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34화 (135/151)

#134화

로베르트의 폭주가 한 차례 지나간 후, 다행히도 그들은 알폰조를 기다리고 있던 마차와 무사히 접선에 성공했다.

“곧장 레헨트로 가도록 하지.”

알폰조의 명에 따라 마차는 빠르게 레헨트로 향했다.

마차 안. 로베르트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국 최고의 재앙의 주둥이답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입을 다물고 있다’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었다.

“저 자식은 라모나 근처에 얼씬도 못 한다.”

알폰조와 대화를 거부했을 뿐, 혼잣말은 끊임없이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로베르트를 바라보며 알폰조는 생각했다.

‘꼭 정신 나간 사람 같군.’

혹시 그가 죽음의 위험을 넘기면서 어떻게 된 것은 아닌지, 알폰조가 진지한 고민에 빠지려던 찰나였다.

“저 자식은 망신을 당한다.”

로베르트가 중얼거리는 순간.

투둑.

알폰조의 목을 꽁꽁 싸매고 있던 셔츠 단추가 갑자기 터져 나갔다.

졸지에 상의를 헐벗게 된 알폰조의 손목에 푸른빛이 나타난 것은 물론이었다.

“……공작?”

당황한 알폰조가 그를 부르자 로베르트는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고작 저게 망신이라니. 왜 하필 저 근육 바보가…… 후.”

아무튼 그는 무언가를 확신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간간이 들리던 로베르트의 혼잣말마저 사라져 버리자 마차 안에는 쥐 죽은 듯 침묵이 흘렀다.

불편한 공기에 알폰조는 한숨을 삼켰다.

‘만약 메닝엔 공작이 나를 지지하지 않는다 하면…… 그때는 그것의 이야기를 꺼내야겠지.’

로베르트를 찾아 나서기 전 레이디 슈타이덴과 했던 대화를 떠올린 알폰조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영 껄끄럽군.’

그나저나 지금의 상황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상의를 풀어헤치고 메닝엔 공작과 마주앉아 있다니.

그것도 단둘이.

‘민망하게.’

슬쩍.

한쪽 손으로 가슴을 여민 알폰조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 * *

그렇게 마차는 한참을 달렸다.

어둠이 내려앉고, 고요한 가운데 로베르트는 생각에 잠겼다.

신의 성물은 왜 세상에서 존재를 감춘 것인지. 산사태를 일으켜 그를 죽이고자 한 사람은 누구인지. 클레멘스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왜 저 자식에게 푸른빛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인지.’

온통 알 수 없는 일뿐이로군. 로베르트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실 생각해 보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황실의 유력한 후계자가 비록 랜덤이지만 그의 말대로 움직인다니.

이렇게 되면 알폰조가 황제가 되는 것이 그에게는 유리한 상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심기가 영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라모나와 나의 특별한 인연의 끈이라고 여겼건만.’

그녀와 자신만의 긴밀한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이다. 근데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이 하필이면 저 근육 바보라니.

“젠장.”

빌어먹을. 로베르트는 욕설을 퍼붓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 넘겼다.

아무튼 지금의 정황으로 보아서는 소위 ‘과거의 꿈’이라 말하는 것이 신의 성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거의 확실해 보였다.

‘정말 내가 시간을 돌린 것이라면…….’

그래서 푸른빛 또한 회귀자들에 한해서만 나타나는 걸까?

‘나의 의지가 닿았기 때문에?’

그렇다면 혹시 알폰조 이외의 사람에게도 가능한 것일까. 로베르트가 가느다란 눈초리로 푸른빛이 감도는 손목을 내려다보던 때였다.

“생각은 좀 정리했나, 공작?”

잠든 줄 알았던 알폰조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

“베르나딘 말일세.”

또 자신을 지지하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가. 헛웃음을 친 로베르트가 대답했다.

“나를 도와준 건 고맙지만, 이런 곳에서 쉽게 이야기할 건은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대답에 알폰조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증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나?”

“그 증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이내 그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벼락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3황자 전하가 약속하신 증거, 제가 대신 찾아 드리죠.>

‘……라모나.’

로베르트는 처음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입에 담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꿈속에서 요하네스가 황제에 올랐죠. 지금부터 1년 후 당신은 그에 의해 죽고, 저 또한 몇 년 후에 그의 손에 죽었죠. 그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요약하자면 그래요.>

“2황자.”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쪽의 ‘꿈’에서 라모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지?”

그의 질문에 알폰조의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로베르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과거의 꿈 이야기를 처음으로 털어놓던 그 순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야 한다는 사실을.

* * *

“아가씨, 짐은 거의 다 챙겼어요.”

수도에 다녀오겠다는 라모나의 말에 티아는 군말 없이 재빠르게 짐을 꾸렸다.

“고마워, 티아.”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할 일인걸요.”

우쭐한 얼굴로 가슴을 탕탕 치는 티아를 보며 라모나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바네사 황녀를 만나러 가는 것은 여전히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요하네스를 두려워하다가 놓친 일들이 너무 많아. 이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어.’

뼈아픈 실책을 떠올린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야 푸른빛 덕분에 로베르트의 생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그 다음번에는? 푸른빛 하나만 믿고 손 놓고 기다릴 것인가?

결국 요하네스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지난 생과 다를 바 없는 신세라는 소리였다.

‘또 두려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분명 지난 생 바네사 황녀도 요하네스에게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라모나는 그렇다면 그녀 또한 같은 뜻을 가졌을 것이라 예상했다.

다만 한 가지. 황궁 무도회에서 그녀가 라모나를 이용해 요하네스를 떠보려 하던 것은 영 마음에 걸렸다.

‘약혼 일로 앙금이 남은 건가…….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뭔가 더 확실해지겠지.’

굳은 결심을 한 라모나가 마차에 올랐다.

라모나와 티아가 탄 마차가 레헨트 땅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히이이잉!

마차의 소음을 뚫고 멀리서 희미하게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깜짝 놀란 마부가 말을 멈춰 세웠다.

“윽.”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라모나가 짧은 신음과 함께 마차 벽을 짚었다.

함께 휘청한 티아가 황급히 라모나의 팔을 붙들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밖에서는 깜짝 놀란 마부가 외쳤다.

“남작님?”

남작?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몰튼 남작이 다급히 마차 문을 두드렸다.

“레이디, 레이디! 큰일이 났습니다.”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심상찮은 예감에 라모나가 마차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남작.”

“헉, 허억. 막사 안의 환자들이 이상합니다.”

“뭐?”

“그, 헉, 그 물을 마셨을 뿐인데…….”

남작은 숨을 고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라모나는 황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일단 레헨트로 되돌아가도록 하지.”

급한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라모나가 몰튼 남작의 말에 올라타던 때였다.

“아가씨!”

티아가 비명처럼 라모나를 불렀다.

순간 몰튼 남작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동시에.

휙.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날아들었다.

* * *

황궁. 데미안의 보고에 요하네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메닝엔 공작이 납치를 당해?”

그의 푸른 눈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다시 말해 보도록.”

“메닝엔 공작이 산사태로 인해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메닝엔 공작가의 사병들이 그를 찾았으나 다시 놓쳤다고 합니다.”

“무슨 그런…….”

요하네스가 드물게 동요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즉사가 아니라니.”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이내 손을 휘저어 데미안을 내보냈다.

“나가 보도록.”

“예.”

고개를 꾸벅 숙인 데미안이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요하네스는 매끄러운 마호가니 책상 표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메닝엔 공작이 목숨을 구했다니. 사고가 난 지점에서 공작이 즉사했던 지난 생과는 다른 흐름이었다.

“시기가 문제였나. 아니면…….”

요하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난 생, 메닝엔 공작은 지금으로부터 1년 후에 죽었다.

물론 그 모든 일은 요하네스의 그림이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 불나방처럼 달려든 에이드런과 뷔나우 백작 덕에 일은 수월했다.

그러나.

“사람이 문제였나.”

이번 생은 달랐다.

이건 요하네스가 꾸민 일이 아니었다.

‘멍청하군.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작의 죽음을 확인했어야지.’

범인을 짐작한 그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떠올랐다.

‘알폰조가 수도를 비웠다고 했던가.’

지난 생의 기억을 되찾으며, 그는 라모나가 메닝엔 공작에게 무엇을 대가로 약속했는지 알아차렸다.

요하네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음이 아프구나, 라모나. 네 칼끝이 나를 겨눌 줄이야.”

쯧. 혀를 한번 찬 그가 문밖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데미안.”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데미안이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처리할 사람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명을 내려 주십시오.”

요하네스는 생각했다.

신께서 제게 새 생명을 주셨으니 한번쯤은 너그러이 라모나를 봐줄 수도 있겠다고.

그러나.

‘라모나, 과거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요하네스가 덧붙였다.

“수도에 돌기 시작한 전염병. 그게 바로 레헨트에서 시작되었다는 소문을 퍼트리도록.”

그의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