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메닝엔 공작저.
“각하!”
로베르트의 흔적을 발견한 기사가 급하게 클레멘스를 찾아왔다.
심상찮은 예감에 클레멘스의 이마가 꿈틀했다.
“보고하도록.”
“공작 각하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다만…….”
말끝을 흐린 기사는 곤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공작 각하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세 명의 병사 중 두 명이 사망, 한 명이 생존했습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누군가가 그를 기절시키고 공작 각하를 납치해 갔다고 합니다.”
기사는 조심스레 품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현장에서 발견한 공작 각하의 권총입니다.”
쾅!
격분한 클레멘스가 주먹을 꽉 쥐고 책상을 내리쳤다.
그때였다.
“아버지.”
에이드런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그가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클레멘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돌아가라, 에이드런.”
“제게 사병을 움직일 권한을 주십시오. 제가 로베르트를 찾아오겠습니다.”
“네까짓 게?”
클레멘스의 멸시에 에이드런의 얼굴이 굳었다.
이내 그가 비통하다는 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형님에 이어 조카까지 이렇게 잃을 수는 없습니다. 직접 병사를 움직여 배후를 찾아내, 감히 메닝엔의 이름을 더럽힌 그 자식들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두겠습니다!”
정말 메닝엔의 이름을 더럽힌 자는 누구인가. 끔찍하리만큼 천연덕스러운 에이드런의 연기에 클레멘스는 얼굴에서 경멸을 감추지 못했다.
클레멘스는 에이드런이 이번 일에도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남은 아들을 지키려던 자신의 선택이 손주를 죽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클레멘스는 절망했다.
“……돌아가.”
그가 에이드런에게서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버지!”
클레멘스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에이드런은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바로 그날부터, 로베르트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수도에 퍼지기 시작했다.
* * *
메닝엔 공작이 영지에 다녀오는 길에 산사태를 만나 실종되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수도를 점령했다.
라모나가 서둘러 레헨트로 내려갔다는 소식도 함께였다. 사교 시즌을 뒤흔들기에는 너무 흉흉한 소식이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그녀는 메닝엔 공작의 권력과 재산을 탐냈던 게 분명해. 사람들은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이 상황에 가장 신이 난 것은 단연 미카엘라였다.
오셀튼가의 티파티.
자신의 추종자들을 한껏 거느리고 티파티에 참여한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라모나가 그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어요.”
“어머,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레이디 벤트하임. 정말이지 마음씨가 너무 착하시다니까.”
레이디 정말이지, 레이디 블레나가 호들갑을 떨며 미카엘라를 위로했다.
미카엘라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기 시작했다.
“집안일에, 약혼자일까지. 라모나가 지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제가 도움이 되고 싶은데.”
웃기네. 멜리사는 팔짱을 낀 채 그런 미카엘라를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저 움찔거리는 입꼬리나 감출 것이지.’
멜리사의 싸늘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레이디 블레나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페브룩 영식이 다시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와 약혼하겠다면서 아이젠부르크 자작가를 찾고 있다면서요?”
“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미카엘라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와우.’
표정 관리가 안 된 멜리사가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티파티의 호스트인 도리스는 안절부절못하며 멜리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나마 레이디 애커만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그녀까지 함께였다면 저 ‘나는 아주 착합니다. 마음도 아주 여린걸요!’ 식의 대화가 끝도 없이 계속되었을 테니까.
‘왜 저러고 사는 거야, 대체.’
멜리사가 헛웃음을 치며 찻잔을 홀짝일 때였다.
“그래도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는 좋겠네요.”
레이디 블레나가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새침하게 덧붙였다.
“공작 각하에, 2황자 전하에, 페브룩 영식에. 남자가 끊이지를 않으니 먹고살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될 거 아니에요.”
그 순간.
퍽.
울컥한 멜리사가 저도 모르게 미카엘라의 얼굴에 연어 카나페를 집어 던졌다.
“히익.”
경악한 도리스가 입을 틀어막았다.
싸늘한 침묵이 흐르고, 멜리사가 성의 없게 놀란 척을 했다.
“어머, 실수.”
실수가 맞기는 했다. 레이디 블레나의 얼굴에 던진다는 것이 빗나간 탓에 미카엘라를 다 먹은 샌드위치 접시 같은 꼴로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사과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힘이 빠진 걸 보니 집에 가야겠네요. 그럼 이만.”
“레이디 바텐베르크!”
어처구니가 없었던 레이디 블레나가 큰소리를 쳤다.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멜리사를 바라본 도리스가 황급히 손수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어머, 레이디 벤트하임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미카엘라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카엘라에게 쪼르르 다가간 도리스는 손수건에 물을 묻히려는 듯 물 잔을 들었다. 그리고.
촥!
“어머! 어떡해!”
미카엘라의 얼굴을 향해 잔을 휘둘렀다. 울상이 된 도리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머, 어머어머. 손수건에 물을 묻힌다는 게 그만. 어쩌면 좋아요! 일단 일어나세요. 욕실로 안내해 드릴게요.”
귀까지 빨개진 도리스가 호들갑스레 미카엘라를 안내했다.
누가 봐도 실수 같은 모습이었지만 멜리사는 알아차렸다.
‘도리스도 열받았나 보네.’
저 소심한 사람이 저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하여간 웃겨.’
피식 웃은 멜리사가 자리를 떴다.
사정을 모르는 오셀튼 백작 부인만이 엉망이 된 티파티에 뒷목을 잡고 있었다.
* * *
레헨트. 다행히 전염병은 이전 생과 달리 미미하게 퍼진 상태였다.
공용 우물 하나로 식수를 해결하던 빈민가와 달리, 중심 거리에는 오염된 우물이 아니어도 깨끗한 물을 얻을 방법이 많은 덕분이었다.
지난번 전염병이 돈다며 빈민가를 봉쇄했던 탓에 바짝 긴장한 영지 대리, 몰튼 남작이 환자가 생기는 대로 격리한 덕도 컸다.
‘이 정도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겠어.’
라모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남아있었다.
라모나가 환자들이 격리된 막사로 들어가려던 그때,
“죄송하지만, 레이디. 저희는 메닝엔 공작 각하의 명을 따릅니다.”
몰튼 남작이 그녀를 막아섰다.
비장한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이미 클레멘스가 손을 쓴 모양이었다.
라모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말하는 공작 각하가 누구이지.”
아직 로베르트의 소식을 듣지 못한 몰튼 남작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라모나는 말을 이었다.
“나 또한 로베르트의 부탁을 따르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이야. 환자들만 보고 갈 건데 문제가 있나?”
라모나는 몰튼 남작에게 그 무엇보다 로베르트의 명이 우선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남작. 로베르트가 분명 빈민가를 봉쇄하고 전염병을 경계하라 말했을 텐데?”
“……예.”
몰튼 남작은 탐탁지 않은 기색을 지우지는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라모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어찌 보면 오히려 양도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게 다행인가.’
라모나에게 레헨트가 모두 넘어왔다면 빈민가를 봉쇄한 메닝엔 공작가의 사병들은 자리를 떴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각성제가 반출되는 것을 막기는 어려웠겠지.’
라모나는 한숨을 삼켰다.
‘후. 일단 그건 나중에. 지금은 전염병을 막아야 해.’
지난 생, 제국을 죽음의 그림자로 몰아넣었던 병의 주된 증상은 끊임없는 설사였다.
사람들이 죽어 난 것은 바로 그에서 비롯된 탈수 증상 때문이었다.
병의 치료법은 허무할 만큼 간단했다. 바로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계속해서 물을 공급해 주는 것이었다.
다만 이 간단한 방법을 실행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비싼 설탕과 소금을 물에 풀어야 했으니까.’
몸 안의 농도를 맞춰 주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던 의사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이 정도 비용은 아직 내 선에서 감당 가능해.’
다행히도 잘나디잘난 메닝엔 공작의 목숨값은 생각보다 제법 되었다.
‘목숨값이라.’
왜 하필 그런 단어를 썼을까. 쓴웃음을 삼킨 라모나는 커다란 물통을 설치하도록 심부름꾼에게 명했다.
“여기에 물통을 설치하도록 해. 목마른 사람들이 잔뜩 마실 수 있도록.”
호기심에 물을 마셔 본 몰튼 남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윽, 레이디. 물맛이 조금…….”
“어머, 문제라도 있는가?”
라모나는 태연한 얼굴로 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티아가 얼른 물을 한 잔 따라 라모나에게 건넸다.
“여기요, 아가씨.”
물을 한 모금 홀짝인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수도에서 먹던 바로 그 물맛인데?”
수도라는 말에 사람들의 귀가 쫑긋하는 것이 느껴졌다. 눈치 빠른 티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
“맞아요, 아가씨. 수도에서 아가씨께서 드시던 것처럼 그 귀한 설탕을 풀었는걸요!”
역시 티아. 라모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차피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 그냥 많이 마시게 만드는 편이 좋겠지.’
확실히 설탕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 물이 귀족들이 마시는 귀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두고, 라모나는 환자들을 모아 둔 막사를 떠났다.
라모나가 바이스카스텔에 도착했을 때는 두 가지 소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뭐? 로베르트가?”
로베르트가 납치된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고, 둘째는.
<자네의 말을 생각해 봤네. 내 생각이 짧았어. 그를 찾는 일을 돕도록 하지.>
바로 바네사 황녀의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