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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38화 (139/151)

#138화

늦은 밤 바텐베르크 후작저.

“황실의 마차를 타고 갔다고?”

“예, 그렇습니다.”

“귀가는?”

“아직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짤랑.

멜리사가 금화를 건네주자 심부름꾼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윽고 심부름꾼이 자리를 뜨고, 멜리사는 급히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아버지.”

“들어오거라, 멜리사.”

서류를 살피던 후작이 피로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냐?”

“낮에 황궁에 다녀오셨다고요.”

“그래, 전염병이 돈다고 하니 폐하께서 나를 부르시더구나.”

황제에게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신이 난 후작의 어깨가 우쭐하게 올라갔지만, 멜리사는 못 본 척했다.

“아아, 레헨트요?”

“그래. 다행히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잘 막고 있는 모양이야. 어떻게 설탕과 소금을 쓸 생각을 했는지 참.”

바텐베르크 후작이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 괜히 폐하께 붙잡히는 바람에 시간만 낭비했지 뭐냐. 하여간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입이 과묵해져야…….”

“고생 많으셨어요. 아버지, 그럼 이만.”

“응, 멜리사? 애야. 멜리사!”

벌써 간다고?

당황한 후작이 애타게 그녀를 불렀으나 멜리사는 이미 휑하니 멀어진 후였다.

‘확실해. 폐하가 레이디 슈타이덴을 부른 게 아니야.’

황궁의 마차가 레이디 슈타이덴을 태워 갔으나,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혹시나 했건만.

‘알폰조 전하가 지금 어디쯤에 있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멜리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로베르트를 찾으러 간 그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아니 맞는 선택일까?

‘찾으려면야 방법이 없지는 않지.’

고민하던 멜리사는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이젠부르크의 영지가 몰수되고, 레이먼은 급하게 특별 휴가를 받아 수도로 내려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곧장 레헨트로 향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수도에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어, 도련님…… 페브룩가의 도련님이 오셨는데요.”

“이 시간에? 또?”

하녀의 말에 레이먼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저 미친놈이.’

아드득.

레이먼이 이를 악물었다.

메닝엔 공작의 실종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요아힘 페브룩은 그 쥐새끼 같은 얼굴을 다시 들이밀었다.

<아니, 라모나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니까! 날 그리워한다고, 용서해 달라고 했다고!>

그는 뻔뻔하게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편지를 들먹이며 자작저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쯧.

‘모자란 놈. 역시 누님에게는 한참 못 미쳐.’

레이먼이 혀를 찼다.

‘말에서 떨어져 고자 됐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결혼 시장에서 밀려난 것 같으니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양이군.’

라모나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그의 속셈이 너무나 투명했다.

사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헨트에 전염병이 돈다더라.>

처음에는 겁을 먹은 라모나가 빈민가를 봉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이후로 라모나가 전염병을 잘 막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설탕과 소금으로 무슨 병을 막는다고…… 쯧, 공작에게 뜯어낸 돈은 많은가 보네.>

사람들은 신나게 라모나의 무능함을 헐뜯었다. 그러나 전염병에 걸린 레이디 블레나의 하녀가 목숨을 잃으면서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가 자기만 살려고 설탕과 소금을 사재기했다며?>

라모나를 무능하다고 욕하던 사람들은 기억을 잊기라도 한 양 라모나가 이기적이라 욕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는 레이먼으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때마침 황태자 요하네스가 라모나를 칭찬한 것이 여론을 더 악화시켰다.

귀족들은 사재를 쓸 수밖에 없게 만든 라모나를 속으로 원망했고, 평민들은 배부른 치료 약이라며 라모나를 비난했다.

거기다 요아힘 페브룩이 저렇게 난리를 쳐 주고 있으니 라모나가 사람들에게 무슨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안 봐도 뻔했다.

레이먼은 이를 악물었다.

‘자기들이 뭘 안다고.’

아무튼 누님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레이먼은 그 점이 가장 걱정스러웠다.

“어휴.”

한숨을 내쉰 레이먼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래. 내 생각이 너무 간 걸지도 몰라. 나가서 머리나 좀 식히고 오자.’

대문 앞에는 머리가 덥수룩한 요아힘이 비틀거리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딸의 약혼자를 이렇게 대하다니! 아이젠부르크의 손님 대접은 고작 이따위야?”

힐끔 요아힘을 곁눈질한 레이먼이 혀를 찼다.

‘눈이 완전 맛이 갔군. 붙잡히면 귀찮아지겠는데.’

레이먼은 요아힘이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잽싸게 그곳을 빠져나갔다.

막상 저택 밖으로 나섰지만 딱히 갈 곳은 없었다. 레이먼이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아, 젠장.’

메닝엔 공작저를 발견한 그가 짜증스레 머리를 긁었다.

‘왜 하필 산책을 나와도 이쪽으로 온 거야.’

클레멘스, 유디트와 함께했던 훈훈한 저녁 식사를 떠올리자 입맛이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님이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쯧. 혀를 찬 그가 다시 아이젠부르크 자작저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잠깐만.’

으슥한 골목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레이먼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에이드런 메닝엔?

그가 왜 마차를 안 타고 길바닥에서 저러고 있는 걸까. 이상한 예감에 레이먼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드런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내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레이먼은 본능처럼 빠르게 몸을 숨기고 에이드런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에이드런을 쫓았을까.

‘……저건.’

각성제?

에이드런의 손에서 익숙한 하얀 가루를 발견한 레이먼의 눈이 커졌다.

‘잠깐만.’

순간 레이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레헨트 산이라는 각성제, 봉쇄된 빈민가, 그리고 라모나를 향한 악의적인 여론.

‘설마.’

누군가가 일부러 그린 듯한 계획이 떠오른 레이먼의 얼굴이 일그러지던 찰나였다.

“읍.”

레이먼의 뒤에서 누군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레이먼은 단번에 그 손을 틀어 버리려 했지만.

“쉿.”

그러지 못했다.

“수상한 사람은 아닌데.”

시니컬한 여자의 목소리에 레이먼의 눈이 커졌다.

“으으읍 으으으으으?”

“2황자 전하께 급히 연락드릴 일이 있어.”

레이디 바텐베르크. 멜리사였다.

* * *

쪽.

이마에 닿는 말캉한 감촉에 라모나는 눈을 떴다. 어느덧 해가 어렴풋이 뜨고 있었다.

“으음.”

아직 잠이 덜 깬 라모나와 눈이 마주친 로베르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쪽.

또다시 로베르트의 입술이 라모나의 이마에 닿았다.

이번에는 그의 입술이 떨어질 생각을 안 하자 라모나가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으음, 일어났어요.”

그제야 슬쩍 입을 뗀 로베르트가 태연하게 라모나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췄다.

“그럼 이제 굿모닝 키스를 해야겠군요.”

“방금 전은 뭔데요?”

“그건.”

흠. 턱을 만지작거린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냥 하고 싶어서?”

굳이 무엇이 하고 싶은지를 콕 집어 말하지 않는 그를 보며 라모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렇게 하고도 또요?”

로베르트는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했다.

“뭘 그렇게 했습니까? 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에, 말을 말아야지.”

“당신이 하고 싶은 건 아니고?”

검은 눈이 야릇하게 휘어졌다.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핥은 로베르트의 손이 라모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건 좀 반가운 소식인데.”

맨살에 닿는 그의 손이 뜨거웠다.

뜨거워진 것은 그의 손만이 아니었다. 이불 속의 공기가 팽팽하게 달아오를 무렵.

쪽.

라모나는 불쑥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로베르트의 눈이 커지자 라모나가 그를 꼭 닮은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요.”

눈을 깜박이던 로베르트가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제 생각엔 이마가 아니라 여기를 막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 정도만 했으면 못 이기는 척 달콤한 키스를 퍼부어 줬을 텐데, 로베르트의 반대쪽 손은 아침부터 음흉한 속내를 숨기지 못했다.

찰싹.

라모나는 그녀의 다리를 은밀하게 쓸어내리는 로베르트의 손을 따끔하게 혼냈다.

그러나 로베르트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황홀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오, 내 사랑.”

“설마, 세상에, 혹시나 짜릿하다고 하려는 거면 가만 안 둘 거예요.”

라모나의 험악한 기세가 심상치 않자, 로베르트가 살랑거리던 꼬리를 잽싸게 내렸다.

그가 세상 엄숙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라모나의 가느다란 눈이 커질 기미가 없자 로베르트가 장난스럽게 눈을 접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딱 키스만?”

하여간 여우가 따로 없다.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그렇다고 이 커다란 여우가 싫은 것은 또 아닌지라, 그녀는 로베르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가벼운 모닝 키스는 점점 진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언뜻 붉은 것이 오갔다.

라모나가 그의 입술을 살짝 물자 로베르트는 라모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빈 공간 없이 밀착된 부드러운 감촉에 그의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그는 라모나의 날개 뼈를 보물이라도 되는 듯 소중히 어루만졌다. 그러다 척추를 훑듯 그의 손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이러다 또 꼼짝없이 침대에 붙들리겠다 싶었던 라모나가 단호하게 로베르트의 손을 떼어 냈다.

“안 돼요.”

“하지만, 라모나 잘 생각해 봅시다.”

“안 돼요.”

“단호하군요.”

로베르트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입술은 왜 깨물었습니까? 그것도 엄청나게 야하게. 날 이렇게 유혹해 놓고 너무합니다.”

“그거야…….”

말끝을 흐린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이 좋아서?”

그녀의 말에 순식간에 목덜미가 달아오른 로베르트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 미치겠다.”

베개를 꽉 쥔 그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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