아 요하네스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요하네스를 바라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아!”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메닝엔 공작저에서 개를 키울 때 이렇게 키웠던 것 같군.”
“닥치거라!”
피식.
모욕에 분노한 요하네스의 외침에 로베르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말 재수 없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미소였다.
“공작! 네 놈이 감히! 죽고…….”
요하네스가 이성을 잃고 날뛰었지만, 로베르트는 그를 무시하고 일어났다.
로베르트가 황제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럼 저는 이만.”
뚜벅뚜벅.
멀어지는 로베르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제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하여간 메닝엔 공작이 괜히 재앙의 주둥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황궁을 떠난 로베르트는 곧장 마차에 올랐다.
‘황제는 이만큼 들쑤셔 뒀으면 됐고……. 남은 문제는 이제 그 사람뿐인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 로베르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