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45화 (146/151)

#145화

“…….”

“…….”

바텐베르크 후작저의 손님방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숨 막혔던 멜리사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너. 무. 덥. 다.”

라모나는 자신보다 연기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솔직히 놀랐다.

“호. 호. 호.”

무표정한 얼굴로 뚝뚝 끊어지는 웃음소리를 내는 멜리사의 모습은 기이하다 못해 오싹할 지경이었다.

본인도 그것을 아는지 결국 멜리사는 입에서 미소를 거뒀다.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아무튼 멜리사가 빠르게 자리를 떴다.

달칵.

문이 닫히고, 로베르트와 단둘이 남은 라모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로베르트는 라모나를 마주친 순간부터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화를 참는 중인지 때때로 그의 미간이 꿈틀했다.

‘화가 날 만도 하지.’

바네사가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몰라도, 사실 라모나가 직접 했어야 하는 이야기들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는 더 이상 늘어놓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제 계약이나, 정치적 약속으로 묶인 정도의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일단…….”

우선 사과부터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라모나가 입을 열 때였다.

“그 개자식의 짓입니까.”

이를 악문 로베르트가 소리를 짓이기듯 말했다.

그의 시선이 푸르다 못해 보랏빛에 가깝게 멍든 라모나의 뺨을 떠나지 못했다.

그제야 로베르트의 분노가 무엇을 향한 것인지 깨달은 라모나가 머쓱하게 뺨을 만지작거렸다.

‘아프네.’

그녀가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자 로베르트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그가 혀를 찼다.

“쯧. 그 자식의 목을 따 버린다고 할 것을.”

“발목은 제가 땄…….”

어머, 내가 뭐라는 거야. 말실수를 한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죄송해요.”

로베르트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그는 조용히 라모나에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행입니다.”

“……미안해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지금은 일단.”

무언가를 참듯, 혹은 삼키듯. 그의 목이 크게 움직였다.

“그냥 이러고 있고 싶어서.”

그 한마디면 그녀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울컥한 라모나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두 사람의 손에서 푸른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푸른빛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무사히 로베르트 메닝엔과 재회했다.

* * *

죽은 줄로만 알았던 메닝엔 공작이 살아 돌아왔다.

그는 납치니, 뭐니 하는 자신을 둘러싼 살벌한 소문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내 사랑, 나의 천사와 잠시 사랑의 도피를 했을 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되는지?”

물론 부끄러움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몫이었다.

상황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으나, 그것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기에 큰 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문제 삼을 만한 사람도 분명히 있었으나.

“그 소식 들었어? 왜, 메닝엔 공작가의 망나니 있잖아.”

“망나니? 메닝엔 공작?”

“아니, 거기는 망나니는 아니잖아. 입이 좀 그래서 그렇지. 그 숙부 말이야.”

“뭔 짓 했나?”

“세상에 공화국의 잔당들이랑 환각제를 들여왔대. 그것도 혼자 한 게 아니라던데.”

“헉, 누가? 누가 또 같이했는데?”

“무려 벤트하임 공작이 양자로 들인 놈이랑 함께!”

“아주 미쳤구먼, 단체로 미쳤어. 쯧쯧쯧.”

에이드런과 사무엘 크뤼거의 투옥 소식이 전해지며 알아서 몸을 사렸다.

다행히 메닝엔 공작가가 에이드런을 황제에게 고발하며 밝혀진 사실이기에, 메닝엔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벤트하임은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쥐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겉보기에는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 같았다.

겉보기에는.

* * *

벤트하임 공작저.

“젠장…… 젠장!”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미카엘라가 연신 손톱을 깨물었다.

안 그래도 레이디 블레나가 레헨트에서 전염병을 옮아온 일로 꼬투리를 잡힐까 봐 불안해하던 찰나였다.

거기다 요하네스가 연락이 되지 않은 게 벌써 일주일째.

황제가 요하네스를 가둬 두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미카엘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분명해. 황태자 전하가 사무엘 크뤼거의 일로 벤트하임을 저버린 거야.’

하지만 그건 요하네스가 시킨 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미카엘라가 다시 손톱을 깨물었다.

‘어째서지? 황태자 전하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 설마 라모나?’

공작이 사라진 사이 그 계집애가 황태자 전하께 꼬리라도 친 걸까?

‘그 여우 같은 계집애.’

한껏 예민해진 미카엘라가 아드득 이를 갈았다.

똑똑.

“아, 아가씨.”

벤트하임 공작저의 하녀가 조심스레 미카엘라를 불렀다.

“손님이 오셨는데요.”

미카엘라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태자 전하가 오셨구나, 그렇지? 맞지?”

“그게…….”

환한 얼굴의 미카엘라가 다그치자 하녀는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페브룩 영식께서 공작저를 방문하셨습니다.”

빌어먹을. 미카엘라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페브룩 영식에게 공작이 실종되었으니 이제 다시 라모나가 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바람을 넣기는 했다.

사실 바람만 넣은 것은 아니고 그렇게만 된다면 남부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모나의 평판을 있는 대로 망가뜨리면 그제야 정신을 차릴 테니 그렇게 해 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죽은 줄 알았던 메닝엔 공작이 돌아올 줄이야.’

짜증 나게. 미카엘라가 손을 휘저었다.

“적당히 돌려보내.”

“꼭 아가씨를 뵙고 가시겠다고 하시는데요…….”

“그럼 아프다고 하던가! 공작저 밖으로 그냥 던져 버리라고!”

잔뜩 짜증이 난 미카엘라가 작은 탁자 위에 올려 둔 화병을 바닥에 집어 던져 버렸다.

하마터면 화병에 맞을 뻔한 하녀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네, 넵!”

하녀는 잽싸게 자리를 떴다.

밖이 잠시 소란스러운 듯했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요아힘 페브룩을 순조롭게 쫓아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 뒤.

똑똑.

“미카엘라.”

세상의 모든 짜증나는 일은 다 겪은 표정의 벤트하임 공작 부인이 미카엘라를 찾아왔다.

“어, 어머니?”

그녀의 날카로운 기세에 당황한 미카엘라가 말을 더듬었다.

공작 부인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진짜니?”

“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페브룩 영식이……. 하.”

공작 부인이 생각하기만 해도 기가 찬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너와 주고받은 연서라는 걸 들고 공작저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던데.”

아. 젠장.

미카엘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밑바닥까지 다다른 사람에게 체면이고 뭐고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 * *

“사형이요?”

라모나의 되물음에 로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에이드런과 사무엘 크뤼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각성제의 존재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준 레이먼 아이젠부르크와 알폰조에게는 큰 상이 약속되어 있었다.

황제의 처분을 들은 라모나가 말끝을 흐렸다.

“예상했던 결과기는 한데…….”

아무래도 메닝엔 공작가가 얽힌 이야기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탓이었다.

오히려 로베르트가 더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말에서 라모나는 로베르트가 부모의 죽음에 얽힌 증거를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이 잠잠하다는 것은…….’

로베르트가 그 일을 덮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리라.

‘혹은 그 일을 덮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가.’

요하네스가 폐위될 것이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바네사 황녀의 신변을 로베르트가 확보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 일이 터진다면 황태자 폐위야 당연한 수순, 그렇다면…….’

바네사 황녀를 처벌하기 위해 황제와 협상했구나.

로베르트가 무슨 심정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지 상상하니 가슴이 찡하게 아려 왔다.

이제는 정말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시간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각하.”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호칭은 오랜만이군요.”

이내 그가 사람의 손을 탄 여우라도 된 듯 장난스레 라모나의 품에 안겼다.

“내 사랑, 나를 사랑한다 말해 주시죠.”

지금 그럴 때가 아닌데. 당황한 라모나가 그를 바라보자 로베르트가 미소 지었다.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압니다. 그러니 그 전에.”

그가 심호흡을 했다.

“나를 사랑한다 말해 줘요.”

그제야 라모나는 깨달았다.

로베르트는 상황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라모나에게 캐묻지 않았으며.

행여나 그녀의 감정이 거짓된 것일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정말 이 남자에게 잘못했구나.

울컥하고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지금 입을 열었다가는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서, 라모나는 조용히 로베르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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