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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28화 (129/151)

#128화

회귀 전. 제국력 848년.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 부하의 보고에 로베르트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뭐? 다시 말해 보도록.”

“3황자 전하께서 서부 경계를 맡겠다고 황제 폐하께 말씀드렸다 합니다.”

“……미치겠군. 도대체 베르나딘이 서부를 왜.”

쾅!

책상을 세게 내려친 로베르트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가뜩이나 약혼녀인 바네사를 위해 크레모라 백작저를 다녀온 참이었다.

<아무래도 아쉽긴 하지. 공작도 알다시피 외가의 힘도 무시 못 하니 말이야.>

로베르트를 볼 때마다 크레모라 백작 부인은 신이 나서 마리안느의 욕을 해 대곤 했다.

레이디 슈타이덴에 대한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분명했기에, 로베르트는 그녀의 험담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래도 공작은 아버지와 달리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 안심이 돼. 뭐랄까, 메닝엔답잖아? 호호호.>

크레모라 백작 부인이 로베르트의 칭찬이랍시고 리안드로를 걸고 넘어선 말이 그의 속을 뒤집어 둔 후였다.

‘그 빌어먹을 여자.’

이럴 때면, 마리안느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리안느를 향한 원망이 치솟곤 했다. 피곤이 쌓인 로베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바네사 황녀는 잠자코 그녀의 옆에서 차를 즐겼다.

마치 로베르트가 베르나딘을 향한 지지만 철회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쯧.”

로베르트가 혀를 찼다. 뭐, 그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한 약혼이니까.

다만 베르나딘이 줄곧 헛발질을 해 대는 것은 더 이상 참아 주기 힘들었다.

‘차라리 2황자를 지원했어야 하나.’

로베르트가 헛웃음을 쳤다. 요즘 따라 부쩍 이미 늦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점점 잔혹한 본색을 드러내는 요하네스와 그를 지원하는 벤트하임. 그리고 골치 아픈 그 여자까지.

불길하다.

슬슬 베르나딘으로는 요하네스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로베르트는 습관처럼 턱을 만지작거렸다.

‘베르나딘은 너무 무르지. 중심을 잘 잡지 못해. 그로는 부족하다면…….’

역시 그 사람뿐인가. 깊은 한숨을 내쉰 로베르트가 공작저 밖으로 나섰다.

* * *

“뻔뻔하기도 하지.”

로베르트를 마주한 레이디 슈타이덴이 인사보다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로베르트는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그러는 레이디께서는 예의가 없으시군요.”

“내 집에서 당장 나가.”

“저는 2황자 전하를 만나러 왔습니다만.”

로베르트의 대꾸에 레이디 슈타이덴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내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헛웃음을 쳤다.

“하. 그놈의 메닝엔, 지겹기도 하지. 내 친구에 이어 이제는 내 아들을 노려?”

“이런, 제 아버지 탓이라도 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로베르트 메닝엔!”

레이디 슈타이덴의 비명 같은 외침에 로베르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레이디께서 모르시는 듯하여.”

로베르트의 비아냥에 레이디 슈타이덴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배를 잡고 웃어 대던 그녀가 웃음을 뚝 그쳤다.

“그게 정말 그냥 사고였을까?”

“그건 재난이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하필 메닝엔 공작이 탄 마차가 예정보다 하루 늦게 출발했고, 하필 그날 비가 왔고, 하필 산사태를 만난 게.”

성큼.

레이디 슈타이덴이 핏발 선 눈으로 로베르트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정말 사고일까?”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피식 웃은 레이디 슈타이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집무실에서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들은 레이디 슈타이덴의 집무실에 들어섰고, 레이디 슈타이덴은 보여 줄 게 있다며 로베르트를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가 들고 돌아온 것은 녹슨 로켓이었다. 로켓을 손에 꽉 쥔 레이디 슈타이덴이 말했다.

“마리안느의 목걸이야. 그쪽도 알겠지만 나와 같은 것으로 맞췄었지.”

로켓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황제의 정부라는 이름을 반갑게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 때만큼은 유용했어. 뷔나우 백작가가 불길한 물건이라며 이 로켓을 태워 버리려 하는 걸 황제에게 억지를 써서 겨우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무언가를 떠올리는 레이디 슈타이덴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덕분에 나는 마리안느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 수 있었어.”

로베르트도 대충 부모의 죽음에 얽힌 전말은 파악하고 있었다.

메닝엔이 자신들을 천대하자 뷔나우 백작은 요하네스 쪽에 붙어 권력을 얻어 보려 했고, 그러기 위해 리안드로의 정보를 요하네스 쪽에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게 레이디 슈타이덴이 자신을 협박할 만한 일이던가?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게 그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궁금하군요.”

“황태자. 뷔나우 백작, 그리고 에이드런 메닝엔.”

“……!”

레이디 슈타이덴의 입에서 나온 작은 아버지의 이름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사건의 범인들이야. 마리안느는 자신의 로켓 안에 그 증거를 남겼지.”

레이디 슈타이덴이 목에 건 그녀의 로켓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이 로켓은 보기와 달리 고대 신의 힘을 머금은 물건이거든. 오직 주인만이 이 로켓을 열 수 있지. 다만 예외가 있어.”

“무엇입니까.”

“두 개의 로켓이 맞닿았을 때 이 로켓은 열려. 돈이 남아돌다 못해 썩어나는 부잣집 어린 딸이 친구와 비밀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구입하기에 아주 적합한 물건이지.”

레이디 슈타이덴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로베르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애초에 어머니는 사고로 즉사하셨습니다.”

“이런, 순진하기도 하지.”

레이디 슈타이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리안느는 살아 있었어.”

“……!”

미처 몰랐던 진실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레이디 슈타이덴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피 묻은 손으로 떨어진 편지를 찢고, 또 로켓 안에 넣어 둘 수 있지 않았겠니?”

“편지라니. 살인을 의뢰받은 이들이 그렇게 어수룩하게 일처리를 할 리 없습니다.”

“오, 이런.”

레이디 슈타이덴이 짜증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편지는 일부러 흘리고 간 거야.”

“그렇다 한들 타겟이 살아 있는데 자리를 뜨는 건 말이 안 되는군요.”

“그들의 목표는 메닝엔 공작이었지. 멍청하고 무능하다고 소문난 뷔나우의 신데렐라가 아니라. 게다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황태자는 선대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여기서 클레멘스의 이야기가 나오다니. 당황한 로베르트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건 또 무슨…….”

“그들이 두고 간 것은 에이드런이 황태자에게 보낸 편지였거든. 비열하고, 또 영악한 게 딱 황태자다운 짓이지.”

레이디 슈타이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서진 마차 밖으로 겨우 기어 나온 마리안느가 편지를 찢어서 로켓 안에 보관했지. 이미 피를 많이 흘린 마리안느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지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선대 공작이 현장에 도착했지. 찢어진 편지를 발견하고, 일의 전말을 알아차린 선대 공작이 무어라 명령했는지 아니?”

쿵.

심상찮은 예감에 로베르트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비가 올 것 같으니 일단 마을로 내려가라 했어.”

“……!”

충격에 빠진 로베르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까드득.

레이디 슈타이덴이 이를 악물었다.

“편지에는 뷔나우 백작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더군. 그러니까 마리안느는…….”

눈을 감은 그녀가 숨을 골랐다. 그녀의 속눈썹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아버지가 얽혔을지언정……. 사랑하는 리안드로를 죽인 범인을 알리려 했던 거야.”

핏대가 선 레이디 슈타이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살인자를 지키려던 누구와는 다르게.”

숨이 턱하고 막히는 진실에 로베르트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요하네스가 그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작은아버지인 에이드런까지 연루되어 있었을 줄이야.

로베르트는 그제야 클레멘스가 왜 그렇게 자신이 에이드런을 해칠까 봐 경계했는지 알아차렸다.

<어떻게…… 어떻게 할아버님이 그런……?>

혼란에 빠진 그를 레이디 슈타이덴은 매몰차게 내쫓았다.

<돌아가. 내 친구도 모자라 내 아들까지 죽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리안느의 죽음에 받은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언제부터 요하네스와 에이드런이 내통 중이었던 것일까. 과연 요하네스와 손을 잡은 사람이 에이드런 한 명뿐일까?

로베르트는 깨달았다.

베르나딘이 황태자가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미 판은 넘어갔다. 불타 버린 레헨트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더 이상 요하네스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을 것이다.

“……젠장.”

초조해진 로베르트가 레이디 슈타이덴이 건네준 마리안느의 로켓을 바라보았다.

마리안느의 피가 묻어 검게 녹슨 체인을 보고 있노라니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로켓은 보기와 달리 고대 신의 힘을 머금은 물건이거든.>

로켓을 꽉 쥔 그는 레이디 슈타이덴의 말을 떠올렸다.

‘고대 신의 힘을 머금은 물건이라. 만약 정말 신의 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지금의 이 모든 일을 되돌릴 수 있을까?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그가 마차를 돌렸다.

“칼로에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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