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40화 (141/151)

#140화

“제정신인가, 정말!”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티아가 맹렬하게 바네사의 심부름꾼을 노려보자, 심부름꾼은 라모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수도에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으로 사람들이 많이 예민해져 있습니다.”

“전염병이?”

레헨트의 전염병을 잘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이디의 심부름꾼이 수도에 설사병을 퍼뜨렸다는 이야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심부름꾼의 대답에 라모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라모나를 이렇게 대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게다가.

‘어떻게 로브만 보고 나인 줄 알아차릴 수 있지.’

라모나는 바네사 황녀가 의도적으로 자신이 크레모라 백작저에 올 것이라는 소문을 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젠장, 제대로 휘말렸군.’

무슨 일이 있어도 마차에 오르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로베르트의 사람들이 자신을 잘 추적하고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시작부터 이렇게 나오다니.’

라모나가 이를 악물었다.

마차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심부름꾼은 더 이상 아무 설명 없이 입을 다물었다.

“도착했습니다, 레이디.”

곧 마차는 수도 근교, 웬 한적한 저택에 도착했다.

‘한산하네.’

소박한 모습을 보아하니 황실의 소유는 아니고, 바네사 황녀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저택인 모양이었다.

라모나가 저택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심부름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레이디, 그분께서 혹 부담스러우시다면 다음에 뵈어도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나름의 승부수를 띄웠군. 라모나가 헛웃음을 삼켰다.

바네사 황녀는 이 협상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 제대로 알려 주려는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날 떠보겠다 이건가.’

떠보기라면 이미 지겨우리만큼 당했다. 이내 라모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가도록 하지.”

또각또각.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저택 로비를 가로질렀다. 라모나의 구두 소리가 온 저택을 울렸다.

이윽고 도착한 응접실.

“오랜만이군.”

바네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라모나를 맞이했다.

* * *

쪼르륵.

바네사는 능숙하게 차를 따랐다.

붉은 찻잔에서 화려한 꽃향기가 피어났다. 달콤하고도 이국적인 과일 향이 뒤섞인 홍차였다.

“앉게.”

찻주전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네사가 말했다.

움찔 팔을 떤 티아가 라모나를 막아섰으나.

‘괜찮아.’

라모나는 티아의 팔을 살며시 밀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단정하고 차분한 바네사와는 어울리지 않게 찻잔은 눈이 부실 만큼 화려했다.

강렬한 붉은색과 대비되는 진한 파란색의 무늬. 그리고 영롱한 금장 림까지.

확실히 바네사의 취향과는 동떨어진 물건이었다.

“화려하지?”

라모나가 찻잔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챈 바네사가 입을 열었다.

“내 취향은 아니네만. 자네가 찻잔을 모으는 게 취미라 들어서 특별한 것으로 준비해 봤네.”

회귀 전의 이야기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달그락.

바네사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들게.”

라모나는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피식 웃은 바네사가 다시 찻잔을 들었다.

“내가 이 정도로 의심을 받고 있을 줄이야.”

그녀는 자신의 차와 라모나의 차를 모두 찻주전자에 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찻잔을 맞바꾼 뒤 다시 따랐다.

“이 정도면 되겠나?”

바네사가 여유롭게 찻잔을 홀짝였다.

라모나는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좋은 차였다. 화사한 향기만큼이나 산뜻한 베르가모트의 맛이 코를 치고 들어왔다. 향만큼이나 달콤한 과일의 맛도 함께였다.

하지만 바네사는 좋은 차를 함께 즐길 만한 사이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라모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바네사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메닝엔 공작을 찾은 모양이야.”

“……!”

“아닌가?”

“무슨 의도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글쎄. 단순한 것 아닌가?”

고개를 살짝 갸웃한 바네사가 말을 이었다.

“선대 메닝엔 공작은 공작을 놓친 모양이고, 그렇다고 우리 쪽에서 그를 납치한 것도 아니지. 그렇다고 요하네스라 보기에는 정황이 이상해.”

피식.

바네사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제법 긴 세월을 살아 낸 사람의 분위기가 풍겼다.

“만약 그가 메닝엔 공작을 손에 넣었다면 당장 그대를 겁박하지 않았겠는가. 레이디 슈타이덴을 납치하는 게 아니라.”

레이디 슈타이덴의 납치 소식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요하네스가 그 증거를 손에 넣으려 하는구나.’

안 돼. 긴장한 그녀가 옷자락을 꽉 쥐었다.

라모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바네사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답은 하나겠지. 공작이 제 발로 그 협곡을 탈출했다.”

그녀가 다시 찻잔을 들고, 홍차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아쉬운 일이야.”

라모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황녀 전하?”

바네사는 라모나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럼에도 그대가 나를 찾아온 것은 나를 의심했다는 뜻이겠지.”

바네사는 서늘한 눈빛으로 라모나를 노려보았다.

“하나만 했어야지. 어리석게도.”

혀를 끌끌 찬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는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말씀하시죠.”

“그대만 아니었다면 이번 산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걸세.”

바네사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세우고, 업신여기듯 라모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대만 아니었다면 메닝엔 공작이 그런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텐데. 아쉬운 일이야, 그렇지 않나?”

순간 일의 전말을 알아차린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설마 황녀, 당신이……?”

그 순간.

퍽!

“아가, 으읍!”

둔탁한 소리와 함께 티아의 억눌린 비명이 들려왔다.

“티아?”

깜짝 놀란 라모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윽.”

강렬한 두통이 라모나를 덮쳤다.

“으으읍! 으읍!”

누군가가 티아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질질 끌고 갔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낀 라모나가 이를 악물었다.

바네사는 우아하게 말했다.

“진정하는 게 좋을 거야. 목숨을 해하는 약은 아니지만 움직일수록 약효가 빨리 들거든.”

“이게 무슨……!”

의자를 짚은 라모나가 비틀거렸다.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느낌이었다.

바네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정하게 라모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대의 오판이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하지만 라모나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웠다.

“그대도 삶의 목표를 바꿨는데 왜 다른 회귀자들은 여전히 같은 목표를 고집할 것이라 믿는가.”

바네사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기를 원하는가? 그러니까, 내가 왜.”

그녀가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번 생에도 베르나딘 오라버니를 황태자로 만들 거라 생각했냐 이 말일세.”

이제 눈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어질어질해진 라모나가 가까스로 이를 악물었다.

풀썩.

그런 그녀의 앞에 바네사가 먼저 정신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젠장.”

이런 함정을 팠을 줄이야. 라모나가 이를 악물었다.

‘나와 같이 정신을 잃을 작정이었나.’

안 돼. 이대로 기절해서는 안 돼.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세게 악문 라모나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내려쳤다.

짝!

얼얼한 통증에 정신을 차린 그녀가 겨우겨우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움직였다. 하지만.

“데, 데미안 스펜서?”

라모나가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절망한 라모나는 필사적으로 데미안을 피해 도망치려 했지만.

“으윽.”

툭.

채 열 걸음도 못 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 * *

제국력 847년 3월 15일.

요양을 핑계로 베르나딘과 뤼스톡에 머무르던 바네사에게 의아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메닝엔 공작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벤트하임의 시녀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바네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곧장 오라버니인 베르나딘을 찾아갔다.

<이상하긴 한데…… 뭐 별일 있겠느냐.>

베르나딘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로베르트가 그런 수작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란 것은 잘 알지 않느냐.>

<아무래도 수도에 한번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라버니.>

<흐음, 바네사 네가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베르나딘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약혼자가 될 사람이니.>

바네사는 베르나딘의 반응에 한숨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다음 날 그녀는 재빠르게 수도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니까.

<오, 로베르트. 내 사랑.>

마차를 멈춰 세운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엄청난 사랑 고백을.

뭐지. 혼란에 빠진 바네사는 일단 몸을 숨겼고, 고민 끝에 다시 뤼스톡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오라버니!’

그녀는 아주 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메닝엔 공작은 그녀의 약혼자였고, 약혼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산사태로 사망했다.

그다음은 베르나딘, 그다음은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네사의 목숨을 앗아 가며 요하네스는 말했다.

‘왜 너를 가장 마지막에 처리하는지 아느냐, 바네사.’

그의 푸른 눈이 번들거렸다.

‘네가 가장 재미있는 사냥감이었거든. 너도 알다시피…….’

요하네스가 싱긋 웃었다.

‘베르나딘은 너무 착하지 않느냐.’

<안 돼!>

바네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