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복숭아는 맛있었고, 로지나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분명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1시간도 안 되는 그 짧은 휴식 사이에도 라모나의 가슴은 몇 번이고 내려앉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되새겼다.
‘괜찮아.’
로베르트는 살아 있어. 그는 죽지 않았어.
그가 살아 있다. 그 사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졌다.
복숭아로 대신한 조촐한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똑똑.
“라모나. 한잔하죠?”
로지나가 샴페인을 한 병 들고 라모나를 찾아왔다.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힐끔 라모나의 눈치를 살핀 티아가 요령껏 자리를 피했다.
“아가씨. 저는 내일 아침에 쓸 세숫물을 좀 떠올게요.”
“그래.”
티아가 자리를 비우고, 한결 편안한 차림의 로지나가 라모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쪼르륵.
술을 따른 그녀가 물었다.
“술 좀 해요?”
“당연한 걸 묻네요.”
“오호, 아이젠부르크의 자부심인가요? 멋지네요.”
싱긋 웃은 로지나가 라모나에게 샴페인 잔을 건넸다. 잠시 샴페인을 홀짝거리던 라모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밖은 어때요? 지금쯤이면 로베르트의 사고 소식이 전해졌겠네요.”
“아뇨. 선대 공작 각하께서 막아 두셨어요. 물론 알 만한 사람들이야 다 알겠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이야기가 나온 적은 없어요.”
“그런가요.”
고개를 끄덕인 라모나는 묵묵히 생각에 빠졌다. 벌써 잔을 비운 로지나가 두 번째 잔을 따르며 말했다.
“사실 이해가 안 가서요.”
“어떤 점이요?”
“약이 필요 없다니. 너무 안일한 것 아닌가요?”
“아아.”
지난 생, 레헨트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전염병의 치료 방법을 떠올린 라모나가 작게 웃으며 되물었다.
“궁금한 건 그뿐인가요?”
“어머, 제 음습한 속내를 들켰나 보네요.”
어깨를 으쓱한 로지나가 솔직한 질문을 꺼내 놓았다.
“평민들을 치료하는데 설탕과 소금을 쓰겠다니, 괜찮은 거 맞아요?”
로지나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붙여 보였다.
“이쪽 말이에요. 약초가 오히려 더 싸게 먹힐 수도 있어요. 미안하지만 그 예산을 전부 제가 대 줄 수도 없고요.”
“당연하죠, 물건값은 치룰 거예요.”
단호한 로지나의 선언에 라모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한 라모나의 태도에 오히려 조바심이 난 로지나가 물었다.
“레헨트의 재정을 쓸 생각인가요?”
“아뇨, 그건 아마 어려울 거예요. 아직 레헨트의 양도 절차가 다 이루어지지 않아서요.”
“……선대 공작 각하 때문인가 보군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로지나가 물었다.
“그럼 어디서 돈을 만들려는 거예요?”
“음.”
라모나가 손을 들어 사파이어 반지를 보여 주었다.
“메닝엔 공작의 목숨값으로?”
라모나가 로베르트가 선물한 보석들을 처분할 계획이라는 것을 눈치챈 로지나의 눈이 커졌다. 메닝엔 공작의 목숨값이라는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내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해가 안 가네요. 평민들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리암과 만나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로지나가 말끝을 흐리자 라모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로지나가 저를 구해 준 이유와 같아요.”
“예?”
“마음의 빚이죠.”
의미심장한 라모나의 대답에 로지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내 라모나가 남은 잔을 비웠다.
“설탕과 소금은 언제까지 확보가 가능할까요?”
“필요한 양이 얼마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번 주 내로 최대한 확보해 볼게요.”
“좋네요. 바로 레헨트로 보내 주세요.”
“……레헨트로 떠날 생각이에요?”
로지나의 질문에 라모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베르트가 위험하다고 여기서 발만 구르고 있을 수는 없다.
라모나는 라모나의 자리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고, 지금 그녀의 자리는 바로 레헨트였다.
* * *
크레모라 백작저.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자 전하.”
라모나가 레헨트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한 로지나가 고개를 숙여 베르나딘에게 인사하고 문밖을 나섰다. 물론 그녀가 라모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은 비밀로 한 채였다.
로지나가 떠나고, 베르나딘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젠부르크의 영지가 사라지니 발등에 불이 떨어졌나 보군.”
로베르트가 선물한 보석들까지 몰래 처분하고 있다니. 베르나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나딘은 라모나가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속물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로베르트가 실종되자마자…….’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는 부족함 없는 삶을 평생 살아 온 그로서는 라모나의 행동이 못마땅하기만 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자신을 찾은 아들이 로베르트의 소식에만 집중하자,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베르나딘, 네 약혼 일 말이다.”
“어머니,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메닝엔 공작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 전에 빨리 네 세력을 다져 놔야 한다. 응?”
“어머니.”
“바텐베르크 후작이 딸을 시집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데, 한번 이야기를 해 보마.”
“어머니!”
베르나딘이 큰소리를 내자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입술을 삐죽였다.
바네사는 그 모든 소동이 남의 일인 양 태연하게 찻잔을 들었다. 그녀의 생각은 베르나딘과는 조금 달랐다.
‘왜 레헨트로 갔는지 알 만하군.’
베르나딘의 짐작처럼 아이젠부르크의 영지 문제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알량한 사명감이나, 죄책감 때문이겠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바네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바네사. 약혼이라도 하지 않은 것이 어디야. 메닝엔 공작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그러게요.”
바네사의 호응에 신이 난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경망스럽게 입을 놀렸다.
“아니면 아예 결혼을 서두를 것을 그랬구나. 그랬다면 공작가의 유산이나 후계자 문제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후우.”
크레모라 백작 부인의 망언에 베르나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네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았겠네요.”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한 베르나딘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베르나딘, 베르나딘!”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바네사는 무감각한 얼굴로 그런 베르나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바네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편지를 쓸 일이 있어서요.”
베르나딘에게 정신이 팔린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 * *
늦은 밤.
“비가 오겠군.”
범상치 않은 기세의 하늘을 살핀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협곡은 벗어난 지 오래였다. 마을이 코앞이지만, 요하네스의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는 마을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분명 지금쯤이면 공작저에 소식이 들어갔을 텐데.’
이대로 쭉 걸어서 수도까지 갈 수도 없고, 메닝엔의 사람들이 자신을 하루빨리 발견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후.”
로베르트가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바스락.
고요한 가운데 나뭇잎 밟는 소리가 들렸다.
“……!”
로베르트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는 숨을 참으며 남은 총알의 개수를 헤아렸다.
로베르트는 인기척의 주인이 산짐승이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 말씀이십니까?”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말이야.”
젠장. 낯선 이의 목소리에 로베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라모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아하니 요하네스의 사람이 틀림없었다.
상대는 최소 둘. 남은 총알은 셋. 한 번에 해치우지 못하면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아, 사고가 나자마자 새 남자를 찾아서 레헨트로 떠났다면서요?”
라모나가 레헨트에? 의아했지만 로베르트는 그들이 대화하는 틈을 타 조심스레 총알을 장전했다.
하지만 그때.
“자살행위지. 레헨트에 이미 암살자를 보내 둔 것도 모르고.”
‘……뭐?’
라모나에게 암살자가 갔다는 소식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나무에서 빠져나와 그들 중 한 사람을 총으로 쐈다.
탕!
“윽!”
총을 맞은 이가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의 일행이 허겁지겁 총을 꺼내 들었다.
“꼬, 꼼짝 마!”
“다시 말해 봐.”
로베르트의 눈이 시퍼런 분노로 타올랐다.
“암살자를 보냈다고?”
“우, 움직이면 쏜다.”
하나 남은 사내의 격렬한 저항에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탕!
그가 사내의 발목을 쐈다.
“어윽, 윽!”
느껴지는 고통에 사내는 총을 놓치고 말았다.
성큼 사내에게 다가선 로베르트가 그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넘겼다. 그리고 머리에 총을 겨누며 물었다.
“누가 암살자를 보냈지?”
“으윽, 메닝엔 공작…….”
“그래, 내가 메닝엔 공작인 건 제국의 모두가 알지. 마지막으로 묻지. 누가.”
까드득.
로베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암살자를 보냈지?”
그때였다.
탕, 탕!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로베르트에게 붙잡힌 사내를 총으로 쐈다. 비명 지를 새도 없이 사내는 목숨을 잃었다.
로베르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젠장, 일행이 있었나?’
남은 총은 한 발. 실수는 곧 그의 죽음을 의미했다.
‘단숨에 해치운다.’
로베르트가 이를 악물고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총구를 겨눌 때였다.
퍽.
“윽!”
거대한 무언가에게 얻어맞은 어둠 속 암살자가 힘 한번 못 쓰고 고꾸라졌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은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하고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