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로베르트의 납치 소식을 전해 들은 로지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일단 진정해요, 라모나.”
라모나의 어깨를 붙든 그녀는 단호하게 조언했다.
“어찌 됐든 라모나에게는 공작 각하가 살아 있다고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 거잖아요, 맞죠?”
푸른빛을 떠올린 라모나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당장 이거나 생각하자고요.”
톡.
로지나가 책상 위에 올려 둔 바네사의 편지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라모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로지나. 나는 이 편지가 솔직히 수상해요.”
“흐응, 어떤 점이요?”
“지난번에는 황녀 전하께서 분명 로베르트를 찾는 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처럼 말했거든요.”
“하지만 황녀 전하께서도 각하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마음이 바뀌셨을 수도 있지 않나요?”
로지나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라모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지나는 생각에 잠긴 라모나에게 찬물을 한 잔 건넸다.
“좀 괜찮아요?”
“덕분에요.”
라모나의 대답에 피식 웃은 로지나가 중얼거렸다.
“참 이해가 안 가.”
뭐가 이해가 안 간다는 거지? 라모나가 그녀를 쳐다보자 로지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왜 공작 각하와 사랑에 빠진 거야.”
“그야…….”
‘진짜 왜지?’
미쳐 버린 주둥이. 변태 또라이. 제국 최고의 재수 없는 남자. 하지만.
<내 사랑? 당신의 그이입니다.>
그 점마저 다정하게 느껴지는 마법 같은 남자.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찌르르 떨렸다.
보고 싶다. 울컥하고 올라오려는 눈물을 감추며 라모나가 말을 이었다.
“……잘생겼잖아요.”
“세상에, 라모나!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에요.”
“성격도 그만하면…….”
괜찮다고 하려던 라모나의 머릿속에 로베르트의 온갖 망언들이 떠올랐다.
라모나가 말을 잇지 못하자 로지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털썩 라모나의 옆에 주저앉은 그녀가 조심스레 권했다.
“라모나. 고민된다면 일단 황녀 전하를 한번 만나 뵙고 결정하는 건 어때요?”
돕는 이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기는 했다.
라모나는 껄끄러운 기색을 애써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어쨌든 바녀사 황녀 또한 회귀자이고, 자신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산 사람이었다.
‘이 일뿐만이 아니라 요하네스를 대적하는 데에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불안한 이 기분은 뭘까.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 * *
벤트하임 공작저.
까드득.
낮에 오셀튼 백작저에서 받은 수모를 떠올린 미카엘라가 이를 악물었다.
‘그 바텐베르크 계집애.’
어쩜 그리 교양도, 예의도 없는지. 후작가라는 배경 하나 믿고 날뛰는 꼴이 마치 망나니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비 자리를 놓치더니 라모나와 친하게 구는 속셈도 너무나 뻔했다. 자신의 속을 긁어 두기 위해서인 게 분명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날뛰나 보자. 잘근잘근 밟아 주마.’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미카엘라의 살벌한 기세에 머리카락을 빗겨 주던 하녀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다행히 혼나지 않은 것을 보니 머리를 아프게 빗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한숨을 돌린 하녀에게 미카엘라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라모나 말이야.”
“예, 아가씨.”
“대체 어쩔 작정일까?”
“그러게 말이에요. 아가씨께서 얼마나 챙겨 주셨는데 감히 아가씨를 배신하더니 꼴좋게 됐어요.”
하녀의 이야기에 미카엘라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우아하게 손을 내저었다.
“너무 그러지는 마. 가진 게 몸밖에 없으니 어쩌겠어.”
“하긴 그렇긴 해요. 우리 아가씨는 참 마음씨도 넓으시다니까.”
하녀의 너스레에 미카엘라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흐음,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제 라모나에게 흥미가 없으신 것 같았는데…….’
그래도 라모나를 황태자의 정부로 끌어들여야 하는 걸까?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분명 고작 그 계집애에게는 영광스러운 자린데. 그걸 모르고 수습하기도 어려운 일을 벌인 라모나를 떠올리며 미카엘라가 혀를 끌끌 찼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이디 애커만이 라모나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지만, 영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레헨트에 다녀오자마자 별일 없다는 말만 남기고 아프다며 집에 틀어박힌 점도 그러했다.
‘괘씸하게.’
미카엘라가 싸늘한 얼굴로 혀를 찼다.
“쯧, 그래도 어쩌겠니.”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난 정을 봐서라도 내가 용서해 주는 수밖에.”
요아힘 페브룩.
멍청한 라모나의 전 약혼자를 떠올린 미카엘라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지금 라모나가 너무 힘든 상황에 처했잖아, 그렇지?”
* * *
“얼마나 더 가야 하지, 2황자?”
“내 이름은 2황자가 아닌데, 공작.”
알폰조의 대답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이름도 공작이 아닌데, 2황자.”
“그렇군.”
로베르트의 반격에도 알폰조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름을 부를 만큼 다정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이게 무슨……!”
이래서 이 근육 바보가 싫다니까. 알폰조에게 꼼짝없이 휘말린 로베르트가 헛웃음을 쳤다.
그래도 덕분에 잡생각은 좀 덜 수 있었다. 라모나에게 암살자가 갔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한 나날이었으니까.
가슴이 또다시 철렁 내려앉은 로베르트가 손목을 향해 중얼거렸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는 나와 무사히 만난다.”
그런 로베르트를 바라보던 알폰조가 물었다.
“그건 뭐, 의식 같은 건가?”
“자네가 알 필요 없네.”
“흠.”
로베르트의 날카로운 대답에 알폰조가 머리를 긁었다. 이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라모나도 자네가 그렇게 모자라게 구는 것을 알고 있나, 공작?”
까드득.
알폰조의 도발에 로베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이내 그가 싱긋 예쁘게 웃으며 되물었다.
“나의 사랑, 나의 천사. 우리, 라모나 말이지?”
알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작. 우리 라모나.”
‘우리’라는 단어에 로베르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로베르트의 경계에 알폰조가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 그가 저럴수록 더 놀리고 싶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뭐랄까.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일이라면 저렇게 돌변하는 것이, 뭔가…….’
신경 쓰이는군.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생각에 알폰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
<로베르트 없이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요.>
단호하게 말하던 라모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역시 공작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다시 요하네스의 정부가 되겠다고 말할 수 있다니. 지난 생 그가 보았던 라모나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갑자기 입 안이 썼다. 미간을 찡그린 알폰조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회귀 후에 나를 찾아왔다면…….’
그럼 나를 위해서 그런 결정을 해 주었으려나.
“후.”
알폰조가 한숨을 삼켰다.
힐끔, 그런 알폰조의 얼굴을 살핀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건…… 라모나와 나를 연결하는 끈 같은 거야.”
“끈?”
“인연의 표시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 로베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속이 뒤틀린 알폰조가 거칠게 나무 넝쿨을 잡아 뜯자 로베르트가 그를 나무랐다.
“그러다 아주 나무라도 뽑겠군. 적당히 하지 그래.”
그때였다.
쑥.
“……!”
“……!”
마치 마법처럼, 진짜로 나무가 뽑혔다.
놀란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당황한 알폰조가 얼른 나무를 집어 던졌다.
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나무를 바라보며 로베르트는 경악했다.
“맙소사, 근육 바보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
말하다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눈이 커졌다. 그가 세상이 다 무너진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의아해진 알폰조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윽고 자신의 손목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한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푸른빛?”
로베르트는 이보다 더 기분 나쁠 수는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신이시여.”
이게 어찌 된 상황일까. 고민하던 알폰조는 아까 로베르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가 충격 받은 표정으로 로베르트를 향해 물었다.
“인연의…… 표시……?”
“……!”
로베르트는 더 충격 받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발! 제발 좀! 제발 그 입 좀! 제발!”
분노한 로베르트가 허공을 향해 고함치듯 외쳤다. 얼핏 듣자 하니 라모나에 대한 사과도 섞여 있었다.
도대체 산에서 위험하게 왜 저러는 건지.
‘뭐 그녀에게 잘못한 거라도 있는 모양이로군.’
알폰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