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로베르트는 그 즉시 사병을 이끌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엄하다!”
분노한 황제를 마주했다.
황제로서는 실로 당황스러운 하루였다.
사랑하는 정부가 납치를 당해 그 아들에게 군사를 내어 주었더니, 그의 또 다른 아들을 범인이라며 잡아 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또 다른 아들은 남의 약혼녀를 납치해 둔 상황이었다.
대체 누구를, 어떻게 벌해야 하는가.
머리를 싸맨 황제가 로베르트에게 호통쳤다.
“이건 반역일세, 공작! 아무리 약혼녀의 일이 얽혀 있다지만 어찌 이런 무도한 짓을!”
“죄송합니다만.”
로베르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이 정도는 해야 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시죠, 폐하.”
“……뭐?”
“황태자 전하고, 황녀 전하고…… 다들 메닝엔을 멸문시킬 작정이신 듯하니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설마 지고하신 황족들이 제 아버지도 모자라 저까지 죽이려 들 줄은 몰랐습니다.”
“……!”
그제야 황제는 정말 골치 아픈 일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요하네스가 뷔나우 백작, 에이드런과 함께 로베르트의 부모를 죽음에 빠뜨린 일이며, 바네사가 로베르트를 죽이려 했던 일.
그도 모자라 바네사가 라모나를 납치해 요하네스에게 건네주었다는 일까지 전해 들은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황실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을 만한 큰 사건이었다.
게다가 공화국의 추방자들과 손을 잡고 서부군에 각성제를 퍼뜨리다니.
요하네스가 벤트하임을 통해 저지른 일에 황제는 크게 분노했다.
황제는 요하네스를 아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요하네스가 그의 후계자이기 때문이었다.
‘헌데 내게 발톱을 세우려 들어……?’
무엇보다 황제를 사칭하여 레이디 슈타이덴을 납치했다는 점이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다.
감히. 황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침 벤트하임 공작이 사무엘 크뤼거를 양자로 삼을 서류를 올린 찰나였다.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황제에게 로베르트는 먼저 제안했다.
“지난 일은 덮어 드리죠.”
“……원하는 것은?”
“현 황태자의 폐위, 바네사 황녀의 처분에 대한 권한.”
굴욕적인 협상에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노로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히 짐의 후계자 선정에 손을 대겠다?”
“뭐, 제가 누구를 황태자로 만들어 달라 말씀드린 건 아니지 않습니까.”
로베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이 일이 밝혀지면 폐위는 당연한 수순이 아닌지.”
틀린 말은 아니다. 로베르트의 말에 황제가 신음했다.
“……증거는 있나?”
황제의 말에 로베르트가 피식 웃었다. 그의 입가에 특유의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증거를 전해 드리면 감당은 가능하시겠습니까?”
“무례하다!”
“아니면 없던 일로 하죠.”
로베르트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황제는 꼴사납게 엉덩이를 쭉 빼고 일어나 그를 붙잡아야만 했다.
겨우 이성을 되찾은 황제가 제안했다.
“각성제까지. 그 일까지 덮도록 하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 덮어씌우라는 말씀이십니까?”
로베르트의 얼굴이 싸늘해지자 황제는 저도 모르게 황급히 입을 열었다.
“진범이 있지 않은가.”
에이드런 메닝엔의 이야기였다. 로베르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가 자리를 뜨고 나서야 황제는 자신이 로베르트의 페이스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빌어먹을 메닝엔의 주둥이.”
노한 황제가 수염을 부들부들 떨었다.
* * *
크레모라 백작저.
백작저로 옮겨 온 바네사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베르나딘이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들이닥쳤다.
“바네사!”
“오라버니.”
충격에 빠진 듯 가늘게 떨리는 바네사의 손을 본 베르나딘은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것을 겨우 삼켰다.
바네사는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죠?”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메닝엔 공작을 배신했다. 너를 납치하려고 했던 모양이더구나.”
분을 못 이긴 베르나딘이 이를 악물자 바네사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나딘이 잔뜩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로베르트도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야. 세상에, 그 여자가 너를 해치려 할 줄이야.”
“공작이요?”
로베르트의 이야기에 바네사가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되물었다.
“공작을 만나셨나요?”
“그, 그래. 어찌 알았는지 나타났더구나.”
“그가 살아 있었나요?”
바네사의 질문에 베르나딘의 눈이 커졌다. 그는 그제야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납치당했다던 로베르트가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지?”
바네사는 찡그려지는 미간을 겨우 폈다. 베르나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층에서 보고서를 발견했다, 바네사.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자세히 설명해다오.”
“아무래도 메닝엔 공작의 실종이 좀 수상쩍어서 자료를 모으던 중이었어요. 그러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연루된 것 같은 증거를 발견했고요. 마침 그녀가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기에 이곳으로 오라 했는데…….”
바네사가 말을 더 잇지 못하자 베르나딘이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다, 바네사. 네가 무사했으니 됐지.”
“메닝엔 공작은요?”
“공작저로 돌아갔다. 급한 일을 처리하고 이곳으로 오겠다고 하더구나.”
“……그런가요?”
됐다. 바네사는 자신의 수가 먹혔음을 직감했다.
“수면제였나요?”
“그래, 찻잎에 수면제가 섞여 있더구나. 부엌 하녀가 네가 가져다준 차라며 횡설수설하기에 가둬 두었다.”
“저런…….”
바네사가 혀를 찼다.
“황족을 해하려 든 것도 모자라 모함하려 들다니.”
그녀의 얼굴에 냉정한 기색이 깃들었다.
“가만두어선 안 되겠군요.”
뒤탈이 날 것 같은 요소는 모조리 제거하면 된다. 그게 바네사의 방식이었다.
베르나딘에게서 상황을 확인한 그녀는 곧 생각에 빠졌다.
‘빠르게 공화국으로 망명해야겠군.’
모든 일이 그녀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요하네스가 눈감아 주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얼른 움직이는 것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길이다.
‘메닝엔 공작이 쉽게 속아 주어 다행이야.’
바네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똑똑.
“황녀 전하. 메닝엔 공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때마침 크레모라 백작저의 하녀가 로베르트의 방문 소식을 알렸다.
바네사는 비릿한 미소를 숨겼다.
“들라 하도록.”
그녀의 예상과 달리 로베르트는 무척이나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사해 보이는군.”
바네사를 훑어본 로베르트가 싸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뻔뻔하게도.”
“무슨…… 말씀이신지?”
바네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했지만 로베르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건 이제 내가 황녀에게 들어야겠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닝엔의 사병들이 들이닥쳤다.
“이게 무슨!”
당황한 베르나딘이 호통쳤다.
로베르트는 차가운 얼굴로 사병들에게 명령했다.
“황녀 전하를 당장 끌어내도록.”
“로베르트!”
베르나딘이 바네사의 앞을 막아섰다.
로베르트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덤덤한 얼굴로 황제의 서신을 꺼내 들었다. 서신의 내용을 듣고는 베르나딘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로베르트는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바네사 황녀의 처분을 메닝엔에 일임하셨네.”
“……!”
베르나딘이 일의 전말을 파악할 새도 없이 사병들은 바네사를 끌어냈다.
* * *
요하네스를 포박한 채 황궁 의사에게 넘겨준 후, 알폰조는 급한 대로 라모나를 바텐베르크 후작저로 옮겼다.
소식을 들은 멜리사가 황급히 사람들을 물리고 직접 따뜻한 찻주전자를 들고 찾아왔다.
“라모나, 괜찮아요?”
“…….”
충격에 빠진 라모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멜리사가 황급히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녀가 습관처럼 각설탕을 집어 들 때였다.
“설탕은 괜찮아요, 멜리사.”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라모나가 멜리사를 만류했다. 멜리사는 떨떠름한 얼굴로 각설탕을 내려놓았다.
“이거 제법 괜찮은데.”
“취향이 아니라서요.”
“아쉽네요.”
한쪽 뺨에 시퍼렇게 멍이 든 라모나의 얼굴을 보며 멜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은 거 맞죠?”
“네.”
라모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 괜찮아요.”
멜리사는 전혀 안 그래 보이는 얼굴이라 생각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네.’
이럴 때 나타나서 달래 줄 것이지. 메닝엔 공작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였다.
“있잖아요, 멜리사.”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말해요.”
“혹시 멜리사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사람이 멜리사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요.”
“음, 화나겠죠?”
“용서할 수 있겠어요?”
뭐 저런 걸 물어보지. 멜리사는 솔직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라모나가 아파 보이니 일단 참았다.
“필요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요.”
“필요가 없으면요?”
“그럼 굳…… 이 한번 용서해 보죠, 뭐.”
아 마음에 없는 말 하기 너무 힘들어. 멜리사가 진땀을 흘리던 때였다.
똑똑.
“아가씨.”
멜리사에게는 마치 구세주와도 같은 하녀의 부름이 들렸다.
“어, 들어와, 어서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선 하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메닝엔 공작 각하께서 방문하셨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