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거대한 무언가의 정체는 알폰조였다. 로베르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2황자?”
“그래.”
“아니, 부른 게 아닌데.”
“그것도 알고 있다.”
태연한 알폰조의 대답에 헛웃음을 친 로베르트가 물었다.
“당신이 왜 이곳에?”
“재수 없는 존댓말보다 지금이 훨씬 낫군, 공작.”
툭.
알폰조가 로베르트에게 물병을 던져 주었다. 미심쩍은 얼굴로 물병을 받아 든 로베르트가 물을 마실 때였다.
“짜릿하군.”
“푸흡.”
알폰조의 입에서 나온 말에 로베르트가 분무기처럼 물을 뿜어냈다.
“미친 건가, 2황자?”
“그 잘난 공작이 거지꼴을 하고 있으니 재밌지 않나.”
알폰조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자 로베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바탕 신경전이 끝나고, 시신들을 확인한 로베르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메닝엔 공작가의 사병이군. 빌어먹을.”
암살자라 생각했던 이의 얼굴을 살핀 로베르트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힐끔. 자괴감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살핀 알폰조가 입을 열었다.
“죽지는 않았어. 급소를 때려서 기절시켰을 뿐이지.”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로베르트의 총을 맞은 이들의 소지품에서도 메닝엔의 징표가 발견되었다.
로베르트가 그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과정을 묵묵히 바라보던 알폰조가 입을 열었다.
“공작.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기왕 들린 김에 이야기하는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더군.”
“뭐?”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에게 보낸 암살자의 배후 말이야.”
대체 언제 암살자가 배후를 불었단 말인가. 알폰조의 말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툭툭.
로베르트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린 알폰조가 입을 열었다.
“총성이 들렸으니 금방 공작의 위치를 들킬 거야. 빨리 이동해야 하네. 원한다면 자네를 레헨트까지 데려다주도록 하지.”
충격에 빠진 로베르트가 아무 말도 없자 알폰조가 그를 도발했다.
“아니면 나 홀로 라모나를 만나러 가는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그가 라모나의 이름을 입에 담자 로베르트의 표정이 바뀌었다.
알폰조는 웃음을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서둘러야겠군. 라모나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까드득.
이를 악문 로베르트가 결국 알폰조의 뒤를 따랐다.
“기절한 이는 어떻게 하기를 바라나, 공작.”
알폰조의 질문에 로베르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한 발이 남은 총을 바닥에 던졌다.
“그대로 두고 가지.”
로베르트의 의도를 알아차린 알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공작.”
“뭐지.”
“도대체 손목에 그건 뭔가.”
알폰조의 말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지?”
“그…… 푸른…… 빛? 말일세.”
이게 알폰조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하다니.
“젠장.”
도대체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로베르트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알폰조는 태연한 얼굴로 로베르트의 화를 돋궜다.
“그것의 이름이 젠장인가?”
“헛소리 좀 그만해.”
“아니면 헛소리?”
“……이런 미친.”
로베르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갑자기 자신만 보면 제발 그만하라고 하는 라모나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급격히 우울해진 로베르트의 기색에 알폰조는 화제를 돌렸다.
“흠흠, 아직 자네가 실종된 소식이 전해지지는 않았어.”
“다행이군.”
“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퍼뜨려 줄 수는 있지.”
알폰조의 말에 로베르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못 본 사이에 정치적 능력을 좀 키워 온 것 같군, 2황자. 결단을 내린 것인가?”
이번에는 알폰조가 입을 다물었다. 피식 웃은 로베르트가 말을 이었다.
“그래 봤자 나는 베르나딘의 손을 들 거야. 이 사실은 변치 않지.”
알폰조가 묵묵히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마리안느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종종 만나기도 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리안느는 로베르트를 양육할 권리를 잃었고, 마리안느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레이디 슈타이덴이 메닝엔이라면 이를 갈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은 다시 남이 되었다.
아니, 서로를 묘하게 껄끄럽게 여기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안타까운 일이군, 메닝엔 공작.”
피식 웃은 알폰조가 덧붙였다.
“라모나는 나를 지지하기로 했는데.”
“뭐?”
그가 라모나를 친근하게 부르자 분노한 로베르트가 큰소리로 되물었다. 알폰조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약혼자의 정치적 성향이 다를 수 있는 일이니까.”
그 순간 로베르트는 정말, 정말이지 알폰조가 싫었다.
* * *
“쿡.”
황태자 궁의 침실. 자신을 붙잡던 바네사의 얼굴을 떠올린 요하네스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황실 무도회 전날, 그에게 이브리트어로 쓰인 편지가 다시 도착했다.
<그녀와 이야기할 기회.>
건방진 편지에 요하네스는 헛웃음을 쳤다.
무도회 당일. 노골적으로 그를 피하는 라모나의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그에게 시종이 짧은 편지를 내밀었다.
<2층 파우더 룸. 지금.>
역시 이브리트어로 된 편지였다.
그렇게 라모나를 마주쳤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던 그날 밤. 요하네스는 아주 기묘하고도 긴 꿈을 꿨다.
그의 꿈은 게더른 백작가의 파티에서 라모나를 만나던 장면부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결국 그녀를 손에 넣고, 메닝엔 공작을 처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가 그렇게 갈망하던 라모나는 그의 곁에서 점점 시들어 갔다.
불이 다 꺼진 그녀의 눈동자를 보는 것은 즐거웠지만 곧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를 향한 그의 흥미가 모두 식어 버렸을 때, 미카엘라는 라모나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며 소동을 벌였다.
미카엘라의 연극에 어울려 준 대가로 요하네스는 벤트하임의 광산을 손에 넣었고, 자신의 수하 사무엘 크뤼거를 차기 벤트하임 공작으로 확정 지었다.
정부 하나의 목숨으로 제법 괜찮은 장사를 한 셈이었다.
그러나 라모나가 죽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라모나의 죽음 이후 미카엘라는 제동 장치가 고장 난 마차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번거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사실은 그의 평생에 그렇게 특별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 오직 라모나 한 명뿐이라는 점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미카엘라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다 전하가 만드신 일입니다.>
미카엘라가 그런 말을 하던 순간 요하네스는 폭소했다. 그녀를 죽이고자 이를 갈던 미카엘라가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요하네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황후, 그녀가 황후를 살해하고자 했다며 소동을 부린 것이 나였던가?>
<제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저를 몰아세우셨잖아요! 신이시여…… 어떻게, 어떻게 제 친구를!>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하는지는 미처 몰랐군. 뻔뻔하기도 하지.>
경멸이 가득 어린 그의 말에 미카엘라의 눈이 커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요하네스의 마음 속 무언가가 꿈틀했다.
<한 가지를 더 알려 줄까, 황후?>
그의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내가 그대와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누구를 생각했는지 알고 있나? 그대의 머리카락이 갈색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아드득, 미카엘라가 이를 갈았다. 요하네스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차라리 어린 시절에 그대와 라모나가 바뀌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아아악!>
눈이 뒤집힌 미카엘라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그녀가 식사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나이프를 쥐어 들고는 요하네스에게 달려들었다.
요하네스의 목숨을 앗아 가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도였다.
그 일로 미카엘라는 감옥에 갇혔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요하네스는 그와 동시에 벤트하임 공작을 처리했다. 그리고 자신의 수하이던 사무엘 크뤼거를 새로운 벤트하임 공작으로 임명했다.
메닝엔과 벤트하임, 제국의 두 기둥은 그의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각성제 사태로 힘을 잃은 서부군은 오합지졸이 되었다.
덕분에 요하네스의 권력은 커졌지만 제국의 국력은 약해졌다.
호시탐탐 레오벤 제국을 노리던 이웃한 공화국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고, 결국 요하네스는 제국을 침략한 공화국의 손에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을 돌아오게 되다니 이것이야말로.
‘신이 내게 다시 주신 기회가 아닌가.’
요하네스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는 수도로 끌고 오라 명한 평민 소년을 떠올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하긴, 뭐 이름 따위를 알아 둘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라모나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살려 두었을 뿐인 버러지인 것을.
피식. 요하네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과거의 기억을 되찾기 전 그는 제게 도착한 편지를 백 프로 신뢰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 편지는 그가 라모나의 생각을 파악하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
영리한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왜 고작 평민을 만나러 움직였을까. 그것도 마치 그 평민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답은 하나뿐이었다.
‘라모나, 너는.’
이번 생을 과거의 참회로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착하기도 하지. 요하네스의 푸른 눈에 번들거리는 빛이 맴돌았다. 이내 그가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 라모나. 네가 그렇게 나와야지.”
중얼거린 그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환희가 떠올랐다.
“그래야 나도 지루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