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29화 (130/151)

#129화

칼로에에 도착한 로베르트는 곧장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서 마리안느의 흔적을 발견한 그는 순간 숨을 쉬지 못했다.

크레모라 백작 부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공작은 아버지와 달리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 안심이 돼. 뭐랄까, 메닝엔답잖아? 호호호.>

메닝엔답다는 말이 이렇게 수치스럽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치솟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로베르트가 마리안느의 물건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마리안느를 원망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기만하듯 그녀의 흔적을 보관해 둔 클레멘스에게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리안드로와 마리안느의 초상화를 마주한 순간.

“……!”

그는 절망하고 말았다.

로베르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차마 마리안느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던 그가 조용히 커튼으로 마리안느의 모습을 가렸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주머니에서 푸른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리안느의 로켓이었다. 마리안느의 로켓에서 시작된 푸른빛은 점점 방 안으로 퍼졌다. 그러고는 이내 창고 한쪽에 보관되어 있던 메닝엔의 가보이자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생긴 신의 성물에 닿았다.

그 순간.

“이게 무슨……!”

신의 성물은 눈이 멀 듯 강렬한 빛을 쏟아 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 *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수도로 향하는 길.

‘빌어먹을. 신의 힘은 무슨.’

로베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괜한 기대감을 품은 자신이 머저리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또다시 마리안느의 죽음이 떠오른 그가 이를 악물었다.

분노가 가라앉은 자리에 무력감이 밀려왔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이제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바네사 황녀와의 약혼 관계를 정리해야겠군. 베르나딘에게는…… 후. 당분간 요양을 가라고 권해야겠어.’

2황자 알폰조를 포섭하는 일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알폰조 또한 이미 요하네스의 늪에 빠져 있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 여자를 포섭해 볼까.’

로베르트가 벤트하임의 시녀, 요하네스의 정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를 떠올릴 때였다.

히이잉!

갑자기 말이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로베르트가 마부를 향해 외치려던 때였다.

“무슨 일이…….”

갑자기 그의 손목에서 푸른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로베르트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

쾅!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그가 탄 마차는 흙더미에 파묻혔다.

메닝엔 공작의 죽음, 그리고 회귀의 순간이었다.

Chapter. 14 과거 그리고 미래

시간을 거슬러 온 제국력 847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뾰족한 가시가 가득한 덤불을 단검으로 베어 내며 로베르트가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신의 성물을 이용해 시간을 되돌린 것이 자신이라 치자. 그렇다면 도대체 왜 당사자인 자신에게는 아무 기억이 없단 말인가.

‘하다못해 그 근육 바보도 기억하는 것을.’

하. 알폰조를 떠올린 로베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목에서 푸른빛이 또다시 널뛰었다. 뭔가 잔뜩 억울한 모습이었다.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기억 대신 이 힘을 얻은 것인가? 뭐, 특별하긴 하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왕 줄 거면 다 줄 것이지. 신이라는 존재가 이리도 속이 좁을 수 있나.”

로베르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푸른빛이 펄쩍 날뛰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었던 로베르트가 중얼거렸다.

“라모나는 건강하다. 라모나는 안전한 곳에 머무른다. 라모나는 복숭아를 먹는다.”

복숭아 맛있겠군. 로베르트가 헛웃음을 쳤다.

그 이후로도 그는 한참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숲길을 걸었다.

라모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 * *

달칵.

로지나와 라모나는 문을 닫고 들어섰다.

“또 비가 오려 하네요.”

로지나의 말에 라모나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의 상황에 비해 너무 일상적인 대화이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트가 목숨의 위협을 받았고, 그럼에도 살아 있으며, 알폰조가 그를 찾기 위해 사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산 위에서 굴린 눈 뭉치가 커다란 눈덩이가 되듯이, 지난 생을 바꾸기 위해 라모나가 한 행동들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뭐 좀 먹을래요?”

로지나가 라모나에게 무척 호의적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라모나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로지나는 그것이 로베르트의 뜻이기 때문이라 말하지만, 로지나의 태도는 분명 그 이상의 호감을 담고 있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라모나가 로브를 벗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별로 입맛이 없어서.”

“황녀 전하는 왜 만나려고 했던 거예요?”

로지나의 질문에 라모나는 질문으로 대답했다.

“레이디 클라이스트.”

“예.”

“바네사 황녀 전하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해요?”

뜬금없는 질문에 로지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고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음. 베르나딘 3황자 전하의 동생, 사교계의 주축, 숨은 권력자, 메닝엔 공작 각하의 약혼, 어머. 미안해요.”

“괜찮아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와우. 그런데 공작 각하를 노렸어요?”

로지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뢰가 가는 분은 아니에요. 뭐랄까 조금…….”

말을 고르던 로지나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찝찝해서.”

적나라한 로지나의 말에 라모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불경한 말이네요.”

“제가 좀.”

입가를 비스듬히 올린 로지나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말씀하세요.”

“이번 일의 배후로 황녀 전하를 의심하고 있는 거죠?”

“솔직히 말하자면, 맞아요.”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가 배후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베르나딘 3황자 전하 쪽에서 로베르트의 일정이 새어 나갔다고 생각해요.”

“하여간 에드윈 이 자식은…… 하. 그래서 2황자 전하를 지지하려고 하나요?”

로지나의 질문에 라모나는 어디까지 대답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다. 이내 그녀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것도 있지만. 저는 3황자 전하가 지금의 황태자를 누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없어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라모나의 의견에 동의한 로지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내 침대 모서리에 털썩 걸터앉은 로지나가 입을 열었다.

“그 평민 말이에요, 레헨트에 있는.”

“벤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요. 영 수상한 짓을 하던데…… 혹시 기밀을 알고 있나요?”

“어떤 수상한 짓을 했죠?”

“우물가에 시체를 묻더군요. 그것도 다 썩은, 아, 미안해요. 너무 비위 상하는 이야기죠.”

시체라는 말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뇨, 괜찮아요. 그대로 두었나요?”

“그럴 리가요! 당장 파내고 태웠어요.”

“훌륭하네요. 그 이후로 벤은 어떻게 됐나요?”

“납치를 당했는데…… 아직까지는 무사해요. 아!”

짝.

말하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로지나가 박수를 쳤다.

“그러고 보니 레헨트에 전염병이 도는 것 같더라고요. 내 정신 좀 봐.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깜빡했네.”

쿵.

전염병이라는 말에 라모나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또다시 시체를 우물에 묻었고, 전염병이 돈다면…… 회귀 전과 같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빈민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먹을 만한 물이 우물 하나뿐인 빈민가와 달리 레헨트 시내에는 우물 하나 정도를 막는다 해도 큰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방법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달라. 그렇게 당하지 않을 거야. 깨끗한 손목을 내려다본 라모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레이디 클라이스트. 기왕 부탁하는 김에 좀 더 할게요.”

“이제 하나라고도 안 하네요. 뭐, 좋아요.”

“소금과 설탕을 좀 많이 확보해 줄래요?”

“소금과 설탕이요? 약이 아니라?”

라모나의 부탁이 의아했던 로지나가 되물었다. 그러나 라모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은 따로 없어요.”

“네?”

“약이 중요한 병이 아니거든요.”

라모나의 말에 로지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죠?”

“로지나라고 불러 줘요.”

예상외의 조건에 라모나가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지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저도 차기 공작 부인 덕 좀 보고 싶어서요.”

당황한 라모나가 대답하지 못하자 로지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복숭아 좋아해요? 리암이 납작한 복숭아를 좀 사 왔다던데.”

“……좋아요.”

라모나가 대답하기 무섭게 갑자기 그녀의 손목에 푸른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반가웠다. 분명 반갑기는 한데.

‘아니…….’

이 남자는 대체 뭔 말을 이렇게 많이 하고 다니는 거야?

혹시나 또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된 라모나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