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허억, 헉.>
그 소름 끼치는 눈동자를 도저히 잊을 수 없었던 그녀가 팔을 끌어안았다.
비명을 들은 바네사의 유모가 황급히 달려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바네사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물을 좀 떠다 줘, 유모.>
이윽고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풀썩.
그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바네사는 방에 틀어박힌 채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는 베르나딘을 황태자로 만드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꿈에서 본 베르나딘은 너무나도 물렀으며, 너무나도 무능했다.
‘아니야.’
내가 오라버니를 도우면 돼. 할 수 있어. 바네사가 이를 악물었다.
* * *
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꿈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메닝엔 공작이 약혼을 하고, 아이젠부르크는 벤트하임에게서 돌아섰다.
‘단순한 꿈이었나.’
고민 끝에 바네사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의 꿈이 정말 미래라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또한 그 미래를 보았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혹시 모르는 일에 대비하여 바네사는 서부 경계에서 수도로 오는 편지를 빼돌리기 시작했다.
서부와 아이젠부르크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라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자신 이외에도 또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바네사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곧 그녀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황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브리트어로 편지를 작성했다.
처음에는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요하네스도 같은 꿈을 꾸었다면 편지가 도착하는 순간 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발신인을 찾아낼 것이라는 확신에서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바네사는 안도했다.
‘어찌 보면 잘 된 일이지.’
자신뿐만 아니라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도 요하네스를 향한 칼을 갈고 있으리라.
미래를 아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 지난 생보다 분명 희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베르나딘이 요하네스를 이길 수 있을까.
바네사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매일 밤, 그녀는 회귀 전의 꿈을 꿨다.
<……어머니?>
어느 날은 눈도 감지 못한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크레모라 백작 부인의 시신이.
<추, 춥구나. 바네사. 너무……. 너무 추워.>
또 어느 날은 피투성이가 된 채 살려 달라 애원하던 베르나딘이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베르나딘은 여전히 물렀고, 또 무능했다.
그녀는 서서히 깨달았다.
‘이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베르나딘이 헛된 욕심을 부릴 때 말렸어야 했다.
자신이 베르나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은 끔찍하리만큼 오만한 생각이었다.
베르나딘은 그렇게 섣불리 황위 싸움에 뛰어들어서는 안 됐다. 이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매일매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 결심했다.
더럽고 비참하더라도 살아남자고. 설령 요하네스의 발아래 바짝 엎드려야 하더라도.
그래도 살아남자고.
그게 회귀자 바네사가 내린 결론이었다.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모시고 공화국으로 추방당하면 되겠지.’
어떤 굴욕적인 항복을 취해야 그에게 목숨을 구걸할 수 있을까. 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이 무엇일까.
긴 고민 끝에 그녀는 다시 펜을 들었다.
목표를 정한 그녀는 거침없이 행동했다.
크레모라 백작 부인의 시가 모임을 통해 요하네스에게 메닝엔의 정보를 물어다 줄 엘츠 백작을 소개해 주고, 각성제를 만드는 이들에게 접근해 그들의 일이 수월하게 돌아가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알폰조마저 이상한 동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교 시즌이 시작하고, 마침내 요하네스까지 이전 생의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바네사는 결심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자신이 직접, 요하네스가 가장 원하는 것을 제물로 바치기로.
결단을 내린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예? 산에 폭약을요?>
로베르트 메닝엔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사람을 써서 산사태를 일으킨 그녀는 곧장 사람을 메닝엔 공작가로 보내 사고 소식을 알렸다.
한시라도 빨리 라모나가 메닝엔 공작가에서 쫓겨나도록.
그래서 그녀가 한시라도 빨리 요하네스의 손아귀에 들어가도록.
하지만 일은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직접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라모나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보낸 뒤, 바네사는 다시 이브리트어로 편지를 작성했다.
<폐하, 레헨트에 있는 폐하의 것들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보다 더 굴욕적인 항복이 있을까. 바네사는 그제야 안심했다.
* * *
“뭐? 수도 외곽으로?”
라모나가 바네사 황녀를 만나러 이동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그곳으로 가지.”
하지만 로베르트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
바네사와 라모나, 두 사람이 모두 납치된 후였다.
소식을 들은 베르나딘 또한 이미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그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차야.”
“뭐?”
“놈들이 차에 수면제를 탔네!”
젠장, 베르나딘이 머리를 짚으며 욕설을 짓이겼다.
바네사의 시녀는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베르나딘은 울분을 토했다.
“애초에 바네사를 노리고 있던 게 분명해.”
저택은 엉망이었다. 테이블은 넘어져 있었고, 찻잔이 깨지면서 카펫은 찻물이 들어 있었다.
격양된 베르나딘이 울부짖었다.
“요하네스. 그가 분명해! 분명하단 말일세!”
“진정하게, 베르나딘.”
“당장 폐하를 찾아가야겠어.”
흥분해 날뛰는 베르나딘의 모습은 침착하게 다음 플랜을 제안하던 알폰조와는 영 딴판이었다.
한숨을 삼킨 로베르트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증거로?”
“그야…….”
“바네사가 납치되었는데,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요하네스뿐이다. 설마 이런 멍청한 말을 폐하께 드리려는 건가?”
“선 넘지 말게, 로베르트. 자네가 알폰조와 어울리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바네사를 자네가 이렇게 대해서는 안 돼.”
“자네야말로 바보같이 굴지 마. 증거도 없이 뭘 하겠다는 건가.”
“로베르트!”
흥분한 베르나딘이 거센 숨을 내쉬었다. 이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쉰 로베르트는 찬찬히 응접실을 훑어보았다.
‘침입의 흔적은 없군.’
엉망이 된 것은 테이블 주변뿐.
창문과 현관은 멀쩡했다. 마치 활짝 열린 문으로 납치범이 들어온 것처럼.
‘설마 황녀의 짓인가.’
이를 악문 로베르트는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중얼거렸다.
“라모나는 무사하다. 라모나는 안전하다.”
그때였다.
툭.
“이것 좀 보게.”
밖으로 나갔던 베르나딘이 돌아와 로베르트에게 타다 만 종이 뭉치를 던져 주었다.
종이 뭉치는 다름 아닌 바네사가 수하에게 전달받은 보고서였다.
그 안에는 레헨트의 동향에 대한 보고가 적혀 있었다.
공화국에서 추방당한 세력들이 레헨트에서 각성제를 제조 중이며, 라모나가 그들에게 협조한 정황이 포착된다는 내용이었다.
보고서에는 빈민가를 폐쇄한 것도 그들을 위한 결정인 것처럼 적혀 있었다.
“이게 무슨……!”
당황한 로베르트가 종이를 구기자 베르나딘이 크게 발을 굴렀다.
“이래도 모르겠는가?”
그가 소리쳤다.
“자네의 그 여우 같은 약혼녀가 바네사를 제거하기 위해 꾸민 일이 틀림없다, 이걸세!”
베르나딘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곳에서는 라모나가 요하네스와 밀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벤트하임의 시녀에게 자네도 이용당한 거라고. 로베르트 메닝엔.”
* * *
<라모나.>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라모나의 귓가에 울렸다.
<너는 왜 나를 사랑한다 말하지 않느냐, 응?>
또 요하네스의 꿈이었다. 끔찍해. 주먹을 꽉 쥔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거짓말하지 말거라.>
“정말이야.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
<네가 그리 말하면 내가 관심을 가져줄 줄 아는 모양이구나.>
“……네 관심 따위는 필요 없어.”
<나만큼 너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넌 그냥 쓰레기일 뿐이야.”
라모나가 한 글자 한 글자에 진심을 담아 내뱉었다.
이내 라모나의 귓가에 더 생생하게 요하네스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라모나.”
약 기운 때문일까. 라모나는 눈이 떠지지 않자 눈썹을 찌푸렸다.
이윽고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손가락이 라모나의 뺨에 닿았다.
“눈을 떠, 라모나.”
서늘한 감각에 라모나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손을 묶어 놨어.’
라모나가 이를 악물자, 피식 웃은 요하네스가 그녀의 입술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러다 다치지.”
그러나 언제 다정하게 그녀를 걱정했냐는 듯, 요하네스는 라모나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
짝.
“일어나.”
윽, 라모나가 이를 악물었다.
“깨어난 것을 모를 것 같으냐. 속눈썹을 그렇게 바들바들 떨면서?”
요하네스는 억지로 그녀를 일으켰다.
결국 눈을 뜬 라모나에게 그는 천사같이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라모나.”
그가 덧붙였다.
“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